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31. 빨간 알사탕 하나

 장에 다녀오신 할머니가 모시 손수건에 싸 꼬옥 품고 온 빨간 알사탕 한 알을 입에 넣어주셨다.

 "와아 달다 할무니, 겁나게 다요. 세상에서 젤 달고 맛있다아."

 볼이 불룩한 알사탕을 빨며 나는 황홀감에 소리쳤다.

 처음 먹어 본 알사탕의 단맛은 며칠이 지나도록 내 입 속과 몸 안을 굴러다녔다. 할머니가 잘 익은 대추알을  줘도, 붉은 홍시랑 몰캉한 다래알을 입에 넣어줘도 "아 거시기 알사탕 참 달고 맛있었는디라" 온통 알사탕 생각뿐이었다.

 신식 알사탕의 강렬한 단맛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혓바닥을 물들인 빨간 색소만큼이나 진득하니 나를 끌어당겼다. 

 흰 눈이 내리고 문풍지 바람이 차운 밤, 처마 아래 매달은 대바구니에서 인절미를 꺼내 화롯불에 구워 호호 불어 조청에 찍어 입에 넣어주던 할머니가 그랬다.

 "아가 맛있냐. 수수조청 맛이 어떠냐."

 "달고 맛나요, 근디요 알사탕이 더 달고 맛나요. 최고랑께요."

 문득 할머니가 침묵하는 걸 느끼며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챈 순간, 알사탕 맛을 본 이래의 내 말과 일련의 일들이 스쳐갔다.

 그랬다. 할머니는 곶감이든 떡이든 엿이든 어디선가 선물 받은 그 달고 맛난 것들을 자기 입에 넣지 않고 품고 와 내 입에 넣어주셨는데, "근디 알사탕이 더 달고 맛난디라. 그 빨간 알사탕이..." 흘린 듯이 말해왔던 나는 그만, 구수한 인절미와 달근한 수수조청을 씹으며 울먹였다.

 다른 때 같으면 "아가 울지 마라" 품에 안아주실 텐데, 울먹이는 나를 기냥 두고 구부정히 마주 앉아 아무 말도 없는 할머니가 낯설고 멀어지고, 할머니와 나 사이의 어떤 끈이 끊어져 버린 듯 아득했다.

 이윽고 할머니가 "아가, 이리 오니라" 울먹이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물그릇을 들어 마시게 했다.

 "평아, 알사탕이 달고 맛나지야? 그란디 말이다. 산과 들과 바다와 꽃과 나무가 길러준 것들도 다 제맛이 있지야. 알사탕이 아무리 달고 맛나다 해도 말이다. 그것은 독한 것이제. 유순하고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을 무감하게 가려버리제. 다른 맛들과 나름의 단맛을 가리고 밀어내 부는 건 좋은 것이 아니제. 알사탕같이 최고로 달고 맛난 것만 입에 달고 살면은 세상의 소소하고 귀한 것들이 다 멀어져 불고, 네 몸이 상하고 무디어져 분단다. 그리하믄 사는 맛과 얼이 흐려져 사람 베리게 되는 것이제.

 "야아, 할머니, 알겠어라."

 "우리 평이는 겨울이면 동백꽃을 쪼옥 쪼옥 빰시롱 '달고 향나고 시원하게 맛나다' 했는디, 올해 동백꽃 맛은 어쩌드냐아. 나는 말이다, 아가. 네 입에 넣어줄 벼꽃도 깨꽃도 감자꽃도 아욱꽃도 녹두꽃도 오이꽃도 가지꽃도 다 이쁘고 장하고 고맙기만 하니라. 이 할무니한텐 세상에서 우리 평이가 젤 이쁘고 귀한 꽃이다만 다른 아그들도 다 나름으로 어여쁜 꽃으로 보인단다. 아가, 최고로 단 것에 홀리고 눈멀고 그 하나에만 쓸려가지 말그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 품에 꼬옥 안겼다.

 다음 해 문풍지 우는 화롯불 곁에 할무니, 우리 할무니는 아니 계셨다. 나는 돌아가신 할무니가 그리워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하얀 눈 위에 작은 내 발자국이 총총히 따라왔다.

 

 동백나무 아래 붉고 선연한 동백꽃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으스스 떨면서 언 손으로 동백꽃을 한 줌 가득 주워 쪼옥 쪼옥 빨아먹으며 눈길을 걸었다.

 "아가, 맛이 어떠하냐?"

 "순하고 맑고 시려요. 달고 향그럽고 맛나요, 할무니."

 

p54

 성서는 복음서라는데, 나에게 성서는 울음의 책이었다. 호세 신부님과 함께 더듬더듬 성서를 읽어나갈 때 내 가슴에 박히는 건 눈물과 탄식과 수난과 죽음이었다. 그랬다. 세상의 큰 울음을 통하지 않고는 복음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울음이야말로 복음이었다. 눈물이야말로 은총이었다.

 가난하고 불운하고 슬픈 눈을 가진 예수. 그는 고난받으면서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사랑이 처음이자 전부라고,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애통하고 분노하고 울면서도,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다 이루었다' 기꺼이 죽어간 예수가 좋았고, 눈물의 사제인 호세 신부님이 좋았다.

 

p57. 빗속의 등불들

 가을비를 앞두고 다들 벼 수확에 쫓겨서 부지깽이도 나설 만큼 분주한 때였다.

 일손을 구하지 못한 어머니는 혼자 겨우 벼를 베어 논바닥에 뉘어놓고는 묶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급히 저녁을 지어 먹고 다시 논으로 나가 볏단을 묶어 세우는데, 꾸물거리는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애써 베어 둔 벼가 빗물에 잠겨 들고 있었다. 탈진한 어머니는 벼를 묶어 세우느라 안간힘이었다.

 들녘은 어둡고 빗줄기는 거세고 발은 푹푹 빠지고 나락은 젖어 무겁기만 했다. 애가 탄 나는 어찌해 볼라고 볏단을 붙들고 힘을 써 봤으나 이렇게 작고 약한 내가 원망스럽고 아부지 없는 서러움이 차갑게 파고들었다.

 그때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일렁였다. 불빛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자 나는 도깨비불인가, 더럭 겁이 났다. 어둠 속에 점점 커지는 불빛 사이로 "가스파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쏟아지는 빗발을 뚫고 등불과 낫을 든 흰옷의 행렬이 보였다. 동강공소에 다니는 저 건너 마을 형 누나들과 어른들이었다.

 동네 사람들도 친척들도 이런저런 나름의 일들로 도울 여력이 없었는데, 우리 집 사정을 아는 신자들이 비가 쏟아지자 서로 소식을 들리고 의견을 모아 여기 먼 마을까지 나선 것이다.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젊은 엄니가 이 작은 논 세마지기에 다섯 아이 생계를 걸고 사는 걸 알기에, 자기들 수확을 뒤로 한 채 십리 밤길을 달려온 것이다.

 어머니와 신자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인사를 나누고 일렁이는 횃불 아래 비에 젖은 얼굴들이 빛나고 있었다.

 "하이고 장해라. 엄니랑 벼를 다 베어놓았구나이."

 그러더니 논바닥의 나락을 세워 짚으로 묶고, 볏단을 지고 논두렁에다 옮겨 둥글게 쌓고, 함께 성가를 부르며 날랜 손길로 일을 해나가는 것이었다.

 차가운 빗속에 몸에 돋는 소름과 하얀 입김, 가슴을 데우는 뜨거운 온기, 어둠 속에 일렁이는 등불과 노동의 춤사위 같은 긴 그림자, 빗소리를 타고 울리는 성가 소리...

 일을 마치고 어두운 밤길로 점점이 멀어져 가는 등불을 바라보며 어머니와 나는 빗줄기 속에서 성호를 그었다.

 

p75. 나의 첫 요리

 나의 첫 번째 요리는 여덟 살 때, 그러니까 그날 정오에, 느닷없이 해버렸다.

 모내기를 앞두고서 동네 일손을 구해 우리 논에 써레질을 하는 날이었다.

 "일손은 잘 멕여아지야. 작은아들, 오늘 나 좀 도와주시제."

 엄니가 뜨끈한 가마솥에 쌀밥을 안쳐두고 매콤새콤한 서대회 감을 손질해 살강(선반)에 올려두는 사이, 나는 동강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받아다 찬물에 담가두고, 갯벌 바다가 어부네에 가서 갓 잡은 커다란 갯장어 두 마리를 대바구니에 담아  끙끙 이고 왔다.

 "애썻다. 인자 아궁이에 불을 지피그라. 불티 안 날리게 은근히 때야 쓴다이."

 "걱정 마시씨요. 싸릿가지랑 솔잎으로만 곱다시 불 땔께라."

 엄니는 부뚜막 위에 된장 한 그릇, 조선파 한 다발, 어슷이 썬 무우, 여린 호박잎이랑 들깨 순이랑 토란 줄기, 절구에 굵게 빻은 고춧가루랑 마늘이랑 생강, 부엌 시루에서 기른 숙주 한 바구니를 가지런히 준비해 두고선 큰 도마를 꺼내 내 다리만큼이나 굵은 갯장어를 다듬고 토막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갯장어가 꿀틀, 한순간에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엄니의 손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몸서리가 치고 난 얼어붙어 버렸다.

 으음, 엄니가 신음을 토하더니 한참이나 감은 눈을 번쩍 뜨고 작으나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보며 말했다.

 "평아, 정신 차리자. 바가지에 물을 떠라. 여기 손에 부어라. 잘혔다. 방에 가 횟대에 걸어둔 옷 내오니라. 이 치마랑 저고리 벗기고 입혀라. 되었다."

 "엄니.... 얼굴에 피..."

 나는 엄니가 쓴 머릿수건을 풀어 후다닥 물에 적셔 이마와 볼에 튄 피를 닦았다. 엄니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입술이 파랗게 떨려 더럭 겁이 났다. 엄니는 피 흐르는 손을 감싸 위로 치켜든 채 우뚝 서너디 말했다.

 "평아, 내 말 잘 들어라. 물이 끓으면 이 장어를 넣어라. 솥뚜껑이 들썩이고 김이 오르면 여그 된장과 파를 넣고 호박잎과 야채를 넣어라. 마지막에 고춧가루랑 양념을 넣어라. 간을 잘 잡아야 쓴다. 서대회는 고루 잘 무치고 막걸리 식초는 논에 가져가서 마지막에 넣어라. 알겄냐. 다들 일 나갔을 테니 논밭에 가서 작은 엄니나 아랫집 순덕이 누나를 찾아라. 엄니가 급한 일로 출타했다 허고 늦지 않게 일손들 밥 내가그라. 알았지야, 평아, 해낼 수 있겄지야?"

 나는 아직 부들부들 떰시롱 애써 씩씩하게 대답했다.

 "알았어라, 다 해낼께라. 근디 엄니 혼자 가실라고라..."

 엄니는 팔꿈치 아래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움켜쥔 채 날랜 걸음으로 마당을 질러 멀리 떨어진 면 소재 의원으로 가는 것이었다.

 혼자 남겨진 나는 겁에 질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귓속에서 잉잉잉 벌이 날고 가슴에 우두두 말이 달리고 엄니의 피 묻은 얼굴만 아른거렸다. 나는 물을 한 바가지 떠서 마시고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 타닥타닥 가마솥이 끓을 때, 엄니가 불러준 순서대로 기억을 불러내며 장어 요리를 시작했다.

 "하이고 하느님, 울 엄니 살려주씨요. 울 엄니가 안 불쌍하요. 아부지 델꼬 가 불더니 울 엄니까지 뭔 죄다요. 좀 살려주시씨요."

 울며 기도하며 엄니가 맡긴 요리를 마쳤다. 그러고는 숨이 차도록 달려나가 아랫집 순덕이 누나를 찾았다.

 "누나 얼러 씼으씨요. 바쁘요이."

 나는 논흙투성이인 누나에게 두레박 물을 막 부어주며 재촉했다. 부엌으로 와서 국 맛을 본 누나가 둥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옴마야, 간이 딱 맞네. 맛나게 끓였네잉. 엄니가 한 거보다 평이가 더 맛있게 해부렸네이."

 누나는 속도 모르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밥 늦겄소. 싸게싸게 챙기잔께라."

 누나와 나는 고봉밥을 담고 김치를 썰고 국통과 그릇을 날래게 챙겨 논가 키 큰 버드나무 아래 밥을 차리고 일손들을 불렀다.

"엄니는 으디 가고 평이랑 순덕이냐?"
"아 공소에 신부님이... 그 눈 파란 신부님이 급하게 불러서라."

 나는 애써 둘러댔다.

 "하야, 귀헌 장어국이네. 나가 오늘 뭔 복이다냐아."
 "하이고야 맛나네. 간도 딱 맞고 입에 착착 감기네잉."
 "흐미, 요 새콤매콤 달근한 서대회 맛 좀 보소. 씨원한 동강 막걸리랑. 이 맛에 나가 여그 살제잉. 아 행복지다."
 "하여튼 니 엄니 음식 솜씨는 천하제일이여."

 나는 엄니가 빈 자리에 마치 내가 우리 집안의 가장이나 되는 양 뒷짐을 지고 힘을 담아 말을 했다.

 "맛나게들 많이 많이 드시씨요. 우리 논에 정성 좀 많이 들여 주씨요잉."

 어른들이 하하하 웃으면서 나를 놀리고 순덕이 누나도 "아따아따, 쫌 있으면 장가 보내달라겄다야" 호호호 웃음을 날렸다.

 나는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마치고 엄니를 기다렸다. 해가 저물녘에야 엄니가 핼쓱한 얼굴로 작아져서 돌아왔다. 기름 떨어진 호롱불처럼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평아, 이른 대로 했느냐?"
 "예, 걱정 마씨요. 다 잘 되었써라."

 나는 잽싸게 방으로 달려가 요를 펴고 베개를 놓았다. 그리고 핏자국이 말라붙은 옷저고리를 벗겨주었다. 자리에 누운 엄니가 눈을 감고 신음하더니 하얗게 마른 입술로 더듬거렸다.

 "손은 붙였다. 스무 바늘쯤 꿰맸다. 피를 많이 흘려 도중에 어질했으나 다 잘되었다. 감사하다. 오 하느님, 성모님..." 그러고는 스르르 잠에 들었다.

 나는 살금살금 들락거리며 내가 아파 누웠을 때 엄니가 해준 것들을 떠올리며 수건을 적셔 이마의 땀을 닦고 따끈한 물로 발을 닦고 팔 자루를 데워 배 위에 얹었다. 그리고 엄니의 낡은 기도문을 펼쳐 읽으며 울먹였다.

 엄니가 깨어났을 때 솥 안 더운 물 위에 놓아둔 장어국과 밥을 내왔다. 벽에 기대앉아 상을 받은 엄니가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많이 컸네..."하셨다. 나는 머쓱한 데다 시린 마음이 들킬세라 "아따 얼른 수저나 뜨씨요" 해버렸다.

 엄니는 따끈한 장어국을 맛보더니, 밥을 말더니, 점점 빠르게 드시는 거였다.

 "맛나네, 잘했네. 아들 밥상을 다 받아보네... 속없이 맛있네."

 밥을 다 드신 엄니는 또 잠이 들었다.

 울 엄니가 크게 베인 손을 움켜쥐고 핏방울 떨구며 홀로 먼 황톳길을 걸어가던 꿈같이 어질하고 절박했던 그날 이후, 나에게 요리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어느 날, 준비도 연습도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울며 기도하며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주어지면,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꼭 해내야만 하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이 그날 정오에 시작되었다.

 생각할 때마다 아뜩하고 목이 메이는 나의 첫 요리, 내 인생의 첫 요리.

 

 2년간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 비서관을 지냈던 이의 기록. 그 기간 동안 주요한 이벤트에서 연설한 문 대통령의 연설문의 내용들과 그 뒷얘기를 알 수 있다.

 재밋다.

----------------------

p50

 취임 초기부터 추진한 개헌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회에 제출했지만, 시한 내 처리되지 않았다. 2018년 5월 25일 문 대통령은 안타까움과 송구스러움을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표현했다.

 

 촛불 민심을 헌법에 담기 위한 개헌이 끝내 무산됐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매우 송구스럽고 안타깝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한의 가부可不를 헌법이 정한 기간안에 의결하지 않고 투표 불성립으로 무산시켰습니다. 국회는 헌법을 위합ㄴ했고, 국민은 찬반을 선택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됐습니다. 국회가 개헌한을 따로 발의하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정치인이 개헌을 말하고 약속했지만, 진심으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한 분은 적었습니다. 이번 국회에서 개헌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기대를 내려놓습니다. 언젠가 국민께서 개헌의 동력을 다시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진심이 없는 정치의 모습에 실망하셨을 국민께 다시 한번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https://www.facebook.com/moonbyun1/photos/a.263896370383389/1450487375057610/?type=3

 

문재인 - 촛불 민심을 헌법에 담기 위한 개헌이 끝내 무산됐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

촛불 민심을 헌법에 담기 위한 개헌이 끝내 무산됐습니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매우 송구스럽고 안타깝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의 가부를 헌법이 정한 기간 안에 의결

www.facebook.com

 

 

정경심 교수가 옥중에서 쓴 글 모음. 시집이라고 봐야 할 듯. 

절절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

p66. 오늘 밤

 여보
 오늘 밤은 각자의 슬픔을 
 슬퍼합시다
 내 슬픔이 너무 커서
 당신 슬픔도 너무 클 것을 알기에
 오늘 밤은 나 혼자 슬퍼하겠습니다
 당신도 슬픔에 겨워 어쩔 줄 모를 테니까요

 여보
 우리가 오늘 밤
 큰 슬픔을 슬퍼하며
 홀로이 그 슬픔을 이겨 냈음을
 잊지 맙시다
 당신과 나보다 더 아픈 마음이
 오늘 밤엔 없었음을 기억합시다

 

p78. 결국, 사람이다

 죽음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은
 사람 때문이다
 결코 그 길을 가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그가 버티고 있었고
 나를 그 길로 보내 버릴 수 있었던 아이들이
 집요하게 내 죽음의 멱살을 붙잡고 싸워 주었다
 자신도 버티기 힘든 각자의 무게 위에 서로의 무게까지
 우리는 어깨와 어깨를 맞대어
 무게를 떠안고 분산시켰다
 그리고 이곳에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이 어깨를 
 들이밀고 우리의 어깨가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우리를 지탱시킨 것은 우리를 살린 것은
 결국, 사람이다

 

p135.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세상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받은 만큼 주는 것도 아니고
 준 만큼 받는 것도 아니란 걸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많이 준 친구는 더 달라 하고
 내게 받은 적 없는 이는 조건 없이 주려 하는
 이 불가사의에 가끔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반문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얼마나 주었나
 나는 누군가를 조건 없이 얼마나 믿었나
 그리고 이제,
 나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p139. 마음의 대화

 오늘, 당신을 만났습니다
 찬찬히 보니 주름이 많아졌습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그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아이들까지 다 내려놓은 지금
 뭐가 그리 안달복달할 게 있겠습니까
 이 일이 있기 전까진 내 속으로 낳았어도
 그리 단단한 줄 알지 못했습니다
 시련이 성숙시켰을까요
 나는 아이들만 보며 살겠습니다
 당신은 훨훨 자신의 길로 나아가세요

 오늘, 당신을 만났습니다
 자세히 보니 없던 흰머리가 셀 수 없습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우리를 가두었던 그 세월이 그러고도 남습니다
 우리 모두 다 내려놓은 지금
 광야에 헐벗고 선 듯하여 춥고 아픕니다
 이 일이 있기 전까진 감히 상상조차 못 한 일

 우리가 이리 잘 버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시련이 서슬 퍼런 칼날로 닥쳤지만
 당신과 아이들이 버티어 주어
 내가 살아 있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 주세요, 다 와 갑니다
 적어도 이 모든 일의 시작도 끝도
 당신이 잡고 있으니 매듭도 풀어 주세요
 나는 당신 옆을 지키겠습니다

 

p146. 여행

악몽을 꾸었다
여행을 가기 위해 모인 우리는
각자 비행기표를 끊었으므로
각자의 게이트로 나아갔다
제일 먼저 내가 I-50이라는 게이트를 향해 나갔지
I-50을 보고 표지판대로 길을 따라갔는데
나의 게이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다 보딩 시간이 지났고
비행기를 놓쳤다 낭패한 표정으로
재발권을 위해 발권 데스크로 갔다
발권 데스크가 방금 눈앞에 있었는데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의 세 친구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공항 건물에는 덩그러니
두리번거리면서 나 혼자 남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출구가 없는 공간
나는 밤새도록 출국를 찾아 헤매다 깼다
왜 악몽은 늘 기억이 나는지
나도 알고 싶다
언젠가는 꿈에 멋지게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고 싶다
그리고 깨어나면 꼭 그 꿈을 기억하고 싶다

 

p150. 그대의 배반

그대는 진실을 티끌처럼 버리고
나를 순식간에 웃음거리로 만들며
장막 뒤에서 웃지
그대를 믿는 사람들이
하이에나가 되어 킬킬거릴 때
세상의 공기는 끈적하다
서서히 폐에 스며들어
매캐하게 질식시키는 안개처럼
그대는 진실을 그렇게 버리고
어찌 세상과 마주하는가
그 어떤 변명도 그대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시간이 알고 있는데

 

p157. '그냥' 말고

나는 지금 나의 시련이 그대의 생명일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보다는 내가 내성이 강하니까요

그대는 부디 살아 주세요
'그냥' 말고 건강하게 살아 주세요
지금 나의 시련을 위해서

나는 지금 나의 시련이 견딜 만합니다
내 시련 위에 그대의 생명이 자라고
그 생명 위에 나의 미래가 의지하고 있어서

'그냥' 말고 기꺼이 견딜 만합니다.

 

p163. 침묵

내게 성가신 일이 생겼지만
침묵하기로 한다
내게 오해가 생겼지만
침묵하기로 한다

너와 나는 서로 다른 존재
우리가 무한히 열린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믿지 않는다면
말보다 침묵이 더 큰일을 하기에

내게 화난 일이 있었지만
내 감정에 침묵하라고 한다
내게 슬픈 일이 있었지만
내 가슴에 침묵하라고 한다

결국은 침묵이 이겨 낼 것을 알기에

 

p169. 나는 왜 몰랐을까

나는 왜 평생 문학 공부를 하고도
몰랐을까
약속에 늦은 이가
차 사고로 늦었어요 하면
'핑계일 뿐이야, 차 사고는 개뿔'
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큰 사고는 아니었어?
안 다쳤어?
전화하고 미루지 왜 왔어?"
걱정을 쏟아 냈는지
그게 보통의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는 왜 몰랐을까
사람들은 면피를 위해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그보다 더한 양심도 팔 수 있음을
정말 나는 왜 몰랐을까

 

p183. 아직은 충분하지 않아

아이야 울어도 된다
울지 않고 의연한 네 모습이 더욱 아프구나
세상은 그런 거라고 말하지 않으련다
세상은 그래서는 안 되니까

아이야 힘내 다오
제발 버티어 다오
지금은 그들의 시간이나
반드시 역전의 날이 올 것이다

내 육십 년의 시간이 말해 주니
반드시 너의 억울함을
이 모든 부당함을 밝혀 줄 시간이
올 것이다

그저 기다림의
그저 견딤의
그저 긍정의
마음으로 주저앉지 말거라

아이야
하늘도 우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리니
눈물을 닦고 당당하게 나아가자
아직 갈 길이 멀지 않니

그래도 너의 가는 길 걸음마다
너를 붙잡아 줄 작은 들꽃 하나
너의 은신처가 될 작은 동굴 하나
너의 추락을 막아 줄 작은 바위 하나

그러니 너는 굽이굽이 길을 돌 때마다
그저 마음만 먹어도 너에게 작은 도움을
내일 사람으로 가득했으니
그러나 나는 아직은 충분치 않아

이 길 다 걸으면 길 끝에 내가 서 있으리니
그곳에서 너의 눈물을 닦아 주고 너를 다시 세우리니
그때까지는 그 어떤 것도 충분치 않아
너에 대한 나의 계획은 아직 갈 길이 멀었으니까

 

p187. 기도2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뿐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

 

저는 아마도 많이 부족했던가 봅니다
제게 지워 주신 십자가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 옆에 예수님이 함께
이 길을 걷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엠마우스까지 가는 길을 동행했던
그분에 기대며 끝까지 가 보겠습니다
이 십자가 끝에서
제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여 주세요

 

p199. 손톱깍이 쓰는 날

오늘은 손톱깍이 쓰는 날
일주일에 한 번이니
늘 옆에 두고 수시로 쓰는
아들과 남편이 여기에 없는 것 또한
다행이고 감사하다
알코올 솜과 함께 지급되어
몇 분간 쓸 수 있는 손톱깍이
내 손톱에는 W023번이 잘 맞는다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아주 작은 쾌적함이
때로는 큰 만족을 주기도 한다
인생처럼.

 

 

p200. 길 없는 길

'길 없는 길'을 걷겠다고 한다
나는 그 길을 오래 생각했다
그대에게 묻지 않았다
물어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대가 그 길을 찾으면
묻지 않아도 알게 될 테니까

그대가 어떤 길을 가도 괜찮다
나는 괜찮다
그 길이 어떤 길이든
그대 곁에 있을 것이니
그대는 매인 곳 없이
자유롭기를 저 하늘의 구름처럼
가볍기를
영원하기를

 

p202. 뿌리 깊은 들품

창틀까지 웃자란 풀을 보고
고개를 갸웃합니다
제초기로 싹쓸이한 게 언제였더라?
엊그제 아니었나?
들풀의 생명력이 새삼스럽습니다
아무리 아무리 싹둑 잘려도
여봐라 문제없다 숨 가쁘게 올라옵니다
그 모든 노력을 잘라 내는 칼날이
가차 없을수록
치고 솟아나는 들풀의 의지도 가차 없습니다
'망연자실할 필요 없어요,
뿌리가 깊으면 문제 될 게 없어요"
칼날의 무자비함을 비웃고 있습니다.

 

p216. 땡큐, 끝까지 간다

사람들이 그런다
절망과 분노와 억울함으로
형편없을 줄 알았는데
꽤 괜찮은 듯해 좀 놀랐다고
내가 무심하게 뱉는다

마지막까지 다 빼앗겼는데
이제 지킬 것이 있어야
애걸복걸이라도 하지 않겠냐고
이제 남은 게 없는데 이제 미련도 없이
홀가분한데 뭐 울 일이 있겠느냐고

땡큐, 이렇게 완벽하게 정리해 줬으니
땡큐, 돌아볼 것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
땡큐,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게 해 줬으니
땡큐, 끝까지 갈 수 있게 해 줬으니
땡큐, 땡큐, 땡큐

내 몸 하나만 가볍게 맨손으로
앞만 보고 끝까지 간다
그래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나
땡큐, 땡큐, 때땡큐
끝까지 간다

 

p222. 진통제

통증이 날카로우면
진통제가 혈관을 퍼져 나가는 감각 하나하나가 느껴진다
약한 진통제는 전신에 퍼지는 데 삼십 분 걸리고
그보다 강한 놈은 십 분이면 제 할 일을 한다
내 몸은 강한 녀석을 원하지만
내 마음은 인내하라고 한다
너무 아플 때는 인내가 소용없어지고 결국
강한 놈을 불러야 하지만
마음은 늘 약한 놈 먼저 불러
삼십 분을 견딘 후 강한 놈에 의지한다
한두 번 한 일이 아닌데도
마음에는 관성이 있나 보다
어쩌지 못하는 관성이.

재밋고 유익하다.

------------------------------

p56

 "공부 좀 했네."

 우리 부모님은 내가 평균 80점대만 받아와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어쩐지 욕심이 나서 스스로 아쉬운 마음에 학원을 다녀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친구들이 다 방이역에 있는 종합학원에 다닌다기에 "그럼 나도 다녀볼까?" 했더니, 친구들이 "그래, 너 왜 학원 안 다녀? 너 그러다 큰일 나, 대학 가려면 학원 다녀야 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버지께 학원에 등록하고 싶다고 얘기해서 카드를 받아다 혼자 등록했다. 이 학원을 떠올리면 지금 생각해도 손끝이 아려오는 추억이 있다.

 수업 첫날, 문제를 많이 틀렸다. 그때는 체벌이 존재할 때였고(조민 씨가 그리 나이가 많나? 하고 알아봤다. 2010년 11월 서울시 교육청이 모든 형태의 체벌을 금지했다. 아마 다른 시/도도 비슷한 시기일 것이다. 조민 씨는 1991년 생으로 기록에 의하면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중,고등학교를 재학했다. 그러니 체벌이 존재하는 시기에 중,고등학교를 보냈다. 내 생각보다는 체벌이 없어진 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학원의 방침은 틀린 만큼 맞는 것이었다(내가 학교 다닐때도 이런 거지같은 경우가 아주 많았다. 첫시험에 100점을 맞고 다음 시험에 1개 틀려 95점을 맞으면 1대-문제갯수, 혹은 5대-점수대로-를 맞는 경우도 있었다. 참으로 야만의 시절이었다. 물론 나는 100점을 맞아본 적은 별로 없다). 첫날이니 뭐 아는 게 있었겠는가. 엄청나게 틀리고 손을 내밀라기에 내밀었다. 그간 체벌을 당해본 적이 없는데 - 부모님은 한번도 나를 때린 적이 없다. 미국 학교에서도 물론 - 처음으로 학원에서 손을 내밀라기에 '손을 왜 내밀까?' 했더니 회초리로 때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틀린 개수만큼.

 일단 손을 올려 한 대를 맞았다. 너무 아팠다. 두 번째 맞을 때 움찔, 피하면 더 아픈 법이다.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데 피하면서 손가락뼈를 맞았다. 그래도 '때린 선생님 잘못이 아니라 피한 내 잘못'이었던 시절이다. 수업을 듣는데 나아지질 않고 점점 아파서 정형외과에 갔더니 뼈에 금이 갔다는 것이 아닌가. 내가 피하다가 뼈에 제대로 맞은 거였다. 그대로 깁스를 하고 집에 갔다.

 집에 가니 아버지는 기가 막히다며 할 말을 잃으셨다. 그간 매 한 번 들지 않고 나를 키우셨는데 제 발로 카드를 들고 가서 학원비를 긁고 오더니, 손가락뼈에 금이 가서 돌아왔으니 황당하실 만도 하다. 부모님은 바로 학원에 연락해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학원 정책은 존중하지만 내 딸 체벌하는 곳에는 못 보내겠다"고 말하고 남은 수강 일수만큼 환불받았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체벌의 기억이다.

 

p67

 부산대 의전원 입학 취소 결정에 대한 항소를 포기할 지 생각할 때, 고민이 많았다. 주변에서는 내가 포기하면 일단 실질적 이득이 사라지기 때문에 어머니가 세상에 빨리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또, 재판을 받고 있는 아버지에게도 유리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이건 사실 내 인생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이유로, 부모님을 위해 나의 지난 10년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부모님을 1순위에 놓고 내 인생을 생각하기에는 내 삶이 우선 너무 힘들었다. 부모님 또한 부모님 때문에 내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나에게 평생의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기보다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고민했다. '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선택은 무엇인지 고민해보았다.

 내 인생에서 사람들의 평가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시선을 내 인생의 판단기준으로 삼아버리면, 그 순간부터 내 삶은 남의 것이 된다. 외적이 요소에 내 내면이 휘둘리게 둘 수는 없다. 나는 나의 깊은 내면에서 정말 내려놓을 만한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아는 '정치인 자녀'들은 대개 다음의 세 부류에 속했다.

 1. 조용히 숨어 산다.
 2. 아예 정치를 한다(혹은 정치적으로 발언하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3. 변두리에서 사고를 친다.

 이 세 부류는 모두 타자화된 자신이다. 세 경우 모두 끊임없이 평생을 '누구 딸 누구' '누구 아들 누구'라는 이름표를 단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그 이름표로만 남을 뿐이다. 조용히 살면 어떨까? 부모를 빼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조용히 숨어 살아도 정치인의 자녀, 정치를 하면 부모의 후광을 업은 정치인, 사고를 쳐도 사고를 친 정치인 자녀로 정리된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셋 중 어느 쪽도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정치인이 될 생각이 없다. 사회적으로 너무 알려져서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이미 늦었고,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하거나 정치와 연관된 일을 하고 싶지 않다.

 조민이라는 이름으로 성공하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정치적인 발언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숨어있고 싶지 않으니 세상에 나왔다. 나오되, 비정치적이고 싶었다. 비정치적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이룰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찾아가는 중이다.

 어른들, 특히 정치 쪽에 몸담은 분들은 주변에서 나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

 "너 누구 딸인데 이렇게 행동해야 하지 않겠니?"
 "인스타에 봉사활동 하는 거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미지 좋아지게 어려운 환경에서 땀 흘리는 것 좀 보여줘라."
 "마라톤 대회 나가서 몸 쓰는 거라도 좀 보여줘."

 정치하는 사람들은 땀 흘리는 모습, 봉사하는 모습을 참 좋아한다. 이유가 어떻든 땀 흘리는 이미 그 자체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말이다.

 내가 그분들의 말을 따르면 나는 정치인이자 사회인 '조국'의 딸로서만 이미지가 굳어질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게 그것일 수도 있다. 아버지 딸로서 아버지를 서포트하고, 착하고 예쁘게 잘 자란 딸로서 행동했으면 하는 사람들의 바람과 기대를 나는 온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정말 감사한 조언들이지만 나는 하나도 듣지 않는다. 나에게는 자신의 개성이 있다. 누구 딸로서의 그런 개체가 아닌, 사람들이 원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 그 자체, 나 자신을 알리게 되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재판에 나갈 때, 브랜드 이름이 알려진 가방을 들고 나갔다. 정가 70만 원 정도 하는 가방이었다. 나는 명품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실제로 그 가방도 내가 가진 것 중 비싼 축에 속하는 가방이었다. 그런데 기어이 그게 문제가 됐다. 정치계 사람들은 말했다.

 "앞으로 그 가방 들지 마라. 사람들이 비싸다고 욕한다"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반대다. 아예 다른 생각이다. 나는 아버지 말도 수긍하기 어렵다면 듣지 않는다.

 "그 가방 가지고 언론 기사에 여럿 나오던데 그거 꼭 들어야겠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 가방을 또 들었다. 우리집 형편이 아주 어렵지 않다는 걸 사람들은 안다. 70만 원 정도 하는 가방을 내가 드는 게 아주 못할 짓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빚을 져서 초고가 명품을 드는 것도 아니고, 내가 돈을 벌어 구매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방을 처음 들었을 때만 떠들썩하지, 같은 가방을 두 번 세번 들면 이슈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그 가방을 들고 다시 문밖을 나선다. 

 

p119

 내가 유일하게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의사로서의 일이다. 어릴 때부터 장래희망으로 꼽았던 일을 법적으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삶에는 언제나 득실이 있게 마련이라던데,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은 의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득이 앞으로 내 삶에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아마 절대 없을 것 같다. 평생 꾸어온 꿈이 가로막히자, 처음에는 막막함과 동시에 앞으로 무얼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하면서 두려웠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의사의 길도 인생에 놓인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꾸 말한다. 대학은 다시 가든, 외국에 가든 다시 시작하라고. 어떻게든 의사 면허를 되찾을 방법을 모색해보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학을 다시 가라고 하는 건 내 학력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일부 지인들의 희망이지 나의 희망사항은 아니다.

 나는 요즘 학력이라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중이다. 만일 내게 정말 의학 공부에 대한 의지가 있고 진정 원한다면 다시 시도해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지금 내게 지금 어떠한 의지와 각오가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지금은 특별히 공부하고 싶은 게 없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내가 왜 다시 학교에 가야 하는 걸까? 결국 고졸 학력으로 살아가기겐 우리 사회가 좀 만만하지 않으니까 졸업장을 따놓으라는 것 아닐까? 나는 남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학력'을 위해 '적당한 과'를 선택해 대학에 다시 갈 생각이 없다. 물론 살면서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정말로 대학 졸업장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또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대졸자만 가능하다면, 그때는 기꺼이 다시 공부해서 졸업장을 따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내가 왜 지금 인생의 10년을 되돌리기 위해 또 10년을 투자해야 하는가. 그것은 내 뜻에도, 인생의 가성비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면 또 누군가 반문할 것이다. 의사를 하려는 의지가 원래 이렇게 희박했느냐고. 의사고 되고 싶어 한 사람이 맞긴 한 거냐고.

 나라고 10년 공부한 것이 왜 아깝지 않겠는가. 내가 인생에서 가장 간절했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응급의학과에 꼭 가고 싶었다. 힘들게 공부하고 밤잠을 설치면서도 나는 평생을 병원에서 보낼 생각으로 살았다. 살면서 의사라는 길만 보고 달려왔기 대문에 지금처럼 어떤 제동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내가 하고 싶은 다른 일들을 찾아보고 있는 나날이 힘겨울 때도 많다. 그러나 어쩌면 이 또한 생의 과정이지 않을까?

 나는 늘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전문의를 위한 수련 시기를 놓쳤다. 동기들과 흔히 '로컬 시장'이라고 하는데, 내가 '의사'라는 이름만 달고 싶은 거라면 인턴을 할 필요도 없이 졸업하자마자 연봉을 가장 많이 주는 동네 의원에 취직하든 개업을 하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당직만 서는 알바의사를 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내 나람의 보람, 내가 느끼는 보라믄 로컬 시장이 아니라 응급실이라는 작지만 큰 공간 안에 있었다.

 '내가 느끼는 보람'과 '사회의 시선'이라는 대립항 사이에서 내가 의사로 일하면 지탄받는 상황이라면 내가 과연 이걸 유지하는 게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의사 면허가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만일 내가 응급의학과 수련을 못 받는다면, 의사로 계속 살 이유가 있을까?

 누군가는 내게 수련을 꼭 종합병원이나 응급의학 쪽으로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묻는다. 왜냐면 작은 응급실의 경우 전문의가 부족하여 일반의도 모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은 병원에서 형식적으로 수련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나중에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 대처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고 경험이 부족해 뜻하지 않은 사고를 낼 가능성도 커진다.

 교수님의 가르침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훌륭한 의사는 착한 의사가 아니다. 실수하지 않는 똑똑한 의사다. 사람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착하고 멍청한 의사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래, 그럴 거면 안 하는게 낫다.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응급실 현장에서, 불충분한 수련을 받고 싸워낼 수 있을까? 생가가 오가는 상황에서 내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환자에게 오진을 내릴 수도 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수련을 제대로 못 받고 응급실에 설 거라면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료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많은 곳에, 사실상 의료 혜택을 못 받는 곳에 나의 작은 손길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누군가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지도 모른다. 조건이 닿는다면 그렇게라도 살고 싶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다. 명지병원도 경상대병원도 수련의로 받아주지 않았다. 나보다 성적이 낮은 사람도 붙었는데, 블라인드가 원칙이라고 모집요강에 크게 적어뒀던 경상대병원에서는 면접관이었던 병원 고위 관계자가 내 이름과 상황을 언급하며 왜 우리 병원에 지원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아, 이제 나는 아무 데서도 안 받아주는구나. 앞으로 수련은 글렀구나.'

 응급의학과는 항상 모집정원이 차지 않아 추가 모집하는 경우가 있고 가을에도 모집한다. 주변 친구들이 여기 비었다고 지원해보라고 추천을 많이 해줬다. 하지만 더 지원해봤자 기삿거리만 늘어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의사로서의 내 앞길이 막혀버린 순간이었다.

 보건복지부에서 나의 의사 면허를 취소하기 전에 나는 의사 면허를 반납하겠다고 선언했다.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뉴스에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으면 면허를 반납하고 소송을 취하해야지"라고 하던 패널이 막상 내가 면허를 반납하고 소송을 취하했더니 "기소를 피하려고 쇼하네"라고 한다. 공중파 뉴스에까지 나와서 떠드는 사람이 저렇게 앞뒤가 안 맞을 수 있을까? 또 어떤 분은 "아버지 총선 출마를 위해 네가 희생했구나, 잘했다. 넌 딸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성공이 곧 너의 성공이다. 그때 시집가거라"와 같은 성차별적 망언을 쏟아냈다.

 예전에는 어른들의 말은 다 맞는 줄 알았다. 웃어른은 존경할 대상이고, 나보다 큰 지혜를 담은 사람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분명 아닌 사람도 정말 많다. 존경심은 나이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정말 존경할 만한 사람일 때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하지만, 의사 면허 반납은 여러 요소를 고려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인생에 레몬이 주어지면, 레모네이드를 만들라"는 격언이 있다.

 비록 지금 인생의 대부분을 부정당했지만, 이 상황을 나는 제2의 자아실현 기회로 만들어보려 한다. 한 길만 바라보고 달려온 나에게 이 같은 강제 멈춤은 아마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하는 트라우마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막힌 상태를 기꺼이 누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멈추어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이 좁고 긴 길이었던 데 반해 이제부터 펼쳐질 길은 꽃도 피어 있고 산도 보이는 그런 길일지도 모른다. 그 길을 천천히 즐기며 걷다 보면 나의 세상도 확장되어 더 큰 행복을 안겨다 줄지도 모른다.

 

p156

 지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다. 한 살 후배여서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함께 밴드 활동을 하며 가까워졌다. 이 친구가 성인이 되었을 때 첫 여행을 함께 갈 정도로 친했다. 친구 부모님은 지수가 나와 여행 간다고 하면 다 보내주시고 나도 이 친구와 어디든 간다고 하면 부모님도 오케이, 지원해주셨다. 

 지수를 만난 이후로 모든 생일을 함께 보냈다. 친구 부모님도 나를 정말 잘 챙겨주셨고, 서로 남자친구도 소개 해주고, 서로의 친구들도 다 소개해주었다. 함께 여행도 자주 다니고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아버지가 민정수석, 법무부장과으로 잘 나갈 때는 매일 같이 밥 사준다 술 사준다, 누구 소개해주고 싶다, 선 자리 마련해주고 싶다, 이 말 아버지께 꼭 좀 전해달라, 부탁할 게 있다, 돈 빌려달라 연락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툭 끊겼다.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원래도 그런 자리, 그러니까 아버지 때문에 부른 자리에 나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던 나는 오히려 잘 되었다 싶었다.

 내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애초에 나를 '조국의 딸'로 보지 않았다. 그냥 '조민'으로 보았다. 이런 친구들만 남으니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그저 집 앞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마시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하고 서로 밥값 내겠다고 싸우는, 지금 남아 있는 친구들이 진짜다.

 그 친구들의 선봉에는 항상 지수가 있었다.

 집이 압수수색을 당한 날, 내 생일 전 날이었다. 가족 중 누구도 당연히 내 생일을 신경 쓰지 못했다. 나조차도 내 생일을 잊고 있었으니.

-----------------------

(2019년 9월 23일 조국 장관 자택 압수수색 뉴스, 방송 날짜는 9월24일)

---------------------------

 

 사람들이 들이닥쳐 집을 뒤지고 물건을 가져가고, 눈 앞에서 낯선 사람들이 내 방을 오갔다.

 너부 놀란 마음에 그저 앉아 있는데, 지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언니 집 앞에 기자가 왜 이렇게 많아요?"

 "너 어디야? 뉴스 봤어?"

 "아니, 언니 집 근처에 한 번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엄마가 언니 생일 밥 사주라고 카드 줬는데 어떻게 나오지?"

 "정말? 나 못 나가. 나가면 카메라 한 100대는 있을걸?"

 "언니, 뒷문으로 한번 나와봐요. 한번 어떻게든 나와봐."

 집이 털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어머니를 남겨두고 혼자 가겠는가. 어머니도 정신이 없는데, 그런데 통화 내용을 들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민아, 너라도 나가. 너 혼자 나가."

 "아니, 나도 그냥 여기 같이 있을게요."

 "아니냐, 여기는 지금 사람 몇 명만 있으면 되고, 여기 있어봤자 압수수색이 언제 끝날지 몰라. 계속 지연될 수도 있고 영장 추가로 나오는 것도 기다리고 하면 12시간이 걸릴지 24시간이 걸릴지 몰라. 그러니 차라리 나가서 있다가 와라."

 그렇게 나는 기자들의 눈을 피하려 경비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옥상을 통해 옆 라인으로 가서 옆 라인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수가 나를 데려간 곳은 친구가 일하던 회사에서 임직원 할인이 되는 레스토랑 중 가장 좋은 음식점이었다. 고급 레스토랑이라 망설였는데, 지수는 나를 잡아끌었다. 이 음식점은 훗날 뉴스에 나왔다. 한 변호사가 내가 '호화 생일 파티'를 했다며 제보해 보도한 것이다.

 그래, 호화라면 호화였다. 지수와 나 여자 둘이 요리 세 가지에 음료수 한 잔씩을 마셨으니.

 그런데 정말 신박한 뉴스가 나왔다. 그 가게에서 제일 비싼 코스요리를 10명이 먹어서 돈 100만 원 가까이 나왔다면서. 아, 허위 기사라는 게 이렇게 나는구나를 그때 제대로 느꼈다.

--------------

https://biz.heraldcorp.com/view.php?ud=20190927000015

 

강용석 “조국 딸 생일파티 71만원 영수증 알고보니 가짜”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가 지난 25일 조국 법무부장관의 딸 조모씨가 생일에 방문한 중식당의 식사내역이라며 소개한 영수증이 허위로 알려졌다.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 운영

biz.heraldcorp.com

(당시 조민 씨 호화 생일파티 관련 가짜 뉴스, 출처는 그 악명 높은 가로세로연구소, 강용석)

-------------------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전통이 있었다.

 1. 생일마다 서로 풀코스로 대접하기
 2. 선물은 예산 5만 원 내로 사기

 나는 상대적으로 환경이 유복한 유학생들 사이에서 자랐고, 젊은 세대의 SNS 문화로 고가의 브랜드 쇼핑백이 담긴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서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지수와 서로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마음과 진심은 주고받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든 룰이었다.

 그렇게 나는 작년 5월, 대부도로 지수를 데려갔다. 조개구이도 먹고, 전동 이륜바이크도 타고, 바다 앞에 텐트를 펼쳐놓고 고기도 구워먹었다. 지수의 생일 파티였다.

 

지수는 핼러윈 데이 저녁에 잠시 이태원에 들러야 한다고 했다. 나는 코로나 이후로 처음 맞는 핼러윈이라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다른 친구들과 신사동에 가기로 했다. 지수에게는 신사동으로 오라고 했다

 '오늘 이태원 사람 너무 많을 것 같은데, 너도 신사동으로 와.'
 ' 그럼, 잠시 이태원에 들러 친구 지인들한테만 인사만 하고 바로 넘어갈게!'

 그런데 지수는 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수의 장례식이 열렸다.

 귀국한 지수의 부모님께서 지수를 보러 영안실에 들어가실 때 따라 들어가서 나도 그녀의 마지막을 볼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지수 생일 때 지수와 대부도에 가서 찍은 사진을 올린 적이 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찍어준 나의 소중한 추억, 그것을 내 계정에 올려두고 싶었다. 소중한 기억, 기억하고 싶은 지수를 간접적으로 담은 장면. 그리 생각하고 올린 사진이었다.

(지수 씨가 찍어준 사진, 출처 : 조민 씨 인스타)

 

누군가는 이 사진을 올린 의도가 무어냐며 내 정신상태까지 언급했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그 사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붙인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내가 해명한답시고 무언가 언급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내가 입을 열면 열수록 기사가 크게 나고, 기사가 크게 나면 지수가 뉴스에 나오겠구나 싶었다.

------------------------

https://www.news1.kr/articles/?4947103

 

조민 '대부도 캠핑' 사진 구설…"이태원 고인이 찍었나" "확대 해석 말길"

(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장녀 조민씨의 인스타그램이 연일 화제다. 이번에는 지난 1월 올린 대부도 캠핑 사진을 두고 "이태원 참사로 고인이 된 지인이 찍어준 거 아니

www.news1.kr

(당시 사이코패스 한국 언론들의 기사)

------------------------------

 

 사람들이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상관 없지만, 지수를 가십거리로 올리는 건 싫었다. 지수의 부모님은 또 얼마나 힘드실까 하고 그냥 내가 조금 욕을 먹고 말자고 생각했다.

 얼마 전, 지수의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지수가 찍어준 사진으로 기사가 나서 죄송해요."
 "아니, 아줌마는 민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사진을 올렸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누가 뭐라든 괜찮아. 오히려 지수와의 추억을 생각하며 사진 올려줘서 엄마로서 고맙지."

 어머니는 그 사진을 보면 나를 찍어주는 지수가 보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사진을 지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정말 감사했다. 내게는 소중한 친구이자 어머니에게는 사랑하는 딸인 지수는 그렇게 우리 마음에 남아있다.

 

p216

 어느 날, 백호에게 친구가 있으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인핸드 앱을 보다 놀라운 사진을 보았다. 골프연습장에 고양이가 출연한 거다. 퍼팅장에서 고양이가 골프공으로 축구하며 골프장 손님들을 방해하는 사진이었다. 공들 사이로 돌아다니는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불안해 보였다.

(백호 : 출처 조민 인스타그램)

 골프연습장 주인이 포인핸드에 입양 글을 올려두었다. 누가 보아도 한국 토종 길고양이었다. 치즈태비무늬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정말이지 귀여웠다. 엄마 없는 아기 고양이인데 겨울에 얼어 죽을 것 같아 빨리 누가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었다.

 지역을 보니 일산이었다. 쌍문동에 살 때라, 운전해서 가면 금방이었다. 연습장 사무실에 가서 보니 마치 아랫목처럼 전기담요 아래 푹신한 이불을 깔고 고양이가 자고 있었다. 골프연습장 주인 아주머니는 회원들이 가져다준 사료와 간식을 주었다며, 용변도 자기가 알아서 가려 흙에 가서 한다고 했다.

 "냥냥아 안녕?" 하면서 츄르를 들고 살며시 다가갔다. 태어난 지 삼 개월 쯤 되었을까, 솜털도 아직 빠지지 않아 부스스한 털을 가진 아기 냥이었다. 가만히 보니 정말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묻어 있었다. 제법 츄르 먹어본 경험이 있는지 미친 듯이 먹었다. 그러더니 마구 애교를 부리고 몸을 부볐다. 백호와는 정반대였다. 

 피부병도 없고 건강해 보이는 데다가 폴짝거리는 게 너무나도 귀여웠다. 하지만 집에서 생활하려면 야외 생활은 청산해야 했기에 마음에 걸렸다. 저렇게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데.

 하도 팔짝팔짝 뛰어다녀서 잡는 건 포기하고 다시 한 번 "나랑 갈까? 츄르 줄까?" 했더니 차까지 따라왔다. 케이지에 넣어서 지퍼를 잠갔다. 심바를 데리고 떠날 때, 아주머니는 남은 사료를 챙겨주셨다. 

 골프장 아주머니와 그 가족들은 그새 고양이에게 정이 들었는지 가끔 소식을 전해달라고 했다(지금도 가끔 사진을 찍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제 가자, 하고 가는데 고양이가 계속 나오겠다며 야옹거렸다. 

 껴내주었더니 뒷 좌석부터 쭉 스캔을 시작했다. 운전석 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내 쪽으로 오려고 하면 옮기고 그냥 운전만 하던 어느 순간, 고양이가 무릎 위에 앉았다.

 "뭐야 너어."

 내 허벅지 위에 갑자기 딱 눕더니 잠드는 거였다. 일산에서 쌍문까지 밀리는 차 안에서 한 시간 반을 고양이는 내내 잠들어 있었다. 처음 본 인간 무릎 위에서.

 동물병원에 가보니 다행히 건강하고 귀 진드기만 조금 있었다. 한 달 정도 통원치료하면서 백호가 있던 방에 격리시켰다. 백호는 갑자기 나타난 작은 녀석이 자기 영역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꼬리를 펑! 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심바 : 출처 조민 인스타그램)

 

 백호가 서열을 과시하기 위해 심바를 끈질기게 괴롭혔는데, 심바는 괴롭히면 괴롭히는 대로 당하는 순둥이다. 밥도 백호가 먼저 먹고 나서야 심바가 먹고, 캣타워에서도 백호가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 백호는 소형종이고, 심바는 중형종이라, 심바가 성장할수록 점점 백호의 크기를 넘어선다. 지금은 백호가 3.8kg,  심바가 5.4kg이다. 덩치만 보면 사실상 심바가 서열을 뒤집는 게 맞는데, 캣타워 맨 위에 있는 우주선에만 가끔 가서 잘 뿐, 나머지는 백호한테 아무리 맞아도 져준다. 백호와 심바는 이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자매가 되었다. 일 년에 한 번은 둘이 껴안고 자는 걸 목격했기 때문에 확실하다.

(백호와 심바 : 출처 조민 인스타그램)

 

 두 녀석이 서로 자기를 만져달라고 애웅거릴 때, 잠자고 일어나 내 곁에 곤히 잠든 녀석들을 볼 때, 집에 들어가면 꼬리를 치켜들고 반겨줄 때....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하고 느낀다. 

 

    너를 사랑하는 일은 아주 쉬웠어
    네 눈 속엔 우주가 담겨 있었거든
    함께하는 일상은 금방 습관이 돼
    내 작고 예쁜 보송한 천사야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가만히 잠들고 일어나자
  

     -미닝, 내 고양이 (My Cat) 중에서

 

 

p242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유명하다고 해서 읽어본 작품인데, 나에겐 하나도 어쩐지 재미없었다. 얼마나 재미가 없었으면 제목으로만 기억나는지.... 정말이지 배우 둘이 벤치에 앉아 있다가 끝났다. 고도라는 사람이 실제로 등장했는지도 기억에 없는 걸 보니, 그는 끝까지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p244

 A Poison Tree. By William Blake

 

 I was angry with my friend;
 I told my wrath, my wrath did end.
 I was angry with my foe:
 I told it not, my wrath did grow.

 And I watered it in fears,
 Night & morning with my tears:
 And I sunned it with smiles,
 And with soft deceitful wiles.

 And it grew both day and night.
 Till it bore an apple bright.
 And my foe beheld it shine,
 And he knew that it was mine.

 And into my garden stole,
 When the night had veild the pole;
 In the morning glad I see;
 My foe outstretche beneath the tree.

 

 (해석은 책에는 없는데 인터넷 등을 참고해서 내 나름대로 해석을 붙였다)

 나는 친구에게 화가 났다;
 나의 분노를 얘기했더니, 분노는 사라졌다.
 나는 적에게 화가 났다:
 나는 말하지 않았고, 분노는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그것에 물을 주었다.
 밤낮으로 흘리는 나의 눈물로:
 나는 미소로 그것에 햇빛을 쬐어주었다.
 그 미소 뒤에 교묘한 속임수를 섞어서.

 분노는 밤낮으로 자라
 밝게 빛나는 사과를 맺게 되었다.
 적은 사과가 빛나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것이 내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곤 내 정원에 숨어들어왔지,
 밤이 별빛을 가릴 때.
 아침이 되어 난 기뻤지.
 나의 적이 나무 아래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윌리엄 블레이크의 <독나무>는 내가 좋아하는 시 중 하나다. 고등학교 때 유학반에서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처음 접한 시로, 어린 나이에 적잖이 충격받았다. 이 시에서 화자는 분노의 두 가지 표출 방법을 다루는데, 친구에게 화가 나면 분노를 표출하자 분노가 사라졌다고했다. 하지만 친구가 아닌 적에게 화가 날 때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그 분노를 나무처럼 키워서 사과가 맺힐때까지 기다린다. 적이 그 탐스러운 사과를 훔쳐먹고 나무 아래 죽어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게 시의 내용이다. 이렇게만 보면 기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분노라는 감정을 이렇게 다룬 시를 처음 보아서인지 매우 인상적이었다. 화자의 분노를 자양분 삼아 자라는 사과라니. 분노와 눈물, 두려움을 안으로 삼키면서 겉으로는 미소만 짓고 있는 화자. 화자는 적에게 복수하기 위해 분노라는 사과를 키웠지만, 그 사과를 키우는 과정에서 그는 본인도 의도하지 못했던 변화를 경험한다. 가식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분노는 상대방뿐 아니라 본인 자신도 망가뜨린다는 이야기 아닐까.

 

p254

 최근 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깊어지면서, 제 가치관 및 삶의 일부를 드러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살기에 저의 가치관과 주체성은 너무나도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신변잡기의 에세이. 탁현민은 책을 쓸수록 갈수록 필력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사소한 추억의 힘'인지는 마지막 에필로그 말미에 쓰여있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여읜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읜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우리는 그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바늘 끝이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나침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 <지남철>

 

p7

 스필버그 감독은 1982년 개봉된 영화 <이티>에는 총을 든 경찰관이 어린아이들을 쫓는 장면이 포함돼 있었는데, 20주년을 기념한 재편집 작업에서 총을 든 장면을 무전기를 쥔 장면으로 교체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실수'였다는 회고였다.

 "<이티>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그 어떤 영화도 현재 시점의 렌즈를 통해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수정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영화는 영화를 만들었던 당시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세상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보냈을 때 세계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등을 보여주는 일종의 이정표다."

 

p9

 절망과 위로, 그 모든 순간에 그것이 극단으로 치닫게 하지 않는 장치(裝置)가 있다라는 것이다. 바로 성찰과 웃음이었다. 실패를 복기하는 과정은 괴롭지만, 과정의 성찰은 곧 위로였다. 또한 괴롭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음은 가장 뛰어난 탈출 버튼이었다. 모든 위로의 순간에는 반드시 성찰과 웃음 포인트가 함께 있었다.

 

p19

 내 평생 스승은 "어떤 일에 쓰일 때 자기 능력의 70퍼센트 정도만 해도 되는 자리가 가장 적당한 자리"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높은 지위나 원하는 역할에 욕심을 내기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적당히 해도 좋은 성과를 내며 즐겁게 일할 수 있다면 그게 자신에게도 조직에도 이상적이라는 말씀이었다.

 청와대에서 처음 일하게 되었을 때 일의 고됨과 책임의 막중함을 자주 토로하기는 했지만 한참 징징거린 후에 돌아서서는 씩 웃기도 많이 웃었다. 한동안 쓰임이 없다가 모처럼 쓰이니 쓰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어진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쓰임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욕심이 나의 능력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의 능력치가 100이라 할 때, 그 사람이 60이나 70 정도만 하면 되는 자리에 놓이면 어느 순간부터 욕심이 생긴다. 자신의 능력만큼, 아니 그 이상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그러했다. 부여된 일보다 더 많은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더 많은 결정을 할 수 있고,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되는 자리와 권한에 욕심을 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결국 그런 쓰임이 없었다는 것이 저말 다행이었다. 100퍼센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100퍼센트를 요구받는 자리나 그 이상의 자리에 놓이면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사고(思考)의 여유도 상상력도 발휘하기 힘들어진다. 매번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이고 최선을 다해 보아도 능력의 한계만 절감하게 된다. 짊어여쟈 할 책임은 무거워져 결국에는 자기 능력의 100퍼센트를 다 채우지도 못하게 된다.

 하지만 능력이 100퍼센트라고 할 때 70퍼센트 정도만 해도 되는 자리에 놓이면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아도 주변의 기대치를 손쉽게 채울 수 있다. 기대치를 채우는 것뿐 아니라 30퍼센틔 여유도 가지게 된다. 

 30퍼센트의 여유, 이것이 단지 술렁술렁 일해도 되니 다행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생긴 30퍼센트의 여유가 그렇게 간절했던 상상력이 되고,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가능하게끔 해준다. 여러 국가 행사를 기획하고 연출하면서 나름의 상상과 실험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좀 더 많은 책임과 부여되었더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아쉬운 쓰임이었기 대문에 오히려 여러 일을 성공적으로 무사히 치러낼 수 있었구나 싶다.

 

 

p51(신영복 글)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무엇보다 글씨가 바른지 삐뚤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물은 빈 곳을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차곡차곡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살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p.74 마스터 요다의 가르침

 두려움은 분노를, 분노는 증오를, 증오는 고통을 낳는다(Fear leads to anger, anger leads to hate, and hate leads to suffering).

-<스타워즈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협> 중에서,

 마땅찮은 세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분노가 필요할 것 같지만 그게 꼭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편이 분노보다 유용할 때가 많다. 

 현실에서는 저주로 사람이 죽지 않고 증오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타인이나 다른 정치 세력을 탓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바라는 세상은 절대 오지 않는다. 남 탓으로 잠시 웃거나 정신 승리를 할 수도 있지만 그때뿐이다. 세상은커녕 한 개인의 삶도 절대 바뀌지는 않는다. 증오는 결국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분노와 증오의 문제에 관해서 김어준만큼 '순수'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와 나는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거쳐 이제는 윤석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의 5년을 제외하고는 영 마땅찮은 시절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그가 이러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기질 탓이 클 것이다.

 김어준은 어뜻 대충대충 무심해 보이지만 매우 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제안했을 때 상대방의 거절 의사가 분명할 때는 '그럼 할 수 없지' 하며 넘기고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뒷담화는 물론 군말도 없다. 믿기 어렵겠지만 생각보다 막말도 쓰지 않는다. '씨바' 정도가 그의 막말 한계선이다. 요즘 그의 방송을 보면 '바보', '멍충이'를 즐겨 쓰는 것 같다.

 나와는 <나는 꼼수다> 콘서트 때부터 인연이었으니, 알고 지낸 지 십 년이 넘었다. 일이 있으면 밤낮 가리지 않고 연락을 주고받지만, 일이 없으면 몇 달씩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 나이는 나보다 네댓 살 위인데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탁'이나 '자기'라고 불렀고, 나는 그를 '김어준'이나 '총수'라고 부른다. 그러한 호칭과 관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불편해하거나 불만을 이야기한 적도 없다. 한마디로 뒤끝이 없다. 그의 순수함은 이런 '뒤끝 없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분노가 증오가 되기 딱 좋은 시대다. 모쪼록 그의 순수한 분노를 많이들 배웠으면 좋겠다.

 

p177. 모그바티스

 모그바티스는 촌장이 마을의 대소사는 물론이거니와 여러 분쟁을 조정하고 크고 작은 일들을 결정한다. 촌장의 결정이 법적 효력이나 강제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결정을 내리면 누구도 더는 불만을 갖지 않는다. 사람들은 촌장을 두고 '이편도 저편도 아닌 사람'이라 말한다. 누군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어느 편도 아닌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여기 사는 이들의 생각이라고 한다.

 나는 촌장에게 물었다. "그건 민주주의도 아니고 대체 뭐죠? 어느 쪽이든 자신의 주장을 펴고 그걸 다수가 받아을이는 것도 아니고, 양쪽의 주장을 듣고 촌장이 결정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독재 아닌가요? 뭔가 이상하네요."

 촌장은 대답했다. "민주주의요? 다수의 의견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민주주의는 종종 엉뚱한 선택을 하곤 하죠. 안 그렇던가요?"

 

p178

 해거름에 해변 모래사장을 헤집으며 느릿느릿 지나는 소 한 마리와 몽이꾼도 보았다. 뭘 하는 것이냐고 묻자 "백사장 아래 묻혀있는 오래된 사람들의 지혜를 찾고 있다"고 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혜와 같이 소중한 것을 파도가 조금만 밀려와도 쓸려가는 해변에 묻어 놓다니... 왜 그 소중한 것을 거기에 묻어놓는 것일까 싶었다.

 "당신은 지식과 지혜를 구분할 줄 모르는군요. 지식은 구하는 것이지만, 지혜는 발견하는 것입니다. 모래밭에 지식을 묻어놓으면 언제고 큰 파도에 쓸려 사라지지만, 지혜는 어떤 파도가 와도,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에서 발견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p241. 날짜는 잊어도 날씨는 안다

 종종 날짜를 잊었다. 대체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갓지던 협재해수욕장이나 금능해수욕장에 차들이 들어차면 그제야 '아, 주말이구나' 싶고, 혜심언니의 게스트하우스나 추의 작은집이 썰렁하게 느껴지면 '아, 월요일쯤 됐겠군' 싶었다. 도시에서 월간, 주간, 일간에 더해 시간 단위로 끊어 살던 기억이 너무도 아득해서 괜히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야 일 없는 여행하는 처지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이곳에 사는 혜심언니나 추나 효주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간혹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 "오늘이 며칠이지? 무슨 요일이지?" 하면 다들 한참 대답을 못 하고 휴대폰이나 다이어리를 뒤적이곤 했다.

 오늘이 며칠인지를 잊고 산다는 것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과 내일이 이어진다는 것과, 날짜보다 중요한 무엇이 있다는 것인데 날짜를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날씨'였다.

 제주의 변화무쌍한 날짜는 종일 기상청 예보를 살펴보게 했고, 아침저녀그로 꼭 몇 번씩 확인하게 했다. 사람들은 누구라도 날짜는 몰라도 날씨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세 시간 간격으로 예보되는 날씨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자신만의 기상 예측도 열심히 했다. 구름의 흐름이나 바람의 세기, 그리고 파도의 높이까지 고려해 각자의 예보를 낼 정도로 날씨에 민감했다.

 아침 바람이 습하고 무거우면 저녁엔 반드시 비가 온다거나, 중산간의 구름이 얼마쯤 지나면 이곳 한림까지 내려온다거나, 제비들이 유난히 낮게 날며 분주하면 오후에 후텁지근할 것이라든지, 매미가, 개구리가, 물색이, 파도가, 석양이, 달무리가, 어떻다는 걸로 어떻게 해서든 날씨를 알아내기 위해 다들 노력했다. 

 날짜를 헤아리며 사는 것과 날씨를 예측하며 사는 삶은 어떻게 다른 걸까?

 도시에서의 삶이란 결국 끝없는 약속과 정해진 기한과 계획과 그것들을 점검함으로써 하루를 보낸다. 날짜와 시간을 몰라서는 이런 것들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다이어리를 살펴야 하고, 시계를 쳐다봐야 하고, 알람을 울리고 다시 그 알람을 재설정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래야만 실수가 없고, 그래야만 별 탈 없이 살 수 있다.

 하지만 섬에서 날짜와 시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예컨대 고기를 잡는 데 특별한 약속과 기한이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오로지 바다 상태와 날씨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내가 오전 11시에 참돔을 잡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그게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저녁 6시에 금오름에서 해지는 것을 보겠다는 것은 나만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참돔도, 금오름도 그 모든 것은 날씨가 결정한다.

 2박 3일간의 제주도 여행에서 도착하면 한수풀식당에 가고, 오후에는 저지오름에 갔다가, 저녁에는 신창리에서 해지는 풍경을 보고, 다시 아침에는 차귀도에서 잠수함 투어를 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세워온 커플이 있었는데, 그들은 결국 종일 내리는 비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다 신경질을 내며 떠나는 모습을 목격한 적도 있다.

 그러니 섬에서는 날짜와 시간보다 날씨가 먼저가 되고, 삶의 태도와 방식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도시에서 웬만한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눈이 오거나 해도 큰 걱정이 없다. 큰 태풍이 몰아쳐도 대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된다. 심심한 재난 영화나 안타까운 뉴스 정도일 뿐이다.

 나 역시 아파트에서 주차장으로, 주차장에서 다시 다른 주차장으로 이동하면서 때로는 비가 아무리 와도 우산조차 필요 없을 때가 많았다 간혹 거리를 걷게 되더라도 여차하면 들어갈 카페나 건물의 처마가 연이어 있었다. 다만 걱정은 약속 시간에 맞출 수 있느냐 없느냐일 뿐이었다. 비가 오면 차가 좀 막히니까.

 섬에서는 비 오는데 나가봐야 고생이다. 우산은 뒤집히고 우비를 입어도 세찬 바람에 금세 젖는다. 그러니 비가 오면 잠시 멈추고 빗소리를 들으며서 집 앞 텃밭을 돌보다가 해가 뜨면 오후 물때에 맞춰 배 타고 나가 고기를 잡는다. 날씨가 좋고 바람이 불면 서둘러 밀린 빨래를 널고, 해 질 녘에 구름이 걷히면 오름에 올라 해지는 풍경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섬사람들의 약속도 대충 그렇다. '저녁이나 먹지'라고 하지 '몇 시에 저녁 먹자'고는 잘 안 한다. '내일 보자'고 하지 내일 몇 시에 보자는 건지는 잘 안 알려준다. 처음엔 그걸 잘 몰라 괜히 저녁밥 때보다 일찍 가서 일없이 빈둥거리거나 때로는 밥때보다 늦어 타박을 듣곤 했다. "대체 저녁을 먹으려면 몇 시에 가야 하느냐"고 묻자 "배고플 때 오면 되지" 했다. 맞는 말이다. 어차피 밥 먹는 게 목적인데 6시든, 7시근 그게 뭐 대수인가, 배고플 때 먹으면 되지.

 시간에 갇혀 사는 것과 날씨에 갇혀 사는 것, 우리, 어떻게 사는 게 더 나은 것일까.

 

p.257

  혼자 지내는 날이 많으니 음식 해 먹는 솜씨도 꽤 늘었다. 한림 수협 마트나 하나로 마트에서 장을 봐 유튜브 영상 레시피를 따라 만들어 먹는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카레라이스, 오므라이스, 볶음밥 같은 것은 이제 기본이고 돼지주물럭, 청경채 볶음, 두부조림, 오삼불고기, 궁중 떡볶이 최근에는 등갈비찜에까지 이르렀다. 실패도 있었고 시련도 있지만 꾸준히 나아지는 중이다. 다음에는 춘장을 사서 해물짜장을 만들어 보려 한다.

 

p259

 제주에 머무는 동안 내가 생산적이지 않았으면 한다. 좀 더 유약했으면 한다. 매사 별 뜻 없고 의미 없었으면 한다. 온갖 사소한 것들과 함께 유유자적 지낼 수 있으면 한다.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위해서, 다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필요하다. 대단치 않은 것들, 사소한 것들이야말로 삶에 큰 위로가 되어 주니 그래서 필요하다.

탁현민 비서관의 경우는 정치인도 아니고 이 책의 내용도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일종의 회고록이므로 에세이로 분류하는 것이 맞다.

난 도서의 분류를 할때 교보문고 사이트의 분류를 참고하는데 회고록 류의 도서를 분류할때의 분류를 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다.

예를 들어서 이건희 회고록은 경제/경영으로 분류가 되고, 이해찬 회고록은 정치, 김지하 회고록은 에세이로 분류가 된다.

이 기준을 보면 인물에 의해서 도서의 카테고리가 정리되는 것이다. 그럼 조용필이 회고록을 쓰면 연예로 분류가 되고 차범근이 회고록을 쓰면 스포츠로 분류가 되나? 웃기는 일이다.

책의 내용은 문재인 대통령 재임 5년간 의전비서관으로 크고 작은 국가행사와 대통령 행사를 준비하면서 겪은 뒷 얘기들로 이루어져있다. 대부분의 에피소드에서 비서관 시절 의전을 준비하면서의 고민의 과정들이 진솔하게 소개되어 있으며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탁 비서관의 애정과 존경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대한민국 대통령 의전에 대한 입문서이자 대한민국의 지금이 있기까지의 영웅들에 대한 헌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의 가장 큰 덕목은 재밋다는 점이다. 사실 누군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쓴 책은 남들이 보기엔 재미가 없고 아부성으로 비칠 위험이 큰데 실제로 일어난 일의 뒷 이야기보니 위화감이 없이 재밋고 간혹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

------------------------------

p26 탄소 중립 선언 흑백 연설 - 방송법 위반 고발 사건

2020년 10월 방영된 대한민국 탄소중립선언 방송으로 이 영상을 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을 하는 장면 초입에서 컬러로 흑백으로 화면이 서서히 바뀌어간다.

이 영상의 의도는 컬러 화면 대비 1/4의 데이터를 소모하는 흑백 화면을 통해 온실가스를 덜 소비하자는 탄소 중립 의지를 환기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흑백 영상을 트집잡아서 국힘이 탁 비서관을 방송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책에 이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있긴 한데 말도 안되는 억지라 굳이 소개하지 않는다. 국힘의 억지 고발,고소가 대한민국 사회에 엄청난 비용을 유발하고 있으며 선의와 창의력을 제약하고 있다. 쳐죽일 넘들이다.

 

p33 대통령의 '퇴근길 맥주 한잔'

 

 문재인 대통령 재임 기간 가장 많이 제안됐던 일정은 바로 '퇴근길 한잔'이었다. 저간의 사정을 잘 모르기는 대통령도 마찬가지여서 이따금 "왜 퇴근길 한잔 일정을 준비하지 않느냐"는 야단도 여러 번 맞았다.

 그러던 어느날, 기적처럼 대통령이 '한잔'할 수 있는 날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주는 신기하게도 정무적으로 큰 부담이 없는 한 주였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지도 않았고, 외교적인 문제도 없었고, 격렬한 시위도 없었고, 민생과 관련한 이렇다 할 큰 이슈도 없던 날이었다. 그날 '퇴근길 한잔'의 장소로 직장인들이 많은 광화문의 어느 호프집을 선택했다.

 수입 맥주만 파는 호프집이라는 점이 마음에 좀 걸리긴 했지만, 그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경호처도 사전에 점검할 시간을 충분히 가져 꼭 대통령과 근접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안전을 확보했고, 가게 사장님과도 이야기가 잘 되어 우리 때문에 손해 보게 될 매출은 행사가 끝난 뒤 비서관들이 가서 벌충해 주기로 했다.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 회사원, 구직자, 공무원, 직장맘 등 다양한 사람을 선별해 초청했고 현장에서 동석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합석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 대통령이 등장했고, 조마조마했지만 초청한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가 시작됐다. 분위기가 좋아서 이내 옆 테이블과 가게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다들 대통령과의 '퇴근길 한잔'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합석을 원하시면 함께하자고 권유했고, 실제로 꽤 많은 사람이 대통령 주변에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잔을 기울였다. 주로 최저임금 문제, 워라벨에 대한 고민,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이야기들이 시민들의 주 관심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히 일정은 큰 사고 없이 다들 기분 좋게 한잔하고 끝이 났다.

의전팀과 경호팀은 내내 식은땀을 흘렸지만, 대통령도 참석자들도 모두 즐거운 자리였다며 마지막 잔을 하고 헤여졌다. 그리고 대통령은 떠나면서 한 말씀하셨다.

 "그래 이렇게 만나서 한잔씩 하면 좋지요. 매달 한 번은 합시다."

 경호처장은 딴 곳을 바라보았고, 우리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맥줏집 매상을 올려 주기 위해 오래도록 자리에 앉아있었다.

 

p38 남수단에서 온 유소년 축구단

 이 영상에서 남수단 유소년 축구단을 접견하는 일정은 이 날 당일 보고를 받은 문 대통령이 바쁜 일정 중간에 잠시 접견 후 기념 사진 촬영을 하는 아주 짧은 일정이었는데, 축구단 아이들이 깜짝 공연을 준비한다. 이에 문 대통령이 화답으로 잠시 격려 말씀을 해주시는데 문제는 남수단 아이들은 아이들은 알아듣지 못한다는데 있었다

(본문 발췌)

 노래가 끝나자 대통령은 박수를 치셨다. 다행히 크게 당황하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속으로 '그래 이만하면 큰 사고는 아니니 다행이다' 생각하며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

 "이제 이동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이 말씀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노래 선물을 받았으니 뭔가 격려 말씀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대한민국도 전쟁의 아픔을 겪었지만 힘겨운 과정을 이겨내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이태석 신부님이 나온 경남고등학교 선배고, 이 신부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설치됐는데 저도 그 동상 설치에 참여했습니다. 이 신부가 봉사의 삶을 바친 남수단 어린이들을 만나 반갑습니다. 열심히 해서 세계 많은 나라, 어린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이때까지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말씀을 마쳤는데도 선수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 통역이 없었다.'

 원래 사진 촬영만 예정되어 있어 근접 통역을 배치할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현장에 대통령 말씀을 남수단어로 통역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식은땀이 흘렀다. 대통령은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는 감독님을 바라보고, 감독님은 신부님을, 신부님은 다시 우리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길게 느껴진 몇 초가 흐르고, 우리는 유일한 희망인 신부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부님, 대통령님 말씀을 전해주시죠."
 "...."

 모두가 신부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신부님이 조심스럽게 선수들을 향해 말했다.

 "땡큐 베리 머치, 씨 유 어게인."

 다시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흘렀고,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

 "대통령님, 이제 이동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p154 육군 중사 김기억 - 2018년 63주년 현충일 추념식

 국가 기념식의 첫 번째 과제는 '그날'의 의미를 잊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그날에 담긴 이야기가 무엇인지 찾아서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야기에 공감하는 국민이 많을수록 그날의 의미는 잊히지 않고 기억되며 살아 숨 쉬게 된다.

 그러나 60년이 넘는 세월 속에 사람도, 이야기도 다 흘러갔다. 단단했던 슬픔도 씻기고 기억도 이내 사라져갔다. 현충일을 다시 공감할 수 있는 날로 만들기 위해서는 슬픔의 이야기를 찾아야 했다.

 이전까지 현충일 추념식은 대부분 서울 현충원에서 열렸다. 변화를 주고자 전국 국립묘지들을 살펴보았다. 

 대전 현충원을 답사하던 중 현충원장의 안내에 따라 무연고 묘역을 둘러보게 됐다. 무연고 묘역은 다른 묘역과는 달리 울긋불긋한 꽃들이 묘비마다 꽂혀 있었다. 오히려 더 화려해 보이는 그곳이 무연고 묘역일지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그 꽃들은 모두 조화였다. 현충원장은 찾아와서 헌화하는 사람들이 없으니 조화라도 꽂아두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가족이 찾아오는 묘역보다 더 화려하게 보였던 것이다.

 대전 현충원장은 화려한 조화가 있던 어느 비석 앞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비석 앞에 서자마자 현충원장의 설명을 듣기도 전에 울컥했다. 묘비에 각인된 글자 때문이었다.

 육군중사 김기억,
 1931년에 태어나 1953년 5월 3일 양구에서 전사

 단단한 묘비에 더 단단하게 새겨져 있는 글자 하나하나가 우리를 때렸다. 고 김기억 중사는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전사했다. 그의 생몰 연도와 전사 기록이 묘비 측면에 새겨져 있었다. 그의 이름도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듯 단단히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부모와 가족은 모두 사망하고, 이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연고 묘가 되었다.

 

p159 오희옥 애국지사의 올드 랭 사인

'70년간 이어져온 국가 기념식이기에 의전에 있어서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포상자인 독립지사 중 사연이 있는 분을 찾던 중 오희옥(당시 92세) 지사를 추천받았다. 식 초입에 애국가를 제창하게 되는데 이 선창을 애국지사가 하면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행사 전날 리허설 시간에 지사님에게 애국가를 불러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원래는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연습 겸 해볼 요량이었는데 마침 국방부 관현악단이 잠시 휴식 중이라 연주를 할 수가 없었다. 

"지사님, 지금 반주가 없는데 몇 소절만 그냥 해보실래요?"
"어, 그럼 애국가 부르면 되는거지?"

오 지사는 숨도 고르지 않고 바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희옥 애국지사가 부른 애국가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아니라 올드 랭 사인 애국가였다. 우리 애국가에 곡조가 없을 때 스코틀랜드 민요에 가사를 붙여 불렀던 애국가, 독립운동가 애국가로 알려진 그 멜로디였다.'

(감상)

일의 의미를 곰곰히 되새기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그 의미를 상징하는 결정적 장면들이 연출된다. 
탁현민 비서관은 이 책에서 또 방송에서 이런 내용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의 과정을 요구하지, 그 결과를 요구하진 않는다."
요즘 대한민국이 시끄러운 것은 리더가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과를 정해놓고 과정을 거기에 끼워맞추다 보니 거기선 우리의 상식과 논리에 부합하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가 없고 감동은 커녕 수긍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에는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가 있다고 난 생각한다. 교육의 진짜 의미는 답을 찾는 스킬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다.
이 세상 현실에서 발생하는 주요한 문제들은 모두 기존의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것들이다(아주 드물게 패러다임을 바꾸는 정말 새로운 문제가 튀어나올 때도 있는데 보통 그러한 새로운 문제는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천재들에 의해 해결된다).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문제의 의미와 맥락을 찾아내서 상황에 맞는 과정을 밟아나가야 한다. 그래야 합리적이고 상황에 맞는 올바른 답을 찾아나갈 수 있다.
하지만 답을 찾는 스킬만 익힌 질 낮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기존의 방법론만을 답습하다가 운이 좋을때는 답을 찾을 때도 있겠지만, 보통은 어이없는 답을 찾아 상황을 망칠 뿐이다. 
치열한 의미의 성찰과 그 과정을 통해 의미있는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의미있는 인생이 거쳐나가야 할 유일한 왕도이고, 그것이 바로 교육이 추구해야 할 모범이다.

오 지사는 숨도 고르지 않고 바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희옥 애국지사가 부른 애국가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가 아니라 올드 랭 사인 애국가였다. 우리 애국가에 곡조가 없을 때 스코틀랜드 민요에 가사를 붙여 불렀던 애국가, 독립운동가 애국가로 알려진 그 멜로디였다.'

p169 어린이날 100주년 - 대통령 특별 지시 사항

행사가 끝나자 국민소통수석실과 몇몇 기자들의 연락을 받았다. '대통령 메시지'가 없다는 지적이었다. 반드시 들어가야 했을 대통령 당부라든지, 어린이날 복지와 교육 문제 같은 정책 사안들에 대한 언급 없이 그냥 놀기만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 놀이가 끝나고 함께 둘러앉아 꿈과 미래를 이야기했어야 했다. 문재인 정부가 가지고 있는 어린이 정책 같은 것을 할아버지 버전으로 이야기하는 그런 대목이 있어야 했다. 아마 그것이 저녁 뉴스가 됐을 것이다. 우리도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보고를 드렸었다. 그러나 행사 며칠 전 대통령은 그러한 계획을 다 들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 알겠는데, 한 가지는 하지 마세요. 내가 아이들 앞에서 뭔가 연설을 한다거나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는 거는 하지 맙시다. 좋아하지도 않을 거고 나도 하루 아이들과 놀면 충분합니다. 같이 하루 즐겁게 놀면 됐습니다. 절대 내가 말을 해야 하는 순서는 넣지 마세요."

 

p203 피스메이커 - 73주년 국군의날 기념식

백문이 불여일견. 기념식 대미인 피스메이커 작전을 보면 정말 국뽕이 차오른다.

 

p218 청년의 날(with BTS) - 2020년 제1회 청년의 날

 

첫 번째 청년의 날 메신저로 누구를 선정해야 할까? 많은 의견과 토론, 조사를 거쳤지만 결과는 같았다. BTS였다. 많은 의견과 토론, 조사를 거쳤지만 결과는 같았다. BTS였다. 가장 성공한 아이돌, 세계적인 아티스트, 한국 문화를 세계 문화로 확장한 아이콘, 대한민국 청년을 대표하는 데 이만한 인물이 없었다. 

 하지만 우려되는 지점도 있었다. 바로 그 완벽함이 걱정이었다. 그들의 성공이 오늘날 청년의 현실을 반영할 수 있을까? 동시대 청년이 겪고 있는 여러 문제를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성공한 이들의 모습을 보는 청년의 마음이 과연 좋기만 할까? 서로 너무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아닐까? 여기에 더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BTS가 과연 행상에 올 수는 있을까? 행사에 와서 노래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아티스트가 부담 없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러 고민과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고민을 해결할 방법은 문제와 마주하는 것이니 일단 그들을 찾아가 묻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무척 바빴다. 일정을 조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정을 조정하기 전에 그들이 메신저로 나서 준다면 어떤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지부터 정리해야 했다.

 "완벽한 성공, 멋진 현실과 미래를 가진 BTS가, 어렵고 힘들어하는 청년에게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 수 있을까요?"

 그들이 이 질문을 두고 즉답을 피했던 이유에는 일정 문제도 있었겠지만, 행사 참석으로 인한 효과와 파장은 어떠할지 고민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 후 BTS 측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우리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정을 이야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답을 찾아서 온 것이 아니라 정답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을 뿐이거든요. 그 노력과 과정에 대해 멤버들의 생각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p223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내내 외면받던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정상화됐다. 임기 첫해부터 대통령은 5.18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아버지를 잃은 딸이 편지 읽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딸을 안아주었다. 생방송 중이었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참석자들과 시청하던 국민들은 그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함께 울었다.

 

p231 영웅에게 - 70주년 6.25 전쟁 기념식

 누군가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연출적으로 가장 완벽했던 행사는 무엇이었나요?"라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70주년 6.25 전쟁 기념식 <영웅에게> 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기념식 시작은 전 세계 정상들의 6.25 70주년 기념 영상 메시지부터였다. 아마도 건국 이래 처음이었을 것이다. 미국,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공 등 모든 참전 국가와 의료 지원 국가의 대통령, 총리 등 국가수반의 영상 메시지를 받았다.

 정상들의 영상 메시지 다음은 6.25 전사자들의 유해를 싣고 온 공군 공중 급유기와 드론을 사용한 '미디어 파사드'였다. 미디어 파사드는 건물 외벽에 빔프로젝터로 영상을 구현하는 것을 말하지만, 이날은 유해를 싣고 온 비행기 동체에 영상을 투사하고 비행기 위로 드론을 연출해 입체감을 더했다. 투사된 영상은 70년의 세월을 거쳐 이제야 조국 땅에 도착한 6.25 전사들의 여정이었다.

 

 유해 안치가 끝난 후 6.25 참전 용사이자 고인들과 함께 싸웠던 이등중사 유영봉 님의 복귀 신고가 있었다. 147분의 유해 앞에서 유영봉 님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러나 고인들을 대신해 힘찬 목소리로 대통령과 국민에게 복귀 신고를 했다.

 "이등중사 유영봉 외 147명은 조국으로 복귀를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행상 프로그램에 이제 막 군에서 제대한 20대 배우 유승호의 편지를 넣었던 까닭은 기념식을 준비하며 전사자들의 나이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세 살.... 겨우 20대 초반에 나라를 위해 가족과 헤어져 전쟁 한가운데로 뛰어든 이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두렵고 무섭지 않았을까? 춥고 배고프지 않았을까?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용감하게 만들고 목숨을 다해 싸우게 했을까? 알 것도 같고 끝내 모를 것도 같았다. 이 들을 수 없는 대답을 같은 나이의 청년을 통해 묻고 싶었다.

 그래서 유승호 배우에게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것이 아닌 당신과 같은 20대 청년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허락하신다면 나는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나와 같은 나이에 전쟁터로 갔던 친구여."

 

 애석하게도 당시 야당이었던 국민의힘과 몇몇 보수  매체들은, 행사에 쓰인 공군기가 실제 유해를 실어 온 기체와 다르다며, 행사를 위해 유해를 욕보였다고 헐뜯기 바빴다. 그러나 사실은 해외 수송 후 방역을 위해 기체를 바꾸었을 뿐이다.  비난 중 압권은 애국가 도입부에 쓰인 변주가 북한의 애국가와 비슷하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었다. 그 대목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한 집단의 정치 수준과 음악 수준은 같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p250 102년만에 다시 외친 대한독립 만세 - 102주년 3.1절 기념식

(이 날 비가 엄청 왔다)

 대통령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임우철 애국지사 담요가 비에 젖은 바닥에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것을 본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임우철 지사에게 새 담요를 가져다드리라고 하셨고, 얼른 뛰어가 임우철 지사에게 새 담요를 덮어드렸다. 임우철 지사는 그해 세상을 떠나셔서 그날 기념식이 지사님의 마지막 3.1절 기념식이 됐다.

 

 그즈음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폄훼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사회 부적응자'라는 허무맹랑한 비난이었다. 많은 사람이 분노했고,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후손을 제대로 예우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았다. 우리는 행사 사회자로 전문 진행자와 함께 독립유공자 가족인 이재화 씨를 선정했다. 이재화 씨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알려진 시인 이상화 선생의 후손이었다.

(다시 한번 이상화 님의 이 시를 음미해보았다. 슬프고도 비장하며 아름다운 시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비는 기념식이 진행되면서 더욱 거세졌지만 우리는 준비한 모든 순서를 빠짐없이 진행했다.

 3.1 운동과 애국지사들을 위해 첼리스트 홍진호의 특별한 연주도 준비했다. <대니 보이의 아리랑>이라는 곡이었다. <대니 보이의 아리랑>은 아일랜드 민요 <대니 보이>와 우리 민요 <아리랑>을 엮은 곡이었다. 굳이 <대니 보이>를 엮은 이유는 이 곡이 일제강점기에 희생된 위인, 열사, 무명 영웅 들을 추도하는 노랫말이 붙여져 <선현추도가>로도 불린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기념식 마지막 순서는 가수 정인과 헤리티지 합창단의 <대한이 살았다> 합창과 각 대학 의과대학생들의 만세 삼창이었다.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그렇게 101년 만에 탑골공원에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p268 하와이에서 서울로 - 2021년 한미유해상호인수식(영웅의 귀환)

 

 애초 2021년 한미유해상호인수식에 대통령의 참석은 고려되지 않았었다. 그 기간에 대통령은 뉴욕에서 재임 중 마지막 유엔총회에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총회 참석뿐만 아니라 다른 정상들과의 정상회담, 경제 관련 회의, 대한민국 백신 허브 국가 관련 일정 등이 준비되고 있었다.

 또한 UN총회에서 전 세계 정상들을 대표해 대한민국 대통령이 기조연설을 하게 됐기 때문에 하와이 일정은 아무래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엔총회 참석 일정 중에는 미래 세대를 위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BTS도 함께 방미해 유엔에서 전 세계 청년들을 대표해 연설할 계획이 있었다. 아울러 대통령과 함께 미국 언론과 인터뷰할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한미유해상호인수식 참석을 결정하셨다. 뉴욕 일정을 조정해 하루를 줄이고, 밤늦게 하와이에 도착한 후 다음 날 인수식을 끝내자마자 서울로 돌아오자는 것이었다. 이 경우 대통령이 쉴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 여러 비서관이 반대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한미 상호 간 유해 인수인계 준비가 끝났고, 마침 미국에 있는데 직접 가서 그분들을 모시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하와이 일정을 결정하셨다.

 이 일정은 실무적인 부담도 컸다. 유엔과 뉴욕 일정을 준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별도로 한 팀을 더 꾸려 하와이 일정까지 준비해야 했다. 서울에 도착해 대통령을 현충원으로 모실때까지 국내 행사와도 일정을 연계해야 했다.

 

 처음 기획 단계에서는 현지 행사가 끝나면 대통령은 공군 1호기로 복귀하고, 유해는 우리 공군 공중급유기를 통해 모셔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하와이로 출발하기 직전 인수받은 68구 유해 중 고 김석주 일병과 고 정환조 일병 두 분의 신원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두 분 모두 6.25 전쟁 당시 미 7사단 카투사로 복무하다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는 이 두 분을 서울에서 온 유족과 함께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1호기에 모시기로 했다.

 

 유해가 기내에 오르자 공군 1호기 기장은 기내 방송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특별히 김석주, 정환조 일병 두 분 영웅과 유가족을 고국으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을 기다리셨을 두 분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분의 영웅을 모신 공군 1호기는 잠시 후 하와이 히캄 공군기지를 출발,대한민국 서울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대통령은 1호기가 이륙하자 잠시 후 유해를 모신 좌석을 찾아가 아무 말씀 없이 태극기가 관포된 관을 바라보셨다. 유해를 운구하러 고 김석주 일병의 외증손녀인 김혜수 소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다. 그렇게 두 분의 유해를 모신 공군 1호기와 나머지 유해를 모신 공중 급유기는 약 10시간 비행 뒤 한국방공식별구역에 진입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내 방송이 나왔다.

 "공군 1호기는 잠시 후 대한민국 영공에 진입할 예정입니다. 영웅들의 귀환을 맞이하기 위해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편대가 호위 비행을 시작하겠습니다."

 공군 1호기 옆으로 F-15K 4대가 공중 호위 비행을 실시했다. 경례와 함께 4대의 엄호기에서는 영웅들의 귀환을 환영하는 21발의 플레어가 발사됐다.

 "영웅의 귀환을 마중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배님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국가 수호 임무는 후배들에게 맡기시고 고국의 품에서 편히 잠드시길 바라겠습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선배님들을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p274 장국의 귀환 - 여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식과 안장식

(이 공식영상 외에 홍범도 장군 귀환의 맞추어 조정웅 배우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다큐가 있다. 그 영상도 추천한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인 여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서거 101주년만에 이루어졌다.

 실은 이전 정부에서도 유해를 봉환받으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김영삼 정부 시절,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카자흐스탄에 요청한 적이 있었으나 당시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한 카자흐스탄이 거절했고, 이후 북한 정부가 홍범도 장군 유해를 봉환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대한민국 정부 입장을 고려해 거절했다는 말을 카자흐스탄 관계자에게서 들었다. 

 그러던 중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에게 홍범도 장군 유행 봉환을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토카예프 대통령은 흔쾌히 그 요청을 수락하면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사업은 결실을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카자흐스탄 국경이 봉쇄되고 국내 사정도 어려워지면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상황이 어느 정도 관리되기 시작하면서 2021년 8월 토카예프 대통령 국빈 방문이 재추진됐다. 봉환 사업도 다시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이날 추모곡은 가수 하현상이 불렀다. <바람이 되어>였다. 이 곡은 독립운동과 의병 역사를 다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OST중 한 곡이었다. "바람이 되어 그대 곁에 머물겠다"는 가사가 불릴 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관을 덮은 태극기가 펄럭이던 장면은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드라마 속 장면 같았다.

 

p373 최고의 순방, 최고의 회담 -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 초청 미국 공식 방문

 

미국 명예훈장 수여식에 양국 정상이 참석했던 장면도 큰 화제가 됐다.

명예훈장은 미국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무공 훈장이다. 처음 미국으로부터 이 일정을 제안받았을 때는 감이 오지 않았다. 우리 태극무공훈장 수여식에 미국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훈장을 받는 분이 누구인지 들으니 우리도 양국 대통령이 함께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장을 받게 된 랠프 퍼켓 쥬니어 대령은 한국전의 영웅이었다. 청천강 전투 때 미 특수부대 제8레인저 중대를 지휘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날 수여식은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갖는 1호 훈장 수여식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 있는 자리에 한국 대통령과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은 대단히 사려 깊은 제안이었다. 미국은 그 자리에서 우리 대통령의 연설도 부탁했다. 

 "대령님은 아까 제게, 당시 한국은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섰고,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함께 지켜준 미국 참전 용사들의 그 힘으로 오늘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랠프 퍼켓 대령님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p400 휘모리 - 2021년 유럽 순방

 행사 가제 '휘모리'는 로마 교황청 방문, G20, COP26, 헝가리 국빈 방문, V4(비셰그라드 4개국 그룹 :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까지 총 7박 9일간의 여정이었다.

COP26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120개 나라 정상과 국제기구 수장이 참여한 역대급 국제회의다. 거기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오전 8시 개회식부터 당일 저녁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 주최 리셉션까지 참석해야 하는 종일 일정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면 밤 10시가 되어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통령의 체력적인 부담이 엄청났다. 게다가 당일 아침 개회식에 참석하려면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출발해야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주최 측은 회의장 안에 정상들이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다고 설명했지만, 믿기 어려웠다.

 '정상들을 포함해 500명 정도가 그 안에 있을 텐데 개회식 끝나고 30분 이내에 500명의 식사가 가능하다고?'

 부속비서관과 상의해 도시락을 준비해 가기로 했다.

 새벽부터 회의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정상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기저기서 정상들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 천지였다. 그 틈을 비집고 가까스로 라운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대통령도 이런 상황이 처음이고, 평생을 외교관으로 살았던 정의용 장관도 마차가지였다.

 "아이고, 이거 정말 대단하네."

 다들 처음 보는 풍경에 놀랐다. 시간이 되어 대통령은 개회식 참석을 위해 자리를 떠나셨고, 주최 측이 준비했다던 음식을 찾기 시작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누군가 메뉴가 적힌 종이를 하나 주고 갔다. 거기에는 음식 메뉴가 1번부터 10번까지 적혀있었다. 주문하면 가져다준다는 설명이었다. '주문하면 그때부터 조리해서 30분 이내에 500명을 먹일 수 있다고?' 말도 안되는 계획이었다.

 "장관님, 이거 음식 지금 주문해도 절대 시간 못 맞출 것 같아요."

 "어, 그래. 내가 봐도 그러네. 어떻게 하지."

 "일단 도시락 가져왔으니까 이거부터 꺼내 놓고 주문은 주문대로 하죠."

 "그래 뭘 주문하지. 대통령이 뭘 좋아하시지?"

 "아뇨, 그냥 1번부터 10번까지 다 주문하죠. 뭐든 먼저 한두가지는 나오겠죠."

 우리는 10가지 음식을 모두 주문해 놓고 대통령을 기다렸다. 잠시 후 개회식을 마친 대통령이 나오셨다. 다음 세션까지는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여기저기서 의전비서관들과 외교부 장관들이 분주했다. 어떻게든 자국 정상을 챙겨야 하는데 음식이 나오지 않으니 다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준비해 온 도시락을 조용히 꺼냈다. 옆 테이블의 캐나다, 콜롬비아 그리고 또 다른 몇 개의 나라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준비해 온 음식들과 보욘병에 가져온 차를 따라 대통령에게 드렸다. 그리고 잠시 옆에 비켜서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 물었다.

 "그 음식들, 그거 어디서 난 건가?"

 "우리는 음식이 늦을 것 같아 도시락을 싸 왔다."

 "아, 우리도 싸 올 걸 그랬다. 좋겠다."

 "어, 부럽지. 부러울 거야."

 정상들은 잠시 후 다시 세션에 들어가야 했고, 그때까지도 음식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음식은 첫 번째 세션이 시작될 때 쯤에야 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나라 정상이 굶은 채로 회의장으로 향했다. 정상들이 회의장에 들어가자 각 나라 의전비서관들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음식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어느 나라나 똑같았다. 우리 자리에도 대통령이 들어가시고 나서야 10가지 음식이 쌓였다. 마치 한정식처럼.

 COP26 마지막 일정은 보리스 총리 주최 리셉션이었다. 회의장과 리셉션 장소가 떨어져 있어 정상은 단체 버스로, 수행원은 별도 버스로 이동하도록 안내받았다. 아침부터 개회식과 세션 등으로 정상들은 다들 지쳐있는 상태였다. 영국으로서는 주최국이어서 리셉션을 개최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너무 무리한 계획이었다.

 게다가 다들 수행원과 떨어져 버스를 타라니 그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대통령만 혼자 버스에 모셔드리고, 통역, 경호와 함께 버스 옆에 서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면 우리도 뒤따라갈 생각이었다. 다른 정상들도 하나, 둘 버스에 올랐다.

 그때 대통령이 탄 버스에서 큰 소리가 났다. 어느 정상 한 분이 통역도 버스에 못 태운다고 하니 버럭 화를 낸 것이었다. 당황한 영국 담당자가 "그럼 통역을 태우세요"라고 했지만 이미 그 나라 통역은 먼저 따로 이동한 다음이었다. 우리는 그 북새통에 슬며시 우리 통역 손을 잡아끌어 버스에 태웠다. 이따 보자는 말과 함께.

 지친 정상들의 리셉션 기념 촬영이 끝나고, 각국은 눈치껏 자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처음 리셉션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영국 담당관과 이야기해서 차량을 이미 바깥쪽에 주차해 놓았었다. 담당관들은 영국 공무원들이지만 마치 우리 수행원처럼 일해주었다. 눈치도 빠르고 '척'하면 알아들었다.

 리셉션이 끝나면 이 많은 정상이 한꺼번에 나가려고 할 텐데, 그렇다면 승패(?)는 차량의 주차 위치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먼저 빠져나가려면 바로 움직여야 했다. 조금만 늦어도 다른 정상들 차량이 우리 차 앞을 막을 것 같았다. 대통령에게 가서 말씀드렸다.

 "차를 빼놓았습니다. 지금 움직이셔야 합니다."

 대통령도 힘드셨는지 바로 따라나섰다. 대통령 뒤로 유엔 사무총장과 여러 정상이 따라나섰다. 차량 대기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차량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가 나왔다. 대기 지점에서는 이미 몇몇 정상들이 나오지 않는 차량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 순서와 달리 우리 차량이 먼저 나온다는 안내가 나오자,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아세안 국가 어느 총리가 자국 의전관(인 듯)을 정말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구박하기 시작했다. 저분 이러다 오늘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괜히 미안했다.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어느 국제기구 수장도 우리 대통령을 보며 말했다.

 "정말 힘드네요. 한국에서 했으면 이렇게 힘들게 안 했을 텐데..."

 우리 대통령 들으라고 한 말이겠지만 듣기는 좋았다. 대통령도 그 수장에게 오늘 고생 많으셨다며 인사를 했다. 이윽고 가장 먼저 우리 차량이 도착했다. 우리는 뿌듯한 마음으로 대통령을 차량으로 모셨다. 차를 타고 나오는데 100대가 넘는 차량이 주차장 입구에 뒤엉켜 있는 모습을 보았다. COP26  마지막 밤이었다. 차량 불빛들이 아름다웠다. 

 

p414 마지막 순방 샤프란 - UAE,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중동과 아프리카 순방은 수행원들의 무덤이라느 말이 있다. 절대로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대통령의 2022년 마지막 순방은 UEA,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로 확정됐다. 시작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출발 전 국힘의힘에서 순방 관련 일정을 논평 형식으로 발표했다. 공동 발표일이 정해져 있음에도 일방적으로, 그것도 정부 공식 발표가 아니라 특정 정당에서 일정을 공개한 것은 대단히 심각한 외교적 결례였다. 상대 국가에서 문제 삼을 수도 있을만한 사안이었다.

 

 

 사우디에서는 대통령도 여사님도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특히 여사님은 몸이 심각하게 좋지 않아 일정을 전부 취소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사님은 주치의에게 약을 타 드시면서까지 일정을 소화하셨고, 결국 사우디를 떠나기 전날 크게 앓아누우셨다. 어디에다가 말할 수도 없으니 더 답답했고 여사님께도 죄송했다.

 

 중동-아프리카 국가들의 국빈 행사가 이런 식(협의된 일정의 변경 등 돌발 상황이 잦음, 주로 윗 사람의 기분에 좌우)이라면, 마지막 남은 순방지인 이집트가 정말 걱정이었다.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간으로 늦은 오후였다. 도착하자마자 여사님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니 역시 좋지 않았다. 2부속 비서관과 여사님 일정을 취소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 이집트 일정을 점검했다.

 우려했던 대로 현지 선발대는 애를 먹고 있었다. 이집트 측은 사소하지만 사전에 합의한 내용에서 달라진 것들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크고 작은 일정들에 혼선이 생겼다. 하지만 이집트에서는 한 가지만 해결된다면 의전 관련한 것들이야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다. K9 자주포 수출 건이었다.

 그것 때문에 방사청장이 전에 없이 공식 수행원이 되어 함께 온 것이고, 이집트는 대통령 방문 중에 결정하겠다는 약속도 했던 터였다. 실제로 관련 계약 체결을 위한 행사 장소까지 우리와 협의를 끝낸 상태였다. 하지만 이집트가 정말로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이집트 정상회담 양측 기자회견과 공식 오찬이 어어지는 동안 이집트와 우리의 협상은 엎치락뒤치락했다. 나중에 들으니 양 정상은 정상들대로, 실무자들은 실무자들대로 협상하고 있었는데, 협상이 깨졌다가 붙었다가를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틀 내내 그런 상황이 반복됐다.

 그 와중에 이집트는 피라미드를 가지 않겠다는 우리에게 방문을 집요하게 권했다. 자신들에게는 가장 자랑스러운 유적이고 이제껏 모든 해외 정상이 방문했는데, 왜 가지 않으려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우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피라미드 방문이 한가하게 여행이나 다닌다고 비난받을 소지가 있기도 했지만, 대통령은 회담과 협상으로 시간을 낼 수가 없었고, 여사님은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공개 일정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집트가 끝까지 강권하자 결국 여사님은 아픈 몸을 이끌고 피라미드를 방문했다.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후 여사님의 피라미드 방문을 두고 국민의힘과 보수 매체들이 떠들 때, 그때라도 사정을 말했어야 하는데 그래 봐야 믿지도 않을 테니, '그래, 그냥 아무 말이나 해라'하고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중동을 보수언론에서 김정숙 여사 피라미드 방문을 두고 엄청 씹었었다. 쓰레기들이다. 윤석열이 2022년 6월 나토 정상회의 참석시 김건희의 지인이 미리 프랑스 파리를 거쳐 대통령 순방단에 합류했던 사실이 있고, 그 이후 김건희 까르띠에 팔찌등 명품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김건희 지인이 프랑스에 미리 가서 명품 쇼핑을 대신해준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그런 소식에 대해서는 조중동은 함구한다. 조중동이 쓰레기인 이유는 꼴통들의 의혹에 대해서는 입을 쳐닫으면서 진보측의 티끌만한 의혹에도 소설을 써대는 그 얄량함 때문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45470#home

 

김정숙 여사 피라미드 방문…청와대, 이집트에 비밀 요청 | 중앙일보

청와대가 일정을 일부러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www.joongang.co.kr

 

 대통령은 떠나는 날까지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방사청장에게 부담 주는 말을 절대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어려운 협상을 하고 있는데, 대통령 순방 성과를 내야 하니 결론을 달라고 채근하면 그게 다 부담이다. 그러니 아예 아무 말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뜨끔했다. 사실 "대통령이 이집트까지 갔는데 계약을 하지 못하면 빈손으로 귀국했다고 할 게 뻔합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든 결론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그렇게 정색하고 주의를 주시니, 아무 소리 못 하고 그저 '방사청장님 파이팅'만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K9 자주포 수출 건은 우리가 이집트를 떠날 때까지 결론을 못 낸 체 돌아오게 됐다. 방사청장은 침울해했고, 우리는 돌아가서 시달릴 일이 걱정이었다.

(어떤 협상이든 급한 쪽이 손해를 보게 되어 있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이때 본인의 치적에만 급급해서 방사청장 등 관계자에게 계약을 독촉했다면 우리는 불리한 조건에 계약을 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본인의 치적보단 국익을 우선시한다면 이런 자세가 당연하다. 하지만 석열이는? 이 새끼는 그런 걸 모른다는 걸 지난 10개월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 새끼는 대한민국의 국익은 어떻게 됐든 자신의 치적과 겉모냥에만 급급한 천박한 새끼다)

 1월22일 10시 21분, 공군 1호기가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마지막 순방이 끝났다는 안도보다는 곧 야당에 시달릴 일을 예감하며 서둘러 짐을 챙겨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방사청장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 이집트에서 연락이 왔는데 다시 와 달랍니다. 아마 계약이 될 것 같습니다."

 "정말이요? 아, 참 할 말이 없네요. 그럼 다시 가셔야겠네요."

 "내일 다시 이집트로 갑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되겠죠."

 "네, 청장님. 정말 고생 많으십니다. 파이팅."

 아니나 다를까 돌아온 다음 날부터 국민의힘과 보수 매체들은 "대통령 빈손 귀국, 빈손 외교"라며 신나게 떠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내리는 비를 맞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귀국한 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카이로에서 기다리던 소식이 날아왔다.

 'K9 자주포 이집트 수출 마침내 성사, 사상 최대 2조 원 계약 체결.'

 

이 책의 에필로그는 청와대 직원들이 준비한 조촐한 서프라이즈 퇴임 행사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문재인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 자정에 청와대를 개방하겠다는 윤석열의 만행으로 문대통령은 그날 처음으로 퇴근을 하셨고, 일반 시민들이 그 자리에 함께 하며 대통령을 배웅해 드렸다.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께서 퇴장하시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환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1997년에 출판된 도서를 10년 후인 2007년에 개정판으로 내놓은 것.

일부 에피소드에 10년 후의 조수미의 개인적 감상이 덧붙여진 내용들이 있다. 예를 들어 1997년에 어떤어떤 것들을 소망하거나 예사했는데, 10년 후에 다시 되돌아보니 이루어졌드라 하는 내용들이다.

조수미에 대해 관심있는 분들에게는 흥미로운 내용일 듯.

음악적인 내용 위주로 쓰여져있지만 카라얀과의 만남 등 신변잡기적인 내용이라 쉽게 읽힌다.

 이런 글로도 책을 낼 수 있구나, 그리고 이런 책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구나라는 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브랜드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지극히 가벼운 소품류의 글이다.

 이제 하루키 옹(이제 그도 옹翁이라는 접미어가 어울리는 나이대에 접어들었다)은 더 이상 소설을 내지 않을 작정인가? 싶다. 현재 일본에서 그는 무라카미 라디오라는 라디오 방송을 부정기(약 2달에 한번 정도 한다고)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기사단장 죽이기를 포함해서, 그의 최전성기로 보이는 시기에 발표한 태엽감는 새 이후의 작품은 모두 태엽감는 새의 변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쭈욱 읽다보면 아! 무라카미의 작품세계는 태엽감는 새 이후에서 더 나아가질 못하고 있구나라는 그런 느낌이 강하다.

 사실 더 나아기지 못한다는 표현은 하루키와 같은 대작가에게는 무례한 표현이긴 하지만 내 개인적인 감상은 그렇다. 뭐랄까 밥도 더 맛있어지고, 반찬도 화려하고 풍성해지고 있긴 하지만 결국은 그것은 화식(和食, 와쇼쿠)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까?

 이젠 하루키가 만들어주는 갈비찜, 짜장면, 돼지불백, 쌈밥 같은 것도 먹고 싶어지는데 그런 음식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 아닌가 싶다. 

 밥이라도 맛있게 지어주는 게 어디냐? 라며 감지덕지해야 하는데 배 부른 소리를 하고 있구나 싶긴 하다.

 어찌 보면 하루키의 에세이들은 소설에 비하면 간식 혹은 가벼운 스낵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단편소설들은 분식 정도?

 이 책을 그런 기준에서 보면, 영화를 보면서 먹는 팝콘 쯤 되는 것 같다.

--------------------------------

p115

 갈라파고스에는 바닷물에 들어가 해초를 먹는 진기한 종류의 이구아나가 있는데 이분들은 한 시간 동안 호흡을 하지 않고 바닷속에 머물 수 있다. 체온을 낮춰 혈류를 멈추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이구아나는 초식이지만, 살고 있는 섬에 식물이 자라지 않아서 그렇게 진화했다. 다윈이 그 '바다 이구아나'를 연구해 '진화론'의 한 예시로 삼았다.

 이분들이 한 시간 동안 바다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고 실증한 사람도 다윈이다. 다윈은 십 분 단위로 이구아나를 물속에 넣었고, 칠십 분까지 갔을 때 죽자 "오, 육십 분은 잠수할 수 있구나" 하는 확신을 얻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칠십 분 동안 물에 잠겨 있던 이구아나가 너무 불쌍하다. 과학이란 얼마나 비정한 것인지.

 

 얼마전에 읽었던 김경수 도지사의 '사람이 있었네'도 그렇고, 한명숙 총리의 '한명숙의 진실'도 그렇고 정치인이 쓴 글은 대부분 정치 섹션으로 분류되는데 난 그것이 마뜩치 않다.

 내용을 보면 이것은 에세이로 분류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치적 어젠다를 다루는 책들과 달리 이것은 한 개인의 소회와 경험을 쓴 책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은 한(恨)의 민족이라고 한다. 전통 민요의 구슬픈 곡조도 그렇고 우리 민족의 내적 정서에는 '恨'이라는 것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恨'의 정서의 배경에는 사회의 부조리가 담겨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대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부당하게 민초의 삶이 일부 기득권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왔던 시절, 그 부당함은 풀길이 없는 원(怨)이 되고 그러한 怨이 쌓이고 쌓여내려오면서 한민족에게는 恨이라는 고유의 정서가 생겨나게 되었다. 

 민주화 시대에 더 이상 이러한 怨이 쌓여 恨이 우리의 가슴속에 응어리지는 역사가 되풀이되는 일만은 없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교보에서 도서 분류는 정치,사회로 되어 있지만, 사실상 내용은 에세이다. 단지 그 내용에 노무현 대통령과 봉하마을에 대한 이야기와 김경수 도지사의 정치관에 대한 것이 포함되기 때문에 정치로 분류했을 것이다.

 

김경수 도지사가 이번에 네이버 포탈에 대한 영업방해라는 죄로 2년형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그가 구속된 이유는 그가 가진 정치적 자산 때문이다.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관, 문재인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으며, 노무현을 존경하는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차기 대권 주자로 인정받는 인물.

기득권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무서운 존재다(이런 비슷한 정치인들이 몇 명 있는데 몇 년 사이에 전부 감옥에 가거나, 가족인질극을 당하고 있거나, 사망하거나 했다).

그러니 무리하게라도 정치적 생명을 끊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형집행 이후에도 5년간 선거권이 박탈되기 때문에, 그가 정치권으로 복귀할 수 있는 시점은 2028년이나 2029년이 될 것이다. 1967년 생인 그가 환갑이 넘어서야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7,8년 후에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는 현재보다 훨씬 큰 인지도를 가진 인물로 되돌아 올 가능성이 높다.

 

2년의 기간동안 몸 건강히 돌아오시길 바란다.

---------------------------------------------

p184.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랜터 윌슨 스미스-

 

어늘 날 페르시아의 왕이 신하들에게 

마음이 슬플 때는 기쁘게

기쁠 때는 슬프게 만드는 물건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신하들은 밤새 모여 앉아 토론한 끝에

마침내 반지 하나를 왕에게 바쳤다.

왕은 반지에 적힌 글귀를 읽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만족해했다.

반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그대에게 미소 짓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할 때

근심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적인 것들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이 진실을 조용히 가슴에 새기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버지에 대한 짧은 추억. 그리고 대동아전쟁기를 살아온 아버지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일본인이 겪은 전쟁이 개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한 한편의 에피소드를 제공한다.

굉장히 짧은 분량이지만 함축된 메시지는 매우 농밀하다.

--------------------------

 

p34

 사람은 누구나 많든 적든 잊을 수 없는, 그리고 그 실태를 말로는 타인에게 잘 전할 수 없는 무거운 체험이 있고, 그걸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리라.

 

p49

 이 시기에 중국 대륙에서는, 초년병이나 보충병을 살인 행위에 길들이기 위해 포로로 잡은 중국 병사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일이 흔했던 것 같다. 요시다 유타카가 쓴 <일본군 병사>에 다름와 같은 문장이 있다.

 

 후지다 시게루는 1938년 말부터 1939년에 걸쳐 기병 제28연대장으로서, 연대 장교 전원에게 '병사를 전장에 적응케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살인이다. 즉 담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에 포로를 사용하면 된다. 4월에 초년병이 보충될 예정이니, 최대한 빨리 기회를 만들어 초년병을 전장에 적응케 하고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에는 총살보다 척살刺殺이 효과적이다' 하고 훈시했다고 회상했다.

 

 저항하지 않는 포로를 살해하는 것은 당연히 국제법에 위반되는 비인도적인 행위지만, 당시 일본군에게는 아주 당연한 발상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일본군 전투 부대에는 포로를 관리할 여유가 없었다. 1938년에서 1939년은 아버지가 초년병으로 중국 대륙에 건너가 있었던 바로 그 시기이다. 그 같은 행위를 하급 병사가 강요했다 한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살해는 대부분 총검에 의한 척살인 것 같은데, 아버지가 그때 처형에는 군도가 사용되었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쨋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 - 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p62

 하지만 당시의 나는, 책상에 들러붙어 주어진 과제를 하고 시험에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적을 받는 것보다, 좋아하는 책을 많이 읽고,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고, 밖에 나가 운동을 하고, 친구들과 마작을 하거나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이 옳았다고, 지금은 확신을 갖고 단언할 수 있지만.

 

 

 현대 바둑에서 딱 한 사람을 꼽으라면 만장일치로 이 분이 꼽힐 것이다.

그와 같은 시기를 살던 기사들은 그의 바둑을 보노라면 신운(神雲)이 감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바둑은 사실 접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바둑을 알던 시절부터 거의 이야기는 마치 전설처럼 전해져왔던 것이 기억난다.

-------------------------------

 p91

 그 본인방전도 처음에는 제한시간이 13시간 3일제였다. 같은 무렵에 시작된 오청원 · 기타니 도전 십번기의 제한시간도 13시간이다. 제한시간이 길수록 좋은 바둑을 둘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당시는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주류라고 하는 것은 주로 본인방 일문을 가리키는데 물론 본인방 일분 이외에도 장시간 대국을 지지하는 부류는 있었다. 기타니 미노루의 스승 스즈키 다메지로 등도 그 주장의 으뜸가는 사람이었다. 마이니치신문의 미타니 스이헤이(三谷水平)씨가 나에게 들려준 실화가 있다.

 본인방전의 예선 대국에서 장고파(長考派)인 스즈키의 제한시간이 거의 소비되어 초읽기에 이르자 기록계가 말을 걸었다. 

 "스즈키 선생, 나머지 시간 5분입니다."

 스즈키는 태연히 기록계를 돌아다보고 호통을 쳤다.

 "이 수를 5분에 둘 수 있나!"

 때마침 대국실에 와 있던 미타니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두지 않으면 마감 시간이 되어 진다는 것은 스즈키씨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 나는 모른 체하고 있었지만 좌우간 이런 분들을 납득시키는 데 힘이 들었지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의 이야기이므로 미타니의 회고담에는 옛날을 그리워하는 운치가 있었다.

 그것은 차치하고, 그러한 풍조에 대항하여 일관해서 시간 단축을 주장하고 있던 것이 하시모토 우타로와 오청원의 스승 세고에 겐사쿠이다. 그는 수필집 《바둑과 인생》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바둑을 빠르게 잘 두지 않으면 진짜 명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몇 시간을 소비하지 않으면 좋은 바둑을 둘 수 없다는 것은 명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씨름의 예를 들면 예전의 히다치야마(常陸山)처럼 상대의 기합 소리에 따라 언제라도 몸을 일으켜 덤비는 절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진짜가 아니다. 이것이 나의 가문의 기풍이다.

 스즈키씨는 바둑은 숙고하면서 두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여기에 각 가문의 기풍이 새겨서 흥미있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시간제를 실시한 후 많이 대국 시간이 단축되었다고는 하지만 역시 습관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바둑은 그렇게 시간을 쓰지 않으면 명국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 이런 점에 나는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고에의 견해는 대담하고 혁명적이다. 단시간에 명국을 둘 수 있도록 단련하면 관중 앞에서 진검승부를 겨룰 수 있게 된다. 기사는 그러헥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고에의 견해는 TV바둑이 시작되지 훨씬 전에 밝힌 것으로 그 선견성에는 새삼 감탄하게 된다.

 세고에가 자기 가문의 기풍이라고 말한대로 하시모투 우타로, 오청원 모두가 시간 단축파이며, 오청원은 《오청원 기담(棋談)》 중에서 구체적으로 각각 6시간씩, 하루에 끝내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오청원대 하시모토 우타로의 제1차 도전 십번기에서 오청원이 6시간을 주장하자 하시모토가 흔쾌히 동의했다. 오히려 요미우리신문 측이 당황하여 속기(速棋)로 오해받기 쉽다고 이의를 제기, 결국 각자 7시간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전후 본인방전의 제한시간은 각 10시간이 오래 계속되다가 각 9시간으로 되고 다시 각 8시간으로 단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인전(名人戰), 기성전(棋聖戰) 등 새로 만들어진 타이틀전도 제한시간은 본인방전을 답습하고 있다. 리그전이나 예선은 각 5시간, 하루에 끝내는 것이 대부분으로 거의 정착되어 있다.

 

p109

 바둑계는 도전 십번기에서 타이틀전으로 자리바꿈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슈사이 명인의 은퇴기념 대국에 따라 본인방의 칭호는 타이틀명이 되고 마이니치신문 주최로 모든 기사가 참여하는 본인방전이 시작되어 이와모토 가오루, 하시모토 우타로의 쌍벽 시기에서 다카가와의 연패 시대가 출현하는데, 동시에 요미우리신문에 의거하는 오청원은 도전 십번기를 귀신같이 이겨 나가고 있었다.

 거기서 그 접점을 찾아 마이니치신문은 1962년 다카가와가 본인방이 되자 오청원대 본인방의 3번기를 기획하였다. 십번기와는 관계없이 조건은 호선(互先)으로 덤 4집반, 즉 본인방전의 규정에 따른 대전이다. 여하튼 오청원은 도전 십번기에서 역대 본인방을 차례로 물리쳐 버렸다. 슈사이 명인 시대와는 달라서 도전제를 고집했더라면 양자의 대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청원은 조건을 받아들여 거의 해마다 본인방전을 마친 후 마이니치신문 주최의 본인방에 대한 3번기를 두기로 되었다.

 그것은 차치하고, 다카가와 본인방은 오청원과의 3번기에서 제1차 이후 제4차까지 놀랍게도 11연패를 당하고 마는 것이다. 1958년 제4차 3번기 제3국에서 다카가와는 겨우 반격을 하지만 그 사이에 요미우리의 오청원 · 다카가와 도전 십번기가 끼어 있으므로 이 3번기는 오청원의 최강 지위만을 돋보이게 하는 기획이 되고 말았다.

 본인방전을 마치고 한숨 돌리고 있을 때의 3번승부여서 다카가와가 불리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한 동정을 다카가와에게 보내는 말도 나와으나, 물론 그런 동정은 무의미하다. 다카가와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한 것이 있다.

 "오씨는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본인방전과 함께 3번기도 담당하고 있던 마이니치의 미타니 기자도 쓴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한 것이 있다.

 "다카가와는 본인방 타이틀을 다시 거머쥐었으니 3번기에서 오씨에게 한수 지도를 받은 셈이지요. 그걸로 족할 것입니다."

 다소 자포자기적으로 들리는 말투였다. 양자의 3번기는 다카가와의 종반 만회로 1961년 2월 제7차가 끝날 때까지 통산 오청원의 14승7패였다. 그해 오청원의 나이 47세였다.

 그해 본인방은 다카가와의 10연패(連覇)를 저지한 사카다 에이쥬(坂田榮壽)로 바뀌었다. 따라서 3번기의 상대도 다카가와로부터 사카다로 바뀐 셈이다. 새로운 3번기의 제1국이 시작된 것이 그해 7월인데 다음달인 8월에 오청원은 뜻밖의 재난을 당했다.

일본 홍만회의 이사회에 출석하려고 친산소(椿山莊)근처인 메지로(目白)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오토바이와 부딪쳐서 중상을 입은 것이다. 실신한 채 옮겨진 데가 소시가야(雜司谷)에 있는 동대병원(東大病院) 분원이었다. 진통제 주사만 맞고 일반 병실에 눕혀졌으며 조서를 받으러 온 경찰관에게 병원 측은 대단치 않은 부상이라고 설명하고 X선 사진도 찍지 않았으며 뇌파나 심전도 검사도 하지 않았다.

 밤이 되어 매니저를 맡고 있던 다가야 시노부(多賀谷信乃)가 달려왔을 때 오청원은 오른쪽 다리가 몹시 아프므로 X선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그런데 결과는 아무 데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병원이 촬영한 것은 통증이 있는 오른쪽 다리가 아니라 왼쪽 다리였던 것이다. 뢴트겐 기사가 착오를 일으킬 수는 있어도 환자 자신이 좌우를 혼동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에 대범한 오청원은 병원측의 실수조차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개인적 생각 : 오청원 정도 되시는 분은 다른 이들도 모두 자신처럼 꼼꼼하고 상식적이라 생각하며 사셨을게다. 그러니 내가 오른쪽 다리가 아프다고 얘기했으니 당연히 오른쪽 다리를 찍겠지라고 생각하셨을거라고 본다. 그리고 속세와는 많이 동떨어진 바둑기사의 삶을 사시다 보니, 보통 세상의 인간의 오류라던가 시스템의 오류라는 부분에 민감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싶다)

 

겨우 실수를 깨달은 병원측이 뢴트겐을 다시 찍어 오른쪽 발목 골절, 허리뼈의 금 두곳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다리에 깁스, 허리에 코르셋을 끼우고 두 달간의 입원 생활을 보내게 되는데, 뇌파나 심전도 검사는 끝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청원은 사고시에 실신했었기 때문에 당연히 머리에도 얼마간의 상해를 받았을 것이며 퇴원후에도 두통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과연 다음해가 되어 사고의 후유증이 나타났고 때때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일시는 인사불성에 빠져서 입원을 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한 상태 속에서 새로 발족된 명인전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기전(棋戰)에도 몸을 달래가면서 어떻게든 대국은 계속했지만 십번기 시대와 같은 승운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역시 교통사고는 그의 바둑에 치명상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여러 후유증으로 고생하였고 기사 생명에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나의 부상에 관해서만큼은 천하의 동대병원이 어째서 그와 같은 조잡한 검사로 끝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청원 자신의 말인데 천하의 유명한 병원이라는 것이 이정도인 것이다. 왼쪽과 오른쪽을 틀리게 뢴트겐 촬영을 하고도 병원은 한마디 사과의 말도 없었다. 오청원의 귀중한 기사 생명을 단숨에 단축한 것이 바둑계에 어떤 손실을 초해하는지 그러한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는 패거리들이다. 즉 오청원은 이때 이중의 재난을 만난 셈이다.

 이야기를 새로운 본인방이 된 사카다와 오청원의 3번기로 돌리자. 그 제2국이 시작된 것은 11월 중반으로 제1국이 끝난 지 3개월이 경과하고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오토바이 사고와 입원에 따른 공백 때문이었다. 이 대국이 선명하게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 관전기를 내가 담당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대국의 입회인은 다카가와였다.

 다카가와는 그해 본인방을 사카다에게 빼앗겼지만 분노와 충격은 잊은 뒤였다.

 "입회인을 옆에 두고 대국만 할 때는 몰랐는데 입회인이라는 것은 의외로 화려한 것이군요. 특히 이번은 오씨와 사카다씨의 대국에 입회를 하니까요."

 대국장에서 만났을 때 다카가와가 즐거운 듯이 나에게 한 말이다.

 나는 오청원의 명성에 대해서는 친숙했으나 직접 그 대국을 접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대국장은 하코네 고오라(箱根强羅)의 이시바테이(石葉亭)이며 전날 저녁에 오청원은 간호부의 부축을 받아 도착하였다. 나는 즉시 담당기자인 미타니씨와 함께 오청원의 방에 인사하러 갔다. 오청원은 밤색 목닫이옷 차림으로 각로(脚爐)에 발을 녹이고 있었다.

그때의 인상을 다는 다음과 같은 짧은 문장으로 정리한 적이 있다.

 

 '구름 위의 사람 - 그런 말이 나의 뇌리에 떠올랐다. 뭉구리, 넓은 이마, 높은 코, 윤기 있는 피부, 차분하고 독특한 고성(高聲). 지금까지 나는 이런 속세를 떠난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고 느낀 것이다.

 "다리가 좋지 않아 이런 자세로 실례합니다."

 오씨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인사말을 하였다. 이해 여름, 오씨는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다리가 골절되었는데 그것이 완치되지 않아 간호부가 부축하고 있었다. 아마 그러한 정황도 나에게 구름 위의 사람이라는 인상을 강력히 준 원인이겠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초면의 오청원에게 이러한 인상을 받은 것은 그가 모든 번기(番棋)를 이겨낸 쇼와 바둑계의 왕자이며 전 바둑사를 통해서도 아마 제1위에 랭크될 기사일 것이라는 나의 동경심 때문이며, 동시에 그 동경심을 배반하지 않는 풍격과 분위기를 의심할 여지 없이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면 바둑계의 거봉으로서 그 왕자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 오청원이 50세 전후로 은퇴와 다름없는 처지가 된 것은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1년이 지나 갑자기 나타나서 정신장애로 입원을 하는 불행 때문이다. 다행히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대단한 긴장의 지속이 요구되는 쟁기의 현장에 나설 수 없게 된 것이다. 유감천만의 사건이었으나 이것도 숙명이라는 것이겠다.

 

 

p152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사카다가 본인방 명인이 되고 곧 《바둑 클럽》에서 문인들을 상대로 하는 지도바둑이 실시된 일이 있따. 곤도 게이타로(近藤啓太郞), 우메사키 하루오(梅崎春生) 등이 매월 한 사람씩 도전하여 마지막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등장하였다. 이 지도바둑을 기획한 것은 《바둑 클럽》 편집장 고노 나오다쓰(河野直達)인데 그의 의도는 전쟁전에 오청원이 문인에 대한 지도바둑을 실시한 것에 대응시키고 있다.

(개인 감상 : 이 책은 일본에서 1996년 출판된 것으로 한국에는 1997년에 1년이 시차를 두고 출간되었다. 당시는 이창호의 전성기가 시작되던 시기로 한국 바둑 최융성기에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이다. 그래서 바둑책도 꽤 많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이런 바둑 에세이집이 일본에서 출간된지 1년만에 번역되었다는 것이 그 반증이기도 하다. 어쨋든 이 "오청원"이라는 책의 저자는 일본의 소설가인 에사키 마사노리이다.  마지막 구절인 '지도바둑을 실시한 것에 대응시키고 있다'라는 것은 완전한 일본식 표현의 직역인데 우리나라 사람이야 이걸 이해할 수는 있지만 상당히 어색한 표현이다. 요즘같으면, '지도바둑을 두었던 것에 대한 연장선' 이라거나 '지도바둑을 두었던 것을 부활시켰다' 정도로 표현할 것이다.)

 

 오청원의 지도바둑은 모두 여섯점을 놓고 두었는데 사카다의 지도바둑은 각자의 실력에 따라 치수(置數)를 조정했다. 흥미있는 것은 오청원의 지도바둑에서는 스나고야 서저머의 야마사키 고헤이만이 2집승을 거두었고 사카다의 지도바둑에서는 최후의 단 한사람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여섯점 놓고 4집승을 거두었다. 잘 둔 편이다.

 사카다는 지도바둑에서도 쉽게 지지 않는다는 평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그만큼 지도바둑에서 조언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문인에 대한 지도바둑에서 조언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문인에 대한 지도바둑에 나는 몇 판이나 입회했는데 "백이 두기 전이라면 바꿔 놓아도 좋아요." 하고 억지로 무르게도 한다. 잡지에 게재하는 바둑이므로 너무 형편없어서는 안되겠다는 배려에서 나왔겠으나 승부에는 특별히 비정하다고 생각되는 그의 다른 일면이 전해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정상의 인물에게는 각기 고운 마음씨가 있다.

 역으로 보면 고운 마음씨가 없는 사람은 일류가 될 수 없다. 일류란 그 분야에 있어서 뛰어다는 것인데 그를 위해서는 재능뿐 아니라 엄격한 단련과 자기 규제라는 것이 또한 필요하다. 즉 그것은 강인한 정신이라는 것인데 그 엄격성을 지탱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는 애정 이외에는 없다. 그 내부에 풍부한 정감이 없이 긴 고독한 투쟁에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바둑이 강하다고만 해서는 빛이 나지 않는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인데 명국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고도의 기량에 지탱되고 있음과 동시에 그 기량을 구사하는 기사의 인간성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을 것이다. 전인적(全人的)인 싸움이 있어서 명국이 두어지며 명승부가 탄생한다.

 

 

p181

 예도의 세계에서 다닞 그것이 유행한다는 현상만으로는 황금시대라고 할 수 없다. 그 분야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서 그 예능의 수준을 끌어올리며 혹은 새롭게 탈바꿈하는 상황이 생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 세계에 활기를 가져오고 큰 흐름이 되어 풍부한 인맥이 형성되어 간다.

 

 

 

 

 원제는 질투의 법칙 : 연예, 결혼, 섹스 이다.

제목처럼 연예, 결혼, 섹스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의 끄적임이다.

아마 제목을 원제와는 별 상관없이 한 이유는 그의 영화 "모두 하고 있습니까”의 유명세를 어느 정도 감안한 타이틀인 듯 하다.

일본에서는 비트 다케시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예능인(영화감독, 작가, TV엔터테이너)이다. 일본에서는 굉장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최근에 반한적 발언으로 이슈가 됐는데 이 부분은 일본인의 한계라고나 할까? 글로벌한 마인드라든가 역사의식은 부족하다. 일본 사회나 정치의 폐쇄성을 볼 때 개인적 노력이 없이는 글로벌한 마인드가 제대로 박혀있는 일본인이 되기는 어렵다는 점에선 일본인들이 가장 잘 쓰는 변명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근성이라는 측면에선 지극히 일본적인 인물이며, 영화든 책이든 엄청난 다작을 쏟아내는(요즘은 영화는 좀 뜸하지만 책은 꾸준히 내고 있다) 인물이다.

 잡론에 가까운 에세이인데 그의 생각이 일반인과는 좀 동떨어진 스펙트럼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거칠지만 굉장히 번뜩이는 지점이 많다.

------------------------------------- 

 

p31

 신주쿠 같은 데서 중년 회사원을 상대로 성매매를 해서 돈을 버는 여고생이 있다. 그 아이에게는 고등학생 남자 친구가 있는데, 그 남자 친구한테는 뽀뽀는커녕 '손도 못잡게' 한다고 한다.

 "우리 사랑은 순수하니까."라면서

 잘은 모르겠지만, '순수한 사랑' 어쩌고 할 만큼 남자 친구를 좋아한다면 뒤에서 절대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되지 않나?

 

 

p36

 흔히 아이들을 보고 순수하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떤 것에 대한 반응을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맛있는 걸 보면 두 눈이 반짝거린다든가, 용돈을 받으면 곧바로 입이 찢어진다. 그러다가 자랄수록 점점 사회가 규정한 틀과 관습에 얽매여 자신을 억제하는 행동이 늘어간다. 음식을 쩝쩝 소리 내어 먹는 사람은 아주 천박한 느낌이 든다. 볼이 미어터지게 먹는 모습 역시 꼴불견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게 먹는다. 햄버거든 밥이든 뭐든 하지만 어른들은 먹으면서도 주위를 둘러본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신경 쓰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아이들은 그저 먹는 데만 집중한다.

 

p127. 죽어도 좋을 만큼 좋은 것

 '평범한 사고방식'으로 '평범한 삶'을 산다면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평범하지만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한 '수단'.

 그런고로 나이가 들면 결혼해야 한다는,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더 대단한 정열이나 힘이 필요하다. 

 어중간한 노력을 하느니 결혼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지만, 수단이 되는 결혼관 따위 없앨 정도의 뭔가를 인생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쪽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반드시 죽어도 좋을 만큼 좋은 것을 발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살면서 "어떻게 하면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을까?"라든가 "어떻게 하면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증거를 마음껏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흘려보낸다. 결국 죽음에는 아무런 준비도 매뉴얼도 없고, 아무도 '잘 죽는 법'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나는 이게 가장 큰 낭패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걸 떠올려보라. '와, 살아 있네.' 하는 느낌이 절로 들 정도로 장관이다.

 그런데 힘겹게 도착한 녀석들은 산란하자마자 바로 죽는다. 그 노력이란 것이 녀석들에게 '죽어도 좋을 만큼 좋은 것'이라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과연 내게 그런 건 뭘까?

 

==>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긴 한데, 끝에 비유가 그렇게 좋진 않다.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도중에 곰, 인간들에게 잡히는 위험과, 마지막에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강의 상류에 와서 알을 낳고 죽는 것 자체가 모두 생존과 번식의 본능때문이다. 결혼은 사회적 관습이기도 하지만 궁극의 목적은 결국 아이를 낳고 기르는데 있다. 연어도 태어나서 먼 바다로 가 성체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간이 인생의 전부이듯이, 인간도 태어나서 짝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평생(요즘은 평균 수명이 길어져서 아이 양육 후에도 20,30년 정도의 인생을 더 살긴 한다) 기르고 결국은 죽음을 맞는다. 

결혼 적령기 이전에 자기의 생의 목적과 목표에서 결혼을 하지 않아야 겠다는 결심이 설 정도는 '신부(사제)'와 '중' 정도의 종교적 이유 외에는 현실적으로 찾기 힘들다. 아마도 결혼이 늦어지거나 때를 놓쳐서 현실적으로 결혼을 못하게 될때 그에 합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사는 경우가 더 많을 것 같다. 대개는 치열한 삶보다는 그저 외로운 삶을 살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싶다.

 

p155. 누가 보면 콩가루 집안이라고 하겠지만

 

 우리 가족은 설날이나 명절에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다들 고향에 가서 부모나 형제자매들을 만나는데, 우리 가족은 그러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설날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라고 일러두었더니 다들 그러려니 한다.

 대신 여름 방학이나 봄 방학 때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바람을 쏘인다. 하지만 방학 때도 애들을 데리고 고향에 내려가진 않는다.

 고향에서 형제자매들이 모두 모였던 적이 있기는 하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입원했을 때, 그때 단 한 번 뿐이었다. 우리 집은 위아래로 대부분 남자 형제들이라서 다들 자기 부인과 자식들을 끌고 왔는데, 대식구가 다 모이니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욱이 다 모여서 한다는 얘기가 고작 유산 문제에 관련된 것이었다. 형제고 뭐고 없이 다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얘기를 하는데, 얼마나 볼썽사납고 한심했는지. 게다가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신데 만일을 대비해 장례식 이야기까지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이다.

 제일 큰형이란 작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땅은 누가 가질 거냐?" 이따위 소리나 해댄다.

 내겐 "넌 돈 많이 버니까 필요 없지?" 따위의 말을 날리면서. "너는 불효만 했으니까 권리가 없어." 하고, 자체 판단까지 내린다. 이에 질세라 나도 반격한다.

 "그 묘지는 내가 샀어."

 "부엌은 내가 고쳤어."

 이런 소니라 해대고 있으니 거, 참 추한 형제들이다.

 

p282. 상당3 : 매일 같은 일을 하다 보면 진력이 나요.

 

 Q / 저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직장을 옮겼습니다. 지금까지 다녔던 회사 모두 대우도 나쁘지 않았고, 옮기는 곳마다 환영도 받았습니다.그런데도 어느 정도 일을 배우고 나면 의욕이 사라집니다. 매일 같은 일을 하다 보면 진력이 납니다. 지금은 새로운 회사에서 노력하고 있는데, 언제 또 이직 버릇이 고개를 들지 몰라 불안합니다.

 

A / 아직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이직해도 괜찮다. 당신은 기계적인 작업이 싫은 것이다. 처음에는 모르는 걸 배우니까 재미있이서 열심히 하는데, 다 배우고 나면 지루해진다. 그러니까 얼른 그만두고 싶다. 당신에게 그 일이 평생을 걸 만한 일이 아니어서 그렇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직하는 편이 낫다.

 예를 들어 지출 전표를 정리하는 단조로운 사무라면 앞으로 그 일이 진화할 가능성은 제로다. 들어온 전표를 체크하는 일 말고는 할 것이 없다. 그게 싫으면 역시 그만두는 편이 낫다.

 내 직업관에 따르면, 그 직업에서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이차적인 문제다. 선택한 분야에서 전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만족스러운 직업이 있다. 나는 처음 코미디계로 뛰어들었을 때 아사쿠사의 코미디언으로 만족했다. 인기가 없어도 좋았다. 성공하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객사하더라도 좋았다. 오히려 목숨을 걸고 싶은 직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불쌍했다.

 어쨌든 그 일에서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고, 제일 중요한 건 그 일에 대해 만족하는가다. 선택한 직업에 대한 만족감, 그게 무엇보다 우선이다.

 단순히 취직하는 것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의 돈을 받으려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고, 과도한 노동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게 아무리 싫더라도.

 내가 아사쿠사에서 코미디언을 하던 시절에는 밥벌이를 못해서 아르바이트로 육체노동을 하며 돈을 벌어야만 했다. 코미디언을 할 때는 돈을 못 버는 게 당연했다. 인기도 전혀 없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돈을 못 벌어도 괜찮았다.

 사람들은 돈과 보람을 동시에 생각하려고 하니까 골치 아픈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라면, 대가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좋아하는 일을 찾고 도전해서 점점 팔릴 만한 가치가 생기면 돈도 벌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지금 할 수 있는 한도의 일에서 능력을 파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는 건 좀 그렇다. 먼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라. 용돈에 불과한 돈을 버는 일이라도 좋다. 그러면 그 일을 질리지 않고 오래 할 수 있을 것이다.

 딸인 서동주의 에세이집을 보고 나서 흥미가 생겨서 찾아본 작품.

중간중간 약간의 과잉도 보이긴 하지만 그럭저럭 볼만하다. 

 

 서세원과 서정희의 딸로 유명세를 시작한 서동주의 에세이.

한국 사람들에겐 어느 정도 알려진 그녀의 가정사의 아픔, 근황들과 그녀의 인생관이 잔잔하고 소소하게 녹아있다.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사셨으면 좋겠다.

 

 

 영화배우 하정우의 두번째 에세이집. 이번 에세이는 몇년 전 영화제에서 수상공약으로 내걸었던 국토종단 공약을 이행하면서 걷기에 빠지게 된 내용을 위주로 주로 걷기와 관련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가볍게 읽기에 좋다.

 

----------------------------------------

 

p26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길 끝에서 느낀 거대한 허무가 아니라 길 위의 나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왜 하루하루 더 즐겁게 걷지 못했을까.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왜 사람들과 더 웃고 떠들고 농담하며 신나게 즐기지 못했을까. 어차피 끝에 가서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텐데.

 내 삶도 국토대장정처럼 길 끝에는 결국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 이름 붙여진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무無’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하루 좋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뿐일 테다.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이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건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p181. 꼰대가 되지 않는 법

 

 영화감독이란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로구나. 각 파트에서 알아서 하게끔, 자연스럽게 굴러가게끔 조율하고 가이드하면 족한 것이구나. 굳이 제일 앞에 나서서 모니터 가려가면서 목청 높이고 스태프들에게 지시할 필요가 없는 거로구나. 새삼스레 감독의 일에 대해 깨달은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작자는 촬영 현장에 놓인 자신의 의자마저 슬쩍 뒤로 빼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좋은 제작자는 촬영 현장이나 모니터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서 스태프나 배우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좋은 제작자는 자신의 자리를 비우고 뒤로 물러나서 감독, 프로듀서, 배우들에게 스스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것을 독려하고 그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일 뿐, 사실 제작자가 이렇게 뒤로 물러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자칫 현장에서 본인이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연기를 하고 감독은 연출을 하고 스태프들은 각 파트의 일을 한다. 그런데 제작자는 현장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다. 이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어? 이 영화를 총괄하는 사람은 난데, 왜 내가 할 일이 없지?' '저 사람들이 나를 잊어먹은 거 아냐?'

 이때 많은 제작자가 자격지심 때문에 '참견'을 하기 시작한다. 나도 이 현장에서 역할이 있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괜한 잔소리를 툭툭 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자가 불필요한 참견을 하게 될 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연기에 대해 지적받은 배우는 당연히 마음이 불편해지고, 감독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이런 순간들이 자꾸 쌓이다보면 제작자는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된다. 그럼 그 제작자가 이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려고 주의할까?

 절대 아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냉랭할수록 어떻게든 더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

 제작자는 처음부터 자신이 어떻게 포지셔닝해야 할지 잘 알아야 한다. 아무리 영화의 허점과 결점이 눈에 띄더라도 입을 열 타이밍이 따로 있다. 그 타이밍이 오기 전에는 절대 입을 떼면 안 된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영화에 뛰어든 각 파트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각자의 꽃을 만개할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억지로 꽃봉오리를 벌리고 꿀벌을 밀어 넣어서 될 일이 아니다. 제작자의 사명은 사람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자리를 잘 마련해주고 그 영역을 지켜주는 것이다.

 

 

차범근 에세이집 2번째.  1권인 슈팅 메시지가 분데스리가 시절의 선수생활 시절의 에피소드 위주였다면, 이번 2권인 그라운드 산책은 귀국 후와 귀국 후 프로팀 감독과 대표팀 감독 시절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글은 투박하지만, 오랜 축구 생활의 경험과 그 비하인드를 통해 좀 더 축구라는 세계를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

 

p29.

 스위스에는 생 모리츠와 함께 세계적인 고급 휴양지로 꼽히는 제어마트(Zermatt)라는 스키 휴양지가 있다.

 1년 내내 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이고 마테 호른을 볼 수 있어서 일본이나 미국으로부터 몰려오는 관광객도 꽤 많은 곳인데 겨울이면 스키 손님으로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이다.

 저녁이면 기차역 구내며 골목 등에 벗어서 팽개쳐 놓은 듯한 스키와 부츠 등으로 어지러운데 아무도 집어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그곳 경찰관에게 괜찮으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부터는 우리 식구들도 어느 한 귀퉁이에다가 스키를 벗어놓고 그 다음날 찾아 신을 만큼 곧 익숙해졌는데, 의심하지 않고 서로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었고 바로 그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게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관계를 단순하게 만들어 준다. 그것은 물질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말, 생각, 그리고 행동에 이르기까지 내가 상대방을 믿을 수 있을 때 편안한 관계가 유지되고 스트레스도 훨씬 덜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려면 서로가 좀더 믿을 수 있어야 한다.

 

 

 p72. 콜 독일 수상에 관한 추억

 

 1990년 봄.

 동서독이 아직 완전한 통일은 되지 않고 화해의 분위기가 한창 뜨거울 때 드레스덴 시에서는 유적지 보수 기금 마련 자선 축구 대회가 있었다.

 나는 그 때 세계 선발로 그 대회에 참가했었는데 드레스덴의 운동장은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성하고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본부석의 자리 역시 널빤지였는데 초대 손님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놓으면 그것이 곧 지정석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 바로 앞에는 'Dr. Kohl'이라고 이름표가 붙어 있었는데 경기가 시작하기 조금 전에 남녀 수행원 한 명씩과 함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 널빤지에 안증ㄴ 사람은 바로 거인처럼 몸집이 큰 독일 수상 콜이었다.

 그 후 몇 차례 가까이에서 뵐 기회가 있었지만 그 때는 처음이라서 사실 흥분이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널빤지에 앉은 수상이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우리 식으로 생각한다면 본부석 전체도 고칠 판이지만 다만 널빤지 몇 줄을 걷어내고 안락한 의자 몇 개쯤 갖도 놓는 게 뭐 그리 어려웠을까. 하프타임이 되었을 때 동독의 축구 팬들은 콜 수상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서 몰려왔고 그것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짓말 같은 모습이었다.

 윗저고리에서 읷훅하게 사인펜을 꺼내서 옆에 앉은 드레스덴 시장과 함께 담소를 하면서 사인을 해주던 모습이 아줌마 수행원이 조심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응원을 하던 모습과 함께 지금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러운 일로 가끔씩 떠오르곤 한다

 언젠가 수상 관저에 초대받은 꼬마 중 하나가 '콜 아저씨'라고 부르는 바람에 그 다음날 신문과 독자들을 상당히 즐겁게 해주었는데 아마도 앞에서 얘기한 콜 수상의 그런 분위기가 그 꼬마에게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느껴지게 한 모양이었다.

 그 뿐 아니다. 지금은 치매로 독일 국민들을 가슴아프게 하는 전 수상 슈미트 씨의 경우에는 의전 상의 시효가 지나 부인이 1등석을 탈 수 없게 되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남편과 떨어져 비좁은 자리에 앉아 여행하는 당당함.

 바로 그런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는커녕 지금도 수십 명씩을 끌고 골프장에 행사하는 우리네 힘깨나 쓰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하고 근사해 보이는 것은 내가 외국 생활을 오래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p73. 축구 열기에 부는 이혼 바람

 

 독일 대사관의 야닉시 부부와 식사를 하는데 로타 마테우스가 두 번째 부인과 또다시 헤어졌다는 얘기를 했다.

 남의 얘기니까 서로 부담 없이 낄낄거리며 화제에 올리기는 하지만 사실 급작스럽게 불어닥친 독일 스타플레이어들의 이혼 바람은 우리들 세대에서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

 1990년 월드컵 우승 멤버 중 베켄바워 감독을 위시해서 로타 마테우스, 뮐러, 리트바르스키 같은 꽤 많은 인기 선수들이 이혼을 했다고 한다. '1990년 월드컵 챔피언 팀은 이혼도 챔피언이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가끔씩 독일을 방문하는 나에게도 발생한다. 운동장에서 마주치면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게 보통인데도 이제는 "부인과 얘들은 잘 있느냐?"는 인사를 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1980년대 내가 선수 생활을 하던 때와 비교하면 분데스리가 선수들의 평균 급여가 3배쯤 늘었다.

 거기다 90년 월드컵 우승을 전후해서 이탈리아로 팀을 옮겨간 국가 대표급 선수들은 천문학적인 숫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수입을 올렸다. 물론 내가 선수 생활을 할 때에도 휠첸바인이나 그라보브스키 같은 노장 선수들은 우리 젊은 선수들이 자신들의 시대에 비해 너무 많이 받는다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최근 5년 동안 불어닥친 연봉의 급등 현상은 가족 관계에까지 이상 현상을 나타낼 만큼 변화가 심했다.

 우리는 돈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생활의 여유가 가정을 파괴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우리 젊은 선수들, 앞으로 우리 축구 시장도 분명히 더 좋아지리라고 생각할 때 이런 선례를 알고 자신을 추스르는 것도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p84. 삼풍 참사와 코리아 컵 교훈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만약에 어느 건설업자가 다리공사를 1억 원에 입찰 받았다고 하자. 좀더 튼튼한 다리를 놓고 싶은 욕심(?)에 한푼 흘리지 않고 받은 돈을 고스란히 다리 건설에만 사용했다고 할 때 오늘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 과연 그 양심적인 업자에게 다시 또 다리를 건설할 기회가 돌아갈까 하는 것이었다.

 다리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원칙이, 양심이 무시되고 오히려 배척 당하다가 막상 다리가 무너지고 말자 왜 원칙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따진다. 삼풍백화점도 마찬가지다. 자재난에 허덕이던 시점에서 만약에 누군가가 온전한 골재를 사용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버티고 나섰다면 그 융통성 없는 잘난(?) 기술자는 분명히 무시당하거나 멀찌감치 떨려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백화점이 무너지고 나자 손가락처럼 가는 철근을 억지로 지탱하던 흙 콘크리트를 부서뜨리면서 사람들은 그들이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분노하고 나무라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꼭 지켜야만 하는 이 원칙은 사고가 난 후에 책임을 물을 때만 필요한 것인지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말하자면 우리의 현실은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기준이 원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융통성을 사랑하고 원칙을 배척하는 우리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 비도덕적이고 무원칙해도 고쳐져야 할 부분들이 잘한 일로 평가되는 우리 사회. 이제부터라도 우리들이 가장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도덕과 원칙이 이 사회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최고급 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한국'이라는 세계인의 비웃음 속에서 우리의 세계화는 정말 요원할 것이다.

==> 2019년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의 기조가 결과 지향에서 과정 지향으로 변해간다는 징조들이 사회 곳곳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 과정 지향만을 통해 원리와 원칙에 함몰되는 것도 효율이라는 측면에서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리스크가 있다고 생각한다. 70년대부터 2000년대 까지 30여년 간 초압축 성장의 과정 상에서 결과가 옳으면 모든 것이 옳다는 목적 지향의 사회기조는 눈부신 경제발전이라는 큰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큰 성과의 뒤안길에서는 소수의 승자를 위해 고통받는 다수의 대중의 알려지지 않은 희생이 있었다. 1998년 IMF와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를 통해 발생한 경제하락의 과정에서는 그간 희생해왔던 다수의 희생이 강요되며, 혜택받던 소수는 이 희생을 피해나가게 되었다. 대중은 경제위기가 표면화되면서, 이러한 비대칭의 경제혜택의 부조리를 목도하게 되었다. 이는 소수의 혜택받은 이들의 모럴 해저드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이는 그간 경시되었던 과정의 윤리와 도덕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결과보다는 과정의 투명성에 대중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난 촛불혁명과, 올해 조국 사태로 촉발된 우리 사회의 교육,경제에 대한 양극화에 국민 전체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과정의 투명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대한 대중의 분노가 그 모티브였다. 또한 조국 개인과 그 가족에 대한 검찰의 과도한 월권은 과도한 국가 권력을 민주주의의 원칙에 맞게 제한해야 한다는 국민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p97. 비자금 파문, 공짜 밝히지 말자

 

 처음 서독에 갔을 때 나는 프로 선수들의 쩨쩨함에 놀란 적이 있다. 원정 경기를 멀리 가게 되면 보통 새벽 두세 시경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수고비를 거둬주는 돈이 1인당 3~5마르크(1500~2500원)였던 것이다.

 이 액수는 그곳에서 콜라 한잔 값에 해당되는데 이것도 이긴 날이나 거두지 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나는 몇 푼 안돼 보이는 그 돈 역시 결코 작은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누구를 막론하고 월급 외에는 단 한푼도 만져볼 수 없는 그곳 사회에서 비록 작은 돈이지만 스물 댓 명이 거두는 그 돈은 그나마 프로 선수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만져볼 수 있는 꽤 짭짤한 액수였다.

 여기에 비한다면 우리는 그 액수나 범위가 너무 크고 넓다. 어디를 가도 봉투는 가장 보편적인 인사 방법이다. 지금 노태우 전대통령의 4천억, 5천억 비자금 때문에 기를 박박쓰는 사람들도 촌지의 액수가 작으면 쩨쩨하다. 많으면 역시 통이 크고 멋있다고 상대방을 평가해 본적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월급이나 수입과 비례해서 봉투를 의심하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치자금, 정치자금, 비자금, 품위유지비... 이런 돈이 이 땅에서는 꼭 필요하다는 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처럼 철저하게 원칙과 도덕을 따지는 사람도 소위 품위 유지비라고 할 수 있는 비자금이 꼭 필요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나 역시 따로 주머니를 차고 있다. 물론 자금의 출처가 정확한 것이기는 하지만 집안의 생활과 내가 써야하는 돈의 비율이 비등해지는 현실에서 매번 마누라에게 달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향에 찾아가 동네사람들이 모여 공을 차는데 한번 들러도 맨손(?)으로는 곤란하고 그 액수 역시 만만치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문화이고 관습이다. 나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비자금으로 야기된 사태를 지켜보면서 좀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인심과 환심을 사야 하는 정치인들로서는 비자금의 필요성과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받는 쪽이 먼저 변해야 이 잘못된 문화는 없어질 수 있고 그 위에 도덕정치가 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p111. 악습 교정과 선수 기 살리기

 

 지난 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전에서 한국 최고의 골게터인 최용수가 퇴장을 당하는 바람에 온 국민들이 바짝 긴장했던 적이 있다.

 일반 팬들의 입장에서는 워낙 중요한 선수가 빠지게 되니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고 축구를 잘 아는 전문가나 열성팬들의 경우는 중요한 고비에서 팀을 어렵게 만드니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날 밤도 방송을 하러 MBC에 갔더니 스포츠 보도국의 정국장님이 큼지막하게 써놓고 퇴근한 대본에는 도저히 방송으로 내보낼 수 없는 흥분한 문구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최용수를 만나면 너무 순진하고 귀여워서 도무지 과격한 행동이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다. 본인의 변명으로는 투지가 넘치다보니 그게 잘 안된다고 하는데 나는 최용수를 볼 때면 또 생각나는 선수가 있다.

 현대 송주석 선수인데 그는 스피드와 기량으로 볼 때 한국 무대에서는 최고의 제목인데도 불구하고 기량만큼 크지 못하는 선수였다.

 내가 그만 두고 고재욱 감독이 팀을 맡으면서 주석이의 플레이가 좋아지기는 했는데 마침내 지난 시즌 끝날 무렵에 상대 팀의 라커룸으로 쳐들어가서까지 한바탕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주석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여러 명의 상대 선수가 다리가 부러지고 부상을 당해서 나는 아주 강경하게 나와 함께 일하는 동안 주석이는 어딘지 모르게 위축돼 있는 것 같았다.

=> 이런 애매한 문장을 보면 스포츠 신문에 연재할 때 편집자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이런 문맥일 것 같다. 

 주석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그의 거친 플레이로 여러 명의 상대 선수가 다리가 부러지는 등의 부상을 자주 당했다. 나는 이런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강경하게 그를 꾸짖었다. 그때문인지 나와 함께 일하는 동안 주석이는 심적으로 위축돼 있던 것 같다.

 내가 주석이의 이런 부분 때문에 고민을 하자 아내는 "만희 씨(현 전북코치) 보고 욕을 빼고 말을 하라고 하니까 당신 앞에서는 말이 잘 안되고 더듬거리잖아요. 똑같은 거지요 뭐!" 하면서 참견을 했는데 그 옆에 있던 최만희 코치의 부인이 "고것이 정답이네요" 하면서 즉각 거들고 나서는 것이었다.

 몸에 익힌 습관. 이것은 나이가 들어서 고치기는 힘든 모양이다. 바로 이렇게 힘든 남들의 습관을 꼭 모범 답안으로 고쳐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습관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고약하기는 똑깥을 것이다.

 

p113. 고교 감독은 로비스트(?)

 

 KBS-TV에서 우리 나라 운동선수들의 문제점들을 취재 보도한 적이 있다. 이날 얘기들은 진학에 얽힌 비리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비교적 완곡한 수준에서 취급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느 학생의 증언처럼 "부모님들이 나를 대학 보내는 데까지 그랜저 수십 대 값이 들었다"고 하는 식의 자극적인 증언도 있었지만 왜곡돼 있는 현실과 비교해 본다면 대체적으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 중 가장 힘든 건 고등학교 감독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도자라기 보다는 차라리 로비스트라고 해야 옳을 만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어떻게 해서든 대학 감독들과 끈을 맺어서 한 명이라도 더 대학에 보내는 게 중요한 임무가 돼버렸다.

 가장 많이 배워야 하는 연령의 아이들을 지도해야 할 감도들의 임무를 생각한다면 한국 축구로서는 이만저만 손실이 아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이 지상 목표가 돼버린 현실에서 부모들 역시도 당연히 이 작업에 적극 동참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보면 진학 과정이 비리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 졌다고 봐야할 것이다.

 지금 고등학교 지도자들의 봉급 수준은 몇몇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형편없는 평균이하의 수준이다. 1백만 원이 채 안되는 감독들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이들에게 자가용에 핸드폰은 기본일 뿐더러 거의 매일 이어지는 사람 만나기(접대) 비용 역시 이들의 수준을 이미 벗어난 지 오래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학부모들의 몫이고 어찌 보면 아이를 대학으로 보내기 위한 지원금인지도 모른다. 물론 더러는 이런 현실을 이용해 아주 악질의 지도자가 없지는 않지만 바로 이런 행위를 힘들고 괴로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안쓰러운 감독들도 적지 않다.

 내 밑에서 공을 차자 지도자로 나선 선수들도 꽤 있는데 바로 이런 짓(?)이 적성에 맞아 신바람내는 경우도 있는 하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지도자의 부인은 "우리 아기 아빠는 고스톱을 못하고 술을 못해서 걱정"이라며 걱정 아닌 걱정을 늘어놓기도 한다.

 언젠가 운동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한다는 부담감으로 자살을 했던 아버지도 있었다. 외국에서 볼을 차다가 귀국한 선수들의 부모는 한 달에 수십만 원씩 들어가는 비용에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아마도 우리 나라처럼 많은 돈이 들어간다면 축구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는 축구를 시킬 수 있는 부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한푼의 돈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무엇부터 얘기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지금 우리 나라의 어느 부문에 손을 대도 썩은 고름이 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 검찰의 탄식. 그러나 그들에게 벌을 주기 이전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도덕불감증'을 강요당하며 괴로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깨끗한 사회로의 변화가 더 급하고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p122.

 여름, 겨울 휴가를 마친 뒤 한 차례씩은 반드시 열흘 정도의 합숙을 아주 조용한 곳으로 떠났었다. 이 기간은 그야말로 먹고 훈련하고 곯아떨어지는, 더 이상의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내야하는 힘든 기간이지만 이 훈련을 마치고 나면 다시 경기를 할 수 있는 몸이 만들어지는 게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했었다. 일단 몸이 만들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가벼운 반복 훈련만으로도 기능이 유지되는데 그게 바로 매일 운동을 조금씩이라도 하는 사람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런 훈련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체력이 불충분하면 근육 사이 이외에 또 하나의 체내 에어지 공급처인 뇌와 간에 축적된 에너지를 우리 몸이 사용하게 되기 때문에 뇌는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지시할 수 없고 간은 구토를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서 기술이나 전술훈련은 아무 의미가 없고 잦은 패스미스 역시도 정신 집중 이외에 바로 이런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p134. 문화 따라 코치 역할도 다르다.

 

 이랜드의 이영무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의 코치직을 사퇴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비쇼베츠에게도 비교적 호감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이영무 감독과도 각별한 사이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돌아가는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별로 편하지 않았다.

 더구나 문제의 근원이 어느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동서양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서 더욱 그랬다. 우리 나라에서는 감독이 자신의 의견보다는 모든 사람과 의견을 나누고 주위의 의견을 잘 받아들일 때 겸손한 감독,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서양에서의 감독은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갈 때 훌륭한 지도력을 가진 감독으로 꼽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코치의 비중이 높고 그 역할 또한 유럽에 비해 중요한 편이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코치는 단순한 어시스턴트에 불과할 뿐 어떠한 권한이나 영향력도 갖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서 이영무 감독과 비쇼베츠의 문제가 시작되었다.

 감독은 바깥 정치(?)를 주로 하고 코치는 가르치는 일을 해왔던 지금까지의 역할에 익숙한 이영무 감독으로서는 감독이 휘슬을 직접 물고 지도하는 비쇼베츠 감독의 단순한 보조자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혼자서도 능히 올림픽 대표 팀을 끌고 갈 수 있는 이영무 감독의 능력 역시 유럽식 코치의 단순한 임무를 맡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비쇼베츠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역할 분담이다. 감독의 개성과 지도력, 그리고 자신만의 축구가 없이는 능력 있는 감독으로 평가받을 수 없는 유럽에서 모든 스태프는 감독을 돕기 위해서 존재할 뿐인데 그들의 의견을 꼭 들어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우리들의 감독 역할이 유럽 사람들 눈에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책임감 없는, 무능한 지도자로 보일 뿐이다.

  "잘모르겠는데요."

 "한번 의논해 보지요."

 바로 이런 말들이 겸손으로 받아들여지는 동양과 무능으로 취급되는 서양의 차이가 이영무 감독의 올림픽 코치직 사퇴를 낳게 한 것이다.

 

 p138. 스포츠 세계화 - 폭력 추방부터

 

 우리는 지금 세계화를 부르짖고 있다.

 그 의미가 세계적인 수준과 실력을 겨룰 수 있는 각 분야의 질적 향상도 되겠지만 그 보다는 세계인과 섞여 사는데 무리가 없는 한국이 되는 게 더 먼저인성 싶다.

 예의범절, 도덕성, 정직성 그리고 순화된 인성도 세계인이 되는데는 큰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얼마 전 TV로 보도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호소를 접하면서 일반적인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국민이 저토록 잔인한가?'하는 괴로운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보고 듣기가 민망할 정도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우리 나라 국민들이 비교적 성격이 급하고 폭력과 가깝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특히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남북한이 번갈아 가며 보여 온 폭력과 비신사적인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사건들을 별 무게 없이 취급하는 언론 역시도 이 부분에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편인 것 같다.

 83년 본선 진출권을 얻은 북한이 FIFA로부터 징계를 받음으로써 한국의 세계 4강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기회를 제공해준 당시 북한 팀의 경기장 난동 장면을 나는 독일에서 신문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대형 사진을 통해 보았었다. 그러나 귀국 후 보니 우리들 주변에서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그라운드의 폭력이 별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

 지난 겨울 일화의 이종화 선수가 월드컵 대표 팀의 전지 훈련에 합류했다가 연습 경기 중 비신사적인 행위를 했다고 해서 FIFA로부터 징계를 받고 국내 리그에도 참여하지 못한 적이 있다. 이것 역시도 우리들의 자체 징계가 아니고 FIFA의 징계였던 것이다.

 스포츠가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갖는 것은 그 바탕이 '페어 플레이'로 정치에서 기대할 수 없는 친선과 교육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세계 무대에 태극기를 달고 나간 우리 선수들 중 어떤 이유에서라도 비신사적인 행위나 폭력을 사용했을 때는 귀국 후 아주 엄한 징계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제 무대에서의 그런 모습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깍아 내리고 세계화와는 정반대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p146. 윤정환, 고정수와의 전쟁이 시작되다.

 

 윤정환, 고정수.

 지금도 이들 둘만 생각하면 어려운 숙제를 끌어안은 듯 답답함을 느낀다. 앞으로 반 년여 동안 이들 두 녀석을 길들이고 '차범근화'하기 위해 해야 할 기력 소모를 생각하면 올 겨울에는 보약 한 재 정도는 넉넉히 먹어 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이들 둘은 게으르고 꾀가 많은, 사이좋은 선후배 관계다. 그러나 고종수는 좀 나은 편이다. 야단도 맘껏 칠 수 있고 여차하면 볼기짝도 패줄 수 있는, 소위 성격상 다루기가 쉬운 유형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정환은 많이 다르다.

 말 수도 별로 없는 데다가 붙임성이 좋은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 서로 간의 마음을 열 수 있는 통로가 썩 원활하지 못한 케이스다.

 선수들 중에는 여러 가지 부류가 있다. 우선 늘 열심이면서 자기 일을 틀림없이 해내는 완전한 프로는 성격의 색깔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런 선수들인데 대표팀 선수들이 대부분 여기에 속하고 나 역시 이런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만들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러나 수 십 명의 선수 중 모두가 다 그럴 수는 없다. 고종수나 김병치처럼 꼭 튀는 선수가 있다. 그나마 이들은 맘껏 야단치고 요리할 수 있어서 목이 아프고 힘은 들지언정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힘들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선수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이 늘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는 부류다. 직장이고 어디고 반드시 있을 것이다. 힘든 훈련과 치열한 경쟁으로 주전, 비주전을 가리는 대표팀의 예민한 분위기 속에서 바로 이런 선수들은 감독을 엄청나게 피곤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팀 분위기를 망쳐 놓는다. 더구나 고참 급에 속하는 노장 선수가 그렇다면 그것은 대책 없이 피곤해지는 것이다. 이제 윤정환, 고종수와의 전쟁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 이들의 상태로는 내가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한국보다 더 높은 기량을 가진 팀들과의 경기 뿐인데 11로 전원이 자기 몫을 해줘도 기량 면에서 부족한 게 우리들의 현실인데, 자신의 몫을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준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둘은 변신에 성공하면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면 수비가 우선적으로 안정되야 공격력이 살아난다는 축구관을 가진 나로서는 과감하게 도태시킬 수밖에 없다. 이들은 우선 세계적인 팀들의 미드필더들이 얼마나 많이 뛰는지를 TV나 경기 비디오 테이프로 계속 보아야 한다.

 그들의 기량이 자신들보다 훨씬 높음에도 불구, 더 나은 자신이 역할을 위해 얼마나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악착을 부리는 지를 진심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충분히 인식되고 공감할 수 있으면 그 다음은 훈련장에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인내와 노력으로 이것이 성공한다면 이건 틀림없이 한국 축구와 팬들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인내하고 참는 것이라면 항상 자신이 있다. 그래서 이미 그들에게 도전장을 던져 놓았다. 성공 여부는 그들의 몫이다.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p151. 오버래핑을 차단하다.

 

 내가 선수 생활을 하던 때였다.

 81독일 선수권 대회의 결승전이 있던 날이었다. 전통적으로 맨투맨 수비를 쓰는 독일에서 최전방 공격수와 전담 마크맨의 1대1 싸움은 경기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만큼 중요한 전술 부분이다. 이때 상대방의 간판 수비수인 브리겔은 올림픽 10종 경기 국가 대표 출신답게 모든 면에서 뛰어난 선수였는데 거기다 그는 남아도는 힘과 스피드로 공격에 가담해 스스로 득점을 하는 아주 위협적인 존재였다.

 경기 전 부흐만 감독은 나에게 특별 지시를 내렸다. 90분 내내 절대 한 자리에만 머무르지 말아라. 공을 차지 않아도 좋으니 국가 대표 수비수인 브리겔을 몰고 전후좌우로 다니면서 브리겔의 공격력을 무력화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쉬지 않고 움직였고 브리겔은 씩씩거리며 따라다녔다.

 결국 이 틈바구니에서 공격수 출신 풀 백인 노이어베르거가 선취 득점을 했고 우리는 2대 0으로 리드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반 종반 쯤 원래 움직이는 사람보다 따라다니는 게 더 힘든 법이이서 지쳐 있는 브리겔을 따돌리고 내가 점프 헤딩 슛으로 3대 0을 만드는 것까지 성공했다.

 이날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치고 달리며 공을 다루는 시간이 적은 내 경기에서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대만족이었다. 물론 브리겔의 체력 저하로 내가 득점까지 얻어내자 작전의 성공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서 더욱 통쾌했겠지만 바로 이런 경우 운동장 밖에서 별볼일 없는 선수가 감독에게는 아주 중요한 무기가 되어 주는 것이다.

 내가 대표팀을 맡고 노르웨이와 첫 경기를 치르던 날, 독일의 친구들은 노르웨이 풀 백의 오버래핑과 득점은 가공할만하다면서 거푸거푸 주의를 주었다. 덴마크 프로팀 소속으로 독일에 와서 유럽 선수권 대회를 치르는데 슈팅 그 자체가 대표 같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석주에게 단단히 일렀다. 물론 당시 상황으로는 먹지 않는 게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공격에 가담하지 않아도 좋으니 상대방이 오버래핑하지 못하도록 미리 차단하고 절대로 슈팅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 석주는 완벽하게 해냈다. 다만 TV에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뿐이었다. 바로 이런 경우 감독에게는 성공하고 선수에게는 실패처럼 보이는 경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도쿄에서 한일전이 끝나고 나는 고정운에게 많은 칭찬을 해줬다. "너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한 경기였지만 전술적으로는 대단히 만족스럽다. 결과적으로 너는 온르 나에게는 성공한 선수다." 이날 정운이에게는 줄기차게 많이 뛰어서 공격 가담을 늘리는 상대방을 철저히 무디게 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더구나 그곳은 적지였기 때문에 상대방의 기를 살려 놓는다는 것은 기름을 부어 주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보았듯이 같은 팀이지만 정운이가 대퇴부 근육 이상으로 도쿄서만큼 움직여 주지 못하고 서정원이가 반대쪽 공격을 저지해주지 못하자 실점을 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을 통해 공격수들의 수비 능력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팬들은 치고 들어가서 슈팅을 하고 문전에서 움직이는 그런 모습을 기억해 낸다.

 그러나 감독은 바로 저 순간 도와주지 않고 그냥 있는 선수들의 수비 나태가 더욱 불만스러운 것이다. 상대가 강팀일 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전의 우리 선생님 한분은 그런 선수를 가리켜 "팬들을 기만하는 선수"라고 혹독하게 야단친 것을 본적이 있다.

 팬들을 기만하는 선수는 팀 전력에 실질적인 보탬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팬들은 그를 기억하는 게 감독을 고민케 하는 또 하나의 짐이다.

 

p169.

 선수의 부상은 정신력이 흐트러지거나 최고의 컨디션이 아닐 때 자주 나타난다. 나 자신이 아픈 선수나 컨디션이 안 좋은 선수보다는 기량이 좀 떨어지더라도 완전한 몸을 가진 선수를 내보내려고 하는 이유 중 하나도 부상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우즈베키스탄 전을 마치고 본선 진출이 확정되자 "가능한 이번 경기는 그 동안 뛰지 못했던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던 것인데 그것은 "한 번쯤 뛰고 싶다"는 정신력이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것보다 우위일 것이라는 판단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쉽지가 않았다. 지난 한 주 내내 훈련 결과가 좋지 않았던 최용수였다. 그러나 홈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그동안 가장 공을 많이 세운 용수에게 주중 훈련이 부실했다고 스타팅에서 제외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목숨을 걸고 이겨야 하는 경우였으면 나 역시 좀 더 냉정했을 것이다.

 지금도 경기에 졌기 때문에 용수의 출장이 아쉬운 게 아니라 바로 그런 훈련 상태서 부상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내보 낸 나의 냉정치 못한 결정이 용수의 코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으로 이어지자 바로 그것이 아쉬운 것이다. 고정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허리가 아프고 시합 전날도 근육이 한번 뜨끔했다는 얘기를 팀 닥터로부터 전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일텐데 본인이 괜찮다며 기어이 출전하고 싶어하는 것을 보자 "우즈베키스탄 전에서 모처럼 골을 넣었으니 그 뒤풀이도 하고 싶을텐데 한 번 들어가서 소원 풀어봐라"하는 냉정치 못한 판단으로 출장을 허락했다. 근육 이상은 날씨가 추우면 더욱 위험률이 높아진다. 결국 한번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고 근육 부상만 악화되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

 

p180. 너무나 길고 힘들었던 3년 간

 89년 독일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지도자 교육 과정을 공부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네덜란드의 리누스 미셸 선생님에게 "지도자도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직업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지도자 과정을 공부하면서도 한국적 지도자 모습에는 스스로 자신이 없던 터라 귀국 후 꼭 팀을 맡아야겠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 선생님은 수 십년 간의 경험에서 오는 확신으로 단호히 얘기해 주셨다. "열심히 일하는 감독만이 성공할 수 있다. 감독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는 선수들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덧붙여 "선수 기용은 절대로 소신대로 정당하게 해야 하며 이것이 무너지면 결국 자살골을 넣게 되고 만다"면서 "특히 너처럼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은 책임도 그만큼 크기 때문에 팀을 맡을 때는 주변 정리를 완벽하게 하고 반드시 소신껏 일할 분위기가 되었을 때만 팀을 맡으라"는 충고도 거급거듭 해주셨다.

 그리고 1년 후.

 내가 현대팀을 맡아 바닥에 있는 팀을 준우승시키면서 감독 취임 첫 해부터 스포츠 서울과 일간 스포츠에서 주는 '올해의 감독' 상을 받을 때만 해도 정말 나는 지금처럼 재미있게 일했다. 큰돈을 들여서 선수들을 사들이는 데는 별 흥미가 없는 나는 어린 선수들이 쑥쑥 크는 재미로 힘든 줄 몰랐고, 당시 단장이셨던 윤국진 현 울산시 축구협회장님은 나의 명예를 걸고 하는 그 일에 신뢰와 지지를 아낌없이 보내주었던 정말 신명나는 한 해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 '왕회장'님께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시면서 윤국진 단장님이 선거관리 본부책임자로 불려나가시자 나는 한쪽 날개가 완전히 떨어져나가 버린 꼴이 되었고, 그 후 3년은 그야말로 매순간 그만두고 싶었던 너무나도 힘든 그런 시간의 연속이었다.

 내가 처음 현대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당시 고려대학교 동문회 회장이신 정세영 회장님은 "우리 동문중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인 차범근과 이명박을 현대가 갖게 돼서 너무 영광이다"면서 단장님에게 "잘 도와서 감독으로서도 훌륭히 키워줘야 한다"며 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보통의 감독 대우 이상으로 예우를 해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장님이 선거 때문에 떠나자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올라 갈 때마다 공항으로 내보내주던 회사 차도 "택시 타라고 그래"하면서 끊어버렸고 합숙 중 술담배를 하지 않는 우리 코칭스태프들이 디저트로 먹는 호텔의 2천원짜리 아이스크림마저 "왜 300원짜리를 사다주지 비싼 걸 먹게 하느냐"며 구단 직원들을 윽박지르는 간접 인신 공격과 자존심을 뭉개는 비하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며 당시의 3년은 너무나 길고 힘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것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나의 결정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표팀 감독을 맡을 때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이상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너무나 열심히 신명나게 일만했다.

 그래서 더욱 행복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서 UAE 감독관이 거푸 배정되자 사실 별 것이 아닌데도 "말도 안된다"면서 바꿔달라고 신경질을 부렸다. 협회는 부랴부랴 FIFA에 편지를 보내서 해결해주었다. 왠지 마음이 편했다.

 경기가 끝나자 오완건 부회장님, 김원동 부장, 가삼현 부장에게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바로 이런 축구협회의 분위기가 우리 선수들과 나에게는 안심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돼주었다.

p212.

 '샤덴 프로이데'라는 심리학 용어가 말해주듯이 인간은 남의 불행을 보면 본능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되어 있다.

 

p241.

 얼마 전 아들 녀석이 학교에서 선배들과 모여 앉아 잡담을 하면서 "다시 태어나면 무엇을 할까"를 서로 얘기했던 모양인데 녀석은 "다시 태어나도 축구 선수를 하겠다"고 했더니 모두들 "돌았다"고 하더란다.

 말하자면 이미 이 연령(고등학생)이 되면 축구를 정말 하고 싶다는 즐거움이 없어져 버린다는 얘긴데 얼마 전 조사된 초등학교 축구 선수들의 경우도 비슷하다는 결론이 나온 모양이다. 초등학교 축구 선수들이 축구를 하기 싫은 첫 번째 이유는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처럼 구타가 무서워서였다고 한다.

 두 번째가 훈련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세 번째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였다고 한다. 

 

p254. 운동장도 없는 축구 교실

 

 언젠가도 소외된 자들의 대변인으로서 바른 사회 만들기에 앞장서는 일을 대표적으로 나서서 하던 사람이 불법으로 집을 짓고 마당을 넓히는 등 정작은 옳지 않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게 문제가 돼 시장이 된지 며칠만에 그만 둔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참담한 기분이었는데 어린이 심장재단에 관여했던 L씨(부연 설명 : 뽀빠이 이상용 씨를 말함. 이 사건은 누명으로 밝혀져서 이상용씨는 법적으로 무죄를 입증했다. 자세한 것은 검색해보면 많이 나온다.)의 경우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을 뿐 아니라 15~16년 전만 해도 그나 나나 꼬마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때라 "나중에 너랑 나랑 대통령 선거에 나가서 누가 더 인기가 있는지 알아보자"는 농담을 자주 했을 만큼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믿어왔기 때문에 허탈감이 더했다.

 그러는 중에도 "단체를 운영하려면 비자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 분의 인터뷰 내용은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올 만큼 공감이 가는 부분이기도 했다.

 축구교실 운영을 좀더 체계 있게 하기 위해서 7년쯤 저 사단법인 허가를 신청했을 때의 일이다. 법인 신청을 하기 위해 우리 사무실에서 열심히 준비해서 갖다 준 서류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퇴짜를 맞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독일에서 귀국한 직후였고 운영 자체가 내 개인의 광고 모델료나 방송 출연료 같은 것으로 되고 있었기에 내가 그들에게 상을 받았으면 받았지 사정(?)을 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거의 1년여를 '차범근이 직접 오라'면서 끌던 것을 우연히 파티에서 만난 당시 박철언 체육부장관이 '팬'이라면서 반가워하는 바람에 체육부에서 퇴짜를 맞고 있는 서류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일이 일사천리로 끝났던 적이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아이들이 연습할 운동장을 빌려쓰는 데서부터 어느 한 곳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는 것이 우리 나라의 현실이다.

 얼청난 정부 예산으로 유명 선수 축구교실을 지원하는 경우에도 지도자들의 보수를 지불해서 더 어려운 곳을 개설해 달라는 요청은 무시하고 지난 해에는 현실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 물품으로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면서 운동자도 없는 축구교실에다 기가 막히게도 골대를 지원하겠다고 품목을 적어보냈다.

 우리 축구교실에서는 연구 끝에 그 골대를 운동장에 있는 곳에 보내주고 우리는 그 운동장을 빌려 써야겠다고 아이디어를 짜보았지만 1년이 넘는 지금까지 수 차례 독촉에도 골대는 나타나지 않고 올해는 그나마도 1천여 명이 넘는 우리 축구교실에는 그 엄청난 예산 중 공 100개만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차범근 감독이 글을 좀 더 조리있게 쓰셨다면 해결될 일이 많았을 지도 모르겠다. 좀 억울한 사연에는 할말은 많은데 마음이 앞서는지 글을 이렇듯 맥락 파악하기가 어렵게 쓰시는 경우가 있다.)

 또 몇 달 전 집사람에게 사정사정해서 얻어낸 돈 몇 천만 원으로 여의도에 만들어 놓은 미니 축구장도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몇 달째 사용허가가 나지 않고 있다.

 바로 이럴 때 원칙만 따지는 사람은 열만 받거나 포기해 버리는 것이고 능력 있는 사람은 비자금을 동원, 매끄럽고 쉽게 처리하는 것이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를 못 믿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는 산소 같은 누군가가 존재하기를 바라고 그런 이들을 사랑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도 더욱 밝고 투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바로 이런 대상이 주는 실망. 이것은 세상을 냉소주의에 빠뜨리게 하는 가장 큰 독성을 지닌 혐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차대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경험한 유태인 정신의학자라는 특별한 이가 쓴 회고록이자 로고테라피라는 정신 분석/치료법의 핵심을 요약한 내용. 전 세계적으로 250만 부 정도가 판매된 스테디 셀러이다.

 

 내용은 당연히 너무 좋다. 수용소의 회고록이라는 부분은 여태 내가 본 책들은(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 모두 재미었다.) 다 재밋었다. 이 책은 수용소의 에피소드를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연결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던 듯 싶다. 

 

 어려운 개념들은 바로 비유적인 에피소드와 연결해서 이해하기도 쉽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읽으면 좋을 것 같다.

 

------------------------------------------------

 

p10.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얘기하건대 언젠가는!-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p19.

 

 니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p57. 죽음보다 더한 모멸감

 

 인간이 더 이상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정서와 감정의 둔화를 의미하는 무감각은 수용자들이 보이는 정서적 반응의 두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징후이다. 수감자들은 마침내 매일같이 반복되는 구타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 이런 무감각을 수단으로 사람들은 곧 자기 주위에 꼭 필요한 보호막을 쌓기에 이른다.

 구타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일어났으며, 어떤 때는 전혀 이유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들겠다. 빵이 작업장까지 배달되면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야 했다. 그런데 한번은 내 뒤에 섰던 사람이 그 줄에서 약간 밖으로 빠져 나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렇게 줄이 삐뚤어졌다는 사실이 감시병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나는 내 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고, 감시병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내 머리통을 두 번이나 강타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나는 몽둥이를 휘두른 감시병이 내 옆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 이것은 어른들이나 벌을 받는 아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인데 - 정작 참기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다.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정말로 이상한 것은 흔적도 남지 않은 단 한 방의 구타가 어떤 상황에서는 그보다 심한 흔적을 남긴 구타보다 더 상처를 준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나는 눈보라를 맞으며 철로 위에 서 있었다. 험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리 반에 있는 사람들은 일을 계속해야 했다. 나는 자갈을 가지고 철로를 고치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추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딱 한순간 숨을 돌리기 위해 일하던 손을 멈추고 삽에 몸을 기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운 나쁘게도 감시병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은 무례한 행동이나 주먹질이 아니었다. 넝마 같은 옷에 초라한 몰골을 하고 서 있는 나를 인간의 형체를 한 물건쯤으로 여겼는지 말은 물론 욕지거리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욕을 하는 대신 그는 장난하듯이 돌맹이 한 개를 집어 나에게 던졌다. 그 행동이 나에게는 맹수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고, 가축들을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자기와는 닮은 점이 전혀 없어서 벌을 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짐승을 향해 하는 행동같이 느껴졌다.

 구타를 당할 때 가장 괴로운 것은 그들이 주는 모멸감이었다. 한번은 얼어 붙은 철로 위로 길고 무거운 도리를 옮겨야 할 때가 있었다. 만약 한 사람이 미끄러지면 그 자신은 물론 함께 도리를 옮기던 모든 사람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내 오랜 친구 중에 엉덩이가 선천적으로 기형인 장애인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선별 과정에서 그와 같은 장애인은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난히 무거운 도리를 들고 철로 위에서 절뚝거렸다. 자기가 넘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넘어뜨릴 것 같았다. 마침 그때 나는 도리를 옮기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그를 도와 주기 위해 달려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등으로 한 방이 날라왔다. 감시병이 나에게 심하게 욕을 하면서 내 자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나를 때린 그 감시병은 불과 몇 분 전에 우리를 향해 멸시하는 투로 너희 같은 '돼지들'에게는 동지애가 전혀 없다고 욕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p75.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 안에서, 그리고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는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은 가능했다.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그런 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을 겪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우리는 작업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구령 소리가 들렸다.

 "차렷! 앞으로 갓! 왼발 둘, 셋, 넷. 왼발 둘, 셋, 넷. 첫째 줄 주의! 왼발 그리고 왼발 그리고 오른발, 왼발, 모자 벗어!"

 지금도 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소리다.

 '모자 벗어!'라는 구령이 떨어질 때, 우리는 마침 수용소 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탐조등이 우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민첩하게 행진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차 없이 발길질이 가해졌다. 춥다고 허락 없이 모자를 귀까지 눌러 쓴 사람은 더 큰 벌을 받았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큰 돌멩이를 넘고 커다란 웅덩이에 빠지면서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비틀거리며 걸었다. 호송하던 감시병들은 계속 고함을 지르면서 총의 개머리판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다리가 아픈 사람은 옆 사람의 팔에 의지해서 걸었다. 한 마디도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 때문에 누구든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높이 세운 옷깃으로 입을 감싸고 있던 옆의 남자가 이렇게 속삭였다.

 "만약 마누라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요? 제발이지 마누라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고."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가고, 아침을 알리는 연분홍빛이 짙은 먹구름 뒤에서 서서히 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은 온통 아내 모습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머리 속으로 그렸다. 그녀가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용기를 주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실제든 아니든 그때 그녀의 모습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났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과 설파하는 숭고한 비미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p78.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 주오.

 

 앞에 있던 남자가 비틀거리자 뒤에 오던 사람들이 그 위에 넘어졌다. 감시병이 달려와서 가지고 있던 채찍을 휘둘렀다. 그래서 내 생각이 잠시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 후 곧 내 영혼은 수감자 신세에서 또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찾아 되돌아갔다.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내가 물으면 그녀가 대답했다. 다음에는 반대로 그녀가 묻고 내가 대답했다.

 "정지."

 드디어 작업장에 도착했다. 모두들 더 좋은 연장을 차지하기 위해 캄캄한 광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곡괭이와 삽을 들고 나왔다.

 "이 새끼들. 빨리 빨리 움직이지 못해?"

 곧 우리는 전날 일했던 배수구로 위치를 찾아서 갔다. 얼어붙은 땅이 곡괭이 끝에서 깨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불꽃이 일어났다. 모두들 말이 없었고, 머리는 마비되어 있었다.

 그때도 내 마음은 여전히 아내의 영상에 매달려 있었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나는 아내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때서야 내가 깨달은 것이었는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나는 아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랐다.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수용소에는 오는 편지도 가는 편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내 사랑의 굳건함, 내 생각, 사랑하는 사람의 영상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때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에 내 자신을 바쳤을 것이다. 나와 그녀가 나누는 정신적 대화 역시 아주 생생하고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 주오.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라오."

 

p82.

 

 그날도 우리는 참호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잿빛 새벽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 위에 있는 하늘도 잿빛이었고, 창백한 새벽빛에 반사되는 눈도 잿빛이었다. 동료가 걸치고 있는 넝마 같은 옷도 잿빛이었고, 얼굴도 잿빛이었다. 나는 또 다시 아내와 침묵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당시 나는 내 고통에 대한, 그리고 내가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곧 닥쳐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으며,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수평선 저 멀리에 그림처럼 서 있던 농가에 불이 들어왔다. 바바리아의 동트는 새벽의 초라한 잿빛을 뚫고 불이 켜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Et lux in tenebris lucet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얼어 붙은 땅을 파면서 서 있었다. 감시병이 지나가면서 욕을 했고, 나는 또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점점 더 그녀가 곁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으며, 그녀는 정말 내 곁에 있었다. 그녀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손을 뻗쳐서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녀가 정말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가 파놓은 흙더미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p88.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개인 감상  : 이는 행복, 사랑의 기쁨같은 유쾌한 감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하지만 긍정적 감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 것과 달리 부정적 감정은 마음에 달라 붙어 오랜동안 괴롭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기쁨보다는 고통이라는 감정이 인간의 정신에 끼치는 영향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p102. 

 

 수용소에 살아남은 사람들, 여전히 일할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로 감상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전적으로 감시병들의 기분 - 운명의 노리개라고나 할까? - 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 자신을 환경이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p104.

 

 다시 두번째로 환자 호송 계획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때는 이 계획이 환자들의 남은 노동력 - 비록 14일 동안이지만 - 을 쥐어짜려는 것인지 아니면 가스실로 데려가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요양소로 가는 것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날 저녁 10시 15분 전에 평소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주치의가 다가오더니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직실에 얘기를 잘 해두었고. 당신을 리스트에서 빼도록 했으니 10시까지 당직실로 가보시오."

 나는 그에게 이것이 내 길이 아니라고, 나는 운명이 정해 놓은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나는 내 친구들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이 연민의 빛을 띠었다. 마치 내 운명을 알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그는 말없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것은 삶을 위한 악수가 아니라, 삶과 작별하는 악수였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막사로 돌아왔다. 막사에는 친한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정말로 그 사람들과 함께 가기를 원하나?"

 그가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네. 나는 갈 거야."

 그러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런 다음 할 일이 있었다. 유언을 하는 것이었다.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네가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 주게. 내가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 두번째로 내가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따는 것. 세번째로 내가 그녀와 함께 했던 그 짧은 결혼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 주게."

 

 오토.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살아있나?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네 아내를 다시 만났나? 그리고 기억하나? 자네가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자네에게 내 유언을 한마디 한마디 외우게 했던 것을.

 

(개인 감상 : 아아.. 너무 슬프다..)

 

p126.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우리는 언제 석방되는지를 몰랐다(내가 있던 수용소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무의미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형 기간은 불확실했으며, 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저명한 연구전문 심리학자는 강제수용소의 이런 삶을 '일시적인 삶' provisional existence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한마디 더 붙이자면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수용소 환경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다른 수용소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고, 어떤 수용소로 간 사람들은 한 사람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수용소로 들어가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의 불확실성은 결말이 났지만, 이번에는 결말에 대한 불확실성이 뒤를 잇는다. 이런 형태의 삶이 끝날 것인지 말 것인지, 끝난다면 과연 언제 끝날 것인지 미리 예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현상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실직자가 이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대비할 수도 없고, 목표를 세울 수도 없다. 실직한 광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보고서를 보면 그들이 아주 기이한 형태의 변형된 시간 감각 - 내면의 시간 -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실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감자들 역시 기인한 '시간 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자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수용소에서 내가 한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얘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한 적이 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이었던가!

 이와 관련해서는 예리한 심리학적 관찰이 돋보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토마스 만은 서로 비슷한 심리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 즉 폐결핵에 걸려 요양소에서 언제 나가게 될지 모르는 환자들을 등장시켜 인간의 영적인 발달단계를 얘기하고 있다. 그들도 똑같은 상태, 미래도 없고 삶의 목표도 없는 생존의 상태를 경험한 것이다.

 

 수용소 동료 중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역에서부터 수용소까지 길게 줄을 서서 행진해 들어왔는데, 그 행진이 마치 자기의 장례식 행렬같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삶은 전혀 미래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자기가 이미 죽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삶이 날아간 것 같은 이런 느낌은 다른 요인에 의해 더욱 심화된다. 갇혀 있어야 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사실 수감자들이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부분이다)과, 갇혀 있는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 그 요인이다. 철조망 밖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손이 닿을 수 없는 것 그래서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곳에 이루어지는 모든 정상적인 삶은 수감자들에게는 유령과 같은 것이었다. 만약 그가 바깥 세계를 볼 수 있다면 그에게는 그것이 마치 저 세상에서 온 사람이 바라보는 이승과 같이 비쳐졌을 것이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운 생황을 자신의 정신력을 시험하기 이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렇게 위대한 영적인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세상일에서의 실패와 죽음을 통해서도 이런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들은 평범한 환경에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낸다.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는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 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그런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들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p131.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 일으킨다.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병리적 상처를 정신요법이나 정신 위생학적 방법을 이용해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수감자들 중에 몇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스스로가 그런 목표를 찾아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sub specie aeternitatis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내가 실제로 경험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날 나는 거의 눈물을 흘릴 정도의 극심한 통증(찢어진 신발 때문에 발에 심한 종기가 생겼다)을 겪으며 긴 행렬에 끼여서 수용소에서 작업장까지 몇 킬로미터를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날은 추웠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우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나는 우리의 누추한 생활과 연관된 끊임없이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게 될까? 만약 특별배급으로 소시지가 나온다면 그것을 빵을 바꾸어 먹을까? 2주일 전에 상으로 받았던 담배 한 개비를 수프 한 그릇과 바꾸어 먹을까? 한쪽 신발끈이 끊어졌는데 끈을 대신할 철사를 어디서 구하지? 시간 안에 작업장에 가서 평소에 내가 일하던 작업반에 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고 다른 작업반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고약한 감독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매일 긴 행렬에 끼어서 작업장에 가지 않고 대신 수용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 주는 카포는 없을까? 그 카포와 잘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다가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내 앞에는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햇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나 자신과 문제는 내가 주도하는 흥미진진한 정신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미래 - 그 자신의 미래 -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행태를 띠고 일어난다.

 수용소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이런 징후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별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우리 친구때문에 우리는 모두 이 순간을 두려워했다. 대체로 이런 현상은 아침에 수감자가 옷 입고 세수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연병장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간청과 주먹질, 위협도 효과가 없다. 그냥 누워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이런 위기가 병 때문에 생긴 것일 경우 그는 병실로 옮겨지는 것을 거부하고, 그밖에 도움이 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한다.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그렇게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이상 간섭 받지 않고.

 

p134.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언젠가 나는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과 이런 위험한 자포자기가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아주 극적인 사례를 보았다.

 F. 우리 구역의 고참 관리인인 그는 그 전에는 꽤 유명한 작곡가이자 작사가였다. 그가 어느 날 나에게 고백했다.

 "의사 선생.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꿈에서 어떤 목소리가 소원을 말하라는 거예요.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말하래요. 그러면 질문에 모두 대답을 해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무얼 물어보았는지 아십니까? 나를 위해서 이 전쟁이 언제 끝날 것이냐고 물어보았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의사 양반? 나를 위해서 말이요. 저는 언제 우리가, 우리 수용소가 해방될 것인기, 우리의 고통이 언제 끝날 것인지 알고 싶었어요."

 

 "언제 그런 꿈을 꾸었소?"

 내가 물었다.

 "1945년 2월에요."

 그가 대답했다. 그때는 3월이 막 시작되었을 때였다.

 "그래, 꿈 속의 목소리가 뭐라고 대답합디까?"

 그가 내 귀에다 나직하게 속삭였다.

 "3월 30일래요."

 F는 희망에 차 잇었고 꿈 속의 목소리가 하는 말이 맞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의 날이 임박했을 때 우리 수용소로 들어온 전쟁 뉴스를 들어 보면 그 약속한 날에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3월 29일. F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고 열이 아주 높게 올랐다. 3월 30일, 그의 예언자가 그에게 말해 주었던 것처럼 그에게서 전쟁과 고통이 떠나갔다. 헛소리를 하다가 그만 의식을 잃은 것이다. 3월 31일에 그는 죽었다. 사망의 직접적인 요인은 발진티푸스였다.

 

 인간의 정신상태 - 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 - 와 육체의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런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내 친구의 죽음을 초래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기대햇던 해방의 날이 오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몹시 절망했으며, 잠재해 있던 발진티푸스 균에 대항하던 그의 저항력이 갑자기 떨어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거의 믿음과 살고자 하는 의지는 마비되었고, 그의 몸은 병마의 희생양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꿈 속의 목소리가 했던 말이 맞기는 맞았던 것이다.

 내가 이 경우를 통해 관찰하고 도출해낸 결론은 후에 수용소 주치의로부터 들었던 말과도 일치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주치의는 이 기간 동안 사망률이 증가한 원인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조건이나 식량사정의 악화, 기후의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p137. 살아야 할 이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수용소에서 사람이 정신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이 말은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심리치료와 정신위생학적 치료를 하려는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말이다. 수감자들을 치료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 - 목표 - 를 얘기해 주어야 한다. 슬프도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여! 그런 사람은 곧 파멸했다. 모든 충고와 격려를 거부하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어야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따.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살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 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 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p139.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우리 같은 수감자들에게 이런 생각들은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사색적인 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이 생각들은 우리가 살아서 그곳을 나올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때에도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었다. 오래전에 우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단계를 통과했었다. 그 순수한 물음은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창조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 것으로 삶을 이해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삶과 죽음, 고통 받는 것과 죽어가는 것까지를 폭넓게 감싸 안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우리는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시하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낸 낙관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으로 그것이 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 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믈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면서 자기가 운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번은 부종 때문에 고생하던 동료에게 어떻게 나았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실컷 울어서 조직 밖으로 몰아냈지."

 

p142. 집단 치료의 경험

 

 당연한 일이지만 수용소 안에서는 집단을 대상으로 정신치료를 할 기회는 제한되어 있엇다. 말로 하는 치료보다는 오히려 올바른 모범을 보여 주는 편이 더 효과적이었다. 공정하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보아 수용소 편이 아닌 것이 분명한 한 고참 관리인은 자기 담당구역 사람들에게 지대한 도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무수히 많이 가지고 있엇다.

 행동을 통해 즉각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대개는 말보다 훨씬 효과적인 법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말이 더 효과적인 경우도 있다. 어떤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에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이 폭이 넓어졌을 경우이다. 나는 어떤 외부적인 조건으로 이런 정신적 수용력이 넓어졌을 때, 우연히 막사에 있던 모든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정신요법을 시도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아침 점호 시간에 반란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가 수없이 나열되었다. 만약 지금부터 이런 행동을 하면 그 자리에서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했다. 그 범죄행위 중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낡은 담요에서 조각(무릎을 보호하기 위해)을 잘라내는 행위와 '좀도둑질'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전에 반쯤 굶어 죽게 된 한 수감자가 감자 창고를 부수고 들어가 거기에서 감자 몇 파운드를 훔친 적이 있었다. 절도가 잇었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고, 수감자 중 몇 명은 그 '도둑'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수용소 당국자들이 이 사실을 알고 죄를 진 사람이 누군지 불지 않으면 수용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루 동안 굶기겠다고 했다. 2,500명의 사람들은 물론 굶는 쪽을 선택했다.

 

 하루 종일 꼬박 굶어야 했던 그날 저녁, 우리는 막사에 누워 있었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몇 마디 말이 오갔을 뿐 이고 한마디 말조차도 신경에 거슬렷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불이 나가버렸다. 기분이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 고참 관리인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이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를 입밖에 냈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병이나 자살로 죽어간 수많은 동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죽음의 진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희생자들이 이런 최악의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어떤 방법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했다.

 

 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정신의학에 대해 설명하거나 설교를 하고 싶은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동료들을 상대로 정신과적 치료를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춥고, 배고프고, 짜증스럽고, 피곤했다. 하지만 나는 노력해야 했다. 좀처럼 생기지 않는 이런 기회를 활용해야만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절실한 때였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의 위로의 말부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여섯번째 겨울을 맞지만 지금 유럽의 정세를 살펴보면 우리 처지가 그렇게 최악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 - 이것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공정하게 얘기해서 미래가 가망 없어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얼마나 적은지에 대해서도 모두 생각을 같이 했다. 우리 수용소에는 아직 발진티푸스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살아남을 확률을 20명 중의 한 명으로 점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을 잃거나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얘기를 그들에게 들려 주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 바로 한 시간 후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며칠 안에 전쟁 상황에 엄청난 반전이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적어도 각 개인에게는 얼마나 엄청난 기회가, 그것도 아주 갑자기 찾아오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래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 미래에 드리워져 있는 장막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또한 나는 과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과거에 있었던 그 모든 즐거운 일들과, 그 빛이 현재의 어둠 속에서도 얼마나 밝게 빛나고 있는지를. 이때 나는 또 시를 인용했다. 내 스스로 설교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경험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확실한 존재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런 다음 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내 동료(꼼짝도 않고 누워 있다가 가끔 한숨을 쉬던)를 향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어둠 속에서 내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불쌍한 신의 피조물들에게 우리가 처한 가혹한 현실을 과감하게 직면하자고 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 - 친구나 아내, 산 사람, 혹은 죽은 사람, 혹은 하느님 - 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로 죽어야 하는지를 알기를 바란다고.

 

 마지막으로 나는 우리의 희생에 대해서 얘기했다. 희생은 어떤 경우에나 다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희생은 그 특성상 정상적인 생활 속에서는, 물질적인 성공이 중요한 세계에서는 틀림없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질 희생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희생에는 의미가 있었다. 나는 진솔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 중에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온 한 동료가 하늘에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을 들었다.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런 종말로부터 구원받도록 해달라는 기도였다. 이런 사람에게 고난과 죽음은 의미 있는 것이다. 그의 희생은 아주 심오한 의미를 지닌 희생이다. 그는 헛되게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바로 그곳, 그 막사에서, 실제로 가망이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들의 삶이 갖고 있는 충만한 의미를 찾아보기 위해 이 말을 했다. 내 말은 효과가 있었다. 불이 다시 들어와 주위가 밝아지자 누추한 몰골을 한 동료들이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나에게 다가와서 감사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당시 나는 고통 받고 있는 내 동료들의 마음 속에 그렇게 대단한 정신력을 심어 주지 못했던 것 같다. 분명히 나에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을 텐데 내가 그것을 그냥 놓쳐버리고 만 것이 틀림없다.

 

p148. 수용소의 여러 가지 인간 군상.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으며, 고매한 인격을 가진 '부류'와 미천한 인격을 가진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들은 사회의 모든 집단에 들어가 있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악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순전히 한 부류'의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집단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 감시병 중에도 가끔씩은 좋은 사람이 끼어 있을 수도 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영혼을 파헤치고, 그 영혼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성에서도 선과 악의 혼합이라는 인간 본연의 특성이 발견되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은 아주 심오한 곳까지 이르러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수용소라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p156.

 

 자유를 찾은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수용소 근처에 있는 시장으로 가기 위해 꽃들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 시골길을 걸었다. 종달새가 하늘로 날아올랐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주변 몇 마일 안에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대지와 하늘, 종달새의 환호 그리고 자유로운 공간만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멈춰 서서 주변을 돌아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그런 다음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자신은 물론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단 한 가지만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저는 제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그때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말을 되풀이했는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잇었다. 바로 그 날, 바로 그 순간부터 새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는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p156. 해방 이후 나타난 현상들.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며칠 동안 견뎌야 했던 극도의 정신적 긴장(예를 들어 게슈타포의 혹독한 심문 같은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이 아무런 장애 없이 순탄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정신적 치료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게 심한 정신적 압박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받았던 사람에게는 자유를 얻은 후에도 그 전과 똑같은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히 그런 정신적 억압상태에서 갑자기 벗어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위험은 정신위생학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잠수병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물 속의 잠함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엄청난 정신적 압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이런 심리적 단계에서 원색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야만성의 영향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 자유를 마치 특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제는 억압을 받는 쪽이 아니라 억압을 하는 쪽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이제 폭력과 불의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겪었던 끔찍한 경험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이런 일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에서 자주 발생한다.

 

 어느 날 나는 다른 친구와 함께 들을 가로질러 수용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앞에 농작물이 자라고 있는 밭이 나타났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친구가 내 팔을 잡고 나를 밭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는 더듬거리면서 어린 농작물을 짓밟지 말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짜증을 냈다. 화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런 말 하지 말게. 그만큼 빼앗았으면 충분한 거 아니야? 내 아내와 아이는 가스실에서 죽었어. 그것으로 더 이상 할 말 없는 거 아니야? 그런데도 자네는 내가 귀리 몇 포기 밟는다고 뭐라고 하다니!"

 

 이런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평범한 진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이런 진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귀리 수천 포기를 잃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한 친구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오른손 주먹을 내 코 밑에 갖다대며 이렇게 소리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내가 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면 내 손을 잘라버리고 말테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말을 한 친구가 절대로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수용소에서나, 그 후에도 나의 가장 친한 동료였다.

 

p174. 정신의 역동성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기보다는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라는 니체의 말에는 이런 예지가 담겨져 있다. 이 말에서 정신치료에도 유용한 어떤 좌우명을 찾을 수 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수감자 중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쓴 또 다른 사람들도, 그리고 일본과 북한, 북 베트남의 포로수용소에서 실시한 정신치료 연구조사도 똑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아우슈비츠에 처음 잡혀 갔을 때 나는 출판을 위해 집필 중이었던 원고를 압수당했다.

 이 이야기에서도 알 수 이는 것처럼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well-being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그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그 동안 숨어 있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homeostasis',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나는 정신건강에 대해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더 효력이 있다. 낡은 아치를 튼튼하게 할 때, 건축가는 오히려 아치에 얹히는 하중을 늘린다. 그래야만 아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들이 서로 잘 밀착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자의 정신건강을 증진시키려는 심리요법가는 삶의 의미를 갖도록 지도하는 과정에서 환자의 마음에 어느 정도 긴장을 유도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하는 것이 환자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얘기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요즘 수많은 환자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생각, 즉 자신의 삶 전체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가져다 조는 악영향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환자들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들은 내적인 공허, 자신 안의 허무가 늘 따라다니는 것을 느낀다. 앞에서 내가 '실존적 공허'라고 얘기했던 바로 그런 상황에 갇혀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p177. 실존적 공허

 

 실존적 공허는 20세기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현상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현상으로 인간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된 후에 겪어야 했던 두 가지 손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의 엯하가 시작될 때, 인간은 동물적인 본능의 일면을 잃게 되었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그런 동물적 본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낙원에서나 얻을 수 있는 그런 안전함은 이제 영원히 인간에게 것이 되었으며,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근래에 들어 인간은 또 다른 상실감을 맛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동안 자기 행동을 지탱해 주던 전통이 빠른 속도로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 주는 본능도 없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전통도 없다. 어떤 때는 그 자신조차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전체주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최근에 조사를 해보았더니 내가 가르치고 있는 유럽 학생들 중 25퍼센트가 크든 작든 실존적 공허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학생들은 25퍼센트가 아니라 무려 60퍼센트가 이런 공허감을 느끼고 있었다.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고민과 권태의 양 극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실제로 요즘은 고민보다는 권태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동화 과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여가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애석한 것은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 얻게 된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 데에 있다.

 

 '일요병'을 한번 예로 들어 보자. 일요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한 주일을 보내고 내면의 공허감이 밀려올 때,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이 겪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자살의 상당수가 바로 이런 실존적 공허 때문에 일어난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우울증과 공격성, 중독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실존적 공허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한다. 연금생활자나 나이든 노인들이 느끼는 위기감 역시 이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실존적 공허는 가면을 쓰거나 위장을 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권력욕으로 그 좌절을 대신 보상받으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욕인 돈에 대한 욕구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실존적 과절을 겪은 사람들이 종종 성적 탐민ㄱ에서 그 보상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정신과 환자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특정한 유형의 피드백 기재feedback mechanism와 악순환의 고리vicious circle formation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징후들이 공허한 상태에 있는 실존에 침입해 들어와서는 계속 번성해나가는 것을 수없이 볼 수 있다. 이런 환자의 경우, 이것은 누제닉 노이로제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환자에 대한 심리요법에 로고테라피를 보완하지 않으면 환자가 자기 상황을 극복하도록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실존적 공허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면, 더 이상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코테라피는 앞에서 얘기한 노이로제noogenic뿐만 아니라 심인성 노이로제psychogenic은 물론 신체성somatogenic(의사pseudo) 신경질환에도 두루 적용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모든 치료법은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로고테라피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는 매그더 B. 아들러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p181.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다.

 

p183.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psyche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말은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취해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의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첫번째를 완수하고 달성하는 방법은 아주 분명하다. 하지만 두번째와 세번째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사람의 의미를 찾아내는 두번째 방법은 어떤 것 -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 - 을 체험하는 것,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거나(마지막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p184. 사랑의 의미.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사랑으로 인해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함으로써 이런 잠재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사랑을 소위 승화라는 의미에서의 성적 충동이나 본능의 단순한 부수현상(일차적 현상의 결과로 발생하는 현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사랑은 섹스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근원적인 하나의 현상이다. 섹스는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섹스는 그 안에 사랑이 담기는 순간, 아니 사랑이 담겨 있을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성화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랑을 섹스의 부산물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섹스를 사랑이라 불리는 궁극적인 합일의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번째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시련을 통해서이다.

 

p186. 시련의 의미.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에 - 수술이 불가능한 암 같은 불치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자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명백한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한번은 나이 지긋한 개업의 한 사람이 우울증 때문에 상담을 받으러 왔다. 그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다. 내가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을 제와하고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자제했다.

 

 "선생님. 만약 선생께서 먼저 죽고 아내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가 말했다.

 "오 세상에! 아내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것 보세요. 선생님. 부인께서는 그런 고통을 면하신 겁니다. 부인에게 그런 고통을 면하게 해주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그 대가로 지금 선생께서 살아남아 부인을 애도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조용히 일어서서 내게 악수를 청한 후 진료실을 나갔다. 어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 - 희생의 의미 같은 - 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정상적인 의미의 치료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의 절망은 병이 아니었으며, 둘째 내가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고, 그의 아내를 살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바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최소한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p199.

 

 광장공포증과 같은 신경성 노이로제는 철학적 해법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로고테라피에서는 이런 경우도 함께 치료할 수 있는 특수한 기법을 개발했다. 이 기법이 사용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위해서 신경질환 환자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증상인 소위 예기 불안anticipatory anxiety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이 증상의 특징은 환자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면 바로 그 증상이 정말로 나타난다는 데에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커다란 방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면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실제로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훨씬 더 얼굴이 빨개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원은 생각의 아버지'라는 말을 '공포는 사건의 어머니'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공포 때문에 진짜로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꼭 하고 싶다는 강한 의욕이 그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과도한 의도, 즉 과잉욕구hyper-intention는 성적인 문제로 고생하는 환자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남자가 거의 정력을 과시하려고 하면 할수록, 여자가 오르가즘에 이르는 능력을 보여 주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떨어지게 된다. 쾌락은 어떤 행위의 부산물로, 파생물로서 얻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얻어져야만 한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정도가 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망가진다.

 

 앞에서 얘기한 과잉욕구 외에 지나친 주의집중, 즉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과잉투사hyper-reflection가 발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병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임상보고를 보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한 젊은 여성이 나를 찾아와 불감증을 호소했다. 병력을 살펴보니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성적인 학대를 받은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불감증을 느끼는 것은 충격적인 경험 그 자체 때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환자가 그 동안 정신분석에 관한 책을 읽고 자신의 충격적인 경험이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 살아왔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런 예기불안은 자신의 여성다움을 확인하고 싶다는 과도한 의욕과 함께 상대편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과도하게 주의를 집중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은 그녀가 성적인 쾌락의 절정에 오를 수 없었던 충분한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상대편에게 대가없이 헌신하고 자기 몸을 맡김으로써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오르가즘을 느껴야 하는데, 오르가즘 자체가 의욕과 주의집중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 동안 로고테라피 치료를 받은 후, 오르가즘을 체험하는 능력에 집중되었던 환자의 과잉의도와 주의집중은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역투사'dereflected의 상태가 되었다. 그녀의 주의가 적절한 대상, 즉 그녀의 파트너에게 맞추어지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오르가즘을 느끼데 되었다.

 

p210. 

 

 인간이 유일한 존재이고, 인간의 자유 또한 제한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조건에 대해 자기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경학과 정신의학 두 분야를 전공한 교수로서 나는 인간이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환경에 어느 정도까지 굴복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강제수용소를 네 곳이나 전전하다 살아 돌아온 사람으로서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감하게 저항하고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도 사실입니다.

 

p213.

 

 자유는 이야기의 부분이고, 절반의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책임이라는 적극적인 측면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극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책임이 전제되지 않는 자유는 방종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내가 동부 해안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에 보완이 되도록 서부 해안에 책임의 여신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214. 인간의 얼굴을 한 정신의학

 

 아주 오랜 기간 동안 - 실제로 반세기 동안 - 정신의학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그저 하나의 수단으로만 보았고, 그 결과 정신질환 치룔르 하나의 테크닉으로만 간주해 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런 종류의 꿈은 충분히 꾸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수평선 너머로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심리학의 얼굴을 한 의술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정신의학이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역할을 그저 하나의 기능인으로 생각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는 환자를 병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기계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여러 개의 사물 속에 섞여 있는 또 다른 사물이 아니다. 사물들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 세대는 실체를 경험한 세대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p221.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p226.

 

 집단 신경 증후군의 두번째 요소인 공격성과 관련해서는 캐롤린 우드 셰리프가 주관했던 한 실험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그녀는 인위적인 방법을 써서 보이스카우트 그룹들이 서로 공격성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런 다음 관찰해 보니 소년들이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행동할 때에만 공격성이 누그러진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공동의 목표란 자기들이 먹을 음식이 실려 있는 차를 진흙구덩이에서 꺼내는 일 같은 것을 말한다. 공동의 목표가 생기자마자 그들은 자신들이 달성해야 할 목표의 도전을 받았고, 그래서 서로 협동하게 되었다.

 

p229.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방법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샬롯 뷜러가 말했듯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은 사람들의 삶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며 공부하는 것뿐이다."

 

p233.

 

 하지만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236.

 

 한번은 한 미국 여자로부터 이런 비난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어떻게 아직도 책을 독일어로 쓸 수가 있지요? 그건 아돌프 히틀러가 쓰던 말 아닙니까?

 이 말에 응수하면서 나는 그녀에게 자기 집 부엌에 칼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녀가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당황스럽고 놀랍다는 제스처를 쓰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살인자들이 칼을 가지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찌르고 죽였는데 어떻게 아직도 칼을 사용할 수가 있지요?"

 그 말을 듣고 그녀는 더 이상 내가 독일어로 책을 쓰는 것은 비난하지 않았다.

 

p237.

 

 삶의 순간들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시간들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으며, 지나간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일회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각 순간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분명 그렇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권한다.

 

 "두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p238.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런 유용성은 그 사람이 사회에 이로운 존재인가 아닌가 아는 기능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정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람이 이루어낸 성과를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 특히 젊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요즘 사회의 특징이다.

 실제로 이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가치는 무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차이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만약에 이런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가치가 오로지 현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히틀러의 계획에 따라 자행된 안락사, 즉 나이가 들어서, 불치의 병에 걸려서,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해서, 혹은 고통스러운 어떤 장애 때문에 사회적으로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사람들을 죽였던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오로지 개인적인 모순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p241.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해보자. 배고픔이라는 절박한 압박이 점점 커짐에 따라 각 개인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그 대신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나타나게 된다."

 

 감사하게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강제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을 몰랐다. 그의 환자는 빅토리아 풍으로 호화롭게 디자인된 침상에 누워 있었지 아우슈비츠의 오물더미 위에 누우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말과는 달리 강제수용소에서 '개인적인 차이'가 모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차이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그런 것을 경험한 후, 우리는 더 이상 '성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맥시밀리언 콜베 신부를 생각한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결국 석탄산 주사를 맞고 살해되었다. 그리고 1983년에 성자로 추대되었다.

 여러분은 원칙에 어긋나는 예외적인 경우만 들었다고 나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스피노자 <윤리학>의 마지막 문장이다.

 

 여러분은 우리가 굳이 '성자'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저 '훌륭한'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소수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소수의 반열에 합류하려는 도전의지를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아주 좋지 않은 상태에 있고, 우리 각자가 최선을 다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더욱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경계심을 갖자 두 가지 측면에서 경계심을.

 아우슈비츠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히로미사 이후로 우리는 무엇이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다.

 

川上未映子

가와카미 미에코(사진은 아마도 30대 정도의 모습일 듯. 꽤나 미인이다. 1976년생, 일본의 가수, 배우, 작가, 가수로 활동을 시작, 노래로는 지명도가 거의 없었지만 2008년 발표한 단편소설 젖과 알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이 알려진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터뷰한 대담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의 출간과 함께한 인터뷰와, 기사단장 죽이기의 출간과 함께한 인터뷰 로 이루어져 있다.

 

하루키의 작법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하루키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마지막에 인터뷰 후에 소감으로서 에필로그로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이 직접 써놓은 글을 봐서도 알 수 있지만, 하루키에게 상당한 깊이에 이르기까지 충실한 대답을 하도록 유도한 인터뷰어로서의 가와카미 에미코 작가의 능력도 대단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

p20. 캐비닛의 존재(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나오는 이야기로 하루키는 자기의 머릿속에는 캐비닛과 같이 소설을 쓸 때 꺼내 쓰는 저장소 같은게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책에서도 언급한 캐비닛 이야기가 이미지로도 멋집니다. 무라카미 씨 안에는 많은 캐비닛이 있다고요.

 무라카미 : 그렇죠. 제 안에는 커다란 캐비닛이 있고 서랍이 잔뜩 달려 있어요.

-그와 관련해 인용한 조이스의 '상상력이란 기억이다'라는 말도 흥미롭습니다. 의식한 것과 의식하지 않은 것 모두 한 덩어리씩 차곡차곡 캐비닛에 들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글을 쓰는 사람이건 쓰지 않는 사람이건 알고 보면 모두 캐비닛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죠.

 무라카미 : 다들 가지고 있죠, 제법 많이.

-누구나가 각자의 캐비닛을 가지고 있고, 그 안을 채워간다. 중요한 건 그것들이 필요할 때 어디 들었는지 즉각 알아내고 입체적으로 조립하는 일이다... 그건 결국 캐비닛 주인의 역량에 달렸을까요?

 무라카미 : 그렇죠. 소설을 쓰면서 필요한 때 필요한 기억의 서랍이 알아서 탁 열려줘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서랍이 아무리 많아도... 소설을 쓰다 말고 일일이 열어보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아, 저기 있다, 하고 그때 그때 서랍들이 자동으로 속속 열려주지 않으면 실제로는 쓸모가 없어요.

-자동으로 열린다고 하셨는데, 그건 훈련이나 노력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 부분일까요?

 무라카미 : 그렇다기보다 쓰는 중에 점점 요령을 터득해가는 거죠. 전업작가로 살다보면 항상 그런 것을 자연히 의식하고, 어디에 뭐가 들었는지 감으로 알게 됩니다. 이게 중요해요, 경험을 쌓고, 여러 기억을 효과적으로, 거의 자동으로 즉각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하죠.

-뒤집어 말하면, 조립하고 입체화하는 요령이 패턴화될 위험성은 없을까요?

 무라카미 : 어디 있는지 대강 알게 되는 것과 함께, 생각지 못한 순간 생각지 못한 서랍이 탁 열리는 것도 중요해요. 그런 의외성이 없으면 좋은 소설이 되지 못하죠. 소설 쓰기란 이른바 '액시던트'의 연속이니까요. 소설 속에서는 많은 일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서는 이런 에피소드를 써두자 하는 식으로 가다보면 당연히 이야기가 패턴화되겠죠.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오는 것에 대응해서 재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이야기가 생명을 잃어버려요.

-자질이 잇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자기 내부에서 필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캐비닛 앞에 서서도 아무 느낌이 없는 사람이라면 소설 쓰기는 좀...

 무라카미 : 특별한 조각 하나를 던져넣는 것만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크고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할 때도 있죠. 때에 맞춰 그런 조각을 찾아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그것만은 특별한 기술이랄까, 타고나는 자질일지도 모르겠어요.

 

-무라카미 씨 작품의 특징 중 하나가 정교한 비유라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가요?

 무라카미 : 그렇죠. 예전에 한 평론가가 하루키는 아마 노트에다 온갖 비유를 써서 모아뒀을 거라고 했는데, 그렇진 않아요(웃음).

-저절로 튀어나오나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이.

 무라카미 : 나와요, 필요할 때, 제 발로 찾아오듯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 때는 비유를 쓰지 않아요. 억지로 만들려면 말에서 힘이 빠져버리니까.

-비유 역시 말의 조립이고, 서로 다른 것들끼리의 거리니까요. 곡예와도 같죠. 놀라움을 불러오지 않으면 비유가 되지 않고, 딱 들어맞아야 하고.

 무라카미 : 네. 뭐니뭐니해도 거리감이 중요하죠. 너무 붙어도 안되고 너무 떨어져도 안 되고. 그렇게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려워져요. 비논리적인 게 제일이죠.

-하나하나의 표현을 끄집어내기도 어려운데, 저절로 나온다는 건... 그런 조합도 캐비닛에 들어 있다는 거죠?

 무라마키 : 들어 있을 겁니다. 전 비교적 간단하게 비논리적이 되거든요.

비유에 관한 건 대개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배웠어요. 챈들러는 그야말로 비유의 천재니까요. 가끔 아니다 싶을 때도 있지만, 좋은 건 말도 안 되게 좋죠.

-챈들러에게 배운 게 비유의 구조라는 말씀인가요?

 무라카미 : 비유란 의미성을 부각하기 위한 낙차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낙차의 폭을 혼자 어느 정도 감각적으로 설정하고 나면, 여기에 이게 있으니 여기서부터 낙차를 역산하면 대략 이쯤이다하는 걸 눈대중으로 알 수 있어요. 역산하는 게 요령입니다. 여기서 쿵하고 적절한 낙차를 두면 독자는 눈이 확 뜨이겠지, 하는 식으로요. 독자를 졸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슬슬 깨워야겠다 싶을 때 적당한 비유를 가져오는 거죠. 문장에는 그런 서프라이즈가 필요해요.

 

... 아까 나온 비유 얘기처람, 가장 적당한 것이 자연스레 나와주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죠. 그러니 여러 가지를 불러들여야 해요. 글쓰기는 뭐가 됐든 그것을 이쪽으로 불러들이는 일이니까요. 무녀 같은 사람처럼, 집중하다보면 여러 가지가 제 몸에 와서 찰싹 달라붙습니다. 자석이 철가루를 모으듯이, 그 자력=집중력을 얼마나 지속하느냐가 관건이죠.

(이 얘기에서 떠오르는 장면은 1Q84에서 아오마메가 교주를 암살하러 신주쿠(아사쿠사?인가)의 호텔로 가서 교주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던 내용이 떠오른다. 이 부분에서 약간 주술적인 요소도 보인다고 할까? 그리고 이와 연관해서 하루키가 이런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유지하는 것이 달리기와 같은 운동을 통해서 이겠군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p33.

 무라카미 : 리얼리티는 특징적인 게 아니라 종합적인 겁니다. 그리고 속속 변해가죠. '이건 이러하다'라고 단순하게 고정해서 단언할 수 없어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서문-이라고 기억되는데-에 보면 하루키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빵가게의 리얼리티는 밀가루 반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빵에 있다." 이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p41.

 무라카미 : 네, 자아 레벨, 지상 의식 레벨에서는 대개 보이스의 호응이 얕아요. 하지만 일단 지하로 내려갔다가 다시 나오면 언뜻 똑같아 보여도 배음의 깊이가 다르죠. 한번 무의식층에 내려갔다 올라온 재료는 전과는 다른 것이 됩니다. 담갔다 건지지 않고 처음 상태 그대로 문장을 만들면 울림이 얕아요. 그러니 제가 이야기, 이야기, 하는 건 요컨대 재료를 담갔다가 건지는 작업입니다. 깊이 담글수록 나중에 밖으로 나오는 것이 달라지죠.

 

p47.문장의 리듬, 고쳐 쓰기

-무라카미 씨의 단편에는 기술적인 부분, 길이나 줄거리 같은 것 말고도 읽고 난 후 짙게 남는 것이 있고, 많은 작가가 그것을 재현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낍니다. 개인적으로 <코끼리의 소멸>이라는 단편을 읽었을 때 '나도 이런 걸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막연하게 말하는 '이런 것'(웃음)은 역시 무라카미 씨 문장의 리듬에서 오는 것 같아요. 뭐라고 이름 붙이거나 설명할 수 없고, '이런 것'이라고 감각적으로만 느끼는 무엇.

 무라카미 : 말하자면 소설의 보이스와 독자의 보이스가 호응하는거죠. 그러면 물론 리듬이 생기고, 울림이 생기고, 호응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보이스를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그건 결국 '고쳐 쓰기'에요. 처음에 일단 완성해놓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치고, 갈고닦고, 이대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손대는 과정에서 점점 나 자신의 리듬, 잘 울리는 보이스를 찾아가죠. 눈보다는 주로 귀를 사용하여 고칩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고쳐 쓰기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씀하셨는데요.

 무라카미 : 저의 고쳐 쓰기는, 제 입으로 말하기 뭣하지만, 꽤 대단하다고 봐요. 전 별로 자랑하는 편은 아닌데 이것만은 자랑해도 좋을 것 같군요.

-일단은 어찌됐건 끝까지 쓰는 편이죠? 돌아보지 않고, 어제 쓴 부분 정도는 다시 보지만 일단은 계속 써나간다. 거기가 어땠더라 하면서 거슬러 돌아가는 일도 별로 없고요.

 무라카미 : 나중에 고치면 되니까, 초고를 쓸 때는 다소 거칠더라도 어쨌건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것만 생각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순조롭게 올라타서 계속 전진하는 거죠. 눈앞에 나타난 것을 가장자리부터 붙들고 써나가요. 물론 그러기만 해서는 이야기 여기저기 모순이 생기지만 신경쓰지 않습니다. 나중에 조정하면 되니까. 중요한 건 자발성. 자발성만은 기술로 보충할 수 없어요.

-완성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엄청난 작업인데요.

 무라카미 : 네, 엄청난 작업이죠. 그래서 저는 장편소설을 전작으로만 씁니다. 잡지 연재는 절대 불가능해요. 혹시 한다면 이미 다 쓴 완성 원고를 나눠서 싣는 거죠. 그러다보니 다 쓸 때까지 몇 년씩 걸리기도 하고, 고독한 작업이니 말 그대로 기진맥진해요. 일단 잡지에 실어놓고 나중에 고치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그게 안 돼요. 한번 활자화되어 다른 이의 눈에 닿았던 글은 더이상 순수하게 자신만의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작업하기가 불가능해져요. 그러니 어쨌거나 마음에 들 때까지 시간을 들여 고쳐 쓰고, 그다음에 비로소 활자화합니다. <양을 쫓는 모험> 이후로 오랫동안 그렇게 해와서 다른 식으로는 쓸 수 없어요.

 

... 아무튼 어릴 때부터 음악을 열심히 들었고 재즈카페를 칠 년쯤 운영했으니, 악기 연주는 못해도 리듬이나 보이스, 즉흥연주 감각은 제법 몸속 깊숙이 배어 있습니다. 그러니 음악을 연주하는 감각으로 문장을 쓰는 면이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귀로 확인해가며 문장을 쓴다고 할까요. 그리고 '벽 뚫고 나가기'와는 좀 다르지만, 정말 훌륭한 연주는 어느 대목에선가 홀연히 저편으로 '뚫고 나가'곤 하죠. 재즈의 긴 애드리브든 클래식이든 어느 시점에서 일종의 천국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번쩍하는 순간이 있어요.

 그렇게 훌쩍 '저편으로 가버리는' 감각 없이는 진정으로 감동적인 음악이 되지 못해요. 소설도 완전히 똑같습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감각'이고 '체감'이지 논리적으로 계측할 수는 없죠. 음악의 경우도, 소설의 경우도.

 

p57. 

 무라카미 : 데뷔 당시 문단에서 제일 싫었던 게 일종의 테마주의 였어요. 이런 주제를 다뤘으니 이건 순문학이다, 깊이가 있다, 그런 말이 제일 싫었죠. 그래서 소재나 주제를 전부 걷어내고, 그럼에도 깊이 있고 무게 있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저뿐 아니라 다들 점점 그쪽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옮겨가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그래서 그 대신 뭐가 나왔느냐하면 아직 명확하지 않죠.

 

p60.

 무라카미 : 열차가 멈추고, 한숨 돌리고, 머리를 식히고, 그뒤에 다시 원고를 읽어보면 '아, 여기가 틀렸군' '이쪽이 모자라군' 하는 부분이 차츰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열차가 완전히 멈추기 전에 편집자에게 원고를 내주면 안되요.

-재워둬야 하는군요. 멈추기 전에 넘기면 안 되고요?

 무라카미 : 안 되죠(웃음). 머리가 뜨거운 상태에서는 나쁜 부분이 안 보여요. 좋은 부분만 보이지.

-뭐든지 제정신이 돌아온 뒤에.

 무라카미 : 그런데 현실적인 마감일이 있다면 어렵겠죠.

-제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 작가 입장에서는 말씀하신 방식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리고 그런 환경은 어느 정도 스스로 만드는 것일 테고요.

 무라카미 : 그렇죠. 레이먼드 카버를 만났을 때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특히 그의 집필방식에 역시 그렇구나 하고 공감했습니다. 그 사람도 무척 면밀하게 고쳐 쓰는 편이니까요.

 

p64.

 무라카미 :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고베 지진이 일어나고,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원전 문제가 생겼죠. 전 그런 시련을 통해 일본이 좀더 세련된 국가로 나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명백하게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그게 제가 위기감을 느낀 이유이고,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 후반에 우리가 싸웠던 건 결국 그 바탕에 이상주의가 있었기 때문이죠. 세상은 기본적으로 더 좋은 곳이 되어갈 것이고 그러기 위해 싸워야 한다. 대부분 그렇게 믿었어요. 뭐, 어찌 보면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지만 아무튼 그런 이상주의가 있었고 그것이 기능했죠. 그러다 그것이 통째로 무너져버리자 강한 환멸을 느꼈고. 하지만 이제는 거기서 한 바퀴 돌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최근에 들더군요. 언제까지고 똑같은 일만 할 수는 없고, 어떤 새로운 움직임에 들어서야 한다고.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니지만, 원칙적으로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에서 담담하게, 성실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p92.

 사람은 싸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죠. 안 그러면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뿐이니까요.

 

p102.

-가와이 하야오 씨는 <그림자의 현상학>에서 그 예를 들며 집합적 무의식이라고 표현하셨죠. 나치 독일의 소행은 집단에 발생한 그런 그림자를 외부에 떠넘긴 결과라고 하셨던 게 생각납니다.

 무라카미 : 2차대전 이후 일본도 그랬는데, 많은 독일인은 전쟁이 끝난 뒤 자신들을 피해자 입장에 놓으려고 했어요. 우리도 히틀러에게 속았고, 마음의 그림자를 빼앗겼고, 그 탓에 혹독하게 고생했다는 막연한 피해자 의식만 남죠. 일본에서도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일본인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의식이 강해서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인식은 자꾸 뒷전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세부적인 사실이 이렇다저렇다 하는 문제로 도피하죠. 그런 것도 '나쁜 이야기'가 낳은 일조의 , 뭐랄까. 후유증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들도 속은 거라는 말로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면이 있죠. 천황도 나쁘지 않다. 국민도 나쁘지 않다. 나쁜 건 군부다. 하는 식으로. 그게 집합적 무의식의 무서운 면입니다.

 

p106.

 무라카미 : 링컨이 말했듯이, 아주 많은 사람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도 있고 얼마 안 되는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속이기는 불가능해요. 그것이 이야기의 기본 원칙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히틀러도 결국은 십 년 남짓밖에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죠. 아사히라는 십 년도 가지 못했고. 대부분의 경우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를 준별하는 것은 시간의 역할입니다. 긴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준별 가능한 것도 있고요.

-하긴 개별적으로, 별로 오래가지 않을 듯한 '악'은 언제나 있으니까요. 사라지지는 않고 언제나 존재하는.

 무라카미 : 네, 인간은 기본적으로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런 것을 원하니까요. 좋은 일은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데 시간이 걸리거니와 귀찮고 따분한 경우가 많아요. 반면 '나쁜 이야기'는 대체로 단순하고 인간 심리의 표층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죠. 논리가 생략되었으니 이야기가 쉽게 받아들여져요. 거친 말을 쓴 헤이트스피치가 논리적이고 훌륭한 연설보다 귀에 잘 들어오는 법이고.

 

 얼마 전 집에 잇는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여러 연주자 버전으로 비교하며 들어봤어요. 총 열다섯 장 정도를요. 그랬더니 글렌 굴드의 연주가 다른 연주자들과 압도적으로 다르더군요. 그야말로 독보적인 경지랄까요. 어딘가 다른지 한참 생각하다가 겨우 깨달은 게, 보통 피아니스트는 오른손과 왼손의 콤비네이션을 생각하며 연주하잖아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다들 그럴 거에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글렌 굴드는 달라요. 오른손과 왼손이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겁니다. 오른손 왼손이 각자 자기 뜻에 따라 움직여요. 그런데 그 둘이 하나가 되면 누가 봐도 훌륭한 음악세계가 확립되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왼손은 왼손이 할 일만, 오른손은 오른속이 할 일만 생각한단 말이죠. 다른 피아니스트는 반드시, 직그히 자연스럽게 오른손과 왼손을 조화시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런 의식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굴드의 연주들을 비교해봐도 1955년 버전이 그 오른손과 왼손의 분리감이 훨씬 강하고요.

-그렇군요. 1981년 버전에서는 별로 느껴지지 않나요?

 무라카미 : 물론 죽기 전에 한 연주도 분리감이 엄청나지만, 예전 것은 각기 완전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합해보면 정확히 프로그래밍되어 있어요. 굴드가 프로그램하는 게 아니라 자연히 프로그래밍된 느낌이죠. 자연체라고 할까, 천연이라고 할까. 그 사람의 그런 분리감은 저도 감각적으로 잘 압니다.

 

p117.

 무라카미 : 음 있죠, 다시 한번 확인해두자면 제 문장은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비리얼리즘이죠. 그런 분리가 처음부터 떡하니 전제되어 있어요. 리얼리즘 문제를 철저하게 구사하며 비리얼리즘 이야기를 펼치는 게 제 목적이니까요. 전부터 자주 한 얘기인데, <노르웨이의 숲>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리얼리즘 문체로 리얼리즘 이야기를 쓰는 실험을 개인적으로 했어요. 그리고 '음, 됐다, 이제 쓸 수 있어'라는 확신이 들면서 그뒤의 작업들이 무척 수월해졌죠. 리얼리즘 문체로 리얼리즘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면, 게다가 베스트셀러가 됐다면 무서울 게 없어요(웃음). 그뒤에는 원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제 뭐든 마음대로 쓸 수 있겠다 생각하고 얼마 후 <태엽 감는 새>를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정도의 정밀함을 지닌 리얼리즘 문체 위에 이른바 '상식을 깨는' 이야기를 얹으면 무척 재미있는 효과가 생긴다는 것을 그때 새삼 깨달았죠.

 

p126.

 아까 가와카미 씨가 말한, 플랜 없이 쓰다가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사람은 분명 '바로 지금'인 그때를 잡지 못한 거겠죠. 하나 더 들자면, 아마 문체가 완성되지 않은 것 아닐까요. 문체는 매우 중요하니까. 자신의 문체 없이 지하 깊숙이 내려가기는 불가능합니다. 굉장히 위험해요. 문체는 생명줄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개인적으로는 플랜 없이 쓰기 시작해서 작가 본인도 마지막까지 무얼 썼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작품은 보통 좀 혼잣말처럼 보이거든요.

 무라카미 : 당연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직접 내뱉지 않는 것이 소설의 기본이니까요.

-그러니 설사, 말이 좀 이상하지만(웃음), 지하 2층까지 내려갔다 해도 그곳에서 본 걸 독자와 공유하려면 문체가 필효하다는 거죠?

 무라카미 : 물론입니다. 저는 이래저래 벌써 사십 년 가까이 프로로 소설을 써왔는데, 그래서 그동안 무얼 했는가 하면 문체를 만드는 것, 그게 거의 다예요. 어쨋거나 조금이라도 좋은 문장을 쓰는 것, 나의 문체를 보다 탄탄하게 만드는 것, 보통은 그것만 생각합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스토리에 맞춰 글을 써가지만, 그때는 다른 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리시브할 뿐이에요. 그러나 문체는 다른 쪽에서 와주지 않아요. 자기 손으로 준비해야죠. 그리고 날마다 진화해야 합니다.

-진화. 그러면 문체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요?

 무라카미 : 완성되는 것이 아니죠.

-변화해가는 것이다?

 무라카미 : 네. 문체는 점점 변화합니다. 작가가 살아 있으면 문체도 그에 맞춰 살아 숨쉬죠. 그러니 매일 변화를 수행할 테고요. 세포가 교체되는 것처럼. 그 변화를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게 중요해요. 그러지 않으면 자기 손에서 떠나갑니다.

-어떤 부분을 써야 할 때가 오면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요.

 무라카미 : 바로 그거죠. 문장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도구로 쓸모가 있으면 그만이죠. 그러니 완성형 같은 건 있을 수 없어요. 저도 예전에는 쓰지 못했던 것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는 거의 쓰고 싶은대로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쓰지 못하는 건 없나요?

 무라카미 : 쓰고 싶은데 못 쓰는 건 없을걸요. 우회할 필요도 별로 없고. 다만 지금 당장 역사소설을 쓰라고 한다면 그건 좀 곤란하겠죠(웃음). 준비도 많이 필요하고.

-역사 고증이라든가(웃음).

 무라카미 : 네, 전문용어도 필요하고요. 하지만 현대 배경, 말하자면 제가 써온 이야기의 세계 안에서 기술적으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 있는가라면, 아마 웬만한 건 어찌어찌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뭐, 꽤 오랫동안 글을 써왔으니까요.

 

 p128.

-이번 주인공은 그림 관련 일을 하는데요. 그 직업은 먼저 정해두셨나요? 화가 주인공은 처음이죠?

 무라카미 : 잇마년 전 미국 터프츠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수전 네이피언이라는 일본어과 교수님을 만나 그분 남편과 파티에서 대화할 기회가 있어어요. 초상화가로 일하는 미국인이었죠.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초상화가가 제법 흥미로운 직업이구나 생각했던 것이 어려풋이 머릿속에 남았어요. 그리고 이번에 주인공 직업을 뭘로 할까 하다가 초상화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쓰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야 '아 참, 그러고 보니 수전 씨 남편이 초상화가였지' 하고 생각났습니다. 제 기억이란 게 대개 그런 식이에요.

 

 p133.

 무라카미 : 캐비닛이 작은 사람, 혹은 일에 쫓겨 서랍을 채울 시간이 없는 사람은 점점 고갈되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 시기에는 열심히 서랍을 채우려고 해요.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총력전이니 쓸 만한 건 뭐든 갖다 써야 하거든요. 서랍이 하나라도 많은 편이 좋아요.

 

p144.

 무라카미 : 그 신용거래가 성립하려면 이쪽에서도 최대한 시간과 수고를 들여 정성껏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독자들은 집합적으로는 정확히 간파해요. 이건 착실하게 공들여 썼거나. 이건 꼭 그렇지도 않구나. 대충 게으름 부리면서 쓴 건 긴 시간 속에서 반드시 지워집니다. 우리는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시간을 존중하고 소중히 다뤄야 해요.

 

p156.

 무라카미 : 그렇죠, 멘시키 씨는 '원하는 것은 거의 전부 손에 넣었지만, 알고 보면 원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밖에 원하지 못한' 사람이니까.

 

p167.

 무라카미 : 전혀 의식하지 않앗어요. 그래도, 의식이란 것에 대해서는 꽤 자주 생각하는 편입니다. 인간의 의식이 등장한 건 인류 역사에서 훨씬 뒤의 일이에요. 그전에는 거의 무의식밖에 없었고, 그 무의식 중심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니라 집합적으로 판단을 내리며 살았죠. 그리고 도시가 생기고 보다 고도의 조직과 시스템이 완성됨에 따라 '무의식'으로 행하던 일들이 점차 '의식'의 영역으로 격상됩니다. 보다 논리적이 되고요. 그렇지 않으면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유지할 수 없으니까요. 

 그것과 같은 얘기라고 봅니다. 옛날에는 대개 무의식 속에서 처리하던 일들을 의식을 기반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와 더불어 언어체계가 정비된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무엇에 기대어 살아왔느냐 하면, 바로 예언이죠. 고대사회에는 무녀, 혹은 주술사 역할을 하는 왕이 있었어요. 그들은 무의식의 사회에서 더더욱 무의식을 갈고닦아, 벼락을 맞는 피뢰침처럼 여러 메시지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가진다 한들 쓸데도 없었으니 그저 예언에 따라 무의식의 세계에서 살아가면 그만이었죠. 그것이 편하기도 했고요. 더이상 메시지를 받을 수 없게 된 왕은 죽임을 당하고, 새로운 왕이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의식'화하면서 그런 무녀적인 존재는 점차 힘을 잃어가죠. 공기가 바뀌고 벼락을 잘 맞을 수 없게 됐어요. 이데아도 그와 비슷한지 모르겠군요. 정말로 순수한 것은 오로지 무의식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것을 보지 못하고, 대신 의식에 투영된 것을 보는 수밖에 없다. 방금 플라톤 이야기를 듣다보니 떠오른 생각입니다.

 

p194. 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무서울 것이 없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목적 없이 써둔 문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 1인칭 '나(와타시)'를 사용한 데는 당시 번역하던 챈들러 작품의 영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을 듣고 그도 그렇겠다. 무슨 분위기인지 알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위대한 개츠비>입니다.

 오늘은 우선 <위대한 개츠비>와의 관계부터 얘기할까 합니다. 지형과 집의 묘사, 멘시키라는 인물의 조형, 그리고 '나'와의 거리, 관계성... 등은 닉 캐러웨이와 제이 개츠비의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건 당연히 의식하셨죠?

 무라카미 : 물론, 처음부터 의식했습니다. 골짜기 너머 건너편을 바라보는 구도는 두말할 것 없이 <위대한 개츠비>에서 거의 그대로 차용한 것이고, 멘시키 씨 조형에도 제이 개츠비의 캐릭터가 얼마간 들어갔습니다. 유복하고 비밀스러운 이웃 개츠비는 매일 밤 후미 건너편의 초록 불빛을 바라봅니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장면이죠. 멘시키 씨 역시 밤마다 골짜기 건너편 집의 불빛을 바라봅니다. 홀로 고독하게. 이 부분은 말하자면 혼카도리(本歌取り : 와카和歌 작법, 현대 대중가요의 샘플링 기법과 유사)처럼, 피츠제럴드에 대한 개인적인 트리뷰트 같은 거에요. 그러니 '나'라는 1인칭 화자가 어느 정도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와 비슷한 포지션이 되리라는 점은 당연히 의식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이미지가 있었나요?

 무라카미 : 집필을 시작하고 골짜기 건너편에 사는 인물을 설정했을 때 '아, 이건 개츠비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건 아니지만요.

-나중에 깨달은 거군요.

 무라카미 : 네, 집의 위치를 만들고 골짜기를 만들고 그 건너편에 커다란 저택이 있다는 설정까지 나온 뒤 '아, 그런가. 이건 개츠비구나'라고 문득 깨달았어요.

-무라카미 씨의 문화적 캐비닛 속에는 워낙 다양한 요소가 들어 있으니 지금까지 작품을 쓰면서도 생각지 못한 것이 나오곤 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중에서도 <위대한 개츠비>였군요. 무라카미 씨에게 무척 특별한 소설인데요.

 무라카미 : 제가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한 건 예순이 되기 조금전이고,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도 비슷한 시기였는데, 더 나중이었던가?

-챈들러가 나중이었어요.

 무라카미 : 그랬죠? <위대한 개츠비>를 제 손으로 직접 한 줄 한 줄 공들여 일본어로 옮기는 작업은 그냥 읽는 일과 전혀 달랐어요. 몸속에 쌓이는 과정이 달라요. 소설의 세부가 앙금처럼 단단히 제 안에 쌓여가고, 그 침전이 구체적인 영감을 주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자극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죠. <위대한 개츠비>와 <기나긴 이별>을 번역한 건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신에게 특별한 작품을 그런 형태로 다시 한번 만나는 건 작가로서 기쁜 일이죠.

 무라카미 : 네,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은 그야말로 제 골격의 일부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을 나름대로 환골탈태할 수 있나느 건 무척 익사이팅한 일이죠. 꺼꾸로 말해, '재사용'이라는 표현은 좀 그렇지만, 작품의 구조와 장치의 이행, 전용이 가능하다는 것도 문학 명작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 같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클래식이라 부를 수 있는 거죠.

-지난 주말에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어봤는데, '데이지를 오후에 집으로 초청하고 자기도 불러줄 수 있겠느냐'는 대목이 상당히 겹치더군요.

 무라카미 : 그렇죠, 그 부분은 물론 저도 의식했습니다. 속으로 슬쩍 웃으면서 썼죠(웃음).

-좋은데요. 이전 작품에서도 본인에게 특별한 작품을,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게 등장시키곤 했죠.

 무라카미 : 몇몇 작품에서도 그런 적이 있어요. 유희이기도하고. 말하자면 트리뷰트처럼, 제 생각에, 한 사람이 인생에서 정말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혹은 감명받을 수 있는 소설은 몇 편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걸 몇 번이고 읽으며 찬찬히 곱씹죠. 소설을 쓰는 사람이건 쓰지 않는 사람이건,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소설은 평생 대여섯 권 정도 만나지 않을까요. 많아야 열 권 남짓일까. 그리고 결국 그 몇 안 되는 ㅊ책이 우리 정신의 대들보가 되어줍니다. 소설가의 경우는 그 스트럭처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바꿔 말하고 풀어 말하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소설에 편입해갑니다. 우리 소설가들이 하는 일이란 결국 그런 게 아닐까요.

 호르헤 보르헤스라고 있죠. 그가 어느 날 시를 써서 친구 앞에서 읽어줬더니 "자네, 오 년 전에도 완전히 똑같은 시를 썼어"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보르헤스는 전에 그런 시를 썼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거죠. 이에 대해 보르헤스는 말합니다. "시인이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평생 대여섯 가지밖에 없어. 우린 그걸 다른 형태로 반복할 뿐이지." 듣고 보면 정말 그렇다 싶어요. 결국 우리는 대여섯 가지 패턴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뿐일지 모른다고. 다만 몇 년 단위로 반복하는 사이 형태나 질은 점점 변해가죠. 넓이와 깊이도 달라지고요.

-그때 작가가 두려워하는 건 아마 자기모방의 가능성이겠죠. 후퇴하지는 않았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걱정. 같은 대여섯 가지의 패턴을 되풀이하면서도 발전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건 어떤 부분일까요?

 무라카미 : 문장입니다.

-문장?

 무라카미 : 네. 문장. 제게는 문장이 전부입니다. 물론 소설에는 이야기적 장치, 등장인물, 구조 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결국에는 모두 문장으로 귀결합니다. 문장이 바뀌면, 새로워지면, 혹은 진화하면 설령 똑같은 내용을 몇 번씩 되풀이해도 새로운 이야기가 됩니다. 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작가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무서울 것이 없다.

 무라카미 : 네. 전혀 무서울 게 없어요. 문장이 정체하면 그저 똑같은 돌림노래겠지만, 문장이 업데이트된다면, 피와 살을 지니고 계속 움직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무라카미 씨는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리듬이라고 하셨느네, 문장을 변화시키는 것이란 즉 리듬을 연마하는 일이기도 하겠군요.

 무라카미 : 그렇죠. 울림, 리듬, 그런 것들이 전과 달라졌다는 확신이 없다면 역시 스스로 무서워지지 않을까요. 문장이 달라지면 같은 이야기여도 나아가는 방향성이 달라집니다. 작가는 그렇게 전진하는 수밖에 없어요.

-<스푸트니크의 연인>이 나왔을 당시 <광고비평>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의식적으로 비유를 많이 사용했다고 하셨죠. 그때까지 선호하던 문체를 총결산하고 '이런 문체의 소설은 이제 그만 쓰자'는 생각으로 임했다고요.

 무라카미 : 네. 그때는 문장 스타일을 한번 완전히 바꿔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전까지의, 이른바 무라카미 씨다운 문체를 모조리 써버리는 극단까지 갔다는 말이군요. <스푸트니크의 연인> 전까지는 문장이 전진하는 과도기였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무라카미 : 네, 그렇죠. 아무튼 나다운 문장, 혹은 그전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다운 문장'이라 여겨졌던 것. 즉 비유를 많이 사용한 경쾌한 문장을 쓸 수 있는 만큼 써버리고, '이건 이제 됐다'하고 그뒤로 다른 문체가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해변의 카프카>로 갔죠. 이 <해변의 카프카>라는 소설은 그전까지의 문장으로는 쓸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른 문체를 끌어와야 했어요. 그래서 조금 색다른 문체를 쓰다보니 호시노군이나 나카타 노인 같은, 지금까지 그려본 적 없던 캐릭터가 자연히 등장한 겁니다. 그래도 그 단계까지 가려면 일단 일종의 총결산 같은 것을 해둬야 하죠.

 

p200. <노르웨이 숲>의 사라진 시나리오

-데뷔작과 그 다음 작품 때는 아직 소설을 잘 몰라서 자신의 스타일을 익히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그뒤로 <스푸트니크의 연인>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을 들여, 좀전에 무라카미 씨가 말씀하신 '나다운 문제'를 만들어갔고요. 그것을 일단 총결산하고 다음 문체로 넘어갈 때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에는 구체적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무라카미 : 물론 문체를 총결산하고 새로 만들어낸다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써보지 않은 근육을 갑자기 쓸수는 없으니까요. 그저 새로운 방향으로 문체를 전환하자는 마음가짐인 거죠. 새로운 문체가 새로운 이야기를 낳고, 새로운 이야기가 또 새로운 문체를 보강해갑니다. 그런 순환이 이뤄지면 제일 좋아요.

-작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신의 문체가 무엇인지 아는것, 자신만의 시그니처가 들어간 문체를 획득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이 좋은 문체인지 치밀하게 관찰할 필요도 있고요. 누가 봐도 무라카미 씨의 것임을 알 수 있는 문장을 쓰면서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 나아가 그것을 독자와 공유하기란 녹록지 않을 텐데요.

 무라카미 : 어쨌거나, 저는 문장을 쓰는 게 좋습니다. 늘 문장을 생각하고, 늘 어떤 문장을 쓰고 있고, 늘 여러 가지를 조금씩 시험해봐요. 문장이라는 도구가 제 손에 있는 것만으로 무척 행복하고, 그 도구의 여러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어요. 애써 손에 넣은 것이니까.

-무라카미 씨는 절대 발을 멈추지 않죠. 정체하기 않고 계속 움직이니까 가까이서도 그 변화를 알 수 있지만, 조금 물러서서 보면, 몇 년쯤 지나서 보면 유기적으로 뚜렷한 그러데이션이 드러나 있어요.

 무라카미 :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노르웨이의 숲>에서 끝까지 리얼리즘으로 소설을 쓰는 실험을 했습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그전까지의 문체를 총결산할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고요. 그뒤에 <애프터 다크>는 거의 영상 시나리오와 비슷한 방식으로 써봤죠. 그렇듯이 '조금 짧은 장편'에서는 늘 저 나름의 실험을 합니다. 이번에는 이런 걸 해보자 하고 도전하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도 제게는 다소 실험적인, 그룹을 묘사한 소설입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써본 적이 없었어요. 쓰는 입장에서는 그 정도 길이의 소설이 제일 실험하기 좋죠.

 단편이라면 어느 정도 통합성이 필요하고, 긴 장편에서도 섣불리 시도할 수 없어요. 어설프게 실험적인 요소를 넣으면 수습이 힘들어지니까. 그래도 <스푸트니크의 연인>과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또 <애프터 다크>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정도의 경장편에서는 비교적 깊이 있는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껏 감각을 해방하고 새로운 설정을 시도해볼 수 있어요. 제게는 아주 중요한 그릇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그 정도 사이즈의 소설은 대개 독자 평판이 좋지 않단 말이죠.

-뭐 짚이는 게 있으세요?(웃음)

 무라카미 : 모르겠군요. 무엇 때문일까(웃음). 단편은 단편대로 어느 정도 인정받고 긴 장편도 장편으로 인정받지만, 그 사이주의 소설을 적어도 출간 당시에는 왠지 혹평이 많은 느낌이에요. 대충 썼다. 지금까지와 똑같다. 아니면 반대로 새로운 시도에 실패했다 등등.

-아무래도 단편과 장편의 중간에 속하다보니, 좀더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기대하던 독자들이 어중간하다는 느낌을 받는 걸까요.

 무라카미 : 모르겠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작품 하나하나에 애착이 있고, 외국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평판이 좋은데 말이죠.

-단편소설을 읽은 뒤의 날카롭고 상쾌한 느낌과 긴 장편소설의 다이너미즘에 흠뻑 취하는 독서체험. 무라카미 씨의 독자는 그 양쪽을 다 알지만 다소 짧은 장편의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좀 망설여지는지도 모르겠네요.

 무라카미 : 독자 카드에 너무 비판적인 의견만 나와서 담당 편집자가 무척 침울해했어요. 보기 딱할 정도로(웃음). 그래도 저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아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희안하게 재평가의 목소리가 나오거든요. "사실은 좋았습니다" 커밍아웃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중이 될수록 점점 평가가 좋아져요.

-"사실은 좋았습니다"라니, 왜 눈치를 보는 걸까요(웃음). 처음부터 말하면 될 걸.

 무라카미 : 아니면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자극하는 부분이 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반발을 사는 걸까요? 그래도 그런 분량의 장편소설에서만 가능한 것이 분명히 있고, 제게도 나름의 성과가 확실히 남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아도 딱히 걱정하진 않습니다. 머릿속에는 '자, 다음으로 가자'는 생각뿐이죠.

-그래도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는 어떤 부분을 포착할 때는 미들클래스, 400자 원고지 사오백 매 내외의 작품 속에 커다란 실마리,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죠.

 무라카미 : 네, 그럴 거에요. 그 정도 분량이 소설이 고비가 되어, 다음 장편으로 그 성과가 이어지는 면이 확실히 있습니다. 저는 곧잘 함대에 비유하는데, 거대한 전함이 있고, 그다음에 순양함이 있고, 구축함이 있고, 뒤이어 더 작은 배나 잠수함이 함대를 이루죠. 제일 큰 전함이 제게는 긴 장편에 해당하는데, 대신 그만큼 움직임은 부자유스러워요. 작은 배가 단편이고, 좁은 데서도 꽤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화력이 아무래도 모자라죠. 그런 때 마침 중간 사이즈의 배가 있으면 굉장히 고마워져요.

-그런데 단편도 점점 분량이 늘어나는 추세에요. 2014년의 <여자 없는 남자들>의 수록작도 각각 팔십 매 전후잖아요. 물론 단편의 범주에 들긴 하지만 조금 긴 편이랄까요. 아주 짧은 작품은 요즘 들어 잘 없어요. 예전에는 많았는데.

 무라카미 : 그렇네요. 점점 길어지는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 또 짧은 것도 쓰겠죠.

-<여자 없는 남자들> 때는 어땠나요?

 무라카미 : 음, 그때는 좀 긴 걸 쓰고 싶은 시기였어요. 쓰다보니 점점 이미지가 부풀어서, 쓰고 싶은 게 많았고, 그동안 길고 촘촘하게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도 했죠. 그런 게 재미있었어요.

-<세 가지의 독일 환상>처럼 짧고 시적인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것도 있었죠. 무라카미 씨 작품 중에서도 실험적인 단편이었어요.

 무라카미 : 옛날 작품이죠. 그렇게 감각적인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잡지에서 짧은 글을 원한 이유도 있지만. 지금은 잡지 청탁을 받아서 쓰는 일이 없으니까 보통 쓰고 싶은 만큼 쓰죠. 그래서 자꾸 길어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때가 되면 또 짧은 이야기를 쓰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기사단장 죽이기>는 분량도 많지만 디테일 면에서도, 특히 1부는 매우 치밀하게 쓰였습니다. 패러프레이즈가 자유자재이고 마치 '문장으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의지까지 느껴지는 밀도에요. 하나의 대상을 아주 끈질기게 묘사하고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그 시점이 또 조금 변한 인상이었습니다.

 무라카미 : 저는 원래 풍경 묘소 같은 데 서툰 편이었어요.

-초기에요?

 무라카미 : 아주 초기에. 대화나 행동 묘사는 그럭저럭 매끄럽게 나오는데, 움직임을 억제하고 구석구석 세세하게 묘사하기로 마음먹으면 아무래도 잘 안 되더군요. 그러다가 차츰 써지니까 좋아서 자꾸 써넣은 편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웃음).

-하긴 초기에는 그런 묘사보다 미니멀한 날카로움, 아포리즘의 이미지가 강했죠. 서툴렀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세번째 작품인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근사한 풍경 묘사가 나오잖아요.

 무라카미 : 그런가요.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산속 오두막으로 가면서 드넓은 초원을 걷는 장면이라든지. 꼭 자작나무 같은 걸 눈앞에 보는 기분이었는데요. 풍경이나 정경 묘사는 언제부터 만족스럽게 쓸 수 있게 됐다고 느끼세요?

 무라카미 : 언제일까요. 아주 최근처럼 느껴지는데, 풍경 묘사는 정말 옛날부터 잘 못했어요. 심리묘사는 더 못해지만(웃음).

-그런 때는 '여기 풍경 묘사를 좀 더 넣는 편이 좋겠는데 쓰기 싫다'는 느낌인가요?

 무라카미 : 그렇죠. 소설에는 본래 밸런스라는 것이 있으니까 '쓰기 싫지만, 귀찮지만, 여기서는 써야 한다' 싶죠.

<애프터 다크>를 쓸 때 가장 뚜렷하게 느꼈는데, 처음에는 대화만 슥슥 쓰고, 사이사이 간단한 지문을 메모해뒀어요. 그리고 마지막까지 다 쓴 뒤 지문 부분을 '영차, 영차'하면서 정교한 문장을 만들어 써넣었죠. 그런 식으로 써보는 것도 제게는 좋은 공부가 됐어요.

 

p213.

 무라카미 : 그에 앞서, 리얼하게 쓰지 않으면 미스터리해지지 않습니다. 미스터리하게 쓰려 한다고 미스터리해지는게 아니니까. 최대한 리얼하게 써야지 하는데도 미스터리해진다면 결과적으로 미스터리한 인물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p227.

 무라카미 : 말이죠. 문장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규범은 제 생각에 기본적으로 두 가지뿐이에요. 하나는 고리키의 <밑바닥에서>에서 거지와 순례자의 대화. "내 말 듣고 있는거야?"하고 한 사람이 말하니까, 다른 사람이 "나 귀머거리 아니야"라고 답해요. 지금은 거지니 귀머거리니 하는 차별용어를 쓰면 안 되지만 그 시절에는 아니었어요. 전 이 책을 학창시절에 읽었는데, 보통 같으면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로 끝날 대화죠. 그런데 그러면 드라마가 안 되는 겁니다. "귀머거리 아니야"라고 대답하니까 주고받는 말 속에 역동감이 생겨요.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하는 작가가 세상에는 많거든요. 저는 항상 그 사실을 의식합니다.

 

 또하나는 비유. 챈들러가 쓴 비유 중에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만큼 드물다"라는 게 있어요. 에전에도 몇 번 예롤 든 문장인데, 만약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은 드물다"라고만 하면 독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죠. 예사롭게 획 읽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만큼 드물다"하면 '호오!' 싶잖아요. 그러고 보니 뚱뚱한 우편배달부는 본 적 없는데, 하고. 그게 살아 있는 문장입니다. 이렇게 반응이 생겨나고, 움직임이 생겨나죠. "귀머거리 아니야"와 "뚱뚱한 우편배달부". 이 두 가지가 제 글쓰기 모델입니다. 그 요령만 알면 제법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을 거예요. 아마도.

 아무튼 독자가 간단히 읽고 넘어갈 문장을 쓰면 안 된다는 거죠.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문장으로만 채울 필요는 없지만, 몇 페이지에 하나쯤은 넣어줘야 해요. 아니면 독자가 좀처럼 따라와주지 않아요.

 

...

 

 오손 웰즈의 영화 <시민 케인>에서 이탈리아에서 온 음악 선생이 가수 지망생인 케인의 부인을 가르치다 말고 이런 말을 해요. "세상에는 노래를 할 줄 아는 인간과 못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유명한 대사인데, 어쩌면 글쓰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거의 글다운 글을 쓰지 못했어요. 그때부터 노력하며 조금씩 이런저런 것들을 쓸 수 있게 돘죠. 단계적으로 발전해온 거죠.

 

p231.

-무라카미 씨는 곧잘 '처음에는 잘 쓰지 못했다'고 하시는데요. 아까 했던 노래 이야기처럼 내가 쓰고 싶은 건 이런 거다. 하는 확고한 이미지는 있었는데 본인이 보기에 멀다고 느꼈다는 뜻인가요?

 무라카미 : 한참 멀었죠. 당시 편집자에게 "제가 아직 문장력이 부족해서요" 했더니 "괜찮아요, 무라카미 씨. 다들 원고료 받아가면서 차차 좋아집니다" 하더군요. 하긴 맞는 말이었어요(웃음).

-자꾸 처음에는 나도 잘 못 썼다, 못 썼다 하시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습니다. 잘만 썼잖아 싶은데요(웃음).

 무라카미 : 잘 쓸 수 있는 것만 썼고, 그것이 그것대로 잘 기능했다고 봐요. 그래도 제가 정말로 쓰고 싶었던 것과는 조금 달랐죠. 쓰고 싶은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쓸 수 있게 된 건 훨씬 나중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해야 하나... 저는 데뷔 무렵부터 꽤 주목받았던 모양이에요.

 

p234.

-2015년 후쿠시마에서 열린 문학 워크숍에서 무라카미 씨가 제 창작 클래스에 잠깐 참석해주셨죠. 그때 수강자들에게 딱 한 가지 지적하셨는데. 귀로 들어서 알 수 없는 말은 쓸 때도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신인상 응모작 원고를 읽다 보면 다들 비교적 어려운 말을 자각 없이 쓰는 경향이 아직 엿보이거든요. 문자로나 소리로나 아무것도 남지 않는 말을요.

 무라카미 : 네, 말의 울림은 중요합니다. 구체적이고 피짘컬한 울림. 설령 소리내지 않고 눈으로만 보더라도 울림이 잇어야 해요.

-주제나 내용은 어찌됐건 일단 문장 단위에서 리듬이 좋고 술술 읽히는 글도 생각해보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것도 일종의 궁합일 테지만요.

 무라카미 : 작가는 눈으로 울림을 들어야 합니다. 글을 쓰고, 다시 읽어보고, 소리내는 대신 눈으로 울림을 느낀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저는 항상 '음악에서 글쓰는 법을 배운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눈으로 보고, 울림을 느끼고, 그 울림이 더 아름답게 울리게끔 바로잡아가는 작업을 중요시해요. 마침표, 쉽표도 리듬이잖아요. 그런 게 무척 중요해요.

 

p236.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글쓰는 법을 가르치기도 어려워요.

 

p238.

 무라카미 : 전에도 말했듯이 소설 쓰는 일은 일종의 신용거래고, 한번 잃어버린 신용을 되찾기는 매우 어려워요. 시간을 들여 '이 사람이 쓴 거니 돈 내고 사서 읽어보자'라는 신용을 쌓아나가고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문장을 정성껏 갈고닦는 일이 중요해요. 구두를 닦거나, 셔츠 다림질을 하거나, 칼날을 가는 것처럼.

 저는 문체가 거의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일본의 이른바 '순문학'계에서는 문체는 3순위나 4순위쯤 되는 듯합니다. 대개는 테마 제일주의로, 일단 테마 운운을 주목한 뒤야에 다른 여러 가지, 이를테면 심리묘사나 인물 설정 같은 관념적인 부분을 평가하고, 문체는 한참 뒷전이죠. 그러나 그게 아니다. 문체가 마음껏 활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p245.

 무라카미 : 스트록처는,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거의 의식하지 않아요. 그럴 필요도 없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자기 안에 이미 갖춰져 있어야 하니까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유의 골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스트럭처 역시 일부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무라카미 : 그 형태가 어디서 생겨나느냐 하면, 주로 지금껏 자신이 읽어온 소설, 그리고 써온 소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이미 자기 안에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새삼 생각할 일이 없어요. 대신 문체를 생각해야죠. 그리고 문체가 이끌어내는 이야기를.

 

..

 

 화가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똑같아요. 캔버스에는 끝이 있죠 다들 그 안에 그림을 그립니다. 테두리 바깥에는 그릴 수 없어요. 그래도 화가는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죠. 끝없이 이어지는 광대한 캔버스 없이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어떤 사이즈의 캔버스를 머릿속에 설정하면 그 안에서 세계가 완성되어갑니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쯤이 끝이겠다 싶은 부분이 대략적으로 보여요. 아니면 오천육백 매씩 쓰고도 아직 모자란다고 하겠죠. 즉 어느 정도 쓰는 사이 구조가 보이기 마련이에요. 위쪽 끝은 이쯤이고, 아래쪽 끝은 이쯤, 좌웅 양쪽은 여기까지. 그러니 구조나 골격을 두고 그렇게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자연히 결정되니까요.

-지금까지 독서를 통해 쌓아온 것들에 구조의 재료가 모여있고, 그게 자연히 나오면서 작품에 따라 확실한 형태를 잡아간다는 말이군요. 무라카미 씨가 꾸준히 번역작업을 하는 것과도 적잖이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번역이란 전체 구조뿐 아니라 문장구조 그 자체에 줄기차게 부딪히는 작업이니까요.

 

 

p323

 무라카미 : 필요 없죠. 저는 소설 쓰는 게 좋고 밖에 나가 노는 일이 잘 없어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나이트라이프라고는 전혀 없어요. 어떻게 그런 생활이 가능한가 하면, 소설을 쓰는 능력이 있어서죠. 저는 소설을 어느 정도 잘 쓸 수 있고, 저보다 잘 쓰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봐서 뭐, 그렇게 많지는 않은 셈이잖아요. 이 세상에.

-좋은 말씀이 나왔습니다. "나보다 잘 쓰는 녀석은 적다!"

 무라카미 : 자랑이 아니라,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지 않나요. 어쨌거나 글쓰기에는 프로니까요. 사십 년 가까이 일선에서 프로로 글을 써왔고, 책도 어느 정도 팔리고, 실력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글쓰기가 즐겁고요. 이 일을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하면 일하기가 즐거워요. 예를 들어 섹스도 나쁘지 않지만, 나보다 섹스를 잘하는 사람이야 아마 세상에 굉장히 많겠죠(웃음). 직접 본 일은 없지만.

-그, 그렇군요...(웃음) 그러나 소설은 다르다.

 무라카미 : 소섥은 다르다. 이런 건 아마 나밖에 하지 못할 거라고 실감합니다. '어때, 손해는 안 본댔지' 하는 거. 이 실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요(웃음).

-철학자 등이 현저히 그렇죠. 의문을 제기하는 단계도 그렇고, 어떤 명제에 대해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기존의 학설을 넘어서서 새로운 생각을 내놓았다는. 일종의 '성취감'과 '과시욕'이 없으면 지적인 작업을 할 수 없죠. 그런 것이 중요한 엔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 그렇기에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요. 아무튼 지금 좋아서 소설가를 하고 있으니 계속 해보자. 그러다가 판매량이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소설을 못 쓰게 되면 못 쓰는 대로, 곧바로 가게문 닫고 아오야마 근처에 재즈클럽을 내면되지. 그것 역시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요.

 

p343.

 무라카미 : 저는 아직 순수한 의미의 '악'을 쓴 적 없고 쓰려고 한 적도 아마 없을 테니 악이란 어떤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지금 제가 가장 큰 '악'이라고 보는 건 역시 시스템입니다.

-무라카미 씨가 생각하는 '악'의 이미지는 시스템이다.

 무라카미 : 좀더 분명히 말하면 국가나 사회나 제도 그 솔리드한 시스템이 불가피하게 양성하고 추출해가는 '악'이죠. 물론 모든 시스템이 '악'이라거나 시스템이 추출하는 것이 모조리 '악'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선한 부분도 당연히 많아요. 하지만 만물에 그림자가 있듯이 어떤 국가나 사회든 '악'이 따라다니기 마련입니다. 교육 시스템도 그렇고, 종교 시스템에도 도사리고 있죠. 그런 '악'은 실제로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합니다. 저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인간이라 그런 시스템의 '악' 같은 것에 매우 민감한 편입니다. 그 실상을 좀더 그려나가고 싶지만 그러면 아무래도 정치적 메시지가 되기 쉽죠. 그것만은 되도록 피하고 싶어요. 제가 바라는 형태의 발신이 아니니까요.

 

p351

 무라카미 : 사악한 이야기의 한 전형이, 아사하라 쇼코(참고 : 옴진리교의 교주)가 펼쳐 보인 이야기죠.

 완전히 폐쇄된 장소로 사람을 끌어들여 철저하게 세뇌하고, 나아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죽이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기능한 건 최악의 형태를 취한 사악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회로가 폐쇄된 악의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다 넓고 개방적인 이야기를 작가는 만들어나가야 한다. 무언가를 둘러싸고 쥐어짜는게 아니라 서로를 받아들이고 주고받을 수 있는 상황을 세상에 제시하고 제안해나가야 한다. 저는 <언더그라운드> 취재를 통해 그렇게 절감했습니다. 피부로 느꼈어요. 이건 해도 너무한 일이라고.

 

p356. 인터뷰를 마치고(무라카미 하루키 에필로그)

 "따분하고 재미없는 대답만 해서 미안합니다. 따분하고 재미없는 질문에는 그런 대답밖에 나오지 않는 법이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 역시 지금까지 작가생활을 해오면서 적지 않은 인터뷰를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상황을 몇 번인가 경험했다.(물론 예의바른 나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번에 가와카미 에미코 씨와 총 네 번에 걸쳐 인터뷰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든 적은, 정말이지 솔직하게,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신선하고 날카로운(때로는 묘하게 절실한) 질문이 속속 날아오는 통에 무심결에 식은땀을 흘릴 때가 잦았다. 아마 독자 여러분도 이 책을 읽으며 그런 '끊임없는 공세'를 피부로 느끼셨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원래 작가끼리의 대담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데뷔 초기에는 몇 번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그러나 인터뷰 형태로 다른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제법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질문하는 쪽이든 대답하는 쪽이든, 상대를 잘 만나면 상당히 흥미로워지기 마련이다. 인터뷰라는 포맷에서는 인터뷰어의 책임과 인터뷰이의 책임이 뚜렷이 나뉘기 때문이다. 그런 깔끔함이 마음에 든다.

 2015년 7월 잡지 <MONKEY>의 청탁으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중심으로 가와카미 씨와 롱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 이 사람과는 좀더 오래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강한 여운이 남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만난 어떤 인터뷰어와도 다른 종류의 질문을 정면에서 던져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망설임 없이 여러 각도에서 그 질문을 반복했다. 그런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는 사이 지금까지 나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와 풍경을 내 안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랬던 터라 그 연장선상에서 다시 그녀와 인터뷰를 하면 어떨까, 나아가 가능하면 한 권의 책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거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창 <기사단장 죽이기>를 쓰고 있던 시기라 일단 대답을 미뤄두고 집필을 끝냈을 때 "혹시 아직 괜찮다면 하고 싶다"는 답을 보냈다. 이 작품을 놓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면 과연 어떤 인터뷰가 될지, 나로서도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따분할 틈이 없었다, 라고 한숨을 섞어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니, 정말이지 따분해할 여유라고는 없었답니다. 헤밍웨이 씨.

 

차범근 감독(현재는 감독, 해설가 등의 활동이 없으나 요즘 부르기 제일 무난한 호칭이라고 생각함)이 주로 독일에서 선수로 뛰던 시절에 대한 에피소드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스포츠 서울에 연재되던 칼럼을 모은 것이다. 칼럼의 연재연도는 1980년대 중후반으로 예상되는데, 실제 책은 1997년도에 출간했다.  거진 30년이 넘은 내용으로 당시의 축구계와 한국의 상황들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개인적으론 이런 책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손흥민의 에세이를 보고 나서 당연히 차범근 감독도 이런 책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찾아봤다.

차범근 감독의 축구에 대한 생각, 그리고 세상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아마 당시는 전문편집자가 없었나하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글의 내용은 괜찮은데 가끔가다 문맥이 이해가 안되게 튀는 부분이 있다.

차범근 감독이 뛰는 모습을 기억하는 세대(나도 사실 차범근 감독의 선수시절 모습은 86년 월드컵에서 뛰던 모습 정도나 기억한다.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활약을 하는 것은 신문으론 봤지만 TV에서 경기모습을 볼 수는 없었던 시절이다.)

이 책은 지금 절판에다가 중고서점에서도 구하기 힘들다.(그래서 어렵게 도서관에서 찾아서 읽었다.)

---------------------------------------------

p19. 나의 자랑스러운 둘째 형님

 처제들은 시골에 계시는 둘째 형님을 '일용씨'라고 부른다. 그 연속극을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처제들의 얘기인즉 [전원일기]에 나오는 '일용씨'의 모습이 둘째 형님의 모습하고 똑같다는 것이다. 형님은 지금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에서 버섯 농사를 짓고 있다. 가끔 고향집에 전화를 하면 밤 열한시가 넘었는데도 어머님과 함께 버섯을 다듬고 있다고 할 만큼 일이 많은 작업이다.

 그러나, 어머님, 형수님, 그리고 형님이 하루종일 매달려야 하는 엄청난 일의 양에 비해 일년에 떨어지는 돈이 칠백만원 정도라고 해서 나는 참 심란한 기분이 들었는데 정작 형님은 그만한 수입을 올린다는 것에 보통 자부심을 갖고 계시는 게 아니었다. 그런 천성 때문인지 형님은 한번도 도시 생활을 꿈꾸거나 계획한 적이 없는 분이다. 작은 운동구점 하나라도 동생 이름 걸고 하겠다고 할 법한데 여지껏 그런 생각은 꿈에서조다도 갖고 계시지 않은 것이다. 농사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도, 아는 것도 아무 것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형님이 지난번 만났을 때 "나는 말이여, 버섯을 하면서도 뭣을 조금씩 치면 일이 훨씬 수월한데 유명한 아우 생각을 하면 절대로 그렇게 못하겠어. 내 버섯은 정말로 아우 덕에 아무 것도 치지 않고 키우는거여"하며 느릿느릿 말씀하시는 것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고마움과 형의 인격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 얼마나 자랑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형님은 자신의 인감도장조차도 마을일을 돌봐주는 '이장'에게 맡겨놓고 그 이장이 형님 몰래 오백만 원을 대출받아 썼는데도 몇 년씩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낼 만큼 순진하신 분이다. 그런 형님이 얼마 전 축구교실을 할 만한 아주 좋은 땅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도 머뭇거리는 나를 보자 내가 돈이 모자라서 그러는 줄 알고 몹시 딱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며칠 전 전화를 했더니 "범근아! 학교 뒷산에 있는 우리 밭을 팔면 한 사천만 원 된다는 데 내가 그걸 팔아서 보태주면 그 땅을 살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우리 둘째 형님 말고 또 있을 수 있을까. 더구나 요즘 같은 세상에....

 고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신 형님.

 하루종일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의 농군 형님. 그러나 형님은 동생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 기쁠 뿐이고 나는 그런 형님이 박사보다도 장관보다도 더 자랑스러울 뿐이다.

 

p21. 

 그 해 6월에는 사기꾼이 처가에 사기를 치려고 했던 적이 있다. 어떤 남자가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내가 축구감독 김호인데 이번에 독일에 갔다 오면서 차범근이가 장모님 갖다 드리라고 주는 선물을 갖고 왔다. 그런데 세관에서 통관세 21만원을 물으라고 하니까 내 온라인 구좌로 돈을 좀 보내달라"면서 구좌번호까지 불러주더란 것이다. 평소 나나 아내는 "괜히 세관 검사대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피곤해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어 귀국할 때 변변한 선물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흔한 양주 한 병도 안 가지고 간다. 그래서 내 손아래 동서는 "형님! 비행기 안에서 파는 양주 한 병은 예의예요."하고 항상 불평을 하는 판이다.

 그런데 10년 동안 선물이라고는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장모님 생각에 "천지개벽이 아니고선 세금까지 물어야 할 변난 것을 사서 보내겠느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장모님은 궁금하지도 않으셨는지 전화 한 통화 안한 걸 보면 평소 교육(?)의 효과가 대단했던 것 같다.

 

 p23.

 남을 위해서 참는 것, 일을 위해서 인내하는 것, 그것은 일의 종류가 어떤 것이라고 해도 매우 귀중한 것만은 틀림이 없으리라.

 

 p29.

 유럽컵과 같은 공식 유럽축구연맹 주최 경기에는 팀에서 입는 일반 유니폼을 입지 못하게 되어 있다. 같은 모양에 광고를 없앤 유니폼을 사용해야 하는데 유럽에서 열리는 3대 유럽컵 결승전은 전 유럽에 중계가 된다.

 10년 전 내가 속해 있던 프랑크푸르트 팀은 UEFA(유럽축구연맹)컵 결승전에 올랐었다.

 물론 경기장에서는 흰색 상의에 까만 팬티를 입었는데 프랑크푸르트의 마크가 왼쪽 가슴에 조그많게 달린, 규정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복장이었다.

 6만이 꽉찬 운동장에서 결승전을 벌인 끝에 '샤웁'이란 선수가 한 골을 넣어 1대 0으로 승리, 우승컵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시상 준비를 하는 짧은 시간에 우리는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옷이 적어 감기에 걸릴까봐서"라며 우리가 평소에 입던 미놀타라는 글자가 새겨진 유니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적은 옷과 갈아 입으라는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의 환호소리에 끌려 다시 나왔을 때 수백명의 카메라맨들이 우승팀을 찍으려고 우리를 향해 몰려들었다.

 중계되는 가운데 시상식도 근사하게 끝마쳤다.

 컵을 앞에 놓고 찍은 '우승 팀 사진은 각국으로 보내져 스포츠 신문과 잡지를 장식했다.

 유럽축구협회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광고주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느긋하게 유럽축구협회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요청한 벌금만 대납해주면 되는 것이다. 

 200만원.

 생각보다 적은 액수다.

 해볼 만한 일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프랑크푸르트가 이 일을 해주고 얼마나 받았을까?

 나도 모른다.

 신문에도 없다.

 다만 효과가 있기에 그런 법석을 떨었을 것이란 점만은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p37. 별난 아들 이름 '세찌'

 "야! 차붐! 넌 드디어 진짜 축구 선수가 된거야! 위대한 축구 선수는 다 얘들이 셋이거든. 펠레가 그렇고 베켄바워, 루메니게, 브라이트너, 슈스너, 그리고 나 니켈...."

 셋째를 낳았다는 신문보도가 나자 프랑크푸르트의 옛 동료 니켈이 부리나케 집으로 전화를 걸어 한 말이다.

 세찌. 이곳 독일 친구들은 저마다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을 지어 이제 겨우 두리란 이름이 익숙해질 만하니까 "또 세찌를 외워야 하게 됐다고 투덜거리는데 이름 가지고 말이 많기는 서울도 마찬가지다.

 전화를 통해 "축하합니다"하고 점잖게 운을 떼고 난 [스포츠서울]의 방석순 기자는 두리 다음에 난 아기의 이름이 세찌라고 하자 "세상에 '찌'가 들어가는 이름이 어디 있어요. 그래 그 이름 호적에 올릴 참이요?"라면서 어이없어했다.

 그렇다고 이미 지어 놓은 이름, 게다가 신문에 나고 이곳 TV해설자까지 축구해설 도중 자세히 소개해 놓은 우리집 아이의 이름을 이제 와서 바꿀 수 없는 것 아닌가?

 거기다 우리 세찌 녀석은 이름만 요란한 게 아니다.

 언젠가 신문지상을 통해 1986년 10월쯤 세찌가 태어날 것이라고 밝혔더니 어느 팬이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차 선수와 통화할 기회가 있거든 요즈음은 하나만 낳기 운동이 한창임을 꼭 일러주라"고 했더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제는 '모두가 하나'도 아니고 '한집 걸러 하나'의 추세라고 하니 우리 같은 경우는 아파트 한층의 애들을 몽땅 갖고 있는 셈이다.

 우리 한국 축구 선수들도 나이가 젊을수록 '하나만 낳고 끝'이라고 하는데 소위 선진국이라는 곳에서 수년을 산 가장 모법적이어야 할 영증(조영증)과 나만 애가 셋이니 사실 할 말이 없다.

 거기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곳 [익스프레지]지는 내가 한국 가족계획협회의 '둘만 낳기 운동'에 모델로 앞장섰다는 사실까지 알아내서 내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유감없이 폭로하기까지 했다.

 

p64.

 그러기 때문에 더 배운 사람, 더 높은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항상 남들이 흉내내고자 하는 대상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국에 있을 때, 많은 어른들을 뵙고 가까이에서 그분들의 생활을 보면서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흉내낸 적이 있고, 또 옳지 않은 것도 높은 분이 하는 것은 근사해보였던 기억이 난다.

 남편의 권력을 등에 업고 열심히 땅장사하시던 어느 사모님, 바로 그분이 내가 독일로 온 뒤 장관 사모님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기분은 요즘 신문을 잃고 난 뒤의 씁쓰레한 뒷맛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한번은 우연히 만난 어느 재벌 총수님께 좋은 말씀 있으시면 한마디 해주십사 하고 부탁드린 적이 있다.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 대재벌 총수님은 거짓말 같게도 갑자기 내 귀에 입을 슬며시 대시더니 "돈 있으면 금 사!" 하시는 것이었다.

 하기야 내가 낮에 묻었던 축구화 바닥의 흙이 생각나서 자다가도 뛰쳐나와 손질을 해놔야 속이 시원한 것만큼이나 그분도 자나깨나 돈버는 궁리를 해서 대기업을 이룰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나이 어린 나에게 하는 충고치고는 분명히 야(?)했었다.

 

p68. 레버쿠젠시가 온통 차붐 축제

 8년만에 UEFA컵이 서독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내 품으로.

(참고 : 1987-88 UEFA 우승은 레버쿠젠이 차지. 당시 상대팀인 RCD에스파뇰은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1차전 홈경기에서 3:0으로 승리. 레버쿠젠의 홈경기에서 4점차 이상으로 승리해야만 하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바로 이 절대절명의 2차전에서 차붐이 후반 81분 극적인 3번째 골을 넣으면서 3:0으로 레버쿠젠이 승리. 이후 1,2차전 동점/동률이 된 상황에서 연장전을 진행하지만 결국 양팀 모두 골을 넣지 못하고 승부차기로 간다. 승부차기에서 레버쿠젠이 3:2로 짜릿한 우승을 차지하며 일약 차붐은 레버쿠젠의 영웅이 된다.)

 뜨거워서 터질 것 같은 팬들의 열광과 환호는 8년 전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하늘에서는 [원더풀,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라는 왕츠가 높은 테너 가수의 음성으로 쏟아지고 관중들은 함성과 흥분으로 운동장을 덮고 있었는데 간간이 보이는 노란 바탕에 까만 붓글씨의 응원 플래카드는 나에게 또 다른 흥분을 더해 주었었다.

 '범근아, 너 알지 끝내줘라."

 나의 세 번째 골이 터졌을 때부터 UEFA컵은 내게 돌아오고 있었다.

 그 당시 내 나이 34세, 바로 그 감격스러웠던 순간에 나의 축구 인생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충동은 너무 감상적인 것이기만 했을까.

 더 이상 바랄 것도, 바라고 싶은 것도 없었다.

 왁자지껄 집으로 몰려들었던 한국 손님들이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떠난 것은 새벽 2시였다.

 도무지 잠자리에 들 수 없는 흥분 때문에 슬리퍼를 신은 채로 파티장에 다시 돌아갔을 때는 레버쿠젠 시도, 파티장도 온통 취해 있었다.

 깊은 밤에 빵빵거리면서 돌아 다니는 자동차, 어깨에 어깨를 걸고 훈훈한 초여름 밤을 맥주로 식히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무리들이 레버쿠젠을 온통 메우고 있었다.

 취한 경찰이 팬들과 어울려 [오! 미스터 나이스]를 신나게 부를 때 푸른 제복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입는 것인지를 그들은 잊은 지 이미 오래된 듯해 보였다.

 "부미!"(감독이 부르는 나의 애칭)하고 집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파티장에 들어선 나를 끌어안은 감독과 부인의 벌겋게 젖은 눈은 지난 세월 동안 그와 우리가 나눈 고통의 밀담을 소리없이 생각나게 하고 있었다.

 눈물과 웃음이 결국은 같듯이 고통과 영광은 같은 무게로 우리의 인생에 매달려 있는 모양이다.

 손수건을 링 위로 던졌다는 신문들의 빈정거림 속에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던 바로 그 감독이 떠나기 1주일 전에는 레버쿠젠의 영웅이었다. "이 컵은 나의 이별의 왕관이다"라고 반쯤 취해서, 아니 하나도 안 취해 있던 감독은 소리쳤다.

 나는 그때 뭐라고 소리쳤을까.

 그 밤의 모든 일들이 꿈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오픈카를 타고 시민들 사이를 누비며 8년만에 안아본 UEFA컵은 어느새 살찐 아들 녀석처럼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p87. 마라도나는 진짜 작은 거인

 1987년 크리스마스 전에 서독 축구 국가대표 팀이 남미원정 중 브라질 및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팀과 친선경기를 가졌었다. 독일에서는 한밤중에 중계가 되었는데 경기 내용이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그 경기의 해설자는 연방 디에고 마라도나의 화려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지 않고 TV를 시청한 대가는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날 저녁 마라도나가 보여준 플레이는 기술이나 묘기라기보다 차라지 천진한 어린아이의 재롱 같아 보였다.

 수만 관중이 디에고를 외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미칠 듯이 환호하는 것을 작은 키의 마라도나는 마치 우리 집 세찌가 도리도리 짝짜궁을 하면서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치 긴장이 무엇인지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아이 같았다.

 그런데 1988년 초에 마라도나가 속해 있는 이탈리아의 나폴리팀과 언젠가 내가 가려고 했던 AC밀란과의 경기에서 나는 또하나의 작고 귀여운 '마스코트'를 보고는 나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그래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단계를 벗어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987년 유럽의 최우수 선수였던 네덜란드 출신의 머리를 갈래갈래 땋은 그 흑인 소년은 돌아가는 템포가 질러가는 상대 선수보다 빠를 만큼 스피드가 대단했다.

 그러나 그보다 개구쟁이 흑인 꼬마를 뻥튀기 기계에 올려놓고 튀겨놓은 것 같은 어른 개구장이의 천성이 내 눈엔 더욱 돋보이는 무기로 보였다.

 더욱이 요즘은 10년, 20년 전처럼 펠레는 영원히 브라질에, 베켄바워는 언제까지나 독일에 머무를 수 없는 세계 축구의 현실로 볼 때 이들의 낙천성이야말로 어느 곳에서든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인 듯했다.

 레버쿠젠 클럽에서 발간한 책에 실린 나에 관한 소개란에서 리벡 감독은 "그는 뛰어난 운동(육상)선수다. 그리고 그는 팀의 어느 곳에나 세울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유일한 선수"라고 얘기했다. 이와 비슷한 얘기는 나를 가르쳤던 감독 중 특히 부흐만과 크라마가 자주 했던 것 같다. 기초가 가장 완벽하다느니 가장 뛰어난 기술을 습득한 선수라느니 하는 식으로.

 그러나 나는 분데스리가 10년 넘은 경험을 통해 볼 때 내가 서 있는 이 위치에서 마지막 단게로 올라서기엔 성격적으로 담대하지 못하다는 크나큰 약점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하는 경기에 대단한 손임이 오게 되면 마라도나처럼 즐겁고 신나는 게 아니라 부담스럽고 불편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가 응원 많이 할 테니 잘하라"라든지 "한 골 넣어라"는 얘기는 일부러 안 들은 걸로 한다. 솔직히 말해 전혀 고맙거나 도움이 안되는 심리적인 부담만 쌓이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깰 수 없는 담, 늘 경기에 신중하게 임하는 나의 성격은 감독들 눈엔 만점일지 모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펠레나 마라도나처럼 한 단계 높은 더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p106.

 고등학교 시절 허리가 아파 쩔쩔매고 있을 때 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나 계신 장운수 선생님은 거액의 자비를 들여 나로 하여금 한의원에서 금침을 맞게 했다.

 머리카락보다도 더 가는 금침을 척추 부위에 집어넣었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 이후 통증 없이 경기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담당 한의사의 말에 따르면 75년이 지나면 침 자체가 없어지고 효과도 사라진다는데 요즘은 이 금침이 온몸을 돌아 당시를 회상하게 만든다.

 금침은 종아리, 허벅지, 무릎, 어깨 등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는데 처음에는 무릎이나 종아리 같은 데서 전기가 오는 것처럼 당기고 아팠다. 그러나 이제는 통증이 있을 때마다 '아! 지금은 이 녀석이 이리로 왔구나!'하고 침이 있는 곳을 알게 된다.

 독일에 온 지 얼마 안돼서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을때 의사인 룬츠하이머가 하루는 기겁을 하고 엑스레이 사진을 들고 달려왔다.

 척추 속에 쇠가 들어 있고 신장도 '쌍둥이 신장'인 때문이었다.

동양 침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척추에 왜 쇠가 들어가 있으며 또 어떻게 집어넣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기네 방식으로는 등을 째고 집어넣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내 등에는 수술한 흔적도 없으니 금침의 효과는 접어두고서라도 침을 어떻게 넣었을까 하는 점부터가 궁금했던 것이다.

 나는 신장이 양쪽에 두 개가 있다. 고무풍선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으면 얇아지듯이 두 개인 경우는 그 벽이 무척 얇기 때문에 작은 충격에도 쉬 상하게 된다고 한다. 당시 나의 부상은 상당히 심해서 소변에 피가 계속 섞여 나오고 있었다.

 정상적인 신장을 가진 사람도 그 위험도가 상당히 높은데 나처럼 유난히 얇고 큰 신장을 가진 경우는 한층 더 위험하다는 의사들의 충고가 있었다.

 

p119. 배고픔.

 1985년 독일에 들른 고등학교 코치 두 분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모처럼 뵙는 한국 분들이라 반갑기도 했고 청소년 축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시골 아저씨 이름이 생각나는 것처럼 나를 깨우는 얘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축구 선수들에게 일기를 쓰게 해서 거두어 읽어봤더니 실컷 한 번 먹어봤으면 하는 얘기가 가장 많더라는 것이다.

 '배고픔'

 지금은 나 역시도 잊고 산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있어서도 가장 절실한 문제는 먹는 것이었다.

 언젠가 라도 한번 실컷 먹고 싶었던 라면. 운동을 마친 뒤 혜화동(참고 : 차범근이 나온 경신고등학교가 혜화동에 있음)에서 목욕하고 학교까지 올라가려면 골목골목에서 나는 찐빵, 만두 찌는 냄새, 단순한 군것질의 욕구가 아니라 성장기 청소년의 육체 바닥에서부터 나는 허기가 그것을 찾는 것이었다.

 기름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반찬에 밥. 그것도 상급생이 아닌 다음에는 먹고 싶어도 숟가락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으니 나에게도 그 당시 머리에 꽉 차 있는 욕구는 "먹고싶다. 실컷 한번 먹어봤으면"하는 것이었다.

 남자의 신체는 고등학교 과정을 지나는 동안 완성된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성장기의 자녀들에게 옷 사대기 신발 사대기가 힘들다고 투정하시겠지만 우리의 신체가 그만한 발달을 하려면 물만 먹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특별히 단백질이 가장 많이 요구되는 시기가 나는 이때라고 생각하다. 하루가 다르게 만들어지고 성장해 가는 신체의 세포들, 이 세포들의 양적 팽창과 지적(질적의 오타인듯) 향상을 도우려면 단백질, 쉽게 말해서 고기가 꼭 필요하다.

 작은 동양 사람과 큰 서양 사람, 작은 옛날 사람들과 큰 요즘 아이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나처럼 영양실조다 뭐다 하면서도 179cm까지 자란 사람도 있지만 어쩌면 나도 그 당시 잘만 먹었으면 김재한 형만큼이나 컸을지도 모른다.(참고: 김재한은 1947년생으로 72년부터 79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며 키는 190cm이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내가 26세에 독일에 왔는데 독일에서 생활하는 동안 거의 2cm가 자랐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말이다. 나는 180cm에 가깝다. 독일에 와서 처음에는 하루 저녁에 1kg의 쇠고기도 먹어치울 수 있었다. 남들은 놀랐지만 나는 먹을 수가 있어다.

 내 몸의 세포들은 피고 싶은 의지가 더 강했던지 청소년기에 다 피지 못한 것들이 늦게라도 화분에 물준 것마냥 핀 모양이다. 

 2cm. 키의 2cm는 작은 숫자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후배들 고등학교 선수들은 잘 먹고 잘 크고 그리고 축구에 기술 향상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두뇌 발달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숲의 나무를 잘 기르는 것과 같은 식이다. 낙엽을 긁지 않고 놔둬서 거름이 되게 하고 적당한 비가 수분이 되었으면 한다

 대전상고 선수들은 그 학교 출신 선배들이 한 명씩 선수를 맡아서 먹이고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배불리 먹게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축구인의 한사람으로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지면을 통해서도 그 도와주는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다른 ㅎㄱ교에서도 더 많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도시락을 두 개씩 사와서 맛있는 반찬을 먹게 해줬던 고등학교 때의 내 짝 경일이한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p131. 훈련량과 위장병

 한국의 9월은 더위가 한풀 꺾이기 시작하는 때다.

 7,8월 뒤통수가 띵할 정도로 더운 날 하루 세 번 훈련을 하고 나면 밥 먹기가 귀찮아 물에 말아 훌훌 마시는 것으로 한끼를 때우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우리 나라 축구 선수 중에는 위장병 환자가 유난히 많다.

 한때 독일에서 배구 선수로 활약했던 이희완 씨는 독일로 건너온 뒤 위장병이 없어지고 밥맛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나는 그 원인이 독일에서 훈련을 무리없이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믿는다.

 사실 나는 한국의 선배들을 뵐 때마다 우리나라 축구는 훈련량이 너무 많다고 말하지만 그럴 때마다 도리어 "한국의 사정을 너무 모르는 이상론"이라는 면박과 함께 다른 데 가서는 그런 소리 하지도 말라는 충고를 듣게 된다.

 자동차의 경우 적재적량이 있어 너무 많이 실으면 고장이 나고 수명도 단축된다.

 나는 인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단순노동도 적정 노동시간을 초과하면 능률이 줄고 사고의 위험이 높아지는데 하물며 고도의 기술과 정신집중을 요하는 운동에서 이미 지쳐 있는 몸과 마음으로 훈련을 계속할 때 부상이 속출하리라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웬만한 운동 선수치고 해마다 몇백만원씩 들여 보약을 복용하지 않는 선수가 거의 없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보약 값을 들이고 또 많은 양의 훈련을 하면서도 우리나라 선수들이 국제 대회만 나가면 왜 뒤떨어지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곧잘 "선천적으로 타고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체력이야 말로 적당한 운동과 휴식, 그리고 좋은 식사로 얼마든지 향상시킬 수 있다. 이제는 옛날같지 않아서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연구 결과들이 우리로 하여금 효과적으로 체력을 보강하고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우리 선수들에게 도움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할 지금 적당한 훈련량, 효과적인 훈련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병난 위장에 몇백만원어치 보약을 쏟아넣는 것보다 건강한 위장에 사과 한 알이 우리 몸에는 더 유익하지 않겠는가.

 

 p153.

 내가 잘 아는 이탈리아의 한 친구는 "정신나간 듯해 보이는 포르노 배우를 국회의원으로 뽑는 너희도 참 한심한 나라다"라는 나의 공박에 천만의 말씀이라며 펄쩍 뛴다.

 이유는 '마피아가 판을 치는' 이탈리아에서 그것은 전체 정치인에 대한 일종의 침묵 시위라는 것이다. 마피아와 손잡는 정치인, 부정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우리는 도둑이나 강도보다는 차라리 미친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뜻을 전하려는 의도라는 얘기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p155. 독일에서 지켜본 대통령 선거.

 

 1987년 독일에서 고국의 대통령 선거를 TV로 지켜보았다.

 과정이나 결과에 무심할 수 없는 나로서는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최루탄이 터지는 등의 광경을 TV로 보고 더욱 착잡해지는 심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정치에 무식하고 무관한 나 같은 사람도, 아니 어쩌면 초등학생 정도의 사고력만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두 사람에 한 사람 꼴로만 나가 싸웠으면 멋진 승부가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세가 나에게로 기울어졌다"며 저마다 자기 도취에 빠진 얘기를 들은 뒤 이들이 한결같이 참패를 당하고 난 후 생각해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 뿐이다. 선거를 한다는 그 자체가 자못 신기하면서도 기특하고 또 한편으로는 선거가 있기까지 최루탄 속에서 잘 참아준 시민들이나 일부 열성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멋진 플레이를 발휘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축구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줄 알지만. 그래서 독일에서 1주일에 두 번씩 몰아서 오는 신문을 보기 위해서 10만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구독을 했던 것이다.

 이제도 다 지나간 얘기다. '부정선거다' '관권 개입이다'하는 소리도 이제는 듣기 싫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라도 듣고 싶고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두 분이 다 많은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잘못되었던 당시의 판단을 시인하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귀신이 씌었나 보다고 한탄을 한다. 누가 돈을 먹었다는 식의 얘기보다는 훨씬 마음이 가는 한마디다. 많은 사람들의 말뜻조차도 애매하게 "그럴 줄 알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두 후보의 득표는 큰 것이었다. 

 '집안싸움'에 진력이 나서 떨어져 나간 숫자까지 합친다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민들을 외면한 것은 그분들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일단락 된 지금 나는 두 분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순수하고 젊은 우리 학생들이 더 이상 데모로 희생되도록 부추기거나 방치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부정선거를 따지기 전에 자신들의 판단 착오였음을 설명하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정치가답게 새로운 정부에 강력히 반영시킬 것을 약속해야 한다. 이제는 하나와 두리도 TV를 볼 때마다 자꾸 묻는다.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이냐"고. 아이들이 커갈수록 대답이 자꾸 궁해지는 아빠들의 체면도 좀 생각해줬으면 한다.

 

p157. 참으성 심어주는 부모의 용기

 

 해발 3천400m에 있는 스키장까지 스위스의 전동식 톱니 기차로 올라가려면 30분은 족히 걸린다.

 그러니 플랫폼에 꽉 찬 스키꾼들 사이에서 애들이 자리라도 잡고 앉아서 가려면 여간 동작이 빨라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리부터 "하나야 두리야, 아빠가 너희들 스키 들고 갈테니까 너희들은 먼저 가서 앉아라"하고는 남들이 못 알아듣는 우리나라 말로 무진장 열심히 교육을 시켰다.

 그러고도 모자라 기차가 도착하자 괜히 마음이 조급해서 또 한 번 "하나야 두리번거리지 말고 앞으로 가"하고는 남들이 못알아듣는 소리지만 그래도 느낄까 봐 되도록 부드러운 멜로디로 다그쳤는데 내 뒤에 있던 꼬마 녀석도 마음이 급했던지 나를 헤집고 앞으로 갔다.

 그때 그 애의 아버지가 남부 사투리가 잔뜩 섞인 독일 말로 "천천히 타도되는데 뭘 그래"하면서 애를 끄집어 도로 내 뒤에 세우고는 "미안해요"하면서 자기 아들의 한쪽 팔을 꽉 붙드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세상 살다가 그때만큼 스스로 무안해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더구나 내 나름대로는 애들 교육을 제법 진지하게 시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 집에서 지내던 많은 한국분들도 애들 교육이 잘돼 있다고 칭찬을 해왔던 터라 그 충격은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가장 큰 고질병이라고 하는 조그함과 이기심을 나 자신은 얼마만큼 고쳤다고 믿어왔는데 자식에게까지 대물림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도 했다.

 언젠가 우리 두리가 학교 학예회에서 시 낭송을 하게 돼 있었는데 그만 며칠 전에 감기를 앓는 바람에 선생님이 다른 아이를 대신 시키기로 한 적이 있었다.

 며칠만에 학교에 간 아들 녀석이 너무 실망하는 것 같아서 제 엄마가 선생님께 반반 나눠서 시키자고 부탁을 했었는데 그 얘기를 들은 친한 이웃집 아줌마가 하나 엄마의 생각에 자기는 반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두리가 예기치 않는 사건에 부딪쳐서 참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배우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는 얘기였다.

 "자기애가 그랬다면 가만있겠어?"하고는 꿍얼꿍얼거리던 하나 엄마가 두 손을 들고 만 일이 나중에 또 있었다.

 그 집 애하고 두리가 같이 축구를 하러 다니는데 시합이 있다고 해서 그 집 식구가 온통 몰려갔던 모양이다.

 갔다 와서는 코치가 토마스를 경기장에 내보내지 않아서 줄곧 벤치에서 울고 있었다는 엄마의 얘기를 듣고 왜 애들 축군데 좀 얘기해서 잠깐이라도 뛰도록 해주지 그랬느냐고 했더니 물론 뛰는 것도 즐겁겠지만 참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좋은 경험이니까 배우도록 가만 놔뒀다는 것이다.

 정말 부모로서 대단하다고 할 만한 용기다.

 예기치 않은 불이익, 손해를 비켜나가도록 도와주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교육이란 게 부모가 돼 보니 참 쉽지가 않았다.

 정작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인 것 같다.

 

p162

 

 "어느 한 나라의 축구가 흥하고 안하고는 골목 축구에 달려있다"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베켄바워가 그랬었고 마라도나, 펠레가 모두 골목 축구로 시작했다. 가난한 집에서 변변한 장난감도 없이, 또 자기가 몸담고 꿈을 키울만한 방 하나도 없이 살다보니 길거리가 곧 자기 방이 되었고 아무 것도 필요없이 맨발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축구다 보니 닥치는 대로 발로 걷어찼을 것이다.

 

p193. 골프 대중화에 입맛 씁쓸

 

 '대중화'라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대중'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았더니 '수가 많은 여러 사람, 민중, 많은 사람들' 그리고는 부연해서 '특히 노동자, 농민들의 일반 근로 계급'이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물론 꼭 사전을 찾지 않더라도 대중이라는 말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별 무리 없이 포함시킬 수 있는 비슷한 삶의 수준을 누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뜻한다는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신문을 통해 '골프의 대중화를 저해하는....' 이라는 기사를 대할 때면 솔직히 말해서 입 맛이 쓰다.

 엄청난게 비싼 장비에 물리는 세금과 골프장 입장료, 회원권, 캐디 팁 같은 것이 대중화를 저해 한다고 목청을 높이니까 대중화와 가장 거리가 먼 이 부분은 얘기하지 않기로 하더라도 한번 필드에 나가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18홀을 도는 데 필요한 네 시간에다 왔다갔다 하면서 소요되는 시간까지 합친다면 일반 대중에게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어느 날을 잡아도 쉽게 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거기다 멀찌감치 떨어져 위치한 골프장까지 한 짐이나 되는 골프채를 챙겨서 가려면 자가용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그들이 얘기하는 대중의 수준에 낄 수가 없게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 나라처럼 좁은 땅에 시립 공원 하나도 제대로 없는 판에 아무리 작은 골프장이라도 십만 평은 넘어야 하는 그 면적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 넓은 그림 같은 잔디밭에서 몇 사람이나 동시에 즐길 수 있겠는가?

 염치 없는 비교가 되겠지만 가장 작은 십만 평짜리 골프장도 국제 규격의 축구장 33개에 해당되는 면적이다.

 33개의 잔디 축구장에서 700여 명이 동시에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뛰는 모습을 생각한다면 땅의 효용성에서도 골프는 대중화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다 골프를 치는 나의 입장에서 얘기해 본다면, 들이는 시간과 돈과 그 밖의 것들을 비교해 볼 때 실제적인 운동량에 있어서는 테니스나 탁구 또는 축구 같은 것들에 비해 형편 없이 못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골프는 분명히 재미있는 운동이다. 넓은 필드를 가로지르는 장타가 제대로 맞았을 때에 '딱'하는 소리는 통쾌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나도 가끔씩 필드에 나가곤 한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것 자체가 특권이며 고마워해야 할 일인 줄 모르고 더 많은 기득권을 얻기 위해 대중화를 앞세우는 몰염치는 삼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골프장의 사람들을 대중이라고 부르면 오늘도 점심시간에 한강 다리 및 고수 부지에서 하루종일 구부렸던 다리를 모처럼 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즐겁게 볼을 차는 택시 운전기사 아저씨들에게는 붙여 줄 이름이 없지 않겠는가.

 

p198. '아침의 나라'의 인정을 아시나요

 

 1988년 어느 날 독일 여성지에 실린 슈미트 전 서독 수상 부부의 사진은 무척 보기가 좋았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얼굴 색도 좋아진 것 같고 표정도 밝고 아름다웠다.

 슈미트 씨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생전 처음 몇 백만 마르크를 모았노라는 자랑도 서슴지 않았다. 관직에만 있던 그로서는 돈을 벌 기회도 없었는데 이제는 책도 쓰고 강연회도 참석하면서 상당히 많은 인세와 사례비를 받는다고 했다.

 1회 강연 사례비가 2만 마르크. 한국 돈으로 8백만원이라고 하니 월급쟁이 생활에 길들여진 그분으로서는 엄청난 돈임에 틀림없다.

 그분이 수상직을 그만두고 첫 해외 여행할 때의 신문 기사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모처럼 공식 여행이 아닌 해외 나들이를 하면서 이 부부는 비행기의 서로 다른 칸에 떨어져 앉게 되었다.

 전직 수상에 대한 예우로 비행기의 1등석을 탈 수 있는 특전이 부인에게까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등석은 엄청나게 비싸다. 나도 가끔 공짜로 태워 줘서 타 보면 돈 있는 사람들의 돈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슈미트 씨의 부인도 수상 시절에는 1등석이나 전용기를 탔을 것이다. 또 그 자신이 원하기만 했다면 아무리 월급쟁이 관료 노릇만 했다고 해도 설마 남편과 나란히 1등석에 앉을 만한 방법쯤이야 없어겠는가.

 나는 참 용기 있는 분이라고 느꼈다. 가식이나 허영보다는 정직과 진실을 더욱 자랑스럽게 여길 줄 아는 용감한 여성이었다. 

 싹둑 잘랐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의 헤어스타일은 용기나 정직과 상당히 어울려 보였다. 결코 아름답게 치장하지도 다듬지도 않은 그분의 모습이 어느 날 유난히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것은 그 전날 뉴스에서 백담에서 은둔 중인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숨과 함께 눈가에 뜨뜻함을 느낀 것은 나뿐이었을까.

 5공화국이라면 눈을 길게 뜨고 째려보던 나였지만 그날 만큼은 그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개털 모자 같은 것을 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산사 같은 데서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많은 역사가들이 우리 민족이 우유부단하기만 한 바보 같은 정 때문에 역사가 걸러지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하더라도 바보 같은 정을 담은 그 우유부단한 피가 바로 내 속에서도 흐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p217. 나눠진 땅 갈라진 이념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이북 방문을 허용하는 대통령의 발표가 있었을 때, 그 발표를 듣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호기심이 발동했었다. (참고 : 1988년 7월7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7.7선언을 의미한다. 이 선언의 6개항중 해외동포의 방북허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북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막상 법으로 이북 방문을 허용한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은근히 이북 사람들 축구하는 것도 한번 보고 싶고 절경 중에 절경이라는 금강산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대사관, 한국 관광 공사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기대에 부풀기도 했었는데 불과 몇 달이 지난 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두려울 만큼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 것 같았다.

 동과 서로 갈린 나라의 서쪽 한편에서 한 10년 살아본 나는 "이 사람들은 남의 탓에 갈라져 살뿐이지 자기들끼리는 통일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나름대로 믿어왔었다.

 우선 자유롭게 서로 왕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이나 유럽의 각종 대회 때면 동독의 메달도 마치 통일된 독일의 것마냥 좋아하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랬다.

 얼음판의 여왕인 동독의 카타리나 비트가 두 번째 동계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을 제패했을 때 '우리의 카타리나'라는 표현으로 신문 1면 전체를 장식했었다.

 실제로 그녀는 서독 매스컴의 비중으로 친다면 테니스의 보리스 베커나 슈테피그라프에 못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1988년 겨울 뮌헨에서 시상하는 밤비상의 스포츠 부문 수상자로 결정되어 뮌헨에 도착했을 때 어떤 호텔에 묵으며 무엇을 하고 시상식에서는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하는 것까지 온통 사랑 어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TV앞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는 그녀는 '우리의 카타리나'라는 사랑이 듬뿍 담긴 얘기가 무색하도록 "당신네 나라 사람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었다.

 나는 상당히 놀랐다. 그리고 곧 "내가 이쪽에서만 보았기 때문이었지 동독은 아직도 냉랭한 모양이구나"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나의 질문을 받은 꽤 많은 서독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동독을 이웃나라 중 하나 이상으로 생각지 않는 것 처럼 카타리나도 그렇게 믿기 때문에 '당신네 사람'이라는 말은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렇다면 나야말로 한 부분만 보고서는 내가 산 10년이란 숫자로 독일을 다 아는 것처럼 지레 믿은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북에 가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한번 가보고 싶은 이웃 나라였을까 아니면 누구처럼 내가 가서 통일의 물꼬를 터야만 한다는 어마어마한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저것도 아닌 나 같은 사람까지 뭐가 문지 모르고 구경하겠다고 날뛰니...

 

p221. 빛바랜 축구 명문 도시

 

 프랑크푸르트와 뒤셀도르프의 전력이 최근 몇 년 사이 크게 약화되면서 관중이 줄어 팀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프로 축구는 단순한 관람객이 아닌 고정 팬을 많이 확보해야 원만한 팀 운영을 기대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두 도시는 수년 전부터 국제 도시로 탈바꿈, 깔끔하고 단정한 국제기업인들이 자리를 차지해 버리면서 축구팬을 잃게 됐다. 외국인들이 자꾸 늘어나는 현상 때문에 특유의 옷 색깔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향토팬은 줄어들고 대신 뜨내기 구경꾼들이 운동장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두 도시는 돈이 많아서인지 엄청난 돈을 들여 유치하는 이반 렌들이나 보리스 베커의 프로 테니스 시범 경기가 벌어질 때면 그 비싼 입장권이 몇달 전부터 매진되곤 한다.

 축구는 서민운동이다. 테니스와 달리 단순히 보는 것으로 즐기기보다는 '네편 내편'이 훨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어쩌면 이 편가름이 프로축구의 바탕인지도 모른다. 

 향토색이 짙은 지역일수록 좋은 팬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데 바이에른 뮌헨 같은 경우가 좋은 예다. 독일의 가장 남부에 있는 이 바이에른은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알프스 지역이다.

 날씨가 좋고 지역이 방대한 데 비해 뮌헨 팀만이 이 지역을 독점하고 있어 늘 많은 팬을 확보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특유의 사투리를 쓰는 그들의 커다란 생맥주 조끼가 말해 주듯 그곳 사람들의 낙천적인 농심이 많이 작용하고 있따.

 이와 달리 중부의 루르 지방에는 반경 150km가 채 안되는 좁은 지역 안에 분데스리가 팀(18개)이 반 수 이상 속해 있다.

 물론 뮌헨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규모가 작지만 이런 지역은 또 나름대로 팬을 모을 수 있는 요인을 갖고 있다.

 광산, 철광산업 등 늘 어두운 데서 노동하는 이 곳 주민들에게 토요일 늦게 벌어지는 축구 경기는 모처럼 소리도 지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노무자들이 대부분인 이 지역 특성대로 옆동네를, 혹은 이웃 광산을 이기고 싶은 심리가 발동, 거의 군 단위마다 팀을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도르트문트, 살케, 보쿰... 이런 팀들이 바로 이곳에 속해 있다. 아무튼 스포츠, 특히 축구는 양쪽 골대 뒤에서 편 갈라 싸우는 팬들이 있어야 신이 나고 구단으로서도 존재 가치가 있다.

동독에 갇혀 있는 서베를린이 수많은 세제 혜택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인들이 그 곳에서 살기를 피하자 이제는 외국인들의 도시처럼 되어 버렸다.

 그리고 뒤따라 나타난 자연적 현상은 그 막강하던 베를린의 팀들이 모두 2부 리그, 혹은 아마추어로의 전락이었다.

 이런 것과 비교하여 우리 나라를 보면 서울은 프로 축구가 뿌리를 내리기에 가장 부적합한 곳이며 영호남 지역이야말로 팬들과 호흡하는 축구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는 호남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 없어 다른 지역의 다섯 개 팀만으로 올 시즌 프로 축구 대회를 치르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보다 근본적인 지역 연고제의 정착, 나아가 진정한 팬 확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호남지역의 프로 팀 창잔이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p236. 한국 축구 활로 새 모델 창안뿐

 

 1990년 로마 월드컵이 끝난 후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거기에 참가했던 상당히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부러워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카메룬'이라는 검은 대륙의 가난한 나라를 상당히 부러워하고 있다. 나 역시도 카메론의 검은 돌풍이 지나간 후 나름대로 호기심을 가지고 이책 저책 혹은 보도 자료를 뒤적이면서 그 이유나 비결(?)이 어디에 있는 관심을 가졌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카메룬을 흉내낸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오늘이 엄청난 투자, 과학적인 훈련, 정부 지원, 해외 연수 같은 데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흉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파악한 카메룬 혹은 아프리카 축구의 비결은 그들이 못살고 덜 깬 덕분에 그 곳 아이들이 널려 있는 빈터에서 짚이나 잔디를 묶어서 맨발로 공을 찰 수 있는 여유(?)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월드컵의 스타 한지 뮐러는 "우리는 브라질보다 훨씬 더 많은 인재들을 갖고 있다. 그 아이들은 공도 유니폼도 운동화도 없이 맨발로 공터에서 짚더미를 차고 있지만 고금만 도와준다면 우리는 세계적인 축구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다. 이렇게 해서 키워진 선수들이 해외로 나가 더욱 다듬어지는 것은 그 다음 과정이다.

 나 역시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니가 굉장히 늦게서야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 본 셈이다. 그러나 어렸을 적에 동네 앞마당에서 애들과 어울려 고무신 신고 짚이나 돼지오줌통으로 만든 공을 공부 걱정 안하고 맘껏 차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때의 경험이 같은 시기에 엄격한 훈련을 받은 다름 동료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아이들은 축구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하더라도 뛰어 놀 만한 '시간'과 '공간'이 없으니 그 시절에 키울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과 응용력을 키워 낼 수가 없고 그저 정해 주는 생각과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팬들은 우리 축구가 답답하다고 한다. 또 지도자들은 "독일 선수들은 위치 선정이 뛰어나다"면서 훈련 방법이나 지도비결이 있는가를 묻기도 한다.

 'ㅋ'으로 시작하는 카메룬과 콜롬비아가 1990년 월드컵 대회 첫 경기에 성공했다고 '코리아'도 벨기에를 이길 것이라는 엉뚱한 발상이 여지없이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천편일률적인 '감'이나 '방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맞는 이상적인 제도와 훈련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카메론의 방법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p298. 비오는 날의 축구화

 

 비가 내리는 저녁 경기였다.

 레버쿠젠 팀에서 축구화 손질이며 유니폼 정리 같은 잡일을 하는 하랄드가 축구화의 양 사이드에 붙은 아디다스 3선에 열심히 흰색을 칠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같아 보여서 내 신발은 그냥 달라고 했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이었다. 흰줄이 잘 안보이면 아디다스에서 자기에게 화를 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들의 지독스러운 상혼에 고개가 숙여지는 면도 없잖았다.

 진땅에서 45분을 뛰고나면 흰 선은 커녕 축구화인지 발목인지조차 구분이 안되는데 TV앞에 앉아 자기네 상표가 화면에 몇 분이나 나오는지 스톱워치로 재고 있는 그들이고 보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게 분명하다.

 아디다스에서는 스타들에게 입힐 옷을 '프로모션'이라고 해서 따로 만드는데 공짜로 얻어 입는 그 옷에는 정말 염치 없으리만큼 그들의 상표를 붙일 만한 데는 다 붙인다. 심지어는 어깨 위에까지 붙어 있는데 TV카메라가 얼굴을 클로즈업 하더라도 가슴에 있는 것처럼 잘리지 않고 나올 수 있도록 한 아이디어다.

 그러나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TV쇼나 가족사진을 찍을 때는 공짜로 얻은 그 옷을 잘 입지 않는다.  그래서 아디다스는 선수 개인과 계약을 해서 TV나 신문에 꼭 아디다스를 입고 출연하는 조건으로 상당한 대가를 지불한다.

 내가 독일에 처음 왔을때에도 아디다스는 이같은 계약을 제시했다.

 광고를 위한 사진 테스트도 한 적이 있는, 당시 한국에서 아디다스의 판매가 저조했기 때문에 광고가 아닌 평상시 옷을 입고 다닌다는 계약만 하자고 해서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달 후 테스트용으로 찍은 사진이 내 허락 없이 한국에서 광고,판촉용 포스터로 사용되었다. 물론 아디다스 같은 대기업이 장난을 치진 않았을 것이다. 중간에 누군가의 농간이라 생각하지만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여지껏 아디다스에서 보내주는 애들 옷이랑 신발 등을 입히지만 탐탁치는 않다.

 얼마전 나는 눈이와서 길이 안좋은 때 400km 떨어진 뉘른베르크의 아디다스 공장을 다녀왔다. 그 동안은 클럽으로 공급되는 표준형 축구화를 문제없이 신었다. 그런데 신형 축구화가 나오고서는 내 발에 맞지 않아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구형을 요구하자, 어렵게 두 켤레를 갖다주었다. 하지만 구형 재고도 떨어졌는지 공장으로 와서 발 본을 떠서 전용 축구화를 공급해주겠다는 오퍼가 왔다. 내 발에 맞는 축구화를 신고 싶은 욕심에 못 이기는 체하고 멀리 떨어진 공장까지 가서 발모양을 떴다. 그런 다음 신발 속에 붙이는 보조 스펀지를 내가 원하는 대로 설명하고 요청했다. 신발 전문장인인 슈버거 씨가 "볼 잘 차는 선수들은 다 까다롭더라"면서 웃었다.

 축구화를 전용으로 만들게 되면 한 켤레에 340마르크, 한화 14만원 정도가 든다. 그러니 앞으로는 시합 전에 하랄드가 3선에 흰칠을 하고 있어도 아무말도 안해야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