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30대에 관상동맥이 막혀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건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개인이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몸으로 경험한 채소과일식의 놀라운 효과를 공유하려는 차원에서 집필한 책이다.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저자의 말처럼 따라하면 건강이 나빠지진 않을 것 같긴하다.

 저자의 최근작인 <완전배출>은  어딘가 모자란 듯한 내용인데 이 책은 그것보단 좀 충실하긴 한데 그래도 역시 어딘가 좀 모자란 느낌이 들긴 한다. 이론적인 책이라기보다는 개인의 경험을 통한 믿음 같은 것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관통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책의 내용을 따라해보고 나서 개인적으로 효과를 본 사람들은 이 저자를 믿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참고 정도만 하고 넘어갈 것 같긴 하다.

한약사(이 책 보고 처음 알았다. 한의사, 한약사가 따로 있다는 것을)인 조승우라는 분이 쓴 디톡스에 관한 내용.

채소,과일섭취를 통한 디톡스로 건강을 되찾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

1년 전부터 유튜브를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꽤 지명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디톡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 및 고혈압,당뇨와 같은 성인병을 가진 사람들이 참고할 만한 내용.\

이 분의 핵심적인 주장은 음식물을 소화시켜서 완전배출시키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채식과 과일을 위주로 식단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

p83

 수면제 얘기가 나왔으니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10여 년 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수면제의 진실에 관한 주제로 방송을 했었습니다. '연예인들의 끝나지 않은 사망 사건'을 다루었는데요. 그 배경에 수면제(졸피뎀Zolpidem)가 있었음을 만천하에 고발했습니다. 탤런트 최진실,최진영 남매와 수 많은 연예인들의 밝혀지지 않은 자살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최진실씨의 매니저와 지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약이 아니었으면 절대 그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거에요. 내가 먹어보지 않았으니까 부작용을 몰랐다니까요. 알았다면 무조건 막았겠죠."

 방송 제작진은 폭식, 기억상실, 자살 시도 등 이해할 수 없었던 죽음 뒤에 수면제가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약물을 누구나 쉽게 처방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건당국은 이처럼 비극적인 부작용을 초래하는 이 약물을 도대체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 걸까요?

 이런 수면제의 부작용이 계속되자 언제부터인가 수면제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슬그머니 '수면유도제'라는 부드러운 이름이 등장했습ㄴ다. 수면제의 부작용을 염려한 제약 회사의 발 빠른 대처인데요 내용은 그대로 두고 이름만 바꾼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장에서 만든 '악마의 약' 수면유도제 말고 천연 수면유도제인 상추를 드시기 바랍니다.

 또한 철분과 엽산 등이 풍부해서 임산부에 특히 좋습니다. 시골 장터에 가면 옛날에 약장수들이 '남자는 정력에 좋고 여자는 피부에 좋고'라며 알약을 팔곤 했는데요, 알약 말고 천연 강장제 상추를 드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뭐 외국에서 들여온 소고기가 흔하지만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돈 좀 있어야 소고기(한우)를 먹었는데요, 제 친구 하는 말이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라며 소금장에 소고기만 계속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채소는 일절 먹지 않고 소고기만 먹는 것을 자랑스럽게 뽐냈는데요, 이거 정말 '돈 자랑'은 될지언정 바보 같은 짓입니다. 고기 먹을 때 상추와 깻잎과 마늘을 싸서 먹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상추와 깻잎 마늘, 이 3종 세트가 소화가 어려운 고기를 분해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고깃집을 가시더라도 '샐러드 셀프바'가 있는 집에 가실 것을 추천합니다. 상추와 각종 채소를 가져다 먹을 수 있으니 설사 고기를 드시더라도 상추에 파무침과 마늘과 양파를 가득 넣어 쌈으로 드시면 고기 1인분의 반도 먹기 전에 배가 불러옵니다. 이것은 제 경험입데요, 채소로 배를 채우면 다음 날 아침 배변이 너무 시원합니다. 어제 먹은 파무침과 양파 냄새가 밖으로 배출되는데요, 몸속에서 소화가 완성되어 완전히 배출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몸무게는 1kg이 빠져 있습니다. '굶어야 빠진다'가 아니라 '몸 청소를 해야 빠진다'가 정답입니다.

(이 책 완전배출의 핵심적인 내용이 배출을 잘해야 살이 빠지고 건강해진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과일과 채식으로 식단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p208

 저는 개인적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연을 사랑한답시고 산이나 공원에 '해충 포집기'를 설치하는데요, 벌레를 그렇게 잡아 가두면 새들은 무엇을 먹고산다는 말입니까? 새들은 나무의 씨앗을 먹고 배설해서 먼 곳까지 식물의 종자를 퍼트리는 역할도 합니다. 새들은 또한 대형동물인 코끼리나 코뿔소의 대변에서 아직 소화되지 못한 씨앗(과육이 남아 있는)을 먹고 그 씨앗을 널리 퍼트림으로써 자연의 순환을 완성합니다.

양자컴퓨터 자체가 아닌 응용분야에 대한 범용 해설서 같은 책.

양자컴퓨터가 과학 및 기술적으로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

p245

 자연의 지능은 하향식으로 창조되지 않는다.

 브룩스는 갓 태어난 새끼 동물은 곧바로 걸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계속 넘어지면서 어렵게 배워나가는 것이다. 자연의 키워드는 바로 '시행착오'였다.

 이것은 음악 교사가 재능 있는 학생에게 해주는 조언과 비슷하다. 카네기홀에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창조물은 시행착오를 통해 세상을 파악해나가는 일종의 학습기계로서, 실수를 저지를수록 성공에 점점 가까워진다. 

 이것이 바로 '상향식 접근법'으로, 일단 무턱대고 부딪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이 어른을 흉내내면서 세상을 배워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는 자는 동안 끊임없이 옹알이를 한다. 아이가 자는 동안 소리를 녹음했다가 나중에 들오보면 알 수 있다. 깨어 있을 때 들은 소리를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p248

 인공지능이 정체기를 겪고 있는 이유는 컴퓨터의 성능이 그 뒤를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뿐만 아니라 학습기계와 패턴인식, 검색엔진, 로봇공학 등도 비슷한 한계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는 양자컴퓨터가 도입되면 정체 상태를 벗어나 비약적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디지털 컴퓨터는 한 번에 1비트씩 계산하는 반면, 양자컴퓨터는 거대한 큐비트 배열을 동시에 계산할 수 있으므로 컴퓨터의 계산 능력이 떨어져서 풀 수 없는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p252

 단백질 분자의 접힘 문제도 이와 동일한 원리로 해결할 수 있다. 즉, 아미노산의 모든 가능한 배열 중 에너지가 가장 낮은 배열을 찾으면 된다. 이것은 등산 중인 사람이 계곡의 가장 낮은 배열을 찾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처음에 등산객은 모든 방향으로 경사진 정도를 확인한 후, 고도가 제일 빠르게 낮아지는 방향을 선택하여 한 걸음 이동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조금 전에 했던 행동을 똑같이 반복하여 또 한 걸음 이동하고... 이런 식으로 내려가다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도 지금 보다 고도가 높아지는 지점'에 도달하면 그곳이 바로 고도가 최저인 지점이다.

 에너지가 가장 낮은 아미노산 배열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는데, 구체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일단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문제를 단순화시켜야 한다. 분자 내부에서는 전자와 원자핵의 파동함수가 복잡한 상호작용을 교환하고 있는데, 이 모든 요인을 고려해서 디지털 컴퓨터로 계산한다면 다음 섹에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소한 요인들(전자와 원자핵의 상호작용, 전자끼리의 상호작용 등)은 과감하게 무시하는 게 좋다.

 이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으면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차례다. 첫째, 다양한 아미노산을 이어붙여서 커다란 배열을 만든다. 이것은 단백질의 형태를 흉내낸 '장난감 모형'에 해당한다. 특정 원자들이 결합할 때 형성되는 각도는 주최 측이 제공한 기본정보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로부터 단백질의 형태에 대한 초기 근사치를 얻을 수 있다.

 둘째, 선택한 배열에서 전하분포에 의한 에너지 결합이 이동하는 방식을 알고 있으므로(이 정보도 기본으로 제공됨), 이로부터 단백질 분자의 총에너지를 계산한다.

 셋째, 선택한 결합을 조금 비틀거나 회전시켜서 동일한 계산을 수행한 후, 이전의 에너지와 비교하여 작은 쪽을 선택한다. 이것은 등산객이 각 지점에서 모든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어보는 것과 같다.

 넷째, 에너지가 이전보다 커지는 배열을 모두 버리고, 작아지는 배열만 유지한다. 그러면 컴퓨터는 원자가 이렇게 이동해야 분자의 에너지가 작아지는지 시행착오를 통해 학습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아미노산의 배열을 비틀거나 통째로 바꿔서 동일한 과정을 반복한다. 단계마다 에너지가 감소하는 아미노산 배열을 찾아나가다보면, 결국 에너지가 가장 낮은 배열에 도달하게 된다.

 원자의 위치를 계속 바꾸면서 목적지로 접근하려면 엄청난 양의 계산을 수행해야 하는데, 지금의 디지털 컴퓨터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자잘한 요인들을 과감하게 무시한 채 컴퓨터를 가동하여 몇 시간, 또는 며칠 안에 단순화된 버전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처음에는 한마디로 참담함, 그 자체였다. 컴퓨터가 예측한 분자는 X선으로 알아낸 실제 모양과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컴퓨터 학습 프로그램이 정교해짐에 따라 결과도 점차 개선되었다.

 지난 2021년에 '구글과 손을 잡고 알파고를 개발했던 딥마인드가 알파폴드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무려 35만 종에 달하는 단백질의 구조를 해독했다'는 뉴스가 터져나왔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25만 종의 단백질까지 새로 발견했다고 한다. 인간유전체 프로젝트에 나열된 단백질 2만 개의 3차원 구조가 밝혀진 것이다. 뉴스에 발표된 목록에는 쥐와 초파리, 그리고 대장균에서 발견된 단백질도 포함되어 있었다. 딥마인드 창업자는 학계에 알려진 모든 단백질을 포함하여 총 1억 개가 넘는 단백질의 데이터베이스를 곧 발표할 예정이라고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근사적 방법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과가 X선 결정학으로 얻은 결과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슈슈뢰딩거 방정식에서 많은 항을 삭제한 채 계산을 수행했는데 실제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으니, 이들의 근사법은 검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p274

 일반적으로 염색체의 길이는 세포가 분열될 때마다 조금씩 짧아진다. 예를 들어 피부세포는 60번쯤 재생된 후 노화를 겪다가 결국 죽은 세포가 된다. 방금 언급한 숫자 '60'을 '헤이플릭 한계Hayflick limit'라 하는데, 세포가 죽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즉, 세포에는 죽을 때를 알려주는 생체시계가 내장되어 있다.

 

p390

 코펜하겐 해석이나 다세계 해석 말고 또 다른 해석은 없을까? 있다. 주어진 계(고양이)의 파동함수가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붕괴된다는 '결어긋남이론decoherence theory'이 바로 그것이다. 즉, 외부 환경은 이미 결어긋남 상태에 있기 때문에, 고양이의 파동함수가 외부환경과 조금이라도 닿기만 하면 곧바로 붕괴된다는 거이다.

 결어긋남이론을 도입해도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이 문제에 '역설'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이유는 상자의 뚜껑을 열지 않는 한 고양이의 생사 여부를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답(코펜하겐 해석의 결론)은 '뚜껑을 열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첩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어긋남이론에 의하면 고양이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는 상자 속의 공기 원자와 이미 닿았기 때문에 뚜껑을 열기 전에 고양이의 파동함수가 분리되고, 따라서 고양이의 상태도 뚜껑을 열기 전에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

 양자역학의 정설로 통하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고양이의 상태는 상자의 뚜껑을 열어서 관측을 시도할 때에만 분리된다decohered. 그러나 결어긋남이론에 의하면 고양이의 파동함수가 공기 분자와 닿으면서 붕괴되기 때문에, 고양이의 상태는 뚜껑을 열지 않아도 분리된다. 즉, 결어긋남이론에서는 파동을 붕괴시키는 원인이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는 관찰자'에서 '상자 내부의 공기'로 대체되는 셈이다.

 양자역학의 성립의 역사와 가장 근본되는 개념에 대한 입문서.

저자의 이전 작품인 화학 이야기가 꽤 괜찮아서 찾아 읽어봤다. 이 책도 꽤 괜찮다.

입자 이중성에 대한 실험 설명과 쿼크로 들어가면서부터 약간 어려워지긴 한다. 

--------------

p34

 어쩌면 영의 이중 슬릿 실험 결과를 광자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빛 방출기가 기관총처럼 빛을 연속해서 쏘면, 빛 입자들이 공중에서 서로 충돌하여 얼룩말 무늬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 가설이 맞는지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광자들이 이중 슬릿을 통과할 때 상호 작용할 가능성을 제것하는 것이다. 광자를 기관총으로 난사하는 대신, 저격용 소총으로 하나씩 하나씩 발사해야 한다.

 이 실험을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수년간 고안되었는데, 그중 1994년 히타치 직원인 도노무라 아키라가 수행한 실험이 단연 돋보였다. 탱크, 냉장고, 마사지 기계를 생산하는 기업 히타치는 최고로 정밀한 이중 슬릿 실험에 관련된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

 도노무라가 구성한 실험의 세부 내용은 토머스 영이 했던 실험과 상당히 다르지만 목표는 같으므로 여러분이 이해하기 단순하고 편하도록 동일 용어로 설명하려 한다. 실제로는 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도노무라의 실험에서 빛 방출기는 두 개의 슬릿을 향해 광자를 발사하며 빛의 세기를 강하거나 약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방출기 맞은편에 설치된 검출기 스크린은 무언가가 부딪히면 빛을 내는 물질로 만들어져 있어서 광자가 닿는 곳마다 빛의 흔적이 새겨졌다.

 이전에 영이 했던 것처럼 도노무라가 빛을 뭉텅이로 쏘자 예상했던 얼룩말 무늬가 얻어졌는데, 방출기 세기를 낮추어 한 번에 광자 한 알씩 쏘자 심각할 정도로 이상한 결과가 나왔다.

 처음 몇 분 동안은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광자는 하나씩 날아가 슬릿을 통과하고 검출기 스크린에 무작위로 부딪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스크린 가운데에 점으로 이루어진 띄무늬가 형성되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도노무라 아키라가 이중 슬릿을 향해 전자 한개씩을 방출한 실험 영상)

입자가 하나씩 발사되는 상황에서는 이 같은 무늬가 그려질 수 없다. 얼룩말 무늬는 슬릿을 통과한 광자가 다른 슬릿을 통과한 다른 광자와 섞여야만 나타난다. 광자를 하나씩 발사하면 다른 광자와 섞일 수 없다. 광자를 간섭하는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간섭무늬가 형성되는 것일까? 광자는 어떠헤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일까?

 

p41

 전자와 양성자는 반대 전하를 띠고, 반대되는 전하는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하는데, 원자에서는 왜 전자가 핵을 향해 소용돌이를 그리며 끌려간 끝에 수축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원자는 왜 파괴되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에 보어는 양자 에너지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에너지 준위가 가장 낮은 껍질을 채운 전자, 즉 핵에서 가장 가까운 전자는 에너지 사다리의 가장 아래쪽 가로대에 놓여 있다. 만약 그 전자가 핵을 향해 안쪽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 에너지 값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가장 안쪽 껍질에 자리를 잡고 나서 에너지를 잃는 유일한 방법은 사다리에서 벗어나 원자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전자 입장에서는 핵을 향해 움직이고 싶을 수 있지만, 양자 에너지 원리가 전하의 인력 규칙에 앞선다.

 

p51

 하이젠베르크는 현실 세계의 물리에는 무지하기로 악명 높았는데, 박사학위 중 구두시험에서 간단한 배터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질문받았으나 전혀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물리학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수학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하이젠베르크는 1920년에 아르놀트 조머펠트에게 고용되었다. 조머펠트는 보어가 원자 이론을 고안하는 데 도움을 준 물리학자 중 한 명이었다.

 조머펠트는 하이젠베르크에게 빛의 분해능에 관한 난제를 수학으로 계산하라는 과제를 주었는데, 하이젠베르크가 2주 만에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데 하이젠베르크가 가져온 답이 너무나도 복잡한 나머지 조머펠트는 그렇게 빨리 답을 얻기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그 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일이 있고 몇 달 후 하이젠베르크보다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물리학자 알프레트 란데가 그와 정확히 같은 답을 발표해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일을 겪고 나서 하이젠베르크는 양자 연구의 세계적인 요새로 빠르게 성장한 덴마크의 코펜하겐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닐스 보어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하이젠베르크는 조머펠트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아 실망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노벨상 수상자들과 함께 일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자리를 옮긴 후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의 수제자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하이젠베르크 인생의 후반기에는 다양한 논란이 불거졌다. 나치즘이 유럽 전역에 퍼지자 많은 과학자가 공습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유럽에 남아 나치에 고용되어 원자 폭탄 제조를 도왔다.

 일부 역사학자는 하이젠베르크가 내부에서 원폭 제조를 방해했다고도 주장한다. 전쟁 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 하이젠베르크가 원자 폭탄을 어떻게 제조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치는 원폭 제조에 실패했다. 어쩌면 하이젠베르크는 원폭 제조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았지만, 나치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와 보어가 주고받은 편지들이 2002년에 공개되면서, 두 사람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편지 내용상 하이젠베르크는 순탄하게 원폭 제조를 연구하고 있었으나 그와 함께 일할 유능한 팀원들이 없고(훌륭한 과학자들은 미국에 있었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연구실 사정에 밝지 않아 프로젝트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짐작건대 실험실의 모든 장비가 배터리로 작동했을 것이다.

 이 시기의 하이젠베르크가 윤리적 측면에서 어떠한 입장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유대인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연구 업적을 알리다가 곤경에 처했지만, 어머니 덕분에 심각한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알다시피 하이젠베르크의 어머니는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의 어머니인 힘러 여사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하이젠베르크가 곤경에 처하자 친구 힘러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내 아들 좀 내버려 두라고 네 아들에게 전해!"라는 의견을 효율적으로 전달했다.

 

p210

 칼 앤더슨은 우주에서 끊임없이 지구로 떨어지는 입자 파편인 우주선cosmic ray을 연구하면서 지구 표면에 도달하는 전자를 세고 있었다. 계산한 결과, 입자 대부분은 예측한 대로 정확하게 거동했으나 이들 입장 중 15개는 자석 주변에서 예상과 다르게 움직였다. 앤더슨이 관찰한 그 입자 15개가 양전하를 띤 전자였다. 우주에서 온 반물질.

 반전자는 '양전자positron'로 명명되었다. 하지만 반대 전하를 지닌 양성자와 중성자는 실망스럽게도 반양성자anti-proton와 반중성자anti-neutron로 불렸는데, 중성자가 어떻게 반대 전하를 지닐 수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반중성자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논할 예정이다.

 QED덕분에 우리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해졌다. 다루어야 할 입자와 장이 각각 일곱 개나 생겼기 때문이다. 양성자, 반양성자, 중성자, 반중성자, 전자, 양전자, 광자.

 광자는 반물질이 없는데, 이는 파인만이 말한 시간 역행 관점에서 보면 완벽하게 이치에 맞는다. 반물질이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일반 물질과 같다면, 광자는 시간을 경험하지 않으므로 광자의 반입자는 자기 자신이다.

 이미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보았듯이, 시간은 우주에서의 제한속도에 도달할 때까지 느려지는데 광자는 이미 그 제한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시간 개념을 갖지 않는다. 광자가 시간의 순행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시간의 역행도 느끼지 못함을 의미한다. 

 

p223

 쿼크는 겔만이 개념을 제안하고 수년이 지난 후 렙톤(전자, 뮤온, 타우온)을 중성자에 쏘아 경로를 추적하는 실험 도중 발견되었다. 중성자가 '중성자장'의 단일 물질 덩어리라면, 전자는 날카로운 각도로 튕겨 나올 것이다. 그런데 겔만이 예상한 대로 중성자가 하위 입자인 쿼크로 구성되어 있다면, 렙톤은 쿼크의 부분 전하에 의해 궤도를 벗어나며 굴절될 것이다.

 실험 결과는 겔만의 예측과 일치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종류의 입자와 핵을 다루는 양자장 이론이 제안되었다.

 양정자와 중성자는 세 개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그 주변으로 수천 개의 가상 쿼크가 생긴다. 여기서 일정하게 유지되는 세 개의 쿼크를 '드러난 쿼크valence quarks'라 부르며 이들이 입자의 전체적인 정체성을 결정한다.

 쿼크에는 전하가 있으므로 광자장과 상호 작용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양전하인 두 개의 위 쿼크가 왜 서로 밀어내지 않는지는 의문이다. 또, 같은 전하를 지닌 두 개의 입자는 절대로 붙어 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왜 모든 원자의 핵은 형성되는 순간 저절로 산산조각 나지 않는지 궁금해진다.

 일본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는 전자기력보다 훨씬 강하고, 양성자와 중성자를 한데 묶을 뿐만 아니라 양성자를 하나의 입자로 유지해주는 힘을 제안했다. 이 힘은 상당히 강해서 전하 반발력도 이겨낼 수 있으므로, 유카와는 그 힘에 '강력strong forc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자기력과 강력은 힘의 규모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따. 전자기적 상호 작용은 원자 주위의 전자를 이동시키거나 화학 반응, 이를테면 불을 붙이는 반응을 일으킨다. 반면 강력에서 비롯된 에너지는 원자핵 중심부에서 움직이는 양성자, 중성자와 관련 있다. 강력은 핵폭발을 일으킨다.

 전자기력은 모든 입자가 광자장에 결합하고 가상 광자를 통해 소통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강력도 쿼크가 결합할 수 있는 고유의 장을 가져야 한다. 겔만은 이를 글론장gluon field이라 불렀다.

 그럼 이제 글루온장에 어울리는 특성이 필요하다. 입자가 광자장에 결합하는 능력을 우리는 전하라고 부른다. 겔만은 쿼크가 글루온장에 결합하도록 해주는 특성의 명칭을 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색colour'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파인먼의 전자와 광자에 관한 양자장 이론은 양자전기역학이었으므로, 겔만은 쿼크와 글루온을 다루는 자신의 이론에 색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크로마chroma'를 따서 '양자색역학quantum chromodynamic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p238

 이론물리학자들은 어느 가설에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어떻게 알아낼까? 입자와 입자장, 그리고 그들 사이의 상호 작용은 너무 많은데 누군가 제안한 방정식이 이치에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새로운 물리학 법칙을 만드는 과정에 기반이 되는 법칙이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그 궁극의 법칙은 역사상 가장 탁월한 물리학자였으나 충격적일 정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물리학자가 세웠다. 아말리에 에미 뇌터Amalie Emmy Noether.

 뇌터는 20세기 초 독일 에를랑겐대학에서 청강 허가를 받은 두 여성 중 한 명이었는데, 듣고 싶은 수업이 있을 때마다 강사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뇌터의 성별은 그녀가 수학 공부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뇌터가 발표한 탁월한 논문은 존경받는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의 관심을 끌었다.

 뇌터는 힐베르트의 도움을 받아 괴팅겐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그 대학의 유일한 여성 직원이 되었다. 직책상 무보수로 일해야 했으며 힐베르트의 이름으로 된 강의에서만 가르칠 수 있었으나, 어쨌든 그녀는 학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마침내 상황이 반전된 것은 뇌터가 이론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는 원리인 '뇌터의 정리Noether's theorem'을 고안한 이후다. 어떤 면에서 애석한 일이지만, 여성인 뇌터가 다른 학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면 세상의 모든 남성 물리학자로부터 승리를 거두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남성 물리학자들에게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던 뇌터는 QED와 QCD의 주춧돌로 작용하며 학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 뇌터의 정리를 발표해 모든 남성 물리학자들보다 한 수 위임을 보였고, 아인슈타인 조차 규명하지 못한 상대성이론의 퍼즐을 풀었다. 

 뇌터의 정리는 물리학자들이 '대칭성'이라 부르는 개념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 개념을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어떠한 사건이나 입자를 연구할 때 우리는 운동에너지(이동)와 위치에너지(장에너지의 에너지)를 알려주는 방정식을 쓴다. 이 두 에너지의 차이를 라그랑지안(Lagrangian)또는 라그랑쥬 함수라 하는데 모든 물리학 법칙에 이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연구하는 대상이나 조건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강한 자석 근처에서 실험하거나 입자의 질량을 변화시킨다면, 라그장지안은 그대로이거나 변화할 것이다. 우리가 일으킨 변화가 라그랑지안을 바꾸지 않는다면 모든 방정식도 같은 형태로 남을 것이며, 우리는 이 상황을 이론에 '대칭성이 있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가 일으킨 변화가 라그랑지안에 변화를 준다면 방정식 역시 변화할 것이고, 우리는 그 이론에 '깨진 대칭성broken symmetry이 있다'라고 말한다.

 뇌터의 정리는 이론에 대칭성이 있다면, 입자에도 마찬가지로 보존되는 특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령 여러분이 입자를 들고 살펴보다가 오른쪽으로 1미터 이동했다고 치자. 입자도 여러분과 함께 이동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이론에는 위치 대칭성이 있다.

 뇌터의 정리에 따르면 이 같은 위치 변화는 추진력이 있는 입자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 결과인데, 추진력은 보존되어야 하며 생성/파괴될 수 없다. 또 서로 충돌하는 입자들은 상대에게 운동량을 전달하지만, 충돌 전후의 운동량 총량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보존된다.

 뇌터의 정리는 또한 우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입자를 전진시켜도 물리 법칙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리 법칙은 시간에 대칭적이므로 그 시간 흐름을 따라가며 보존되는 특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 특성이 에너지인 것으로 밝혀졌다. 에밀리 뒤샤틀레가 에너지는 생성/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증명했지만, 뇌터의 정리가 보다 근본적인 근거를 제시했다.

 전하도 마찬가지로 보존량이며 입자의 파동함수가 진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빛을 구성하는 광자는 언제나 물질과 반물질 입자를 동시에 생성한다. 전하가 보존량이므로, 전하를 지니지 않는 광자는 전자를 생성할 때마다 반전자도 생성해 전체 전하를 0으로 유지한다. 이들은 보존량의 일부 사례에 불과하다.

 뇌터의 정리는 물리 법칙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거나, 그럴 수 없는 특성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따라서 양자장 이론이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알아내려 한 디랙, 파인만, 겔만에게는 뇌터의 정리가 꼭 필요했다. 뇌터가 물리학 법칙을 떠받치는 법칙을 가르쳐주었으며, 그 법칙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뇌터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즘이 대두되는 동안 독일에서 추방당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런데 이주한 뒤에 그녀를 여왕처럼 생각하고 좋아해주는 과학계로부터 받아들여졌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많이 늦긴 했지만 뇌터는 인정받게 되었으며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아인슈타인은 <뉴욕 타임스> 부고문에서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기 시작한 이래 가장 훌륭한 천재 수학자"라고 평가했다.

 주기율표를 주제로 원소의 성질에 대한 초보적인 양자역학적 설명을 곁들인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교양과학 서적.

 내용은 고등학교 물리,화학 정도의 상식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 가능한 수준이지만 곳곳에 꽤 높은 수준의 통찰을 요하는 설명들을 발견할 수 있다.

------------------

p80

 입은 맛뿐만 아니라 온도도 감지하여 우리가 너무 뜨거운 음식을 먹지 않도록 막는다. 우리 몸의 열 감지기는 'TRPV1 수용체'라고 부르는데 혀와 소화관 내부에 많이 있다. 어떤 화학물질은 우연히 열 감지기를 작동시켜 실제로는 그 부위가 차갑지만 뇌에는 뜨겁다는 신호를 보낸다. 이러한 혼란이 빚어낸 감각을 우리는 '매운맛'으로 인식한다.

 1912년 미국 과학자 윌버 스코빌은 음식의 매운맛을 수학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했고, 오늘날에도 이 시험법이 사용된다. 매운 화학물질을 시험 대상자가 느낄 수 없을 때까지 계속 희석한다. 대상자가 매운맛을 느끼지 못할 때까지 희석한 횟수가 스코빌 지수(SHU)로 환산된다.

 혀는 미량의 물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일반적은 SHU값은 매우 크게 나온다. 할라페뇨 고추기름은 8,000회 희석후에 맛이 느껴지지 않으므로 스코빌 지수가 8,000 SHU이며 타바스코 소스는 5만 SHU에 가깝다.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는 웨일스 향신료 전문가 마이크 스미스가 육종한 드래곤 브레스다. 드레곤 브레스의 스코빌 지수는 240만 SHU에 이른다. 이 수치는 후추 스프레이에 맞먹는다. 드래곤 브레스는 너무 매워서 먹으면 과민성 쇼크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매운 화학물질인 레시니페라톡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식물 백각기린 유액에서 추출한 성분인 레시니페라톡신은 급성독성이 있고 피부에 심한 화상을 입힌다. 이 때문에 누구도 이 물질로 미각 실험을 한 적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물질의 스코빌 지수를 간접적으로 계산해야 한다.

 1989년 헝가리 병리학자 아르파드 살라시는 (쥐를 대상으로) 수행한 연구에서 캡사이신보다 레시니페라톡신이 TRPV1 스용체에 1,000배에서 1만 배 더 잘 결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캡사이신의 스코빌 지수가 1,600만 SHU이므로 레시니페라톡신은 대략 160억 ~ 1,600억 SHU일 것이다. 우리를 죽이기에 충분한 매운 맛이다.

 

p135

 원자번호가 커질수록 양성자 수가 증가하므로 양성자를 제대로 붙잡아 두려면 중성자 수도 늘어나야 한다. 그런데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 양성자 사이에 졵재하는 반발력은 끝없이 증가하지만 중성자의 접착력은 무한하지 않다.

 거대 원자 안에서 반발력이 승리하는 것은 시간문제며 반발력은 원자 구조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크기가 클수록 원자는 깨지기 쉬워지고,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결국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푸른빛을 내는 원소 악티늄은 양성자가 89개인 거대 원자핵을 지닌다. 악티늄 덩어리는 20년 이내에 절반 정도가 다른 원소로 붕괴될 것이다. 반면 루비듐의 원자핵은 양성자가 37개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루비듐 덩어리의 절반이 붕괴되려면 490억 년이 걸린다. 

 방사성 붕괴로 생성신 원소의 핵에는 다른 원소가 일반적으로 가지지 않는 독특한 개수로 중성자가 존재한다. 이러한 '딸daughter' 원자핵은 방사성 붕괴로만 발생한다. 암석에 포함된 모mother 원자핵과의 비율을 측정하면 언제 붕괴가 시작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붕괴 반응이 지속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 기술로 미국 화학자 클레어 패터슨은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여 대략 45억 세인 것을 확인했다.

 

물리학의 궁극의 이론으로 가는 여정을 다룬 책.

고대의 물질의 근본인 원자, 그리고 우주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물리학에 대한 탐구의 역사.

근대에 들어 뉴턴 역학과 전자기학, 아인쉬타인의 상대론 그리고 현대의 양자론에 이르러 만물의 힘을 통일하기 위한 과학자의 노력들과 현재까지 이르른 곳에 대한 이야기다.

본인이 초끈 이론의 대가인 과학자인 미치오 카쿠는 현대 물리학의 궁극적 모습에 대해 가장 많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라 생각된다.

훌륭한 교양과학 서적이다.

 

-------------

p99

 훗날 프린스턴의 물리학자 존 휠러는 솔베ㅣ학회를 회상하며 말했다. "나는 그날 오갔던 대화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논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로 30년이 흘렀지만, 그날처럼 심오한 문제를 도마에 올려놓고 그토록 위대한 대가들이 그토록 심오한 결론을 도출한 사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p102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을 시원하게 풀어줄 해결책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지금도 물리학자들은 이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갑론을박을 벌이곤 한다[관측을 실행하여 파동함수가 붕괴되어야 고양이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닐스 보어의 해석(이것을 '코펜하겐 해석'이라 한다)은 과거보다 입지가 좁아졌다. 그 사이에 나노기술이 발달하여 개개의 원자를 다루는 실험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보어의 확률해석보다 다중세계 가설이 더 그럴듯하다. 이 가설에 의하면 상자의 뚜껑을 여는 순간 당신의 우주는 '고양이가 살아 있는 우주'와 '고양이가 죽은 우주'로 갈라진다].

p109

 독일에서는 당대 최고의 유명세를 누리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나치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한 역사가에 의하면, 하이젠베르크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연합군 지휘부가 그를 제거하기 위해 CIA의 전신인 OSS에 암살 계획을 의뢰했다고 한다. 이 임무를 맡은 사람은 한때 브루클린 다저스의 포수였던 모 버그였는데, 그는 1944년에 취리히에서 개최된 하이젠베르크의 강연회에 참석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등 적극적인 스파이 활동을 펼쳤다. 그때 OSS에서는 '독일의 핵무기 개발계획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면 하이젠베르크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나, 모 버그는 아직 걱정할 수준이 아니라며 그를 살려두었다고 한다(이 이야기는 니컬러스 다비도프의 책 <스파이가 된 포수The Catcher was s Spy>에 자세히 나와 있다.

p128

 입자가속기로 가속된 양성자빔을 목표물을 향해 발사하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양성자와 충돌하면서 온갖 입자들이 튀어나온다. 과학자들은 이 과정을 통해 이제껏 발견된 적 없는 새로운 입자를 무더기로 발견할 수 있었다(사실 입자빕으로 양성자를 때리는 것은 매우 둔탁한 방법이다. 비유하자면 피아노를 창밖으로 던져서 부서지는 소리를 분석하여 피아노의 세부구조를 추적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원자핵과 양성자의 내부구조를 탐색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p223. LHC를 넘어서

 일본의 과학자와 정치가들은 직선 튜브 안에서 전자빔을 발사하여 반전자빔과 충돌시키는 국제선형충돌기International Linear Collider(ILC)의 건설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일단 승인이 떨어지면 12년 안에 완성될 것이다. ILC의 장점은 양성자가 아닌 전자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양성자는 세 개의 쿼크가 글루온을 통해 결합된 복합입자여서, 한번 충돌하면 구성입자뿐만 아니라 잡다한 부산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 반면에 전자는 복합입자가 아닌 소립자면서 양성자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에, 많은 에너지를 투입할 필요가 없고 충돌 결과도 훨씬 깔끔하다(전자를 입사입자로 사용하면 250GeV에서 힉스보손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한편, 중국은 원형 전자-양전자 충돌기Circular Electron Positron Collider(CEPC)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2022년에 착수하여 2030년경에 끝날 예정인데, 둘레는 약 100km에 출력은 240GeV이고 총 건설 비용은 50억~60억 달러쯤 된다.

 CERN(유럽 입자물리연구소)의 과학자들도 이에 뒤실세라 LHC의 뒤를 잇는 미래형 원형 충돌기Future Circular Collider(FCC)를 설계 중이다. 둘레가 약 100km인 이 장치의 예상 출력은 무려 100TeV(=100,000Gev)에 달한다.

 이 야심 찬 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물리학자들은 LHC를 뛰어넘는 차세대 가속기에서 암흑물질이 검출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암흑물질의 구성입자가 발견되면 끈이론의 예측과 비교하여 이론의 타당성을 부분적으로나마 검증할 수 있다.

 초대형 가속기가 완성되면 끈이론에서 예측된 미니블랙홀의 존재 여부도 확인할 수 있다. 끈이론은 중력과 소립자를 모두 포함하는 만물의 이론이므로, 물리학자들은 가속기에서 미니블랙홀이 발견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미니블랙홀은 진짜 블랙홀과 달리 에너지가 입자 몇 개 분량밖에 안 되기 때문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오히려 매순간 지구로 쏟아지는 우주선의 에너지가 미니블랙홀보다 훨씬 크다. 그런데도 지구는 멀쩡하니까, 미니블랙홀이 지구를 삼킬 걱정은 붙들어 매도 된다).

p226. LISA

 '레이저 간섭계 우주 안테나 Laser interferometer space antenna(LISA)'로 명명된 이 프로젝트가 완료되면 빅뱅의 순간에 발생한 진동까지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LISA의 한 가지 버전은 세 개의 인공위성을 삼각형 대열로 배치해놓고 레이저로 연결된 형태인데, 한 변의 길이가 거의 150만 킬로미터나 된다. 빅뱅이 발생한 중력파가 이 감지기에 도달하면 레이저빔이 미세하게 흔들리면서 그 존재를 확인하는 식이다(물론 엄청나게 민감한 장치들이 일사분란하게 작동해야 한다).

 LISA의 궁극적인 목표는 빅뱅의 충격파를 시간대별로 기록한 후 테이프를 꺼꾸로 되돌려서 빅뱅 이전에 발생한 복사를 최대한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이 데이터는 끈이론에서 예견된 값과 비교할 수도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값진 자료이다.

 LISA보다 더 강력한 장비를 구축하면 아기우주의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아기우주와 모태우주 사이를 연결했던 탯줄의 흔적이 발견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정말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

p17

 기원전 183년에 카르타고의 장군이었던 한니발은 아편을 이용하여 자살했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후였던 아그리파는 자신이 낳은 아들 네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열네 살짜리 양아들을 아편으로 독살했다.

 아편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 성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마태복음 27장 34절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언가를 주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아편은 쓰기 때문에 포도주나 맥주에 섞어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성경학자들은 '쓴 것'을 뜻하는 쓸개가 사실은 아편이었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편이 중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7세기였다. 처음에는 주로 의학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때로는 감미료나 과자에 첨가하기도 했다. 기분 전환용이었던 아편이 포르투갈 사람들이 가져온 담뱃대를 이용해 피우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중국 사람들은 충분한 아편을 확보할 수 없었다.

 1660년에 영국 회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612kg의 아편을 들여왔다. 1720년에는 1만 5000kg으로 늘었고 1773년에는 7만 5000kg이 되었다. 이로 인해 약 300만 명의 중국인들이 아편 중독자가 됐다. 그러자 중국 정부가 아편 흡연을 금지했지만 금지조치는 별 효과가 없었다.

 놀랍게도 1839년 영국은 2500톤의 아편을 중국에 수출해 적어도 중국인의 25%가 아편에 중독됐다. 어떤 지역에서는 주민의 90%가 중독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중국 사회가 붕괴 직전에 이르면서 중국 정부는 영국에게 아편 수입의 중단을 요구했다.

 영국이 이를 거절하자 전국적인 중독 현상과 범죄의 확산을 방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던 중국 관원들은 다음 조치에 들어갔다.

 1839년 흠차대신이었던 임칙서가 영국 아편 1200톤을 압수해 폐기했다. 이로 인해 영국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1839년과 1860년 사이에 영국과 중국은 두 번의 아편 전쟁을 치ㄹ렀고, 이 두 번의 전쟁에서 중국이 모두 패배했다. 그 결과 중국은 아편 수입을 위해 더 많은 항구를 개방해야 했고, 영국에게 2100만 달러를 보상해야 했으며, 홍콩을 중국에게 조차해야 했다.

 중국은 아편을 합법화했다. 1900년에 중국은 3900톤의 아편을 수입했고, 1300만 명 이상이 중독되었다.

 

p64

 이처럼 버터에서 '심장 건강'에 좋다는 마가린으로 바꿨지만 미국의 심장병 발병율은 오히려 증가했다. 정책 수립자들이 실제로는 마가린이 '심장에 안 좋은 건강 대체품'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다음 20년 동안 지방과 심장병의 관계를 밝혀내기 위해 30만 명을 대상으로 1억 달러가 소요되는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결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연구 결과에도 공식적인 정부 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이 연구를 주도했던 하버드 대학의 의생태학자 월터 윌렛은 격분했다. 그는 '권장 사항을 바꾸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증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을 만들 때는 높은 수준의 증명이 전혀 없었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역설적이다'라고 말했다.

 알셀 키스와 맥거번 위원회가 지방에 대해 잘못된 결론을 내렸던 것은 모든 지방이 똑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화지방, 불포화지방, 시스 지방 그리고 가장 중요한 트랜스지방과 같은 여러 가지 형태의 지방에 대해 몰랐다. 이로 인해 미국인들은 무지에 대한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p67

 두 가지 지방의 상대적 양을 명확히 알게 된 1980년대 초의 여러 연구들은 포화지방이 심장병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런 연구로 인해 불포화지방은 좋은 것이고 포화지방은 악마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두 단체가 미국 식품에서 포화지방을 제거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p191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그 시대의 문화와 어울리는 과학적 편견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대정신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p273

 

 하지만 환경보호주의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의해 고무된 환경보호주의자들은 DDT의 제거를 목표로 했다.

 1969년 위스콘신관 애리조나가 DDT의 사용을 금지했다. 

 역설적인 것은 살아남아 있는 화학물질들이 DDT보다 인간에게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살충제에 대한 대중들의 두려움을 알고 있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농무부에서 적절한 대체 살충제 개발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 말까지 미국에서 DDT의 사용을 금지하겠다고 약속했다.

 1972년 새롭게 만들어진 환경보호국 책임자였던 윌리엄 러클하우스가 범미보건기구, 세계보건기구 그리고 많은 미국 공중건강 옹호 단체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의 DDT 사용을 금지했다. 다른 나라들도 이에 따랐다.

 공중보건 당국자들은 다가올 재앙을 예견하고 여러 국가들에게 DDT를 계속 생산할 것을 요구했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1970년대 중반에 환경보호단체들의 압력을 받아 국제 DDT 저지 프로그램이 사라져버렸다. 《침묵의 봄》에 의해 고무된 사람들이 DDT로부터 모기를 구한 것이다. 대신 모기에 의해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구하지는 않았다.

 

 DDT를 사다리로 삼아 미국은 시궁창을 나올 수 있었고, 학질 모기를 박멸하여 더 이상 시민들이 말라리아로 고통받지 않게 되었다. 그런 다음 환경보호라는 이름으로 미국인들은 사다리를 걷어버렸다. 이로 인해 개발 도상 국가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생물학적인 방법이나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말라리아 치료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환경보호국이 미국에서 DDT 사용을 금지한 1972년 이후 약 5000만 명이 말라리아로 죽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다섯 살 미만의 어린이들이었다.

《침묵의 봄》이 준 충격의 예는 얼마든지 있따.

 1952년과 1962년 사이 인도에서 DDT 살포로 매년 발생하는 말라리아 환자의 수가 1억 명에서 6만 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이 살충제를 사용할 수 없게 된 1970년대 말에 말라리아 환자의 수는 다시 6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스리랑카에서 DDT 사용 전에는 280만 명이 말라리아로 고통받았다. DDT 살포를 중지한 1964년에는 단지 17명만이 말라리아에 걸렸다. 그러나 더 이상 DDT를 사용할 수 없게 된 1968년과 1970년 사이에는 스리랑카에서 말라리아가 크게 유행하여 1500만 명이 감염되었다.

 1997년에 DDT 사용을 금지한 남아프리카에서는 말라리아 환자의 수가 8500만에서 4만 2000으로 늘어났고, 사망자도 22명에서 320명으로 늘어났다.

 결국 99개 나라에서 사라진 말라리아 대부분은 DDT를 사용해서 박멸했다. 때문에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은 'DDT의 사용 금지는 20세기에 있었던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다. 우리는 DDT 사용 금지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DDT의 사용을 금지했고, 이로 인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방치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환경보호주의자들은 DDT를 독극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DDT의 사용을 금지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말라리아로 죽어 가겠지만, DDT의 사용을 금지하지 않으면 백혈병을 비롯한 여러가지 암뿐만 아니라 다양한 다른 질병으로 고통을 받다 죽어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침묵의 봄》에서의 카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럽, 캐나다, 미국에서의 연구는 DDT가 간 질환, 조산, 선천성 장애, 백혈병 그리고 그녀가 주장했던 어떤 다른 질병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DDT 시대에 미국에서 증가했던 암은 흡연으로 인해 발생하는 폐암이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DDT는 지금까지 발명된 가장 안전한 살충제였다. DDT의 사용이 금지된 후 DDT 대신 사용하는 다른 어떤 살충제보다 DDT가 더 안전하다.

 환경보호주의자들은 지구에 우리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다른 많은 생명체들과 함께 지구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침묵의 봄》의 마지막 역설은 레이첼 카슨이 DDT가 인간에게 주는 영향을 과장했을 뿐만 아니라 동물의 건강에 주는 영향에 대해서도 과장했다는 것이다.

 

p288

 환경보호국(EPA) 관리들이 DDT의 사용 금지를 결정할 때,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두 종류의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화학, 독성학, 농경, 환경보건 분야에서 일하는 100명 이상의 전문가들이 만든 수백 개의 그래프와 그림을 포함하고 있는 9000쪽 이상의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는 DDT가 새들을 죽이지 않고, 물고기를 죽이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만성 질병을 유발하지 않는다고 결론짓고 있었다. 이 보고서는 엄청나게 지루했지만 정확했다.

 또 다른 증거는 아름답게 쓰였고, 성서적인 배음으로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이야기인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보고서와는 달리 이것은 충분한 자료를 포함하지 않은 긴 일화였다.

 예를 들면 DDT로 인해 독수리가 죽어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카슨은 새 관찰이 취미인 플로리다의 은퇴한 은행가의 관찰에 의존했다.

 결국 DDT의 사용을 금지하기로 한 EPA의 결정은 자료를 기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잘못된 정보로 인한 공포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p332

 선진국에서는 세균이나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치명적인 질병이 줄어들었지만 천식이나 알레르기와 같은 질병은 오히려 증가했다. 이것을 산업화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생시설의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는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에 실린 '지저분하게 먹어라'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개발도상국의 어린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세균 폭탄을 맞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의 장에는 선진국에서는 드문 기생충과 독성 물질을 분비하는 세균들이 많이 살게 된다. 이런 기생충이나 세균들로 인해 영양결핍에 걸리거나 죽을 수도 있지만 천식이나 알레르기로 고생할 가능성은 적어진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위생가설'이라고 부른다.

 핵심은 모든 것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특정한 기술이 대가만큼의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기술이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우리 주위에 있었다고 해서 예외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기술은 계속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아마도 가장 좋은 예가 전신마취이다.

 전신마취는 150년 이상 사용되어왔지만 최근에 와서야 몇 년 동안 집중력과 기억력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밝혀졌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마취과 교수인 로데릭 에켄호프는 '부분 마취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p346

 화학적 이름을 가진 물질에 대한 우리의 거부감은 쉽게 없어질 것 같지 않다. 몇 년 전 코미디언 펜과 텔러가 한 가지 실험을 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박람회에 친구를 보내 일산화이수소 dihydrogen monoxide 가 우리 건강에 나쁘므로 이 화학물질을 금지하자는 청원에 서명을 받도록 했다. 이수 dihydrogen 라는 것은 두 개의 수소 원자를 뜻했고, 일산화 monoxide는 하나의 산소 원자를 뜻했으므로 일산화이수소는 물(H2O)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화학물질명을 사용하여 그 친구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물을 금지하자는 데 동의하도록 할 수 있었다.

 

 저자인 한정훈 씨는 물리학 박사로, 전공은 물질에 대한 위상적 특성이다.

이 분야의 대가로 노벨상 수상자인 데이비드 사울레스의 제자이다. 스승의 노벨상 수상으로 이 분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을 계기로 대중강연과 이 책의 집필을 시작하였다고 본문에 나온다.

물질의 위상적 특성에 대한 관점에서 물질의 양자적 특성에 대한 탐구의 역사를 정리했다.

비전공자에게도 양자적인 감(感)을 갖기에 상당히 유용하며, 전공자들에게는 이 분야의 히스토리와 전체의 그림과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력을 높일 수 있는 참고서적으로의 활용도가 높다.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썼다고는 하지만 뒤로 갈수록 어렵다. 2,3번은 읽어야 어느 정도 익숙해질 듯p.

-------------------------------------

p70

 불과 28세의 나이에 이 권위 있는 교수 자리를 물려받은 톰슨은 재미있게도 그의 수학적 재능이 아니라 실험적 업적인 '전자의 발견'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지금 그의 소용돌이 고리 상호작용 이론을 기억하는 물리학자는 아무도 없다). 음극관 실험을 통해 톰슨은 원자보다 1천 배 이상 가볍고 음의 전하를 띤 어떤 입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이 입자는 오늘날 전자로 불린다. 원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원자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전자와 반대의 전하를 띤 또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 나머지 구성 요소에 대한 수수께끼를 해결해준 인물은 톰슨의 제자이면서 맥스웰-레일리-톰슨에 이어 네 번째로 캐번디시 연구소장을 지낸 러더퍼드였다. 톰슨이 전자의 존재를 발표한 1897년으로부터 14년 뒤인 1911년, 러더퍼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전자와는 반대 부호의 전하를 가진 원자핵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증명했고, 이로써 현대적 원자 모델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조각을 거의 다 찾게 된다. 남은 한 조각, 즉 중성자의 존재는 이번엔 러더퍼드의 제자 채드윅이 증명한다.

 

p83

 전자의 배타성 때문에, 전자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유동성을 잃어버린 셈이다. 우리 주변에 보이는 대부분의 물체는 전기를 통하지 않는다. 전자의 배타성 덕분이다. 우리가 24시간 전기에 감전되는 끔찍한 상황을 피해 생활할 수 있게 해준 전자의 배타성이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다.

 이렇게 까칠한 전자들이 모인 사회에 유동성을 부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투숙객의 숫자를 조금 줄이면 된다. 방은 1층에 3개, 2층에 7개 있는데 투숙객은 남녀 합해 다섯 쌍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럼 손님을 방에 채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생긴다. 한 방법은 1층에 세 쌍의 전자가 들어가고, 나머지 두 쌍은 2층의 방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남전자, 여전자가 모두 독방을 쓰는 경우 등, 다양한 가능성이 수학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실제 물질에 해당하는 파울리 호텔에서는 전자들이 기를 쓰고 아래층의 방부터 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자 손님을 배치하는 방식도 대단히 간단해진다. '에너지 최소화'라는 전자 세계의 비밀이 작동하는 덕분이다.

 

p126

 그럼 초전도체는 어떤가. 초전도 물질 내부에서 전자기파가 거동하는 방식을 잘 따져 그 운동방정식을 적어보니, 본래의 맥스웰 방정식이 아니라, 약간 변형된 꼴의 파동방정식을 만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변형된 방정식에도 파동의 입자의 이중성 원리를 적용해볼 수 있다. 그럼 흥미롭게도 보통 금속을 지나가는 전자기파, 즉 광자는 질량이 없는 입자의 방정식에, 초전도체를 지나가는 전자기파는 질량이 있는 입자의 방정식에 해당된다는 재미있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즉, 본래 질량이 없는 입자였던 광자가 초전도체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질량이 유한해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왜 광자는 초전도체 속에서 몸이 무거워지는걸까?

 

 이 질문은 물리학의 가장 원초적인 질문 중 하나, 즉 '질량의 근원'에 대한 질문과 서로 일맥상통한다. 본래 질량이 없던 광자가 초전도체 속에서 질량을 얻게 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면 온 우주에 있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 같은 입자가 질량을 갖게 된 이유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초전도체라는 맥락에서 앤더슨이 제공한 답은 무엇이었는가 살펴보자.

 BCS 이론(Bardeen-Cooper-Schrieffe theory, 초전도체를 이론적으로 설명)에 따르면 초전도체를 표현하는 파동함수, 즉 BCS 파동함수에는 금속의 파동함수에는 없는 새로운 숫자 하나가 등장한다. 이 새로운 숫자의 의미를 잘 따져보면 금속에는 없는 새로운 상태, 그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난부-골드스톤 Nambu-Goldstone 상태 또는 입자라고 부르는 것이 초전도체에는 존재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초전도체 밖에서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광자는 난부-골드스톤 입자를 만나 서로 상호작용한다. 그 결과는? 광자가 무거워진다.

 

p133

 일단 액화된 물질은 온도를 더 내리면 계속 액체로 남아 있든가, 아니면 고체로 굳어져야 한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절대온도 4도 근방에서 한번 액화된 헬륨은 절대온도 2도 근방에서 또 다른 액체 상태로 바뀐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액체헬륨이 차가워져 고체가 되는 게 아니라 제2의 액체로 변했다. 굳이 물리학적 훈련을 받지 않아도 기체와 액체가 서로 다른 상태이고, 액체와 고체는 또 다른 상태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같은 헬륨 원자가 만들어낸 액체에 두 종류가 있다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당시 최고 수준의 물리학자들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일단 절대온도 2~4도 사이에 존재하는 액체헬륨을 헬륨1, 그리고 절대온도 2도 미만에서 발견된 새로운 액체를 헬륨2라고 이름지었다. 두 액체의 물성 차이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때마침 1936년, 레이던의 실험실에서 중요한 단서 하나를 찾아냈다. 헬륨2가 헬륨1에 비해 열전달을 훨씬 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액체 한쪽 끝의 온도를 다른 쪽보다 살짝 높이면 한쪽에서 뜨거워진 액체가 차가운 쪽으로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열을 전도한다. 열전도가 뛰어나다는 말은 헬륨2가 헬륨1에 비해 훨씬 유동성이 좋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유동성이 과연 '몇 배' 좋은가이다. 러시아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카피차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새로운 실험을 고안했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관을 만들어 그 속에 액체헬륨을 통과시키는 실험이었다. 그가 발견한 사실은 놀라웠다. 헬륨1은 관을 통해 몇 분 흐르다가 멈추었는데, 헬륨2는 그 흐름이 1천 배 이상 오랜 시간 유지되었다. 마치 벽과의 마찰이나, 헬륨 원자끼리의 충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카피차는 초전도 상태의 금속에서 전류가 회로를 따라 지속적으로 흐르는 현상과 그가 발견한 현상이 매우 유사하다는 걸 눈치채고, 헬륨2를 과감하게 초액체 Superfluid라고 이름지었다.

 

p268

 사회현상이나 자연현상 중에는 이렇게 외부에서 주는 자극이 한참 쌓여야 비로소 변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이런 더딤은 보는 이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사회현상, 자연현상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화여대 물리학과 교수로 입자물리 이론을 전공한 분이다.

 책의 내용을 보면 분류상으론 에세이라고 봐야 할 듯 하다. 그래도 과학적인 주제가 뼈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과학으로 분류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내용은 일반인이 보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이 평이하다.

 

------------------------------

p22

 현재 인류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크기는 약 465억 광년으로 그 안에는 우리 은하 같은 다른 은하들이 대략 1조 개 정도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약간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현재까지 밝혀진 최신 천체물리 이론으로 보면 빅뱅은 138억년 전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주의 크기는 465억 광년이라면 무언가 좀 모순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는 우주의 팽창 속도가 외곽으로 갈수록 점점 빨라지기 때문이다. 팽창 우주론에서 관측결과와 이론적 계산에 의하면, 우주의 최외각 - 물론 팽창 우주론에선 그런 개념은 없지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가정하면 - 의 속도는 광속을 능가한다. 이로 인해 우주의 크기가 우주 탄생후 지난 시간보다 크다고 해도 모순은 없다) 

 아주 터무니없이 먼 곳을 의미하는 유행어가 된 '안드로메다' 은하는 우리 은하에서 겨우 250만 광년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웃' 은하일 뿐이다.

 이 거대한 우주는 점점 더 팽창하고 있다. 우주는 어제보다 오늘이 더 크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클 것이라는 얘기다. 꺼꾸로 말해서 백만 년 전에는 지금보다 작았고 십억 년 전에는 훨씬 작았다. 시간을 더 거슬러 가면 우리는 결국 태초의 순간에 도달한다. 138억 년 전의 어느 때, 우주의 모든 것이 한데 몰려 엄청나게 높은 밀도와 온도를 가지고 있던 우주는 대폭발을 일으켰다.

 

p44

  우주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극단의 천체는 바로 블랙홀이다. 블랙홀은 물체가 너무 무거워서 시공간이 휘어지다 못해 구멍이 난 것이다. 그리고 이 블랙홀이 벌이는 극한의 상황은 두 블랙홀이 서로 충돌하여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2015년 9월에 라이고에서 발견한 중력파는 태양 질량의 36배와 29배인 두 블랙홀이 충돌하여 62배 질량의 블랙홀 하나로 합쳐지면서 나온 것이다. 이 중력파가 가지고 나온 에너지는 태양 질량의 3배에 달한다. 즉, 우주에서 태양 세 개가 증발하면서 그 모든 것이 중력파로 바뀐 것이다. 순간 최대 방출 에너지로 보자면 관측 가능한 우주 전체에서 나오는 모든 빛 에너지의 50배에 달하는 막대한 양이다.

 이 엄청난 에너지가 우주 전역에 방출되었다. 그중 극히 일부가 13억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우주를 여행하여 지구에 도착하였다. 그 신호가 라이고 검출기를 0.15초 동안 머리카락 굵기의 20조 분의 1만큼 움직였을 때, 인류가 놓치지 않고 그것을 포착했다. 그리고 그 신호의 세부 모양을 보고 13억 년 전 두 블랙홀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임을 일반 상대성이론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13억 년과 0.15초, 13억 광년과 머리카락 굵기의 20조 분의 1. 이 두 극한의 시간과 거리가 100년 전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이 중력파 검출의 의미다.

 

p76

 당대의 많은 물리학자는 치열한 논쟁을 거듭했다. 크게 두 파로 나뉘었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옳은 결론이라는 파와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파. 전자에 속하는 물리학자는 코펜하겐 학파라 부른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보른, 파울리 등이 이에 속한다. 후자에 속하는 물리학자는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드브로이, 플랑크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양자역학 발전 과정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중에서 절반이 완성된 양자역학의 결론을 거부한 것이다.

 

p129

 과학적 세계관은 주입식 교육이나 선행교육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중요하고 수능에도 잘 나오는 실험의 방법과 결과를 통째로 외운다고 하여 형성되지도 않는다. 어설프더라도 정해진 답을 강요받지 않고 학생 각자가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며 실험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토론하는 경험을 함으로써 조금씩 쌓여가는 것이다. 시험 점수를 잘 받게 하는 수업은 교육이 아니라 시험 기계를 만드는 것이다. 비판 정신의 싹을 잘라내는 것이며 과학적 세계관에서 더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2008년에도 기후 변화에 대한 목소리가 전혀 없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큰 이슈가 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이 내용이 과장이 섞인 것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 2020년인 지금에선 이 내용은 지극히 현실적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현실(그 당시로는 다가올 미래)을 너무 낙관적으로 예측하고 있기까지 하다.

 코로나19로 전세계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이지만, 다가올 미래에(그것이 100년 후, 혹은 1만년 후든) 인류가 겪게 될 가장 큰 위기는 온난화에 의한 기후변화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에 대한 대책은 어떤 개인이나 한 국가에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며, 오직 인류의 연대와 공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인류의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다.

 이미 인류는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인류의 파멸은 이미 정해진 미래일 수 있다.

-----------------------------------

p57

 온난화의 급습으로 가장 먼저 티핑포인트를 넘어설 곳은 북극이다. 지금 북극의 기온 상승폭은 지구 전체의 상승폭보다 두 배나 높다. 알래스카와 시베리아의 온난화 속도가 특히 빠르다. 이들 지역에서는 지난 50년 동안 수은주가 2~3℃나 상승했다.

 그로 인한 영향은 이미 심각한 상태이다. 알래스카 배로의 경우 해빙(解氷) 시점이 1950년대에 비해 평균 열흘 정도 빨라졌으며, 이끼 말고 별로 나던 게 없던 툰드라 지대에서 관목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알래스카 페어뱅크스에 있는 과학자들은 노스슬로프 일대 지하의 얼음쐐기(ice wedge)가 갑자기 녹으면서 곳곳에 연못이 생겨나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것들은 적어도 지난 3,000년 동안 얼어 있었다. 이는 이전에 비해 지금의 기온 변화폭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말해준다.

 

 

p59

 티핑포인트에 가까워지고 있다. 흰 눈에 덮인 얼음은 햇빛의 80퍼센트 이상을 반사한다. 반면 푸른 빛깔의 바다는 햇빛의 95퍼센트를 흡수한다. 그러면 지구의 대기온도는 상승하고, 그 결과 다시 얼음이 녹는다. 일단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그 과정은 빠르게 자기강화적이 된다. 즉 얼음이 녹아 바다 면적이 넓어지면 그만큼 더 많으 햇빛을 흡수하게 되고, 그러면 기온의 상승폭이 커져 다음 겨울에 얼음을 만들기가 더 어렵게 되는 것이다. 북극해 얼음의 티핑포인트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기후 모델마다 차이가 있다. 하지만 온난화의 일정한 단계를 넘어서면 북극해 얼음이 완전히 붕괴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예측이 일치한다.

 

p60

 그렇다면 북극해의 얼음이 왜 그리 중요할까?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얼음이 없다면 북극의 상징적인 동물인 북극곰이나 바다표범도 멸종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북극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 집에도 그 영향이 있을 것이다. 콜로라도에 있는 국립빙설자료센터(Snow and Ice Data Center)의 수석연구원 테드 스캠보스의 말처럼 "북극해의 얼음이 사라지면 지구 전체의 날씨도 크게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세계 기후의 작동 방식 때문에 불가피한 변화이다. 대부분의 중위도권 날씨는 추운 극지방과 더운 적도지방의 기온 격차에 영향을 받는다. 영국이 1년 내내 비가 오는 것은 두 상반된 기단(氣團)의 불안정한 경계인 극전선(polar front)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미국 동쪽 해안에 몰아치는 강한 북동풍도 비슷한 경우이다. 그런데 북극이 따뜻해지면 이런 기온의 격차가 줄 것이다. 그리고 북반구의 경우 기후대들이 극지방 쪽으로 이동하면서 기온 격차가 일어나는 구역도 북상할 것이다. 그러면 비바람이 잦은 영국의 콘월이나 웨일스 같은 지역이 몇 주 혹은 몇 달씩 무풍지대인 건조 지역으로 바뀔 수 있다. 스코틀랜드만이 비가 많고 습한 날씨를 무기한 견뎌야 할 가능성이 높다. 2장에서 다루겠지만, 미국 서부에도 가문 날씨가 이어질 수 있는데, 이는 인류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추측으로만 치부될 게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지난 30년 동안의 위성관측 자료에 의하면, 남반구와 북반구의 제트기류가 1º 씩 각각 남극 쪽과 북극 쪽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고위도의 이런 풍도(風道:대륙권 상층부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바람의 좁은 통로)가 두 기단 사이의 경계를 나타낸다고 할 때, 그것이 점점 이동한다는 것은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면서 세계의 전형적인 기후대의 위치가 이미 이동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p88

 이산화탄소는 물에 녹으면 탄산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탄산수를 마실 때 톡 쏘는 느낌을 받는 것은 바로 그 탄산 때문이다. 그런 탄산수가 바다 전체에 녹아든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인간은 이미 바다의 알칼리성을 0.1pH만큼 줄여놓고 말았다. 카네기 연구소의 지구생태분과 교수 캔 칼데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이산화탄소 유입량은 정상치보다 50배 정도 많습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100년 안에 해양의 pH가 8.2에서 7.7까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수치 같지만 pH가 0.5 떨어진다는 것은 산성도가 다섯배 올라간다는 뜻이다. 더구나 바닷물은 아주 느리게 순환하기 때문에, 설령 - 온난화의 파급효과에 대한 인류의 자각으로 - 대기의 이산화탄소 수치가 안정되더라도 그 영향은 수천 년 동안 지속될 수 있다.

 

 

p94

 그런 점에서 2003년 여름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럽 전역을 모니터링한 결과, 높은 기온과 심한 가뭄의 이중 스트레스 때문에 광합성 작용이 약화되면서 대륙 전역의 식물성장 속도가 30퍼센트나 떨어졌다고 한다. 북유럽의 너도밤나무 숲에서 지중해 연안의 소나무와 참나무 숲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식물 성장은 더뎌지거나 중단되었다. 스트레스를 받은 식물들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대신, 그것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유럽의 식물들이 추가로 약 5억 톤의 탄소를 내뿜기 시작했는데, 이는 지구의 화석연료 전체 배출량의 12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중요한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 현상'이다. 기온이 올라감으로써 - 특히 폭염으로 인한 재난 발생 시에 - 숲과 토양의 탄소 배출량도 늘어나 온난화를 부추기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유럽과 광범위한 지역에서 장기간 지속될 경우 지구 온난화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처한다.

 

p105

 그러나 IPCC의 예상보다 빨리 빙상들이 붕괴될 수 있다는 핸슨의 주장에는 탄탄한 물리학적 근거들이 있다. 지난 빙하기 말미에 빙상이 빠르게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핸슨은 '알베도플림(albedoflip)'이라는 과정을 소개했다. 이 과정을 오늘날 다시 겪을 경우, 세계의 빙상은 기존의 예측보다 훨씬 빨리 파괴될 수 있다. 알베도플립은 간단하게 설명된다. 눈과 얼음은 녹으면서 촉촉해지는데, 이때 그 표면은 빛깔이 더 짙어지면서 햇빛을 더 많이 흡수한다. 그러면 표면의 온도가 상승하고, 전형적인 양의 되먹임에 따라 녹는 면적도 크게 늘어난다. 핸슨의 주장에 따르면 알베도플립 때문에 빙상의 해체가 - 수천 년이 걸리는 보다 장중한 과정이 아닌 - "폭발적으로 빨라질" 수 있다. 실제로 그린란드와 남극 서부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여름철에 엄청난 양의 얼음이 녹고 있는 것을 볼때, 눈의 입자가 녹아서 짙어지는 이러한 "격발 메커니즘(trigger mechanism)"은 벌써 가동되기 시작했다고 핸슨은 말한다.

 

p107

 북극의 온난화를 모든 사람이 꺼리는 것은 아니다. 그린란드 빙상이 흘러내려 지구 최북단의 기후가 변해야 부자가 되는 사람도 있다. 팻 브로도 그런 기대를 품은 사람들 중 하나이다. 미국의 사업가인 그는 1997년 캐나다 북부의 황량한 마을 처칠의 항구를 7달러에 사들였다.

 이 마을은 '북극곰의 수도'라 불리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1,000명 정도의 마을 주민들의 삶은 혹독한 것이었다. 하지만 브로가 보기에 호황기가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북극의 얼음이 녹는다면 보잘것없던 작은 마를 처칠은 아시아와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이를 연결해주는 항로의 중요한 허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항로가 열릴 때쯤이면 북금곰의 수도 처칠은 새로운 경제가치를 창출할 것이다.

 

 

p133

 생물다양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미학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생물다양성에서 고유의 가치를 찾는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다. 인간사회는 근본적으로 자연 생태계에 의존하는 점이 그것이다. 이는 TV 앞에서 인스턴트 식품을 퍼먹는 도시거주민들에게는 낯선 얘기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생선에서 땔나무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관대하게도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준다. 세균이 유기물을 분해하지 않으면 흙에서 농작물이 자랄 수 없다. 나무나 플랑크톤이 광합성을 하지 않으면 공기는 우리가 숨 쉴 만한 것이 못된다. 우리의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많은 약들은 식물과 동물에서 나는 천연물질을 원료로 한다. 그런 물질들 중에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게 더 많다. 생명은 지구의 영양분이 순환하는 것을 조절하기도 한다. 예컨대 바다에 사는 유기물들이 수백만 년에 걸쳐 여분의 탄소를 분비하여 석회암이나 백악층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는 지구는 오래전에 금성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금성은 대기의 96퍼센트가 이산화탄소로 구성되어 지표면의 기온이 자그마치 500℃ - 납이 녹을 정도 - 나 되기에 생명이 살 수 없다.

 이러한 생태계의 역할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과학기술로 대체할 수도 있다. 일례로 수경재배를 들 수 있다. 이는 뿌리를 내리게 해주는 진짜 흙 대신 합성수지와 각종 화합물질을 이용하여 식물을 재배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생태계는 너무나 복잡한 그물망이어서 우리는 생태계 내에서 벌어지는 살아 있는 것들의 상호작용을 다시 만들거나 대체할 수 있다고 상상하기는 커녕, 그런 것들의 상당수를 이해조차 할 수 없다. 한때 과학자들은 바이오스피어투(Biosphere-2)라는 밀폐된 인공의 세계를 만들려고 한 적이 있다. 그것은 애리조나 사막에 짓는 거대한 온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실패했다. 밀폐된 온실 속에서 이산화탄소 농도가 올라갔을 때 바이오스피어투의 주민들은 숨을 헐떡이며 나름의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생태계는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명은 우리가 계속 살 수 있도록 해주는데도 우리는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며 생명을 파괴한다.

 

p149

 이번 세기의 온난화는 산업혁명의 태동 이후 배출된 온실가스가 누적된 결과이다(스티븐슨의 '로켓호' 같은 초기의 증기기관차가 석탄을 때면서 방대한 탄소를 발생시켰는데, 그 탄소가 아직도 지구를 덥히고 있다고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가 만약 내일 당장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을 줄인다고 하더라도, 지구가 전보다 더워진 상태에서 다시 열평형에 도달하려면 여러 세기가 걸릴 것이다. 지금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플라이오세 수준이라고 해서 기온도 그때와 같기를 기대한다면, 주전자 물이 당장 끓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일이다.

 희망은 있다. 만약 우리가 이산화탄소 주전자 물의 불을 당장 끌 경우, 적어도 한 세기 동안은 지구기온이 3℃까지는 상승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지금의 수치대로 이산화탄소 방출량이 계속해서 증가한다면, 2050년에 지구기온은 3℃ 이상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며 시계는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다.

 

p150

 엘니뇨는 기압의 진동(oscillation)에 의해 태평양 해류가 따뜻해지는 현상으로, 세계의 날씨에 대혼란을 가져온다. 엘니뇨는 '그리스도의 아이'라는 뜻으로 페루의 어민이 붙인 이름이다. 평균 이상의 따뜻한 해수로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 현상이 크리스마스 무렵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엘니뇨의 출현이나 그것이 끼치는 피해에 대해서는 새삼스러울 게 없다. 이를테면 1,000년 전 페루의 해안 사막지대에 있던 모체 문명은 엘니뇨로 인한 가뭄 때문에 멸망한 것으로 유명하다. 1912년의 엘니뇨는 타이타닉 호의 침몰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타이타닉 호가 최고속도로 운항을 하고 있을 때, 빙산들은 평소보다 훨씬 남하하여 항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엘니뇨로 생긴 폭풍우가 빙산들의 위치를 이동시켜 놓았던 것이다.

 엘니뇨는 태평양의 날씨 패턴을 역전시켜버렸다. 이를테면 페루의 아타카마 사막에는 홍수를 일으키고, 인도네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는 가뭄을 일으킴으로써 지구 전체에 '원격상관(teleconnection: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생긴 현상들이 서로 관련이 있는 경우)'이라는 파급효과를 일으켰다. 긍정적인 점으로는, 미국 북동부의 겨울이 온화해지는 것과 대서양 적도권역의 윈드시어가 커지면서 카리브 해의 허리케인의 기가 꺽이는 것을 들 수 있다. 반면 아마존에서 파푸아뉴기니에 이르는 삼림지대에서는 가뭄이 닥치면서 파멸적인 화재가 발생하고, 남아프리카에서는 비가 너무 안 내리면서 식량 수확량이 줄어 기근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엘니뇨가 촉발한 가뭄으로 19세기 영국령 인도에서는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130년 동안의 강수량 기록을 보면, 인도에서 몬순이 약해지면서 생긴 심각한 가뭄들이 늘 엘니뇨와 상관있었음을 알 수 있다.

 

p157

 해들리 센터의 기후 모델은 아마존 일대에 엄청난 가뭄이 닥치리라고 예고한다. 하지만 일부 다른 모델들은 변화가 덜할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모델들은 강수량이 증가할 것이라고도 한다. 무엇이 옳은가는 더 없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곳 생테계의 면적은 700만 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생물다양성의 보고로서 전체 생물권의 1차 생산자-식물의 광합성 생산물-중 10분의 1의 양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데스 산맥의 눈 녹은 물과 계절에 따른 계절에 따른 억수 같은 비(지역에 따라 한 해 강수량이 2.5미터가 넘기도 한다)가 흘러내려 이루어진 아마존 강은 바다 전체로 흘러드는 물의 20퍼센트를 품고 있다. 이는 미시시피 강 강수량의 열 배에 달하는 양이다. 이러한 물이 갖는 에너지는 전 지구적 날씨의 순환에 막대한 역할을 담당한다. 과학 저술가 피너 버냐드가 설명하듯이 "수력 엔진으로서 아마존 유역이 하는 기능은 오늘날 기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아마존은 온난화와 상관없이 이미 곤경에 처해 있다. 프랑스 국토 면적과 맞먹는 50만 제곱킬로미터 이상의 숲이 소를 방목하거나 콩을 대량으로 재배하기 위해 벌채되었다. 지난 50년 동안 숲을 잠식하며 터전을 잡은 인구수가 열 배는 늘었으며, 브라질 정부가 원시림을 파고 들며 도로를 낼 때마다 그 주변에서는 생선뼈 모양으로 숲이 잘려나갔다. 땅에 굶주린 50만 명의 농민들이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 브라질의 마지막 거대 야생지에 몰려들면서 화전 농업을 하는 것도 심각한 위협이다. 벌목꾼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횡행하자 그린피스가 아마존 벌목 행위의 80퍼센트가 불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며 항의했다. 그러자 브라질 정부는 사실을 부인하는 대신 두 손 들고 인정해버렸다.

 해들리 센터의 모델에 따르면 모든 파괴가 내일 당장 멈추더라도 지구 기온이 2℃ 상승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으면 아마존 우림지대의 미래는 절망적이라고 한다. 세상이 이 중대한 티핑포인트를 넘어서면 아마존 북동부 지역에서 파멸의 해일이 시작되어 대륙의 남부와 서부로 퍼져나갈 것이라는 게 주장의 핵심이다. 또 일부 지역에서는 2100년이면 강수량이 제로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기온은 사하라 사막 수준인 평균 38℃까지 상승할 수 있다. 생태계 전체가 붕괴되면 아마존 유역에는 대표적 식물이 하나도 남지 않는 사실상의 사막이 될 것이며, 가장 자리에 풀밭과 초지만이 조금 남을 것이라고 한다.

 

p172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문명의 붕괴』에서 마야의 붕괴를 생태적 과잉의 고전적 사례로 든다. 고도로 발달한 사회가 자원적 기반 이상으로 발전을 추구할 경우 가뭄 같은 자연재해에 취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p228

 한국에서는 강수량이 4분의 1 정도 증가하겠지만 육지의 기온도 6℃ 정도 높아지면서 물 증발량도 크게 늘어나 땅이 전보다 더 건조해진다고 한다.

 4℃ 상승의 세계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다름 아닌 뜨거운 날씨이다. 상상도 못할 정도의 열파가 육지를 휩쓸면 인류는 일찍이 경험해본 적 없는 무더위를 맛보게 될 것이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그 무렵 유럽의 기온은 지금의 중동과 비슷해진다. 사하라 사막은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심장부를 관통하여 북상할 것이다. 경작지가 남아 있더라도 폭우 때문에 침식이 가속화되어, 한때 비옥하던 땅이 텍사스 평원 같은 협곡 많은 황무지로 변할 수 있다. 세계의 식량공급 능력이 곤두박질치면서, 인류의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암울할 것이다.

 

p230

 현재 북극의 얼어붙은 토양에는 약 5,000억 톤 정도의 탄소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북극의 땅이 녹기 시작하면 탄소의 상당량이 배출될 수밖에 없다. 호수나 습지의 물이 빠지면서 흙이 말라붙는 곳에서는 흙 속의 세균이 분해를 시작ㅎ라면서 이산화탄소가 대기로 올라오고, 흙이 많이 젖어 있어서 산화성 분해가 어려운 곳에서는 혐기성(嫌氣性) 세균이 침투하여 막대한 양의 메탄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메탄이 기후변화에 단기적으로 끼치는 영향은 이산화탄소보다 강력하다. 다른 곳에서는 탄소가 물속으로 바로 녹아들어가 강, 호수, 북극해에서 이산화탄소의 형태로 배출될 수 있다. 캐나다의 영구동토층이 녹는 속도를 연구한 미국의 생태학자 필 캐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북극 냉장고의 플러그를 뽑아버렸습니다. 이제 안에 들어 있던 것이 전부 썩기 시작할겁니다.

 

p266

 다량의 탄소는 바다 밑바닥에서 썩어가는 플랑크톤 잔해의 형태로 퇴적되는 짙은 유기물 진흙의 층을 이룬다. 이런 탄소의 일부는 지질학적 과정으로 '요리'되고, 암석의 작은 구멍을 통해 압착되어 저장되는데, 이것은 현대의 인류에게 아주 친숙한 물질이다. 바로 석유이다.

 이러한 고대의 탄소순환 작용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 하나 있다. 오래전 지구는 대기의 지나치게 높은 이산화탄소 수치를 낮춰 지구기온을 견딜 만한 정도로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물 중 많은 양이 인류가 지금 에너지를 얻기 위해 석ㄷ탄, 석유, 가스를 태움으로써 대기 중으로 돌려보내려고 애쓰는 바로 그 탄소이다(화석연료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더구나 인류는 홍합이나 굴, 플랑크톤에 비해 탄소의 위치를 옮기는 데 훨씬 더 효율적인 동물이다. 말하자면 백악기의 생명체들이 수천만 년 동안 격리시키느라 애쓴 것보다 100만 배는 빨리 탄소를 배출시킬 수 있는 것이다.

 

p303

 1인당 탄소 배출량이 국가별로 크게 다르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런 감축 비율을 일률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예컨대 인도는 지금 1인당 약 1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으며, 중국은 4톤을, 미국은 12톤을 배출한다. 이들 국가가 전부 똑같이 60퍼센트 감축을 받아들인다면 기본적으로 불평등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인도는 0.4톤을, 중국은 1.6톤을, 미국은 8톤을 배출할 수 있게 되는 식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불평등을 고착시키면 불공정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성공적인 배출협약의 기초를 다지기가 힘들다.

 

 그러면 어떤 협약이 일률적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유일한 논리적 해답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인류공동자산협회(Global Commons Institute)가 제안한 '축소수렴방식(Contraction and Convergence)'이다. 즉 부유한 나라들이 기후협약에 참여하는 가난한 나라들에게 불평등했던 만큼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이다. 축소수렴방식에 따르면, 모든 국가들은 약속한 날까지 1인당 배출 할당량이 일치하도록 수렴해야 하며, 지구 전체의 배출량을 지속 가능한 수준으로 축소한다는 맥락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부유한 나라까지 포함하여 모두가 생존하면서 가난한 나라가 평등을 얻는 이러한 거래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1인당 탄소 배출량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미국에서는 지구 평균에 비해 감축 비율이 훨씬 높아야 하며, 축소수렴방식의 성격에 따라 2030년까지 85퍼센트는 줄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시스템을 유연하고 효율적으로 만들려면, 배출 허용량에 관한 국제시장이 형성되어 가난한 나라들이 사용하지 않은 할당량은 부유한 나라들에게 팔도록 함으로써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탄소 배출권 거래로 인한 수익은 빈곤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가난한 나라들이 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발전 방식을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

 

p307

 

 유타 대학교의 제프리 듀크스는 화석연료 의존도와 관련된 계산으로 처음으로 해본 이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얻어낸 수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휘발유 1미국갤런, 즉 3.78리터가 태곳적 바다에서 만들어지기 위해서 식물성 재료가 90톤 정도 필요하다는 계산을 해냈다(기름을 넣을 때마다 생각해보도록 하자). 지구 전체로 계산해볼 때, 인류 사회는 화석연료의 사용을 통해 매년 그 옛날 태양열 400년 치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인류가 태양 에너지만을 소비할 수 있었다면, 에너지 사용량을 엄청나게 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 문명이 과거에 마련한 단 한 번의 에너지 보조금(수백만 년에 걸쳐 식물의 광합성으로 형성된 화석연료의 형태)에 의존해 살고 있으며, 그 의존도가 얼마나 큰지를 드러내준다. 우리가 지금 1년마다 사용하는 화석 연료의 양은 그것이 만들어진 시간으로 따질 때 100만년에 해당하는 것일 수 있다. 동물들 중에 특이하게도 인류는 석유, 석탄, 가스의 형태로 저장된 화학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매년 한정된 태양 에너지 예산이 부과하는 생태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이 매년 한정되게 내려주는 보조금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석유를 먹고 사는 셈이기 때문이다.

 화석연료는 인류에게 오늘날의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다른 동물들은 먹이와 포식자 등의 관계에 따라 수가 조절되는 생태계의 제약 내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호모사피엔스는 이러한 생태적 구속을 벗어던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들판에서 기르는 것이나, 숲에서 캐내는 것에서 식량자원을 제한받지 않는다. 기계화된 농경과 장거리 수송을 통해 화석연료를 먹을 것으로 전환한다. 천연가스를 써서 질소비료를 만들고, 석유의 힘으로 트랙터나 콤바인을 움직여 사람이 하던 노동의 대부분을 대체한다. 사과술을 마셔가며 근육의 힘으로 일하던 수백 명의 몫을 석유를 먹는 콤바인 단 한 대가 해낸다. 사과술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바이오 연료인 셈이다.

 

p312

 기후변화는 고전적인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개인적 차원에서는 합리적인 행동이지만, 이를 모두가 되풀이하면 사회적인 차원에서 재앙이 되는 것이다. 이 개념을 주창한 개릿 하딘은 목초지를 공유하는 소 치는 사람들의 예를 들어 설명을 한다. 소 치는 사람 각자는 공유지에서 소 한 마리를 추가함으로써 개인적으로 이익을 취하려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식으로 행동한다면, 과잉방목을 초해라여 공유지는 절단난다. 이 과정에서 심리적 부인이 필수적이라고 하딘은 말한다. "개인이 일부로서 몸담고 있는 사회 전체는 피해를 보더라도, 개인은 사실을 부인하는 능력을 통해 개인적으로는 이익을 본다."

 

p314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지금 서구사회의 경제 시스템 전체가 부인이라는, 특히 자원의 유한성에 대한 부인이라는 바탕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학교에서는 지구가 제공해주는 모든 자원이 자유재(free goods)라는 범주에 든다는 듯이, 경제과정의 시초부터 거의 마술처럼 나타나는 것이라는 듯이 가르친다(노벨상 수상자인 교수들도 그렇게 믿는 것 같다). 인류라는 종을 지탱해주는 생태계의 모든 서비스를 포함하는 이 자유재들은 경제적으로는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며, 기존 경제의 계산에서 제외된다. 국민경제 성공의 잣대가 되는 표준적인 국민총생산(GDP)은 그런 과정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려 없이 생산과 소비의 가치를 합산한다. 그래서 기존의 경제학 이론은 창조적 회계라는 절묘한 솜씨를 발휘하여 자원의 고갈을 부의 축적으로 계산한다. 이런 식의 논리는 자기 계좌에 든 돈을 다 써버리면서 그것을 소득으로 계산하는 것과 흡사하다. 어리석은 짓 같지만 그것이 우리 경제 전체를 떠받치는 논리이다.

 이런 사회적 역기능을 염두에 둔다면, 경제와 사회 전체가 행하는 방해를 무릅쓰고 개인이 기후변화에 맞서 뭔가를 하지 않는다고 탓하는 것은 부당하다. 가수 밥 딜런은 1963년 흑인 인권운동가 메드거 에버스를 쏴 죽인 남부 백인이 "그들 게임의 일개 졸(卒)일 뿐"이라고 노래했다. 우리 모두도 그렇다. 각자가 지구온난화라는 게임의 졸이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무력하지는 않다. 완전히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 졸들을 움직이는 집단적인 손은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1997년의 홍콩 조류독감(H5N1)의 발생을 모티브로, 독감 바이러스에 관련된 사람들이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을 추적하는 이야기.

과거의 전염병을 추적하는 것의 어려움을 생생히 느낄 수 있고, 지금의 코로나19 상황이라 더 공감이 되는 부분들이 많다.

------------------------

p55

 분자생물학과 제약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한 오늘날에조차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들, 특히 독감은 대체로 확실한 치료법이 없다. 분자생물학자들이 독감 바이러스의 내부 기작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간단한 독감 바이러스 안에는 8개로 분절된 RNA 유전자뿐이며, 감염시킬 수 잇는 세포 없이 바이러스만 놓아두면 몇 시간 안에 죽어 버린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십여 년 전에 알아냈다. 독감 바이러스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아냈다. 전자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독감 바이러스는 조그만 공 또는 달걀 모양의 입자들이다. 때로는 긴 막대형을 띠기도 한다. 과학자들은 바이러스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알고 있다. 독감 바이러스 입자들은 단백질 지지대가 박힌 매끄러운 지질막에 싸여 있으며 내부에는 RNA 유전자 분절들이 들어 있다. 또한 과학자들은 바이러스가 세포 안으로 침투해 들으가 자기 자신을 복제한 다음, 바이러스 외피에서 튀어나온 수백 개의 예리한 단백질 침을 이용해 세포를 깨고 다시 퍼져 나오는 과정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왜 인간 독감 바이러스가 허파 세포만을 감염시키는지도 알고 있다. 새로운 바이러스 입자들을 만드는 동안 단백질을 분해하는 데에 필요한 효소가 인체 내에서는 오직 허파에만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드이 모르는 것은 페니실린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는 독감 백신을 만드는 방법이다. 유행성 독감과 싸우는 가장 좋은 길을 백신을 접종하는 것이다. 새롭게 등장할 독감 균주를 미리 알아서 제약 회사들이 독감의 등장 시기에 맞추어 백신을 생산해 배포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1918년 독감이 치명적인 독성을 발휘한 이유를 안다면 제약 회사들은 그 독감 또는 그것과 유사한 독감이 다시 나타났을 때 인류를 지키기에 충분한 백신을 대량으로 비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918년 독감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 독감의 마지막 희생자들은 1918년에 사망했고 바이러스도 같이 가져가 버렸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야기는 그것을 끝일 것이다. 독감 바이러스는 허파의 부드러운 조직 속에서 살며 허파는 주인이 사망하면 거의 즉시 부패해 버린다. 아니, 바이러스는 시체의 허파가 부패하기도 전에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1918년 독감에는 평범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리하여 거의 백 년이 지난 후에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1918년 독감으로 사망한 수백만 명 가운데 세 사람에게서 떼어 낸 허파 조직 속에 독감 바이러스가 남아 있는 것이 밝혀졌다. 치명적인 독감 바이러스에 대한 일종의 로제타석처럼 말이다. 이 세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날 당시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그들만이 21세의 세계를 구할 단서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p120

 아무래도 독감 바이러슨 1918년 독감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엄습 사이에 어디론가 갔다가 살인 균주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독감 바이러스가 간 곳은 동물의 몸속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몇몇 사람들은 생각했다.

 쇼프는 또 하나의 의견을 제시했는데 이는 오랫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될 의견이었다. 그는 돼재의 폐흡충이 독감 바이러스의 중간 숙주이며, 바이러스는 그곳에서 휴면하고 있다가 밖으로 나와 유행병을 일으킨다고 했다. 또한 1918년 독감의 치명적인 두 번째 엄습은 첫 번째 엄습을 일으킨 원인 바이러스와 동일하거나 아주 가까운 연관 관계에 있는 바이러스 때문이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본질적으로 쇼프는 그 바이러스가 1918년 가을에 전혀 변하지 않은 채로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에 감염된 사람들이 두 번째로부터 보호받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엄습 사이의 차이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식객, 그러니까 독감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오랜 숙적인 파이퍼균이었다. 쇼프는 1918년 독감의 두 번째 엄습이 닥쳤을 때 사람들이 독감으로 죽은 것은 그들이 바이러스와, 바이러스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파이퍼균 양쪽 모두에 감염되었디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오늘날 이 이론은 거의 폐기되어 과거의 유물로 여겨지고 있다. 파이퍼균은 이제 아이들에게 뇌막염을 일으키는 세균으로 알려져 있고 이 균을 막아낼 항생제도 있다. 그러나 쇼프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지닌 유산을 남겨 놓았다. 우선 그의 연구는 독감 연구를 위한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그는 돼지 독감 바이러스를 찾아 냈으며 돼지 독감과 1918년 인간 독감 사이의 관련성을 밝혔고 1918년 독감 바이러스가 돼지의 몸속에 살아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동시에 쇼프의 연구는, 비록 그의 탓은 아니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엄청난 정책 사고를 낳은 원인이 되었다. 1976년, 돼지 독감에 대한 그의 이론 때문에 미국 정부는 모든 미국인에게 돼지 독감 예방 접종을 실시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과학자들의 충고에 따라 포드 대통령이 내린 결정이었다. 한 젊은 장교가 돼지 독감에 걸려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1918년 독감과 같은 치명적인 독감이 인간에게 퍼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순식간에 일었다.

 결국 돼지 독감 전염병은 나타나지 않았다. 비록 당시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은 돼지 독감 백신이 마비와 피로, 기타 만성 질병에 이르기까지 오만 가지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확신했고 수백수천의 소송이 제기되었다. 중단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돼지 독감 예방 캠페인은 독감 백신 자체에 대한 일반적 불신을 낳았고, 과학자들은 양치기 소년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과학자들은 억울함을 하소연했다. 그 사건은 1918년 독감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위험에 대하여 과학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크로스비는 말했다. 돼지 독감 재앙 이후, 1918년 독감은 바이러스학자들에게는 "피해야 할 뭔가"가 되었다고 크로스비는 덧붙였다.

 

p167

 독감 바이러스는 두 종류의 단백질을 이용해 세포 안으로 들어가고 빠져 나온다. 하나는 헤마글루티닌(hemagglutinin)으로 적혈구의 응집을 일으키는 단백질이다. 헤마글루티닌은 바이러스가 세포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다른 하나는 뉴라미니데이즈(neuraminidase, ? 내 기억으로는 뉴라미니다아제 로 읽을 것 같아서 찾아보니 국내용어에서 dase는 다아제로 읽는다. 번역가는 과학기술원 생물공학을 졸업한 사람이니 용어를 잘못 알았을리는 없을 것 같고, 찾아보니 영어권에서는 데이즈로 읽는다. 원어 발음 그대로 실렸다)로 세포 안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들이 세포를 깨고 나가게 해 준다.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니데이즈는 독감 바이러스의 외피에 돌출해 있어서(요즘 코로라19로 전세계인들이 이 바이러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돌출된 외피의 돌기를 스파이크spike라고 부른다) 바이러스 침입을 박는 신체 면역 체계의 표적이 된다.

 독감 바이러스의 균주를 나누는 기준은 헤마글루티닌(H)과 뉴라미니데이즈(N), 두 가지의 단백질이다. 과학자들은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니데이즈 단백질의 종류에 따라 균주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946년 전 세계에 유행한 균주는 H1N1이었다. 다음번에 바이러스가 유전자 변이를 일으켜 대규모로 유행하게 된 것은 1956년으로, 이때의 균주는 H2N2였다. 1968년에 유행한 독감은 1956년 바이러스에서 헤마글루티닌만 변이를 일으킨 바이러스에 의해 유발되었다. 그래서 이 바이러스는 H3N2라고 명명되었다.

 침입한 바이러스와 면역 체계 사이의 전쟁에서 백혈구 세포는 독감 바이러스의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니데이즈 단백질에 결합하여 항체를 생산하다. 하지만 새로운 종류의 독감 바이러스가 신체에 처음으로 침입한 경우에는 면역 체계가 독감 바이러스를 막을 항체를 충분히 생산할 때까지 며칠이 걸릴 수 있다. 반면에 해당 독감 바이러스가 전에 침입한 적이 있을 때에는 면역 체계가 즉시 항체를 생산하여 바이러스를 무력화시킨다. 독감 바이러스의 헤마글루티닌이나 뉴라미니데이즈에 큰 변이가 생긴 경우에 독감 환자들은 바이러스의 횡보를 고스란히 당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대규모 유행병이 발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체는 독감에 대항하는 또 다른 방어 무기를 갖고 있다. 1957년에 발견된 이 물질을 독감 바이러스를 비롯하여 여타 바이러스를 죽이는 일종의 체내 항생 물질이다. 인터페론이라고 명명된 이 단백질은 백혈구에서 나온다. 백혈구는 바이러스로부터 세포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아서 세포가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다양한 단백질을 생산하도록 촉진시킨다. 그런 단백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RNA 인산화 효소(phosphokinase RNA)인 PKR이다. PKR은 바이러스가 자기 자신을 복제할 때 RNA를 유전자 재료로 사용하는 것을 막는다.

 

p294

 웹스터 박사는 사상 최악의 유행성 독감인 1918년 독감이 조류독감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류독감이 사람을 감염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화되어야 했다. 말하자면 전염성이 강한 조류독감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허파 세포에서 증식할 수 있는 형질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웹스터는 바로 그 핵심적인 단계가 주로 돼지의 몸속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돼지는 새와 인간을 이어 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데 조류 독감 균주와 인간 독감 균주는 둘 다 돼지의 체내에서 증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인간 독감과 조류 독감에 동시에 감염된 불운한 돼지는 일종의 배양기 역할을 한다. 돼지의 몸속에서 두 가지 유형의 독감 바이러스 유전자가 재조합 되어 새로운 혼성 바이러스를 만들면 이 바이러스는 조류 독감의 유전자를 일부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을 감염시킬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새로 등장한 바이러스는 이 전에 존재한 어떤 바이러스보다 위험할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유행병이 등장할 무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 가설에 대한 증거로써 웹스터는 1918년 바이러스가 조류에서 시작해 돼지로 이동하고 그 다음에 인간을 감염시켰기 때문에 1918년 독감이 발생했던 시기를 거쳤던 사람들은 돼지 독감에 대한 항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독감 바이러스로는 유일하게 분리된 바 있는 1957년의 아시아 독감과 1968년의 홍콩 독감의 바이러스가 조류에서 간접적으로 온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있었다.(그 이전의 유행병들은 바이러스학자들이 독감 균주를 분석하는 방법을 모를 때에 일어났고 그 이후로는 아직 대규모 유행병이 발생하지 않았다.)

 케네디 쇼트리지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시아는 독감의 진원지라는 것이다. 독감 바이러스는 특히 오리의 몸속에 많이 산다. 오리는 남아시아에 편재한다. 오리는 위험한 바이러스 균주들의 저장소 역할을 하며 오리 몸속의 독감 바이러스는 중국 농부들이 고안한 영리한 농사법에 의해 인간 독감으로 전환된다. 이 농사법이 독감 균주들로 하여금 오리에서 돼지로, 그리고 사람에게로 이동할 수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17세기 초, 중국 남부 지방의 농부들은 벼농사를 지으면서 논에서 잡초와 해충을 제거하는 동시에 오리에게 먹이를 주는 방법을 발견했다. 벼가 자라는 도안 농부들은 물이 찬 논에 오리를 풀어놓는다. 오리들은 벌레를 잡아먹고 잡초도 뜯어먹는다. 그러나 벼는 건드리지 않는다. 벼가 익기 시작하면 농부들은 오리를 논에서 몰아내 수로나 연목으로 가게 한다. 벼를 수확하면 농부들은 마른 논에 오리들을 다시 풀어놓는다. 그곳에서 오리들은 따에 떨어진 낱알을 주워 먹는다. 이제 오리는 잡아먹힐 준비가 된다.

 문제는 농부들이 오리와 함께 돼지도 기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리를 키우면 부지불식 간에 독감 바이러스가 인간에게로 옮겨 가게 된다."라고 쇼트리지는 말했다.

 쇼트리지는 대규모 유행성 독감이 언제나 아시아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벼농사와 오리 그리고 돼지가 공존하는 남부 아시아에서 말이다. "역사적 기록들은 언제나 이 지역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제 홍콩에서 사망한 어린아이의 표본 분석 기록을 보면서 콕스 박사는 유례 없이 두려운 가능성을 담은 사건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기에 독감 바이러스가 하나 있다. 이 바이러스는 홍콩에서 왔다. 이것은 조류 독감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알려진 다른 조류 독감과는 달리 이 바이러스는 돼지 단계를 훌쩍 건너뛴 것처럼 보였다.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니데이즈 단백질이 돼지 독감이 아니라 조류 독감 특유의 단백질이었기 때문이었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가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그리고 사망했다.

 

 

p390

 바이러스의 헤마글루티닌 유전자가 단서를 제공하리라는 것이 첫 번째 희망이었다. 결국 이 유전자는 독감 바이러스의 표면에 돌출해 있는 두 가지 단백질 중 하나였다. 이것은 바이러스가 숙주의 세포 안으로 들어갈 때 사용하는 단백질로서 인체의 면역 체계가 독감과 싸울 때 사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독감 바이러스의 헤마글루티닌 단백질을 봉쇄하는 것이다.

 헤마글루티닌 단백질은 독감 바이러스가 사람의 허파에서만 증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독감 바이러스가 세포를 감염시킬 때 헤마글루티닌 단백질의 커다란 전구체를 만드는데 이 전구체는 숙주 세포내 효소에 의해 둘로 나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효소는 오직 인간의 허파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독감 바이러스는 허파 세포 속에서만 증식할 수 있다.

 1918년 독감에 대한 첫 번째 가설은 전구체 단백질이 허파 세포 이외의 세포 효소에 의해 쪼개질 수 있도록 헤마글루티닌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났으리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독감은 다른 신체 조직과 기관들에도 침입할 수 있게 되어 치명적인 병독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가 뇌 세포에도 침입하여 기면성 뇌엽을 유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토벤버거와 앤 레이드는 1918년 독감 바이러스의 헤마글루티닌 유전자 염기 서열을 신중하게 짜 맞추면서 너무 큰 희망을 품지 않으려고 애썼다. 만약 첫 번째 가설이 옳은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것은 너무 쉬운 일이 될 터였다.

 어쨌거나 실망스럽게도 헤마글루티닌 단백질의 분할지점은 완벽하게 평번한 것으로 드러났다. 1999년 2월 16일, 그들은 《미국 국립과학 아카데미 논문집》에서 헤마글루티닌 유전자의 염기 서열을 밝히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바이러스가 뇌 세포나 신체의 다른 조직에 전파되었다 해도 그게 헤마글루티닌 유전자의 돌연변이 때문은 아니었다.

 첫 번째 가설이 배제되자 토벤버거는 또 하나의 인기 있는 가설로 이동했다. 뉴라미니데이즈 유전자의 돌연변이 때문에 바이러스가 허파 밖 다른 신체 기관으로 퍼져 나올 수 있었다는 가설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생쥐 실험에서 나왔다. 생쥐는 일반적으로 독감 바이러스에 저항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체계적이고 반복적으로 생쥐의 뇌에 인간 독감 바이러스를 직접 주사하자 바이러스의 뉴라미니데이즈 유전자가 결국에는 돌연변이를 일으켜 치명적인 뇌염을 일으켰다. 결론은, 1918년 독감이 유사한 돌연변이를 일으켜 인간의 뇌에서 증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폰 에코노모의 기면성 뇌염과 1918년 독감의 치명적 병독성을 하나로 묶는 흥미로운 가설이었다.

 이 돌연변이 덕분에 뇌 세포 효소들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독감 바이러스의 헤마글루티닌 단백질을 쪼개고 결국에는 헤마글루티닌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한 것과 동일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하지만 생쥐를 감염시키는 뉴라미니데이즈 돌연변이는 대단히 특이한 경우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독감 바이러스에서는 보고된 바가 없었다. 그러나 1918년 독감에서 그러한 돌연변이가 일어나 치명적인 독감이 되었을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토벤버거와 레이드는 헤마글루티닌 유전자 분석을 마치자마자 뉴라미니데이즈 유전자를 분석해 보았다.

 하지만 토벤버거와 레이드는 뉴라미니데이즈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났다는 증거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는 바이러스가 허파 밖으로 나올 수 있었으리라는 가설을 지지할 만한 어떤 분자생물학적 증거도 갖고 있지 않다. 지금까지 알려진 돌연변이들에 대해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특이한 유형의 돌연변이를 찾고 있다."라고 토벤버거는 말했다.

 

p395

 한편 사람을 죽이는 능력이 너무나 뛰어난 1918년 독감은 독감 바이러스들에게서도 가장 먼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 바이러스에 어떤 돌연변이가 일어나든 덜 치명적인 쪽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고 토벤버거는 말했다. 1918년 독감은 완벽하게 균형 상태에 있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아주 조금만 변화를 주어도 더 평범한 독감 바이러스 쪽으로 추가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이 바이러스의 유례가 없는 치명적인 맹독성과, 살아남은 사람들이 면역성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연결해 볼 때 1918년 독감 바이러스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인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토벤버거는 말했다. 바이러스는 병독성이 덜한 쪽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키거나 소멸했을 것이다.

 

 

 

 현대 물리학을 개척한 20세기 위대한 물리학자인 엔리코 페르미에 대한 이야기.

저자는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인데, 물리학자의 평전을 쓴다는 건 생뚱맞은 데가 있다.

서론에서 바로 밝히지만, 저자의 아버지인 멜빈 슈워츠가 중성미자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증명(1962년)해서, 198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슈워츠 외에 슈워츠의 스승인 잭 스타인버거와 또 다른 한명인 레온 레더만이 같은 공로로 공동 수상한다.

스승인 잭 스타인버거(스타인버거는 페르미의 직계 제자로 그에게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슈워츠에게 박사과정을 페르미에게서 받으라는 권유를 받았는데, 슈워츠는 콜럼비아 대학을 떠나서 시카고로 가는 것을 꺼려서, 콜롬비아에서 스타인버거에게서 박사과정을 받게 된다(그래도 거기서 연구한 중성미자로 노벨상을 받았으니).

 멜빈 슈워츠의 아들인 저자 데이비드 슈워츠는 아버지 멜빈의 사망 이후, 7년이 지나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다른 물리학자들과 나눈 서신을 발견하다. 그 서신의 내용 중에 엔리코 페르미와 관련된 내용이 있었고, 이에 흥미를 가진 저자는 페르미에 대해서 알아보게 된다.

 그것을 계기로 페르미에 대한 내용을 집필하기로 계획했다는 것이다.

 천재는 흥미를 돋구는 주제 중의 하나이며, 특별히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한 유명한 사람과 관련된 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큰 동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동기와 흥미를 가지고 책을 써볼까 생각할 순 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상당한 정성과 애정이 없었다면 이런 내용을 정리하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면 이 책은 후회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

p69

 학생이건 교수건 페르미의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이 희귀한 정신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년쯤 뒤에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자주 일어날 일을 예견하듯이, 교수들은 직접적인 방법으로 풀리지 않는 방정식이 있으면 페르미를 불렀다. 그는 교수가 고심했던 해법을 향해 꾸준히 다가서서 풀어냈다. 앞으로 계속 그와 함께하게 되는 특이한 습관도 생겼다. 생각에 빠지면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물건(분필, 연필, 어떨 때는 주머니칼)이나 들고 무심코 만지작거리게 된 것이다. 그는 주머니칼로 자기의 오른쪽 관자놀이 근처를 실수로 베었고, 이때 생긴 흉터는 나중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p77

 1922년 10월, 두 사람이 페르미의 장래에 대해 의논하기로 한 날에 무솔리니의 지지자들이 로마에서 행진했다. 총리는 국왕에게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도록 탄원했는데, 이것은 입헌군주제였던 이탈리아에서 왕만이 할 수 있는 조치였다. 코르비노와 페르미는 상황을 주시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 라우라 페르미에 따르면, 두 사람은 왕이 포고문에 서명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코르비노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파시즘 신봉자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혐오감을 표현했지만, 왕이 서명하면 긴 피의 내전이 시작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페르미는 왕이 내각의 권고에 거의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왕이 내각을 거스를 것 같습니까?" 페르미는 노회한 코르비노에게 물었다.

 "왕은 각료들이 하자는 대로 하고 결코 나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코르비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왕이 포고문에 서명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면 여전히 희망이 있군요." 젊은 동료가 말했다. 페르미는 분명히 코르비노를 오해했다.

 "희망?" 그는 대답했다. "어떤 희망? 구원이 아니야. 왕이 서명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독재 정권이 들어설 거야." 코르비노가 옳았다. 왕은 이탈리아에 긴 내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서명을 거부했고, 일주일 만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총리가 되었으며, 코르비노가 예측한 대로 21년 동안 이어질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p94

 파울리는 일찍부터 수학과 물리학에 엄청난 재능을 보였고, 주위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뮌헨 대학교에서 위대한 이론가 아르놀트 조머펠트에게 배웠는데, 조머펠트는 파울리가 뮌헨에 왔을 때 이미 더 가르칠 게 거의 없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페르미처럼 파울리도 상대성이론으로 과학에 첫 번째 기여를 했고, 16세의 나이에 이 주제로 논문을 썼다. 파울리는 상대성이론에 대해 그가 쓴 글이 독일의 수학 백과 사전에 실리면서 대학생 시절에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페르미와 마찬가지로 신동이었고, 페르미처럼 키도 작아 165센티미터 정도였다. 그러나 거의 모든 면에서 파울리는 페르미와 정반대였다. 페르미는 몸이 단단하지만, 아담했고, 외모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파울리는 통통했고 비만에 가까웠지만, 매혹적인 눈과 감각적인 입술로 어두운 매력이 있었다. 페르미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파울리는 무척 많이 마셨고, 알코올 중독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다. 페르미는 습관적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파울리는 그 반대였고, 카페나 카바레에서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뮌헨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파울리는 뮌헨 슈바빙 지역의 작가, 음악가 등 예술가들과 어울려 지냈다. 반면에 페르미가 물리학 외에 가장 탐닉한 활동은 등산이었다.

 페르미는 이론과 실험 모두에 재능이 있었다. 이론가로서 파울리가 페르미보다 더 재능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실험가로서 재앙이었다. 물리학자들은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분명히 파울리가 근처에 와 있을 거라고 농담을 했다. 파울리의 독설은 전설적이었고, 페르미에게는 전혀 없는 면모였다. 파울리는 '독설가'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어떤 동료를 보고 "너무 젊은데도 이미 너무 안 유명하다"고 모욕적인 평가를 했다. 그는 한때 페르미를 "양자 엔지니어"라고 조롱했다. 유달리 애매하고 사변적인 이론 논문에 대해 그는 "너무 엉망이라 심지어 틀리지도 못했다"는 유명한 비판을 남겼다. 그는 절친한 친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바보"라고 즐겨 불렀다. 젊은 시절에는 영국의 유명한 천체물리학자 아서 에딩턴에게 이 연로한 학자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추구하는 연구가 물리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대놓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이 뮌헨 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을 때, 파울리는 이 위대한 인물의 강연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아인슈타인 교수가 방금 한 말은 들리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p100

 디랙은 어떤 의미에서 파울리와 정반대였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가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고통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사교성이 심하게 부족했고, 대화할 때 말을 극단적으로 곧이곧대로 이해했다. 한 번은 그가 하이젠베르크에게 사람들이 왜 춤을 추는지 물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멋진 여자가 있으면 즐겁다"고 대답했고, 디랙은 한참 생각하다가 "하지만 어떻게 여자들이 멋있을지 미리 알지?"라고 말했다.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디랙이 칠판에 쓴 방정식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으나 대답하지 않기도 했는데, 그 학생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해명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동료들은 시간당 한 단어를 말하는 것을 '1디랙'이라는 단위로 정의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공격적으로 비종교적이었다. 1927년 솔베이 학술회의에서 벌어진 한 유명한 대화에서 젊은 물리학자들은 철학과 종교에 대해 토론했다. 하이젠베르크의 회상에 따르면, 디랙은 그의 기준으로는 물리학자의 세계에 종교는 설 자리가 없다고 열렬히 주장했다. 대화 내내 침묵했던 파울리는 "우리의 친구 디랙은 종교가 있는데, '신은 없고, 디랙은 그분의 사도다'라는 게 교리일세"라고 말했다. 하이젠베르크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크게 웃었고, 디랙 자신이 가장 크게 웃었다고 한다.

 

 

 

p161

 페르미는 디랙의 방법을 철저히 이해했지만, 이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2년을 보냈다. 위그너가 말했듯이, 그는 디랙의 접근 방식의 수학적 복잡성에 완전히 익숙했지만 이것을 불편하다고 생각해서 더 단순하게 설명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수학적 복합성 때문이 아니었다. 페르미는 뛰어난 수학자였고,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에 견줄 만했다. 오히려, 페르미의 거의 모든 위대한 업적이 그렇듯이, 단순화하려는 노력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교육적인 이유였다. 

 그는 동료들과 학생들 앞에서 이 주제를 천천히 체계적으로 풀어나가면서 청중이 각 단계를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이 연습의 목적은 자료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함을 사랑하는 물리학자의 기질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없다면 자기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디랙에게는 이런 목적이 없었고, 그는 매우 드문 수준의 논문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썼다. 페르미는 디랙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서, 이상한 물리학자의 복잡한 개념과 이국적인 기법을 이해하기 위해 애쓸 생각조차 하지 않을 물리학자들에게 제공해주었다.

 

 

p163

 1920년 후반에 일련의 매우 정밀한 실험의 결과로 베타선 '위기'가 생겼다. 베타붕괴는 물리학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보존 법칙을 어기는 것처럼 보였다. 중심적인 보존 법칙 중의 하나가 에너지 보존 법칙으로, 모든 물리적인 과정에서 들어가는 에너지와 나오는 에너지가 같아야 한다. 그러나 베타선 방출은 이 법칙을 어기는 것 같았다. 에너지가 보존된다면, 방출된 베타입자의 에너지는 매우 좁은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이론적으로 베타선 방출 과정은 모두 똑같으므로 베타입자의 에너지는 모두 같아야 하지만, 실제로 방출된 베타입자의 에너지를 측정해보면 예측보다 상당히 넒은 에너지 대역에 퍼져 있었다. 이것은 에너지가 보존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야구 연습장의 피칭 머신이 항상 똑같은 속력으로 똑같은 방향으로 공을 던지도록 설정되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갑자기 공이 무작위로 다른 속력으로 나온다면, 기계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몇몇 물리학자들은 이 증거에 항복했고, 이 특정한 상황에서는 분명히 에너지가 보존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보어도 이렇게 생각했고, 1931년 로마에서 열린 코르비노의 페르미 주최의 학술회의에서 이러한 모험을 감행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물리학자들에게는 재앙인 대담한 결론을 내렸다. 러더퍼드는 보어의 결론을 완강히 거부했지만, 에너지 보존의 원칙을 어기지 않으면서 베타선을 설명하는 대안을 제시한 것은 상상력이 넘치는 파울리뿐이다.

 파울리는 특유의 대담성으로 전자와 함께 다른 입자가 방출된다고 제안했다. 이 입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고 질량이 너무 작아서(어쩌면 0일 수도 있다) 거의 탐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1930년 12월 독일 튀빙겐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처음으로 이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그는 이 가상 입자를 '중성자neutron'라고 불렀고, 이 입자가 베타붕괴에서 관찰되지 않은 에너지의 균형을 맞추며, 따라서 에너지 보존 법칙은 깨지지 않는다고 제안했다. 당시에는 오늘날 우리가 중성자라고 부르는 입자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2년 뒤에 제임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하며 엄청난 충격을 일으켰고, 이때 페르미와 그의 팀은 파울리의 가설적 입자를 '중성미자neutrino'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파울리의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물리학자들 중 일부는 저명한 물리학자의 말을 빌려, 베타선 방출 문제에 대해 이런 견해를 가졌다. "그냥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신설된 세금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보어의 편을 들어, 보이지도 않고 엄청난 거리를 방해 없이 통과하는 입자라는 아이디어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중성입자가 있다고 하기보다 에너지가 보존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무도 전자와 중성미자가 방출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자와 중성미자가 언제나 핵 속에 있고, 적절한 자극만 주면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어떻게든 핵 안에서 만들어진 다음에 바로 방출될까?

 

 원자핵 속에 중성자가 들어 있다는 채드윅의 발견이 단서가 되었다. 광자의 생성과 소멸을 기술하는 디랙의 양자전자기역학이 두 번째 단서였다. 요르단과 위그너의 2차 양자화가 세 번째 단서가 되었다. 파울리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페르미는 4년 동안 배운 모든 것을 베타선 문제에 적용했다. 1933년 후반과 1934년 초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학술지에 실린 그의 논문 <베타선에 대한 잠정적인 이론 A Tentative Theory of Beta Rays>에서 페르미는 이 주제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밝혔다. 80년이 지난 지금, 이것은 20세기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페르미는 양자 상호작용이 하나 더 있다고 제안했다. 이 상호작용은 입자들이 서로 매우 가까이 있을 때만 일어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약한' 상호작용이라고 부른다. 이 상호작용은 중성자를 양성자로, 양성자를 중성자로 바꾼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에 새로운 입자가 생성되어 높은 에너지로 핵에서 탈출한다. 중성자가 양성자로 바뀌면 전자와 반중성미자가 방출된다.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면 양전하를 띈 전자(양전자)와 중성미자가 방출된다. 방출된 입자의 에너지 총합은 항상 같지만 각각의 입자가 가지는 에너지는 양자장 이론의 직접적인 결과인 양자 규칙에 따라 달라진다. 전자와 중성미자(그리고 대응되는 반물질 입자들)는 그 전에는 핵 안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방출되는 순간에 생성된다. 중성미자 또는 반중성미자가 물질과 상호작용할 가능성을 이 이론으로 계산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은 너무 낮아서 중성미자는 물질과 전혀 상호작용을 하지 않으면서 수백만 킬로미터를 달려갈 수 있다. 

 

 이 논문의 성립과 발표에는 흥미로운 내막이 있다. 페르미는 1933년 후반까지 이 연구를 진행했다. 베타선 방출 문제는 페르미가 참석한 1933년 10월 솔베이 학술회의의 주요 관심사였고, 학술회의 기간 동안 페르미와 파울리는 파울리의 중성미자 아이디어에 대해 깊이 논의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쯤에 페르미는 그룹의 스키 휴가 때 로마의 동료들에게 주요 아이디어를 편하게 설명할 만큼 충분히 발전시켰다. 이 휴가 직후에 페르미는 영국 학술지 <네이처>에 이 논문을 보냈다고 세그레는 말한다. 로마 그룹이 히틀러가 부상하면서 독일의 학술지를 보이콧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그레에 따르면 검토자 한 사람이 이 논문이 너무 "사변적"이라고 보았고, <네이처>가 논문을 거절했다. 이에 페르미는 논문을 이탈리아의 학술지 <누오보 시멘토>와 독일의 <물리학 저널>에 보냈고, 두 학술지가 모두 이 논문을 게재했다. 이 이야기는 논문에 얽힌 이야기들 중에서도 워낙 중요해서 위키피디아에는 나중에 <네이처>가 이 논문을 거절한 것은 가장 터무니없는 편집자의 실수 중 하나라고 공개적으로 후회했다고 쓰여 있기도 하다.

 

 사실, 논문 거절을 후회한다는 공식적인 언급은 네이처 후속 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불행하게도 검토자가 쓴 거절 편지를 네이처 기록 보관소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십 년 전에 새로운 사무실로 이사하면서 모든 기록이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 전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네이처>는 당시에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는 짧은 노트만 게재를 허용했고, 새로운 양자장 이론에 대한 상세한 발표를 위한 지면이 아니었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논리적으로 봤을 때 페르미가 투고했을 법한 더 그럴듯한 영국의 학술지는 <런던 왕립학회 회보>다 양자전기역학에 대해 디랙이 쓴 초기의 중요한 논문들이 모두 여기에 실렸으므로, 페르미가 베타붕괴 논문을 제출했다면 이 학술지에 체줄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 역사가들은 페르미가 독일의 연구자들, 특히 보른,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누구보다 파울리가 자신의 논문을 먼저 읽기를 원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가 독일 학술지에는 아무것도 싣지 말아야 한다는 젊은 동료들을 의식해서 선의의 거짓말(제출했지만 <네이처>가 거절했다)로 상황을 모면하면서 자기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이다.

 

 논문의 실제 출판 내막이 무엇이든, 물리학 공동체의 즉각적인 반응은 신통치 않았따. 파울리와 위그너는 이 논물을 높이 평가했다. 페르미는 디랙의 양자장 체계 전체를 자기의 사고에 통합했고, 이것을 베타선 방출 문제에 독창적으로 적용했다. 문제는 이 이론을 실험으로 검증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중성미자는 탐지하기가 불가능해 보였고, 페르미조차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 의심했다. 그는 양자전기역학을 완전히 익혔고, 겉보기에 완전히 다른 현상을 이 이론에 사용된 수학을 설명하면서 개인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 논문의 진가는 몇십 년 뒤에야 제대로 알려지게 된다. 이것은 자연의 근본적인 힘이 한 가지 더 있다는 최초의 암시였다. 약력 또는 약한 상호작용이라고 보르는 이 힘은 중력, 전자기력, 강력과 함께 자연의 네 번째 근본적인 힘으로 알려지게 된다. 10개가 넘는 노벨상과 물리학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 몇 가지가 여기에서 나왔다.

 1970년대에, 나중에 페르미가 시카고 대학교에서 가르친 제자 첸닝양(Chen Ning Yang)이 페르미의 동료이자 친구인 유진 위그너에게 물리학자들이 페르미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 무엇이라고 기억할지 물어보았다. 위그너는 베타선 방출 논문이 페르미의 가장 중요한 연구라고 말했다. 양은 동의하지 않았고, 페르미온의 생성/소멸 연산자와 함께 2차 양자화를 발명한 사람은 바로 요르단과 위그너 본인이라고 지적했다. 위그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그렇지.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물리학에서 실제로 쓰일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네." 베타붕괴 논문이 페르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는 위그너의 평가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p183

 여름방학을 앞두고 페르미와 팀은 주기율표의 원소들을 계속 조사했고, 마침내 가장 무거운 원소인 토륨과 우라늄에 이르렀다. 가장 무거운 원소에 중성자를 포격하면 더 무거운 원소, 이른바 초우라늄 원소가 생성될 거ㅓㅅ이라는 생각이 물리학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미는 팀이 철저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고스티노는 더 가벼운 부산물을 찾아내는 과정을 진행했다. 주기율표의 밑으로 내려가면서 납까지 찾기로 했고, 납보다 더 가벼운 원소는 생성될 수 없다고 가정했다. 그는 아무 원소도 찾지 못했고,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다. 팀이 잠정적으로 도달한 결론은(다고스티노가 부산물을 깨끗하게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저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실제로 새로운 무거운 원소가 생성ㅇ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화학자 이다 노다크 Ida Noddack 만이 초우라늄 가설은 틀렸다고 주정했고, 페르미가 실제로 한 일은 우라늄 핵을 훨씬 더 작은 조각으로 쪼개서 납보다 가벼운 원소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녀의 제안은 무시되었는데, 주로 그녀를 비롯해서 어느 누구도 그러한 사건을 설명하는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정적인 결론은 확고한 결론으로 뒤바뀌었다. 여름휴가가 시작될 때쯤, 코르비노가 린체이 아카데미 강연에서 섣부르게 페르미와 그의 팀이 초우라늄 원소를 발견했다고 열정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 연설은 이탈리아와 전 세계 신문의 머리기사로 보도되었다. 코르비노는 연설을 하기 전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고, 불확실한 결론이 최종 결론으로 발표되자 페르미는 충격을 받았다. 신중한 페르미는 결과를 절대적으로 확신할 때만 발표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고, 결과가 틀린 것으로 판명되면 자기의 명성을 망칠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잠 못 이루는 하룻밤을 보냈다. 스승이자 이탈리아에서 핵심적인 후원자였던 코르비노와 다른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는 어려웠다. 다음 날 아침에 그는 코르비노에게 직접 자기의 걱정을 말했다.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코르비노는 그 발표의 중요성을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나 짜릿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잊힐 수 없었다. 페르미가 그 발견을 믿고 싶어했는지 스승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스스로 완벽하게 부인한 적은 없었다. 5년 뒤에 노벨상 위원회는 느린중성자와 초우라늄 원소의 발견을 언급하면서 페르미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주었다. 바로 그 순간에 베를린에서 리제 마이트너, 오토 한, 프리츠 슈트라스만으로 구성된 훌륭한 팀이 페르미 팀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밝혀냈다. 페르미는 초우라늄 원소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우라늄 원소를 쪼갠 것이었다.

 

p185

 

 아주 드물게, 자연은 우리에게 커튼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짝 엿보게 해준다. 1934년 10월 18일에, 아말디와 폰테코르보가 그런 기회를 허락받았다.

 둘은 먼저 은을 중성자로 포격해보았다. 은의 알려진 반감기는 2.3분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서 다른 정량적인 측정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제에 봉착했다. 은 과녁에 대한 중성자 방출원의 효과가 방출원에서 과녁까지의 거리뿐만 아니라 과녁ㅇ에 방출원을 놓은 탁자에도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대리석 탁자에서 실험을 했을 때는 나무 탁자를 쓸 때보다 방사능이 상당히 약했다. 이것은 전혀 부풀리지 않더라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왜 방사능의 세기가 방출원과 과녁을 놓은 탁자에 영향을 받을까? 아말디와 폰테코르보는 다음 날까지 측정을 계속했다. 토요일인 1934년 10월 20일까지도 이 이상한 현상은 사라지기를 거부했고, 그들은 페르미에게 이 수수께끼를 가져갔다.

 

 

 

.....

 

 

결과는 놀라웠다. 은의 방사능 세기를 파라핀이 없을 때보다 훨씬 강했고, 이제까지 연구팀이 측정한 어떤 경우보다도 더 강했다.

 파라핀의 효과를 확인한 뒤에, 페르미는 팀이 점심 식사를 하러 가야한다고 했다(중대한 실험 중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처음이었고, 마지막은 아니었다). 그는 늘 습관에 충실했지만, 이번 휴식은 오전에 목격한 이상한 효과에 대해 곰곰히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오후 3시, 팀이 원기를 회복해서 멈췄던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준비를 마치고 실험실로 돌아왔을 때, 페르미는 이 현상을 이해하고 그의 통찰을 나눌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페르미의 첫 번째 관찰은 파라핀에 탄화수소가 매우 많이 들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파라핀의 많은 부분이 수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두 번째 관찰은 수소 핵이 중성자와 질량이 거의 똑같고, 다른 무거운 핵들은 질량이 두 배, 세배, 다섯 배 또는 심지어 수백 배가 된다는 것이었다. 중성자가 수소 원자에 부딪히면 속력이 크게 줄어든다.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당구공을 생각하자. 당구공을 쳐서 다른 당구공을 때리면, 두 공 사이에 운동에너지가 나눠지고, 원래의 공은 과녁 공에 운동에너지를 나눠주어 속력이 느려지며, 과녁 공은 충돌의 영향을 상당히 이동한다. 이번에 탁구공으로 볼링공을 때린다고 하자. 볼링공은 거의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고, 탁구공의 에너지는 볼링공에 거의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탁구공이 볼링공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이다. 탁구공은 볼링공에 충돌하고도 거의 느려지지 않고, 충돌하기 전과 거의 같은 속력으로 튕겨 나온다.

 이와 비슷하게, 수소 함량이 많은 물질은 무거운 원소의  함량이 많은 물질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중성자를 느리게 한다. 그다음 질문은 이렇다. 왜 중성자를 느리게 하면 과녁 원소의 방사능이 커지는가? 이것이 점심시간 동안에 페르미가 깨달은 수수께끼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고속일 때 중성자는 핵 속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느린 중성자는 핵 속으로 들어가기도 쉽고, 내부에서 충돌하다가 거깅에서 멈출 확률도 높아서, 핵의 불안정성을 높여서 방사능을 일으킨다. 이것은 사실 에너지가 높은 중성자가 과녁의 방사능을 더 높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 정반대였다.

 

 페르미의 아이디어는 파라핀 실험의 결과를 설명했다. 나무 탁자에는 대리석 탁자보다 수소 원자가 많으므로 아말디와 폰테코르보가 본 비정상적인 결과를 낳는다. 또한 파라핀처럼 수소가 많은 물질이 방출원과 과녁 사이에 놓이면, 훨씬 더 많은 중성자가 느려진다. 

 이 관찰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실온에서 수소가 더 많이 들어 있는 물질로 실험을 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구내에 물이 있었다. 로마 대학교 물리학과 건물 뒤뜰에는 금붕어 연못이 있었다. 출처가 의심스러운 이야기에 따르면, 그룹은 건물 밖으로 나가서 페르미가 연못의 물을 중성자를 감속시키는 매체로 사용해서 실험을 반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물의 효과는 파라핀보다 더 강했다. 역사는 금붕어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p190

 느린 중성자의 효과를 발견한 다음에, 그룹은 즉시 1934년 3월부터 했던 실험을 반복하면서 각각의 원소에 느린중성자를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쬐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았다. 1934년 말에 페르미는 그 효과를 이해했다고 확신했다. 1935년 2월에 그는 느린중성자 연구를 요약한 비교적 긴 논문을 왕립학회에 제출했다. 그는 또한 중성자와 핵의 충돌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종이에 계산하는 방식으로 원시적인 형태의 모의실험을 했는데, 나중에 로스앨러모스에서 1세대 컴퓨터를 사용해서 이 작업을 계속하게 된다. 이것은 중성자가 특정한 과녁을 때릴 때 물질을 뚫고 들어가는 각 단계에 대해서 확률에 따라 중성자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그는 종이와 연필을 사용해서 모의실험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주어진 확률에 따른 결과의 분포를 분석할 수 있었다. 카지노에서 하는 도박처럼 우연이 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나중에 '몬테카를로' 방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것은 페르미가 기여한 지속적으로 매우 널리 사용된 유용한 분석 방법 중 하나다. 묘하게도 페르미는 이 새로운 분석 방법이 중요한 발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전자 컴퓨터가 크게 발전해서 몬테카를로 모의실험이 훨씬 쉬워질 것을 페르미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단지 여러 해가 지난 뒤인 전쟁 중에 세그레에게 자기가 그런 계산을 해봤다고 말했을 뿐이다.

 1934년은 로마 학파 최괴의 해라고 할 수 있다. 페르미와 그의 팀은 7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에 부족한 재정 지원과 원시적인 장비만으로 방사능과 원자핵을 탐구했다. 그들의 장비는 분명히 버클리의 로런스 팀이 사용할 수 있는 정도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포격하는 중성자를 감속시키면 방사능이 더 많이 유도된다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그들은 물리학계의 다른 연구팀들이 실험을 재현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상세한 데이터를 만들었다. 페르미는 실험 프로그램을 강력히 밀어붙여서 베를린, 파리, 버클리, 케임브리지를 비롯해서 모든 경쟁자에 앞서서 지속적인 중요성을 지닌 결과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5년쯤 뒤에 일어날 역사적인 드라마의 무대를 만들었고, 그는 이 드라마의 주역이 된다. 크게 보아 세계를 위해서는 다행스럽게도, 페르미나 그의 팀은 당시에는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성취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p198

 이제 로마의 물리학 연구는 더 이상 순수한 재미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물리학에서 순수한 재미를 찾았던 페르미였지만, 그때부터 적어도 10년 동안은 물리학이 순수한 즐거움일 수 없었다. 페르미 자신의 노력으로 제2차세계대전을 끝낸 뒤에도, 물리학은 다시는 초기의 순수한 즐거움이 되지 못했다.

 

p309

 아르곤 팀에 새로 들어온 사람 중에는 페르미의 비범한 능력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직접보지는 못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눈앞에서 페르미의 능력을 보고 당연히 감명을 받았다. 루이스 앨버레즈는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1930년대 초에 시카고 대학교에서 콤프턴의 제자로서 앨버레즈가 했던 연구는 페르미가 도착할 때쯤에는 시카고 대학교의 전설이 되어 있었다. 그는 학위를 받은 뒤에 시카고를 떠나 버클리의 로런스 팀에 들어가서 사이클로트론으로 중요한 실험을 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앨버레즈는 영국과 MIT에서 레이더 개발에 참여했고, 1943년 여름에 아르곤으로 와서는 CP-2에 기어오르면서 리비와 함께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인 새로운 계측 장치 설계와 제작 일을 했다.

 앨버레즈는 결코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페르미를 처음 만난 경험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특히 가치가 있다. 그는 아르곤 연구소의 카페테리아에서 페르미, 마셜 부부, 허버터 앤더슨과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중성자가 엑스선과 비슷한 굴절 법칙을 따를 수도 있다는 점을 토론했다. 페르미가 엑스선 굴절의 정확한 공식을 기억할 수 없다고 마하자, 앨버레즈는 콤프턴과 앨리슨이 쓴 엑스선 회절에 관한 고전적인 교과서에 나와 있다고 말했다. 앨버레즈는 옆방에 그 책이 있는 것을 봤다면서 자기가 가져오겠다고 했지만, 페르미는 그런 수고를 할 필요 없다고 자기가 공식을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앨버레즈는 페르미가 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콤프턴 밑에서 배우면서 나는 엑스선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기본 원리에서 출발해서 굴절률 공식을 유도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엔리코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고전 전자기장 방정식을 칠판에 쓴 다음에 여섯 단계에 걸쳐 공식을 유도했다. 이 묘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엔리코가 책을 보면서 그래도 베껴 쓰듯이 일정한 속도로 한 줄 한 줄 써내려갔다는 것이다. 그날 밤에 나는 집에서 공식을 똑같이 유도해보았는데, 그 일은 꽤 재미있었다. 어떤 단계는 아주 쉬워서 내가 엔리코보다 더 빨리 유도할 수 있을 정도였고, 어떤 단계는 너무 어려워서 나 혼자서는 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엔리코는 쉬운 단계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속도로 어려운 단계를 해냈다.

 

 두 사람은 나중에 좋은 친구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버클리로 돌아간 앨버레즈는 가끔 페르미에게 최근 졸업생을 버클리 대학교에 박사후연구원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페르미는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페르미를 처음 보는 미국의 젊은 물리학자들은 까다로운 문제를 척척 해결해내는 그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앨버레즈 세대의(페르미보다 약 10년쯤 젊은) 뛰어난 물리학자들은 하이젠베르크와 디랙 같은 페르미의 유럽 동료들과 가까이 있으면서 연구해본 적이 없었다. 이들과 가장 비슷한 살마으로, 1920년대 후반에 유럽 스타일의 이론물리학을 미국으로 가져온 버클리 대학교의 오펜하이머가 있었다. 양자론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 연구하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페르미를 직접 겪어본 미국의 젊은 물리학자들이 점점 많아졌고, 그들은 앨버레즈의 경외감을 공유했다.

 이러한 경외감은 젊은 세대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1954년에 열린 페르미의 추도식에서 새뮤얼 앨리슨은 핸퍼드행 기차에서 콤프턴이 페르미와 나눈 잡담을 회고했다. 그는 페르미에게 자기가 안데스산맥에서 우주선 연구를 할 때 시계가 잘 맞지 않았다고 말했고, "여기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고 결국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다"고 하면서 페르미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페르미는 곧바로 호주머니에서 연필, 종이, 계산자를 꺼내 들었고, 몇 분 뒤에 그 현상에 대한 설명과 함께 시계의 오차까지 추정했다. 콤프턴의 오랜 조력자였던 앨리슨은 콤프턴이 감탄하는 모습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었다.

 

p336

 파인먼은 페르미의 명성 따위에는 아무런 감명을 받지 못했지만, 계산 결과를 해석하는 능력 때문에 이 이탈리아 이민자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여러 해 뒤에 그는 페르미를 처음 만났던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는 그와 회의를 했는데, 그때 나는 어떤 계산을 해서 결과를 얻은 상태였다. 계산이 너무 정교해서 매우 어려웠다. 이런 일에 능숙했던 나는 언제나 계산에서 어떤 값이 나와야 하는지 알 수 있었고, 계산에서 왜 그런 값이 나오는지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너무 복잡해서 왜 그런 값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페르미에게 이런 문제를 풀고 있다고 말했고, 결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잠깐, 자네가 결과를 말해주기 전에, 내가 먼저 생각해보겠네. 이건 이런 식으로 될 것 같고(그가 옳았다),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건 이렇게 될 거야. 그래서 이것이 완벽하게 분명한 설명이지."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그는 나보다 열 배나 더 잘했다. 이 일은 나에게 큰 교훈이었다.

 

p338

 페르미는 노이만의 수학 실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몇 년 뒤에, 전쟁이 끝나고 로스앨러모스에서 여름 연구를 마치고 돌아온 페르미는 시카고 대학교 교수 클럽에서 점심 식사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노이만이 특히 까다로운 수학 문제를 거장의 솜씨로 풀어낸 이야기를 했다. 페르미의 젊은 동료 물리학자 코트니 라이트에 따르면, 페르미는 그가 이 문제를 풀 때 자신이 했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쟁기에 앉은 파리가 '우리가 밭을 갈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

 

p342

 추는 젊은 아내와 함께 주최한 파티에 페르미가 참석했던 일을 회상했다. 추는 둥글게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로 가위를 넘겨주는 파티 게임을 제안했다. 가위를 받은 사람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으면 가위를 접은 채로 건네주고, 다리를 꼬지 않았으면 가위를 벌린 채로 넘겨준다. 몇몇 사람들은 그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나머지는 게임을 지켜보면서 추측으로 알아내야 했다. 가위가 여러 번 돌아갔지만 페르미는 규칙을 알아내지 못해서 안달했다. 규칙을 일찍 알아낸 라우라가 좌절감에 빠진 남편에게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페르미는 결국 너무 화가 나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아내와 함께 일찍 자리를 떠났다. 추는 당황했지만, 페르미는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 추는 시카고 대학교로 갔고, 페르미의 대학원생이 되었다.

 더 큰 파티에서는 스퀘어 댄스를 출 때도 있었는데, 페르미 가족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최초의 핵분열 무기의 퓨즈 장치를 개발한 물리학자 로버트 브로드의 부인 버니스는 이 기간 동안 자주 만났던 스퀘어 댄스 그룹을 이끈 사람 중 하나다. 나중에 그녀는 페르미 가족이 초보자를 가르치는 자리에 온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처음에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했는데, 복잡한 춤 동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조금 지나서 라우가와 넬라가 댄스에 동참했지만 엔리코는 여전히 움직임을 연구하면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온화하고 합리적인 목소리로 자기가 스퀘어 댄스에 합류할 준비가 되면 말해주겠다고 했는데, 춤을 자세히 보면서 동작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그가 내게 와서, 내가 직접 파트너가 되어준다면 끼어들어보겠다고 말했다. 스퀘어 댄스를 이끄는 커플이 되겠다는 것이었는데, 처음 춤을 추는 사람으로서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고, 그대로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는 정확한 박자로 나를 인도했고, 어떤 동작을 해야 언제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그때나 그 이후나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춤을 즐겼다고 말하지 않겠다. 가장 잘하는 사람들도 늘 실수를 하는데 그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집중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긴장을 풀고 즐기라는 충고도 했다. 그는 관대하게 웃었지만, 나는 그가 발이 아니라 머리로 춤을 춘다는 것을 알았다.

 

 그도 결국에는 스퀘어 댄스를 즐기는 법을 익혔고, 아주 잘 익혀서 전쟁이 끝난뒤에 시카고 시절에 페르미 가족이 연 많은 파티에서 스퀘어 댄스는 붙박이 행사가 되었다.

 

p345

 이제 페르미는 임계점에 도달한 정확한 순간에 빠른중성자를 내보내는 역할을 하는 '초기 중성자 공급 장치'를 설계하려고 했지만, 이런 시도는 폭탄의 물리학을 담당한 그룹의 책임자 로버트 바커를 난처하게 했다. 바커는 존경받는 실험가였고, 전쟁 뒤에도 길고 성공적인 경력을 쌓게 된다. 페르미와 바커는 서로 크게 존경했지만, 바커는 페르미가 조금 골칫거리가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페르미는 초기 중성자 공급 장치의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냈지만, 바커가 보기에는 모두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페르미가 이 장치 때문에 바커의 속을 썩이기는 했지만 나중에도 둘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각에 페르미는 자기가 그 아버지라고 불리게 될 이 엄청난 물건이 점점 더 거대한 무기가 되어가는 것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했던 듯 하다. 그는 그 점을 끔찍하게 걱정한 것 같다. (...) 그는 초기 중성자 공급 장치뿐만 아니라 전체 프로젝트에 대해 걱정한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들여다볼 수 있는 일이 초기 중성자 공급 장치를 개발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집중했고, 그 일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또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생각해내고 동작하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그는 온갖 것을 다 검토했고, 하루 뒤나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나 또는 베테를 붙들고 그 중성자 공급 방법이 왜 동작하지 않는지에 대해 새로운 이유를 대곤 했다.

 

 

 바커의 추측대로 페르미는 프로젝트의 엄청난 함의를 마침내 이해하고 문제 해결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방법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실제로 페르미가 완전한 연쇄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수의 중성자를 장치가 파괴되기 전에 방출시키는 일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쩔쩔맸을 수도 있다. 어쨌든, 바커와 오펜하이머는 1943년 말에서 1944년 초에 메사의 거주자로 도착한 닐스 보어와 그의 아들 오게 Auge Bohr 에게 이 일을 할당했다. 바커는 보어 부자의 설계를 페르미가 받아들일 것이라고 보았고, 그가 옳았다. 덴마크의 부자는 며칠 동안 고심한 끝에 우아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페르미가 로마에서 사용했던 중성자 방출원을 공 모양으로 만든 이 장치는 "성게"라고 불렸고, 플루토늄 공 안쪽에 설치된 이 장치가 내폭의 엄청난 압력을 받으면 파괴되기 전에 중성자 10~100개를 방출한다. 이 정도의 중성자만으로도 플루토늄 구 전체에서 완전한 폭발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 우아한 해결책을 본 페르미는 그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p347

 독일과의 전쟁은 1945년 4월 말에 끝났다. 5월 2일에 독일 의사당 건물에 소련 국기가 내걸렸다. 연합군의 가장 중요한 유럽의 적을 실질적으로 물리쳤고, 이와 함께 하이젠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이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사라졌다.

 제러미 번스타인이 결론적으로 보여주듯이, 독일은 핵무기를 만드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중수를 감속재로 사용한다는 최초의 결정으로 그들의 프로젝트는 시작하자마자 끝장이 날 운명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중에 프로젝트를 지연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듯이 말했지만, 오늘날 역사가들 사이의 합의는 이 설명이 얼마간 자기 변명이라고 본다. 덧붙여 독일인들이 흑연을 감속재로 사용하기로 했을 때, 그들이 사용한 흑연은 불순물이 너무 많아서 감속재로서의 성능이 크게 떨어졌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그들은 우라늄의 임계질량을 매우 크게 잡았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유지되는 연쇄 반응조차 성취하지 못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맨해튼 프로젝트의 본질이 크게 바뀌었다. 페르미를 포함해서 프로젝트에 참여한 많은 과학자가 보기에 이 프로젝트를 계속해야 할 정당성이 사라졌다. 최초의 핵무기를 만드는 경쟁에서 독일이 탈락했다. 미래를 내다볼 때, 일본이 원자폭탄을 가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속 연구소의 과학자들, 그중에서 특히 제임스 프랑크와 레오 실라르드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진행을 늦추거나 완전히 중단해야 한다고 보았고, 폭탄을 개발했다고 해도 일본에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은 시카고의 과학자들의 동요가 커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일부는 이러한 불안감에 동조했다.

 그러나 정치인들과 군부의 생각은 달랐다. 그로브스는 핵무기의 완성을 독려하려고 했고, 이 길이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는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며, 핵무기의 효율성을 평가해보고 싶어했다. 새로운 대통령 해리 트루먼 주변에 있는, 프로젝트를 잘 아는 소수의 인사들(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 이었다)도 그로브스와 생각이 같았다. 취임하고 나서야 이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된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헨리 스팀슨 장과은 5월 말에 네 핵심 과학자, 아서 콤프턴, 페르미, 로런스, 오펜하이머를 워싱턴으로 불렀다. 그들은 핵무기 프로젝트 전체의 미래에 대해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조어을 담당하는 '임시 위원회'에 조언을 하게 되었다. 스팀슨이 위원장을 맡은 이 임시 위원회는 정부의 최고위급 민간 관료와 군부 지도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스팀슨의 펜타곤 사무실에서 열린 이 회의는 아침 10시쯤 시작해서 점심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되었고, 오후 늦게 끝났다. 콤프턴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이 모임에 대해 회상했다. 회의에서는 프로젝트의 현재 상황, 핵무기의 효과에 대한 추정, 핵무기를 사용할 것인지, 사용한다면 언제 할 것인지, 소련에는 어떻게 알릴 것인지, 전쟁이 끝난 뒤의 비밀 유지 방법,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게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점심 식사 중에 콤프턴과 로런스가 일본의 정치와 군사 지도부를 초청해서 폭발 시범을 보이는 방안을 지지했다. 폭발 시험의 경험이 너무 극적이어서 일본인들이 재빨리 평화를 위한 조치에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있었다. 오펜하이머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폭탄을 일본에 떨어뜨리기를 원했다. 그는 저항하는 일본이 항복할 만큼 시범이 극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핵무기가 재래식 폭격보다 특히 더 비인간적이라고 보지도 않았다. 이미 도쿄를 포함한 일본의 대도시들이 폭격으로 초토화되었고, 약 20만 명이 죽었다.

 오펜하이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회의에 참석한 정치 지도자들은 전쟁을 빨리 끝내거나 후속 침공을 쉽게 하거나 어떤 목적으로든 일본에 핵무기를 쓰는 쪽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그들의 의견상, 가장 빠른 방법은 군수품을 생산하는 일본의 주요 도시에 극적으로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즉각적인 미래에 폭탄을 하나 또는 둘 정도만 만들 ㅅ 있는데, 폭탄 하나를 단순한 시범용으로 소모하는 것에 명확히 반대했다. 시범용으로 하나를 쓴다면 남은 무기가 단 하나뿐인데 일본 사람들이 시범을 보고도 기대했던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시범에서 폭탄이 불발이라도 되면 문제가 더 악화되리라.

 

 

 

 

 

......

 

 물론 가장 큰 아이러니는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그룹의 권고안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크의 보고서와 실라르드의 청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측근들은 정치적, 군사적 고려를 바탕으로 일본의 도시들에 무기를 사용하기로 이미 결정했다. 유일한 문제는 폭탄을 투하할 도시를 선정하는 일이었다. 젊을 때 일본을 여행한 스팀슨은 장엄한 문화 수도인 교토를 잠재적 타격 목표에서 제외했지만, 다른 모든 도시를 똑같이 대했다.

 

 과학자들은 1945년 7월과 8월에 이루어진 결정에 그들이 한 역할을 두고 오랫동안 애를 태웠다. 더 강하게 나갔어야 했을까? 더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했을까? 그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워싱턴의 의사 결정권자들은 이러나 저러나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p360

 앨리슨도 나중에 그날(첫 핵실험의 날, 1945년 7월16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해 회상했다. 가는 길에 타이어가 터져서 앨리슨은 페르미를 남겨두고 다른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가까운 정비소로 향했다. 그러나 앨리슨이 수리 장비를 구하기도 전에 페르미가 차를 몰고 쫓아왔다. 마침 지나가는 물리학자가 아르곤 가스통을 갖고 있어서, 바퀴에 아르곤 가스를 채웠다고 페르미가 말해주었다. 안전하지만 아주 비싼 기체를 자동차 바퀴에 넣는 일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p361

 1945년 7월 24일에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새로운 무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트루먼은 미국 쪽 통역관이나 이 일을 증언해줄 배석자도 없이 혼자 스탈린에게 말했다. 트루먼에 따르면 스탈린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 소련 독재자는 대통령에게 축하를 전하면서 일본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을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스탈린은 트리니티(핵무기의 암호명)가 성공했다는 사실을 미리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파이얼스의 동료 클라우스 푹스가 소련에게 원자폭탄 개발에 관한 소식을 넘겨주고 있었고, 새로운 무기의 재료가 우라늄이 아니라 플루토늄이라는 정보도 그를 통해 소련으로 넘어갔다. 이 정보로 소련은 원자폭탄 개발을 몇 년 앞당길 수 있었다.

 

p405

 파인먼, 슈빙거, (신이치) 토모나가의 연구를 조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젊은 이론가 프리먼 다이슨에게도 페르미의 파이온-양성자 산란 연구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다이슨은 코넬 대학교의 조교수였고, 작은 그룹의 대학원생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파이온-양성자 상호작용의 이론적 계산을 양자전기역학의 분석에 성공적으로 사용했던 기법으로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파이온-양성자 상호작용에 관련된 힘은 양자전기역학의 힘보다 훨씬 강하지만, 다이슨과 그의 학생들은 이 점을 중시하지 않고 계산해서 페르미가 시카고 사이클로트론으로 얻은 것과 꽤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그들은 몇 년에 걸친 연구로 이런 결과를 얻었고, 이것을 완성한 1953년 봄에 다이슨은 코넬에서 시카고까지 버스를 타고 페르미에게 결과를 보여주러 갔다.

 다이슨은 페르미에게 열정적으로 자기 연구를 보여주려고 했다. 한동안 사담을 나누다가, 페르미가 다이슨의 결과를 보자고 했다. 다이슨은 50여 년이 지난 2004년에 페르미의 판단에 대해 회고했다. 페르미는 이렇게 말했다. "이론물리학 계산을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네.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계산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 대한 명료한 물리학적 그림(모델)이 있어야 해. 또 다른 방법은, 상세하고 자기충족적인 수학적 형식론이 있어야 하지. 자네의 연구에는 둘 다 없군."

 

 다이슨은 깜짝 놀라서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했다. 페르미는 다이슨이 사용한 수학적 기법이 풀려고 하는 문제에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가 자신의 결과가 페르미의 1951~1952년 실험에서 측정한 값에 매우 가깝다고 반박하자, 페르미는 다이슨의 계산에는 임의적인 매개 변수가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페르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친구 노이만은 매개 변수가 넷이면 코끼리도 키워 맞출 수 있고, 다섯이면 코끼리가 코를 흔들게 할 수도 있다고 했지." 이 말을 듣고 다이슨은 코넬로 돌아가서 몇 년에 걸친 연구 결과가 페르미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슬픈 소식을 학생들에게 전했다.

 다이슨은 이 일을 회상하면서 쓰라려하기보다는 막다른 골목인 줄 모르고 계속 달려가는 시간 낭비를 막아준 페르미에게 감사해했다.

 

 "50년이 지나서 되돌아보면, 우리는 분명히 페르미가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한 힘을 설명하는 결정적인 발견은 쿼크였다. 중간자와 양성자는 쿼크를 담는 작은 자루이다. 머레이 겔만이 쿼크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강한 힘에 대한 어떤 이론도 적합하지 못했다. 페르미는 쿼크에 대해 전혀 몰랐고, 쿼크가 발견되기 전에 죽었다. 그러나 그는 1950년대의 중간자 이론에 뭔가 핵심적인 것이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리고 이론과 실험의 불일치가 아니라 페르미의 직관이, 나와 학생들이 막다른 골목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p453

 노벨상 수상자가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에게 준 영향을 연구한 사회학자 해리엇 저커먼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페르미가 독보적이라고 지적한다. 페르미에게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이 결론은 더 확실해진다. 그의 직계 학생 중에서 다섯 사람(체임벌린, 프리드먼, 리, 세그레, 스타인버거)이 노벨상을 받았다. 크로닌과 양도 노벨상을 받았는데, 페르미의 공식적인 제자는 아니지만 둘 다 페르미에게 받은 영향을 인정했다. 다른 많은 사람도 물리학 분야에서 유명해졌고, 중요한 경력을 쌓았다. 이것은 놀라운 기록이고, 조머펠트와 러더퍼드 정도만 여기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밸런타인 텔레그디는 시카고 시절 페르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교육이었다고 평가했다. 그가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p468

 울람은 메트로폴리스와 함께 갔던 마지막 방문 뒤에, 눈물을 흘리면서 소크라테스가 죽었을 때 플라톤이 했던 말을 메트로폴리스에게 했다. "이제 가장 현명한 사람이 죽는다."

 

p469

 그의 두 친구 찬드라세카르와 울람은 페르미의 죽음과 페르미의 위대한 친구 존 폰 노이만이 2년이 조금 지난 뒤에 똑같이 53세에 맞이한 죽음을 비교하는 긴 글을 썼다. 노이만은 자기의 뛰어난 수학적 정신이 죽음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노이만은 유대교를 따르지 않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싶어하는 약혼녀를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노이만은 카톨릭 신앙을 편안함과 위안의 원천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였지만, 카톨릭은 그에게 게 둘 다 제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비해 페르미는 드문 평정심으로 자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대개는 현실적으로 얼마간 비판적이었던 평소의 인생관 속에서 받아들였다. 페르미에게는 과학이 종교의 기능을 완전히 대신했다. 그는 살았던 것과 똑같이 죽었으며, 죽은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형이상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사색을 할 필요가 없었다. 페르미로서는 자기의 삶은 그의 비범한 정신이 꺼지는 순간에 끝나지만, 그의 업적은 계속 살아 있으리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했다.

 

p473

 전체 경력을 뒤돌아볼 때 페르미는 몇 안 되는 사람만을 동료로 인정했고, 그들은 주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현대물리학을 창시한 유럽 학자들이었다. 페르미를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반열에 두기는 어렵겠지만, 페르미는 스스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거만함이 전혀 섞이지 않은, 자기의 능력에 대한 건전한 판단이었다. 보른과 슈뢰딩거는 나이가 더 많았지만 페르미의 동료였고,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위그너, 베테, 디랙, 파울리, 그리고 어쩌면 텔러도 동료였다. 노이만은 확실히 동료였고, 울람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들이 페르미가 자기와 견줄 만하다고 여긴 사람들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이 그룹이 아니었고, 로런스도 마찬가지였다. 라비나 펠릭스 블로흐도 이 그룹에 들어갈 거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엘비레스, 겔만, 파인만 같은 사람들도 물리학에서 한 획을 그었지만 그들은 다음 세대였다.

 

현직 약사가 쓴 재밋는 약 이야기. 후속작인 '인류에게 필요한 11가지 약 이야기'를 먼저 보고 나서, 

이전작인 이 책도 보게 되었다. 

-------------------

p38

 사람은 엽산 Vitamin B9을 자체적으로 만들지 못해 잎이 무성한 채소, 간, 효모, 밀, 쇠고기 같은 식품을 먹어서 보충한다. 하지만 세균은 스스로 엽산을 만들 수 있다. 세균은 파라아미노벤조산PABA을 원료로 엽산을 만드는데, 설파제가 PABA와 구조가 유사하다. 설파제가 엽산을 만드는 세균의 효소에 결합하면,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엽산을 못 만들어서 세균이 죽는다.

 설파닐아마이드는 에탄올에 녹지 않아서 어린이들이 먹을 수 있는 시럽이나 액상으로 만들 수 없었다. 미국의 한 제약회사가 설파제가 다이에틸렌 클라이콜 Diethylene glycol 에 녹는다는 것을 알아내 딸기향이 나는 시럽제로 만들ㅇㅆ다. 당시에는 규정이 엄격하지 않아 독성검사와 임상시험 없이 발매되었고, 약은 즉시 영업사원들에 의해 병원과 약국에 공급되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시럽제를 먹은 아이 107명이 사망한 거서이다. 사망한 아이들을 검사해보니 신장이 두 배로 커져 있었다. 신장 독성이 원인이었다. 시럽 개발자는 경찰이 오기 전 권총 자살을 하고 말았다.

 원인은 설파제가 아니라 다이에틸렌 글라이콜이었다. 이 용매가 신장을 망가뜨렸다. 이 사태로 인해 1938년 미국은 FDA 규제 법안을 발표해, 모드 의약품은 독성검사 결과를 제출해야 시중에 팔 수 있도록 했다. 이때 안전성이 강화된 미국 의약제도는 1961년 유럽에서 발생한 탈리도마이드 사고를 막는 초석이 되었다.

 

p54. 슈퍼세균의 반격

 

 항생제 덕분에 인류는 세균이 일으키는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치명적인 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인간의 역사에 비하면 아주 최근의 일이다. 항생제는 감염증을 치료해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무분별한 사용으로 예기치 못한 역풍을 만났다. 슈퍼세균이 등장한 것이다.

 슈퍼세균이란 항생제 오남용으로 세균이 내성을 갖게 되면서 강력한 항생제로도 치료할 수 없는 균을 말한다. 의학용어로는 다약제 내성제균 multi drug resistant bacteria 으로 정의한다.

 1960년대에 항생제 메티실린 Methicillin 에 내성을 가진 세균(MRSA, 메티실린 내성 황생포도상구균)이 나왔다 이 내성균은 반코마이신 Vancomycin 이 나와 잡았다. 1980년대 말 반코마이신 내성균 VRE 이 나왔고, 1990년대 중반에는 반코마이신 내성 황색포도상구균 VRSA 이 발견되었다. 아직은 VRSA균이 세계적으로 창궐하지 않지만, 위험을 예방하고자 반코마이신 처방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다행히 카바페넴 Cabapenem 이 1990년대 개발되어 반코마이신 내성균을 박멸할 수 있었다.

 카바페넴은 VRE균이나 VRSA균 같은 중증 세균 감염 치료에 주로 사용한다. 하지만 카바페넴 항생제 사용이 늘면서 병원 감염의 흔한 원인균인 녹농균과 아시네토박터 Acinetobacter 균에서 카바페넴 내성률이 높아졌다. 이제는 카바페넴을 무력화시키는 장내 세균이 미국과 유럽에서 증가하기 시작했다. 내성 유전자를 가진 세균이 우리나라에도 이미 들어왔다. 초기에는 일부 병원이나 특정 지역에서 발견되었지만 최근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카바페넴 내성균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인류가 보유한 마지막 카드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보고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1년에 70만 명이 내성균 감염으로 사망한다. 2050년이 되면 1,000만 명 정도가 약제 내성으로 사망할 것으로 예상된다. 항생제 내성균이 인류의 재앙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항생제를 개발하는 데는 10년 동안 3,000억 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간다. 그렇게 개발한 항생제가 시장에 나와도 3~4년 내로 내성이 생기기 일쑤다. 문제는 제약회사가 어렵게 약을 개발해도 항생제는 치료 기간이 1~2주로 아주 짧다는 게 문제다. 혈압약이나 당뇨약처럼 꾸준히 먹는 것이 아니라, 단기간 사용하고 끝내기에 지속적인 수익이 되지 않는다. 제약회사들이 새로운 항생제 개발을 꺼리는 이유다. 최후의 사태를 대비해 비축하는 항생제는 기존 항생제가 모두 듣지 않는 환자에게만 사용하기 때문에 처방될 기회가 적다.

 2000년 의약 분업을 도입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항생제의 오남용 근절이었다. 항생제는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처방을 받아야만 복용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항생제를 처방받으면 반드시 마지막 한 알까지 연속적으로 먹어야 한다. 항생제 복용을 자의적으로 중단하면 정상 세균들에게 내성을 일으키는 기회를 준다.

 슈퍼세균은 치료가 어렵기에 예방이 최선이다. 불필요한 항생제 복용을 피하고 손 씻기를 잘하는 등 개인위생 관리가 중요하다. 더불어 국가적 차원의 새로운 항생제 개발로 슈퍼세균을 잡는 연구도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세균과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p131

 스코틀랜드의 산부인과 의사 제임스 심프슨 James Simpson(1811~1870)은 우연히 클로로폼이 마취작용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클로로폼은 독일의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 Justus von Liebig(1803~1873)가 1831년에 처음 합성한 물질이다. 에테르보다 마취 속도가 빠르고 인화성이 적다. 심프슨은 클로로폼으로 임신부를 마취시킨 다음 출산 수술을 했는데, 고통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종교계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신앙심 깊은 신자들이 성경 창세기 3장 16절을 가지고 심프슨을 공격했다.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하나님이 여자에게 출산의 고통을 더했는데, 클로로폼이 통증을 줄여 사탄의 도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출산의 고통을 통해 산모가 아이에게 헌신하는 모성애가 자라고 믿음이 강해진다고 믿었다. 따라서 클로로폼으로 산고를 줄이는 것은 신의 명령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주장이었다. 심프슨은 창세기 2장 21절로 대응했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해서 갈빗대를 떼어내는 최초의 외과수술을 할 대 아담에게 깊은 잠을 자게 했다는 말로써 클로로폼 사용의 정당성을 펼폈다. 논란이 지속되다가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1853년 레오폴드 왕자와 1857년 비어트리스 공주의 출산 때 클로로폼으로 마취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빠르게 보급되었다.

 

p142. 수면마취 3총사

 

 케타민 Ketamine, 프로포폴, 미다졸람 Midazolam 은 간단한 수술을 할 때 사용하는 전신 마취제다. 이들을 수면마취 3총사라고 한다. 주사하면 빨리 잠이 들고 수면에서 깨는 시간도 빨라, 성형수술이나 내시경에 많이 사용한다. 그렇지만 환각을 일으키기도 해서 오남용되는 약이다.

 1962년 나온 케타민은 흰색 가루약으로 냄새가 없다. 수면을 유도해 치과 치료, 분만, 어린이 마취에 사용한다. 일반 마취제와 달리 뇌에 강하게 작용해 혈압이 올라가고 맥박이 빨라지는 특징이 있다. 환각작용이 있어 미국 클럽에서 마약으로 쓰기도 한다. 서울 강남에서도 속칭 '스페셜 케이 Special K' 라고 불리며 마약으로 쓰인다. LSD보다 효과가 강해 주사하면 30~45분, 코로 흡입하면 45~60분 동안 효과가 지속된다. 중추신경계에 작용해 정신이 몽롱해지고 수면을 유도해 데이트 강간 약물로 분류한다.

 1983년에 나온 프로포폴은 불안감을 없애면서 편안하게 잠들게 한다. 정맥주사하면 1분 안에 마취되고 약을 끊으면 2분 이내에 의식이 돌아온다. 마취에서 깨어나도 머리가 아프거나 어지러움 같은 증상이 거의 없다. 내시경과 성형수술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마취제다. 하지만 프로포폴을 맞으면 피로감이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져 환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어 중독자가 많다 수면마취제임에도 마약류로 지정되었다.

 1976년 출시된 미다졸람은 주사 후 5분 정도 지나야 잠이 들어 수면 유도 시간이 느리다. 잠이 들면 15~80분 정도 수면이 유지된다. 근육주사도 가능하지만 보통 위내시경 검사 전에 정맥에 주사한다. 미다졸람은 수면, 불안 해소, 최면 등의 효과가 있다.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당일 진료받는 외래환자 수술은 부드럽고 빠른 회복이 중요하다. 수면내시경 같은 짧은 마취에는 미다졸람이 좋다. 프로포폴 남용이 사회문제가 되자, 일부 성형외과는 프로포폴을 사용하지 않고, 환각 작용이 덜한 미다졸람을 사용한다고 광고한다.

 마취제 개발은 인류를 통증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남용이라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따라서 세 살 이하 어린이와 임산부에게 전신 마취제를 반복 사용하거나 3시간 이상 장시간 쓰는 것은 피해야 한다. 어린이 뇌 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p157

 보틀리눔톡신 Botulinum Toxin 은 상한 통조림에서 생기는 클로스트리디움 보툴리눔 Clostridium Botulinum 세균이 만드는 독소다. 보툴리놈톡신은 식중독을 일으키는 주요 물질로, 중독되면 호흡근 마비를 일으켜 사망할 수 있다.

 어른과 다르게 첫돌이 안 된 갓난아기는 면역력이 낮아 클로스트리디움 세균이 매우 위험하다. 이 세균이 아기의 장내에서 증식해 독소를 방출하기 때문이다. 꿀에는 클로스트리디움 세균이 있는 경우가 많아 아기에게 먹이는 것은 금기다. 보툴리눔톡신 중동이 영아 돌연사의 원인이 된다. 꿀 속에 있는 보툴리눔균은 열에 강해 100℃에서 6시간 이상 가열해야 죽는다. 그래서 가정에서는 균을 없애기가 매우 어렵다.

 보툴리눔톡신은 1970년대 후반, 사시 치료에 처음 사용되었다. 치사량의 1,000분의 1 정도의 양을 주사하면 신경세포의 활동이 적당히 억제된다. 그러면 눈 근육이 마비되어 사시의 비정상적인 운동이 멈춘다. 보툴리눔톡신의 특징을 이용해 1989년 보톡스가 나왔다. 극소량의 보툴리눔톡신을 사람에게 주사하면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막아 근육이 퍼진다. 얼굴의 주름을 없애는 용도로 사용하면서 독이 약이 되었다.

 

p161. 베카론 살인사건

 

 베카론 Vecuronium은 수술에 사용하는 근이완제다. 호흡할 때 꼭 필요한 횡격막도 이완시키는 강력한 약으로, 수술하는 의료인만 취급하는 아주 특별한 약이다. 이런 베카론이 매스컴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때다.

 2017년 3월 충남 당진에서 아내가 호흡 마비를 일으켰다며 남편이 119에 신고한 사건이 있었다. 구급대가 도착하니 의사였던 남편이 아내에게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급하게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아내는 심정지로 사망했다. 병사로 처리되었던 이 사건을 아내의 언니가 경찰에 재조사를 요구하면서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남편이 살인 혐의로 구속되었다.

 의대를 졸업한 남편은 병원을 운영하다 여러 불법을 저질러 폐업하고는 이혼을 한 상태였다. 그런 남편과 죽은 아내는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만나 재혼했고, 10억 원 가까운 재산을 가졌던 아내를 설득해 당진에 다시 성형외과를 개업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고, 급기야 남편은 아내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은 베카론 주사로 살인을 시도했으나 처음에는 실패하고, 두 번째 시도에서 살인에 성공했다. 수면제로 아내를 잠들게 한 뒤 주사기로 아내의 팔에 베카론을 주사한 다음 밖으로 나가 외출한 것처럼 위장하고 30분 뒤 집으로 돌아와 119에 신고했던 것이다. 그러고는 대원들이 출동했을 때, 태연히 아내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는 연기를 했다.

 베카론을 투여하면 환자는 2~3분 안에 스스로 호흡이 불가능해져 목을 졸린 것처럼 숨을 쉴 수 없게 되고, 심장이 멎는다. 그래서 베카론을 주사할 때는 인공호흡기나 안전장치가 준비된 상태에서만 사용한다. 미국에서는 사형집행에 사용하기도 한다. 베카론은 투여한 후 4~5시간 지나면 분해돼 흔적이 남지 않아 병원에서도 의심하지 못했다. 법원은 남편에게 징역 35년을 선고했다. 살인 전 이미 한 차례 살인미수가 있었던 데다, 의사만 구할 수 있는 약을 이용해, 의사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2016년 11월 23일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가 구매한 의약품 목록이 공개되었다.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베카론 주사제를 구매한 내용이 나왔다. 청와대는 응급처치용 약품이라고 해명했지만, 수술에만 사용하는 약을 왜 구매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수술용 외에는 다른 용도가 없는데도 사들인 이유가 궁금하다.

 베카론은 고위험 약물이다. 이렇게 위험한 약들은 훨씬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 마약류처럼 관리할 방안이 필요하다. 사건 사고를 미리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의 도입으로 베카론으로 인한 사고가 더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p176

 힘들 때 단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장에 탈이 나기도 한다. 전혀 별개인 것 같은 장과 뇌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장은 사람의 감정도 조절한다.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의 90%가 장에서 분비된다. 행복은 뇌에서 느끼지만 뇌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기분을 조절하는 세로토닌이 모자라면 우울증이 생긴다.

 세로토닌은 장 속 신경세포의 일종인 장 크롬화 친화성 세포에서 합성된다. 세로토닌을 만드는 원료물질이 많아 크롬염에 노란색으로 염색되는 세포다. 세로토닌을 만드는 장은 제2의 뇌라고 할 수 있다. 세로토닌은 기분을 좋게 해 행복감을 느끼게 하고 우울증을 예방한다. 장 내부의 정보는 주변 신경세포에 전달돼 뇌로 간다. 장과 뇌가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장-뇌 연결축'이라고 한다. 장과 뇌 사이에는 생체신호를 주고받는 축이 있다. 아직 장-뇌 연결축 간의 정확한 기전은 밝혀지지 않았다. 장내 물질 세로토닌은 신경계, 면역계, 내분비계 및 대사 체계를 통해 뇌에 영향을 미친다. 대장이 감정까지 조절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최근 들어 식습관이 서구화되면서 육류 소비량이 급증해 대장암 발생이 높아졌다. 장이 심하게 나빠진 것이다. 육식을 많이 하면 소화되고 남은 단백질 찌꺼기가 장을 통과하여 점막을 손상시킨다. 지속적인 자극으로 장세포가 변형되고 용종이 발생해 심하면 암이 된다. 대장에 서식하는 유산균은 대장균 같은 부패세균 수를 감소시켜 암 발생을 낮춘다. 암을 일으키는 효소를 감소시키고 젖산을 만들어 pH를 낮춰 유해균을 몰아낸다.

 대부분의 암처럼 대장암도 3기, 4기로 갈수록 완치가 어렵기에 예방이 중요하다. 주기적으로 대장내시경을 받아 암을 초기에 발견하고, 암이 될 수 있는 용종을 미리미리 제거해야 한다. 검사만 잘 받아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대장암 사망률이 절반 이상으로 줄어든다. 또한 식생활도 중요한데, 육식을 줄이고 신선한 채소에 고기를 싸서 먹으면 식이섬유가 장을 보호한다.

 

p178

 러일전쟁(1904-1905)은 조선을 차지하려는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다. 전쟁은 랴오둥반도와 한반도 인근 해역에서 일어났다. 청일전쟁 후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1905)에는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차지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그러자 일본의 중국 진출을 반대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이 일본을 압박해(삼국 간섭) 랴오둥반도를 중국에 반환하게 만들었다. 그 후 1896년 러청밀약으로 랴오둥반도는 다시 러시아에 넘어갔는데, 러시아가 만주로 남하하는 것을 경계한 일본이 러시아와 맞붙게 되었다.

 전쟁은 랴오둥반도 남단 여순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를 일본 함대가 공격하면서 일어났다.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침공했다. 1905년 랴오둥반도의 중심지 선양에서 대규모 전투가 일어났는데, 막대한 물자와 수십만 인력을 투입한 일본 육군에서 갑자기 배탈, 설사가 유행했다. 만주의 나쁜 수질이 일으킨 것이다. 일왕은 효과적인 정장, 지사제를 공모했다. 여러 제약회사가 앞다투어 응모했는데, 다이코 신약에서 1902년 개발한 약이 가장 효과가 좋았다. 이 약이 군인들의 배탈, 설사를 치료했다. 전쟁 후 러시아를 정벌한 약이라 하여 정로환征露丸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정로환의 주성분은 크레오소트다. 크레오소트는 숯을 태워 나오는 페놀계 혼합물의 일종이다. 살균력이 강해 장 속의 세균을 죽여 배탈, 설사를 멈추게 한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도 배탈, 설사 환자가 많았는데 마땅한 치료약이 없어 고생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 당시 일본은 정로환을 가정상비약으로 가지고 있을 만큼 널리 보급되었다.

 동성제약 창업주는 정로환을 국내에서 생산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성분 표시를 보고 그대로 제조했으나 잘 안 되었다. 그는 다이코 신약에 기술 제휴를 의뢰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고민 끝에 은퇴한 다이코 신약의 전임 공장장을 찾아갔다. 70대 노인이었던 전임 공장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와달라고 말했다. 노인은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평생 일만 해왔고. 동경 유곽에 한 번 데려다주면 원하는 것을 주겠고." 1주일 후 유곽에서 나온 노인은 정로환 제조법이 자세히 적힌 문서를 건넸다.

 

p188

 우리나라에서는 백미를 먹어도 반찬으로 김치가 빠지지 않는다. 김치 속에 들어 있는 마늘이 티아민을 보충해주어 각기병에 걸리는 경우가 없었다. 요즘도 피곤하면 마늘 주사를 맞는 경우가 있는데, 주성분이 티아민이다.

 

p233. 좁은 혈관은 어떻게 해서 넓어지는가?

 

 니트로글리세린은 그 후 수십 년간 협심증 치료제로 사용되었지만 어떻게 혈관에 작용하는지는 몰랐다. 1977년에야 니트로글리세린이 인체에서 산화질소 NO 를 만들어 혈관을 확장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UCLA 약리학 교수 루이스 이그나로는 혈관 세포 속에서 산화질소가 나와 혈관을 넓혀 혈액순환을 돕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혈관 속의 산화질소는 수 초 안에 사라지는 불안정한 기체다. 산화질소는 세포, 조직, 장기 등 모든 인체 시스템에 신호를 보낸다. 

 산화질소이 발견은 획기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생체 내에 작용하는 기체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자동차 배기가스나 담배 연기 중에 들어 있는 공해 물질도 산화질소의 일종이다. 공기 중에 있을 때는 해롭지만 혈관에서는 아주 유익하다. 산화질소는 모든 혈관에 작용한다. 협심증, 동맥경화증, 심부전, 뇌졸증, 당뇨병, 발기부전 및 기타 혈관 합병증 치료제로 사용할 수 있다.

 산화질소는 1992년 과학 잡지 <시이언스>에 '올해의 분자'로 선정되었다. 이그나로는 1998년 산화질소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산화질소는 혈관 유연성을 높여 혈류를 개선한다. 산화질소가 부족하면 혈관이 손상되고 혈액덩어리가 생겨 혈관이 막힌다. 그러면 협심증, 심근경색, 뇌졸중, 심장마비, 당뇨에 걸리기 쉽다. 뇌의 특정 부위에 산화질소가 결핍되면 치매나 알츠하이머에 잘 걸린다. 혈액순환은 모든 세포에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기에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한다. 혈액순환이 잘 되려면 혈관이 튼튼해야 하는데, 혈관이 막히지 않으려면 산화질소가 필요하다. 산화질소의 발견 덕에 발기부전 치료제가 나올 수 있었다

 의료용 니트로글리세린은 아주 작은 흰색 알약이다. 심장에 통증을 느끼는 협심증이 있을 때는 입으로 삼키는 것이 아니라 혀 밑에 넣어 사용한다. 그러면 삼키는 것보다 효과가 신속히 나타난다. 혀밑 침을 통해 전신에 흡수되는데, 간을 거치지 않고 속도가 빨라 위급상황에 유용하다. 이런 약을 설하정이라 한다.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은 절대 삼키면 안되니다.

 니트로글리세린 설하정을 사용하면 협심증을 앓는 환자 가운데 75%가 3~5분 이내에, 15%는 5~15분 이내에 가슴통증이 가라앉는다. 그래도 흉통이 있으면 5분 후에 다시 투여하고, 다시 흉통이 오면 5분 후에 세 번째 투여한다. 15분 이내 최대 3회 투여해도 통증이 지속되면 즉시 응급실에 가야 한다. 심장에 있는 관상동맥이 심하게 좁아진 상태이므로 니트로글리세린만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는 응급상황이다.

 산화질소는 건강한 식습관과 적절한 운동, 산화질소를 만드는 영양소 섭취를 통해 양을 늘릴 수 있다. 산화질소의 공급은 아미노산을 통하는데, 아르기닌과 시트룰린이 있다. 아르기닌은 단백질 분해로 생긴다. 그래서 질 좋은 단백질 섭취가 필요하다. 수박, 멜론 같은 과일에 많이 들어 있는 시트룰린도 좋다. 운동도 효과적인데 숨이 찰 만큼 유산소운동을 하면 산화질소의 발생을 증가시킨다.

저자의 직업은 약사이다. 약과 치료법에 대해 재밋게 쓰여진 책이다.

인류를 구한 12가지  약 이야기라는 전작과 이어지는 내용같다.

 

-----------------------------

p17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는 이듬해 봄부터 전쟁에서 빠졌다. 독일은 러시아 전선에 투입했던 100만 명의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려 총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대량 살상 무기에 큰 타격을 입었다. 6월부터 유행한 스페인 독감에 당한 것이다. 스페인 독감이라는 복병과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918~1920년 유행한 스페인 독감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앞당겨졌다. 종전 협상을 위해 파리에 온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마저 독감에 걸렸다. 윌슨은 어쩔 수 없이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에게 베르사유조약 체결을 위임했다. 가혹한 조건을 강요한 클레망소에 의해 독일은 식민지를 빼앗기고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단기간에 발생하는 엄청난 물가 상승 현상인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독일 경제는 파탄 났고 외세에 대한 분노가 커질 대로 커졌다.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상황에서 등장한 나치즘과 대공황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p28

 박쥐는 포유류 가운데 유일하게 날아다니는 동물이면서 군집 생활을 한다. 박쥐가 날개로 난다고 생각하지만, 해부학적으로 날개 부위는 '앞발'이다. 박쥐는 앞발의 피부 막으로 날아다닌다. 박쥐에 있는 바이러스는 137종이나 된다. 그중 사람에게 감염되는 인수공통 바이러스는 61종이다. 사람과 대다수 동물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면역물질 인터페론을 생성해 대항하지만, 박쥐는 평소에도 인터페론을 만든다. 그래서 많은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감염되지 않는 특이한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다. 밤에 최대 350km 이상 비행하며 거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는 박쥐는 체온이 40℃ 이상으로 다른 포유류에 비해 높다. 체온이 높으면 신진대사가 활발하고 면역력이 강해져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다. 박쥐는 바이러스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공존해 살아간다.

 

p29

 가금류나 돼지가 야생조류, 즉 철새의 분변으로 오염된 물을 마시면 바이러스가 몸속으로 들어가 증식한다. 조류독감에 걸린 가금류는 금방 죽지만, 돼지는 죽지 않고 오래 살아서 바이러스가 서로 섞인다. 여기에 돼지를 가까이에서 키우는 사람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혼합된다. 돼지는 상부 호흡기에 조류에 있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수용체와 사람에게 있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수용체 모두를 가지고 있다. 즉 조류 인플루엔자도 걸리고 사람 인플루엔자도 걸려 바이러스가 동시에 섞이면 새로운 변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조류,돼지,사람 바이러스 유전자가 돼지 몸속에서 섞여서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드는데, 이런 과정을 유전자 재편성이라고 한다.

 

p62. 오바마 정부의 딜레마 사후피임약

 매일 정해진 시간에 1정씩 먹어 임신을 예방하는 사전피임약과 달리, 사후 피임약은 성관계 뒤에 먹는다. 2002년 시판된 72시간(3일) 안에 먹는 약뿐 아니라 지금은 120시간(5일) 안에 복용하는 약도 나와 있다. 12시간 이내에 복용하면 90% 이상 피임 성공률이 나오고 24시간 이내는 약 80%, 72시간 이내는 60% 정도로 시간이 지날수록 효과가 떨어진다.

 사전 피임약 성분은 2종류(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인데 반해, 사후 피임약은 단일성분(프로게스테론)이다. 3일 안에 먹는 약은 레보노르게스트렐(상품명 노레보원, 포스티노원), 5일 안에 먹는 약은 울리프리스탈(상품명 엘라원)이 있는데 고농도의 프로게스테론이 들어 있다. 2세대 피임약에서 레보노르게스트렐이 100ug 혹은 150ug이 있는데, 사후피임약은 1,500ug으로 10배 정도 양이 많다. 식사와 관계없이 복용 가능하며, 월경주기 어느 때라도 사용할 수 있다. 복용 후 3시간 이내 구토하면, 바로 1정을 추가로 복용한다. 사후피임약은 쉽게 구입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처방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의사 단체, 약 자체를 죄악시하는 종교 단체에 의해 종종 논란거리가 된다. 미국에서는 오바마 정부 때 큰 정치적 이슈였다.

 1999년 미국에서 이스라엘 제약회사 테바가 사후피임약 플랜 B를 출시했다. 처음에는 의사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2001년부터 여성 단체는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과학자들은 안전성이 확보되었으므로 일반의약품으로 판매해도 문제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보수적인 공화당 부시 정부는 응하지 않았고 2006년에 와서야 18세 이상만 처방 없이 살 수 있도록 바꾸었다. 그러다 2009년 오바마 정부는 17세 이상으로 나이를 낮췄다.

 2011년이 되어서야 미국 FDA는 "나이 제한을 없애고 플랜 B를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캐슬린 시벨리우스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를 거부했다. 시벨리우스 장관은 11세 소녀도 10%는 임신할 수 있는데, 플랜 B의 안전성이 어린 여성에게는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FDA는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이므로 장관이 결정을 거부할 권한이 있다. 전문가들이 과학적 근거에 따라 내리는 FDA의 결정을 장관이 뒤집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 민주당은 진보적이이서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편인데, 이런 결정을 한 것은 의외였다. 여기에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임을 원했다. 17세 이상이라는 나이 제한을 유지함으로써 뜨거운 이슈였던 플랜 B 논란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나이 제한이 풀리면 부모 몰래 아이들이 플랜 B를 남용하게 된다는 여론을 의식한 것이다.

 논란은 법정 싸움으로 이어졌다. 2013년 연방법원은 "시벨리우스 장관의 결정은 과학보다 정치를 앞세운 것이었다"며 플랜 B에 대한 나이 제한을 철폐하고 누구나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도록 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과학적 근거뿐 아니라 때로는 상식적 판단도 중요하다"며 버텼다. 오바마 정부는 나이 제한을 15세로 낮추는 것으로 타협하려 했지만, 법원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플랜 B는 2013년, 나이 제한 없이 약국에서 바로 살 수 있는 약이 됐다.

 사후피임약은 응급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피임약 대용으로 먹어서는 안 된다. 몸에 무리를 줄 수 있어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사전피임약으로 관리하는 것이 좋다. 피임약은 광고만 보고 구입하기보다는 궁금한 것을 약사에게 문의하면 도움이 된다. 자궁 출혈, 혈전 위험 등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호르몬 종류와 함량에 따라 선택해서 복용하는 것이 유익하다.

 

p81

 남녀의 특징을 한 몸에 지닌 사람을 간성 혹은 인터섹스라고 한다. 염색체, 생식샘, 성호르몬, 성기 등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 정의와 다른 특징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성별 구분이 모호한 사람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사방지와 임성구지이다.

 세조 8년(1462), 왕은 당시 실세였던 역술가 이순지의 딸이 과부가 된 후 사방지라는 양성인兩性人 노비와 10년 동안 내연관계를 맺었다는 사헌부의 보고를 받았다. 사방지는 겉보기에는 여성이지만 남성 생식기를 가지고 있었다. 양반 자식으로 태어났던 사방지가 양성을 지닌 것을 보고 어머니는 여자 옷을 입히고 바느질을 가르치며 여자로 살도록 했다. 그러던 중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이 될 때 세조 편에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방지 집안은 멸문되어 노비가 되었다. 사방지는 장성한 뒤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는데, 이때 이순지의 딸 이 씨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세종은 사방지를 불쌍히 여겨 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대신 측근 이순지에게 처분을 맡겼다. 이순지는 사방지를 시골로 보냈다. 그렇지만 이 씨와 사방지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이순지가 죽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승 한명회가 처벌을 주장하자 세조는 사방지를 관로비로 만들어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게 했다. 이로써 사방지와 이 씨의 관계도 끝나고 말았다.

 또 다른 예로 임성구지가 있다. 명종 3년(1548), 함경도 감사가 길주 지역에 사는 임성구지가 양의(남성과 여성 생식기)를 가져 시집도 가고 장가도 들었다고 보고했다. 처음에 여자로 살려고 시집갔지만, 첫날밤 그녀의 몸을 본 남편이 혼비백산했다. 새색시의 은밀한 부위에 생각지도 못한 남성의 성기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시집에서 쫓겨나온 임성구지는 남장을 했다. 남자 행세를 하면서 갈 곳 없이 떠돌다 마음 맞는 여자를 만나 장가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이중 행각은 얼마 후 들통이 났다. 관청에 끌려온 임성구지를 처리할 방법을 몰랐던 함경도 감사가 조정에 문의했다. 명종은 사방지 사례를 참고해 임성구지를 외진 곳으로 보내 다른 사람과 섞여 살지 못하게 했다.

 사방지와 임성구지처럼 남녀 생식기 모두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양성구유 혹은 남녀한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아기가 이렇게 태어나면 주변에 숨기고 부모가 한 가지 성을 결정해 살아가기를 강요한다. 1950년대 미국에서도 이런 아이가 태어나면 병원에서 수술해 한쪽 성을 정해버렸다. 아이가 자라면 자신이 선택한 성이 아니라서 나중에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특별한 현상은 고대부터 드물게 있었는데, 신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는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헤르마프로디토스가 나온다. 헤르마프로디토스가 연못에서 수영하고 있을 때 호수의 요정 살마키스가 그를 유혹했다. 헤르마프로디토스가 거부하자 살마키는 그의 몸을 칭칭 휘감은 후, 신에게 "우리 둘을 영원히 한 몸으로 만들어주세요"라고 빌었다. 그러자 둘은 남녀 양성을 가진 동체가 되었다.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조각상을 보면 남녀 한 몸 모양인데, 그리스에서는 남녀 모두를 가졌다고 해서 이상적인 인간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남녀의 성은 확실하게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전체 인구의 1.7% 혹은 연구에 따라서는 0.018%가 간성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외부 생식기는 남성이지만 난소가 있거나, 외형은 여성이지만 잠복 고환이 있는 등 형태도 다양하다. 세메냐처럼 여성인데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0.018%라 해도 현재 우리나라 5,100만 명 인구로 계산하면 9,000명이 넘는 사람이 간성이라는 의미다.

 2015년 국제연합은 간성 유아에 대한 생식기 수술 관행을 비판했다. 2017년 미국 휴먼 라이츠 워치 Human Rights Watch와 인터액트(간성 어린이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단체)는 생식기 수술을 비난하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미국 하원에 생식기 수술을 금지하라고 요구했다. 지금은 일방적으로 수술하지 않고 아이가 성장한 후 스스로 성을 선택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p252

 한때, 기생충은 박멸해야 하는 악이었지만 기생충이 거의 사라진 사회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알레르기와 자가면역질환이 늘어난 것이다. 1960~70년대는 위생상태가 나쁘고 상하수도 시설이 열악했다. 기생충이 창궐해서 대대적으로 퇴치했지만, 환경이 너무 깨끗해지자 과도한 면역반응이 일어났다.

 외부에서 들어온 기생충을 인체는 이물질로 인식한다. 면역세포가 기생충을 감시하며 관리하는 과정에서 면역체계가 강해졌는데, 이방인이었던 기생충이 갑자기 사라지자 혼란이 생겼다. 아토피, 천식, 비염같이 예전에는 드문 질환이 늘어났다. 3만 년 전 사람 몸속에서 회충이 발견될 만큼 사람과 기생충은 오랫동안 공생해왔다. 그래서 서로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균형을 이루며 살았다. 보기에는 흉측하지만 나름 기생하면서 면역을 튼튼하게 해준 공로가 있다.

 

 

 핵발전과 핵무기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핵물리학에 대한 설명이 전반부, 후반부는 핵발전과 핵무기의 기술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 내용은 고등학교 수준 정도의 물리,화학적 기본지식만 가지고 있으면(아마도 그것도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이해할만한 내용이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볍지만도 않다. 저자가 J-PARC(Japan Proton Accelerator Research Complex, 일본 양성자 가속기 연구 복합센터)라는 고에너지 가속기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상당한 수준의 내용을 쉽게 설명할 뿐이지 내용 자체는 일반인이 쉽게 알지 못할만한 내용이다.

 원자력이라는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입문서로서 추천할만한 내용이다.

 저자가 2019년에 핵병기(核兵器)라는 제목의 책을 내놨는데(아직 국내 미발매) 상당한 수준의 심화된 도서일 듯 해서 관심이 간다. 이것도 번역되서 나왔으면 싶다. 

----------------------------------------------

p77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났을 때 "아이오딘(요오드)를 마시시오!"라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을 기억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오딘-131은 이 반응처럼 우라늄-235의 핵분열 반응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까닭에 일정 기간 이상 가동된 원자로 안에 많이 있습니다.

 

       235U + n → (236U) → 103Y + 131I + 2n

 

 그리고 이 아이오딘-131은 베타선이라는 방사선을 방출하는 동위 원소(방사성 동위 원소)인데, 베타선은 알파선과 마찬가지로 내부 피폭의 영향이 큰 방사선입니다. 게다가 아이오딘은 화학적인 성질상 갑상선을 공격하기 때문에 위험하지요. 그런데 한편으로 천연에 존재하는 아이오딘의 대부분은 아이오딘-127이라는 방사선을 방출하지 않는 동위원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미리 섭취해 갑상선에 충분히 축적되도록 만들면 방사성인 아이오딘-131을 흡입하더라도 갑상선에 쌓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아이오딘은 자원이 적은 나라로 알려진 일본의 귀중한 천연 자원입니다. 지하자원으로서는 세계 가채매장량(현재 확립된 기술을 사용해서 채산성을 확보하며 생산할 수 있는 양)의 3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매장량이지요. 산출량도 세계 2위로, 그중 80퍼센트가 지바 현에서 채굴되고 있습니다. 미나미간토南關東 가스전田이라는 일본 최대의 가스전에서 채굴되고 있지요. 미나미간토 가스전은 지바 현과 도쿄에 걸쳐 있는 가스전으로 일본 국내 천연가스 매장량의 무려 90퍼센트를 차지하는 곳입니다만, 이 천연가스를 본격적으로 채굴하면 도쿄의 지반이 침하되어 도쿄가 괴멸되기 때문에 채굴이 제한되고 있습니다.

 

p93

 중성자의 속도가 느리면 원자핵이 쉽게 붙잡을 수 있지만 중성자의 속도가 빠르면 원자핵이 붙잡지 못해서 그냥 지나쳐 버리는 일이 많아지지요. 중성자를 잡지 못하면 핵분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표5는 중성자의 대표적인 속도에 대한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기 쉬운 정도의 차이를 비교한 것입니다.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기 쉬운 정도는 '핵분열 단면적'이라고 부르는 값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중성자를 붙잡기 쉬운 정도뿐만 아니라 중성자를 붙잡았을 경우에 핵분열이 일어날 확률을 함께 나타내지요. 이 표를 보면 원자핵에 부딪히는 중성자의 속도에 따라 핵분열이 일어나는 비율이 상당히 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이 이 점만을 생각해서 핵분열 반응을 효율적으로 실시하려 한다면 중성자의 속도가 느린 편이 좋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표5. 핵분열 단면적

중성자의 속도 핵분열 단면적
[m/sec] [x10^-28 m2]
2,200 585
20,000,000 1.2

 

 핵분열 반응이 일어나면 질량 결손으로 방대한 에너지가 생기며 이것이 반응 후 물질의 운동 에너지가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중성자는 그 방대한 에너지를 받아 빠른 속도를 내지요. 그런데 핵분열 에너지를 이용할 때는 핵분열 반응으로 생겨난 이 중성자를 가지고 다시 핵분열 반응을 일으키는 식의 연쇄 반응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서 연쇄 반응을 효율적으로 일으키기 위해서는 생겨난 중성자를 감속시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어린 아이나 젊은 사람들도 스마폰에 지나치게 노출되면 노안이 올 수 있다는 내용.

예방법과 대처에 대해 쉽게 설명하고 있다. 

 

--------------------------

p88

 스마트폰과 휴대전화가 건강에 미치는 위험성을 다룬 학술논문이 전 세계적으로 만 건 이상 발표되었다. 나라에 따라서 언론이 광고주의 눈치를 보느라 이 문제를 되도록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정보지만, 2011년 WHO는 휴대전화의 전자파가 암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며 휴대전화를 '발암성을 지닌 유해 물릴'로 지정하기도 했다. 미국을 포함한 14개국 과학자들이 공동 연구를 통해 입증한 과학적 사실로 당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103

 눈에 핫팩을 하는 습관은 아주 좋다. 핫팩은 부작용도 없고 스마트폰 노안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바람직한 습관이다. 

 왜 핫팩을 하면 눈에 좋을까? 혈액순환이 좋아지거나 눈주위 근육에 쌓인 피로가 풀려서 일 수도 있고, 하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핫팩을 추천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아래위 속눈썹 뿌리 부분에는 속눈썹과 나란히 '마이봄선 Meibomian gland'이라는 분비샘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마이봄선은 지방을 분비하고 눈물 성분에 유분을 더한다. 또 유막을 형성해 눈알과 눈꺼풀의 움직임을 부드럽게 해주고, 눈물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준다. 마이봄선에서 분비되는 지질은 우리 눈에 필요한 천연 안약인 셈이다.

 그런데 마이봄선은 약간의 자극으로도 막힐 수 있다. 운 나쁘게 마이봄선에 세균이 침투하면 다래끼나 안구건조증, 안구 피로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평소 마이봄선이 막히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

 마이봄선을 손쉽게 관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핫팩이다. 마이봄선의 지방이 녹아나는 온도는 약 40도이다. 욕조에 들어갔을 때 약간 뜨겁게 느껴지는 온도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수건을 목욕물에 적셔 눈 위에 올리면 마이봄선을 막고 있던 지방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꼴로 꾸준히 핫팩을 하면 스마트폰 노안이 상당히 나아진다. 게다가 핫팩 덕분에 눈물이 덜 말라 안구건조증을 예방할 수도 있다.

 

 

저자는 군론(Group theory)을 전공한 옥스포드대 수학교수이다. 저자의 이력만 보면 수학에 관한 내용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물리학, 논리학 그리고 수학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 초반의 5개의 챕터는 상당한 깊이의 통찰로 양자론, 우주론, 상대성이론에 대한 수학적, 철학적 고찰을 보여준다.

초반 5개의 챕터만으로도 현대 물리학에 대한 상당히 알차고 수준높은 입문교양서가 될 수 있다.

그 이후에는 2개의 챕터에서는 논리학, 의식과 관련된 인공지능, 그리고 수학적 추론과 저자 본인의 수학적 연구테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수식적인 전개가 있지는 않고 서술적이지만, 내가 수학적 지식이 짧아서 완벽히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뒤에 집중력이 떨어진 측면이 있다. 시간을 가지고 찬찬히 읽으면 이해할만한 수준일 것으로 보인다.

과학 교양서로 좋은 책이다.

---------------------

 

p29

 내가 기자들과 가장 자주 나눴던 대화는 대충 다음과 같다.

 

 기자 : 교수님은 어떤 종교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나 :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해주세요.

 기자 :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 :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신'을 정확하게 정의해야 합니다. 당신이라면 어떤 정의를 내리시겠습니까?

 기자 : 그야 뭐....,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 존재겠지요.

 나 : 정말 황당하네요. 그런 초월적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는 취급 가능한 대상의 존재 여부만을 알 수 있답니다!

 

p163. 최후의 단위 : 쿼크

 

 그 후 몇 명의 물리학자들이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SU(3)의 다차원 표현에 대응되는 패턴들을 여러 층으로 쌓았더니, 제일 꼭대기 층이 누락된 피라미드 형태가 된 것이다. 꼭대기에 간단한 삼각형이 놓이면 그림이 완성될 것 같았다. 삼각형은 3차원에 적용되는 SU(3) 대칭군의 가장 간단한 물리적 표현에 해당한다. 이 피라미드를 대칭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누락된 층으로부터 다른 층들을 순차적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입자를 할당해야 하는지, 그것이 문제였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로버트 서버 Robert Seber 는 누락된 층에 해당하는 세 개의 입자들이 다른 층의 모든 입자를 구성하는 궁극적 기본 단위일 것으로 예측했다. 1963년의 어느 날, 그는 겔만과 점심 식사를 함께하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했고 겔만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그 입장의 전하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겔만은 냅킨을 탁자에 펼쳐놓고 몇 줄 끼적이더니 곧바로 답을 알아냈다. 그 입자의 전하는 양성자의 2/3이거나 -1/3이 되어야 했따. 겔만이 웃으면 말했다.

 "정말 희안한 입자인데요. That would be a funny quirk. "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 발견된 그 어떤 입자도 전하가 분수인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입자의 전하는 양성자나 전자의 전하의 정수 배여야 했다.

 당시의 상황은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를 연상시킨다. 피타고라스는 모든 만물이 정수로 표현된다고 하늘같이 믿었다가 정수가 아닌 분수를 발견했고, 정수와 분수가 전부라고 생각했다가 무리수와 마주치지 않았던가. 20세기의 물리학자들도 모든 입자의 전하가 어떤 기본 단위의 정수 배라고 믿었다가 '분수 전하'라는 복병과 마주친 것이다. 처음에 겔만은 분수 전하에 회의적이었으나 그날 저녁부터 생각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몇 주 후에는 서버의 아이디어를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자신이 진행 중인 연구를 '쿼크kworks'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가 예전부터 '작고 흥미로운 것'을 칭할 때 즐겨 쓰던 그만의 은어였는데, 서버도 희안한 입자를 표현하는 데 적절한 용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겔만은 제임스 조이스의 실험적 소설 《피네간의 경야》를 읽다가 자신이 연구 중인 가상의 입자에 어울리는 이름을 발견했다. 이 책에는 트리스탄 신화의 바람둥이 마크 왕을 조롱하는 시가 등장하는데, 그중 한 구절이 눈에 띈 것이다.

 "마크 대왕에게 세번의 쿼크를! There quarks for Muster mark!"

 여기 나오는 '쿼크quark'는 자신이 만든 신조어 '쿼크kwork'와 발음도 비슷하고, 게다가 '3'이라는 숫자까지 명시되어 있으니 겔만에게는 더 없이 적절한 이름이었다.

 

p212

 관측 행위의 기이한 특성은 내 책상 위에서 붕괴되고 있는 우라늄에도 적용된다. 우라늄에서 복사(알파 입자)가 방출되는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 초미세 감지기를 짧은 간격으로 계속해서 들이대면 우라늄은 마치 얼어붙은 얼음처럼 붕괴를 멈추고 현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물이 담긴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고 계속 바라보면 절대로 끓지 않는다"는 속담에서 주전자를 우라늄으로 바꾼 양자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불안정한 입자를 계속 관찰하면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었다. 이 현상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의 이름을 따서 '양자적 제논 효과'라 한다. 제논은 '날아가는 화살의 한순간을 포착한 스냅샷(정치영상)은 움직이지 않으므로, 화살은 움직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p310

 미래에는 우주 배경 복사처럼 은하에서 방출된 빛도 가시광선 영역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천문학자들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는데 어떤 이론을 세울 수 있겠는가? 우리의 먼 후손들은 고대 그리스의 우주관을 다시 수용할지도 모른다. 우리 은하는 우주에 홀로 고립되어 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우주의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고대의 선민의식도 되살아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잘 보존하여 후대에 전해주고 싶지만, 수십억 년 후까지 온전하게 전달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우주의 운명이 원래 그런 것을....

 

p347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인 '초秒, second'는 현대에 이르러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1967년 이전까지는 지구의 자전 주기와 공전 주기를 통해 정의된 초 단위를 사용해왔는데, 값이 수시로 변하여 시간의 기본 단위로는 적절치 않았다. 예를 들어 6억 년 전에는 지구의 자전 주기가 22시간이었고 공전 주기는 거의 400일에 가까웠다. 그런데 바다의 조석 현상이 지구의 자전 에너지를 달에 전달하여 지구의 자전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달은 지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태양과 지구 사이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 지구의 공전 주기가 일정하지 않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도량형 학자들은 1967년에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시간의 척도를 우주에서 찾는 대신 운동이 한결같은 원자에서 찾기로 한 것이다. 이때 제정된 1초의 정의는 다음고 같다.

 

 절대 온도 0K에서 세슘 원자(Cs-133)가 바닥상태의 초미세 준위 사이에서 전이할 때 방출되는 복사(전자기파)의 주기의 9,192,631,770배를 1초로 정의한다.

 

p577

 "말할 수 없으면 침묵하라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 등장하는 명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패배주의적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피해 의식에 빠져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이보다는 "알 수 없으면 상상력을 가동하라"는 말이 훨씬 생산적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배우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던가?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을 탐구하기 위한 초석이다. 맥스웰은 "모든 과학의 발전은 완전한 무지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특히 수학을 연구하다 보면 이 말이 피부에 와 닿을 때가 많다. 문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답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끈기 있게 매달리면 결국 어떤 형태로든 보상이 돌아온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스티븐 호킹은 "지식의 최대 적은 무지가 아니라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환상"이라고 했다.

 

 

 이 책의 저자인 앤 드루얀의 남편이자 작고한 칼 세이건의 코스모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최신의 우주 탐사의 내용들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기후 문제까지를 다루고 있다. 

-------------------------------

p40

 우주의 나이에 대한 최신 정보는 유럽 우주국(ESA)의 플랑크 위성이 알아낸 것이다. 플랑크 위성은 1년 넘게 온 하늘을 훑어서 우주가 갓 태어났을 때, 그러니까 대폭발(big bang)으로부터 겨우 38만 년 흐른 시점이었을 때 처음 방출된 빛을 꼼꼼하게 측정했다. 그 데이터는 우리에게 코스모스의 나이가 138.2억 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이것은 과학자들이 기존에 생각하던 것보다 1억 년 더 많은 숫자였다.

 과학의 멋진 점 중 하나가 이것이다. 약간 더 나이가 든 우주의 증거가 발견되었을 때, 그 정보를 은폐하려고 한 과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새 데이터가 사실로 확인되자마자, 온 과학계가 수정된 지식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언제까지나 혁명적인 태도, 변화에 대한 열린 태도가 과학의 핵심에 있기 때문에 과학이 이토록 효과적인 것이다.

 

p54

 시신을 떠멘 장례 행렬이 차탈회위크를 떠나 드넓은 아나톨리아 평원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곳에는 높은 좌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좌대에 시신을 올리고, 맹금과 비바람이 그것을 먹어 치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 사람 정도는 남아서 뼈까지 다 없어지진 않도록 망보았을 것이다. 독수리들이 좌대를 맴돌았고, 비바람이 불어닥쳤다.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유골만 남았을 때, 사람들의 행렬이 돌아왔다. 이제 유골을 붉은 황토로 장식해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배치한 뒤 자신들이 사는 집 거실 바닥에 묻을 차례였다. 아마도 의례적인 행동이었을 텐데, 사람들은 이따금 발밑의 무덤을 열어 사랑하는 망자의 해골을 꺼낸 뒤 자신들이 사는 공간에 보관했다. 그들이 망자와 맺었던 관계는 아마 우리들보다 더 평화롭지 않았을까.

 

▶ 절(寺)에 가보면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탑(塔)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물론 전국의 모든 사찰에 다 진신사리가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에는 어떤 고승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100여개 들고 와서 전국 사찰에 나눴는데, 이런 진신사리가 모셔진 사찰을 특별히 적멸보궁이라 한다. 그리고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전통적인 규율에 따라 부처상이 없다. 원래 전통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상을 만들 수 없게 되어 있다. 부처상을 만든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정복 후, 헬레네 문명이 유입되면서 그리스 조각문화가 불교와 결합된 이후이다).

 즉 고대에는 가족 혹은 존경받는 사람들이 죽고 나면, 그 시신의 뼈 혹은 태우고 남은 재를 가정내에 모시는 것이 원초적인 형태였을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장례후 망자의 다비의 일부를 자그마한 단지에 담아 집에 마련된 자그마한 신당에 모시고 매일 아침에 지은 밥을 올리는 의례를 하는 집이 상당히 많다. 이렇듯 우리가 지내는 제사라는 의례는 이렇게 소박한 형태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저 생각나면 거실 바닥을 파서 돌아가신 이들의 뼈를 보고 생각에 잠기는 행위는 애틋하기도 하고 로맨틱하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기괴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p61

 유태인 공동체의 불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자신들이 살아온 세상이 악몽처럼 뒤집히는 꼴을 목격했으니, 무엇보다도 지역 사회에 받아들여져서 평온하게 살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에는 얄궂은 면이 있다. 구약의 기도문은 사람들에게 매일 일상을 영위하는 모든 행동에서 주님을 떠올리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한 일이 바로 그것 아니었는가? 그는 사방에서, 만물에서 신을 보지 않았던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중이든 자연의 모든 곳에서 신이 있다고 보지 않았던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중이든 자연의 모든 곳에 신이 있다고 보지 않았던가?

 스피노자가 기적이라면 질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1670년 출간한 『신학-정치론(Theological-Political Treatise)』의 6장을 통째 이 주제에 할애해서, 사람들이 기적에 부여하는 의미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를 꼬치꼬치 설명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기적에서 신을 찾지 마라. 기적이란 자연 법칙의 위반인 셈이다. 그런데 만약 그 자연 법칙을 쓴 것이 신이라면, 신이야말로 그 법칙을 가장 잘 이해하지 않겠는가? 기적은 자연적인 사건을 인간이 오해한 것뿐이다. 지진, 홍수, 가뭄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신은 인간의 희망과 두려움이 투사된 존재가 아니라 우주를 존재하게끔 한 창조력일 뿐이고, 우리는 자연 법칙을 연구할 때 그 창조력을 가장 잘 접할 수 있다.

 

p62

 그가 볼 때 국가 공인 종교란 정신적 강압일 뿐이었다. 주요한 전통 종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초자연적 현상은 조직화된 미신일 뿐이었다. 그는 그런 마술적 사고가 자유로운 사회의 시민들에게 위험하다고 믿었다.

 

 

 1920년 11월, 역시 빛에 대한 열정으로 넘치는 또 다른 남자가 스피노자의 철학이 미친 영향력을 기념해 박물관으로 보존된 헤이그의 초라한 작업실을 찾았다. 새로운 자연 법칙을 발견한 업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그 과학자는 사람들로부터 종종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믿는 신은 만물의 조화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입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p63

 식물로 산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한자리에 뿌리 박고 있는 존재에게 섹스가 만만찮은 과제다. 데이트는 불가능하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바람에 씨앗을 날릴 뿐, 말 그대로 손 놓고 앉아서, 바람이 불어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운이 좋다면, 당신이 날려 보낸 꽃가루가 다른 식물의 암 생식기에 해당하는 암술에 가 닿을지도 모른다.

 식물은 이렇게 무턱대고 운에 맡기는 방식을 2억 년 동안 써 왔다. 그러던 중 드디어 큐피드 역할을 해 줄 곤충이 진화했다. 그 결과는 생명 역사상 가장 훌륭한 공진화(coevolution)였다. 곤충은 단백질이 풍부한 꽃가루를 먹으려고 꽃을 찾는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곤충의 몸에 꽃가루가 좀 묻고 곤충이 다음 식사를 하려고 다른 꽃으로 옮길 때 몸에 묻은 꽃가루도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 꽃가루가 다음 꽃을 수정시켜서, 식물의 번식을 돕는다.

 이것은 꽃에게도 곤충에게도 좋은 거래였고, 여기에서부터 또 다른 진화적 발전이 이어졌다. 식물은 꽃가루 외에 달콤한 꿀도 생산하게 되었다. 이제 곤충은 꽃가루 식사뿐 아니라 디저트까지 먹을 수 있었다. 곤충은 더 통통해졌다. 몸에 복슬복슬 털이 났고, 매일 꽃을 돌아볼 때 다리에 꽃가루를 더 많이 붙일 수 있도록 작은 주머니까지 진화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꿀벌이었다.

 이 일은 동물계의 또 다른 종에게도 횡재였다. 우리 인간 말이다. 연기 나는 단지를 들고 꿈 따는 사람을 그린 스페인 동굴 벽화를 비롯해 고대의 다른 많은 그림이 알려주듯이, 우리 선조들은 꿀을 좋아했다. 꿀 자체를 즐겼을 뿐 아니라 꿀을 발효시켜서 벌꿀 술로 만들어 취하는 방법까지 알아냈다.

 새와 박쥐도 꽃가루받이 사업에 끼고 싶어 했지만, 곤충만큼 특히 꿀벌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꿀벌에게 고마워해야 할 이유는 그 밖에도 많다. 아름다움도 한 이유다. 식물은 꿀벌의 번식 대행 서비스를 누리려고 경쟁하다가 꿀 이외의 다른 전략도 진화시켰고, 그것이 바로 향기와 색이었다.

 꿀벌의 눈에는 사람처럼 세 가지 광수용체가 있다. 단 기능이 좀 다르다. 우리 눈은 빨강, 파랑, 초록을 인지하는 데 비해 벌의 눈은 자외선, 파랑, 초록을 인지한다. 주황빛이나 노란빛 파장은 붉은빛으로 인지한다.

 우리는 아름다움 외에도 우리의 생존에 더 긴요한 요소를 벌에게 빚지고있다. 여러분이 어떤 음식을 먹든, 이것은 육식 애호가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셋 중 하나는 벌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던 음식이다. 벌은 우리가 먹을 식량의 총량을 늘려 주기만 한 게 아니었다. 우리의 안정적인 식량 수급을 돕는 생물 다양성도 벌에게 빚진 바가 크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우화의 슬픈 대목으로 접어들었다. 동물계의 새 구성원이 몰지각하고 욕심 사납고 근시안적인 행동으로 그 오래된 동맹을 망가뜨리는 대목이다. 내가 더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무슨 말인지 알 것이고, 그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 것이다.

 

p71

 현재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인류가 가장 가까운 별로 처음 정찰을 떠나게 될 브레이크스루 스타샷(Breakthrough Starshot)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들이 살아서 그 사업이 완료되는 모습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약 20년 뒤, 1,000대의 우주선 함대가 지구를 떠날 것이다. 레이저 빛을 돛에 받아서 움직일 성간 우주선은 무게가 1그램밖에 안 된다. 크기가 콩알만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의 첫 성간 우주선이었던 NASA의 보이저 호들이 갖춘 장치는 물론이고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모든 나노(nano)우주선에는 다른 별에 딸린 세계들을 정찰한 뒤 시각적, 과학적 정보를 지구로 보내는 데 필요한 도구들이 다 들어 있다.

 보이저 1호는 시속 6만 킬로미터 속도로 40년 넘게 여행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인상적인 속도이고 보이저 1호가 항해 초기에 거대한 목성을 근접 비행하면서 얻었던 단 한 번의 중력 도움으로 지금껏 날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대단하다. 하지만 그저 은하 하나의 규모에서라고 해도 그것은 꿈속에서 달리는 것처럼 몽롱한 속도다. 빠르기는 해도, 어딘가에 다다르기에는 턱없이 느리다.

 스타샷 나노 우주선은 보이저 호를 나흘 만에 앞지를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그 속도마저도 광속의 20퍼센트에 불과하다. 별들은 정말 멀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별인 센타우루스자리 프록시마까지의 거리는 4광년이다. 스타샷 우주선이 가는 데만 2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우리가 알기로 센타우루스자리 프록시마의 생명 거주 가능 영역에는 행성이 있다. 어쩌면 그곳에는 물이 흐를지도 모른다. 생명이 꽃피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다른 행성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로봇 사절들은 그 새로운 세계(들)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보내올 것이다. 데이터는 전파의 형태로 광속으로 날아오므로, 우리에게 도착하기까지 4년이 걸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후에 그들은 고향에 어떤 이야기를 보내올까?

 

p124

 골드슈미트는 또 감락석이 코스모스에 널리 퍼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것은 우주 화학이라고 불릴 분야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는 좀 더 전통적이지만 훨씬 더 시급한 화학 작업이 있었다. 나치가 노르웨이를 쳐들어오기 전날, 골드슈미트는 보호복을 입고 사이안화물(청산가리) 캡슐을 몇 개 만들었다. 그리고 게슈타포가 잡으러 올 때를 대비해서 캡슐을 늘 몸에 숨겨 지니고 다녔다. 어느 동료가 그에게 자신도 하나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묻자, 골드슈미트는 이렇게 대답해싸. "독약은 화학 교수를 위한거라네. 자네는 물리학자니까 밧줄을 쓰게."

 

p142

 1600년 2월 19일 오후 5시, 페루 남부에서 후아이나푸티나(Huaynaputina) 화산이 폭발했다. 돌덩이, 기체, 먼지가 하늘로 치솟아 거대한 연기 기둥을 이뤘다. 역사 기록상 남아메리카 최대의 분화였다. 연기 기둥은 대기를 뚫고 솟았다. 대류권을 뚫고, 성층권을 뚫고, 검푸르다 못해 거의 캄캄한 중간권까지 도달하고서야 비로소 땅으로 떨어졌다. 황산과 화산재가 섞인 불쾌한 연기가 햇빛을 차단했다. 겨울이 왔다. 화산성 겨울(volcanic winter)이었다.

 그해 러시아 사람들은 600년 만에 최고로 가혹한 겨울 날씨를 맞았다. 이후 2년 동안 여름에도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러시아 인구의 3분의 1이었던 200만 명이 이상 기온으로 인한 기근으로 죽었다. 누더기로 얼굴을 동여맨 사람들은 덜덜 떨면서 거대한 구덩이를 파서 시체들을 한데 묻었다. 이 기근은 황제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모두 1만 3000킬로미터 떨어진 페루에서 분화한 화산 때문이었다. 지구가 하나의 유기체라는 말을 공허한 감상주의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것은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다.

 

p254

 프리슈는 표시된 벌이 벌집 입구에서 햇빛을 받으며 겉보기에는 무의미한 춤을 씰룩쌜룩 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그 변덕스러워 보이는 춤 동작을 태양의 위치와 함께 공책에 꼼꼼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 벌이 왼쪽으로 돌았다가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하면서 춤추는 동작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그러자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결론이 떠올랐다. 벌의 안무에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었다. 벌은 춤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프리슈는 이것을 독일어로 "tanzsprache"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언어는 수학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프리슈는 벌의 1초(second, s) 동안 씰룩거림(waggle, w)은 1킬로미터의 거리를 뜻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즉 1sw = 1킬로미터였다. 이 정보에 태양의 위치와 씰룩거리는 방향을 결합하면, 나무로 가득한 숲에서 딱 한 나무를 가리킬 수 있는 확실한 암호가 되었다. 만약 이 공식이 우주 저편에서 날아와서 FAST 망원경에 잡힌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것을 외계 지적 생명체가 보낸 메시지라고 해석할 것이다.

 과거 수많은 관찰자가 멍청한 동물의 무의미하고 발작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은 사실 정교한 메시지였다. 수학, 천문학, 그리고 시간을 정밀한 단위로 측정할 줄 아는 예리한 능력을 활용한 메시지였다. 벌은 그 모든 지식을 결합해서 자매들에게 알리고 싶은 횡재가 있는 위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춤꾼은 태양의 각도록 먹이가 있는 방향을 대충 표현한다. 프리슈가 보니, 벌이 위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태양을 향해 날아가라."라는 뜻이었다. 반면 반대 아래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태양과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라."라는 뜻이었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먹이의 좌표를 좀 더 정확하게 알리는 몸짓으로, 가끔 그 좌표는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일 때도 있었다. 춤의 지속 시간은 - 몇분의 1초 단위로 정밀하다. - 친구들이 날아가야 할 시간을 뜻했다. 벌은 심지어 풍속까지 고려해서 메시지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춤은 사시사철 한결같았으며, 어느 벌집의 벌이든 어느 대륙에서 사는 벌이든 다 같은 춤을 추었다. 사회성을 가진 벌이라면 모두 이처럼 공간과 시간을 비행할 때 쓸 방정식을 계산하고 소통할 줄 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사는 벌들은 서로 다른 방언을 쓸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통역이 쉽게 이뤄지는 듯하다.

 나는 왜 이 이야기를 서로 다른 문명들이 처음 만난 이야기라고 말했을까? 더 다를 수 없을 듯한 두 종이 - 인간과 꿀벌이 - 수억 년 동안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밟아 왔다. 그런데도 두 종은 -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지구에서는 오직 꿀벌과 우리만이 - 물리 법칙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서 수학으로 표현한 기호 언어, 즉 과학을 발명해 냈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외계 문명과 공유할 수 있는 언어도 이런 형태의 언어일 것이라고 여긴다.

 

 

p298

 누군가의 꿈이 그 사람과 함께 죽을 때도 있지만, 다른 시대의 과학자들이 그 꿈을 건져내어 달까지, 그리고 그보다 더 멀리까지 데려가는 때도 있다. 유리 콘드라튜크는 자칫 깡그리 잊힐 수도 있었다. 그가 정말로 우주 탐사에 이바지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따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를 기억하고 그가 합당한 공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애쓴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닐 암스트롱은 달 여행에서 돌아온 이듬해, 우크라이나에 있는 콘드라튜크의 허름한 오도막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암스트롱은 무릎을 꿇고, 떠내도 될 듯한 흙을 좀 떠냈다. 자신이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 암스트롱은 당시 (구)소련이었던 그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부디 자신의 신화적인 비행을 가능케 해 준 콘드라튜크를 기려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p343

 H.G. 웰스의 소설을 읽은 사람 중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라는 젊은 물리학자가 있었다. 1933년 9월 12일, 헝가리에서 망명한 실라르드는 런던의 스트랜드 팰리스 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는 막 《타임스》에 실린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경의 연설물은 읽고 심기가 거슬린 참이었다. 러더퍼드는 많은 업적 중에서도 특히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바뀔 때 방사선이 방출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로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일컫어지는 과학자였다. 실리라드가 못마땅한 점은 그 러더퍼드가 우리가 원자 구조에 대한 지식에서 에너지를 얻어낼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한 점이었다. 실라르드는 생각할 일이 있을 때 즐겨 쓰는 수단이었던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길을 걸으면서, 실라르드는 한가운데에 양성자와 중성자가 모여 있고 그 겉에 휙휙 나는 전자들의 베일이 덮여 있는 원자의 구조를 떠올렸다. 그가 사우샘프턴 가와 러셀 광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릴 때, 번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우리가 중성자 1개를 흡수하고 대신 중성자 2개를 내놓는 원소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 연쇄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발상이었다. 중성자 2개가 중성자 4개를 낳고, 중성자 4ㄱ개가 중성자 8개를 낳고....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원자핵에 갇힌 엄청난 에너지가 풀려날 것이다. 이것은 화학 반응이 아니라 핵반응이었다.

 

 

 레오 실라르드는 기하급수적 증가의 힘을 잘 알았다. 우리가 만약 저 깊은 원자핵의 세계에서 연쇄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면 웰스가 상상한 원자 폭탄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는 그 파괴적 가능성에 몸서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어 끊임없이 이어진 인류 폭력의 역사에서 가장 최신의 발명일 뿐이었다.

 

p354

 미국 전쟁부가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의 본부로 낙점한 곳은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라는 외딴 장소였다. 그곳을 추천한 사람은 프로젝트 책임자인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그는 10대 때 요양하느라 그곳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텔러에게는 그 원자 폭탄도 성에 차지 않았다. 텔러는 그것보다 더 큰 살해 범위를 가진 무기, 원자 폭탄을 한낱 원자핵으로 이어진 도화선을 당기는 성냥으로 쓰도록 설계된 무기, 나중에 열핵 무기(thermonuclear weapon)라는 이름을 얻을 무기를 꿈꿨다. 그는 애정을 담아서 그 무기를 "슈퍼"라고 불렀다.

 당시 과학계에서 텔러와 극과 극처럼 달랐던 인물을 꼽으라면 조지프 로트블랫(Joseph Rotblat)이었을 것이다. 로트블랫은 폴란드 바르샤바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텔러처럼 모든 것을 잃었다. 나치가 침공해 오기 직전이었던 1939년 여름, 그는 영국 리버풀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런데 떠나기 직전에 사랑하는 아내 톨라(Tola)가 응급 맹장 절제술을 받게 되었고, 톨라는 몸이 여행을 견딜 만큼 회복될 때까지 뒤에 남아야 했다. 톨라는 남편에게 자신은 몇 주 뒤면 뒤따라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혼자 미리 가서 살 집을 준비해 두라고 부득부득 우겼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는 실라르드가 런던 산책 중 처음 떠올렸던 연쇄 핵반응을 개시할 화학적 도화선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자신들이 유례없는 파괴력을 지닌 폭탄을 만드는 것은 그것보다 더 위중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자신들의 정부는 믿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나라 정부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정부는 그런 무기를 선제 공격에 쓰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 과학자들은 핵무기를 핵전쟁의 억지 수단으로 보는 관점을 처음 채택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원자 폭탄을 가진 히틀러에 대한 공포를 자신들의 일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았다. 하지만 독일이 항복하고 히틀러가 죽은 뒤, 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수천 명의 연합국 과학자 중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 한 명이 조지프 로트블랫이었다. 이후 사람들이 그 결정에 관해서 물을 때마다, 로트블랫은 남들보다 그가 더 양심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느냐는 식의 질문에는 늘 아니라고 답했다. 그저 미소 지으면서, 결국 바르샤바를 떠나지 못하고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연락이 끊긴 아내가 몹시 그리웠을 뿐이라고 말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그는 마침내 바르샤바로 돌아가서 아내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찾아낸 것은 사망자 명단에 오른 이름뿐이었다. 톨라는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잃었다. 베우제츠(벨체크) 절멸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로트블랫은 이후 60년을 더 살았다. 재혼은 하지 않았고, 핵무기 감축 운동에 끝까지 앞장섰다.

 

 전쟁 중 원자 폭탄 개발에 나섰던 세 나라 중 종전 전에 성공한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역사학자들은 미국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이민자를 많이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본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사람 가운데 미국 태생은 2명뿐이었고,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1명뿐이었다.

 핵무기가 핵전쟁 억지 수단이 되어 주리라는 과학자들의 생각은 잘못 짚은 것이었다. 결국 미군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해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냈다. 두 달 뒤, 트루먼 대통령이 오펜하이머를 치하하고자 그를 집무실로 불렀다. 트루먼의 입장에서는 실망스럽게도, 오펜하이머는 치하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트루먼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손이 피로 물든 기분입니다."

 트루먼은 넌더리 난다는 표정으로 오펜하이머를 보며 경멸조로 말했다. "바보처럼 굴지 마시오. 손이 피로 물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요.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소."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굽히지 않고 도리어 대통령에게 되물었다. "러시아가 폭탄을 보유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트루먼은 대답했다. "절대 못 가질걸!"

 오펜하이머가 떠나자, 트루먼은 역정 난 얼굴로 보좌관에게 말했다. "저 징징거리는 과하가를 두 번 다시 내 곁에 들이지 마! 알아들었어?"

 그로부터 4년이 채 못 되어, 러시아가 원자 폭탄을 터뜨렸다. 과학자들이 세 통의 편지에서 상상했던 핵무기 경쟁은 더 무시무시한 두 번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전쟁 후, 살해 범위가 더 큰 무기를 개발하고 싶다는 텔러의 꿈이 현실이 되었다 1950년대 초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마녀 사냥이 한창이었들 때, 텔러는 자신의 옛 상사이자 맨해튼 프로젝트를 훌륭하게 이끌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기뿐 마음으로 당국에 귀띔했다. 그는 오펜하이머의 비밀 정보 취급 인가를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리하여 결국 오펜하이머의 경력을 끝장내는 데 일조했다. 오펜하이머는 텔러가 사랑하는 '슈퍼' 폭탄 제작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텔러는 또 "핵무기를 유지하고 개량하기 위해서"는 대기권 핵실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짓 주장을 내세우면서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막든 데 힘썼다.

 

 

p401

 아니면 약 1,000년쯤 전, 아시아 전역의 사람들이 처음 쌀농사를 했을 때 인류세가 시작되었을까? 그들은 써레질과 이앙법이라는 혁신적인 기술을 써서 물 댄 논에 미리 기른 모종을 옮겨 심기 시작했다. 이 근면한 농부들은 이런 벼농사 기법이 소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수억 톤의 메테인을 배출하리라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물 댄 논은 산소를 잃는다. 그러면 눈에 안 보이는 미생물들이 식물성 물질을 소화시켜서 메테인을 내놓는다. 설상가상, 벼잎도 대기로 메테인을 더 내보낸다. 하지만 옛 농부들은 미시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현대 과학이 등장하기 전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들 역시 그저 자신과 가족의 입에 풀칠하려 애쓴 것뿐이었다.

 

p411

 예언이란 트로이 공주의 열렬한 흡소 형태일 수도 있지만, 무미건조한 제목을 가진 과학 논문의 형태일 수도 있다. 「상대 습도의 분포에 따른 대기의 열평형(Thermal Equilibrium of the Atmosphere with a given distribution of relative Humidity)」이라는 제목은 "재앙이 임박했다! 재앙이 임박했다!" 하는 경고로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내용은 분명 그런 내용이었다. 마나베와 동료 리처드 웨더럴드(Richard Wetherald)는 인간이 대기로 내놓는 온실 기체가 증가함에 따라 지구 온도가 어떻게 바뀔지 예측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재앙이 어떻게 펼쳐질지 정확히 내다보았다. 우리 시대는 물론이고 그 너머까지, 멀리 볼 줄 알았다. 요즘도 일부 사람들은 기후 변화를 과학적으로 확실히 확인되지 않은 현상이라고 주장하지만, 만약 그렇다며 마나베와 웨더럴드가 어떻게 향후 50년 이상의 지구 온도 증가세를 그토록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 변화가 인간이 야기한 것이 아니라면, 그 많은 이산화탄소가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이후 다른 많은 기후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해안 도시들의 잦은 범람 : 사실. 바닷물 수온 상승으로 산호의 떼죽음 : 사실. 자연 재해 수준의 폭풍이 더 거세어짐 : 사실. 치명적인 무더위와 가뭄과 걷잡을 수 없는 산불이 유례없는 수준으로 벌어짐 : 사실. 과학자들은 분명 우리에게 경고했다.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판데믹이라는 주제에 대한 시의적절한 내용. 이낙연 전 총리께서 이 책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보고서 읽게 되었다. 이미 판데믹에 대한 여러가지 대비를 전문가들은 준비하고 있었구나라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이 책에 소개된 래리 브릴리언트의 TED강연은 현재의 상황과 맞물려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아래 동영상의 내용은 책과 어우러지는 내용이 많다. 

 

---------------------

p23

 인플루엔자를 비롯한 많은 바이러스가 인간 숙주라는 환경과 타협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 바이러스들은 신속하게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심지어 유전자 재편성reassortment이라 일컬어지는 과정을 통해 자기들끼리 유전자를 교환하기도 한다. 

 2009년, 나는 물론이고 많은 과학자들이 이런 유전자 재편성을 우려했다. H1N1 바이러스가 세계 곳곳에 폭발적으로 확산되면서, 동시에 사람이나 동물의 체내에서 H5N1을 만난다면 천지개벽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잖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조기에 이런 가능성을 알아내어 돌연변이를 일으킨 바이러스들이 확산되는 걸 신속히 차단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나 동물이 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동시에 감염된다면, 그는 효과적인 혼합용기mixing vessel가 되어, 바이러스들이 유전자를 교환할 최적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런 교환이 가능할까? 일종의 유성생식으로 H5N1과 H1N1이 생산하는 모자이크 딸-바이러스는 양쪽 모두의 유전자를 지닐 수 있다. 이런 유전자 재편성은 유사한 성격을 지닌 바이러스들에 의해 복합적으로 감염된 개체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모자이크 딸-바이러스가 H1N1에서는 확산성을 물려받고, H5N1으로부터 치사율을 물려받는다면, 결국 지독한 치사율을 지닌 채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는 바이러스가 될 것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판데믹에 대한 신속한 대응은 지난 100년 동안 세계보건정책의 핵심적 과제였다. 소수이지만 목소리가 큰 과학자들과 나는 백신을 확보하고 치료약을 개발하며 행동방식을 수정하는 정도로 판데믹에 대응해서는 안 되며, 그 이상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ency Virus, HIV에서 확인되었듯이, 그런 전통적인 대응 방식은 실패작이라는 게 이미 입증되었다. HIV는 처음 발견되고 거의 30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확산되고 있으며,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3,300만 명 이상이 감염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HIV가 확산되기 전에 우리가 그 바이러스의 존재를 미리 알아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HIV는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50년 전부터 인간의 몸에 존재했었다. HIV는 확산되기 시작해서 25년이 지난 후에야 프랑스 과학자 프랑수아즈 바레 시누시Francoise Barre-Sinoussi와 뤼크 몽타니에Luc Montagnier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들은 그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만약 HIV가 중앙아프리카를 떠나기 전에 우리가 발견해서 그 확산을 억제했다면, 지금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p38

 새로운 생명체의 발견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새로운 생명체는 프리온이다. 프리온을 발견한 과학자는 그 공로로 199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프리온은 세포도 없고, 지금까지 알려진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자신의 청사진으로 사용하는 유전물질인 DNA나 RNA도 없는 기묘한 병원체이다. 하지만 프리온은 분명히 존속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광우병을 유발하는 병원균으로도 유명하다. 따라서 이제 지상에는 더 이상 새롭게 발견될 생명체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보다 오만한 언행은 없을 것이다. 새롭게 발견되는 생명체가 있다면 십중팔구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한 생명체일 것이다.

 

p43

 바이러스가 언제 어떻게 행동을 개시하느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주변의 환경적 변수들을 주기적으로 점검하는 게 거의 확실하다. 단순 헤르페스 바이러스에 감염된 성인들 중 대다수는 스트레스가 입술 헤르페스의 원인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또 임신이 감염의 원인인 듯하다고 경험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주장들은 아직 추측의 수준에 불과하지만, 바이러스가 극심한 스트레스나 임신으로 인한 환경적인 변화에 활발하게 반응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죽음의 가능성을 뜻할 수 있기 때문에 바이러스에게는 확산을 도모할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숙주의 죽음은 바이러스에게도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편 임신은 출산 과정에서, 혹은 출산 후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입맞춤 과정에서 아기와의 접촉을 통해 바이러스에게 확산될 기회를 제공한다.

 숙주에서 숙주로의 전파는 어떤 감염체라도 본능적으로 바라는 것이며, 일부 감염체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예컨대 '플라스모디움 바이박스 히베르난스'라는 말라리아 원충은 계절까지 고려하는 듯하다. 단순헤르페스 바이러스보다 훨씬 큰 말라리아 원충을 비롯한 기생충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와 같은 감염체이지만, 특히 이들은 진핵동물에 속한다. 따라서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보다 동물에 훨씬 가깝다. 모기를 통해 전파되는 플라스모디움 바이박스 히베르난스는 극지방의 기후에서도 끈질기게 생존한다. 그런 추운 지역에서는 계절적으로, 즉 모기들이 부화하는 짧은 여름 동안에만 모기를 감염시킬 수 있다. 이 말라리아 원충은 일 년 내내 후손을 생산하려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일 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인간의 간에서 잠복한 상태로 보낸다. 그러나 여름이 되면, 생기를 되찾아 후손으로 알을 낳고, 감염된 인간의 피를 통해 확산된다. 말라리아 원충을 깨우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모기에 물리는 순간이 말라리아 원충에게 확산의 계절이 시작되었다는 걸 알리는 것으로 여겨진다.

 

p64

 HIV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생태학적 상호작용에서 시작된다. 즉 중앙아프리카에서 침팬지가 붉은콜로부스 원숭이를 사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많은 사람이 HIV가 198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약 800만 년 전 우리 유인원 조상이 사냥을 시작한 때부터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HIV의 역사는 두 종의 원숭이 - 중앙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붉은머리 망가베이와 큰흰코원숭이-로부터 시작된다. 두 원숭이의 겉모습은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에이즈 판데믹의 중심에 있는 악당처럼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두 녀석이 없었더라면 에이즈 판데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붉은머리 망가베이는 뺨은 하얗고 머리에 붉은 털이 돋은 작은 원숭이로, 10여 마리가 무리지어 살며 과일을 주식으로 삼는 사회성을 띤 종이다. 또한 개체수가 크게 줄어 멸종위기에 처한 취약종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한편 큰흰코원숭이는 무척 작아서 구세계 원숭이Old World Monkey 중 가장 작은 원숭이 중 하나이다. 수컷 한 마리가 암컷 여러 마리로 구성된 작은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며, 포식자의 종류에 따라 경고음을 다른 식으로 낸다.

 두 원숭이의 공통점 중 하나는 자연 상태에서 원숭이면역결핍바이러스Simian Immunideficiency Virus, SIV에 감염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두 원숭이는 각각 이 바이러스의 고유한 변종을 지닌다. 그 원숭이와 조상들이 수백만 년 동안 품고 살았을 변종이다. 두 원숭이의 또 다른 공통점은 침팬지가 그들을 무척 맛있는 먹잇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원숭이면역결핍바이러스는 레트로바이러스retrovirus이다. 달리 말하면 유전암호로 사용하는 DNA가 먼저 RNA로 바뀌고, 다시 우리의 살을 이루는 단백질 단위로 바뀌는 대부분의 생명체와 달리, SIV는 역으로 기능한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에서 '레트로' 바이러스라고 불린다. 레트로바이러스군群은 RNA 유전암호로 시작하며, RNA는 DNA로 바뀐 후에야 숙주의 DNA로 들어갈 수 있다. 그 후에 레트로바이러스는 생명주기를 시작해서 후손을 생산하게 된다.

 다수의 아프리카 원숭이가 SIV에 감염된 상태이다. 붉은머리 망가베이와 큰흰코원숭이도 마찬가지이다. SIV가 야생 원숭이들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편이지만, SIV는 원숭이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SIV가 다른 숙주로 옮겨가면 그 숙주의 생명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

 2003년 베이트리스 한Beatrice Hahn과 마틴 피터스Martine Peeters의 연구팀이 침팬지 SIV의 진화를 역사적으로 추적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거의 10년 동안, 한과 피터스는 침팬지 SIV의 진화를 밝히기 위해 끈질기게 연구를 거듭했고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2003년 그들은 침팬지 SIV가 실제로는 붉은머리 망가베이 SIV의 조각들과 큰흰코원숭이 SIV의 조각들이 뒤썩인 모자이크 바이러스라는 걸 밝혀냈다. SIV는 유전자 조각들을 재조합하거나 교환하는 잠재력을 지녔기 때문에, 침팬지 SIV는 초기 침팬지 조상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침팬지에게서 생겨난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어떤 침팬지 사냥꾼 한 마리가 사냥한 두 원숭이들로부터 즉시, 혹은 바로 그날 SIV에 감염되면서 발단 환자patient zero-새로운 바이러스가 잠복하게 된 종의 첫 개체-가 되었을 것이란 가정은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예컨대 일찌감치 잡종으로 변한 붉은머리 망가베이 바이러스가 침팬지들 사이에서 성행위를 통해 확산되었고, 어떤 침팬지가 다른 침팬지로부터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에, 사냥을 통해 큰흰코원숭이의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발단 환자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큰흰코원숭이 바이러스와 붉은머리 망가베이 바이러스, 둘 모두가 사냥을 통해 침팬지들에게 전달되고 한동안 침팬지들 사이에서 확산된 후에, 어떤 침팬지 한 마리의 체내에서 두 바이러스의 유전자들이 혼합되는 결과가 닥쳤을 수도 있다. 종을 넘나든 정확한 순서가 무엇이든 간에, 어떤 순간에 침팬지 한 마리가 두 바이러스 모두에 감염되었고, 두 바이러스가 유전물질을 재조합하고 교환하면서 망가베이 바이러스도 아니고 큰흰코원숭이 바이러스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모자이크 변종을 만들어냈다.

 이 잡종 바이러스는 망가베이 바이러스도, 큰흰코원숭이 바이러스도 혼자서는 해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침팬지들의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서쪽으로 코트디부아르부터 동쪽으로는 제인 구달이 1960년대에 연구를 시작했던 동아프리카의 서식지까지 침팬지들을 감염시켰다. 현재는 침팬지에게 별다른 해를 입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이 잡종 바이러스는 오랫동안 침팬지들의 체내에서 잠복해 있었지만,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 어떤 시점에 침팬지에게 서 인간에게로 전이되었다. 침팬지가 사냥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다.

 

p89

 우리 조상이 병원균 청소를 거치는 시기 동안, 유인원 사촌들은 여전히 사냥을 계속하고 새로운 병원균을 받아들였다. 또한 인간 계통에서는 사라졌을 병원균들까지 여전히 보유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유인원 계통들은 인간에게서는 사라진 병원균들의 창고였던 셈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우리 혈통에서 사라진 병원균들을 보존한 노아의 방주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랜 세기가 지난 후 인간 세계가 확대되면서 이 거대한 창고가 인간과 충동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곧 인간에게 중요한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p126

 지난 10년간의 연구에서 사람을 감염시키지만 특별한 질병을 야기하지 않는 듯한, 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다수의 바이러스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TT바이러스는 감염된 첫 환자, 이름의 머리글자가 T.T인 일본인 환자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지금까지 TT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지만, 일부 지역에서 상당히 흔한 바이러스이다. 스코틀랜드의 유능한 바이러스 학자 피터 시몬즈Peter Simmonds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유병률이 스코틀랜드 헌혈자의 경우에는 1.9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아프리카 감비아 국민의 경우는 83퍼센트로 놀라울 정도로 높다. 다행히 TT바이러스는 인체에 해롭지 않은 듯하다.

 GB바이러스도 최근에 발견된 바이러스로 많은 사람에게서 발견되지만 아직은 연구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바이러스는 외과의사 G.베이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그의 감염이 바이러스 탓이라고 잘못 진단되었다. 나는 TT바이러스와 GB바이러스를 찾아내는 무척 정교한 방법을 사용해서 두 바이러스를 빈번하게 확인했지만, 놀랍게도 우리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위험한 요인을 포착해낼 수는 없었다.

 TT바이러스와 GB바이러스는 둘 다 흔하지만 모든 사람을 100퍼센트까지 감염시키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 문자에서 유래한 '판데믹'의 정의를 충족하지는 못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소수만을 감염시키는 1단계 바이러스로부터 시작해서, 감염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경우인 6단계까지 판데믹을 모두 여섯 단계로 분류했다.

 세계보건기구는 2009년 H1N1을 판데믹으로 규정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H1N1은 누가 뭐라 해도 판데믹이었다. H1N1은 2009년 초 소수의 감염자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같은 해 말에는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H1N1이 판데믹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확산되는 병원균을 판데믹으로 규정하느냐 않느냐는 치사율과 관계가 없다. 판데믹은 확산력을 뜻할 뿐이다. 1장에서 논의했듯이 H1N1의 치사율이 50퍼센트에 이르지는 않는다고(실제로는 1퍼센트 이하) 말한 바 있지만, 그것이 100만 명을 죽이지고 못하고 중대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솔직히 내 생각에는 판데믹이 세계를 휩쓸어도 우리가 인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TT바이러스나 GB바이러스처럼 외부로 나타나는 증상이 거의 없는 바이러스가 오늘 인체에 침입해서 전 세계로 확산되더라도 우리는 전혀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현재 질병을 탐지하는 전통적인 시스템은 뚜렷한 증상을 나타내는 병원균만을 포착해낼 뿐이다. 따라서 즉각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바이러스는 놓치고 넘어가기 십상이다.

 물론 '즉각적'이란 개념이 '결코'라는 뜻은 아니다. HIV 같은 바이러스가 오늘 인체에 침입해서 전 세계로 퍼지더라도 수년 동안은 탐지되지 않을 것이다. 중대 질병들은 감염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증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HIV는 곧바로 확산되기 시작하지만, 처음에는 상대적으로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 징후로만 나타난다. HIV로 인한 중대 질병인 에이즈는 수년 후에야 나타난다. 따라서 판데믹을 탐지해내기 위한 전통적인 방법들은 주로 증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소리 없이 확산되는 바이러스는 우리 레이더망에서 벗어나 파괴적인 수준까지 확산된 후에야 인간의 경갃김을 비로소 얻게 된다.

 제2의 HIV를 또다시 놓친다면 공중보건정책의 참담한 실패가 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바이러스들이 TT바이러스나 GB바이러스처럼 완전히 무해할 가능성이 높더라도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확산된다면 철저하게 감시할 필요가 있다. 1장에서 보았듯이 바이러스는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언제든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 다른 바이러스들과 재조합되고 유전물질을 혼합함으로써 치명적인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인체에 존재하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산된다면, 우리는 그 바이러스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내야 한다. 선과 악의 경계는 백지장 한 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132

 앞에서 지적했듯이, 향후에 인간을 위협할 새로운 판데믹의 가능성을 지닌 대부분의 병원균은 동물의 체내에 존재한다. 가축화된 동물들도 분명히 위협요인이다. 그러니 가축들에게 원래 존재했던 병원균의 대부분은 이미 인간에게 전이되어 인간의 병원균 레퍼토리를 구성하는 역할을 끝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제 가축으로부터의 위협은 야생동물의 병원균을 인간에게 옮기는 매개 역할을 하는 경우이다. 게다가 가축의 절대 숫자는 상당히 많지만, 우리가 동물의 세계에서 극히 일부만을 가축화했기 때문에 포유동물의 다양성에 비교하면 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새로운 판데믹에 관한 한 야생동물이 기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p196

 1993년 6월 옴 진리교도들은 동경 동부의 가메이도 지역에 있는 8층 건물 옥상에서 탄저균Bacillus Anthracis의 현탁액을 살포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인구밀도도 높은 도시에 생물학적 테러를 감행한 것이었다.

 다행히 그들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2004년에 쓰인 분석에 따르면, 그들이 상대적으로 양성이었던 데다 세균포자의 밀도가 낮은 탄저균 변종을 선택했고, 살포 방식도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1993년의 사건은 용두사미격인 미풍으로 끝났다. 한 사람도 탄저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일부 애완동물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옴 진리교가 더 치명적인 탄저균 변종을 선택해서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으로 살포했더라면, 내가 위에서 언급한 시나리오에 가까운 사건이 닥쳤을 것이다. 실제로 그 종말론자들은 탄저균만을 배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수의 실험실을 차려놓은 채 보툴리누스 독소, 탄저병, 콜레라, Q열 등 다양한 병원균을 배양하고 있었다. 1993년 그들은 다수의 의사와 간호사를 데리고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들어갔다. 표면적으로는 의료봉사를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에볼라 바이러스를 분리한 샘플을 반입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p198

 생물학적 테러의 위험을 과소평가한다면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테러집단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판단에 따르면, 생물학 무기가 인간에게 사용될 가능성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토록 치명적인 병원균이 합법적인 연구소에서, 혹은 무책임한 테러집단의 작업장에서 배양될 수 있다는 사실은 세계적인 판데믹의 가능성에 또 다른 위협요인이다.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테러집단이 현재 극소수만 남아 있는 천연두 바이러스 샘플을 손에 넣는다면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다. 천연두는 자연상태에서 박멸된 지 오래인 반면에, 천연두 바이러스는 단 두 세트만이 안전한 곳에 철저하게 보관되어 있다. 하나는 미국 애틀랜타의 질병통제예방센터에, 다른 하나는 러시아 콜초보의 국립 바이러스학 및 생물학 연구센터VECTOR에 보관되어 있다. 두 곳은 생물학적 안전성에서 최고등급인 4단계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한때 이곳에 남아 있는 재고마저 없애려는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백신과 치료제의 생산에 이 살아 있는 바이러스의 잠재적인 필요성 때문에 지금까지 결정이 미뤄지는 있는 실정이다.

 흥미롭게도 2004년에 천연두로 의심되는 부스럼 딱지가 뉴멕시코 산타페에서 발견되었다. 예방접종으로 생긴 부스럼 딱지라고 쓰인 봉투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어떤 실험실의 냉동고나 다른 어떤 곳에 상당한 천연두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증거였다. 천연두 바이러스가 의도적으로, 심지어 사고로라도 살포된다면 그 결과는 끔찍할 것이다. 천연두는 박멸되었기 때문에 천연두를 예방할 백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연두가 어떤 형태로든 방출된다면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것이고,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다.

 또 다른 위험은 '바이어에러bioerror'이다. 생물학적 테러bioterror와 달리 바이오레어는 인간의 실수에 의해 병원균이 우연히 방출되어 널리 확산되는 경우이다. 2009년 박사후과정의 지도교수였던 돈 버크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들의 발생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에서 버크는 인간 세계에 확산된 다양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들을 분석했다. 특히 눈에 띄는 사례 중 하나는 1977년 11월 소련과 홍콩 및 중국의 남동부를 강타한 유행성 독감이었다. 문제의 바이러스는 20년 전에 집단 발병했던 유행성 독감의 바이러스와 거의 똑같았지만 그 이후로 바이러스가 발견된 사례가 없었다. 버크와 그의 동료들은 문제의 바이러스를 초기에 추적한 결과, 실험실에 보관되었던 바이러스가 우연히 실험실 직원의 몸에 침입하여 그로부터 확산되었을 거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나면 일반대중도 상세한 생물학적 정보와 기법에 접근해서 단순한 병원균들을 배양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생물학적 테러와 바이오에러가 급증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물학적 실험은 주로 안전한 연구실에서 진행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2008년 뉴욕 시에 사는 두 명의 10대 소녀가 한 연구소에 초밥 샘플을 보내왔다. 이 연구소는 유전자 검사를 단순화하고 표준화하려는 프로젝트를 시행하는 곳인 DNA바코드 데이터베이스 프로젝트 센터였다. 두 소녀는 고가의 초밥이 실제 가치보다 비싸게 팔린다는 것을 알아냈고, 동시에 당시 과학자들에게만 허용되던 유전정보를 얻어내는 방법까지 알아냈다.

 요컨대 두 학생은 초밥 연구를 통해서 뉴욕 시의 초밥 장사꾼들이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운다는 사실만을 알아낸 것이 아니었다. 두 소녀의 초밥 연구는 비과학자가 유전정보를 읽어낸 가장 유명한 초기 사례 중 하나였다. 정보기술IT 혁명의 초창기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만이 HTML 같은 코드를 읽고 쓸 수 있었다. 그 후에는 프로그래머가 아닌 일반사람들도 코드를 읽고 쓰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누구나 블로그와 위키 및 게임에서 무리 없이 코드를 읽고 쓴다. 정보를 공유하는 모든 시스템이 그렇듯이, 고도로 전문화된 것으로 시작한 것이 어느새 보편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멀지 않은 미래에는 직접 생물학적 실험을 시도하는 소규모 집단이 보편화될지도 모른다. 그런 세계에서는 바이오에러를 관리하고 감독해야 할 필요성이 실질적으로 대두될 것이다. 영국왕실협회의 전 회장 마틴 리스Martin Rees 경은 유명한 예언에서, ".... 2020년쯤에는 바이오에러나 생물학적 테러가 현실화되어 수백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갈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파이프 폭탄이나 필로폰 제조공장을 만들던 화학이 바이러스 폭탄을 제조하는 생물학으로 바뀌고 있다.

 

p212

 가축의 수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많지만, 가축이 도축되어 고기로 가공되는 과정도 가축화가 시작된 이후로 행해지던 방법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역사적으로 한 마리의 동물을 도축하면 한 가족, 많으면 마을 사람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가공육이 등장하면서부터 우리가 야구경기를 보면서 먹는 핫도그는 다수의 종(돼지, 칠면조, 소)으로 이루어지며, 수백 마리의 동물에게서 얻은 고기로 만든 것일 수 있다. 따라서 그런 핫도그를 먹으면, 수십 년 전이었다면 농장 전체에서 뛰놀던 동물들을 골고루 맛본 셈이 된다.

 다수와 동물 고기를 혼합한 가공육을 만들어 사람에게 유통시키면서 부작용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수천 마리의 동물 고기를 수많은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오늘날 육식을 즐기는 사람이면 평생 수십억 마리의 동물에서 얻은 고기를 조금씩 먹는다는 뜻이 된다. 과거에는 한 사람의 소비자가 한 마리의 동물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제는 동물의 고깃덩이들과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고기가 요리되는 과정에서 많은 위험이 제거되는 건 확실하지만, 무수한 숫자로 구성된 거대한 네트워크에서 못된 병원균 하나가 인체로 전이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양의 뇌가 광범위하게 파괴되어 스폰지처럼 구멍이 뚫리는 신경질환인 스크래피scrapie,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광우병으로 주로 알려진 우해면양뇌증BSE 에서 바로 위의 현상이 일어났던 것으로 여겨진다. BSE는 1장에서 언급했던 프리온으로 알려진 감염균들 중 하나이다.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와 기생충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여느 생명체와 달리, 프리온에는 생물학적 유전자지도(즉 RNA와 DNA)가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생명체를 구성하는 유전물질과 단백질의 결합체가 아니라 프리온에는 단백질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유기적인 역할을 못할 듯하지만, 프리온 역시도 확산될 수 있고 더구나 중대한 질병을 야기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BSE는 1986년 11월 처음 확인되었을 때, 이 병에 걸린 소들의 특이한 증상 때문에 소에게 발생하는 신종질환으로 여겨졌다. 병에 걸린 소들은 제대로 서 있거나 걷지도 못하고, 수개월이 지나면 격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죽어버린다. 아직도 광우병이 소에게 발생한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연구에 의하면 오히려 양이 그 기원으로 여겨진다. 1960년대와 1970년에 소의 사료 제조가 산업화되었을 때, 죽은 양들을 육분과 골분으로 만든 사료가 있었다. 양은 스크래피로 불리는 프리온 질병을 지닌 것으로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죽은 양을 소의 사료로 가공했기 때문에 그 병원균이 소에게 전이되어 적응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에게 전이된 BSE는 다시 사료를 통해 확산된다. 죽은 양처럼 죽은 소도 소의 사료를 만드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리온이 양에서 소에게로 옮겨갔기 때문에 그 감염된 소를 이용해 가공한 육분과 골분을 통해 다음 세대의 소들에게로 전이된 듯하다. 프리온의 확산은 상당히 놀라웠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기간 동안에 100만 마리 이상의 소가 감염되어 먹이사슬에 유입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러나 이런 프리온들이 모두 소에게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BSE가 처음 확인되고 약 10년 후, 영국 의사들은 프리온에 감염된 쇠고리를 먹어쓸 것이라 판단되는 사람에게서 치명적인 퇴행성 신경질환neurodegenerative disease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환자들은 치매와 격심한 근육경련 및 근육협응 퇴화 등의 증세를 보였다. 환자들의 뇌가 감염된 소들의 뇌와 정확히 똑같은 식으로 구멍이 뚫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감염된 인간의 뇌 조직을 이식 받은 영장류들에게도 이 질병에 전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인간 환자들도 BSE에 감염된 것이지만, 똑같은 질병이 인간에게서 발견되면 변종 크로이츠펠트 야곱병vCJD이 된다.

 지금까지는 vCJD 환자가 24명밖에 확인되지 않았지만, 확정적인 진단이 어렵기 때문에 분명히 더 많은 환자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vCJD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부분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감염된 사람들은 감염된 소의 조직에 접촉한 것이 확실하며 치명적인 뇌장애로 이어지는 유전적 감수성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진다. 건강한 환자에서 추출한 편도선과 충수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영국에서 광우병이 유행하던 동안 그런 소와 접촉한 4,000명 중 한 명꼴로 질병의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는 보균자가 나왔다. vCJD는 장기이식을 통해서도 전이되는 것으로 이미 입증되었고, 수혈을 통해서 전이될 가능성 또한 있기 때문에 위의 결과는 무척 우려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p218

 현재 피츠버그대학교 보건대학원 원장인 돈 버크는 바이러스들의 재조합으로 새로운 판데믹이 발생하는 과정을 경고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버크는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발적 유전자emerging gene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역사적으로 바이러스 학자들은 새로운 유행병에 대하여 동물에서 인간에게 전이되는 병원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HIV와 인플루엔자와 사스에서 보았듯이, 유전자 재조합과 재편성이 새로운 유행병의 근원인 경우가 더 많다. 

기존의 병원균 하나와 새로운 병원균 하나가, 즉 두 병원균은 하나의 숙주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할 때 서로 영향을 미치며 유전물질을 교환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변형된 병원균은 확산되어 완전히 새로운 판데믹, 따라서 전혀 대비되지 않은 판데믹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판데믹의 원인은 새로운 병원균이 아니라, 새로이 교환된 유전정보, 즉 창발적 유전자를 지닌 병원균이다.

 앞으로 우리는 판데믹의 위협에 더욱 시달리게 될 것이다. 새로운 병원체가 확산되어 질병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가 열대우림으로 더 깊이 들어가, 전에는 국제교통망과 단절되어 있던 병원체들과 접촉함에 따라 새로운 판데믹이 끊임없이 출현할 것이다. 높은 인구밀도, 전통음식들, 야생동물 거래 등이 복합되면 이 병원체들이 때를 만난 듯이 확산될 것이다. HIV로 인한 면역결핍으로 새로운 병원체들이 약해진 인간의 몸속에서 쉽게 적응할 위험률이 높아졌기 때문에 유행병의 충격은 더욱 클 것이다. 우리가 동물들을 신속하고도 효율적으로 세계 어느 곳으로든 운송하게 되면서 동물들은 어디에나 새로운 유행병의 씨를 뿌릴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서로 만난 적조차 없던 병원균들이 어디에서든 만나 새로운 모자이크 병원체를 형성하기도 하며, 부모 세대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던 방식으로 확산될지도 모른다. 요컨대 우리는 앞으로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드는 새로운 유행병들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닥칠 유행병들을 더 효과적으로 예측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유행병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할지도 모른다.

 

p296

 

 대부분의 사람은 병원균에 대해 생각할 때, 인간과 세균의 전쟁이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조금만 창의적으로 생각하면 병원균들 간의 전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게다가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우리는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병원균들이 형성한 공동체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 공동체에서 병원균들은 자기들끼리, 또 우리와 싸우고 협조하며 살아간다.

 

 우리 몸을 생각해보자. 머리부터 발끝 사이에서 10개의 세포 중 하나만이 인간이다. 나머지 9개는 우리 피부를 뒤덮거나 우리 내장에서 살아가며, 우리 입안에서는 번성하는 박테리아 덩어리들이다. 유전정보의 다양성을 이런 식으로 비교하면, 피부와 체내에 존재하는 1,000개의 유전정보 중 하나만이 인간의 것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수천 종에 달해 어디에서나 수적으로 인간 유전자를 훌쩍 넘어선다.

 

 우리 몸에 존재하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 모든 병원균을 합해서 미생물상microbiota이라 칭하고, 그 병원균들의 유전정보를 모두 합해서는 미생물군계microbiome라 칭한다. 5년 전부터 인간 미생물군계를 연구하는 새로운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수천 종류의 병원균을 개별적으로 배양하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건너뛰게 해주는 새로운 분자 기법들의 등장에 힘입어, 과학자들은 우리 몸 전체에서 인간 세포와 병원균 세포를 구성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속속 밝혀지는 결과들은 흥미진진하다. 우리 내장은 병원균들의 복잡한 군집들로 가득하고, 대다수의 병원균들이 비유해서 말하면 '장기 거주자'들이다. 그 병원균들은 무임 승객들이 아니다. 우리가 섭취하는 식물성 물질이 소화되려면 박테리아와 박테리아 효소가 필요하다. 인간 효소만으로는 식물성 물질을 소화할 수 없다. 병원균 군집이 어떻게 구조화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진다.

 

 미국의 생물학자 제프 고든Jeff Gordon은 제자들과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자들(그들 중 다수가 지금은 똑ㄱ교수로 활동하고 있따)의 도움을 받아, 우리 내장에 존재하는 병원균 군집들이 무척 중요하다는 걸 입증해냈다. 예컨대 박테로이데테스Bacteroidetes라는 특수한 박테리아군群의 상대적으로 낮은 비율과 관계가 있다는 걸 밝혀냈다.

 

 고든 연구팀은 비만자들의 미생물상이 똑같은 음식에서 얻을 수 있는 열량을 증가시킨다는 것도 입증했따. 게다가 정상적인 생쥐의 장내 미생물상을 비만인 생쥐의 미생물상으로 교체하면, 정상적인 생쥐의 체중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내장에 기생하는 박테리아가 비만과 중대한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자궁경부암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어떤 만성질환의 원인이 병원균이면 그 질환을 상대적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는 활생균probiotics과 항생물질을 결합함으로써, 우리 내장의 미생물상을 신중하게 교체해서 건강한 체중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우리가 치명적인 병원균들에게 영향을 받는 정도에서도 우리 내장에 우글거리는 미생물 군집들이 적잖은 역할을 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식중독의 주된 원인 중 하나인 치명적인 박테리아, 살모넬라균에 의한 식중독의 경우, 가장 큰 위험인자는 안전하지 않은 달걀의 섭취와 항생제의 사용으로 한동안 여겨졌었다. 살모넬라균에 감염된 닭은 달갈까지 감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달걀의 섭취가 위험할 수 있다고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항생제의 사용이 위험인자로 꼽힌 이유는 그야말로 미스터리였다.

 장내 미생물군계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그 미스터리가 조금이나마 풀릴 듯하다. 스탠퍼드대학교의 저스틴 소넨버그Justin Sonnenburg 교수가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중요한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실험실에서 무균 생쥐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 무균 생쥐들은 완전히 멸균된 환경에서 살아간다. 녀석들은 압력솥에서 살균되어 병원균이 완전히 제거된 음식만을 섭취한다. 따라서 미생물들이 숙주의 장내에서 다양한 미생물상을 만들어내는 정확한 결정요인들을 찾아내기에 완벽한 표본들이다.

 항생제 사용이 이로운 병원균을 죽이며, 우리의 장내의 병원균들이 살모넬라균처럼 새로운 파괴적인 세균을 대비하는 자연방어막을 허물어뜨린다는 의심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소넨버그의 실험실에서 시도되는 작업이 조만간 그 해답을 우리에게 전해주리라 믿는다.

 우리를 돕고 지켜주며, 체내에서 조용히 살면서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친절한 병원균들이 있다. 물론 우리 몸밖에도 선량한 병원균들이 있다. 우리 몸 안에, 혹은 자연 환경에 존재하는 어떤 병원균이 우리에게 이롭고, 어떤 병원균이 악당인지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면 대부분이 뜻밖에 사실에 깜짝 놀랄 것이다. 해로운 병원균이 소수에 불과하다는 게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중보건이 완전히 멸균된 세계를 목표로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해로운 병원균을 찾아내서 통제하겠다는 목표이면 충분하다. 음흉하고 해로운 병원균들을 척결하는 지름길을 이로운 병원균들을 왕성하게 키워내는 것일 수 있다.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체내에 기생하는 병원균들을 죽이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런 병원균들을 활성화하는 방식으로 악랄한 병원균들로부터 우리 몸을 지킬지도 모른다.

 

p303

 H1N1 인플로엔자(돼지독감)가 판데믹으로 발전한 초기에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글로벌 질병탐지 및 응급대응팀 침장인 스콧 두웰Scott Dowell의 도움을 받아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상황실을 둘러보았다. 당시 팀원들은 멕시코에서 봇물처럼 밀려드는 보고들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또 세계보건기구가 판데믹을 비롯해 화급하게 대응해야 할 보건 문제가 닥쳤을 때 사용하는 상황실도 살펴보았다.

 내가 운영하는 조직 '글로벌 바이러스 예보Global Virus Forecasting, GVF'는 세계보건기구 산하에 조직된 집단발병 경보 및 대응을 위한 네트워크Global Outbreak Alert Response Network, GOARN의 일원이다. 안타깝게도 관료주의적인 절차, 불충한데다 들쑥날쑥한 지원, 먹이사슬에서 위에 있는 사람들의 변덕에 따라 걸핏하면 수정되는 목표 때문에 질병통제 예방센터와 세계보건기구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조직들이 더 강해져야 한다. 더 많은 지원을 받아 더 좋은 장비로 무장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때가 오더라도 항상 더 많은 지원과 장비가 필요할 것이다.

 

p305

 생물의 역사에서 초기에 일어난 몇몇 사건들로 바이러스 폭풍을 위한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졌다. 예컨대 사냥의 도래로 우리의 생물학적 계통에서 어떤 종이 동물들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새로운 병원균들이 인류 이전의 조상에게 침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멸종에 가까운 사건이 있은 후로 우리가 병원균들에 대처하기에 미흡한 상황이 닥친 듯하다.

 또한 인구가 증가하고 세상이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우리는 조금씩 폭풍의 중심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도 말했다. 동물들의 가축화, 나날이 확대되는 도시화, 경이로운 교통 시스템으로, 지상에서 생명이 탄생한 이후로 모든 개체군이 전례 없이 긴밀하게 연결된 세상이 되었다. 특히 인간은 장기이식과 주사요법을 발명하면서, 병원균이 확산되어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통로를 열어놓았다.

 

 

 

 미생물학 전문가로서 나는 "감염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행동하십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첫째로, 귀찮더라도 내 예방 상태에 허점이 없도록 유지한다. 예컨대 말라리아 지역에서 지낼 때는 말라리아 예방주사를 고박꼬박 맞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호된 홍역을 치른 후에야 예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겨울철에는 호흡기 질환의 전염경로를 항상 염두에 두고, 호흡기 질환에 걸리지 않으려 애쓴다. 대중교통은 많은 사람이 이용하기 때문에 무척 위험하다. 그래서 지하철이나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는 손을 씻거나, 알코올을 기반으로 한 간단히 손세정제를 이용한다. 또한 많은 사람과 악수를 나누면 곧바로 손을 씻거나, 쓸데없이 코나 입을 만지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한다. 언제나 깨끗한 음식을 먹고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하지 못한 섹스로 인한 위험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어디에서 사느냐에 따라 대답은 달라진다. 깨끗한 물과 백신, 효과 있는 말라리아 약과 콘돔이 안타깝게도 아직 보편적이지 않다. 이 정도의 안전장치는 모두를 위해서라도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집단 발병이 발생할 때, 뉴스 보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위험 정도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자주 받는 편이다. 유행병의 몇 가지 특징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면 적절한 대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병원균이 어떤 식으로 확산되고 있는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파되는가? 감염된 사람들의 치사율은 얼마나 되는가? 치사율이 무척 높더라도 확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이는 반대로 일반적인 치사율이지만 꽤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판데믹보다는 덜 걱정스러운 일이다. 에볼라 바이러스처럼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병원균이라고 항상 전세계를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 유두종 바이러스HPV처럼 유순한 바이러스가 때로는 전 세계를 공포에 빠뜨릴 수 있다. 다행히 확산성과 치사율 같은 기본적인 사실만 파악해도 유행병의 위험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당신이 한 곳에서 양질의 삶을 산다고 해서 판데믹의 위험에서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HIV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감염시킨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만이 아니라 부자도 HIV를 피해가지 못했다. HIV는 건강관리를 거의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악영향을 주었지만, 세계에서 최고의 건강관리를 받는 사람들, 특히 혈우병 환자들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로 이어진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p310

 미래의 판데믹을 저지하려는 우리 노력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걸림돌은 위험에 대한 대중의 어설픈 판단이다. 판데믹 에방 분야에서 초석을 놓은 학자 중 한 명이며, 지금도 여전히 판데믹 예방의 중요성을 역설해온 래리 브릴리언트가 2010년 스콜 세계포럼에서 '위험 판단능력risk literacy'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미래의 판데믹을 저지하는 데 작은 도움을 주려는 바람' 덕분에 권위 있는 TED상을 수상한 브릴리언트는, 과거 구글에서, 그리고 지금은 스콜 세계위협요인기금에서 뛰어난 리더십으로 판데믹 예방운동을 출범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천연두 박멸 프로그램에서도 핵심적 팀원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위험 판단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브릴리언트만큼 적합한 사람은 없다.

 '위험 판단능력'이란 무척 중요한 개념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대중이 판데믹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고 적합하게 해석할 수 있게 만들자는 개념이다. 따라서 판데믹 예방을 위해서는 대중의 위험 판단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양한 수준의 위험을 구분하는 능력, 즉 위험 판단능력은 정책결정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자연재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무엇보다 대중이 침착성을 유지하며 지시를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 언론이 끝없이 쏟아내는 위협적인 소식에 대중은 만성적인 위험 불감증에 걸린 듯하다. 이런 불감증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모두가 위험을 정확히 인지하고, 여러 형태의 재앙들이 어떻게 다른지 평가할 수 있어야 하며, 각 재앙에 따라 적절히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위험 판단능력이 일반화되면 판데믹을 예측하고 예방하는 데 필요한 정부의 막대한 비용을 국민에게 지원 받기에도 유리할 것이다. 또한 한정된 재원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최적의 방법인지 판단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2001년 4월부터 2002년 8월까지 전세계에서 약 8,000명이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이 기간에는 9·11 테러까지 있었다. 2009년 4월부터 2010년 8월까지, 8년 후이지만 같은 기간 동안 H1N1 판데믹만으로 1만 8,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따. 그런데도 대부분이 H1N1을 시시하게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1만 8,000명이란 숫자가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위협에 대비할 때 고려해야 할 유일한 변수가 사망자 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서 투자하는 수조 달러가 실제 위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많은 돈이라는 생각을 지우긴 힘들다.

 

p314

 우리가 어떤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현장 정보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따라서 우리 작업의 근간은 세계 각지의 현장에서 실시되는 노력들이다. 현재는 동물에게 기생하지만 인간에게 침입할 가능성이 있는 병원균을 찾아내는 것이 현장의 목표이다. 또 우리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방식으로 질병을 유발할 가능성을 지닌 병원균들, 특히 이미 인체에 침입한 병원균들을 추적하는 것도 GVF의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덧붙이면, 새로운 집단 발병과 유행병이 전통적인 보건기구와 미디어 조직의 레이더망에 걸리기 전에 먼저 포착해내는 것도 우리의 과제이다.

 이런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 병원과 진료소의 상황을 정기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또한 우리 판단에 '파수꾼' -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거주지나 고유한 행동 습관 때문에 병원균이 널리 확산되기 전에 남보다 먼저 감염되는 사람 - 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관찰한다. 수렵꾼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한 덕분에 우리는 과거에 알려지지 않은 상당수의 병원균을 발견한 성과를 거두었다. 힘들게 수집한 이런 감시 자료들을 활용해서, 우리는 인간파보 바이러스 4 human parvovirus 4 처럼 기존에 알려진 바이러스들이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는 증거를 객관적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새로운 동물 병원균이 판데믹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돌입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파수꾼을 연구하는 우리 모델은 무척 성공적이었다는 게 입증되었다. 미국국제개발처의 EPT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한 협력 조직들, 국방부와 다른 협력 조직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현재 20여 개에서 '파수꾼 모델'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파수꾼 모델을 진행 중인 나라들에서도 동물과 자주 접촉하기 때문에 동물로부터 새로운 병원균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더 폭넓게 감시해야 하고, 더 넓은 지역에서 감시 활동을 펼쳐야 한다. 또한 지금보다 더 많은 나라로 파수꾼 모델을 확대해야 한다. 판데믹의 가능성을 감시하는 작업은 더 큰 관점에서 봤을 때 이제야 첫걸음을 때었을 뿐이다.

 병원균이 동물로부터 인체로 침입하는 지점, 즉 파수꾼을 연구할 뿐 아니라, 병원균이 확산되는 네트워크에서 중추적인 위치에 있는 중요한 개체군을 광범위하게 감시하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다. 예컨대 정기적으로 수혈을 받는 사람들을 면밀하게 추적한다. 그들 중 일부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백 번의 수혈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질병이 나타난다면 그들이 가장 먼저 감염되어 그와 관련된 징후를 보여줄 것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어 새로운 병원균에 가장 먼저 감염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집단들이 많다. 의료 종사자와 항공기 승무원이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이런 직업군들을 하나씩 꾸준히 우리 감시 시스템 안에 끌어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물들도 무척 중요하다. 9장에서 간략하게 설명했듯이, 나는 GVF의 생태학팀 팀장 매슈 르브르통의 도움을 받아 현장에서 실험실 여과지를 이용해서 동물들로부터 혈액 표본을 다량으로 신속하게 수집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요즘에는 이 방법 이외에 동물의 급격한 사멸animal die-off 까지 면밀히 감시한다. 카메룬에서 유인원들이 탄저병에 쓰러지며 죽어갔듯이, 지상 어딘가에서 매일 일군一群의 야생동물이 죽어간다. 동물세계에서 소규모로 일어나는 집단 발병은 자연계에 어떤 병원균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동물의 급격한 사멸은 인간에게 곧 닥칠 어떤 집단 발병의 전조일 수 있다. 남아메리카를 휩쓴 황열이 대표적인 예이다. 열대우림에서 원숭이가 죽은 후에 인간 정착민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사건이 종종 벌어진다. 하지만 요즘에는 동물의 급격한 사멸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세계 전역에서, 특히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숲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는 사냥꾼들의 도움으로 동물의 급격한 사멸 현상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어떤 동물이 떼죽음할 때마다 우리가 빠짐없이 안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현재는 그런 중요한 정보를 거의 놓치고 있는 실정이다.

 GVF의 대다수 현장에서는 새로운 병원균을 찾는 데 열중하는 반면에, 일부 현장에서는 이미 알려진 병원균 하나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예컨대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는 GVF의 현장 작업과 실험실 작업을 지휘하는 바이러스 학자이자 현장 유행병학자인 조지프 페어Josepth Fair 가 라사열Lassa Fever로 알려진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이해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첨단 방법을 동원해 힘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라사 바이러스는 설치동물이 인간에게 옮기는 위험하고 흥미로운 바이러스로, 주로 오염된 음식을 통해 전이된다.

 라사 바이러스는 에볼라 바이러스나 마르부르크 바이러스 못지않게 파괴적인 증상을 야기한다. 조지프 페어가 시에라리온의 라사열 현장에서 개발한 모델은 라사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에볼라 바이러스와 마르부르크 바이러스까지 파악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런 바이러스들을 예측해서 대처하기에 최적인 모델이다. 라사열 이외에 모든 출혈열 바이러스들 - 에볼라 바이러스와 마르부르크 바이러스도 여기에 속한다 - 로 인한 전염병은 서아프리카에서 간헐적으로만 발생한다. 그러나 라사열은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일상의 한 부분이다. 간헐적으로만 발생하는 바이러스들까지 철저하게 감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페어는 시에라리온의 곳곳에 설치한 현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이런 바이러스들이 확산되기 전에 그 바이러스들을 포착하고 통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들을 연구하며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전염병의 집단 발병을 다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시에라리온의 현장은 흥미진진한 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 생물학적 오염도가 무척 높은 곳인데다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도외시한 채 세계인의 목숨을 구하려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에라리온은 그런 의미에서만 중요한 곳이 아니다. 우리가 이곳의 현장에서 라사열을 예측하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법을 알아낸다면, 에볼라 바이러스와 마르부르크 바이러스 같은 출혈열 바이러스들까지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p319

 우리는 중앙아프리카에서 함께 일하는 야생동물 사냥꾼들에게 새로운 바이러스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방법을 찾아ㅐ고자 한다. 중앙아프리카는 HIV가 처음 출현했던 곳이기 때문에, 사냥꾼들은 새로운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중앙아프리카에 처음 들어가 연구를 시작하며, 사냥꾼들에게 야생동물의 사냥과 도살에서 비롯된 위험을 언급했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을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 부모와 조부모도 똑같은 식으로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는 많은 것들만큼 사냥과 도살이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연구했던 모든 곳에서 사냥꾼들은 내게 그런 식으로 반응했다. 그들의 설명은 틀린 데가 없었다. 말라리아, 비위생적인 물, 빈약한 영양공급 등으로 죽음이 일상사인 환경에서, 동물을 통해 침입하는 새로운 병원균은 사소한 위험에 불과한 듯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사소한 위험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비극이다. 생계형 사냥꾼들이 사냥을 포기할 때 감수해야 할 영양 부족과 그 밖의 대가에 비하면, 새로운 치명적인 질병에 걸릴 위험은 대수롭지 않다. 그러나 지극히 다양한 병원균들로 뒤범벅인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야생동물을 사냥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병원균의 출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드는 셈이다. 온 세상을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 병원균이 출현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위의 문제는 사냥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사냥에서 비롯되는 위험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하지만, 진정한 적은 가난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이 만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냥의 위험을 설명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가난한 지역 주민들이 영양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데도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들이 위험한 사냥을 대신할 대안을 찾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들이 자기 가족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사냥한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는 '건강한 사냥꾼 프로그램'을 더 많은 지역으로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발 및 식량지원조직들과 연대해서 그들에게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공해주려고도 노력한다. 

 중앙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아마존 분지 등과 같이 바이러스가 극성인 지역에서 생존을 위한 사냥을 근절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할 것이다. 야생동물의 사냥은 판데믹의 위험을 고조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구의 생물학적 유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재생 불가능한 동물성 단백질원을 주식으로 삼는 가난한 집단의 식량 확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 차원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비용을 아깝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판데믹을 저지하고 생물다양성을 보존하려는 부유한 사람들의 이기적인 목적도 충족시키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합리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야생동물고기 문제는 멸종 위기에 처한 종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멋에 겨워 제기하는 문제가 아니다. 야생동물고기가 세계인의 건강을 위협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 문제를 간과할 수 있겠는가?

 

p322

 에이즈로 인해 면역기능이 떨어지면 새로운 병원균들이 인체에 침입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따라서 사냥으로 야생동물들과 자주 접촉하는 오지의 사람들에게까지 에이즈를 억제하는 항레트로 바이러스 제제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면역학 전문가인 데비 벅스Debbie Birx와 이 분야의 몇몇 선구자들과 함께 이런 작업을 해왔다. 벅스는 월터리드 육군연구소WRAIR에서 성과가 좋은 연구팀을 감독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왔지만, 지금은 질병통제예방센터에서 글로벌 에이즈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항레트로 바이러스 제제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들에게까지 공급하는 기초적인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 각자가 이 과정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정책결정자들과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가하며, 판데믹 예방을 위한 장기적인 접근 방법을 지원해야 한다. 또한 특정한 위협에 단순히 집중하는 방식보다 미래의 판데믹을 통제하려는 포괄적인 접근방식에 더 많은 연구기금을 지원하라고 정부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

 지금 이 세계가 매우 이상적인 세계라면, 아마도 최근에 판데믹이 있은 직후에 몇몇 선각자들이 제안한 변화를 우리는 받아들여야 했다. 2009년 롱비치에서 열린 TED 회의에서, 엔터테인먼트 법전문가 프레드 골드링Fred Goldring은 우리에게 '안전한 악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손을 맞잡는 대신에 팔꿈치를 맞대는 식으로 악수법을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하면 손바닥보다 팔뚝에 대고 재채기를 하는 셈이기 때문에 감염성 질환의 확산을 막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악수 대신에 한국이나 일본처럼 허리를 굽히는 인사법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 학자는 한 명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분명 한국식의 인사법이 감염성 질환의 확산을 줄이는 효과가 있으리라 예상된다. 또 독감에 걸리면 수술용 마스크를 쓰는 관습도 병원균의 확산을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다. 물론 습관을 바꾸기는 무척 어렵겠지만, 현재의 습관을 유용한 방향으로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과거의 데이타와 선입견에 사로잡힌 우리의 잘못된 상식을 교정할 수 있는 책.

최신의 통계를 바탕으로 이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내용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스웨덴 태생의 의사 겸 통계학자로서 20년 이상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양인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가지는 선입견에 의한 왜곡과 그로 인해 발생한 오해와 무지가 얼마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과거에 유럽이 산업발전을 거치면서 이미 지구에 끼쳐왔던 환경파괴와 같은 해악들을 이유로 중국, 인도와 같은 개발국들에게 하는 무리한 요구의 뻔뻔스러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선입견과 뻔뻔함을 밝히는 수단으로서 데이터의 수집과 정합성 있는 통계적 해석에 힘써왔다.

 2017년 2월에 사망한 저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책으로 평생의 역작이라 할만하다. 아마도 더 사셨으면 좋은 책을 더 많이 썼을텐데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

1장. 간극본능(Gap Instinct)

 

2장. 부정본능(Negativity Instinct)

 

p95. 부정본능

 그런 식의 생각은 대개 부정 본능 때문이다.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더 주목하는 본능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작용한다. 하나는 과거를 잘못 기억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언론인과 활동가들이 사건을 선별적으로 보도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상황이 나쁜데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말하면 냉정해 보이기 때문이다.

 

p102. 나쁘지만 나아진다

 부정적 뉴스를 볼 때 더 긍정적 뉴스로 균형을 맞추는 것은 해법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기만하고, 안심시키며, 반대 방향으로 호도하는 편향일 뿐이다. 마치 설탕이 너무 많이 들어갔을 때 소금을 잔뜩 넣어 균형을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 좀 더 강렬한 맛을 내겠지만 건강에는 좋지 못하다.

 내게 효과 있는 해법은 머릿속에서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유지하도록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황이 점점 좋아진다는 말을 들으면 '걱정 마, 안심해'라거나 '신경 안 써도 돼'라는 뜻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내가 상황이 점점 좋아진다고 말할 때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를 외면하자는 뜻이 아니라, 상황이 나쁠 수도 있고 동시에 좋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상을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미숙아라고 가정해보자. 아기의 건강 상태가 극도로 안 좋아 호흡, 심장박동 같은 중요한 신호를 꾸준히 관찰하며 아기를 보살핀다. 일주일이 지나자 상태가 훨씬 좋아진다. 모든 지표에서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위험한 상태라 계속 인큐베이터에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기가 좋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말할 경우, 만사 오케이니 마음 푹 놓고 걱정하지 말라는 뜻일까? 전혀 아니다. 상황이 나쁜 것과 나아지는 것 중 선택을 해야만 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둘 다 옳다. 상황은 나쁘면서 동시에 나아지고 있기도 하고, 나이지고 있지만 동시에 나쁘기도 하다. 

 세계의 현 상황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3. 직선 본능(Straight line instinct)

4. 공포 본능(Fear Instinct)

p163

 2011년 3월 11일, 일본 해안 근처 태평양의 약 29km 해저에서 '지진 단층 파열 현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일본 본토가 약 2.5m 동쪽으로 이동했고, 이때 발생한 쓰나미가 1시간 뒤 일본 해안을 덮쳐 약 1만 8,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쓰나미는 후쿠시마 핵발전소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놓은 장벽을 넘었다. 후쿠시마는 온통 물로 넘쳤고, 전 세계 뉴스는 신체 손상과 방사능 오염의 공포로 넘쳐났다.

 사람들은 최대한 빨리 후쿠시마를 탈출했지만 이후 1,600명이 더 목숨을 잃었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방사능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방사능을 피해 도망쳤지만, 방사능 때문에 사망했다고 보고된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다. 1,600명은 탈출 과정 또는 탈출 후에 사망했다. 이들은 대개 노인이었고, 피난 그 자체나 대피소의 삶에서 오는 정신적 · 신체적 스트레스가 사망 원인이었다. 한마디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방사능이 아니라 방사능 공포였다.(1986년 체르노빌에서 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일어난 뒤에도 사람들은 사망률이 크게 증가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세계보건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러한 예상을 확신할 근거는 없었다).

 

5. 크기 본능(Size Instinct)

 

p177.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음

 

 1980년대 초, 젊은 의사로 모잠비크에서 일하던 나는 매우 힘든 셈을 해야 했다. 죽은 아이를 세는 일인데, 특히 나칼라Nacala에 있는 우리 병원에 입원했다가 죽은 아이들을 우리 활동 지역 내 가정에서 죽은 아이들 수와 비교해야 했다.

 당시 모잠비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내가 나칼라 지방에서 활동한 첫해에 30만 명이 사는 그곳에 의사는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두 번째 의사가 합류했다. 스웨덴 같으면 의사 100명이 맡았을 환자를 우리 둘이 돌봤고, 나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나 자신에게 말했다. "오늘 나는 의사 50명 몫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해마다 상태가 심각한 아이들 약 1,000명을 이 지방의 작은 병원 한 곳에 입원시켰다. 하루에 약 3명꼴이다. 나는 이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려 애썼던 일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모두 설사, 폐렴, 말라리아 같은 심각한 질병에 시달렸는데, 빈혈과 영양실조도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20명 중 1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매주 1명씩 죽는 셈인데, 자원과 인력이 더 많았다면 거의 다 치료할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치료는 가장 기초적 수준인 물과 소금을 이용한 방법과 근육주사였다. 정맥주사는 놓지 않았다. 정맥주사를 놓을 간호사도 없고, 의사가 주사를 놓고 감독하기에는 시가이 너무 많이 걸렸다. 산소통도 거의 없고, 수혈 능력도 제한적이었다. 극도로 빈곤한 나라의 의료 수준은 원래 그랬다.

 한번은 주말레 친구가 우리 집에 묵으러 왔다. 300km 넘게 떨어진 더 큰 도시에 있는, 우리보다 약간 더 나은 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는 스웨덴 친구였다. 토요일인 그날 오후 나는 응급실 호출을 받았고, 그 친구도 동행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한 엄마가 겁에 질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설사를 심하게 했는데, 힘이 너무 없어 젖을 빨지도 못했다. 나는 아기를 입원시켰고 아기에게 튜브를 끼운 뒤 경구 수액을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소아과 친구가 내 팔을 붙잡고 나를 복도로 끌고 나갔다. 그는 수준 이하의 내 처치법에 크게 화를 내며, 집에 가서 저녁 먹을 생각에 치료를 건성으로 한다고 나무랐다. 그러면서 정맥주사를 놓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이해 부족에 화가 났다. "여기서는 이게 우리 표준 치료법이야. 아이한테 정맥주사를 놓으면 30분은 걸릴 텐데, 그러면 간호가 일을 엉망으로 만들 확률이 높다고. 그리고 맞아. 나도 더러는 집에 가서 저녁을 먹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나도, 우리 가족도 여기서 한 달 이상은 못 버틸 테니까."

 친구는 여전히 수긍하지 못했다. 그는 혼자 병원에 남아 아기 정맥에 바늘을 꽂느라 여러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그가 집에 돌아오자 토론이 이어졌다. 친구가 주장했다. "병원에 오는 모든 환자한테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해."

 내가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 내 시간과 자원을 이곳에 찾아온 사람을 살리는 데 모두 소진하는 건 비윤리적이야. 내가 병원 밖 서비스를 개선하면 더 많은 아이를 살릴 수 있으니까. 이 지방 '모든' 아이의 죽음이 다 내 책임이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아이들도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들과 똑같이."

 대부분의 의사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어쩌면 대부분의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친구는 동의하지 않았다. "네 의무는 네가 돌보는 환자한테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거야. 다른 곳에 있는 아이들을 더 많이 살릴 수 있다는 주장은 냉정한 이론상의 추측일 뿐이라고." 나는 몹시 피곤해 언쟁을 그만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수를 세기 시작했다.

 나는 분만 병동을 관리하는 아내 앙네타 Agneta 와 함께 셈을 했다. 그해 병원에 입원한 아이는 총 946명이고, 대부분이 다섯 살 미만이며, 그중 52명(5%)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수를 나칼라 지방 전체에서 사망한 아이들의 수와 비교해야 했다.

 모잠비크의 아동 사망율은 당시 26%였다. 나칼라 지방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어 우리는 그 수치를 이용했다. 아동 사망율은 한 해에 사망한 아이 수를 그해 태어난 아이 수로 나누어 구한다.

 따라서 그해 나칼라 지방의 신생아 수를 알면 아동 사망률 26%를 이용해 사망한 아이가 몇 명인지 추정할 수 있었다. 당시 최신 인구조사에 따르면, 나칼라시의 신생아 수는 연간 약 3,000명이었다. 나칼라 지방의 인구는 시 인구의 5배이므로 신생아 수도 약 5배인 1만 5,000명으로 추산했다. 따라서 나는 해마다 26%인 3,900명의 죽음을 막아야 할 책임이 있었고, 그중 52명이 병원에서 죽었다. 내가 맡은 아이들 중 고작 1.3%의 죽음을 직접 지켜보는 셈이다.

 이는 내 육감을 뒷받침하는 수치였다. 설사, 폐렴, 말라리아를 초기에 치료해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공동체 기반의 기초 의료를 조직, 지원, 감독한다면 죽음에 임박해 병원을 찾아온 아이에게 정맥주사를 놓을 때보다 더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구 다수가 기본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죽어가는 아이의 98.7%가 병원에 와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병원에 더 많은 자원을 쏟는 건 정말로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을 의료 인력을 훈련해 최대한 많은 아이에게 예방접종을 하고, (아이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을) 엄마가 걸어서도 쉽게 갈 수 있는 소규모 의료 시설에서 가급적 초기에 처리하도록 했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외면한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익명의 아이들 수백 명에게 주목한다면 언뜻 비인간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극빈층 국가에서의 냉정한 계산법이다.

 콩고와 탄자니아에서 선교하며 간호사로 일하다 내 멘토가 된 잉에게르드 로트Ingegerd Rooth의 말이 생각난다. 로트는 내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 무엇이든 완벽하게 하려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더 좋은 곳에 쓸 자원을 훔치는 꼴이니까요."

 수치보다 눈에 보이는 피해자 개개인에게 지나치게 주목하면 우리 자원을 문제의 일부에만 모두 쏟아부을 수 있고, 따라서 훨씬 적은 목숨을 구할 뿐이다. 이런 원칙은 부족한 자원을 어디에 쓸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경우에 모두 해당한다. 목숨을 구하는 문제나 삶을 연장 또는 개선하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자원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매정한 사람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자원이 무한하지 않은 한(자원은 절대 무한하지 않다) 머리를 써서 지금 있는 것으로 가장 좋은 일을 하는 게 오히려 가장 인간적이다.

 5장은 죽은 아이들과 관련한 데이터로 가득하다. 아이들 목숨을 살리는 것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일이기 때문이다. 죽은 아이의 수를 세고, 아이의 죽음과 비용 효과를 한 문장에서 동시에 언급하는 것이 매정하고 잔인해 보인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최대한 많은 아이의 목숨을 살릴, 비용 효과가 가장 뛰어난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덜 매정한 행위다.

 내가 앞에서 통계 이면에 있는 개별 이야기를 보라고 다그쳤듯, 이번에는 개별 이야기 이면에 있는 통계를 보라고 다그쳐야 겠다. 수치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으며, 수치만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다.

 

p184

 1, 2단계(1일 소득수준으로 나눈 단계, 1단계 1달러 이하, 2단계 4달러, 3단계 16달러, 4단계 32달러 이상) 나라에서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은 의사나 병실 침대가 아니다. 병실 침대와 의사의 수를 세기 쉽고 정치인은 병원 개원식을 부척 좋아하지만, 아이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병원 밖에서 해당 지역 간호사, 산파 교육받은 부모 등이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특히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 데이터를 보면 세계적으로 아동 생존율 증가의 절반은 엄마들의 탈문맹에서 나왔다. 지금은 아동 생존율이 더 높아졌다. 처음부터 아에 병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훈련받은 산파가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돕고, 간호사는 아기에게 면역력을 심어준다. 아기는 잘 먹고, 부모는 아기를 늘 따뜻하고 청결하게 관리한다. 그리고 아기 주변 사람들은 손을 씻고, 엄마는 약통에 붙은 지시사항을 읽을 줄 알게 되었다. 따라서 1,2단계에서 보건 의료 발전에 돈을 투자한다면 초등학교, 간호 교육, 예방접종에 투자해야 한다. 휘황찬란한 대형 병원은 조금 미뤄도 상관없다.

 

p187. 큰 전쟁

 베트남전쟁은 내 세대로 치면 시리아 내전 정도에 해당한다.

 1972년 크리스마스 이틀 전,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박마이BachMai 병원에 폭탄 7개가 떨어져 환자와 의료진 27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나는 스웨덴 웁살라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스웨덴에는 의료 장비와 노란 담요 등이 풍족했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이런 것들을 수집해 상자에 담아 박마이 병원으로 보내주었다.

 15년 뒤, 나는 스웨덴 원조 프로젝트를 평가하기 위해 베트남에 갔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베트남 동료 의사인 니엠Niem과 밥을 먹으며 그의 과거를 물었다. 그는 폭탄이 떨어질 때 박마이 병원에 있었고, 그 후 세계 각지에서 온 보급품 상자를 뜯는 일을 했다고 한다. 나는 혹시 노란 담요를 기억하느냐고 물었고, 그가 노란 담요의 무늬를 말하자 소름이 돋았다. 순간 우리 둘이 마치 평생의 친구였던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그 주말에 나는 니엠한테 베트남전쟁비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가 물었다. "'대미항전' 말하는 거죠?" 나는 그가 '베트남전쟁'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니엠은 나를 태우고 도시 중앙에 있는 공원으로 갔다. 거기에 황동 판이 붙은 1m 정도 높이의 돌이 있었다. 나는 농담이겠지 싶었다. 서양에서는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가 활동가 세대를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할 정도였다. 내가 담요와 의료 기구를 보낸 것도 거기에 자극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전쟁에서 150만 명 넘는 베트남인과 5만 8,000명 넘는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다. 도시가 그런 대재앙을 기억하는 방식이 고작 이런 식이라니! 내가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자, 니엠은 나를 차에 태우고 더 큰 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3.5m가 넘는 대리석 비로, 프랑스 식민 통치에서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니엠은 내게 비다운 비를 볼 준비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를 태우고 조금 더 가더니 창밖을 가리켰다. 나무 꼭대기 너머로 금색으로 덮인 거대한 돌탑이 보였다. 100m 가까이 되어 보였다. "여기가 전쟁 영웅을 추모하는 곳이에요. 멋지죠?" 베트남이 중국을 상대로 싸운 전쟁을 기리는 비였다.

 중국과의 전쟁은 싸움과 휴전을 반복하며 2,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프랑스가 점령한 기간은 200년이었다. 대미항전은 고작 20년 지속되었다. 비의 크기는 그런 기간을 완벽하게 반영했다. 나는 여러 개의 비를 비교한 뒤에야 비로소 지금 베트남 사람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작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p190. 결핵과 신종플루

 뉴스가 비율을 왜곡하는 경우는 곰과 도끼만이 아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이 발생해 전 세계 인구의 2.7%가 목숨을 잃었다. 백신이 나오지 않은 독감이 발생할 가능성은 지금도 여전히 위협적이어서 모두가 이를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2009년에는 처음 몇 달 동안 신종플루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 2주일에 걸쳐 그 소식이 뉴스를 도배했다. 그러나 2014년의 에볼라와 달리 신종플루 사망자는 2배로 증가하지 않았다. 심지어 직선으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신종플루는 처음 경고가 나왔을 때만큼 공격적이진 않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언론은 여러 주 동안 공포심을 계속 자극했다.

 마침내 나는 이런 언론의 히스테리에 신물이 나서 뉴스 보도와 실제 사망자 비율을 계산해보았다. 2주일 동안 신종플루로 사망한 사람은 31명, 구글에서 검색한 관련 기사는 25만 3,442건이었다. 사망자 1명당 기사가 8,176건인 셈이다. 같은 2주일 동안 결핵 사망자는 대략 6만 3,066명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1, 2단계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얼마든지 치료 가능한 이 병이 1,2단계 나라에서는 여전히 주요한 사망 원인이다. 하지만 결핵은 전염성이 있고 결핵 균주는 약제에 내성이 생길 수 있어, 4단계 사람도 많이 죽을 수 있다. 그런 결핵을 다룬 뉴스는 사망자 1인당 0.1건이었다. 신종플루 사망자가 결핵으로 똑같이 비극적 죽음을 맞은 사람보다 8만 2,000배나 많은 주목을 받은 셈이다.

 

6장. 일반화 본능(Generalization Instinct)

 

p211

 임신하면 대략 2년 정도는 생리를 하지 않는다. 생리대 제조업자에게는 우울한 뉴스다. 따라서 이들은 세계적으로 여성 1인당 출생아 수가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해야 한다. 집 밖에서 일하는, 교육받은 여성이 늘고 있다는 소식도 마찬가지다. 이런 발전은 현재 2,3단계에 살면서 생리를 하는 여성 수십억 인구 사이에서 지난 여러 해 동안 생리대 시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세계적 생리대 제조업체에서 개최한 국제회의에 참석한 나는 서양 제조업체 대부분이 이런 점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들은 4단계에서 생리를 하는 여성 3억 명에만 매몰된 채 거기서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고객을 찾으려 했다. "비키니를 입을 때 사용하는 더 얇은 패드를 내놓으면 어떨가? 라이크라 스판을 입을 때 사용하는 보이지 않는 패드는? 복장마다, 상황마다, 스포츠마다 각각의 경우에 맞는 패드를 만들면 어떨까? 등산용 특수 패드도 좋지!" 모두 패드가 워낙 작아서 하루에도 몇번씩 갈아야 한다면 제조업체에는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부유한 소비자 시장이 대부분 그렇듯 기본 욕구는 진작 충족되었고, 생산자는 가뜩이나 작은 분야에서 새로운 수요를 만드느라 헛된 싸움을 할 뿐이다.

 반면 2,3단계에서는 생리를 하는 약 20억의 여성이 생리대를 선택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들은 라이크라 스판을 입지 않으며, 울트라 슬림 패드에 돈을 쓰지도 않는다. 이들은 밖에서 일할 때 하루 종일 갈지 않고 쓸 수 있는, 믿을 만하고 값싼 패드를 원한다. 그런 제품을 찾을 수 있다면 아마도 평생 한 가지 상표만 고집하면서 딸에게도 같은 상품을 추천할 것이다.

 이런 논리는 다른 많은 소비재에 두루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업계 지도자를 상대로 수백 회 강연을 하면서 이러한 점을 누차 강조했다. 세계 인구 다수에서 삶의 단계가 천천히 올라가고 있다. 3단계에 사는 사람은 현재 20억에서 2040년에는 40억까지 늘것이다. 세계 거의 모든 사람이 소비자가 되고 있다. 세계 인구 대다수가 물건을 전혀 살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가난하다고 오해하는 사람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기회를 놓친 채 유럽 대도시에 사는 부유한 힙스터에게 특수 '요가' 생리대를 파는 데 마케팅 비용을 쓸 것이다. 사업 계획을 전략적으로 세우는 사람이라면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미래의 고객을 찾아야 한다.

 

p215

 한번은 한 여학생이 2단계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큰 대가를 치를 뻔한 적이 있다. 인도 케랄라주에 있는 8층짜리 멋진 현대식 사립 병원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복도에서 아직 오지 않은 학생을 기다렸다. 15분이 지나도 오지 않아 우리끼리 움직이기로 하고 복도를 따라 내려가 대형 승강기를 탔다. 병원 침대가 여러 개 들어갈 정도로 매우 큰 승강기였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집중치료실 실장이 6층 버튼을 눌렀다. 문히 닫히는 순간, 금발의 젊은 스웨덴 학생이 병원 복도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뛰어, 뛰어!" 그 모습을 본 학생의 친구가 소리치며 발을 내밀어 승강기 문을 멈추려 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승강기 문은 여학생의 발을 조이며 계속 닫혔다. 학생은 고통과 공포에 비명을 질렀다. 승강기는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학생은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러다가는 다리가 부러지겠다 싶을 때, 우리를 안내하던 실장이 뒤쪽에서 튀어나와 빨간색 비상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내게 화난 말투로 도와달라고 했다. 우리는 문을 강제로 열어 피가 흐르는 학생의 다리를 빼냈다.

 나중에 그 실장이 내게 말했다. "살다 살다 이런 일은 처음 봐요.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학생이 의과대학에 있을 수 있죠?" 나는 스웨덴 승강기에는 자동 감지 장치가 있어 문 사이에 무언가가 끼면 닫히던 문이 저절로 다시 열린다고 설명했다. 인도 의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그런 고도의 기술이 매 순간 작동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죠?" "그냥 늘 작동해요. 엄격한 안전 규칙이 있고, 정기적으로 점검하니까 잘 작동하겠죠." 좀 어리석은 대답 같았다. 실장은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흠, 그렇다면 스웨덴이 워낙 안전해서 해외로 나가면 위험하겠군요."

 나는 그 여학생이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어리석게도 4단계 나라에서 승강기를 타던 자신의 경험을 다른 모든 나라 승강기에 일반화했을 뿐이다.

 

7. 운명 본능(Destiny Instinct)

 

p248

 여성 1인당 출생아 수가 역사상 가장 빠르게 감소한 현상은 자유로운 서양 언론에서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이란은 1990년대에 세계 최대 규모의 콘돔 공장이 들어섰고, 신부와 신랑 모두에게 혼전 성교육을 의무화한 나라다. 국민의 교육 수준도 높고, 발전한 공공 의료 시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부부는 피임으로 자녀 수를 적게 유지하고, 임신이 어려우면 불임 치료 전문 병원을 찾는다. 적어도 내가 1990년에 테헤란의 한 병원에 가봤을 때는 그랬다. 그때 우리를 안내한 사람은 이란의 가족계획 기적을 설계한 열정적인 호세인 말레크아프잘리 Hossein Malek-Afzali 교수였다.

 오늘날 이란 여성은 미국이나 스웨덴 여성보다 아이를 더 적게 낳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서양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서양인의 언론의 자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정권이 들어선 나라의 발전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걸까? 적어도 자유로운 언론이라고 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문화적 변화를 보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거의 모든 종교가 전통적으로 성생활에 관한 규범이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특정 종교를 믿는 여성은 아이를 더 많이 출산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쉽게 이해는 간다. 그러나 종교와 여성 1인당 출생아 수의 관계는 곧잘 과장된다. 사실은 소득과 여성 1인당 출생아 수가 훨씬 관계가 깊다.

 

p250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 다음의 물방울 도표는 종교에 따라 세계를 기독교, 이슬람교, 그 밖의 종교로 나눈 것이다. 그런 다음 각 종교에 따라 여성 1인당 출생아 수와 소득을 표시했다. 이번에도 물방울 크기는 인구를 나타낸다. 기독교 인구가 모든 소득수준에 얼마나 고루 퍼져 있는지 보라. 또 1단계 기독교 인구가 아이를 얼마나 많이 낳는지 보라. 그리고 나머지 도표2개를 보라. 유형이 매우 비슷하다. 한마디로 종교에 관계없이 1단계 극빈층 여성이 아이를 많이 낳는다.

 

소득수준 및 종교에 따른 출생아 수

(설명)이 그림은 책의 도표가 종교별로 3개의 그래프로 나뉜 것을 gapminder에 들어가서 한개의 그래프로 통합한 그래프로 대체했다. 물방울이 파란색이 기독교, 녹색이 무슬림, 빨간색이 기타(인도, 중국, 일본등이 포함된 eastern religion, 불교, 유교, 도교등의 동양적 종교 모두를 의미) 종교이다. 

위 그래프는 하기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gapminder.org/tools/#$state$marker$axis_x$domainMin:null&domainMax:null&zoomedMin:null&zoomedMax:null&scaleType=genericLog&spaceRef:null;&axis_y$which=children_per_woman_total_fertility&domainMin:null&domainMax:null&zoomedMin:null&zoomedMax:null&spaceRef:null;&color$data=data_fasttrack&which=main_religion_2008&spaceRef=entities;;;&chart-type=bubbles

 

Gapminder Tools

Animated global statistics that everyone can understand

www.gapminder.org

 

오늘날 이슬람 사회 여성은 아이를 평균 3.1명 낳고, 기독교 사회는 2.7명 낳는다. 세계의 주요 종교별 출생률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p252

 오늘날 스웨덴 사람은 거의 다 여성의 낙태 권리를 지지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적극 옹호하는 것이 이제 우리 문화가 됐다. 내가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1960년대의 학창 시절을 이야기하면 학생들은 입을 딱 벌린다. 그때까지도 낙태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 말고는 여전히 불법이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비밀자금을 모아 임신한 여학생들을 외국으로 보내 무사히 낙태 수술을 받도록 했다. 내가 그 여학생들이 찾아간 곳은 다른 아닌 폴란드라고 말하면 학생들의 입은 더 크게 벌어진다. 폴란드라니? 폴란드는 기독교 국가 아닌가. 그리고 5년이 지나 폴란드는 낙태를 금지하고, 스웨덴은 낙태를 합법화했다. 그러자 젊은 여성들이 정반대로 이도했다. 요컨대 지금 상황이 늘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문화는 변한다.

 나는 아시아를 여행할 때면 늘 구스타브 할아버지 같은 완고한 노인의 가치와 마주한다. 한 예로, 한국과 일본에서는 많은 여성이 자녀 돌보는 일을 전적으로 책임질 뿐 아니라 시부모도 부양한다. 이런 상황을 자랑스러워하는 남자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이것을 '아시아의 가치'라고 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는 많은 여성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런 문화를 참을 수 없어 하고, 그런 가치 때문에 결혼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고 말한다.

 

남편 상상하기.

 홍콩에서 열린 금융 콘퍼런스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저녁 만찬 때 젊고 똑똑한 전문 금융인 옆자리에 않게 되었다. 37세의 꽤 성공한 여성으로, 식사를 하면서 아시아의 현재 이슈와 추세에 관해 내게 많은 것을 얘기해주었다. 얼마 후 우리는 사적인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족을 꾸릴 계획이신가요?" 내가 물었다. 무례하게 행동할 뜻은 없었다. 우리 스웨덴 사람은 (요즘) 그런 주제를 즐겨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여성도 내 솔직한 질문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여성은 웃음 띤 채 내 어깨 너머로 바닷가의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가 있으면 어떨까 날마다 생각해요."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남편을 상상하면 참을 수가 없어요."

 

나는 그런 여성들을 위로하면서 앞으로 달라질 거라는 확신을 주려고 애쓴다. 최근에는 방글라데시 아시아 여성대학 Asian University for Women에서 젊은 여성 400명에게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문화가 어떻게 그리고 왜 항상 탈바꿈하는지, 극빈층 탈출과 여성 교육 그리고 피임이 어떻게 잠자리 대화는 늘리고 자녀 수는 줄였는지 이야기했다. 매우 가슴 벅찬 강의였다. 색색의 히잡을 쓴 젊은 여성들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강의가 끝나자 아프가니스탄 학생들은 내게 자기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했다. 그들은 그런 변화가 아프가니스탄에도 이미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도 문제고 빈곤도 문제지만, 우리 같은 많은 젊은이가 현대적 삶을 계획하고 있어요.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이고, 이슬람 여성이에요. 그리고 교수님이 말씀하신 그런 남자를 만나고 싶어요. 우리 말에 귀 기울이고 함께 계획을 세우는 남자 말이에요. 아이는 둘만 낳아서 모두 학교에 보내고 싶고요."

 오늘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에서 나타나는 마초적 가치는 아시아의 가치도, 아프리카의 가치도 아니며 이슬람의 가치도 아니고, 동양의 가치도 아니다. 스웨덴에서 60년 전에나 볼 수 있었던 가부장적 가치이며, 스웨덴에서 그랬듯 사회와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라질 가치다. 불변의 가치가 결코 아니다.

 

 p255

 사회와 문화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사소하고 더뎌 보이는 변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축적된다. 연간 1% 성장은 더뎌 보이지만 70년간 축적되면 2배 성장이 되고, 연간 2% 성장은 35년 뒤 2배 성장이 되며, 연간 3% 성장은 24년 뒤 2배 성장이 된다.

 기원전 3세기에 스리랑카의 데바남피야 티샤 Devanampiya Tissa 왕은 세계 최초로 자연보호구역을 공식적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2,000년이 지난 후 웨스트요크셔의 유럽인이 이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고, 그로부터 다시 50년이 지난 후에 미국에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생겼다. 그리고 1900년에는 지표면의 0.03%가 보호구역이 되었고, 1930년에는 그 수요가 0.2%로 늘었다. 천천히, 천천히 10년이 지나고 또 10년이 지나면서 한 번에 숲 한 곳씩 보호구역이 늘었다. 연간 증가율은 너무 작아서 거의 감지하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지표면의 무려 15%가 보호구역이고, 그 수치는 꾸준히 늘고 있다. 

운명 본능을 억제하려면 더딘 변화를 불변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연간 변화가 1%에 그쳐도, 너무 적고 느리다는 이유로 무시해서는 절대 안된다.

 

p258. 내게는 어떤 비전도 없다

 앞에서 잘 차려입은 무지한 남성 이야기로 7장을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가능성을 내다보는 비전이 부족했던 남성이다. 이제 비슷한 이야기로 7장을 마무리하려 한다. 

 2013년 5월 12일, 나는 '2063년의 아프리카 르네상스와 어젠다'라는 제목의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 학술회의 때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서 모인 여성 지도자 500명 앞에서 강연하는 특권을 누렸다. 대단한 영광이었고, 굉장한 설렘이었으며, 내 인생 최고의 강연이었다. 아디스아바바 Addis Ababa에 있는 아프리카연합 본부의 플리너리 홀Plenary Hall에서 나는 30분 동안 소규모 여성 농업인에 관해 수십 년간 진행한 연구를 요약해 말했으며,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20년 안에 극빈층이 사라질 수 있는지를 이 막강한 의사 결정자들에게 설명했다.

 아프리카연합의 사무국장 은코사자나 들라미니주마Nkosazana Dlamini-Zuma가 강단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내 말을 꽤나 경청하는 듯싶었다. 강연이 끝나자 그는 내게 다가와 감사를 표시했다. 나는 강연이 어땠냐고 물었는데, 그의 대답은 가히 충격이었다.

 "글쎄요, 도표도 훌륭하고 말씀도 잘하시는데, 아무런 비전이 없네요." 자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게 나한테는 더욱 충격이었다.

 "네? 비전이 부족해요? 아프리카 극빈층이 앞으로 20년 안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 거라고 말했는데요?" 나는 기분이 상해 되물었다.

 은코사자나는 어떤 감정이나 동작도 섞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극빈층이 사라질 거라고 말했어요. 그게 시작이었고, 거기서 끝났죠. 아프리카 사람들이 극빈층이 사라지는 걸로 만족하면서 적당히 가난하게 사는 정도로 행복해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러곤 내 팔을 힘주어 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화를 내지도 않고, 웃음기도 없었다. 내 단점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은코사자나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교수님 손주들이 우리가 건설할 새로운 고속열차를 타고 아프리카를 여행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어떤 비전인가요? 유럽의 낡은 비전과 뭐가 다르죠? '우리' 손주들도 '교수님' 대륙에 가서 '교수님 나라의' 고속열차를 타고 여행하며, 스웨덴 북쪽에 있다는 이국적인 얼음 호텔에 갈겁니다. 물론 오래 걸리겠죠, 아시다시피. 현명한 결단도, 대규모 투자로 많이 필요할 거고요. 하지만 내 50년 비전으로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에서, 원치 않는 난민이 아니라 관광객으로 환영받을 겁니다." 은코사자나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그래도 도표는 정말 멋졌어요. 자, 가서 커피나 한잔합시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내 실수를 가만히 되새겨보았다. 33년 전 내 첫 아프리카 친구인 모잠비크의 광산 기술자 니헤레와 마셀리나 Niherewa Maselina 와 나눈 대화가 기억났다. 그도 은코사자나와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때 나는 모잠비크 나칼라에서 의사로 일했는데, 하루는 니헤레와 함께 해변으로 가족 나들이를 갔었다. 모잠비크 해안은 믿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고, 아직 개발되지 않아 주말에 가면 거의 우리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1.5km 모래 해변에 15~20가족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말했다. "오늘은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 그때 니헤레와가 은코사자나처럼 내 팔을 꽉 잡으며 말했다. "한스, 난 정반대 느낌이 들어. 나는 이 해변을 보면 정말 괴롭고 서글퍼. 저기 멀리 있는 도시를 봐. 저곳에 80만 명이 살아. 아이가 4만 명이라는 얘기지. 오늘은 주말이야. 그런데 겨우 40명이 이곳에 왔잖아. 1,000분의 1이야. 내가 동독에서 채굴 교육을 받을 때 주말이면 로스토크Rostock 해변에 가곤 했는데, 사람들로 가득 찼었어. 아이들 수천 명이 재미있게 놀더라고. 나칼라도 로스토크 같으면 좋겠어. 일요일에는 아이들이 들판에서 부모를 도와 일하거나, 슬럼에 앉아 있지 말고 모두 해변으로 나왔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그게 내 소원이야." 그러고는 내 팔을 놓고 자동차에서 우리 아이들의 수영 장비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33년이 지난 지금, 아프리카의 학자 및 단체와 일생일대의 공동 연구를 마친 뒤 아프리카 연합에서 강연을 하면서, 내가 그들의 위대한 비전을 공유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아프리카의 가능성을 알아본 몇 안 되는 유럽인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내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강연을 한 후, 내가 여전히 낡고 정적인 식민지적 사고방식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프리카 친구와 동료들이 여러 해 동안 가르쳐줬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들'이 '우리'를 언젠가는 따라잡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모든 사람, 모든 가족, 모든 아이가 그 목표를 성취하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면 언젠가는 해변 나들이를 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8장. 단일 관점 본능(Single Perspective Instinct)

 

p285. 민주주의도 단일한 해결책이 못된다

 조금 위험하더라도 이 말은 꼭 해야겠다. 나는 자유민주주의가 국가를 운영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나를 비롯해 그렇게 믿는 사람은 민주주의에서 평화, 사회 발전, 보건 의료 발전, 경제성장 같은 좋은 것이 나오고, 심지어 그런 것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인정하기 어려운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증거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이다.

 경제와 사회가 크게 발전한 나라라고 해서 다 민주국가는 아니다. (산유국도 아닌)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 빨리 1단게에서 3단계로 넘어갔고, 그 시기는 줄곧 군부 독재가 이어졌다. 2012~2016년에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 열 곳 중 아홉 곳은 민주주의 수준이 낮았따.

 경제성장과 보건 의료 발전에 민주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와 모순되는 현실에 부딛히기 쉽다. 따라서 우리가 좋아하는 다른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민주주의가 우월한 수단이라고 주장하기보다 민주주의 자체를 목적으로 지지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다른 모든 발전을 가늠하는 단 하나의 척도는 없다. 1인당 GDP도, (쿠바에서처럼) 아동 사망률도, (미국에서처럼) 개인의 자유도, 심지어 민주주의도 단일한 척도가 될 수 없다. 한 국가의 발전을 측정하는 단일한 척도는 없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세계는 수치 없이 이해할 수도, 수치만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국가는 정부 없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지만,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공공 부문도, 민간 부문도 늘 정답일 수는 없다. 좋은 사회에서 나온 척도라도 단일 척도가 모든 사회 발전을 이끌 수는 없다. 이것 또는 저것을 아주 택할 게 아니라, 사안에 따라 이것과 저것을 두루 택해야 한다.

 

9장. 비난 본능(Blame Instinct)

 

p295

 세계의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죄를 추궁하기보다 시스템에 주목해야 할 때가 많다.

 비난 본능은 일이 잘 풀릴 때도 발동되어 칭찬 역시 비난만큼이나 쉽게 나온다.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아주 쉽게 그 공을 개인이나 단순한 원인으로 돌리는데, 이때도 대개는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세계를 이해해야지 비난 본능에 좌우돼서는 안된다.

 

p298. 언론인

 지식인과 정치인 사이에서는 언론을 손가락질하며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게 유행이다. 어쩌면 나도 이 책 앞부분에서 그랬을지 모른다.

 우리는 언론인을 손가락질하기보다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언론은 세상을 왜 그렇게 왜곡해 보여주는 걸까? 의도적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가짜 뉴스는 논의하지 않겠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며, 저널리즘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고 나는 가짜 뉴스가 우리 세계관을 왜곡하는 주범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를 단지 오해하기 시작한 게 아니라 항상 오해하고 있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는 2013년 갭마인더 무지 프로젝트 Gapminder's Ignorance Project의 결과를 인터넷에 올렸다. 두 방송사는 우리가 제시한 문제를 자사 사이트에 올려 사람들이 직접 풀어보게 했는데, 살마들의 정답률이 눈 감고 찍은 것보다도 못한 이유를 분석한 수천 개의 짧은 글이 올라왔다.

 그중 우리 주의를 사로잡은 글 하나는 이랬다. "언론 종사자 중 이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우리는 이 생각이 퍽 흥미로워 정말 그런지 알아보려 했지만, 여론조사 회사들은 언론인을 집단적으로 접촉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언론사 경영주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이해는 간다. 자신의 권위를 의심받는 게 달가울 사람은 없다. 진지한 뉴스 방송사가 침팬지보다 지식수준이 나을 게 없는 언론인을 고용했다고 알려지면 몹시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나는 어떤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걸 해보고 싶은 충동이 샘솟는다. 그해 일정에 언론 학술회의가 두 번 잡혀 있었는데, 그때 설문 조사 장비를 챙겨 갔다. 20분이라는 강연 시간은 준비한 질문을 다 던지기에 턱없이 짧았지만, 몇 가지는 물을 수 있었다. 여기에 그 결과를 소개한다. BBC, PBS, 내셔널지오그래픽, 디즈니 등 주요 다큐멘타리 제작자들이 참석한 학술회의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그 결과 역시 함께 소개한다.

  

 이들 언론인과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지식수준이 일반인보다 나을 게 없고, 침팬지보다 못한 것 같았다.

 만약 언론인과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전반적으로 이런 수준이라면(다른 기자들은 이들보다 지식수준이 높다거나, 이들에게 다른 문제를 냈더라면 더 나은 결과가 나왔으리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없다) 이들에겐 죄가 없다. 언론인과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세계를 극적으로 가르거나 '자연의 역습 또는 '인구 위기'라는 식으로 극적인 보도를 하면서 안타까운 피아노 음악을 배경 삼아 심각한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그들이 거짓말을 하며 우리를 의도적으로 호도하는 것은 아니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면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세계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대부분의 언론인과 다큐멘터리 제작자도 사실은 세계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인을 악마화하지 마라.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세계를 크게 오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언론은 자유롭고 전문적이며 진실을 추구하겠지만, 언론의 독립성과 그들이 보도하는 사건의 대표성은 다르다. 모든 보도가 그 자체로는 전적으로 진실이라도 기자가 세상에 알리기로 선택한 진실 이야기를 여럿 모으면 오해할 만한 그림이 나올 수 있다. 언론은 중립적이지도 않고, 중립적일 수 없으며, 그걸 기대해서도 안 된다.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는 심각한 재앙이다. 항공기 추락 사고에 견줄 만한 지식수준이다. 하지만 언론인을 비난하는 것은 졸았던 기장을 탓하는 것만큼이나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다는 언론인이 세계를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유(답  그들도 극적 본능을 지닌 인간이라서)와 언론 시스템의 어떤 요소가 그들로 하여금 왜곡되고 과도하게 극적인 뉴스를 내보내게 하는지(부분적인 답  소비자의 주의를 사로잡는 경쟁을 해야 하고, 직장을 잃지 말아야 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이해한다면 언론을 향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이런저런 식으로 변하라고 요구하는 게 대단히 비현실적이고 불공정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현실 반영은 언론에 기대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언론이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보여주길 기대하지 말고, 차라리 베를린의 휴일을 찍은 사진 여러 장을 GPS 삼아 그 도시를 둘러보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게 좋다.

 

p302. 난민

 2015년 난민 4,000명이 고무보트를 타고 유럽으로 가려다 지중해에서 익사했다. 휴양지 해변에 떠밀려온 죽은 아이들 모습은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유럽 등지에서 4단계의 안락한 삶을 즐기던 우리는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누굴 비난해야 하나?

 우리는 곧 비난 대상을 찾아냈다. 절박한 가족을 속여 1인당 1,000유로를 받고 사람들을 죽음의 고무보트에 태운 잔인하고 탐욕스루언 밀입국 알선자들이 죽일 놈이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을 멈추고, 거친 물살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유럽 구조선의 모습을 보며 안도한다.

 그런데 난민은 편안한 비행기나 여객선을 타지 않고 왜 육지로 리비아나 터키로 가서 다시 저런 부실한 고무보트에 목숨을 맡기는 걸까? 유럽연합 회원국은 모두 제네바 협약에 서명한 터라 전쟁으로 피폐해진 시리아 난민에게 망명 자격을 부여할 의무가 있다. 나는 언론인과 지인에게 그리고 난민 신청 접수와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이에 대해 물었지만, 가장 현명하고 자상한 사람조차 매우 이상한 해명을 내놓았다.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어서? 다들 알다시피 난민은 소형 고무보트의 한 자리를 얻으려고 1,000유로를 지불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터키에서 스웨덴, 리비아에서 런던으로 가는 항공권은 50유로 미만으로 나온 게 많았다.

 그렇다면 공항까지 갈 수 없어서? 그렇지 않다. 그중 다수가 이미 터키나 레바논까지 왔으니 그곳 공항을 가기는 쉬웠다. 항공권을 살 형평도 되고,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탑승 수속 카운터에서 항공사 직원에게 제지당해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 왜 그럴까? 유럽연합 회원국이 불법 이민에 대처하는 규정을 정해놓은 2001년 유럽 이사회 지침 European Council Directive 때문이다. 이 지침에 따르면, 적절한 서류를 갖추지 않은 사람을 유럽으로 들여보내는 모든 항공사와 선박 회사는 그 사람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비용을 모두 지불해야 한다. 물론 제네바 협약에 따라 망명 자격을 갖추고 유럽으로 들어오려는 난민에게는 그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다. 오직 불법 이민자에게만 적용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큰 의미가 없다. 탑승 수속 카운터에서 항공사 직원이 45초 만에 제네바 협약에서 인정하는 난민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겠는가? 대사관에서 최소 8개월이 걸리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지침은 언뜻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현실에서는 비자 없는 사람은 절대 탑승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이 비자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터키와 리비아에 있는 유럽 대사관은 비자 신청을 처리할 자료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리아 난민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이론적으로는 유럽으로 들어갈 권리가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 결국 바다를 건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위험한 배를 타야 할까? 사실 이 역시 유럽연합의 정책과 관련이 있다. 유럽연합에 도착하는 난민의 배는 무조건 압수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배는 한 번밖에 쓸 수 없다. 결국 밀입국 알선자들은 1943년 유대인 난민 7,220명을 며칠 사이 덴마크에서 스웨덴으로 이동시킨 데 동원한 어선처럼 안전한 배에 난민을 태우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 된다.

 유럽의 여러 정부는 전쟁에 짓밟힌 나라의 난민에게 망명 자격을 신청 및 획득할 자격을 주도록 한 제네바 협약을 존중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민 정책은 그런 주장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밀입국 알선자가 활동하는 운송 시장을 만들어낸다. 이는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생각이 아주 없지 않는 한 이를 모를리 없다.

 우리는 비난할 사람을 찾는 본능이 있지만, 거울을 들여다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똑똑하고 자상한 사람도 난민 익사 사고는 우리의 이민 정책에 책임이 있다는 죄책감을 유발하는 끔찍한 결론을 내놓지 못하는 일이 흔하다.

 

p305. 외국인

 5장에서 인도와 중국이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비난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반박한 인도 관리를 기억하는가? 나는 1인당 수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그 이야기를 꺼냈지만, 비난 대상을 찾다 보면 전체 시스템에 주목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인도와 중국을 비롯해 소득수준이 올라간 국가들은 기후변화에 책임이 있으며, 그 나라 사람들은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빈곤한 삶을 살 수밖에는 없다는 주장이 서양에서는 놀랍게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내가 밴쿠버에 있는 테크대학 Tech University 에서 세계 추세에 관한 강연을 하던 중 한 학생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당돌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처럼 살 수 없어요. 그런 식으로 계속 발전하도록 놔두면 안 돼요. 그렇게 배출하다가는 지구가 죽고 말 거에요." 서양인이 마치 자기 손에 리모컨이 있어 버튼만 누르면 다른 수십 억 인구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정말 기겁할 일이다. 가만히 둘러보니 그 여학생 주변의 학생들은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다.

 오늘날 대기에 축적된 이산화탄소 대부분은 현재 4단계 삶을 사는 나라들이 지난 50년간 배출한 것이다. 캐나다의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중국보다 여전히 2배 많고, 인도보다는 8배 많다. 전 세계 연간 화석연료 사용량 중 가장 부유한 10억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절반이 넘는다. 그리고 두 번째로 부유한 10억 인구가 그 나머지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리고 또 절반, 또 절반으로 이어지면 가장 가난한 10억 인구는 겨우 1%를 차지할 뿐이다.

https://www.gapminder.org/tools/#$state$marker$axis_x$domainMin:null&domainMax:null&zoomedMin:null&zoomedMax:null&spaceRef:null;&axis_y$which=co2_emissions_tonnes_per_person&domainMin:null&domainMax:null&zoomedMin:null&zoomedMax:null&scaleType=genericLog&spaceRef:null;;;&chart-type=bubbles

 

Gapminder Tools

Animated global statistics that everyone can understand

www.gapminder.org

 

위 그래프는 책에 나온것과는 좀 틀린데 이야기하는 바는 동일하다. 연두색의 아메리카 대륙과 노란색의 유럽대륙이 소득수준이 높으며,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CO2 배출량이 많다. 즉 선진국일수록 CO2배출로 인한 환경파괴의 책임이 크다.

 

가장 가난한 10억 인구가 1단계에서 2단계로 올라가기까지는 최소 20년이 걸릴 테고, 그동안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2% 증가한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3단계, 4단계로 올라가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인이 자신의 책임을 아주 쉽게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현상은 비난 본능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우리는 '그 사람들'은 우리처럼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우리처럼 살 수 없다"가 맞다.

 

외국질병

신체의 가장 큰 기관은 피부다. 현대 의학이 발달하기 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피부병은 매독이었다. 가려운 부스럼으로 시작해 뼈가 드러날 정도로 피부가 썩어 들어가다가 결국 골격이 훤히 드러난다. 이처럼 혐오스러운 모습과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유발하는 질병은 장소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질병, 폴란드에서는 독일 질병, 독일에서는 프랑스 질병,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질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은 비난의 화살을 돌려 프랑스 질병이라고 불렀다.

희생양을 찾으려는 본능은 인간 본성의 핵심이어서, 그 피부병을 스웨덴 사람이 스웨덴 질병이라 부른다거나, 러시아 사람이 러시아 질병이라 부르리라고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인간이 원래 그렇다. 우리에겐 비난할 사람이 필요하고 어떤 외국인 한 명이 그 병을 옮겼다면, 그 외국인이 속한 나라를 주저없이 통째로 비난하곤 한다. 자세한 조사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p311. 사회 기반.

 사회 발전과 경제 발전이 제자리걸음인 국가는 지도자가 대단히 파괴적이고 무력 충돌이 잦은 몇몇 나라뿐이다. 그 밖의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아무리 무능해도 사회와 경제가 발전한다. 그렇다면 지도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은 아마도 '아니다'일 것이다. 사회를 꾸려나가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인 다수의 사람들이다.

 나는 아침에 세수하려고 수도꼭지를 틀었을 때 마술처럼 따뜻한 물이 나오면, 이런 상황을 가능하게 한 배관공을 소리 없이 칭송할 때가 있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감사해야 할 수많은 사람이 떠올라 종종 가슴이 벅차오른다. 공무원, 간호사, 교사, 변호사, 경찰, 소방관, 전기 기사, 회계사, 안내 데스크에 있는 사람 등등. 모두 사회 기반을 구성하는, 그물처럼 얽힌 서비스를 수행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며, 일이 잘될 대 우리가 찬양해야 할 사람들이다.

 2014년 에볼라 퇴치를 돕기 위해 라이베리아에 갔었다. 서둘러 손쓰지 않으면 전 세계에 빠르게 퍼져 10억 인구의 목숨을 앗아가고, 이제까지 알려진 그 어떤 유행병보다 심각한 해를 끼칠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치명적인 에볼라 바이러스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은 영웅적 지도자도, 국경 없는 의사회나 유니세프 같은 영웅적 조직도 아니었다. 공무원과 지역보건 의료 종사자들이 나서서 묵묵히 공중 보건 캠페인을 벌여 오랫동안 내려오던 장례 관습을 단 며칠 만에 바꿔놓고 죽어가는 환자를 목숨 걸고 치료하고, 환자와 접촉한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 격리하는 성가시고 위험하고 복잡한 작업을 해냈다. 인내심을 갖고 사회를 움직이는 용감한 사람들, 좀처럼 언급되지 않지만 이 세계의 진정한 구세주들이다.

 

p314.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받는 질병을 제대로 연구하지 않는 현실과 관련해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사장도, 이사도, 우주도 아니다. 그들을 손가락질해봐야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언론이 내게 거짓말을 한다거나(대개는 사실이 아니다), 삐딱한 세계관을 심어준다며(맞는 이야기지만, 대개 고의성은 없다) 매체를 비난할 생각은 버려라. 전문가가 자기들만의 관심과 해당 분야에만 과도하게 초점을 맞춘다거나 상황을 악화시킨다며(그럴 때도 있지만, 대개는 나쁜 의도는 아니다) 그들을 비난할 생각도 버려야 한다. 한마디로, 개인이나 집단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해 비난할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쁜 사람을 찾아내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거의 항상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여러 원인이 얽힌 시스템이 문제일 때가 대부분이다. 세계를 정말로 바꾸고 싶다면 누군가의 면상을 갈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10장. 다급함 본능(Urgency Instinct)

 

p336

 멀리뛰기 선수더러 자신이 뛴 거리를 직접 측정하라고 해서는 안 되듯이, 문제 해결 기관더러 어떤 데이터를 발표할지 직접 결정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은 늘 더 많은 돈을 원하기 마련이라 그들이 개선 정도를 측정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잘못된 수치를 내놓을 수 있다.

 내게 에볼라 위기의 심각성을 알려준 것은 데이터였다. 의심 사례가 3주마다 2배로 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데이터다. 내게 에볼라와 싸우기 위한 조치들이 효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도 데이터였다. 확정 사례가 줄고 있음을 알려준 데이터. 데이터는 절대적인 열쇠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어서 데이터의 신뢰성과 그 데이터 생산자의 신뢰성을 보호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데이터는 진실을 말하는 데 사용해야지,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행동을 촉구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p338.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세계적 위험 다섯 가지

 우리가 대처해야 할 절박한 세계적 위험이 있다는 걸 나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세계를 핑크빛으로 보는 낙천주의자가 아니다. 문제에서 눈을 뗀다고 해서 마음이 안정되지는 않는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다섯 가지는 전 세계를 휩쓰는 유행병, 금융 위기, 제3차 세계대전, 기후변화, 극도의 빈곤이다.

 이 문제들이 왜 가장 걱정되는 것일까?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앞의 세 가지는 예전에 일어났고, 나머지 두 가지는 지금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다섯 가지 모두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인간의 발전을 여러 해 또는 수십 년간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막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거대한 살인마여서 가능하다면 모든 힘을 모아 한 단계씩 차근차근 행동하는 식으로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가야 한다. (이 목록에 오를 여섯 번째 후보가 있다. 바로 미지의 위험이다. 우리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 발생해 심각한 고통과 황폐화를 초래할 가능성이다. 생각만 해도 정신이 번쩍 든다. 우리가 손쓸 수 없는 미지의 존재를 걱정한다는 게 사실은 무의미하지만, 새로운 위험에도 늘 호기심과 경각심을 유지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적 유행병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전 세계에 퍼진 스페인 독감은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4년 동안의 전쟁으로 몸이 쇠약해졌다고는 해도, 독감이 전쟁보다 더 많은 피해자를 내다니! 그 결과 세계 기대 수명이 10년이나 줄어들어 33세에서 23세가 되었다. 이는 2장(83쪽)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염병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전문가들은 새로운 지독한 독감이 여전히 전 세계인의 건강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 이유는 독감의 전염 경로 탓이다. 독감은 아주 미세한 물방울에 섞여 공기중에 날아다닌다. 감염자 한 사람이 지하철을 탔을 때 그 안에 있는 사람과 전혀 접촉하지 않고도, 심지어 같은 곳을 만지지 않고도 모두에게 전염시킬 수 있다. 독감처럼 매우 빠른 전파력을 갖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질병은 에볼라나 HIV/에이즈 같은 질병보다 인류에 더 큰 위협이 된다. 전염성이 대단히 강하고 그 어떤 방어막도 간단히 무시해버리는 바이러스로부터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우리를 보호하려는 노력은 쉽게 말해 그만한 가치가 있다.

 세계는 독감에 대처할 준비가 과거보다는 잘되어 있지만, 1단계 사람들은 무섭게 퍼지는 질병에 재빨리 대처하기 어려운 사회에 여전히 살고 있다. 누구나 어디서든 기초적인 의료를 받도록 해서 질병이 발병하면 빠르게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계보건기구를 건강하고 강한 조직으로 유지해 전 세계의 대응을 조율하도록 해야 한다.

 

금융 위기

 지구촌 시대에 금융 거품의 영향은 치명적이다. 나라 전체의 경제를 망가뜨리고 대량 실업 사태를 일으켜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과격한 해결책을 찾게 만든다. 대형 은행이 무너지면 2008년 미국의 주택 담보대출 사태가 촉발한 세계적 참사보다 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해 세계경제 전체가 붕괴할 수 있다.

 경제 시스템은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워낙 복잡해,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들도 지난 금융 위기와 이후의 회복 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했다. 따라서 붕괴를 예측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경제가 무너지지 않겠거니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스템이 더 단순하다면, 시스템을 이해하고 금융 붕괴를 피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으련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제3차 세계대전

 나는 평생 국적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친분을 맺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재미도 재미지만 폭력적 보복을 원하는 인간의 끔찍한 본능에 맞서, 그리고 모든 악 중에 가장 사악한 악인 전쟁에 맞서 세계 안전망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올림픽, 국제무역, 교육 교류 프로그램, 자유로운 인터넷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인종과 국경을 뛰어넘어 소통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한 안전망을 강화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세계 평화 없이는 우리의 지속 가능성 목표 중 어느 것도 달성할 수 없다. 과거 폭력 전력이 있는 나라가 현재의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잃었을 때 자만심과 향수에 빠져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상황을 막는 데는 엄청난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구시대적 서양이 새로운 세계에 평화롭게 통합될 새로운 길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기후변화

 기후변화의 거대한 위협을 알아본다고 해서 최악의 시나리오만 살펴볼 필요는 없다. 공기처럼 지구가 공유하는 자원을 관리하려면 세계가 존중하는 권위가 있어야 하고, 국제적 기준을 준수하는 평화로운 세계라야 한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전 세계는 이미 오존 파괴 물질과 휘발유에 첨가하는 납을 관리해 지난 20년 동안 그 둘을 거의 제로 수준으로 낮췄다. 여기에는 제기능을 다하는 강력한 국제 공동체(구체적으로 말하면 유엔)가 필요하다. 그리고 소득수준이 다른 사람들의 여러 요구와 필요를 인정하는 국제적 연대 의식도 필요하다. 그러나 국제 공동체가 이산화탄소 배출 총량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 1단계 10억 인구의 전기 사용을 막는다면 그런 연대를 바랄 수 없다. 지금까지는 가장 부유한 나라들이 이산화탄소 배출의 주범이니 다른 나라를 압박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자신부터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극도의 빈곤

 이제까지 언급한 위험은 미래에 어느 정도는 알 수 없지만 고통을 초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시나리오다. 그러나 극도의 빈곤은 가능성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이며, 지금 당장 날마다 일어나는 고통이다. 에볼라가 발생한 지역도 그런 곳이어서, 초기 단계의 의료 서비스도 받기 힘들다. 내전이 일어나는 곳도 마찬가지다. 먹을거리와 일자리가 절실하고 잃을 것도 없는 젊은이들은 잔인한 게릴라 조직에 적극 가담하곤 한다. 악순환이다. 가난이 내전을 불러오고, 내전은 다시 가난으로 이어진다.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그 지역의 다른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들이 모두 중단된 상태다. 테러리스트들은 몇 군데 남 극도로 빈곤한 지역에 숨어 있다. 멸종위기에 처한 코뿔소가 내전이 일어난 지역의 한가운데에 갇혔다면, 코뿔소를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오늘날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가 어느 정도 지속되면서 세계는 좀 더 번영할 수 있었다. 극빈층은 그 어느 때보다 줄었다. 그래도 여전히 8억 인구가 극빈층이다. 기후변화와 달리 이 문제에서는 예측이나 시나리오가 필요치 않다. 지금 당장 8억 인구가 빈곤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해결책도 알고 있다. 평화, 학교 교육, 보편적 기초 의료 서비스, 전기, 깨끗한 물, 화장실, 피임, 시장의 힘을 가동할 소액 대출 등이 필요하다. 가난을 끝내는 데 혁신 따위는 필요 없다. 다른 모든 곳에서 효과를 본 방법을 쓰면 그만이다. 그리고 빨리 행동할수록 해결할 문제는 더 작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극빈층에 머무는 한 대가족에서 벗어나기 힘들고, 식구 수는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약 10억 인구에게 삶다운 삶에 필요한 기본 요건을 빨리 충족해주는 것은 사실에 근거한 우선순위로 볼 때 시급한 과제가 분명하다.

 도움을 주기 가장 어려운 사람들은 정부의 힘이 약한 나라에서 폭력적이고 무질서한 무장 범죄 조직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가난에서 탈출하려면 안전된 군대가 필요하다. 무장한 경찰관은 죄 없는 시민을 폭력에서 보호해야 하고, 정부 당국은 교사들이 평화롭게 다음 세대를 교육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전히 가능성 옹호론자다. 다음 세대는 매우 긴 계주 경기의 마지막 주자와 같다. 극도의 빈곤을 끝내는 경기는 1800년에 출발 총성이 울린 긴 마라톤이다. 다음 세대에게는 이 일을 마무리할 둘도 없는 기회가 주어졌다. 바통을 건네받고 결승선을 통과한 뒤 두 팔을 치켜들 기회다. 이 프로젝트는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 완수한 뒤에는 성대한 파티를 열어도 좋다.

 무언가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내게는 위안을 준다. 이제까지 말한 다섯 가지 위험은 우리가 힘을 집중해야 할 분야다. 냉철한 머리와 확실하고 객관적 데이터로 접근해야 하며, 국제적 협력과 재원 조달이 필요하다. 극적 조치가 아니라 아기 걸음마 같은 조치와 꾸준한 평가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명분이든 모든 활동가는 이 위험을 존중해야 한다. 너무나 막중한 위험이라 양치기 소년의 실수가 끼어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걱정할 대상을 제대로 알자는 뜻이다. 뉴스를 외면하라거나 행동을 촉구하는 활동가의 말을 무시하라는 뜻도 아니다. 소음을 무시하고 중요한 세계적 위험에 주목하자는 뜻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다. 냉철함을 잃지 말고, 그런 위험을 줄이기 위한 국제적 협력을 지지하자는 뜻이다. 다릅한 본능과 모든 극적 본능을 억제하라. 세계를 과도하게 극적으로 바라보고 상상 속에서 문제를 만들어 스트레스받기보다 진짜 문제와 해결책에 좀 더 집중하다. 

 

11장. 사실충실성 실천하기(Factfulness in Practice)

 

p360

 영업 또는 마케팅과 관련해 유럽이나 미국에서 대기업을 운영하는 사람과 그 직원은 미래에 시장이 성장할 곳은 그들 나라가 아니라,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채용과 관련해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직원을 고용할 때 유럽 기업이나 미국 기업이 우위를 누렸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전 세계에서 사업을 하며 '미국다움'을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만들었다. 그들이 채용한 아이사와 아프리카 직원들은 진정한 국제기업의 일원이길 바라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구글의 최고 경영자 순다르 피차이Sundar Pichai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 경영자 사티아 나델라Satya Nadella는 모두 인도에서 태어나고 인도에서 교육받았다.

 나는 유럽 기업에서 강연할 때면 유럽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고("로고에서 알프스를 빼세요"), 본사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생산과 관련해서는 세계화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십 년 전, 서양 기업은 제조업을 2단계 국가, 이른바 신흥 시장에 아웃소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같은 품질의 상품을 절반의 인건비로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화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꾸준한 과정이다. 여러 해 전, 방글라데시와 캄보디아가 2단계로 진입할 때 유럽의 직물업계가 그곳으로 이전했는데, 두 나라가 한 단께 더 부유해지면서 3단계로 진입하자 조만간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만약 아프리카로 이전한다면, 방글라데시와 캄보디아는 사업을 다각화하지 않을 경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투자 결정과 관련해서는 과거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그리고 언론 탓에 오늘날까지도 이어진)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순진한 시각을 버리고, 오늘날 최고의 투자 기회는 가나, 나이지리아, 케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업계는 조만간 철자 실수보다는 사실 오해를 바로 잡는 데 신경을 쓰고, 직원과 고객이 세계관을 반드시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길 바라지 않을까 싶다.

 

p362

 궁극적으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언론인의 역할도, 활동가나 정치인의 목표도 아니다. 이들은 항상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극적인 서사로 우리의 주의를 끌려고 경쟁하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항상 흔한 것보다는 색다른 것에, 느린 변화보다는 새롭고 일시적인 것에 집중한다.

 양질의 뉴스 매체조차 통계 기관처럼 세계를 중립적으로, 그리고 극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그렇게 보도해야 맞겠지만, 그러면 너무 지루할 것이다. 언론에 그 수준까지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보다는 소비자인 우리가 뉴스를 좀 더 사실에 근거해 소비하고, 뉴스가 세계를 이해하는 매우 유용한 도구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