우치다 타츠루의 시사 만평 모음집.

일본의 정치,경제,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진보적 스탠스를 취하는 언론인이라 일본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꽤나 유익하다.

특히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일본사회의 변화에 대한 일본 진보지식인의 감상과 생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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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6. '고학'을 권함

 일본 대학의 수업료는 비싸도 너무 비싸다. 국립대학도 첫해 납입금이 80만 엔을 넘는다. 수업료 감면이나 장학금 등 구제 대책은 있지만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학생 스스로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70년에는 국립대학 입학금이 4000엔, 한 학기 수업료가 6000엔.... 창구에 1만 엔 지폐를 내면 학생증을 받을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시급이 600엔이었으니까 2시간 일하면 한 달 학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학생들은 부모의 지갑에 손대지 않고 고학苦學할 수 있었다.

 그 후 교육행정 지도에 의해 학비는 급커브를 그리며 상승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고학생'이 사라졌다.

 고학이 불가능해진 탓에 사회는 엄청나게 변했다. 하나는 진로 결정에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자식이 '하고 싶은 일'과 부모가 '시키고 싶은 일'은 대개 다르기 마련이다. 고학이 불가능해졌다는 말은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부모가 절대로 동의해주지 않을 것 같은 분야)'를 단념하는 아이들이 아마 수백만 명 단위로 출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본의 지적 생산성을 얼마나 떨어뜨렸던 것일까? 그것 때문에 잃어버린 지적 자산은 수업료의 인상으로 국고에 거두어들인 금액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2009년 3월9일)

p168. 조직이 바라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다.

 많은 학생들은 취직 준비를 수험 공부와 비슷하다고 여긴다. 성적이 우수하고, 말솜씨가 빼어나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뽑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떨어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채용 여부의 기준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다. 모든 조직은 집단의 수행 능력을 향상시키는 사람을 원한다. 조직이 바라는 인간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마음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런 자질은 반드시 '능력'과 일치하지 않는다.

 아무 조건 없이 리더를 지원해주는 '예스맨'의 능력ㄷ, 집단 내부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분위기 메이커'의 능력도, 논쟁이 달아오를 때 삐딱한 역설을 통해 찬물을 끼얹는 '심통쟁이'의 능력도, 하나같이 집단이 건전하게 기능하는 데 꼭 필요한 능력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수험 경쟁을 통해 배운 것은 탁 까놓고 말해 '타자의 능력 발휘를 방해하고 그 평가를 깍아내리는' 기술이다. 그런 능력은 현실 사회로 나갔을 때 백해무익하다. 경쟁 상대를 필사적으로 떨어뜨리려고 발버둥치는 학생은 경쟁 심리 때문에 면접관에세 낮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누구도 학생들에게 이를 가르쳐주지 않는다.(2009년 4월20일)

p170. 될수록 캠퍼스에 오래 머물라.

 신학기 오리엔테이션에서 신입생에게 학생 생활의 기본적인 요령을 말해주었다. 그것은 '될수록 오랜 시간을 캠퍼스에서 지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수강신청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아야 한다. 대학생의 수업은 강의 1시간 당 예습과 복습에 드는 2시간을 더해야 한다는 전제 때문이다.(15주 동안 이렇게 3시간이 들어가는 강의를 1학점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것이 빈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시간 수업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두어 배 시간을 더 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은 경험상 맞는 말이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고 밥을 먹은 뒤에 '휴식'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식이 온몸에 속속들이 퍼지게 하려면 앞뒤로 그 정도의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또 하나의 요령은 될수록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학생은 '가난을 기본으로' 생활을 설계해야 한다. 가난하면 캠퍼스를 떠돌아다니는 정도밖에 할 일이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예배 시간에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듣고, 정원에서 꽃을 바라보고, 교사 사이를 산책한다. 그러는 동안 만약 학생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아름다운 것' '지적인 고양을 느끼게 하는 것'을 추구했다면, 그것은 이미 '배움'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심신의 감도를 높일 수 있는 곳이야말로 학교라는 공간이다. 또한 이것이 대학이 학생들에게 제공해주는 가장 훌륭한 선물이다. 건투를 빈다.(2009년 5월4일)

p210. 정치인들이 실언을 반복하는 이유.

 자, 청중을 이끌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방금 즉흥적으로 생각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 이 방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요즘의 예능인이다.

p238. '일시적으로나마 안심할 수 있는 말'을 듣고 싶다.

 민주당의 대표 선거가 끝나고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이 발족했다. 이 내각의 긴급한 과제는 당내 통합과 야당과의 협조다.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최우선의 정치 과제인 것이다. 이 선택에는 현재 일본에 만연한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는 동안 어떻게든 되겠찌'하는 체념과 어렴풋한 희망이다.

 대지진의 피해, 쓰나미,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국나의 위기 직후에는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재편에 착수해야 한다는(분노와 슬프이 뒤섞인) 목소리가 일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후 반년 동안 정부와 지방자치 단체의 졸렬한 대응, 정보의 조작과 은폐, 기득권층의 반격 같은 흐름 속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차츰차츰 잦아들었다. 시스템의 기능 저하가 지나차게 심각한 상태라서 근본적인 재편 같은 것은 바랄 수도 없다는 현실을 뼛속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치가, 관료, 경제인, 방송인 등을 통틀어 일본의 지배 체제에는 신뢰할 만한 인물이 없다. 일본 국민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들 어떤 변화도 시도하지 않으리나는 깊은 절망에 익숙해지고 있다.

 '성장 전략 없이 재정의 재건은 있을 수 없다.' 오늘도 신문에는 이 말이 쓰여 있었다. 아마도 이 말을 쓴 장본인도 '성장 전략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달리 쓸 말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쓴다. '성정 전략 없는 재정 재건'이란 '오로지 가난해 질 뿐'이라는 뜻이다. 우리도 필시 그렇게 되리라고 마음속 깊이 생각한다. 다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중뿔나 보이기'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다.

 따라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중뿔나게 나서지 않는' '귀에 거슬리는 말은 하지 않는' 총리의 등장은 '시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가면 일본은 불가피하게 가난하고 활기 없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래도 그 속도를 늦출 수는 있다. 파국을 맞이하는 시기를 연기할 수는 있다. 그렇게 해서 '시간 벌기'를 하는 동안 외부로부터 생각하지 못한 어떤 계기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일본인은 이렇게 미미한 기대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하다못해 '일시적으로나마 안심할 수 있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2011년 9월12일)

p260. 백성의 안녕은 지고의 법

 국회 질문에서 아베 총리는 민주당 의원에게 인권에 대한 조문을 질문받았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자, 총리는 일본국 헌법에서 포괄적인 인권 보장을 정한 조문이 몇 조인지 알지 못한다고 이해해도 좋겠습니까?"하고 질타당하는 인상 깊은 사건이 있었다. 개헌파의 우두머리가 '숙적'과 같은 포괄적 인권 보장을 정한 조문을 잊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는 보지 않지만, '그런 것은 없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라면 언젠가 그것의 존재 자체가 흐릿해지기도 하는 법이다. 어쩌면 총리가 생각하는 일본국 헌법은 벌써 불확실한 것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헌법 13조의 조문은 이렇다. "모든 국민은 개인으로서 존중받는다. 생명,자유 및 행복 추구에 대한 국민의 권리는 공공복지에 반하지 않는 한 입법 등 국정 안에서 최대의 존중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자민당의 헌법 개정 초안은 이렇다. "모든 국민은 사람으로서 존중받는다. 생명, 자유 및 행복 추구에 대한 국민의 권리는 공익 및 공공질서에 반하지 않는 한 입법 등 국정 안에서 최대한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지금의 '공공복지'를 개정안이 '공익 및 공공질서'로 바꾼 것이다. '공공복지'는 기본적 인권을 정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법적 근거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오랫동안 헌법학의 논쟁거리였고, 지금도 단일화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자민당의 개정안은 여기에 '공익 및 공공질서'라는 한정적이고 일의적인 해석을 부여한 것이다.

 '공공복지'라는 말의 용례는 저 멀리 법에 관한 키케로(Cicero)의 격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성의 안녕 salus populi은 지고의 법이다" 법치국가는 이것에 위배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그러나 '백성의 안녕'과 '공익 및 공공질서'는 말뜻이 다르다. 라틴어 salus는 '건강,행복,안녕,무사,생존'이라는 내포하기 때문이다. '공익과 공공질서'의 유지는 '백성의 안녕'을 위한 요건의 일부이기는 해도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공익과 공공질서를 지키기 위해 백성의 행복과 생존을 희생시키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통치자는 역사상 무수히 많았고, 지금도 많다.(2013년4월15일)

p263.

 공인의 적성은 '자신의 반대자를 포함해 집단을 댚해내겠다는' 각오에 달려 있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 

 자신을 지지하고 동의하는 사람만 대표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리 거대한 조직을 이끈다고 할지라도 '권력을 가진 사인私人'일 따름이다. 나는 '공인'이 통치자의 사리에 오르기를 바란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e Ortega y Gasset는 자유민주주의를 "적과 함께 살아가고, 반대자와 함께 통치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렇게 기술했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역설적이고, 이토록 우아하고, 이토록 곡예와 비슷하고, 이토록 반자연적인 것을 생각해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참으로 잘 짚어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말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정치적 이상이 있다고 할 수 있을가?

p268. 귀담아들어야 할 자연과학지의 조언

 영국의 종합학술잡지 <네이처>가 (2013년) 9월5일자에 '핵 에러'라는 제목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문제를 다룬 논설을 게재했다. 그 글은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의 원자력발전소 사고 처리가 부적절하다는 점을 상당히 날카롭게 지적했다. 자연과학 학술지가 한 나라의 정부와 민간 기업이 저지른 그릇된 행적을 대상으로 논란을 벌이는 일은 지극히 예외적이다.

 '무책임하다고까지는 못해도 부주의한' 도쿄전력의 감시 시스템에 의해 오염수 탱크에서 새어나온 누수를 체크하지 못했다는 점. 당초에 '단순한 이상'이라고 경시한 누수가 실은 사고 이후 최대 규모의 '진짜 위기'였다는 점. 위기를 언제나 과소평가하고 정보를 불충분하게 제공해왔다는 점에 그 논설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일본정부나 도쿄전력이나 과학자의 시각으로 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무시해왔다. 오염수가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가 세계적인 환경 문제에 파급을 미치지는 않을까, 국제사회는 진심으로 우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글은 일본이 전세계 연구자의 지원과 전문적인 조언을 바탕으로 국력을 기울여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그런데도 이 나라 사람들은 올림픽 유치와 그에 따른 경제적 효과에 들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원자력발전소 문제에 대해 매스컴이 집중적으로 질문을 퍼붓자 올림픽 유치위원회 이사장은 초조한 나머지, "도쿄와 후쿠시마는 250킬로미터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후쿠시마의 사고를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으로 여길 수 없다'는 위기감이 세계적으로 드높아지고 있을 때, 일본인은 태연하게 '후쿠시마의 사고는 강 건너 불구경'이라고 말해버린 꼴이다. 아베 총리는 "오염수의 영향은 원자력발전 사고가 일어난 항만 내로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고 하고, "지금까지도 그렇고, 현재나 미래에도 건강에는 문제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앞의 논설을 이렇게 서술한다. "일본은 지원을 위한 조언을 얻기 위해 국제적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되었다. 연구와 오염 제거를 위한 국제적인 연대는 모니터링과 위기관리의 유용성과 유효성을 둘러싸고 산산히 무너진 공적 신뢰를 회복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대체 어떻게 '산산이 무너진 공적 신뢰'를 회복할 셈인가? 그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다.(2013년 9월23일)

p276. 진심으로 '전쟁'을 의식하고 있는 정부

 국가안전보장회의 관련법, 특정비밀보호법, 공모죄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은 아베 정권이 진심으로, '전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일본 국민이 '진심으로 전쟁을 개시할 마음이 있는 정부를 받든 것은 전후 처음이다. 최근 2개월 동안 일본은 법제적으로 '언제라도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고 말았다.

 만약 내각총리대신이 센카쿠 열도 근처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군사적 충돌을 '영해 침입, 불법 상륙 사안'으로 인정한다면, 그래서 '신속하고 적절한' 군사 행동을 개시함으로써 전투 행위가 벌어진다면,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포기할 것"이라는 헌법 9조는 사실상 폐기된다. 정책 결정 과정에 어떤 정보가 올라가고, 어던 논의가 이루어지고, 무엇을 결정했는가에 대해 국민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곳에서 논의한 것은 '국가의 안전 보장에 관련된 특정 비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동중국해에서 어떤 중대 사안이 발생했고, 정부가 그것에 신속하게 적절하게 대응했다'는 '대본영의 발표'를 얼빠진 표정으로 듣는 것 말고는 할수 있는 일이 없다.

 10월에 열린 자위대 열병식에서 아베 총리는 "방위력은 그 존재만으로 억지력이 된다는 종래의 발상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핵 억지력은 '상호확증파괴'에 의해 성립한다. 핵을 사용하면 어느 쪽이든 멸망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서로 억지하도록 기능하겠다는 합의가 핵전략을 '정당화'해왔다. 아베 총리가 상정하는 것은 서로 확실하게 파괴한 적이 없는 수준의 전쟁이다. 완전하게 '통제 아래'있는 전쟁, 말하자면 비전투원도 죽이지 않고, 도시도 파괴하지 않ㅎ고, 매스컴이 호전적인 여론을 떠들기만 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위신만 과시할 수 있는 '계획적이고 비용 대비 효과가 좋은 전쟁'말이다. 아베 총리는 과연 그런 전쟁이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사용할 수 있는 억지력'이라는 발상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일본 국민은 두 번에 걸친 국정 선거를 통해 '민주당을 따끔하게 혼내주겠다'든지 '결정할 수 있는 정치'라든지 '뒤틀림 해소'같은 일상어로 정치를 논했다. 그러는 동안 비일상적인 상황으로 빠져들고 말았다.(2019년12월30일)

p279.

 애초부터 오키나와에 기지가 들어서야 할 지정학적 이유는 없다. 미군 기지가 훗카이도에 없고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소련'을 적국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훗카이도를 통해 남하하면서 일본 열도의 방어 거점을 모조리 파괴하더라도 미군의 주력이 주둔한 오키나와만큼은 온전하게 남는다. 오키나와 기지는 이를 위한 포진이다. 따라서 미국의 가상 적국인 소련이 사라진 오늘날, 미군이 오키나와에 꼭 있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

p280.

 비상사태가 발생해 모든 재산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몸 하나만 달랑 도피하려고 할 때, 금이라면 최대 10킬로그램(약 4500만엔, 2019년 11월6일 현재 대한민국 기준 5.5억원)쯤 소지할 수 있다. 그래도 걷고 달리는 동안 허리가 아프고 원망스러울 것이다.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재산의 한도는 기껏해야 이 정도다. 그것을 실감으로 표상해내는 것이 금이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떡거렸다. 분수에 넘치게 자산을 갖고 있으면 거추장스러워진다. 그렇다면 '희사'하는 것이 좋다. 희사하기 싫은 사람은 병에 넣어 땅에 파묻어도 좋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살아있는 인간의 몸으로 제어할 수 없는 돈은 타인에게 주는 것 말고는 사용할 길이 없다. 이렇게 하면 부의 편재는 해소할 수 있다.

p286. '개헌파'가 아니라 '폐헌파'라고 이름 붙여야

 헌법기념일에 자민당의 헌법개정추진본부장 후나다 하지메(船田元)는 "9조 개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위기적 상황을 생각하면 해석의 확대에 의해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명문 개헌의 방향은 어디까지나 유지한다고 한다. 즉 "임시변통일지도 모르지만 이해하기 쉬운 환경권 등을 부가하는 것을 첫 번째 국민투표에 부치고, 그 다음 사람들이 개정에 익숙해지고 나서 9조 개정에 착수하고 싶다." 솔질한 발언이다.

 해석 개헌으로 나갈 수 있는 데까지 나가고, 그것이 무리라면 명문 개헌으로 나가려는 정치가는 헌법 이념의 실현보다 그가 속한 정당의 정책 실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헌법을 철저하게 경시할 수 있는 정치가들이 뻔뻔한 낯짝으로 헌법 운운하고 이야기하는 꼴을 보면 속이 거북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아베 총리대신은 헌법 99조가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할 공무원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음에도 헌법에 결점이 있다드니, 애초부터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드니 하면서 헌법의 실질적인 공동화空洞化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속한 당의 개헌 초안 102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국민은 이 헌법을 존중해야 한다." 즉 국민 전체에게 헌법을 준수할 의무와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다는 이러한 헌법관이 마음에 걸린다. 왜냐하면 순조롭게 개헌에 성공한 뒤 그가 현행 헌법을 대한 것처럼 국민이 신헌법을 대할 때, 총리는 어떤 논리로 그것을 금지할 생각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나는 공문원이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지만, 제군은 내가 정한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해야 한다." 이런 요구를 관철하려면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헌법은 그때마다 정부의 형편에 따라 지킬 수도 있고 폐지할 수도 있는 일개 정치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는 이런 리얼리즘도 '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머릿속에 있는 생각에 맞추어 정당의 강령도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고 싶다.

 차라리 '헌법 폐지'가 낫지 않겠는가? 긴요한 사안은 내각회의에서 결정해서 주저 없이 실시하면 그뿐이다. 입법부의 심의에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 헌법 조문을 내각의 형편에 따라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 이것을 통치의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을 '개헌파'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폐헌파'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타당하리라.(2014년 5월19일)

p320.

 이러한 사고방식의 밑바탕에는 글로벌리스트의 공통적인 생각, 즉 '모든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인간관이 깔려있다.

 그러나 일정한 비율로 '돈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인간'이 없다면 나라는 멸망한다. '돈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인간'은 그런 의미에서 '나라의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돈으로 움직이는 이유는 세계 어디에서나 비슷하지만, 어떤 사람이 '돈으로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국제적인 공통성이 없다. '이곳에서만 통하는' 국지성이 최후의 순간에 한 나라의 토대를 받쳐주는 것이다.(2011년 3월7일)

p322. 다시, 폐를 끼치는 삶을 배우자

 소프트뱅크의 손 마사요시孫正義 사장이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자 구제를 위해 100억 엔과 공무원의 보수 전액을 기부하겠다고 한 발언이 화제로 올랐다. 그전에는 야나기 다다시柳井正 유니클로 사장(유니클로 창업자)이 개인적으로 10억 엔, 프로골퍼 이시카와 료石川遼 씨가 2억 엔을 '목표'로 상금을 기부하겠다고 한 것을 매스컴이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기사에 반드시 '냉소적'인 어조가 감돌았겠지만 이번 보도에서는 누구나 냉소를 삼갔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위선적'이라는 둥, '이름을 판다'는 둥, '잘못을 무마하려는 면피용'이라는 둥...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이러한 상투적인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는 커다란 흐름 변화가 아닐까 한다. '공공의 복리를 위해 사재를 터는 행위'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까지만 해도 '성공을 거두고 이름을 날린' 인물이 짊어진 의무였다. 그때는 다들 한 사람이 거둔 사회적 성공이 무수한 사람들의 지원 덕분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성공을 자신의 노력이 거둔 결과로 보고 독점하려는 태도는 '잘못'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생각이 상식으로 통하지 않게 된 지 반세기가 흘렀다. 그후 오랫동안 사람들은 '내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남이 나한테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을 모범적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풍요롭고 안전한 시대는 오래 가지 않았다. 우리는 또다시 '남에게 폐를 끼치기도 하고 남이 나한테 폐를 끼치기도 하는' 삶을 학습해야 했다. 옛날에도 그럴 수 있었으니까 오늘날에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2011년 4월18일)

p325.

 인생은 어긋남의 연속이다. 우리는 대학도 잘못 선택하고, 취직할 회사도 잘못 선택하고, 배우자도 잘못 선택한다. 그럼에도 어떻게 상황을 헤쳐 나가느냐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다. "자원봉사자의 선의와 현장의 요구가 어긋난다고 해서 풀이 죽을 것은 없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더니 젊은 건축가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피해 지역에 갈게요. 그 사람들이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이더라도 커튼 치는 일을 계속할게요." 그렇지, 그렇게 하면 되는거야.(2011년 5월2일)

p328. '만사는 돈 문제'라는 사람의 속마음.

 대지진의 피해가 발생한 직후 블로그에 '소개

 우치다 타츠루의 시사 만평 모음집.

 

일본의 정치,경제,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진보적 스탠스를 취하는 언론인이라 일본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꽤나 유익하다.

 

특히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일본사회의 변화에 대한 일본 진보지식인의 감상과 생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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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6. '고학'을 권함

 

 일본 대학의 수업료는 비싸도 너무 비싸다. 국립대학도 첫해 납입금이 80만 엔을 넘는다. 수업료 감면이나 장학금 등 구제 대책은 있지만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학생 스스로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70년에는 국립대학 입학금이 4000엔, 한 학기 수업료가 6000엔.... 창구에 1만 엔 지폐를 내면 학생증을 받을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시급이 600엔이었으니까 2시간 일하면 한 달 학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학생들은 부모의 지갑에 손대지 않고 고학苦學할 수 있었다.

 

 그 후 교육행정 지도에 의해 학비는 급커브를 그리며 상승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고학생'이 사라졌다.

 

 고학이 불가능해진 탓에 사회는 엄청나게 변했다. 하나는 진로 결정에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자식이 '하고 싶은 일'과 부모가 '시키고 싶은 일'은 대개 다르기 마련이다. 고학이 불가능해졌다는 말은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부모가 절대로 동의해주지 않을 것 같은 분야)'를 단념하는 아이들이 아마 수백만 명 단위로 출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본의 지적 생산성을 얼마나 떨어뜨렸던 것일까? 그것 때문에 잃어버린 지적 자산은 수업료의 인상으로 국고에 거두어들인 금액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2009년 3월9일)

 

p168. 조직이 바라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다.

 

 많은 학생들은 취직 준비를 수험 공부와 비슷하다고 여긴다. 성적이 우수하고, 말솜씨가 빼어나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뽑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떨어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채용 여부의 기준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다. 모든 조직은 집단의 수행 능력을 향상시키는 사람을 원한다. 조직이 바라는 인간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마음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런 자질은 반드시 '능력'과 일치하지 않는다.

 

 아무 조건 없이 리더를 지원해주는 '예스맨'의 능력ㄷ, 집단 내부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분위기 메이커'의 능력도, 논쟁이 달아오를 때 삐딱한 역설을 통해 찬물을 끼얹는 '심통쟁이'의 능력도, 하나같이 집단이 건전하게 기능하는 데 꼭 필요한 능력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수험 경쟁을 통해 배운 것은 탁 까놓고 말해 '타자의 능력 발휘를 방해하고 그 평가를 깍아내리는' 기술이다. 그런 능력은 현실 사회로 나갔을 때 백해무익하다. 경쟁 상대를 필사적으로 떨어뜨리려고 발버둥치는 학생은 경쟁 심리 때문에 면접관에세 낮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누구도 학생들에게 이를 가르쳐주지 않는다.(2009년 4월20일)

 

p170. 될수록 캠퍼스에 오래 머물라.

 

 신학기 오리엔테이션에서 신입생에게 학생 생활의 기본적인 요령을 말해주었다. 그것은 '될수록 오랜 시간을 캠퍼스에서 지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수강신청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아야 한다. 대학생의 수업은 강의 1시간 당 예습과 복습에 드는 2시간을 더해야 한다는 전제 때문이다.(15주 동안 이렇게 3시간이 들어가는 강의를 1학점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것이 빈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시간 수업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두어 배 시간을 더 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은 경험상 맞는 말이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고 밥을 먹은 뒤에 '휴식'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식이 온몸에 속속들이 퍼지게 하려면 앞뒤로 그 정도의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또 하나의 요령은 될수록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학생은 '가난을 기본으로' 생활을 설계해야 한다. 가난하면 캠퍼스를 떠돌아다니는 정도밖에 할 일이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예배 시간에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듣고, 정원에서 꽃을 바라보고, 교사 사이를 산책한다. 그러는 동안 만약 학생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아름다운 것' '지적인 고양을 느끼게 하는 것'을 추구했다면, 그것은 이미 '배움'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심신의 감도를 높일 수 있는 곳이야말로 학교라는 공간이다. 또한 이것이 대학이 학생들에게 제공해주는 가장 훌륭한 선물이다. 건투를 빈다.(2009년 5월4일)

 

p210. 정치인들이 실언을 반복하는 이유.

 

 자, 청중을 이끌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방금 즉흥적으로 생각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 이 방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요즘의 예능인이다.

 

p238. '일시적으로나마 안심할 수 있는 말'을 듣고 싶다.

 

 민주당의 대표 선거가 끝나고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이 발족했다. 이 내각의 긴급한 과제는 당내 통합과 야당과의 협조다.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최우선의 정치 과제인 것이다. 이 선택에는 현재 일본에 만연한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는 동안 어떻게든 되겠찌'하는 체념과 어렴풋한 희망이다.

 

 대지진의 피해, 쓰나미,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국나의 위기 직후에는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재편에 착수해야 한다는(분노와 슬프이 뒤섞인) 목소리가 일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후 반년 동안 정부와 지방자치 단체의 졸렬한 대응, 정보의 조작과 은폐, 기득권층의 반격 같은 흐름 속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차츰차츰 잦아들었다. 시스템의 기능 저하가 지나차게 심각한 상태라서 근본적인 재편 같은 것은 바랄 수도 없다는 현실을 뼛속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치가, 관료, 경제인, 방송인 등을 통틀어 일본의 지배 체제에는 신뢰할 만한 인물이 없다. 일본 국민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들 어떤 변화도 시도하지 않으리나는 깊은 절망에 익숙해지고 있다.

 

 '성장 전략 없이 재정의 재건은 있을 수 없다.' 오늘도 신문에는 이 말이 쓰여 있었다. 아마도 이 말을 쓴 장본인도 '성장 전략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달리 쓸 말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쓴다. '성정 전략 없는 재정 재건'이란 '오로지 가난해 질 뿐'이라는 뜻이다. 우리도 필시 그렇게 되리라고 마음속 깊이 생각한다. 다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중뿔나 보이기'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다.

 

 따라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중뿔나게 나서지 않는' '귀에 거슬리는 말은 하지 않는' 총리의 등장은 '시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가면 일본은 불가피하게 가난하고 활기 없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래도 그 속도를 늦출 수는 있다. 파국을 맞이하는 시기를 연기할 수는 있다. 그렇게 해서 '시간 벌기'를 하는 동안 외부로부터 생각하지 못한 어떤 계기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일본인은 이렇게 미미한 기대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하다못해 '일시적으로나마 안심할 수 있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2011년 9월12일)

 

p260. 백성의 안녕은 지고의 법

 

 국회 질문에서 아베 총리는 민주당 의원에게 인권에 대한 조문을 질문받았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자, 총리는 일본국 헌법에서 포괄적인 인권 보장을 정한 조문이 몇 조인지 알지 못한다고 이해해도 좋겠습니까?"하고 질타당하는 인상 깊은 사건이 있었다. 개헌파의 우두머리가 '숙적'과 같은 포괄적 인권 보장을 정한 조문을 잊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는 보지 않지만, '그런 것은 없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라면 언젠가 그것의 존재 자체가 흐릿해지기도 하는 법이다. 어쩌면 총리가 생각하는 일본국 헌법은 벌써 불확실한 것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헌법 13조의 조문은 이렇다. "모든 국민은 개인으로서 존중받는다. 생명,자유 및 행복 추구에 대한 국민의 권리는 공공복지에 반하지 않는 한 입법 등 국정 안에서 최대의 존중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자민당의 헌법 개정 초안은 이렇다. "모든 국민은 사람으로서 존중받는다. 생명, 자유 및 행복 추구에 대한 국민의 권리는 공익 및 공공질서에 반하지 않는 한 입법 등 국정 안에서 최대한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지금의 '공공복지'를 개정안이 '공익 및 공공질서'로 바꾼 것이다. '공공복지'는 기본적 인권을 정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법적 근거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오랫동안 헌법학의 논쟁거리였고, 지금도 단일화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자민당의 개정안은 여기에 '공익 및 공공질서'라는 한정적이고 일의적인 해석을 부여한 것이다.

 

 '공공복지'라는 말의 용례는 저 멀리 법에 관한 키케로(Cicero)의 격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성의 안녕 salus populi은 지고의 법이다" 법치국가는 이것에 위배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그러나 '백성의 안녕'과 '공익 및 공공질서'는 말뜻이 다르다. 라틴어 salus는 '건강,행복,안녕,무사,생존'이라는 내포하기 때문이다. '공익과 공공질서'의 유지는 '백성의 안녕'을 위한 요건의 일부이기는 해도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공익과 공공질서를 지키기 위해 백성의 행복과 생존을 희생시키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통치자는 역사상 무수히 많았고, 지금도 많다.(2013년4월15일)

 

p263.

 

 공인의 적성은 '자신의 반대자를 포함해 집단을 댚해내겠다는' 각오에 달려 있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 

 

 자신을 지지하고 동의하는 사람만 대표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리 거대한 조직을 이끈다고 할지라도 '권력을 가진 사인私人'일 따름이다. 나는 '공인'이 통치자의 사리에 오르기를 바란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e Ortega y Gasset는 자유민주주의를 "적과 함께 살아가고, 반대자와 함께 통치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렇게 기술했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역설적이고, 이토록 우아하고, 이토록 곡예와 비슷하고, 이토록 반자연적인 것을 생각해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참으로 잘 짚어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말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정치적 이상이 있다고 할 수 있을가?

 

p268. 귀담아들어야 할 자연과학지의 조언

 

 영국의 종합학술잡지 <네이처>가 (2013년) 9월5일자에 '핵 에러'라는 제목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문제를 다룬 논설을 게재했다. 그 글은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의 원자력발전소 사고 처리가 부적절하다는 점을 상당히 날카롭게 지적했다. 자연과학 학술지가 한 나라의 정부와 민간 기업이 저지른 그릇된 행적을 대상으로 논란을 벌이는 일은 지극히 예외적이다.

 

 '무책임하다고까지는 못해도 부주의한' 도쿄전력의 감시 시스템에 의해 오염수 탱크에서 새어나온 누수를 체크하지 못했다는 점. 당초에 '단순한 이상'이라고 경시한 누수가 실은 사고 이후 최대 규모의 '진짜 위기'였다는 점. 위기를 언제나 과소평가하고 정보를 불충분하게 제공해왔다는 점에 그 논설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일본정부나 도쿄전력이나 과학자의 시각으로 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무시해왔다. 오염수가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가 세계적인 환경 문제에 파급을 미치지는 않을까, 국제사회는 진심으로 우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글은 일본이 전세계 연구자의 지원과 전문적인 조언을 바탕으로 국력을 기울여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그런데도 이 나라 사람들은 올림픽 유치와 그에 따른 경제적 효과에 들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원자력발전소 문제에 대해 매스컴이 집중적으로 질문을 퍼붓자 올림픽 유치위원회 이사장은 초조한 나머지, "도쿄와 후쿠시마는 250킬로미터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후쿠시마의 사고를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으로 여길 수 없다'는 위기감이 세계적으로 드높아지고 있을 때, 일본인은 태연하게 '후쿠시마의 사고는 강 건너 불구경'이라고 말해버린 꼴이다. 아베 총리는 "오염수의 영향은 원자력발전 사고가 일어난 항만 내로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고 하고, "지금까지도 그렇고, 현재나 미래에도 건강에는 문제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앞의 논설을 이렇게 서술한다. "일본은 지원을 위한 조언을 얻기 위해 국제적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되었다. 연구와 오염 제거를 위한 국제적인 연대는 모니터링과 위기관리의 유용성과 유효성을 둘러싸고 산산히 무너진 공적 신뢰를 회복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대체 어떻게 '산산이 무너진 공적 신뢰'를 회복할 셈인가? 그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다.(2013년 9월23일)

 

p276. 진심으로 '전쟁'을 의식하고 있는 정부

 

 국가안전보장회의 관련법, 특정비밀보호법, 공모죄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은 아베 정권이 진심으로, '전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일본 국민이 '진심으로 전쟁을 개시할 마음이 있는 정부를 받든 것은 전후 처음이다. 최근 2개월 동안 일본은 법제적으로 '언제라도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고 말았다.

 

 만약 내각총리대신이 센카쿠 열도 근처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군사적 충돌을 '영해 침입, 불법 상륙 사안'으로 인정한다면, 그래서 '신속하고 적절한' 군사 행동을 개시함으로써 전투 행위가 벌어진다면,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포기할 것"이라는 헌법 9조는 사실상 폐기된다. 정책 결정 과정에 어떤 정보가 올라가고, 어던 논의가 이루어지고, 무엇을 결정했는가에 대해 국민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곳에서 논의한 것은 '국가의 안전 보장에 관련된 특정 비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동중국해에서 어떤 중대 사안이 발생했고, 정부가 그것에 신속하게 적절하게 대응했다'는 '대본영의 발표'를 얼빠진 표정으로 듣는 것 말고는 할수 있는 일이 없다.

 

 10월에 열린 자위대 열병식에서 아베 총리는 "방위력은 그 존재만으로 억지력이 된다는 종래의 발상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핵 억지력은 '상호확증파괴'에 의해 성립한다. 핵을 사용하면 어느 쪽이든 멸망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서로 억지하도록 기능하겠다는 합의가 핵전략을 '정당화'해왔다. 아베 총리가 상정하는 것은 서로 확실하게 파괴한 적이 없는 수준의 전쟁이다. 완전하게 '통제 아래'있는 전쟁, 말하자면 비전투원도 죽이지 않고, 도시도 파괴하지 않ㅎ고, 매스컴이 호전적인 여론을 떠들기만 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위신만 과시할 수 있는 '계획적이고 비용 대비 효과가 좋은 전쟁'말이다. 아베 총리는 과연 그런 전쟁이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사용할 수 있는 억지력'이라는 발상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일본 국민은 두 번에 걸친 국정 선거를 통해 '민주당을 따끔하게 혼내주겠다'든지 '결정할 수 있는 정치'라든지 '뒤틀림 해소'같은 일상어로 정치를 논했다. 그러는 동안 비일상적인 상황으로 빠져들고 말았다.(2019년12월30일)

 

p279.

 

 애초부터 오키나와에 기지가 들어서야 할 지정학적 이유는 없다. 미군 기지가 훗카이도에 없고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소련'을 적국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훗카이도를 통해 남하하면서 일본 열도의 방어 거점을 모조리 파괴하더라도 미군의 주력이 주둔한 오키나와만큼은 온전하게 남는다. 오키나와 기지는 이를 위한 포진이다. 따라서 미국의 가상 적국인 소련이 사라진 오늘날, 미군이 오키나와에 꼭 있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

 

p280.

 

 비상사태가 발생해 모든 재산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몸 하나만 달랑 도피하려고 할 때, 금이라면 최대 10킬로그램(약 4500만엔, 2019년 11월6일 현재 대한민국 기준 5.5억원)쯤 소지할 수 있다. 그래도 걷고 달리는 동안 허리가 아프고 원망스러울 것이다.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재산의 한도는 기껏해야 이 정도다. 그것을 실감으로 표상해내는 것이 금이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떡거렸다. 분수에 넘치게 자산을 갖고 있으면 거추장스러워진다. 그렇다면 '희사'하는 것이 좋다. 희사하기 싫은 사람은 병에 넣어 땅에 파묻어도 좋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살아있는 인간의 몸으로 제어할 수 없는 돈은 타인에게 주는 것 말고는 사용할 길이 없다. 이렇게 하면 부의 편재는 해소할 수 있다.

 

p286. '개헌파'가 아니라 '폐헌파'라고 이름 붙여야

 

 헌법기념일에 자민당의 헌법개정추진본부장 후나다 하지메(船田元)는 "9조 개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위기적 상황을 생각하면 해석의 확대에 의해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명문 개헌의 방향은 어디까지나 유지한다고 한다. 즉 "임시변통일지도 모르지만 이해하기 쉬운 환경권 등을 부가하는 것을 첫 번째 국민투표에 부치고, 그 다음 사람들이 개정에 익숙해지고 나서 9조 개정에 착수하고 싶다." 솔질한 발언이다.

 

 해석 개헌으로 나갈 수 있는 데까지 나가고, 그것이 무리라면 명문 개헌으로 나가려는 정치가는 헌법 이념의 실현보다 그가 속한 정당의 정책 실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헌법을 철저하게 경시할 수 있는 정치가들이 뻔뻔한 낯짝으로 헌법 운운하고 이야기하는 꼴을 보면 속이 거북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아베 총리대신은 헌법 99조가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할 공무원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음에도 헌법에 결점이 있다드니, 애초부터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드니 하면서 헌법의 실질적인 공동화空洞化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속한 당의 개헌 초안 102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국민은 이 헌법을 존중해야 한다." 즉 국민 전체에게 헌법을 준수할 의무와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다는 이러한 헌법관이 마음에 걸린다. 왜냐하면 순조롭게 개헌에 성공한 뒤 그가 현행 헌법을 대한 것처럼 국민이 신헌법을 대할 때, 총리는 어떤 논리로 그것을 금지할 생각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나는 공문원이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지만, 제군은 내가 정한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해야 한다." 이런 요구를 관철하려면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헌법은 그때마다 정부의 형편에 따라 지킬 수도 있고 폐지할 수도 있는 일개 정치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는 이런 리얼리즘도 '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머릿속에 있는 생각에 맞추어 정당의 강령도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고 싶다.

 

 차라리 '헌법 폐지'가 낫지 않겠는가? 긴요한 사안은 내각회의에서 결정해서 주저 없이 실시하면 그뿐이다. 입법부의 심의에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 헌법 조문을 내각의 형편에 따라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 이것을 통치의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을 '개헌파'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폐헌파'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타당하리라.(2014년 5월19일)

 

p320.

 

 이러한 사고방식의 밑바탕에는 글로벌리스트의 공통적인 생각, 즉 '모든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인간관이 깔려있다.

 

 그러나 일정한 비율로 '돈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인간'이 없다면 나라는 멸망한다. '돈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인간'은 그런 의미에서 '나라의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돈으로 움직이는 이유는 세계 어디에서나 비슷하지만, 어떤 사람이 '돈으로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국제적인 공통성이 없다. '이곳에서만 통하는' 국지성이 최후의 순간에 한 나라의 토대를 받쳐주는 것이다.(2011년 3월7일)

 

p322. 다시, 폐를 끼치는 삶을 배우자

 

 소프트뱅크의 손 마사요시孫正義 사장이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자 구제를 위해 100억 엔과 공무원의 보수 전액을 기부하겠다고 한 발언이 화제로 올랐다. 그전에는 야나기 다다시柳井正 유니클로 사장(유니클로 창업자)이 개인적으로 10억 엔, 프로골퍼 이시카와 료石川遼 씨가 2억 엔을 '목표'로 상금을 기부하겠다고 한 것을 매스컴이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기사에 반드시 '냉소적'인 어조가 감돌았겠지만 이번 보도에서는 누구나 냉소를 삼갔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위선적'이라는 둥, '이름을 판다'는 둥, '잘못을 무마하려는 면피용'이라는 둥...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이러한 상투적인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는 커다란 흐름 변화가 아닐까 한다. '공공의 복리를 위해 사재를 터는 행위'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까지만 해도 '성공을 거두고 이름을 날린' 인물이 짊어진 의무였다. 그때는 다들 한 사람이 거둔 사회적 성공이 무수한 사람들의 지원 덕분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성공을 자신의 노력이 거둔 결과로 보고 독점하려는 태도는 '잘못'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생각이 상식으로 통하지 않게 된 지 반세기가 흘렀다. 그후 오랫동안 사람들은 '내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남이 나한테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을 모범적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풍요롭고 안전한 시대는 오래 가지 않았다. 우리는 또다시 '남에게 폐를 끼치기도 하고 남이 나한테 폐를 끼치기도 하는' 삶을 학습해야 했다. 옛날에도 그럴 수 있었으니까 오늘날에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2011년 4월18일)

 

p325.

 

 인생은 어긋남의 연속이다. 우리는 대학도 잘못 선택하고, 취직할 회사도 잘못 선택하고, 배우자도 잘못 선택한다. 그럼에도 어떻게 상황을 헤쳐 나가느냐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다. "자원봉사자의 선의와 현장의 요구가 어긋난다고 해서 풀이 죽을 것은 없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더니 젊은 건축가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피해 지역에 내갈게요. 그 사람들이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이더라도 커튼 치는 일을 계속할게요." 그렇지, 그렇게 하면 되는거야.(2011년 5월2일)

 

p328. '만사는 돈 문제'라는 사람의 속마음.

 

 대지진의 피해가 발생한 직후 블로그에 '소개疎開를 권함'이라는 글을 올렸다. 찬반양론이 있었다. 내 귀에 들린 목소리는 거의 다 '찬성'(이라기보다는 '벌써 소개했다')이었다.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혼란을 부채질하지 말라'는 비판이 있었다. 내가 한 말은 이것뿐이었다. "임산부나 어린이, 노인과 병자 등 대혼란이 일어났을 때 자력으로 탈출하기 힘든 사람들은 교통과 통신 인프라가 기능하는 동안 빨리 안전한 곳으로 소개하는 것이 좋다." 무조건 '다들 도망가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대해 이런 반론이 들려왔다. "소개 때문에 인구가 줄어들면 경기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수도권에 머물면서 평소처럼 소비활동을 계속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나는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반면, 그들은 '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톱니가 맞아 들어갈 리 없다.

 원자력발전을 둘러싼 대책이 지지부진한 까닭은 '국토의 보전과 국민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할 정계와 재계의 관리들이 실은 그것을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국토의 보전과 국민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돈을 어떻게 충당할까?'하는 생각이 가득 차 있다.

 그들에게 최우선 과제는 방사선량의 측정이나 원자력발전의 멜트스루melt-through에 대처하는 기술적인 대응이 아니라 추경예산과 국채다. 그것은 '돈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는 리얼리즘을 채용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돈만 있으면 어떤 곤경도 처리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을 고백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만사는 돈 문제'라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은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것은 돈이 없는 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실로 '돈만 있으면(돈은 없지만) 모든 것은 잘 풀린다(풀릴 것이다)'는 조건법 구문을 통해 이 세계가 그렇게 부조리하지 않다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마법의 돈'을 두고 정신없이 주판알을 튕기는 동안에만 그들은 공포의 대상에서 눈을 떼고 한때의 평안을 후무릴 뿐이다.(2011년 7월4일)

 p338. '이기적'으로 굴 수 있는 까닭

 1970년 이후 42년 만에 국내의 모든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정지시켰다. 나는 올해가 '원자력발전 제로 원년'으로서 오랫동안 국민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

<마이니치신문>(2012년) 5월8일자 여론조사에서 올해 여름 원자력발전을 중단한 탓에 전력이 부족하리라고 에측하고, "절전과 정전에 따른 불편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하는 물음에 74퍼센트가 '참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얼마나 씩씩하고 믿음직한 국민인가?

 원자력발전 재가동 추진파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은 뜻밖의 숫자가 아닐까? 왜냐하면 74퍼센트 중에는 전력을 마음껏 사용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원자력발전의 위기를 깨닫더라도 '딴 일에는 마음을 쓸 수 없는' 절체절명의 리얼리즘에 굴복할 것이라고 재가동 추진파는 예측했을 것이다. 국토가 오염되는 위기에 빠지든말든, 후손에게 핵폐기물 처리 비용을 떠넘기든 말든, 그들은 그런 것보다 '당장 내일 먹을 끼니'를 걱정한다. 지금 당장만 좋으면, 나만 좋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재가동 추진파는 그런 자포자기의 리얼리즘으로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셀제로는 일본 국민의 과반수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다. 같은 설문조사를 보면 "당신은 원자력발전의 안전성에 대한 정부의 설명을 믿습니까?"라는 물음에 77퍼센트가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더 이상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마음... 이것이 불편함을 참겠다는 국민적 결단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좋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도리에 어긋난 이기적인 언사를 떠들어댈 수 있는 경우는 역설적으로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공공의 복리를 생각하고 비이기적으로 행동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때뿐이다. 고속도로가 정체되어 있을 때 갓길로 달리는 운전자는 자기 이외의 다른 운전자가 긴급 차량을 위해 갓길을 비워둔 경우에만 편익을 취할 수 있다. 

 일본 국민은 '일단 나 혼자만이라도 비이기적으로 행동하자'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웃전'의 선의나 양식을 더 이상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2012년 5월27일)

p341.

 원자력발전 사고를 거친 이래 일본 시스템은 치명적으로 낙후하고 있다.

p342.  이 나라에 '어른'은 있는가?

 원자력발전 사고 직후 미국정부는 군용기로 방사선을 측정하고 상세한 '오염 지도'를 작성했다. 지도는 방사성 물질이 북서 방향으로 띠 모양으로 튀어 흩어진다는 것을 밝혔다. 경제산업성 원자력안전-보안원과 문부과학성은 그 데이터를 공표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총리 관저와 원자력안전위원회에도 전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잘못된 방향으로 피난을 떠난 많은 주민들이 피폭당하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했다.

 '말단 벼슬아치나 저지를 수 있는 실수'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들을 지배하는 원칙은 '규정으로 정해놓지 않은 사안은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것과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판단을 보류하고 웃전의 지시를 기다린다.

 웑자력발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일본의 관청은 실효 있는 매뉴얼을 갖고 있지 않았다. 원자력발전 사고는 '일어날 리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고는 일어났다. 모든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관리들은 판단을 보류했다.

 관리들도 '오염 지도'의 중요성은 금방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활용해 주민의 피폭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행동한 관리는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좀 놀랄 필요가 있다. '원자력발전 사고가 일어나면 외국 정부가 제공해준 데이터를 어떻게 취급할까?'에 대한 규정이 예규집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규정상 그들의 행동(이라기보다는 비행동)에 하자는 없다. 그러나 요직에 있는 사람은 때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은지에 대해 적절한 기준이 없을 때 적절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 나라에서는 예부터 그렇게 할 줄 아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불렀다.

 일본 관리의 열등함은 제도적인 문제가 아니다. 업무 규정을 세밀화하고, 근무 고과를 엄격하게 정하면 어떻게든 정상화되리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질 자체가 열등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제대로 생각할 줄 아는 '어른'을 등용할 수 있을까? 무엇을 기준으로 '제대로 된 어른'과 그렇지 않은 인간을 식별할 수 있을까? 문부과학성과 경제산업성은 '직업교육'이나 '글로벌 인재 육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내부에는 왜 어른이 없을까?'를 자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2012년 7월2일)

p352. 제국의 수도 하늘은 지금보다 파랗고...

 (2013년) 10월6일 조간에는 1940년에 작성한 '환상의 도쿄 올림픽' 영어판 계획서를 발견한 어느 수집가의 기사가 났다. 도청과 박물관에도 없는 귀중한 사료라고 한다. 나는 이 계획서의 불어판을 읽은 적이 있다. 스위스 로잔에 있는 올림픽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자료실 '일본' 코너 책장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1964년 도쿄 올림픽 계획서라고 생각하고 펼쳐보았는데, 거기에 나온 수도의 사진이 내가 아는 도쿄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그래서 새삼 표지를 다시 보았더니 1940년 올림픽 계획서였다. 해가 저물 때까지 열람실에서 읽어나갔다. 실현하지 못한 행사 계획서는 현실과 몽상 중간에 머무는 반투명한 유령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올리픽의 도쿄 개최가 정해진 것은 1936년이었다. 다음해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에 개최가 취소되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과 1944년(런던이 개최 예정 도시였다.)은 올림픽이 없었다.

 '환상의 도쿄 올림픽'에 대해 나는 그런 계획이 있었다는 것밖에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치의 정치 쇼였던 베를린 올림픽과 비슷하게 이데올로기 색채가 강한 야외극을 구상했을 것이라고 멋대로 상상했다.

 그러나 계획서를 읽어보니 뜻밖에도 꽤 진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비상시에 스포츠에 열광할 여유가 있어?'하고 말할지도 모르는 군부와 여론에 마음을 쓴 탓인지, 신규 건축물은 적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경기장과 선수촌 사진을 보고 나는 특히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 1930년대 제국의 도시 하늘은 무척 넓고 파랗다는 것(흑백사진이지만 '투명하고 깨끗한 창공'이라는 점은 알 수 있었다.). 둘째 이때 올림픽에 출전할 운동선수 대다수는 그 후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열람실 책상에 팔꿈치로 턱을 괴고 나는 '1940년에 도쿄 올림픽을 개최한 세계'를 공상해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 나오는 '평행세계'적인 공상이다. 그 다음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회파한 대일본제국을 상상했다. 제국의 수도 하늘이 지금보다 파랗고, 청년들이 지금보다 조용하고 수수한 일본을 상상했다.(2013년 10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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