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통 인간으로서 감히 이루기 어려운 일, 성취하기 힘든 것들에 대해 신의 영광을 이야기한다.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이 그를 신의 레벨에 올려놓은 것은, 어찌 보면 말도 안되는 이타주의적 행동을 신이라는 이름을 빌어
인간 예수가 실천에 옮겼으며, 결국 그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실천했다라는 것이다. 유발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이야기했듯이 인간이 동물과 뚜렷이 차별화되는 부분이 신화에 기반한 사회체제를 만들어가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이야기한 신화란 현대의 경제의 기반인 신용, 돈, 혹은 철학적 영역에서 인본주의, 인간의 가장 큰
성취의 하나인 과학등 모든 상상적 체계로 만들어진 정신적 구조물을 의미한다.-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사후 3일만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이후의 부활에 대한 내용은 어차피 2천년이 지난
지금으로선 그 진위를 과학적으로도 따질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Supernatural한 영역이며, 난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핵심과는 별로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부활은 위대한 인간 그리스도를 신의 아들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하며 부활 자체가 예수를 더 위대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상 예수님의 행동은 현대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는 정신병자와 정상의 경계선상에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꼭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위인,
성인들의 많은 행적에서도 보이는 바이다.
어쨌든 예수의 행적에서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믿든 안믿든 그 입장을 떠나서, 인생을 살아본 이들에게 예수의 가르침과 그 실천의
용기는 우리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바가 크기에, 아직도 예수님이 역사 이래 사랑이라는 이슈에 대해서는 최대의 유명 아이콘로서의
네임밸류를 아직도 유지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민족의 역사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이를 한 분 찾는다면 나는 그것을 이순신 장군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홀연히 나타나 7년간 외로이 분투하면서 한민족을 구원하고 노량 앞바다에서 왜적의 총탄에 목숨을
잃으며, 동시에 한민족의 가슴에 가장 위대한 이름의 한 분으로서 각인되었으며, 그분의 행적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재생산
되어오고 있다.
바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그의 국회의원 시절, 더 앞으로 가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문재인과 함께 활동하던 시기,
그리고 3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서화합(영남과 호남의 화합)이라는 그 시대의 가장 뼈아픈 대한민국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군 분투했던
이에 대한 기록이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과 함께 조용히 2시간을 흘러가면서, 때로는 웃고, 때로는 숨죽여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시대의 아픔을 외로이 혼자 어루만져주던 거인을 만나게 된다.
앞으로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21세기에 한민족의 정의로운 삶, 인간을 위한 삶이라는 가치 앞에 노무현 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이나
이순신 장군과 비슷한 레벨로 우리에게 기억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다. 한없이 여리고 나약했으나 인간이라는
이름앞에 부끄럽지 않고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 인간 노무현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이 켜켜이 쌓여서 만들어진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