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직업은 약사이다. 약과 치료법에 대해 재밋게 쓰여진 책이다.

인류를 구한 12가지  약 이야기라는 전작과 이어지는 내용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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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는 이듬해 봄부터 전쟁에서 빠졌다. 독일은 러시아 전선에 투입했던 100만 명의 병력을 서부전선으로 돌려 총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나타난 대량 살상 무기에 큰 타격을 입었다. 6월부터 유행한 스페인 독감에 당한 것이다. 스페인 독감이라는 복병과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918~1920년 유행한 스페인 독감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앞당겨졌다. 종전 협상을 위해 파리에 온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마저 독감에 걸렸다. 윌슨은 어쩔 수 없이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에게 베르사유조약 체결을 위임했다. 가혹한 조건을 강요한 클레망소에 의해 독일은 식민지를 빼앗기고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단기간에 발생하는 엄청난 물가 상승 현상인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독일 경제는 파탄 났고 외세에 대한 분노가 커질 대로 커졌다.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상황에서 등장한 나치즘과 대공황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p28

 박쥐는 포유류 가운데 유일하게 날아다니는 동물이면서 군집 생활을 한다. 박쥐가 날개로 난다고 생각하지만, 해부학적으로 날개 부위는 '앞발'이다. 박쥐는 앞발의 피부 막으로 날아다닌다. 박쥐에 있는 바이러스는 137종이나 된다. 그중 사람에게 감염되는 인수공통 바이러스는 61종이다. 사람과 대다수 동물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면역물질 인터페론을 생성해 대항하지만, 박쥐는 평소에도 인터페론을 만든다. 그래서 많은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감염되지 않는 특이한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다. 밤에 최대 350km 이상 비행하며 거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는 박쥐는 체온이 40℃ 이상으로 다른 포유류에 비해 높다. 체온이 높으면 신진대사가 활발하고 면역력이 강해져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다. 박쥐는 바이러스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공존해 살아간다.

 

p29

 가금류나 돼지가 야생조류, 즉 철새의 분변으로 오염된 물을 마시면 바이러스가 몸속으로 들어가 증식한다. 조류독감에 걸린 가금류는 금방 죽지만, 돼지는 죽지 않고 오래 살아서 바이러스가 서로 섞인다. 여기에 돼지를 가까이에서 키우는 사람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혼합된다. 돼지는 상부 호흡기에 조류에 있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수용체와 사람에게 있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수용체 모두를 가지고 있다. 즉 조류 인플루엔자도 걸리고 사람 인플루엔자도 걸려 바이러스가 동시에 섞이면 새로운 변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조류,돼지,사람 바이러스 유전자가 돼지 몸속에서 섞여서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드는데, 이런 과정을 유전자 재편성이라고 한다.

 

p62. 오바마 정부의 딜레마 사후피임약

 매일 정해진 시간에 1정씩 먹어 임신을 예방하는 사전피임약과 달리, 사후 피임약은 성관계 뒤에 먹는다. 2002년 시판된 72시간(3일) 안에 먹는 약뿐 아니라 지금은 120시간(5일) 안에 복용하는 약도 나와 있다. 12시간 이내에 복용하면 90% 이상 피임 성공률이 나오고 24시간 이내는 약 80%, 72시간 이내는 60% 정도로 시간이 지날수록 효과가 떨어진다.

 사전 피임약 성분은 2종류(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인데 반해, 사후 피임약은 단일성분(프로게스테론)이다. 3일 안에 먹는 약은 레보노르게스트렐(상품명 노레보원, 포스티노원), 5일 안에 먹는 약은 울리프리스탈(상품명 엘라원)이 있는데 고농도의 프로게스테론이 들어 있다. 2세대 피임약에서 레보노르게스트렐이 100ug 혹은 150ug이 있는데, 사후피임약은 1,500ug으로 10배 정도 양이 많다. 식사와 관계없이 복용 가능하며, 월경주기 어느 때라도 사용할 수 있다. 복용 후 3시간 이내 구토하면, 바로 1정을 추가로 복용한다. 사후피임약은 쉽게 구입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처방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의사 단체, 약 자체를 죄악시하는 종교 단체에 의해 종종 논란거리가 된다. 미국에서는 오바마 정부 때 큰 정치적 이슈였다.

 1999년 미국에서 이스라엘 제약회사 테바가 사후피임약 플랜 B를 출시했다. 처음에는 의사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2001년부터 여성 단체는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과학자들은 안전성이 확보되었으므로 일반의약품으로 판매해도 문제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보수적인 공화당 부시 정부는 응하지 않았고 2006년에 와서야 18세 이상만 처방 없이 살 수 있도록 바꾸었다. 그러다 2009년 오바마 정부는 17세 이상으로 나이를 낮췄다.

 2011년이 되어서야 미국 FDA는 "나이 제한을 없애고 플랜 B를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캐슬린 시벨리우스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를 거부했다. 시벨리우스 장관은 11세 소녀도 10%는 임신할 수 있는데, 플랜 B의 안전성이 어린 여성에게는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FDA는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이므로 장관이 결정을 거부할 권한이 있다. 전문가들이 과학적 근거에 따라 내리는 FDA의 결정을 장관이 뒤집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 민주당은 진보적이이서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편인데, 이런 결정을 한 것은 의외였다. 여기에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임을 원했다. 17세 이상이라는 나이 제한을 유지함으로써 뜨거운 이슈였던 플랜 B 논란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나이 제한이 풀리면 부모 몰래 아이들이 플랜 B를 남용하게 된다는 여론을 의식한 것이다.

 논란은 법정 싸움으로 이어졌다. 2013년 연방법원은 "시벨리우스 장관의 결정은 과학보다 정치를 앞세운 것이었다"며 플랜 B에 대한 나이 제한을 철폐하고 누구나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도록 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은 "과학적 근거뿐 아니라 때로는 상식적 판단도 중요하다"며 버텼다. 오바마 정부는 나이 제한을 15세로 낮추는 것으로 타협하려 했지만, 법원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플랜 B는 2013년, 나이 제한 없이 약국에서 바로 살 수 있는 약이 됐다.

 사후피임약은 응급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피임약 대용으로 먹어서는 안 된다. 몸에 무리를 줄 수 있어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사전피임약으로 관리하는 것이 좋다. 피임약은 광고만 보고 구입하기보다는 궁금한 것을 약사에게 문의하면 도움이 된다. 자궁 출혈, 혈전 위험 등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호르몬 종류와 함량에 따라 선택해서 복용하는 것이 유익하다.

 

p81

 남녀의 특징을 한 몸에 지닌 사람을 간성 혹은 인터섹스라고 한다. 염색체, 생식샘, 성호르몬, 성기 등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 정의와 다른 특징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성별 구분이 모호한 사람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사방지와 임성구지이다.

 세조 8년(1462), 왕은 당시 실세였던 역술가 이순지의 딸이 과부가 된 후 사방지라는 양성인兩性人 노비와 10년 동안 내연관계를 맺었다는 사헌부의 보고를 받았다. 사방지는 겉보기에는 여성이지만 남성 생식기를 가지고 있었다. 양반 자식으로 태어났던 사방지가 양성을 지닌 것을 보고 어머니는 여자 옷을 입히고 바느질을 가르치며 여자로 살도록 했다. 그러던 중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이 될 때 세조 편에 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방지 집안은 멸문되어 노비가 되었다. 사방지는 장성한 뒤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는데, 이때 이순지의 딸 이 씨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세종은 사방지를 불쌍히 여겨 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대신 측근 이순지에게 처분을 맡겼다. 이순지는 사방지를 시골로 보냈다. 그렇지만 이 씨와 사방지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이순지가 죽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승 한명회가 처벌을 주장하자 세조는 사방지를 관로비로 만들어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게 했다. 이로써 사방지와 이 씨의 관계도 끝나고 말았다.

 또 다른 예로 임성구지가 있다. 명종 3년(1548), 함경도 감사가 길주 지역에 사는 임성구지가 양의(남성과 여성 생식기)를 가져 시집도 가고 장가도 들었다고 보고했다. 처음에 여자로 살려고 시집갔지만, 첫날밤 그녀의 몸을 본 남편이 혼비백산했다. 새색시의 은밀한 부위에 생각지도 못한 남성의 성기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시집에서 쫓겨나온 임성구지는 남장을 했다. 남자 행세를 하면서 갈 곳 없이 떠돌다 마음 맞는 여자를 만나 장가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이중 행각은 얼마 후 들통이 났다. 관청에 끌려온 임성구지를 처리할 방법을 몰랐던 함경도 감사가 조정에 문의했다. 명종은 사방지 사례를 참고해 임성구지를 외진 곳으로 보내 다른 사람과 섞여 살지 못하게 했다.

 사방지와 임성구지처럼 남녀 생식기 모두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양성구유 혹은 남녀한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아기가 이렇게 태어나면 주변에 숨기고 부모가 한 가지 성을 결정해 살아가기를 강요한다. 1950년대 미국에서도 이런 아이가 태어나면 병원에서 수술해 한쪽 성을 정해버렸다. 아이가 자라면 자신이 선택한 성이 아니라서 나중에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특별한 현상은 고대부터 드물게 있었는데, 신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는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헤르마프로디토스가 나온다. 헤르마프로디토스가 연못에서 수영하고 있을 때 호수의 요정 살마키스가 그를 유혹했다. 헤르마프로디토스가 거부하자 살마키는 그의 몸을 칭칭 휘감은 후, 신에게 "우리 둘을 영원히 한 몸으로 만들어주세요"라고 빌었다. 그러자 둘은 남녀 양성을 가진 동체가 되었다.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조각상을 보면 남녀 한 몸 모양인데, 그리스에서는 남녀 모두를 가졌다고 해서 이상적인 인간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남녀의 성은 확실하게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전체 인구의 1.7% 혹은 연구에 따라서는 0.018%가 간성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외부 생식기는 남성이지만 난소가 있거나, 외형은 여성이지만 잠복 고환이 있는 등 형태도 다양하다. 세메냐처럼 여성인데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0.018%라 해도 현재 우리나라 5,100만 명 인구로 계산하면 9,000명이 넘는 사람이 간성이라는 의미다.

 2015년 국제연합은 간성 유아에 대한 생식기 수술 관행을 비판했다. 2017년 미국 휴먼 라이츠 워치 Human Rights Watch와 인터액트(간성 어린이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단체)는 생식기 수술을 비난하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미국 하원에 생식기 수술을 금지하라고 요구했다. 지금은 일방적으로 수술하지 않고 아이가 성장한 후 스스로 성을 선택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p252

 한때, 기생충은 박멸해야 하는 악이었지만 기생충이 거의 사라진 사회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알레르기와 자가면역질환이 늘어난 것이다. 1960~70년대는 위생상태가 나쁘고 상하수도 시설이 열악했다. 기생충이 창궐해서 대대적으로 퇴치했지만, 환경이 너무 깨끗해지자 과도한 면역반응이 일어났다.

 외부에서 들어온 기생충을 인체는 이물질로 인식한다. 면역세포가 기생충을 감시하며 관리하는 과정에서 면역체계가 강해졌는데, 이방인이었던 기생충이 갑자기 사라지자 혼란이 생겼다. 아토피, 천식, 비염같이 예전에는 드문 질환이 늘어났다. 3만 년 전 사람 몸속에서 회충이 발견될 만큼 사람과 기생충은 오랫동안 공생해왔다. 그래서 서로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균형을 이루며 살았다. 보기에는 흉측하지만 나름 기생하면서 면역을 튼튼하게 해준 공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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