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자인 앤 드루얀의 남편이자 작고한 칼 세이건의 코스모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최신의 우주 탐사의 내용들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기후 문제까지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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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0

 우주의 나이에 대한 최신 정보는 유럽 우주국(ESA)의 플랑크 위성이 알아낸 것이다. 플랑크 위성은 1년 넘게 온 하늘을 훑어서 우주가 갓 태어났을 때, 그러니까 대폭발(big bang)으로부터 겨우 38만 년 흐른 시점이었을 때 처음 방출된 빛을 꼼꼼하게 측정했다. 그 데이터는 우리에게 코스모스의 나이가 138.2억 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이것은 과학자들이 기존에 생각하던 것보다 1억 년 더 많은 숫자였다.

 과학의 멋진 점 중 하나가 이것이다. 약간 더 나이가 든 우주의 증거가 발견되었을 때, 그 정보를 은폐하려고 한 과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새 데이터가 사실로 확인되자마자, 온 과학계가 수정된 지식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언제까지나 혁명적인 태도, 변화에 대한 열린 태도가 과학의 핵심에 있기 때문에 과학이 이토록 효과적인 것이다.

 

p54

 시신을 떠멘 장례 행렬이 차탈회위크를 떠나 드넓은 아나톨리아 평원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곳에는 높은 좌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좌대에 시신을 올리고, 맹금과 비바람이 그것을 먹어 치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 사람 정도는 남아서 뼈까지 다 없어지진 않도록 망보았을 것이다. 독수리들이 좌대를 맴돌았고, 비바람이 불어닥쳤다.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유골만 남았을 때, 사람들의 행렬이 돌아왔다. 이제 유골을 붉은 황토로 장식해 태아처럼 웅크린 자세로 배치한 뒤 자신들이 사는 집 거실 바닥에 묻을 차례였다. 아마도 의례적인 행동이었을 텐데, 사람들은 이따금 발밑의 무덤을 열어 사랑하는 망자의 해골을 꺼낸 뒤 자신들이 사는 공간에 보관했다. 그들이 망자와 맺었던 관계는 아마 우리들보다 더 평화롭지 않았을까.

 

▶ 절(寺)에 가보면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탑(塔)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물론 전국의 모든 사찰에 다 진신사리가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에는 어떤 고승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100여개 들고 와서 전국 사찰에 나눴는데, 이런 진신사리가 모셔진 사찰을 특별히 적멸보궁이라 한다. 그리고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전통적인 규율에 따라 부처상이 없다. 원래 전통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상을 만들 수 없게 되어 있다. 부처상을 만든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정복 후, 헬레네 문명이 유입되면서 그리스 조각문화가 불교와 결합된 이후이다).

 즉 고대에는 가족 혹은 존경받는 사람들이 죽고 나면, 그 시신의 뼈 혹은 태우고 남은 재를 가정내에 모시는 것이 원초적인 형태였을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장례후 망자의 다비의 일부를 자그마한 단지에 담아 집에 마련된 자그마한 신당에 모시고 매일 아침에 지은 밥을 올리는 의례를 하는 집이 상당히 많다. 이렇듯 우리가 지내는 제사라는 의례는 이렇게 소박한 형태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저 생각나면 거실 바닥을 파서 돌아가신 이들의 뼈를 보고 생각에 잠기는 행위는 애틋하기도 하고 로맨틱하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기괴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p61

 유태인 공동체의 불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자신들이 살아온 세상이 악몽처럼 뒤집히는 꼴을 목격했으니, 무엇보다도 지역 사회에 받아들여져서 평온하게 살기만을 바랐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에는 얄궂은 면이 있다. 구약의 기도문은 사람들에게 매일 일상을 영위하는 모든 행동에서 주님을 떠올리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한 일이 바로 그것 아니었는가? 그는 사방에서, 만물에서 신을 보지 않았던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중이든 자연의 모든 곳에서 신이 있다고 보지 않았던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중이든 자연의 모든 곳에 신이 있다고 보지 않았던가?

 스피노자가 기적이라면 질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1670년 출간한 『신학-정치론(Theological-Political Treatise)』의 6장을 통째 이 주제에 할애해서, 사람들이 기적에 부여하는 의미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를 꼬치꼬치 설명했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기적에서 신을 찾지 마라. 기적이란 자연 법칙의 위반인 셈이다. 그런데 만약 그 자연 법칙을 쓴 것이 신이라면, 신이야말로 그 법칙을 가장 잘 이해하지 않겠는가? 기적은 자연적인 사건을 인간이 오해한 것뿐이다. 지진, 홍수, 가뭄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신은 인간의 희망과 두려움이 투사된 존재가 아니라 우주를 존재하게끔 한 창조력일 뿐이고, 우리는 자연 법칙을 연구할 때 그 창조력을 가장 잘 접할 수 있다.

 

p62

 그가 볼 때 국가 공인 종교란 정신적 강압일 뿐이었다. 주요한 전통 종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초자연적 현상은 조직화된 미신일 뿐이었다. 그는 그런 마술적 사고가 자유로운 사회의 시민들에게 위험하다고 믿었다.

 

 

 1920년 11월, 역시 빛에 대한 열정으로 넘치는 또 다른 남자가 스피노자의 철학이 미친 영향력을 기념해 박물관으로 보존된 헤이그의 초라한 작업실을 찾았다. 새로운 자연 법칙을 발견한 업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그 과학자는 사람들로부터 종종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믿는 신은 만물의 조화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입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p63

 식물로 산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한자리에 뿌리 박고 있는 존재에게 섹스가 만만찮은 과제다. 데이트는 불가능하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바람에 씨앗을 날릴 뿐, 말 그대로 손 놓고 앉아서, 바람이 불어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운이 좋다면, 당신이 날려 보낸 꽃가루가 다른 식물의 암 생식기에 해당하는 암술에 가 닿을지도 모른다.

 식물은 이렇게 무턱대고 운에 맡기는 방식을 2억 년 동안 써 왔다. 그러던 중 드디어 큐피드 역할을 해 줄 곤충이 진화했다. 그 결과는 생명 역사상 가장 훌륭한 공진화(coevolution)였다. 곤충은 단백질이 풍부한 꽃가루를 먹으려고 꽃을 찾는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곤충의 몸에 꽃가루가 좀 묻고 곤충이 다음 식사를 하려고 다른 꽃으로 옮길 때 몸에 묻은 꽃가루도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 꽃가루가 다음 꽃을 수정시켜서, 식물의 번식을 돕는다.

 이것은 꽃에게도 곤충에게도 좋은 거래였고, 여기에서부터 또 다른 진화적 발전이 이어졌다. 식물은 꽃가루 외에 달콤한 꿀도 생산하게 되었다. 이제 곤충은 꽃가루 식사뿐 아니라 디저트까지 먹을 수 있었다. 곤충은 더 통통해졌다. 몸에 복슬복슬 털이 났고, 매일 꽃을 돌아볼 때 다리에 꽃가루를 더 많이 붙일 수 있도록 작은 주머니까지 진화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꿀벌이었다.

 이 일은 동물계의 또 다른 종에게도 횡재였다. 우리 인간 말이다. 연기 나는 단지를 들고 꿈 따는 사람을 그린 스페인 동굴 벽화를 비롯해 고대의 다른 많은 그림이 알려주듯이, 우리 선조들은 꿀을 좋아했다. 꿀 자체를 즐겼을 뿐 아니라 꿀을 발효시켜서 벌꿀 술로 만들어 취하는 방법까지 알아냈다.

 새와 박쥐도 꽃가루받이 사업에 끼고 싶어 했지만, 곤충만큼 특히 꿀벌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꿀벌에게 고마워해야 할 이유는 그 밖에도 많다. 아름다움도 한 이유다. 식물은 꿀벌의 번식 대행 서비스를 누리려고 경쟁하다가 꿀 이외의 다른 전략도 진화시켰고, 그것이 바로 향기와 색이었다.

 꿀벌의 눈에는 사람처럼 세 가지 광수용체가 있다. 단 기능이 좀 다르다. 우리 눈은 빨강, 파랑, 초록을 인지하는 데 비해 벌의 눈은 자외선, 파랑, 초록을 인지한다. 주황빛이나 노란빛 파장은 붉은빛으로 인지한다.

 우리는 아름다움 외에도 우리의 생존에 더 긴요한 요소를 벌에게 빚지고있다. 여러분이 어떤 음식을 먹든, 이것은 육식 애호가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셋 중 하나는 벌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던 음식이다. 벌은 우리가 먹을 식량의 총량을 늘려 주기만 한 게 아니었다. 우리의 안정적인 식량 수급을 돕는 생물 다양성도 벌에게 빚진 바가 크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우화의 슬픈 대목으로 접어들었다. 동물계의 새 구성원이 몰지각하고 욕심 사납고 근시안적인 행동으로 그 오래된 동맹을 망가뜨리는 대목이다. 내가 더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무슨 말인지 알 것이고, 그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 것이다.

 

p71

 현재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인류가 가장 가까운 별로 처음 정찰을 떠나게 될 브레이크스루 스타샷(Breakthrough Starshot)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들이 살아서 그 사업이 완료되는 모습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약 20년 뒤, 1,000대의 우주선 함대가 지구를 떠날 것이다. 레이저 빛을 돛에 받아서 움직일 성간 우주선은 무게가 1그램밖에 안 된다. 크기가 콩알만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의 첫 성간 우주선이었던 NASA의 보이저 호들이 갖춘 장치는 물론이고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모든 나노(nano)우주선에는 다른 별에 딸린 세계들을 정찰한 뒤 시각적, 과학적 정보를 지구로 보내는 데 필요한 도구들이 다 들어 있다.

 보이저 1호는 시속 6만 킬로미터 속도로 40년 넘게 여행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인상적인 속도이고 보이저 1호가 항해 초기에 거대한 목성을 근접 비행하면서 얻었던 단 한 번의 중력 도움으로 지금껏 날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대단하다. 하지만 그저 은하 하나의 규모에서라고 해도 그것은 꿈속에서 달리는 것처럼 몽롱한 속도다. 빠르기는 해도, 어딘가에 다다르기에는 턱없이 느리다.

 스타샷 나노 우주선은 보이저 호를 나흘 만에 앞지를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그 속도마저도 광속의 20퍼센트에 불과하다. 별들은 정말 멀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별인 센타우루스자리 프록시마까지의 거리는 4광년이다. 스타샷 우주선이 가는 데만 2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우리가 알기로 센타우루스자리 프록시마의 생명 거주 가능 영역에는 행성이 있다. 어쩌면 그곳에는 물이 흐를지도 모른다. 생명이 꽃피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다른 행성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로봇 사절들은 그 새로운 세계(들)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보내올 것이다. 데이터는 전파의 형태로 광속으로 날아오므로, 우리에게 도착하기까지 4년이 걸릴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후에 그들은 고향에 어떤 이야기를 보내올까?

 

p124

 골드슈미트는 또 감락석이 코스모스에 널리 퍼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것은 우주 화학이라고 불릴 분야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는 좀 더 전통적이지만 훨씬 더 시급한 화학 작업이 있었다. 나치가 노르웨이를 쳐들어오기 전날, 골드슈미트는 보호복을 입고 사이안화물(청산가리) 캡슐을 몇 개 만들었다. 그리고 게슈타포가 잡으러 올 때를 대비해서 캡슐을 늘 몸에 숨겨 지니고 다녔다. 어느 동료가 그에게 자신도 하나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묻자, 골드슈미트는 이렇게 대답해싸. "독약은 화학 교수를 위한거라네. 자네는 물리학자니까 밧줄을 쓰게."

 

p142

 1600년 2월 19일 오후 5시, 페루 남부에서 후아이나푸티나(Huaynaputina) 화산이 폭발했다. 돌덩이, 기체, 먼지가 하늘로 치솟아 거대한 연기 기둥을 이뤘다. 역사 기록상 남아메리카 최대의 분화였다. 연기 기둥은 대기를 뚫고 솟았다. 대류권을 뚫고, 성층권을 뚫고, 검푸르다 못해 거의 캄캄한 중간권까지 도달하고서야 비로소 땅으로 떨어졌다. 황산과 화산재가 섞인 불쾌한 연기가 햇빛을 차단했다. 겨울이 왔다. 화산성 겨울(volcanic winter)이었다.

 그해 러시아 사람들은 600년 만에 최고로 가혹한 겨울 날씨를 맞았다. 이후 2년 동안 여름에도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러시아 인구의 3분의 1이었던 200만 명이 이상 기온으로 인한 기근으로 죽었다. 누더기로 얼굴을 동여맨 사람들은 덜덜 떨면서 거대한 구덩이를 파서 시체들을 한데 묻었다. 이 기근은 황제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모두 1만 3000킬로미터 떨어진 페루에서 분화한 화산 때문이었다. 지구가 하나의 유기체라는 말을 공허한 감상주의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것은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다.

 

p254

 프리슈는 표시된 벌이 벌집 입구에서 햇빛을 받으며 겉보기에는 무의미한 춤을 씰룩쌜룩 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그 변덕스러워 보이는 춤 동작을 태양의 위치와 함께 공책에 꼼꼼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 벌이 왼쪽으로 돌았다가 오른쪽으로 돌았다가 하면서 춤추는 동작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그러자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결론이 떠올랐다. 벌의 안무에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었다. 벌은 춤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프리슈는 이것을 독일어로 "tanzsprache"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언어는 수학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 프리슈는 벌의 1초(second, s) 동안 씰룩거림(waggle, w)은 1킬로미터의 거리를 뜻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즉 1sw = 1킬로미터였다. 이 정보에 태양의 위치와 씰룩거리는 방향을 결합하면, 나무로 가득한 숲에서 딱 한 나무를 가리킬 수 있는 확실한 암호가 되었다. 만약 이 공식이 우주 저편에서 날아와서 FAST 망원경에 잡힌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것을 외계 지적 생명체가 보낸 메시지라고 해석할 것이다.

 과거 수많은 관찰자가 멍청한 동물의 무의미하고 발작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은 사실 정교한 메시지였다. 수학, 천문학, 그리고 시간을 정밀한 단위로 측정할 줄 아는 예리한 능력을 활용한 메시지였다. 벌은 그 모든 지식을 결합해서 자매들에게 알리고 싶은 횡재가 있는 위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춤꾼은 태양의 각도록 먹이가 있는 방향을 대충 표현한다. 프리슈가 보니, 벌이 위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태양을 향해 날아가라."라는 뜻이었다. 반면 반대 아래쪽으로 움직이는 것은 "태양과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라."라는 뜻이었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먹이의 좌표를 좀 더 정확하게 알리는 몸짓으로, 가끔 그 좌표는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일 때도 있었다. 춤의 지속 시간은 - 몇분의 1초 단위로 정밀하다. - 친구들이 날아가야 할 시간을 뜻했다. 벌은 심지어 풍속까지 고려해서 메시지를 미세하게 조정했다. 춤은 사시사철 한결같았으며, 어느 벌집의 벌이든 어느 대륙에서 사는 벌이든 다 같은 춤을 추었다. 사회성을 가진 벌이라면 모두 이처럼 공간과 시간을 비행할 때 쓸 방정식을 계산하고 소통할 줄 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사는 벌들은 서로 다른 방언을 쓸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통역이 쉽게 이뤄지는 듯하다.

 나는 왜 이 이야기를 서로 다른 문명들이 처음 만난 이야기라고 말했을까? 더 다를 수 없을 듯한 두 종이 - 인간과 꿀벌이 - 수억 년 동안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밟아 왔다. 그런데도 두 종은 - 그리고 우리가 아는 한 지구에서는 오직 꿀벌과 우리만이 - 물리 법칙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서 수학으로 표현한 기호 언어, 즉 과학을 발명해 냈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외계 문명과 공유할 수 있는 언어도 이런 형태의 언어일 것이라고 여긴다.

 

 

p298

 누군가의 꿈이 그 사람과 함께 죽을 때도 있지만, 다른 시대의 과학자들이 그 꿈을 건져내어 달까지, 그리고 그보다 더 멀리까지 데려가는 때도 있다. 유리 콘드라튜크는 자칫 깡그리 잊힐 수도 있었다. 그가 정말로 우주 탐사에 이바지했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따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를 기억하고 그가 합당한 공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애쓴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닐 암스트롱은 달 여행에서 돌아온 이듬해, 우크라이나에 있는 콘드라튜크의 허름한 오도막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암스트롱은 무릎을 꿇고, 떠내도 될 듯한 흙을 좀 떠냈다. 자신이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 암스트롱은 당시 (구)소련이었던 그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부디 자신의 신화적인 비행을 가능케 해 준 콘드라튜크를 기려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p343

 H.G. 웰스의 소설을 읽은 사람 중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라는 젊은 물리학자가 있었다. 1933년 9월 12일, 헝가리에서 망명한 실라르드는 런던의 스트랜드 팰리스 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는 막 《타임스》에 실린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경의 연설물은 읽고 심기가 거슬린 참이었다. 러더퍼드는 많은 업적 중에서도 특히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바뀔 때 방사선이 방출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로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일컫어지는 과학자였다. 실리라드가 못마땅한 점은 그 러더퍼드가 우리가 원자 구조에 대한 지식에서 에너지를 얻어낼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한 점이었다. 실라르드는 생각할 일이 있을 때 즐겨 쓰는 수단이었던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길을 걸으면서, 실라르드는 한가운데에 양성자와 중성자가 모여 있고 그 겉에 휙휙 나는 전자들의 베일이 덮여 있는 원자의 구조를 떠올렸다. 그가 사우샘프턴 가와 러셀 광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릴 때, 번뜩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우리가 중성자 1개를 흡수하고 대신 중성자 2개를 내놓는 원소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 연쇄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발상이었다. 중성자 2개가 중성자 4개를 낳고, 중성자 4ㄱ개가 중성자 8개를 낳고....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원자핵에 갇힌 엄청난 에너지가 풀려날 것이다. 이것은 화학 반응이 아니라 핵반응이었다.

 

 

 레오 실라르드는 기하급수적 증가의 힘을 잘 알았다. 우리가 만약 저 깊은 원자핵의 세계에서 연쇄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면 웰스가 상상한 원자 폭탄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는 그 파괴적 가능성에 몸서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어 끊임없이 이어진 인류 폭력의 역사에서 가장 최신의 발명일 뿐이었다.

 

p354

 미국 전쟁부가 원자 폭탄 개발 프로젝트의 본부로 낙점한 곳은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라는 외딴 장소였다. 그곳을 추천한 사람은 프로젝트 책임자인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그는 10대 때 요양하느라 그곳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텔러에게는 그 원자 폭탄도 성에 차지 않았다. 텔러는 그것보다 더 큰 살해 범위를 가진 무기, 원자 폭탄을 한낱 원자핵으로 이어진 도화선을 당기는 성냥으로 쓰도록 설계된 무기, 나중에 열핵 무기(thermonuclear weapon)라는 이름을 얻을 무기를 꿈꿨다. 그는 애정을 담아서 그 무기를 "슈퍼"라고 불렀다.

 당시 과학계에서 텔러와 극과 극처럼 달랐던 인물을 꼽으라면 조지프 로트블랫(Joseph Rotblat)이었을 것이다. 로트블랫은 폴란드 바르샤바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텔러처럼 모든 것을 잃었다. 나치가 침공해 오기 직전이었던 1939년 여름, 그는 영국 리버풀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런데 떠나기 직전에 사랑하는 아내 톨라(Tola)가 응급 맹장 절제술을 받게 되었고, 톨라는 몸이 여행을 견딜 만큼 회복될 때까지 뒤에 남아야 했다. 톨라는 남편에게 자신은 몇 주 뒤면 뒤따라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 혼자 미리 가서 살 집을 준비해 두라고 부득부득 우겼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는 실라르드가 런던 산책 중 처음 떠올렸던 연쇄 핵반응을 개시할 화학적 도화선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자신들이 유례없는 파괴력을 지닌 폭탄을 만드는 것은 그것보다 더 위중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자신들의 정부는 믿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나라 정부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정부는 그런 무기를 선제 공격에 쓰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 과학자들은 핵무기를 핵전쟁의 억지 수단으로 보는 관점을 처음 채택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원자 폭탄을 가진 히틀러에 대한 공포를 자신들의 일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았다. 하지만 독일이 항복하고 히틀러가 죽은 뒤, 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수천 명의 연합국 과학자 중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 한 명이 조지프 로트블랫이었다. 이후 사람들이 그 결정에 관해서 물을 때마다, 로트블랫은 남들보다 그가 더 양심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느냐는 식의 질문에는 늘 아니라고 답했다. 그저 미소 지으면서, 결국 바르샤바를 떠나지 못하고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연락이 끊긴 아내가 몹시 그리웠을 뿐이라고 말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그는 마침내 바르샤바로 돌아가서 아내를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찾아낸 것은 사망자 명단에 오른 이름뿐이었다. 톨라는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잃었다. 베우제츠(벨체크) 절멸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로트블랫은 이후 60년을 더 살았다. 재혼은 하지 않았고, 핵무기 감축 운동에 끝까지 앞장섰다.

 

 전쟁 중 원자 폭탄 개발에 나섰던 세 나라 중 종전 전에 성공한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역사학자들은 미국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이민자를 많이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본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사람 가운데 미국 태생은 2명뿐이었고,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1명뿐이었다.

 핵무기가 핵전쟁 억지 수단이 되어 주리라는 과학자들의 생각은 잘못 짚은 것이었다. 결국 미군 폭격기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해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냈다. 두 달 뒤, 트루먼 대통령이 오펜하이머를 치하하고자 그를 집무실로 불렀다. 트루먼의 입장에서는 실망스럽게도, 오펜하이머는 치하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트루먼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손이 피로 물든 기분입니다."

 트루먼은 넌더리 난다는 표정으로 오펜하이머를 보며 경멸조로 말했다. "바보처럼 굴지 마시오. 손이 피로 물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요.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소."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굽히지 않고 도리어 대통령에게 되물었다. "러시아가 폭탄을 보유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트루먼은 대답했다. "절대 못 가질걸!"

 오펜하이머가 떠나자, 트루먼은 역정 난 얼굴로 보좌관에게 말했다. "저 징징거리는 과하가를 두 번 다시 내 곁에 들이지 마! 알아들었어?"

 그로부터 4년이 채 못 되어, 러시아가 원자 폭탄을 터뜨렸다. 과학자들이 세 통의 편지에서 상상했던 핵무기 경쟁은 더 무시무시한 두 번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전쟁 후, 살해 범위가 더 큰 무기를 개발하고 싶다는 텔러의 꿈이 현실이 되었다 1950년대 초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마녀 사냥이 한창이었들 때, 텔러는 자신의 옛 상사이자 맨해튼 프로젝트를 훌륭하게 이끌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기뿐 마음으로 당국에 귀띔했다. 그는 오펜하이머의 비밀 정보 취급 인가를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리하여 결국 오펜하이머의 경력을 끝장내는 데 일조했다. 오펜하이머는 텔러가 사랑하는 '슈퍼' 폭탄 제작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텔러는 또 "핵무기를 유지하고 개량하기 위해서"는 대기권 핵실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짓 주장을 내세우면서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막든 데 힘썼다.

 

 

p401

 아니면 약 1,000년쯤 전, 아시아 전역의 사람들이 처음 쌀농사를 했을 때 인류세가 시작되었을까? 그들은 써레질과 이앙법이라는 혁신적인 기술을 써서 물 댄 논에 미리 기른 모종을 옮겨 심기 시작했다. 이 근면한 농부들은 이런 벼농사 기법이 소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수억 톤의 메테인을 배출하리라는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물 댄 논은 산소를 잃는다. 그러면 눈에 안 보이는 미생물들이 식물성 물질을 소화시켜서 메테인을 내놓는다. 설상가상, 벼잎도 대기로 메테인을 더 내보낸다. 하지만 옛 농부들은 미시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현대 과학이 등장하기 전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들 역시 그저 자신과 가족의 입에 풀칠하려 애쓴 것뿐이었다.

 

p411

 예언이란 트로이 공주의 열렬한 흡소 형태일 수도 있지만, 무미건조한 제목을 가진 과학 논문의 형태일 수도 있다. 「상대 습도의 분포에 따른 대기의 열평형(Thermal Equilibrium of the Atmosphere with a given distribution of relative Humidity)」이라는 제목은 "재앙이 임박했다! 재앙이 임박했다!" 하는 경고로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내용은 분명 그런 내용이었다. 마나베와 동료 리처드 웨더럴드(Richard Wetherald)는 인간이 대기로 내놓는 온실 기체가 증가함에 따라 지구 온도가 어떻게 바뀔지 예측했다. 그들이 다가오는 재앙이 어떻게 펼쳐질지 정확히 내다보았다. 우리 시대는 물론이고 그 너머까지, 멀리 볼 줄 알았다. 요즘도 일부 사람들은 기후 변화를 과학적으로 확실히 확인되지 않은 현상이라고 주장하지만, 만약 그렇다며 마나베와 웨더럴드가 어떻게 향후 50년 이상의 지구 온도 증가세를 그토록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 변화가 인간이 야기한 것이 아니라면, 그 많은 이산화탄소가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이후 다른 많은 기후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해안 도시들의 잦은 범람 : 사실. 바닷물 수온 상승으로 산호의 떼죽음 : 사실. 자연 재해 수준의 폭풍이 더 거세어짐 : 사실. 치명적인 무더위와 가뭄과 걷잡을 수 없는 산불이 유례없는 수준으로 벌어짐 : 사실. 과학자들은 분명 우리에게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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