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가 제시하는 대한민국이 경제적 민주주의로 가는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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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3

 불환화폐(신용화페)라는 (중앙)은행권은 금 대신 정부가 가치를 보장하는 화폐(채권)이다. 왕이나 오늘날의 대통령 등이 아닌 정부의 경제력이 보증하는 것이다. 국가가 없어지지 않는 한 정부는 마르지 않는 샘에 해당하는 조세권이라는 경제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금 대신 사회 전체 생산물 중 사회몫에 해당하는 생산물이 금의 역할을 대체한 것이다. 국민이 함께 만든 생산물로 불환화폐의 가치를 보증하여 (보유금의 양에 의해 제한되었던) 은행에게 돈놀이의 장애물을 제거해주었기에 (영란등 중앙)은행의 설립 목표를 '공공선과 인민의 이익The public Good and benefit of our People 촉진'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처럼 불환화폐의 가치가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만들어낸 생산 중 사회몫으로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사회 구성원 모두는(생계에 필요한 최소소득을 사회소득으로 배분받을 권리가 있듯이) 최소한의 신용 이용에 대한 기본권리를 갖는다. 이재명 대표가 주장하는 '기본금융' 개념은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모든 국민은 세금을 납부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모두 함께 불환화폐 가치를 보증했기에 불환화폐의 혜택인 이른바 '사회금융' 혹은 '공공금융'을 누릴 권리를 갖는 것이다.

 

<정부 부채는 이자만 갚아나가도 괜찮은 이유 - 근거, 사례 및 설명?

p41.

 한국은행법을 보면 제1장 총칙이 시작되기 전에 해당 기관을 관할하는 상위 정부조직이 표기된다. 한국은행법에는 '기획재정부(거시정책과)'가 표기되어 있고 해당 기관의 전화번호(044-215-2831)도 옆에 기재되어 있다. 이것은 정부 조직법 가운데 행정각부의 역할을 규정한 제4장의 (기획재정부 역할을 규정한) 27조 ①항에서 화폐에 관한 사무를 기획재정부가 갖고 있음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① 기획재정부장관은 중장기 국가발전 전략수립, 경제/재정정책의 수립/총괄/조정. 예산/기금의 편성/집행/성과관리/화폐/외환/국고/정부회계/내국세제/관세/국제금융, 공공기관 관리, 경제협력/국유재산/민간투자 및 국가채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즉 화폐 발행의 원천적 권한은 중앙은행이 아니라 정부라는 이야기이다.

 한국은행법 제5절은 정부 및 정부대행기관과의 업무를 설정하고 있는데 정부와의 업무를 72조부터 75조까지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에 대해 돈을 빌려주는 업무를 규정한 제75조(대정부 여신 등)의 ①항에서 "한국은행은 정부에 대하여 당좌대출 또는 그 밖의 형식의 여신을 할 수 있으며, 정부로부터 국채를 직접 인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③항에서 "제1항에 따른 여신에 대한 이율이나 그 밖의 조건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한다"고 되어 있다. 즉 한국은행은 정부가 원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돈을 빌려 줄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러한 규정은 세계 모든 중앙은행의 공통 요소이다.

 

p43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국민이 부여한 임무(예:물가안정)를 정치적 잣대에 휘둘리지 말고 수행하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p44

 세계에서 정부 부채가 가장 많은 일본의 경우 <그림1>에 따르면 1990회계년도의 일본 정부가 상환해야 할 국채 규모는 166조 엔이고 이자부담액은 10.8조 엔이었다.

https://www.mof.go.jp/english/policy/budget/budget/fy2023/02.pdf

<그림1. 위 링크 22페이지>

 

2010회계년도에는 각각 636조 엔과 7.9조 엔이었다. 그리고 2022회계년도에는 각각 1,043조 엔과 7.3조 엔으로 정부 부채는 급증했는데 이자 부담액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1990년과 2022년 사시에 정부가 상환해야 할 국채 규모는 877조 엔이나 증가했는데 이자 부담액은 오히려 3.5조 엔이 줄어든 것이다. 국채 평균 조달 금리가 6.1%에서 0.8%로 하락했기 때문이다. (IMF <글로벌 부채 보고서Global Debt Monitor>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일본의 중앙정부 부채가 214.27%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견디는 이유 중 하나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엔화가 준기축통화라서가 아니라 국채에 대한 이자 부담이 오히려 줄어들어 재정 부담이 줄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는 일본이 인플레이션과 엔저 속에서도 금리를 인상하지 못하는, 즉 통화정책의 정상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은 어떨까? <그림2>에서 보듯이, 2011~2021년의 10년간 국고채 발행 잔액은 340.1조 원에서 843.7조 원으로 약 2.5배 증가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이자 부담액은 13.5조 원에서 15.1조 원으로 12%도 증가하지 않았다. 

일본처럼 초저금리는 아니지만 한국도 조달금리가 낮아진 것은 마찬가지이다. 세계적 인플레와 금리 인상에 따라 조달금리가 다시 3%대로 올라간 2022년의 경우 국고채에 대한 이자 부담액이 약 30조 원으로 2021년에 비해 약 2배로 증가했다. 이처럼 정부 재정의 지속 가능성은 정부 채무의 절대 규모보다 이자율에 의해 영향을 크게 받는다.

 물론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외국자본의 갑작스러운 유출에 따른 충격도 고려해야만 한다. 국고채를 매각하고 철수할 때 환율 급등을 포함한 외환시장이 충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 12월 기준 외국인은 219.5조 원 규모의 국고체를 보유하고 있다. '1달러=1,300원'을 기준으로 할 때 약 1,688억 달러 규모에 해당한다. 참고로 일본은 2022년 12월 말 기준 외국인이 약 165.3조 엔 규모의 일본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1달러=140엔'을 기준으로 할 때 약 1조 1,800억 달러 규모에 해당한다.

 2023년 12월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약 4,201억 달러,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조 2,950억 달러 정도이니 한국이 상대적으로 더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엔화 하락을 막으려면 달러를 매각하여 엔화를 사들여야 한느데 외환보유액 사정으로 달러를 적극적으로 시장에 풀기 어렵다. 금리도 인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달러 투입도 어렵다 보니 엔화 가치를 방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처럼 정부 채무는 기본적으로 이자를 상환할 수 있으면 지속 가능하다. 이자 지급액은 세금 등 정부 수입에 달려 있고, 정부 수입은 조세율이 변하지 않을 경우 경제성장률에 크게 의존하기에 정부 채무의 지속 가능성을 따질 때 정부의 자금조달 금리(국채 발행 이자율)와 성장률을 비교하는 이유이다. 물론, 외국인의 갑작스러운 자금 유출을 대비해 외국인 보유 규모를 고려한 외환 방어벽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크루그먼이나 아베 등이 정부 채무의 원금을 상환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이유는 맞는 말이다. 이는 영란은행 설립 과정에서 보듯이 중앙은행의 설립 이유가 정부 재정 공급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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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ght]

1. 국가채무는 원금의 상환능력은 중요하지 않다. 이자상환능력을 통해 국채를 지속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2. 국가채무가 자국통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외국인이 투자한 금액은 외국인이 투자를 외수할 경우 언제든지 외환(보통 달러)으로 유출될 수 있으므로 국가채무 중 외국인 투자분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외환보유고 방어벽이 필요하다.

3. 민간채무가 과도하여 소비위축등 경제적 패닉이 발생할 때는 국가가 재정확대를 통해 민간채무를 흡수하여 국가채무를 증가시키면서 민간경제 활성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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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1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으면 1원 1표 원리, 즉 돈의 힘이 지배하는 시장만 남고, 사회는 극단적 불평등을 향해 치닫고 결국 붕괴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최소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만 자본주의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이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은 기본적으로 불평등 심화의 결과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p55

 '돈의 흐름'을 의미하는 금융을 시장에만 맡겨놓으면 사회는 순식간에 야만화되고 그런 사회는 지속이 불가능하다. 불환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른바 화폐경제 시대의 경제 문제는 '돈의 배분' 문제로 귀착한다. 함게 생산한 생산물은 대부분 화폐로 표현되고, 그 생산물의 배분은 결국 돈의 배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함께 생산한 사회적 생산의 화폐적 배분을 어떻게 시장에만 맡길 수 있다는 말인가.

 공공금융의 복원은 좌파적이거나 진보적 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시장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출발했고, 양축이 균형을 맞추었기에 번영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근대 사회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공공영역에서 금융을 분리하여 시장(민간)금융 중심으로 바꾼 것이 (사회 전체를 금융 자본의 논리로 재구성한) 이른바 금융화였고,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공공영역의 축소로 이어졌다. 재정 지출 최소주의, 감세, 작은 정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불평등의 심화 및 가계 부채와 정부 채무의 급증 등이 그 산물들이다.

 

p59

 은행은 불환화폐를 도입 및 사용할 때부터 엄청난 특혜를 입었다. 게다가 가장 낮은 금리(비용)의 불환화폐를 이용한다. 그런데 그 불환화폐가 통용될 수 있도록 실질적 가치를 공동 보증한 일반 납세자 국민은,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층은 중앙은행의 혜택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공공선과 모든 인민의 이익을 촉진시킨다"는 중앙은행의 설립 목적이 사문화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와 민주주의가 실종된 결과이다.

 

p60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으로 유명하여 한국 부유층의 롤모델로 불리는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에서 개인의 선의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이 도탄에 빠진 양란 후 삼남(三南 : 충청,경사,전라도의 총칭)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인 1671년, 경주 최부자 최국선은 곳간을 헐어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헛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히도록 했다. 경주 부자 최국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들에게 서궤 서랍에 있는 담보서약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한 후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라"고 했다. 오늘날 은행금융 자본이라면 죽음과 절망에 놓여 있는 없는 사람을 상대로 부를 엄청나게 증식할 기회로 삼았을 것이다.

 경주 최부자 집이 10여 대 300년 동안 만석군의 부를 현명하게 지켜내며 어려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게다가 조선 말기 다산 정약용 등 많은 토지개혁 사상가들이 그렇게 노력을 기울였ㅈ만 조선은 폭동과 민란과 농민전쟁 등을 피할 수 없었고, 끝내 망국의 길을 가지 않았는가.

 

p71

 공공금융의 해체로 재벌 자본에 더해 '월가 자본의 아바타인 금융 자본'이 시장 권력을 더욱 공공화했다. 돈의 힘은 사람들을 욕망의 포로로 만들고, 민주주의가 고개를 들 때마다 무참히 짓밟았다. 돈의 힘이 통제되지 않는 한, 정치는 돈의 힘에 좌우되고, 민주주의의 자리는 금권 과두정이 차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공금융은 민주주의 그 자체이기에 사회를 구성하는 민주주의와 시장 중 민주주의가 죽으면 시장만 남게 되고, 시장만 남은 사회는 죽어갈 수밖에 없다.

 

p73

 공공금융의 사망은 대한민국을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으로 변화시켰다. 재벌 자본의 건설회사와 금융 자본의 부동산 금융이 결합한 산물이었다. 공공선과 국민 이익의 촉진은 뒤로 밀려났다. 그 결과가 세습성이 강한 부동산자산 중심 경제 구조의 등장이었다. 2000년대 20년(2001~2021년)간 국내  GDP는 약 1,373조 원 증가한 반면 국내 부동산자산은 이보다 약 9배 많은 1경 1,845조 원 증가했다. 가계로 국한해도 마찬가지이다. 가계의 처분가능 소득이 706조 원 증가하는 동안 가계 부동산 자산은 약 10배 많은 6,969조 원 증가했다.

 이러한 변화를 스스로를 보수라 지칭하는 보수정권에서나 진짜(?) 보수정권인 민주당 정권에서나 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노무현 정부나 문재인 정부 시절 글로벌 유동성의 폭발과 맞물려 부동산자산 중심의 경제 구조는 더욱 고착화됐다. 참고로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한국은 중국, 멕시코, 튀르키예, 이란 다음으로 외화 신용이 많은 나라이다. 경제 성장률은 2001~2007년간(김대중/노무현 정부 기간) 연평균 7.5%에서 2008~2016년간(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 연평균 5.3%, 그리고 다시 2017~2021년간(문재인 정부 기간) 연평균 3.6%로 하락하는 동안 부동산자산의 연평균 증가율은 각각 14.0%, 5.0%, 8.3%로 민주당 정권에서 부동산자산 증가율이 소득 증가율을 크게 앞질렀다. 가계 소득과 부동산자산을 비교해도 차이가 없다. 소득 증가율은 연평균 6.1% → 4.9% → 3.7%로 하락했지만 부동산자산 증가율은 연평균 14.4% → 4.5% → 8.7%로 소득 증가율을 2배 이상 앞질렀다.

 노무현 정권 때는 일본은행의 제로금리와 양적완화(2001.3~2006.3) 그리고 미국 연준의 1% 초저금리(2003.7~2004.6)가 맞물려 글로벌 유동성이 폭발하며 글러벌 주택시장에 붐이 있었고, 문재인 정권 때는 코로나 팬데믹에 대한 대응으로 주요국이 초금융완화로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내면서 부동산을 포함한 글로벌 자산시장에 붐이 일었던 기간이다.

 

p75

 글로벌 유동성의 폭발이 부동산 가격의 폭등을 모두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이는 국내 가계 신용의 영향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한국의 가계 신용은 팬데믹 직전 2년간 연 평균 6.5% 증가한 반면, 팬데믹 기간 2년간은 8.3% 증가했다. 국내 신용증가율이 글로벌 신용증가율보다 높았다. 반면 노무현 정권 때는 상대적으로 글로벌 신용증가율(연 16.4%)보다 국내 신용증가율(연 10.4%)이 낮았다. 문재인 정권에서의 부동산 자산가치 급등은 국내 신용에 대한 통제 실패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 주요국 모두가 가격 폭등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IMF가 발표하는 58개 국가의 전체 주택의 실질가치 변화율을 보면 2021년에 12개 국가는 변화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반면, 한국은 11.7%로 8번째로 높았다. 폭등을 겪었던 미국의 10.6%, 캐나다의 9.8% 등보다 높았을 뿐 아니라 독일, 싱가포르, 일본 등의 6%대 상승률이나 프랑스의 3%대보다 크게 높았다. 

 이는 (앞에서 일부 언급한) 부동산 투기에 적합한 사회경제적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를 혁파하지 못한 대가는 고스란히 무주택자나 정부를 믿고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예를 들어,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신년사에서 "부동산 시장의 안정, 실수요자 보호, 투기 억제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면 손해를 볼 것처럼 계속 강조했지만, 대통령 말을 믿고 무리하게 빚을 내 집을 사지 않은 사람들에게 돌아온 것은 이른바 '벼락 거지'였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인 2020년과 2021년 2년간 그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2년간 시중 통화량은 700조 780억 원이나 풀렸다. 그리고 정부 채무도 2478조 5,000억 원이 증가할 정도로 정부가 푼 돈 역시 사상 최대였다. 그런데 시중에 풀린 돈 중 실물경제로 들어간 돈은 시중 통화량의 22%에 불과한 155조 7,000억 원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자산시장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결과 국내 부동산자산은 2년간 GDP의 약 12배에 해당하는 1,845조 9,000억 원 증가했다. 가계의 경우는 더 끔찍했다. 소득은 80조 원 증가한 반면 부동산자산은 소득의 20배가 넘는 1,658조 원 이상이 증가했다. 생존 위기로 내몰리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부동산 투기를 외면하고 열심히 땀 흘리며 살던 무주택자들에게는 날벼락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을 해체하지 않은 산물이다. 외환위기 이후 대한민국에서 돈이 가장 집중되는 곳은 부동산이 되었고, 따라서 대한민국의 가장 강한 힘들은 부동산(돈)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부동산자산 중심의 경제 구조는 고인물 사회를 만든다.

 

p77

 부동산자산 중심의 경제 구조는 대한민국을 전 세계 주요국 중 최악의 자산 불평등 국가로 만들었다. 자산 불평등이 가장 심한 선진국 중 하나인 미국의 경우 팬데믹 기간에 주식 자산가치 증가가 부동산 자산가치 증가보다 약 3배 컸던 반면, 한국은 정반대였다. 부동산자산은 주식자산보다 불로소득 성격이 강하다. 한국에서 부동산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고, 그 결과 정부와 기업과 가계 모두가 부동산의 인질이 되었다.

 1995~2022년간 기업이 만들어낸 부가가치에 해당하는 기업 영업잉여(=영업이익+감가상각비-금융비용)는 208조 원 증가한 반면 기업의 부동산자산 가치는 15배가 넘는 3,020조 원이나 증가했다. 가계 부채가 세계 최고 수준이 되었어도 계속 증가하는 이유나 건설회사의 부실을 정부가 나서서 막아주는 이유가 그것이다. 정부가 부동산 시장 부양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부동산 불패'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었다. 건설경기에 대한 높은 의존과 부동산 자산가치 하락이 가져올 가계 부채 충격 등으로 인해 부동산 자산가치를 떠받쳐야만 사회와 경제가 생존할 수 있는 지경이 된 것이다.

 문제는 저금리 시절에는 높은 가계 부채의 이자 부담이 은폐됐지만, 고금리의 장기화는 모르핀으로 연명한 부채 모래성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현재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이 진퇴양난 상황에 놓여 있듯이 내부적으로 개혁하지 못한 부동산 카르텔 공화국의 운명은 자명하다. 경제성장(소득 증가)과 인구 증가등이 떠받치는 부동산 가치 증가는 정당성을 확보하지만 유동성이나 가계 부채 증가 등으로 밀어 올린 부동산 가치 증가는 가계의 소득(과 일자리) 증가 등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가계 부채 증가가 가계의 소득과 소비를 억압하여 성장의 둔화 및 정체, 가계 소득(일자리)의 정체로 이어지면서 시한폭탄 같은 가계 부채의 위험성이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p85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예산 부문을 재정경제부에서 분리했지만 (모피아 사고에 젖어 있는) 경제관료가 장악하는 한 공공금융에 대한 사고를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균형재정' 신화에 갇혀 있는 '(경제)관료에 포획'되어 예산을 장악하지 못한 후회를 퇴임 후 토로한 배경이다.("이거 하나는 내가 좀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던 거는 오히려 예산을 가져오면 색연필을 들고 '사회정책 지출 끌어올려' 하고 위로 쫙 그어버리고, '여기에서 숫자 맞춰서 갖고 와' 이 정도로 나갔어야 하는데, (...)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요. 그래 무식하게 했어야 되는데 바보같이 해서..." 노무현 <진보의 미래> 중에서)

 그 결과가 오늘의 공룡 기재부이고, '사실상 기재부의 나라'가 된 것이다.

 

 오늘날 기재부는 사실상 정부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중장기 국가발전전력 수립이 바로 정부 주도 개발을 추진한 군부 권력의 경제기획원 권한이고, 예산 편성권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기획예산처 권한이다. 또한 내국세제 권한으로 부동산 관련 세제를 매개로 국토교통부의 부동산 정책에 개입하고, 화폐 업무로 한국은행을 관리하고, 외환 업무 포함 국제금융 사무와 (사실상 국무조정실장의 코치를 받는 국무총리의 통제를 받고 기재부 차관이 당연직 금융위원회 의원인) 금융위를 사실상 관리한다. 한국은행이 모피아의 '남대문 출장소'로, 금융위-금감원이 '여의도 출장소'로 불리는 배경이다. 그리고 산하에 국세청, 관세청, 조달청, 통계청 등 4개나 되는 청을 갖고 있는 부서이다.

 막대한 권한으로 경제 관련 부서의 장도 쉽게 차지한다.

 

 심지어 예산 배분 권한으로 정부 조직의 숱한 기관장 자리까지 차지하곤 한다.

 

 기재부의 권한은 일반 국민의 상상을 초월한다. 예산 심의를 하는 국회의원들도 지역구 예산 배정을 결정하는 기재부 권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통령실 경제비서관이나 정책실도 기재부 사정권에 놓여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어공'인 홍장표 경제수석이 2018년 6월 사실상 경질된 후 윤종원/이호승/안일환 등 경제관료(늘공)가 경제수석을 장악했듯이 경제관료 조직은 사실상 선출 권력조차 좌지우지한다.

 

p88

 모피아는 퇴직 후에도 금융계와 정치계 등을 넘나든다. 특정 정당 및 정권과도 관계없다. 김진표는 그 상징이다. 그는 김대중 정권에서 재정경제부 차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국무조정실장을 거쳐 노무현 정권의 인수위 부위원장,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이후 국회 진출을 위해 열린우리당 정책위 위장을 거쳐 18대부터 국회에 진출한 그는 문재인 정권에서 국정기획자문위원히 위원장과 더불어민주당 부동산특별위원회 위원장을 거치고 21대 국회 후반기 의장까지 차지하고 있다. 노무현과 문재인 정권에서 부동산정책이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현재 윤석열 정권의 국무총리인 한덕수는 김대중 정권의 경제수석과 노무현 정부의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다. 초대 기재부 장관을 역임한 추경호는 김대중 정권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인수위원을 한 후 김대중 정권 초기부터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비서관실과 정책기획수석 비서관실에서 근무했다.

 이처럼 "정권은 유한하지만, 모피아는 영원하다"

 

 물리력으로 통치하던 군부독재 시대에는 시장(자본)이 전근대적 방식인 물리력으로 통제되었다. 그런데 군부독재의 종식과 더불어 시장(자본)에 대한 통제 자체가 해체되었다. 물리력에 기초한 통제 방식을 (공공금융 성격이 더 강화되는) 사회적(민주적) 통제 방식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김영삼 정권의 역사적 과오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본인 입으로 시인했듯이 경제에 문외한이었을 뿐 아니라 금융에는 문맹 수준이었다. 오히려 노태우 정권에서도 최대한 늦추려 했던 금융 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을 적극 추진하면서 재벌 자본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고, 자청해서 대한민국을 월가 자본의 먹잇감으로 바쳤다.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전통 산업들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있었으나, 역시 금융에는 문외한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첫 번째 가계 부채 사태인 '카드 사태'가 김대중 정권의 작품인 배경이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팀이 선택한 (신용)카드는 '내수 부양책'으로 포장됐지만, 그 내용은 가계가 빚을 내서 소비하고 집을 사게 하는 '부채주도성장' 방안이었다. 

 당시 길거리에서 카드 모집인이 상환능력이 거의 없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카드를 발급하는 모습도 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당시(2000년) 김대중 정권의 재정경제부 장관이었던 '이헌재표 내수부양책'이었다.

 내수부양책으로 카드활성화 정책과 더불어 부동산 규제 완화가 2000년에도 확장되었고, 심지어 1가구 다통장 보유 기능과 각종 세제 혜택 등이 추가되었다. 그 결과는 380만 명의 신용불량자 양산과 부동산 가격의 급등이었다. 특히 2002년 한 해 동안 아파트값은 서울 45%, 신도시 25.1%, 수도권 23% 등 전국적으로도 22.5%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1999년 말 GDP 대비 45.1%(267조 원)였던 가계 부채는 2002년 말에는 64%(502조 원)까지 급증했다. 반면 같은 기간 정부 채무는 GDP 대비 9.3%에서 9.7%로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공공금융의 역할 없이 가계 희생으로 재벌 건설 자본과 금융 자본의 배를 불려려준 것이다.

 2003년 카드 사태는 노무현 정권에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2003년 1분기 성장률은 직전에 비해 반토막이 나고 3분기까지 자유낙하 하듯이 하락했다.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1등 공신 역할을 했던 유명 인사(?)는 당시 카드 사태는 김대중 정부에서 반든 것인데 노무현 정부가 뒤집어썼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런데 카드 사태는 노무현 정권에게는 양날의 검이었다. 2000년 9.1%에서 2001년 4.9%로 급갑했던 성장률은 가계 부채 기반의 부양책 덕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2002년 7.7%로 반등하며 노무현 후보 당선에 도움이 된 측면이 있었고, 부양책 후유증(카드 사태)으로 임기 첫해 3.1%로 성장률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카드 활성화 대책이나 부동산/건설 경기 부양 모두 금융 및 재벌 자본의 이익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김대중 정부 때부터 가계 부채는 부동산 카르텔의 숙주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p93

 모피아의 뿌리에 해당하는 이헌재와 강만수 등이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주요 정책을 좌우했듯이 권력의 성격과 모피아는 관계없다. 윤석열 정부의 초대 기재부장관인 추경호가 김대중 정부 출범 인수위원회 인수위원이자 김대중 대통령 경제비서관을 지냈고, 이명박 정부의 윤증현은 노무현 정부의 금융감독위원장을 지낸 후 김앤장에 있다가 이명박 정부에서 기재부 장관을 역임했고,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핵심 경제전략을 만들었던 김동연과 홍남기가 문재인 정부의 전후반 기재부 장관을 지냈고, 한덕수가 김대중 정부에서 경제수석, 노무현 정부에서 재정부 장관을 지내고 김앤장에 머물다가 윤석열 정권에서 다시 돌아왔다. 민주당 정권이나 국민의힘 정권이나 핵심 경제정책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모피아는 심지어 공적 자원의 사유화에도 거리낌이 없다. 다음은 2022년 8월15일자 <MBC 뉴스데스크>의 보도 내용이다.

새 정부 들어서 공기업들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기획 재정부가 나서서 공공 기관들의 경영이 방만하니까, 
가지고 있는 사옥 건물이나 땅을 팔라고 압박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닙니다.

박근혜 정부 때도 기획 재정부가 공공 기관들에게 자산을 팔라고 했고, 
실제로 한국석유공사가 사옥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을 누가 샀는지, 이 거래로 누가 이익을 얻었는지, 
저희가 취재를 해 봤더니, 기획 재정부 관료 출신들이 만든 
부동산 투자 회사였습니다.

 

 노태우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을 지냈던 이규성은 김대중 정부의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등용된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2001년 일종의 사모펀드인 코람코(KORAMCO, 한국부동산자산관리회사) 설립을 주도한다. 코람코의 회장을 장기간 역임하는 중에도 이규성은 2004년 노무현 정부의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의장은 대통령)도 역임한다. 2010년에는 코람코자산운용사도 설립한다. '작은 정부를 내세운 박근혜 정부 들어 공공기관 민영화가 추진되며 박근혜 정부의 기재부는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 실패로 부채가 급증한 석유공사 매각을 추진한다. 석유공사 매각은 자본의 하수인 역할을 넘어 스스로 공적 자원을 사유화하는 모피아의 탐욕을 보여준다.

 

 석유공사는 본사 건물을 2,000억 원에 매각하고, 매각 대금을 부채 상환에 사용하지도 않고 사업비와 정기예금 등으로 운용했다. 건물 매각 후 임대하며 지불한 임대료율은 4.87%였다. 그런데 석유공사가 자금이 필요해 조달할 때의 조달비용, 이른바 석유공사 채권 이자율은 2.67%에 불과했다.

 

p100

 불환화폐(신용화폐)의 가치는 정부가 보증하는 것이다. 정부 보증의 힘은 정부 경제력에서 나오는 것이고, 정부 경제력은 세금 수입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국민 전체가 불환화폐의 가치를 함께 보증한 것이다. 즉 오늘날 사용하는 법정화폐는 그 사회의 국민 전체가 함께 보증한 신용이다. 출범 때부터 영란은행을 공공선과 인민 이익의 촉진을 위한 정부 은행으로 성격을 못 박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의 재정 자원은 물론이고 모든 국민이 은행시스템의 기본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는 이유이다. 소득과 금융에 대한 국민의 기본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공금융은 생산과 금융에서 사회몫을 의미한다. 사실 근대 화폐경제에서 생산과 금융은 분리 자체가 불가능하다. 공공금융을 '재정'으로 번역한 것은 생산측면으로 좁혀 잘못 부르는 것이다. 금융을 민간금융만으로 축소한 금융 자본의 이해를 반영한 개념이다.

 

p104

 정부 채무 겁박론은 국가 채무의 실상을 왜곡한다.

https://www.seoul.co.kr/news/economy/2023/04/04/20230404500151

 

나랏빚 첫 1000조 돌파, 文정부 5년 새 408조 급증… 국민 1인당 빚도 2000만원 돌파

정부, 2022 회계연도 국가결산보고서 의결 관리재정수지 적자 규모 117조 ‘사상 최대’ 국가채무 1068조, 국가부채 2326조 ‘최대’ 고금리 여파에 국가 자산 가치 30조원 감소, 지난해 나랏빚이 사

www.seoul.co.kr

 

 

IMF 기준을 따르는 기재부의 'e-나라지표'에 소개되어 있듯이, 정부 채무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순채무 합으로 구성된다. 기재부는 정부 채무를 적자성 채무와 금융성 채무로 나누고 있다. 2022년 말 기준 정부 채무액 약 1,069조 원은 적자성 채무 678조 원과 금융성 채무 391조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https://www.index.go.kr/unity/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1106

 

지표서비스 | e-나라지표

국가채무 : 정부가 직접적인 상환의무를 부담하는 확정채무(IMF기준)로서, 국채, 차입금, 국고채무부담행위, 지방정부순채무로 구분 (국가채무 = 국채 + 차입금 + 국고채무부담행위 + 지방정부 채

www.index.go.kr

 

이 두 채무의 성격을 기재부가 해당 사이트에 소개하고 있는 내용 그대로 소개해보자. '적자성 채무'는 "조세 등 국민 부담으로 상환해야 하는 채무"인 반면, '금융성 채무'는 "정부가 상환할 수 있는 자산을 가진 채무"로 국민 부담이 없는 채무이다. 예를 들어, 외평채(외국환평형기금채권)나 국민주택채권 발행에 의한 금융성 채무는 정부가 확보한 외환 자산 매각이나 융자금 회수 등으로 상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2년 말 기준 국민이 부담할 '진짜' 채무액은 1,069조 원이 아니라 678조 원에 불과한 것이다. 대통령과 언론, 여당 등이 미래 세대를 겁박한 1,000조 원은 391조 원이나 과장한 수치인 것이다.

 

p115

 이처럼 여러 문제를 갖고 있는 재정 운용 기준은 한 나라의 정부가 도입하는 것은 (국민이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하는 점을 악용하여) 막대한 공공자금에 대한 통제권을 독점하겠다는 것이다. 법제화 조치는 바로 대통령 등 선출 권력조차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세하는 '제2의 검찰'이 되고 싶은 것이다. 막강한 공적 권한의 사유화는 지금보다 더한 부정부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경제적 약자층에 집중된다.

 

p118

  재정관리를 관리수지로 변경한다고 하여 정부 채무 증가 속도가 멈추거나 줄어든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표6>에서 보듯이 2002년보듯이 2000년 이후 코로나 팬데믹이 발발했던 2020년 이전까지 관리수지의 적자 규모가 GDP 대비 -3%를 초과한 경우는 금융위기 때밖에 없었다. 즉 관리수지가 -3% 이내에서 관리가 되었어도 정부 채무가 지속해서 증가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2년간의 대규모 재정 적자는 대부분 주요국이 겪었던 것으로 불가피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가 관리수지를 기준으로 재정을 관리한다고 해서 정부 채무 증가가 멈춘다는 보장도 없고, GDP 대비 정부 채무 60% 이내 관리도 어렵다. 무엇보다 관리수지 적자를 -3% 이내로 해서 정부 채무를 60% 이내에서 관리하겠다는 '재정준칙 법제화'를 추진하는 윤석열 정권 18개월 동안의 관리수지는 131.3조 원으로 이는 GDP 대비 3.9%의 규모이다. 그 결과 문재인 정권이 사실상 종료됐던 2022년 4월 중앙정부 채무 비중(GDP 대비 %) 47.5%도 2023년 10월 50.1%로 증가했다.

 문제는 자신들이 공언한 관리수지 목표를 지키려다 보니 지출을 무리하게 줄이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써야 할 돈이라며 국회로부터 승인까지 얻어낸 예산조차 쓰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23년 10개월 동안 지난해보다 77.8조 원 규모의 지출을 축소했고, 이는 GDP의 3.5%가 넘는 규모이다. 최근 1년간(2022년 4분기~2023년 3분기) 연간 성장률이 1.1%로 추락한 배경이다. 모피아의 욕망(재정준칙 법제화)이 재정수지 관리도 망치고, 성장률은 후퇴시키고, 다시 재정수지와 정부 채무를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p120

 이제 재정건전성 논리가 기초하는 '재정 지출 최소주의'를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재정 지출 최소주의는 '과학'이 아닌 '이데올로기'이다. 앞에서 인간 사회의 구성과 운영 원리를 말했다. 사회가 지속하려면 민주주의와 시장, 즉 정치와 경제의 상호견제와 균형이 필요하지만, 자본의 탐욕은 끊임없이 정치와 민주주의를 약화하려 하고, 심지어 제거하고 싶어 한다. 역으로 자본의 탐욕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고 싶어 하는 욕망도 작동한다. (셜실 사회주의 체제에서 경험했듯이) 시장을 통제하고, 정부가 직접 자원을 배분하는 '정치의 과잉'이 그것이다. 정치의 과잉은 시장이 만들어내는 경제 활력을 약화하고 심지어 (인민독재로 위장한) "또다른 독재'로 이어지곤 한다. 자본 탐욕은 극단적인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필연적으로 경제위기를 낳는다. 사회 붕괴와 경제위기가 동전의 앞뒷면인 이유이다.

 

p122

 앞에서 보았듯이 재정준칙이 설정한 재정 적자 관리로는 한국의 정부 채무 증가를 막을 수 없다. 재정준칙을 동원해도 정부 채무 증가를 막을 수 없다면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하나는 경제성장률을 현재보다 높게 만들거나, 아니면 정부 수입을 늘리는 길이다. 그리고 정부 수입을 늘리려면 증세가 불가피하다. 윤석열 정부의 재정 지출 최소주의가 재정 파탄을 가져온 이유도 증세는커녕 감세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리한 재정 지출 축소로 국가의 미래 성장 동력을 만들어내는 연구개발R&D 예산까지 줄이면서 성장률 둔화와 재정 파탄의 악순환을 만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가 재정건전성을 핑계로 재정준칙의 법제화를 추진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재정건전성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피아가 재정준칙을 도입하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모피아가 대변하는 금융 자본의 이해를 생각하면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모피아는 미래 세대에게 부담을 주는 정부 채무 증가를 막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포장해 재정건전성 논리를, 정부의 재정 운용 및 서비스 등에 대한 국민의 불만 정서를 이용하여 재정 지출 최소화 논리를, 그리고 재정 지출을 줄일 것이기에 감세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첫째, 재정 지출 최소화는 모든 부분에 균등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무원 보수 등 경직성 비용은 줄이기 어렵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힘이 있는(?) 부서보다 사회경제적 약자층 지원과 관련된 부서의 예산이 일차적인 조정 대상이 된다. 둘째, 공공자금의 지원이 축소되면 그에 비례해 민간금융에 대한 의존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국민을 (높은 이자 놀이를 하는) 금융 자본의 먹잇감으로 던지는 것이다. 셋째, 감세는 고소득층일수록 혜택이 크고, 특히 금융 고소득층에게 가장 많은 혜택이 돌아간다. 게다가 재정 지출 최소화에 따른 재정 적자를 정부 차입(국채 발행)으로 해결하고, 그로 인해 정부 채무를 증가시킨다. 역설적으로 재정 건전성이 재정 악화를 낳는 것이다.

 

 

p125

 2021년 최저임금이 시간당 8.720원이었다. 이를 연소득으로 환산하면 2,187만 원이다. 그런데 2021년 소득활동자 중 상위 60% 선이 최저임금 수준의 연소득보다 낮은 2,180만 원이었다. 하위 41%의 규모는 약 1,040만 명에 해당한다. 이들의 평균 소득은 980만 원에 불과했다. 약 2만 5천명에 해당하는 상위 0.1%의 평균 소득은 18.5억 원이니 하위 41%의 평균 소득에 비해 188.8배나 되는 규모이다. 상위 0.1%의 총소득 46.9조 원은 29%에 속하는 745만 4천명의 총소득 46.7조 원보다 많은 규모이다. 약 2만 5천명의 소득이 745만 4천명의 소득보다 많은 사회인 것이다.

 자산 불평등은 더 극심하다. 지난 거의 한 세대(1995~2022년) 간의 대한민국 전체 소득(GDP)은 437조 원에서 2,205조 원으로 1,768조 원이 증가했는데 부동산자산은 2,205조 원에서 1경 2,506조 원으로 1경 301조 원이나 증가했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경제활동보다 부동산 재테크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그 결과 부동산자산의 핵심인 토지 소유의 불평등은 정말 끔찍하다. (약 2,371만 세대로 구성된 대한민국의) 2022년 개인의 토지 소유를 보면, 전체의 38%가 넘는 901만 세대는 땅을 한 조각도 갖고 있지 못하는데 약 1.2%에 해당하는 29만 세대는 약 1,258조 원 가치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이들의 토지소유액은 땅이 있는 나머지 62%에서 상위 10%를 제외한 나머지 약 52%인 1,220만 세대의 토지 소유액(1,263조 원)과 비슷한 규모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니계수가 0.8이 넘으니 토지 소유가 집중되었던 조선왕조 말기보다 그 정도가 더 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사회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사회란 무엇인가? 사회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집'이다. 먹을 것을 나눠 먹고, 비바람을 함께 피하고, 아프면 서로 돌봐주고, 그리고 혼자라는 외로움을 갖지 않게 해주는, 더불어 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찬바람이 부는 집 밖 허허벌판에 버려진 사람이 있고, 홀로 고립되어 죽어가는 이른바 고독사가 청년층에까지 확산하고 있고, 집 안에서조차 소수만이 아랫목을 차지하는 그런 '가짜 집'이다. 모두가 참여해서 사회적 생산액(GDP)을 만들었는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집은 함게 사는 집이 아니다. 그리고 아파도 돌봄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함께 사는 집이 아니다. 사회 속에 살면서 혼자라는 느낌을 준다면 사회라 할 수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은 사회가 실종된 나라이고, 사회가 붕괴한 나라이다.

 

p129

  최소 소득은 시혜가 아니고 누구나 법적으로 보장받을 권리이고, 이는 (사회 전체 생산액의 배분 방식의 하나인) 세금으로 해결해야만 하고, 특히 출발선의 차이를 만드는 유산에 대해서는 최대한 세금으로 환수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자본주의가 하나의 사회 체제로 출발할 때부터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적 상식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런 상식조차 작동하지 않는 사회이다. 이렇게 불평등이 극심한 상황에서는 상속세 완화나 폐지를, 그것도 저출산 대책으로 거론하고 있다. 경제학에서 저출산은 낮은 결혼율에서 찾고, (경제이론과 한국은행의 실증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낮은 결혼율은 임금 불평등과 주거비, 그리고 자녀 교육비 등의 순서로 영향을 받는 것으로 확인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결혼율 차이는 그동안 여러 연구에서 확인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대다수 국민의 사회소득을 늘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증세와 (전통적인 취약계층 중심의) 소득 이전 정책은 많은 중산층이 거부감을 갖는다. 소득이 극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다 보니 (기계적으로 구분된) 중산층조차 많은 사람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장 편하게 중산층을 설정하는 하위 30%에서 상위 30% 사이의 소득 규모를 보면 (2021년 국세청 소득활동자 자료를 기준) 세전 평균 소득은 1,500만 원에서 4,192만 원 사이의 소득계층이다. 개인 소득이라도 중산층이라기에는 너무 적은 소득 수준이다. 자신도 지원받아야 할 소득계층에게 더 어려운 극빈층 지원을 위해 세금을 더 납부하라 하면 거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식은 사회소득을 모두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모든 소득활동자에게 사회소득 100만 원을 지급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 재원은 약 25.4조 원이다. 이를 현재의 소득세율을 기초로 25.4조 원을 배분할 때 추가 세금 부담은 상위 16%에 국한된다. 2021년 모든 소득활동자 기준 세전 소득이 18.5억 원(세후 소득 11.94억 원)인 상위 0.1%는 추가로 약 2억 원의 세금을 더 부담한다. 그리고 상위 16%선에 있는 소득활동자의 경우 2021년 세후 소득이 6,052만 원인데, 추가로 2만 원만 더 부담하면 된다. 이 정도의 추가 세금으 객관적으로 볼 때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반면, 하위 50%는 최소한 91만 원에서 100만 원을 지급받을 수 있다. 앞에서 하위 41%까지는 연소득이 최저임금 수준보다 작다고 말했다. 2023년 기준으로 최저임금을 1만 원으로 인상하기 위해서는 시간당 380원을 인상해야 하고, 1년간 95만 1,000원이 더 필요하다. 그런데 사회소득 100만 원을 지급하면 최저임금 대상자의 시간당 1만 원 소득은 쉽게 달성된다.

 여기에 (2022년 기준 약 98만 2,500개의) 법인을 대상으로 소득활동자 모두에게 100만 원을 지급할 25.4조 원을 배분하면, 세후수입이 3조 1,367억 원인 0.1%의 법인은 추가로 154.5억 원을 부담하고, 세후 수입이 543억 원인 10% 선의 법인은 추가로 2억 3,541만 원을 부담한다. 세후 수입이 34억 원인 상위 20% 선에 있는 법인이 추가로 부담할 세금은 808만 원, 세후 수입이 4.7억 원인 50% 선의 법인은 추가로 171만 원만 부담하면 된다.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것으로 모든 소득활동자에게 사회소득 100만 원을 추가로 지급할 수 있다. 개인소득보다 법인소득, 그리고 소득보다 토지 등 자산 집중이 더 심한 상황이기에 자산에 대한 사회소득 재원 확보는 소득보다 저항이 더욱 적고, 추가 부담을 해야 하는 계층의 경제적 부담도 적다.

 이렇게 사회 생산이나 사회 자산에 대한 사회몫에 해당하는 사회소득을 사회 구성원에게  배분하게 되면 국민의 80% 이상이 현재보다 최소 수백만 원 이상의 추가 소득을 확보할 수 있다. 전통적인 재분배와의 차이라면 사회소득세를 거두어서 바로 현금 혹은 (일부는) 지역화폐로 배분한다는 점이다. 관료가 배분을 (결정)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돌려주는 방식이다. 저소득층일수록 배분받는 사회소득이 크고 초고소득층에게 세금 부담이 집중되기에 소득재분배 효과가 클 뿐 아니라 (대다수가 혜택을 받기에) 조세 저항도 크지 않고, 무엇보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이전으로 돌려 놓기가 쉽지 않다. 정기적으로 들어오던 수입이 줄어들게 된 국민 80% 이상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p145

 싱가포르는 경상수지 흑자와 더불어 유입된 외국자본을 외환보유액Official Foreign Reserves, OFR으로 축적하여 이를 싱가포르통화청MAS, 싱가포르 국부펀드를 운용하는 싱가포르투자청Government of Singapore Investment Corportation, GIC, 싱가포르 국책투자 사업을 수행하는 테마색Temasek Holdings이 활용해 재정에도 지원하고 있다. 사실, 한국도 외환위기 이후 경상수지 흑자액이 1조 달러에 달하는데 현재 외환보유액은 4,201억 달러(2023년 12월 기준)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외환보유액 축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일부에서 과도한 외환보유액 축적은 (외화보유 확충에 따라 풀리는 국내 여신을 흡수하기 위한 통화안정증권 발행 등에 따른 제반 비용인) 불태환 개입비용 부담을 증가시킨다고 지적하지만, 싱가포르의 경우 축적한 외환으로 더 높은 투자 수익을 만들고 있고, 또한 높은 신용등급으로 기업들은 해외자금 조달 비용을 낮출 수 있다. 무엇보다 (외환위기 때처럼) 외국인 자금의 갑작스러운 유출 상황에서 금융 및 외환시장의 방어벽 역할을 한다.

 2023년 12월 기준 한국의 국고채에 대한 외국인 보유액은 약 219.5조 원(약 1,688억 달러, 1달러 = 1,300원 기준)에 달한다. 외국인 보유 국고채가 모두 일시에 처분될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주식시장 유입액(약 5,085억 달러, 2023년 12월 8일 기준)이나 단기 외화차입액(1,416억 달러, 2023년 3분기 기준), 3개월 수입액(2,438억 달러, 2022년 수입액 기준) 등을 고려하면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결코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전문가는 없다. IMF가 제시하는 적정외환보유액 기준에 미달하는 배경이다. 국제금융시장이 불안정해질 때마다 원화가 가장 취약한 통화로 전락하는 이유이다. 해외자금 조달 비용이 올라가는 이유도 국제금융시장 환경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외환 불안정석에 있다.

 

 

 예를 들어, (인도 중앙은행 총재 시절) 라구람 라진이 기축통화국 중앙은행이 세계 나머지 국가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때 신흥국 경제는 산업경쟁력에 필요한, (과도한 통화가치 절상 방지 등) 자국의 화폐가치 안정을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대외적 양적완화(Quantitative External Easing. QEE)'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배경이다. (자신이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버냉키 화법을 사용해) 라잔 역시 신흥국의 외환시장 개입은 신흥국의 경제성장에 기여할 것이고, 신흥국의 경제성장은 선진국 경제에도 기여한다는 점에서 외환시장 개입이 '근린궁핍화' 정책이 아니고, '근린부유화' 정책이라고 받아쳤다.

 이처럼 해외 지식인들이 화폐 주권을 당연시하는 풍토와 달리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으로 사고하는) 한국의 많은 지식인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이익 추구는 '사치'에 불과하다.

 

p148

 <그림7>은 대한민국 경제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간은 지난 30년(1992~2023년 2분기)이다. 지난 30년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일치하는 기간이다. 그림의 곡선은 현재의 시장 가치와 자국 화폐 단위로 평가한 세 나라의 GDP(명목 GDP 혹은 경상 GDP)를 해당국의 시중 유통 전체 통화량으로 나눈, 이른바 '화폐유통속도'이다. 사전적으로 화폐유통속도는 화폐 한 단위가 일정 기간 동안 경제 구성원들의 상품 거래 혹은 소득을 창출하는 거래에 평균적으로 몇 회 사용되었는가를 나타내는 지표를 말한다.

 예를 들어, 2023년 3분기(9월말) 기준 대한민국의 명목 GDP는 약 2,205조 원이고, 총통화량은 약 3,818조 원이다. 이는 3,818조 원 중 2,205조 원만이 소득창출과 관련 있는 상품 거래에 연결되었음을 말한다. 나머지는 수익을 좇아 자산시장으로 대부분 흘러 들어간다.

 그런데 한국은 외환위기 충격 이후 1값 밑으로 떨어져 계속 하락해, 자산시장 거품 붕괴 충격 이후 1값 밑으로 떨어진 일본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는 중이다.

 경제 내용상으로 사실상 한국 경제 역시 '잃어버린 30년'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지난 2023년 3분기 기준 연간 성장률은 1.1%였는데 이는 일본의 1990년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1992~2001년)의 연평균 성장률 수준이다. 이 값이 내려가면 돈을 풀어도 새로운 가치 창출보다는 자산 불평등의 심화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난 30년(1992~2001년) 사이에 한국의 명목 GDP는 약 1,725조 원 증가했는데, 국내 부동산자산은 약 9배에 달하는 1경 4,710조 원이나 증가했다. 가계로 국한해도 마찬가지 모습이 확인된다.

 가계의 처분가능소득은 약 928조 원 증가했는데, 가계의 부동산 자산은 약 8배에 달하는 7,077조 원 증가했다. 비금융법인이 만든 부가가치, 이른바 영업잉여는 약 208조 원 증가했는데 비금융 기업이 보유한 부동산자산은 약 15배에 해당하는 3,020조 원 이상 증가했다. 다른 기준으로 비교하면, 유가증권 이른바 코스피 상장기업 매출액은 2004~2022년 사이에 약 2,075조 원 증가했는데 비금융기업의 부동산자산은 2,311조 원 이상이 증가했다. 지난 30년의 가계와 기업, 국가 경제 모두에서 부동산은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선진국 중 가장 자산 불평등이 심한 나라가 미국인데 미국보다 불평등이 더 심하면서 내용이 좋지 않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무엇보다 미국은 주식자산이 부동산자산 증가를 압도한다. 한국은 그 반대이다.

 게다가 돈을 빨아들이는 부동산자산의 핵심 원천인 토지자산 소유 상태를 보면 정말 끔찍하다. (2,370만 5,814세대로 구성된) 2022년 대한민국에서 상위 0.62%에 해당하는 14만 6,952세대가 보유한 토지가액 943.4조 원은 전체 세대의 (38%의 땅이 한 평도 없는 901만 세대를 포함) 85%(약 2,018만 세대)의 토지보유액 949.7조 원과 맞먹는 규모이다. 오죽하면 필자가 전정田政 문란과 토지개혁 등으로 채색된 조선왕조 말기보다 오늘날의 토지 소유가 더 집중되었다고 하겠는가.

 두 번째 주목할 점은, 이러한 경향이 지난 30년간 정권의 성격과 무관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부동산에 돈이 몰리는 구조는 대한민국의 힘의 역학 구조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돈을 중심으로 세력의 이해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사회 일각에서 대한민국을 '부동산 공화국'이라 부르는 배경이다. 또한 오래전부터 시중에 회자하는 말이 "권력은 유한한데 자본(모피아)은 영원하다"이다.

 

p152

 흥미로운 점은 김대중 정권에서 (GDP대비) 가계 소비 비중이나 성장률의 하락폭이 가장 컸다는 사실이다.

이는 외환위기 충격도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2000~2002년 3년간 기준으로 가계 부채가 역대 최고로 증가한 사실에서 비롯한다. 김대중 정권에서 3년 간 18.9%p의 가계 부채 증가는 문재인 정권에서의 2018년 3분기~2021년 3분기까지의 3년간 14.5%p보다 높았고, 1년 기준으로도 (가계 부채 증가 속도가 가장 빨랐던 시기를 기준으로) 김대중 정권의 2001년 3분기 이후 2002년 3분기까지의 10%p 증가가 문재인 정권의 2020년 1분기 이후 2021년 1분기까지의 8.8%p 증가보다 높았다. 이는 '평화적 정권 교체' 및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6.15 공동선언)등 민주주의와 남북 관계에 이정표를 세운 업적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알맹이인 공공금융의 '사실상' 해체의 산물이었다.

 김대중 정부 이래 가계 부채의 증가는 가계 소비를 억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GDP 대비 가계 부채가 10%p 상승할 때마다 GDP 대비 가계소비는 2.4%p 감소했다. 그리고 가계 소비 감소는 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졌다. 김영삼 정권에서의 연평균 8% 성장률은 문재인 정권에서의 연평균 2.4%까지 하락했다. 약 60%에 달했던 GDP 대비 가계 소비 비중이 46%까지 하락한 결과였다. 가계 소비 비중이 1%p 하락할 때마다 성장률은 0.87%p씩 하락한 것이다. 내수의 핵심인 가계 소비의 둔화는 수출 의존도를 높이고, 이는 다시 국민총소득에서 가계 소득의 비중을 낮추었다.

 결과적으로 GDP 대비 가계 부채 10%p 증가는 (국민총소득에서) 가계 처분가능소득 비중을 2.3%p 감소시켰다. 특히, 내수 의존도가 절대적인 자영업자에 타격을 입혔다. 임금노동자 1인당 평균 소득 대비 자영업자 1인당 평균 소득의 비중은 (가계 소비와 가계 소득을 감소시킨) 가계 부채 증가에 따라 하락했다. 가계 소득과 가계 소비가 1%p 하락할 때마다 (임금노동자 소득 대비) 자영업자의 상태 소득에 각각 -4.1%p(가계 소득)와 -3.6%p(가계 소비)의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오래전에 격차 사회가 되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종사자의 소득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간 소득 격차, 그리고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간 소득 격차가 그것들이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소득 격차가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간 소득 격차인 데 이 격차는 한국 사회의 특성이기도 하다. 1인당 자영업자 평균 실질소득이 2001년 정점을 찍고 최근까지 계속 하락하고 있고, 물가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명목소득도 2011년 이후 계속 하락하는 배경이다.

 그 결과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격차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간 소득 격차는 문재인 정부 출범 전후에 40%가 무너졌다. 작은 충격만 받아도 자영업자가 폐업에 내몰리는 배경이다. 절대적인 소득 취약성으로 가계 부채 못지 않게 자영업 부채가 급증하는 배경이다. <표9>에서 보듯이 자영업자 1인당 명목소득은 지난 10년간 연평균 0.7%씩 줄어들어왔다. 실질소득 기준으로 보면 지난 20년 넘게 연평균 2.3%씩 하락해왔다.

 

 

p166. 사회 소득을 위한 세율 조정 방안.

 

p170

 지금까지 간단히 소개한 사회소득만 강화해도 대부분 가계는 최소 연 300~400만 원의 사회소득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엄청나다. 첫째, 가계의 소비 여력을 강화함으로써 국민 경제의 성장뿐 아니라 가계의 소득과 일자리 증가 등에도 기여한다. 둘째, 소득 불평등의 개선, 특히 불평등 발생의 최대 용인인 토지 부동산자산에 대해 과세와 소득이 낮을수록 많은 배당을 받는 소득 이전으로 불평등을 크게 개선하게 된다. 셋째, 부동산 투기에 따른 기대 불로소득이 낮아짐으로써 투기를 완화한다. 넷째, 세금을 거둔 후 그 세금을 바로 국민에게 배당해줌으로써 재경 관료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국민 주권 강화의 효과가 있다. 다섯째, 사회소득이나 토지배당 등의 일부를 지역화폐로 나누어 주면 지역경제 활성화와 자영업자 소득 개선에도 기여한다. 여섯째, 저소득층이 가장 큰 혜택을 입음으로써 저소득층의 최저임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고, 그 결과 사회 경제적 약자들인 을과 을 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일곱째, 설사 보수정권으로 바뀌어 사회소득세 및 토지배당세를 이전으로 환원시키게 되면 대다수 국민의 소득 감소로 이어져 정치적 저항에 직면하기 때문에 감세가 불가능한 불가역적 증세 방식이다. 여덟째, 노동소득 이외의 추가 소득이 발생하면 많은 국민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시도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 삶의 질 향상과 사회적으로는 혁신 활동화 등을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사회금융까지 결합할 경우 창업 활성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현재 주저앉는 대한민국 경제를 살리려면 가계 소득 강화와 혁신 활성화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점에서 사회소득 강화와 사회금융 복원이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이다.

 

p173

 2023년 (금리인상으로 가처분소득의 감소로 이자를 감당못해 자산가치 붕괴 조짐이 생기는) '민스키 모멘트'가 도래하자 정부가 정책주택금융 지원으로 붕괴를 일시적으로 막았다. 실제로 2008년 이후 2022년까지 정책주택금융의 분기당 증가율은 3.2%였으나 2023년 3분기 동안 증가율은 4.2%로 증가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책주택금융으로 주택 거래의 일시적 회복을 자극했으나 가계의 소득 감소와 식비 축소까지 진행될 정도로 가계 부채가 임계점에 도달한 상황에서 정책주택금융으로는 방어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 결과가 태영건설 워크아웃이다.

 본질적으로 태영건설 워크아웃은 수십 년간 진행해온 부동산 부채 모래성 쌓기의 결과로 인한 건설업의 과잉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동안 경제관료들은 해외사례 베끼기, 그것도 실패한 일본 사례 베끼기를 하고 있다. 금융지원으로 부실기업 연명시키기, 정부의 대규모 토목건설 사업으로 건설사 수입 만들어주기, 금리 인하로 주택시장 부양하기 등이 그것이다.

 

 일본은 이와같은 잘못된 정책으로 1990년대 10년 동안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나서 1999년부터 산업 구조조정을 시작한다. 

 일본의 구조조정이 성공했더라면 '잃어버린 20년' 혹은 '잃어버린 30년'은 없었을 것이다. 통·폐합에서는 성과를 거둔 반면 창조산업 육성은 처참하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창조산업 육성이 처참히 실패한 이유는 제조업과 전혀 다른 창조산업을 제조업 육성 방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태영건설을 처리하는 방식을 보면 2015년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을 처리할 때가 연상된다. 당시 2,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 수혈이 산업은행 주도로 추진됐다. 박근혜 정부가 2016년에 도입한 것이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일명 원샷법)이었다. 그런데 이 법은 일본의 1999년 '산업활력재생특별법'을 베낀 것이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상징인 '창조경제' 육성도 일본의 '창조산업' 육성의 베끼기였다. 그리고 지금 윤석열 정부가 부동산과 건선 부문의 부실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도 자산시장 거품이 꺼지자 일본 정부가 내놓은 대책과 정확히 일치한다.

 

  가게 소빙, 기업 설비 투자, 그리고 수출 등 성장 에너지가 악화한 상황에서 부동산 시장의 침체는 자산가치의 하락을 의미하고, 이로 인해 소비의 추가 침체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수준으로 성장률이 하락한 상태에서 부동산 시장 침체가 더해지면 향후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일본의 1990년 잃어버린 10년보다 더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이를 막으려면 가계 구제에 초점을 맞춘 '한국적 양적완화'가 불가피하다. 주택금융공사가 금융권의 주택담보대출을 인수한 후 주택금융공사가 매입한 주택을 장기공공임대로 전환하는 것이다. 주거 불안을 겪는 많은 세입자의 주거 문제를 아넝화하는 계기로 만들 수 있다. 모든 국민이 기본적인 주거시설을 확보할 권리를 실현하는 것이다. 게다가 주택 매물 압력은 완화할 것이고 주택 소유를 포기한 가계도 여유 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채 상환 부담에서 해방되고 소비 여력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이는 차기 정권의 과제이다.

 

p184

 대개 산업화 혹은 공업화로는 1인당 소득 1만 달러까지 도달한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흔히 압축성장이라 부르듯이 한국은 '압축적 공업화'를 이루어냈다.  1만 달러 이후 한국은 탈공업화가 일본에 비해 2배나 빠를 정도로 압축적으로 진행됐고, 그 결과 많은 노동력이 저부가가치 서비스 부문으로 이동했다. 대표적인 분야가 자영업이고, 오늘날 플랫폼 노동자가 21세기형 저부가가치 서비스 부문 종사자들이다.

 그런데 AI와 로봇 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저부가가치 서비스 부문의 노동력조차 소멸시키고 있다. 한국 사회의 일자리 문제가 심각한 배경이다. 이로 인해 의사나 변호사처럼 일부 고부가가치 서비스 부문의 진입장벽이 높은 일자리를 들어가기 위한 교육 경쟁이 극심해지고 있다.

문제는 디지털 생태계에 필요한 인간상과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다른 사람과의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이 필요한데, 한국 사회에서 교육받은 학생은 대개가 스스로 문제를 찾아낼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과 협력을 만들어내는 데도 익숙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조업 생태계와 디지털 생태계가 전혀 다른 인간상을 요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산업혁신이 가능하다. 교육 혁명과 더불어 국민의 경제 기본권들을 구현할 때 새로운 집을 위한 최소조건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p191

 1980년대 이후 금융화가 새롭게 부상한 금융 자본의 지배력을 상징하듯이 화폐 권력에 변화가 발생했다. 금융혁신이라 불리는 '증권화'는 금융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증권화'란 유동성이 낮은 자산을 현금화하는 기법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저당증권(Mortgage-Backed Securities, MBS)이다. 주택은 대부분 대출이 포함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대출을 해준 금융회사는 원리금을 회수할 때까지 대출금을 채권  형태로 보유했다. 이 대출 채권은 대출 만기까지 온전히 현금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동성이 낮은 자산이다. 또 다른 대출을 하려면 추가 예금을 확보하거나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그리고 추가로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은 기본적으로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 통화량의 크기에 의존한다. 그러나 주택을 담보래 대출해 준 채권 자산을 담보로 증권을 만들어 매각하면 현금이 확보되고 이 현금으로 또 다른 대출을 만들 수 있다. 이 증권이 바로 주택저당증권MBS 이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자동차 대출금, 신용카드 사용 채권, 학자금 대출금, 공장 대출금 등에서부터 심지어 엔터테인먼트 로열티까지 다양한 비현금성 자산을 증권화하게 되었고, 이를 통용해서 자산담보증권Asset-Backed Securities ABS이라 부른다. 유동성이 낮은 자산을 모아 현금 흐름을 만들고, 이를 통해 유동성 낮은 자산의 가치를 높이고 동시에 소비자에게는 더 낮은 차입비용을 제공하고, 투자가에게는 고품질 고정수입이라는 매력적인 수익률을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금융시장은 이를 최대 혁신으로 평가했다. - *2008년 금융위기가 바로 이 MBS가 부도처리 되면서 발생한 것임.

 

 자산담보증권은 출현하자마자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2021년에 자산담보증권의 시장 규모는 2조 1,371억 달러에 달했다. 자산담보증권의 출현은 금융회사가 자금을 시장에서 직접 조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시중의 통화량 공급은 중앙은행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른바 중앙은행의 통화공급 독점력이다. 그런데 금융 자본이 중앙은행의 자금 지원 없이도 상당한 자금을 조달할 길이 열린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금융의 외생성外生性에서 내생성內生性으로의 진화라 부른다. 중앙은행의 화폐공급 독점력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장 상황에 따라 화폐공급이 달라지면서 전통적인 통화정책이 통화량 중심에서 이자율 중심으로 변경한 배경이다.

 

p202

 '제재'는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미국이 러시아를 해외 금융거래를 위한 달러화 결제시스템, 이른바 스위프트SWIFT, 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 에서 퇴출시킨 조치를 말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탈달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했다. 즉 스위프트는 금융기관을 연결하는 국제금융결제망으로 '글로벌 공공재'에 해당한다. 러시아 경제의 파산을 의도했지만, 기대한 목적은 달성되지 못하고 오히려 탈달러의 모멘텀으로 작용했다. 미국으로서는 자기 발등을 찍은 겨이 되었다. 

 게다가 뒤이은 러시아와 거래하는 제3국 단체/개인에 대한 제재인 세컨더리 보이콧 등과 더불어 인플레 불을 붙이면서 탈달러와 미국채 파동은 시작되었다. 2024년 새해가 시작하며 브릭스BRICs에 사우디아라비아가 공식 가입함으로써 탈달러는 가속 페달을 밟게 될 것이다. 이란과 아랍에미리트 등이 브릭스에 합류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면 이들의 석유공급은 전 세계의 약 42%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p209

 많은 전문가는 금융위기 이후부터 코로나 팬데믹 이전까지 경험했던 저물가와 그에 기초한 초저금리 시대는 다시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이는 금융위기 이후의 '이지 머니' 공급에 의한 자산시장 부양은 어렵다는 사실을 말한다. 사실 이는 저임금 중국 경제의 세계 시장 편입으로 상징되는 세계화와 기술진보 등이 가져다준 저물가로 가능했다.

 

p210

 이러한 대응 방식은 기본적으로 시간 벌기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갖는다. 미국채 공급 과잉 우려는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장에 공급되는 미국채 규모는 금융위기 이전(2001~2008년)에는 연 6,795억 달러(GDP 증가분의 120%)씩 증가하다가 금융위기 이후부터 코로나 팬데믹 이전(2009~2019년)까지는 연 1조 1,365억 달러(GDP 증가분의 171%)씩 증가해왔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이후(2020~2022년)에는 연 3조 1,485억 달러(GDP 증가분의 210%)씩 증가하고 있다.

 

 이는 미국채 가격의 안정성 악화가 '상수'가 되는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달러 힘의 약화를 의미한다. 앨런이 "준비금의 자연스러운 다변화 욕구"를 미국이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 배경이다.

 

p214

 현재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암호화폐(비트코인, 이더리움 등)가 분산과 공유와 개방 등을 속성으로 갖고 있는 분산형 네트워크 화폐임에도, 즉 국가와 금융 자본이 독점하던 화폐 권력을 해체하는 화폐시스템의 혁명임에도, 실질 가치를 만들어내는 플랫폼 사업모델이 뒷받침되지 않아 새로운 화폐시스템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산형 네트워크 화폐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일부 논자들은 암호화폐는 실질 가치가 없고 버블에 불과하다고 말하나,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등 분산과 개방과 공유의 특성을 실현한 블록체인형 암호화폐는 디지털 생태계의 특성에 부합하는 분산형 네트워크 화폐라는 가치를 갖는다. 단지, 디지털 생태계에서의 신용 역시 실질가치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화폐로서보다 자산으로서 자리매김되는 배경이다.

 

p216

 미국은 금융위기의 대외적 원인으로 '글로벌 불균형=글로벌 과잉 저축'에 돌리며 미국 이익을 위해 '나머지 세계'에 희생을 강요했다. 경제 주권의 충돌이다. 경상수지 흑자 축소를 둘러싼 미국과 주요 교역국들 간의 갈등, 더 나아가 미·중 간 경제패권을 둘러싼 갈등 등이 화폐 권력을 둘러싼 갈등인 이유이다. '통화정책 독립성의 약화'라는 미국 화폐 주권의 손상은 기본적으로 중심통화가 달러와 경제력 다원화의 미스매치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자신의 화폐 주권을 위해 나머지 세계에 경제력 신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외환위기에 대한 자기 보험 차원이든, 경제 주권의 차원이든 간에 나머지 세계의 달러 축적을 막을 권리가 미국에는 없지 않은가.

 결국 준비금의 다원화가 하나의 대세라면 국제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한 국제 협력은 선택을 넘어 필수 사항이다. 문제는 패권주의 사고에 젖어 있는 미국이 준비금의 다원화를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순간이 도래할 때까지는, 먼저 모두의 경제 주권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 블록화나 독자적 공급망 구축 등으로 나타나는 세계 경제의 지정학적 파편화Geo-economic fragmentation는 그 산물에 불과하다. 분산형 네트워크 화폐처럼 준비금의 다원화 역시 시대적 대세임에도 준비금 권력을 독점하려는 달러의 힘으로 인해 국제통화시스템 및 국제금융 시스템 모두 이행기적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이처럼 적어도 21세기 전반부는 불확실성과 혼란 등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사회혁신들을 만들어내는 길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것은 바로 정치의 역할이다. 인간 사회가 직면한 공동 과제를 푸는 일이 정치이고, 이를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만드는 것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p219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며 또한 양극화된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지지 세력의 목소리만을 대변하면서 정치가 극단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사실 경제적 양극화가 정치적 양극화로 이어지는 것은 많은 연구로 밝혀졌는데, 사실 이는 연구 이전에 상식의 문제이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면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증오, 심지어 폭력 등으로 이어진다. 관용과 사랑 등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이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이 병들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이 이렇게 망가지 이유는 한국 사회와 경제가 '부동산 카르텔'이 만들어낸 사실상의 세습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인 부동산으로 인해 경제 활력도 잃어버렸고, 인구도 축소되고, 급기야 사회가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리고 이제 부동산 모래성이 무너질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소비, 투자, 수출, 소득 등이 모두 마이너스 행진을 하며 지난 2023년의 스테그플레이션은 조만간 디플레이션으로 전활될 가능이 크다. 낡은 집(사회질서)이 무너진 후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제로에서 시작한다고는 하지만 수준이 낮지는 않다. 현재의 사회,경제,정치적인 이슈를 기반으로 자본론의 현대적 의의와 적용방안에 대해서 저자가 고민한 바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상당히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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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

 한 남자가 동독에서 시베리아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자산의 편지를 검열관이 읽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암호를 정해 두자. 만약 내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였다면, 편지의 내용은 진실이다. 하지만 만약 빨간 잉크로 쓰였다면 그것은 가짜다." 한 달 후 그의 친구가 편지를 받았을 때, 모든 것이 파란색 잉크로 쓰여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매우 훌륭하다. 맛있는 음식도 많다. 영화관에서는 서양의 재미있는 영화를 상영한다. 집은 넓고 고급스럽다. 여기서 살 수 없는 것은 빨간 잉크뿐이다."

 

이 농담은 소련의 '사회주의'를 다뤘지만, 자본주의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는 바로 이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의 세계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빨간 잉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번은 버린 <자본론>이 바로 그 빨간 잉크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본론>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 사회의 부자유를 정황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p19

 도시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남쪽 섬에 사는 어부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나요?

 "왜 너는 매일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거야. 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라."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뭘 할 건데?"
 "돈 많이 벌어서 은퇴하면 느긋하게 낮잠 자고 낚시하며 살고 싶으니까."
 "어, 나는 벌써 그렇게 하고 있어."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매일매일 힘들어하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을까요?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아니면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 그렇다면 위 이야기의 어부는 도시에 사는 우리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p20

 인간은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자연에 작용하여 다양한 것을 만들어 내면서 이 지구상에서 삶을 영위합니다. 의식주 등을 얻기 위해 인간은 적극적으로 자연에 적용하고 그 모습을 변화시키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합니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마르크스는 생리학 용어를 사용하여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라고 말했습니다.

 

p21

 이 책은 물질대사론을 바탕으로 <자본론>을 읽어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필자는 마르크스를 따라 '노동'이라는 행위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조절하는 통제하는 행위가 바로 '노동'입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노동'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노동은 우선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즉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제어하는 한 과정이다.

 

p24

 우리의 삶과 사회,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자연환경의 모습은 우리가 자연에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 작용 방식을 크게 잘못하면 사회와 자연은 황폐해집니다. 그래서 노동은 인간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매우 중요한 활동인 것입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가 '노동'이라는 개념에 주목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착취를 백일하에 드러내고 하는 정치적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물질대사라는 인간과 자연의 본원적 관계를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막연하게만 파악한다면 어느 시대든 인간은 자연과 물질대사를 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 모습은 시대와 지역마다 크게 다르죠.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활동인 '노동'이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고찰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결정적 변화가 있음을 밝히고, 거기서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접근한 것입니다.

 

p28

 화폐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풍요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풍부한 상태, 그것이 바로 사회의 '부'입니다.

 

p33

 사회의 '부'가 '상품'으로 변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가격표가 붙은 '매물(賣物)'이 된다는 뜻입니다.

 

p37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생산이 전면화된 사회', 즉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물건을 만드는 목적, 즉 노동의 목적이 다른 사회와 크게 다릅니다.

 

p39

 왜 이런 상황(부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이 벌어지는가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보다 '자본을 늘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자본주의는 이윤추구를 멈출 수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서점을 없애는 등 사회의 '부'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는다 해도 눈앞의 돈벌이를 멈출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p40

 생산 활동의 주요 목적이 '인간의 욕구 충족'에서 '자본을 늘리는 것'으로 바뀌면 당연히 생산방식도, 생산되는 물건도 달라집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되는 '상품'은 사람들의 삶에 정말 필요핮ㄴ지, 정말 중요한지보다 얼마나 비싸고, 얼마나 팔리겠는지, 당시 말해 얼마나 자본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돈이 되는 물건'과 '필요한 물건'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마르크스는 '상품'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는 '사용가치'라는 얼굴입니다. '사용가치'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유용성), 즉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하는 힘입니다. 물에는 갈증을 해소하는 힘이 있고, 식료품에는 굶주린 배를 채우는 힘이 있습니다. 마스크에도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 '사용가치'가 있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사용가치'가 바로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생산의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품의 또 다른 얼굴인 '가치'입니다.

 

p44

 '사용가치'를 위해 물건을 만들던 시대는 말 그대로 인간이 '물건을 사용하던' 시대였지만, '가치'를 위해 물건을 만드는 자본주의에서는 입장이 역전되어 인간이 물건에 휘둘리고 지배당합니다. 이 현상을 마르크스는 '물상화(物象化)'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이 노동에서 만든 물건이 '상품'이 되는 순간, 신비한 힘으로 인간의 삶과 행동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p47

 그와 동시에 광고업과 마케팅이 늘어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소비자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자신이 쓰레기를 샀다는 것을 금새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품의 마법이 풀려서 싫증이 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제품을 바꾸고, 새로운 쓰레기를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해야 하는 것입니다.

 

p48

 '상품'의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물상화의 힘은 강해지고, 인간은 점점 더 물건에 휘둘리게 됩니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경쟁 원리가 작동해 효율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 이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물상화의 힘을 강화한 결과, 예상하지 못한 많은 부조리와 비효율, 독점을 낳고 있습니다.

 

 민영화라고 하면, '독재적'이고 비효율적이던 공영/국유사업이 민간의 손에 의해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운영된다는 이미지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어의 마술입니다. 원어인 프라이비티제이션(privatization)은 직역하면 '사유화'입니다. 프라이빗(private)의 어원은 '빼앗기다' '분리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공유하고 관리하던 '코먼'을 빼앗긴 상태라는 뜻이죠. 민영화의 실체는 특정 기업의 권리 독점이며, '상품'의 영역을 넓히는 현대판 '울타리 치기'입니다.

 시장은 결코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돈을 가진 사람뿐이기 때문입니다. 민영화가 진행되면서 공영/국유이던 시절에는 접근이 가능했던 의료나 교육 같은 공공서비스에서 많은 사람이 배제되었습니다. 

 또 시장에서는 '이익'이 우선하기 때문에 수익성 없는 물건이나 서비스는 가차 없이 삭감됩니다. 예산도, 인력도 삭감됩니다. 정말 쓸모없는 것은 당연히 줄여야 하지만, '사용가치'를 무시한 효율화는 꼭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까지 삭감하거나 질을 떨어뜨려 사회의 '부'를 빈약하게 합니다.

 

p54

 가치 논리의 내면화를 보여 주는 잘 알려진 예가 바로 '가성비(코스파, cost performance)'의 사고입니다. 모든 일의 수익률을 추정하고 그에 따라 효율화를 꾀하는 태도죠.

 

 이렇게 가사나 육아는 외주화, 상품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효율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에 서비스산업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성비 사고에 더 깊이 빠져들면 돈이 되지 않는 주민 회의나 축제, 학부모/교사 모임(PTA), 노동조합 등에 참여하는 일이 모두 가성비가 나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가족이나 지인을 돕는 것조차 말이죠. 결국 공동체는 점점 더 말라비틀어지고, 끝내는 붕괴됩니다.

 물론 집안일을 모두 여성에게 맡기거나, 동네 모임에서 '장로'가 거드름을 피우던 옛날이 더 좋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상품화하지 않더라도 가사나 육아에 남녀가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도 있고, 커뮤니티의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선택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대신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남는 시간을 점점 더 돈벌이에 바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더 풍요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이 역설을 미하일 엔데가 쓴 <모모>의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간 은행'에 홀린 이발사 푸지는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는데도 전혀 여유가 없습니다.

 

 푸지 씨는 점점 더 흥분하고, 침착하지 못한 사람으로 변해 간다. 한 가지,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절약한 시간은 사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마술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푸지 씨의 하루하루는 처음에는 몰랐지만 점점 더 뚜렷하게, 그리고 조금씩 사라져 갔다.

 

가성비를 더 높이고 시간을 절약한다고 해서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압니다. 오히려 여가가 점점 줄어들고, 가족이나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여유도 없어집니다. 그리고 조금의 낭비도 용납하지 못하는 짜증 나는 인간들만 가득한 사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p82

 노예는 단지 외부의 두려움에 의해 노동하지, 자신의 생활(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보장되어 있는)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해 자유노동자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노동한다. 자유로운 자기결정, 즉 자유에 대한 의식과 그에 따른 책임의 감정은 자유노동자를 노예보다 훨씬 더 나은 노동자로 만든다.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결과들>)

 

 노동자들을 움직이는 것은 '일자리를 잃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두려움보다는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자발적으로 일한다'는 자부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깁니다. 실제로 취업 면접에서 "무슨 일이든 죽기 살기로 하겠습니다!"라며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최저한의 생활을 보장받으며 마지못해 일하는 노예와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책임감을 갖고 임하는 노동자는 억지로 일하는 노예보다 더 일을 잘하고, 더 좋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실수하면 자신을 탓합니다. 불합리한 명령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몰아세웁니다. 이는 자본가가 바라지도 않았던 바입니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사고방식을 노동자가 스스로 내면화함으로써 자본의 논리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이를 가리켜 '영혼의 포섭'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래 끝없는 가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고 자발적인 노동자는 자본가가 원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마치 자신이 지행해야 할 모습, 인간적으로 우수한 모습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고도성장기의 '모레쓰 사원(猛烈社員)'이나 버블경제기에 유행한 영양 음료의 캐치프레이즈 "24시간 싸울 수 잇습니까"가 그 좋은 예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자발적 책임감, 향상심, 주체성이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다고 마르크스는 경고했습니다.

 

p86

 노동운동이나 노사 교섭에서도 '임금인상'은 가장 큰 쟁점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마르크스는 임금인상보다 '노동일 제한(단축)'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당시 임금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는데도 말입니다.

 노동일의 제한은, 그것 없이는 모든 해방의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선결 조건이라고 우리는 선언한다. (319/410)

 

 임금이 인상되더라도 장시간 노동이 해소되지 않으면 으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본가가 임금인상 요구를 받아들이면 분명 착취는 완화됩니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자는 "그럼 우리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는 오히려 기업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사태입니다. 임금을 조금만 올려 주고 그 대신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해 준다면 잉여가치, 즉 자본가의 이윤은 오히려 늘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가의 목적은 노동력이라는 '부'를 '상품'으로 가둬 두는 것입니다. '상품'으로 가둬 두는 것은 자유 시간을 빼앗는 것입니다. 임금인상에 따른 장시간 노동이 임금노예 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임금이 조금 오른다 해도 시간을 빼앗긴 노동자에게는 아이와 놀거나 취미를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일하다 지쳐서 책을 읽거나 인생이나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없습니다.

 바빠서 직접 요리할 시간이 없게 되면 외식이라는 '상품'이 팔립니다. 빨래를 해도 건조할 시간이 아깝게 되면 세탁기와 건조기가 팔립니다. 자동 청소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는 가사 대행 서비스도 유행입니다.

 하지만 이런 편리한 서비스가 우리를 여유롭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노동시간이 점점 늘어날 뿐입니다. 이렇게 노동일을 '무제한'으로 만들면 '상품'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자본가들의 사업 기회가 확대됩니다.

 

p98

 자본주의는 엄청난 부를 가져다준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생활은 오히려 여유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욕구와 감성이 메마르고 빈곤해졌습니다. 180년 전, 20대 중반의 젊은 마르크스는 이 상태를 '노동의 소외'라고 불렀습니다. 소외된 삶에 대해 마르크스는 분노를 담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빛, 공기 등 가장 단순한 동물적 청결도 이간에게 욕구된 것을 중지한다, 더러움, 인간의 이 퇴폐, 타락, 문명의 하수구의 오물(이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이 인간의 생활 기반이 된다. 완전히 부자연스러운 황폐, 부패한 자연이 인간의 생활 기반으로 된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 철학 초고>)

 

p101

 상품을 값싸게 하기 위해, 그리고 상품을 값싸게 함으로써 노동자 자체를 값싸게 하기 위해 노동생산력을 증대하는 것은 자본의 내재적 충동이자 끊임없는 경향이다. (338/436)

p102

 임금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관계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일본은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임금은 전혀 오르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생활하는 데 얼마가 필요한지에 따라 임금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하루 일하고 지친 노동자는 먹고 자고 다음 날도 일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노동력의 재생산'이라고 표현했는데,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려면 얼마나 일해야 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필요'의 내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합니다. 음식, 집세, 의복, 여가 비용은 물론이고, 오늘날에는 스마트폰과 인터넷 요금도 포함될 것입니다. 지방에서는 자동차도 필요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자녀 교육비, 노후 자금 등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합니다.

 한편, 지금까지는 일당 1만 엔을 받아야 살 수 있었지만, 생산력이 높아지면 패스트패션과 패스트푸드 덕분에 예를 들어 8,000엔으로도 이전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일당을 8,000엔으로 낮출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비저유직 등을 늘려서 비용 절감을 할 수 있습니다.

 생산력이 높아져 싸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이 노동자가 한 시간 노동으로 창출하는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한 시간에 2,000엔인 가치를 창출한다고 가정할 때, 노동시간이 이전과 같은 여덟 시간이라면 일당 감소분 2,000엔은 고스란히 자본가의 잉여가치가 됩니다.

 이처럼 노동력가치의 저하로 인해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마르크스는 '상대적잉여가치'라고 했습니다.

 왜 '상대적'일까요? 앞 장에서 살펴본 '절대적잉여가치' 생산에서는 노동일의 절대 길이가 연장됨으로써 하루에 생산되는 가치 자체가 증가했습니다. 반면 '상대적잉여가치' 생산에서는 노동일의 길이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하루에 생산되는 가치의 합계는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노동력의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이윤이 늘어나는 구조입니다.

 

p105

 자본가들이 생산력을 높이는 기술혁신, 즉 이노베이션에 기대하는 것은 '가치'의 증식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또 다른 목표,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지배' 강화입니다. 오히려 이것이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생산력 증대에 대해 마르크스가 가장 문제 삼은 점입니다.

 자본가는 특별잉여가치를 획득하고자 상품을 최대한 싸게 만들려고 노동자가 '효율적으로' 일하게 하려고 합니다. 즉,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이죠. 이때 효율성은 노동자의 '쾌적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요구되는 것은 노동자를 중노동이나 복잡한 일에서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기술이 아닙니다. 그들이 무단결근도 하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고, 지시하는 대로만 일하도록 하는 혁신, 즉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는 기술입니다. 이런 '일하는 방식의 개혁'이 현대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에 케인스의 예상이 빗나간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노동자는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포섭'되어 자율성을 잃고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도대체 왜 생산력의 상승이 자본의 지배 강화로 이어질까요?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1장 서두에서 소개한 '물질대사'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인간이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노동을 통해 자연과 물질대사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노동과정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상'과 '실행'입니다['구상'과 '실행'이라는 정리는 마르크스 본인이 아니라 해리 브레이버맨이라는 뛰어난 마르크스 연구자가 <노동과 독점자본>이라는 책에서 <자본론>을 연구하면서 쓴 말입니다]

 

p110

 그렇다면 '구상'과 '실행'을 어떻게 분리할 수 있을까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생산공정을 세분화하여 노동자들에게 분업을 시키는 것입니다. 옹기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공정을 거치는지, 각 공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어떤 두고와 방식으로 진행하는지, 몇 분이 걸리는지 등을 자본가가 관찰하고, 직인이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는 작업을 획일적인 단순 작업으로 분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도 직인만이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품들은 애초에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요구되지 않습니다. 자본가들이 만들고 싶은 것은 수작업으로 만든 예술적인 옹기가 아니라, 싸고 나름대로 튼튼한 물건입니다. 깨지거나 부서지면 언제든 저렴한 가격으로 교체할 수 있는 대량생산품입니다. 그런 것들은 직인 한 명이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분업해서 흐름작업으로 만드는 것이 효율도 좋고, 싸게 많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가격경쟁의 물결에 휩쓸려 길드는 해체되어 갔습니다. 장사가 안되는 직인들은 폐업하거나 생계를 위해 자본가들의 분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길드의 힘은 약해지고, 그만큼 자본가의 힘은 강해졌습니다.

 그 결과 18~19세기 영업의 자유 원칙을 내세운 각국의 입법에 의해 길드의 특권은 폐지되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조국 독일에서도 1869년 길드제의 역사는 막을 내렸고, '규칙 없는 자본주의'는 이렇게 해서 형성되었습니다.

 

p112

 애초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자본가에게 팔아야 햇던 이유는 물리적 생산수단, 즉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업이라는 시스템에 편입됨으로써 무언가를 만드는 생산능력마저 잃게 되었다고 마르크스는 갈파했습니다.

 몇 년을 일해도 단순 작업만 할 수 있는 노동자는 분업 시스템 안에서만 일할 수 있습니다(더 이상 자기 혼자로는 완제품을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본의 지휘 감독과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분업과 협업은 이렇게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재편되어 노동자의 주체성을 빼앗아 갑니다.

 게다가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 작업이기 때문에 공장 밖에는 나를 대신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다면 꿈을 포기하고 불평불만을 꾹꾹 눌러 참으며 할당량을 달성하기 위해 묵묵히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더 자본가와의 주종 관계가 강화됩니다. - 자유로운 재량의 여지가 사라진 일터야말로 노동이 고통으로 되는 소외의 원인입니다.

 

p113. 인간다움을 앗아 가는 테일러주의

 구상과 실행을 철저하게 분리한 사례로 20세기 초의 '테일러주의'를 소개하겠습니다. 테일러주의는 미국의 기술자이자 <과학적 관리법의 원리>의 저자 프레더릭 테일러가 주장한 관리법입니다. 테일러는 기계공장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기계공, 기술 부장을 거쳐 컨설턴트가 된 인물로, 지금은 미국 경영학의 원조로 여겨집니다.

 테일러는 먼저 생산공정을 세분화하여 각 공정의 동작과 절차, 소요시간을 분석해 공정별 표준 작업시간을 확정해습니다. 작업의 낭비를 철저히 없애기 위해 동작에 따라 체형과 능력 등을 고려해 재배치하고, 전용 공구를 개발하고, 공구와 부품의 위치까지 세밀하게 정했습니다. 즉, 생산의 기술적 조건이 자본가에 의해 근본적으로 바뀐 것입니다.

 또 생산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사람과 실제 작업하는 사람을 완전히 분리했습니다. 이는 실제 작업을 하는 사람의 의식을 '정해진 시간 내에 자신의 업무를 완수하는 것'에만 집둥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시간 내에 일을 끝내지 못하면 벌금을 물거나 해고하고, 일정량 이상의 일을 해낸 사람에게는 보상을 하는 차별성과급제도도 도입해 경쟁심을 부추기며 단순노동에 매진하도록 했습니다.

테일러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그가 제철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초창기, 부하인 현장 공원들이 그의 명령을 조금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테일러는 자신의 지식과 기술이 '공원들의 지식과 손재주의 총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요컨대 공원들은 그를 우습게 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테일러는 공원들의 지식과 손재주, 즉 구상과 실행을 철저하게 해제하고, 모든 공원이 자신의 지시에 따라 '최대의 노력, 최고의 근면 성실'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를 고안하고 이를 체계화했습니다.

 테일러는 경영의 개념을 정립한 '과학적 관리법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테일러주의는 생산에 관한 노동자들의 지식이라는 '코먼(공유재산)'에 울타리 치는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생산에 관한 지식과 노하우를 자본이 독점하고, 자본의 편의에 따라 재구성된 생산시스템에 노동자를 강제로 복종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일시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져 실적 상승의 혜택을 노동자들도 임금인상이라는 형태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조 측도 자본에 구상을 빼앗기는 것을 용인해 왔습니다.

 하지만 고도 경제성장 시대가 끝나면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에게 그런 '덤'을 주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입지는 점점 약해지고, 임금도 낮아지고, 노동시간도 쉽게 연장됩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높이면서 노동자의 자율성도, 인간다운 풍요로운 시간도 사정없이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생산력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케인스가 예견한 여가사회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p116

 1장에서 인간이 상품의 '가치'에 휘둘린다는 이야기를 했고, 2장에서는 '자본의 운동'에 휘둘린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대공업 시대의 노동자는 더 나아가 '기계'에 휘둘립니다. 기계라는 사물과 노동자의 입장이 역적, 전복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바로 생산과정의 '물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산과정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은 기계이고, 기계는 "살아 있는 노동력을 지배하고 빨아들이는 죽은 노동"(446/571)이 됩니다. 이렇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에 기반한 자본의 지배가 완성됩니다.

 

 기계 노동은 신경계를 극도로 피곤하게 하는 한편, 근육의 다면적 작용을 억압하고 심신의 모든 자유로운 활동을 봉쇄힌다. 심지어 노동의 완화조차도 고통의 원천이 된다. 왜냐하면 기계는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내용에서 해방하기 때문이다. (445~446/571)

 

 흥미롭게도 이 구절에서는 기계로 인해 노동이 쉬워지는 것조차 노동자에게는 고통의 원천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계가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내용'에서 해방하는 것, 즉 내용 없는 단순노동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기쁨도, 성취감도, 충실감도 없는, 한마디로 소외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용이 없으니 언제, 누구와도 대체가 가능하고 노동자의 힘은 점점 약화되는 것입니다.

 자본의 지휘/명령, 즉 경영자의 의도에 따라 노동이 실현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마르크스는 '자본의 전제(專制)'라고 불렀습니다.

 자본의 전제가 완성되면 비약적으로 향상된 생산력도 모두 자본가의 것으로 나타난다고 마르크스는 말햇습니다.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협동'하여 수행한 노동이 생산력을 높였지만, 그것은 '노동자의 생산력'으로 나타나지 않고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의지로, 자율적으로 협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자본 아래 모여서 그것의 지시에 따라 일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지휘와 명령 없이는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만들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생산력이 증대될수록 자본의 지배는 오히려 강화된다고 마르크스는 비판한 것입니다.

 

 

p120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은 한편으로 노동일의 무제한적 연장에 새로운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고, 이 경향에 대한 저항을 분쇄하는 방식으로 노동 양식 자체와 사회적노동 유기체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 중 이전에 자본의 손이 닿지 않던 계층을 편입시키고 또는 기계가 쫓아낸 노동자들을 하는 일 없게 만듦으로써,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과잉 노동인구를 만들어 낸다. (430/551)

 

 기계가 육체노동을 대신하게 되면 비숙련노동자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등 '이전에 자본의 손이 닿지 않던 계층'도 일할 수 있게 됩니다. 트랙터와 경운기 등의 도입으로 농업의 공업화는 농촌에 과잉인구를 만들어 많은 젊은이가 도시로 향하게 됩니다. 이들을 노동시장에 '편입'시키면 상대적 과잉인구는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공장 밖에서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겠다' '더 열악한 노동조건에서도 일하겠다' '어쨌든 일하게 해 달라'는 사람이 늘어나면 공장 안의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더 오래, 더 성실하게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들이 필사적으로 일할수록 생산력이 높아져 자본가들이 '그렇게 많이 일해 준다면 지금은 100명 체제로 생산하는데 80명 정도면 되겠네'라고 생각하여, 상대적과잉인구는 더 증가하고 맙니다.

 

 노동자계급 중 취업자들의 과도 노동은 예비군 대열을 팽창시키는 반면, 예비군이 경쟁을 통해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의 강화로 취업자는 과도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665/866~867)

 

 이러한 상황은 실업자와 취업자의 분열을 낳고, 단결할 수 없는 노동자는 자본 앞에서 더욱더 힘이 약화됩니다. 힘이 약해지면 저항할 수 없게 되고, 더 많은 '과도 노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끝없는 악순환의 내막과 문제점을 마르크스가 강한 어조로 비판한 것이 다음 대목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은 모두 개별 노동자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며, 생산을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은 생산자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환되어 노동자를 부분적 인간으로 불구화하고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며, 노동의 고통으로 노동 내용을 파괴한다. 그리고 과학이 자립적 역능으로 노동과정에 합체될수록 노동과저의 정신적 역능은 노동자로부터 소원해지게 된다. 또 이러한 방법과 수단은 노동조건을 왜곡학로, 노동과정에서 극히 비열하고 혐오스뤙 전제 지배에 노동자를 복종시키며, 그의 생활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고, 그의 처자를 자본이라는 저거너트의 수레바퀴에 던져 넣는다. (674/878~879)

 

p127

 애초에 사회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 당사자조차 의미 없다고 느끼는 고임금 일자리는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문화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불쉿 잡(bullshit job)'이 광고업과 컨설팅업을 중심으로 최근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쓸데없는 회의, 서류 작성, 쓸데없는 캐치프레이즈 만들기, 매너 교육, 모두 '불쉿 잡'입니다. 이는 생산력이 너무 높아져 무의미한 노동을 억지로라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엘리트들이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환경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간다는 반증입니다. 즉, 케인스의 예측이 빗나간 이유는 자본주의가 무의미한 일자리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레이버의 주장입니다.

 무익한 고임금 불쉿 잡이 넘쳐 나는 반면, 사회에 꼭 필요한 필수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당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의 현실입니다. 보람 없는 무의미한 노동도, 가혹한 장시간 노동도 삶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p128

 인간이 모든 노동에서 해방되어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원한 것은 인간을 대신해 무엇이든 해 주는 기계나 로봇을 우리가 맥구 한잔 마시며 멍하니 바라보는 그런 미래 사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반복해서 보았듯이, 그가 무엇보다 문제 삼은 것은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어 자본의 지배 아래 사람들의 노동이 무내용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동이라는 풍부한 '부'를 회복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극복하고 노동의 자율성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보람 있고 풍요롭고 매력적인 노동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즉, 로봇이나 AI로 '노동' 자체를 없애겠다는 발상은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문제의 소재를 잘못 짚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상상하는 미래 사회의 노동자는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입니다. 나사만 조이고 돈만 버는 개인이 아니라, 구상과 실행 모두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개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부'를 활용하면서 사회 전체의 '부'를 풍요롭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면서 자율적으로 살아갈 능력과 감수성을 되찾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습니다.

 

p142

 자본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부를 빈곤하게 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습니다.

 

p144

 자본주의의 끝없는 운동은 일부 국가의 일부 사람에게 유리한 독점적 형태('대토지 소유')로 전 세계를 상품화합니다. 세계화의 결과, 한 국가의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국경을 넘어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가치 증식을 '무한'하게 추구하지만, 지구는 '유한'합니다. 자본은 항상 비용을 '외부화'하는데, 지구가 유한한 이상 '외부'도 유한합니다.

소련 붕괴 이후 자본주의 세계화가 점점 가속되면서 환경 위기 또한 세계화되었고, 이 위기와 무관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가 지구에는 더 이상 남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실제로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기후 위기와 영향이 슈퍼태풍과 폭염으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질대사의 균열'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p147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움직여 온 기존의 생산관계, 또는 그 법칙 표현에 불과한 소유관계와 모순된다. 이러한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 형태에서 그 질곡으로 전화한다. 이때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전집> 제13권 6쪽)

 

 자본주의는 지구환경을 파괴하지 않고는 이미 생산력을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사적소유와 이윤추구 아래 약탈을 반복하는 시스템에서는 누구의 것도 아닌 지구환경을 지속 가능한 형태로 관리할  수 없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더 나은 사회발전에 '질곡'이 된 상태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사이의 '회복 불가능한 균열'이 문명을 파괴하기 전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켜 다른 사회 시스템으로 이행해야만 한다고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p164

 자유투자사회에서 우리는 모든 행위와 선택을 '투자'로 간주하게 됩ㄴ다. 그런 사회의 귀결은 궁극적인 가성비 사회입니다. 결혼의 가성비? 육아의 가성비? 문화의 가성비? 민주주의의 가성비?

 당연히 인생에서 행위 대부분이 자산 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가성비 사고를 철저히 하게 되면 소통, 문화, 정치 참여, 세상의 많은 활동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고, 커뮤니티와 상호부조는 쇠퇴하고 사회의 부는 점점 더 앙상하게 됩니다.

 인생의 가성비를 따지자면 "당장 관 속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라고 요로 다케시(養老孟司, 1937~)는 비꼬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 따위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에 의한 '영혼의 포섭'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p174

 그 사회가 자본주의인지 아닌지는 정부의 규모나 국유 비율과는 무관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본을 늘리기 위한 잉여가치의 착취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따라서 정부가 작아지고 시장에 맡기면 더 자본주의적으로 된다는 '신자유주의' 발상은 일면적입니다. 실제로 시장이 잘 작동하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중국은 신자유주의는 아니지만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국가입니다.

 

p176

 자본주의의 본질은 상품의 등가교환 이면에 숨은 노동자 착취에 의한 잉여가치 생산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사유에서 국유로 소유 형태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착취를 둘러싼 문제를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느냐의 문제로만 보고 노동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면, 소련과 같은 과오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착취 없는 자유로운 노동의 존재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p177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데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의 탈취나 정치체제의 변혁이 아니라 경제 영역에서 이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렵게 느낄 수도 있지만, 요컨대 상품과 화폐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일상에서 선택의 여지를 넓혀 가는 것입니다.

 

p178

 독일은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하는 사람이 적고, 6년 정도 걸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유학 초기에, 박사과정까지 포함하면 20년 정도 학생인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왜 그런 일이 가능하냐면, 학비가 무료이기 때문이죠. 그뿐 아니라 한 학기 2만 엔 정도면 전철과 버스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정기권이 붙은 학생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학생증만 있으면 학식도 몇백 엔으로 먹을 수 있고, 미술관이나 콘서트 할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베를린 필의 콘서트도 15유로(약 2000엔)로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기숙사비는 한 달에 3만 엔 정도로 저렴하고요.

 대학 등록금뿐만이 아닙니다. 독일에서는 의료도 원칙적으로 무료이고, 간병 서비스도 후합니다. 실업수당, 직업훈련 등도 충실합니다. 그래서 육아에도 돈이 들지 않고, 노후까지 2000만 엔을 모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싫은 일을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는 압박감이 약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복지국가 연구자인 괴스타 에스핑아네르센이 '탈상품화'라 부른 상황입니다. 즉, 생활에 필요한 재화(주거, 공원)와 서비스(교육, 의료, 대중교통)를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을수록 탈상품화가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화와 서비스는 필요한 사람에게 시장에서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의료나 교육 등의 형태로 직접 현물급부됩니다.

 현물급부의 결과, 우리는 화폐를 얻기 위해 일할 필요가 줄어들게 됩니다. 복지국가는 물론 자본주의국가입니다. 하지만 탈상품화가 물상화의 힘에 제동을 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p179. 국유화보다 어소시에이션이 선행했다.

 소련도 교육, 의료 등을 무상으로 제공했기 때문에 복지국가와 차이점을 알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국유화가 먼저 선행되었죠. 반대로 복지국가의 경우,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려는 사회운동이 선행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마르크스는 '어소시에이션'이라고 불렀습니다.

 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정당, 모두 다 어소시에이션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NGO나 NPO도 해당됩니다. 마르크스가 지행한 것은 소련과 같은 관료 지배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를 기초로 한 민주적 사회였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의 중요성은 복지국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업보험은 노동자 스스로가 임금의 일부를 모아 만든 것입니다.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노동운동의 대오는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일정 수준 이하의 임금으로 일하지 않도록, 실직한 노동자들의 삶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사회보험이나 연금부터 공공도서관, 공공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노동조합, 이웃 상호부조 조직, 협동조합 등의 실천이 있습니다. 자본의 힘 앞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지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상호부조 시스템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요컨대 이 모든 것이 탈상품화를 위한 어소시에이션 운동이었으며, 그것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노동자들 자신이 아니라 국가가 세금을 사용해 보편적 형태로 국민에게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즉, 어소시에이션 운동은 국유화를 당과 관료가 추진했던 국가자본주의와는 순서가 반대입니다. 보편적 서비스로서 국유화는 어소시에이션이 발전한 다음에 이루어졌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이 경제의 기초에 있기 때문에 생활보장의 모든 것을 국가의 관리나 개입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에는 최근까지 전국적이고 일률적인 법정최저임금이 없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노동조합이 일본처럼 기업별이 아닌 산업별로 조직되어 있습니다(금속산업노조는 IG금속, 서비사업은 ver,di처럼). 이 산별노조가 각 기업과 산업별로 노사 협정을 맺어 일정한 최저임금을 지키도록 하기 때문에 굳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물상화와 탈상품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복지국가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비전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노동조합운동을 금지하고 국유화 아래 관료가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국가'보다 자본주의 복지국가가 마르크스의 생각에 더 가깝습니다.

 

p182. 기본소득이라는 '법학 환상'

 '국가자본주의'와 '법학 환상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오늘날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과거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운동이 침체되고 어소시에이션이 약화되는 가운데, 국가의 강력한 힘을 이용한 자본주의 개혁안이 다시금 제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0년대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기본소득(BI, Basic Income)은 '법학 환상'의 상징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화폐를 나눠 주는 법을 만들면 된다는 BI의 발상은 언뜻 보기에 매우 대담합니다. 충분한 돈을 자동으로 받을 수 있다면 굳이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유 시간도 늘어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BI는 마치 기사회생의 특효약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월 2~3만 엔을 지급받는 대신 연금이나 사회보장비를 삭감당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편, BI로 매월 10만 엔 정도를 전 국민에게 지급하려면 재원으로 대기업과 부유층에 상당한 부담을 지우게 됩니다.

당연히 자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러한 증세에 저항할 것입니다. 글로벌기업들은 일본 정부가 BI를 위해 높은 세금을 부과하면 회사를 접고 세금 부담이 적은 해외로 도피하겠다고 협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수는 줄고, 주가는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자본의 위협, '자본 파업'입니다.

 자본은 국가를 넘어 좋아하는 곳, 좋아하는 것에 투자할 자유를 갖고 있으며, 이 자유가 이동하지 못하는 노동자와 국가에 대한 자본의 권력과 우위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방패 삼아 '자본 파업'을 발동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BI를 도입하려면 국가가 이 자본 파업을 이겨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의 사회운동이 뒷받침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사회운동 진영에 그 정도의 강력한 힘이 있다면 국가가 화폐를 나눠 주는 것 외에 다른 사회변혁의 길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료, 고등교육, 보육, 돌봄, 대중교통 등을 모두 무상화하여 탈상품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BI라는 제안이 나온 배경에는 노동운동이 약화되고, 불안정 고용과 저임금 노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에 의존할 수 없으니, 그 대신 국가가 화폐의 힘으로 국민의 삶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 BI입니다.

 물론 매달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늘어나면 노동자들의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노동자계급의 힘이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생산의 존재 방식에는 손을 대지 않기 때문에 자본이 가진 힘을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BI를 요구하는 세력이 얼마나 힘을 가지고 자본 파업에 맞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BI에 담긴 사고방식은 화폐가 힘을 가진 현재의 상황을 상당히 소박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BI를 도입한다 할지라도 상품과 화폐의 힘에 계속 휘둘리지 않을까요? 물상화의 힘은 전혀 약화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물상화의 힘을 억누르려고 한 마르크스는 화폐와 상품이 힘을 갖지 않는 사회로의 변혁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물론 이 목표는 화폐의 힘을 아무리 사용해도 달성할 수 없습니다. 화폐의 힘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화폐 없이 살 수 있는 사회의 영역을 어소시에이션의 힘으로 늘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p184. 피케티와 MMT의 사각지대

 BI와 비슷한 '법학 환상'은 <21세기 자본>의 저자이자 프랑스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의 세제 개혁안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실 피케티도 최근 들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데, 그의 방식은 소득세와 법인세, 상속세를 대폭 인상해 과감한 재분배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득세와 상속세의 최대 세율을 90퍼센트 올리고, 이를 재원으로 삼아 모든 성인에게 일천수백만 엔씩을 지급하자고 제창합니다. 물론 그런 재분배가 이루어지면 서민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증세를 싫어하는 자본 측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피케티의 설명에는 BI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본 파업에 맞서 이런 대담한 개혁을 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불분명합니다.

 결국 피케티와 같은 양심적인 엘리트들이 사회 전체를 위한 제도를 톱다운방식으로 설계한다는 '법학 환상'은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자본 파업을 이겨 낼 수 있는 어소시에이션의 힘을 키워야 하는데, 피케티가 제안하는 세제 개혁을 지지하는 운동이 애초에 어떻게 일어날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최근 '반긴축파'의 이론으로 주목받는 현대화폐이론(MMT, Modern Monetary Theory) 에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MMT는 자국 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정부는 재정적자를 확대해도 채무불이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재정적자일지라도 국가는 과도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 범위에서 지출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MMT가 주장하는 과감한 재정지출은 정부가 최저임금으로 일자리를 마련하고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용보장 프로그램'과 한 세트로 생활을 보장합니다. 이를 통해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일자지를 적극 창출하면서 경제성장을 도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면 잘될까요? 적극적 재정이라 하더라도 공적 투자로 비중이 이동하여 어디에 투자할지를 정부가 결정하는 것은 자본이 여전히 싫어할 것입니다. 투자 여부의 자유로운 판단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자본이 가진 권력의 원천이고, 그 힘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MMT에서 공적 투자에 의한 자본 관리는 중요합니다. 만약 화폐를 마구잡이로 뿌리는 형태가 되면 사회보장이나 친환경적 일자리뿐 아니라 군비나 불필요한 공공사업에 사용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화폐를 뿌리는 과정에서 이권이 생겨 대기업만 이득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정부의 시장개입이 커지고 탈탄소, 인권보호 등 규제를 강화할수록 자본의 반발도 거세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본이 국내 투자에서 철수하기 시작하고, 통화가치가 하락해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증세나 금리인상을 통한 경기 긴축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본 파업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MMT의 경제정책에는 없습니다.

 결국 톱다운식으로 대담한 정책을 실행하려고 해도 국가가 자본 파업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당한 어소시에이션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때 어소시에이션에 요구되는 것은 노동자들이 무엇에 투자할지, 어떻게 일할지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생산의 실권을 쥐여 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생산 영역의 개혁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힘의 균형을 바꾸는 근본적인 과제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어소시에이션을 만드는 관점이 BI에도, 피케티에게도, MMT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계급투쟁이 없는 시대에 톱다운으로 할 수 있는 정치개혁이 BI이고, 세제 개혁이고, MMT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책이나 법의 논의가 선행되는 '법학 환상'에 갇혀 있습니다.

 이에 반해, 물상화, 어소시에이션,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의 독자적 관점을 이러한 정치개혁에 도입하는 것은 사고와 실천의 폭을 크게 넓혀 주며, 이러한 대담한 정책 제안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전제조건입니다.

 

 p187. 상향식 사회변혁으로

 이사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는 위로부터의 설계만으로 사회 전체가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버렸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소시에이션을 통한 탈상품화를 전략의 중심에 두는 것은 러시아혁명 이미지가 강한 20세기형 사회변혁의 비전에 큰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톱다운' 방식에서 '상향식' 으로의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마르크스 자신의 혁명관 변화에서도 드러납니다. 마르크스 역시 아직 젊었던 <공산당선언>(1848년) 단계에서는 공황을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자본론>에서는 논의의 초점이 크게 달라집니다. <자본론>에서 그런 공황 대망론은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오히려 이 책의 2장과 3장에서도 보았듯이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시간 단축과 기능 훈련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혁명의 책인데도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소시에이션에 의한 개량입니다.

 이러한 강조점 변화의 배경에는 마르크스가 혁명의 어려움을 인식한 점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는 노동자의 궁핌화와 공황으로 머지않아 혁명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에서 노동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자본주의는 되살아났습니다. 1857년 시작된 공황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본주의의 끈질긴 생명력 앞에서 마르크스는 그 힘의 원천을 탐구할 필요성을 통감했습니다. 그것이 마르크스를 경제학 비판으로 이끌었고, 그 연구 성과인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낙관적인 변혁 비전을 버리고 혁명을 향한 자본주의 수정에 무게를 두게 됩니다.

 이때 마르크스는 임금인상보다 노동시간 단축을 중시했는데, 이 역시 물상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시급을 올리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더 오래 일해 화폐를 얻고자 하는 욕망에서 노동자들은 해방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점점 더 화폐에 의존학 됩니다.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구 복지국가는 노동시간 단축을 체택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노동시간이 주 35시간입니다. 이러한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에게 여가가 생기게 합니다. 하지만 여가가 생겨도 일요일에 모든 가게가 문을 연다면, 결국 자본주의에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에는 식당이나 미술관 등을 제외하고 백화점, 쇼핑몰, 슈퍼마켓 등은 원칙적으로 문을 닫는 것입니다.

 가게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소비활동을 아예 할 수 없게 됩니다. '윈도쇼핑'은 일본에서 흔히 오해되듯이 돈이 없어 가게 밖에서 브랜드 상품을 구경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요일에 가게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에서 구경하는 것입니다.

 가게가 문을 닫기 때문에 여가를 보내는 다른 방법이 필연적으로 생겨납니다. 카페에서 독서하고,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포츠 침에서 축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원이나 농장을 가꾸어도 좋습니다. 시위나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탈상품화와 결합된 여가는 비자본주의적 활동과 능력 개발의 터전을 마련해 줍니다. 그것이 또 다른 어소시에이션의 발전과 탈상품화의 가능성을 넓혀 가는 것으로도 이어집니다. 이리하여 가성비 사고로 회수되지 않는 사회적 부의 풍요가 양성될 수 있습니다. 

 

p201

 자연과학과 공동체를 동시에 연구하던 마르크스는 자연의 '지속가능성'과 인간 사회의 '평등'의 강력한 연관성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가 편재하면 거기에서 권력과 지배-종속 관계가 생겨나고, 이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인간과 자연에서 약탈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원이 고갈되면, 이번에는 서로 탈취하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사회의 번영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p237

 마르크스에 따르면 변화의 담당자는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면 남성 공장 노동자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겠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 부정적 영향을 받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피폐해진 필수 노동자, 일자리가 불안정해서 늘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 일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시장 논리, 경쟁 원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우리는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자본주의는 불평등과 분단을 낳고, 약자들로부터 더 빼앗아 왔습니다. 그리고 시장은 화폐가 없는 사람들을 배제합니다. 이 때문에 상품화의 힘을 약화하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주의 영역을 경제 영역에까지 확대하자고 마르크스는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상품화(commodification)'에서 모든 것의 '코먼화(commonification)'로의 대전환을 향한 코뮤니즘의 투쟁입니다.

 

p240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전염병, 전쟁, 기후 위기 등 만성적 긴급사태의 시대에는 강한 국가가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이 만성적 긴급사태를 방치한다면 국가의 힘이 점점 더 강해져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나아갈 것입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재림은 물론 허용될 수 없습니다.

 그런 '야만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불평등과 착취, 전쟁과 폭력, 식민지지배와 노예제 등의 문제를 직시하고 국가의 폭주에 저항하면서 자유와 평등의 가능성을 필사적으로 사고했던 사상가들의 지혜와 상상력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자본론>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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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1. 빨간 알사탕 하나

 장에 다녀오신 할머니가 모시 손수건에 싸 꼬옥 품고 온 빨간 알사탕 한 알을 입에 넣어주셨다.

 "와아 달다 할무니, 겁나게 다요. 세상에서 젤 달고 맛있다아."

 볼이 불룩한 알사탕을 빨며 나는 황홀감에 소리쳤다.

 처음 먹어 본 알사탕의 단맛은 며칠이 지나도록 내 입 속과 몸 안을 굴러다녔다. 할머니가 잘 익은 대추알을  줘도, 붉은 홍시랑 몰캉한 다래알을 입에 넣어줘도 "아 거시기 알사탕 참 달고 맛있었는디라" 온통 알사탕 생각뿐이었다.

 신식 알사탕의 강렬한 단맛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혓바닥을 물들인 빨간 색소만큼이나 진득하니 나를 끌어당겼다. 

 흰 눈이 내리고 문풍지 바람이 차운 밤, 처마 아래 매달은 대바구니에서 인절미를 꺼내 화롯불에 구워 호호 불어 조청에 찍어 입에 넣어주던 할머니가 그랬다.

 "아가 맛있냐. 수수조청 맛이 어떠냐."

 "달고 맛나요, 근디요 알사탕이 더 달고 맛나요. 최고랑께요."

 문득 할머니가 침묵하는 걸 느끼며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챈 순간, 알사탕 맛을 본 이래의 내 말과 일련의 일들이 스쳐갔다.

 그랬다. 할머니는 곶감이든 떡이든 엿이든 어디선가 선물 받은 그 달고 맛난 것들을 자기 입에 넣지 않고 품고 와 내 입에 넣어주셨는데, "근디 알사탕이 더 달고 맛난디라. 그 빨간 알사탕이..." 흘린 듯이 말해왔던 나는 그만, 구수한 인절미와 달근한 수수조청을 씹으며 울먹였다.

 다른 때 같으면 "아가 울지 마라" 품에 안아주실 텐데, 울먹이는 나를 기냥 두고 구부정히 마주 앉아 아무 말도 없는 할머니가 낯설고 멀어지고, 할머니와 나 사이의 어떤 끈이 끊어져 버린 듯 아득했다.

 이윽고 할머니가 "아가, 이리 오니라" 울먹이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물그릇을 들어 마시게 했다.

 "평아, 알사탕이 달고 맛나지야? 그란디 말이다. 산과 들과 바다와 꽃과 나무가 길러준 것들도 다 제맛이 있지야. 알사탕이 아무리 달고 맛나다 해도 말이다. 그것은 독한 것이제. 유순하고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을 무감하게 가려버리제. 다른 맛들과 나름의 단맛을 가리고 밀어내 부는 건 좋은 것이 아니제. 알사탕같이 최고로 달고 맛난 것만 입에 달고 살면은 세상의 소소하고 귀한 것들이 다 멀어져 불고, 네 몸이 상하고 무디어져 분단다. 그리하믄 사는 맛과 얼이 흐려져 사람 베리게 되는 것이제.

 "야아, 할머니, 알겠어라."

 "우리 평이는 겨울이면 동백꽃을 쪼옥 쪼옥 빰시롱 '달고 향나고 시원하게 맛나다' 했는디, 올해 동백꽃 맛은 어쩌드냐아. 나는 말이다, 아가. 네 입에 넣어줄 벼꽃도 깨꽃도 감자꽃도 아욱꽃도 녹두꽃도 오이꽃도 가지꽃도 다 이쁘고 장하고 고맙기만 하니라. 이 할무니한텐 세상에서 우리 평이가 젤 이쁘고 귀한 꽃이다만 다른 아그들도 다 나름으로 어여쁜 꽃으로 보인단다. 아가, 최고로 단 것에 홀리고 눈멀고 그 하나에만 쓸려가지 말그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 품에 꼬옥 안겼다.

 다음 해 문풍지 우는 화롯불 곁에 할무니, 우리 할무니는 아니 계셨다. 나는 돌아가신 할무니가 그리워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하얀 눈 위에 작은 내 발자국이 총총히 따라왔다.

 

 동백나무 아래 붉고 선연한 동백꽃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으스스 떨면서 언 손으로 동백꽃을 한 줌 가득 주워 쪼옥 쪼옥 빨아먹으며 눈길을 걸었다.

 "아가, 맛이 어떠하냐?"

 "순하고 맑고 시려요. 달고 향그럽고 맛나요, 할무니."

 

p54

 성서는 복음서라는데, 나에게 성서는 울음의 책이었다. 호세 신부님과 함께 더듬더듬 성서를 읽어나갈 때 내 가슴에 박히는 건 눈물과 탄식과 수난과 죽음이었다. 그랬다. 세상의 큰 울음을 통하지 않고는 복음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울음이야말로 복음이었다. 눈물이야말로 은총이었다.

 가난하고 불운하고 슬픈 눈을 가진 예수. 그는 고난받으면서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사랑이 처음이자 전부라고,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애통하고 분노하고 울면서도,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다 이루었다' 기꺼이 죽어간 예수가 좋았고, 눈물의 사제인 호세 신부님이 좋았다.

 

p57. 빗속의 등불들

 가을비를 앞두고 다들 벼 수확에 쫓겨서 부지깽이도 나설 만큼 분주한 때였다.

 일손을 구하지 못한 어머니는 혼자 겨우 벼를 베어 논바닥에 뉘어놓고는 묶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급히 저녁을 지어 먹고 다시 논으로 나가 볏단을 묶어 세우는데, 꾸물거리는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애써 베어 둔 벼가 빗물에 잠겨 들고 있었다. 탈진한 어머니는 벼를 묶어 세우느라 안간힘이었다.

 들녘은 어둡고 빗줄기는 거세고 발은 푹푹 빠지고 나락은 젖어 무겁기만 했다. 애가 탄 나는 어찌해 볼라고 볏단을 붙들고 힘을 써 봤으나 이렇게 작고 약한 내가 원망스럽고 아부지 없는 서러움이 차갑게 파고들었다.

 그때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일렁였다. 불빛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자 나는 도깨비불인가, 더럭 겁이 났다. 어둠 속에 점점 커지는 불빛 사이로 "가스파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쏟아지는 빗발을 뚫고 등불과 낫을 든 흰옷의 행렬이 보였다. 동강공소에 다니는 저 건너 마을 형 누나들과 어른들이었다.

 동네 사람들도 친척들도 이런저런 나름의 일들로 도울 여력이 없었는데, 우리 집 사정을 아는 신자들이 비가 쏟아지자 서로 소식을 들리고 의견을 모아 여기 먼 마을까지 나선 것이다.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젊은 엄니가 이 작은 논 세마지기에 다섯 아이 생계를 걸고 사는 걸 알기에, 자기들 수확을 뒤로 한 채 십리 밤길을 달려온 것이다.

 어머니와 신자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인사를 나누고 일렁이는 횃불 아래 비에 젖은 얼굴들이 빛나고 있었다.

 "하이고 장해라. 엄니랑 벼를 다 베어놓았구나이."

 그러더니 논바닥의 나락을 세워 짚으로 묶고, 볏단을 지고 논두렁에다 옮겨 둥글게 쌓고, 함께 성가를 부르며 날랜 손길로 일을 해나가는 것이었다.

 차가운 빗속에 몸에 돋는 소름과 하얀 입김, 가슴을 데우는 뜨거운 온기, 어둠 속에 일렁이는 등불과 노동의 춤사위 같은 긴 그림자, 빗소리를 타고 울리는 성가 소리...

 일을 마치고 어두운 밤길로 점점이 멀어져 가는 등불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나는 빗줄기 속에서 성호를 그었다.

 

p75. 나의 첫 요리

 나의 첫 번째 요리는 여덟 살 때, 그러니까 그날 정오에, 느닷없이 해버렸다.

 모내기를 앞두고서 동네 일손을 구해 우리 논에 써레질을 하는 날이었다.

 "일손은 잘 멕여아지야. 작은아들, 오늘 나 좀 도와주시제."

 엄니가 뜨끈한 가마솥에 쌀밥을 안쳐두고 매콤새콤한 서대회 감을 손질해 살강(선반)에 올려두는 사이, 나는 동강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받아다 찬물에 담가두고, 갯벌 바다가 어부네에 가서 갓 잡은 커다란 갯장어 두 마리를 대바구니에 담아  끙끙 이고 왔다.

 "애썻다. 인자 아궁이에 불을 지피그라. 불티 안 날리게 은근히 때야 쓴다이."

 "걱정 마시씨요. 싸릿가지랑 솔잎으로만 곱다시 불 땔께라."

 엄니는 부뚜막 위에 된장 한 그릇, 조선파 한 다발, 어슷이 썬 무우, 여린 호박잎이랑 들깨 순이랑 토란 줄기, 절구에 굵게 빻은 고춧가루랑 마늘이랑 생강, 부엌 시루에서 기른 숙주 한 바구니를 가지런히 준비해 두고선 큰 도마를 꺼내 내 다리만큼이나 굵은 갯장어를 다듬고 토막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갯장어가 꿀틀, 한순간에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엄니의 손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몸서리가 치고 난 얼어붙어 버렸다.

 으음, 엄니가 신음을 토하더니 한참이나 감은 눈을 번쩍 뜨고 작으나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보며 말했다.

 "평아, 정신 차리자. 바가지에 물을 떠라. 여기 손에 부어라. 잘혔다. 방에 가 횟대에 걸어둔 옷 내오니라. 이 치마랑 저고리 벗기고 입혀라. 되었다."

 "엄니.... 얼굴에 피..."

 나는 엄니가 쓴 머릿수건을 풀어 후다닥 물에 적셔 이마와 볼에 튄 피를 닦았다. 엄니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입술이 파랗게 떨려 더럭 겁이 났다. 엄니는 피 흐르는 손을 감싸 위로 치켜든 채 우뚝 서너디 말했다.

 "평아, 내 말 잘 들어라. 물이 끓으면 이 장어를 넣어라. 솥뚜껑이 들썩이고 김이 오르면 여그 된장과 파를 넣고 호박잎과 야채를 넣어라. 마지막에 고춧가루랑 양념을 넣어라. 간을 잘 잡아야 쓴다. 서대회는 고루 잘 무치고 막걸리 식초는 논에 가져가서 마지막에 넣어라. 알겄냐. 다들 일 나갔을 테니 논밭에 가서 작은 엄니나 아랫집 순덕이 누나를 찾아라. 엄니가 급한 일로 출타했다 허고 늦지 않게 일손들 밥 내가그라. 알았지야, 평아, 해낼 수 있겄지야?"

 나는 아직 부들부들 떰시롱 애써 씩씩하게 대답했다.

 "알았어라, 다 해낼께라. 근디 엄니 혼자 가실라고라..."

 엄니는 팔꿈치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움켜쥔 채 날랜 걸음으로 마당을 질러 멀리 떨어진 면 소재 의원으로 가는 것이었다.

 혼자 남겨진 나는 겁에 질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귓속에서 잉잉잉 벌이 날고 가슴에 우두두 말이 달리고 엄니의 피 묻은 얼굴만 아른거렸다. 나는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시고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 타닥타닥 가마솥이 끓을 때, 엄니가 불러준 순서대로 기억을 불러내며 장어 요리를 시작했다.

 "하이고 하느님, 울 엄니 살려주씨요. 울 엄니가 안 불쌍하요. 아부지 델꼬 가 불더니 울 엄니까지 뭔 죄다요. 좀 살려주시씨요."

 울며 기도하며 엄니가 맡긴 요리를 마쳤다. 그러고는 숨이 차도록 달려나가 아랫집 순덕이 누나를 찾았다.

 "누나 얼러 씼으씨요. 바쁘요이."

 나는 논흙투성이인 누나에게 두레박 물을 막 부어주며 재촉했다. 부엌으로 와서 국 맛을 본 누나가 둥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옴마야, 간이 딱 맞네. 맛나게 끓였네잉. 엄니가 한 거보다 평이가 더 맛있게 해부렸네이."

 누나는 속도 모르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밥 늦겄소. 싸게싸게 챙기잔께라."

 누나와 나는 고봉밥을 담고 김치를 썰고 국통과 그릇을 날래게 챙겨 논가 키 큰 버드나무 아래 밥을 차리고 일손들을 불렀다.

"엄니는 으디 가고 평이랑 순덕이냐?"
"아 공소에 신부님이... 그 눈 파란 신부님이 급하게 불러서라."

 나는 애써 둘러댔다.

 "하야, 귀헌 장어국이네. 나가 오늘 뭔 복이다냐아."
 "하이고야 맛나네. 간도 딱 맞고 입에 착착 감기네잉."
 "흐미, 요 새콤매콤 달근한 서대회 맛 좀 보소. 씨원한 동강 막걸리랑. 이 맛에 나가 여그 살제잉. 아 행복지다."
 "하여튼 니 엄니 음식 솜씨는 천하제일이여."

 나는 엄니가 빈 자리에 마치 내가 우리 집안의 가장이나 되는 양 뒷짐을 지고 힘을 담아 말을 했다.

 "맛나게들 많이 많이 드시씨요. 우리 논에 정성 좀 많이 들여 주씨요잉."

 어른들이 하하하 웃으면서 나를 놀리고 순덕이 누나도 "아따아따, 쫌 있으면 장가 보내달라겄다야" 호호호 웃음을 날렸다.

 나는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마치고 엄니를 기다렸다. 해가 저물녘에야 엄니가 핼쓱한 얼굴로 작아져서 돌아왔다. 기름 떨어진 호롱불처럼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평아, 이른 대로 했느냐?"
 "예, 걱정 마씨요. 다 잘 되었써라."

 나는 잽싸게 방으로 달려가 요를 펴고 베개를 놓았다. 그리고 핏자국이 말라붙은 옷저고리를 벗겨주었다. 자리에 누운 엄니가 눈을 감고 신음하더니 하얗게 마른 입술로 더듬거렸다.

 "손은 붙였다. 스무 바늘쯤 꿰맸다. 피를 많이 흘려 도중에 어질했으나 다 잘되었다. 감사하다. 오 하느님, 성모님..." 그러고는 스르르 잠에 들었다.

 나는 살금살금 들락거리며 내가 아파 누웠을 때 엄니가 해준 것들을 떠올리며 수건을 적셔 이마의 땀을 닦고 따끈한 물로 발을 닦고 팔 자루를 데워 배 위에 얹었다. 그리고 엄니의 낡은 기도문을 펼쳐 읽으며 울먹였다.

 엄니가 깨어났을 때 솥 안 더운 물 위에 놓아둔 장어국과 밥을 내왔다. 벽에 기대앉아 상을 받은 엄니가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많이 컸네..."하셨다. 나는 머쓱한 데다 시린 마음이 들킬세라 "아따 얼른 수저나 뜨씨요" 해버렸다.

 엄니는 따끈한 장어국을 맛보더니, 밥을 말더니, 점점 빠르게 드시는 거였다.

 "맛나네, 잘했네. 아들 밥상을 다 받아보네... 속없이 맛있네."

 밥을 다 드신 엄니는 또 잠이 들었다.

 울 엄니가 크게 베인 손을 움켜쥐고 핏방울 떨구며 홀로 먼 황톳길을 걸어가던 꿈같이 어질하고 절박했던 그날 이후, 나에게 요리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어느 날, 준비도 연습도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울며 기도하며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주어지면,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꼭 해내야만 하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이 그날 정오에 시작되었다.

 생각할 때마다 아뜩하고 목이 메이는 나의 첫 요리, 내 인생의 첫 요리.

 

p98

 나는 홀로된 울 엄니의 젊음을 먹고 눈물을 먹고 기도를 먹고 어서어서 자라났는데, 엄니의 가르침대로 엄미가 바쳐준 사랑의 힘으로 이렇게 자라났는데, 엄니한테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한 번은 자랑이고 싶었는데, 한 번도 그러지 못해서... 이제는 그럴 수도 없어서... 엄니 미안해.

 

p100

 다음 날부터 산과 들과 바닷가를 누비며 꽃씨를 받으러 다녔다. 고이고이 받은 꽃씨들을 종류별로 한지 봉투에 넣고 꽃 그림을 그리고 꽃 이름을 쓰고, 지끈으로 묶어 서랍에 넣어두었다.

 고광꽃 참나리 분꽃 앵꽃 꿩의다리 초롱꽃 패랭이 봉선화 솔체 접시꽃 백일홍 금낭화 붓꽃 하늘매발톱 도라지꽃 구절초 채송화 과꽃 치자 동백꽃 산국화 작약 할미꽃 해당화... 하나하나 봉투가 채워질수록 내 가슴도 부풀었다.

 

 

 검찰개혁을 시작한 조국. 그의 실패의 발자취를 다룬 내용.

언젠가는 다시 시작될 검찰개혁의 쓴약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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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1

 조국 수석은 평생 학자로 살아왔지만 민정수석실 업무 특성을 바로 파악했다. 불과 한 시간 남짓 이뤄지는 나의 보고에도 바로 적응하고, 의사결정도 매우 빠른 상사였다.

 

p32

 처음 민정수석실 근무를 시작했을 때, 조국 수석은 점심시간에 혼자 나갔다가 한참 지나서 들어오곤 했다.

 "수서님, 어디 다녀오시나요?"
 "구내식당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왜 혼자 다녀오셨어요?"
 "황 국장도 개인적인 점심 약속이 있을 것 같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혼자 먹었습니다."
 "수석님께서 업무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보좌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잘 보좌하기 위해서는 수석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하는데 워낙 업무가 바쁘셔서 의중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걱정입니다. 앞으로 점심 약속이 없으시면 식사를 저랑 같이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수석님께서 혼자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시면 제가 수석님을 소홀히 모신다고 욕먹습니다. 혼자 점심을 드시러 가시는 것은 저를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쁜 보좌관'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이후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었다.

 

p34

  일 이야기 외에는 대부분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국 수석은 청와대에 근무하면서도 교수 재직 시절 출간했던 책 2권의 개정판을 내기도 했다. 주 6일 근무다 보니 딱 하루 쉬는 휴일에 집필로 휴식을 대신했다. 몸은 물론 머리도 하루쯤은 다 내려놓고 쉬시라고 여러 번 부탁 아닌 부탁을 드렸지만, 책을 읽고 쓰는 일이 휴식과 다름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조국 수석이 출간한 책들을 읽은 독자라면 익히 알고 있겠지만, 조 수석은 법학자 출신답게 정확한 기록이 몸에 밴 사람이다. 특히 수석의 기억력은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하는 우영우처럼 포토그래픽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다른 말을 하기 어려운 상사였다. 그런 그가 윤석열 검찰이 앞뒤 잘라내고 왜곡한 사실들로 사냥을 당했으니 그 정신적 고통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p39

 2017년 7월 18일 청와대 페이스북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수상한 장비 철거 작전'이라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청와대 민정수석실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계단 가림막'과 '검색대'를 철거하는 장면이었다. 언뜻 평범한 검색대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철제 난간 사이마다 설치해 종이 한 장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은 가림막이었다. 검색대 옆에 있는 커다란 철제 장비는 특수용지를 감지하는 센서였다.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이 설치한 것들이었다. 이것을 처음 발견해 철거를 제안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청와대에 들어올 때부터 있었던 것이었기에 무심코 지나다녔지만 '저게 왜 있지?'라는 의문이 들어 여러 사람에게 물어 용도를 확인한 후 조국 수석에게 철거를 제안했다.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은 모든 문건을 작성할 때 반드시 특수처리된 용지를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용지를 들고 검색대를 통과하면 경고음이 울린다. 최순실의 남편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보좌관 출신인 정윤회가 비선 실세라는 문건이 언론에 유출된 직후, 당시 민정수석이었던 우병우의 지시로 이런 시설물과 장비를 설치했던 것이다.

 

p49

 민정수석실에서 가장 미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자제들이었다. 다른 특수 관계인들보다 자제들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했다. 어려운 점을 듣기보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지 않는 것이 최선임을 주지하다 보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뭘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민정수석실의 주된 역할이다 보니 자제들은 친인척을 관리하는 민정비서관실의 특별감찰반 자체를 불편해했다고 한다. 자제를 관리해야 하는 특별감찰반의 고충도 많았다고 들었다. 양쪽 다 하소연할 데가 없는 사람들끼리의 불편한 만남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문 대통령의 자제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자랑스러움에 앞서 속박이었을 것이다.

 

p50

 조국 수석에게는 제자가 많았다. 제자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조 수석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청와대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조 수석에게 추천을 부탁하기도 했다.

 어느 날 조국 수석이 아무개를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도 잘 알고 있는 후배였다. 이 후배가 정부 부처에 있는 국장하고 수석을 방문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만나지 말라고 했다. 시기도 문제거니와 사적인 친분으로 민정수석을 만난다면 사전 점검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 수석의 질문에도 '만나면 안 되는 일'이라는 답이 담겨 있었고, 당연히 내가 그렇게 말할 것을 수석도 알고 있었다. 보좌관인 내가 정리해주기 바란다는 요청을 담은 질문이었다.

 나는 아무개에게 전화했다. "사적인 인연으로 공직의 관례를 깰 수는 없으니 필요한 내용에 따라 민정수석실 선임 행정관이나 담당 행정관을연결해주겠다. 그리고 민정수석에게 사적인 친분을 이용해 면담 요청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국 수석은 청와대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제자가 있을 경우 자신이 청와대에 있는 동안에는 추천하기 어렵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이 서운함이 우선인지라 조 수석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수석도 많이 속상해했다. 내가 당사자에게 전화해서 "민정수석이라는 자리는 청와대의 공직기강과 인사 추천의 문제까지도 점검해야 하는 자리다. 제자를 추천할 경우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영이 서지 않는다. 이해를 바란다"고 말하며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감수해달라고 요청했다. 

 청와대에서 원하는 업무 능력을 갖추고 있던 한 제자는 조국 수석이 청와대를 떠난 이후에야 행정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청와대에 온 이후 업무 기여도, 전문성 모두 인정받았다. 다만 조국의 제자라는 이유로 청와대 입성이 늦어졌을 뿐이다.

 

p54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한 황찬익 감사원장이 임기를 마치고 퇴직할 무렵이 되자 후임 감사원장을 추천받고 검증을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법률가, 특히 판사 출신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후보군으로 추천되었다. 하지만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황당한 일이었다. 내가 직접 검증 업무를 담당한 것이 아니다 보니 계속 '검증 중'이라는 말만 들었는데, 알고 보니 20명 넘게 검증했다고 한다. 한국 사회 지도충 사람들의 민낯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감사원장 후보로 지금은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된 최재형으로 결정되었다. 최재형은 검증 과정에서 특별한 문제는 없었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보수 언론과 원자력발전 분야 주요 인사와 친인척 관계였는데, 이 점이 나중에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나는 조국 수석에게 다음과 같이 의견을 드렸다.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인사들이 너무 보수적인 분들이어서 문재인 정부 국정전찰에 동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만 나중에 보수 인사들의 영향을 받아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판사 출신 인재 후보군의 인력 풀이 좁다는 것이 문제인데다가 인사 추천은 민정수석실의 몫이 아니었다. 민정수석실을 검증만 할 뿐 최종 결정을 하는 단위는 아니었다. 조국 수석도 여러 걱정을 했지만 인재 후보군의 한계로 더 이상 감사원장 후보자를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매우 보수적이지만 공직자로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흠결이 없어 중요 기관장을 마냥 공석으로 비워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과 맞물려 최재형 후보자는 감사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나의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p101

 청와대 민정수석실 초대 반부패비서관은 검사 출신의 박형철 변호사였다. 그는 대검찰청 공안2과장, 서울중앙지방 검찰청 공공형사부장을 거쳐 2013년에는 윤석열 당시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이 팀장을 맡았던 국정원 대선 개입 수사팀의 부팀장을 맡았다. 이 때문에 박근혜 정부에 의해 좌천되어 부산고등검찰청 검사로 근무하다가 2016년에 검찰 조직을 떠나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이력 때문에 일찌감치 반부패비서관으로 천거되었던 것 같다.

 내가 후일 조국 민정수석에게 박형철 비서관이 임명된 경위를 물었더니 조국 수석은 "글쎄요, 저보다 하루 늦게 임명되긴 했지만, 제가 민정수석에 취임했을 때 이미 반부패비서관으로 내정되어 있더군요."라고 답했다. 박형철 비서관은 나중에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 '울산 하명 수사' 사건, 특감반원 김태우 사건 등 윤석열 검찰이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를 겨냥한 사건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박형철 비서관은 초대 특감반장으로 공안검사 출신인 이인걸 변호사를 추천했다. 청와대 내에서 공안검사 출신을 임명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었다. 특히 민정수석실 내부 반발도 심했다. 박형철 비서관은 "비선관이 선임행정관 하나도 추천 못 합니까?"라며 조국 수석에게 항변했다. 조국 수석은 결국 박형철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공안 검사 출신을 특검반장에 임명함으로써 특감반은 박형철 비서관의 완벽한 통제권 안에 들어갔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뒤에 언급할 특감반 사태를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국 수석은 검찰 출신인 그가 청와대에 들어와서 행여 고립될까 봐 염려해 그를 많이 배려하라고 나에게도 여러 차례 당부했다. 그러나 박형철 비서관과 나는 늘 부딪혔다. 내가 보기에 그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 본격화되자 드러내놓고 검찰의 입장을 옹호했다. 나는 2019년 8월 이른바 '조국 사태' 당시에 그가 윤석열을 위해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사태 초기 청와대는 중요한 국면마다 박형철을 통해 전해 들은 검찰의 입장에 기울어 오판을 거듭했다. 내 생각에, 박형철은 결국 검사였고 윤석열의 사람이었다.

 

 박형철 비서관은 같이 일해보니 스마트한 사람이었다. 업무능력도 좋았고, 운동도 잘했다. 처세에도 능했던 그는 검사직을 떠났음에도 검찰의 이익이 침해될 우려가 있을 때에는 늘 검찰 입장을 대변했다. 조국 수석의 배려를 이용하여 늘 교묘하게 검찰의 이익을 청와대 내부에서 관철하려고 애썼다. 그는 퇴근길에 윤석열 중앙지검장이 살고 있는 아크로비스타로 가서 함께 술을 마셨다고 자랑하고는 했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나중에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고 난 다음 그 얘기를 떠올리고는 등골이 서늘했다.

 그런 박형철 비서관에게 수사권 조정이나 검찰 과거사 문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검찰의 수사 역량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에 비해 경찰이 수사를 얼마나 못하는지 등을 틈나는 대로 민정수석실 사람들에게 설파했다. 박형철은 내가 청와대에서 나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민정수석실에서 일했다. 조국 수사 국면에서 그는 "조국이 사모펀드의 주인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고 했으며 "검찰이 아무 근거 없이 그랬을 리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기를 전해 듣고 쓴웃음이 났다. 조국이 민정수석을 그만둔 것이 2019년 7월이었으니, 박형철 비서관이 조국 수석과 함께 일한 기간은 만 2년이 넘는다. 그동안 박형철은 도대체 조국의 어떤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내가 지켜본 조국 수석은 결코 공적 영역에 사적인 이해를 끌어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제 수사 결과도 조국 수석이나 정경심 교수 모두 사모펀드의 주인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 출신인 박형철 비서관이 검찰 입장이나 이해에 공감하는 것까지는 불가피했다고 본다. 그렇더라도 조국이 민정수석의 자리에서 사모펀드를 운영했다는 누명에 대해 단호하게 "그럴 사람이 아니다. 신중해라. 증거를 잘 살펴봐라."라고 말하지는 못할망정 "검찰이 아무 근거 없이 그랬을 리 없다"고 하다니.

 박형철 자신도 검찰에 의해 울산 하명 사건과 유재수 사건으로 두 건이나 기소당했다. 이 두 사건은 이른바 '조국 사모펀드'설을 입증하지 못한 윤석열 검찰이 조국을 옭아매려고 캐비닛을 뒤져 만든 사건들이다. 당시 박형철 비서관은 검찰이 의도하는 대로 진술했다고 들었다. 그러고도 자신 또한 기소를 면하지 못했다.

 엘리트 검사로 살아온 박형철은 자신이 보피했던 민정수석의 범죄를 캐기 위한 검찰 수사에 피조사자로 출석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검사 앞에 앉아 추궁을 당하고, 일일이 변명할 때 어떤 심정이 들었을까. 조사에 적극 협조했는데도 기소되어 피고인이 된 심정은  또 어땠을까. 어쩌면 그 또한 회한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윤석열 검찰의 조국 수사는 옳은 일이었는가? 윤석열 검찰의 당신에 대한 수사는 올바른 일이었는가?

 

p139

 나는 2019년 1월에 청와대 근무를 마치고 그해 3월부터 민간기업의 상임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재무구조가 부실한 기업에 대한 채무 재조정을 비롯해 신규 자금 지원을 통한 기업 정상화, 비핵심 자산 매각 등 사업 재편, 핵심 자산 매각 등을 통한 한계기업 구조조정을 전담하는 기업이었다.

 2019년 5월 어느 날, 정책실과 협의할 일이 있어서 청와대에 갔다가 조국 민정수석에게 인사차 집무실에 들렀다. 조국 수석이 반갑게 맞아주더니 "저녁에 식사 약속 있나요?"라고 물었다. 웃으면서 대답했다. "수석님이 물으시니, 있던 약속도 없어야죠."

 단둘이 마주 앉아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조 수석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대통령께서 거듭 법무부 장관직을 권하시네요. 요즘 그 문제로 고민 중입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조 수석은 이미 오래전부터 문재인 대통령과 '검찰개혁'에 대해 의기투합한 사이였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중요한 국정과제인 권력기관 개혁을 도맡아서 청사진을 그린 민정수석비서관이다. 대통령이 그가 이 일을 끝까지 마무리해주기 바란다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내가 물었다. "수석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조 수석은 "나야 학교로 돌아가고 싶죠." 그의 대답도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는 결코 권세를 탐하지 않는 천상 학자였다. 문재인 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맡았던 것도 일종의 '공익 근무'였다. 그런데 바로 그 '공익에 대한 책임감'이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 같다. 문재인 정부의 권력기관 개혁에 깊이 관여해 온 처지인데 일을 하다 말고 혼자 마음 편하게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다른 분들과도 상의하셨을 텐데, 뭐라고들 하던가요?"
 "노영민 실장을 비롯해 몇 분과 상의했는데, 다들 '도망칠 생각하지 말고 문재인 정부와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더군요. 장관을 맡기 싫으면 내년 총선에 부산 출마라도 해야 한다네요."
 "죄송하지만, 저도 같은 말씀밖에 못 드리겠네요. 학자로 살고 싶은 수석님의 마음과 무관하게 수석님은 이미 문재인 정부의 개혁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셨습니다. 함께 책임을 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법무부 장관직을 맡으시는 것보다는 총선 출마가 나을 것 같습니다. 지금 방배동에 살고 계시니 서초갑에 출마하시면 좋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강남/서초는 자유한국당의 텃밭인데, 수석님이라면 해볼 만합니다. 더불어민주당의 불모지에 출마하셔서 내년 총선의 '선봉장' 역할을 하시면 문재인 정부에 큰 기여를 하시는 셈이죠. 출마하신다면 선거 준비는 제가 다 하겠습니다."

 10여 년 전 <검찰개혁을 말하다>라는 토크 콘서트에서 당시 교수였던 조국 본인이 "검찰개혁을 시도하는 법무부 장관은 검찰로부터 거센 저항과 보복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온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국 수석은 장관직 수락은 그런 위험을 감수한 결단이어야 했다. 그 와중에 벌어질 살벌한 권력투쟁을 조국 수석 같은 '선비'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나는 총선 출마를 권했다.

 검찰은 자기 조직의 기득권을 지킬 의사나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조직의 수장인 검찰총장도 하극상으로 몰아내는 집단이다. 2012년 11월 당시 한상대 검찰총장은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최태원 SK 회장을 봐주려다가 검찰 안팎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한 총장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대검 중수부 폐지'를 제기했다가 검찰 내부의 조직적 반발을 초래해 임기가 9개월이나 남은 상태에서 후배 검사들에 의해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맹활약했던 자가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이었던 윤석열이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인의 앞날에 방해가 되는 자는, 검찰 권력에 방해되는 자는 누구든 봐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검찰 선배도 아닌 학자 출신의 법무부 장관에게 검찰이 더욱 거세게 저항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조 수석이 대답했다. "다른 분들도 대부분 총선 출마를 권하시더군요. 그런데 저는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요. 임명직 공무원이 되면 휴직을 하는 거라서 임기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데, 총선에 출마해서 선출직 공무원이 되면 학교에 사표를 내야 합니다. 나로서는 학자로서의 정체성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출마는 하기 싫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더 이상 출마를 권할 수 없었다. 당시 상황으로는 출마를 안 하는 유일한 방법이 입각入閣하는 것이었다. 당/청 모두 조국 수석이 전국 단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p176

 2013년 10월 19일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서울고검 및 서울중앙지검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당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소속이었던 정갑윤 의원이 증인으로 출석한 윤석열 당시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을 불러냈다. 윤석열 지청장은 당시 채동욱 검찰총장의 지시로 '국정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지휘하다가 "수사에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해 이른바 '항명 파동'에 휩싸여 있었다.

 "증인은 혹시 조직을 사랑합니까?"
 "예, 대단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까? 혹시 사람에 충성하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오늘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날의 어록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로 검사 윤석열은 '의로운 강골 검사의 표상'이 되었다. '국민 사기극'의 시작이었다. 이후 2016년 11월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국정농단 특검)의 수사팀장을 맡게 되면서 윤석열 검사는 일약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19일 윤석열 대전고검 검사를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탁해 임명했다. 조국 수석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윤석열은 정권 출범 초기부터 이미 서울중앙지검장에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 민정수석실 진용은 채 짜여 있지 않아 충분한 검증을 하지 못했다. 민정수석실에는 조국 민정수석 외에 극소수만 근무하는 상황이었다. 대통령선거 이후 즉시 임기를 시작한 촛불 정부의 운명이었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검찰 돈봉투 회식' 사건이 터지면서 공석인 검찰총장 인선을 비롯해 검찰 인사를 서둘러야 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윤석열의 중앙지검장 임명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당시 민정수석실에는 장관 내정자들에 대한 검증 수요가 넘쳐 이미 국민 영웅이 된 윤석열을 제대로 검증할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후 윤석열은 적폐 청산 수사를 주도하며 검찰 특수부 패밀리의 수장이 되어갔다. 만약 문재인 정부도 다른 정부와 같이 정상적인 인수위 과정을 거쳐 출범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두고두고 아쉬운 점은 서초동에서 윤석열 대망설이 나오고 있었으나 윤석열은 그럴 그릇도 못 되거니와 특수부 측근 몇 사람이 꿈꾸는 허망한 지라시일 거라고 간과하고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것이 윤석열 검찰 쿠데타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년 후 윤석열이 검찰총장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뉴스타파가 그의 변호사법 위반 혐의를 폭로했지만, 귀담아듣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만큼 다들 '의로운 검사'에 목말라 있었다. 온 국민이 속았고, 대통령도 속았다.

 

 그러나 윤석열의 본색이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19년 7월 25일 검찰총장으로 취임한 그는 한 달 후인 8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다. 자신의 상급자인 박상기 법무부 장관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기습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이 대통령의 인사권을 부정하고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사실 윤석열의 검찰총장 발탁 과정에서 그의 권력욕과 포악한 본성, 각종 비리 의혹 등을 알고 우려했던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법조계에서 오랫동안 그를 봐왔던 이들은 그의 검찰총장 임명에 반대 의견을 제출했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공직기강비서관으로 근무했던 최강욱 비서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공직 후보자에 대한 인사 검증을 담당했던 최 비서관은 윤석열이 부적격자라는 보고서를 두 번이나 제출했었다.

 사실 조국 민정수석도 같은 의견이었다. 일각에서는 조국 수석이 윤석열을 천거하지 않았느냐고 오해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조국 수석은 내심 당시 김오수 법무부차관과 봉웅 대검찰청 차장을 검찰총장 후보로 꼽고 있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결국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임명했다. 오늘날 이를 두고 대통령을 비난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윤석열에 의해 조국 일가가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나도 솔직히 대통령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가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당시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내 생각엔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발탁하게 된 데에는 네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윤석열의 '돌파력'이 검찰개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수십 년 동안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는 경우 집단으로 저항하는 검찰을 내부에서부터 제압하려면 윤석열 같은 인물을 검찰 조직의 리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게다가 당시에 윤석열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라는 어록과 적폐 청산 수사등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며 '국민 검사'로 칭송받고 있었다.

 둘째, 검찰개혁에 대한 윤석열의 적극적인 태도였다. 2019년 당시 검찰총장천위원회가 추천한 후보는 윤석열(서울중앙지검장), 김오수, 봉욱, 이금로(수원고검 검사장) 등 4명이었다. 이 중 윤석열이 검찰개혁에 대해 가장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조국 수석은 각 후보자 면담에서 윤석열 후보자만 수사/기소 분리에 적극 찬성이었고, 다른 후보자들은 소극적이었다고 했다. 최강욱 비서관에 따르면, 윤석열은 검/경 수사권 조정을 넘어 '수사와 기소의 분리'에도 동의했으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당연히 신설되고 권한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얼마 안 가서 드러났듯이, 검찰총장이 되기 위해 본심과 전혀 다른 새빨간 거짓말로 대통령을 속인 것이다.

 셋째, 대통령 주변에 이미 윤석열과 친교를 맺고 그를 적극적으로 천거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이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미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인물들이어서 여기서는 굳이 실명을 언급하지 않겠다(좀 언급해 주지 아쉽네). 이들도 지금은 윤석열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조국 수석이 좀 더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의중을 읽은 조 수석은 그럴 수 없었다. 조국 수석은 김오수 차관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임자인 문무일 검찰총장이 광주 출신으로 관례상 다시 호남 출신인 김오수 차관을 검찰총장에 임명하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컸다. 후보군 중에 강력하게 천거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도 조국 수석이 반대하기 힘든 이유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직도 지역감정으로 인한 정무적 고려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 안타깝다.

 권력의 실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윤석열과 술자리를 가진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중 일부는 윤석열에게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서야 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평소 이들은 민주당에 대선 후보가 많아져야 정권 재창출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윤석열에게 치열한 경쟁을 거쳐 대선 후보가 된다면 적폐 청산 수사로 국민에게 인기가 많으니 당신도 못 할 이유가 없다고 부추긴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윤석열의 대권에 대한 꿈은 어쩌면 야당이 아닌 '민주 진영'에서 심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윤석열이 대놓고 그런 뜻을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안희정, 박원순 등 유력 대선 후보들의 문제가 잇따라 불거지자 대권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은 방해물은 '조국'이 유일했다. 그래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 청문회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조국을 사냥했던 것이다.

 2019년 12월 6일 자 <경향신문>에 <윤석열 "충심 그대로...정부 성공 위해 악역">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https://m.khan.co.kr/national/court-law/article/201912060600025#c2b

 

[단독]윤석열 “충심 그대로…정부 성공 위해 악역”

윤석열 검찰총장(사진)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충심에는 변화가 없다”면서 “이 정부의 성공을 위해 내가 악역을 맡은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패스트트랙(신속...

m.khan.co.kr

 유명한 친검親檢 기자 유희곤이 쓴 '단독' 기사였다. 이 기사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충심에는 변화가 없다. 이 정부의 성공을 위해 내가 악역을 맡은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로 시작한다. 요컨대 윤석열 검찰총장이 딴마음을 먹고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욕먹을 각오를 하고 조국에 대한 수사와 '울산 사건'등의 수사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황당무계한 '윤비어천가'였다. 이미 윤석열은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며 청와대에 칼끝을 겨누고 공공연하게 반란을 도모하고 있었다. 윤석열 일당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조국 전 장관은 2021년 3월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위 기사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렸다.

 당시 이러한 윤 총장의 정치적 언동을 접하면서 옛말이 떠올랐다. '구밀복검' 당시 윤 총장은 대통령을 겨누는 '울산 사건'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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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7

 종편 방송인 채널A는 9월 21일 <"정경심 처음 봤다"던 병원장은 서울대 동기>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정경심 교수가 입원한 병원의 원장이 서울대 의과대 81학번인데, 정 교수도 서울대 영문과 81학번이다"라면서 "하지만 이 병원장은 '정 교수를 이번에 처음 봤다. 다른 환자들과 똑같은 입/퇴원과 진료 절차를 거쳤다'고 설명했다"라는 내용이었다. 채널A는 한 학년에 수천 명씩 다니는 종합대학에서 각각 의과대와 영문과를 다닌 두 사람이 서로 몰랐다는 사실이 정말 기삿거리라고 생각했을까.

https://voda.donga.com/view/3/all/39/1853586/1

 

[단독]“정경심 처음 봤다”던 병원장은 서울대 동기였다

별별뉴스 20190921

voda.donga.com

 

 이런 언론의 취재 경쟁으로 일부 병원에서는 정경심 교수의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아군과 적군에 상관없이 치료해야 할 의료인들이 언론 보도가 집중되자 다른 환자의 치료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한 것이다. 조국 장관은 정경심 교수가 치료받을 병원을 찾기 위해 애썼다.

 조국 장관의 동생은 넘어져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는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료 소견을 가지고 있었고 동생은 수술을 위해 뒷머리까지 삭발했다. 하지만 담당 의사는 의사 출신 검사를 만난 후 수술이 필요 없다고 입장을 바꿨다. 영화 <그대가 조국>에 출연한 동생의 지인은 "찾아가는 병원마다 기자들이 쫓아와서 의료진이 부담스럽다고 환자로 받아주지 않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https://www.ytn.co.kr/_ln/0103_201910180431596961

 

조국 동생 "수술 필요 소견서, 검찰 온 뒤 달라져"

[앵커]조국 전 장관의 동생, 조 씨는 YTN 취재진을 만나 ...

www.ytn.co.kr

 

p189

 윤석열 검찰은 2019년 9월 6일 조국 후보자 인사청문회 진행 도중에 전격적으로 배우자 정경심 교수를 기소했다. 조민에게 발그된 봉사 활동 표창장을 정 교수가 위대했다는 혐의였다. 동양대 총장 최성해의 "표창장을 발급해준 적 없다"는 일방적인 주장만을 근거로 피의자 소환 조사도 압수수색도 없이 기소를 감행한 것이다. '검찰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장관의 임명을 막으려는 폭거'라는 비판이 일었다. 조국 장관 관련 온갖 의혹들을 반신반의하던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억지 기소로 궁지에 몰린 검찰을 구원해준 것은 다음 날인 9월 7일 자 <조국 아내 연구실 PC에 '총장 직인 파일' 발견>이라는 제목의 SBS 단독 보도였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428668

 

[단독] "조국 아내 연구실 PC에 '총장 직인 파일' 발견"

지금부터는 조국 후보자 관련 소식 이어갑니다. 어젯밤에 청문회가 끝나갈 무렵에 검찰이 후보자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를 기소를 했습니다. 딸의 총장 표창장을 위조한 혐의입니다.

news.sbs.co.kr

 "검찰이 이 PC를 분석하다가 동양대 총장의 직인이 파일 형태로 PC에 저장돼 있는 것을 발견한 것으로 SBS 취재 결과 확인됐습니다. 검찰은 총장의 직인 파일이 정 교수의 연구용 PC에 담겨 있는 이유가 석연치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딸 조 씨에게 발행된 총장 표창장에 찍힌 직인과 이 직인 파일이 같은 건지 수사하고 있습니다."

 정 교수가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검찰과 최성해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이 보도가 검찰에 대한 비판 여론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그런데 이 보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였다. 총장 직인 파일이 발견된 것은 '연구실 PC'가 아니고 '강사 휴게실 PC'였다. 게다가 이 강사 휴게실 PC는 SBS 보도 3일이나 지난 9월 10일 검찰이 동양대에서 임의 제출받은 것이다. 그 후에도 일주일 동안의 디지털포렌식을 거쳐 9월 17일에야 총장 직인 파일이 발견되었다.

 즉 "정경심 교수 연구실 PC에서 '총장 직인 파일'이 발견됐다"던 SBS의 보도는 파일이 발견된 PC가 틀렸을 뿐만 아니라 발견되기 10일 전의 '예언 보도'였던 것이다. SBS가 '타임머신'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media/950541.html

 

방심위, ‘정경심 PC서 총장 직인 발견’ SBS 보도 중징계 확정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업무용 컴퓨터에 동양대 총장의 직인 파일이 저장되어 있었다’고 보도한 <에스비에스>(SBS)에 대해 법정

www.hani.co.kr

 어쨋든 SBS의 예언 보도로 인해 정경심 교수의 '표창장 위조'를 사실로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런 여론이 정 교수의 재판 과정에서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SBS는 아직도 이 '예언 보도'에 대해 해명도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p205

 2023년 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부모님의 묘가 훼손되는 수모를 당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09211

 

이재명 부모 산소 훼손당해... 사방에 구멍나고 돌 꽂혀

돌 발견한 지관 "무속테러" 주장... 이 대표, 페북에 사진 공개 "무슨 의미인가"

www.ohmynews.com

(나중에 이 행위는 이재명 대표의 문중에서 기 불어넣기라는 식의 물타기 기사가 나왔는데, 말도 안되는 헛소리다. 문중에서 진짜 그런 뜻으로 이런 행위를 했다면 적어도 자식인 이재명 본인에게 미리 알리고 의사를 물었어야 한다. 자식도 모르게 이런 행위를 했다는게 말이 되는가?)

 당시 나는 비슷한 수모를 겪은 조국 수석이 떠올라 더 참담했다. 2022년 조 수석 자택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던 중 수사 과정에서 가장 화났을 때가 언제인지 물은 적이 있었다. 조 수석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다름 아닌 김진태 의원이 조국 수석 부친의 묘지석 사진을 공개했던 일이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20/2019082002253.html

 

野 "2013년 사망한 조국 부친 묘비에 2009년 이혼한 며느리 이름"

野 2013년 사망한 조국 부친 묘비에 2009년 이혼한 며느리 이름

www.chosun.com

 당시 공개된 사진을 보면 묘를 밟지 않고는 찍을 수 없는 구도로 촬영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찍으려면 아버님 묘에 올라서지 않고는 불가능하지요?" 조국 수석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화가 사그라들지 않은 눈빛이었다. 조 수석은 그 당시를 떠올리며 격분했었다고 말했다. 돌아가신 아버님께 불효를 저질렀다고 괴로워했다.

 부모의 묘를 훼손하는 것은 남은 가족에게 대놓고 수모와 치욕을 주는 행위나 다름없다. 조 수석과 이재명 대표에게 일어난 일 모두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넘어선 것이다.

 저자는 30대에 관상동맥이 막혀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건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개인이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몸으로 경험한 채소과일식의 놀라운 효과를 공유하려는 차원에서 집필한 책이다.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이 저자의 말처럼 따라하면 건강이 나빠지진 않을 것 같긴하다.

 저자의 최근작인 <완전배출>은  어딘가 모자란 듯한 내용인데 이 책은 그것보단 좀 충실하긴 한데 그래도 역시 어딘가 좀 모자란 느낌이 들긴 한다. 이론적인 책이라기보다는 개인의 경험을 통한 믿음 같은 것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관통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책의 내용을 따라해보고 나서 개인적으로 효과를 본 사람들은 이 저자를 믿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참고 정도만 하고 넘어갈 것 같긴 하다.

한약사(이 책 보고 처음 알았다. 한의사, 한약사가 따로 있다는 것을)인 조승우라는 분이 쓴 디톡스에 관한 내용.

채소,과일섭취를 통한 디톡스로 건강을 되찾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

1년 전부터 유튜브를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꽤 지명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디톡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 및 고혈압,당뇨와 같은 성인병을 가진 사람들이 참고할 만한 내용.\

이 분의 핵심적인 주장은 음식물을 소화시켜서 완전배출시키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채식과 과일을 위주로 식단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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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3

 수면제 얘기가 나왔으니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10여 년 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수면제의 진실에 관한 주제로 방송을 했었습니다. '연예인들의 끝나지 않은 사망 사건'을 다루었는데요. 그 배경에 수면제(졸피뎀Zolpidem)가 있었음을 만천하에 고발했습니다. 탤런트 최진실,최진영 남매와 수 많은 연예인들의 밝혀지지 않은 자살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최진실씨의 매니저와 지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약이 아니었으면 절대 그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거에요. 내가 먹어보지 않았으니까 부작용을 몰랐다니까요. 알았다면 무조건 막았겠죠."

 방송 제작진은 폭식, 기억상실, 자살 시도 등 이해할 수 없었던 죽음 뒤에 수면제가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약물을 누구나 쉽게 처방받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건당국은 이처럼 비극적인 부작용을 초래하는 이 약물을 도대체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 걸까요?

 이런 수면제의 부작용이 계속되자 언제부터인가 수면제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슬그머니 '수면유도제'라는 부드러운 이름이 등장했습ㄴ다. 수면제의 부작용을 염려한 제약 회사의 발 빠른 대처인데요 내용은 그대로 두고 이름만 바꾼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장에서 만든 '악마의 약' 수면유도제 말고 천연 수면유도제인 상추를 드시기 바랍니다.

 또한 철분과 엽산 등이 풍부해서 임산부에 특히 좋습니다. 시골 장터에 가면 옛날에 약장수들이 '남자는 정력에 좋고 여자는 피부에 좋고'라며 알약을 팔곤 했는데요, 알약 말고 천연 강장제 상추를 드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뭐 외국에서 들여온 소고기가 흔하지만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돈 좀 있어야 소고기(한우)를 먹었는데요, 제 친구 하는 말이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라며 소금장에 소고기만 계속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채소는 일절 먹지 않고 소고기만 먹는 것을 자랑스럽게 뽐냈는데요, 이거 정말 '돈 자랑'은 될지언정 바보 같은 짓입니다. 고기 먹을 때 상추와 깻잎과 마늘을 싸서 먹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상추와 깻잎 마늘, 이 3종 세트가 소화가 어려운 고기를 분해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고깃집을 가시더라도 '샐러드 셀프바'가 있는 집에 가실 것을 추천합니다. 상추와 각종 채소를 가져다 먹을 수 있으니 설사 고기를 드시더라도 상추에 파무침과 마늘과 양파를 가득 넣어 쌈으로 드시면 고기 1인분의 반도 먹기 전에 배가 불러옵니다. 이것은 제 경험입데요, 채소로 배를 채우면 다음 날 아침 배변이 너무 시원합니다. 어제 먹은 파무침과 양파 냄새가 밖으로 배출되는데요, 몸속에서 소화가 완성되어 완전히 배출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몸무게는 1kg이 빠져 있습니다. '굶어야 빠진다'가 아니라 '몸 청소를 해야 빠진다'가 정답입니다.

(이 책 완전배출의 핵심적인 내용이 배출을 잘해야 살이 빠지고 건강해진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과일과 채식으로 식단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p208

 저는 개인적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연을 사랑한답시고 산이나 공원에 '해충 포집기'를 설치하는데요, 벌레를 그렇게 잡아 가두면 새들은 무엇을 먹고산다는 말입니까? 새들은 나무의 씨앗을 먹고 배설해서 먼 곳까지 식물의 종자를 퍼트리는 역할도 합니다. 새들은 또한 대형동물인 코끼리나 코뿔소의 대변에서 아직 소화되지 못한 씨앗(과육이 남아 있는)을 먹고 그 씨앗을 널리 퍼트림으로써 자연의 순환을 완성합니다.

<1호기 속 수상한 민간인>이라는 기사를 통해 알려지고, <바이든 날리면> 사태의 시발점이며, 대통령 도어스테핑 질의/응답 중에 날카로운 질문으로 윤석열의 심기를 건드려서 파장을 일으켰던 MBC의 이기주 기사의 에세이.

이 책의 에필로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얼마 전 한 강연에 초청받아 갔다가 "기자가 다 그렇지는 않을 텐데 지금처럼 피곤하게 살면 결국 고독하지 않겠냐"라는 기습 질문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말을 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최고 권력에 대한 취재부터 '바이든 날리면' 사태, 도어스테핑 충돌 같은 연쇄 폭탄이 터질 때마다 나는 고독했다. 후폭풍을 이겨내는 것도 나 혼자 해야 할 몫이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제대로 된 어른, 제대로 된 사회인이 되기 위해선 고독해지는 것을 피할 길은 없어보인다. 그리고 그 고독한 길을 피하지 않아야만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양자컴퓨터 자체가 아닌 응용분야에 대한 범용 해설서 같은 책.

양자컴퓨터가 과학 및 기술적으로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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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5

 자연의 지능은 하향식으로 창조되지 않는다.

 브룩스는 갓 태어난 새끼 동물은 곧바로 걸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계속 넘어지면서 어렵게 배워나가는 것이다. 자연의 키워드는 바로 '시행착오'였다.

 이것은 음악 교사가 재능 있는 학생에게 해주는 조언과 비슷하다. 카네기홀에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창조물은 시행착오를 통해 세상을 파악해나가는 일종의 학습기계로서, 실수를 저지를수록 성공에 점점 가까워진다. 

 이것이 바로 '상향식 접근법'으로, 일단 무턱대고 부딪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이 어른을 흉내내면서 세상을 배워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는 자는 동안 끊임없이 옹알이를 한다. 아이가 자는 동안 소리를 녹음했다가 나중에 들오보면 알 수 있다. 깨어 있을 때 들은 소리를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p248

 인공지능이 정체기를 겪고 있는 이유는 컴퓨터의 성능이 그 뒤를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뿐만 아니라 학습기계와 패턴인식, 검색엔진, 로봇공학 등도 비슷한 한계에 직면해 있다. 여기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는 양자컴퓨터가 도입되면 정체 상태를 벗어나 비약적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디지털 컴퓨터는 한 번에 1비트씩 계산하는 반면, 양자컴퓨터는 거대한 큐비트 배열을 동시에 계산할 수 있으므로 컴퓨터의 계산 능력이 떨어져서 풀 수 없는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p252

 단백질 분자의 접힘 문제도 이와 동일한 원리로 해결할 수 있다. 즉, 아미노산의 모든 가능한 배열 중 에너지가 가장 낮은 배열을 찾으면 된다. 이것은 등산 중인 사람이 계곡의 가장 낮은 배열을 찾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처음에 등산객은 모든 방향으로 경사진 정도를 확인한 후, 고도가 제일 빠르게 낮아지는 방향을 선택하여 한 걸음 이동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조금 전에 했던 행동을 똑같이 반복하여 또 한 걸음 이동하고... 이런 식으로 내려가다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도 지금 보다 고도가 높아지는 지점'에 도달하면 그곳이 바로 고도가 최저인 지점이다.

 에너지가 가장 낮은 아미노산 배열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는데, 구체적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일단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문제를 단순화시켜야 한다. 분자 내부에서는 전자와 원자핵의 파동함수가 복잡한 상호작용을 교환하고 있는데, 이 모든 요인을 고려해서 디지털 컴퓨터로 계산한다면 다음 섹에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소한 요인들(전자와 원자핵의 상호작용, 전자끼리의 상호작용 등)은 과감하게 무시하는 게 좋다.

 이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으면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차례다. 첫째, 다양한 아미노산을 이어붙여서 커다란 배열을 만든다. 이것은 단백질의 형태를 흉내낸 '장난감 모형'에 해당한다. 특정 원자들이 결합할 때 형성되는 각도는 주최 측이 제공한 기본정보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로부터 단백질의 형태에 대한 초기 근사치를 얻을 수 있다.

 둘째, 선택한 배열에서 전하분포에 의한 에너지 결합이 이동하는 방식을 알고 있으므로(이 정보도 기본으로 제공됨), 이로부터 단백질 분자의 총에너지를 계산한다.

 셋째, 선택한 결합을 조금 비틀거나 회전시켜서 동일한 계산을 수행한 후, 이전의 에너지와 비교하여 작은 쪽을 선택한다. 이것은 등산객이 각 지점에서 모든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어보는 것과 같다.

 넷째, 에너지가 이전보다 커지는 배열을 모두 버리고, 작아지는 배열만 유지한다. 그러면 컴퓨터는 원자가 이렇게 이동해야 분자의 에너지가 작아지는지 시행착오를 통해 학습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아미노산의 배열을 비틀거나 통째로 바꿔서 동일한 과정을 반복한다. 단계마다 에너지가 감소하는 아미노산 배열을 찾아나가다보면, 결국 에너지가 가장 낮은 배열에 도달하게 된다.

 원자의 위치를 계속 바꾸면서 목적지로 접근하려면 엄청난 양의 계산을 수행해야 하는데, 지금의 디지털 컴퓨터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자잘한 요인들을 과감하게 무시한 채 컴퓨터를 가동하여 몇 시간, 또는 며칠 안에 단순화된 버전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처음에는 한마디로 참담함, 그 자체였다. 컴퓨터가 예측한 분자는 X선으로 알아낸 실제 모양과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컴퓨터 학습 프로그램이 정교해짐에 따라 결과도 점차 개선되었다.

 지난 2021년에 '구글과 손을 잡고 알파고를 개발했던 딥마인드가 알파폴드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무려 35만 종에 달하는 단백질의 구조를 해독했다'는 뉴스가 터져나왔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25만 종의 단백질까지 새로 발견했다고 한다. 인간유전체 프로젝트에 나열된 단백질 2만 개의 3차원 구조가 밝혀진 것이다. 뉴스에 발표된 목록에는 쥐와 초파리, 그리고 대장균에서 발견된 단백질도 포함되어 있었다. 딥마인드 창업자는 학계에 알려진 모든 단백질을 포함하여 총 1억 개가 넘는 단백질의 데이터베이스를 곧 발표할 예정이라고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근사적 방법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과가 X선 결정학으로 얻은 결과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슈슈뢰딩거 방정식에서 많은 항을 삭제한 채 계산을 수행했는데 실제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으니, 이들의 근사법은 검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p274

 일반적으로 염색체의 길이는 세포가 분열될 때마다 조금씩 짧아진다. 예를 들어 피부세포는 60번쯤 재생된 후 노화를 겪다가 결국 죽은 세포가 된다. 방금 언급한 숫자 '60'을 '헤이플릭 한계Hayflick limit'라 하는데, 세포가 죽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즉, 세포에는 죽을 때를 알려주는 생체시계가 내장되어 있다.

 

p390

 코펜하겐 해석이나 다세계 해석 말고 또 다른 해석은 없을까? 있다. 주어진 계(고양이)의 파동함수가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붕괴된다는 '결어긋남이론decoherence theory'이 바로 그것이다. 즉, 외부 환경은 이미 결어긋남 상태에 있기 때문에, 고양이의 파동함수가 외부환경과 조금이라도 닿기만 하면 곧바로 붕괴된다는 거이다.

 결어긋남이론을 도입해도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이 문제에 '역설'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이유는 상자의 뚜껑을 열지 않는 한 고양이의 생사 여부를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답(코펜하겐 해석의 결론)은 '뚜껑을 열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첩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어긋남이론에 의하면 고양이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는 상자 속의 공기 원자와 이미 닿았기 때문에 뚜껑을 열기 전에 고양이의 파동함수가 분리되고, 따라서 고양이의 상태도 뚜껑을 열기 전에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

 양자역학의 정설로 통하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고양이의 상태는 상자의 뚜껑을 열어서 관측을 시도할 때에만 분리된다decohered. 그러나 결어긋남이론에 의하면 고양이의 파동함수가 공기 분자와 닿으면서 붕괴되기 때문에, 고양이의 상태는 뚜껑을 열지 않아도 분리된다. 즉, 결어긋남이론에서는 파동을 붕괴시키는 원인이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는 관찰자'에서 '상자 내부의 공기'로 대체되는 셈이다.

 2년간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 비서관을 지냈던 이의 기록. 그 기간 동안 주요한 이벤트에서 연설한 문 대통령의 연설문의 내용들과 그 뒷얘기를 알 수 있다.

 재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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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0

 취임 초기부터 추진한 개헌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회에 제출했지만, 시한 내 처리되지 않았다. 2018년 5월 25일 문 대통령은 안타까움과 송구스러움을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표현했다.

 

 촛불 민심을 헌법에 담기 위한 개헌이 끝내 무산됐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매우 송구스럽고 안타깝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한의 가부可不를 헌법이 정한 기간안에 의결하지 않고 투표 불성립으로 무산시켰습니다. 국회는 헌법을 위합ㄴ했고, 국민은 찬반을 선택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됐습니다. 국회가 개헌한을 따로 발의하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정치인이 개헌을 말하고 약속했지만, 진심으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한 분은 적었습니다. 이번 국회에서 개헌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기대를 내려놓습니다. 언젠가 국민께서 개헌의 동력을 다시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진심이 없는 정치의 모습에 실망하셨을 국민께 다시 한번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https://www.facebook.com/moonbyun1/photos/a.263896370383389/1450487375057610/?type=3

 

문재인 - 촛불 민심을 헌법에 담기 위한 개헌이 끝내 무산됐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

촛불 민심을 헌법에 담기 위한 개헌이 끝내 무산됐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매우 송구스럽고 안타깝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의 가부를 헌법이 정한 기간 안에 의결

www.facebook.com

 

 

정경심 교수가 옥중에서 쓴 글 모음. 시집이라고 봐야 할 듯.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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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6. 오늘 밤

 여보
 오늘 밤은 각자의 슬픔을 
 슬퍼합시다
 내 슬픔이 너무 커서
 당신 슬픔도 너무 클 것을 알기에
 오늘 밤은 나 혼자 슬퍼하겠습니다
 당신도 슬픔에 겨워 어쩔 줄 모를 테니까요

 여보
 우리가 오늘 밤
 큰 슬픔을 슬퍼하며
 홀로이 그 슬픔을 이겨 냈음을
 잊지 맙시다
 당신과 나보다 더 아픈 마음이
 오늘 밤엔 없었음을 기억합시다

 

p78. 결국, 사람이다

 죽음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은
 사람 때문이다
 결코 그 길을 가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그가 버티고 있었고
 나를 그 길로 보내 버릴 수 있었던 아이들이
 집요하게 내 죽음의 멱살을 붙잡고 싸워 주었다
 자신도 버티기 힘든 각자의 무게 위에 서로의 무게까지
 우리는 어깨와 어깨를 맞대어
 무게를 떠안고 분산시켰다
 그리고 이곳에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이 어깨를 
 들이밀고 우리의 어깨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우리를 지탱시킨 것은 우리를 살린 것은
 결국, 사람이다

 

p135.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받은 만큼 주는 것도 아니고
 준 만큼 받는 것도 아니란 걸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많이 준 친구는 더 달라 하고
 내게 받은 적 없는 이는 조건 없이 주려 하는
 이 불가사의에 가끔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반문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얼마나 주었나
 나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얼마나 믿었나
 그리고 이제,
 나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p139. 마음의 대화

 오늘, 당신을 만났습니다
 찬찬히 보니 주름이 많아졌습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그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아이들까지 다 내려놓은 지금
 뭐가 그리 안달복달할 게 있겠습니까
 이 일이 있기 전까진 내 속으로 낳았어도
 그리 단단한 줄 알지 못했습니다
 시련이 성숙시켰을까요
 나는 아이들만 보며 살겠습니다
 당신은 훨훨 자신의 길로 나아가세요

 오늘, 당신을 만났습니다
 자세히 보니 없던 흰머리가 셀 수 없습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우리를 가두었던 그 세월이 그러고도 남습니다
 우리 모두 다 내려놓은 지금
 광야에 헐벗고 선 듯하여 춥고 아픕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진 감히 상상조차 못 한 일

 우리가 이리 잘 버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시련이 서슬 퍼런 칼날로 닥쳤지만
 당신과 아이들이 버티어 주어
 내가 살아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 주세요, 다 와 갑니다
 적어도 이 모든 일의 시작도 끝도
 당신이 잡고 있으니 매듭도 풀어 주세요
 나는 당신 옆을 지키겠습니다

 

p146. 여행

악몽을 꾸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 모인 우리는
각자 비행기표를 끊었으므로
각자의 게이트로 나아갔다
제일 먼저 내가 I-50이라는 게이트를 향해 나갔지
I-50을 보고 표지판대로 길을 따라갔는데
나의 게이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다 보딩 시간이 지났고
비행기를 놓쳤다 낭패한 표정으로
재발권을 위해 발권 데스크로 갔다
발권 데스크가 방금 눈앞에 있었는데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의 세 친구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공항 건물에는 덩그러니
두리번거리면서 나 혼자 남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출구가 없는 공간
나는 밤새도록 출국를 찾아 헤매다 깼다
왜 악몽은 늘 기억이 나는지
나도 알고 싶다
언젠가는 꿈에 멋지게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고 싶다
그리고 깨어나면 꼭 그 꿈을 기억하고 싶다

 

p150. 그대의 배반

그대는 진실을 티끌처럼 버리고
나를 순식간에 웃음거리로 만들며
장막 뒤에서 웃지
그대를 믿는 사람들이
하이에나가 되어 킬킬거릴 때
세상의 공기는 끈적하다
서서히 폐에 스며들어
매캐하게 질식시키는 안개처럼
그대는 진실을 그렇게 버리고
어찌 세상과 마주하는가
그 어떤 변명도 그대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시간이 알고 있는데

 

p157. '그냥' 말고

나는 지금 나의 시련이 그대의 생명일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보다는 내가 내성이 강하니까요

그대는 부디 살아 주세요
'그냥' 말고 건강하게 살아 주세요
지금 나의 시련을 위해서

나는 지금 나의 시련이 견딜 만합니다
내 시련 위에 그대의 생명이 자라고
그 생명 위에 나의 미래가 의지하고 있어서

'그냥' 말고 기꺼이 견딜 만합니다.

 

p163. 침묵

내게 성가신 일이 생겼지만
침묵하기로 한다
내게 오해가 생겼지만
침묵하기로 한다

너와 나는 서로 다른 존재
우리가 무한히 열린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믿지 않는다면
말보다 침묵이 더 큰일을 하기에

내게 화난 일이 있었지만
내 감정에 침묵하라고 한다
내게 슬픈 일이 있었지만
내 가슴에 침묵하라고 한다

결국은 침묵이 이겨 낼 것을 알기에

 

p169. 나는 왜 몰랐을까

나는 왜 평생 문학 공부를 하고도
몰랐을까
약속에 늦은 이가
차 사고로 늦었어요 하면
'핑계일 뿐이야, 차 사고는 개뿔'
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큰 사고는 아니었어?
안 다쳤어?
전화하고 미루지 왜 왔어?"
걱정을 쏟아 냈는지
그게 보통의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는 왜 몰랐을까
사람들은 면피를 위해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그보다 더한 양심도 팔 수 있음을
정말 나는 왜 몰랐을까

 

p183. 아직은 충분하지 않아

아이야 울어도 된다
울지 않고 의연한 네 모습이 더욱 아프구나
세상은 그런 거라고 말하지 않으련다
세상은 그래서는 안 되니까

아이야 힘내 다오
제발 버티어 다오
지금은 그들의 시간이나
반드시 역전의 날이 올 것이다

내 육십 년의 시간이 말해 주니
반드시 너의 억울함을
이 모든 부당함을 밝혀 줄 시간이
올 것이다

그저 기다림의
그저 견딤의
그저 긍정의
마음으로 주저앉지 말거라

아이야
하늘도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리니
눈물을 닦고 당당하게 나아가자
아직 갈 길이 멀지 않니

그래도 너의 가는 길 걸음마다
너를 붙잡아 줄 작은 들꽃 하나
너의 은신처가 될 작은 동굴 하나
너의 추락을 막아 줄 작은 바위 하나

그러니 너는 굽이굽이 길을 돌 때마다
그저 마음만 먹어도 너에게 작은 도움을
내일 사람으로 가득했으니
그러나 나는 아직은 충분치 않아

이 길 다 걸으면 길 끝에 내가 서 있으리니
그곳에서 너의 눈물을 닦아 주고 너를 다시 세우리니
그때까지는 그 어떤 것도 충분치 않아
너에 대한 나의 계획은 아직 갈 길이 멀었으니까

 

p187. 기도2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뿐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

 

저는 아마도 많이 부족했던가 봅니다
제게 지워 주신 십자가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 옆에 예수님이 함께
이 길을 걷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엠마우스까지 가는 길을 동행했던
그분에 기대며 끝까지 가 보겠습니다
이 십자가 끝에서
제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여 주세요

 

p199. 손톱깍이 쓰는 날

오늘은 손톱깍이 쓰는 날
일주일에 한 번이니
늘 옆에 두고 수시로 쓰는
아들과 남편이 여기에 없는 것 또한
다행이고 감사하다
알코올 솜과 함께 지급되어
몇 분간 쓸 수 있는 손톱깍이
내 손톱에는 W023번이 잘 맞는다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아주 작은 쾌적함이
때로는 큰 만족을 주기도 한다
인생처럼.

 

 

p200. 길 없는 길

'길 없는 길'을 걷겠다고 한다
나는 그 길을 오래 생각했다
그대에게 묻지 않았다
물어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대가 그 길을 찾으면
묻지 않아도 알게 될 테니까

그대가 어떤 길을 가도 괜찮다
나는 괜찮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
그대 곁에 있을 것이니
그대는 매인 곳 없이
자유롭기를 저 하늘의 구름처럼
가볍기를
영원하기를

 

p202. 뿌리 깊은 들품

창틀까지 웃자란 풀을 보고
고개를 갸웃합니다
제초기로 싹쓸이한 게 언제였더라?
엊그제 아니었나?
들풀의 생명력이 새삼스럽습니다
아무리 아무리 싹둑 잘려도
여봐라 문제없다 숨 가쁘게 올라옵니다
그 모든 노력을 잘라 내는 칼날이
가차 없을수록
치고 솟아나는 들풀의 의지도 가차 없습니다
'망연자실할 필요 없어요,
뿌리가 깊으면 문제 될 게 없어요"
칼날의 무자비함을 비웃고 있습니다.

 

p216. 땡큐, 끝까지 간다

사람들이 그런다
절망과 분노와 억울함으로
형편없을 줄 알았는데
꽤 괜찮은 듯해 좀 놀랐다고
내가 무심하게 뱉는다

마지막까지 다 빼앗겼는데
이제 지킬 것이 있어야
애걸복걸이라도 하지 않겠냐고
이제 남은 게 없는데 이제 미련도 없이
홀가분한데 뭐 울 일이 있겠느냐고

땡큐, 이렇게 완벽하게 정리해 줬으니
땡큐, 돌아볼 것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
땡큐,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게 해 줬으니
땡큐, 끝까지 갈 수 있게 해 줬으니
땡큐, 땡큐, 땡큐

내 몸 하나만 가볍게 맨손으로
앞만 보고 끝까지 간다
그래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나
땡큐, 땡큐, 때땡큐
끝까지 간다

 

p222. 진통제

통증이 날카로우면
진통제가 혈관을 퍼져 나가는 감각 하나하나가 느껴진다
약한 진통제는 전신에 퍼지는 데 삼십 분 걸리고
그보다 강한 놈은 십 분이면 제 할 일을 한다
내 몸은 강한 녀석을 원하지만
내 마음은 인내하라고 한다
너무 아플 때는 인내가 소용없어지고 결국
강한 놈을 불러야 하지만
마음은 늘 약한 놈 먼저 불러
삼십 분을 견딘 후 강한 놈에 의지한다
한두 번 한 일이 아닌데도
마음에는 관성이 있나 보다
어쩌지 못하는 관성이.

 

이 책일 읽은 소감은 과연 현상과 그 해석은 실무전문가가 제일 낫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부동산 문제는 실무전문가로서는 해결할 수 있는 단계가 지나갔다.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대한민국의 부동산 문제도 많은 복마전이 도사리고 있고 이미 기형화되어 있는 부분이 많다. 즉 병들어 있는 것이다. 병든 부분을 낫게 하려면 몸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즉 대한민국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돈이 있는 사람이나 돈이 없는 사람이나(또는 중간에 있는 사람), 즉 모든 국민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마치 국민연금 문제처럼).

 지도자(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대통령을 의미하겠지)는 제대로 된 전문가 그룹과의 심도 있는 토의를 통해서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한민국의 부동산 정책이 추구할 방향을 일단 정하고 이를 국민들과 컨센서를 맞춰야 한다. 그리고 이 컨센서스로 도출된 방향과 그 정책들은 효과가 나타날때까지 10년이고 20년이고 꾸준히 실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간에 당연히 어디가 아플 것이고 국민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칠 수 있지만 그걸 넘겨야 한다. 그럴 의지와 실행력을 갖춘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래서 매우 힘든 일이다. 어찌 보면 국민연금 개혁은 부동산 문제에 비하면 난이도가 절반도 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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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3

 

 문재인 정부가 보유세를 제대로 올리지 않아서 집값이 폭등했다는 사람들조차, 고가/다주택자만 올리자는 포퓰리즘에 포획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유세를 강화하자는 것은 "고가/다주택자만 보유세를 올리자"는 것과 사실상 동의어다. 이렇게 해서는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이 '징벌적'이라는 반발을 달랠 방법이 없다. 또 어디까지가 고가/다주택인가? 서울 아파트의 대부분이 종부세에 해당하는 상황이 되자 서둘러 세금을 낮추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비싸고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비례적으로 이를 많이 내는 것과 누진적으로 많이 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여러 주택을 전국적으로 합산해서 훨씬 더 많이 내게 하는 것은 한국만 시행하고 있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여러 채를 가지고 임대하는 경우 과다한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불가피하다. 이것이 임대사업자 등록시 임대료 인상을 억제하는 대신 종부세를 면제해준 이유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다주택자에게 세금 혜택을 주었다는 비난이 이어졌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사실 보유세를 높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시가격을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체 부동산 소유자의 부담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정치적으로 이것을 감당하지 못한 문재인 정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금방 다시 깍아주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해서 전체 주택의 95%에 대한 재산세율을 낮췄다. 물론 이재명 후보가 주장했던 모든 토지를 과세 대상으로 하는 국토보유세는 이를 모두 올리되 저가주택 소유자에게 대해서는 되돌려준다는 것이다. 조삼모사이며 결과는 같다. 결코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명문에 집착한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목표에 끌려다니지 말아야 한다.

 

 내가 부동산 정책에 관여할 때까지 바로 이 대목에서 이른바 개혁주의자들과 입장이 달랐다. "보유세는 집값을 잡는 세금이 아니다"는 김동연 부총리의 발언(국회 답변, 2018년 8월 27일)은 내 생각과 같았다. 보유세 실효세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미국이 역설적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집값이 많이 오른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나라는 유동성 때무닝고, 우리는 세금이 낮아서 그런가?

 

 따라서 보유세에 대한 냉정한 이해와 현실적 목표가 필요하다. 우리 보유세는 역사적으로 '고가/다주택'을 차등적으로 높게 과세하는 체제가 굳어져 있다. 대다수 국민들의 보유세 부담을 높이려는 시도는 사실상 노무현 대통령이 유일했지만,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세금은 역사성과 경로의존성이 있기 때문이다. 개혁, 반개혁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국민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취득세 비중이 왜 높을까? 부동산 구입 시 내는 세금이라 조세 저항이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득세를 선납 보유세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조세 저항이 큰 보유세의 몇 해분을 일시에 받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결국 보유세는 아파트, 단독주택, 상가, 토지 등 부동산의 종류와 소재 지역에 따른 과세 형평성을 단계별로 높여가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부담을 높일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화가 나 있다고 고가/다주택만 올리려 해보지만, 그 고가의 기준 설정 때문에 다시 갈팡질팡했던 것이 2019년 말부터 2021년 중반까지 정부/여당의 모습이었다. 실제 종부세를 강화했더니 서울 아파트의 반 이상이 그 대상이 되었고, 이에 놀란 정부와 민주당은 서둘러 세금을 다시 낮추려 허둥지둥했다. 특히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는 이전에 종부세를 올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p146. 국토보유세와 기본소득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국토보유세와 기본소득 구상은 이렇다. "모든 토지에 대해 국토보유세를 물려서 실효세율을 1%로 하게 되면 약 50조 원의 재원이 발생하는데, 이를 재원으로 전 국민에게 나눠주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그럼 전체 토지 소유자의 부담이 증가할 것으로 우려하지만, 90%는 기본소득으로 돌려받는 것이 더 많게 된다. 또 실수요자나 업무용의 경우 감면하고, 고령자 등에게는 과세 이연할 수 있다. 사람별로 전국의 소유 토지를 합산해서 누진 과세하므로, 결국 고가/과다 토지 보유자만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고 일반 국민은 더 많은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재명 후보는 2017년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기본소득과 국토보유세 추진을 준비하면서, 심지어 경기도만이라도 시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다양한 우려를 받게 되자 "90%의 국민은 이득이다"는 점을 강조함녀서, 이를 반대하는 것은 악성 언론과 부패 정치 세력에 놀아나는 '바보짓'이라고 항변한다(2021.11.15)

 

 그러나 우려가 계속되자 "국민들이 동의한다면"이란 전제를 달고 한발 물러서게 된다(2021.11.30). 이후 이재명 후보는 공시가격 현실화로 재산세가 크게 늘어나서 서민들의 피해가 예상되므로 공시가격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정부에 요구한다(2021.12.20). 이와 함께 2주택자에 대한 종부세 중과 완화 필요성도 언급하게 된다(2021.12.12). 국토보유세 정신은 온데간데없게 된다. 그러나 지지층의 반발이 우려되자, 며칠 뒤에는 세금이라는 이미지를 반대로 적용해서 토지이익배당금재로 이름을 바꾸어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2021.12.28).

 

 이재명 후보의 국토보유세는 이 책이 강조하고 있는 전형저긴 보유세 포퓰리즘 사례다. 포장을 어떻게 하든, 고가/과다 보유자만 올리자는 것이 그것이다. 실무적으로도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소출은 거의 없는 산지, 녹지에 대해서도 1% 세금을 매기자는 것인기, 또 농지나 공장용지 같은 생산용도 토지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더구나 결정적으로, 선거운동이 본격화되고 보유세 관련 여론이 악화되자 그동안 국토보유세를 강조해오던 정신과는 반대로 가고 말았다. 선거 캠프 내부에서는 당선 이후 추진하면 되지 않느냐고 이를 정당화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보유세 1%'는 이렇게 편법으로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p207

 

 이명박 대통령식 반값 아파트였던 토지 임대부 보금자리주택은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추진에도 불구하고, 서초구 우면동(358가구)과 강남구 자곡동(402가구)에서 단 두 차례 760가구만 공급되었을 뿐이다.

 

 김헌동 사장(현 SH공사 사장, 과거 경실련 본부장으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은 이명박 정부 당시 보금자리주택 반값 아파트 공급 때문에 강남 집값이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이 부동산 정책을 가장 잘했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한다. 궤변이다. 노무현 정부 동안 쌓인 거품, 그동안 누적된 공급 물량이 금융위기 이후 조정받았기 때문에 가격이 내린 것이다.

 

 

(감상) 사실 내가 저 당시(2012년도에서 2013년도) 서초,양재,우면,강남 일대의 부동산에 관심이 있어서 어느 정도 가격 동향을 알고 있다. 일단 내 경험상으로는 저 당시 우면동과 자곡동에 풀려나온 보금자리주택 물량으로 인해서 주변 아파트 시세에는 영향을 미쳤다. 보금자리주택과 비슷한 수준의 20~30평대 아파트의 경우 당시 1억까지 하락한 아파트도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연구결과도 존재한다.

 

https://www.mk.co.kr/news/realestate/8019630

 

보금자리주택, 주변 집값 5∼7% 떨어트렸다 - 매일경제

거래량도 다소 줄어…가격 안정성 측면에선 긍정적

www.mk.co.kr

 

당시 완공되서 입주가 시작된 보금자리주택의 영향으로 강남의 부동산값이 영향을 받자 당시 막 들어선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의 보금자리주택 계획을 백지화시킨다.

 

https://www.nocutnews.co.kr/news/1013431

 

이명박 정부 ''보금자리주택''…4년만에 중단 위기

{IMG:-1}이명박 정부의 주거정책인 ''보금자리주택''사업이 시행 4년만에 전면 재수정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행복주택''사업을 위해선 보금자리주택 사업의 축소 또는 일부

www.nocutnews.co.kr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명박의 보금자리주택이 계획대로 서울과 수도권에서 150만호 건설이 이루어졌으면 부동산 특히 대한민국 부동산 시세를 견인하는 아파트 가격의 거품은 많이 걷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p229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주택의 금융화의 대표적인 현상은 금융을 매개로 한 자가 소유 열풍이다.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자가 소유가 늘어나 2000년대 초 정점에 이르렀는데, 특히 미국, 영국의 경우 10여 년 동안 5%p 이상 증가했다. 이때 자가 소유 확대를 견인한 것이 금융권의 장기주택담보대출, 즉 모기지였다. 그러나 금융 시스템을 매개로 증가한 자가 소유는 2008년 금융위기 전후 한계에 달하면서 자가율은 상당수 국가에서 정체되고 있다. 특히 미국, 영국은 늘어났던 자가율이 과거보다 더 낮아져버렸다. 이 과정에서 소득과 비교해 대출을 무리하게 받은 가구들이 집을 차압당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모기지는 금융산업 성장의 가장 큰 동력이었지만, 이런 대단위 모기지 시대가 '금융의 저주'를 불러온 것이다.

 이처럼 과다한 모기지 시대는 역설적으로 자가 소유의 한계를 가져왔다. 낮은 금리의 모기지가 더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거꾸로 부동산 가격 상승을 초래하면서 집값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청년층과 소수 인종 가구들은 자가 소유율이 현격히 떨어졌다. 자가 소유 열풍이 역설적으로 세대별 격차와 소득 계층별 불평등을 확대한 것이다. 미국, 영국은 물론이고 북유럽 국가들조차 과도한 금융화의 결과로 집값과 임대료가 급등하고, 소득 대비 부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 되면서 주택시장이 불안정하고 취약하게 변해버렸다.

 

p230. 임대로 살 수밖에 없는 세대 VS  임대업자 세대

 대다수 선진국에서 자가 소유의 한계가 드러나는 가운데, 그동안 핵심적인 주택 정책이었던 공공임대주택마저 후퇴하는 중이다. 1990년대부터 대부분의 선진국은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대폭 축소하거나 심지어 기존에 있던 물량까지 줄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임대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세대·계층이 늘어나고 고착화되고 있다. 영국을 예로 들면, 2003년에는 자가율이 70%였던 것이 2015년에는 64%로 줄어들었는데, 같은 기간 35세 이하의 경우는 50.3%에서 28.9%로 자가율이 급감했다. 반면 민간임대에 사는 비율은 27.2%에서 50.4%로 급증했다. <그림 11-1>은 영국, 미국의 세대별 자가거주율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중·고령 세대를 제외하면 자가율이 빠르게 내려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서방 선진국 외에도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10년 정도 통계에서는 이런 추세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떤 세대에서도 자가율이 떨어지는 경향이 뚜렷하지 않다. 40대에서는 눈에 띄게 늘어나기도 했다. 이는 주거실태조사의 통계적 문제 때문일 수도 있는데, 다른 연구에서는 이른바 에코 세대인 30대까지는 과거보다 자가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많다. 다만 소득 계층별로는 중상위층과 하위층 간 자가율 차이는 분명하다. 특히 저소득층 중 노령 가구를 제외할 경우 청년층 자가율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늘어난 민간임대 수요는 누가 공급할까? 영국의 경우 1998년과 비교해 2015년에는 민간임대업자의 수와 그들이 제공하는 주택이 모두 두 배로 늘었다. 이들 대다수는 1960~1970년대에 출생한 고도성장 세대로 임대주택 구입용(Buy-to-let) 모기지 등을 활용해서 추가로 주택을 구입했다. 일본의 경우도 55세 이상의 26%는 다주택 소유자들이다. 공공임대주택 거주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인 네덜란드도 금융위기 이후 다주택자가 빠르게 늘어나 암스테르담 20%, 마하스트리트 27%를 넘을 정도다. 이런 추가 주택을 통한 소득 보충은 영국, 미국과 같은 자유주의 복지국가뿐 아니라, 복지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중·북부 유럽 국가들에서도 연금 보충 차원에서 확산되고 있다.

 다수이 1980~1990년대에 출생한 청년층들이 '임대로 살 수밖에 없는 세대(generation rent)'가 되었다면 1960~1970년대에 출생한 세대들은 '임대업자 세대(generation landlord)'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임대업자 세대는 자신의 돈이 아니라 금융을 활용해서 집을 늘리는 중이다. 미국, 일본, 영국, 호주 등에서 "서브프라임이 무너뜨린 잔해 위에서 더 강하고 금융화된 민간임대업자 시대"가 출현한 것이다. 결국 고도성장 세대와 저성장 세대가 주택자산을 매개로 세대 간에 현격한 격차를 보이게 되어싸. 그러나 이는 세대간 문제에 그치지 않고 세대 내 격차로 확대된다. 젊은 세대 중에서 부모가 능력이 있는 경우 부모 지원, 즉 '엄마 아빠 은행'을 활용하여 주택을 구입하거나 심지어 임대사업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이다.

 민간임대 확대는 개인 임대업에 머물지 않는다. 금융위기 이후 임대사업 기관 투자가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금융권 대출을 이용하거나 헤지펀드, 리츠 등을 통해 주택에 투자한다. 캐나다에서는 금융화된 임대사업자들이 전체 캐나다 아파트의 10%를 소유하고 있다. 1999년 조사에서는 전혀 없던 현상이다. 미국에서는 소형 1인 가구용 임대주택 리츠, 독일에서는 등록 부동산투자운영 회사가 확대되고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는 금융위기로 압류된 수십만 채를 리츠가 사들여 임대사업을 하고 있다. 미국, 호주도 마찬가지로, 더 전문적으로 금융화된 투자자들이 출현했다. 2000년대 이후 완화된 임대차 규제는 민간임대시장을 더욱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임차인은 더 나쁜 상황에 빠지고, 여러 곳에서 임대료 인상을 둘러싼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특히 금융화가 강하게 진행된 나라일수록 소득 증가보다 임대료 증가 속도가 훨씬 빨라서 주거비 부담이 커졌다. 

 이렇게 민간임대주택이 금융 투자의 대상이 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주택의 금융화 단계가 시작되었다. 종전 금융을 활용한 단기 거래 중심의 주택 투자가 '금융화 1.0'이라고 한다면, 운용 수익을 계속 얻기 위한 장기 민간임대사업은 '금융화 2.0'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거와 달리 임대 부분이 금융화의 최전선에 등장함으로써 '임대' 주택의 금융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p274. 전 세계 부동산 문제의 핵심은 주택의 금융화다.

 집값 불안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동산 경기 순환과 주기적인 거품 형성과 붕괴는 거의 모든 선진국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일이다. 특히 최근 20년 동안은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집값의 급등락이 반복되고 있다. 기억에 생생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뒤이은 2008년 금융위기는 주택 거품이 촉발제였다. 당시 '대공황 이후 최대 거품 붕괴'라고 했지만 부동산 거품은 10년 만에 오히려 이전보다 더 커져버렸다. 게다가 코로나19로 풀린 돈들은 부동산으로 더 몰렸다. 최근 중국에 부상하고 있는 경제위기도 본질은 부동산 거품에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주택의 금융화 현상이 전면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원래 주택은 생활 필수품이면서 투자 수단이라는 양면성이 있었는데, 2000년대부터 주택의 금융화 현상이 확산되면서 상품 성격이 더 강화되었다. 과잉 자본이 부동산에 몰릴 수 있는 물꼬가 활짝 열린 셈이다. 그만큼 유동성과 금융의 영향이 부동산시장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집값 불안과 세대·계층 간 주택 문제의 양극화가 만성화되었다. 임대로 살 수밖에 없는 세대와 임대업자 세대가 고착화되는 신주거계급 시대가 출현한 셈이다.

 따라서 집값 급등락은 과거의 부동산 경기순환으로만 이해할 수 없고, 후기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차원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부동산 정책도 우리나라 특유의 문제와 더불어 세계적인 주택금융화 현상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제때 효과를 거두지 못한 데는 부동산 과잉 수요를 유발하는 금융화 현상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과거 경험에 따른 수요 관리, 공급 확대의 정책 패키지로는 너무 커져버린 유동성과 금융화 현상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동산 문제의 핵심 요인과 부차 요인을 혼동하면 안 된다. 핵심은 넘치는 돈이 자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구조이며, 공급, 세제, 그리고 청약제도 등 한국적인 제도들은 부차적인 요인이다. 그런 점에서 주택의 금융화 시대에 대응하는 금융 정책의 새로운 차원이 요구되고 있다.

 

p285. 이제 정부는 집값 잡겠다는 약속을 하지 말자

 이미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된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 동향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주택이 점점 더 투자 상품화되는 주택금융화 경향과 전 세계적인 유동성 상황은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우리 주택문제가 갖는 보편적 성격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우리 특유의 문제도 있다. 무엇보다 전세제도가 그렇다. 강한 가족주의는 전세제도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만큼 주택 문제에 대한 전 국민의 관심이 높고, 이는 특유의 평등주의가 더 부추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집값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해왔고, 가격 안정을 위한 것이라면 무리한 시장 개입도 주저하지 않았다. 게다가 정부는 민심을 달래는 차원에서, 또 시장과의 심리전 차원에서 집값, 특히 강남 아파트값을 잡겠다고 공헌해왔다. 하지만 정부의 약속이나 호언장담은 여지없이 헛말이 되고 만다. 전 세계 선진국 중에서 정부 수반이 집값을 잡겠다고 얘기하거나 집값을 못 잡았다고 사과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이제 정부에서 집값을 잡겠다는 말을 기대하지 말자. 정확한 시장 상황이나 정책 계획을 밝히는 등 필요한 일만 하게 하자. 시장에는 시장의 일이 있듯이, 정부는 자신들의 몫을 하면 된다. 형평성 있는 세제와 개발이익환수 체제만 작동한다면, 굳이 강남 아파트값에 전전긍긍하며 심리전을 펼 필요는 없다. 여기다 좋은 주택이 빨리 공급될 수 있도록 택지 공급과 도시계획 인센티브 관리만 하면 된다. 주거복지를 튼튼히 구축해서 주거 취약계증을 보호하는 일도 중요하다. 나머지 약속은 기대하지 말자.

재밋고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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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6

 "공부 좀 했네."

 우리 부모님은 내가 평균 80점대만 받아와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어쩐지 욕심이 나서 스스로 아쉬운 마음에 학원을 다녀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친구들이 다 방이역에 있는 종합학원에 다닌다기에 "그럼 나도 다녀볼까?" 했더니, 친구들이 "그래, 너 왜 학원 안 다녀? 너 그러다 큰일 나, 대학 가려면 학원 다녀야 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버지께 학원에 등록하고 싶다고 얘기해서 카드를 받아다 혼자 등록했다. 이 학원을 떠올리면 지금 생각해도 손끝이 아려오는 추억이 있다.

 수업 첫날, 문제를 많이 틀렸다. 그때는 체벌이 존재할 때였고(조민 씨가 그리 나이가 많나? 하고 알아봤다. 2010년 11월 서울시 교육청이 모든 형태의 체벌을 금지했다. 아마 다른 시/도도 비슷한 시기일 것이다. 조민 씨는 1991년 생으로 기록에 의하면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중,고등학교를 재학했다. 그러니 체벌이 존재하는 시기에 중,고등학교를 보냈다. 내 생각보다는 체벌이 없어진 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학원의 방침은 틀린 만큼 맞는 것이었다(내가 학교 다닐때도 이런 거지같은 경우가 아주 많았다. 첫시험에 100점을 맞고 다음 시험에 1개 틀려 95점을 맞으면 1대-문제갯수, 혹은 5대-점수대로-를 맞는 경우도 있었다. 참으로 야만의 시절이었다. 물론 나는 100점을 맞아본 적은 별로 없다). 첫날이니 뭐 아는 게 있었겠는가. 엄청나게 틀리고 손을 내밀라기에 내밀었다. 그간 체벌을 당해본 적이 없는데 - 부모님은 한번도 나를 때린 적이 없다. 미국 학교에서도 물론 - 처음으로 학원에서 손을 내밀라기에 '손을 왜 내밀까?' 했더니 회초리로 때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틀린 개수만큼.

 일단 손을 올려 한 대를 맞았다. 너무 아팠다. 두 번째 맞을 때 움찔, 피하면 더 아픈 법이다.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데 피하면서 손가락뼈를 맞았다. 그래도 '때린 선생님 잘못이 아니라 피한 내 잘못'이었던 시절이다. 수업을 듣는데 나아지질 않고 점점 아파서 정형외과에 갔더니 뼈에 금이 갔다는 것이 아닌가. 내가 피하다가 뼈에 제대로 맞은 거였다. 그대로 깁스를 하고 집에 갔다.

 집에 가니 아버지는 기가 막히다며 할 말을 잃으셨다. 그간 매 한 번 들지 않고 나를 키우셨는데 제 발로 카드를 들고 가서 학원비를 긁고 오더니, 손가락뼈에 금이 가서 돌아왔으니 황당하실 만도 하다. 부모님은 바로 학원에 연락해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학원 정책은 존중하지만 내 딸 체벌하는 곳에는 못 보내겠다"고 말하고 남은 수강 일수만큼 환불받았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체벌의 기억이다.

 

p67

 부산대 의전원 입학 취소 결정에 대한 항소를 포기할 지 생각할 때, 고민이 많았다. 주변에서는 내가 포기하면 일단 실질적 이득이 사라지기 때문에 어머니가 세상에 빨리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또, 재판을 받고 있는 아버지에게도 유리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이건 사실 내 인생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이유로, 부모님을 위해 나의 지난 10년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부모님을 1순위에 놓고 내 인생을 생각하기에는 내 삶이 우선 너무 힘들었다. 부모님 또한 부모님 때문에 내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나에게 평생의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기보다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고민했다. '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선택은 무엇인지 고민해보았다.

 내 인생에서 사람들의 평가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시선을 내 인생의 판단기준으로 삼아버리면, 그 순간부터 내 삶은 남의 것이 된다. 외적이 요소에 내 내면이 휘둘리게 둘 수는 없다. 나는 나의 깊은 내면에서 정말 내려놓을 만한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아는 '정치인 자녀'들은 대개 다음의 세 부류에 속했다.

 1. 조용히 숨어 산다.
 2. 아예 정치를 한다(혹은 정치적으로 발언하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3. 변두리에서 사고를 친다.

 이 세 부류는 모두 타자화된 자신이다. 세 경우 모두 끊임없이 평생을 '누구 딸 누구' '누구 아들 누구'라는 이름표를 단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그 이름표로만 남을 뿐이다. 조용히 살면 어떨까? 부모를 빼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조용히 숨어 살아도 정치인의 자녀, 정치를 하면 부모의 후광을 업은 정치인, 사고를 쳐도 사고를 친 정치인 자녀로 정리된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셋 중 어느 쪽도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정치인이 될 생각이 없다. 사회적으로 너무 알려져서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이미 늦었고,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하거나 정치와 연관된 일을 하고 싶지 않다.

 조민이라는 이름으로 성공하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정치적인 발언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숨어있고 싶지 않으니 세상에 나왔다. 나오되, 비정치적이고 싶었다. 비정치적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이룰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찾아가는 중이다.

 어른들, 특히 정치 쪽에 몸담은 분들은 주변에서 나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

 "너 누구 딸인데 이렇게 행동해야 하지 않겠니?"
 "인스타에 봉사활동 하는 거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미지 좋아지게 어려운 환경에서 땀 흘리는 것 좀 보여줘라."
 "마라톤 대회 나가서 몸 쓰는 거라도 좀 보여줘."

 정치하는 사람들은 땀 흘리는 모습, 봉사하는 모습을 참 좋아한다. 이유가 어떻든 땀 흘리는 이미 그 자체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말이다.

 내가 그분들의 말을 따르면 나는 정치인이자 사회인 '조국'의 딸로서만 이미지가 굳어질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게 그것일 수도 있다. 아버지 딸로서 아버지를 서포트하고, 착하고 예쁘게 잘 자란 딸로서 행동했으면 하는 사람들의 바람과 기대를 나는 온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정말 감사한 조언들이지만 나는 하나도 듣지 않는다. 나에게는 자신의 개성이 있다. 누구 딸로서의 그런 개체가 아닌, 사람들이 원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 그 자체, 나 자신을 알리게 되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재판에 나갈 때, 브랜드 이름이 알려진 가방을 들고 나갔다. 정가 70만 원 정도 하는 가방이었다. 나는 명품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실제로 그 가방도 내가 가진 것 중 비싼 축에 속하는 가방이었다. 그런데 기어이 그게 문제가 됐다. 정치계 사람들은 말했다.

 "앞으로 그 가방 들지 마라. 사람들이 비싸다고 욕한다"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반대다. 아예 다른 생각이다. 나는 아버지 말도 수긍하기 어렵다면 듣지 않는다.

 "그 가방 가지고 언론 기사에 여럿 나오던데 그거 꼭 들어야겠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 가방을 또 들었다. 우리집 형편이 아주 어렵지 않다는 걸 사람들은 안다. 70만 원 정도 하는 가방을 내가 드는 게 아주 못할 짓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빚을 져서 초고가 명품을 드는 것도 아니고, 내가 돈을 벌어 구매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방을 처음 들었을 때만 떠들썩하지, 같은 가방을 두 번 세번 들면 이슈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그 가방을 들고 다시 문밖을 나선다. 

 

p119

 내가 유일하게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의사로서의 일이다. 어릴 때부터 장래희망으로 꼽았던 일을 법적으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삶에는 언제나 득실이 있게 마련이라던데,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은 의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득이 앞으로 내 삶에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아마 절대 없을 것 같다. 평생 꾸어온 꿈이 가로막히자, 처음에는 막막함과 동시에 앞으로 무얼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하면서 두려웠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의사의 길도 인생에 놓인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꾸 말한다. 대학은 다시 가든, 외국에 가든 다시 시작하라고. 어떻게든 의사 면허를 되찾을 방법을 모색해보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학을 다시 가라고 하는 건 내 학력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일부 지인들의 희망이지 나의 희망사항은 아니다.

 나는 요즘 학력이라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중이다. 만일 내게 정말 의학 공부에 대한 의지가 있고 진정 원한다면 다시 시도해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지금 내게 지금 어떠한 의지와 각오가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지금은 특별히 공부하고 싶은 게 없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내가 왜 다시 학교에 가야 하는 걸까? 결국 고졸 학력으로 살아가기겐 우리 사회가 좀 만만하지 않으니까 졸업장을 따놓으라는 것 아닐까? 나는 남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학력'을 위해 '적당한 과'를 선택해 대학에 다시 갈 생각이 없다. 물론 살면서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정말로 대학 졸업장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또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대졸자만 가능하다면, 그때는 기꺼이 다시 공부해서 졸업장을 따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내가 왜 지금 인생의 10년을 되돌리기 위해 또 10년을 투자해야 하는가. 그것은 내 뜻에도, 인생의 가성비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면 또 누군가 반문할 것이다. 의사를 하려는 의지가 원래 이렇게 희박했느냐고. 의사고 되고 싶어 한 사람이 맞긴 한 거냐고.

 나라고 10년 공부한 것이 왜 아깝지 않겠는가. 내가 인생에서 가장 간절했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응급의학과에 꼭 가고 싶었다. 힘들게 공부하고 밤잠을 설치면서도 나는 평생을 병원에서 보낼 생각으로 살았다. 살면서 의사라는 길만 보고 달려왔기 대문에 지금처럼 어떤 제동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내가 하고 싶은 다른 일들을 찾아보고 있는 나날이 힘겨울 때도 많다. 그러나 어쩌면 이 또한 생의 과정이지 않을까?

 나는 늘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전문의를 위한 수련 시기를 놓쳤다. 동기들과 흔히 '로컬 시장'이라고 하는데, 내가 '의사'라는 이름만 달고 싶은 거라면 인턴을 할 필요도 없이 졸업하자마자 연봉을 가장 많이 주는 동네 의원에 취직하든 개업을 하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당직만 서는 알바의사를 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내 나람의 보람, 내가 느끼는 보라믄 로컬 시장이 아니라 응급실이라는 작지만 큰 공간 안에 있었다.

 '내가 느끼는 보람'과 '사회의 시선'이라는 대립항 사이에서 내가 의사로 일하면 지탄받는 상황이라면 내가 과연 이걸 유지하는 게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의사 면허가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만일 내가 응급의학과 수련을 못 받는다면, 의사로 계속 살 이유가 있을까?

 누군가는 내게 수련을 꼭 종합병원이나 응급의학 쪽으로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묻는다. 왜냐면 작은 응급실의 경우 전문의가 부족하여 일반의도 모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은 병원에서 형식적으로 수련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나중에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 대처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고 경험이 부족해 뜻하지 않은 사고를 낼 가능성도 커진다.

 교수님의 가르침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훌륭한 의사는 착한 의사가 아니다. 실수하지 않는 똑똑한 의사다. 사람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착하고 멍청한 의사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래, 그럴 거면 안 하는게 낫다.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응급실 현장에서, 불충분한 수련을 받고 싸워낼 수 있을까? 생가가 오가는 상황에서 내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환자에게 오진을 내릴 수도 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수련을 제대로 못 받고 응급실에 설 거라면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료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많은 곳에, 사실상 의료 혜택을 못 받는 곳에 나의 작은 손길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누군가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지도 모른다. 조건이 닿는다면 그렇게라도 살고 싶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다. 명지병원도 경상대병원도 수련의로 받아주지 않았다. 나보다 성적이 낮은 사람도 붙었는데, 블라인드가 원칙이라고 모집요강에 크게 적어뒀던 경상대병원에서는 면접관이었던 병원 고위 관계자가 내 이름과 상황을 언급하며 왜 우리 병원에 지원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아, 이제 나는 아무 데서도 안 받아주는구나. 앞으로 수련은 글렀구나.'

 응급의학과는 항상 모집정원이 차지 않아 추가 모집하는 경우가 있고 가을에도 모집한다. 주변 친구들이 여기 비었다고 지원해보라고 추천을 많이 해줬다. 하지만 더 지원해봤자 기삿거리만 늘어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의사로서의 내 앞길이 막혀버린 순간이었다.

 보건복지부에서 나의 의사 면허를 취소하기 전에 나는 의사 면허를 반납하겠다고 선언했다.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뉴스에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으면 면허를 반납하고 소송을 취하해야지"라고 하던 패널이 막상 내가 면허를 반납하고 소송을 취하했더니 "기소를 피하려고 쇼하네"라고 한다. 공중파 뉴스에까지 나와서 떠드는 사람이 저렇게 앞뒤가 안 맞을 수 있을까? 또 어떤 분은 "아버지 총선 출마를 위해 네가 희생했구나, 잘했다. 넌 딸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성공이 곧 너의 성공이다. 그때 시집가거라"와 같은 성차별적 망언을 쏟아냈다.

 예전에는 어른들의 말은 다 맞는 줄 알았다. 웃어른은 존경할 대상이고, 나보다 큰 지혜를 담은 사람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분명 아닌 사람도 정말 많다. 존경심은 나이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정말 존경할 만한 사람일 때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하지만, 의사 면허 반납은 여러 요소를 고려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인생에 레몬이 주어지면, 레모네이드를 만들라"는 격언이 있다.

 비록 지금 인생의 대부분을 부정당했지만, 이 상황을 나는 제2의 자아실현 기회로 만들어보려 한다. 한 길만 바라보고 달려온 나에게 이 같은 강제 멈춤은 아마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하는 트라우마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막힌 상태를 기꺼이 누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멈추어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이 좁고 긴 길이었던 데 반해 이제부터 펼쳐질 길은 꽃도 피어 있고 산도 보이는 그런 길일지도 모른다. 그 길을 천천히 즐기며 걷다 보면 나의 세상도 확장되어 더 큰 행복을 안겨다 줄지도 모른다.

 

p156

 지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다. 한 살 후배여서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함께 밴드 활동을 하며 가까워졌다. 이 친구가 성인이 되었을 때 첫 여행을 함께 갈 정도로 친했다. 친구 부모님은 지수가 나와 여행 간다고 하면 다 보내주시고 나도 이 친구와 어디든 간다고 하면 부모님도 오케이, 지원해주셨다. 

 지수를 만난 이후로 모든 생일을 함께 보냈다. 친구 부모님도 나를 정말 잘 챙겨주셨고, 서로 남자친구도 소개 해주고, 서로의 친구들도 다 소개해주었다. 함께 여행도 자주 다니고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아버지가 민정수석, 법무부장과으로 잘 나갈 때는 매일 같이 밥 사준다 술 사준다, 누구 소개해주고 싶다, 선 자리 마련해주고 싶다, 이 말 아버지께 꼭 좀 전해달라, 부탁할 게 있다, 돈 빌려달라 연락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툭 끊겼다.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원래도 그런 자리, 그러니까 아버지 때문에 부른 자리에 나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던 나는 오히려 잘 되었다 싶었다.

 내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애초에 나를 '조국의 딸'로 보지 않았다. 그냥 '조민'으로 보았다. 이런 친구들만 남으니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그저 집 앞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마시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하고 서로 밥값 내겠다고 싸우는, 지금 남아 있는 친구들이 진짜다.

 그 친구들의 선봉에는 항상 지수가 있었다.

 집이 압수수색을 당한 날, 내 생일 전 날이었다. 가족 중 누구도 당연히 내 생일을 신경 쓰지 못했다. 나조차도 내 생일을 잊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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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3일 조국 장관 자택 압수수색 뉴스, 방송 날짜는 9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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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들이닥쳐 집을 뒤지고 물건을 가져가고, 눈 앞에서 낯선 사람들이 내 방을 오갔다.

 너부 놀란 마음에 그저 앉아 있는데, 지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언니 집 앞에 기자가 왜 이렇게 많아요?"

 "너 어디야? 뉴스 봤어?"

 "아니, 언니 집 근처에 한 번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엄마가 언니 생일 밥 사주라고 카드 줬는데 어떻게 나오지?"

 "정말? 나 못 나가. 나가면 카메라 한 100대는 있을걸?"

 "언니, 뒷문으로 한번 나와봐요. 한번 어떻게든 나와봐."

 집이 털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어머니를 남겨두고 혼자 가겠는가. 어머니도 정신이 없는데, 그런데 통화 내용을 들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민아, 너라도 나가. 너 혼자 나가."

 "아니, 나도 그냥 여기 같이 있을게요."

 "아니냐, 여기는 지금 사람 몇 명만 있으면 되고, 여기 있어봤자 압수수색이 언제 끝날지 몰라. 계속 지연될 수도 있고 영장 추가로 나오는 것도 기다리고 하면 12시간이 걸릴지 24시간이 걸릴지 몰라. 그러니 차라리 나가서 있다가 와라."

 그렇게 나는 기자들의 눈을 피하려 경비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옥상을 통해 옆 라인으로 가서 옆 라인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수가 나를 데려간 곳은 친구가 일하던 회사에서 임직원 할인이 되는 레스토랑 중 가장 좋은 음식점이었다. 고급 레스토랑이라 망설였는데, 지수는 나를 잡아끌었다. 이 음식점은 훗날 뉴스에 나왔다. 한 변호사가 내가 '호화 생일 파티'를 했다며 제보해 보도한 것이다.

 그래, 호화라면 호화였다. 지수와 나 여자 둘이 요리 세 가지에 음료수 한 잔씩을 마셨으니.

 그런데 정말 신박한 뉴스가 나왔다. 그 가게에서 제일 비싼 코스요리를 10명이 먹어서 돈 100만 원 가까이 나왔다면서. 아, 허위 기사라는 게 이렇게 나는구나를 그때 제대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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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iz.heraldcorp.com/view.php?ud=20190927000015

 

강용석 “조국 딸 생일파티 71만원 영수증 알고보니 가짜”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가 지난 25일 조국 법무부장관의 딸 조모씨가 생일에 방문한 중식당의 식사내역이라며 소개한 영수증이 허위로 알려졌다.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 운영

biz.heraldcorp.com

(당시 조민 씨 호화 생일파티 관련 가짜 뉴스, 출처는 그 악명 높은 가로세로연구소, 강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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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전통이 있었다.

 1. 생일마다 서로 풀코스로 대접하기
 2. 선물은 예산 5만 원 내로 사기

 나는 상대적으로 환경이 유복한 유학생들 사이에서 자랐고, 젊은 세대의 SNS 문화로 고가의 브랜드 쇼핑백이 담긴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서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지수와 서로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마음과 진심은 주고받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든 룰이었다.

 그렇게 나는 작년 5월, 대부도로 지수를 데려갔다. 조개구이도 먹고, 전동 이륜바이크도 타고, 바다 앞에 텐트를 펼쳐놓고 고기도 구워먹었다. 지수의 생일 파티였다.

 

지수는 핼러윈 데이 저녁에 잠시 이태원에 들러야 한다고 했다. 나는 코로나 이후로 처음 맞는 핼러윈이라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다른 친구들과 신사동에 가기로 했다. 지수에게는 신사동으로 오라고 했다

 '오늘 이태원 사람 너무 많을 것 같은데, 너도 신사동으로 와.'
 ' 그럼, 잠시 이태원에 들러 친구 지인들한테만 인사만 하고 바로 넘어갈게!'

 그런데 지수는 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수의 장례식이 열렸다.

 귀국한 지수의 부모님께서 지수를 보러 영안실에 들어가실 때 따라 들어가서 나도 그녀의 마지막을 볼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지수 생일 때 지수와 대부도에 가서 찍은 사진을 올린 적이 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찍어준 나의 소중한 추억, 그것을 내 계정에 올려두고 싶었다. 소중한 기억, 기억하고 싶은 지수를 간접적으로 담은 장면. 그리 생각하고 올린 사진이었다.

(지수 씨가 찍어준 사진, 출처 : 조민 씨 인스타)

 

누군가는 이 사진을 올린 의도가 무어냐며 내 정신상태까지 언급했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그 사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붙인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내가 해명한답시고 무언가 언급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내가 입을 열면 열수록 기사가 크게 나고, 기사가 크게 나면 지수가 뉴스에 나오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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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ews1.kr/articles/?4947103

 

조민 '대부도 캠핑' 사진 구설…"이태원 고인이 찍었나" "확대 해석 말길"

(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장녀 조민씨의 인스타그램이 연일 화제다. 이번에는 지난 1월 올린 대부도 캠핑 사진을 두고 "이태원 참사로 고인이 된 지인이 찍어준 거 아니

www.news1.kr

(당시 사이코패스 한국 언론들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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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상관 없지만, 지수를 가십거리로 올리는 건 싫었다. 지수의 부모님은 또 얼마나 힘드실까 하고 그냥 내가 조금 욕을 먹고 말자고 생각했다.

 얼마 전, 지수의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지수가 찍어준 사진으로 기사가 나서 죄송해요."
 "아니, 아줌마는 민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사진을 올렸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누가 뭐라든 괜찮아. 오히려 지수와의 추억을 생각하며 사진 올려줘서 엄마로서 고맙지."

 어머니는 그 사진을 보면 나를 찍어주는 지수가 보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사진을 지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정말 감사했다. 내게는 소중한 친구이자 어머니에게는 사랑하는 딸인 지수는 그렇게 우리 마음에 남아있다.

 

p216

 어느 날, 백호에게 친구가 있으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인핸드 앱을 보다 놀라운 사진을 보았다. 골프연습장에 고양이가 출연한 거다. 퍼팅장에서 고양이가 골프공으로 축구하며 골프장 손님들을 방해하는 사진이었다. 공들 사이로 돌아다니는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불안해 보였다.

(백호 : 출처 조민 인스타그램)

 골프연습장 주인이 포인핸드에 입양 글을 올려두었다. 누가 보아도 한국 토종 길고양이었다. 치즈태비무늬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정말이지 귀여웠다. 엄마 없는 아기 고양이인데 겨울에 얼어 죽을 것 같아 빨리 누가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었다.

 지역을 보니 일산이었다. 쌍문동에 살 때라, 운전해서 가면 금방이었다. 연습장 사무실에 가서 보니 마치 아랫목처럼 전기담요 아래 푹신한 이불을 깔고 고양이가 자고 있었다. 골프연습장 주인 아주머니는 회원들이 가져다준 사료와 간식을 주었다며, 용변도 자기가 알아서 가려 흙에 가서 한다고 했다.

 "냥냥아 안녕?" 하면서 츄르를 들고 살며시 다가갔다. 태어난 지 삼 개월 쯤 되었을까, 솜털도 아직 빠지지 않아 부스스한 털을 가진 아기 냥이었다. 가만히 보니 정말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묻어 있었다. 제법 츄르 먹어본 경험이 있는지 미친 듯이 먹었다. 그러더니 마구 애교를 부리고 몸을 부볐다. 백호와는 정반대였다. 

 피부병도 없고 건강해 보이는 데다가 폴짝거리는 게 너무나도 귀여웠다. 하지만 집에서 생활하려면 야외 생활은 청산해야 했기에 마음에 걸렸다. 저렇게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데.

 하도 팔짝팔짝 뛰어다녀서 잡는 건 포기하고 다시 한 번 "나랑 갈까? 츄르 줄까?" 했더니 차까지 따라왔다. 케이지에 넣어서 지퍼를 잠갔다. 심바를 데리고 떠날 때, 아주머니는 남은 사료를 챙겨주셨다. 

 골프장 아주머니와 그 가족들은 그새 고양이에게 정이 들었는지 가끔 소식을 전해달라고 했다(지금도 가끔 사진을 찍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제 가자, 하고 가는데 고양이가 계속 나오겠다며 야옹거렸다. 

 껴내주었더니 뒷 좌석부터 쭉 스캔을 시작했다. 운전석 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내 쪽으로 오려고 하면 옮기고 그냥 운전만 하던 어느 순간, 고양이가 무릎 위에 앉았다.

 "뭐야 너어."

 내 허벅지 위에 갑자기 딱 눕더니 잠드는 거였다. 일산에서 쌍문까지 밀리는 차 안에서 한 시간 반을 고양이는 내내 잠들어 있었다. 처음 본 인간 무릎 위에서.

 동물병원에 가보니 다행히 건강하고 귀 진드기만 조금 있었다. 한 달 정도 통원치료하면서 백호가 있던 방에 격리시켰다. 백호는 갑자기 나타난 작은 녀석이 자기 영역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꼬리를 펑! 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심바 : 출처 조민 인스타그램)

 

 백호가 서열을 과시하기 위해 심바를 끈질기게 괴롭혔는데, 심바는 괴롭히면 괴롭히는 대로 당하는 순둥이다. 밥도 백호가 먼저 먹고 나서야 심바가 먹고, 캣타워에서도 백호가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 백호는 소형종이고, 심바는 중형종이라, 심바가 성장할수록 점점 백호의 크기를 넘어선다. 지금은 백호가 3.8kg,  심바가 5.4kg이다. 덩치만 보면 사실상 심바가 서열을 뒤집는 게 맞는데, 캣타워 맨 위에 있는 우주선에만 가끔 가서 잘 뿐, 나머지는 백호한테 아무리 맞아도 져준다. 백호와 심바는 이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자매가 되었다. 일 년에 한 번은 둘이 껴안고 자는 걸 목격했기 때문에 확실하다.

(백호와 심바 : 출처 조민 인스타그램)

 

 두 녀석이 서로 자기를 만져달라고 애웅거릴 때, 잠자고 일어나 내 곁에 곤히 잠든 녀석들을 볼 때, 집에 들어가면 꼬리를 치켜들고 반겨줄 때....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하고 느낀다. 

 

    너를 사랑하는 일은 아주 쉬웠어
    네 눈 속엔 우주가 담겨 있었거든
    함께하는 일상은 금방 습관이 돼
    내 작고 예쁜 보송한 천사야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가만히 잠들고 일어나자
  

     -미닝, 내 고양이 (My Cat) 중에서

 

 

p242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유명하다고 해서 읽어본 작품인데, 나에겐 하나도 어쩐지 재미없었다. 얼마나 재미가 없었으면 제목으로만 기억나는지.... 정말이지 배우 둘이 벤치에 앉아 있다가 끝났다. 고도라는 사람이 실제로 등장했는지도 기억에 없는 걸 보니, 그는 끝까지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p244

 A Poison Tree. By William Blake

 

 I was angry with my friend;
 I told my wrath, my wrath did end.
 I was angry with my foe:
 I told it not, my wrath did grow.

 And I watered it in fears,
 Night & morning with my tears:
 And I sunned it with smiles,
 And with soft deceitful wiles.

 And it grew both day and night.
 Till it bore an apple bright.
 And my foe beheld it shine,
 And he knew that it was mine.

 And into my garden stole,
 When the night had veild the pole;
 In the morning glad I see;
 My foe outstretche beneath the tree.

 

 (해석은 책에는 없는데 인터넷 등을 참고해서 내 나름대로 해석을 붙였다)

 나는 친구에게 화가 났다;
 나의 분노를 얘기했더니, 분노는 사라졌다.
 나는 적에게 화가 났다:
 나는 말하지 않았고, 분노는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그것에 물을 주었다.
 밤낮으로 흘리는 나의 눈물로:
 나는 미소로 그것에 햇빛을 쬐어주었다.
 그 미소 뒤에 교묘한 속임수를 섞어서.

 분노는 밤낮으로 자라
 밝게 빛나는 사과를 맺게 되었다.
 적은 사과가 빛나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것이 내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곤 내 정원에 숨어들어왔지,
 밤이 별빛을 가릴 때.
 아침이 되어 난 기뻤지.
 나의 적이 나무 아래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윌리엄 블레이크의 <독나무>는 내가 좋아하는 시 중 하나다. 고등학교 때 유학반에서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처음 접한 시로, 어린 나이에 적잖이 충격받았다. 이 시에서 화자는 분노의 두 가지 표출 방법을 다루는데, 친구에게 화가 나면 분노를 표출하자 분노가 사라졌다고했다. 하지만 친구가 아닌 적에게 화가 날 때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그 분노를 나무처럼 키워서 사과가 맺힐때까지 기다린다. 적이 그 탐스러운 사과를 훔쳐먹고 나무 아래 죽어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게 시의 내용이다. 이렇게만 보면 기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분노라는 감정을 이렇게 다룬 시를 처음 보아서인지 매우 인상적이었다. 화자의 분노를 자양분 삼아 자라는 사과라니. 분노와 눈물, 두려움을 안으로 삼키면서 겉으로는 미소만 짓고 있는 화자. 화자는 적에게 복수하기 위해 분노라는 사과를 키웠지만, 그 사과를 키우는 과정에서 그는 본인도 의도하지 못했던 변화를 경험한다. 가식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분노는 상대방뿐 아니라 본인 자신도 망가뜨린다는 이야기 아닐까.

 

p254

 최근 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깊어지면서, 제 가치관 및 삶의 일부를 드러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살기에 저의 가치관과 주체성은 너무나도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전적 에세이. 전반부는 성장기의 에피소드 후반부는 사회에 나가서 정치에 입문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정치입문 후의 역경을 다루고 있다.

이재명에 대해 알고 싶으면 함 봐두면 좋을 내용. 사실 인터넷에도 많이 퍼져있는 내용이라 이재명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웬만큼은 알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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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48

 무려 프레스공! '나름 성공한 열다섯이었다.'라고 쓰려다 만다. 성공은커녕 고무기판 연마기에 손이 남아나질 않아 공장을 옮겼더니 더 위험한 샤링기를 만았고, 샤링기에서 떠나니 프레스기 앞에 앉아 있었다.

 세상은 소년공의 안전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대양실업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권투경기가 열렸다. 권투가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경기는 점심시간 공장창고에서 벌어졌다. 직원 단합이나 복지 차원의 경기는 아니었다. 선수는 신참 소년공들이었고, 선수 지명권은 반장과 고참들에게 있었다. 지명당한 소년공들은 무조건 글로브를 끼고 나가 싸워야 했다. 그리고 고참들은 자기들이 먹을 '부라보콘' 내기를 걸었다. 그리고 그 부라보콘 값은 권투 아닌 격투기에서 진 신참 소년공의 몫이었다.

 하고 싶지도 않은 경기를 해야 하는 소년공은 경기에 지면 돈까지 내야 했다. 나도 지목당하면 꼼짝없이 경기에 나갔다. 한달 용돈이 500원인데, 부라보콘은 100원이던가? 경기에서 지면 부라보콘 세 개 값인 하루 일당을 고스란히 빼앗겼다. 정말 '개떡' 같은 경기였다.

 나는 그때 이미 왼팔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벼락같이 떨어지는 육중한 구형 프레스기가 왼쪽 손목을 내리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조금만 더 늦게 팔을 뺐다면.... 손목이 부어올랐지만 타박상이려니 하고 빨간약과 안티프라민 연고나 바르고 말았다. 손목뼈가 깨졌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부기가 가라앉은 뒤에도 통증은 가시지 않았고 프레스기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내색하면 프레스공 지위를 잃는다는 생각에 아픈 걸 참고 숨기며 더 열심히 일했다. 그게 평생의 장애가 될지 그땐 몰랐다. 프레스기에서 밀려나지 않는 것만 중요했다. 

 

p71

 악착같이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도금실에서 락카실로 옮겼다. 락카실은 이중으로 밀폐된 구역이어서 방해를 덜 받았다. 나는 최고 속도로 작업 물량을 끝내놓고 남은 시간에 공부했다. 그 시간이 내겐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런데 몸이 자꾸 말썽을 부렸다. 두통이 잦아졌고 코가 헐기 시작했다. 락카실은 독성물질이 배출되지 않아 화공약품 냄새가 지독했다. 결국 나는 그곳에서 후각의 반 이상을 잃었다. 좋아하는 복숭아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됐다.

 프레스기에 치인 손목도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한 해 키가 15센티나 컸는데, 두 개의 손목뼈 중 성장판이 파손된 바깥뼈만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팔이 눈에 보일 정도로 뒤틀리면서 밤새 끙끙 앓는 날이 많았다.

 

p76

 아버지에 대한 내 감정도 양가적이었다. 비 오는 어느 새벽 아버지와 쓰레기를 치우는데 급기야 일을 못 할 정도로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리는 시장통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꼬박꼬박 조는 내 모습을 본 아버지가 가게 좌판에 누워 눈 좀 붙이라고 했다.

 새벽에 누가 깨웠다. 엄마였다. 흠뻑 젖은 작업복을 입고 오들오들 떨며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말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때 아버지는 희뿌연 여명 속에서 비를 맞으며 혼자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재명이 댈꼬 드감더."

 엄마가 소리쳤다. 아버지가 천천히 돌아보더니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아버지의 그 모습이 문득 아렸다.

 생각하면 아픈 것들투성이.

 그래도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였다.

 

p79

 손목 통증으로 밤새 끙끙 앓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치료받을 길은 요원했고 치워야 할 쓰레기는 끝도 없이 나왔다. 밤새 쓰레기를 치우고 오면 나는 젖은 박스처럼 구겨져 잠이 들었다.

 어느 날 잠결에 엄마와 아버지가 하는 얘기가 들렸다.

 "재맹이가 저러다 평생 빙신이 되머 우야니꺼?"

 "돈 벌어서 수술하머 될끼라."

 "집 살라꼬 모다돈 돈으로 아 수술부터 시켜야 되잖겠니껴?"

 엄마의 말에 의식이 또렷해졌다.

 "그 돈은 아무도 손 못 대."

 엄마와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에서 수없이 재생됐다. 한창 예민한 열입곱 살이었다. 가난은 아득해 보였고 한 팔을 못 쓰는 사람이 되어서도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온갖 절망적인 생각이 나를 삼키고 있었다.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다락에 연탄불을 피우고 수면제를 먹었다. 잠은 쉬 오지 않았다. 세상과의 영원한 작별이었다. 슬프기도 했지만 홀가분하기도 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나는 멀쩡하게 눈을 뜨고 다시 깨어났다. 연탄불을 꺼져 있었고 정신은 말짱했다. 공장 친구들은 그 정도면 죽는다고 했는데... 수면제가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다시 기회를 보기로 했다.

 

 다시 약국에 들렀다. 또 수면제를 달라고 하면 이상하게 여길 듯해 이번에는 동생 핑계를 대고 수면제 20알을 샀다. 약사가 잔소리가 많았ㅈ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서를 썼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너무 지쳤다고 말하고 싶었다. 눈물 때문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다시 연탄불을 붙이고 꾸역꾸역 수면제를 삼켰다. 

 

p.156

 나는 승률이 높은 변호사였다. 사건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법리는 물론 최신 판례까지 샅샅이 뒤져 변론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재밋게도 내가 노동자들을 변론하느라 재판정에서 맞붙었던 회사와 기업주들이 나에게 다른 사건을 의뢰하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들은 나로 인해 패소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가 자기들 변호사였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기업들은 노사문제가 아닌 민사사건을 가지고 왔다. 수임료가 괜찮았다. 

 법률상담도 열심히 했다. 답을 못 찾겠으면 며칠 뒤 다시 오라고 한 뒤, 책 사서 공부하고 판례를 분석해 답을 찾았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최신 판례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책자로 만들어 전국의 변호사 사무실로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남에서 최신 판례집을 빠짐없이 구입해 탐독하는 건 나뿐이었다.

 "돈도 안 받는 무료상담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하루는 무료상담이 끝난 후 이영진이 물었다.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내가 답을 찾아주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성남 어디 가서도 답을 찾지 못할 거야. 성남의 변호사인 내가 해야지."

 나의 대답에 대한 감상평이랄까. 이영진은 그 시절의 나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재명이는 늘 공부했어요. 보통 변호사 되고 나면 공부 안 하거든요. 그래서 머리가 굳고 생각도 굳는데, 재명이는 안 그래요. 또 재명이는 질 사건은 맡지 않았어요. 질 게 분명한 걸 가지고 소송하려고 하면 하지 마라, 해도 진다, 시간과 돈만 날린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도 우리 말 안 듣고 기분 나빠하며 다른 사무실 찾아가서 소송한 사람들 어떻게 되었겠어요? 지고 나서 후회하며 우리한테 와서 그때 변호사님 말 들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죠.

 

p162

 '파크뷰 특혜사건'은 분당 백궁/정자지구의 상업/업부용 토지를 주거용으로 용도변경하고 정/관계 유력인사들에게 특혜분양한 권력형 비리였다. 토지를 용도변경해 아파트를 짓는 일은 건설업자에게 엄청난 차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나는 1999년 말부터 용도변경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반대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남시는 용도변경했고, 이 땅의 가치는 천정부지가 되었다. 사건을 파헤쳐 나갈수록 배후에 토건업자와 정관계, 검찰, 언론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고리가 버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역의 변호사 한 명과 시민단체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상대였다. 주변에서 다친다며 물러서라는 권유가 잇달았다. 무모하다고 했다.

 나라고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몰랐다면 모를까 부정이 행해지고 있음을 알게 된 이상 물러서는 것은 옳지 않았다. 

 결심은 그러했지만 실제의 상대는 예상보다 막강했다.
 토건세력은 처음엔 회유책으로 나를 포섭하려 했다. 내가 지역의 노동자와 시민을 위한 언론사를 만들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20억을 투자해주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20억, 천만 원도 없어 사무실 개업비용을 빌렸던 내게 20억이라.. 나는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했다.

 "우리가 양심을 팔려면 얼마를 받아야 할까?"

 돈으로 사람도, 영혼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세력들이었다. 나는 한 5천억은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성남시민모임과 같은 단체를 전국적으로 2~3백 개쯤 만들어 운영하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모두가 웃었다. 웃픈 농담. 그들은 이날의 농담을 소문냈다. 이재명이 20억이 적다며 5천억을 요구했다고.... 덕분에 내 양심의 공시지가는 20억에서 5천억으로 급격히 상승했다.

 회유가 먹히지 않으니 다음 단계는 협박이었다. 나를 향한 협박까지는 견딜 만했다. 하지만 가족을 해치겠다는 협박에는 나도 힘들었다. 그들은 사무실은 물론 집으로도 전화를 해댔다. 새벽에 전화해서 아내에게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와 반까지 대면서 좋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내가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었다. 나중에 보니 경찰서 간부도 한패였다.

 결국 나는 허가를 받고 6연발 가스총을 구비했다. 양복 주머니에 총을 넣고 다녔다.

 상대는 거대한 골리앗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생의 방향을 결정할 커다란 물음 앞에 서 있었다.

 

p168

 아파트 특혜분양은 곁가지였다. 몸통은 땅의 가치를 천정부지로 뛰게 한 용도변경이었다. 어마어마한 이득이 발생하는 지점. 나는 사건의 본질을 추적하는 KBS '추적 60분' 팀의 취재와 인터뷰에 응했다. 나와 인터뷰 도중, 내 사무실에 오기 전 수차례 검찰을 사칭해 시장 비서진과 통화하며 시장과의 연결을 요청한 KBS 피디에게 시장으로부터 통화하자는 음성메시지가 왔다. 용도변경의 최종 인허가권자였던 성남시장에게 전화한 피디는 자신이 파크뷰 사건 담당검사라며 솔직하게 전모를 털어놓을 것을 종용했다. 당시 성남시장(인터넷 검색해보면 나온다. 김병량 시장이다)은 내막을 털어놓았고, 기자는 통화를 녹취했다.

 며칠 후 녹취가 '추적 60분' 방송으로 나갔지만 반향이 없다. 나는 피디에게 통사정해 녹취파일을 받아 기자회견장에서 공개했다.

 마침 지방선거와 맞물려 세상이 뒤집혔다. 당황한 성남시장은 피디의 검사사칭 배후로 나를 지목했고, 검찰은 나를 공범으로 기소했다. 억울해서 대법원까지 가며 싸웠지만 결국 유죄로 벌금 150만 원을 받았다. 사칭한 PD는 선고유예였다.

 '파크뷰 특혜사건' 싸움은 몇 년에 걸쳐 계속됐다. 무려 499세대를 정관계, 법조계, 언론계의 유력자들에게 특혜분양한 사실이 드러났고, 도움을 주고 돈을 받은 경기도지사 부인, 성남시장, 경찰간부, 언론인, 정치인 등 관계자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사건은 나와 부동산마피아, 음험한 기득권 세력과의 전선이 구축되는 순간이었다. 이 일을 두고 어떤 평론가는 내가 '부동산 패권주의 세력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부동산투기 세력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땅을 통한 그들의 이익 추구는 만족을 모른다.

 그들은 전방위적인 수단을 동원해 부동산값 상승을 부추기고, 서로 결탁해 범법하며 천문학적 이득을 취한다. 그들은 이기기 어려운 거악이자 우리 사회의 숨은 실력자들이다.

 

p170

 토건마피아와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된다.

 대장동 개발사업 또한 다르지 않다. 대장동 건은 이미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 때도 내가 검찰에게 기소당한 사건이다. 검찰은 개발이익금 5,503억 원을 시민 몫으로 환수했다는 내 발언이 허위사실 공표라고 기소했다. 결론은?

 '무죄'였다.

 검경은 이미 그때 현미경을 들이대듯 대장동 사업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내게 부정과 비리가 있었다면 이미 그때 그 점을 문제 삼지 않았겠는가.

 원래 LH의 공공개발로 추진되던 대장동 개발사업을 민간개발로 바꿔놓은 것 국민의힘 세력이다.

(대장동 개발사업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다음 포스팅을 참고하라)

https://lachezzang.tistory.com/1332

 

[PD수첩]대장동, 설계자와 쩐주(1/3)

시행사인 성남의 뜰이 원주민에게 토지구입을 한 후, 도로와 기반시절 공사를 한 후에 택지를 건설사들에게 판매하게 됨. 이 판매과정에서 택지분양수익이 나게 됨. 그 판매 수익을 표와 같이

lachezzang.tistory.com

https://lachezzang.tistory.com/1333

 

[PD수첩]대장동, 설계자와 쩐주(2/3)

대장동 사업 초기인 2009년부터 자문변호사로 일하던 남욱 변호사는 인맥 활용을 위해 김만배 기자를 영입함. 강원도 지사 출마시 불법선거 운동으로 훅간 엄기영 당시 앵커. 대장동 개발에 대한

lachezzang.tistory.com

https://lachezzang.tistory.com/1334

 

[PD수첩]대장동, 설계자와 쩐주(3/3)

화천대유는 우선계약자로 다른 업체들과 달리 다섯 곳의 택지를 비교적 싼 가격에 매입할 수 있었음. 그리고 이 다섯 곳의 택지에 아파트를 건설해서 분양하면서 총 4천억 원 대의 이익을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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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성남시장이 되면서 민간개발을 막고 성남시 공공개발을 추진했다. 공공개발로 시민 모두의 이익이 돼야 한다는 것이 내 원칙이었다.

 국민의힘 세력의 저지로 공공개발이 막히자 공공민간 합동개발이라도 해서 최대한 공익환수를 하기로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도 써야 한다. 국민의힘 세력이 장악한 시의회의 반대로 지방채 발행이 막혀 성남시 예산만으로는 개발자금을 조달할 수 없어 민간투자를 받아야 했다. 이에 나는 원칙을 세웠다.

 자본은 민간이 댄다. 손해와 위험은 민간이 진다. 성남시는 사업이 어떻게 되든 고정이익을 취한다.

 오히려 민간사업자가 계약을 꺼릴만큼 성남시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사업방식이었다.

 25억을 투자한 성남시는 당초 예상이익의 70%인 4,400억가량을 환수했고 1조 3천억을 투자한 그들은 몫은 30%인 1,800억이었다. 나중에 지가 상승으로 그들의 이익이 2천억가량 늘어났지만 성남시가 업자들에게 1,400억을 더 부담시켜 전체이익의 60% 가량을 환수해 시민들에게 돌린 결과가 됐다. 내가 아니었으면 5,800억도 그들 업자와 정치인, 전직 검사들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부동산 투기세력은 나의 기습에 또다시 당한 셈이다. 토건마피아가 지금까지도 결사적으로 나를 반대하는 배경이다.

 땅을 통한 그들의 이익 추구는 매일매일 성실히 일하며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박탈감을 준다. 상승하는 부동산 가격으로 다수의 사람들을 벼락거지로 만든다. 공동체 전 구성원들로 하여금 이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회의하게 만든다.

 불로소득은 누군가의 손실이다. 부동산 불로소득은 누군간의 피눈물이다. 이 적폐를 뿌리 뽑지 않고서는 공정과 정의를 기대하기 어렵다.

 세계 10위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이다. 이제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주거권을 보장할 때다

 지역균형발전, 수도권 집중완화, 대규모 주택공급, 기본주택등의 영민한 정책집행이 필요하다. 하기로 작정하고, 용기있게 결정하고, 과감히 실행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자신감이 내게는 있다.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집 걱정 사라지게 하는 것이 내 목표 중 하나다. 혼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부정과 불의를 끝내겠다는 백만, 천만 국민의 뜻과 의지가 있다고 믿는다.

 

p173

 대학교 1학년 때 일이다. 1주일의 군사학교 입소훈련을 앞두고(*1988년까지 고등학교, 대학에 교련교육이 있었다. 남자의 경우 대학 1학년때 문무대에 입소해서 1주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았으며, 2학년때는 전방 군부대에 입소해서 1주일간경계 근무 체험 -  GOP에서 철책선 근무, 매복 등 -을 하게 된다. 학생 때 힘든 경험일 순 있는데 문무대 1주일 입소 혜택이 군대 45일 면제, 1주일 군부대 입소가 군대 45일 면제, 합하면 90일, 무려 3달의 군대 기간 면제 혜택이 있었다. 당시 일반적 육군의 복무기간은 30개월이었는데, 이 혜택 여부에 따라서 대학을 나온 후임병장이 그렇지 않은 선임병장보다 먼저 제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2학년을 마치고 나서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가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교련 교관이 장애를 증명하는 진단서를 떼어오라고 했다. 성남의 가장 큰 병원으로 갔다. 진단비가 2만 원이라고 했다. 돈이 없던 나는 발길을 돌렸고, 다음날 어렵게 2만 원을 마련해 들고 갔다. 그런데 병원에선 접수비 1천 원을 더 내라고 하더니 X-선비 1만8천 원도 추가로 요구했다. 무려 3만9천 원이었다. 화가 났다. 다른 병원에 정화를 걸어봤지만 취급하지 않는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병원은 에누리 없는 시장논리로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치료도 포기했던 나였다. 마음이 씁쓸했다. 나는 진단서를 포기했다. 그리고 경험 삼아 입소를 하기로 하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런 일을 겪으며 의료에서 공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다급한 생명의 문제이지 않은가? 성남시립병원 설립 추진운동은 다수 서민들을 위한 길이었다. 결국 나는 추진위원회의 공동대표를 맡게 됐다.

 우리는 시립병원을 세우기 위해 주민발의 조례제정에 나서기로 했다. 주민발의 조례제정은 지방자치에 처음 만들어진 제도였고 교과서에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겠다고 꺼내 든 것.

 지역 정치인들이 비웃었다.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퍼포먼스 정도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진심이었다. 나 또한 그때도 지금도 한다면 하지 시늉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 우리는 노상에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주민발의 참여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노조원들과 성남시민모임뿐만 아니라 변호사 사무실 상근자들까지 달라붙었다. 새벽 2시까지 일하는 날들이 반복됐다.

 그렇게 주민발의자 18,595명을 모았다. 주민발의자는 자신의 거주지와 신원을 증명하는 주민증까지 확인해야 한다. 그런 발의자를 3주 만에 2만 명 가까이 모은 것이었다. 설립 지지 성명에는 2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 구도심 지역 시민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였다.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에 우리 모두가 놀랐다.

 

p176. 47초 만에 무산된 시민의 꿈

 마침내 2004년 3월 24일, '성남의료원 설립 및 운영조례안'이 성남시의회에 상정되었다.

 당일 시의회 참관인석에 자리 잡은 우리는 시장과 시의원들이 시립의료원을 설립하라는 성남시민의 압도적인 바람과 여론을 쉬 무시하지 못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됐다. 단 47초 만에 '심의보류'가 선포된 것이다. 심의보류는 사실상 부결이자 폐기였다. 최소한의 찬반 토론도 없이 그랬다. 경악스러웠다.

 유동인구 50만이 넘는 성남 본시가지에 변변한 종합병원은 물론 공공의료시설이 제대로 없었다. 주민들은 가장 필요한 것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또 정당한 권리와 방법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47초 만에 날치기로 묵살당했다. 한나라당이 장악한 성남시의회는 시민을 발끝에 차이는 돌부리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분노한 우리는 본회의장으로 들어가 강하게 항의했다. 놀란 시의원들은 서둘러 꽁무니를 뺐다.

 텅 빈 회의장에 주저앉아 모두 울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주권재민은 사전에만 있는 죽은 언어란 말인가.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성남시의회는 한술 더 떠 시민대표와 나를 특수공무집행 방해로 고발했다. 그것이 시민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였다. 나는 체포를 피해 시청 앞 주민교회 지하실에 숨었다. 체포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고발당한 시민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변호사님,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 지하실로 찾아온 인하병원의 노조위원장 정해선이 물었다.

 "우리가 만듭시다."

 내가 대답했다.

 "어떻게요?"

 "우리가 시장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병원 만듭시다."

 그 일로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아 파크뷰 사건에 이어 두번째 전과가 생겼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3년 나는 성남시장으로서 성남시 의료원 착공식에 착공 기념 발파 버튼을 눌렀다.

 

p180. 이재명 제거 작전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나흘에 3일꼴로 압수수색과 조사, 감사, 수사를 받았다.

 집무실과 집에 대한 압수수색은 기본이었고, 검경은 해외출장 시 퉁화한 목록, 어머니가 시청에 출입한 CCTV 기록까지 요구했다. 성남시 공무원 수십 명이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시청과 집에 50명의 검사와 수사관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2012년 이명박 정권은 나에 대한 40쪽 분랸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청와대와 행안부, 한나라당 소속 김문수 지사의 경기도가 성남시에 대한 내사에 들어가 2개월에 걸쳐 조사한 결과다.

 당시 청와대 내부에서는 나를 물너나게 해야 하며, 성남의 보수 시민단체를 움직여 주민소환 투표를 유도한다는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거론됐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재인 정권이 개혁하려 했던 구태 검찰세력은 나를 잡기 위해 온갖 시도를 했다. 때문에 선출직 공직자 생활 12년 동안 처음 2년을 뺀 나머지 기간 내내 정치적 명운을 건 사법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나는 기득권의 표적이며 끝없이 감시받아 왔다.

 왜 그러한가. 덤볐기 때문이다. 공익을 위해 덤볐다. 적폐와 손잡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온갖 의혹이 더해졌고 '아니면 말고' 식의 언론보도로 수없이 고약한 이미지가 덧대졌다. 나는 내가 어항 속 금붕어임을 잘 알고 있다. 호시탐탐 나를 제거하려는 세력은 지금도 매순간 나를 캐고 흔들어댄다. 이는 팩트이다. 그러하니 부패가 내겐 곧 죽음이다.

 내가 희망하는 사회는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길 희망한다.

 하지만 누구나 더불어 함께 잘 사는 그런 세상은 가만히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어서, 나의 싸움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다만 혼자 싸워서는 절대 이길 수 없음을 절절히 느낀다. 함께 싸워줄 동지들이 필요하다.

전작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6년만에 나온 신작. 하루키 작품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작품의 초반부를 읽으면서 얼마되지 않아 '익숙한 스토리와 구성인데?'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도시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부터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그대로 떠올리게 된다.

소설 말미에 작가후기에서도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중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1980년 문예지 '문학계' 발표)를 처음 다듬어서 쓴 장편이 1996년에 나온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였다고 밝혀놨다.

작가는<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는 다른 대응이 또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하는데 속마음으로는 아마도 조금은 미진하거나 걸리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도 든다.

개인적으로도 1996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세계의 끝>은 최근(2년 전쯤)에 들어서야 읽어봤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다.  다 읽고 나서도 뭔가 빠진 부분이 있다고나 할까?

이 작품도 그리 개운하진 않다. 카페 여주인과의 스토리를 좀 더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데 급작스럽게 끊겨버리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세계의 끝>보다는 진일보한 작품이란 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후기 말미에 작가는 이런 말을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 - 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 = 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하루키의 주요한 작품은 크게 3개라고 본다.

1. 양 3연작 시대(초기)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2. 노르웨이의 숲

3.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이후 

 

특히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이후의 작품은 거의 동일한 모티프의 변주이고 그 중 최고의 작품은 <태엽 감는 새 연대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번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여전히 내겐 2% 정도 부족해보이는데, 70대가 넘는 노작가가 아직도 그의 작품 세계의 결말을 내지 않고 정진하는 모습은 어떤 면에선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도 있다.

신변잡기의 에세이. 탁현민은 책을 쓸수록 갈수록 필력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사소한 추억의 힘'인지는 마지막 에필로그 말미에 쓰여있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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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여읜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읜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우리는 그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바늘 끝이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나침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 <지남철>

 

p7

 스필버그 감독은 1982년 개봉된 영화 <이티>에는 총을 든 경찰관이 어린아이들을 쫓는 장면이 포함돼 있었는데, 20주년을 기념한 재편집 작업에서 총을 든 장면을 무전기를 쥔 장면으로 교체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실수'였다는 회고였다.

 "<이티>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그 어떤 영화도 현재 시점의 렌즈를 통해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수정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영화는 영화를 만들었던 당시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세상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보냈을 때 세계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등을 보여주는 일종의 이정표다."

 

p9

 절망과 위로, 그 모든 순간에 그것이 극단으로 치닫게 하지 않는 장치(裝置)가 있다라는 것이다. 바로 성찰과 웃음이었다. 실패를 복기하는 과정은 괴롭지만, 과정의 성찰은 곧 위로였다. 또한 괴롭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은 가장 뛰어난 탈출 버튼이었다. 모든 위로의 순간에는 반드시 성찰과 웃음 포인트가 함께 있었다.

 

p19

 내 평생 스승은 "어떤 일에 쓰일 때 자기 능력의 70퍼센트 정도만 해도 되는 자리가 가장 적당한 자리"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높은 지위나 원하는 역할에 욕심을 내기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적당히 해도 좋은 성과를 내며 즐겁게 일할 수 있다면 그게 자신에게도 조직에도 이상적이라는 말씀이었다.

 청와대에서 처음 일하게 되었을 때 일의 고됨과 책임의 막중함을 자주 토로하기는 했지만 한참 징징거린 후에 돌아서서는 씩 웃기도 많이 웃었다. 한동안 쓰임이 없다가 모처럼 쓰이니 쓰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어진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쓰임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욕심이 나의 능력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의 능력치가 100이라 할 때, 그 사람이 60이나 70 정도만 하면 되는 자리에 놓이면 어느 순간부터 욕심이 생긴다. 자신의 능력만큼, 아니 그 이상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그러했다. 부여된 일보다 더 많은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더 많은 결정을 할 수 있고,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되는 자리와 권한에 욕심을 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결국 그런 쓰임이 없었다는 것이 저말 다행이었다. 100퍼센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100퍼센트를 요구받는 자리나 그 이상의 자리에 놓이면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사고(思考)의 여유도 상상력도 발휘하기 힘들어진다. 매번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이고 최선을 다해 보아도 능력의 한계만 절감하게 된다. 짊어여쟈 할 책임은 무거워져 결국에는 자기 능력의 100퍼센트를 다 채우지도 못하게 된다.

 하지만 능력이 100퍼센트라고 할 때 70퍼센트 정도만 해도 되는 자리에 놓이면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아도 주변의 기대치를 손쉽게 채울 수 있다. 기대치를 채우는 것뿐 아니라 30퍼센틔 여유도 가지게 된다. 

 30퍼센트의 여유, 이것이 단지 술렁술렁 일해도 되니 다행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생긴 30퍼센트의 여유가 그렇게 간절했던 상상력이 되고,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가능하게끔 해준다. 여러 국가 행사를 기획하고 연출하면서 나름의 상상과 실험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좀 더 많은 책임과 부여되었더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아쉬운 쓰임이었기 대문에 오히려 여러 일을 성공적으로 무사히 치러낼 수 있었구나 싶다.

 

 

p51(신영복 글)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무엇보다 글씨가 바른지 삐뚤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물은 빈 곳을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차곡차곡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살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p.74 마스터 요다의 가르침

 두려움은 분노를, 분노는 증오를, 증오는 고통을 낳는다(Fear leads to anger, anger leads to hate, and hate leads to suffering).

-<스타워즈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협> 중에서,

 마땅찮은 세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분노가 필요할 것 같지만 그게 꼭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편이 분노보다 유용할 때가 많다. 

 현실에서는 저주로 사람이 죽지 않고 증오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타인이나 다른 정치 세력을 탓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바라는 세상은 절대 오지 않는다. 남 탓으로 잠시 웃거나 정신 승리를 할 수도 있지만 그때뿐이다. 세상은커녕 한 개인의 삶도 절대 바뀌지는 않는다. 증오는 결국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분노와 증오의 문제에 관해서 김어준만큼 '순수'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와 나는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거쳐 이제는 윤석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의 5년을 제외하고는 영 마땅찮은 시절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그가 이러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기질 탓이 클 것이다.

 김어준은 어뜻 대충대충 무심해 보이지만 매우 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제안했을 때 상대방의 거절 의사가 분명할 때는 '그럼 할 수 없지' 하며 넘기고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뒷담화는 물론 군말도 없다. 믿기 어렵겠지만 생각보다 막말도 쓰지 않는다. '씨바' 정도가 그의 막말 한계선이다. 요즘 그의 방송을 보면 '바보', '멍충이'를 즐겨 쓰는 것 같다.

 나와는 <나는 꼼수다> 콘서트 때부터 인연이었으니, 알고 지낸 지 십 년이 넘었다. 일이 있으면 밤낮 가리지 않고 연락을 주고받지만, 일이 없으면 몇 달씩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 나이는 나보다 네댓 살 위인데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탁'이나 '자기'라고 불렀고, 나는 그를 '김어준'이나 '총수'라고 부른다. 그러한 호칭과 관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불편해하거나 불만을 이야기한 적도 없다. 한마디로 뒤끝이 없다. 그의 순수함은 이런 '뒤끝 없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분노가 증오가 되기 딱 좋은 시대다. 모쪼록 그의 순수한 분노를 많이들 배웠으면 좋겠다.

 

p177. 모그바티스

 모그바티스는 촌장이 마을의 대소사는 물론이거니와 여러 분쟁을 조정하고 크고 작은 일들을 결정한다. 촌장의 결정이 법적 효력이나 강제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결정을 내리면 누구도 더는 불만을 갖지 않는다. 사람들은 촌장을 두고 '이편도 저편도 아닌 사람'이라 말한다. 누군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어느 편도 아닌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여기 사는 이들의 생각이라고 한다.

 나는 촌장에게 물었다. "그건 민주주의도 아니고 대체 뭐죠? 어느 쪽이든 자신의 주장을 펴고 그걸 다수가 받아을이는 것도 아니고, 양쪽의 주장을 듣고 촌장이 결정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독재 아닌가요? 뭔가 이상하네요."

 촌장은 대답했다. "민주주의요? 다수의 의견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민주주의는 종종 엉뚱한 선택을 하곤 하죠. 안 그렇던가요?"

 

p178

 해거름에 해변 모래사장을 헤집으며 느릿느릿 지나는 소 한 마리와 몽이꾼도 보았다. 뭘 하는 것이냐고 묻자 "백사장 아래 묻혀있는 오래된 사람들의 지혜를 찾고 있다"고 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혜와 같이 소중한 것을 파도가 조금만 밀려와도 쓸려가는 해변에 묻어 놓다니... 왜 그 소중한 것을 거기에 묻어놓는 것일까 싶었다.

 "당신은 지식과 지혜를 구분할 줄 모르는군요. 지식은 구하는 것이지만, 지혜는 발견하는 것입니다. 모래밭에 지식을 묻어놓으면 언제고 큰 파도에 쓸려 사라지지만, 지혜는 어떤 파도가 와도,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에서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p241. 날짜는 잊어도 날씨는 안다

 종종 날짜를 잊었다. 대체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갓지던 협재해수욕장이나 금능해수욕장에 차들이 들어차면 그제야 '아, 주말이구나' 싶고, 혜심언니의 게스트하우스나 추의 작은집이 썰렁하게 느껴지면 '아, 월요일쯤 됐겠군' 싶었다. 도시에서 월간, 주간, 일간에 더해 시간 단위로 끊어 살던 기억이 너무도 아득해서 괜히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야 일 없는 여행하는 처지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이곳에 사는 혜심언니나 추나 효주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간혹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 "오늘이 며칠이지? 무슨 요일이지?" 하면 다들 한참 대답을 못 하고 휴대폰이나 다이어리를 뒤적이곤 했다.

 오늘이 며칠인지를 잊고 산다는 것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과 내일이 이어진다는 것과, 날짜보다 중요한 무엇이 있다는 것인데 날짜를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날씨'였다.

 제주의 변화무쌍한 날짜는 종일 기상청 예보를 살펴보게 했고, 아침저녀그로 꼭 몇 번씩 확인하게 했다. 사람들은 누구라도 날짜는 몰라도 날씨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세 시간 간격으로 예보되는 날씨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자신만의 기상 예측도 열심히 했다. 구름의 흐름이나 바람의 세기, 그리고 파도의 높이까지 고려해 각자의 예보를 낼 정도로 날씨에 민감했다.

 아침 바람이 습하고 무거우면 저녁엔 반드시 비가 온다거나, 중산간의 구름이 얼마쯤 지나면 이곳 한림까지 내려온다거나, 제비들이 유난히 낮게 날며 분주하면 오후에 후텁지근할 것이라든지, 매미가, 개구리가, 물색이, 파도가, 석양이, 달무리가, 어떻다는 걸로 어떻게 해서든 날씨를 알아내기 위해 다들 노력했다. 

 날짜를 헤아리며 사는 것과 날씨를 예측하며 사는 삶은 어떻게 다른 걸까?

 도시에서의 삶이란 결국 끝없는 약속과 정해진 기한과 계획과 그것들을 점검함으로써 하루를 보낸다. 날짜와 시간을 몰라서는 이런 것들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다이어리를 살펴야 하고, 시계를 쳐다봐야 하고, 알람을 울리고 다시 그 알람을 재설정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래야만 실수가 없고, 그래야만 별 탈 없이 살 수 있다.

 하지만 섬에서 날짜와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예컨대 고기를 잡는 데 특별한 약속과 기한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오로지 바다 상태와 날씨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내가 오전 11시에 참돔을 잡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그게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저녁 6시에 금오름에서 해지는 것을 보겠다는 것은 나만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참돔도, 금오름도 그 모든 것은 날씨가 결정한다.

 2박 3일간의 제주도 여행에서 도착하면 한수풀식당에 가고, 오후에는 저지오름에 갔다가, 저녁에는 신창리에서 해지는 풍경을 보고, 다시 아침에는 차귀도에서 잠수함 투어를 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워온 커플이 있었는데, 그들은 결국 종일 내리는 비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다 신경질을 내며 떠나는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다.

 그러니 섬에서는 날짜와 시간보다 날씨가 먼저가 되고, 삶의 태도와 방식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도시에서 웬만한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거나 해도 큰 걱정이 없다. 큰 태풍이 몰아쳐도 대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된다. 심심한 재난 영화나 안타까운 뉴스 정도일 뿐이다.

 나 역시 아파트에서 주차장으로, 주차장에서 다시 다른 주차장으로 이동하면서 때로는 비가 아무리 와도 우산조차 필요 없을 때가 많았다 간혹 거리를 걷게 되더라도 여차하면 들어갈 카페나 건물의 처마가 연이어 있었다. 다만 걱정은 약속 시간에 맞출 수 있느냐 없느냐일 뿐이었다. 비가 오면 차가 좀 막히니까.

 섬에서는 비 오는데 나가봐야 고생이다. 우산은 뒤집히고 우비를 입어도 세찬 바람에 금세 젖는다. 그러니 비가 오면 잠시 멈추고 빗소리를 들으며서 집 앞 텃밭을 돌보다가 해가 뜨면 오후 물때에 맞춰 배 타고 나가 고기를 잡는다. 날씨가 좋고 바람이 불면 서둘러 밀린 빨래를 널고, 해 질 녘에 구름이 걷히면 오름에 올라 해지는 풍경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섬사람들의 약속도 대충 그렇다. '저녁이나 먹지'라고 하지 '몇 시에 저녁 먹자'고는 잘 안 한다. '내일 보자'고 하지 내일 몇 시에 보자는 건지는 잘 안 알려준다. 처음엔 그걸 잘 몰라 괜히 저녁밥 때보다 일찍 가서 일없이 빈둥거리거나 때로는 밥때보다 늦어 타박을 듣곤 했다. "대체 저녁을 먹으려면 몇 시에 가야 하느냐"고 묻자 "배고플 때 오면 되지" 했다. 맞는 말이다. 어차피 밥 먹는 게 목적인데 6시든, 7시근 그게 뭐 대수인가, 배고플 때 먹으면 되지.

 시간에 갇혀 사는 것과 날씨에 갇혀 사는 것, 우리, 어떻게 사는 게 더 나은 것일까.

 

p.257

  혼자 지내는 날이 많으니 음식 해 먹는 솜씨도 꽤 늘었다. 한림 수협 마트나 하나로 마트에서 장을 봐 유튜브 영상 레시피를 따라 만들어 먹는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카레라이스, 오므라이스, 볶음밥 같은 것은 이제 기본이고 돼지주물럭, 청경채 볶음, 두부조림, 오삼불고기, 궁중 떡볶이 최근에는 등갈비찜에까지 이르렀다. 실패도 있었고 시련도 있지만 꾸준히 나아지는 중이다. 다음에는 춘장을 사서 해물짜장을 만들어 보려 한다.

 

p259

 제주에 머무는 동안 내가 생산적이지 않았으면 한다. 좀 더 유약했으면 한다. 매사 별 뜻 없고 의미 없었으면 한다. 온갖 사소한 것들과 함께 유유자적 지낼 수 있으면 한다.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위해서, 다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필요하다. 대단치 않은 것들, 사소한 것들이야말로 삶에 큰 위로가 되어 주니 그래서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다음 단계로 발전하기 위한 조국의 2가지 화두에 대한 제안.

대한민국의 사회권 확대와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독재에 까지 이른 검찰권력의 해체 그리고 재벌 해체의 이유와 그 의미에 대해서 고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작인 가불선진국과 어떤 면에서는 이어지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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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0

 군사독재 시절에는 물론 '1987년 헌법체제' 아래에서도 검찰은 현재의 "살아 있는 권력"에 충성했다. 2023년 10월 18일 김의겸 민주당 의원은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 질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YS(김영삼 정부) 때 검찰에 출입했는데, 그때 서울(중앙)지검의 모 차장 검사가 기자들 앞에서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물고 물지 말라면 안 문다'고 했다. 

 2013년 11월 고 이용마 MBC 기자는 월간지 《참여사회》 11호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검사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권력의 사냥개'다. 주인이 "가서 물어!"라고 시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가서 무는 존재, 주인이 시키기 전에는 절대 물 수도 없는 존재다.   하지만 최근엔 이런 사냥개 이미지에 한 가지 더 덧붙여졌다. 권력자에게 빌붙어 아양을 떠는 애완견 이미지다. 돈 많고 힘센 권력자들의 무법 행위 앞에서 비굴하게 꼬리를 내리고 기분에 맞추려고 보이는 형태는 빗댄 것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검찰은 전두환-노태우가 주도한 12·12 쿠데타와 5·17 군사반란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로 불기소처분을 했다. 검찰의 정치적 편향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데 자신들의 '부역附逆'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 결정의 주임검사를 맡은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 장윤석 부장검사는 후일 참여정부 시절 검찰 게시판에 정부 비판 글을 올리고 사직한 후 국민의힘 전신인 한나라당 국회의원(경북 영주시)이 된다. 물론 이 '성공한 쿠데타 처벌 불가론'은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고, 그 여파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지시와 군사반란 주모자들에 대한 공소시효를 정지시키는 '5·18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정치적 민주화 이후 검찰은 점점 조직의 외연과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독자적 '준準정당'으로 변화해 갔다. 개발독재 단계에서는 소수의 조직화된 군부 엘리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권력을 독점적으로 운영했다면, 개발독재를 벗어나는 시점부터 여러 다른 권력 엘리트 집단이 목소리를 내게 된다. 그들은 정권 초기에는 정치권력과 협력하고 정권 말기에는 미래의 권력에 줄을 대고 현재 정치권력을 공격하면서 독자적 힘을 키워나갔다. 같은 맥락에서 김누리 교수는 "'폭력의 지배Autocracy'에서 '자본의 지배Plutocracy'를 거쳐 '기술관료의 지배Technocracy'로 이행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검사동일체'와 '상명하복'을 조직 운영 원리로 삼고 있던 검찰은 다른 엘리트 집단에 비해 우위에 섰다. 대한민국 검찰은 OECD에 속한 다른 국가의 검찰과 달리 '수사권',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 '기소권', '영장청구권' 등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엘리트 집단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무기'를 가진 검찰은 정치권력과도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권력의 사냥개'에 그치지 않고, '주인'인 정치권력이 약해진다 싶으면 '주인'을 물어뜯었다. 이즈음 "정권은 유한하고 검찰은 무한하다"라는 건배사가 검찰내에서 공유되었다.

 군부의 총칼이 최고의 무력이었던 시간이 끝나가면서, 수사권·기소권·영장청구권 등 이른바 '검찰권'이 최고의 무력이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시대가 끝나가면서, 법이 주먹 같은 역할을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p34

 2012년 이명박 정부 말기, 제18대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국가정보원 소속 심리정보국 요원들이 댓글공작을 전개한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통합당이 국정원 전현직 관계자로부터 제보를 받고 경찰에 신고했고, 민주통합당과 경찰은 심리정보국 요원 중의 한 명인 김하영 씨가 작업을 하던 오피스텔을 찾아가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국가정보원이 자행해 온 불법 대선 개입이 발각된 것이다.

 당시 김용판 경찰청장이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압수수색영장 신청을 신중히 결정하라는 취지의 말을 했고, 권 과장이 이를 폭로하자 총경 승진에 탈락하고 관악경찰서 여성청소년과장으로 발령이 난다. 이후 2013년 경찰은 이 사건을 국정원의 선거 개입으로 결론을 내리고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사법연수원 23기)을 팀장으로 특별수사팀을 구성해 수사를 전개했고, 원세훈 국정원장, 김용판 경찰청장 등을 기소한다. 당시 부팀장은 박형철 부장검사(사법연수원 25기)였다. 이후 윤석열은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고, 박형철은 검찰을 떠났다. 그렇지만 권력기관 내 국정원의 절대 우위는 무너지게 된다. 10·26 사태 이후 중정이 보안사에 의해 타격을 받았다면 이제는 검찰에 의해 타격을 받았고, 이 검찰 수사는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김용판 청장은 이후 2020년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의 국회의원(대구달서병)으로 당선되는데, 윤석열 검찰총장은 훗날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된 후 김 의원을 만나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막걸리를 마시며 화해했다고 보도되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치고, 언제든지 손잡는 정치의 민낯을 보았다. 나는 대체 윤 후보가 김 의원에게 무엇이 미안했던 것인지 의아했다.

 이 국정원 선거 개입 수사 과정에서 국정원과 맞섰던 윤석열, 권은희 두 사람은 대중적 인기를 얻었고, 범진보 진영은 이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나 역시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냈다. 특히 윤석열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특별수사팀장은 2013년 10월 21일 국정감사에서 조영곤 전 서울중앙지검장 등 윗선의 수사 축소 압력을 폭로했고, 이 자리에서 그가 한 말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크게 회자되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말 앞에 이루어진 문답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즉, "조직을 사랑합니까?"라는 당시 여당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의 질문에 윤 검사는 "네, 대단히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의 답변을 종합하면,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검찰 조직에 충성한다"는 뜻이었다.

 박근혜 정권에 의해 인사불이익을 받은 윤석열 검사는 2016년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을 수사하는 박영수 특별검사에 의해 수사팀장으로 발탁된다. 수사팀장으로 내정된 윤 검사가 한 말도 인기를 끈다. "검사가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입니까?"가 그것이었다. 윤석열 검사는 이러한 두 번의 특별수사 과정 속에서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p37

 2017년 촛불혁명은 단지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었따. '국정농단'이라는 희대의 사태를 맞이해 진보와 중도 보수가 연합해 이루어낸 성과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유승민, 김수성 등 당시 여당 새누리당 안의 '비박非朴' 인사들이 동참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문재인 정부는 국정농단에 분노하고 박근혜 탄핵에 동참했던 합리적 보수 인사를 포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2017년 5월 19일 윤석열 검사를 검사장으로 승진시키면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파격 발탁했다. 당시 이 발표를 들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탄성을 기억한다. 당시 범여권 내에서 "윤석열은 검찰주의자일 뿐이다"라는 우려 섞인 지적도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윤석열은 검찰 내 '개혁 세력'의 상징적 인물이 되어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검찰을 제도적으로 개혁하려 했지만, 수사와 기소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과거 정부는 민정수석비서관을 검찰 고위 간부 출신으로 임명해 주요 사건의 수사와 기소를 검찰 수뇌부와 '조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검찰개혁 추진을 시대적 사명으로 생각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러한 '거래'는 검찰개혁의 후퇴를 초래할 수 있기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학자 출신인 나를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선택했다. 검사들이 비검사 학자의 '수사지휘'를 들으려 하겠는가. 청와대가 검찰 수사를 막거나 압력을 가했다면 이후 모두 직권남용죄로 기소되었을 것이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에 청와대가 일절 관여하지 않을 테니, 검찰도 검찰개혁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 문 대통령의 확고한 소신이었다. 나는 민정수석비서관 재직 동안 검찰개혀게도 방안 논의와 검찰 인사 협의를 위해 문무일 총장과 회동을 가진 적은 있지만, 수사와 기소 문제로는 어떠한 검사에게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청와대 안팎에서 검찰 수사에 대한 불만을 들어야만 했다. 정부 초기 검찰은 전병헌 정무수석과 김은경 환경부장관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감행했는데, 청와대는 사후 통보를 받았을 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이 수사와 기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단,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가 개시되었을 때 나느 이 수사가 과도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밝히고 싶다. '사법농단'과 관련 판사들에 대한 법원 내부 징계가 지연되는 상황에서 검찰이 전격적으로 강제수사에 들어간 데에는 이번 기회에 검찰에 대한 거의 유일한 사후통제기관이었던 법원을 길들이려는 검찰의 조직적 목표와 이익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사권 조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은 공수처 신설과 검경수사권 조정합의안에 모두 동의한다는 의사를 박형철 반부패 비서관을 통해 전해왔다. 윤 지검장은 검찰총장 후보 당시 청와대의 검증 인터뷰에서도 같은 뜻을 표명했다. 검찰에 대한 검사의 수사지휘권도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할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검찰총장 후보 청문회에서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에 대해서도 장기적으로 옳은 방향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윤석열 검사장이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후 검찰개혁에 대한 이러한 입장이 180도 바뀌었음은 확인된 사실이다. 2022년 2월 12일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오마이TV와의 인터뷰에서 "검찰총장 면접 당시엔 윤 후보가 4명의 후보 중에서 공수처의 필요성 등 검찰개혁에 가장 강력하게 찬성했는데 총장이 된 후부터 태도가 바뀌었다"면서, "그때 거짓말을 했다", "정직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거짓말'과 관련해 유시민 작가는 2023년 7월 19일 '매불쇼'에 출연해, 윤석열의 행동양식을 침팬지의 행동양식에 비유해 설명했다. 집단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수컷 침팬지는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하고, 우두머리가 되면 서열 밑에 있는 침팬지를 괴롭히고 그 위에 군림한다. 유 작가는 윤석열은 "말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은 " 사람이기에,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무슨 말이든 다 하고 "출제자의 의도"에 맞추어 답을 할 뿐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반해 침팬지와 달리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다른 유인원 보노보에 가까운 문재인 대통령은 윤석열의 말을 믿었다고 보았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문재인 정부에 대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 이후 누가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밀었느냐 등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가 계속되었다. 윤 총장에 대해 당시 집권 세력 전체가 기만당했고 그 결과 오판을 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기 전에 단지 고위 공직자 검증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민정수석비서관으로서 윤 검사에 대한 내부 검증을 철저히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자성한다. 민정수석실 내부에서도 윤 검사에 대한 평가가 갈리었는데, '검찰지상주의자'라는 비판을 더 심각하게 생각했어야 했던 것이 아닌지 자책한다. 요컨대, 다름 아닌 내가 최고 인사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p87

 헌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으나, 기소되고 나면 일반 사회에서는 '유죄추정의 원칙'이 작동하기에 피고인은 오랫동안 사회적 편견과 낙인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2021년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윤미향 의원 수사를 생각해 보자.

 언론과 정치권은 '윤 의원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해 돈을 챙겼다', '공금을 유용해 딸을 유학시켰다', '단체 자금을 유용해 개인 부동산을 구입했다', '안성힐링센터를 헐값에 팔았다', '배우자 회사에 일감을 몰아줬다' 등등 이후 허위로 판명된 수많은 혐의를 부각시키며 몰아세웠다. 그리고 검찰은 보조금관리법 위반, 지방재정법 위반, 사기, 기부금품법 위반, 준사기, 업무상 배임, 업무상 횡령, 공중위생관리법 위반 등 자그마치 8개 혐의로 기소하고 징역 5년을 구형했다. '먼지털이 수사'에 이어 '투망식 기소'를 한 것이다. '투망식 기소'는 수사를 마친 후, 최종적으로는 무죄가 나오더라도 온갖 혐의를 다 모아 일단 기소부터 하는 기법이다. 즉 '투망'을 던져 '뭐든 하나만 걸려라'라는 식의 기소를 뜻한다. 대중에게는 피고인이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인식을 심어 주고, 법원에는 모든 혐의에 무죄판결을 할 수 없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1심 법원은 이 중 7개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고, '10년 동안 1700만 원을 가져다 썼다'는 업무상 횡령 혐의에만 벌금형을 선고했다(유죄판결이 난 건의 경우 오랜 시간이 흘러 영수증을 확보하지 못한 탓이 컸다). 그렇지만 윤 의원에게 붙은 딱지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그는 민주당으로 복당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대해 마녀 사냥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전혀 사과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여전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p124

 우리는 '법치', 즉 '법의 지배rule of law'는 '법을 이용한 지배rule by law'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법치'는 단지 권력자가 법을 통해서 통치 또는 지배한다거나, 국민은 그 법을 무조건 준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법을 이용한 지배'에서 법은 통치의 도구이자 수단일 뿐이다. '법을 이용한 지배'는 조선시대에도, 일제강점기에도, 권위주의 정권, 군사독재 정권하에서도 이루어졌다. 권위주의 정권,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제정된 각종 '반민주악법'에 대한 예는 생략하기로 하자. 당시 '법치'는 (노동자 시인 백무산 씨의 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국가권력이 "법대로 테러"하는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는 자신이 내세우는 '법치'가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통치'라고 공문서에 명기했다(법무부는 'rule by law'를 '법에 의한 통치'라고 번역했다). 법무부는 세칭 '검수완박법'이라고 불리는 검찰 직접수사권 축소 법률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다. 그런데 법무부는 그 청구서에서 "법치주의는 법에 의한(rule by law)  통치를 의미하는 개념"이라고 밝혔다. 이 문서를 접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분명히 "rule of law"가 아니라 "rule by law"라고 적혀 있다. 이 문서는 온라인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 또는 군사독재 정권도 자신들의 '법치'가 '법에 의한 통치' 또는 '법을 이요한 지배'라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윤석열 정부는 노골적으로 이를 표명한 것이다. '법치'가 '법을 이용한 지배'가 될 때 법은 법의 외피를 쓴 폭력이 된다.

 

(검수완박법에 대한 권한쟁의 심판 청구는 법무부장관인 한동훈이 제기했으며, 헌재에서 각하 - 검수완박법은 합헌이다라는 의미 - 됐다)

https://www.newspim.com/news/view/20230323000843

 

[종합] 헌재, '검수완박' 효력 인정…법무부·검찰 권한쟁의는 각하

[서울=뉴스핌] 김신영 기자 = 헌법재판소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 과정의 위헌성을 일부 인정했다. 다만 법안 무효확인 청구는 기각해 법안 효력이 유지될 전망이다. 이와 별

newspim.com

 

 

 

p131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던 70대 노인이 뇌경색으로 쓰러진 처의 병 수발 때문에 대한주택공사를 찾아갈 수 없어서 결혼 후 분가한 딸의 명의로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했다. 처가 사망한 후 노인은 홀로 임대주택에서 살았는데 대한주택공사가 집을 비워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딸 이름으로 계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법대로라면 노인은 집을 나가야 했다. 그래서 1심 판결에서는 주택공사가 이겼다. 그런데 제2심 판견은 노인의 손을 들어줬다. 이 사건은 이후 대법원을 거쳐 조정으로 종결됐는데, 제2심 판결문 일부를 소개한다.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에 빨간 감이 익어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에선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대한주택공사)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이 판결을 접하면서 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했던 이탈리아계 정치인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가 떠올랐다. 그는 1930년대 초 대공황 시기에 잠시 뉴욕시 치안판사로 재판을 하게 됐다. 그는 배가 고파 빵을 훔친 어느 노파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했다. 이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 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모두에게 각각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방청객들은 순순히 벌금을 냈고, 라과디아는 이렇게 걷은 57달러 50센트를 노인에게 줬으며, 노인은 10달러의 벌금을 낸 후 47달러 50센트를 갖고 법정을 떠났다.

 

p136

 법률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법은 대개 특정 사회의 계급·계층·집단의 이익과 욕망, 그리고 꿈이 충돌하고 절충되어 만들어진다. 여기서 '강자' 또는 '가진 자'가 유리한 조건에 서게 됨은 분명하다. 그래서 법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바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피료하다. 각 계급·계층·집단의 요구와 주장과 논변論辯이 무엇인지 꿰뚫어야 한다. 법전을 넘어 현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특히 '약자'나 '갖지 못한 자'가 부당하게 대우받는 일을 막아야 한다.

 

 법률은 정치의 자식이다. 정치를 모르고 법률을 알 수 없다. 정치의 논리와 동학動學에 무관심하면 법률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정치는 투쟁의 영역인 동시에 타협의 영역이다. 각 정당은 자신들의 방향성을 담은 정강정책이나 소속된 정치인의 활동을 통해 그들의 비전과 가치를 확산시키고 이에 따라 사회를 바꾸고자 한다. 이때 치열한 논쟁과 논박論駁은 필연적이며 필수적이다. 이러한 토쟁은 종종 '선 대 악'의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궁극적으로 중간 중간 타협의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당동벌이黨同伐異'(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뜻이 같은 무리끼리 돕고 다른 무리는 배척한다)가 아니라 '구동존이求同存異'(같은 것을 추구하되 다른 것은 남겨둔다)로 가야 한다. 효율적인 정치는 이러한 타협의 영역을 많이 확보하고 이를 법률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정치다. 정당 사이에 공유하는 영역이 많아지고 이것이 신속한 법률로 마무리된다면 소모적인 정쟁은 줄어든다. '적'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견이 있는 부분까지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구동존이'를 넘어 '구동화이求同化異'(같은 것을 추구하고 이견이 있는 부분까지 공감대를 확대한다)에 이르는 길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야당을 처벌해야 할 '범죄자' 집단으로 파악하는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는 '구존동이'나 '구동화이'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적다.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대통령과 야당 대표와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2022년 정진석 당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그 이유를 "대통령이 지금 범죄 피의자와 면담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2021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윤 후보는 "제가 이런 사람하고 토론을 해야 되겠습니까? 참 어이가 없습니다. 정말 같잖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인식이 집권 세력 전체에 공유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윤석열 정권의 정치 방침은 '당동벌이' 그 자체다.

 

p146

 법률을 해석하는 입장도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이 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시대정신과 헌법정신에 충실한 법 해석은 초기에는 소수의견에 머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다수의견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 점에서, 존재하는 판례를 그저 암기만 하는 것은 법을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에서 확인되듯이 법 공부를 잘하려면, 제일 먼저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정립해야 한다. 법학은 '가치지향적 학문'이지 '가치중립적 학문'이 아니다. 어떠한 가치를 중심에 놓을 것인가를 스스로 분명히 하고, 다른 가치와의 소통과 타협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법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철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다른 학문을 알아야 한다. 법학은 독자적인 학문체계와 논리를 갖고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다른 학문의 시각과 성과를 흡수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법학은 편벽便辟하고 건조한 개념과 논리의 묶음에 머물고 말 것이다.

 

p152

 민주주의 형법은 존재하고 있는 법률의 내용이 정당한지, 실정법률이 국미느이 법 의식이나 법 관행을 초과하는지, 그리고 위반자에게 부과되는 제재가 과도한지 등을 따지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피치자被治者 국민데 대한 공감과 배려가 필수적이다. 요컨대, 민주주의와 인본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법의 이념인 정의는 후자의 정의, 즉 "연민의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지성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 바로 이것이 정의의 출발점이다.

 

p157

 전통적 정의론에서 강조하는 재화의 공정한 배분 -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이라고 요약되는 '배분적 정의' - 에 집중하는 한편 "지배와 억압"을 문제 삼아야 한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막는 것이 바로 지배와 억압이기 때문이다. 16세기 영국에서 사상가이자 대법관으로 활약했던 토머스 모어는 1516년에 쓴 <유토피아>에서 일반 서민들에게만 적용되는 정의인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닥을 기는 정의"와 군주들의 정의인 "원하는 것은 다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정의"를 대비시켰다. 전자에 대한 후자의 지배와 억압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적 재화의 공정한 배분은 불가능하다.

 

p192

 나는 정치사상가 샹탈 무페Chantal Mouffe가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로 남긴 글의 진짜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불확실하고 일어날 법하지 않은 어떤 것이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항상 허약한 정복이며, 심화시키는 만큼 방어도 중요하다. 일단 도달했다고 해도 그 지속성을 보증할 민주주의의 문턱 같은 것은 없다."

 

 '검찰독재'와 '경제독재', '검찰공화국'과 '삼성왕국' 모두 무섭고 두렵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핵심 중 하나는 '일인일표제'다. 한 표를 가지 주권자 한 명이 검찰이나 재벌과 싸워 이길 수 없다. 한 표, 한 표가 모이면 달라진다. 또한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외 '광장민주주의'를 요구한다. 촛불 하나하나가 모이면 달라진다.

 

p210

 어려운 시절이기에 안토니오 그람시의 유명한 말을 되새긴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그는 어린 시절 사고로 꼽추라는 장애를 가진 채 성장했고, 이후 이탈리아의 대표적 공산주의자로 반파시즘 투쟁에 앞장섰다가 2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약 11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성적 비관"과 "의지적 낙관", 이는 재벌공화국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성이다.

 

p212. 사회주의의 진짜 의미

 1987년 헌법체제 이후 여러 번의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1997년 'IMF 체제'가 요구한 신자유주의의 요구는 우리 사회의 근본을 바꿔놓았다. 정치적 민주화는 경제적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투사들도 심화되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싸우는 데는 주저했다. 안착된 줄 알았던 정치적 민주주의도 흔들리고 있다. 소련 등 국가사회주의가 붕괴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화되고 첨예해지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예고는 우리나라 상황에도 딱 들어맞아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경제 성장은 우리 대부분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압도적 다수인데도 여전히 그 수가 급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도 더 심각하고 냉혹한 불평등과 더 불안정한 조건 및 더 많은 추락과 원통함과 모욕과 굴욕을 겪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즉, 사회적 생존을 위한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싸움을 예고한다."

 

 

 자본주의 모순을 비판하는 최고 이론은 여전히 사회주의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에 대해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악마시하는 데 급급했다.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서술 또한 21세기 한국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사회주의라는 말에 당황스러운 침묵으로 대응하는 것은 오직 미국만의 특수한 현상이다.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공공 정책에 대한 논쟁의 방향을 바꾸는 데 필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사회주의'의 기미가 보이거나 그 같은 성향을 지닌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든 의심부터 하고 보는 미국인들의 뿌리 깊은 성향을 극복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사회주의 논리가 도움이 될 수 있는데도 '냉전의 논리'로 무작정 반대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사회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이론과 사상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서는 그와 같은 모순을 없애거나 줄일 수 없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사회주의가 평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임을 나도 잘 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상당한 수의 어용 문사와 말주변 좋은 교수들이 사회주의가 약탈적 동기를 그대로 놓아둔 계획적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바쁘다.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등사상에 있다.

 자본주의가 온갖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평등사상'은 여전히 소중하다. 이 사상을 구현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다. 알랭 바디우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평등한 기회를 부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것이 정치의 고민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국가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리영희 선생이 공언한 다음과 같은 말씀의 무게는 묵직하다.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재 시장경제의 비인간성, 사회적 다윈이즘의 극단 형태인 사회·경제적 약육강식과 그 무자비성, 윤리성을 상실한 과학·기술 만증주의, 자본의 과학·기술 지배구조로 말미암은 인간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공포 등 사회주의에 대해서 21세기가 거는 요구와 기대는 19세기나 20세기의 소수 국가들에서 보였던 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 못지않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어요."

 

 장하준 교수의 전작인 '나쁜 사마리안'이나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는 읽다가 말았는데 이유는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재미없는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 때문에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이 책은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주제로 넘어가는 현란한 기술에 깜빡 속아넘어가는 덕분인지 재밋게 읽었다.

 이 책 덕분에 현대의 주류경제학이 미국이고 미국의 주류경제학은 신고전학파라는 사실도 리마인드하게 됐고, 저자는 이러한 획일주의적 경제학이 싫어서 다양한 경제학 담론이 살아있던 시대의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그간 경제학에서 알게 모르게 선입견처럼 가지고 있던 사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장하준 교수의 다른 책도 다시 한번 시도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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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

 많은 이론에서 필수 사회 서비스로 간주하는 의료, 교육, 상하수도, 대중교통, 전기, 주거 등을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면, 그 이론은 '1인1표'라는 미눚 사회의 원칙을 축소하고 '1원1표'라는 시장 논리를 확장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p75

 지난 150여 년에 걸쳐 자본주의가 좀 더 인간적이 된 거은 오로지 자유 시장적 시각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신성불가침으로 여겼던 자산 소유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우리는 자산 소유자들의 경제적 자유가 대중의 정치적/사회적 자유와 충돌할 때 후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민주 헌법, 인권법, 평화로운 시위에 대한 법적 보호 등이 그 예다. 자산 소유자들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하는 수많은 법 - 노예 제도와 연한 계약 노동의 금지, 노동자의 파업 권리 보호, 복지 국가 설립, 공해 물질을 배출할 자유 제한 등 - 을 도입했다.

 

p88. 가난의 근본적 원인

 이처럼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한다면 그들의 빈곤이 근면성 부족 때문일 수가 없다. 문제는 생산성이다. 이들이 부자 나라 국민보다 인생의 훨씬 더 긴 기간, 훨씬 더 오래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만큼 많이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것은 생산성이 그만큼 높지 않아서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성이 낮은 것은 교육 수준, 건강 등 노동자 개인의 능력이나 조건과 크게 상관이 없다. 노동력의 질은 전문직이나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직종에서는 생산성의 차이를 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종에서 가난한 나라 노동자와 부자 나라 노동자의 개인적 생산성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점은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 나라로 이민 온 사람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민을 왔다고 갑자기 없던 기술이 생기거나 건강이 급격히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 그들의 생산성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것은 더 양질의 사회 기반 시절 infrastructure(전기, 교통, 인터넷 등)과 더 잘 기능하는 사회적 체제(경제 정책, 법률 체계 등)를 기반으로 해서 더 잘 운영되는 생산 시설(공장, 사무실, 가게, 농장 등)에서 더 나은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양실조에 걸린 당나귀를 타고 애를 쓰던 기수가 갑자기 좋은 혈통의 경주마를 타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기수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누가 경주에서 이기는가는 만흔 부분 기수가 탄 말이 결정한다. 

 가난한 나라들이 왜 덜 생산적인 테크놀로지와 사회 체제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로 낮은 생산성밖에 달성하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를 이 짧은 장에서 만족스럽게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저부가가치 1차 상품 생산에 특화된 구조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 식민주의 역사의 잔재, 만성적 정치 분열, 엘리트 계층의 무능력(비생산적인 지주, 역동적이지 못한 자본가 계급, 비전 없고 부패한 정치 지도자), 부자 나라에 유리하도록 편성된 국제 경제 체제 등은 굵직한 이유들 중에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역사적/정치적/테크놀로지적 문제 때문이고, 이는 그들이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개인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열심히 일할 마음이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다.

 

p99. 페루의 번영을 이끈 작은 생선

 멸치는 풍부한 맛뿐 아니라 한때 풍부한 부를 가져다주는 고마운 생선이기도 했다. 이 작은 생선은 19세기 중반 페루가 누린 경제적 번영의 원인이었다. 페루가 멸치를 수출해서 돈을 번 건 아니었다. 당시 페루는 바닷새의 구아노guano(마른 새똥)을 수출해서 국가적 번영을 누렸다. 구아노는 질산염과 인이 풍부하고 냄새가 그다지 역겹지 않아서 인기 높은 비료였을 뿐 아니라 화약의 핵심 재료인 질산칼륨이 들어 있어서 화약 제조에도 사용되었다.

 페루의 구아노는 태평양 연안의 섬들에 모여 사는 새들인 가마우지와 부비booby(얼가니새)의 배설물이다. 이 새들의 주된 양식은 생선, 특히 칠레 남쪽에서부터 페루 북쪽을 잇는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의 영양소 풍부한 훔볼트 해류를 타고 이동하는 멸치들이다. 훔볼트 해류는 프로이센 왕국의 과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훔볼트는 1902년 에콰도르에서 가장 높은 산인 침보라소 화산(6262미터)을 올라 당시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을 뿐 아니라 페루산 구아노의 장점을 최초로 유럽에 알린 사람들 중 하나다. 구아노가 페루 경제에서 너무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경제사를 다루는 사람들은 '구아노기'(1840년대~1880년대)라는 용어를 쓴다.

 구아노가 중요한 역할을 한 나라는 페루만이 아니었다. 1856년 미국 의회는 '구아노제도법Guano Islands Act'을 통과시켜서 아무도 살지 않고 다른 나라 정부의 관할 아래 있지 않다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구아노가 있는 섬은 미국 시민이 점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법 덕분에 미국은 태평양과 카리브해의 100개가 넘는 섬을 점거해서 페루산 구아노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영국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도 구아노가 쌓인 섬들을 점거했다.

 구아노로 인한 페루의 경제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호황이 시작된 지 30여 년쯤 지나자 과다 채취로 인해 구아노 수출이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870년 대규모 칠레 초석(질산나트륨) 매장지가 발견되면서 구아노 수출의 쇠락으로 인한 영향이 한동안 상쇄되었다. 초석은 비료, 화약 제조에 사용될 뿐 아니라 육류 보전에까지 쓰이는 질산염이 풍부한 광물질이다. 그러나 페루의 번영은 초석전쟁Saltpetre War이라고도 부르는 남아메리카 태평양전쟁(1879~1883년)과 함께 끝이 났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볼리비아 해안 지역 전부(그 결과 볼리비아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 되었다)와 페루 남부 해안 지역의 절반 가량을 점령했다. 그 지역에는 대량의 초석이 매장되어 있고 구아노도 많아서 칠레는 엄청나게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1909년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공기 중에서 질소를 분리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고압 전류를 사용해 암모니아를 만들고 거기서 인공 비료를 만드는 기술이었다. 말하자면 하버가 글자 그대로 허공에서 인공 비료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그 덕에 그는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때 사용한 독가스를 개발한 일로 악명이 높아서 그에게 노벨상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점잖은 자리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하버가 발명한 기술은 또 다른 독일의 과학자 카를 보슈에 의해 상용화되었다. 보슈가 일하던 '바스프BASF'는 '바덴에 있는 아닐린과 소다 만드는 공장'이라는 뜻의 바디셰 아닐린 운트 소다 파브리크Badische Anilin und Soda Fabrik의 약자로, 하버가 개발한 기술을 사들인 회사다. 오늘날 '하버-보슈법'이라 부르는 이 기술은 인공 비료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해서 구아노를 비료계의 황제 자리에서 추출하고 말았다. 구아노보다 더 중요한 질산염의 공급원인 초석 또한 가치가 없어졌다. 구아노와 초석에서 추출한 칠레의 천연 질산염 생산량은 1925년 250만 톤이었던 것이 1934년에는 불과 80만 톤으로 줄어들었다.

 

p107

 역사를 살펴보면 높은 생활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오직 산업화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다시 말해 혁신과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는 주된 근원인 제조업 분야를 발달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산업화를 통해 생산 능력을 더 높이면 자연이 우리에게 가하는 제약을 '마법처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칠흑처럼 새까만 석탄에서 선명하기 그지없는 새빨간 염료를 뽑아내고, 허공에서 비료를 만들어 내는가 하면 다른 나라를 침공하지 않고도 땅을 몇 배로 늘리는 것이 마법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거기에 더해 이런 능력을 갖추고 나면 긴 기간 동안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초석과 같은 재생 불가능한 광물 천연자원, 또는 멸치를 먹고 사는 새들의 분비물로 만들어진 페루의 구아노처럼 재생 가능하지만 과잉 채취로 결국 늘 '바닥이 나고야 마는' 천연자원과는 달리 한번 습득한 기술이나 능력은 고갈되지 않기 때문이다.

 

p116.  싱크 최대 수출국 일본은 어떻게 경제 강국으로 거듭났을까

 현대에 들어서면서 최대 실크 생산국은 한때 일본이었다. 일본은 7세기에 한국에서 양잠술을 도입한 이래 매우 긴 견직물 방적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직후 이 부문을 크게 키웠다. 1950년대 일본은 세게 최대 실크 수출국이었고, 실크 관련 상품은 일본의 최대 수출 품목이었다.

 일본인들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 및 유럽 국가들과 철강, 조선, 자동차, 화학, 전자를 비롯한 기타 '선진' 공업 부문에서도 대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기술 면에서 뒤쳐진 일본이 그런 부문에서 국제적으로 경쟁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높은 관세, 다시 말해 수입품에 높은 세금을 물리는 한편, 보호 사업 부문에서는 외국 기업들이 일본 내에서 영업하는 것을 금지하는 방법으로 외국과의 경쟁으로부터 국내 제조업자를 보호했다. 이에 더해 당시 정부의 엄격한 규제 아래 있던 은행들로 하여금 수익성이 좋은 주택 담보 대출이나 소비자 금융, 또는 이보다는 수익성이 조금 떨어지지만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실크 산업 부문보다 '선진' 공업 부문의 국내 기업들에 우선적으로 대출하도록 만들었다.

 일본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이런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본은 철강이나 자동차 같은 건 수입으로 조달하고 실크를 비롯한 방직 산업처럼 이미 잘하고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지적했다. 비효율적인 부문의 기업들, 가령 토요타나 닛산 같은 자동차 제조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외국산 차에 관세를 부과하면 소비자는 더 나은 외국산 차를 사기 위해 국제 시세보다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거나 품질이 낮고 미운 일본산 차를 사야 하는 손해를 봐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그리고 자동차 생산 기업처럼 비효율적인 산업 부문에 은행 대출을 하도록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입을 하면 실크 산업처럼 더 효율적인 부문에 돈을 투자해서 같은 자본으로 훨씬 더 큰 이윤을 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이는 흠 잡을 데가 없이 맞는 주장이다. 한 나라의 생산 능력을 고정된 것이라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어느 나라든 생산 능력은 변화할 수 있고, 현재 잘하지 못하는 것을 나중에는 잘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지만 - 더 나은 기계, 노동자의 기술 습득, 테크놀로지 연구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 -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일본의 자동차, 철강, 전자 등 수많은 산업 분야에서 일어났다. 1950년대에는 국제 시장에서 경쟁할 꿈도 꾸지 못했던 산업 분야 중 많은 수가 1980년대에 들어설 무렵에는 세계 1위에 등극해 있었다. 한 나라의 생산 능력에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는 데는 적어도 20여 년이 걸린다. 이 말은 자유 무역 환경에서는 이런 변화가 생길 수 없다는 뜻이다. 자유 무역 체제에서는 신생 산업 부문의 비효율적인 초보 기업들이 우월하고 규모가 큰 외국 경쟁 업체들에 순식간에 전멸당하고 말기 때문이다.

 

p120

 그렇다고 해서 유치 산업 보호 정책이 반드시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보장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유치 산업 또한 잘못 키우면 '성숙'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수많은 개발도상국이 과도한 보호 정책을 쓰는 바람에 국내 기업들이 태만해졌고, 시간이 흐른 후에도 보호 정책을 줄이지 않아 생산성을 향상시킬 동기 부여를 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유치 산업 정책을 가장 기술적으로 운용한 일본과 한국 같은 나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보호 정책을 단계적으로 줄여서 그런 위험을 피했다. 자녀가 성장해 감에 따라 보호의 손길을 차차 거두고 더 많은 책임을 자녀에게 주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유치 산업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한때 경제적 새우였던 나라들 - 18세기의 영국과 19세기의 미국, 독일, 스웨덴, 20세기의 일본, 핀란드, 한국 - 은 오늘날 세계 경제의 고래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p230

 복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나라의 시민(그리고 장기 거주자) 모두가 동일한 보험 패키지를 대량 구매를 통해 싼값에 에 구입한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을 가장 쉽게 이해하려면 바로 부자 나라 중 보편적 공공 의료 보험 제도가 없는 유일한 나라인 미국과 다른 부자 나라들의 의료 비용을 비교해 보면 된다.

 GDP에 대한 비율로 볼 때 미국인은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부자 나라 시민에 비해 적어도 40퍼센트 이상, 많으면 2.5배 정도를 의료비에 더 쓴다(미국은 GDP 대비 17퍼센트인데 반해 아일랜드는 6.8퍼센트, 스위스는 12퍼센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의 건강 지표는 선진국 중 최악이어서 다른 부자 나라들에 비해 미국에서는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비용이 훨씬 비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이유 한 가지는 미국의 의료 시스템이 조각조각 분산되어 있어서 의료 제도가 더 잘 통합되어 있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공동 구매를 통해 얻는 혜택을 보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 전체 시스템을 통한 '대량 구입' 디스카운트를 받는 대신 모든 병원은 개별적으로 약과 의료 장비를 구입해야 하며, 의료 보험 회사들은(이윤 추구 기업이므로 더 높은 보험료를 부과하는 데 더해) '규모의 경제' 혜택을 볼 수 있는 통합된 시스템 대신 각각 시스템을 운영하는 비용을 들여야 한다.

p246

 불평등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 오래도록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개인의 필요와 역량은 무시한 채 결과와 기회에만 초점을 맞추어 왔기 때문이다. 좌파는 모든 사람에게 결과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 공평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마다 다른 필요와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반면에 우파는 기회의 평등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이 되려면 개인 간의 역량이 어느 정도는 균등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것은 부모 세대가 상당한 정도로 결과의 평등을 누려야 가능한데, 그렇게 되려면 소득을 (하향) 재분배하고, 모든 사람에게 양질의 기초 서비스를 제공하고, 시장을 규제해야 한다.

 채식주의자에게 닭고기 기내식을 주는 것이 공평한 일이라 생각하는 항공사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승객들의 여러 가지 취향과 필요를 모두 맞추어 주는 다양한 기내식을 제공하지만 표가 너무 비싸서 극소수만이 이용할 수 있는 항공사 또한 원치 않는다.

 

p255

 가장 널리 쓰이는 경제 척도인 GDP는 시장에서 교환되는 것만 포함한다.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모든 측정법과 마찬가지로 GDP도 여러 문제점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극도의 '자본주의적' 관점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뭔가가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결정할 때 시장에서 어떤 가격에 거래가 되는지를 기준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는 관점이다.

 시장활동만을 계산하는 관행은 경제 활동의 엄청나게 큰 부분을 보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농업 생산물의 큰 부분이 계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많은 농민이 가지가 기른 작물을 팔지 않고 일정량을 소비하는데 농산물 생산량에서 이 부분은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으므로 GDP 통계에 포착되지 않는다. 가정과 공동체에서 임금을 받지 않고 행해지는 돌봄 노동 역시 이런 식으로 시장에 기초해 생산량을 측정하면 부자 나라와 개발도상국 모두에서 GDP에 포함되지 않는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그들의 학습을 도와주고, 노인과 장애인을 돌보며, 음식을 만들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그에 더해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일(미국의 사회학자인 앨리슨 대민저Allison Daminger가 '인지 노동cognitive labour'이라고 부르는 활동) 말이다. 이런 활동을 시장 가격으로 환산하면 GDP의 30~40퍼센트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GDP에 전혀 포함되지 않고 있다.

 간단한 사고 실험으로도 시장 밖에서 벌어지는 돌봄 노동을 경제 활동으로 치지 않는 관행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2명의 엄마가 자녀를 교환해서 상대방의 아이를 돌봐 준 다음 베이비시터에게 지불하는 금액을 서로에게 지불한다면(같은 금액을 주고받는다면) 두사람의 재정 상태와 아이 돌보는 시간에는 아무 변화가 없지만 GDP는 올라갈 것이다. 개념적으로 생각해도 돌봄 노동 없이는 경제는 말할 것ㄱ도 없고 애초에 인간 사회 자체가 존재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무보수 돌봄 노동을 담당하는 사람 중에는 여성이 큰 비율을 차지한다. 따라서 돌봄 노동을 경제 활동으로 계산하지 않으면 여성이 우리 경제 - 그리고 사회 - 에 하는 공헌이 과소 평가될 수밖에 없다.

 

p281. 시장이나 개인에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모든 기술적 가능성과 모든 생활 방식 변화를 실현하더라도 지방 정부, 중앙 정부, 국제기구가 지역적/전국적인 대규모의 공공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세계적으로 국가 간 협력을 도모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시장을 통한 우대나 장려책, 개인적인 선택 등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술 개발의 경우 정부가 적극 개입해서 그린 테크놀로지를 장려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그냥 시장에 맡겨 두면 기후 변화와 싸우고 대처하는 데 필요한 수 많은 기술이 개발되지 않고 말 것이다. 이는 민간 기업들이 '사악해서'가 아니라 단기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끊임없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고, 설상가상으로 이 압박은 금융 규제 완화로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린 테크놀로지를 개발하고 사용해도 그 혜택이 가시화되기까지는 몇십 년이 걸리는 경우가 태반이며 심지어 그보다 더 장기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민간 부문의 기업들은 몇 년은 고사하고 분기마다 가시화된 실적을 증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기술 개발을 주저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민간 부문이 이러헥 근시안적으로 경영하는 경향이 심하기 때문에 신기술 개발을 위한 대규모 투자나 그렇게 개발된 신기술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항상 정부가 강력한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 방면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IT와 바이오테크놀로지 개발로, 둘 다 초기에는 미국 정부가 저의 전액을 지원했다. 실패할 위험이 매우 크고 수익을 내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는 부문들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해 유럽의 다수 국가, 중국, 브라질 등에서 태양 발전, 조력 발전 같은 저탄소 에너지 기술이 상당한 규모로 개발되어 사용되어 온 것은 정부 개입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난한 나라들이 온실가스를 최소한으로 배출하고 기후 변화로 인한 부작용에 대처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게 하는 공적 조치도 중요하다. 시장은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를 원칙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내버려 두면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원하는 쪽으로 투자가 몰리기 마련이다. 이 말은 가난한 나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술들 - 농산물과 공산품 생산에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나 '기후 변화 적응' 기술 등 - 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돈이 투자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기술의 개발과 개발도상국으로의 이전을 보조금으로 주거나 심지어 무료로 지원하기 위한 공적 조치가 필요하다. 개발도상국들은 기후 변화를 초래한 장본인이 아닌데도 기후 변화의 여파로 훨씬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모든 조치는 '기후 정의climate justice'를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일부 개발도상국은 글자 그대로 해수면 아래로 사라질 위기에까지 처해 있지 않은가.

 각 개인이 진정으로 환경을 보호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 할 수 있으려면 그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정부 정책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어떨 때는 개인적으로 행동을 바꾸고 싶어도 대부분의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선행 투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외벽 단열, 이중 창문, 열펌프 설치 등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결국 투자 비용을 회수하고도 남겠지만 당장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투자를 하는 데 정부의 보조금과 대출 정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기후 변화와 같은 시스템의 문제를 시장 환경에서 개인이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맡겨 두는 것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효과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는 공적 조치가 필요하다. '친환경 식생활greener eating' 운동이 아주 좋은 예다. 식품 판매업자에게 각 상품의 탄소 발자국을 완전히 공개하도록 요구해서 소비자가 '올바른 식료품 쇼핑'을 하도록 유도하고, 공해를 많이 발생시키는 식품을 시장에서 추출하는 것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진배없다. 우선 그런 정보가 완전 공개가 된다 해도 소비자는 구매하는 식품 하나하나의 탄소 발자국 정보를 모두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선택을 할 만한 시간이나 정신적 여유가 없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정부가 최소한의 환경 기준을 정립해 놓지 않으면 더 심한 오염을 유발하는 판매업자가 더 값싼 식품을 제공해서 경쟁 업체들은 시장에서 몰아내는 식의 '바닥치기 경쟁race to the bottom' 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p295. 자본주의 발달의 정점, 유한 책임 제도

 이제는 유한 책임제가 일반적 표준이 되었지만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왕 - 절대 왕정이 끝난 다음에는 정부 - 이 허락하는 특권이었고, 오직 국가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위험 부담이 높은 장거리 교역이나 식민지 확장 같은 사업만 이런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 예외적인 경우에만 적용하는데도 유한 책임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비판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른바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유한 책임 회사 제도가 경영자들이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고 도박을 하도록 허용한다고 비난했다. 이런 식으로 자금을 모은 기업의 경영자들은 기업을 100퍼센트 감당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과도한 모험을 하려는 성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흠잠을 데가 없이 완벽한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한 책임제 덕분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할 때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자본을 모으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자본주의의 패망을 예상했던 카를 마르크스가 유한 책임 회사야말로 '자본주의의 발달이 정점을 찍어서 나온 제도'라고 칭송했던 것이다. 물론 이 발언에는 자본주의가 더 빨리 발전할수록 사회주의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으리라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그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완전히 발달한 다음에야 사회주의가 도래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마르크스가 이런 선언을 한 직후, 대규모 투자 없이는 성장이 불가능한 '중화학 공업' - 제철 및 철강, 기계, 화학 공업, 제약 등 - 이 출현하면서 유한 책임 횟하가 더욱 절실해졌다. 장거리 항해나 식민지 사업뿐 아니라 주요 산업의 대부분에 대규모 투자가 필요해지면서 유한 책임제를 사례별로 심사해서 허용해 주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그 결과 19세기 말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유한 책임 회사 설립이 특혜가 아닌 권리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때 이후 유한 책임 회사는 자본주의 발달의 주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p296. 성장의 원동력에서 성장의 장애물로

 그러나 한대 경제 성장의 강력한 도구였던 이 제도가 최근에는 성장의 장애물로 변했다. 지난 수십 년에 걸친 금융 규제 완화로 인해 주주들은 자기네가 법적으로 소유한 기업에 장기 투자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다른 방식으로 투자해서 수익을 창출한 기회가 너무나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영국을 예로 들자면 주주들의 주식 보유 기간이 1960년대에 5년이었던 것이 요즘은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투자한 돈을 1년도 되기 전에 거둬들이는 사람이 그 기업을 공동으로 소유한다고 할 수 있을까?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주주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전문 경영인들은 배당금과 주식 환매(자사주 매입)등을 통해 기업 이윤 중 극도로 높은 비율을 주주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주주들에게 돌아간 기업 이윤 비율은 1980년대에는 절반 이하였지만 지난 10~20년 사이 이 수치가 90~95퍼센트로 치솟았다. 기업의 유보 이윤이 기업 투자의 주된원천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변화는 기업의 투자 능력, 특히 장기간을 기다려야 수익을 낼 수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 능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유한 책임제라는 제도를 개선해서 해로운 부작용은 제한하면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때가 되었다.

 무엇보다 유한 책임 제도는 장기간 주식 보유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투표권을 주식 보유 기간과 연동해서 장기 투자를 한 주주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를 '테뉴어 보팅tenure voting'이라 부른다.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매우 희석된 형태에 그치고 있다. 이 테뉴어 보팅 제도를 훨씬 더 강화해서 주식을 보유한 햇수마다 1표씩 더 주는 방법 등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장기 투자를 하는 투자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혜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주주들의 권한을 제한해야 한다. 여기에는 주식 장기 보유자들까지 포함된다. 대신 기업의 운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 다른 '이해관계자'들이 기업 경영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노동자, 부품 조달 업체, 기어비 위치한 지역의 지방 정부 등이 모두 해당한다. 주주들의 문제는 장기 투자자라 할지라도 언제든 주식을 팔고 기업을 떠날 수 있다는 데 있다. 주주들보다 움직임이 훨씬 자유롭지 못한 주주 이외에 '이해관계자'들에게 일정 부분 권한을 부여한다는 것은 이른바 기업의 '소유주'들보다 기업의 장기적 미래에 더 큰 관심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 준다느 의미다.

 마지막이자 앞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주주들이 자기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의 장기적 미래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제한해야 한다는 점이다. 투기 성향이 강한 일부 금융 상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서 '치고 빠지는 식의 투자' 기회를 줄이고 장기 투자를 할 동기 부여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p308

 자동화로 일자리를 위협받는 건 딸기 수확 노동자만이 아니다. 요즘은 신문, 라디오, TV 어디서든 인간이 하는 일을 로봇이 대체하고,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보도를 피할 수가 없다.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는 인공 지능AI 기술의 발달로 더 고조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손과 근육 뿐 아니라 두뇌마저 대체할 것이라는 두려움까지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 불안감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예 중 하나가 <파이낸셜타임스>가 2017년 공개한 '로봇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을까? Can a robot do your job?'라는 앱이다.

 자동화로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늘, 적어도 지난 2세기 반 동안은 항상 존재해 왔던 현상이다. 그리고 <파이낸셜타임스> 같은 지면에 글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 경제학자, 경제 전문가 등은 줄곧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노동력을 절약하는 기술 도입에 저항하는 것은 경제 발전을 방해하는 짓이라 꾸짖어 왔다. 그랬던 기자들과 논평가들이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일자리 자동화의 영향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는걸까?

 계급적 위선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 오지 않는가? 전문가 계급에 속한 이들은 자기네 일이 자동화의 물결에서 안전하다고 확신할 때는 새 기술의 도입에 거부감을 보이는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러다이트Luddite'라 쉽게 비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자동화가 그들과 그들의 친구들 - 의사, 법조인, 회계사, 금융인, 교사, 심지어 저널리스트까지 - 이 속한 화이트칼라 일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기술 발전으로 인한 실업, 심지어 로봇이 자기네 분야 전체를 완전히 대체해 버릴 수도 있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뒤늦게 맛보고 있는 것이다.

 

p325

 스위스가 탈산업 경제post-industrial economy의 모범으로 제조업보다는 금융과 고급 관광 상품 같은 서비스 산업을 통해 번영을 이룬 나라라는 것이다. 

 1970년대에 시작된 이 탈산업 시대 담론은 인간은 잘살게 될수록 더 세련된 것을 원할 수밖에 없다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개념에 기초한다. 일단 사람들이 배를 채우고 나면 농업이 사양길에 접어든다. 옷과 가구처럼 다른 필요가 충족된 후에는 더 높은 차원의 소비재, 예를 들면 전자 제품이나 자동차 등으로 눈을 돌린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물건들을 가진 후에는 소비자의 수요가 외식, 공연, 관광, 금융 서비스 등의 서비스 부문으로 향한다. 이 시점이 되면 산업 분야는 위축되기 시작하고 서비스 부문이 경제의 주인공이 되면서 인류 경제 발달 단계 중 하나인 탈산업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탈산업 시대에 대한 이런 식의 시각은 1990년대에 힘을 얻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부자 나라 경제 체제에서 생산과 고용 어느 쪽으로 따져도 제조업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서비스 부문의 역할이 커지는 현상이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탈산업화'라고 한다. 중국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산업 국가로 부상하면서 탈산업 사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제조업은 중국과 같은 저기술, 저임금 국가가 담당하는 산업인 반면 금융, IT,  서비스, 경영 컨설팅 같은 고급 서비스에 미래가 있고, 특히 부자 나라들은 이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논의에서 스위스는 가끔 함께 등장하는 싱가포르와 더불어 서비스 부문을 특화해서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증거로 제시된곤 한다. 이런 논리에 설득당하고 스위스나 싱가포르에서 영감을 얻은 인도, 르완다와 같은 일부 개발도상국은 산업화 과정을 아예 건너뛰고 고부가가치 서비스에 특화해서 이를 수출하는 방법으로 경제를 개발하겠다는 시도를 해 오기까지 했다.

 

탈산업 사회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스위스는 사실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 정도가 높은 나라로, 1인당 제조업 생산량 세계 1위를 자랑한다. '메이드 인 스위스'라고 적힌 상품이 많이 보이지 않는 건 부분적으로 스위스가 작은 나라여서이기도 하지만 경제학자들이 '생산재'라고 부르는 기계, 정밀 장비, 산업용 화학 물질 등 우리 같은 보통 소비자가 접할 수 없는 물건들을 주로 생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른바 탈산업 사회의 성공담으로 꼽히는 또 다른 나라인  싱가포르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산업화된 국가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예로 들어 서비스 중심의 탈산업 경제의 장점을 선전하는 것은 뭐랄까, 해변 휴양지를 광고하면서 노르웨이와 핀란드를 모델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윤석열이 집권한 현재를 난세로 정의하고, 난세에 본인의 일기를 쓴 것이다.

정치적 내용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주로 도올 선생의 평소 관심사와 얽힌 내용이 대부분이고 그것이 일기라는 형식을 빌려 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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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1 기독교의 역사는 갑질의 역사

 인류문명사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갑질"의 역사이다. 어느 시공에 떨어지든지 자기만이 옳고 타자는 무조건 개종이나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폭압적으로 강요하는 십자군신학의 역사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의 부당성을 기독교신앙을 수용한 이들은 느끼지 못한다. 은재 신석구(1875~1950) 목사는 깊은 유학자의 소양 속에서 이러한 논리의 부당성을 감지한 심오한 신앙인이었다.

 기독교적 삶의 논리는 하여튼 껄끄럽다. 껄끄럽다라는 것은 비인과적이고 비상식적이고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토착적인 삶은 인과적이고 상식적이고 순리적이라는 것이다.

 

p155 결곡 기독교의 최대 문제는 "배타"

 기독교신학의 최대의 문제는 배타Exclusiveness 이다. 사랑과 용서와 관용을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실내용에 들어가면 배타를 떠나지 못한다. 배타의 본질은 독선이다. 나의 생각만이 옳고 타인의 생각은 다 틀리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기독교교회 속에서만 구원이 존재한다고 믿는 배타적 구원론으로 골인하게 된다. 그러한 구원론이 지배한 것이 서양의 중세기역사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실상 기독교가 아니라 서양의 중세기 교리였다. 그래서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는 시각이 생겨났고 많은 유학자 기독인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배타와 함께 들어왔고 배타로 일관되었다. 그것이 오늘날 매우 폭력적인 대형교회로 발전하였고, 또 친미 정치세력으로 발전하였다. 바이든의 정치이념은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자는 배타의 이념이다. 이러한 이념의 확장의 동반자가 키시다의 일본이고 그 동반자의 말잡이가 윤석열이고, 윤석열의 하수인들이 한국의 친미 대형교회 세력이다.

 

p193. 동서양 신론의 차이

(마테오 릿치, 천주실의 중)

 凡物不能自成, 必須外爲者, 以成之. 樓臺房屋不能自起, 恒成於工匠之手. 知此, 則識天地不能自成, 定有所爲制作者, 卽吾所謂天主也.

 대저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이루어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밖으로부터 작위를 가하는 존재가 있어야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각 하나 가옥 하나가 스스로 세워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항상 목수의 손을 빌어서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명백한 사실을 깨닫는다면 천지가 스스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고, 반드시 그것을 만든 제작자가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제작자가 바로 저 마테오 릿치가 말씀드리는 하느님(=天主)이올시다.

 

(주역, 계사 중)

 그러므로 하느님이라 하는 신묘한 존재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고착되지 않으며, 그 변화무쌍한 운동은 실체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존재자가 아니다. 끊임없이 음과 양이 번갈아 들면서 조화로운 법칙을 만들어가는 것, 그 자체가 궁극적인 하느님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도를 나의 실존 내로 계승하여 구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선(the Good)이요 도덕(Morality)이다. 그 하느님이 도를 나의 존재 내에서 형성해나가는 것이 나의 본성(Human nature)이다.

故神无方而易无體.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 善也; 成之者, 性也.

 

p229

  수운은 아편전쟁으로 이미 중국이 몰락하고 있고, 중국이 몰락하면 조선왕조가 몰락하는 것은 뻔한 이치라고 판단했다. 다산은 끝까지 조선을 살리려 했다. 수운은 조선의 멸망은 조선민중의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왕조는 멸망해도 백성은 멸망하지 않는다. 난군亂君은 있어도 난국亂國은 없다.

 왕조를 멸망시켜야 할 판에 기독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왕조보다 더 지독한 억압의 수직구도를 새로 도입하는 것이다. 왕조는 권위의 억압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갱생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민중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평등사회를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늘 꼭대기 옥경대에 앉아있는 상제꼴로서 세상사람들의 삶을 다 관장한다고 말을 하니 허무지설虛無之說 아닐런가!" 또 하나의 픽션이요, 왕보다 더 무서운, 세계 전체를 파멸로 휘몰아갈 수직과 연역의 폭력이다. 이것을 수용하면 이 민족은 개화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의 길로 들어설 뿐이다. 이 세계는 소유주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릿치가 말하는 천주는 우주의 설계자로서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속지 말라!

 다산은 세계를 몰랐다. 수운은 세계를 알았다. 다산은 주어를 도입했고 수운은 주어를 해소시켰다. 다산은 수직적이었고 수운은 수평적이었다. 다산은 기독교교리를 만났지만, 수운은 하느님(=천주天主)을 직접 만났다. 

 

p243 수운의 문제의식 : 수직적 종교사유와 수직적 권력구조의 상응성

 서양의 종교는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성"을 전제하고 그 존재에게 나의 운명을 맡기는 절대적 복속을 "신앙Belief"으로 삼는다. 그러나 동학은 "무위이화無爲而化"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하느님 자체가 세계와의 관계에서 조작적인 개입(爲)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은 세계생성의 동반자일 뿐이다. 하느님은 인격적인 존재Being인 동시에 철저히 비인격적인 생성Becoming이다.

 

p246 동학은 인류종교사에서 케리그마가 없는 유일한 종교

 그런데 동학경전은 타 종교경전과 견주어 말할 수 없는 유니크한 특징이 있다. 그거슨 "케리그마Kerygma"의 필터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케리그마"란 20세기 초 성서신학에서 생겨난 말이긴 하지만, 그것은 모든 종교영역에서 적영될 수 있는 유용한 개념이다. 케리그마는 문자 그대로 "선포Proclamation"라는 뜻인데, 초기신봉자들(초대교회)이 자기들의 교주에 대해 갈망하는 이미지를 선포하기 위하여 경전의 언어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경우, 그 케리그마는 "그리스도" 즉 구세주(=메시아),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이다. 이 케리그마의 필터를 거치면 인간 예수,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는 사라지고, 케리그마 즉 그리스도라는 이미지, 즉 초대교회의 갈망만 남는다. 다시 말해서 2천 년 동안의 기독교의 역사는 역사적 예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형성된 그리스도를 선포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것은 이런 허구화된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케리그마가 경전을 지배한 결과인 것이다.

 

케리그마는 허구, 수운의 삶은 시종 있는 그대로

 최수운은 기독교(=천주교=서학)와의 대결에서 모든 신비나 이적이나 예언,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조화造化"를 거부하고 "성誠, 경敬, 신信"이라는 상식적 일상도덕의 가르침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신비주의자들의 "흘림"의 위태로움을 잘 알고 있었고, 이들이 초기교단을 형성하게 되면 그의 가르침은 그들의 케리그마에 의하여 왜곡되고 타락되고 신비화되리라는 것을 정확히 예견했다.(「흥비가」). 모든 대각의 종교운동은 초기집단을 노리는 사기꾼들에 의하여 왜곡되는 것이다.

 최수운은 "지식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후계자로서 지식이 출중한 인물은 사도 바울과 같이 오히려 케리그마를 조직적으로 형성하여 동학의 진로를 바꿀 우려가 있었다. 그가 한문으로만 저술을 하지 않고 동시에 한글가사를 지었다는 것도 민중에게 직접 개벽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산이 단 한 건의 한글서한이나 시조 한 수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 그의 형 약전이 서민을 위한 서민생활의 『자산어보』를 집필하면서도 물고기의 한글이름 한 자도 써넣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의식구조가 어디까지나 망해가는 조선왕조의 기력회복(목민牧民)에 머물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운의 문제의식과는 소양지판이었다.

 

 과학 교양서적을 어느 정도 봐서 그런지 그리 새로울 건 없지만 환원주의적 시각을 인문학에 적용하는 작가의 생각에서는 참고할 부분이 있었다.

 재밋었다. 이 책을 보고 나니 언급된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과 몇몇 책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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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순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화학)

p195

 과학자는 드러내 놓고 환원주의 연구 방법을 쓴다. 화학은 물리학으로, 물질은 입자로 거의 완벽하게 환원한다. 그러나 그걸 두고 물리학 패권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양자역학 덕분에 화학의 세계는 완전해졌고 화학산업은 더 발전했다. 그러나 인문학자는 환원주의를 배격하기도 한다. 환원주의는 생물학과 인문학의 접점에서 특히 날카로운 마찰을 일으켰다. 우리나라 하계도 예외가 아니다. 2009년 7월 한국과학철학회와 서양근대철학회를 비롯한 여러 학회가 국립과학관에서 '다윈 200주년 기념 연합학술대회'를 열었다. 이 행사는 11월 서울대사회과학연구원/통섭원/한국과학기술학회가 이화여대에서 연 공동 학술 심포지엄으로 이어졌다. 주제는 '부분과 전체 : 다윈, 사회생물학, 그리고 한국'이었다. 여기서 환원주의 논쟁이 불타올랐다. 어떤 인문학자는 아래와 같이 사회생물학을 비판했다.

  

  『인간의 역사과정을 물리적 역사과정에서 분리해야 할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물리법칙으로 환원할 수 있다. 인간의 문화도 인과적 설명으로 과학과 연결해야 온전한 의미를 가진다. 사회학은 인류학에, 인류학은 영장류학에, 영장류학은 사회생물학에 포섭된다. 에드워드 윌슨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렇다면 사회생물학은 왜 물리학에 통합하지 않는가? 사회과학이 사회에서 마음과 뇌로 이어지는 인과적 설명망을 만들어내지 못해서 과학 이론의 본질을 결여하고 있다는 지적이 옳다면, 물질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인과적 설명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회생물학도 과학 이론의 본질을 결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인문학이든 과학이든 학문을 이런 식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사회과학자더러 뇌의 전달물질을 연구해 사회 행동이나 문화와 연계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하라는 요구다. 사회생물학자더러 물리학을 연구해 물질 수준의 토대에서 동물 행동을 설명하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진화의 수준이 변하면 새로운 성질이 <창발(創發, emerge)>하기 때문에 하위 수준을 연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상위 수준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른 차원의 언어를 사용하고 차원이 다른 의미를 추구한다. 유전자를 연구해서 문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분노의 감정을 드러낸 이 주장의 핵심은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문학을 생물학으로 환원할 수 없다. 둘째, 인문학을 과학과 통합할 수 없다. 환원도 통합도 안 될 일이다. 인문학은 인문학이고 과학은 과학일 뿐이다. 그런 뜻이다.여기서 통합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는 잠시 뒤에 말하겠다. 나는 '지금은' 이 반론이 옳다고 본다. 하지만 '영원히'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물리법칙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지, 나는 판단하지 못하겠다.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물리법칙으로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는 날이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할 근거는 없으니까.

 

p199

 만사가 그렇듯 환원주의도 위험 요소가 있다. 가장 중대한 위험은 복잡한 것을 설명한다는 원래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단순한 것을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가장 단순한 수소의 원자 구조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우주의 구조와 운동법칙을 설명할 수 있어야 수소의 원자 구조를 아는 것이 온전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복잡한 것을 설명하는 임무를 수행하려면 연구자가 자신이 몸담은 세부 학문의 경계를 넘어 다른 분야의 연구 성과를 습득하고 다른 분야의 연구자와 소통해야 한다. 설명하려는 대상이 우주든 사회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그래야 환원주의가 훌륭한 연구방법론이 될 수 있다. 윌슨은 그런 노력을 가리켜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는 것은 지성의 가장 위대한 과업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겨하는 지식의 파편화와 철학의 혼란은 실제 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학자들이 만든 것이다. 통섭은 통일統一(unification)의 열쇠다.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을 둔 이론을 연결해 지식을 '통합'해야 한다. 학문의 갈래를 가로지르는 통섭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소수의 과학자와 철학자가 공유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지나지 않지만 과학이 지속적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지지해 준다. 인문학에서도 힘을 발휘한다면 더 확실한 지지의 증거가 될 것이다. 통섭은 지적 모험의 전망을 열어 주고 인간의 조건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

 

 

 

윤석열의 가장 큰 문제는 말과 행동이 완전히 따로 논다는 거다. 

자유,공정,정의를 외치지만 실제론 가장 자유가 억압받고 불공정한 사회가 바로 지금이다.

윤석열 정부의 실상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보면 좋을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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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5

이광수 : 경제라는 건 결국 잠재성장률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잠재성장률을 높이기 위해선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는 노동인데요, 인구가 증가하면 잠재성장률도 증가하죠. 그런데 한국은 인구가 줄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자본인데요, 자본의 효과도 우리나라는 제조업 고도화를 넘어서는 단계이기 때문에, 일본 사례처럼 자본을 투입하면 성장률이 나오는 구조가 끝나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세 번째가 생산성, 총요소생산선이라고 하는 건데, 각 요소들이 융합하고 만들어내는 혁신을 통해서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는 겁니다. 혁신이 일어나려면 가장 큰 전제조건이 격차가 적어야 한다는 겁니다. 임금 격차와 빈부 격차가 줄어들어야 하는 거죠. 그래야 혁신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못 살면 보수화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사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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