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물리학을 개척한 20세기 위대한 물리학자인 엔리코 페르미에 대한 이야기.

저자는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인데, 물리학자의 평전을 쓴다는 건 생뚱맞은 데가 있다.

서론에서 바로 밝히지만, 저자의 아버지인 멜빈 슈워츠가 중성미자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증명(1962년)해서, 198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슈워츠 외에 슈워츠의 스승인 잭 스타인버거와 또 다른 한명인 레온 레더만이 같은 공로로 공동 수상한다.

스승인 잭 스타인버거(스타인버거는 페르미의 직계 제자로 그에게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슈워츠에게 박사과정을 페르미에게서 받으라는 권유를 받았는데, 슈워츠는 콜럼비아 대학을 떠나서 시카고로 가는 것을 꺼려서, 콜롬비아에서 스타인버거에게서 박사과정을 받게 된다(그래도 거기서 연구한 중성미자로 노벨상을 받았으니).

 멜빈 슈워츠의 아들인 저자 데이비드 슈워츠는 아버지 멜빈의 사망 이후, 7년이 지나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다른 물리학자들과 나눈 서신을 발견하다. 그 서신의 내용 중에 엔리코 페르미와 관련된 내용이 있었고, 이에 흥미를 가진 저자는 페르미에 대해서 알아보게 된다.

 그것을 계기로 페르미에 대한 내용을 집필하기로 계획했다는 것이다.

 천재는 흥미를 돋구는 주제 중의 하나이며, 특별히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한 유명한 사람과 관련된 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큰 동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동기와 흥미를 가지고 책을 써볼까 생각할 순 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상당한 정성과 애정이 없었다면 이런 내용을 정리하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면 이 책은 후회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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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9

 학생이건 교수건 페르미의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이 희귀한 정신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년쯤 뒤에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자주 일어날 일을 예견하듯이, 교수들은 직접적인 방법으로 풀리지 않는 방정식이 있으면 페르미를 불렀다. 그는 교수가 고심했던 해법을 향해 꾸준히 다가서서 풀어냈다. 앞으로 계속 그와 함께하게 되는 특이한 습관도 생겼다. 생각에 빠지면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물건(분필, 연필, 어떨 때는 주머니칼)이나 들고 무심코 만지작거리게 된 것이다. 그는 주머니칼로 자기의 오른쪽 관자놀이 근처를 실수로 베었고, 이때 생긴 흉터는 나중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p77

 1922년 10월, 두 사람이 페르미의 장래에 대해 의논하기로 한 날에 무솔리니의 지지자들이 로마에서 행진했다. 총리는 국왕에게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도록 탄원했는데, 이것은 입헌군주제였던 이탈리아에서 왕만이 할 수 있는 조치였다. 코르비노와 페르미는 상황을 주시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 라우라 페르미에 따르면, 두 사람은 왕이 포고문에 서명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코르비노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파시즘 신봉자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혐오감을 표현했지만, 왕이 서명하면 긴 피의 내전이 시작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페르미는 왕이 내각의 권고에 거의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왕이 내각을 거스를 것 같습니까?" 페르미는 노회한 코르비노에게 물었다.

 "왕은 각료들이 하자는 대로 하고 결코 나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코르비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왕이 포고문에 서명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면 여전히 희망이 있군요." 젊은 동료가 말했다. 페르미는 분명히 코르비노를 오해했다.

 "희망?" 그는 대답했다. "어떤 희망? 구원이 아니야. 왕이 서명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독재 정권이 들어설 거야." 코르비노가 옳았다. 왕은 이탈리아에 긴 내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서명을 거부했고, 일주일 만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총리가 되었으며, 코르비노가 예측한 대로 21년 동안 이어질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p94

 파울리는 일찍부터 수학과 물리학에 엄청난 재능을 보였고, 주위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뮌헨 대학교에서 위대한 이론가 아르놀트 조머펠트에게 배웠는데, 조머펠트는 파울리가 뮌헨에 왔을 때 이미 더 가르칠 게 거의 없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페르미처럼 파울리도 상대성이론으로 과학에 첫 번째 기여를 했고, 16세의 나이에 이 주제로 논문을 썼다. 파울리는 상대성이론에 대해 그가 쓴 글이 독일의 수학 백과 사전에 실리면서 대학생 시절에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페르미와 마찬가지로 신동이었고, 페르미처럼 키도 작아 165센티미터 정도였다. 그러나 거의 모든 면에서 파울리는 페르미와 정반대였다. 페르미는 몸이 단단하지만, 아담했고, 외모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파울리는 통통했고 비만에 가까웠지만, 매혹적인 눈과 감각적인 입술로 어두운 매력이 있었다. 페르미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파울리는 무척 많이 마셨고, 알코올 중독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다. 페르미는 습관적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파울리는 그 반대였고, 카페나 카바레에서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뮌헨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파울리는 뮌헨 슈바빙 지역의 작가, 음악가 등 예술가들과 어울려 지냈다. 반면에 페르미가 물리학 외에 가장 탐닉한 활동은 등산이었다.

 페르미는 이론과 실험 모두에 재능이 있었다. 이론가로서 파울리가 페르미보다 더 재능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실험가로서 재앙이었다. 물리학자들은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분명히 파울리가 근처에 와 있을 거라고 농담을 했다. 파울리의 독설은 전설적이었고, 페르미에게는 전혀 없는 면모였다. 파울리는 '독설가'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 어떤 동료를 보고 "너무 젊은데도 이미 너무 안 유명하다"고 모욕적인 평가를 했다. 그는 한때 페르미를 "양자 엔지니어"라고 조롱했다. 유달리 애매하고 사변적인 이론 논문에 대해 그는 "너무 엉망이라 심지어 틀리지도 못했다"는 유명한 비판을 남겼다. 그는 절친한 친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바보"라고 즐겨 불렀다. 젊은 시절에는 영국의 유명한 천체물리학자 아서 에딩턴에게 이 연로한 학자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추구하는 연구가 물리학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대놓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이 뮌헨 대학교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을 때, 파울리는 이 위대한 인물의 강연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다. "아인슈타인 교수가 방금 한 말은 들리는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p100

 디랙은 어떤 의미에서 파울리와 정반대였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가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고통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사교성이 심하게 부족했고, 대화할 때 말을 극단적으로 곧이곧대로 이해했다. 한 번은 그가 하이젠베르크에게 사람들이 왜 춤을 추는지 물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멋진 여자가 있으면 즐겁다"고 대답했고, 디랙은 한참 생각하다가 "하지만 어떻게 여자들이 멋있을지 미리 알지?"라고 말했다.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디랙이 칠판에 쓴 방정식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으나 대답하지 않기도 했는데, 그 학생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해명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동료들은 시간당 한 단어를 말하는 것을 '1디랙'이라는 단위로 정의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공격적으로 비종교적이었다. 1927년 솔베이 학술회의에서 벌어진 한 유명한 대화에서 젊은 물리학자들은 철학과 종교에 대해 토론했다. 하이젠베르크의 회상에 따르면, 디랙은 그의 기준으로는 물리학자의 세계에 종교는 설 자리가 없다고 열렬히 주장했다. 대화 내내 침묵했던 파울리는 "우리의 친구 디랙은 종교가 있는데, '신은 없고, 디랙은 그분의 사도다'라는 게 교리일세"라고 말했다. 하이젠베르크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크게 웃었고, 디랙 자신이 가장 크게 웃었다고 한다.

 

 

 

p161

 페르미는 디랙의 방법을 철저히 이해했지만, 이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2년을 보냈다. 위그너가 말했듯이, 그는 디랙의 접근 방식의 수학적 복잡성에 완전히 익숙했지만 이것을 불편하다고 생각해서 더 단순하게 설명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수학적 복합성 때문이 아니었다. 페르미는 뛰어난 수학자였고,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에 견줄 만했다. 오히려, 페르미의 거의 모든 위대한 업적이 그렇듯이, 단순화하려는 노력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교육적인 이유였다. 

 그는 동료들과 학생들 앞에서 이 주제를 천천히 체계적으로 풀어나가면서 청중이 각 단계를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이 연습의 목적은 자료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함을 사랑하는 물리학자의 기질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없다면 자기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디랙에게는 이런 목적이 없었고, 그는 매우 드문 수준의 논문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썼다. 페르미는 디랙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서, 이상한 물리학자의 복잡한 개념과 이국적인 기법을 이해하기 위해 애쓸 생각조차 하지 않을 물리학자들에게 제공해주었다.

 

 

p163

 1920년 후반에 일련의 매우 정밀한 실험의 결과로 베타선 '위기'가 생겼다. 베타붕괴는 물리학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보존 법칙을 어기는 것처럼 보였다. 중심적인 보존 법칙 중의 하나가 에너지 보존 법칙으로, 모든 물리적인 과정에서 들어가는 에너지와 나오는 에너지가 같아야 한다. 그러나 베타선 방출은 이 법칙을 어기는 것 같았다. 에너지가 보존된다면, 방출된 베타입자의 에너지는 매우 좁은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이론적으로 베타선 방출 과정은 모두 똑같으므로 베타입자의 에너지는 모두 같아야 하지만, 실제로 방출된 베타입자의 에너지를 측정해보면 예측보다 상당히 넒은 에너지 대역에 퍼져 있었다. 이것은 에너지가 보존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한다. 야구 연습장의 피칭 머신이 항상 똑같은 속력으로 똑같은 방향으로 공을 던지도록 설정되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갑자기 공이 무작위로 다른 속력으로 나온다면, 기계가 뭔가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몇몇 물리학자들은 이 증거에 항복했고, 이 특정한 상황에서는 분명히 에너지가 보존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보어도 이렇게 생각했고, 1931년 로마에서 열린 코르비노의 페르미 주최의 학술회의에서 이러한 모험을 감행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물리학자들에게는 재앙인 대담한 결론을 내렸다. 러더퍼드는 보어의 결론을 완강히 거부했지만, 에너지 보존의 원칙을 어기지 않으면서 베타선을 설명하는 대안을 제시한 것은 상상력이 넘치는 파울리뿐이다.

 파울리는 특유의 대담성으로 전자와 함께 다른 입자가 방출된다고 제안했다. 이 입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이고 질량이 너무 작아서(어쩌면 0일 수도 있다) 거의 탐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1930년 12월 독일 튀빙겐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처음으로 이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그는 이 가상 입자를 '중성자neutron'라고 불렀고, 이 입자가 베타붕괴에서 관찰되지 않은 에너지의 균형을 맞추며, 따라서 에너지 보존 법칙은 깨지지 않는다고 제안했다. 당시에는 오늘날 우리가 중성자라고 부르는 입자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2년 뒤에 제임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하며 엄청난 충격을 일으켰고, 이때 페르미와 그의 팀은 파울리의 가설적 입자를 '중성미자neutrino'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파울리의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물리학자들 중 일부는 저명한 물리학자의 말을 빌려, 베타선 방출 문제에 대해 이런 견해를 가졌다. "그냥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신설된 세금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보어의 편을 들어, 보이지도 않고 엄청난 거리를 방해 없이 통과하는 입자라는 아이디어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중성입자가 있다고 하기보다 에너지가 보존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무도 전자와 중성미자가 방출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자와 중성미자가 언제나 핵 속에 있고, 적절한 자극만 주면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어떻게든 핵 안에서 만들어진 다음에 바로 방출될까?

 

 원자핵 속에 중성자가 들어 있다는 채드윅의 발견이 단서가 되었다. 광자의 생성과 소멸을 기술하는 디랙의 양자전자기역학이 두 번째 단서였다. 요르단과 위그너의 2차 양자화가 세 번째 단서가 되었다. 파울리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페르미는 4년 동안 배운 모든 것을 베타선 문제에 적용했다. 1933년 후반과 1934년 초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학술지에 실린 그의 논문 <베타선에 대한 잠정적인 이론 A Tentative Theory of Beta Rays>에서 페르미는 이 주제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밝혔다. 80년이 지난 지금, 이것은 20세기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페르미는 양자 상호작용이 하나 더 있다고 제안했다. 이 상호작용은 입자들이 서로 매우 가까이 있을 때만 일어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약한' 상호작용이라고 부른다. 이 상호작용은 중성자를 양성자로, 양성자를 중성자로 바꾼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에 새로운 입자가 생성되어 높은 에너지로 핵에서 탈출한다. 중성자가 양성자로 바뀌면 전자와 반중성미자가 방출된다.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면 양전하를 띈 전자(양전자)와 중성미자가 방출된다. 방출된 입자의 에너지 총합은 항상 같지만 각각의 입자가 가지는 에너지는 양자장 이론의 직접적인 결과인 양자 규칙에 따라 달라진다. 전자와 중성미자(그리고 대응되는 반물질 입자들)는 그 전에는 핵 안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방출되는 순간에 생성된다. 중성미자 또는 반중성미자가 물질과 상호작용할 가능성을 이 이론으로 계산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은 너무 낮아서 중성미자는 물질과 전혀 상호작용을 하지 않으면서 수백만 킬로미터를 달려갈 수 있다. 

 

 이 논문의 성립과 발표에는 흥미로운 내막이 있다. 페르미는 1933년 후반까지 이 연구를 진행했다. 베타선 방출 문제는 페르미가 참석한 1933년 10월 솔베이 학술회의의 주요 관심사였고, 학술회의 기간 동안 페르미와 파울리는 파울리의 중성미자 아이디어에 대해 깊이 논의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쯤에 페르미는 그룹의 스키 휴가 때 로마의 동료들에게 주요 아이디어를 편하게 설명할 만큼 충분히 발전시켰다. 이 휴가 직후에 페르미는 영국 학술지 <네이처>에 이 논문을 보냈다고 세그레는 말한다. 로마 그룹이 히틀러가 부상하면서 독일의 학술지를 보이콧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그레에 따르면 검토자 한 사람이 이 논문이 너무 "사변적"이라고 보았고, <네이처>가 논문을 거절했다. 이에 페르미는 논문을 이탈리아의 학술지 <누오보 시멘토>와 독일의 <물리학 저널>에 보냈고, 두 학술지가 모두 이 논문을 게재했다. 이 이야기는 논문에 얽힌 이야기들 중에서도 워낙 중요해서 위키피디아에는 나중에 <네이처>가 이 논문을 거절한 것은 가장 터무니없는 편집자의 실수 중 하나라고 공개적으로 후회했다고 쓰여 있기도 하다.

 

 사실, 논문 거절을 후회한다는 공식적인 언급은 네이처 후속 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불행하게도 검토자가 쓴 거절 편지를 네이처 기록 보관소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십 년 전에 새로운 사무실로 이사하면서 모든 기록이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 전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네이처>는 당시에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는 짧은 노트만 게재를 허용했고, 새로운 양자장 이론에 대한 상세한 발표를 위한 지면이 아니었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논리적으로 봤을 때 페르미가 투고했을 법한 더 그럴듯한 영국의 학술지는 <런던 왕립학회 회보>다 양자전기역학에 대해 디랙이 쓴 초기의 중요한 논문들이 모두 여기에 실렸으므로, 페르미가 베타붕괴 논문을 제출했다면 이 학술지에 체줄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 역사가들은 페르미가 독일의 연구자들, 특히 보른, 하이젠베르크, 그리고 누구보다 파울리가 자신의 논문을 먼저 읽기를 원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가 독일 학술지에는 아무것도 싣지 말아야 한다는 젊은 동료들을 의식해서 선의의 거짓말(제출했지만 <네이처>가 거절했다)로 상황을 모면하면서 자기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이다.

 

 논문의 실제 출판 내막이 무엇이든, 물리학 공동체의 즉각적인 반응은 신통치 않았따. 파울리와 위그너는 이 논물을 높이 평가했다. 페르미는 디랙의 양자장 체계 전체를 자기의 사고에 통합했고, 이것을 베타선 방출 문제에 독창적으로 적용했다. 문제는 이 이론을 실험으로 검증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중성미자는 탐지하기가 불가능해 보였고, 페르미조차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 의심했다. 그는 양자전기역학을 완전히 익혔고, 겉보기에 완전히 다른 현상을 이 이론에 사용된 수학을 설명하면서 개인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 논문의 진가는 몇십 년 뒤에야 제대로 알려지게 된다. 이것은 자연의 근본적인 힘이 한 가지 더 있다는 최초의 암시였다. 약력 또는 약한 상호작용이라고 보르는 이 힘은 중력, 전자기력, 강력과 함께 자연의 네 번째 근본적인 힘으로 알려지게 된다. 10개가 넘는 노벨상과 물리학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 몇 가지가 여기에서 나왔다.

 1970년대에, 나중에 페르미가 시카고 대학교에서 가르친 제자 첸닝양(Chen Ning Yang)이 페르미의 동료이자 친구인 유진 위그너에게 물리학자들이 페르미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 무엇이라고 기억할지 물어보았다. 위그너는 베타선 방출 논문이 페르미의 가장 중요한 연구라고 말했다. 양은 동의하지 않았고, 페르미온의 생성/소멸 연산자와 함께 2차 양자화를 발명한 사람은 바로 요르단과 위그너 본인이라고 지적했다. 위그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그렇지.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물리학에서 실제로 쓰일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네." 베타붕괴 논문이 페르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는 위그너의 평가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p183

 여름방학을 앞두고 페르미와 팀은 주기율표의 원소들을 계속 조사했고, 마침내 가장 무거운 원소인 토륨과 우라늄에 이르렀다. 가장 무거운 원소에 중성자를 포격하면 더 무거운 원소, 이른바 초우라늄 원소가 생성될 거ㅓㅅ이라는 생각이 물리학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미는 팀이 철저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고스티노는 더 가벼운 부산물을 찾아내는 과정을 진행했다. 주기율표의 밑으로 내려가면서 납까지 찾기로 했고, 납보다 더 가벼운 원소는 생성될 수 없다고 가정했다. 그는 아무 원소도 찾지 못했고,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다. 팀이 잠정적으로 도달한 결론은(다고스티노가 부산물을 깨끗하게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저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실제로 새로운 무거운 원소가 생성ㅇ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화학자 이다 노다크 Ida Noddack 만이 초우라늄 가설은 틀렸다고 주정했고, 페르미가 실제로 한 일은 우라늄 핵을 훨씬 더 작은 조각으로 쪼개서 납보다 가벼운 원소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녀의 제안은 무시되었는데, 주로 그녀를 비롯해서 어느 누구도 그러한 사건을 설명하는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정적인 결론은 확고한 결론으로 뒤바뀌었다. 여름휴가가 시작될 때쯤, 코르비노가 린체이 아카데미 강연에서 섣부르게 페르미와 그의 팀이 초우라늄 원소를 발견했다고 열정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 연설은 이탈리아와 전 세계 신문의 머리기사로 보도되었다. 코르비노는 연설을 하기 전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고, 불확실한 결론이 최종 결론으로 발표되자 페르미는 충격을 받았다. 신중한 페르미는 결과를 절대적으로 확신할 때만 발표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고, 결과가 틀린 것으로 판명되면 자기의 명성을 망칠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잠 못 이루는 하룻밤을 보냈다. 스승이자 이탈리아에서 핵심적인 후원자였던 코르비노와 다른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는 어려웠다. 다음 날 아침에 그는 코르비노에게 직접 자기의 걱정을 말했다.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코르비노는 그 발표의 중요성을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나 짜릿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잊힐 수 없었다. 페르미가 그 발견을 믿고 싶어했는지 스승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스스로 완벽하게 부인한 적은 없었다. 5년 뒤에 노벨상 위원회는 느린중성자와 초우라늄 원소의 발견을 언급하면서 페르미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주었다. 바로 그 순간에 베를린에서 리제 마이트너, 오토 한, 프리츠 슈트라스만으로 구성된 훌륭한 팀이 페르미 팀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밝혀냈다. 페르미는 초우라늄 원소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우라늄 원소를 쪼갠 것이었다.

 

p185

 

 아주 드물게, 자연은 우리에게 커튼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짝 엿보게 해준다. 1934년 10월 18일에, 아말디와 폰테코르보가 그런 기회를 허락받았다.

 둘은 먼저 은을 중성자로 포격해보았다. 은의 알려진 반감기는 2.3분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서 다른 정량적인 측정을 진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제에 봉착했다. 은 과녁에 대한 중성자 방출원의 효과가 방출원에서 과녁까지의 거리뿐만 아니라 과녁ㅇ에 방출원을 놓은 탁자에도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대리석 탁자에서 실험을 했을 때는 나무 탁자를 쓸 때보다 방사능이 상당히 약했다. 이것은 전혀 부풀리지 않더라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왜 방사능의 세기가 방출원과 과녁을 놓은 탁자에 영향을 받을까? 아말디와 폰테코르보는 다음 날까지 측정을 계속했다. 토요일인 1934년 10월 20일까지도 이 이상한 현상은 사라지기를 거부했고, 그들은 페르미에게 이 수수께끼를 가져갔다.

 

 

 

.....

 

 

결과는 놀라웠다. 은의 방사능 세기를 파라핀이 없을 때보다 훨씬 강했고, 이제까지 연구팀이 측정한 어떤 경우보다도 더 강했다.

 파라핀의 효과를 확인한 뒤에, 페르미는 팀이 점심 식사를 하러 가야한다고 했다(중대한 실험 중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처음이었고, 마지막은 아니었다). 그는 늘 습관에 충실했지만, 이번 휴식은 오전에 목격한 이상한 효과에 대해 곰곰히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오후 3시, 팀이 원기를 회복해서 멈췄던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준비를 마치고 실험실로 돌아왔을 때, 페르미는 이 현상을 이해하고 그의 통찰을 나눌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페르미의 첫 번째 관찰은 파라핀에 탄화수소가 매우 많이 들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파라핀의 많은 부분이 수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두 번째 관찰은 수소 핵이 중성자와 질량이 거의 똑같고, 다른 무거운 핵들은 질량이 두 배, 세배, 다섯 배 또는 심지어 수백 배가 된다는 것이었다. 중성자가 수소 원자에 부딪히면 속력이 크게 줄어든다.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당구공을 생각하자. 당구공을 쳐서 다른 당구공을 때리면, 두 공 사이에 운동에너지가 나눠지고, 원래의 공은 과녁 공에 운동에너지를 나눠주어 속력이 느려지며, 과녁 공은 충돌의 영향을 상당히 이동한다. 이번에 탁구공으로 볼링공을 때린다고 하자. 볼링공은 거의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고, 탁구공의 에너지는 볼링공에 거의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탁구공이 볼링공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이다. 탁구공은 볼링공에 충돌하고도 거의 느려지지 않고, 충돌하기 전과 거의 같은 속력으로 튕겨 나온다.

 이와 비슷하게, 수소 함량이 많은 물질은 무거운 원소의  함량이 많은 물질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중성자를 느리게 한다. 그다음 질문은 이렇다. 왜 중성자를 느리게 하면 과녁 원소의 방사능이 커지는가? 이것이 점심시간 동안에 페르미가 깨달은 수수께끼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고속일 때 중성자는 핵 속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느린 중성자는 핵 속으로 들어가기도 쉽고, 내부에서 충돌하다가 거깅에서 멈출 확률도 높아서, 핵의 불안정성을 높여서 방사능을 일으킨다. 이것은 사실 에너지가 높은 중성자가 과녁의 방사능을 더 높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 정반대였다.

 

 페르미의 아이디어는 파라핀 실험의 결과를 설명했다. 나무 탁자에는 대리석 탁자보다 수소 원자가 많으므로 아말디와 폰테코르보가 본 비정상적인 결과를 낳는다. 또한 파라핀처럼 수소가 많은 물질이 방출원과 과녁 사이에 놓이면, 훨씬 더 많은 중성자가 느려진다. 

 이 관찰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실온에서 수소가 더 많이 들어 있는 물질로 실험을 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구내에 물이 있었다. 로마 대학교 물리학과 건물 뒤뜰에는 금붕어 연못이 있었다. 출처가 의심스러운 이야기에 따르면, 그룹은 건물 밖으로 나가서 페르미가 연못의 물을 중성자를 감속시키는 매체로 사용해서 실험을 반복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물의 효과는 파라핀보다 더 강했다. 역사는 금붕어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p190

 느린 중성자의 효과를 발견한 다음에, 그룹은 즉시 1934년 3월부터 했던 실험을 반복하면서 각각의 원소에 느린중성자를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쬐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았다. 1934년 말에 페르미는 그 효과를 이해했다고 확신했다. 1935년 2월에 그는 느린중성자 연구를 요약한 비교적 긴 논문을 왕립학회에 제출했다. 그는 또한 중성자와 핵의 충돌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종이에 계산하는 방식으로 원시적인 형태의 모의실험을 했는데, 나중에 로스앨러모스에서 1세대 컴퓨터를 사용해서 이 작업을 계속하게 된다. 이것은 중성자가 특정한 과녁을 때릴 때 물질을 뚫고 들어가는 각 단계에 대해서 확률에 따라 중성자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그는 종이와 연필을 사용해서 모의실험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주어진 확률에 따른 결과의 분포를 분석할 수 있었다. 카지노에서 하는 도박처럼 우연이 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나중에 '몬테카를로' 방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것은 페르미가 기여한 지속적으로 매우 널리 사용된 유용한 분석 방법 중 하나다. 묘하게도 페르미는 이 새로운 분석 방법이 중요한 발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전자 컴퓨터가 크게 발전해서 몬테카를로 모의실험이 훨씬 쉬워질 것을 페르미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단지 여러 해가 지난 뒤인 전쟁 중에 세그레에게 자기가 그런 계산을 해봤다고 말했을 뿐이다.

 1934년은 로마 학파 최괴의 해라고 할 수 있다. 페르미와 그의 팀은 7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에 부족한 재정 지원과 원시적인 장비만으로 방사능과 원자핵을 탐구했다. 그들의 장비는 분명히 버클리의 로런스 팀이 사용할 수 있는 정도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포격하는 중성자를 감속시키면 방사능이 더 많이 유도된다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그들은 물리학계의 다른 연구팀들이 실험을 재현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상세한 데이터를 만들었다. 페르미는 실험 프로그램을 강력히 밀어붙여서 베를린, 파리, 버클리, 케임브리지를 비롯해서 모든 경쟁자에 앞서서 지속적인 중요성을 지닌 결과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5년쯤 뒤에 일어날 역사적인 드라마의 무대를 만들었고, 그는 이 드라마의 주역이 된다. 크게 보아 세계를 위해서는 다행스럽게도, 페르미나 그의 팀은 당시에는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성취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p198

 이제 로마의 물리학 연구는 더 이상 순수한 재미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물리학에서 순수한 재미를 찾았던 페르미였지만, 그때부터 적어도 10년 동안은 물리학이 순수한 즐거움일 수 없었다. 페르미 자신의 노력으로 제2차세계대전을 끝낸 뒤에도, 물리학은 다시는 초기의 순수한 즐거움이 되지 못했다.

 

p309

 아르곤 팀에 새로 들어온 사람 중에는 페르미의 비범한 능력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직접보지는 못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눈앞에서 페르미의 능력을 보고 당연히 감명을 받았다. 루이스 앨버레즈는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1930년대 초에 시카고 대학교에서 콤프턴의 제자로서 앨버레즈가 했던 연구는 페르미가 도착할 때쯤에는 시카고 대학교의 전설이 되어 있었다. 그는 학위를 받은 뒤에 시카고를 떠나 버클리의 로런스 팀에 들어가서 사이클로트론으로 중요한 실험을 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앨버레즈는 영국과 MIT에서 레이더 개발에 참여했고, 1943년 여름에 아르곤으로 와서는 CP-2에 기어오르면서 리비와 함께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인 새로운 계측 장치 설계와 제작 일을 했다.

 앨버레즈는 결코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페르미를 처음 만난 경험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특히 가치가 있다. 그는 아르곤 연구소의 카페테리아에서 페르미, 마셜 부부, 허버터 앤더슨과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중성자가 엑스선과 비슷한 굴절 법칙을 따를 수도 있다는 점을 토론했다. 페르미가 엑스선 굴절의 정확한 공식을 기억할 수 없다고 마하자, 앨버레즈는 콤프턴과 앨리슨이 쓴 엑스선 회절에 관한 고전적인 교과서에 나와 있다고 말했다. 앨버레즈는 옆방에 그 책이 있는 것을 봤다면서 자기가 가져오겠다고 했지만, 페르미는 그런 수고를 할 필요 없다고 자기가 공식을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앨버레즈는 페르미가 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콤프턴 밑에서 배우면서 나는 엑스선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기본 원리에서 출발해서 굴절률 공식을 유도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엔리코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고전 전자기장 방정식을 칠판에 쓴 다음에 여섯 단계에 걸쳐 공식을 유도했다. 이 묘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엔리코가 책을 보면서 그래도 베껴 쓰듯이 일정한 속도로 한 줄 한 줄 써내려갔다는 것이다. 그날 밤에 나는 집에서 공식을 똑같이 유도해보았는데, 그 일은 꽤 재미있었다. 어떤 단계는 아주 쉬워서 내가 엔리코보다 더 빨리 유도할 수 있을 정도였고, 어떤 단계는 너무 어려워서 나 혼자서는 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엔리코는 쉬운 단계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속도로 어려운 단계를 해냈다.

 

 두 사람은 나중에 좋은 친구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버클리로 돌아간 앨버레즈는 가끔 페르미에게 최근 졸업생을 버클리 대학교에 박사후연구원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고, 페르미는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페르미를 처음 보는 미국의 젊은 물리학자들은 까다로운 문제를 척척 해결해내는 그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앨버레즈 세대의(페르미보다 약 10년쯤 젊은) 뛰어난 물리학자들은 하이젠베르크와 디랙 같은 페르미의 유럽 동료들과 가까이 있으면서 연구해본 적이 없었다. 이들과 가장 비슷한 살마으로, 1920년대 후반에 유럽 스타일의 이론물리학을 미국으로 가져온 버클리 대학교의 오펜하이머가 있었다. 양자론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 연구하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페르미를 직접 겪어본 미국의 젊은 물리학자들이 점점 많아졌고, 그들은 앨버레즈의 경외감을 공유했다.

 이러한 경외감은 젊은 세대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1954년에 열린 페르미의 추도식에서 새뮤얼 앨리슨은 핸퍼드행 기차에서 콤프턴이 페르미와 나눈 잡담을 회고했다. 그는 페르미에게 자기가 안데스산맥에서 우주선 연구를 할 때 시계가 잘 맞지 않았다고 말했고, "여기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고 결국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다"고 하면서 페르미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페르미는 곧바로 호주머니에서 연필, 종이, 계산자를 꺼내 들었고, 몇 분 뒤에 그 현상에 대한 설명과 함께 시계의 오차까지 추정했다. 콤프턴의 오랜 조력자였던 앨리슨은 콤프턴이 감탄하는 모습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었다.

 

p336

 파인먼은 페르미의 명성 따위에는 아무런 감명을 받지 못했지만, 계산 결과를 해석하는 능력 때문에 이 이탈리아 이민자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여러 해 뒤에 그는 페르미를 처음 만났던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우리는 그와 회의를 했는데, 그때 나는 어떤 계산을 해서 결과를 얻은 상태였다. 계산이 너무 정교해서 매우 어려웠다. 이런 일에 능숙했던 나는 언제나 계산에서 어떤 값이 나와야 하는지 알 수 있었고, 계산에서 왜 그런 값이 나오는지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너무 복잡해서 왜 그런 값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페르미에게 이런 문제를 풀고 있다고 말했고, 결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잠깐, 자네가 결과를 말해주기 전에, 내가 먼저 생각해보겠네. 이건 이런 식으로 될 것 같고(그가 옳았다),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건 이렇게 될 거야. 그래서 이것이 완벽하게 분명한 설명이지."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그는 나보다 열 배나 더 잘했다. 이 일은 나에게 큰 교훈이었다.

 

p338

 페르미는 노이만의 수학 실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몇 년 뒤에, 전쟁이 끝나고 로스앨러모스에서 여름 연구를 마치고 돌아온 페르미는 시카고 대학교 교수 클럽에서 점심 식사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노이만이 특히 까다로운 수학 문제를 거장의 솜씨로 풀어낸 이야기를 했다. 페르미의 젊은 동료 물리학자 코트니 라이트에 따르면, 페르미는 그가 이 문제를 풀 때 자신이 했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쟁기에 앉은 파리가 '우리가 밭을 갈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

 

p342

 추는 젊은 아내와 함께 주최한 파티에 페르미가 참석했던 일을 회상했다. 추는 둥글게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로 가위를 넘겨주는 파티 게임을 제안했다. 가위를 받은 사람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으면 가위를 접은 채로 건네주고, 다리를 꼬지 않았으면 가위를 벌린 채로 넘겨준다. 몇몇 사람들은 그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나머지는 게임을 지켜보면서 추측으로 알아내야 했다. 가위가 여러 번 돌아갔지만 페르미는 규칙을 알아내지 못해서 안달했다. 규칙을 일찍 알아낸 라우라가 좌절감에 빠진 남편에게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페르미는 결국 너무 화가 나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아내와 함께 일찍 자리를 떠났다. 추는 당황했지만, 페르미는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 추는 시카고 대학교로 갔고, 페르미의 대학원생이 되었다.

 더 큰 파티에서는 스퀘어 댄스를 출 때도 있었는데, 페르미 가족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최초의 핵분열 무기의 퓨즈 장치를 개발한 물리학자 로버트 브로드의 부인 버니스는 이 기간 동안 자주 만났던 스퀘어 댄스 그룹을 이끈 사람 중 하나다. 나중에 그녀는 페르미 가족이 초보자를 가르치는 자리에 온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처음에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했는데, 복잡한 춤 동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조금 지나서 라우가와 넬라가 댄스에 동참했지만 엔리코는 여전히 움직임을 연구하면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온화하고 합리적인 목소리로 자기가 스퀘어 댄스에 합류할 준비가 되면 말해주겠다고 했는데, 춤을 자세히 보면서 동작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그가 내게 와서, 내가 직접 파트너가 되어준다면 끼어들어보겠다고 말했다. 스퀘어 댄스를 이끄는 커플이 되겠다는 것이었는데, 처음 춤을 추는 사람으로서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고, 그대로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는 정확한 박자로 나를 인도했고, 어떤 동작을 해야 언제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그때나 그 이후나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춤을 즐겼다고 말하지 않겠다. 가장 잘하는 사람들도 늘 실수를 하는데 그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집중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긴장을 풀고 즐기라는 충고도 했다. 그는 관대하게 웃었지만, 나는 그가 발이 아니라 머리로 춤을 춘다는 것을 알았다.

 

 그도 결국에는 스퀘어 댄스를 즐기는 법을 익혔고, 아주 잘 익혀서 전쟁이 끝난뒤에 시카고 시절에 페르미 가족이 연 많은 파티에서 스퀘어 댄스는 붙박이 행사가 되었다.

 

p345

 이제 페르미는 임계점에 도달한 정확한 순간에 빠른중성자를 내보내는 역할을 하는 '초기 중성자 공급 장치'를 설계하려고 했지만, 이런 시도는 폭탄의 물리학을 담당한 그룹의 책임자 로버트 바커를 난처하게 했다. 바커는 존경받는 실험가였고, 전쟁 뒤에도 길고 성공적인 경력을 쌓게 된다. 페르미와 바커는 서로 크게 존경했지만, 바커는 페르미가 조금 골칫거리가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페르미는 초기 중성자 공급 장치의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냈지만, 바커가 보기에는 모두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페르미가 이 장치 때문에 바커의 속을 썩이기는 했지만 나중에도 둘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각에 페르미는 자기가 그 아버지라고 불리게 될 이 엄청난 물건이 점점 더 거대한 무기가 되어가는 것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했던 듯 하다. 그는 그 점을 끔찍하게 걱정한 것 같다. (...) 그는 초기 중성자 공급 장치뿐만 아니라 전체 프로젝트에 대해 걱정한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들여다볼 수 있는 일이 초기 중성자 공급 장치를 개발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집중했고, 그 일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또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생각해내고 동작하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그는 온갖 것을 다 검토했고, 하루 뒤나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나 또는 베테를 붙들고 그 중성자 공급 방법이 왜 동작하지 않는지에 대해 새로운 이유를 대곤 했다.

 

 

 바커의 추측대로 페르미는 프로젝트의 엄청난 함의를 마침내 이해하고 문제 해결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방법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실제로 페르미가 완전한 연쇄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수의 중성자를 장치가 파괴되기 전에 방출시키는 일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쩔쩔맸을 수도 있다. 어쨌든, 바커와 오펜하이머는 1943년 말에서 1944년 초에 메사의 거주자로 도착한 닐스 보어와 그의 아들 오게 Auge Bohr 에게 이 일을 할당했다. 바커는 보어 부자의 설계를 페르미가 받아들일 것이라고 보았고, 그가 옳았다. 덴마크의 부자는 며칠 동안 고심한 끝에 우아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페르미가 로마에서 사용했던 중성자 방출원을 공 모양으로 만든 이 장치는 "성게"라고 불렸고, 플루토늄 공 안쪽에 설치된 이 장치가 내폭의 엄청난 압력을 받으면 파괴되기 전에 중성자 10~100개를 방출한다. 이 정도의 중성자만으로도 플루토늄 구 전체에서 완전한 폭발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 우아한 해결책을 본 페르미는 그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p347

 독일과의 전쟁은 1945년 4월 말에 끝났다. 5월 2일에 독일 의사당 건물에 소련 국기가 내걸렸다. 연합군의 가장 중요한 유럽의 적을 실질적으로 물리쳤고, 이와 함께 하이젠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이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사라졌다.

 제러미 번스타인이 결론적으로 보여주듯이, 독일은 핵무기를 만드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중수를 감속재로 사용한다는 최초의 결정으로 그들의 프로젝트는 시작하자마자 끝장이 날 운명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중에 프로젝트를 지연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듯이 말했지만, 오늘날 역사가들 사이의 합의는 이 설명이 얼마간 자기 변명이라고 본다. 덧붙여 독일인들이 흑연을 감속재로 사용하기로 했을 때, 그들이 사용한 흑연은 불순물이 너무 많아서 감속재로서의 성능이 크게 떨어졌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그들은 우라늄의 임계질량을 매우 크게 잡았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유지되는 연쇄 반응조차 성취하지 못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맨해튼 프로젝트의 본질이 크게 바뀌었다. 페르미를 포함해서 프로젝트에 참여한 많은 과학자가 보기에 이 프로젝트를 계속해야 할 정당성이 사라졌다. 최초의 핵무기를 만드는 경쟁에서 독일이 탈락했다. 미래를 내다볼 때, 일본이 원자폭탄을 가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속 연구소의 과학자들, 그중에서 특히 제임스 프랑크와 레오 실라르드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진행을 늦추거나 완전히 중단해야 한다고 보았고, 폭탄을 개발했다고 해도 일본에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은 시카고의 과학자들의 동요가 커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일부는 이러한 불안감에 동조했다.

 그러나 정치인들과 군부의 생각은 달랐다. 그로브스는 핵무기의 완성을 독려하려고 했고, 이 길이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는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며, 핵무기의 효율성을 평가해보고 싶어했다. 새로운 대통령 해리 트루먼 주변에 있는, 프로젝트를 잘 아는 소수의 인사들(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 이었다)도 그로브스와 생각이 같았다. 취임하고 나서야 이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된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헨리 스팀슨 장과은 5월 말에 네 핵심 과학자, 아서 콤프턴, 페르미, 로런스, 오펜하이머를 워싱턴으로 불렀다. 그들은 핵무기 프로젝트 전체의 미래에 대해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조어을 담당하는 '임시 위원회'에 조언을 하게 되었다. 스팀슨이 위원장을 맡은 이 임시 위원회는 정부의 최고위급 민간 관료와 군부 지도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스팀슨의 펜타곤 사무실에서 열린 이 회의는 아침 10시쯤 시작해서 점심 식사를 하면서도 계속되었고, 오후 늦게 끝났다. 콤프턴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이 모임에 대해 회상했다. 회의에서는 프로젝트의 현재 상황, 핵무기의 효과에 대한 추정, 핵무기를 사용할 것인지, 사용한다면 언제 할 것인지, 소련에는 어떻게 알릴 것인지, 전쟁이 끝난 뒤의 비밀 유지 방법,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게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점심 식사 중에 콤프턴과 로런스가 일본의 정치와 군사 지도부를 초청해서 폭발 시범을 보이는 방안을 지지했다. 폭발 시험의 경험이 너무 극적이어서 일본인들이 재빨리 평화를 위한 조치에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있었다. 오펜하이머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폭탄을 일본에 떨어뜨리기를 원했다. 그는 저항하는 일본이 항복할 만큼 시범이 극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핵무기가 재래식 폭격보다 특히 더 비인간적이라고 보지도 않았다. 이미 도쿄를 포함한 일본의 대도시들이 폭격으로 초토화되었고, 약 20만 명이 죽었다.

 오펜하이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회의에 참석한 정치 지도자들은 전쟁을 빨리 끝내거나 후속 침공을 쉽게 하거나 어떤 목적으로든 일본에 핵무기를 쓰는 쪽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그들의 의견상, 가장 빠른 방법은 군수품을 생산하는 일본의 주요 도시에 극적으로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즉각적인 미래에 폭탄을 하나 또는 둘 정도만 만들 ㅅ 있는데, 폭탄 하나를 단순한 시범용으로 소모하는 것에 명확히 반대했다. 시범용으로 하나를 쓴다면 남은 무기가 단 하나뿐인데 일본 사람들이 시범을 보고도 기대했던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시범에서 폭탄이 불발이라도 되면 문제가 더 악화되리라.

 

 

 

 

 

......

 

 물론 가장 큰 아이러니는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그룹의 권고안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크의 보고서와 실라르드의 청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측근들은 정치적, 군사적 고려를 바탕으로 일본의 도시들에 무기를 사용하기로 이미 결정했다. 유일한 문제는 폭탄을 투하할 도시를 선정하는 일이었다. 젊을 때 일본을 여행한 스팀슨은 장엄한 문화 수도인 교토를 잠재적 타격 목표에서 제외했지만, 다른 모든 도시를 똑같이 대했다.

 

 과학자들은 1945년 7월과 8월에 이루어진 결정에 그들이 한 역할을 두고 오랫동안 애를 태웠다. 더 강하게 나갔어야 했을까? 더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했을까? 그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워싱턴의 의사 결정권자들은 이러나 저러나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p360

 앨리슨도 나중에 그날(첫 핵실험의 날, 1945년 7월16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해 회상했다. 가는 길에 타이어가 터져서 앨리슨은 페르미를 남겨두고 다른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가까운 정비소로 향했다. 그러나 앨리슨이 수리 장비를 구하기도 전에 페르미가 차를 몰고 쫓아왔다. 마침 지나가는 물리학자가 아르곤 가스통을 갖고 있어서, 바퀴에 아르곤 가스를 채웠다고 페르미가 말해주었다. 안전하지만 아주 비싼 기체를 자동차 바퀴에 넣는 일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p361

 1945년 7월 24일에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새로운 무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트루먼은 미국 쪽 통역관이나 이 일을 증언해줄 배석자도 없이 혼자 스탈린에게 말했다. 트루먼에 따르면 스탈린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 소련 독재자는 대통령에게 축하를 전하면서 일본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을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스탈린은 트리니티(핵무기의 암호명)가 성공했다는 사실을 미리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파이얼스의 동료 클라우스 푹스가 소련에게 원자폭탄 개발에 관한 소식을 넘겨주고 있었고, 새로운 무기의 재료가 우라늄이 아니라 플루토늄이라는 정보도 그를 통해 소련으로 넘어갔다. 이 정보로 소련은 원자폭탄 개발을 몇 년 앞당길 수 있었다.

 

p405

 파인먼, 슈빙거, (신이치) 토모나가의 연구를 조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젊은 이론가 프리먼 다이슨에게도 페르미의 파이온-양성자 산란 연구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다이슨은 코넬 대학교의 조교수였고, 작은 그룹의 대학원생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파이온-양성자 상호작용의 이론적 계산을 양자전기역학의 분석에 성공적으로 사용했던 기법으로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파이온-양성자 상호작용에 관련된 힘은 양자전기역학의 힘보다 훨씬 강하지만, 다이슨과 그의 학생들은 이 점을 중시하지 않고 계산해서 페르미가 시카고 사이클로트론으로 얻은 것과 꽤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그들은 몇 년에 걸친 연구로 이런 결과를 얻었고, 이것을 완성한 1953년 봄에 다이슨은 코넬에서 시카고까지 버스를 타고 페르미에게 결과를 보여주러 갔다.

 다이슨은 페르미에게 열정적으로 자기 연구를 보여주려고 했다. 한동안 사담을 나누다가, 페르미가 다이슨의 결과를 보자고 했다. 다이슨은 50여 년이 지난 2004년에 페르미의 판단에 대해 회고했다. 페르미는 이렇게 말했다. "이론물리학 계산을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네.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계산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 대한 명료한 물리학적 그림(모델)이 있어야 해. 또 다른 방법은, 상세하고 자기충족적인 수학적 형식론이 있어야 하지. 자네의 연구에는 둘 다 없군."

 

 다이슨은 깜짝 놀라서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했다. 페르미는 다이슨이 사용한 수학적 기법이 풀려고 하는 문제에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가 자신의 결과가 페르미의 1951~1952년 실험에서 측정한 값에 매우 가깝다고 반박하자, 페르미는 다이슨의 계산에는 임의적인 매개 변수가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페르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친구 노이만은 매개 변수가 넷이면 코끼리도 키워 맞출 수 있고, 다섯이면 코끼리가 코를 흔들게 할 수도 있다고 했지." 이 말을 듣고 다이슨은 코넬로 돌아가서 몇 년에 걸친 연구 결과가 페르미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슬픈 소식을 학생들에게 전했다.

 다이슨은 이 일을 회상하면서 쓰라려하기보다는 막다른 골목인 줄 모르고 계속 달려가는 시간 낭비를 막아준 페르미에게 감사해했다.

 

 "50년이 지나서 되돌아보면, 우리는 분명히 페르미가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한 힘을 설명하는 결정적인 발견은 쿼크였다. 중간자와 양성자는 쿼크를 담는 작은 자루이다. 머레이 겔만이 쿼크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강한 힘에 대한 어떤 이론도 적합하지 못했다. 페르미는 쿼크에 대해 전혀 몰랐고, 쿼크가 발견되기 전에 죽었다. 그러나 그는 1950년대의 중간자 이론에 뭔가 핵심적인 것이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리고 이론과 실험의 불일치가 아니라 페르미의 직관이, 나와 학생들이 막다른 골목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p453

 노벨상 수상자가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에게 준 영향을 연구한 사회학자 해리엇 저커먼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페르미가 독보적이라고 지적한다. 페르미에게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이 결론은 더 확실해진다. 그의 직계 학생 중에서 다섯 사람(체임벌린, 프리드먼, 리, 세그레, 스타인버거)이 노벨상을 받았다. 크로닌과 양도 노벨상을 받았는데, 페르미의 공식적인 제자는 아니지만 둘 다 페르미에게 받은 영향을 인정했다. 다른 많은 사람도 물리학 분야에서 유명해졌고, 중요한 경력을 쌓았다. 이것은 놀라운 기록이고, 조머펠트와 러더퍼드 정도만 여기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밸런타인 텔레그디는 시카고 시절 페르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교육이었다고 평가했다. 그가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p468

 울람은 메트로폴리스와 함께 갔던 마지막 방문 뒤에, 눈물을 흘리면서 소크라테스가 죽었을 때 플라톤이 했던 말을 메트로폴리스에게 했다. "이제 가장 현명한 사람이 죽는다."

 

p469

 그의 두 친구 찬드라세카르와 울람은 페르미의 죽음과 페르미의 위대한 친구 존 폰 노이만이 2년이 조금 지난 뒤에 똑같이 53세에 맞이한 죽음을 비교하는 긴 글을 썼다. 노이만은 자기의 뛰어난 수학적 정신이 죽음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노이만은 유대교를 따르지 않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싶어하는 약혼녀를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노이만은 카톨릭 신앙을 편안함과 위안의 원천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였지만, 카톨릭은 그에게 게 둘 다 제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비해 페르미는 드문 평정심으로 자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대개는 현실적으로 얼마간 비판적이었던 평소의 인생관 속에서 받아들였다. 페르미에게는 과학이 종교의 기능을 완전히 대신했다. 그는 살았던 것과 똑같이 죽었으며, 죽은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형이상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사색을 할 필요가 없었다. 페르미로서는 자기의 삶은 그의 비범한 정신이 꺼지는 순간에 끝나지만, 그의 업적은 계속 살아 있으리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했다.

 

p473

 전체 경력을 뒤돌아볼 때 페르미는 몇 안 되는 사람만을 동료로 인정했고, 그들은 주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현대물리학을 창시한 유럽 학자들이었다. 페르미를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반열에 두기는 어렵겠지만, 페르미는 스스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거만함이 전혀 섞이지 않은, 자기의 능력에 대한 건전한 판단이었다. 보른과 슈뢰딩거는 나이가 더 많았지만 페르미의 동료였고,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위그너, 베테, 디랙, 파울리, 그리고 어쩌면 텔러도 동료였다. 노이만은 확실히 동료였고, 울람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들이 페르미가 자기와 견줄 만하다고 여긴 사람들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이 그룹이 아니었고, 로런스도 마찬가지였다. 라비나 펠릭스 블로흐도 이 그룹에 들어갈 거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엘비레스, 겔만, 파인만 같은 사람들도 물리학에서 한 획을 그었지만 그들은 다음 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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