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간략 감상평)
이 영화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감상은 남다를 수 밖에는 없다.
나는 1987년에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곧 내가 이 영화의 메인스토리중 하나인 87년 연세대학교 6.10시위의 중심에 있었다.
게다가 영화에서 김태리가 학교앞을 검문할때 학번을 대는데(8712023), 이 학번과 내 학번이 거의 유사해서 감딱 놀랬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에서 보이는 87년 5월부터 6월항쟁까지의 시위에 참가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잠시 우리집의 가계역사를 살펴보면,
6.25가 터질 당시 황해도 연백(현재는 북한의 행정구역이 1952년개편되어 해주 옆에 있는 연안군 일대지역에 있다, 현재의 남한의 경기도 연백은 당시 황해도 연백의 남단의 일부 지역만을 포함한다)에서 약간의 땅으로 소작농을 두고 가계를 꾸리시던 나의 조부는, 가장 맞이인 큰 아들(내겐 큰아버님, 당시 20대)은 국군정보사 장교였고, 둘째 아들은(당시 10대, 내겐 둘째 큰아버님) 경찰학교로 유학을 보내서 남쪽에 있던 상황이었다. 당연히 공산군이 밀려내려오면서지주, 군인, 경찰에 관련된 집안은 살려두질 않는다는 흉흉한 소문을 접하신 조부는 발빠르게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을 처분하여 통통배 한척을 빌려 모든 가족(6남3녀, 당시 장남이던 큰아버님은 결혼해서 큰어머님과 아들 2과 딸 1를 둔 상태로 총 가족수는 15명)을 배에 태워 서해바다 연안을 통해 남쪽으로 내려가셨으며, 몇 일인가를 서해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대한민국 해군에 의해 구조되어 군산 앞바다 어청도에서 가족들과 함께 피난 생활을 몇 달간 하게 된다. 이후 국군의 후퇴에 따라 부산으로 이동해 있던 큰 아들과 연락이 되어 부산으로 가족을 이끌고 지금의 자갈치 어시장 근처에서 피난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미군의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군이 진격하면서, 고향과 가까운 인천의 화수동 지역으로 이사를 하고 가건물 생활을 하시면서 북녁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셨지만, 휴전 이후 결국 북쪽으로는 돌아가지 못하시고 당시의 대부분의 피난민들처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시다가 사망하시게 된다.
예상이 가능하지만, 이러한 집안의 내력에서 어릴때부터 집안 어른들이 모이면 귀에 못이 배기도록 들었던 이야기가, "공산당 빨갱이는 나쁜 새끼들"이라는 것이었고, 80년대 이후 학생 및 지식인층 혹은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촉발된 민주화 및 노동인권과 관련된 시위에 대한 뉴스라도 나오면, "저런 빨갱이 새끼들."이라는 욕이 어른들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서,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때 아버지를 위시하여 모든 집안의 친척 어른들께서 말씀하신 첫번째 당부말씀은, 그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들었던 말과 비슷할 것이다.
"학교에 가면 동아리 같은거 가입하지 말고, 운동권 친구들 사귀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 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갖 20이 되었던 당시의 나의 관심사는 죽어라 공부만(?) 했던 암울한 시절끝에 찾아온대학생활의 낭만같은 것이었다.
미팅, 엠티, 축제, 술, 담배, 디스코 텍(당시는 나이트나 클럽이라는 이름보다는 디텍으로 많이 불리웠다. 70년대의 고고장의 시대가 끝나고 바야흐로 디스코가 대세인 때였다.)과 같은 향략적인 문화에 대해 동경했던 나에게 87년 입학후 여름방학까지의 3개월의 기억을 요약하자면 단 한단어로 압축된다.
"최루탄"
3월 입학식 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위한 엠티와 몇 번의 미팅, 그리고 같은 동기생들끼리 서로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찾기 위해 암중모색하는 시간이 2달 남짓 지난 5월 중순부터(영화에서도 나오지만, 87년 5월18일 광주민주화 희생자 7주기에 명동성당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실제 고문치사에 가담한 형사들 5명의 이름을 공개한다. 이후 전국적인 규모로 전국대학가에서 시위가 격화된다.) 학교에서는 단 하루도 시위를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침에 신촌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굴다리를 지나 학교 정문으로 가는 길에는 백골단들이 지나가는 학생들을 잡고 학생증과 가방을 검사하는 것이 일상사였고, 학교에 도착하면 점심때쯤부터 시작되는 시위에 수백발씩 쏴대는 최루탄에 정문 바로 앞 공학관은 정상적인 수업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언덕위 과학관의 수업을 진행하는 2층 이상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쉬거나 씻기 위해 화장실이나 학회실로 몰려오면서 1층의 휴게공간은 매케한 냄새로 곧 가득차게 되었다. 이런 매케한 냄새때문에라도 더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통에(당시에는 학교 복도에서 그냥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매우 좋은 시절이었다.) 매케한 냄새와 자욱한 담배연기 냄새가 어우러진 그 아스트랄한 분위기는 지금으로서는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지역에서나 경험할 만한 장면이 아닌가 싶다.
이 당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필수과목이었던 대학수학(벡터, 미적분, 통계등을 포함하여 이공계에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되는 기본적인 수학을 배우는 과정)의 중간고사 시험에 대한 보이콧에 관한 것이다. 당시 박종철 사태로 촉발된 시위의 격화와 관련하여 총학에서는 시위에 참석하는 학생들이 수업과 시험을 치루지 않는 부분에 대한 부담에 대한 문제로, 모든 학생들이 중간고사 기간 수업과 시험거부를 결의할 것에 대해 제안하였다. 나는 사실 이 당시 무슨 거창한 사회적 인식이라든가 그런게 있던 때가 아니었다.(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저 난 내가 주어진 상황에 대해 최대한의 상식을 추구할 뿐이다.) 이 문제로 당시 과에서는(당시 50명 정도의 과원이 있었고, 필수과목인 탓에 대부분의 동기가 참석한 것으로 기억한다.) 수업과 시험거부에 대한 토의가 있었고, 당시 수업과 시험거부에 대해 가결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물론 당시 반대하는 동기들도 있었고, 학생의 가장 큰 권리이자 의무인 수업과 시험의 거부를 다수결로 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예상된다고 하는 이유는 난 당시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과정이 소상히 기억나지 않기때문이다.)
어쨋든 가결되었으니 수업도 시험도 참석할 이유가 없겠군이라고 생각한 나는 당시 최루탄 공방이 지속되는 학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정보수집차(어떻게 돌아가나 하는 정도) 가는 정도였고, 시험도 보지 않았다. 그렇게 1달여를 지나고 6.29선언으로 시위가 조용해지면서 정상화된 학교를 가서 알게 된 사실은 50명정도의 과원중에 당시 절반정도가 수업 및 시험에 참석했으며, 중간고사를 보지 않은 인원은 기말고사에서 만회하지 않으면 F를 맞게 되리라는 담당교수의 사무적인 경과설명이었다.
당시의 나는 별로 수업에 대한 열정도, 사회적 문제에 대한 열정도 없던 상태이고, 그저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재밋게 당구나 치고 영화나 보며 인생을 즐기기 바쁜 시기였기에 뭐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면서 기말고사 역시 그저그런 점수를 맞았던 덕분에 대학수학에 F를 맞게 되었다. 필수이수과목을 F를 맞은 덕분에 2학년때부터 대학수학을 선수해야 하는 일반역학과 같은 필수과목을 듣지 못하는 바람에 3,4학년때 듣는 전공선택을 신청하게 되면서 이상하게 커리큘럼이 꼬이면서 점점 전공과목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게 되었던 것이 기억난다.
당시의 그 거대한 대한민국의 사회적 변혁은 그것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든 그것에 무관심했던 사람이든 결국은 그 영향으로 인생의 많은 부분에 큰 영향을 준 것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시간이 지나보니 알게된 점이다.
이 영화는 당시의 전두환의 호헌 발표로부터 시작해서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 그리고 그 고문치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이한열의 죽음, 그 죽음으로부터 촉발된 대한민국 국민의 전국적인 시위와 그와 같은 국민의 힘으로 인해 쟁취한 민주주의에 대한 소중한 기록이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부인 마지막 장면에서 김태리가 버스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시청앞 광장이 펼쳐지면서 모든 시민들이 연호하는 독재타도, 호헌철폐에 대한 구호중 호헌철폐라는 부분은 이 시기에 대한 정치적인 배경을 이해해야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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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위키에서 인용)
1980년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대통령은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한 뒤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후 대통령의 임기 제한과 입법부의 권력 강화, 통금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며 지지 기반을 공고히 닦았다. 그러나 정반대로 재야 인사들에 대한 강경 조치와 시위 탄압은 더해갔다.
1985년 2·12 총선 이후 야당과 재야세력은 간선제로 선출된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의 도덕성과 정통성 결여, 비민주성을 비판하면서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였다. 1986년 2월 각계 각층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중점으로 하는 민주헌법쟁취투쟁이 확산되고, 신한민주당이 1000만 개헌 서명운동에 돌입하면서 개헌 논의는 더욱 확산되었다.
이어 같은 해 7월 30일에는 여야 만장일치로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발족하였다. 그러나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의원내각제를,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함에 따라 개헌 논의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후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고문과 폭행으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거세지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정권 유지에 불안을 느낀 전두환은 그해 4월 13일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조치가 4·13호헌조치이다. 여야가 헌법안에 합의하면 개헌할 용의가 있지만, 야당의 억지로 합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선제인 현행 헌법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키고, 1988년 2월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것이 4·13호헌조치의 요지이다.
(4.13 호헌발표의 전문)
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본인의 이 결단은 오늘의 망국을 타계하고 국가 목표를 수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전폭적인 도움과 신뢰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합니다. 2가지의 국가 대사를 완성한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좋은 방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도 나라와 사회 성장발전에 부응하는 선진 정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본인은 남은 기간 동안 민주발전의 기반을 더욱 넓히고 사회 안정과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한 조치들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강제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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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의 상황은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초기에 있던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에 대해 광주에서 잔인하게 진압한 80년 광주민주항쟁의 상황이 이미 외국에서는 알려진 이후(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독일기자 한스 위르겐츠에 의해 독일에서 처음 방송되어서 서방에 알려졌고, 이후 이 필름이 한국에서도 야권인사들에 의해 반입되었으며, 이 필름은 전국대학생 연합회와 각종 대학의 동호회를 중심으로 복사되어 퍼지게 된다. 1987의 영화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운동권 동호회뿐 아니라 비운동권 동호회내에서도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비디오에 대한 관람회가 음성적으로 공유되었으며, 5월 대동제등에서도 공유되는 분위기였다. 이 당시 이러한 학생들의 음성적 활동에 대한 정보수집을 위해 고등학교 졸업 혹은 대학재학 시절 입대한 군인들을 정보원으로 대학에 잠입시킨 쁘락치들이 상당히 많아서 학생회에서도 쁘락치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는 분위기가 있었다.
또한 영화에서 보이듯이 청바지와 청자켓을 입은 소위 백골단은 -특별히 강원도와 경상도 출신의 고졸자 위주로 많이 뽑았다는 루머가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고졸자를 특별히 뽑은 이유는 이들이 대학생에 대한 반감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시는 대학생에 대해 우대해주는 사회분위기가 있었고, 대학을 못간 아이들이 그러한 반감을 가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평상시에는 사복을 입고 대학내에 잠입하여 학생회 활동등을 감시하고 시위 정보들을 수집하는 역할을 했다.) 전국 대학생 연합회 소속 각 대학의 총학생회 및 산하 부서나 동호회를 통해 학생들에게 전파되었다.
그래서 당시 대학을 간 자식을 둔 부모들이나 친척들이 신입생들에게 하는 첫마디는, "대학에 가면 써클이나 학생회같은거에 가입할 생각말고 괜시리 데모같은데 나가서 휘둘리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라는 것이 거의 일상적인 덕담이었던 시절이다.
이렇듯 뒤숭숭하게 시작된 1987년 영화에서 보듯이 1월14일에 대공조작사건을 기획중인 대공수사부에서 서울대학교 3학년생인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가서 물고문 도중 고문치사한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이로 인해 촉발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전국 대학생들의 시위가 벌어 각지에서 벌어지고, 그 와중에 연세대학교에서 6.10 시위에서 이한열이 전경이 쏜 최루탄 직격에 의해(영화에서도 보이지만 최루탄은 직격시 인명이 다칠 위협이 있기 때문에 상향 45~60정도로 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 당시 위협용으로 직격을 하는 일들이 많았다. 사실 이 시기 전경과 시위대의 대치는 총만 서로 안들었지 전쟁과 거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전경은 개인이 사용하는 최루탄총과 다연발 최루탄(소위 지랄탄) 및 박달나무 곤봉(이걸로 대가리를 치면 두개골은 아작난다)을 무기로 소지하고 있었고, 학생은 소주병에 휘발유를 담아 천으로 만든 심지에 불을 붙여 던지는 화염병 그리고 보도블럭을 깨서 만든 돌조각을 던지고, 각목등을 들고 대치했으며, 만약 학생이 전경들에게 잡혀서 전경차(닭장차로 불렸다.)에 잡혀들어가면 일단 40명쯤 되는 전경들에 의해 군화발로 밟히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두들겨 맞아 거의 반병신이 되는 것이 상례였으며, 마찬가지로 전경도 대학생들에게 잡히면 두들겨 맞아 반쯤 죽어나가는 상황이었다. 물론 잡히는 경우는 대부분 학생측이었으므로 피해자의 대부분은 학생 시위대였다.
당시 시위에서 학생들이 다치는 상황은 전경대와 시위대가 대치하는 경우, 전경들이 쓰는 방패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기술(?)에 의해 머리가 깨지거나 얼굴에 큰 상처를 입거나, 시위대의 전열이 무너지면서 도망치기 시작할때 백골단이 달려와서 곤봉으로 뒤통수나 어깨를 가격해서 머리가 깨지거나 어깨가 골절되는 경우등이 있었으며, 그 이후 잡혀서 닭장차로 끌려가면 죽기 직전까지 집단 폭행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여자들의 경우는 폭행은 심하게 당하지 않아도 영화에서처럼 서울에서 차로 1,2시간 이상 걸리는 외진 지역으로 데려가서 그냥 길가에다 버리고 가는 경우가 있었다.
이렇듯 폭력이 난무하는 무자비한 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이로 인해 대학생들의 피해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갔으며, 이를 보던 시민들의 동조가 시작되었고, 그 동조가 조직화되면서 1987년의 6월 항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6.29선언이 나오기 직전 전국에서 소집되어 서울로 올라온 전경대및 경찰의 규모보다 시위대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많아지면서 전경들이 시민 시위대에게 포위되면서 무장이 해제되는 일마저도 벌어지게 된다.
이 시기 전두환은 사실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무장으로 해제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당시 미국이 전두환에게 계엄령을 내릴 경우 미국은 이를 두고 보지 않겠다라며 계엄에 대한 반대의견을 전두환에게 전달했고, 이로 인해 전두환은 노태우를 내세워 6.29선언을 통해 자신이 내린 호헌을 철회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할 것을 약속하고 이후 전국적인 시위는 가라앉게 된다.
이 영화는 당시의 상황의 주요한 2가지 모티브,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을 통해서 본 이 시기의 역사적 기록이다.
(p.s)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대한민국 국민은 그해 12월16일, 13대 대통령 선거를 치룬다.
그 결과는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36.6%로,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28%),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후보(27%),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후보(8.1%)를 누르고 13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 당시 선거분위기는 동네의 아줌마들에게는 동네 통/반장들을 통해서 온천여행을 보내주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는 동네 경로당에서 연일 잔치를 통해 음식을 대접하고, 돌아가는 어르신들 손에는 수건등의 선물을 안겨주었으며, 돈봉투를 건네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국민들의 열망에 대해 정치권의 두 거두 김대중과 김영삼은 그들의 개인적 야심때문에 결국 손을 잡지 못했고, 젊은이들의 피와 땀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라는 고귀한 권리를 저열한 정부의 금권선거에 아무런 양심의 꺼리낌없이 받아들인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이 없는 중장년 세대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당시 운동권 인사들에게 엄청난 패배의식을 심어준 결과가 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