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에서 시작한다고는 하지만 수준이 낮지는 않다. 현재의 사회,경제,정치적인 이슈를 기반으로 자본론의 현대적 의의와 적용방안에 대해서 저자가 고민한 바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상당히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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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

 한 남자가 동독에서 시베리아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자산의 편지를 검열관이 읽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암호를 정해 두자. 만약 내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였다면, 편지의 내용은 진실이다. 하지만 만약 빨간 잉크로 쓰였다면 그것은 가짜다." 한 달 후 그의 친구가 편지를 받았을 때, 모든 것이 파란색 잉크로 쓰여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매우 훌륭하다. 맛있는 음식도 많다. 영화관에서는 서양의 재미있는 영화를 상영한다. 집은 넓고 고급스럽다. 여기서 살 수 없는 것은 빨간 잉크뿐이다."

 

이 농담은 소련의 '사회주의'를 다뤘지만, 자본주의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는 바로 이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의 세계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빨간 잉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번은 버린 <자본론>이 바로 그 빨간 잉크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본론>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 사회의 부자유를 정황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p19

 도시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남쪽 섬에 사는 어부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나요?

 "왜 너는 매일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거야. 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라."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뭘 할 건데?"
 "돈 많이 벌어서 은퇴하면 느긋하게 낮잠 자고 낚시하며 살고 싶으니까."
 "어, 나는 벌써 그렇게 하고 있어."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매일매일 힘들어하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을까요?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아니면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 그렇다면 위 이야기의 어부는 도시에 사는 우리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p20

 인간은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자연에 작용하여 다양한 것을 만들어 내면서 이 지구상에서 삶을 영위합니다. 의식주 등을 얻기 위해 인간은 적극적으로 자연에 적용하고 그 모습을 변화시키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합니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마르크스는 생리학 용어를 사용하여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라고 말했습니다.

 

p21

 이 책은 물질대사론을 바탕으로 <자본론>을 읽어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필자는 마르크스를 따라 '노동'이라는 행위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조절하는 통제하는 행위가 바로 '노동'입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노동'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노동은 우선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즉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제어하는 한 과정이다.

 

p24

 우리의 삶과 사회,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자연환경의 모습은 우리가 자연에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 작용 방식을 크게 잘못하면 사회와 자연은 황폐해집니다. 그래서 노동은 인간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매우 중요한 활동인 것입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가 '노동'이라는 개념에 주목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착취를 백일하에 드러내고 하는 정치적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물질대사라는 인간과 자연의 본원적 관계를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막연하게만 파악한다면 어느 시대든 인간은 자연과 물질대사를 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 모습은 시대와 지역마다 크게 다르죠.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활동인 '노동'이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고찰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결정적 변화가 있음을 밝히고, 거기서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접근한 것입니다.

 

p28

 화폐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풍요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풍부한 상태, 그것이 바로 사회의 '부'입니다.

 

p33

 사회의 '부'가 '상품'으로 변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가격표가 붙은 '매물(賣物)'이 된다는 뜻입니다.

 

p37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생산이 전면화된 사회', 즉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물건을 만드는 목적, 즉 노동의 목적이 다른 사회와 크게 다릅니다.

 

p39

 왜 이런 상황(부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는 상황)이 벌어지는가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보다 '자본을 늘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자본주의는 이윤추구를 멈출 수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서점을 없애는 등 사회의 '부'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는다 해도 눈앞의 돈벌이를 멈출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p40

 생산 활동의 주요 목적이 '인간의 욕구 충족'에서 '자본을 늘리는 것'으로 바뀌면 당연히 생산방식도, 생산되는 물건도 달라집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되는 '상품'은 사람들의 삶에 정말 필요핮ㄴ지, 정말 중요한지보다 얼마나 비싸고, 얼마나 팔리겠는지, 당시 말해 얼마나 자본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지가 더 중요해집니다.

 

 

 '돈이 되는 물건'과 '필요한 물건'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마르크스는 '상품'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는 '사용가치'라는 얼굴입니다. '사용가치'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유용성), 즉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하는 힘입니다. 물에는 갈증을 해소하는 힘이 있고, 식료품에는 굶주린 배를 채우는 힘이 있습니다. 마스크에도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 '사용가치'가 있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사용가치'가 바로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생산의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품의 또 다른 얼굴인 '가치'입니다.

 

p44

 '사용가치'를 위해 물건을 만들던 시대는 말 그대로 인간이 '물건을 사용하던' 시대였지만, '가치'를 위해 물건을 만드는 자본주의에서는 입장이 역전되어 인간이 물건에 휘둘리고 지배당합니다. 이 현상을 마르크스는 '물상화(物象化)'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이 노동에서 만든 물건이 '상품'이 되는 순간, 신비한 힘으로 인간의 삶과 행동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p47

 그와 동시에 광고업과 마케팅이 늘어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소비자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자신이 쓰레기를 샀다는 것을 금새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품의 마법이 풀려서 싫증이 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제품을 바꾸고, 새로운 쓰레기를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해야 하는 것입니다.

 

p48

 '상품'의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물상화의 힘은 강해지고, 인간은 점점 더 물건에 휘둘리게 됩니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경쟁 원리가 작동해 효율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한 이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물상화의 힘을 강화한 결과, 예상하지 못한 많은 부조리와 비효율, 독점을 낳고 있습니다.

 

 민영화라고 하면, '독재적'이고 비효율적이던 공영/국유사업이 민간의 손에 의해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운영된다는 이미지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어의 마술입니다. 원어인 프라이비티제이션(privatization)은 직역하면 '사유화'입니다. 프라이빗(private)의 어원은 '빼앗기다' '분리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공유하고 관리하던 '코먼'을 빼앗긴 상태라는 뜻이죠. 민영화의 실체는 특정 기업의 권리 독점이며, '상품'의 영역을 넓히는 현대판 '울타리 치기'입니다.

 시장은 결코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돈을 가진 사람뿐이기 때문입니다. 민영화가 진행되면서 공영/국유이던 시절에는 접근이 가능했던 의료나 교육 같은 공공서비스에서 많은 사람이 배제되었습니다. 

 또 시장에서는 '이익'이 우선하기 때문에 수익성 없는 물건이나 서비스는 가차 없이 삭감됩니다. 예산도, 인력도 삭감됩니다. 정말 쓸모없는 것은 당연히 줄여야 하지만, '사용가치'를 무시한 효율화는 꼭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까지 삭감하거나 질을 떨어뜨려 사회의 '부'를 빈약하게 합니다.

 

p54

 가치 논리의 내면화를 보여 주는 잘 알려진 예가 바로 '가성비(코스파, cost performance)'의 사고입니다. 모든 일의 수익률을 추정하고 그에 따라 효율화를 꾀하는 태도죠.

 

 이렇게 가사나 육아는 외주화, 상품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효율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에 서비스산업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성비 사고에 더 깊이 빠져들면 돈이 되지 않는 주민 회의나 축제, 학부모/교사 모임(PTA), 노동조합 등에 참여하는 일이 모두 가성비가 나쁜 것이 되어 버립니다. 가족이나 지인을 돕는 것조차 말이죠. 결국 공동체는 점점 더 말라비틀어지고, 끝내는 붕괴됩니다.

 물론 집안일을 모두 여성에게 맡기거나, 동네 모임에서 '장로'가 거드름을 피우던 옛날이 더 좋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상품화하지 않더라도 가사나 육아에 남녀가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도 있고, 커뮤니티의 힘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선택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대신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남는 시간을 점점 더 돈벌이에 바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더 풍요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이 역설을 미하일 엔데가 쓴 <모모>의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시간 은행'에 홀린 이발사 푸지는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는데도 전혀 여유가 없습니다.

 

 푸지 씨는 점점 더 흥분하고, 침착하지 못한 사람으로 변해 간다. 한 가지,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절약한 시간은 사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마술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푸지 씨의 하루하루는 처음에는 몰랐지만 점점 더 뚜렷하게, 그리고 조금씩 사라져 갔다.

 

가성비를 더 높이고 시간을 절약한다고 해서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압니다. 오히려 여가가 점점 줄어들고, 가족이나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여유도 없어집니다. 그리고 조금의 낭비도 용납하지 못하는 짜증 나는 인간들만 가득한 사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p82

 노예는 단지 외부의 두려움에 의해 노동하지, 자신의 생활(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보장되어 있는)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해 자유노동자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노동한다. 자유로운 자기결정, 즉 자유에 대한 의식과 그에 따른 책임의 감정은 자유노동자를 노예보다 훨씬 더 나은 노동자로 만든다.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결과들>)

 

 노동자들을 움직이는 것은 '일자리를 잃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두려움보다는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자발적으로 일한다'는 자부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깁니다. 실제로 취업 면접에서 "무슨 일이든 죽기 살기로 하겠습니다!"라며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최저한의 생활을 보장받으며 마지못해 일하는 노예와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책임감을 갖고 임하는 노동자는 억지로 일하는 노예보다 더 일을 잘하고, 더 좋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실수하면 자신을 탓합니다. 불합리한 명령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몰아세웁니다. 이는 자본가가 바라지도 않았던 바입니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사고방식을 노동자가 스스로 내면화함으로써 자본의 논리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이를 가리켜 '영혼의 포섭'이라고 말했습니다.

 본래 끝없는 가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고 자발적인 노동자는 자본가가 원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마치 자신이 지행해야 할 모습, 인간적으로 우수한 모습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고도성장기의 '모레쓰 사원(猛烈社員)'이나 버블경제기에 유행한 영양 음료의 캐치프레이즈 "24시간 싸울 수 잇습니까"가 그 좋은 예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자발적 책임감, 향상심, 주체성이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다고 마르크스는 경고했습니다.

 

p86

 노동운동이나 노사 교섭에서도 '임금인상'은 가장 큰 쟁점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마르크스는 임금인상보다 '노동일 제한(단축)'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당시 임금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는데도 말입니다.

 노동일의 제한은, 그것 없이는 모든 해방의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선결 조건이라고 우리는 선언한다. (319/410)

 

 임금이 인상되더라도 장시간 노동이 해소되지 않으면 으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본가가 임금인상 요구를 받아들이면 분명 착취는 완화됩니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자는 "그럼 우리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는 오히려 기업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사태입니다. 임금을 조금만 올려 주고 그 대신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해 준다면 잉여가치, 즉 자본가의 이윤은 오히려 늘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가의 목적은 노동력이라는 '부'를 '상품'으로 가둬 두는 것입니다. '상품'으로 가둬 두는 것은 자유 시간을 빼앗는 것입니다. 임금인상에 따른 장시간 노동이 임금노예 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임금이 조금 오른다 해도 시간을 빼앗긴 노동자에게는 아이와 놀거나 취미를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일하다 지쳐서 책을 읽거나 인생이나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없습니다.

 바빠서 직접 요리할 시간이 없게 되면 외식이라는 '상품'이 팔립니다. 빨래를 해도 건조할 시간이 아깝게 되면 세탁기와 건조기가 팔립니다. 자동 청소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는 가사 대행 서비스도 유행입니다.

 하지만 이런 편리한 서비스가 우리를 여유롭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노동시간이 점점 늘어날 뿐입니다. 이렇게 노동일을 '무제한'으로 만들면 '상품'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자본가들의 사업 기회가 확대됩니다.

 

p98

 자본주의는 엄청난 부를 가져다준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생활은 오히려 여유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욕구와 감성이 메마르고 빈곤해졌습니다. 180년 전, 20대 중반의 젊은 마르크스는 이 상태를 '노동의 소외'라고 불렀습니다. 소외된 삶에 대해 마르크스는 분노를 담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빛, 공기 등 가장 단순한 동물적 청결도 이간에게 욕구된 것을 중지한다, 더러움, 인간의 이 퇴폐, 타락, 문명의 하수구의 오물(이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이 인간의 생활 기반이 된다. 완전히 부자연스러운 황폐, 부패한 자연이 인간의 생활 기반으로 된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 철학 초고>)

 

p101

 상품을 값싸게 하기 위해, 그리고 상품을 값싸게 함으로써 노동자 자체를 값싸게 하기 위해 노동생산력을 증대하는 것은 자본의 내재적 충동이자 끊임없는 경향이다. (338/436)

p102

 임금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관계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일본은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임금은 전혀 오르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생활하는 데 얼마가 필요한지에 따라 임금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하루 일하고 지친 노동자는 먹고 자고 다음 날도 일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노동력의 재생산'이라고 표현했는데,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려면 얼마나 일해야 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필요'의 내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합니다. 음식, 집세, 의복, 여가 비용은 물론이고, 오늘날에는 스마트폰과 인터넷 요금도 포함될 것입니다. 지방에서는 자동차도 필요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자녀 교육비, 노후 자금 등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합니다.

 한편, 지금까지는 일당 1만 엔을 받아야 살 수 있었지만, 생산력이 높아지면 패스트패션과 패스트푸드 덕분에 예를 들어 8,000엔으로도 이전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일당을 8,000엔으로 낮출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비저유직 등을 늘려서 비용 절감을 할 수 있습니다.

 생산력이 높아져 싸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이 노동자가 한 시간 노동으로 창출하는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한 시간에 2,000엔인 가치를 창출한다고 가정할 때, 노동시간이 이전과 같은 여덟 시간이라면 일당 감소분 2,000엔은 고스란히 자본가의 잉여가치가 됩니다.

 이처럼 노동력가치의 저하로 인해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마르크스는 '상대적잉여가치'라고 했습니다.

 왜 '상대적'일까요? 앞 장에서 살펴본 '절대적잉여가치' 생산에서는 노동일의 절대 길이가 연장됨으로써 하루에 생산되는 가치 자체가 증가했습니다. 반면 '상대적잉여가치' 생산에서는 노동일의 길이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하루에 생산되는 가치의 합계는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노동력의 가치가 낮아짐에 따라 이윤이 늘어나는 구조입니다.

 

p105

 자본가들이 생산력을 높이는 기술혁신, 즉 이노베이션에 기대하는 것은 '가치'의 증식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또 다른 목표,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지배' 강화입니다. 오히려 이것이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생산력 증대에 대해 마르크스가 가장 문제 삼은 점입니다.

 자본가는 특별잉여가치를 획득하고자 상품을 최대한 싸게 만들려고 노동자가 '효율적으로' 일하게 하려고 합니다. 즉,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이죠. 이때 효율성은 노동자의 '쾌적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요구되는 것은 노동자를 중노동이나 복잡한 일에서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기술이 아닙니다. 그들이 무단결근도 하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고, 지시하는 대로만 일하도록 하는 혁신, 즉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는 기술입니다. 이런 '일하는 방식의 개혁'이 현대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에 케인스의 예상이 빗나간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노동자는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포섭'되어 자율성을 잃고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도대체 왜 생산력의 상승이 자본의 지배 강화로 이어질까요?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1장 서두에서 소개한 '물질대사'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인간이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노동을 통해 자연과 물질대사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노동과정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상'과 '실행'입니다['구상'과 '실행'이라는 정리는 마르크스 본인이 아니라 해리 브레이버맨이라는 뛰어난 마르크스 연구자가 <노동과 독점자본>이라는 책에서 <자본론>을 연구하면서 쓴 말입니다]

 

p110

 그렇다면 '구상'과 '실행'을 어떻게 분리할 수 있을까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생산공정을 세분화하여 노동자들에게 분업을 시키는 것입니다. 옹기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공정을 거치는지, 각 공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어떤 두고와 방식으로 진행하는지, 몇 분이 걸리는지 등을 자본가가 관찰하고, 직인이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는 작업을 획일적인 단순 작업으로 분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도 직인만이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품들은 애초에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요구되지 않습니다. 자본가들이 만들고 싶은 것은 수작업으로 만든 예술적인 옹기가 아니라, 싸고 나름대로 튼튼한 물건입니다. 깨지거나 부서지면 언제든 저렴한 가격으로 교체할 수 있는 대량생산품입니다. 그런 것들은 직인 한 명이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분업해서 흐름작업으로 만드는 것이 효율도 좋고, 싸게 많이 생산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가격경쟁의 물결에 휩쓸려 길드는 해체되어 갔습니다. 장사가 안되는 직인들은 폐업하거나 생계를 위해 자본가들의 분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길드의 힘은 약해지고, 그만큼 자본가의 힘은 강해졌습니다.

 그 결과 18~19세기 영업의 자유 원칙을 내세운 각국의 입법에 의해 길드의 특권은 폐지되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조국 독일에서도 1869년 길드제의 역사는 막을 내렸고, '규칙 없는 자본주의'는 이렇게 해서 형성되었습니다.

 

p112

 애초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자본가에게 팔아야 햇던 이유는 물리적 생산수단, 즉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업이라는 시스템에 편입됨으로써 무언가를 만드는 생산능력마저 잃게 되었다고 마르크스는 갈파했습니다.

 몇 년을 일해도 단순 작업만 할 수 있는 노동자는 분업 시스템 안에서만 일할 수 있습니다(더 이상 자기 혼자로는 완제품을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자본의 지휘 감독과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분업과 협업은 이렇게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재편되어 노동자의 주체성을 빼앗아 갑니다.

 게다가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 작업이기 때문에 공장 밖에는 나를 대신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다면 꿈을 포기하고 불평불만을 꾹꾹 눌러 참으며 할당량을 달성하기 위해 묵묵히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더 자본가와의 주종 관계가 강화됩니다. - 자유로운 재량의 여지가 사라진 일터야말로 노동이 고통으로 되는 소외의 원인입니다.

 

p113. 인간다움을 앗아 가는 테일러주의

 구상과 실행을 철저하게 분리한 사례로 20세기 초의 '테일러주의'를 소개하겠습니다. 테일러주의는 미국의 기술자이자 <과학적 관리법의 원리>의 저자 프레더릭 테일러가 주장한 관리법입니다. 테일러는 기계공장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기계공, 기술 부장을 거쳐 컨설턴트가 된 인물로, 지금은 미국 경영학의 원조로 여겨집니다.

 테일러는 먼저 생산공정을 세분화하여 각 공정의 동작과 절차, 소요시간을 분석해 공정별 표준 작업시간을 확정해습니다. 작업의 낭비를 철저히 없애기 위해 동작에 따라 체형과 능력 등을 고려해 재배치하고, 전용 공구를 개발하고, 공구와 부품의 위치까지 세밀하게 정했습니다. 즉, 생산의 기술적 조건이 자본가에 의해 근본적으로 바뀐 것입니다.

 또 생산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사람과 실제 작업하는 사람을 완전히 분리했습니다. 이는 실제 작업을 하는 사람의 의식을 '정해진 시간 내에 자신의 업무를 완수하는 것'에만 집둥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시간 내에 일을 끝내지 못하면 벌금을 물거나 해고하고, 일정량 이상의 일을 해낸 사람에게는 보상을 하는 차별성과급제도도 도입해 경쟁심을 부추기며 단순노동에 매진하도록 했습니다.

테일러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그가 제철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초창기, 부하인 현장 공원들이 그의 명령을 조금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테일러는 자신의 지식과 기술이 '공원들의 지식과 손재주의 총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요컨대 공원들은 그를 우습게 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테일러는 공원들의 지식과 손재주, 즉 구상과 실행을 철저하게 해제하고, 모든 공원이 자신의 지시에 따라 '최대의 노력, 최고의 근면 성실'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를 고안하고 이를 체계화했습니다.

 테일러는 경영의 개념을 정립한 '과학적 관리법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테일러주의는 생산에 관한 노동자들의 지식이라는 '코먼(공유재산)'에 울타리 치는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생산에 관한 지식과 노하우를 자본이 독점하고, 자본의 편의에 따라 재구성된 생산시스템에 노동자를 강제로 복종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일시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져 실적 상승의 혜택을 노동자들도 임금인상이라는 형태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조 측도 자본에 구상을 빼앗기는 것을 용인해 왔습니다.

 하지만 고도 경제성장 시대가 끝나면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에게 그런 '덤'을 주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입지는 점점 약해지고, 임금도 낮아지고, 노동시간도 쉽게 연장됩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높이면서 노동자의 자율성도, 인간다운 풍요로운 시간도 사정없이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생산력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케인스가 예견한 여가사회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p116

 1장에서 인간이 상품의 '가치'에 휘둘린다는 이야기를 했고, 2장에서는 '자본의 운동'에 휘둘린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대공업 시대의 노동자는 더 나아가 '기계'에 휘둘립니다. 기계라는 사물과 노동자의 입장이 역적, 전복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바로 생산과정의 '물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산과정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은 기계이고, 기계는 "살아 있는 노동력을 지배하고 빨아들이는 죽은 노동"(446/571)이 됩니다. 이렇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에 기반한 자본의 지배가 완성됩니다.

 

 기계 노동은 신경계를 극도로 피곤하게 하는 한편, 근육의 다면적 작용을 억압하고 심신의 모든 자유로운 활동을 봉쇄힌다. 심지어 노동의 완화조차도 고통의 원천이 된다. 왜냐하면 기계는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내용에서 해방하기 때문이다. (445~446/571)

 

 흥미롭게도 이 구절에서는 기계로 인해 노동이 쉬워지는 것조차 노동자에게는 고통의 원천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계가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내용'에서 해방하는 것, 즉 내용 없는 단순노동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기쁨도, 성취감도, 충실감도 없는, 한마디로 소외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용이 없으니 언제, 누구와도 대체가 가능하고 노동자의 힘은 점점 약화되는 것입니다.

 자본의 지휘/명령, 즉 경영자의 의도에 따라 노동이 실현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마르크스는 '자본의 전제(專制)'라고 불렀습니다.

 자본의 전제가 완성되면 비약적으로 향상된 생산력도 모두 자본가의 것으로 나타난다고 마르크스는 말햇습니다.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협동'하여 수행한 노동이 생산력을 높였지만, 그것은 '노동자의 생산력'으로 나타나지 않고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의지로, 자율적으로 협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자본 아래 모여서 그것의 지시에 따라 일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지휘와 명령 없이는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만들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생산력이 증대될수록 자본의 지배는 오히려 강화된다고 마르크스는 비판한 것입니다.

 

 

p120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은 한편으로 노동일의 무제한적 연장에 새로운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고, 이 경향에 대한 저항을 분쇄하는 방식으로 노동 양식 자체와 사회적노동 유기체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 중 이전에 자본의 손이 닿지 않던 계층을 편입시키고 또는 기계가 쫓아낸 노동자들을 하는 일 없게 만듦으로써,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과잉 노동인구를 만들어 낸다. (430/551)

 

 기계가 육체노동을 대신하게 되면 비숙련노동자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등 '이전에 자본의 손이 닿지 않던 계층'도 일할 수 있게 됩니다. 트랙터와 경운기 등의 도입으로 농업의 공업화는 농촌에 과잉인구를 만들어 많은 젊은이가 도시로 향하게 됩니다. 이들을 노동시장에 '편입'시키면 상대적 과잉인구는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공장 밖에서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겠다' '더 열악한 노동조건에서도 일하겠다' '어쨌든 일하게 해 달라'는 사람이 늘어나면 공장 안의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더 오래, 더 성실하게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들이 필사적으로 일할수록 생산력이 높아져 자본가들이 '그렇게 많이 일해 준다면 지금은 100명 체제로 생산하는데 80명 정도면 되겠네'라고 생각하여, 상대적과잉인구는 더 증가하고 맙니다.

 

 노동자계급 중 취업자들의 과도 노동은 예비군 대열을 팽창시키는 반면, 예비군이 경쟁을 통해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의 강화로 취업자는 과도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665/866~867)

 

 이러한 상황은 실업자와 취업자의 분열을 낳고, 단결할 수 없는 노동자는 자본 앞에서 더욱더 힘이 약화됩니다. 힘이 약해지면 저항할 수 없게 되고, 더 많은 '과도 노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끝없는 악순환의 내막과 문제점을 마르크스가 강한 어조로 비판한 것이 다음 대목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높이는 방법은 모두 개별 노동자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며, 생산을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은 생산자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환되어 노동자를 부분적 인간으로 불구화하고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며, 노동의 고통으로 노동 내용을 파괴한다. 그리고 과학이 자립적 역능으로 노동과정에 합체될수록 노동과저의 정신적 역능은 노동자로부터 소원해지게 된다. 또 이러한 방법과 수단은 노동조건을 왜곡학로, 노동과정에서 극히 비열하고 혐오스뤙 전제 지배에 노동자를 복종시키며, 그의 생활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고, 그의 처자를 자본이라는 저거너트의 수레바퀴에 던져 넣는다. (674/878~879)

 

p127

 애초에 사회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 당사자조차 의미 없다고 느끼는 고임금 일자리는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문화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불쉿 잡(bullshit job)'이 광고업과 컨설팅업을 중심으로 최근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쓸데없는 회의, 서류 작성, 쓸데없는 캐치프레이즈 만들기, 매너 교육, 모두 '불쉿 잡'입니다. 이는 생산력이 너무 높아져 무의미한 노동을 억지로라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엘리트들이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환경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간다는 반증입니다. 즉, 케인스의 예측이 빗나간 이유는 자본주의가 무의미한 일자리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레이버의 주장입니다.

 무익한 고임금 불쉿 잡이 넘쳐 나는 반면, 사회에 꼭 필요한 필수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당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의 현실입니다. 보람 없는 무의미한 노동도, 가혹한 장시간 노동도 삶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p128

 인간이 모든 노동에서 해방되어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르크스가 원한 것은 인간을 대신해 무엇이든 해 주는 기계나 로봇을 우리가 맥구 한잔 마시며 멍하니 바라보는 그런 미래 사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반복해서 보았듯이, 그가 무엇보다 문제 삼은 것은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어 자본의 지배 아래 사람들의 노동이 무내용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동이라는 풍부한 '부'를 회복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극복하고 노동의 자율성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보람 있고 풍요롭고 매력적인 노동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즉, 로봇이나 AI로 '노동' 자체를 없애겠다는 발상은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문제의 소재를 잘못 짚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상상하는 미래 사회의 노동자는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입니다. 나사만 조이고 돈만 버는 개인이 아니라, 구상과 실행 모두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개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부'를 활용하면서 사회 전체의 '부'를 풍요롭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면서 자율적으로 살아갈 능력과 감수성을 되찾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습니다.

 

p142

 자본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부를 빈곤하게 한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습니다.

 

p144

 자본주의의 끝없는 운동은 일부 국가의 일부 사람에게 유리한 독점적 형태('대토지 소유')로 전 세계를 상품화합니다. 세계화의 결과, 한 국가의 '도시와 농촌의 대립'은 국경을 넘어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가치 증식을 '무한'하게 추구하지만, 지구는 '유한'합니다. 자본은 항상 비용을 '외부화'하는데, 지구가 유한한 이상 '외부'도 유한합니다.

소련 붕괴 이후 자본주의 세계화가 점점 가속되면서 환경 위기 또한 세계화되었고, 이 위기와 무관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가 지구에는 더 이상 남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실제로 일본과 같은 선진국에서도 기후 위기와 영향이 슈퍼태풍과 폭염으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질대사의 균열'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p147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움직여 온 기존의 생산관계, 또는 그 법칙 표현에 불과한 소유관계와 모순된다. 이러한 관계는 생산력의 발전 형태에서 그 질곡으로 전화한다. 이때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전집> 제13권 6쪽)

 

 자본주의는 지구환경을 파괴하지 않고는 이미 생산력을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사적소유와 이윤추구 아래 약탈을 반복하는 시스템에서는 누구의 것도 아닌 지구환경을 지속 가능한 형태로 관리할  수 없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더 나은 사회발전에 '질곡'이 된 상태입니다.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사이의 '회복 불가능한 균열'이 문명을 파괴하기 전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켜 다른 사회 시스템으로 이행해야만 한다고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p164

 자유투자사회에서 우리는 모든 행위와 선택을 '투자'로 간주하게 됩ㄴ다. 그런 사회의 귀결은 궁극적인 가성비 사회입니다. 결혼의 가성비? 육아의 가성비? 문화의 가성비? 민주주의의 가성비?

 당연히 인생에서 행위 대부분이 자산 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가성비 사고를 철저히 하게 되면 소통, 문화, 정치 참여, 세상의 많은 활동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고, 커뮤니티와 상호부조는 쇠퇴하고 사회의 부는 점점 더 앙상하게 됩니다.

 인생의 가성비를 따지자면 "당장 관 속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라고 요로 다케시(養老孟司, 1937~)는 비꼬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 따위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에 의한 '영혼의 포섭'이 극에 달한 것입니다.

 

p174

 그 사회가 자본주의인지 아닌지는 정부의 규모나 국유 비율과는 무관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본을 늘리기 위한 잉여가치의 착취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따라서 정부가 작아지고 시장에 맡기면 더 자본주의적으로 된다는 '신자유주의' 발상은 일면적입니다. 실제로 시장이 잘 작동하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중국은 신자유주의는 아니지만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국가입니다.

 

p176

 자본주의의 본질은 상품의 등가교환 이면에 숨은 노동자 착취에 의한 잉여가치 생산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사유에서 국유로 소유 형태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착취를 둘러싼 문제를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느냐의 문제로만 보고 노동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면, 소련과 같은 과오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착취 없는 자유로운 노동의 존재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p177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데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의 탈취나 정치체제의 변혁이 아니라 경제 영역에서 이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렵게 느낄 수도 있지만, 요컨대 상품과 화폐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일상에서 선택의 여지를 넓혀 가는 것입니다.

 

p178

 독일은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대학을 4년 만에 졸업하는 사람이 적고, 6년 정도 걸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유학 초기에, 박사과정까지 포함하면 20년 정도 학생인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왜 그런 일이 가능하냐면, 학비가 무료이기 때문이죠. 그뿐 아니라 한 학기 2만 엔 정도면 전철과 버스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는 정기권이 붙은 학생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학생증만 있으면 학식도 몇백 엔으로 먹을 수 있고, 미술관이나 콘서트 할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베를린 필의 콘서트도 15유로(약 2000엔)로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기숙사비는 한 달에 3만 엔 정도로 저렴하고요.

 대학 등록금뿐만이 아닙니다. 독일에서는 의료도 원칙적으로 무료이고, 간병 서비스도 후합니다. 실업수당, 직업훈련 등도 충실합니다. 그래서 육아에도 돈이 들지 않고, 노후까지 2000만 엔을 모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싫은 일을 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는 압박감이 약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복지국가 연구자인 괴스타 에스핑아네르센이 '탈상품화'라 부른 상황입니다. 즉, 생활에 필요한 재화(주거, 공원)와 서비스(교육, 의료, 대중교통)를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을수록 탈상품화가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화와 서비스는 필요한 사람에게 시장에서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의료나 교육 등의 형태로 직접 현물급부됩니다.

 현물급부의 결과, 우리는 화폐를 얻기 위해 일할 필요가 줄어들게 됩니다. 복지국가는 물론 자본주의국가입니다. 하지만 탈상품화가 물상화의 힘에 제동을 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p179. 국유화보다 어소시에이션이 선행했다.

 소련도 교육, 의료 등을 무상으로 제공했기 때문에 복지국가와 차이점을 알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국유화가 먼저 선행되었죠. 반대로 복지국가의 경우,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려는 사회운동이 선행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마르크스는 '어소시에이션'이라고 불렀습니다.

 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정당, 모두 다 어소시에이션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NGO나 NPO도 해당됩니다. 마르크스가 지행한 것은 소련과 같은 관료 지배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를 기초로 한 민주적 사회였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의 중요성은 복지국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업보험은 노동자 스스로가 임금의 일부를 모아 만든 것입니다.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노동운동의 대오는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일정 수준 이하의 임금으로 일하지 않도록, 실직한 노동자들의 삶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사회보험이나 연금부터 공공도서관, 공공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노동조합, 이웃 상호부조 조직, 협동조합 등의 실천이 있습니다. 자본의 힘 앞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지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상호부조 시스템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요컨대 이 모든 것이 탈상품화를 위한 어소시에이션 운동이었으며, 그것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노동자들 자신이 아니라 국가가 세금을 사용해 보편적 형태로 국민에게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즉, 어소시에이션 운동은 국유화를 당과 관료가 추진했던 국가자본주의와는 순서가 반대입니다. 보편적 서비스로서 국유화는 어소시에이션이 발전한 다음에 이루어졌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이 경제의 기초에 있기 때문에 생활보장의 모든 것을 국가의 관리나 개입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에는 최근까지 전국적이고 일률적인 법정최저임금이 없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노동조합이 일본처럼 기업별이 아닌 산업별로 조직되어 있습니다(금속산업노조는 IG금속, 서비사업은 ver,di처럼). 이 산별노조가 각 기업과 산업별로 노사 협정을 맺어 일정한 최저임금을 지키도록 하기 때문에 굳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쨌든 물상화와 탈상품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복지국가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비전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노동조합운동을 금지하고 국유화 아래 관료가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국가'보다 자본주의 복지국가가 마르크스의 생각에 더 가깝습니다.

 

p182. 기본소득이라는 '법학 환상'

 '국가자본주의'와 '법학 환상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오늘날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과거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운동이 침체되고 어소시에이션이 약화되는 가운데, 국가의 강력한 힘을 이용한 자본주의 개혁안이 다시금 제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0년대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기본소득(BI, Basic Income)은 '법학 환상'의 상징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화폐를 나눠 주는 법을 만들면 된다는 BI의 발상은 언뜻 보기에 매우 대담합니다. 충분한 돈을 자동으로 받을 수 있다면 굳이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유 시간도 늘어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BI는 마치 기사회생의 특효약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월 2~3만 엔을 지급받는 대신 연금이나 사회보장비를 삭감당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한편, BI로 매월 10만 엔 정도를 전 국민에게 지급하려면 재원으로 대기업과 부유층에 상당한 부담을 지우게 됩니다.

당연히 자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러한 증세에 저항할 것입니다. 글로벌기업들은 일본 정부가 BI를 위해 높은 세금을 부과하면 회사를 접고 세금 부담이 적은 해외로 도피하겠다고 협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수는 줄고, 주가는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자본의 위협, '자본 파업'입니다.

 자본은 국가를 넘어 좋아하는 곳, 좋아하는 것에 투자할 자유를 갖고 있으며, 이 자유가 이동하지 못하는 노동자와 국가에 대한 자본의 권력과 우위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방패 삼아 '자본 파업'을 발동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BI를 도입하려면 국가가 이 자본 파업을 이겨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힘의 사회운동이 뒷받침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사회운동 진영에 그 정도의 강력한 힘이 있다면 국가가 화폐를 나눠 주는 것 외에 다른 사회변혁의 길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료, 고등교육, 보육, 돌봄, 대중교통 등을 모두 무상화하여 탈상품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BI라는 제안이 나온 배경에는 노동운동이 약화되고, 불안정 고용과 저임금 노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에 의존할 수 없으니, 그 대신 국가가 화폐의 힘으로 국민의 삶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 BI입니다.

 물론 매달 손에 쥘 수 있는 돈이 늘어나면 노동자들의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노동자계급의 힘이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생산의 존재 방식에는 손을 대지 않기 때문에 자본이 가진 힘을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BI를 요구하는 세력이 얼마나 힘을 가지고 자본 파업에 맞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BI에 담긴 사고방식은 화폐가 힘을 가진 현재의 상황을 상당히 소박하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BI를 도입한다 할지라도 상품과 화폐의 힘에 계속 휘둘리지 않을까요? 물상화의 힘은 전혀 약화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물상화의 힘을 억누르려고 한 마르크스는 화폐와 상품이 힘을 갖지 않는 사회로의 변혁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물론 이 목표는 화폐의 힘을 아무리 사용해도 달성할 수 없습니다. 화폐의 힘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화폐 없이 살 수 있는 사회의 영역을 어소시에이션의 힘으로 늘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p184. 피케티와 MMT의 사각지대

 BI와 비슷한 '법학 환상'은 <21세기 자본>의 저자이자 프랑스 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의 세제 개혁안도 공유하고 있습니다. 사실 피케티도 최근 들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데, 그의 방식은 소득세와 법인세, 상속세를 대폭 인상해 과감한 재분배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득세와 상속세의 최대 세율을 90퍼센트 올리고, 이를 재원으로 삼아 모든 성인에게 일천수백만 엔씩을 지급하자고 제창합니다. 물론 그런 재분배가 이루어지면 서민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증세를 싫어하는 자본 측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피케티의 설명에는 BI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본 파업에 맞서 이런 대담한 개혁을 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불분명합니다.

 결국 피케티와 같은 양심적인 엘리트들이 사회 전체를 위한 제도를 톱다운방식으로 설계한다는 '법학 환상'은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자본 파업을 이겨 낼 수 있는 어소시에이션의 힘을 키워야 하는데, 피케티가 제안하는 세제 개혁을 지지하는 운동이 애초에 어떻게 일어날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최근 '반긴축파'의 이론으로 주목받는 현대화폐이론(MMT, Modern Monetary Theory) 에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MMT는 자국 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정부는 재정적자를 확대해도 채무불이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재정적자일지라도 국가는 과도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 범위에서 지출을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MMT가 주장하는 과감한 재정지출은 정부가 최저임금으로 일자리를 마련하고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용보장 프로그램'과 한 세트로 생활을 보장합니다. 이를 통해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일자지를 적극 창출하면서 경제성장을 도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면 잘될까요? 적극적 재정이라 하더라도 공적 투자로 비중이 이동하여 어디에 투자할지를 정부가 결정하는 것은 자본이 여전히 싫어할 것입니다. 투자 여부의 자유로운 판단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자본이 가진 권력의 원천이고, 그 힘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MMT에서 공적 투자에 의한 자본 관리는 중요합니다. 만약 화폐를 마구잡이로 뿌리는 형태가 되면 사회보장이나 친환경적 일자리뿐 아니라 군비나 불필요한 공공사업에 사용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화폐를 뿌리는 과정에서 이권이 생겨 대기업만 이득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정부의 시장개입이 커지고 탈탄소, 인권보호 등 규제를 강화할수록 자본의 반발도 거세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본이 국내 투자에서 철수하기 시작하고, 통화가치가 하락해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증세나 금리인상을 통한 경기 긴축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본 파업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MMT의 경제정책에는 없습니다.

 결국 톱다운식으로 대담한 정책을 실행하려고 해도 국가가 자본 파업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당한 어소시에이션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때 어소시에이션에 요구되는 것은 노동자들이 무엇에 투자할지, 어떻게 일할지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생산의 실권을 쥐여 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생산 영역의 개혁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힘의 균형을 바꾸는 근본적인 과제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어소시에이션을 만드는 관점이 BI에도, 피케티에게도, MMT도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계급투쟁이 없는 시대에 톱다운으로 할 수 있는 정치개혁이 BI이고, 세제 개혁이고, MMT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책이나 법의 논의가 선행되는 '법학 환상'에 갇혀 있습니다.

 이에 반해, 물상화, 어소시에이션,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의 독자적 관점을 이러한 정치개혁에 도입하는 것은 사고와 실천의 폭을 크게 넓혀 주며, 이러한 대담한 정책 제안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전제조건입니다.

 

 p187. 상향식 사회변혁으로

 이사의 논의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크스는 위로부터의 설계만으로 사회 전체가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버렸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소시에이션을 통한 탈상품화를 전략의 중심에 두는 것은 러시아혁명 이미지가 강한 20세기형 사회변혁의 비전에 큰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톱다운' 방식에서 '상향식' 으로의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마르크스 자신의 혁명관 변화에서도 드러납니다. 마르크스 역시 아직 젊었던 <공산당선언>(1848년) 단계에서는 공황을 계기로 국가권력을 탈취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자본론>에서는 논의의 초점이 크게 달라집니다. <자본론>에서 그런 공황 대망론은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오히려 이 책의 2장과 3장에서도 보았듯이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시간 단축과 기능 훈련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혁명의 책인데도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소시에이션에 의한 개량입니다.

 이러한 강조점 변화의 배경에는 마르크스가 혁명의 어려움을 인식한 점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는 노동자의 궁핌화와 공황으로 머지않아 혁명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에서 노동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고 자본주의는 되살아났습니다. 1857년 시작된 공황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본주의의 끈질긴 생명력 앞에서 마르크스는 그 힘의 원천을 탐구할 필요성을 통감했습니다. 그것이 마르크스를 경제학 비판으로 이끌었고, 그 연구 성과인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낙관적인 변혁 비전을 버리고 혁명을 향한 자본주의 수정에 무게를 두게 됩니다.

 이때 마르크스는 임금인상보다 노동시간 단축을 중시했는데, 이 역시 물상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시급을 올리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더 오래 일해 화폐를 얻고자 하는 욕망에서 노동자들은 해방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점점 더 화폐에 의존학 됩니다.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구 복지국가는 노동시간 단축을 체택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노동시간이 주 35시간입니다. 이러한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에게 여가가 생기게 합니다. 하지만 여가가 생겨도 일요일에 모든 가게가 문을 연다면, 결국 자본주의에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에는 식당이나 미술관 등을 제외하고 백화점, 쇼핑몰, 슈퍼마켓 등은 원칙적으로 문을 닫는 것입니다.

 가게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소비활동을 아예 할 수 없게 됩니다. '윈도쇼핑'은 일본에서 흔히 오해되듯이 돈이 없어 가게 밖에서 브랜드 상품을 구경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요일에 가게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에서 구경하는 것입니다.

 가게가 문을 닫기 때문에 여가를 보내는 다른 방법이 필연적으로 생겨납니다. 카페에서 독서하고,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포츠 침에서 축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원이나 농장을 가꾸어도 좋습니다. 시위나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탈상품화와 결합된 여가는 비자본주의적 활동과 능력 개발의 터전을 마련해 줍니다. 그것이 또 다른 어소시에이션의 발전과 탈상품화의 가능성을 넓혀 가는 것으로도 이어집니다. 이리하여 가성비 사고로 회수되지 않는 사회적 부의 풍요가 양성될 수 있습니다. 

 

p201

 자연과학과 공동체를 동시에 연구하던 마르크스는 자연의 '지속가능성'과 인간 사회의 '평등'의 강력한 연관성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가 편재하면 거기에서 권력과 지배-종속 관계가 생겨나고, 이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인간과 자연에서 약탈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원이 고갈되면, 이번에는 서로 탈취하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사회의 번영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p237

 마르크스에 따르면 변화의 담당자는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하면 남성 공장 노동자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겠지만, 자본주의 아래에서 부정적 영향을 받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으로 피폐해진 필수 노동자, 일자리가 불안정해서 늘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 일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시장 논리, 경쟁 원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우리는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자본주의는 불평등과 분단을 낳고, 약자들로부터 더 빼앗아 왔습니다. 그리고 시장은 화폐가 없는 사람들을 배제합니다. 이 때문에 상품화의 힘을 약화하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주의 영역을 경제 영역에까지 확대하자고 마르크스는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의 '상품화(commodification)'에서 모든 것의 '코먼화(commonification)'로의 대전환을 향한 코뮤니즘의 투쟁입니다.

 

p240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전염병, 전쟁, 기후 위기 등 만성적 긴급사태의 시대에는 강한 국가가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이 만성적 긴급사태를 방치한다면 국가의 힘이 점점 더 강해져 파시즘과 전체주의로 나아갈 것입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재림은 물론 허용될 수 없습니다.

 그런 '야만 상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불평등과 착취, 전쟁과 폭력, 식민지지배와 노예제 등의 문제를 직시하고 국가의 폭주에 저항하면서 자유와 평등의 가능성을 필사적으로 사고했던 사상가들의 지혜와 상상력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자본론>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윤석열이 집권한 현재를 난세로 정의하고, 난세에 본인의 일기를 쓴 것이다.

정치적 내용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주로 도올 선생의 평소 관심사와 얽힌 내용이 대부분이고 그것이 일기라는 형식을 빌려 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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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1 기독교의 역사는 갑질의 역사

 인류문명사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갑질"의 역사이다. 어느 시공에 떨어지든지 자기만이 옳고 타자는 무조건 개종이나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폭압적으로 강요하는 십자군신학의 역사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의 부당성을 기독교신앙을 수용한 이들은 느끼지 못한다. 은재 신석구(1875~1950) 목사는 깊은 유학자의 소양 속에서 이러한 논리의 부당성을 감지한 심오한 신앙인이었다.

 기독교적 삶의 논리는 하여튼 껄끄럽다. 껄끄럽다라는 것은 비인과적이고 비상식적이고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토착적인 삶은 인과적이고 상식적이고 순리적이라는 것이다.

 

p155 결곡 기독교의 최대 문제는 "배타"

 기독교신학의 최대의 문제는 배타Exclusiveness 이다. 사랑과 용서와 관용을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실내용에 들어가면 배타를 떠나지 못한다. 배타의 본질은 독선이다. 나의 생각만이 옳고 타인의 생각은 다 틀리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기독교교회 속에서만 구원이 존재한다고 믿는 배타적 구원론으로 골인하게 된다. 그러한 구원론이 지배한 것이 서양의 중세기역사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실상 기독교가 아니라 서양의 중세기 교리였다. 그래서 제사를 우상숭배로 보는 시각이 생겨났고 많은 유학자 기독인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배타와 함께 들어왔고 배타로 일관되었다. 그것이 오늘날 매우 폭력적인 대형교회로 발전하였고, 또 친미 정치세력으로 발전하였다. 바이든의 정치이념은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자는 배타의 이념이다. 이러한 이념의 확장의 동반자가 키시다의 일본이고 그 동반자의 말잡이가 윤석열이고, 윤석열의 하수인들이 한국의 친미 대형교회 세력이다.

 

p193. 동서양 신론의 차이

(마테오 릿치, 천주실의 중)

 凡物不能自成, 必須外爲者, 以成之. 樓臺房屋不能自起, 恒成於工匠之手. 知此, 則識天地不能自成, 定有所爲制作者, 卽吾所謂天主也.

 대저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이루어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밖으로부터 작위를 가하는 존재가 있어야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각 하나 가옥 하나가 스스로 세워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항상 목수의 손을 빌어서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명백한 사실을 깨닫는다면 천지가 스스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고, 반드시 그것을 만든 제작자가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제작자가 바로 저 마테오 릿치가 말씀드리는 하느님(=天主)이올시다.

 

(주역, 계사 중)

 그러므로 하느님이라 하는 신묘한 존재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고착되지 않으며, 그 변화무쌍한 운동은 실체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존재자가 아니다. 끊임없이 음과 양이 번갈아 들면서 조화로운 법칙을 만들어가는 것, 그 자체가 궁극적인 하느님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도를 나의 실존 내로 계승하여 구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선(the Good)이요 도덕(Morality)이다. 그 하느님이 도를 나의 존재 내에서 형성해나가는 것이 나의 본성(Human nature)이다.

故神无方而易无體.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 善也; 成之者, 性也.

 

p229

  수운은 아편전쟁으로 이미 중국이 몰락하고 있고, 중국이 몰락하면 조선왕조가 몰락하는 것은 뻔한 이치라고 판단했다. 다산은 끝까지 조선을 살리려 했다. 수운은 조선의 멸망은 조선민중의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왕조는 멸망해도 백성은 멸망하지 않는다. 난군亂君은 있어도 난국亂國은 없다.

 왕조를 멸망시켜야 할 판에 기독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왕조보다 더 지독한 억압의 수직구도를 새로 도입하는 것이다. 왕조는 권위의 억압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갱생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민중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평등사회를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늘 꼭대기 옥경대에 앉아있는 상제꼴로서 세상사람들의 삶을 다 관장한다고 말을 하니 허무지설虛無之說 아닐런가!" 또 하나의 픽션이요, 왕보다 더 무서운, 세계 전체를 파멸로 휘몰아갈 수직과 연역의 폭력이다. 이것을 수용하면 이 민족은 개화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의 길로 들어설 뿐이다. 이 세계는 소유주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릿치가 말하는 천주는 우주의 설계자로서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속지 말라!

 다산은 세계를 몰랐다. 수운은 세계를 알았다. 다산은 주어를 도입했고 수운은 주어를 해소시켰다. 다산은 수직적이었고 수운은 수평적이었다. 다산은 기독교교리를 만났지만, 수운은 하느님(=천주天主)을 직접 만났다. 

 

p243 수운의 문제의식 : 수직적 종교사유와 수직적 권력구조의 상응성

 서양의 종교는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성"을 전제하고 그 존재에게 나의 운명을 맡기는 절대적 복속을 "신앙Belief"으로 삼는다. 그러나 동학은 "무위이화無爲而化"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하느님 자체가 세계와의 관계에서 조작적인 개입(爲)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은 세계생성의 동반자일 뿐이다. 하느님은 인격적인 존재Being인 동시에 철저히 비인격적인 생성Becoming이다.

 

p246 동학은 인류종교사에서 케리그마가 없는 유일한 종교

 그런데 동학경전은 타 종교경전과 견주어 말할 수 없는 유니크한 특징이 있다. 그거슨 "케리그마Kerygma"의 필터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케리그마"란 20세기 초 성서신학에서 생겨난 말이긴 하지만, 그것은 모든 종교영역에서 적영될 수 있는 유용한 개념이다. 케리그마는 문자 그대로 "선포Proclamation"라는 뜻인데, 초기신봉자들(초대교회)이 자기들의 교주에 대해 갈망하는 이미지를 선포하기 위하여 경전의 언어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경우, 그 케리그마는 "그리스도" 즉 구세주(=메시아),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이다. 이 케리그마의 필터를 거치면 인간 예수,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는 사라지고, 케리그마 즉 그리스도라는 이미지, 즉 초대교회의 갈망만 남는다. 다시 말해서 2천 년 동안의 기독교의 역사는 역사적 예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형성된 그리스도를 선포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것은 이런 허구화된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케리그마가 경전을 지배한 결과인 것이다.

 

케리그마는 허구, 수운의 삶은 시종 있는 그대로

 최수운은 기독교(=천주교=서학)와의 대결에서 모든 신비나 이적이나 예언,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조화造化"를 거부하고 "성誠, 경敬, 신信"이라는 상식적 일상도덕의 가르침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신비주의자들의 "흘림"의 위태로움을 잘 알고 있었고, 이들이 초기교단을 형성하게 되면 그의 가르침은 그들의 케리그마에 의하여 왜곡되고 타락되고 신비화되리라는 것을 정확히 예견했다.(「흥비가」). 모든 대각의 종교운동은 초기집단을 노리는 사기꾼들에 의하여 왜곡되는 것이다.

 최수운은 "지식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후계자로서 지식이 출중한 인물은 사도 바울과 같이 오히려 케리그마를 조직적으로 형성하여 동학의 진로를 바꿀 우려가 있었다. 그가 한문으로만 저술을 하지 않고 동시에 한글가사를 지었다는 것도 민중에게 직접 개벽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산이 단 한 건의 한글서한이나 시조 한 수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 그의 형 약전이 서민을 위한 서민생활의 『자산어보』를 집필하면서도 물고기의 한글이름 한 자도 써넣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의식구조가 어디까지나 망해가는 조선왕조의 기력회복(목민牧民)에 머물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운의 문제의식과는 소양지판이었다.

 

 과학 교양서적을 어느 정도 봐서 그런지 그리 새로울 건 없지만 환원주의적 시각을 인문학에 적용하는 작가의 생각에서는 참고할 부분이 있었다.

 재밋었다. 이 책을 보고 나니 언급된 브라이언 그린의 <엔드 오브 타임>과 몇몇 책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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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순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화학)

p195

 과학자는 드러내 놓고 환원주의 연구 방법을 쓴다. 화학은 물리학으로, 물질은 입자로 거의 완벽하게 환원한다. 그러나 그걸 두고 물리학 패권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양자역학 덕분에 화학의 세계는 완전해졌고 화학산업은 더 발전했다. 그러나 인문학자는 환원주의를 배격하기도 한다. 환원주의는 생물학과 인문학의 접점에서 특히 날카로운 마찰을 일으켰다. 우리나라 하계도 예외가 아니다. 2009년 7월 한국과학철학회와 서양근대철학회를 비롯한 여러 학회가 국립과학관에서 '다윈 200주년 기념 연합학술대회'를 열었다. 이 행사는 11월 서울대사회과학연구원/통섭원/한국과학기술학회가 이화여대에서 연 공동 학술 심포지엄으로 이어졌다. 주제는 '부분과 전체 : 다윈, 사회생물학, 그리고 한국'이었다. 여기서 환원주의 논쟁이 불타올랐다. 어떤 인문학자는 아래와 같이 사회생물학을 비판했다.

  

  『인간의 역사과정을 물리적 역사과정에서 분리해야 할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물리법칙으로 환원할 수 있다. 인간의 문화도 인과적 설명으로 과학과 연결해야 온전한 의미를 가진다. 사회학은 인류학에, 인류학은 영장류학에, 영장류학은 사회생물학에 포섭된다. 에드워드 윌슨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렇다면 사회생물학은 왜 물리학에 통합하지 않는가? 사회과학이 사회에서 마음과 뇌로 이어지는 인과적 설명망을 만들어내지 못해서 과학 이론의 본질을 결여하고 있다는 지적이 옳다면, 물질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인과적 설명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회생물학도 과학 이론의 본질을 결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인문학이든 과학이든 학문을 이런 식으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사회과학자더러 뇌의 전달물질을 연구해 사회 행동이나 문화와 연계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하라는 요구다. 사회생물학자더러 물리학을 연구해 물질 수준의 토대에서 동물 행동을 설명하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진화의 수준이 변하면 새로운 성질이 <창발(創發, emerge)>하기 때문에 하위 수준을 연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상위 수준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른 차원의 언어를 사용하고 차원이 다른 의미를 추구한다. 유전자를 연구해서 문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분노의 감정을 드러낸 이 주장의 핵심은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문학을 생물학으로 환원할 수 없다. 둘째, 인문학을 과학과 통합할 수 없다. 환원도 통합도 안 될 일이다. 인문학은 인문학이고 과학은 과학일 뿐이다. 그런 뜻이다.여기서 통합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는 잠시 뒤에 말하겠다. 나는 '지금은' 이 반론이 옳다고 본다. 하지만 '영원히'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물리법칙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지, 나는 판단하지 못하겠다.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물리법칙으로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는 날이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할 근거는 없으니까.

 

p199

 만사가 그렇듯 환원주의도 위험 요소가 있다. 가장 중대한 위험은 복잡한 것을 설명한다는 원래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단순한 것을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가장 단순한 수소의 원자 구조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우주의 구조와 운동법칙을 설명할 수 있어야 수소의 원자 구조를 아는 것이 온전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복잡한 것을 설명하는 임무를 수행하려면 연구자가 자신이 몸담은 세부 학문의 경계를 넘어 다른 분야의 연구 성과를 습득하고 다른 분야의 연구자와 소통해야 한다. 설명하려는 대상이 우주든 사회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그래야 환원주의가 훌륭한 연구방법론이 될 수 있다. 윌슨은 그런 노력을 가리켜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는 것은 지성의 가장 위대한 과업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겨하는 지식의 파편화와 철학의 혼란은 실제 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학자들이 만든 것이다. 통섭은 통일統一(unification)의 열쇠다.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을 둔 이론을 연결해 지식을 '통합'해야 한다. 학문의 갈래를 가로지르는 통섭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소수의 과학자와 철학자가 공유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지나지 않지만 과학이 지속적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지지해 준다. 인문학에서도 힘을 발휘한다면 더 확실한 지지의 증거가 될 것이다. 통섭은 지적 모험의 전망을 열어 주고 인간의 조건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

 

 

우리가 들어서 많이 알고 있는 법의 근본사상을 이루는 고전들에 대해 그 핵심을 설명한 책.

재밋고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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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 

 정치 참여는 '의무'



 루소는 <사회계약론> 1부 도입부에서 정치 참여의 당위성을 강조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나 봅니다. "네가 뭔데 정치 이야기를 해?"라는 식이죠.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군주도 아니고 입법자도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관한 글을 쓴다. 내 의견이 공적인 일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아무리 미미하다고 해도 나는 한 자유국가의 시민이자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그것[공무]에 관해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으므로 거기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의무 역시 당연히 갖게 된다.'

 권위주의 체제 시절에는 시민들이 정치를 이야기하면 "네 일이나 잘해"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교사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이나 잘 가르치지"라는 야유를 받았죠. 노동자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면 "물건이나 잘 만들어 팔지"라는 구박이 돌아왔습니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크게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경우는 정치 과정에 참여한 이후 "교수가 전공 강의나 하지 왜 정치 이야기를 해?"라는 비난을 많이 들었습니다. '폴리페서'라는 딱지도 붙었죠.

 만약 이런 식으로 '네 일이나 잘하라'는 요청을 따르기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정치에 관심을 끊고 학교 캠퍼스에 틀여박혀 있거나 노동자가 공장에서 일만 하고 농민이 논밭에서 농사만 지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정치는 특성 사람,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민주공화국은 이 나라의 주인이 바로 우리라는 뜻입니다. 나라 운영의 원리와 방향을 정하는 것이 정치인데, 나라의 주인이 그러한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루소는 이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편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마!"라는 윽박지름과 함께 "정치가 너와 무슨 상관이야?"라는 어리석은 질문도 있습니다. 루소가 살던 시대에도 그랬나 봅니다. 루소는 이렇게 답합니다.  

 '누군가가 나랏일에 관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그 나라는 끝장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나라의 주인이 나랏일에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죠. 정치는 한 나라의 운명과 주권자 국민의 삶의 방향을 좌우합니다. 예를 들면 정치는 납세자, 즉 우리에게 얼마의 세금을 걷을지 결정합니다. '슈퍼리치'로 불리는 '초부자'들을 대상으로 증세를 할지 감세를 할지 정합니다. 부동산 문제가 심각한데, 다주택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를 유지할지 아니면 폐지할지도 결정합니다. 재벌 등 대기업이 내는 법인세를 인상할지 인하할지도 정합니다. 최근 유럽연합은 석유,천연가스,석탄을 생산/정제하는 기업들이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막대한 이윤을 얻게 되자 1400억 유로(약 200조 원) 규모의 횡재세(windfall tax)를 부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치는 또한 우리가 내는 세금의 사용처를 정합니다. 예컨대 4대강 사업에 돈을 쓸지, 아니면 '무상급식', '무상보육', '전국민고용보험' 실시에 돈을 쓸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세금을 냈는데 4대강 사업에 쓰여 강을 '녹차 라테'로 만들어 버리면 화가 나죠.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자원외교는 깡통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몇조 원이 들어갔다는 것 아닙니까? 4대강, 자원외교, 방산비리 등을 다 합한 액수를 우리나라 인구로 나눠보니 1인당 200만 원, 가구당 약 1000만 원을 부담한 셈이더군요.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에 쓰레기통을 구입했는데, 한 개에 약 90만 원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이뤄지는 일입니다.

 

p75

 삼권분립의 의미

 

 권력을 가진 자는 모두 그것을 함부로 쓰기 마련이다. 이 점을 지금까지의 경험이 알려주는 바이다.  사람이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본질에 따라 권력이 권력을 저지하도록 해야 한다.

 

p81

 몽테스키외는 법관의 역할을 제한하려고 했습니다.

 판결은 명백히 정해져 있는 법률 조문에 불과할 정도로 일정해야 한다. 만약 판결이 한 재판관의 개인적 견해라면 사람들은 책임져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법권은 이를테면 없음이나 다름없다. 인민의 재판관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법의 문구를 선언하는 입에 불과하다.

p84

 <범죄와 형벌>에서 베카리아는 배심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지한 자는 감각으로 판단하지만, 전문가는 학설과 의견으로 판단한다. 전자의 판단이 후자의 판단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안내자이다. 재판관은 유죄판결에 익숙해져 있으며, 모든 것을 그의 전문지식에서 빌려온 인위적 개념요소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재판관의 학식보다는 보통 사람의 상식이 증거판단을 잘못할 가능성이 더 적다. 법을 아는 일이 전문 학문이 아닌 나라는 얼마나 행복한가! 누구나 그와 동등한 이웃 시민들로부터 재판받도록 하고 있는 법제는 정말 경탄할 만하다.

 

p88

 <법의 정신> 제29편 '법을 만드는 방법'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췌해 정리했습니다. 몽테스키외는 그리스, 로마, 프랑스의 예를 들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원칙을 제시합니다. 차례로 보겠습니다.

 첫째, "입법자의 의도에 어긋나는 법"을 만들어선 안된다. 입법자는 입법의 목적과 결과가 반대로 나올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둘째, "법의 문체는 간단해야 한다." "법의 문체는 쉬워야 한다."

 셋째, "법의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관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법에서 사물의 관념을 확정했을 때는 결코 모호한 표현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법의 표현이 모호하고 불명확하면 필연적으로 해석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법을 준수해야 하는 시민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금지되고, 무엇이 허가되는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결과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권력이 재량을 갖게 되고, 시민의 자유는 위태로워집니다. 이 원칙은 현대 법률용어로 '명확성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이 원칙은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서도 강조됩니다.

 

p94

 법은 만들어지지만 풍속은 제시된다. 후자는 좀 더 일반 정신에서 유래하고, 전자는 좀 더 특수한 제도에서 유래한다. 풍속이나 생활양식을 바꾸고자 할 때에는 그것을 법에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전체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다른 풍속, 다른 생활양식에 따라서 변경하는 편이 낫다. 그러므로 군주가 그 국민에게 큰 변화를 일으키고자 할 때엔, 법으로써 설정된 것은 법에 따라 개혁하고, 생활양식으로 형성된 것은 생활양식에 따라 변경해야 한다. 생활양식으로 바꿔야 할 것을 법에 따라서 변경한다는 것은 매우 나쁜 정책이다.

 '법'과 '풍속'을 구분하면서, 법을 통해 생활양식을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그러면서 서구식 근대화와 강력한 국가 건설을 추진했던 러시아의 표토르 1세가 사람들이 도시에 들어갈 때 입는 옷의 길이를 무릎까지로 제한한 법을 만든 것은 "폭정과도 같았다"라고 비판합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남성이 장발이거나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경범죄처벌법상 '범죄'로 규정되었습니다. 경찰관들이 거리에서 가위와 자를 들고 지나가는 남성들의 머리카락 길이를 재고, 여성들의 치마 길이를 쟀어요. 머리와 치마 길이가 규정을 초과하면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폭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p169

 베카리아는 '범죄'와 '종교적 죄악'이 다르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근대 형법학이 출발합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에서 '죄악'이라고 비난하는 행위가 있잖아요? 종교별로 '죄악'의 범위에 차이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악'중 형법상 '범죄'인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 절도, 강간 등은 '죄악'이기도 하고 '범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교를 하는 간통adultery은 '죄악'으로 분류되지만,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범죄'가 아닙니다. 중세에는 간통도 '범죄'로 처벌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간통은 오랫동안 범죄로 규정되었지만 2015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간통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범죄로 처벌해서는 안되다는 것입니다. 배우자와의 사랑이 식고 혼인이 파탄으로 가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 혼외성교를 한 것을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해 오랜 논쟁이 있었는데, 드디어 마무리된 것입니다.

 한편 중세 기독교에서는 '자살', 미혼 남녀의 성교인 '사통私通 fornication'을 '죄악'으로 분류했고 당시 이 행위는 '범죄'로 처벌되었지만,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를 '범죄'로 규정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물론 혼전순결 서약을 하는 사람들의 의사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근대 형법의 기본은 종교와 법의 구별, 죄악과 범죄의 구별, 도덕과 법의 구별입니다. 베카리아가 바로 이 점을 갈파했던 것입니다. "종교적 죄악은 신이 벌하는 영역이다"라는 말에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종교적 죄악'은 같은 종교 공동체에서 비난을 받습니다. 신부님, 목사님, 스님이 질책을 하실 것이고, 동료 신도들이 책망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는 국가가 바로 개입합니다. 경찰, 검찰 등 수사기관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 등 강제처분을 하고, 검찰이 기소하면 법원이 판결해서 형벌을 부과하죠. 이 모든 과정은 국가 기록으로 남습니다. '종교적 죄악'과 '범죄'를 구분하지 못하면, 전자의 경우에도 국가가 강제력을 행사해 개입하게 됩니다. 이는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p285

 -존스튜어트 밀-

 진리란, 스스로 사색하지 않고 오로지 타인의 주장에 맹종할 뿐인 사람들의 진실한 의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에 의해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제가 재직하고 있는 서울대는 머리 좋고 성실하고 시험 잘 치는 젊은이들이 공부하는 곳입니다. 저는 수업 중에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대부분 '주체사상'에 따라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북한에서 제일 좋은 대학인 김일성 종합대학에 성공적으로 입학해 아침저녁으로 '수령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에 매진하고 있을 것입니다."

 

p294

 밀은 "개성에 대한 일반인의 무관심", "집단 속에 매몰된 개인"이라는 현상, "모든 개인을 공인된 표준에 합치시키려고 노력하는 경향"을 개탄합니다. 그는 당시 영국 사람들이 타인에 관련된 사항만이 아니라 자신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도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무엇이 나의 성격과 성향에 맞는가? 또는 무엇이 내 속에 있는 최고 최선의 것으로 하여금 공정하게 그 힘을 발휘하게 하여 그것을 성장 발달하게 하는 것일까?"라고 묻지 않고, 반대로 "무엇이 나의 지위에 적합한가? 나와 같은 신분으로 같은 수입을 얻는 사람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또 (더욱 나쁘게도) 나보다 높은 신분과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보통 어떤 일을 하는가?"를 자문하고 있다고 평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기질, 취향, 꿈, 욕구,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나 여론이 이를 특정 기준에 따라 획일화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어린이에 대해서도 그런 경향에 따라 훈육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붕어빵 찍듯이 사람을 찍어내고 싶은 것입니다. 일제의 지배와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 경험이 있다 보니 이런 현상이 고착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밀은 말합니다.

 

 인간성을 위협하는 위험은 개인적 충동과 선호의 과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핍에 있다. 진보의 원칙은, 그것이 자유를 사랑하는 형태든 개량을 사랑하는 형태든, 관습의 지배에는 반대하고, 적어도 관습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한다. 하나의 인민은, 일정 기간 진보적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정지한다. 언제 정지하는가? 그것은 개성을 갖지 못할 때다.

 

p298

청중 : 책을 읽으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일은 개인의 자유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촛불 집회/시위가 열렸을 때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피해를 줬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 상황에서는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가 억압받아도 되는 걸까요?

 

조국 : 중요한 쟁점입니다. 법률적 용어를 사용하면, '기본권의 서열'이라는 확립된 법리가 있습니다. 최상위는 생명입니다. 그다음 순위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정신적 자유입니다. 그다음은 신체의 자유이고, 그 아래는 재산권입니다. 이 서열에서는 위의 것을 위해서는 아래의 것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촛불 집회/시위가 열리면 그 주위에 있는 상인들이 장사를 못하거나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재산적 이익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법리에 따르면 상인 분들이 감수해야 합니다. 물론 집회/시위 참가자가 이 상점에 불을 지르거나 물건을 파손했다고 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원제는 Belonging : A German reckons with history and home. 으로 소속 : 역사와 가계에 대한 한 독일인의 생각 이다.

 독일인들에게 나치(Nazi)란 원죄와 같은 집단적인 트라우마이자 항시 자신들을 경계하는 절대적인 지침이다.

 이 책은 성인이 된 후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며 독일인들에게 목에 가시처럼 박혀있던 나치의 그림자를 밝혀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다루고 있다.

 일종의 다큐형식으로 개인적인 가계를 자료들과 조부모와 부모님의 친척과 지인들의 증언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이라 약간 산만한 감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크게 거슬리는 수준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추천으로 재조명 된 책인데 그저 재미로 볼만한 내용은 아니다. 

 처음의 프롤로그에서 이 책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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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친구의 아파트 건물 루프탑에 서 있었다. 그때까지 뉴욕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 친구 하나뿐이었다. 나는 베를린을 떠나온 지 얼마 안 된 유학생이었다. 아는 사람이라곤 없었고, 나를 아는 사람도 있지 않았다.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한 노부인이 우연히 우리 대화를 들었다.

 "어디서 왔어요?" 그녀가 물었다. 

 "독일에서요."

 "그런 것 같았어요."

 "독일에 가보신 적 있으세요?" 내가 물었다.

 "네, 아주 오래전에요."

 그녀는 내 눈을 피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그녀는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사연을 들려줬다. 여자 간수 하나가 최후의 순간 가스실에서 열여섯 번을 구해줬다고 한다.

 그 간수는 수용소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가혹하기 그지없어서 벌을 준답시고 걸핏하면 포로들의 머리를 서로 박치기하게 했는데 자기에게는 남몰래 연정을 품었던 것 같다고 그녀는 말했다.

 

퇴임 후에 문재인 대통령은 SNS를 통해 개인적 활동과 관심사를 간간히 포스팅을 하시는데 그 중에서도 꾸준하게 읽은 책에 대한 감상과 소개를 올리시고 있다.

그 중에 최근 하얼빈을 읽었고, 뒤이어서 본 책이 <지극히 사적인 네팔>이다. 

사실 네팔하면 히말라야, 나마스테, 그리고 네팔 음식 정도를 알 뿐이고 그것마저도 영상으로 본 것이 대부분이다.

네팔이라는 나라와의 교류가 그닥 많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네팔에 대해서 알 기회가 거의 없다.

이 책은 네팔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시절까지 보낸 저자가 한국에서 10년 이상을 보내면서 양국의 문화와 사회를 어느 정도 알고 난 사람이기에 우리가 알아야 할 그리고 네팔인의 입장에서 한국사람들이 이것만은 알았으면 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저자의 말처럼 개인적인 면에 치우쳐 있을지는 모르지만 네팔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입장에서는 네팔 입문서로 괜찮을 내용이다. 

 

 난 책의 카테고리를 파악하는데 온라인 교보문고를 주로 이용하는데, 어떤 기준으로 그 카테고리를 나누는지 좀 의문이긴 하다. 이 책은 정치/사회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인문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다. 인문적 지식과 통찰이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 가득 들어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통찰들은 비단 대한민국에만 적용되는 것들은 아니다. 케이스들은 다 로칼에 관련되어 있지만 그것들을 아우르는 카테고리적인 내용들은 인류가 지속적으로 리마인드하면서 새겨야 할 주요한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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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숫자가 말을 하게 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고위 공직자의 재산 내역을 PDF로 공개한다. 이것을 컴퓨터로 처리하려면 별도의 처리를 거쳐야 한다. 

 PDF는 사람이 보라고 만든 포맷이다. 컴퓨터가 자동으로 처리하려면 별도의 개발이 필요하다. 

 정부가 처음부터 그냥 구조화된 데이터로 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미국은 데어터법에 아예 포맷을 못박고 있다. 데이터법 정보모델 스키마라고 불리는 이것은 쉽게 말해 정부 예산 보고서를 기계가 읽을 수 있도록 하는 표준 포맷이다. 미 연방정부는 이 포맷을 공개해 다른 정부기관들도 쉽게 쓸 수 있도록 제공한다. 정부가 공개하는 데이터는 '기계가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법으로 구현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어떨까?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수많은 복지 비용을 지출하고 있지만, 각 지자체의 지역사회보장계획은 정책 목표 설정이나 성과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소득불평등과 빈곤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세청의 행정데이터가 공유되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정부기관 간에도 그렇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과 선별 재난지원금은 지금도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다. 다 줄 것인가. 선별해서 줄 것인가? 찬반의 소리가 높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미 전 국민 재난지원금도, 선별지원금도 지급한 경험이 있다. 그렇다면 효과를 측정해보면 되는 것 아닌가? 십수조 원의 돈이 들어간 일인데, 쓴 다음에 그 효과를 측정해보지도 않는다는 건 아주 이상한 일이다. 하다못해 작은 기업에서 1천만 원의 광고비만 써도 당연히 결과 리포트를 제출한다. 놀랍게도 기획재정부는 아직까지 어떤 보고서도 공식적으로 내놓지 않고 있다. 효과를 측정하지도 않고서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건 근거가 없고, 근거가 없이 십수조 원의 예산을 쓰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정부가 숫자로 된 자료들을 이런 '구조화된' 형태로, 즉 분석가능한 데이터로 공개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민간의 수많은 전문간들이 데이터를 다각도록 분석하고, 통찰이 빛나는 논문들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누구든 수십 년치 숫자를 넣고 시계열 분석을 해 볼 수도 있고, 다양한 개선방안들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데이터가 4차산업혁명시대의 원유라고 한다. 디지털 혁신의 캐치프레이즈도 D.N.A. 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이다. 한 해에만 558조가 넘는 돈을 쓰는, 한국경제에서 가장 큰 단일 주체인 정부가 먼저 '데이터에 기반한' 정책을 펴는 게 D.N.A. 성공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p31

 수감율, 비만, 정신병, 중독 이런 사회적 지표들이 GDP와 관계를 보면 의외로 별 상관관계가 없는 걸로 나온다. 부자 나라인데도 비만율이 높고, 수감률도 높고, 덜 부자인데도 지표가 좋기도 하고.

 그런데 기대수명/문맹률/영아사망률/살인/수감률/미성년자 출산율/사회적 신뢰/비만/정신병/중독/사회적 유동성, 이런 지표들을 빈부 격차순으로 비교하면 거의 Y=X에 맞먹는 아주 강한 상관관계가 나타난다. '코로나에 왜 미국, 영구, 프랑스가 그렇게 맥없이 무너졌지?'라는 부분도 이렇게 보면 상당히 설명이 된다. 'GDP가 핵심이 아니었구나'하는 것이다.

 불평등을 완화해야 성장이 빨라진다는 OECD 공식보고서도 있다. 2014년 OECD는 <불평등과 성장>이라는 이름의 리포트를 내고 낙수 효과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OECD 회원국의 1985년부터 2005년까지의 지니계수와 1990년부터 2010년까지의 누적성장률을 사용해 분석을 했더니, 지니계수가 0.03포인트 악화되면 경제성장률이 무려 0.35%씩 떨어진다는 게 확인이 된 것이다. OECD는 "낙수 효과가 아니라 불평등 해소가 성장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면서 "불평등을 빨리 해소하는 국가가 빨리 성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p35

 현대 한국인의 문해 능력은 세계 최하위 수준에 가깝다. 청취력도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상대의 얘기를 제대로 경청한 뒤 토론하고 합의안을 찾는 것, 타협하는 법이 우리의 (입시) 교육에는 빠져 있다.

 도덕적 개인은 가르치되, 합리적인 시민을 가르치지 않는 것, 신독愼獨(*노자에 나오는 말, 공자는 모름지기 신독하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홀로 있어도 예를 갖추고 법도에 어긋나서는 안된다는 뜻) 하되 협업하지 않는 것, 현대 한국 사회의 공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공교육을 대학까지 정상적으로 다 마쳐도 계약서 한 장을 제대로 못 쓰고, 취업을 위해 애는 쓰지만 노동법은 읽어 본 적도 없고, 딜은 영화에서나 본 적이 있는 교육은 명백히 고장이 나 있따. 사람과 사람이 뉴런처럼 촘촘히 연결된 초연결의 사회에서 이런 결점은 치명적인 걸림돌이다. 도끼를 치우고, 상소문을 던져버리고, 초연결사회를 사는 현대 시민의 옷을 입어야 한다. 상대의 말을 깊이 경청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안을 마련해 손을 맞잡는 경험을 어릴 적부터 가르쳐야 한다. 

 

p46. 1996년, 한국영화의 느닷없는 황금기

 한국 영화 얘기를 해보자, 1996년과 2006년 사이에 한국영화가 느닷없는 황금기를 맞는다. 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97년 <넘버3> <접속> <초록물고기>, 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99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 <박하사탕>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1년 <소름>, 2002년 <복수는 나의 것>, 2003년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지구를 지켜라>, 2004년 <송환>, 2006년 <괴물> 등등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아~ 할 영화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이들 극영화 15편 가운데 무려 8편이 감독 데뷔작이었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로 봉준호 감독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고, 같은 해 박찬욱 감독은 세 번째 연출작 <공동경비구역 JSA>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체 96년도에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해에 영화 사전심의가 폐지되었다. 사전 검열이 폐지됐고, 공연윤리위원회도 사라졌다.

 검열이니 사전심의니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거다. 조영남의 <불꺼진 창>은 왜 창에 불이 켜져 있어야지 꺼졌느냐고 금지, 이장희의 <그건 너>는 왜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냐고 금지, 양희은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뤄지지 않느냐고 금지했다. 배호가 노래한 <영시의 이별>은 당시 통행금지가 밤 12신데ㅔ 그 시간에 헤어지면 언제 집에 가느냐고 금지곡이 됐다. 그러다가 사전심의가 폐지되고, 뉴런이 사방으로 자유결합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휩쓸었고, 넷플릭스 상위권을 K드라마가 채우고 있다. 일본은 TV 시리즈 10위 중 절반이 한국 드라마다. <사랑의 불시착>은 일본에서 230일이 넘도록 톱 10이다. 대만은 톱 10 중 9개, 말레이시아는 8개, 베트남은 7개가 한국 드라마인 때도 있다.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최고 경영자가 재미있게 본 한국 드라마로 뽑은 <킹덤> < 사랑의 불시착> <사이코지만 괜찮아> <승리호>들이 끊임없이 리스트를 점령한다. 최근에는 애플도 한국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올해도 윤여정 씨가 지명되는 영화제마다 여우조연상을 타낸 끝에 봉 감독에 이어 2년 연속 아카데미상으로 화려한 매듭을 지었다.

 

p52

 뉴런의 자유결합이 지능을 만들듯이, 재능의 자유결합이 경제를 꽃피운다. 민주주의는 한국의 경제와 문화를 위로 밀어올리는 최고의 플랫폼이다. 당연한 듯 보이는 이런 K-민주주의는 기실 유리그릇처럼 위태롭다. 사회 곳곳의 인재들을 생각에 따라, 정권의 친소 관계에 맞춰 블랙리스트로 분류하고 갈라치기를 했던 게 불과 몇년 전이다. 번영은 공짜가 아니다.

p84. 왼쪽으로 가는 영국차

 오래전에 영국에서 마차는 왼쪽 통행을 했다. 오른쪽으로 다니면, 대부분 오른손잡이인 마부가 휘두르는 채찍이 자칫 지나가는 행인을 때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만들어진 자동차도 자연스럽게 왼편으로 다니게 됐다. 이 '자연스러움'의 결과로 영국과 영연방 일부, 그리고 따라서 채택한 일본 등은 두고 두고 비싼 비용을 치르게 된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오른손으로 수동식 기어를 조작하기 편하게 핸들을 왼쪽에다 뒀기 때문이다.

 우핸들을 좌핸들로 바꾸는 것은 단순히 운전대만 바꿔서 되는 일이 아니라 파워트레인까지 뜯어고쳐야 하는 큰 작업이다. 인테리어도 통째로 바뀐다. 따라서 차를 만들 땐 언제나 수출용 차와 내수용 차, 2개의 라인을 만들어야 한다. 차를 수입하는 건 더 큰 난관이다. 좌측통행용으로 새로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p85. 인장제도문화보존연맹

 일본 국회에는 도장 문화를 존중하는 '일본 인장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 연맹'이 있다. 얼마 전까지 다케모토 나오키라는 의원이 이 연맹의 회장이었다. 이 양반이 몇 달 전에 과학기술-IT 담당장관이 됐다. 그는 자기 입으로 컴맹이라고 자복한 사람이다. 취임하면서 역사적인 명언을 남겼다. "행정절차의 디지털화와 함께, 서류에 날인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도장 문화의 양립을 목표로 한다." 이 명언이 얼마나 비난을 많이 받았던지, 그는 결국 '일본 인장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 연맹' 회장직으로 사임해야 했다.

 일본은 세계 최고의 로봇 강국이다. 그 로봇 강국 일본에서 2년쯤 전에 덴소 웨이브와 히타치 캐피털, 히타치 시스템즈 등이 자동 날인 로봇을 개발했다. 

 히타치 캐피털 측은 "산업 현장에서 '날인 작업이 귀찮기 대문에 효율화해 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 개발했다"고 말했다. "사람 대신 로봇이 서류 뭉치를 분류해 도장을 찍으면 시간을 절약하는 효과가 있고, 이는 사실상 '서류를 전자화'하는 것과 같다."

 'AI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며 인공지능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원격근무 잘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원격근무는 잘 하고 있는데, 인감을 찍어야 하는 일이 있어 가끔씩 사무실에 나갈 수 밖에 없다'고 답했다. 천하의 손 회장조차도 인감을 찍어야 돌아가는 일본 사회의 구조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p100. 한국, 오래된 맛집의 비밀

 몇 해 전 국내 유수의 음식 배달 서비스 회사에서 한국의 오래된 맛집의 비밀을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가동한 적이 있다. 오래된 맛집의 비밀을 알 수 있다면 이것을 잘 정리해 자사의 서비스를 쓰는 자영업자들에게 알려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막상 연구 결과가 나온 뒤 이 업체는 발표를 하지 못하고 접었다. 비밀을 발견하긴 했는데, 전혀 자영업자들에게 알려줄 만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오래된 맛집의 비밀로, 압도적인 단 하나의 변수를 가리켰다. '자가 점포'. 자기 점포에서 영업을 하지 못한 거의 대부분의 맛집들이 장사를 이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 뒤를 이어 잘 나가던 경리단길이 임대료의 급격한 상승으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난 사례가 나온다)

 임차인이 갖은 노력을 다해서 입소문을 내고, 그래서 손님이 늘어나고 매상이 올라가면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을 건물주들이 냉큼 임대료로 가져가 버린다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노력을 할수록 벌을 더 받게 되는 구조다. 이런 구조에서 100년 된 노포가 나온다면 그게 기적이지.

 우리의 임대차보호법에 해당하는 게 일본의 차지차가법이다. 

 (일본의 경우는) 임차인이 월세를 제때 내지 못하고 있건, 임차 기간 중 건물에 손상을 입혔다거나 하는 등의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건물주는 임대 연장을 거부하지 못한다고 법으로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주변 비슷한 건물의 임대료와 비교해서 상당히 낮은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임대료를 올리지 못하게 못을 박고 있다. 분쟁이 있으면 재판으로 해결해야 하며, 주변의 임대료가 많이 올랐다는 것도 건물주가 입증해야 한다.

 이런 구조라면 식당 주인이 죽을 힘을 다해서 열심히 할 만하다. 노력의 대가를 고스란히 자신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열심히 한 결과로 쫓겨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p148

 산업혁명은 역사상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인류의 생산성을 높여 놓았지만, 초기의 90년간 그러니까 거의 한 세기 동안 평균적인 서민의 생활수준은 나락으로 떨어진 채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p155

 얼마 전 애플의 신용카드 발급을 위한 신용등급평가시스템이 동일한 조건의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 더 낮은 신용한도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소식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금세 퍼져나갔고, 미 금융당국도 조사에 착수했다. 이 사건은 2가지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첫 번째, 애플이 사용한 금융 데이터에는 처음부터 고객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고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인공지능은 애초에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애플 스스로도 왜 자신들의 알고리듬이 이런 편향된 결과를 불렀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인공지능이 저지른 일이었던 것이다. 애플과, 카드발급을 맡은 골드만삭스는 과거의 데이터 자체가 편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짐작했다.

 

 지난해 아마존은 몇 년간 개발해서 채용에 적용해오던 인공지능 툴을 폐기했다. 최근 10년간의 채용 데이터를 근거로 수많은 채용 후보자 중에서 적합한 사람을 가려내는 툴이었는데, 그 결과가 남성 편향적이었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지난 10년간 남자직원이 훨씬 많았는데, 인공지능은 이것을 주요한 입력요소로 판단한 것이다. 아마존은 이 편향을 제거할 적절한 방법이 없다고 판단해 결국 툴을 개발해온 팀 자체를 해체했다.

 

p158

 케인즈는 '장기적인 균형'이라는 언술의 허무함을 이렇게 설명했다.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 죽는다."

 

 

과학, 건축, 경제, 인문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최근 동향이라든가 현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대담 형식으로 진행한 유툽의 내용을 책으로 옮겼다.

 

개인적으론 유현준 교수과의 건축 및 부동산에 관한 내용이 새로웠다.

 

각 분야에 대한 수준높은 담론보다는 입문의 소양을 갖추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좋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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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만남 x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

 

p53

 

제동 : 그런데 그게 의도적인 것인지, 최선을 다했는지 실수한 건지 어떻게 확인하나요?

상욱 :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라서 과학계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다뤄지는 실수가 아니면 아예 검증에 안 들어갈 때가 많아요. 그래서 모든 과학자가 다 성실하게 과학의 방법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얀 헨드린 쇈(Jan Hendrik Schoen)이라는 과학자는 2000년부터 2001까지 불과 2년 사이에 유명한 과학저널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연구 논문이 무려 16편이나 실렸어요. 보통 과학자라면 평생 논문 한 편 실리기도 쉽지 않은 저널인데 말이죠. 분자로 된 트랜지스터에 관한 논문이었는데, 데이터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곧 들통났죠. 가설에 실험 결과를 꿰맞춘 거였어요.

 그의 논문 수십 개가 다 취소됐어요. 논문에 "철회되었다(retracted)"라고 아주 확실하게 박아놨어요. 문제가 된 논문을 삭제한 게 아니라 그대로 놔두고서 논문이 연구 부정으로 쓰였다고 박제를 한 거에요. 이 사람에게 박사학위를 준 독일의 콘스탄츠 대학교에서는 학교의 수치라며 이 친구의 학위를 박탈했어요.

 연구 부정이 밝혀지면 그 당사자는 과학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요. 과학자 집단은 동료가 진행한 데이터를 믿고, 그 결과가 옳다는 것을 전제로 그 실험을 재현한 다음에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니까요. 동료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면 그 한 사람 때문에 누군가는 소중한 시간과 자원을 허비학 되잖아요.

 지금도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백신 개발을 하고, 관련 데이터를 공유하잖아요. 공유된 정보만 믿고 거기에 맞게 개발하고 있는데, "미안한데, 거짓말이었어." 이렇게 말한다면 인류의 노력이 그냥 물거품이 되는 거죠. 그래서 용서를 못 하는 거에요.

 

p55

상욱 : 민감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게 지적재산권이잖아요. 백신을 개발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개발했을 거에요. 물론 지금 분위기에서는 과학자들도 선뜻 특허를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걸 강요할 수 있는지는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이번에 강요하는 전례가 만들어지면 또다른 바이러스가 생겼을 때 사람들이 백신을 개발하려고 할까요?

제동 : 사실 저는 당연히 적당한 보상 원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가 위급할 때를 대비해 얼마만큼의 기반 시설을 닦아 놓느냐의 측면에서 봐야 하는 것 같아요.

상욱 :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죠. 리스크 관리를 위해서는 리스크를 관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우리가 의사들, 간호사들, 질병관리청에 계신 분들에게 박수 보내면서 정말 훌륭한 분들이라고 칭찬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그분들은 지난 몇 개월 동안 휴가도 못가고 아마 추가 근무까지 했을 텐데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 없이 말로만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p57

상욱 : 서로 논의를 하고 시스템을 구축해나가야 하는 거죠. 이때 시스템이란 완벽한 제도를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끊임없이 논쟁과 논의를 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는 거에요.

 

p63

제동 : 다만 인간으로 살면서 자기 기준을 갖는다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기 기준이 있어야 일관되게 살 확률이 커지고, 논리적 모순 없이 살기만 해도 다른 사람한테 예측 가능성을 주기 때문에 훨씬 더 믿을 만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쉬워질 거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이때 자기가 세워놓은 기준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거에요. 이 사실을 알면 자기 기준에 따라서 살다가 뭔가 좀 이상하면 '이게 틀렸나?' 하고 바꿔볼 수 있거든요. 인간의 문제는 오히려 답이 틀릴 수 있다는 것, 내가 항상 옳은 건 아니라는 것, 나아가 본래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최대한 자기 기준을 만들어서 그 기준과 모순 없이 일관되게 살도록 노력하되 끊임없이 점검해나가는 것, 그게 최선이 아닐까 싶어요.

 

p65

제동 : 아, 그래요? 지금 상욱 쌤 얘기가 되게 인상 깊은게, 과학에서는 검증할 수 없다거나 그것은 우리 영역이 아니라고 말하지, 틀렸다고 얘기하지는 않는군요. 지금도 "그런 실험은 좋은데, 문제는 그 실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안다." 이렇게 얘기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도 사람 마음이 희안하게 "영혼의 무게 21 그램이 빠져나가면 어디로 가는 걸까? 이런 데 끌리긴 해요. 저는 그런 쪽에 마음이 더 가요.

 

p67

상욱 :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학문의 역사를 보면 그렇지 않았던 때가 있었어요. 서양의 근대과학이 1600년대쯤에 탄생했다고 믿어지는데, 그전까지는 철학과 신학이 과학의 역하로 담당했어요. 종교적 질문, 우주에 대한 질문,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온 학문은 철학과 신학이었어요. 중세에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서양 문화에서 철학과 신학의 공통점이자 특징은 모든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 거죠.

제동 : 아, 무오류라고...

상욱 : 오늘날 우리의 감각으로 신학은 주로 인간의 도덕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지만 그 당시 신학자들이 별을 이야기하고, 천문 현상과 기상 현상을 이야기했거든요. 심지어 물질을 이루는 근원도 이야기 했잖아요. 누가 무엇을 묻든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성경에 있어." 이렇게 말해야지, 성경에도 답이 없는 게 있다고 하는 순간 이단이 되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어요. 반면 과학은 시작부터 명확하게 무지를 인정해요. 그리고 객관적이고, 재현 가능한 물질적 근거를 기반으로 얻은 증거로만 이야기하거든요. 그걸 일반화시킨 게 귀납법이죠.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만 가지고 이야기하라는 건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입 다물라는 뜻이죠. 실제로 입 다물어요. 갈레리오는 한 번도 인간의 도덕에 관해 책을 쓴 적이 없어요. 뉴턴도 예술에 대해서 이론을 만든 적이 없고요. 자기가 진행한 실험을 통해 얻은 지식만 가지고 이야기하라는 뜻은,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라는 의미에요. 그래서 우리 과학자들은 모르는 게 많아요.

 

p113

제동 : 저는 잘 이해가 안 되는 게, 양자컴퓨터로 뭘 할지도 모른다면서 왜 이렇게 많은 나라들이 개발에 뛰어들고 있는 거죠?

상욱 : 왜냐하면 군사적 장점이 있거든요.

제동 : 그럴 것 같더라. 그럴 것 같았어.

상욱 : 이게 기존의 암호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어요. 지금 가장 널리 쓰이는 암호체계는 RSA라고, 인터넷뱅킹 등에도 쓰이는 건데 이것을 무력화할 수 있어요. 처음에 그것 때문에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죠. 거꾸로 양자역학을 이용해 암호를 만들면 절대 안깨져요. 양자역학을 이용한 암호를 사용하면 절대로 도청당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앞서 얘기한 검색 알고리즘은 아직 갈 길이 멀어요. 데이터베이스가 커지면 너무 힘들어지거든요. 하지만 암호 관련한 것은 군사적 이점이 엄청나니까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거죠. 만약 어느 나라가 이것에 먼저 성공하더라도 얘기를 안 할 거에요.

제동 : 다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거네요. 마음만 먹으면 교란할 수도 있고. 혹시 통장에서 돈도 빼갈 수 있어요?

상욱 : 그럴 수도 있겠죠. 암호체계가 무력화될 테니까.

 

두번째 만남 x 건축가 유현준 교수

 

p122. 인구가 감소해도 집값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

 

제동 :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준 :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봐요. 그런데 보통 많은 분들이 인구론으로 부동산과 집값 문제에 접근하죠. "인구가 줄어드니까 집값이 내려갈 거다." 이런 얘기 많이 들어보셨죠?

제동 : 네. 일본처럼 집값 절벽이 다가올 거라고. 근데 제가 알기로는 일본도 도시 외곽의 집값은 떨어졌지만 도심은 오히려 올랐잖아요.

현준 : 맞아요. 인구가 도심으로 몰리면서 더 올랐죠. 물론 거품이 있던 시절만큼 회복되진 않았지만, 경제가 회복되었다고 하더라도 중심부의 얘기지, 주변은 별로 안 좋은 상태거든요. 그래서 주택 수요를 볼 때는 인구 중심으로 보면 안 돼요.

제동 : 아, 그래요?

현준 : 인구보다 세대를 고려해야 해요. 베이비붐 세대 언저리, 그러니까 인구가 많이 늘었던 세대는 대한민국 사회가 도시화와 핵가족화되는 것을 경험했어요. 시골에 살던 사람들이 도시로, 대부분 서울로 이사를 갔어요. 농업경제 시대에는 도시 인구가 15% 정도밖에 안 됐는데, 지금 대한민국은 전국민의 91%가 도시에 살고 있거든요.

제동 : 굉장히 높네요

현준 : 네, 90%가 넘는 도시화 비율은 전세계에서 딱 세 나라, 홍콩과 싱가포르, 대한민국밖에 없어요. 대단히 독특한 사례죠. 엄청난 인구가 도시로 이동을 했어요. 예전에는 집이 조부모, 부모, 자식 3대가 사는 공간이었다면, 도시로 이동하면서 이제 2대가 사는 공간으로 바뀐 거죠.

제동 : 예전 드라마 「전원일기」에 나오던 그런 구성이었다다가 4인 가족이 된거네요.

현준 : 네. 정부 정책도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방향으로 바뀌기 때문에 4인 가족이 대한민국 중산층의 전형이 된 거죠. 우리나라 5,000만 인구가 4인 가족으로 살려면 집이 1,250만 채가 필요해요. 실질적으로는 4인 가족만 있는 게 아니라, 2인 가족도 있고 7인 가족도 있으니까 대략 2,000만 채가 필요한데, 문제는 1990년대부터 1인 가구의 비중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거든요. 지금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약 30%는 1인 가구고요, 2인 가구까지 합하면 거의 60%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수요는 늘어나는데 집은 아직도 4인 가족이 기준이라고 생각하고 공급을 안 늘린 거에요.

제동 : 아, 주택 수요를 잘못 계산해서 공급에 오류가 생겼다는 얘긴가요?

현준 : 맞아요, 혹시 '쉐어링 하우스'라고 들어보셨어요?

제동 : 네, 같은 집에 살면서 방만 따로 쓰는 그런 주거 형태죠?

현준 : 맞아요. 집값이 너무 비싸니까 많은 젊은 세대들이 내 집을 소유하지 못하고, 오피스텔에서 함께 월세로 살든지, 방은 따로 쓰고 부엌은 같이 쓰는 형태가 나오는 거에요.

제동 : 요즘 1인 가구는 수요가 있잖아요. 그런데도 건설사에서 그런 집을 안짓는 이유는 뭘까요?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인가요?

현준 : 그렇죠. 아파는 짓는 분들이 청년들을 위한 주택, 그러니까 1,2인 가구를 위한 괜찮은 집을 안 짓는 이유 중 하나는 젊은 친구들이 돈이 없어서에요. 대신 방 3개까지 30평대 아파트를 짓는 거죠. 그래야 오래된 30평대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이 그 집을 파고 새 아파트로 이사 갈 테니까요.

 결국에는 지금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만 또 아파트를 살 수 있는 거죠. 그러다보니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고요. 공급이 필요한 곳에는 돈도 없고 공급도 없는데 특정 지역, 예를 들면 서울 중심부나 강남 일대의 부동산 가격은 기형적으로 계속 올라가고, 그 주변 지역도 덩달아 올라가고 있어요.

 어쨌든 좋은 의도로 집값을 잡기 위해서 15억 원을 초과하는 집을 살 대는 아예 대출을 막았잖아요. 그랬더니 대출을 받아서 16억, 17억 원짜리 집을 사려던 사람들이 15억 원 이하의 집을 살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는 거에요. 결국 수요가 늘어나면서 15억 원 이하의 집값이 더 올라가게 됐어요. 한 7억, 8억 원 정도면 살 수 잇던 집이 10억 원이 넘어가기 시작하니까 집 없는 사람들의 내 집 마련의 꿈은 더 멀어지는 거죠.

제동 :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네요.

 

p132

현준 : 사람들이 자기 집을 갖게 되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좋은 점이 있어요. 바로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거에요. 1950년대에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프루이트아이고(Pruitt-igoe)라는 아파트 33개 동을 지은 후, 사람들을 이주시켰어요.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슬럼화가 된 거에요. 마약 밀매와 살인 같은 범죄의 온상이 돼서 지은 지 겨우 20년 만에 다이너마이트로 다 폭파해버렸어요.

제동 : 아니, 왜요?

현준 : 다큐멘타리에서 소개된 자료에 따르면 그 아파트에 입주한 주민 대부분이 월세였던 거에요. 그러다보니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이 없거나 적었던 거죠. '돈 벌면 여기서 나가야지' 하는 생각밖에 안 하니까 공동체가 형성이 안 되고 점점 더 슬럼화됐던 거에요. 그런데 똑같은 아파트 형식을 대한민국 강남에 적용했을 때는 부의 상징이 됐잖아요.

제동 : 그건 내 집을 소유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인가요?

현준 : 그렇죠. 칠레의 경우처럼 비록 절반만 완성된 집이라더라도 내 집이 되면 정착할 계획으로 주변을 꾸미게 되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들과도 친해져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자긍심이 생기게 되겠죠. '돈 벌면 떠나야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활을 하게 되는 거에요.

 

제동 : 전세만 하더라도 2년 있다가 나가야 하니까 고치기도 그래요. 괜히 손 댔다가 원상복구 해놓으라고 할까봐 걱정도 되고요. 우리 촌에서도 석양이 뉘엿뉘엿 질 때까지는 논밭에 남아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주인이거든요. 이건 내 논이고, 내 밭이니까 그럴 수 있는 거죠. 내 소유의 공간을 가꾸는 건 재미가 있잖아요.

현준 : 그렇죠. 사실 그건 인간의 본능이죠. 저도 전에 월세로 살 때 집주인 아주머니가 그러셨어요. "나가라고 안 할 테니까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사세요." 그런데 어떻게 월세를 내는 집이 내 집이겠어요? 그건 사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공유경제'라는 말을 싫어해요. 저는 그 말이 교묘하게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을 소작농으로 만들어놓고서 "한 달에 몇십에서 몇백만 원만 내면 좋은 집에서 호텔 같은 서비스를 받고 사는데 굳이 네 집을 가질 이유가 뭐가 있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해요.

제동 : 아, 그렇구나!

현준 : "이제는 회사 차릴 때 사무실 안 사도 돼. 사옥 없어도 돼. 그냥 월세만 내고 써. 그럼 적은 돈으로 어디서든지 창업할 수 있잖아. 좋지?" 이때 누가 돈 법니까? 공유 오피스 같은 회사만 돈 벌어요. 결국 공유경제는 내가 부동산 자산으로 돈 벌 기회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프루이트아이고 사례처럼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제동 :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도 동물이니까 비슷할 것 같은데, 동물은 자신의 서식지가 안락하거나 먹고살 만큼 기본적인 것들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번식을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현준 : 네, 본능적인거요.

 

p138

제동 : 맞아요. 엄마나 아빠가 밥 먹으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그 작은 사회 안에서 놀았던 공통의 추억 때문에 그렇게 전학 가기가 싫고 그랬죠. 지금은 아이 때부터 그런 공동체에 대한 경험이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에 어른이 되면 더 불안해지는 것 같아요. 자기만의 좁은 공간에 점점 더 갇히게 되고 사회로 나가면 더 불안하고..

현준 : 그렇죠. 강 건너편 사람과 이쪽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할 수 있는 중간지대,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커먼그라운드(Common Ground)'가 필요해요. 제동 씨도 아침에 현관문 열고 나오면 알겠지만, 지금 우리 주변엔 계속 이동해야 하는 공간밖에 없거든요.

제동 : 맞아요. 멈추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없죠.

현준 : 인도를 걷든지 차를 타고 이동을 하든지 움직이는 공간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어디 가서 않으려면 돈을 내고 카페에 들어가야 해요. 대한민국 서울이 전세계에서 단위 면적당 카페 수가 가장 많거든요. 공원도 적고, 벤치도 없고, 공짜로 않을 데가 없으니까요.

제동 : 유럽에 여행을 가보면 걷다가 아무 성당에나 들어가 앉아 있어도 참 좋잖아요. 반면 우리나라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은 편의점 앞에 있는 의자 정도인 것 같아요.

현준 : 그렇죠. 우리는 그런 공간이 없으니까 별다방에 가든, 빽다방에 가든, 자판기 커피를 마시든 이 사회에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공간은 돈을 내야만 쓸 수 있잖아요.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거죠. 돈 많은 사람은 비싼 데로 가고, 돈 없는 사람은 싼 데로 가니까 서로 다른 경제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공통의 추억을 만들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러면 서로를 이해하기가 힘들어지거든요.

 

p141

현준 : 코로나가 이 사회의 기본 구조를 많은 부분 흔들어놓고 있거든요. 지금까지 해오던 관성이 깨진 거잖아요. 이 얘기는 공간 체계도 그동안 관성으로 해오던 것들이 어느 정도는 와해될 거라는 의미에요. 그러면 '헤쳐 모여'가 되겠죠.

제동 : 충격을 주는 거네요.

현준 : 그렇죠. 예를 들어 그전에도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지만 직장 상사가 싫어해서 안 했잖아요. 온라인 예배도 가능했지만 교회에서 별로 안 좋아하니까 계속 꼬였던 건데, 지금은 전염병 때문에 좋든 싫든 온란인으로 해야 하니까요. 그러면 공간을 통해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이 권력을 내려놓게 되고, 그 구조가 해체되면서 재배치가 될 거에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빨리 공통의 목표를 정하고, 그 꿈을 이루는 방향으로 사회 구조를 재구성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동 : 쉽사리 내려놓지 않았던 기득권을 어쩔 수 없이 내려놓게 되겠네요.

현준 : 그렇ㄹ죠. 유럽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흑사병이 돌았던 탓에 중세사회를 끝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죠. 흑사병이 없었다면 교회의 권력은 계속 유지됐을 거에요.

제동 : 마녀사냥 하고, 문자와 신을 독점하고...

현준 : 그렇죠. 1,000년 넘게 문자와 신을 독점해온 그 시스템을 종식한 게 흑사병이에요. 전염병 창궐에 무기력했던 교회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죠. 코로나 사태 이후 어쨋든 우리의 생활방식이나 공간 구조를 바꿔야만 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재배치 하느냐, 이것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인 거죠.

 

p147

제동 : 우리나라가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 깨끗하고 의료체계도 잘 갖춰져 있잖아요.

현준 : 저는 해외에서도 오래 생활했지만,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에 상당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거든요. 정말 다른 어떤 선진국보다도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나라가 발전하려면 제대로 된 도시 모델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그런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이번에 코로나 방역에 잘 대처했잖아요. 전염병에 강한 도시는 제대로 된 도시 모델이거든요. 도시 모델이라고 하면 복잡하게 많은 요소가 있을 것 같지만 제일 기본적인 게 물 공급이 잘 되고 전염병이 없는 거에요.

제동 : 아, 과거에 로마와 파리가 발전한 것처럼 상하수도 문제가 해결된 도시군요.

현준 : 그렇죠. 거기서 더 나아가 19세기부터는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전염병을 상당 부분 통제하기 시작했어요. 예방주사라든지 항생제가 없었다면 인구가 1,000만 명이나 되는 도시는 나올 수 없었을 거에요. 잉카문명이나 마야문명이 멸망한 것도 다 전염병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결국에는 전염병에 강한 도시 공간 구조를 만드는 것이 국가 경쟁력과도 연결돼요.

 

p148

제동 : 누구나 공기 좋고 물 좋은 데 살고 싶어하잖아요. 집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실제로 집을 고를 땐 주변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진 곳을 찾게 되잖아요.

현준 : 그렇죠. 그런 곳으로 모이죠.

제동 : 수도권 집값이 너무 올라가니까 문제긴 하지만, 그렇다고 "도시는 복잡하니까 거기로 모이면 안 돼." 이렇게 접근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현준 쎔 얘기는 오히려 사람이 살고 싶은 곳에 더 많은 집을 공급하고,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건강한 공간을 늘려가야 한다는 거죠?

현준 : 맞아요. 거기서 꼭 필요한 것이 다양성이에요. 예를 들어 강남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렇다고 강남의 인구 밀도만 높이면 삶의 질이 높아질 거라고 보지는 않아요. 밀도가 어느 정도 이상 올라가면 오히려 매력이 떨어지겠죠. 그때쯤 누군가가 부산이나 목포처럼 바다가 보이는 어느 지역에 샌프란시스코 같은 도시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죠. 이때 사람들이 그곳을 보고 '저기에는 서울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이 있어'라는 생각 들게 할 수 있다면 또 그쪽으로 이동해가겠죠.

 

p151

현준 : 지난 한 10년간의 도시 재생 사례를 보면 다양성 측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곳이 어딘 줄 아세요? 바로 익선동이에요. 낙후돼서 사람들 발길이 뜸했던 동네가 젊은이들이 몰리는 활기찬 동네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중정(中庭)을 지붕으로 덮어 실내 공간으로 바꿨기 때문이에요.

 이게 원칙적으로는 불법 점유인데, 어차피 나중에 철거될 거니까 관청에서 벌금만 좀 받고 눈감아줬어요. 만약 법대로 건폐율(대지 면적에 대한 건축 면적의 비율)을 적용하면 다 철거해야 하거든요. 그러면 돈 가진 사람만 새 건물을 지을 수 있겠죠. 그런데 중정에 지붕만 덮으면 공사비가 많이 안 들잖아요. 그러니까 자본이 많지 않은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창업할 수 있는 공간 구조가 된 거에요. 약간의 아이디어를 보태고 시스템을 조금 바꾸면 되는 거였어요.

제동 : 아,, 그래서 가보면 골목마다 개성이 살아 있고, 젊은이들이 많이 찾나봐요.

현준 : 앞서 제가 다양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는 했는데, 다양성이 나오려면 핵심은 소자본 창업이 쉬워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시스템을 바꿔야 해요. 지금 있는 규칙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창업하라고 하면 결국 대자본이 들어와 기존 건물을 다 밀고 쇼핑몰 거리를 만들겠죠. 그러면 소자본 창업 기회는 또 없어지는 거에요.

 

p153

제동 : 현준 쎔 얘기처럼 선택지가 많고 다양성이 있는 공간이 우리 주변에 많이 생기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게 안 되는 이유가, 사람들은 저마다 살고 싶은 곳들이 있고 꿈꾸는 데가 있는데 그 꿈마저 다 꺽여버린 세상이 됐기 때문이잖아요. 어디서 봤는데, 싱가포르는 원래 모든 국민이 자기 소유의 집을 갖는 1가구 1주택을 목표로 출발했다던데, 맞나요?

현준 : 네. 싱가포르와 우리나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주거의 다양성이에요. 싱가포르에서는 똑같이 생긴 아파트 단지를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똑같은 형태의 주거지를 만들지 않도록 하는 법적 장치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처럼 서울, 대전, 대구, 판교, 세종 할 것 없이 다 똑같이 생긴 아파트가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주거지부터 획일화가 되니까 점점 더 가치관이 정량화되는 것 같아요.

제동 : 선택지가 몇 개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네요.

현준 : 그렇죠. 그러니까 그다음부터는 가치를 부여할 데가 돈밖에 없는 거에요. 제동 씨 집이나 저희 집이나 거의 다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그러면 자기만의 독특한 가치가 없어요. 내 집의 가치는 결국 집값밖에 안 남는 세상이 되는 거죠. 그리고 아파트를 똑같은 모양으로 지으면 물물교환이 쉬워지면서 아파트가 화폐 기능을 갖게 되요.

 우리나라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각 분야에서 생각해야겠지만, 건축가로서 제가 제안할 수 있는 부분은 이거에요. "집을 다양하게 만들어라. 도시도 다양하게 디자인해라. 다양성을 키워라."

제동 : 그래야 사람들이 한곳으로 몰리지 않고, 각자 원하는 게 다르니 나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해지겠네요.

현준 : 그렇죠. 만약 100명이 있는데 선택지가 딱 하나밖에 없으면 99명은 경쟁자가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다양성을 10배 늘리면 행복한 사람이 10배 늘어나는 거에요. 우리 주택 문제를 단순 공급으로만 해결하겠다고 하면..., 전 답이 없다고 봅니다. 공급도 당연히 늘려야 하고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도 물론 좋지만,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이 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동 : 맞아요.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한강뷰도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지겨울 수 있거든요.

현준 : 서울이 엄청 넓잖아요. 그러면 정말 살고 싶은 동네가 100군데는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특하고 좋은 동네가 100군데 정도 생기면 주택형태도 다양해지고 인구도 좀 분산되겠죠.

 

 

세번째 만남 x 천문학자 심채경 박사

 

p244

채경 : 지금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달 궤도선에 주어진 기회가 단 한 번뿐이거든요. 그 한 번의 기회를 꼭 성공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죠.

제동 : 기회가 왜 한 번밖에 없나요?

채경 : 달 탐사 프로젝트에 돈이 많이 들어요. 제가 알기로는 예산이 2,000억 원 이상 되는데, 국민들의 세금으로 얻은 그 기회를 달 과학자들이 함부로 낭비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 이번에 실패 했는데 2,000억 원 한 번만 더 지원해주세요." 이렇게 말하기도 어려운 거죠. 누군가 "너희가 하고 있는 달 탐사 프로젝트가 그 정도의 부가가치를 만들고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거든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먹고사는 데 아무런 기여를 안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요. 당장 달 탐사 못 한다고 밥을 못 먹는 것도 아니고요.

제동 : 제가 물어보고 싶었는데 채경 쎔이 먼저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사실 '지금 당장 달에 가서 무슨 큰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도 있긴 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 국가 예산 500조 원 중에 2,000억 원 정도 들어가는 거잖아요? 물론 GDP 규모가 다르지만 다른 나라에서 투자하는 비용에 의하면 그렇게 높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2,000억 원이면 그게 얼마야?" 싶은 거죠.

 

채경 : 예전에 미국과 구소련이 한창 우주 경쟁을 할 때는 2년 동안 달 탐사선을 20대씩 보냈어요. 그러면 그게 다 성공했느냐? 그렇지 않았거든요. 10대 보내면 2대 성공하던 시절이었죠.

제동 : 그때는 미국과 구소련이 누가 세계를 선도하느냐를 두고 자존심 대결을 하던 때니까요.

채경 : 네. 당시에는 열 번을 실패해도 계속해보라는 분위기였을 거에요. 그런데 우리나라 달 과학자들에게 60,70년이 뒤처진 상황에서 딱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거에요. 우주 미션은 변수가 많아서 실패할 가능성이 크거든요. 그렇다고 실패해도 좀 봐달라고 합리화하려거나 밑밥을 까는 건 아니고요.

제동 : 밑밥 좀 까세요. 괜찮아요. 실패 경험도 쌓여야 성공 확률도 높아지고, 채경 쌤의 후배들도 그 실수를 토양 삼아서 또 도전할 수 있는 거잖아요.

채경 : 네. 그래야 다음 세대 친구들도 용기를 내서 '달 연구 재밌겠네. 달 탐사해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이 길에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왜 그렇게밖에 못해? 왜 자꾸 지연돼?'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만큼 어려운 일에 도전하고 있구나!' 이런 애정어린 시선으로 봐주시면 큰 힘이 되고 감사하죠.

 

 

네번째 만남 x 경제전문가 이원재 대표

 

p375

제동 : 솔직히 저 같은 사람은 신호(기본 소득을 의미함) 안 받아도 삽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웃을 여유가 없으면 제 직업도 의미가 없거든요. 사람들이 분노해 있는데 코미디가 되겠어요? 오히려 어떤 재밋는 얘기를 해도 돌을 던질 가능성이 커요.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사람들과 웃으면서 얘기하는 거에요. 사실 돈 받지 않고 강연할 때가 제일 행복해요. 그럼 안 웃겨도 되거든요. 희한한 게 그렇게 할 때가 저도 재밋고, 사람들도 훨씬 재밌어하는 것 같아요. 원래 돈 받고 하면 다 노동이고, 돈 내고 하면 놀이잖아요. 하지만 요즘은 돈 받고 노동도 하고 싶네요.

 

p378

제동 : 우리 사회가 이렇게 갈등이 첨예한 이유 중엔 축제가 적다는 것도 있어요. 축제라고 하면 거창한 것 같지만, 마을의 크고 작은 경조사도 사람들이 모여 오해와 갈등을 푸는 축제 역할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마을의 자잘한 축제들이 모두 대규모 축제에 잠식당하고, 경조사가 다 기업화돼 버렸어요. 지금은 장례식도 다 상조회사에 맡기잖아요. 예전에는 누가 돌아가시면 동네 주민들이 다 함께 했거든요. 뭐가 더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그렇게 바뀌었다는 거죠.

 그때 사흘간 밤새워 음식 하고 상여 메고 하면서도 돈을 받지 않았어요. 그냥 남은 음식 싸 가고, 상여 메시는 분들에게 막걸리 대접하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다섯 번째 만남  x 뇌과학자 정재승 교수

 

재승 : 뇌과학적으로 보면 우리 뇌에 인슐라(insula)라는 영역이 있어요. 뇌섬이라고도 하는데, 역겨움을 표상하고 공정함을 측정하는 뇌 영역이에요.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거나 그런 상황을 보면 분노 반응을 일으키는 곳이죠.

제동 : 아, 뇌섬이라는 곳에서 분노를 느끼게 하는군요?

재승 : 네, 시상하부와 함께요.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부모님이 형이나 언니에게만 잘해주거나 막내만 예뻐해서 화가 날 때가 있잖아요. 그 분노의 반응을 만들어내는 뇌 영역이 바로 인슐라에요. 어미 새가 벌레를 물고 와서 딱 한 마리 새끼한테만 계속 벌레를 준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때 나머지 새끼 새들의 뇌섬은 난리가 나요. 어미가 첫째에게만 계속 먹이를 준다면 나머지 새들은 자기도 달라고 지저귀어야 하나라도 얻어먹을 수 있잖아요.

 만약 "제가 봐도 첫째가 예쁘니 첫째만 주세요." "먹이가 남거든 그때 주세요." "전 안주셔도 되요" 이렇게 쿨하게 반응하면 굶어죽어요. 불공정함에 대한 분노 반응은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으려는 전략이기도 한 거죠. 안 그러면 굶어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차별과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 내가 되었든 내 주변 사람이 되었든 그것에 분노하는 뇌가 있는 거에요.

제동 : 그게 생존과 관련된 아주 원초적인 욕구인 거네요.

재승 : 그렇죠. 그래서 부모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딨어? 다 똑같이 대했어"해도 아이들은 다 기억하고 있는 거에요. 부모가 언제 나를 차별했고 상처를 줬는지를, 왜냐하면 아이들은 그걸 너무나 잘 기억하는 뇌 영역을 가졌기 때문이에요.

 

여섯 번째 만남 x 국립과천과학관 이정모 관장

 

p497

정모 : 네, 처음에는 저도 과학자와 신앙인 사이에서 고민하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괜찮아졌어요. 복음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과학적인 사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거든요. 신앙인들이 과학적인 사실에 두려움을 갖는다면, 그건 성서에 대한 신뢰가 약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신뢰가 있으면 얼마든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고 바꿀 수도 있거든요.

제동 : 그래요? 좀더 자세히 말해줘봐요.

정모 : 예를 들면 옛날 사람들은 천동설을 믿었잖아요. 지동설로 바뀔 때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어요. 그런데 지금은 천동설, 지동설로 고민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제동 : 그렇죠.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같은 과학자들 덕분이죠.

정모 : 1992년 10월 31일이 아주 중요한 날이에요. 혹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제동 : 1992년이면 제가 대학교 1학년인데, 분명 술 먹고 있었을 거에요.

정모 : 그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갈릴레오와 후손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합니다. "360여 년 전 우리 로마 교황청이 당신들의 조상인 갈릴레오 갈릴레이 선생님을 부당하게 핍박했습니다. 알고봤더니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닌 태양계 변방의 작은 행성에 불과하더군요. 용서해주십시요. 그리고 전세계 만방의 카톨릭교도들에게 알려드리오니, 오늘부터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인정합니다."

제동 : 1992년에 그런 발표를 했군요.

정모 : 네, 물론 그전에도 알았지만 그들의 잘못을 고백하면 카톨릭과 교황청의 권위가 무너질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만약 교황청에서 아직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면 누가 교황청의 권위를 인정했겠어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느냐면 지동설뿐 아니라 빅뱅이론과 진화론에 대해서도 받아들이자고 진지하게 권유를 하십니다.

 

p502

제동 : 앞에서 침팬지와 인간의 공통 조상이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정모 : 그렇죠. 그 공통 조상은 침팬지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에요. 그 조상의 자식 중 하나는 침팬지의 조상이 되고, 다른 자식 중 하나는 인간의 조상이 된 거죠.

제동 : 그러면 침팬지나 오랑우탄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네요? 저는 이게 항상 헷갈렸어요.

정모 : 전혀 없죠. 심지어 교과서에 그런 그림 있었잖아요. 네 발로 걷던 침팬지가 점점 두 발로 걷는 사람이 되는 그림이요. 그게 아주 큰 오류인 거에요. 지금이라도 교과서 내용을 바꾸면 후세가 공부하기 편할 텐데, 못 바꾸고 있어요.

 그 그림을 보면 침팬지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되고, 그게 호모에렉투스가 되고, 네안데르탈인이 된다고 그러는데, 우리는 그렇게 직선으로 진화한 게 아니라 계속 갈라서고, 갈라서고, 갈라선 거에요. 나무에서 가지들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져 쫙 뻗어나간 것처럼 그 나뭇가지 끝에는 사람, 침팬지, 원숭이, 지렁이, 풍뎅이 들이 있는 거죠. 지금 살아 있는 생명체는 다 진화의 끄트머리에 있는 거에요. 이제까지 우리는 지렁이는 진화가 덜 된 하등한 생물이라고 생각했잖아요. 우리가 진화에 대한 개념이 없다보니까 다른 동물들을 하찮게 여기는데, 진화를 제대로 이해하면 다른 생명들이 우리와 함게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동반자라는 걸 알게 돼요.

제동 : 듣고보니까 정말로 겸손해지네요.

정모 : 그렇죠. 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세포로부터 시작됐어요. 빅뱅의 순간에 수소가 생겨났어요. 또 별에서 다양한 원소가 생성되고,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이 원소들이 다 흩어졌는데 그중 어떤 건 단백질이 되고, 어떤 건 지방이 되면서 우리 몸에 들어와서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거죠.

제동 : 과학을 제대로 알면 차별하는 마음이 사라지겠네요. 특히 인종차별은 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정모 : 과학 논문에서는 'Race'라는 단어를 쓰면 안 돼요. 과학적인 단어가 아니에요. "인종(Race)은 없다. 인종주의(Racism)만 있을 뿐이다." 이런 말도 있죠.

제동 : 와, 좀 멋있는데요? 있어 보이고, 사실이어서 더 좋고요.

정모 : 생물학적으로는 모든 인간이 단일 종인 호모사피엔스에 속한다고 표현하면 되죠. 하지만 찰스 다윈도 'Race'란 단어를 썼어요. 물론 1800년대 얘기죠. 찰스 다윈도 어마어마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고 알려져 있어요.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찰스 다윈을 비난하기는 힘들어요. 그 당시 과학 상식의 기준으로 용인됐던 부분이니까요. 당시의 본능과 지식의 한계였던 거죠. 그렇지만 지금은 그 한계를 뛰어넘었기 때문에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그랬다고 나도 그런 태도를 가지면 안 되겠죠.

 

p520

정모 : 의심할 때 중요한 게 숫자에요. 숫자로 의심해야죠.

제동 : 숫자요?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정모 : 2017년에 '살충제 달걀 파동'이 있었잖아요. 일부 양계장에서 피프로닐(Fipronil)이라는 살충제를 막 뿌렸던 거에요. 피프로닐은 간, 신장, 갑상선을 손상시킬 수도 있는 독성 물질이에요. 그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이 '달걀이 피프로닐에 오염돼서 큰일이다'라는 식의 보도를 했어요. 그리고 2018년 말에는 신생아들이 맞는 결핵 예방용 백신에서 비소 성분이 검출됐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전국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백신을 안 맞히려고 했던 일도 있었어요. 비소가 뭐냐면 사약의 주성분이에요. 그런데 따져봐야죠. 설마 멀쩡한 백신에 비소를 넣었을 리는 없잖아요.

 알고보니 전에도 비소가 있었는데 너무 적은 양이라 있는지도 몰랐다가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그것을 검출할 수 있게 된 거에요. 그만큼 적은 양이었어요. 우리가 매일 먹는 밥에도 비소가 들어 있거든요. 백신에는 밥 한 숟가락에 있는 양만큼의 비소가 들어 있었어요. 제가 지금 50대 중반이고 50년 동안 밥을 먹었지만 아직 비소에 중독되지 않았거든요.

제동 : 대신 밥에 중독되셨잖아요. 

정모 : 그렇죠. 밥에는 중독됐지만, 비소에는 중독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중요한 건 숫자인데, 피프로닐도 마찬가지였어요. 60g짜리 달걀에 0.002mg쯤 검출됐던 것 같은데, WHO가 정한 일일섭취허용량, 급성독성참고량에 따르면 체중이 60kg인 사람이 평생 매일 5.5개 먹어도 되는 양이에요.

제동 : 하루에 5.5개를 먹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요?

정모 : 네, WHO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체중이 60kg인 사람이 하루에 246개를 먹으면 문제가 생겨요. 그러면 간이나 신장, 갑상선에 독성이 생긴다는 거에요. 그런데 실제로 하루에 달걀 246개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제동 : 배불러서 죽을 것 같아요.

정모 : 네, 해부학적인 문제가 생겨서 진짜 죽을 수도 있어요. 배 터져 죽는 거죠.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달걀이 오염돼도 괜찮다는 게 아니에요. 문제가 생기면 올바른 정보를 알려주고 얼른 조치하면 되지, 온 국민이 패닉에 빠져서 달걀값은 치솟고, 빵집이 망하고, 수십 개의 양계장이 파산해서 그걸 다시 살려내기 위해 어마어마한 세금을 쏟아부을 필요는 없었다는 거죠. 우리가 숫자로만 계산해보면 문제를 좀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불필요한 혼란을 줄일 수 있어요. 물론 돈도 절약할 수 있고요.

 이렇게 과학적 태도의 시작은 의심인데, 의심은 모두에게 해야해요. 좋은 사람도 의심하고 좋은 말도 의심하는 거에요. 이때 그 의심에 답해주는 과학자의 태도는 겸손함인 것 같아요.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정말 겸손하거든요.

 

p526

제동 : 그런데 호모사피엔스가 잘못하는 것도 많잖아요. 특히 요즘은 자연과 환경 분야에서 죄책감을 느껴야 할 것 같아요. 근데 저번에 관장님이 북극 빙하가 녹는 것과 해수면이 높아져서 도시가 물에 잠기는 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걸 얼핏 들은 것 같은데, 그건 확실한 겁니까?

정모 : 이런 거에요. 빙하는 해수면 위로 요만큼만 나와 있고, 그 아래 더 많은 부분은 물에 잠겨 있잖아요. 신기하게도 다른 물질은 고체가 되면 부피가 줄어드는데, 물은 고체가 되면 부피가 커져요.

제동 : 그래서 물을 꽉 채워서 얼리면 그릇이 터지죠?

정모 : 네, 터져요. 그러니까 생각해보세요. 대부분의 빙하는 물속에 잠겨 있잖아요. 얼음이 해수면을 높여놨는데 빙하가 녹으면 부피가 줄어들겠죠?

제동 : 그러면 오히려 해수면이 낮아진다는 얘기에요?

정모 : 낮아져야죠.

제동 : 그런데 왜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높아지면 저지대 국가들이 침수된다. 자연재해가 생긴다, 하는 말들이 나올까요?

정모 : 북극 바다에 있는 빙하가 다 녹으면 해수면은 낮아집니다. 문제는 빙하가 바다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육지에도 어마어마한 빙하가 있고 남극 빙하는 다 육지에 있어요. 그린란드나 캐나다도 마찬가지에요. 이게 녹으면 그대로 바다로 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남극 대륙에 있는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이 높아지고,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 오히려 해수면이 낮아지는 거에요.

 

일곱 번째 만남 x 대중문화평론가 김창남 교수

 

p595

창남 : 아, 쉽지 않은 질문이네요.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대학이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는 공간, 그런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지 않나 싶어요. 학생들 역시도 대학에 다니는 기간을 그런 시간으로 인식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는 대학이 삶의 연습을 마음놓고 해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동 : 불안해하지 않으면서

창남 : 그렇지. 우리는 학생 때 만화책이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너 인마, 공부해야지, 왜 쓸데없는 짓 하고 있어?" 이런 얘기를 들어왔잖아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밥벌이 외에 다른 걸 할라치면 또 같은 얘기를 듣게 되요. "왜 일은 안 하고 쓸데없는 짓을 해?" 바로 그 쓸데없는 짓을 맘껏 해볼 수 있는 때가 대학시절인 거죠.

제동 : 그 쓸데없는 짓을 통해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질 수도 있고,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할 수도 있잖아요.

창남 : 맞아요. 그런데 요즘 보면 많은 대학에서 총학생회도 구성되지 않고, 동아리 활동도 잘 안 돼요. 그런 것들이 당장 토익시험 보고 취업 면접 준비하고 자격증을 따야 하는, 그 도로의 논리에서 보면 쓸데없는 일이 돼버린 건데, 진짜 대학의 의미는 바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대학에 있는 동안 비교적 자유롭게, 커리큘럼이나 세속적인 스펙이 요구하지 않는 일들을 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거든요.

제동 : 우리가 경쟁사회에서 살다보니까 '이러다 낙오되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알면서도 쉽게 시도를 못하는 것 같아요.

창남 : 사회 시스템 자체가 다 함께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쉽지 않죠. '어떻게 하면 두려움 없이 이것저것 도전해보고 시행착오를 겪어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으로서의 대학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나도 이런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제동 :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 그렇지 않다는 말씀인데, 이것이 젊은이들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이 되면 또 안 되는 거잖아요.

창남 : 당연하죠. 한국 사회가 그렇게 몰고 간 거니까. 그래서 대학의 기능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저는 가끔 캠퍼스에서 기타를 메고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반가워요. 기타를 치고 노래 부르는 건 그 친구의 전공이나 스펙과 무관한, 소위 말하는 '쓸데없는 일'일 거에요. 그래도 그 친구는 그것을 하는 거죠.

 

 

 

제동 : 보통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캠퍼스에서 술 먹지 마시오!" 하잖아요. 그런 얘기 들으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캠퍼스의 낭만은?'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될라고...

창남 : 맞아요. 그러니까 요즘 대학생들을 탓할 수가 없는 거죠. 사회 전체가 그렇게 움직여왔고, 대학에 그런 기능을 강요했으니가. 2006년 서울대 입학식에서 신영복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대학시절에는 그릇을 채우려고 하기보다는 그릇 자체를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먼저 그릇을 비우고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제동 : 신영복 선생님 말씀이 당장 실천하기는 쉽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 맞는 말 같아요.

창남 : 내가 이만큼 살아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물론 내가 가지고 있던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건 굉장히 힘들죠. 대학에서 그러한 과정을 만들어가고, 그 이후에 그릇을 채우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신 건데, 요즘 내가 느끼는 안타까움은 학생들이 자기가 가진 그릇을 비우고 좀더 크고 새롭고 튼튼한 그릇으로 키우는 과정을 잘 경험하지 못하는 것 같은 데서 와요. 그냥 가지고 있는 그릇을 빨리 채우려고 드는 것이 요즘 대학생의 모습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제동 : 사실 학생들이 그럴 수 있으려면 사회에 나갔을 때 어느 정도 안정적인 요건들이 갖춰져 있어야 하잖아요. 앞서 쌤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이 사회에서 버림받지 않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어야 불안이 해소되고 그릇을 키우는 그런 경험들을 해나갈 텐데, 또다시 패배주의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우리가 그런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면,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은 많은데 왜 안 될까요?

창남 : 글쎄요. 내가 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동 씨가 말한 것처럼 이 사회와 국가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사회구성원들에게 심어주는 게 핵심이겠죠. 그게 기본소득의 형태가 됐든 보편적 복지 형태가 됐든 어쨌거나 이 사회가 각자도생의 정글이라는 인식을 안 가져도 될 만큼의 최소한 신뢰라도 심어주는 거에요.

제동 : 이 사회가 정글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는 게 아니고, '안 가져도 되게끔' 한다는 게 중요하네요.

창남 : 그렇죠. 불안한 사람에게 "불안해하지 마."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제동 : 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만 있어도 힘이 좀 될 텐데 그게 없으니까 더 불안한 거죠.

창남 : 예컨대 기본소득만 해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건 안 될 거야'하는 인식을 먼저 심어주잖아요. 언론의 문제일 수도 있고, 이 사회의 담론구조를 장악한 권력 집단, 마이크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심어주는 건 아닌가. 내가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제일 하고 싶은 얘기가 그거였어요. "두려워하지 말자." 두려움은 나 혼자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거잖아요.

제동 : 맞아요.

창남 : 내 친구가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면 같이 방법을 모색해볼 수 있잖아요. 언젠가 우리 학생한테 들은 사례인데, 나 혼자 살면 월세 50만 원을 내야 하지만 친구와 같이 살면 절반만 내도 해결할 방법이 있는 거죠. 그런데 각자 해결하려다보니까 친구도 경쟁자가 되고 승부의 대상이 되는 상황이죠. 신영복 선생님 말씀처럼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날 거예요. 그렇게 함께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 또한 대학의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제동 : 저처럼 불안감이 많은 사람도 쌤과의 대화를 통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듯이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대학이 될 수 있겠네요.

창남 : "친구가 되지 못하는 스승은 좋은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되지 못하는 친구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해주신 말씀이에요. 명나라 때 이탁오라는 사상가가 했던 말을 현대식으로 말씀해주신 것인데, 저한테는 굉장히 깊이 남아 있어요. 거의 마지막에 해주신 말씀이거든요. 요즘 친구들을 만나거나 학생들과 대화할 때 이 얘기를 꼭 해요. 결국 가장 좋은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이자 스승이 되는 관계인 거죠.

 

p608

창남 : 신영복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부란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로의 여행"이에요.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하는 것은 대상을 타자화하고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걸 의미해요. 공감하는 거죠. 이해에서 공감으로, 이게 아주 힘든 과정이죠.

 

 

 에세이로 분류되어 있지만 내용상 인문으로 봐도 무방할 듯 싶다.

한국인으로서 일본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로 있는 서정민이라는 분이 쓴 에세이집이다.

신변잡기적인 내용도 있지만 한일관계라든가 종교 그리고 철학적인 부분도 혼재되어 있다.

일본에서 교수를 하시는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경계인의 시각에서 한일관계의 문제점을 다루는 관점은 참고할 만하다.

제목에 이끌려서 본 책인데 내용이 상당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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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6

 민족주의는, 고난 받는 민족의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을 회복하는 데에만 긍정적으로 유효하다.. 역사에서 자주 보았듯이 우월적, 배타적, 공격적인 민족주의는 피아를 막론하고 배격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 민족주의는 '수비적', '고난 받는 민족주의'의 긍정적 테제를 지난 바 있다. 그러나 현황은, 한국 민족주의의 실체는 사라지고 남북한 모두에 유사 민족주의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민족의 과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현저히 상실되었다. 한국내의 민족주의 갈등은 구민족주의를 거짓 민족주의이자 '보수 꼴통'으로, 신민족주의를 사회주의이자 '종북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상호 불신과 논쟁만 거세다.

 

p211

 지난 번 한국문학기행 중 미당시문학관에서 마주한 서정주의 고백문은 실제로 내게 많은 생각을 더해주었다.

 

 "나에게 친일문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43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최재서가 경영하던 '인문사'에서 일본어 잡지 '국민문학' 편집 일을 하는 동안 당시 총독부 산하에 소속된 조선국민총력연맹지부 요구대로 작품을 쓴 일이 있다. 쓰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젊은 그 시절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그것이 새삼 아픔으로 다가온다. 친일문제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며 깨끗하게 청산되어야 마땅하다. 당시 나의 정신적 실상을 세상을 뜨기 전에 꼭 글로 남기겠다.

 

 이렇게 전제한 서정주는 자신의 친일작품 일부도 인용해 놓았다.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리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서정주의 고백 수준이 결코 높거나 만족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누가 보아도 '변명'에 가깝다. "쓰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그것" 등의 표현은 영락없이 구차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중요하다. '분명히 잘못된 일'이라고 전제하고, 자신이 남긴 행적을 그대로 증거하는 일 자체가 필요하다. 이보다 훨씬 뒤인 최근의 일이지만, 결코 '역사적 정죄'가 아니라 '역사적 정리'라고 강조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친일인사 후손들의 어불성설 이의제기가 새삼 우리 가슴을 꽉 막히게 한다. 역사의 현장이 실존적인 고뇌 그 자체라는 것은 역사가들 스스로가 더욱 잘 안다. 사실과 고백, 그것처럼 역사인식을 맑게 해주는 기제도 드물다.

 

 

 

 2016년 트럼프의 당선, 영국의 브렉시트를 천박한 포퓰리즘의 승리로 매도하는 중도 좌/우파의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내용.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로 능력있는 자들이 독재, 혹은 엘리트들의 독재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번역된 공정하다는 착각은 좀 생각해보면 현재의 능력주의적 신자유주의가 기회의 평등을 신봉하지만 그 자체가 능력에 따른 계급을 고착화시키고 이러한 고학력 지식인들이 교육이라는 매개를 통해 지위를 세습하는 아이러니를 비판한다.

 미국의 양극화-특히 고등교육을 이수한 자와 아닌 자의 차이로 인한-를 자세하고 다루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생각할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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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1

  물론 실제로 보면 그렇게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돈은 뒷문뿐만 아니라 정문 앞에도 떠돈다. 실력대로라고? 사실 실력은 경제적 우위와 구별해서 보기가 어렵다. SAT처럼 표준화된 시험은 그 자체로 능력주의를 의미한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배경을 가진 학생이라 할지라도 지적인 장래성을 보일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 SAT 점수와 수험생 집안의 소득이 비례관계를 나타낸다. 더 부유한 집 학생일수록 더 높은 점수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

 

p46

 시장친화적이고 기술관료적인 세계화의 개념은 좌우 주요 정당들에게 고스란히 수용되었다. 특히 중도 좌파 정당이 시장 중심적 사고와 시장적 가치를 수용한 일은 무엇보다 의미심장했다. 이는 세계화 프로젝트의 진행에, 그리고 뒤따른 포퓰리즘의 반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트럼프가 당선될 즈음 민주당은 기술관료적 자유주의 정당으로서 한때 그 지지기반이었던 노동자와 중산층 유권자 대신 전문직업인들에게 한껏 기울어져 있었다. 브렉시트 당시의 영국 노동당, 유럽의 사회 민주당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변화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는 "정부는 문제이고 시장이 해답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정치 무대에서 물러나자, 미국 빌 클린턴, 영국 토니 블레어,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의 중도 좌파 정치친들이 뒤를 이었다. 그들이 시장에 대해 갖는 믿음은 이전의 리더들보다 엷었지만 각자의 사회에서 그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한몫했다. 그들은 통제받지 않는 시장의 날선 이빨을 어느 정도 무디게 만들었으나, 레이건-대처 시대의 핵심 전제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시장 메커니즘이야말로 공공선을 달성하는 기본 수단이라는 전제였다. 이러한 믿음에 발맞춰 그들은 시장 중심적 세계화를 수용했고 경제가 갈수록 금융화되는 경향을 환영했다.

 

p56

 사실 능력 있는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공자는 덕이 뛰어나고 유능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고 했다. 플라톤은 공공의 정신으로 무장한 수호자 계급의 지지를 받는 철인왕이 다스리는 사회를 상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철인왕에는 반대했으나 그 역시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공공 문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정치와 관련된 능력은 부유함이나 좋은 가문이 아니라 시민적 미덕civic virtue과 실천지phronesis(공공선의 문제에 있어서 추론을 잘하는 실천적 지혜)의 탁월함이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스스로를 "능력을 갖춘 사람Men of Merit"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처럼 유덕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공직을 맡기를 바랐다. 그들은 세습귀족제에 반대했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도 내켜하지 않았다. 선동정치가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연방에 상원을 두고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는 등의 제도로 능력주의적 통치를 도모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덕과 재능에 근거한 '자연 귀족정'을 '부와 출신에 근거한 인위적 귀족정'보다 선호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런 정부 형태는, 자연적으로 고귀한 사람들을 정부 공직에 앉힐 수 있는 순수한 선택을 하는 데 최고의 것이다."

 이런 저런 차이가 있어도, 공자에서 미국 공화주의자들까지 이르는 이러한 전통적 능력주의는 통치에 적합한 능력에 도덕적, 시민적 미덕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같다. 그들 모두 공동선이란 적어도 부분적이나마 시민의 도덕교육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겪고 있는 '기술관료 버전'의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 판단의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는 경제 영역에서 '공동선이란 GDP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해 버렸으며, 어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에 달려 있다고 못박아버렸다. 또한 정부 영역에서는 능력이란 곧 기술관료적 전문성이라고 보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현상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대통령 정책고문으로서 경제학자들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공동선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일에 시장 메커니즘이 점점 더 많이 적용되고 있다. 정치 논쟁에서 중요한 도덕적, 시민적 문제들 즉 '불평등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국경 문제에서 살펴야 할 도덕적 부분은 무엇인가?', '일의 존엄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우리는 시민으로서 서로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나?' 등이 소외되고 있다.

 

p70

 능력주의 논쟁은 구원을 논의할 때 다시 기독교에서 등장한다. 신앙이 독실한 사람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신이 각자의 생활 태도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첫 번째가 더 정당해 보인다. 권선징악의 틀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신의 전능함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며 따라서 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신은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하게 된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

 두 번째는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의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p96

 

 소련의 몰락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많은 서구인들은 역사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자본주의로의 행로를 명백히 드러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 가정에 힘입어 그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비전을 실천에 옮겼다. 자유무역협정, 금융 규제 철폐를 비롯한 재화, 자본, 사람의 국가 간 흐름을 쉽게 하는 여러 조치들이 취해졌다. 그들은 글로벌 시장 확대가 글로벌 상호의존성을 높일 것이며, 국가 간 전쟁 가능성은 줄어들고 민족주의 정체성이 완화되며 인권에 대한 존중은 높아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글로벌 경제와 새로운 IT가 가져올 긍정적 효과는 심지어 권위주의적 정권의 힘을 빼고 그들을 자유민주주의로 인도하기까지 하리라 여겨졌다.

 

 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세계화 프로젝트는 2008년 금융위기를 몰고 왔으며, 8년 뒤에는 격렬한 정치적 반동을 일으켰다. 민족주의와 권위주의는 사라지기는 커녕 전 세계적으로 새롭게 힘을 얻었고, 민주 사회들에서도 자유주의적 제도와 규범을 위협했다.

 

p106. 고된 노력과 정당한 자격

 

 나는 능력주의 정서가 점점 짙어지고 있음을 나의 학생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1980년부터 하버드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쳐온 나는 때때로 학생들에게 해가 지남에 따라 자신의 의견이 바뀐 건 없는지 묻곤 한다. 보통은 그런 질문에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교실에서 내가 가르치는 주제(정의론, 시장과 도덕, 신기술의 윤리학) 아래 논쟁을 벌여 보면 학생들의 도덕 및 정치관은 매우 다양했다. 그런 가운데 크게 의견이 바뀌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데, 예외가 하나 있었다. 199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현상으로, 갈수록 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성공은 자신의 덕이며, 자신이 기울인 노력에 따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능력주의적 신념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먼저 나는 이 현상이 학생들의 성장 연령대가 로널드 레이건 시대이고 따라서 당시 유행한 개인주의 철학에 물 들었기 때문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학생들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적이지 않았다. 능력주의적 직관은 정치적 성향을 불문하고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직관이란 대학 입학에서의 소수집단 우대정책과 관련된 토론에서 특히 강하게 불거졌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에 찬성하는 학생이든 반대하는 학생이든 '나는 죽어라 노력해서 하버드에 왔으며 따라서 나의 지위는 능력으로 정당화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이 운이나 기타의 통제 불가능 요인으로 입학한 게 아니냐는 말에는 거센 반발이 있었다.

 쉽게 들어가기 힘든 대학의 학생들 사이에서 능력주의 정서가 팽배해지는 현상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스탠포드대는 지원자 가운데 거의 삼분의 일을 입학시키고 있었다. 1980년대 초에는 하버드와 스탠포드가 오분의 일을 입학시켰다. 그러나 2019년 이 두 명문대는 이십분의 일도 입학시키지 않았다. 입시 경쟁이 처열해지면서 명문대(그들의 부모가 입학을 열망하는 대학들)를 지망하는 청소년들은 가혹한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고급 교과과정에서 요구하는 빡빡한 스케쥴과 막대한 과제물, 심리적 부담, 사설 입시 컨설턴트와 SAT 과외교사, 체육특기를 비롯한 특별활동 강사들의 훈육, 그리고 인턴 이수와 해외 봉사점수 따기 등등 목표 대학의 입학담당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온갖 노력들). 이 모든 것이 자기 아이들에게 '최선'을 선물하려는 극성 부모들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이런 과도한 스트레스와 힘겨운 노력을 겪은 뒤에 얻은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며 성공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고 여겨지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그렇다 해서 학생들이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많은 학생들이 많은 시간을 공공 봉사나 그 밖의 선행에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그들을 철저한 능력주의자로 만들었다. 과거 청교도 선배들처럼 그들의 성공이 노력의 산물이라 믿는다.

 내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능력주의 정서를 느낀 것은 미국에서만이 아니다. 2012년 나는 중국의 남동쪽 해안 지역에 있는 샤먼대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 주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도덕적 제한'이었다. 최근의 신문에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사느라 자기 신장을 판 중국 10대 학생기사를 읽었던 나는 학생들에게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뒤이은 토론에서 많은 학생들은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를 나타냈다. 그 10대 학생이 강압이나 협박에 의하지 않고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 신장을 팔기로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입장에 반대한 일부 학생들은 가난한 사람의 신장을 사서 부자가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강연이 끝난 뒤 한 학생은 내게 비공식적으로 답을 주었다. 부를 이룩한 사람은 그만한 능력을 입증한 것이며, 따라서 생명을 연장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후안무치한 능력주의 사고의 응용에 깜짝 놀랐다. 돌이켜 보면 이런 주장이나 개인의 건강과 부가 신의 은총의 증표라고 하는 번영 복음 신앙이나 도덕적으로 동색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내게 그런 답을 들려준 중국 학생은 아마도 청교도 사상이나 섭리론 전통과는 무관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그의 학우들은 중국이 시장경제로 전환할 때 자라났다.

 

 부유한 사람은 많은 돈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내가 중국 방문 때 만났던 학생들의 도덕적 직관, 또한 지난 십여 년간 다수의 중국 대학에서 배양된 도덕적 직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중국 대학생들은 우리 하버드대 학생들처럼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은 사람들이며, 그 경쟁의 배경에는 치열한 시장사회의 경쟁이 있다. 우리가 성공하는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에는 저항하는 한편, 우리는 스스로 성공했고 따라서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재능에 대해 사회체제가 부여하는 보상이 아무리 크든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에 환호하는 일은 놀랍지 않다.

 

p128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굳건한 미국은 사회민주주의 유럽보다 덜 간대한 복지국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p149

 "진짜 문제는 노동자의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과 상관없으며,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데 있다.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생산한 것에서 자기 몫을 요구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이 생산한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사람들은 더, 더 많이 챙겨가고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민주당 사람들은 경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 현실이란 독점산업에서 경제의 금융화, 그리고 노동 관리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은 대신 그런 현실 모두를 방치하게 만드는 도덕적 환상에 젖어 있을 뿐이다."

 

p159.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지지받기 힘들 때(힘들지만 완전히 외면되는 것은 또 아닐 때다), 학력주의는 최후의 면책적 편견이 된다. 미국과 유럽에서, 학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에 대한 멸시는 다른 부분에서 시원치 않은 집단에 대한 멸시보다 훨씬 두드러진다. 아니면 적어도 훨씬 잘 통용된다.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실시된 일련의 설문조사에서 사회심리학자 연구팀은 대학을 졸업한 응답자들이 다른 약점보다 대학 졸업을 못한 약점이 있는 집단에게 더 반감을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전형적인 차별 대상 집단들 즉 무슬림, 터키 출신 유럽 거주민, 빈곤층, 비만인, 시각장애인, 저학력자 등에 대해 고학력 유럽인들이 보이는 반응을 조사했는데, 그 가운데 저학력자가 가장 기피됨을 알 수 있었다.

 미국에서 실시된 비슷한 조사에서, 연구자들은 유럽과 다른 차별 대상 집단들을 예시했다. 흑인들, 노동계급, 빈곤층, 저학력자였다. 미국인들은 이 가운데 저학력자에 대해 가장 낮은 평가를 했다.

 

 대졸 엘리트가 그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을 어떻게 낮춰 보는지를 넘어, 이 연구보고서들의 저자들은 몇 가지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냈다. 첫째, 그들은 교육 받은 엘리트가 교육 수준이 낮은 대중보다 깨어 있어서 더 관용적이라는 익숙한 생각이 어긋남을 포착했다. 그들에 따르면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는 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에 비해 편견이 결코 적지 않다. 다만 편견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더욱이 엘리트는 그런 편견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는 반대할지 모르나, 저학력자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는 '그러면 어때?'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둘째, 대졸 엘리트들이 편견에 거리낌 없는 까닭은 개인 책임을 중시하는 능력주의와 관련이 있다. 엘리트는 가난이나 출신 계층을 따지기보다 학력을 따져 노동계급을 멸시한다. 학력 이외의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들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낮은 학력은 개인의 노력 부족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래서 대학에 못 간 것은 그 개인의 책임이라 여긴다. "노동계급과 비교해, 저학력자는 보다 자기 책임이 크고 더 비난받을 만하다 여겨진다. 그들에 대해서는 분노 감정이 많고, 호감이 적다."

 

 셋째, 저학력자에 대한 이런 안 좋은 감정은 엘리트만의 것이 아니다. 저학력자들 스스로도 그렇다. 이는 능력주의적 성공관이 얼마나 사회에 깊이 파고들어 있으며,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이 그 때문에 얼마나 사기 저하를 겪고 있는지 보여준다. "저학력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손가락질에 저항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반대로 그들은 그런 손가락질을 내면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학력자들은 자신들의 상황이 자업자득이며 욕먹어도 싸다고 여기는 듯하다.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연구자들은 능력주의적 사회에 대학 진학이 계속 강조됨으로써 비대졸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화된다고 본다. "교육이야말로 사회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의 권고는,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의 집단이 더욱 부정적으로 평가되면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될 위험성을 키운다." 이는 사람들이 불평등을 더 선뜻 받아들이게 하며, 성공은 능력 나름이라고 믿기 쉽도록 한다. "교육을 개인 책임이라 여기게 되면 교육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교육 성과는 대체로 개인 하기 나름이라 여겨지게 되고, 그에 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 또한 그렇게 된다.

 

p164

 

 어떤 이들은 고학력 대졸자들이 정부를 이끌어간다면 환영할 일이지 문제될 게 무엇이냐고 할지 모른다. 물론 다리를 지을 때는 가장 유능한 엔지니어를, 맹장수술을 할 때는 가장 숙련된 의사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최고의 대학을 나온 국회의원을 원하면 안 될 까닭이 뭘까? 빵빵한 학력을 갖춘 고학력 리더들이 더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더 합리적인 정치 담론을 이루지 않겠는가?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미국 연방의회와 유럽 국회들에서 오가고 있는 정치 담론을 슬쩍만 들어 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러시모어 산의 큰 바위 얼굴로 기념되고 있는 네 사람의 미국 대통령들 중 둘(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은 비대졸자다. 또한 마지막 비대졸자 미국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은 미국 최고의 대통령 중 하나로 꼽힌다.

 

 하버드 졸업생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여러 배경을 가진 자문단과 뉴딜 정책을 고안하고 실행했다. 그 자문위원들은 최근 민주당 대통령들의 자문위원들보다 더 유능했으나, 학력은 훨씬 떨어졌다. 1930년대에는 경제 관련 전문성이 최근 수십 년처럼 워싱턴의 정책에서 중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머스 프랭크는 뉴딜 정책을 만든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배경을 가졌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루스벨트가 가장 신임하던 해리 홉킨스는 아이오와 주의 사회복지사였다. 법무장관을 거쳐 대법원 판사에 임명된 로버트 잭슨은 법학 학위가 없는 변호사였다. 루스벨트의 구제금융 정책을 추진한 제시 존스는 텍사스 주의 사업가였는데 유수 금융기관들의 관리자가 되는 데 아무 주저가 없었다. 루스벨트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사장에 선임한 매리너 애클스는 유타주 작은 마을의 은행원이었고 비대졸자였다. 아마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농무장관일 헨리 윌리스는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학업을 마쳤다.

 

p167

 의회를 고학력자 계층의 전유물로 만들면 정부가 더 효과적인 방향으로 가기 힘들다. 대표성만 더 낮아질 뿐이다. 이로써 노동계급은 주류 정당에서 배제되며 특히 중도좌파 정당에서 그렇게 된다. 그에 따라 정치판은 학력에 따라 양극화된다. 오늘날 정치판을 가르는 가장 깊은 균열 중 하나가 바로 대졸자와 비대졸자 사이의 균열이다.

 

p172

 이런 학력주의 병폐와 가깝게 이어진 것이 기술관료적인 공적 담론의 왜곡이다. 정책 결정이 '스마트하냐 우둔하냐'의 문제로 여겨질수록 '스마트한 사람(전문가나 엘리트)'이 결정하고, 일반 시민들이 토론과 결의를 하는 일은 배제하는 게 옳다고 여겨지기 마련이다. 능력주의 엘리트들에게 '스마트하다'와 '우둔하다'의 담론은 도덕 및 이념적 반대에 대해 비당파적인 대안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런 반대는 민주정치의 핵심에 속한 것이다. 정당정치와 갑론을박을 뿌리치고 정책을 관철하려는 의지가 너무 강하면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질문을 저버린 채 정치를 유명무실화하는 기술관료적 공적 담론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다.

 

p179

 그러나 정치적 이견을 단지 액면의 사실로 부정하거나 과학을 부정하는 일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사실과 의견이 정치적 설득 과정에서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 이전에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우리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술관료적 기만이다. 정치 토론은 종종 의제와 연관된 사실을 어떻게 잡아내고 정의할지에 대해 벌어진다. 어느 쪽이든 사실을 프레임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면, 그는 장기적으로 그 논쟁에서 이긴 셈이다. 모이니 한의 말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의견은 우리의 인식을 사로잡는다. 의견이란 것은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정립된 뒤에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니다.

 

p182

 기술관료적 입장의 매력이면서 동시에 약점은, 그것이 겉보기로는 잡음의 여지가 없는 가치중립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 기술'과 '스마트한 규제 틀' 같은 이야기는 기후변화를 두렵고 어려운 문제로 만드는 도적적, 정치적 질문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화석연료 산업의 외부효과를 억제하기 위해 민주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자연을 도구화하도록 부추긴 소비주의적 생활 태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쓰고 버리는 문화"라고 부른 그런 태도를 재고해야 할 것인가?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정부의 행동에 반대하며, '과학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정부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 않은지, 특히 경제를 대규모로 뜯억치며 특정인들(그런 재편성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기술관료적 엘리트들)의 잇속을 채우려 하는 게 아닌지 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는 전문가들이 대답해야 할 과학적 질문들이 아니다. 권력, 도덕, 권위, 신뢰에 대한 질문들이다. 바로 민주시민을 위한, 민주시민이 할 수 있는 질문들인 것이다.

 지난 40년을 군림해온, 좋은 학력을 자랑하는 능력주의 엘리트의 실수 중 하나는 그러한 질문들을 정치 논쟁의 핵심에 제대로 집어넣지 못한 것이다. 민주주의 규범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는 이 시점에, 능력주의 엘리트의 오만과 기술관료적 비전의 협소함에 대한 불만은 별 것 아닌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불만이 지금 이 지경까지 정치를 끌고 온 것이다. 그런 불만을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자들이 잘도 써먹은 것이다. 능력주의와 기술관료 정치의 실패를 바라보는 일, 그것은 그런 불만을 제대로 접수하고 공동선의 정치를 다시 이미지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단계다.

 

p192

 마이클 영은 누군가의 사회적 지위가 우연한 이유로 정해짐을 성찰하는 것이 꽤 득이 된다고 보았다. 덕분에 승자와 패자 모두 자기 인생은 자업자득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현행 계급질서를 마냥 옹호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는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역설적인 효과를 준다. 직업과 기회의 능력에 따라 배분되더라도 불평등은 줄어들지 않는다. 불평등 구조를 능력에 따라 재국축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재구축은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자리를 가졌다는 생각을 굳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를 더 벌려놓는다.

 

 "이제 능력에 따라 계급이 분류된 사람들에게 계급 간 격차는 필연적으로 더 넓어진다. 상류계급은 더 이상 자기 의심이나 자기 비판에 시달리지 않는다. 오늘날 잘나가는 사람들은 그 성공이 단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보상이요, 노력에 따른 대가라고만 여긴다. 그리고 누구도 그 성공에 대해 가타부타할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은 상류계급에 속할 만하니까 속해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시작할 때부터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뿐 아니라, 타고난 재능을 일류 교육으로 갈고 닦을 수 있었음도 알고 있다."

 

p208

 하이에크는 경제적 보상이 능력의 문제임을 부정함으로써 재분배에 따른 옹호론을 차단했다. 헤지펀드 매니저가 왜 교사보다 많은 돈을 버느냐며 분개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킴으로써 말이다. 하이에크는 우리가 비록 교사의 직분이 돈 관리하는 일보다 더 찬양할 만하다 여길지라도, 봉급과 임금은 좋은 인격이나 칭찬할 만한 업적의 보상이 아니며, 시장 참여자들이 내놓은 재화와 용역의 경제적 가치에 따른 보수일 뿐이라고 답변한다.

 

 하이에크와 달리 복지국가 자유주의의 옹호자들은 부자에게 세금을 거둬 빈자를 돕는 일을 선호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소득과 부의 배분이 각자의 능력이나 자격과는 무관해야 한다는 하이에크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p210

 롤스는 "차등의 원칙은 '자연적 재능의 분배 상태가 공동 자산이며, 그 분배에서 비롯되는 편익은 무엇이든 공동체적으로 향유되어야 한다'는 합의를 나타낸다.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유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가 누구든 가장 불우한 상황에 처한 이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한에서 그 행운의 몫을 향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는 반드시 "우연한 배분이 가장 불운한 사람들에게 이롭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p250

 코넌트는 이런 세습적 엘리트 체제를 뒤집어엎고 능력주의적 체제로 대체하려고 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르만이 했던 말로 정리된다.

 

 '기존의 비민주적인 미국 엘리트들을 쫓아내고 좋은 머리, 정교한 훈련, 공적인 정신으로 찬 새로운 엘리트가 배경을 불하고 충원되어 그들을 대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사실 보자면, 남성들)은 이 나라를 이끌어 갈 것이다. 그들은 20세기 말 미국이 창출해낸 대규모의 기술적 조직을 관리할 것이며, 그런 조직을 통해 처음으로 모든 미국인들에게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르만의 표현을 빌면 "이 나라의 리더십 집단과 사회구조에 대담한 변혁을 가져오려는 공학적 시도였다. 다른 말로 하면, 조용한 쿠데타 계획" 이었다.'

 

p253

 코넌트는 모든 장래의 시민을 민주사회 구성원으로서 교육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보기는 했지만, 공립학교의 그러한 공적인 목표는 '인재 선별기'로서의 기능에 비하면 뒷전이었다. 젊은이들을 시민으로 육성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그들에게 가장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기회의 사다리, 그 첫 단에 발을 디딜 수 잇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코넌트는 이러한 인재 선별 역할이 "교육 시스템에 과도한 부담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했다. 그러나 그는 공립학교가 "이 특정 목적에 종사하도록 재구성될" 필요를 제기했다. 공립학교는 새로운 능력주의적 엘리트를 널리 모집할 통로가 될 것이었다.

 

p255

 사회적 이동성과 기회의 평등이라고 하면서 모호하게 가리는, 능력주의 시스템의 부정적 측면 두 가지를 조명해준다. 첫째, 능력에 기준한 유동적 사회는 비록 세습적 위계질서와는 상반되지만 불평등과 상반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출생 대신 능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둘째, '최고의 천재'를 예찬하고 보상하는 시스템은 그 나머지를 격하시키며,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비천한 자들'이라고 멸시하기 쉽다. 비록 후한 장학금 제도를 제안하면서도 제퍼슨은 '스마트한 사람'을 높이고 '우둔한 사람'을 깍아내리는 능력주의 성향을 아주 일찌감치 나타낸 셈이다.

 

p256

 재능을 선별하는 일과 평등을 찾는 일은 두 개의 서로 다른 프로젝트다.

 

p269

 명문대들이 특기생 제도를 두는 종목들 대부분은 부유한 집 자녀들이 선호하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스쿼시, 라크로스, 조정, 요트, 골프, 수상폴로, 펜싱, 심지어 승마 등등.

 

p270

 그러나 오직 현행 시스템의 공정성에만 집중한다면 코넌트의 능력주의 혁명의 핵심에 놓인 더 큰 질문을 놓치게 된다. '대학은 누가 인생의 승자가 될지에 대해 재능을 근거로 사람들을 선별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

 그래야 한다는 주장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 번째 의문은 그런 선별 결과 걸러진 사람들에 대해 암울한 낙인을 찍게 되고, 그것은 곧 공동체적 시민 생활에 유해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이다. 두 번째는 능력주의적 경쟁이 인재 선별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피해, 그리고 인재 선별 임무가 너무 과부하됨으로써 대학의 교육 임무마저 경시될 위험성이다. 간단히 말해 고등교육을 초고도 경쟁을 거친 선별 도구로 삼는 것은 민주주의와 교육 모두에 건전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p272

 1961년 출간된 <탁월함 Excellence>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재단 이사장이며 훗날 린드 존슨 행정부 보건교육복지부 장관을 맡게 되는 존 가드너는 새로운 능력주의 시대의 정신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높은 역량과 앞선 훈련을 갖춘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태도의 혁명을 목격하고 있다. 사상 처음으로 그런 사람들은 아주 열렬하게, 아주 광범위하게 환영받고 있다." 소수가 다스리고 따라서 재능의 낭비가 가능했던 이전 시대와 달리, 현대 기술문명 사회는 복잡한 조직에 의해 다스려지므로 재능 소유자가 끝없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런 사람을 어디에서든 찾아내려고 한다. 이러한 "위대한 재능 사냥"의 긴급성은 이제 교육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엄격한 선별 처리"를 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코넌트와 달리 가드너는 능력주의적 선별의 가혹한 면을 잘 알고 있었다. "갈수록 교육이 가장 명민한 젊은이를 꼭대기까지 올려 보내는 효과적 수단이 됨에 따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엄격한 인재 선별기 역할을 할 것이다. 학교는 유능한 젊은이들에게 기회의 오아시스가 된다. 그러나 같은 의미에서, 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곳이 되기도 한다." 이는 기회의 평등이 가져오는 악영향이다. "이는 모든 젊은이가 돈이나 사회적 지위, 종교나 인종 등의 장애물을 초월해 자신의 능력과 야심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필요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준다.

 가드너는 그런 고통은 불가피하며, 재능을 발견하고 개발해야 할 시급성에 비추어 보면 수지가 맞는 비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에서 일부 학생은 학생은 떨어질 때 고통이 가장 심하리라 보았다. "사회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사람들을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선별하면, 루저들은 자신의 낮은 지위가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남보다 못하기 때문임을 절감할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입에 쓴 약이다.

 마이클 영에게 이런 통찰은 능력주의를 반대하는 핵심적 사유였다. 그러나 가드너에게는 불운한 부수적 효과일 뿐이었다. "대학이 특별한 명예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성공을 좌우하게 되었다고 그는 인정한다. "오늘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세상의 시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한 필수 코스처럼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만든 잘못된 가치 틀에 따라, 대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없게 되었다." 가드너는 다음과 같이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성취와 그 사람의 가치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개인은 그 성취와 무관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추구하던 능력주의 사회가 교육적 성취와 명망 사이에 구별의 여지를 별로 안 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대학 교육이 대중에 개인적 성취, 사회적 상승, 시장 가치와 자부심의 향상으로 확고히 인식되고 있음은 단순한 사실이다. '존경과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대다수의 미국 국민이 동의하게 되면, 그러한 국민 의견의 일치가 사실의 일반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p276

 경쟁률이 높은 대학과 그렇지 않은 대학의 차이는 점점 벌어진다. SAT 고득점 학생들은 몇 안 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대학 입시는 '승자독식 게임'이 된다. 비록 '지금의 대학 입학이 과거보다 더 어렵다'고 많이들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진술이라 할 수 없다. 지금 미국의 대다수 대학들은 지원하는 학생 대부분을 받아준다.

 오직 극소수의 엘리트 대학들만 최근 수십 년간 합격률이 떨어졌다. 그런 대학들의 사례는 신문 머릿기사를 장식하며 10대 내내 오직 입시 준비에 매진하는 부잣집 자녀들 사이에서 입시 광품이 몰아치도록 만든다. 1972년 '재선별'이 이미 한참 진행되었을 때 스탠포드는 지원자의 삼분의 일을 합격시켰다. 오늘날 그 수치는 5퍼센트로 떨어졌다. 1988년에 지원자의 절반 이상(54퍼센트)을 받아주던 존스홉킨스는 이제 9퍼센트만 받아준다. 대표적으로 합격률이 수직 낙하한 시카고대의 경우 1993년 77퍼센트였던 것이 2019년에는 6퍼센트가 되었다.

 통틀어 46개 대학이 지금 입학 지원자의 20퍼센트 이하를 합격시키고 있다. 이 중 일부 학교는 학생들에게 염원의 대상이며, 그들의 부모가 2019년 입시 부정 스캔들과 같은 일을 저지르게끔 하는 꿈의 목표다. 그러나 미국 대학 학부생 중 겨우 4퍼센트만 그런 경쟁률이 심한 대학에 소속되어 있다. 80퍼센트 이상은 입학 지원자의 50퍼센트 이상을 받아 주는 대학들에 다닌다.

 

p277. 상처 입은 승리자들

 

 고등교육의 승자독식형 재선별은 두 가지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첫째,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는 대학들은 일반적으로 부유한 집안 출신 자녀를 압도적으로 많이 뽑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은 승자들에게도 피해를 남긴다. 별 문제나 말썽 없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과거의 세습적 엘리트와 달리, 새로운 능력주의 엘리트는 힘겨운 투쟁을 거듭해야 높이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비록 새로운 엘리트가 세습적 위치까지 차지하긴 했지만, 능력주의적 특권의 되물림은 확정될 수 없다. 그것은 '들어가기'에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는 능력주의적 성공에 모순적인 도덕 심리학을 부여한다. 명문대에 물밀 듯 몰린 부잣집 자제들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러나 입시 초고도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성공을 개인의 노력과 성취 이외의 것으로 생각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런 경쟁의 승자들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이를 쟁취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믿음은 능력주의적 오만의 일환으로 비판 받을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분투 이상의 것을 요구하며, 대가로 주어져야 할 성공 이상을 강요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강점도 있다. 그것이 고통 속에 담금질되었고 혼을 파괴할 정도의 압박 속에서 젊은이들에게 부과된 능력주의적 고난을 뚫고 왔다는 데서 비롯되는 강점이다. 부유한 부모들은 자제들에게 명문대 입학을 위한 강력한 뒷받침을 해준다. 그들 대부분은 고등학교 생활 내내 엄청난 스트레스, 고민, 불면과 싸우며 모의고사는 물론 공부, 체육, 예체능 실기 과외, 그 밖의 온갖 잡다한 특별활동을 견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겪는다. 종종 과외 선생들에게 지불하는 비용이 예일대 4년 과정보다 더 많이 들기도 한다. 선생들 가운데는 지체장애자 특별 선발을 노려보라고 권하는 경우도 있다. 그 결과 표준화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어느 소득수준이 높은 코네티컷 근교에서는 18퍼센트의 학생이 지체장애 진단을 받아냈다. 그것은 미국 전체 기준보다 6배나 높은 수치였다). 어떤 컨설턴트는 여름방학을 이용한 특별 해외 참가 프로그램에 등록해 대학 지원 자소서를 쓸 때 적당히 써먹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자고 권하기도 한다.

 이런 능력주의적 군비 경쟁은 부유한 집안 쪽으로 전세를 기울인다. 그리고 부자 부모들이 스스로의 특권을 대물림하기 쉽게 해준다. 이런 식의 특권 대물림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런 판에서 유리한 고지를 찾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공평하며, 이 판에 자식들이 뛰어들어 있는 상황에서는 지나친 압박이 된다. 능력주의적 경쟁은 침략적이고 성취만 쫓으며 과도한 부모의 압박을 불러온다. 10대 청소년에게 과중한 부담을 준다는 말이다. 극성 학부모의 등장은 능력주의적 경쟁이 과열된 시기와 일치한다. 사실 '부모 노릇하다parent'라는 단어는 1970년대에 와서야 동사로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자녀가 공부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부모의 책임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지게 되던 때다.

 

 1976년에서 2012년까지 숙제를 해주는 등 자녀의 학업을 돕는 데 전념하는 부모의 숫자는 다섯 배로 늘었다. 대학 입시가 갖는 의미가 커짐에 따라 조바심 내고 나서기 좋아하는 부모들의 태도도 늘상 있는 일이 되었다. 2009년 11월 <타임> 표지 기사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과잉 부모 노릇의 폐해 : 엄마 아빠는 왜 이제 잡고 있던 줄을 끊어야 하나." 기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성공에 너무 집착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부모 노릇이라는 게 마치 어떤 생산물이 생산 과정처럼 되고 말았다." 이제 아동기에 개입해 일정하게 관리를 하려는 움직임은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6~8세의 경우 1981년에 비해 1997년에는 노는 시간이 25퍼센트 감소했다. 그리고 숙제는 두 배로 늘었다."

 

 어느 흥미로운 연구에서 경제학자인 마티아스 되브케와 파브리치오 질리보티는 과보호 학부모의 등장을 경제학적으로 설명했다. 그들이 정의한 표현으로는 "과도하게 개입하고, 막대한 시간을 투입하며, 통제적인 육아 방식을 통해 지난 30년 동안 널리 퍼진 방식"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런 부모 노릇은 불평등이 증가하고 교육으로 인한 보상이 커진 데 따른 합리적 대응이었따. 비록 여러 사회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결 같이 부모의 개입이 심해지긴 했으나, 가장 심했던 곳은 불평등이 가장 크게 두드러진 곳이었다. 가령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였다. 그리고 스웨덴이나 일본처럼 불평등이 비교적 덜 불거진 나라에서는 그러한 극성 부모들도 덜 나타났다.

 이해할 만하기는 하지만, 자녀의 인생을 능력주의적 성공으로 몰고 가려는 부모들의 집착은 심리학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다. 특히 대입을 앞두고 있는 10대들에게 그렇게 가혹한 강요를 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2000년대 초 캘리포니아 주의 마린 카운티(샌프란시스코 인근의 풍요로운 교외 지역)에서 젊은이들의 심리 상담을 해온 심리학자 매들린 레빈은 겉으로는 성공적인 여러 유복한 가정의 10대들이 극심한 불행감, 고립감,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소한 문제에 흥분하며, 그들 다수는 우울하고, 불안하고, 분노에 차 있었다. 그들은 부모, 교사, 코치, 동료의 말에 지나치게 복종적이었으며 어려운 일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문제까지도 남들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의 문제가 삶의 어려움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인 것은 아니었다. 매들린은 이들이 '풍요로움과 지나칠 정도의 부모 간섭 때문에 불행하고 깨져 버리기 쉬운 인간이 되었음'을 차차 알게 되었다.

 <특권의 대가 The Price of Privilge>라는 책에서 레빈은 그녀가 "특권층 젊은이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질환 증후군"이라 부르는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심리학자들은 '일촉즉발'의 젊은이는 도시빈민굴의 불우한 청소년들이라고 생각했다. 어렵고 용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나야만 했던 아이들 말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괴롭다.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레빈은 "미국에서 나타난 새로운 일촉즉발의 젊은이 집단은 부유하고 잘 교육받은 집안의 아이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겪은 경험은 이 나라 동 연령대에서 최고 수준의 절망, 약물 의존, 불안 장애, 신체적 호소, 불행감 등이었다. 연구자들이 사회경제적 스펙트럼을 통틀어 동 연령대 아동들을 살펴본 결과, 가장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가진 아동들이 부유한 가정 출신임을 알 수 있었다.'

 

 레빈은 '상류 및 중류 청년들에 대한 뜻밖의 사실, 가장 유명한 대학을 나오고 미국 최고의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의 어두운 면'이라는 이름의 연구를 한 수니아 루타의 글을 이용한다. 그들은 동년배 10대보다 높은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으며, 그것은 그들이 대학에 합격한 뒤에도 계속된다.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때 풀타임 등록 대학생들은 2.5배나 높은 약물 의존증을 나타낸다(23퍼센트, 보통 사람은 9퍼센트)." 그리고 풀타임 대학생의 절반은 과도한 음주를 하며 불법적이거나 처방 약물을 사용하고 있다.

 부유한 출신 젊은이들이 과도하게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답은 능력주의적 사명에서 찾을 수 있다. '뭘 해내라', '뭘 이뤄라', '뭘 성공해라' 하며 끊임없이 떨어지는 사명. 투라는 이렇게 썼다. "부모와 자식 모두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 메시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생애 초기부터 들려오던 것이며 행복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목소리다. 돈을 많이 벌어라. 그러기 위해 명문대에 들어가라."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다. 나는 그 사실을 내 학생들을 보고 알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불타는 고리를 뛰어 통과하는 일을 거듭해왔고, 그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많은 아이들이 아직도 분투하고 있다. 생각하고, 탐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가치 있게 살아갈 것인가 숙고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싸우고 또 싸운다. 놀랄 만큼 많은 아이들이 정신 건강에 이상을 겪고 있다. 능력주의의 호된 시험을 통과하는 데 따르는 심리적 피해는 아이비리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100개 이상 미국 대학의 학부생 6만 7,000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대학생들이 전례 없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울증과 불안증이 치솟고 있다. 대학생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설문 이전 1년 이내에 자살을 고려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넷은 정신질환자로 진단을 받거나 치료를 받고 있다. 젊은이(20~24세)의 자살률은 2000~2017년 사이 36퍼센트 늘었다. 지금 그들은 살인보다 자살로 더 많이 죽어간다.

 이런 병리학적 상황을 넘어 심리학자들은 이 세대 대학생들의 보다 미묘한 정신적 문제점을 찾아냈다. '완벽주의라는 숨은 전염병'이다. 몇 년 동안이나 불안 속에 분투해온 결과 젊은이의 마음은 약하디 약한 자부심, 그리고 부모, 교사, 입학사정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냉혹한 한 마디에도 산산조각 날 자의식으로 채워져 버렸다. "실적과 지위와 이미지만이 한 사람의 쓸모와 가치를 정할 수 있는 세계에서, '완벽한 자신'이라는 비이성적 생각이 의미 있는 게 되고 말았다." 4만 명 이상의 미국, 캐나다, 영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물의 공저자 토머스 쿠란과 앤드류 힐의 말이다. 이들은 1989년부터 2016년까지 완벽주의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사회적인, 그리고 부모의 기대에 매인 완벽주의의 증가세는 32퍼센트에 달했다.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직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실적을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한다." 성취 요구에 따라,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개인의 능력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치를 결정한다.

 능력주의 기계의 레버와 활차 역할을 해온 사람들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희생이 있었는지 모른다. 번아웃 증후군에 대한 솔직하고 통찰력 있는 글에서 하버드 입학사정관실은 "고등학교와 대학 재학 시절을 불타는 고리를 뛰어넘는 일로만 채워온 사라들이 결국에는 평생 신병훈련소와 같은 틀 안에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2000년에 나온 그 글은 아직도 하버드 입학 홈페이지에 일종의 경고용으로 게시돼 있다.

 

p285

 캄핑(comping) 문화의 등장은 대학이 경쟁적 능력주의의 기초훈련장과 같아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목표와 수단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는 다시 대학 역할이 더 넓은 범위에서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학력을 부여하는 역할은 이제 너무 커져서 교육을 수행하는 역할을 덮어버렸다. 선별하고 분투하는 일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넘어버렸다.

 

 p286

 오늘날 기회의 관리자로서 대학의 역할은 아주 확고하기 때문에 도무지 대안을 찾기 어려운 상태다. 고등교육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볼 때가 왔다. 특권을 얻은 사람들의 고장 난 정신 상태를 고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이 낳은 시민생활의 양극화를 고리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인재 선별기를 뜯어 고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면, 능력주의 체제가 그 폭력적 지배를 동시에 두 방향으로 뻗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정상에 올라서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안증, 강박적 완벽주의, 취약한 자부심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으로서 능력주의적 오만 등을 심는다. 한편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극심한 사기 저하와 함께, '나는 실패자야' 라는 굴욕감마저 심는다.

 이 쌍방향 폭력은 하나의 도덕적 원인을 공유한다. 능력주의의 금과옥조인 '우리는 개인으로서 우리 운명의 책임자다'라는 도덕률이다. 우리가 성공하면 우리가 잘한 덕이며, 실패하면 우리가 잘못한 탓이다. 사기를 올려주는 말 같지만, 개인 책임에 대한 집요한 강조는 우리 시대의 불평등 상승 추세에 대응할 연대 의식이나 연대 책임을 떠올리기 어렵게 한다.

 

 p297

 고등교육은 그 영예의 대부분을 그것이 공언한 고등 목표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학생들이 직업 세계에서 필요한 역량을 갖추게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도덕적인 인간이자 민주적인 시민으로서 공동선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사람이게끔 준비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가르쳐온 나는 도덕교육 및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왜 4년제 대학들이 그런 임무를 도맡아야 하는가? 시민의 민주주의 교육에 대한 보다 포용력 있는 생각은 대학의 시민교육에만 한정하는 입장에 반대할 것이다.

 

p299

 문화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래시가 본 대로, 19세기에 미국을 찾은 외국인 방문자들은 살므이 구석구석에 배어 있던 평등에 놀랐다. 그 평등이란 부의 평등한 분배도, 심지어 출세의 기회가 평등하다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시민이 거의 똑같은 기반에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민권이 있다면, 사회의 가장 보잘 것 없는 구성원일지라도 다른 곳에서는 특권층에게만 한정되는 지식과 교양을 저할 기회가 자유롭다. 모두의 복지를 위해 기여하는 노동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인 형태로 띤다. 이런 말이 있다. "미국의 기술자들은 무식한 일꾼이 아니다. 개명되고, 사려 깊은 사람들로, 자기 손을 어떻게 쓸지 알 뿐 아니라 원리원칙을 어떻게 쓸지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술자들을 위한 잡지는 이런 성찰적 주제를 계속해서 다룬다.'

 

 래시는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때, 19세기 미국 사회의 평등주의적 성격은 사회적 이동성이 아니라 지성과 교육이 모든 계층과 직업에 널리 퍼져 있던 데서 나온다고 보았다. 이는 능력주의적 선별이 망쳐버린 평등의 유형이다. 능력주의는 지성과 교육을 고등교육의 상아탑에 온통 몰아넣어 두고서, 누구에게나 그 상아탑에 들어올 공평한 경쟁이 보장되리라고만 약속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접근권 배분은 노동의 존엄을 떨어뜨리며 공동선을 오염시킨다. 시민교육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될 수 있다. 향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

 

p301

 풍요로우면서도 경쟁이 치열한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능력주의의 폭정을 보면, 내 십대 시절의 두 가지 경험이 떠오른다.

 선별과 등급 구분이 과열되면서 내가 1960년대 말 캘리포니아 주의 퍼시픽 팰리세이드에서 다녔던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내려왔다. 당시 우열반 편성 열기가 얼마나 심했던지, 우리 고등학교에는 2,300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우등분의 30~40명의 친구들하고만 지내야 했다. 8학년 때 수학 선생님은 그런 우열반 편성을 극단적으로 밀고 갔다. 아마 대수학인지 기하학인지 하는 과목 시간이었는데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성적에 따라 앉는 줄이 달라야 했던 사실은 기억난다. 6개 줄 가운데 3번째 줄까지가 이른바 우등 분반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학생 개인별 성적대로 정확히 차례차례 앉아야만 했다. 그것은 시험이나 쪽지시험을 볼 때마다 앉는 자리가 매번 바뀐다는 뜻이었다. 이 희비극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자 선생님은 개인 시험점수를 나눠주기 전에 자리 재배치부터 시켰다. 나는 수학을 잘했지만 최고는 아니었다. 보통은 두 번째 자리와 네 번째 또는 다섯 번째 자리 사이에 앉고는 했다. 케이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는 거의 언제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열네 살 먹은 소년으로서 '나는 학교란 게 원래 이런 건가'보다 여길 수밖에 없었다. 잘하면 잘할수록 좋은 자리에 앉게 되는 것. 모두가 누가 가장 수학을 잘하는지 알고 있었고, 이번 또는 저번 시험에서 누가 최고였고 누가 폭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것은 내가 생애 처음으로 능력주의와 마주한 순간이었다.

 우리가 10학년이 되었을 때는 등급 정하고 나누기가 최악에 이르렀다. 첫째 줄에 앉는 학생들은 대부분 성적에 목을 맸으며, 그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무섭게 경쟁했다. 너무 석차에 열을 올린 나머지 지적 호기심 자체가 증발하는 상황이었다.

 우리 10학년 때 생물 선생님의 이름은 판햄이었다. 늘 인상을 쓰고 나비넥타이를 매고 다녔는데, 수업 시간마다 교실을 뱀, 도마뱀, 물고기, 생쥐 등등의 신기한 야생동물로 채워서 놈들의 말썽으로 정신없게 만들곤 했다. 하루는 그가 우리에게 돌발 퀴즈를 냈다. 종이를 한 장씩 꺼내서 1번부터 15번까지 적고, 답이 맞는지 틀리는지 적으라고 했다. 당황한 학생들이 문제도 없이 어떻게 답을 적으라는 거냐고 묻자, 그는 각자 문제를 생각해서 맞나 틀리나 답을 쓰면 된다 했다. 학생들은 "이 말 같지 않은 시험도 성적에 들어가느냐"고 걱정스레 질문했고, 선생님은 "물론, 당연하지"라고 대답했다.

 그 때 나는 이것이 엽기적인 농담이 아니면 놀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판햄 선생님은 그 나름대로 능력주의의 폭정에 저항했던 것 같다. 그는 우리가 선별과 분투의 도가니에서 한 발 물러나 그냥 지긋이 도마뱀을 바라보기를, 그 동물이 얼마나 신비한 존재인지를 충분히 보고 즐기기를 원했을 것이다.

 

p324

 경제 정책이 궁극적으로 소비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오늘날 하도 익숙해져서 그런 생각을 넘어서기가 어려울 정도다. "소비는 모든 생산의 유일한 목표이자 의미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한 말이다. "그리고 생산자의 이익 추구는 오로지 소비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 존 케인스도 "소비란 모든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대상이다"라고 함으로써 스미스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리고 이는 지금의 경제학자들 대부분도 동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더 오래된 전통적 도덕사상과 정치사상은 생각이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번영이 '우리의 본질을 우리 역량의 배양과 실행을 통해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미국 공화주의 전통은 일정한 직업(먼저 농업, 그 다음은 수공업, 그리고 널리 자유노동이라고 이해되는 것)은 시민들의 자기 통치가 가능하도록 미덕을 계발해 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20세기에 공화주의 전통의 생산자 윤리는 소비자 중심적 자유 윤리와 경제성장 위주의 정치경제학에 밀려났다. 그러나 복잡한 사회에서도 '일은 시민들을 기여와 상호 인정의 틀 안에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때때로 이는 고무적인 표현으로 재인식된다.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암살 직전 행한 연설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청소 노동자들의 존엄을 그들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점에 결부시켜 이야기했다.

 '언제가 우리 사회는 청소 노동자들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죠. 따져 보면 우리가 버린 쓰레기를 줍는 사람은 의사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질병이 창궐할 테니까요. 모든 노동은 존엄합니다.

 

 1981년 회칙 "인간의 일에 대하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일을 통해 사람은 인간으로서 충족되고, 그리하여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일을 공동체와 결부된 것으로 보았다. "일은 인간의 가장 심층적인 정체성이 국가 전체와 이어지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의 일은 그의 동포와 함께 공동선을 개발하도록 해준다."

 몇 년 뒤 가톨릭 추기경 전국협의회는 경제 관련 사회교육에 대해 가톨릭 교회의 자세한 입장을 담은 <목회 서한>을 내놓았다. 그것은 '기여'에 대한 명백한 정의를 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사회생활에서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참여자가 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정부는 경제 및 사회 제도를 정비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존중받고 노동의 존엄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할 의무가 있다."

 일부 세속 철학자들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독일 사회이론가 악셀 호네트는 오늘날 소득과 부의 분배에 대한 논쟁은 인정과 명망에 대한 갈등으로 이해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생각이 헤겔에게서 연유했다고 밝히긴 했지만, 고액 연봉을 받는 운동선수를 놓고 벌어지는 연봉 논쟁에 참여해 본 스포츠 팬이라면 아마 직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팬들이 한 선수에게 "이미 수백만 달러를 받고 있으면서 더 달라고 하느냐"고 불평하면 그 선수는 거의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존중받느냐가 문제죠."

 이것이 '인정 투쟁'이라는 용어를 통해 헤겔이 말하려던 것이었다.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시스템을 넘어, 노동 시장은 인정을 부여하는 시스템이라는 게 헤겔의 생각이다. 그것은 단지 소득만으로 노동에 보상하는 게 아니며, 각 개인의 일을 공동선에 대한 기여로 공적 인정을 해준다. 시장 자체는 노동자들에게 기술이나 인정을 부여하지 않으며, 그래서 헤겔은 노동조합이나 길드 같은 기구를 제안한다. 그런 기구는 각 노동자의 기술이 공적 명망을 얻을 만한 기여를 하기에 충분함을 보장해준다. 간단히 말해 헤겔은 그의 시대에 등장한 자본주의적 노동 기구는 오직 두 가지 조건에서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보았다. "첫째, 최저 임금을 보장해야 한다. 둘째, 모든 근로 활동에 있어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80년 뒤 프랑스 사회이론가 에밀 뒤르켐은 헤겔의 노동론을 토대로 "노동분업은 사회적 연대의 원천이 되어야 하며, 모든 이들은 공동체에 기여한 실제 가치에 근거해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미스, 케인스, 그리고 어려 현대 경제학자들과 다르게 헤겔과 뒤르켐은 일이 소비만을 위한 수단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일은 그 최선에 있어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p330

 시장 사회에서는 우리가 버는 돈과 우리가 공동선에 기여한 내용의 가치를 혼동하기 쉽다. 

 그런 혼동은 단지 생각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가 아니다. 그 논리적 결함을 지적하는 철학 논증만 하고 만족스러워 할 일도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는 받을 몫을 받는다'는 식으로 짜여 있다는 능력주의적 희망에서 비롯된 혼동이다. 그런 희망은 구약성서 시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역사의 옳은 쪽에 서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섭리론적 사고를 부추긴 희망이기도 하다.

 시장 주도적 사회에서 물질적 성공을 도덕적 자격의 증표로 해석하는 일은 지속성 있는 유혹이다. 그 유혹은 계속해서 우리의 저항을 깨트리려 한다.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논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법을 세우는 것이다. 공동선에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 있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시장의 낙인이 잘못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숙고하고, 민주적으로 공동의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런 논쟁이 어떤 합의를 반드시 낳으리라 본다면 비현실적이리라. 공동선은 불가피하게 논란의 여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일의 존업에 대한 새로운 논쟁은 우리의 당파적 경향을 무너뜨릴 것이고, 우리의 정치 담론을 도적적으로 활성화할 것이며, 우리가 40년 동안 시장의 신앙과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져든 탓에 양극화된 정치 현실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p335

 금융업계는 2008년 금융위기 때 극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이때 불거진 논쟁은 주로 '세금으로 구제금융을 제공해야 되느냐'와 '어떻게 월스트리트를 개혁해서 앞으로의 위기 가능성을 줄이느냐'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그보다 훨씬 덜 주목받은 문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금융이 경제를 재구성했으며 교묘하게 능력과 성공의 의미 또한 뜯어고쳤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변화는 일의 존엄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역과 이민은 금융에 비해 포퓰리즘의 반 세계화 공격에서 덜 주목 받았다. 그런 것들이 노동계급의 일자리와 지위에 미친 영향은 보다 분명하고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경제의 금융화야말로 아마도 일의 존엄 감소에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노동자들의 사기 저하에도 역시 더 큰 역할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대 경제에서 시장의 보상과 실제 공동선에의 기여도 사이에 아마도 가장 큰 격차 사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융업계는 선긴경제체제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으며, 지난 수십 년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미국의 경우 GDP에서 금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대 이래 세 배로 늘었다. 그리고 2008년 기준 기업 이익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그 고용인들은 다른 업계 비슷한 수준의 노동자들에 비해 70퍼센트 이상 실적을 낸다.

 모든 금융 활동이 생산적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가치 있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할 경제 능력을 증진시켜 준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최선을 다 한다고 해도 금융은 그 자체가 생산적일 수가 없다. 그 역할은 자본을 사회적으로 유용한 목적별로(신생 기업 공장, 도로, 공항, 학교, 병원, 가정 등등) 배당함으로써 경제 활동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이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최근 몇 십 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함으로써 그 투자는 점점 실물경제와 유리되었다. 점점 더 관계자들에게 큰 수익을 창출하는 복합 금융공학과 연계되고 있는데, 이 금융공학이란 경제를 보다 생산적이게 하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영국 금융서비스 국장 어데어 터너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 20~30년 동안 부유한 선진국들에서 금융 시스템의 규모와 복잡성이 증대했는데. 그것이 성장이나 경제 안정에 보탬이 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금융 활동이 경제적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실물경제에서 지대(부당한 불로소득)를 끌어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절제된 판단은 1990년대에 클린턴 행정부와 영국 정부가 믿고 있던 지혜, 그에 따라 금융업 규제를 철폐하도록 했던 지혜에 사형선고를 내린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간단히 볼 때 월스트리트에서 최근 수십 년 동안 고안해 낸 파생상품들과 기타 금융상품들은 실제로는 경제를 돕기보다 헤치기만 했다는 뜻이다.

 

 p338

 현대 금융이 경제이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금융을 개혁하려 한다. 그러나 나의 관심사는 그 도덕적, 정치적 영향이다. 일의 존엄을 살리려는 정치 어젠다는 세금 제도를 써서 명망의 경제를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즉 투기자본을 억누르고 생산적인 노동을 상찬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는 세금 부담을 일에서 소비로, 그리고 투기로 옮긴다는 뜻이다. 이를 급진적으로 추진하려면 급여세를 대폭 인하하거나 아예 없애버리고 대신 소비세, 부유세, 금융거래세를 통해 세입 부족분을 메워야 할 것이다. 보다 온건하게 가려면 급여세(고용주나 고용자 모두에게 일 관련 비용을 늘리고 있는)를 줄이고 그만큼 줄어드는 세입은 단타 거래(실물경제에 아무 보탬이 안 되는)에 한해 금융거래세를 매겨 충당한다.

 노동에서 소비와 투기로 조세 부담을 넘기려는 이런 저런 수단들은 오늘날의 세금 제도를 좀 더 효율적이면서 좀 덜 누감累減적이게끔 만드는 방법으로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고려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충분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세금의 표현적인 중요성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공공생활에 어떻게 돈을 대느냐를 통해 성공과 실패, 명예와 인정에 대한 태도를 표출한다. 세금 징수는 세입을 올리는 방법만이 아니다. 한 사회가 과연 무엇을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로 여기는가에 대한 판단을 제시하는 것이다.

 

p350

 같은 해에 대서양 건너편에서 제임스 애덤스라는 사람이 <미국의 서사시 The Epic of America>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조국에 바치는 송가를 썼다. 이 책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가 그 책의 결론부에서 처음으로 쓴 문구는 모두가 알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 우리 시대에서 돌아보면 그가 말한 아메리칸 드림이란 우리가 쓰는 사회적 상승 담론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버리기 쉽다. 그러나 애덤스가 미국은 "인류에게 내려진 독특하고 유일한 선물"이라고 쓴 까닭은 그 꿈이 "그 땅에서는 모둔 사람에게 더 낫고, 더 부유하고, 더 온전한 삶을 살아갈 기회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역량이나 성취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지 자동차나 높은 급여에 대한 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최상까지 이뤄낼 수 있는, 그리고 태생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자기 자신으로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질서의 꿈이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 보면 애덤스가 말하는 꿈은 단지 사회적 상승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더 폭넓고 민주주의적인 조건적 평등을 말하고 있다. 확실한 예로, 그는 미국 의회도서관을 가리켜 "민주주의가 그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상징"이라고 말했다. 모든 삶의 영역의 미국인들이 자유롭게 와서 공공 학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 열람실을 보면, 물어볼 필요조차 없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1만권이나 비치되어 있다. 자리마다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노인도 젊은이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흑인도 백인도, 경영자도 노동자도, 장군도 사병도, 저명한 학자도 학생도 한 데 섞여 있다. 모두가 그들이 가진 민주주의가 마련한 그들 소유의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는다.'

 

 애덤스는 "이 장면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 완벽하게 작용한다는 확실한 사례다. 사람들 스스로가 쌓은 자원으로 마련된 수단, 그리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대중 지성. 이 예가 우리 국민 생활의 모든 부분에 그대로 실현된다면 아메리칸 드림은 살아 있는 현실이 되리라"라고 썼다.

 

 p352

 당파주의가 하도 팽배하여 이제 사람들은 신앙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을 껄끄럽게 보게 되었다.

 

 

 저자의 베스트셀러로 라틴어와 관계된 에피소드 중심의 에세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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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6

 

 저는 소통의 도구로서 언어는 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되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항구를 떠나 먼 바다로 나가면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해요. 어쩌면 그것은 배가 지나간 자리에 생기는 물거품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배와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아야 하는데 물거품을 보는 데서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죠. 이는 정작 메시지를 읽지 않고 그 파장에 집중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오해가 쌓이고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p56

 

 언어 학습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학습의 방향성이 다른 학문들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 즉 '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 그 자체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점이 바로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운다"라는 말에 부합하는 공부의 길이 될 겁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학교와 집에서 "공부해서 남 주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하지 못했던 대답을 지금은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할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일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착취당하며 사회구조적으로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는 무신경해요.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모른 척하기 일쑤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p85

 

 공부하는 과정은 일을 해나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공부든 일이든 긴장만큼이나 이완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순간에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죠. 그러자면 스스로의 리듬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지만 그 과정 중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두뇌나 남다른 집중력보다 더 중요한 자세입니다.

 

 

p87

 

 삶이 그런 것인데도 사람들은 종종 착각해요. 안정적인 삶, 평온한 삶이 되어야 그때 비로소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요. 이것은 착각입니다. "지금 사정이 여러모로 안 좋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이 일을 혹은 공부를 할 수 없어. 나중에 좀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 본격적으로 할 거야"라고 하지만 그런 시간은 잘 오지 않아요. 아니,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왔다고 하더라도 이미 필요가 없거나 늦을지도 모르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갈등과 긴장과 불안의 연속 가운데서 일상을 추구하는 것이 삶이기도 하고요. 결국 고통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의 표시입니다. 산 사람, 살아 있는 사람만이 고통을 느끼는데 이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모순이 있는 소망이겠지요. 존재하기에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p96

 

 그리스도교는 스토아 학파와 키케로 등 로마의 법사상가들의 주장처럼 모든 인간이 동일한 도덕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설파했습니다. 다만 스토아 학파가 인간이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하여 도덕적 평등을 주장하였다면, 그리스도교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줄 아는 능력에 근거하여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p106

 

 1555년 유럽에서 이루어진 종파 간의 화해 원칙인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회의 Pace di Augusta'이든, 1789년 북미 지역에서 행해진 여러 종파의 공존 원칙인 '미국 연방 헌법 제정'이든 역사적으로 최초로 인정된 권리는 바로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였습니다. 즉 이 권리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종교의 자유의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양심의 문제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로 확대되고, 이윽고 출판 및 표현에 대한 자유, 집회 및 결사에 대한 자유에까지 그 범위가 넓어지게 되죠. 다시 말해 우리가 오늘날 헌법상 기본권이라고 향유하는 권리는 그 출발이 종교의 자유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슬람 사회에서 법, 국가와 종교에 대한 개념은 다소 절대적인 일원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법률이란 마호메트가 전파한 종교적, 사회적 교리의 실천적인 면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슬람교에서 인권은 자유로운 이슬람교도 성인에게만 온전히 존재합니다. 비이슬람교도와 노예는 부분적인 보호만 받거나 어떠한 법적(행위) 능력도 갖지 못합니다. 이슬람교도가 이슬람교 원칙에 반대하여 활동하거나 이슬람교 신앙을 포기하면 이슬람 국가의 국적을 잃을 수도 있어요. 배우자와 자신의 종교를 변경하는 일은 그 자체로 혼인 해소, 상속의 포기와 시민권 상실morte civille을 가져올 수도 있고요. 이슬람교는다른 모든 종교의 개종 권유를 거부하면서도 자신들은 타인에게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열렬히 권유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은 유엔 비정부기구를 통해 세계 인권선언 제18조와 '인권 및 기본적 자유의 보호에 관한 유럽협약' 제9조 1항에 있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선언의 내용은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는 종교 또는 신념을 변경할 자유와, 단독으로 또는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그리고 공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선교, 신앙실천, 예배 및 의식에 따라서 자신의 종교나 신념을 표명하는 자유를 포함한다"라고 규정됩니다.

 

 아프리카에서 이슬람 국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 국가 다음에 괄호로 표기한 것은 "이슬람법이 입법의 주요 원천이다"라는 내용이 각 나라 헌법 몇 조에 실려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알제리(헌법 제4조), 모로코, 튀니지, 이집트(헌법 제1조), 모리타니(헌법 제2조)가 있고, 수단도 이슬람 국가에 포함해야 합니다. 아시아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헌법 제5조), 이라크(헌법 제13조), 이란(헌법 제1조), 요르단(헌법 제2조), 말레이시아(헌법 제3조), 파키스탄(헌법 제1조), 시리아(헌법 제2조와 3조)와 예멘(헌법 제3조)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이슬람은 국교입니다. 이슬람교가 가진 국교로서의 영향력은 신정神政 체제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과 남예멘에서 최고조에 달하죠. 입법, 교육, 국가의 경영과 정치적 입장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고요. 이슬람 국교의 근본 요소는 "이슬람법이 입법의 주요 원천이다"라고 정의하는 데 있습니다(시리아 헌법 제2조).

 

 

p127

 

 어떤 사람의 성취는 그 자체만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니까요. 결국 누군가의 생각이나 성취를 인정하더라도 그의 태도에 상처를 받거나 불쾌감을 느낀다면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들을 더는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리게 됩니다.

 

 

p134. 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그가 말한 이 문장은 법의학뿐만 아니라 종교학에서도 사용되는데, 그 의미는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자기 능력 밖에 있는 더 큰 무엇을 놓치고 말았다는 허무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개인적, 사회적인 자아가 실현되지 않으면, 인간은 고독하고 외롭고 소외된 실존과 마주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외되고 고독한 인간, 특히 윤리적 인간이 비윤리적 사회에서 고통받고 방황하는 모습에서 인간은 영적인 동물로서 이성적 인간homo sapiens이자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을 지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학에서 이 명문을 해석한 내용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스스로 인간이라고 자각하고 난 뒤부터 신을 경배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이 단순히 강력한 절대자에게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지배하는 냉혹한 체제와 부조리한 가치관으로부터 고통받는 삶 속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즉 초기의 인류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신神적인 것에서부터 '유추analogia'하려고 했던 것이죠. 신이 인간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필요로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신'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Deus non indiget nostri, sed nos indigemus Dei.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p208

 

 무솔리니 건축물의 특징은 파시즘을 상징할 수 있도록 웅장하고 위압적이라는 겁니다.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자인 마르첼로 피아첸티니와 함께 바티칸 광장에서부터 콜로세움에 이르는 거대한 도로 건설 프로젝트를 준비하여 바티칸 광장과 콜로세움 두 부분에서 동시에 공사가 진행됐습니다. 그 시대 바티칸 광장 팡에는 여러 건물들이 있어서 광장까지 가기 위해서는 골목들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었는데, 무솔리니는 광장 앞에 있는 건물을 모두 허물고 도로를 내기 시작했어요. 독재자가 사유재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리 큰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그 덕에 오늘날 바티칸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광장에 이르는 '화해의 거리'라는 뜻의 '비아 델라 리콘칠리아지오네Via della Riconcilazione'를 볼 수 있습니다.

 

 

p220

 

 스피노자는 "예속적인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그저 운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리거나, 자신보다 강한 능력을 지닌 개체에 압도되어 수동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속적일 수록 무엇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인지를 판단할 능력을 잃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증대시킬 적합한 관계를 형성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욕망은 그저 맹목적인 채로 남아 있고, 자신의 능력이나 활동을 확대시키지 못한 채로 무수한 단절과 실패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에티카> 4부 정리 60 증명)"라고 말합니다.

 

 p244

 

 중세 시대의 대학은 어떻게 설립되었을까요? 대학이 설립되기 이전의 중세 교육은 여러 신학적 주제와 더불어 사도 바오로(바울)의 사상이 지배했습니다. 바오로의 사상에 바탕을 둔 중세의 신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편으로는 믿음과 책임감을 강조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종말론적 세계관을 심어주었습니다. 앞서 8강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바오로의 사상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또 다른 문제는 로마서 13장의 '그리스도인과 권위'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초창기 교회와 나라 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현세의 권위는 신이 정해준 것이므로 그리스인들은 합법적인 모든 일에 대해 국가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주장의 영향으로 교회의 법령이 일반 시민법보다 더 상위에 자리하게 됐습니다. 그와 동시에 성경이 법률적 차원의 공동 유산이자 공통 규범이 됐고 점차 모든 것의 근원이 되기에 이르죠.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성경이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걸 절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믿는 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결국 중세 사람들은 성경의 가치를 변함없이 인정하고 유념하면서도 세속의 학물과 연계해서 문제를 풀고자 했어요. 이것이 유럽에서 대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p282

 

 Letum non ominia finit.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지 않는다.

 

 Dum vita est, spes est.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이 분 소설은 영화로만 봤기 때문에 실제로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몇몇 작품을 언급하는데, 살렘스 롯이나 미래의 묵시록 같은 책은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가 읽어본 글쓰기에 대한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있는데, 소설에 대한 기본적인 작법에 대한 생각은 놀랍도록 동일하다(물론 표현은 틀리다). 

이 2명의 작가 말고도, 창작에 대한 생각은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도 동일한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미켈란젤로는 대리석으로 조각을 만들어낼 때, 그는 조각상의 원형을 미리 생각하고 대리석을 깍아나가면서 형태를 다듬는 것이 아니라, 대리석 원석 속에 숨어있는 형태를 드러내게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스티븐 킹의 표현으로는 내용을 낚아올린다고 쓰고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의식속에서 꺼낸다(일상의 1층, 무의식의 지하, 그리고 더 깊은 무의식의 지하 2층을 그런식으로 이야기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어떤 경지에 이른 이들은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가지게 되며 그 정수를 그들만의 표현으로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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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4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가 그렇듯이 작가도 처음에는 등장 인물에 대하여 그릇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이에 버금가는 깨달음은, 정서적으로 또는 상상력의 측면에서 까다롭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작품을 중단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때로는 쓰기 싫어도 계속 써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형편없는 작품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좋은 작품이 되기도 한다.

 

p124

 인생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p129

 글쓰기라는 것을 시작하면서 여루분은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고 흥분이나 희망을 느낄 수도 있다. 심지어는 절망감을 가질 수도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들을 결코 완벽하게 종이에 옮겨적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여러분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때려눕힐 태세로 글쓰기를 시작할 수도 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어서 글쓰기를 시작할 수도 있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시작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러나 경박한 자세는 곤란하다. 다시 말하겠다. '경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해서는 안 된다.'

 

p182

 재능은 연습이라는 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자신에게서 어떤 재능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고 눈이 빠질 정도로 몰두하게 마련이다. 들어주는 (또는 읽어주는, 또는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밖에만 나가면 용감하게 공연을 펼친다. 창조의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환희라고 해도 좋다. 그것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야구공을 때리거나 400미터 경주를 뛰는 일뿐만 아니라 독서나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이 정말 독서와 창작을 좋아하고 또한 적성에도 맞는다면, 내가 권하는 정력적인 독서 및 창작 계획도 - 날마다 4~6시간 - 별로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벌써 실천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마음껏 책을 읽고 글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싶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하라.

 독서가 정말 중요한 까닭은 우리가 독서를 통하여 창작의 과정에 친숙해지고 또한 그 과정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작가의 나라에 입국하는 각종 서류와 증명서를 갖추는 셈이다. 꾸준히 책을 읽으면 언젠가는 자의식을 느끼지 않으면서 열심히 글을 쓸 수 있는 어떤 지점에 (혹은 마음가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미 남들이 써먹은 것은 무엇이고 아직 쓰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진부한 것은 무엇이고 새로운 것은 무엇인지, 여전히 효과적인 것은 무엇이고 지면에서 죽여가는 (혹은 죽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은 것들ㅇ르 알게 된다. 그리하여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이 펜이나 워드프로세서를 가지고 쓸데없이 바보짓을 할 가능성도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p228

 소설의 다른 요소들이 모두 그렇듯이, 좋은 대화문의 비결도 진실이다. 등장 인물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솔직하게 쓸 때 여러분은 상당량의 비판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나는 매주 빠짐없이 최소한 한 통씩의 (대개는 그 이상의) 성난 편지를 받는다. 입이 더럽다느니, 고루하다느니, 동성애를 혐오한다느니, 흉악하다느니, 경솔하다느니, 혹은 아예 미친 놈이라면서 나를 비난하는 편지들이다. 그 사람들이 열받는 이유는 대부분이 대화문 속의 어떤 말 때문이다. 이를테면 '쓰벌, 이 차에서 빨리 내리자니까' 라든지, '우리 동네에서는 깜둥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단다'라든지,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이 염병할 새꺄!' 따위가 문제인 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부디 편히 잠드소소> 욕설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으셨다. '무식한 사람들이 쓰는 말' 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고기를 태우거나 망치질을 하다가 엄지손가락을 회되게 내리치거나 하면 대뜸 '이런 제기랄!' 하고 소리치셨다. 마찬가지로 개가 비싼 카펫에 구토를 하거나 지나가는 자동차가 흙탕물을 튀기거나 할 때는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비슷한 말을 내뱉게 될 것이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많은 것이 진실에 담겨 있다.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가 붉은 손수레에 대한 시에서 하고 싶었던 말도 바로 그것일 것이다. 점잖은 사람들은 '제기랄' 같은 단어를 싫어할 테고, 아마 여러분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쓰게 될 때가 있다. 세상의 어떤 아이도 엄마한테 달려가서 여동생이 욕조 안에서 '배변했다' 고 말하지는 않는다. 물론 '응가했다' 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똥 쌌다' 고 말하기가 쉬울 것이다(아이들에게도 듣는 귀는 있으니까).

 

p242

 언젠가 헤밍웨이가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것들을 죽여야 한다." 옳은 말이다.

 

p247

 소설을 쓸 때 여러분은 나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확인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일이 다 끝나면 멀찌감치 물러서서 숲을 보아야 한다. 

 

p253

 이같은 일들은 폭력을 해결책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인간의 뿌리 깊은 본성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미래의 묵시록》의 주제가 되었고, 수정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그 생각은 내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p333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 직전이 가장 두려운 순간이다. 그 순간만 넘기면 모든 것이 차츰 나아진다.

 

 길을 물어, 선禪으로 나아간 기록 정도의 의미가 될 듯. 김미루라는 이름 자체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인 도올 김용옥 선생의 따님이기도 하다. 나도 도올 선생께서 강연 등에서 몇 번 언급을 해서 알게 되었다.

 책의 장르는 여행 에세이라고 볼 수 있지만, 관광이라기보다는 해당 지역의 문화를 깊이 체험해보는 내용이 많아서 인문학적인 관점이 많이 녹아있다(그래서 인문으로 분류했다).

 사막과 낙타, 그리고 유목민이라는 테마에 관심이 많은 저자가 몇년 간 중동, 인도, 몽골지역의 사막,낙타와 유목민을 포함한 원주민과의 생활의 경험을 해당 지역의 풍광을 담은 자신과 함께 전하고 있다.

 글의 스타일은 아버지인 도올 선생과 굉장히 많이 닮아있는데, 도올 선생이 감수를 해주셨거나 아니면 저자 본인이 아버지의 책을 많이 읽었거나 대화를 자주 나누다 보니 그런 글의 스타일을 닮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내용 자체가 쉽게 접해볼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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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4

 레바논에서 레이시즘은 클라시즘 classism, 즉 계급주의와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 현상은 그 나라에 편재하는 외국인 가정부무역에서 유래되는 것인데, 이것은 내 관점에서 본다면 현대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노예무역 이외의 딴 것이 아니었다. 가정부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공인된 제도는 가정이라는 밀폐된 환경 속에서 자행되는 통제되지 않는 학대를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레바논이라는 나라의 인구가 겨우 500만밖에는 되지 않는데 외국에서 이주한 가정부가 20만 이상이나 된다(전체 인구의 4% 정도). 레바논의 상류, 중상류, 그리고 중류가정조차도 대부분이 에티오피아, 케냐,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지에서 가정부를 고용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적 관행 때문에 가장 저열한 사회적 신분을 특정한 외관이나 국적에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스리랑칸 Sri Lankan"이라는 말은 곧 레바논 자곤jargon으로 "하녀"를 의미한다. 

 독자들은 내가 베이루트 거리에서 일상적으로 어떤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항상 누군가의 필리피노 하녀로서 심부름 나온 사람으로 즉각적으로 취급되었다. 매우 크고 모던한 한 식료품 가게에서 올리브를 사기 위해 나는 줄을 서고 있었다. 나는 두 늙은 백인 앞에 서있었는데, 나를 제키고 그들은 먼저 서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사람이 서부된 후에야 비로소 서브되었던 것이다. 계산대에 있는 노인은 나에게 마치 개에게 명령하듯이 그의 손으로 "기다려"하고 손짓할 뿐이었다. 내가 불만을 토로하자, 입에 손가락을 대면서 "쉿"할 뿐이었다. 명백한 줄의 순서를 어기는 행위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체험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의 단순한 외관 때문에 내가 나에게 던져지는 그토록 낯뜨거운 레이시즘을 체험한다는 것은 진실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내가 동아시아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다. 나의 얼굴이 보통 아시아 사람보다 다크 스킨톤인데다가 눈이 크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레바논 사람들은 전형적인 일본인이나 중국인, 한국인 관광객을 더 못사는 나라로부터 온 까무잡잡한 가사노동자들로부터 구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나를 보면 좀 이색적이라고 칭찬 비슷한 말을 던지곤 하는데, 바로 이놈의 "이색적 외관"이 이 레바논 지역에서는 전적으로 핸디캪이 되고 마는 것이다.

(위에서 보면 제키다, 핸디캪 과 같이 표준어와 약간 다른 표기법이 있는데 저자인 김미루 씨가 미국에서 출생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중학시절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간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표준어에 약해서 그럴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책이 통나무 출판사를 통해서 나왔고, 아마도 아버지인 도올 선생이 이 책을 어느 정도는 감수를 했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면 이러한 표기법은 표준어를 잘못 썼거나 오기라기보다는 도올 선생의 평소 표기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도올 선생의 표기법은 간혹 독특한 바가 있다.)

 

 내가 피부가 좀 더 하얗고 눈이 옆으로 찢어지고 광대뼈가 불거졌다면 나는 돈 많은 일본관광객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레바논 사람들은 나를 공경스럽게 대했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나의 체험을 말하자, 한 레바논 친구가 이렇게 디펜드하는 것이다 : "여기 사람들이 특별히 레이시스트라고 말할 것은 없지. 그들이 판단하는 것은 사회적 계급이야. 네가 부자처럼 보이면 사람들이 널 잘 대접할 거야." 나는 이 새로운 설을 입증하기 위하여, 머리꼭대기부터 발끝까지 백만불 여인처럼 치장을 화려하게 하고 밤에 나가보았다. 그러나 이 작전은 결코 먹히질 않았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빠를 갔는데, 아이디카드를 보자고 한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나 혼자만이 유색인종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 줄곧, 내가 아무리 잘 못을 입더라도 나 혼자만 체크당하는 수모를 계속 당해야만 했다. 여러 번 나는 문간 경비 어깨들이 내 미국여권을 보자마자 그들의 태도를 180도 바꾸는 사태를 체험했다. 약자에게 비열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중동문화의 한 측면을 나는 강렬하게 체험했다. 종교문화는 결코 인간에게 보편주의를 선사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종교가 인간의 구원을 외치면서 인간을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동방의 인문주의가 오히려 더 보편주의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매우 화가 났다. 그래서 이 가정부문제를 보다 깊이 탐구했다. 그리고 많은 이민자 가정부들이 그들을 고용한 가정에서 못 견디고 가출을 하게 되면 결국 길거리에서 매춘이나 천직에 불법고용되어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 현실을 목도하게 되었다.

 

 베이루트에는 가정부조달 에이전시가 많이 있다. 누구든지 가정부를 고용하고 싶으면 조달소에 나타나 국적을 선택할 수 있다. 에티오피아 가정부를 2년계약으로 고용하는 데는 서류작성과 비행기표를 포함하여 대략 2,000불이 든다. 그리고 방글라데시 식모를 구하는 데는 대략 1,500불이 든다. 그러나 이 돈은 양국의 에이전트들이 다 먹는 것이며 가정부 본인과는 무관하다. 본인은 그 나라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신청할 뿐이다. 그리고 계약대로 가정부가 도착하면 매울 샐러리가 지급되는데, 에티오피아 여자에게는 200불, 방글라데시 여자에게는 150불, 필리핀 여자에게는 250불 등등의 가격이 매겨져 있다.

 그런데 이 소녀들이 공식기구를 통하여 돈거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녀를 고용한 패밀리가 전적으로 모든 관리를 담당하기 때문에 가정부들의 여권과 서류를 고용주가 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월급조차도 고용주의 변덕에 따라 보류되기도 하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외국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일체의 노동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제도는 무제한의 혹사와 학대를 허용한다. 가정부들의 자살이 흔치않게 보도된다. 소녀들이 가정으로부터 도망치면, 그들은 여권을 포함한 모든 서류를 상실하기 때문에, 매춘과 같은 불법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레바논 가정의 고용주들이 월급을 꼬박 주었는데도 가정부가 도망쳤다고 투정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 아니다. 그들은 그러한 사태의 원인을 규명하여 불만과 불행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단지 그 자리를 새로운 가정부로 대치할 뿐이다. 그들은 소비성 상품에 불과한 것이다. 가정부조달 에이전트들은 그들의 가정부에 대해 이런 광고를 써붙이곤 한다: "신중히 선택된 메이드, 우울증에 걸리지 않음."

 일인당 GDP가 1만 9천 불 정도 되는 나라, 그런데 불합리한 종교의 교리가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나라, 그리고 오랜 내전으로 국가조직의 통제력이 와해된 나라, 이러한 모든 정황을 고려해보면 이러한 인간불평등의 부조리에 대하여 아무런 기준도 만들지 않고 있다는 무책임한 사실도 쉽게 이해가 간다. 우리 한국문명의 대체적인 개화의 방향이 세계문명의 기준에서 볼 때, 탁월한 정도正道를 지향해왔다는 사실도 비교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기독교 가정에도 이미 2년 동안 일하고 있었던, 방글라데시에서 온 19살의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리나Rina였다. 리나는 방글라데시의 어느 시골 작은 마을에서 살았는데, 아주 어린 나이에 임신을 했고 임신시킨 남자는 도망가버렸다. 그런데다가 설상가상 엄마가 세상을 떴다. 그래서 리나는 자기의 애기를 언니집에 맡겼고 자신은 양육비를 벌기 위해 에이전시에 취직을 부탁한 모양이다. 에이전시는 리나가 단 한마디의 아랍어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임의적으로 레바논에 배정했던 것이다. 리나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아주 작고 어여쁜 얼굴을 한 매우 조용한 소녀였다. 그녀는 항상 수심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녀와 감정을 소통하려고 접근하면 때때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매일 새벽 일찍부터 저녁식사 후 설거지 때까지 하루종일 일했다.

 그런데 나에게 그토록 잘해주는 패밀리의 엄마, 다시 말해서 리나의 보스조차도 끊임없이 그녀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그 집안의 아이들, 이미 성년이 된 아이들이었지만, 그들도 허파가 터질 듯이 리나의 이름을 불러댔다. 벗어놓은 양말이 없어졌다든가, 자기들이 제일 좋아하는 셔츠가 사라졌다든가 하면서, 물론 리나의 처지는 레바논의 대부분의 가정부의 처지보다는 더 좋은 상태인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나는 그녀가 로보트나 집안의 부속품처럼 취급되는 모습을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이 도무지 소화해내기 어려웠다.

 

 그녀는 결사적으로 휴식이 필요할 때는 꼭 장롱 하나차럼 생긴 작은 그녀의 방으로 숨어버리곤 했다. 레바논의 가옥에는 식모방이 그렇게 코딱지만 하게 설계되어 있다. 나에게 그토록 친절하고 관대한 엄마, 나를 한가족처럼 생각해준 고마운 그 엄마도 나에게 여러 번 리나에 관해 불평을 토로했다: "우리는 리나가 여기 오기까지 모든 비용을 댔고, 매달 월급도 꼬박꼬박 주었지. 리나는 매달 언니집으로 송금을 해. 그 돈은 방글라데시에서는 큰 돈이라고, 나는 리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지. 지금은 아럽어까지 알아들을 수 있어. 그런데도 리나는 너무 멍청해! 아직도 항상 실수를 저지르고,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모른단 말이야!" 언젠가 리나가 부엌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벽을 쳐다보고 밥을 먹고 있었다. 남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방글다데시 집에서 먹는 것처럼 밥을 손으로 꾹꾹 눌러 입에 넣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패밀리의 엄마는 그녀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 "저것 좀 보라구! 쟤는 개처럼 먹고 있잖아!" 문화적 관습에 대한 근원적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상대주의의 관용이야말로 보편주의의 기본원칙이라는 것을 전혀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나는 그 집에 존경받는 게스트였고, 주제넘게 주인의 인식체계를 교정할 수 있는 포지션에 있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주인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패밀리의 한 친구인 젊은 레바논 청년이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리나는 참 운이 좋아! 이 패밀리는 나이스해. 리나를 때리지는 않으니까." 그 무의식적인 말인즉슨, 레바논에서 가정부에 대한 체벌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너무도 충격을 받아 공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나에게 그 청년은 계속 말을 이었다: "레바논의 가정부 상황은 일반적으로 정말 좋지 않아! 많은 소녀들이 학대받고 있지. 예를 들면 우리집 옆의 패밀리가 얼마 전에 바캉스를 떠났어. 그런데 그들의 메이드를 음식과 물도 공급해주지 않고 방에 감금해버렸단 말야. 그래서 내가 매일 가서 창문으로 먹을 것을 공급해주었지."

 

 그 청년의 언어는 나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내가 그 잔학무도한 장면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다는 것만이 나의 위안이었다. 아무튼, 리나의 정황을 쳐다보면서 나는 내가 오랫동안 되씹지 않았던 오래 전의 감정, 내 존재의 내면에 깊숙이 숨겨져 있었던 그런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내가 영어단어를 매일매일 외우면서, 계속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나날들의 추억이 나를 휘감았다. 언젠가 나를 놀리고 멍청하게 만드는 아메리칸 키드들보다 내가 더 훌륭한 인물이 되고야 말리라는 굳은 맹세가 생각난 것이다. 그때 나는 불과 13살이었다. 영어 한 단어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캘리포니아의 오렌지카운티에 홀몸으로 왔던 것이다.

 

 미국의 공립중학교의 아이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좀 사악한 종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내 얼굴에 대고 웃거나 심술궃은 행동을 마구 해댔다. 내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아시아의 소녀라는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나는 이모집에 머물렀는데, 나의 이종사촌의 한국계 친구들조차도 나를 매우 귀찮은 존재로 여겼다. 물론 나 자신이 세련되지 못했고, 분위기를 쉽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나와 함께 어울리는 것을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 나는 "FOB"라고 놀림을 당했는데, 그것은 "fresh off the boat"라는 뜻이다. 배에서 갓 내린 세상 물정을 모르는 촌놈이라는 뜻이다. 아시아계 미국아이들도 나를 "포브"라고 놀려만 댔던 것이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아주 이방의 먼 땅에서 완벽하게 고독한 단독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 느낌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인자하기 그지없는 이모의 배려가 있었고 또 사촌들과 같이 잘 지냈지만, 베드에 들어가기 전에 거의 매일 밤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나의 리나에 대한 동정심, 아니 공감의 폭이 각별했다. 불과 17살의 어린 나이에 모든 사람이 경멸하는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이국의 땅에, 홀몸으로 내팽겨쳐진다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어느날, 나는 리나가 부엌에 혼자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재빨리 나는 나의 랩탑컴퓨터를 가져다가 유튜브를 눌렀다. 나는 "방글라뮤직"을 찾아, 물항아리를 나르는 전통적 시골여인들도 분장한 가수들이 노래부르는 비디오 하나를 클릭했다. 노래가 터져나오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의 리나처럼 환희에 찬 모습을 어느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질 못했다. 리나는 홍조를 띠며 흥분 속에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리나는 그 노래를 완벽하게 암송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야말로 리나가 2년만에 자기 모국에서 온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느껴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던 것이다.

 리나에게는 인터넷이나 텔레비젼을 보는 것이 일체 허용되질 않았다. 물론 스마트폰도 가지고 있질 못했을 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셀폰도 허락되질 않았다. 주인의 입회 아래 일주일에 한번 정도 지상통신선으로 집에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그것도 제한된 시간범위 내에서. 뮤직비디오를 쳐다본 후에 리나는 그녀가 잘 알고 있는 또 하나의 방글라 비디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일종의 코미디쇼였다. 우리가 같이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한참중에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리나는 재빨리 컴퓨터로부터 멀어져갔고, 빨리 그것 좀 꺼달라고 손짓을 했다.

 그때로부터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면 리나에게 방글라 텔레비젼을 틀어주었다. 물론 누가 나타나기 전에 재빨리 끌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리나는 나에게 깊은 애정을 표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2년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한 인간으로부터 아무런 격 없는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 있는 인간의 관계가 왜 그렇게 왜곡되어야만 하는지, 칼릴 지브란의 심오하고 아름다운 레토릭도 이 예전자의 고향에서 공허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내가 리나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을 때, 그녀의 도톰한 눈망울에는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숫자가 적힌 종이 한 쪽지를 건네주었다. 아마도 그것은 방글라데시 고향에 있는 자기 연락처였을 것 같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 번호로 그녀와 연락하는데 실패했다. 국가번호도 그렇고 자릿수가 도무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2년 후에 나는 그녀가 결국 가출하고 말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리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중동의 빠리"라는 베이루트의 추억이나 모든 기획이 나의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멀어져만 갔다. 중동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흥분되고, 가장 열광적이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음식이 맛있는 곳처럼 느껴졌던 나의 환상은 이 가정부무역의 문제로 인하여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알고보면 중동의 어디에서나 벌어지고 있다. 예수시절부터 "돌로 쳐죽이기" 린치가 공공연한 율법으로 자행되고, 지금도 "명예살인"이 사회규범으로 인지되는 그런 분위기, 결국 구약적 세계관에서 아직도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인들은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손가?

 인류문명의 진보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나의 다음 목적지 요르단에서는 나는 필리피노 하녀로 취급되는 일은 없었다. 요르단이라는 나라는 최소한 그토록 뻔뻔스러운 레이시즘이 설치는 분위기에 예속된 그런 문명의 나라는 아니었다.

 

p207

 나는 비록 죽이는 첫장면을 놓쳤지만, 나머지 과정,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끌어내고, 자르고, 요리하는 과정에는 참여할 수 있었다. 아침용으로 작은 고기조각과 간조각이 양파와 더불어 볶아졌고, 빵과 함께 식탁에 올려졌다. 점심과 저녁용으로는 뼈있는 고깃덩어리가 큰 통에 넣어지고 장작불에 몇시간 동안 계속 삶아졌다. 이때 들어가는 전통적 요르단 조미료는 "자미드jameed"라는 것인데 염소젖에서 얻은 치즈를 태양에 말린 것이다. 나는 이 전과정엣 참다운 베두인 삶을 느낄 수 있었고, 상품화된 치즈와 깡통채소에 실망한 후인지라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이날 찍은 비디오는 염소머리가 분해되고 창자가 꺼내어져 요리되는 장면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뉴욕갤러리에서 사진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많은 관객들, 특히 고상함을 자랑하는 한국부인들이 이런 살육장면은 전시장에서 안틀면 좋겠다고 나에게 항의하는 것이다. 교육상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나의 비디오를 보면 아흐마드의 3살난 아들은 염소의 몸통 옆에서 아주 재미있게, 자연스럽게 놀고 있다. 베두인들은 걷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동물이 도추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난다. 이거은 우리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고기를 먹는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고기를 만드는 과정, 귀한 생명이 도축되는 과정, 귻이 축제의 일환으로 인식된다. 닭을 잡을 줄 모르면 닭을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에게 자식교육 운운하면서 항의한 부인들은 결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식들에게 고기를 많이 멕이는 여인들이다.

 고기를 먹는다고 하는 우리의 행위의 전체과정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교육적일까? 그것을 속이고 감추고, 오직 공장에서 생산된 최종적 고기상품만을 식탁에서 먹게만들고, 위생, 잔인, 살생, 백정놈들 운운하면서 고상한 삶의 가치를 구가하는 것이 교육적일까? 우리의 자녀들을 대량고기생산의 맹목적 소비자로 만드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 생각없이 불필요하게 과도하게 고기를 많이 먹는 병적인 인간들로 만드는 것이 이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더 바람직한 것일까? 수천년 지속되어온 "고기먹음"의 축제적 성격, 자연스럽고 지속가능한, 생태순환적인 전과정을 인지하도록ㄱ 만드는 것이 더 정당하지 않을까? 과거에는 소곡기를 먹어도 일년에 한번이면 족했던 것이다. 인류 식생활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요청되는 시점인 것이다.

 

p234

 최상의 이미지는 최악의 환경에서 창조된다.

 

p239

 처음에는 소통의 부재를 언어장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아랍어를 좀 할 수 있었고 또 바디 랭귀지를 습득하여 이야기할 수 있었다. 기실 내가 모르는 것은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의 사유방식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추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주일이 지난 후로는, 나는 순결한 침묵에 매우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들이 사유 그 자체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체류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는 나도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예술의 경지에 거의 도달핵가고 있었다.

 

p276

  맨해튼에서 보낸 2012년 가을은 정말 빨리 지나갔다. 나는 이때 이집트와 요르단으로 다시 갈 것만을 구상하며 새로운 벤쳐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육신이 있는 곳에 나의 정신이 있질 않았다. 도시의 삶은 무의미하게만 보였다. 밖으로 외출할 때마다 왜 나는 꼭 엘리베이터라는 좁은 공간에 나를 실어야만 하는가? 트래픽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게 길 한복판에 갇혀 있을 땐, 왜 나는 택시미터에 올라가고만 있는 숫자를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파티룸에서 왜 나는 그들과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희희덕거리고만 있어야 하는가? 왜 철근콘크리트의 고층건물이 서있고, 아스팔트 깔린 대로들이 존재해야만 하는가? 왜 아는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야만 하는가?

 나를 둘러싼 환경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지간에 모두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너무 과도한 것뿐이었다. 내가 여행할 동안 향유할 수 없었던 사치들, 맛있는 해산물 요리라든가 끝없이 쏟아지는 더운물 샤워라든가 하는 것들이 나를 유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화이트 데저트로 갈 꿈만 꾸고 있었다. 나의 작업이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나는 일단 벌려놓은 일은 마무리해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p435

 내가 이 아이들에게 관해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된 것은, 이들이 항상 웃고 야외에서 즐겁게 논다는 매우 단순한 사실, 그리고 극히 단순한 오브젝트를 가지고 재미를 창조하면서 논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을 즐겁게 만드는 사태를 고안해낸다. 그리고 울거나 싸우거나 하는 법이 거의 없다. 도시문명의 아이들이 하루종일 울거나 찡얼거리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일례를 들자면, 어디서 볼펜 하나를 얻든지, 전등 하나를 얻든지 하면 그걸 가지고 수없는 종류의 오락을 끊임없이 지어내고 또 그것에 열중한다. 하룻밤은 나이가 좀 있는 소년이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의 손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놀이를 고안해냈다. 그 손바닥그림은 매우 정교했다. 나는 그가 손바닥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그 손바닥을 전등으로 비쳐주었는데 어두운 방에 모두가 옹기종기 웅크리고 있는 판에 집중된 스포트라이트가 생기고 또 그림이 그려지는 그 장면 자체가 매우 신비롭고 인간적인 훈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은 그 그림을 그리는 소년이 여러 가지 패턴과 글자와 숫자를 쓰면서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비상하게 집중하고 웃곤 했다. 그 행위 자체가 위대한 연극이었다.

 낮에 밖에서 놀 때도 그러했다. 동네에는 단지 하나의 시소가 있을 뿐이었다. 새총처럼 쌍갈래 가지가 달려있는 나무 하나가 땅에 굳건히 박혀있다. 그리고 그 위로 기다란 통나무 하나가 횡으로 걸쳐져 있다. 이 시소는 결국 두 개의 큰 나무로 구성된 초라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었지만 아이들은 그 나뭇가지에 매달려 끊임없이 다양한 놀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베키가 시소의 한 편에 남자아이들과 함께 타려고 하다가는 곧 땅에 떨어지곤 했다. 도시아이들 같으면 울면서 짜증을 낼 텐데, 베키는 웃고 또 웃으면서 천진난만하게 그곳에 기어이 올라타려는 노력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 순결한 시도와 웃음, 그리고 끊임없이 재미를 만들어낼 줄 아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문명사회에서 말하는 바 "교육"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지, 더구나 "덕성교육, 인성교육"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깊은 반성을 자아낸다. 자연이 그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도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p493

 과거의 베두인들은 친구이든 낯선 이방인이든, 사막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든 누구든지 텐트에 접근하기만 하면, 그들에게 마시고 먹을 것을 친절하게 제공했다. 사흘 동안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조건 접대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손님들이 오면 염소 한 마리를 잡는 것이 관례였고, 전통적인 맛있는 커피를 달여 정성스럽게 대접했다. 모든 게스트는 커피를 세 컵까지는 달라고 할 수가 있었다. 세 컵 이상 달라는 게스트는 탐욕의 인간으로 낙인 찍혔다. 커피는 집안간의 원한문제 해결이라든가 결혼에 관해 합의할 때도 반드시 필수품이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논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가장 특이한 측면은 완벽하게 낯선 이방인일지라도, 본인이 얘기하지 않는 한, 도대체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런 질문을 제4일 까지는 던질 수 없었다. 오면 무조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한국인의 친절이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들의 친절이라는 것은 좀 제식적 · 율볍적 측면이 강하다. 그만큼 절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예지가 묻어나는 것이다.

 

 한 베두인 가정의 사례로 전해 내려오는 재미난 얘기가 있다. 한 가정에 남자가 왔는데 대접을 하다 보니 그가 자기 가족의 한 사람을 죽인 집안의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사람에게 염소 한 마리를 잡아 후대했고, 그들의 천막에서 3일 동안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제4일이 되는 날 그는 자기 갈길을 평온히 떠났다. 텐트의 주인은 자기 장남에게 곧 명한다. "따라가서 그를 죽이고 오라!"

 

 

 

불복종에 관하여(On Disobedience)중에서 4편의 에세이를 발췌했다. 번역이 매끄러워 이해하기 좋다.

특히 인류여 번성하라는 인본주의에 대한 헌사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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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리적 · 도덕적 문제로서의 불복종

 

p13

 자신의 양심에, 또 인본주의와 이성의 법칙에 복종하기 위해, 종교와 자유와 과학의 모든 순교자는 그들에게 재갈을 물리려는 자들에게 불복종해야 했다. 어떤 사람이 오로지 복종만 할 수 있고 불복종은 할 수 없다면 그는 노예다. 오로지 불복종만 할 수 있고 복종은 할 수 없다면 그는 반항꾼이다. 혁명가와 반항꾼은 다르다. 반항꾼은 분노와 실망, 억울함에 추동되어 행동할 뿐 신념이나 원칙의 이름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p18

 만약 어떤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시스템이 자유를 주창하면서 불복종을 억압한다면,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일 수 없다.

 

p19

 "감히 알고자 하라 sapere aude"는 원칙과 "모든 것을 의심하라 de omnibus est dubitandum"는 원칙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더욱 키워나가게 해주는 태도의 핵심적인 특징이었다.

 아돌프 아히히만은 우리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며,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제기한 바를 훨신 넘어서는 중요성을 가진다. 아히히만은 조직인組織人, organization man의 상징이다. 남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인간을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게 된, 소외된 alienated 관료의 상징이다. 그는 우리 모두의 상징이다. 우리는 아이히만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관련해 가장 무서운 사실은, 그가 저지른 일이 낱낱이 다 드러났고 심지어 그것을 본인 스스로 인정했는데도 그가 완전히 진심으로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같은 상황에 다시 처해진다면 분명히 그는 같은 짓을 다시 저지를 것이다. 우리도 그럴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그렇다.

 조직인은 불복종의 역량을 잃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역사의 현 시점에, 의심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의 미래냐 문명의 종말이냐를 가를 모든 것일지 모른다.

 

 

2장. 예언자와 사제

 

p42

 하지만 과학이 삶에서 가치를 주는 순간들을 박탈한다면, 아무리 영리하고 정교하게 작동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을 절마의 길로 이끄는 것이며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것이다.

 

p50

 사람들 사이의 구분 중에 삶을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의 구분보다 더 뚜렷한 것은 없을 것이다. 죽음 애호는 인간만이 획득하는 특질이다. 인간은 지루함을 느끼게 될 수 있고 죽음을 사랑하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불능(성적 불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인 사람은 생을 창조할 수 없지만 생을 파괴함으로써 그것을 초월할 수는 있다. 삶 가운데서 죽음을 사랑하는 것은 궁극적인 도착증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실로 죽음을 애호한다. 이들은 자신의 진짜 동기를 인식하지 못해서 자신의 야망이 생, 명예,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하지만, 실은 죽음을 애호하기 때문에 전쟁에 환호하고 전쟁을 촉진한다. 이런 사람은 아마 소수이겠지만, 삶과 죽음 사이에서 선택을 내리지 않는 사람은 아주 많다. 이 선택에 직면했음으로 외면하기 위해 일상의 바쁨 속으로 숨는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파괴를 환영하지는 않지만 생을 환영하지도 않는다. 전쟁에 열정적으로 반대하려면 꼭 필요한 생의 기쁨이 이들에게는 없다.

 

 

 

3장. 인류여 번성하라

 

p63

 오늘날 우리의 정치사상은 영적인 뿌리를 잃었고,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지, 더 효율적인 정치 행정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로만 판단되는 편의적 방편의 문제가 됭ㅆ다. 정치사상은 인간의 심성과 열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뿌리를 잃고 공허한 껍데기가 되었고 편의에 따라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것이 되었다.

 

p66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는데, 실로 옳은 말이다.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은 이 모든 감각의 자기 소외에 의해, 즉 소유의 감각게 의해 잠식되었다.... 사적 소유는 우리를 너무나 멍청하고(생성의 능력에 있어서) 무력하게 만든 나머지 우리가 어떤 사물을 소유할 때만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자본의 형태로 존재할 때만,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소유했을 때만, 우리가 먹었을 때만, 우리가 마셨을 때만, 우리가 사용했을 때만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이 모든 부를 가지고서도 가난하다. 많이 소유하고는 있지만 우리의 존재가 너무나 하찮기 때문이다."

 

p70

 하지만 어떤 용어를 쓰든 옛 자본주의와 새 자본주의 사이에는 기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연대와 사랑이 아니라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원칙, 인간의 의지와 비전과 계획이 아니라 비인격적 메커니즘인 시장이 사회의 삶을 조절해야 한다는 믿음 등이 그렇다. 자본주의는 사물(자본)을 삶(노동)보다 우위에 둔다. 권력은 행동이 아니라 소유에서 나온다.

 

p72

 마르크스주의적 형태와 그 밖의 많은 형태에서도 19세기 사회주의는 모든 이가 존엄한 인간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 물질적 조건을 만들려 했다. 자본이 노동을 이끌게 하기보다 노동이 자본의 방향을 설정하게 만들려 했다. 사회주의에서 노동과 자본은 단지 두 개의 경제적 범주가 아닝ㅆ다. 노동과 자본은 두 개의 원칙을 의미했다. 하나는 자본, 즉 축적된 사물, 소유의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 즉 삶과 인간의 힘, 존재하고 되어가는 것의 원칙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물이 삶을 이끌고 소유가 존재보다 우위에 놓이며 과거가 현재를 이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관계를 뒤집고자 했다. 사회주의의 목적은 인간 해방이었다. 인간이 소외되거나 훼손되지 않고 다시 개인이 되기를, 인간이 동료 인간과, 또 자연과 새롭고 풍성하고 자생적인 관계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사회주의의 목적은 인간이 자신을 묶은 속박과 비현실과 허구를 벗어버리고, 느끼고 사고할 수 있는 자신의 힘을 사용해 스스로를 재창조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는 인간이 독립적이 되기를, 자신의 발로 설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를 자기 자신에게 의존할 때만", 그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사고하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즉 세계와 맺는 모든 관계에서 전인격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개인성을 긍정할 때만",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 "자신의 개인성의 모든 장기와 기관들을 긍정하고 표현할 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사회주의의 목적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융합이었다.

 

 

4장. 인본주의적 사회주의

 

p89

 현재의 중앙 집중적인 국가에서 완전하게 탈중심화된 사회 형태로 이행하려면 과도기가 필요하며 과도기에는 몇몇 중앙 계획과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그러한 중앙 계획과 국가 개입이 관료주의를 심화하고 개인의 통합과 주도권을 약화하게 될 위험을 피하려면 1) 국가가 실질적으로 시민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하고, 2) 기업의 사회적, 정치적 권력이 깨뜨려져야 하며, 3) 탈중심적이고 자발적인 연합의 형태로 이뤄지는 모든 생산과 교역, 그리고 지역에서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들은 모두 (과도기가 끝난 다음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촉진되어야 한다.

 

p92

 탈중심화는 사회 전체의 삶을 규율하는 근본 원칙들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의사 결정을 소규모로 그리고 지역적인 수준에서 거주자의 손에 최대한 맡기고자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형태를 찾아내든 간에 (최면과 암시로 통제되는 로봇화된 대중이 아니라) 정보를 바탕으로 책임 있게 참여하는 시민들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과정으로서의 민주적 과정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 늘 본질적인 원칙이어야 한다.

 

 

 1독 : 내용은 대강 파악. 제대로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려면 1번 더 읽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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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

 우리가 직면한 중대한 어려움은 인간의 지적 능력 발달이 감정 발달을 훨씬 앞지른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 인간과 현 상황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인간의 두뇌는 20세기에 살고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심장은 아직도 석기시대에 살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아직 독립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인간은 혼자이고 ,인간 자신을 빼고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권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뎌내려면 그들에게는 신화와 우상이 필요하다. 인간은 파괴성과 증오, 시샘과 복수심같은 무분별한 열정을 억누르고 힘과 돈, 독립 국가와 민족을 숭배한다. 인간은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들 - 부처, 구약의 예언자들, 소크라테스, 예수, 무함마드 - 의 가르침에 말로만 경의를 표하면서, 그 가르침을 미신과 우상 숭배의 정글로 바꾸어버렸다. 지적 · 기술적 조숙과 감정적 퇴보 사이의 괴리로 말미암아 자신을 파괴할 위기에 놓인 인류는 그 위기에서 어떻게 자신을 구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우리의 사회생활에서 가장 본질적인 사실들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 인식은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것을 막아주고, 객관성과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이나마 높여준다. 가슴이 저지르는 대부분의 어리석은 짓과 그것이 우리의 상상력과 사고에 미치는 악영향을 겨우 한 세대 만에 극복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인간이 수십만 년에 걸친 인류 출현 이전의 역사에서 벗어나려면 아마 천 년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 중대한 순간, 조금만 통찰력 - 객관성 - 을 강화하려면 인류의 생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과학적이고 역동적인 사회심리학의 발달이 매우 중요하다. 물리학과 의학의 진보에서 생겨나는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회심리학의 진보가 반드시 필요하다.

 

p21

 존 듀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해외에 있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 태도와 우리 자신의 제도 속에는 외적인 권위와 규율, 획일성, 외국의 지도자에 대한 의존이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준 조건들이 존재하고, 바로 그것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따라서 싸움터는 이곳, 우리 자신과 우리 제도의 내부에도 존재한다.

 

p25

 파시즘이 권력을 잡았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악에 대한 성향과 힘에 대한 욕망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 약자의 권리를 그렇게 무시하고 복종을 갈망할 수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화산이 분출하기 전에 땅이 울리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극소수뿐이었다. 니체는 19세기의 자기만족적인 낙관주의를 흔들어놓았고, 마르크스도 다른 방식으로 낙관주의를 뒤흔들었다. 또 다른 경고는 조금 나중에 프로이트한테서 나왔다. 확실히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 대다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지극히 소박한 생각밖에 갖고 있지 않았고, 그가 사회 문제에 심리학을 적용한 경우에는 대부분 그 해석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개인의 정서적 장애와 정신적 불안이라는 현상에 관심을 기울여, 우리를 화산 꼭대기로 데려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화구를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프로이트는 인간 행동의 여러 부분을 결정하는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힘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에서 그 전의 누구보다도 앞서 있었다. 근대 합리주의는 인간성을 이루는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부분의 존재를 도외시했지만, 근대 심리학에서 프로이트와 그의 후계자들은 그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부분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 비합리적인 현상이 일정한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프로이트는 인간 행동의 비합리성만이 아니라 꿈의 언어와 신체적 증상을 이해하는 법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프로이트는 개인의 성격 구조 전체만이 아니라 이런 비합리적인 행동들도 개인이 외부 세계에서 받은 영향, 특히 어린 시절에 받은 영향에 대한 반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그가 속해 있던 문화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것이 정해놓은 어떤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 한계는 환자에 대한 그의 이해까지도 제한하게 되었고, 그가 정상적인 개인을 이해하고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비합리적인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걸림돌이 되었다.

 이 책은 사회 과정 전반에서 심리적 요소들이 맡고 있는 역할을 강조하고, 이 분석은 프로이트의 기본적인 발견 - 특히 인간의 성격에서 무의식적인 힘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힘들이 외부의 영향에 얼마나 의존하는지에 관한 발견 - 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접근방식의 일반적인 원칙은 무엇이고, 이 원칙과 프로이트의 고전적인 개념은 어떻게 다른지를 처음부터 알려주는 편이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성이 약하다는 전통적인 학설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기본적으로 양분하는 전통적인 믿음도 받아들였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반사회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회는 인간을 길들여야 하고, 인간이 생물학적 - 따라서 근절할 수 없는 - 충동을 직접 만족시키는 것을 어느 정도는 허락해야 한다. 하지만 대체로 사회는 인간의 기본적인 충동을 정화시키고 노련하게 억제해야 한다. 타고난 충동을 사회가 이렇게 억압하면, 그 결과 기적적인 일이 일어난다. 즉 억압당한 충동이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노력으로 바뀌고, 그리하여 문화의 인간적 토대가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문화적 행동으로 바뀌는 이 이상한 변화를 승화(昇華)라고 불렀다. 억압의 정도가 개인이 승화시킬 수 있는 한계를 넘으면 개인은 신경증에 걸리고, 억압을 줄이는 것을 허락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개인의 충동을 만족시키는 것과 문화 사이에서 반비례 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억압이 강할수록 문화가 발달한다(그리고 신경 장애에 걸릴 위험도 더 높아진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고정적이다. 개인은 사실상 변하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고, 사회가 개인의 자연스러운 충동에 더 강한 압력을 행사하거나(그래서 더 많은 승화를 강요하거나) 더 많은 만족을 허용하거나(그래서 문화를 희생시키거나) 할 때에만 개인도 변한다.

 이전의 심리학자들이 인정한 이른바 인간의 기본적 본능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근대인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충동들을 반영한 것이었다. 프로이트에게는 그의 문화권에 속하는 개인이 인간을 대표했고, 근대 사회에 사는 인간 특유의 열정과 불안은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에 뿌리를 내린 영원한 힘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이 점을 실증하는 예를 많이 들 수 있지만(예를 들어 오늘날 현대인에게 널리 퍼져 있는 적개심의 사회적 토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여성들의 이른바 거세 콤플렉스 등),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는 개념 전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한 실례를 한 가지만 더 제시하고 싶다. 프로이트는 언제나 개인을 타인들과 관련지어 생각한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이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타인들과 맺고 있는 독특한 경제적 관계와 비슷하다. 각자는 자기가 책임지고 개인주의적으로 자신을 위해 일하지 기본적으로 타인과 협력하여 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다. 그는 고객이나 고용주나 고용인이 될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는 물건을 사고팔아야 하고, 남들과 주고받아야 한다. 상품 시장이든 노동 시장이든, 시장이 이 관계를 규제한다. 따라서 주로 혼자이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개인은 한 가지 목적 - 물건을 팔거나 사는 것 - 을 위한 수단으로 타인들과 경제저 관계를 맺는다. 인간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개념도 본질적으로는 이와 같다. 개인은 반드시 충족시킬 필요가 있는 생물학적 충동들은 충분히 갖추고 있는 듯하다. 그 충동들은 만족시키기 위해 개인은 다른 '객체'와 관계를 맺고, 따라서 다른 개인들은 언제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 목적은 개인이 타인들과 접촉하기 전에 원래 자신에게서 비롯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현장은 시장과 비슷하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욕구를 서로 충족시켜주는 것이고, 여기서 타인과의 관계는 언제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이 책에서 제시된 분석은 프로이트의 관점과는 대조적이다. 심리학의 주요 문제는 이런저런 본능적 욕구 자체를 충족시키거나 좌절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개인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것이냐의 문제라는 가정,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고정적인 게 아니라는 가정이 이 책에 제시된 분석의 기본 바탕이다. 한쪽에는 어떤 충동을 타고난 개인이 있고, 또 한쪽에는 개인과는 별도로 개인의 타고난 성향을 충족시키거나 좌절시키는 사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식욕 · 갈증 · 성욕처럼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욕구는 존재하지만, 사랑과 미움, 권력욕과 복종심, 관능적 쾌락에 대한 욕망 또는 두려움처럼 사람들의 성격에 차이를 가져오는 충동들은 모두 사회 과정의 산물이다. 인간의 가장 추악한 성향만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성향도 생물학적으로 고정된 인간 본성이 아니라 인간을 만들어내는 사회 과정의 결과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는 개인을 억압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 물론 그 기능도 갖고 있기는 하지만 - 창조적인 기능도 갖고 있다. 인간의 본성, 열정과 불안은 문화적 산물이다. 사실 인간 자체가 인류의 부단한 노력이 낳은 가장 중요한 창조물이자 성취이고, 그 기록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역사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인간의 창조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사회심리학의 과제다. 하나의 역사 시대에서 다음 역사 시대로 넘어갈 때 인간의 성격에 어떤 뚜렸한 변화가 일어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르네상스 정신은 왜 중세 정신과 다른가? 독점자본주의 시대 인간의 성격 구조는 왜 19세기 인간의 성격 구조와 다른가? 사회심리학은 좋든 나쁘든 새로운 능력과 새로운 열정이 생겨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르네상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인간은 명성을 얻으려는 불타는 야망으로 가득 찼지만, 오늘날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 욕망이 중세 사회의 인간에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또한 전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도 같은 시대에 발달했다. 북유럽 국가에서는 16세기부터 인간이 일하고 싶은 욕망에 거의 강박적으로 사로잡혔다. 그 전에는 노예가 아닌 자유민은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역사에 의해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회심리학의 영역이다. 열정과 욕망과 불안이 사회 과정의 '결과'로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는지를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구체적인 형태를 이루게 된 인간의 에너지가 어떻게 '사회 과정을 형성하는 생산력'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사회심리학의 과제다. 따라서, 예컨대 명성과 성공을 얻고자 하는 갈망과 일하고 싶은 욕구는 근대 자본주의를 발달시킨 원동력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근대 자본주의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며, 이 원동력과 그 밖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힘이 없었다면 인간은 근대 상공업 체제의 사회적 · 경제적 요구에 따라 행동할 있는 추진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p38

 인간의 본성이란 생물학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타고난 충동들의 총화도 아니고, 또한 순조롭게 적응해가는 문화 유형의 생명 없는 그림자도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 진화의 산물이지만, 어떤 고유한 메커니즘과 법칙도 갖고 있다. 인간의 본성에는 고정 불변의 요소들이 있는데, 생리적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필요성, 고립과 정신적 고독을 피해야 할 필요성이 그것이다. 개인은 어떤 사회 특유의 생산과 분배 체제에 뿌리를 둔 생활양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문화에 역동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행동과 검정을 유발하는 강력한 충동들이 수없이 생겨난다. 개인은 이 충동들을 의식할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욕구들은 강력하고 일단 생겨나면 충족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그것들은 강력한 영향력이 되어, 이번에는 반대로 사회 과정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경제적 · 심리적 · 이념적 요인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고 이 상호작용에 관하여 어떤 일반적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는 나중에 종교개혁과 파시즘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논할 것이다. 이 논의는 언제나 이 책의 주요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될 터인데, 이 책의 ㅈ요 주제는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이 '개인' 되면 될수록, 자발적인 사랑과 생산적인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결합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자유와 개체적 자아의 본래 모습을 파괴하는 끈으로 세계와 자신을 묶어서 일종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p40

 개인이 원시적 유대관계에서 차츰 벗어나는 과정, 즉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은 종교개혁부터 현재에 이르는 수세기 동안의 근대사에서 절정에 달한 듯하다.

 

p44

 개체화 과정의 다른 측면은 '고독의 증대'다. 원초적 유대는 외부 세계와의 기본적인 통합과 안도감을 준다. 아이가 그 세계에서 벗어날수록 자기가 혼자라는 것, 다른 모든 존재와 분리된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개인의 존재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강하고 힘센 세계, 때로는 위협적이고 위험하기도 한 세계와 이렇게 분리되는 것은 무력감과 불안감을 낳는다. 개별 행동의 가능성과 책임을 모른 채 세계의 일부로 남아 있는 동안은 세계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개인이 되면 혼자 서서, 세계가 지니고 있는 위험하고 압도적인 측면과 맞서야 한다.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외부 세계에 완전히 잠겨서 고독감과 무력감을 극복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 총동과 거기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유대는 성장 과정 자체에서 끊어진 원초적 유대와는 다르다. 아이가 육체적으로는 결코 어머니 자궁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심리적으로는 절대로 개체화 과정을 뒤집을 수 없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복종의 성격을 띠고, 권위와 거기에 복종하는 아이 사이의 기본적인 모순은 결코 제거되지 않는다. 아이는 의식적으로는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자아의 본래 모습과 힘을 포기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복종의 결과는 과거와는 정반대다. 복종은 아이의 불안을 늘리는 동시에 적개심과 반항심을 불러일으킨다. 아이가 적개심과 반항심을 품는 대상은 아이가 계속 의존하는, 또는 새로 의존하게 된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놀랍다.

 하지만 복종은 고독과 불안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또 다른 방법, 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해소할 수 없는 갈등으로 끝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 및 자연과 자발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관계는 개성을 없애지 않으면서 개인을 세계와 이어준다. 이런 종류의 관계 -  이 관계의 가장 중요한 표현은 사랑과 생산적인 이리다 - 는 인격 전체의 통합과 그 힘에 뿌리는 두고 있다. 따라서 자아 성장의 한계가 이 관계를 지배한다.

 

p46

 분리와 개체의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자아도 그만큼 성장한다면, 아이는 조화롭게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개체화 과정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반면, 자아의 성장은 수많은 개인적 · 사회적 이유로 방해를 받는다. 이 두 경향의 차이는 참을 수 없는 고립감과 무력감을 낳고, 이것은 나중에 '도피의 메커니즘'으로 논할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이어진다.

 

p47

 인간은 태어났을 때는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무력하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응은 본능의 결정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학습 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본능은 .... 고등동물, 특히 인간에게는 사라지는 범주는 아니라 해도 약해지는 범주다."

 

p53

 다른 측면 - 인간 본성의 악함을 강조하고, 개인의 무의미함과 무력함, 개인이 외적인 힘에 종속되어야 할 필요성 - 은 무시된다. 개인은 무가치하고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의존할 수 없고 외적인 힘에 복종할 필요가 있다는 이 생각은 히틀러 이데올로기의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히틀러의 이념은 개신교에 내재하는 고유의 자유와 도덕 원리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p65

 이 사실은 중세 사회에서 개인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카톨릭교회의 교리만이 아니라 세속의 법률에도 표현되어 있던 '경제 활동'에 관한 '윤리적 견해'가 그것이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토니의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그의 견해는 중세를 이상화하거나 낭만화하려 든다고 의심받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생활에 대한 기본적인 가정은 두 가지였다. "경제적 이익은 인생의 진정한 사업인 구원에 종속된다는 것. 경제활동은 인간 행위의 한 측면이며 인간 행위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도덕률에 묶여 있다는 것"이다.

 

p69

 루터는 1524ㄴ녀에 <상거래와 고리대금업>이라는 팸플릿에서 독점 기업에 대한 중소 상인의 울분과 분노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들은 모든 상품을 장악하고 앞에서 언급한 모든 수법을 노골적으로 행사한다. 그들은 상품 가격을 마음대로 올리거나 내리고, 마치 자기들이 신의 창조물 위에 군림하고 믿음과 사랑의 법칙에서 자유롭기라도 한 것처럼, 강꼬치고기가 물속의 작은 물고기들을 괴롭히듯이 모든 중소 상인을 억압하고 파멸시킨다." 루터의 이 말은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와 16세기에 중산층이 부유한 독점가들에게 느꼈던 공포와 분노는 우리 시대에 중산층이 독점 기업과 강력한 자본가들에게 보이는 태도를 특징짓는 감정과 비슷한 점이 많다.

 

p88

 루터에게서 찾아볼 수 있듯이, '확실성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의 표현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회의를 극복하려는 욕구에 뿌리박고 있는 행동이다.' 루터의 해결책은 오늘날 수많은 개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들은 루터와는 달리 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즉 그들은 고립된 개별적 자아를 제거하고, 개인 밖에 있는 압도적으로 강한 힘의 손에 쥐어진 도구가 됨으로써 확실성을 찾으려 한다. 루터에게 이 힘은 선이었고, 그는 절대적인 복종으로 확실성을 추구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회의를 어느 정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햇지만, 그 회의가 정말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 회의의 공격을 받았고, 복종하려는 노력을 거듭하여 그 회의를 극복해야만 했다. 심리학적으로 믿음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믿음은 인류와의 내적 관계와 삶에 대한 긍정의 표현일 수도 있고, 개인의 고독과 삶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 뿌리를 둔 근본적인 회의감을 억제하려는 반작용의 형성일 수도 있다. 루터의 믿음은 그런 보상적 성질을 갖고 있었다.

 

p107

 '양심'이란 인간이 스스로 자기 마음속에 앉혀놓은 노예 감독에 불과하다. 양심은 인간이 자신의 것이라 믿는 소망이나 폭표에 따라 행동하도록 몰아세우지만, 사실 그 소망이나 목표는 외부의 사회적 요구가 내면화한 것이다. 양심은 가혹하고 잔인하게 인간을 몰아붙이고, 쾌락과 행복을 금지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죄를 속죄하는 데 평생을 바치게 한다. 

 

 

 봉건사회라는 중세적 제체의 붕괴는 모든 사회 계급에서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개인이 홀로 남겨지고 고립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은 이제 자유로워졌다. 이 자유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다. 인간은 그때까지 누렸던 안전성과 의심할 여지없는 소속감을 박탈당했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전을 추구하는 그를 만족시켰던 세계로부터 강제로 떨어져나왔다. 그는 고독과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도 있었고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어, 남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종류의 자유는 여러 사회 계급의 실제 생활 형편에 따라 서로 다른 무게를 가졌다.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부류만이 대두하는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아, 진정한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활동과 합리적인 계산의 결과로 사업을 확장하고 정복하고 지배하고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 신흥 유산 귀족은 기존의 문벌 귀족과 함께 새로운 자유의 열매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개인이 주도권을 잡고 세상을 지배하는 새로운 느낌을 얻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도 근본적인 불안전과 불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신흥 자본가에게는 대체로 자유의 소극적인 의미보다 적극적인 의미가 더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귀족 사회의 토양에서 번영한 르네상스 문화에 잘 표현되어 있다. 르네상스 예술과 철학에는 물론 절망과 회의주의도 자주 표현되었지만, 인간의 존업성과 의지와 지배력이라는 새로운 정신이 표현되었다. 이처럼 개인의 활동과 의지의 힘을 강조한 것은 중세 말기에 카톨릭교회의 신학적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권위에 저항하지 않고 그 지도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유의 적극적인 의미를 강조했고,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권리, 인간의 힘과 존엄성 그리고 의지의 자유를 강조했다.

 한편 하층계급인 도시 빈민과 특히 농민들은 자유에 대한 새로운 추구, 점점 심해지는 경제적 · 인간적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렬한 소망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잃을 것이 거의 없었지만 얻을 것은 많았다. 그들은 교리상의 시시콜콜한 면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보다는 성서의 기본 원칙인 우애와 정의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소망은 초기 기독교 특유의 비타협적 정신을 특징으로 하는 종교 운동과 수많은 정치적 반항에 적극적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중산층의 반응이었다. 자본주의의 발흥은 그들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강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중산층에 속하는 개개인은 16세기 초에는 아직 새로운 자유에서 힘과 안전을 많이 얻지 못했다. 자유는 힘과 자신감보다는 오히려 개인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느낌과 고독감을 가져왔다. 게다가 중산층은 로마 교회의 성직자를 비롯한 유산계급의 사치와 권력에 대한 불타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의 무의미함과 부유층에 대한 분개를 표현했으며,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믿음을 파괴했으며, 자신과 타인을 경멸하고 불신하도록 가르쳤으며,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만들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세속 권력 앞에 굴복했으며, 세속 권력이 도덕적 원칙에 어긋나면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원칙을 포기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프로테스탄티즘은 유대-기독교 전통의 기초가 되었던 요소들을 버리고 만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리가 제시한 개인과 신과 세계의 모습에서는, 개인이 느끼는 무의미함과 무력감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마땅히' 그렇게 느껴야 한다는 믿음으로 그 느낌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새로운 종교적 교리는 평균적인 중산층의 느낌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이 태로를 합리화하고 체계화하여 그 느낌을 더욱 확대하고 강화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교리는 그 이상의 일을 했다. 즉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도 개인에게 알려주었다. 자신의 무력함과 본성의 사악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생애를 그 죗값으로 여기고, 극도로 자신을 비하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회의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또한 신에게 완전 복종하면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적어도 신이 구원하기로 결정한 사람들 가운데 자기도 속해 있을 거라는 희망은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겁먹고 뿌리째 뽑혀 고립된 개인, 새로운 세계와 관계를 맺고 거기에 적응해야 하는 개인의 인간적 욕구에 대한 해답이었다. 경제적 · 사회적 변화로 생겨났고 종교적 신조로 더욱 강화된 새로운 성격 구조가 이번에는 꺼꾸로 사회적 · 경제적 발전을 촉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성격 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던 바로 그 자질들 - 일하려는 충동, 절약하려는 열정, 가외의 개인적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도구로 삼으려는 태도, 금욕주의, 강박적 의무감 - 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이 된 성격 특성들이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근대의 경제 발전과 사회 발전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에너지가 구체적인 형태로 형성된 것이 바로 그 특징들이었다. 그 특정한 형태를 취함으로써 인간의 에너지는 사회 과정에서 생산력의 하나가 되었다. 새로 형성된 성격 특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경제적 필요라는 관점에서 보면 유리했다. 그런 행동은 이 새로운 성격 유형의 요구와 불안에 대응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이 원칙을 좀 더 일반적인 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아질 것이다. 사회 과정은 개인의 생활양시, 즉 타인 및 일과의 관게를 결정함으로써 그의 성격 구조를 형성한다. 종교적이든 철학적이든 정치적읻든, 새로운 이념은 성격 구조의 이런 변화를 낳은 결과이고, 이렇게 바뀐 성격 구조에 호소하여 그것을 강화하고 충족하고 안정시킨다. 새로 형성된 성격 특성은 다시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사회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원래 그 성격 특성들은 새로운 경제력의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난 것이지만, 서서히 새로운 경제 발전을 촉진하고 강화하는 생산력이 되는 것이다.

 

p115

 예를 들면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자유의 최후 승리라고 믿는다. 신앙의 자유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신을 숭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교회와 국가 권력에 대한 승리지만, 근대인은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개연성이 입증되지 않은 것을 믿는 내적 능력을 대부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p120

 중세의 사회 체제에서 자본은 인간의 하인이었지만, 근대의 사회 체제에서는 인간의 주인이 되었다. 중세의 세계에서 경제 활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목적은 삶 자체, 또는 카톨릭교회가 이해한 바와 같이 인간의 영적 구원이었다. 경제 활동은 필요한 것이고, 재물도 신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지만, 모든 외적 활동은 삶의 목적을 촉진하는 경우에만 의미와 존엄성을 갖는다. 그 자체를 위한 경제 활동과 소유욕은 중세 사상가에게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근대 사상가에게는 오히려 그런 활동과 욕망이 없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본주의에서 경제 활동과 성공과 물질적 획득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자신의 행복이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 체제의 발전에 기여하고 자본을 축적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 된다. 인간은 경제라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 - 그가 자본을 많이 갖고 있다면 중요한 톱니가 되고, 자본을 갖고 있지 않다면 하찮은 톱니가 된다 - 가 되었지만, 항상 외부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톱니다. 인간을 초월한 목적에 자신을 이토록 기꺼이 바치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킨 것은 사실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 물론 경제 활동의 이 같은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만큼 루터나 칼뱅의 정신과 동떨어진 것은 없었지만, 그들은 신학적 가르침 속에서 인간의 정신적 척추인 존엄감과 자존심을 꺽어버리고 활동의 목적은 자기 자신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침으로써, 상황이 이런 식으로 발전할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루터의 가르침에서 주된 요점의 하나는 그가 인간성의 사악함을 강조하고,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칼뱅도 인간의 사악함을 강조했고, 인간은 최대의 자신의 자존심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그의 사상 체계의 중심에 놓았다. 더 나아가 인간 생활의 목적은 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설파했다. 그렇게 루터와 칼뱅은 심리적으로 인간이 근대 사회에서 맡아야 할 역할 - 자신이 무의히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목적이 아닌 목적을 위해서만 자신의 삶을 종속시킬 각오를 하는 것 - 을 준비시켰다. 인간은 일단 정의도 사랑도 상징하지 않는 신의 영광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존재가 되면, 경제적 기계 - 그리고 결국에는 '총통' - 의 하인 역할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경제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개인을 경시하는 것은 자본 축적을 경제 활동의 목적으로 삼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특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람은 이익을 위해 일하지만, 그가 얻은 이익은 소비되지 않고 새 자본으로 투자된다. 이렇게 늘어난 자본은 새로운 이익을 가져오고, 이 이익은 다시 투자된다. 이익과 투자는 이렇게 다람쥐 쳇바튀 돌 듯 계속된다. 물론 사치를 위해 돈을 쓰거나 '과시적인 낭비'로 돈을 쓰는 자본가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대표자들은 소비가 아니라 일을 즐겼다. 자본을 소비하는 대신 축적하는 이 원칙은 우리의 근대 산업 체제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의 전제다. 사람이 일에 대해 금욕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또한 경제 체제의 생산력을 발달시키기 위해 자신의 성과를 투자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연을 통제하는 일에서 이렇게 많은 진보를 이룩하지 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될 미래를 역사상 처음으로 마음속에 그릴 수 있게 된 것도 사회의 생산력이 이렇게 증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 축적 자체를 위해 일한다는 원칙이 객관적으로는 인류의 진보에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다 해도, 주관적으로는 인간으로 하여금 초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일하게 만들었고, 인간을 자기가 만든 기계의 하인으로 전락시켰으며, 그리하여 자기가 보잘것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을 인간에게 안겨주었다.

 

p127

 근대인은 자아를 최대한 주장하는 것이 특징인 것 같지만, 실제로 그의 자아는 약해져서 전체 인격의 다른 부분은 모두 제외하고 전체 자아의 일부인 지성과 의지력으로 축소되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은 놀랄 만큼 강해졌지만, 사회는 자기가 창조한 그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생산 체계는 기술적 측면에서는 합리적이지만 사회적 측면에서는 비합리적이다. 경제 위기, 실업, 전쟁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건설했다. 공장과 집을 세우고, 자동차와 옷을 생산하고, 곡식과 과일을 지배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생산품에서 멀어졌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기가 만든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이 만든 시계가 그의 주인이 되었고, 그 주인 앞에 인간은 고개를 숙이고, 될 수 있는 한 아양을 떨며 속이려 애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 인간의 신이 되었다. 그는 자기 이익에 휘둘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든 구체적 능력을 가진 그의 전체적인 자아는 그의 손으로 만들어진 그 기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인간은 여전히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환상을 품지만, 일찍이 선조들이 신에 대해 의식적으로 느꼈던 무력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p129

 경제적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적 관계도 이런 소외의 성격을 띤다. 그 관계는 인간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사물 사이의 관계와 같은 성격을 띤다. 하지만 서로 상대를 수단으로 이용하고 소외시키는 것은 이런 정신을 보여주는 실례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파괴적인 것은 아마 개인과 그 자신 사이의 관계일 것이다. 사람은 상품을 팔 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팔고, 자신이 상품이라고 느낀다. 육체노동자는 자신의 육체적 에너지를 팔고, 상인과 의사와 사무원은 '인격'을 판다. 그들이 생산품이나 용역을 팔기 위해서는 '인격'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인격은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 밖에도 소유자는 수많은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그는 에너지와 창의성, 그 밖에 자신의 특별한 지위가 요구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갖추어야 한다.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이런 인간적 자질들의 가치, 나아가 그 존재 자체까지 결정하는 것은 시장이다. 어떤 사람이 제공하는 자질들이 아무 쓸모도 없으면 그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설령 사용 가치를 지니고 있더라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상품은 무가치한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신감이나 '자아의식'은 남들이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시일 뿐이다. 시장에서의 인기나 성공과는 관계없이 그의 가치를 확신하는 것은 '그'가 아니다. 남들이 그를 원하면 그는 쓸모 있는 인간이고, 인기가 없으면 쓸모없는 인간이다. 자기 평가가 이처럼 '인격'의 성공에 달려 있는 것이야말로 인기가 근대인에게 그토록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이유다. 어던 실제적인 문제에서 남보다 앞서가느냐 아니냐뿐만 아니라,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또는 열등감의 구렁텅이에 빠지느냐 아니냐도 인기에 달려 있다.

 

p147

 이 점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신경증적(neurotic)'이라는 용어와 '정상적인(normal)' 또는 '건강한(healthy)'이라는 용어를 잠깐 검토하는 것이 유용할 듯싶다.

 

 '정상적인' 또는 '건강한'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는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그 사회에서 맡아야 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정상적인 또는 건강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그가 그 특정한 사회에서 요구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의 재생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즉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건강 또는 정상적인 상태를 개인의 성장과 행복의 최고 단계로 생각한다.

 주어진 사회의 구조가 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제공했다면, 두 관점이 일치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포함하여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사회는 그렇지 않다. 개인의 성장이라는 목표 달성을 어느 정도나 촉진시키는지는 사회마다 다르지만, 사회의 원활한 기능과 개인의 완전한 발전이라는 두 가지 목표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 때문에 건강에 대한 두 개념을 뚜렷이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사회적 필요의 지배를 받고, 또 하나는 개인 생활의 목표에 관한 규범과 가치관의 지배를 받는다.

 불행하게도 이 차이는 종종 무시된다. 정신과 의사들은 대부분 그들의 사회 구조를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치가 떨어지는 존재로 생각한다. 반면에 잘 적응하는 사람은 인간적 가치 척도의 관점에서 더 쓸모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 우리가 정상적이라는 개념과 신경증적이라는 개념을 구별해서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즉 잘 적응한다는 점에서 정상적인 사람이 인간적 가치라는 면에서는 신경증적인 사람보다 덜 건강한 경우가 많다. 그는 사회에 잘 적응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아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개성과 자연스러움은 모두 사라졌을 것이다. 반면에 신경증적인 사람은 자아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완전히 굴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으로 그 특징을 묘사할 수 있다. 물론 자신의 개체적 자아를 구하려는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자신의 자아를 생산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신경증적 증상을 통해, 그리고 환상적인 생활로 물러가 그 속에서 구원을 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개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정상적인 사람보다는 덜 불구자다.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신경증 환자가 아니면서도 적응 과정에서 개성을 잃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신경증적인 사람에게 찍혀 있는 낙인은 아무 근거도 없는 것 같고, 신경증 환자를 사회적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때만 그 낙인이 정당회되는 듯하다. 사회 전체에 관해서 말하면, '신경증적'이라는 용어는 이 후자의 의미로는 쓰일 수 없다.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않으면 그 사회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구성원들이 인격의 성장 과정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고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는 그런 의미에서 신경증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경증적'이라는 용어는 사회적 기능의 결핍을 나타낼 때 자주 쓰이기 때문에, 사회가 신경증적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인간의 행복과 자기실현에 불리한 사회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p159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이성적 공격이라는 현상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알프레드 아들러는 우리가 여기서 논하는 경향을 그의 사상 체계의 중심에 놓았다. 하지만 그것을 가학-피학증으로 다루지 않고 '열등감'과 '권력욕'으로 다루었다. 아들러는 이런 현상의 합리적인 측면만 보고 있다. 우리는 자신을 비하하고 하찮게 만드는 비합리적인 경향에 대해 말하지만, 그는 열등감을 어린아이의 일반적인 무력함과 신체적 열등감 같은 실제적 열등성에 대한 적절한 반작용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욕을 타인을 지배하려는 비합리적인 충동의 표출이라고 생각하는 데 대해 아들러는 그것을 완전히 합리적인 결정 너머에 있는 것을 못 보고 있다. 그는 동기 부여의 복잡성에 대한 귀중한 통찰에 이바지했지만 항상 표면에만 남아 있을 뿐, 프로이트가 했던 것처럼 비합리적 충동의 심연 속으로 결코 내려가지 않았다.

 

p170

 확실히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은 순전히 물질적인 의미에서 우월한 힘의 표현이다. 내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보다 '강한'것이다. 하지만 심리적 의미에서 보면 '권력욕은 강함이 아니라 오히려 약함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것은 개체적 자아가 홀로 서서 살아갈 수 없다는 표현이다. 그것은 진정한 힘이 부족할 때 2차적인 힘을 얻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p178

 하지만 권위주의적 성격자가 권위에 맞서 싸우는 것은 본질적으로 반항이다. 그것은 권위와 싸움으로써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의 무력감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복종에 대한 갈망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여전히 존재한다. 권위주의적 성격자는 결코 '혁명가'가 아니다. 나는 그를 '반역자'라고 부르고 싶다. '급진주의'에서 극단적인 권위주의로 뭐라고 설명할 수 없게 표변하여 피상적인 관찰자를 당혹하게 만드는 개인과 정치 운동이 많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들은 전역적인 '반역자'다.

 

p202

 가짜 생각이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일 수도 있다. 그것의 허위성이 반드시 비논리적인 요소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행동이나 감정을 실제로 결정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들이지만, 그것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근거에서 설명하려는 합리화에서 이것을 고찰할 수 있다. 합리화는 사실이나 논리적 사고의 법칙과 모순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합리화 그 자체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비합리성은 어떤 행동을 유발한 것처럼 위장한 동기가 실은 진짜 동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진술의 논리성을 판단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합리화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그 사람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동기도 고려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적극적 생각의 결과인 사고는 항상 새롭고 독창적이다. 독창적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이제껏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의 외부 세계에서나 내부 세계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수단으로 사고를 이용했다는 의미에서 독창적인 것이다. 합리화에는 본질적으로 이같은 발견과 폭로의 자질이 결여되어 있다. 합리화는 단지 자신 속에 존재하는 감정적 편견을 확인해줄 뿐이다. 합리화는 현실을 통찰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을 기존의 현실과 조화시키려는 사후의 시도다.

 

p224

 1918년에 전승국들이 독일을 너무 가혹하게 대한 것이 나치즘이 대두한 주요 원인의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단서가 필요하다. 독일인 대다수가 강화조약이 부당하다고 느껴지만, 중산층은 몹시 분통하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에 노동자 계급은 별로 억울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체제에 반대해왔으며, 그런 그들에게 패전은 구체제의 패배를 뜻했다. 그들은 전쟁 때 용감하게 싸웠던 만큼 부끄러워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느꼈다. 한편 군구제의 패배 덕분에 가능했던 혁명의 승리는 그들에게 경제적 · 정치적 · 인간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분노는 하류 중산층에 토대를 두고 있었는데, 그 국가주의적 분노는 사회적 열등감을 국가적 열등감에 투영한 하나의 합리화였다.

 이런 투영은 히틀러 개인의 성장 과정에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전형적인 하류 중산층의 대표자였고, 성공할 기회나 미래가 전혀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는 낙오자의 신세를 아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나의 투쟁》에서 그는 젊은 시절 자기가 '보잘것없는 인간', '이름도 없는 인간'이었다고 자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국가의 상징 속에서 합리화시킬 수 있었다.

 

p239

 강자에 대한 사랑과 무력한 약자에 대한 증오는 가학-피학적 성격의 전형적인 특징이고, 이것은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정치적 행동을 대부분 설명해준다.

 

p249

 교육의 진정한 목적이 아이들의 내적 독립성과 개성, 성장과 본래 모습을 발전시키는 것이라면, 훈련이 반드시 자발성을 억압하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교육이 성장기 아이들에게 부과할 수밖에 없는 제약은 일시적인 조치일 뿐이고, 사실은 그것도 성장과 발전 과정을 뒷받침하는 조치다.

 

p251

 우리 사회에서 감정은 전반적으로 억압되어 있다. 창의적 사고가 - 다른 어떤 창조적 활동도 마찬가지지만 - 감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감정 없이 생각하고 감정 없이 생활하는 것이 하나의 이상적인 태도가 되어버렸다. '감정적'인 것이 불안정하거나 정신적으로 불균형한 것과 같은 뜻이 되어버렸다. 이 기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개인은 매우 약해졌다. 그의 생각은 빈곤해지고 단조로워졌다. 한편 감정은 완전히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인격의 지적인 측면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존재해야 한다. 그 결과는 값싸고 가식적인 감상성인데, 이 김상성을 가지고 영화와 대중가요는 감정에 굶주진 수백만 명의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죽음을 부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근본적인 측면 한 가지를 부인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죽음과 고통에 대한 인식을 가장 강력한 삶의 자극제이자 인류가 서로 단결하는 토대로 삼고, 기쁨과 열정이 강렬함과 깊이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할 경험으로 삼기는커녕 개인에게 그 인식을 억압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억압이 항상 그렇듯이, 억압된 요소는 시야에서 사라져도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죽음의 공포는 우리 사이에 불법으로 존재한다. 죽음의 공포는 아무리 그것을 부인하려고 애써도 여전히 살아 있지만,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불모 상태로 남아 있다. 그것은 다른 경험들이 단조로워지는 원인이고, 삶에 널리 퍼져 있는 불안감의 원인이기도 하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은 미국 국민이 장례식에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쓰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p255

 오늘날 쓰이는 교육 방법 가운데 독창적인 생각을 실제로 방해하는 몇 가지를 잠깐 언급하고 싶다. 하나는 사실에 대한 지식, 아니 그보다는 정보를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을 많이 알수록 현실도 잘 알 수 있다는 한심한 미신이 널리 퍼져 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산발적인 사실 수백 개를 학생들의 머릿속에 주입한다. 학생들은 점점 더 많은 사실을 배우는 데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기 때문에 생각할 짬이 거의 없어진다. 물론 사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생각은 공허하고 허구적이다. 하지만 '정보'만으로는 정보가 없는 것만큼이나 생각을 방해할 수 있다.

 독창적인 생각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모든 진실을 상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진실은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이해되고 누군가가 진실을 발견하고 싶다고 말하면 오늘날의 '진보적인' 사상가들은 그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전반적으로 주관적인 문제, 거의 취향에 따른 문제라고 주장된다. 과학적인 노력은 주관적인 요소에서 분리되어야 하고, 그 노력의 목적은 열정이나 관심을 배제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과학자는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접근할 때처럼 손을 소독하고 사실에 접근해야 한다. 상대주의는 경험주의나 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단어의 정확한 용법에 관심이 많다고 스스로 자랑하기도 하지만, 이 상대주의의 결과는 생각이 그 본질적인 자극 - 생각하는 사람의 소망과 관심 - 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 대신 생각은 '사실'을 기록하는 기계가 된다. 실제로 생각이 일반적으로 물질생활을 지배해야 할 필요성에서 발달해온 것처럼, 진실의 탐구도 개인과 사회 집단의 이해관계와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이해관계가 없다면 진실을 찾기 위한 자극제가 없어질 것이다. 진실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 집단은 항상 존재하는데, 그들의 대표는 인류 사상의 선구자였다. 반대로 진실을 감추어야만 더 많은 이익을 얻는 집단도 존재하는데, 이 경우에만 이해관계가 진실을 잡는 데 해가 된다. 따라서 문제는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진실에 대한 갈망이 모든 인간에게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진실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대한 환상은 혼자 걸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유익한 지팡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지팡이는 사람을 더욱 약하게 만들 뿐이다. 개인의 가장 큰 힘은 자신의 인격을 최대한 완성시키는 데 바탕을 둔다. 그것은 자신에게최대한 투명성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이간의 힘과 행복을 겨냥한 근본적인 명령의 하나다.

 

p263

 지도자가 흥분을 약속하고 개인의 삶에 의미와 질서를 준다는 정치적 기구와 상징을 제시하기만 하면, 어떤 이념이나 지도자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문화를 토대부터 위협하는 위험이다. 자동인형 같은 인간의 절망은 파시즘과 정치적 목적을 키우기 좋은 비옥한 토양이다.

 

p265

 우리의 분석은 자유에서 새로운 의존으로 이어지는 불가피한 순환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것인가? 모든 원초적 유대로부터의 자유는 개인을 너무 고독하고 고립된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는 새로운 유대 속으로 도피해야 할 것인가? '독립'은 '고립'과 같고 자유는 두려움과 같은 것일까? 혹은 개인이 독립된 자아로 존재하지만 고립되지는 않고 세상이나 타인이나 자연과 결합한 상태로 남아 있는 적극적인 자유라는 상태가 존재할까?

 우리는 긍정적인 대답이 있다고 믿는다.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은 악순환을 이루지 않고, 인간은 자유로우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고, 비판적이지만 의심으로 가득 차지 않을 수도 있고, 독립적이지만 인류를 구성하는, 없어서는 안 될 일부일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이 적극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자아의 실현이란 무엇인가? 관념론 철학자들은 지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이성이 억누르고 감시할 수 있도록 인격을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분할한 결과 인간의 감정생활만이 아니라 지적 능력까지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성은 자신의 죄수인 본성을 감시하는 간수가 됨으로써 그 자신도 죄수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인격의 두 측면인 이성과 감정은 둘 다 절름발이가 되었다. 자아의 실현은 사고 작용만이 아니라 인격 전체의 실현을 통해, 즉 감정적 잠재력과 지적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 잠재력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지만, 겉으로 표현되는 만큼만 현실이 된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자유는 통합된 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는 것이다.'

 

p268

 자발적인 활동이 어째서 자유라는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는가? 앞에서 우리는 소극적인 자유가 개인을 고독한 존재로 만들고, 그래서 개인과 세계의 관계는 멀어지고 불신으로 가득 차며, 개인의 자아는 약해지고 끊임없이 위협받는다고 말햇다. 자발적인 활동은 인간이 본래 모습을 희생하지 않고 고독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자아를 자발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다시 세계와 - 인간과 자연 및 자신과 - 통합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런 자발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 속에 용해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다.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서의 사랑, 개체적 자아를 보존하는 것을 토대로 하여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의 동적인 성질은 바로 이 양극성에 있다. 사랑은 분리를 극복하고 싶은 욕구에서 생겨나 완전한 일체로 이어진다. 하지만 개인이 제거되지는 않는다. 일은 자발성을 이루는 또 하나의 구성요소다. 이 일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강방적 활동으로서의 일도 아니고, 부분적으로는 자연을 지배하고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생산품을 숭배하고 그 생산품으로 자연을 노예화하는 관계로서의 일도 아니고, 인간이 창조 행위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일이다. 사랑과 일에 적용되는 것은 모든 자발적 행동에도 적용된다. 감각적 쾌락을 자각하는 것이든 공동체의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든 자발적 행동에는 모두 적용된다. 그것은 자아의 개별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인간과 자연을 자아와 결합시킨다. 자유에 내재하는 기본적인 양분성, 즉 개성의 탄생과 고독의 고통은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으로 더 높은 차원에서 해소된다.

 

p271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만 서로 다르게 태어나기도 한다. 이 차이의 토대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생리적 · 정신적 장비다. 인간은 그 장비를 가지고 삶을 시작하고,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상황과 특별한 경험을 거기에 덧붙인다. 인격의 이러한 개인적 토대는 두 유기체가 육체적으로 결코 같지 않듯이 다른 누구와도 거의 같지 않다. 자아의 진정한 성장은 항상 이 특별한 토대 위에서의 성장이다. 그것은 유기적 성장이고, 오직 이 한 사람에게만 특유한 세포핵이 펼쳐지는 것이다.

 

p282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조건을 확립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의 하나는 계획 경제와 각 개인의 적극적인 협력이 상충하는 데에 있다. 큰 규모의 산업 체계처럼 넓은 범위의 계획 경제는 엄청난 규모의 중앙집권을 요구하고, 그 결과 이 집중화된 기구를 관리할 관료 체계가 필요해진다. 한편 각 개인과 전체 체계의 가장 작은 단위들이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협력하려면 많은 분권화가 필요하다. 상부의 계획이 하부의 적극적인 참여와 융합되지 않으면, 또한 사회생활의 물줄기가 밑에서 위로 끊임없이 흐르지 않으면 계획 경제는 다시 민중을 조종하는 체제로 변할 것이다. 중앙집권화와 분권화를 결합하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회의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미 해결하여 자연을 거의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해준 기술적 문제 못지않게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또한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그들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돌볼 능력이 있다고 믿어야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제어하고 경제 기구를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적에 종속시킬 때에만, 또한 인간이 사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에만 인간은 지금 자신을 절망에 빠뜨리고 있는 고독과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다. 인간은 오늘날 가난에 시달리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큰 기계의 톱니나 자동인형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삶이 공허해지고 무의미해졌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고 공세를 취하여 지난 수백 년 동안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목표로 삼았던 것을 실현해야만 모든 권위주의 체제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간 정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하나의 신념, 생명과 진리에 대한 신념, 그리고 개체적 자아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실현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신념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 있어야만 허무주의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NHK의 히트 다큐인 "욕망의 자본주의"의 2019년도 버젼을 정리한 내용.

책보다도 다큐멘타리쪽의 내용이 좀더 이해하기도 쉽고(편집의 영향) 핵심적인 내용에 접근성도 좋다.

자본주의 경제하에서 미래의 변화를 여러 명의 전문가의 인터뷰를 통해서 구성한다.

책에는 5명의 패널들만 나오는데, 실제 다큐에서는 더 많은 인물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개인적으론 다큐 쪽이 더 좋다.

 

(NHK 욕망의 자본주의 2019 링크)

이 다큐의 나레이터의 목소리는 상당히 일본적이라고나 할까? 나레이터는 야쿠시마루 에츠코라는 여성으로 일본에서 꽤 유명한 싱어송라이터이자 음악가이다. 상당히 많은 음악가들과의 콜라보로도 유명하다.

https://www.dailymotion.com/video/x7010c0

 

BS1スペシャル「欲望の資本主義2019(前編)~偽りの個人主義を越えて~」20190103 - 動

後編 https://dai.ly/x7017yt 「ネット界の四天王」と呼ばれるGAFAを巡る議論が熱い。強大な力に国家の枠組み前提の市場経済が揺れている。仮想通貨をめぐる議論も沸騰、バーチャル経済時代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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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1スペシャル「欲望の資本主義2019(後編)~偽りの個人主義を越えて~」(後編)20190103 - 動画 Dailymotion

前編 https://dai.ly/x7010c0 「ネット界の四天王」と呼ばれるGAFAを巡る議論が熱い。強大な力に国家の枠組み前提の市場経済が揺れている。仮想通貨をめぐる議論も沸騰、バーチャル経済時代の資本主義はどこへ行く?2017年富を生むルールの変化を捉え2018年社会構造に地殻変動が起きている現実に迫ってきた番組は次のステージへ。テクノロジーが社会を変える今、格差、分断を越え自由への道は?切迫感ある今問う、自由の形と資本主義の行く末は? 【出演】安田洋祐,スコット・ギャロウェイ,ユヴァル・ノア・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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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자본주의 앞에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는가 ___ 유발 하라리 012

 

p26

 공산주의는 이용 가능한 재화와 서비스의 수급을 단일한 중앙 관리자가 결정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선택을 개개인의 자유에 맡깁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한 자유를 가진 것, 이것이 자본주의의 성공 비결입니다.

 

p31

 일이 사라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솔직히 노동자의 입장에서 모든 일이 항상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건 아니거든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지 않아도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까 일을 합니다. 하루에 10시간씩 슈퍼마켓 계산대 앞을 지키는 일이 꿈의 직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에요.

 저는 인공지능에 맞서 인간의 일을 지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봇에게 계산대 일을 빼앗겨도 괜찮아요. 오히려 이런 시대가 오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일'이 아니라 '인간'일 것입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했던 일들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니,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습니까? 다음 두 문제가 해결된다면 말이죠. 하나는 직업을 잃은 사람들을 어떻게 지탱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보편적 기본 소득제universal basic income 같은 대안들이 논의될 수 있겠죠.

 다른 하나는 인생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이제 당신은 매일같이 공장에 출근해 10시간씩 일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식주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럼 남아도는 시간엔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기쁨과 의미를 일 대신 예술, 스포츠, 종교, 명상, 인간관계, 공동체 등에서 충족시키는 모델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직 시장에서 밀려나는 일로 갑론을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알고리즘에 맞서 인간의 실직을 막겠다는 계획은 실제 성공하기도 어려울 테고요. 오히려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을 지켜주는 방법을 고민하는 쪽이 더 현명합니다.

 일이 없는 세계를 대비하는 건 필요합니다. 보편적인 경제 안전망을 통해 최소한의 생활 수준을 지탱해주는 방안 등을 마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시장의 힘에 맡겨두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요. 아마 부와 권력이 한 줌의 엘리트들에게 집중되고 사람들 대부분은 빈곤에 빠져 하루하루가 아주 힘들 겁니다. 위기가 본격적으로 분출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뭐든 해야 합니다. 그게 뭐가 되었든 지키는 대상은 일이 아니라 인간이어야 합니다.

 

p34

 기술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다만 기술이 너무 큰 힘을 갖게 되어 우리가 그 노예로 봉사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크게는 인간을 위해 기술을 봉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죠. 정부 차원에서는 유전자 조작 기술, 자유 무기 체계 Autonomous Weapon System AWS 같은 위험한 기술 개발을 규제해야 합니다. 개인 수준에서도 가령 스마트폰이 자신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하고 자신의 존재와 삶에 대한 통제권을 알고리즘에 쉽사리 넘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가능하게 만든 미래 사회 시나리오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 앞에는 다양한 선택지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선택권은 아닐지 몰라도, 우리는 그중에서 고를 수 있습니다.

 

 

2. 거대 디지털 기업들은 세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___ 스콧 갤러웨이 040

 

p49

 아마존 같은 기업은 연방 정부나 주 정부로부터 세제 우대나 보조금 지원 등의 각종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저임금 ·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면서 생계 지원을 받을 정도로 가난합니다. GAFA(Google, Apple, Facebook, Apple)의 주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면서도 지나치게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쥐어짜고, 그 와중에 보조금과 세금 감면을 받으려고 분주히 뛰어다니면서 이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세계 최고의 혁신가로 칭송받고 있지요.

 하나의 기업이 거대해져서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갖게 되면 온갖 부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세금 회피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10년간 월마트가 낸 법인세는 640억 달러였지만, 아마존은 14억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아마존은 장기 비전으로 투자자들을 매료시켜 막대한 자금을 저렴하게 빌리고, 벌어들이는 수익을 다른 사업에 재투자함으로써 법인세로 빠져나가는 돈을 절약해왔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들이 내야 할 세금을 내지 않으면 소방관, 군인, 공무원 들에게 어떻게 월급을 주죠? 거대 IT 기업이 세제 지원 혜택을 누리는 동안, 작은 기업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면 됩니다! 세금 제도의 역진성逆進性 문제가 발생하는 거죠. 이런 상황은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미국의 정신에도 반하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p50

 많은 사람들이 GAFA가 고용을 창출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해 GAFA는 '소수의 고용'을 창출하고 '다수의 고용'을 파괴합니다. 페이스북과 구글이 230억~250억 달러 규모의 수익을 추가로 내는 데는 2만 8000명의 고용이 더 필요합니다. 고학력 · 고스펙 친구들이 탐내는, 돈벌이가 좋은 고급 일자리입니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 광고 산업은 몇 년째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덴츠나 IPG, WPP 같은 업계 대기업들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요, 이들이 250억 달러라는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약 25만 명의 인원이 필요합니다.

 페이스북과 구글이 2만 8000명을 고용해서 벌어들인 250억 달러는 다른 광고 기업의 성장을 저해하고, 25만 명의 고용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상황은 마치 5만 명을 수용하는 양키스타디움 다섯 곳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와 미디어 플래너Media Planner, 카피라이터Copywriter 등을 모이게 한 뒤, 페이스북과 구글이 "이제 당신들의 일자리는 없습니다"라는 해고 통지서를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고용의 파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전통적인 일자리들이 새로운 기술 직군에세 산 채로 잡아먹히고 있어요. GAFA는 고용의 창출자가 아니라 오히려 고용의 파괴자입니다

 

==> 이 주장은 사실 과거 산업혁명 당시의 러다이트 운동의 사상과도 비슷하다. GAFA가 전통적인 일자리를 파괴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는 혁신을 통해 시장의 원리가 바뀌고 있다고 봐야 한다. 기존 체제의 파괴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늘날 기업가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자금 조달이 매우 힘들다는 점입니다. 전자 상거래, 검색 엔진, 소셜 미디어, 컴퓨터 하드웨어 같은 분야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해도 투자자들이 'GAFA와 경쟁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금을 조달받지 못해서 하루살이처럼 사라지는 신생 기업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혁신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혁신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최근 40년 동안 매일 생겨나는 새로운 비즈니스의 숫자가 절반가량 줄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놀랍게도, 지금보다 1970년대에 훨씬 더 많으 새로운 비즈니스가 등장했습니다.

 독점 기업은 혁신을 저해합니다. 이들은 투자자 자본과 세계 최고의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입니다. 훗날 본인들을 성가시게 할 것 같은 잠재적 경쟁자는 매수해버립니다. 이런 현실에서 작은 회사가 성장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자본주의에서 기업은 고령자의 곤궁한 삶이나 사람들의 마음속 평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도, 화성을 탐사하는 것도 기업의 역할이 아닙니다. 모든 기업의 목적은 이윤을 창출하고 주주 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

 GAFA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GAFA가 내세우는 이미지, 즉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가치를 옹호하며 공익을 추구한다는 이미지를 곧이곧대로 믿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제품과 서비스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수많은 추종자들은 그들을 본보기로 삼아야 하고 그들에게 무한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류 구제 등의 숭고한 비전을 내세운들 그런 이미지는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GAFA의 본질은 기업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수익 창출에 방해가 되는 사회적 책임은 교묘히 피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두뇌들과 세계 최대 규모의 자본이 한데 모여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는 대신 시가 총액을 높이고 돈을 벌어달 줄 아이템을 궁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어요.

 

p65

 미국은 다소 길을 잃었습니다. 미국은 일찍부터 기회의 땅이었고, 경제 정책은 여러 백만장자millionaire를 만드는 걸 목표로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극소수의 조만장자trillionaire를 만들어내는 쪽으로 목표가 바뀐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 명의 승자가 꿈같은 생활을 누리고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르는 반면, 나머지 99명은 그 풍요로움을 눈으로만 구경하면서 한 줌의 부스러기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겠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 자식이 다음 세대의 스티브 잡스라고 맹신하는 것처럼 보여요. 일종의 '대박'을 꿈꾸는 기묘한 복권 경제에 빠져 있는 거죠.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보세요, 당신의 아이는 스티브 잡스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인 전망입니다. 대신 우리는 1퍼센트가 엄청난 혜택을 독점하는 사회가 아니라, 나머지 99퍼센트가 일정 수준 이상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아주 불편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말했듯, 이전의 미국은 보통 인간들을 사랑했습니다. 지금의 미국은 더 이상 그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우리 대부분은 평범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상황이 너무 나쁘게 돌아가고 있어요. 승자 독식 경제에서 평범한 우리는 하잘것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거에요.

 예를 들어 원래 정부는 중소기업을 우대해 그들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는 정반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정부 지원금이 신생 기업이 아니라 GAFA에게 흘러들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복권에 당첨된 사람에게 '축하합니다. 당첨금을 배로 드리지요' 하는 식입니다. 우리는 3억 5000만 명의 농노가 300만 명의 영주에게 종속된 사회를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p67

 도를 넘은 소득의 불평등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좋은 소식은, 역사를 보면 극단적인 소득의 불평등은 반드시 스스로 수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쁜 소식은, 극도로 심한 소득의 불평등을 수정해온 것은 전쟁, 기아, 혁명 중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모두 피하고 싶은 일들이죠.

 오늘날 세계 경제는 이 세 가지 메커니즘 주 하나가 작동할 수 밖에 없는 상태로 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실제로 '느린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극소수가 누리는 '멋진 삶'에서 배제된 수많은 사람들이 울분을 토해내기 시작했고, 그들의 외침은 결국 위험한 선동 정치가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기에 이르렀죠. 유럽의 상황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 미래가 아주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지금부터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 외침이 당선시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교수님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동맹국은 미국이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습니다. 가장 중요한 유럽과 일본 등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관성 없는 메시지로 인해 신뢰가 약해지고 말았죠. 미국은 고립주의를 표명하면서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는 '닫힌 사회'를 지향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말해도, 그 진실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이런 현실이 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우리의 동맹 관계는 세계의 평화를 지켰고 세계의 소득을 증가시켰으며 세계의 기아를 줄여왔습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가 함께 쟁취한, 훌륭한 성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파트너십이 위기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p71

 적어도 미국은 거대 IT 기업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고용 파괴나 납세 회피, 반경쟁적 행위, 소셜 미디어의 정치적 이용과 가짜 뉴스 등 부정적인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들 기업에겐 긍정적인 면도 있거든요. 예를 들어 거대 IT 기업이 만들어내는 고급 일자리는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덕분에 미국이라는 나라의 경쟁력은 한층 올라가게 됩니다. 미국 기업이 세계 시장의 선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부심 역시 무시 못하죠.

 하지만 미국 밖에 있는 나라들은 이런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대학이나 병원 중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이름으로 지어진 시설은 거의 없다고 알고 있는데요. 거대 IT 기업들이 일본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만큼, 일본 정치인은 이들이 자국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거대 IT 기업이 일본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을 추진할 국회의원을 선출해야 합니다.

 최근 중국의 행보는 흥미롭습니다. 중국은 거대 IT 기업을 자국에 유치해 지식과 기술을 훔친 후 유사한 회사를 설립하고 있습니다. 독자적인 검색 엔진과 독자적인 소셜 미디어 회사를 만들어서 국내에서 생기는 이익을 확보하는 방법인데요. 이 수법은 유럽에서 비판을 받았지만 저는 가까운 미래에 유럽도 중국과 같은 수법으로 데이터 유출을 방어하려 들 거라고 예상합니다.

 참고로 영국은 거대 IT 기업이 총수익(매출액)에 과세하는 일명 '디지털세Digital Tax'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구글은 영국에서 매년 70억 파운드를 벌어들였다고 추정되었으나, 그 대부분을 아일랜드에 있는 구글 유럽 본사로 귀속시켜서 법인세를 회피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법인세는 물리적 고정 사업장이 있어야 과세가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한 거죠. 이 때문에 영국은 자국 내에서 실제 발생하는 총수익에 과세한다는 결정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유사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3. 암호화폐는 어떻게 잠들어 있는 부를 깨우는가 ___ 찰스 호스킨슨 074

 

p90

 그럼 어떻게 우버와 에어비앤비를 없앨 수 있을까요? 이런 중개자는 블록체인을 이용한 '스마트 콘트랙트 smart contract' 로 간단하게 없앨 수 있어요. 스마트 콘트랙트란 '프로그래밍된 조건이 모두 충족되면 계약 내용이 자동 이행되는 시스템'으로, 제3자 없이 개인 간 직접 거래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렇게 되면 시장을 독점하고 운전기사를 착취하는 중앙 집권화된 기업은 소멸하고 말 거에요.

 아무리 잘 나가는 사업이어도 새로운 기술의 등장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신문업계가 좋은 사례입니다. 신문은 오랫동안 미디어 시장에서 큰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출현한 인터넷이, 신문사들이 따라온 전통적인 수익 및 유통 모델과 정면으로 충돌했지요. 처음에는 신문업계는 인터넷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매달, 매년 구독률이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들이 낡은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죠. 광고 수익과 구독 수익이 줄어든 신문사들은 현재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저는 '블록체인 기술이 반드시 GAFA를 무너뜨릴 것이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GAFA는 영리하며 적응력이 탁월합니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이들 기업은 자신들과 고객과의 관련성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p92

 하지만 이제 개인 정보와 사생활 보호에 관한 권리 의식이 높아지면서 '프라이버시'가 새로운 사업 모델로 부상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최근 주목할 만한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브레이브 Brave'라는 웹브라우저인데요. 프로그램 언어인 자바스크립트의 아버지 브렌던 아이크 Brendan Eich 가 개발했습니다.

 브레이브는 보안과 프라이버시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이트 접속 정보나 구매 이력, 검색 이력을 서버에 저장하지 않으며 광고 추적기를 차단해 사용자의 익명성을 보장합니다. 광고를 허용함으로써 자신의 데이터를 제공하는 이용자에게는 보상으로 토큰을 줍니다. 이용자의 관심을 갖는 가치를 인정하고, 웹브라우저의 광고 수익을 나누는 것이죠. 브레이브는 최근 등장했지만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이미 수백만 명이나 이용하는 웹브라우저가 되었습니다. 조만간 구글의 크롬이나 모질라의 파이어폭스 같은 선발 주자들을 앞지를 것으로 보입니다.

 이 새로운 기술이 5년 후, 10년 후에 가져올 변화에 기업들은 주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브레이브가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다른 웹브라우저 회사들은 브레이브가 가진 능력과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GAFA도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이 제공해온 서비스의 바람직한 면은 그대로 두면서도 사용자가 포기할 것을 적게 만드는 방법 아니면 일시적으로 포기하더라도 탈퇴 시에는 사용자 권리를 되돌려주는 방법을 고안해내야 할 겁니다.

 계정을 삭제함과 동시에 프로필을 비롯해 나의 모든 디지털 흔적이 삭제되는 세계, 즉 '잊힐 권리가 있는 세계'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록체인 기술은 고객이 더 많은 권한을 갖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4. 좋은 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___ 장 티롤 106

 

p131

 저는 암호화폐가 사회에 무익하다고, 아니,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유해하다고 봅니다. 이유는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 암호화폐는 돈세탁, 탈세, 암거래 등에 악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런 불법 행위에 대해 정부가 통제할 제도적, 법적, 기술적 기반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둘째, 암호화폐 때문에 통화를 발행하는 중앙은행의 시뇨리지seigniorage(화폐 주조 차익)가 줄어듭니다. 각국 중앙은행은 화폐를 발행할 때 이익을 얻고, 이것이 공공 부문의 수익이 되는데요. 간단히 설명하면 중앙은행은 민간 은행으로부터 국채를 사들이고 대금을 민간 은행에 지불하는 형태로 화폐를 발행합니다. 이때 국채에는 금리가 붙지만 현금에는 금리가 붙지 않는데 그 차액이 중앙은행의 이익이 됩니다. 그런데 비트코인 등의 암호화폐가 확산되면 중앙은행에서 얻는 시뇨리지가 줄어들어서 공공 부문의 수익이 감소합니다.

 마지막은 금융 정책의 훼손 가능성입니다. 제가 가장 우려하는 점인데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때는 각국 중앙은행이 시장에 통화를 대량으로 유통, 발행함으로써 유동성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민간이 발행하는 암호화폐는 그 누구도 공급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암호화폐가 주거래 화폐인 상황에서는 이런 부양책을 쓸 수 없습니다.

 

 암호화폐는 거품이라고 하셨느데요. 현재 각국 통화도 금이나 은 등의 실물로 보증되지 않으며 고유의 내재 가치가 없는 불환 지폐입니다. 그럼 사실상 모두가 거품 아닌가요? 둘은 어떻게 다릅니까?

 

 둘 다 거품이라고 해도, 불환 지폐는 공급이 통제되며, 실제 사용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다시 말해, 각국의 불환 지폐는 실물 경제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민간이 발행하는 암호화폐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트코인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값을 치르거나 세금을 납부한다고 하면 모를까요. 개인적으로는 부디 그럴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가치의 등락이 너무 심해서 하루 사이 세수가 배로 늘었다가 반으로 줄어드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의 암호화폐는 실물 경제와 연동되어 있지 않고 섣부른 기대까지 더해 있어서 매우 불안정합니다. 그에 견주면 불환 지폐는 그 역사가 길고 가치도 비교적 안정적이죠. 둘은 근본적으로 달라요. 

 

p136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유가 경제의 전부이고, 시장 실패는 경제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듯합니다.

 

 시장이 잘 기능하면 경제학은 필요가 없습니다. 경제학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시장 실패를 연구하는 데 씁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시장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시장은 사람들의 기호를 정확하게 측정해주는 도구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훌륭한 도구라는 말은 아닙니다.

 경제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익입니다. 시장은 공익에 이바지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가치를 지닙니다. 따라서 공익에 해가 되는 시장에는 규제가 이뤄져야 맞습니다.

 자유방임주의와 자유주의는 같은 생각이 아닙니다. 제가 그리는 자유주의에선 자유에 책임이 수반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를 책임져야 해요.

 예를 들어 자유주의를 지지한다고 해서, 환경 보호도 개인의 자유에 전적으로 맡겨야 할까요? 오히려 경제학자들은 그런 자유방임주의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자유주의에서는 오염 제공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이 탄소세를 지지하는 거죠.

 문제는 시장 실패를 교정하려는 정부의 시도가 방해를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은 금융 시장에서 규제를 철폐하고 상품 시장에서 보호주의와 고립주의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요, 이것은 잘못된 정치 개입의 전형입니다.

 사실 미국 대통령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단기적으로밖에 생각을 못 합니다. 트럼프의 경우, 길어 봐야 2년 정도 내다볼 걸요? 그들은 장기적인 시야로 정책을 보는 데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다음 선거에 당선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5. 탈진실의 시대에 가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___ 마르쿠스 가브리엘 144

 

p152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우리가 이런 기업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매일 인터넷을 통해 메일을 주고받거나 뉴스를 읽거나 검색을 하거나 쇼핑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데, 이 모든 행위는 부가 가치를 가진 데이터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노동'에 가깝습니다. 덕분에 수십억 달러의 돈이 캘리포니아의 계좌로 들어가게 됩니다. 

 소셜 미디어는 카지노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인터넷에 글을 쓰거나 사진을 올리고 '좋아요'를 클릭함으로써 '도박'에 참여합니다. 열심히 자기 팔로워를 모으고 게시물의 클릭 수나 조회 수를 올려서 '잭팟'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지요. 실제로 페이스북 인플루언서, 인스타그램 스타, 유명 유튜버는 큰돈을 법니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은 도박 참가자가 아니라 도박판의 운영 관리자입니다. 카지노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카지노 주인인 것과 똑같은 이치죠. 게다가 소셜 미디어는 전 세계 어느 카지노보다도 불공평한 카지노입니다. 어떤 더러운 카지노보다 GAFA가 훨씬 더럽습니다.

 

p155

 진정한 저널리즘이란 쉬이 보이지 않는 진실을 백일하에 밝혀내는 것인데 지금은 비판적이지 않은 저널리즘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터넷 사회가 낳은 저널리즘의 위기입니다. 트럼프나 시진핑 같은 사람들이 언론에 비판적이어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저널리즘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저널리즘의 힘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려는 자세가 실종된 민주주의는 이미 민주주의로서 기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인터넷에서 뉴스를 읽거나 메일을 보내는 '노동'이 배후에 숨어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저널리즘을 위기에 빠뜨리는 원동력으로 이용되며,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면 좋아합니다. 이러한 구조가 현대 사회를 위태롭게 하고 있어요.

 

 가짜 뉴스가 만연하여 탈진실 post truth 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사실과 진실을 알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야말로 탈진실을 만들어내는 원인입니다. 물론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전략적으로 진실을 숨기려고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설령 그러한 상황에 있더라도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 짓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오늘날 정치는 탈진실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원래 민주주의 시스템은 '재화나 특권 등의 분배가 실현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 실현 방안을 논의로 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이렇게 작동하지 않죠. 따라서 가치의 분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항의하거나 봉기할 수 있는데,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의사 결정을 '숨길' 스토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탈진실입니다. 객관적인 사실보다 주관적인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본질을 흐리는 일종의 속임수죠.

 이것은 다른 의미로 '완벽한' 속임수이기도 합니다. 거짓은 진실을 전제로 하므로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속임수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되거든요. 덕분에 정치인들은 마음껏 거짓말을 하고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합니다.

 

p162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어요?

 

 지금 미국에는 두 종류의 이데올로기밖에 없어요. 바로 자연주의와 종교인데요. 트럼프는 그 둘을 완벽하게 구현한 사람이에요. 먼저, 그는 기독교 원리주의자(근본주의자)입니다. 또 진화론을 부정하고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창조론자입니다.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기독교는 유물론적 자연관과 이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세계의 '탈주술화Entzauberung'라는 명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유일신 종교에서는 오직 신만이 불가사의한 힘을 지녔다고 가르칩니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으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신이 만든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난다고요. 고전적인 자연주의는 '신'과 '세계' 사이에 큰 질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고, 현대의 자연주의는 '신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지만, 둘은 근본적으로 같은 선상에 있는 이데올로기입니다. 다시 말해 전자는 신을, 후자는 세계 자체를 자연주의에 입각해 고찰하고자 했습니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말은 완전히 틀린 주장입니다. 이러한 입장 위에서 세계를 이해할 수 없어요. 미국 문화는 이렇게 틀린 자연관을 바탕으로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원인은 분명합니다. 미국의 청교도 문화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원주민은 완전히 다른 자연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어머니로, 모든 동식물을 형제로 봤어요. 하지만 그들의 의미 있고 아름다운 자연관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공허하고 어두운 유물론적 자연관만이 남았죠. 예를 들면 그랜드캐니언이 그 모델입니다.

 미국인에게 현실이란 그랜드캐니언 같은, 이른바 '의미 없는 거대한 구멍'과 같습니다. 자연주의적 자연관이 허무주의nihilism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미국인의 행동 패턴은 이러한 '의미 없는 구멍'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미국 문화는 일반적인 이미지보다 훨씬 종교색이 강하고, 그 정치 형태도 기독교 원리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미국이나 이슬람 원리주의 아래 있는 이란이나 비슷해요.

 

 

 경제와 관련해 자연주의와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으려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러려면 학문상 발견, 즉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학문과 기술은 이어져 있는 셈인데요. 학문상의 공적에 의해 새로운 기계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경제를 위해 쓰입니다.

 경제 활동의 존속과 제조 합리화를 목적으로 지식이 연구되는 셈인데요, 이때 가격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다른 형태의 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가격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앎이란, 우리들의 실재 체험입니다.

 

p165

 예를 들어 텔레비전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과 고전 소설을 읽는 것은 모두 만족감을 줍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보는 즉시 만족감을 주는 상품입니다. 그에 비해 고전 소설은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하지만 그만큼 자유와 우연을 향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곧바로 얻는 만족감과는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만족감을 선사하죠.

 자연주의가 사회에 위험한 이유는 그 세계관이 자유나 우연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자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연은 양자론에서 말하는 소립자 수준에서나 존재합니다. 자연주의는 우리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사고 방식입니다.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체험을 자연주의는 고찰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 체험을 자연과학적으로 탐구하려면, 그림을 보고 감동하거나 친구와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중에 우리 뇌에 전극을 꽂고 뇌파나 영상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간의 경험이란 그렇게 시각화해서 측정한 것 이상입니다.

 예를 들어 세 살 난 딸이 "숫자 3이 뭐야?" 하고 묻는다면 저는 손가락 세 개를 펴서 보여줄 겁니다. 그럼 딸은 "아, 그렇구나. 하나, 둘, 셋. 이게 3이구나"라고 대답할 거에요. 하지만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제 손가락 세 개는 '3'이 아닙니다. 세포, 소립자, 에너지 같은 이야기로 흘러가죠. 그러나 '세 개의 손가락'이 제게 의미하는 내용, 예를 들어 세 살 난 딸에게 나이를 가르쳐주었을 때의 추억 등은 현상을 구성 요소로 쪼개서 분석하는 방법으로 탐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어떠한 현상을 자연과학적으로 탐구한다는 건 잘게 분해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실험이란 어떤 측면에선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대형 하드론 충돌형 가속기LHC 안에서는 항상 물체가 기본 입자 수준으로 잘게 파괴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분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상황'이라는 큰틀 안에서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p167

 자연주의가 경제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 현대에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철학의 관점에서 말하면 우선 개념에 신경 쓰라고 조언하고 싶군요. 특히 자연주의에서 '사실을 가리려고 사용하는 단어'들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은 철학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가 '뭔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단어는 사실 키워드이지 개념이 아닙니다. 참고로 개념과 키워드는 달라요. 개념은 진실에 가깝고, 키워드는 무기 같은 겁니다. 정치 토론을 보면 이런 키워드들이 상대를 공격하거나 비방하는 데 쓰입니다. 하지만 토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평화를 만들어내느 거게요. 따라서 개념을 잘 이해해서 진실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게 첫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철학은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현실을 바꿉니다. 특히 우리는 같은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파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현실을 인식하다간 세간에 떠도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고 말 거에요.

 표면적인 이데올로기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변증법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어떤 '예측'에 대해 우선은 반대 방향에서 살펴보세요.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다른 측면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것'의 숨겨진 일면을 탐색해야 합니다.

 트럼프를 예로 들어볼까요? 이 내용을 설명하는 데 트럼프만큼 완벽한 소재는 없거든요.

 글로벌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존재가 백악관에 앉아 있습니다. 덕분에 미국 경제는 잘 굴러가고 있지요. 트럼프는 세계적인 스타입니다. 전 세계 미디어가 앞다퉈 연일 트럼프에 관한 뉴스들을 송출하는 가운데 우리는 트럼프라는 인물을 충분히 아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뉴스 대부분이 정말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정보들입니다. 트럼프는 제대로 일을 하고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데, 매일 귀에 들리는 뉴스는 '트럼프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골프 삼매경에 햄버거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흥미로운 사실은 대통령 자신이 이런 얼토당토않는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미국에서는 아무도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사물의 본질과 표면은 같지 않습니다. 표면에서는 '놀고먹는 트럼프'가 우리에게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백악관이 의도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심으려고 한다는 걸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가 바로 변증법입니다. 그러므로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p171

 오늘날 우리는 인간적인 삶이 완전히 파괴될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100년 넘게 위험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어요. 현재의 소비문화를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기란 불가능합니다. 커피와 빨대, 자동차와 휴대전화 등을 100억 명이 모두 원한다면 지구가 남아나겠습니까? 현 사회 모델이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p180

 뒤르켐은 '각자가 자신의 성격에 맞는 역할을 가지고 진정한 용역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분업'이라고 말하다.

 

p182

 그러나 이에 대해서 재미있는 '다른 의견'이 있다.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지주'이자 '시장 경제의 최대 옹호자' 하이에크가 애덤 스미스의 인간관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다음을 보자.

 

 애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말한 개인주의에 대해 현재 퍼지고 있는 오해를 가장 잘 나타내는 예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애덤 스미스는 '경제인'이라는 요정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결론은 엄밀히 합리적인 행동이라는 그들의 가정 혹은 일반적으로 잘못된 합리주의적 심리학으로 인해 그 가치를 해치고 있다. 물론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종류는 가정하지 않았다. 그의 견해에서는 인간은 원래 태만하고 게으르고 경솔하며 낭비를 좋아하는 존재로, 인간으로 하여금 목적과 수단을 합치시키고 경제적으로 혹은 주의 깊게 행동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환경의 힘뿐이라고 말하는 편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것조차 그가 가지고 있던 매우 복잡하고 현실적인 인간관에 대해서는 적절하지 않다.

 (중략) 스미스의 주된 관심은 인간이 최선의 상태에 있을 때 우연히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최악의 상태일 때 해를 끼칠 기회를 되도록 적게 하는 것에 있었다. 스미스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 옹호한 개인주의의 주요 장점은 그 체제 아래서는 악인이 최소의 해밖에 끼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 체제를 운용할 선인을 우리가 발견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그 기능이 좌우되는 사회 체제가 아니며, 또 모든 인간이 현재 그 이상으로 선량한 사람일 때 비로소 기능하는 사회체제도 아니다. 그렇지 않고 그것도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다양하고 복잡한, 때로는 선량하고 때로는 악인인, 또 때로는 총명하면서도 더 자주 어리석은 모습을 그대로 활용하는 사회 체제다. 스미스가 목표로 하는 것은 동시대 프랑스 사람들이 바란 것처럼 '선인과 현인'에게만 자유를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인정할 수 있는 체제였다.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개인주의와 경제질서」 -

 

p185

 뒤르켐은 120년도 더 전에 위기감을 표명한 대상은 산업사회뿐만 아니라 산업사회가 만드는 그림자, 즉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는 기계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생산라인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사고의 양식마저 심어주는 것을 경고했다. 그는 이런 부정적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본래의 도덕적인, 유기적 연대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이 책은 우치다 타츠루가 한국에서 2014년부터 매년 1차씩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 8개의 강연의 내용을 묶어서 출간한 것이다. 교육관련 단체인 에듀니티가 주관을 하고 주로 초중고 교사를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기 때문에 교육과 관련된 우치타 타츠루의 견해를 중심으로 그 내용이 이루어져 있다.

각 강연이 유튜브로 올라와 있어서 같이 참고하면 좋다.

 

주로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해 저자는 일본의 부정적 상황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반면교사적 내용 위주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교육에 대한 의견 자체도 있지만, 일본의 현재의 사회나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다. 

 

 

(강연 Link)

2014 첫 번째 이야기.

1.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

 

2. 교육은 실패라는 말을 허용하지 않는다

 

2015. 두 번째 이야기

 

3.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

 

4. 우치다식 공생의 필살기

 

2016/2017 세 번째 이야기

 

5. 교사단의 관점에서 교육 낯설게 보기

 

2018. 네 번째 이야기

6. 미래교육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2019. 다섯 번째 이야기

7. 교육과 계급 : 이 · 생 · 망 동지들에게

 

 

8. 어른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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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첫 번째 이야기.

1.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

p23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아이들의 성숙 문제가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것이 세계적인 문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지금 성숙 모델을 잃어버린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남성의 경우가 더욱 심각한데, 남자의 성숙에 참고할 만한 롤모델을 거의 상실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으로 변화한 것은 가정 내 아버지의 역할입니다.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가정에서 아버지의 지위가 극도록 낮아졌습니다. 할리우드의 유명 제작이자 뛰어난 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최근 20년간 딸에게 미움받는 역할을 연기한 것으로도 느껴지는 사실이지요. 바깥에서는 슈퍼 히어로인 남성들이 가정 안에서는 충분한 존경도 애정도 못 받는 것은 이미 세계적인 경향인 듯합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점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p29

 아이러니하게도 부권제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미성숙하거나 인간성에 대한 이해다고 낮을수록 아이가 잘 성장했습니다. 정말 잘 만들어진 시스템이죠. 아버지가 미성숙하고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일수록 아이들은 성장할 기회를 얻었던 겁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한이 사라짐과 동시에 아이들은 망설일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p31

 아이들은 갈등 속에서 성장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서로 다른 성숙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다양한 어른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 전혀 다른 육아 전략을 지닌 어른들과 마주해야 합니다.

 

p33

 성숙의 반대말은 미숙이 아닌 트라우마입니다. 동일한 경험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는 것, 아무리 새로운 일을 경험해도 과거의 기억이 변하지 않는 것이 트라우마입니다.

 성장이라는 말에 여러분 중 대다수는 앞을 향해 나아간다는 이미지를 갖고 계실 것 같은데요, 사실 그렇지 ㅇ낳습니다. 성장을 뒤를 돌아보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의 의미가 변하는 것. 풍경이 변하고, 자신이 경험한 일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 그것이 성장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뒤를 보고 걸어갈 수 있을까요? 바로 등으로 느끼는 겁니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콜링Calling 또는 보케이션vocation이라고 하는데 두 단어 모두 '소명'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소명은 그렇게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기를 부르는 곳을 향해서 걸어가는 걸 말합니다. 성숭하는 아이란 여러 어른이 해주는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들어야 할 목소리를 가려내 그 방향으로 걸어가는 아이입니다. 목소리가 하나밖에 들리지 않는 경우, 어른이 한 명뿐이거나 다른 어른들이 모두 침묵하는 상황은 결코 아이를 성장시키지 못합니다.

 

2. 교육은 실패라는 말을 허용하지 않는다.

 

p40.  교육은 사회공통자본이다.

 세상에는 종사자들의 멘탈리티가 변하지 않는 직업이 몇 가지 있습니다. 사법과 의료는 정권의 변화나 경제 상황의 변화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사법적 판단이 바뀌면 안 됩니다. 경기가 좋아지거나 나빠짐에 따라 의료 내용이 달라지면 곤란합니다. 교육과 종교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집단이 살아남기 위해서 꼭 있어야 하는 것을 사회공통자본이라고 하지요. 첫 번째 사회공통자본은 자연환경입니다. 공기나 대지, 바다와 강, 숲 등입니다. 이게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정치 권력이나 기업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누구도 사유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는 사회 인프라입니다. 교통망, 상하수도, 통신망 등이 여기 해당합니다. 전기나 가스 같은 라이프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또한 없어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이런 것들은 정치나 경제에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직접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어선 안 됩니다. 사회공통자본은 전문가가 전문적인 지식에 기초해서 관리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앞서 이야기한 사법, 의료와 교육입니다. 당연히 사회공통자본인 교육은 전문적인 사람에게 맡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전문가란 교사입니다.

 학교교육은 정치나 경제, 미디어 등과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학교교육의 시간은 굉장히 느리게 흐릅니다. 정치가 한 사람의 신념이나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오사카 시장에게 교육에 관여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사회공통자본의 특징은 실패라는 말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육정책을 실행해보고 몇 년뒤에서야 틀렸다는 말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틀렸으니 이번엔 다른 교육정책을 실시해보자는 태도는 허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은 실패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공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특정 제품에 대해서라면 '제작법이 잘못되었다. 불량품이다'하고 폐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2015. 두 번째 이야기

2.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

 

p72

 구체저긴 미군 기지 축소 프로그램이나 동아시아 공동체 계획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생각 자체가 금기입니다. 미국에서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일본인 스스로 한 일입니다. 만약 미국에서 대놓고 실각을 요구하면 내정간섭이 되지만 일본의 경우는 내정간섭조차 필요없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기분이 나빠지겠다 싶은 말을 총리대신이 꺼내면 온 일본의 관료들이 들고 일어나 발목을 잡으니까요. 하토야마 씨의 발목을 잡은 건 외무성과 방위성입니다. 미국은 공문서를 금방 공개해주는데, 당시 미일공동위원회의 자료를 보면 외무성의 한 관료가 "조만간 하토야마 총리가 미군기지 축소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르니 절대 응하지 말아달라"라고, 일본 외무성의 관료가 미군에게 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국 언론에서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하토야마 씨를 끌어내릴 때 일본 언론의 공격은 굉장했습니다.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치라는 일본 3대 신문사를 비롯해서 수많은 언론이 사설을 통해 '하토야마는 머리가 이상하다'는 식의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저는 당시 하토야마 총리의 실각 과정을 보면서 일본이 상당히 이상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속국으로서 주권의 회복, 국토의 회복을 바라서 그랬다고 하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일본인은 주권이나 국토 회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일본인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지시하지 않아도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발 멋고 나서는 모습이 일본 전체에 만연해 있습니다.

 

p75

 안전보장 관련법은 미국을 위해 전쟁하겠다는 법률입니다. 자위대원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시리아나 수단에 가서 전쟁하면 일본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미국의 국익은 올라갑니다. 자국 청년들 대신 일본 병사가 죽어주고 군비 부담도 해주니, 미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일본이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본의 이익이 되지 않는데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건데, 아베 정권의 경우 미국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인상을 주어 장기 집권을 약속받았죠. 이건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계속 시행해온 전략입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힘쓴다면 어떤 정권이라도 지지해줍니다. 필리핀의 마르코스Ferdinand Emmanuel Edralin Marcos(임기:1965~1986),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Haji Mohammad Soeharto(임기:1967~1998), 베트남의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임기 : 1955~1963)처럼 명백하게 비민주적인 정권들은 미국은 계속 지지해왔습니다. 그들의 통치 형태는 민주제도 아니었고, 미국의 건국이념과 공유할 만한 가치관도 전혀 없었습니다. 아베 역시 이번 안전보장 관련법의 채택으로 마르코스나 수하르토, 응오딘지엠과 똑같은 정치가가 된 것입니다. 자국민을 배신하고 자국의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정치가 말입니다. 일본에서는 지금 국민의 40퍼센트가 그런 정치가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일본인에게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인식이 생겼기 때문일 겁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 일본의 국제적 위상보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국민이나 미래 세대보다도 현재 자신의 사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거죠.

 

p77

 TPP라는 게 있습니다.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고 있는데 그게 실현되면 일본 농업은 괴멸할 겁니다. 일본의 농산물 가격이 국제 시장의 평균 가격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협정이 체결되면 일본 사람들은 일본 농산물을 사지 않고 외국산 농수산물을 구매할 것입니다. 저는 좀더 비관적으로 생각합니다만, 낙관적으로 봐도 일본 농업의 40퍼센트가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언론이나 정치가, 재계인은 외국의 값싼 농수산물이 들어오면 소비자들이 이익을 얻을 거라고 떠들어댑니다. 단기적인 면에서는 그럴지 몰라도 장기적인 리스크는 어떻게 회피할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멕시코는 캐나다, 미국과 FTA협약을 맺고 자유무역 체제가 되어 관세가 철폐되었습니다. 멕시코의 주식은 옥수수입니다. 그런데 미국산 옥수수가 멕시코산보다 훨씬 쌉니다. 당연히 멕시코의 소비자들은 미국산 옥수수를 선택했습니다. 계속 싼 물건이 들어오니 소비자들은 이익을 봤지만 대신 멕시코의 옥수수 농가는 괴멸했습니다. 얼마 후, 바이오매스 연료의 재료로 옥수수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옥수수 가격이 폭등했고, 멕시코 사람들은 옥수수를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국내에서 더 이상 옥수수를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식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죠. 이게 2008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똑같은 일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농수산물은 상품으로 보이지만 실은 상품이 아닙니다. 그것 없이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원에서 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식량'입니다. 만약 이대로 일본의 농업이 괴멸하더라도 당장은 자동차 산업 등 다른 산업으로 번 돈으로 쌀이든 밀가루든 사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사먹을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전쟁이 일어나질도 모릅니다. 전염병이 퍼질 수도 있고, 테러가 있을 수도 있고요. 어쩌면 일본 경제력이 완전히 떨어져서 농수산물 수입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른 공업제품이라면 수입을 못하더라도 불편한 정도로 끝납니다. 전자제품이나 자동차가 들어오지 못하더라도 불편한 걸로 끝입니다. 하지만 국내 농산물 생산이 중단되 상태에서 해외로부터의 유입이 끊어진다면 사람들은 굶게 됩니다. 식량을 두고 싸움이 벌어집니다.

 TPP 논의에서 가장 화나는 부분이, 먹을거리를 상품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식량은 상품이 아닙니다. 식량이라는 것은 공급히 윤택할 때는 상품으로 보이지만, 공급량이 일정 이하로 떨어지는 순간 상품이 아니게 됩니다. 어느 정도 경제가 잘 돌아갈 때는 상품으로 보이지만 경제활동이 침체되는 순간 살기 위해 서로 빼앗게 되는 것이 식량입니다. 그런 것들을 상품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국제가보다 높은 비용이 들더라도 자급자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식량입니다. 농수산업 같은 1차 산업은 국미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국제 가격보다 싸다 비싸다가 문제가 아닙니다. 식량의 자급자족은 생존을 위한 보증입니다.

 식문화는 기본적으로 기아, 배고픔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나라마다 다양한 식문화가 있지만, 어느 나라든 식문화의 기본은 기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식문화의 역사는 먹지 못하는 것을 먹을거리로 만들기 위한 궁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걸 어떻게 먹나 싶은 것들을 다양한 궁리를 통해 먹을 수 있게 만들어온 과정입니다. 삶거나, 굽거나, 말리거나, 찌거나, 다지거나.... , 여러 방법을 동원해 먹을 수 있게 만든 것이 인류학적인 식문화의 역사입니다. 또한 인류는 집단마다 다른 것을 주식으로 삼아왔지요. 저쪽 집단이 고구마를 먹으면 이쪽이 바나나를 먹고, 이쪽이 밀을 먹으면 조쪽은 쌀을 먹는 식이죠. 기상 조건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의 대상에 모든 욕망이 집중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모든 인류가 밀을 주식으로 하는 상황에서 밀이 흉작이면 밀을 빼앗기 위한 살육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나 고구마가 바나나, 콩 등을 주식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것으로 대체해 굶주림을 피할 수 있습니다.

 식료품을 상품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 식문화의 다양성이 파괴됩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것을 먹으면 식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생산 비용이 낮아집니다. 식문화의 획일화 또한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현상인 겁니다.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세계가 평평해진다고들 하는데, 평평해지는건 경제만이 아닙니다. 식생활도 평평해집니다. 일본이 TPP에 가입하면 일본 농수산업은 괴멸 상태에 빠질 텐데 그에 대한 위기감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식료품 유입이 끊어졌을 때, 기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리스크를 피할 지 논의하자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앞서 평화보케, 70년의 평화에 젖어버린 현재 일본의 정치가나 관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만, 이 경우도 똑같습니다. 우리들이 우선적으로 지성을 활용해야 할 부분은 아무 일도 없을 때 어떻게 이익을 높이느냐가 아닙니다. 카타스트로프적인, 파국적인 상황이 찾아왔을 때 살아남을 방법입니다.

 

 

4. 우치다식 공생의 필살기.

p120 

 어른이라는 것은 결국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럴 수도 있지'하며 상대의 말에 이해와 공감을 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애주의자여서라거나 다른 사람에게 뭔가 줄 것이 있어서 타인을 받아들이는 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공생하는 것,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공생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게 굉장한 노력을 요한다는 생각, 예외적인 소수만이 획득할 수 있다는 식의 발상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p122

 여러 먼에서 자신과 다른 집단이나 개인과 조우했을 때 다투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가 바로 공생의 매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집단과 집단이 만났을 때 싸움이 일어나고, 개인의 경우 배제당하게 됩니다. 가치관이나 언어, 종교 등이 전혀 다른 상대와도 공생할 수 있는 능력, 이런 능력은 어렸을 적부터 반드시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대 사회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만, 공생의 매러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나라에서 아이들의 자기다움, 오리지널리티 등에 이상할 정도로 높은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공생의 매너를 배울 기회를 잃고, 어른들은 그걸 가르쳐야 한다는 문제의식조차 없다는 것이 이 시대에 일어나는 커다란 불행들의 원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병들어갈 때 나타나는 특유의 정신 상태가 있습니다. 무언가에 집착하고, 프라이드를 내세우고, 내가 가져야 할 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보입니다. 사회 전체가 정신병자를 만들고 있는 건데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집착이죠.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감입니다. 지금의 사회는 옷, 음식, 수집품 등에 대한 집착을 상당히 높게 평가합니다. 아마 사회적 요구 때문에 이렇게 된거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무언가에 집착할수록 소비활동이 활발해지기 때문이겠죠.

 

p126

 사람들이 자신의 자아, '나다움'을 어떻게 설계할지 정할 때,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처럼 어린아이들부터 중학생, 고등학생까지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제일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역시 '자기 내면에 다양한 것이 혼재해도 괜찮다'라는 생각일 겁니다. 어느 아이에게도 품위 있는 면과 비루한 면모가 있고, 용감한 면과 비열한 면이 있으며, 향상심 있는 부분과 방종한 부분이 있고, 선량한 면과 사악한 면이 있습니다. 인간이 원래 그런 거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개성이란 것이 항상 수미일관적으로, 똑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려줘야 합니다.

 자아의 깊이라거나 넓이, 풍부함이야말로 개성이라는 것을 먼저 가르치는 것. 나는 이런 스타일의 옷밖에 입지 않는다거나 이런 음악밖에 듣지 않는다는 사람은 스스로를 개성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대량 생산된 상품을 그저 소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자신의 내면에 풍부한 개성의 단편을 지닌 아이들이야말로 이윽고 성숙한 시민이 되어 다양한 문화권으로부터 찾아오는, 다른 사회에서 방문하는 타자들에게 관대할 수 있는 기본적인 힘을 갖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2016 / 2017 세 번째 이야기.

5. 교사단의 관점에서 교육 낯설게 보기

 

p169

 작년 10월, 미국의 외교전문지 <Foreign Affairs>에 '일본 대학교육의 실패'라는 장문의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지난 25년간 일본에서 시행된 교육행정의 실패 증거가 제시돼 있었습니다. 교육행정을 담당하는 일본 관료들의 특징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얼른 잊고 다음으로, 그것마저 실패하면 또다음으로 넘어가며 실패한 이유의 검증 작업은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동아시아 최고 수준이었던 일본의 고등교육은 중국, 타이완, 한국에 모두 뒤쳐져 선진국 최하위로 전락했습니다.

 각 나라의 연구력, 학술적 발신력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표는 인구당 논문 수입니다. 이전 일본의 인구당 논문 수는 동아시아 최고였습니다. 그런데 2015년의 통계로는 OECD 37위, 선진국 최하위로 떨어졌습니다. 또 자주 비교되는 지표가 GDP 중 교육투자 비율, 교육계의 공적 지출 비용입니다. 여기서도 일본은 연속해서 선진국 최하위에 머물고 있습니다. 5년 연속 최하위입니다. 작년에 한 등수 올라서 최하위가 헝가리였는데 이번에 다시 일본이 최하위가 됐습니다. 나라가 고등교육에 투자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Foreign Affairs>의 기사에서는 이런 수치를 나열하며 일본의 학교교육, 고등교육이 이 정도로 추락한 이유로 여러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로 꼽은 것이 비평적 사고Critical Thinking의 결여였습니다. 비평적 사고란 세상을 비평적으로 보고 생각하며 주어진 명령이나 지시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대학은 '예스맨'만 키워낸다는 거죠. 두 번째가 이노베이션, 혁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혁신이란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부분에 흥미를 갖는 지적 태도가 혁신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일본의 대학은 창의적 고안도 전통적인 기술들을 깨부술 힘도 없이 하나의 분야에서 경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거죠. 세 번째는 아이러니하게도 글로벌 마인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글로벌 마인드란 것은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해서 공동으로 작업하고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Foregin Affairs>는 일본의 학교교육이 이 세 가지가 결여된 채 정치 안정성, 사회 안정성을 위해서만 기능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윗사람 말에 무조건 따르고 비판적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며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굳어지는, 그런 인간들을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본 고등교육기관의 학술적 발신력, 연구력이 선진국 최하위까지 떨어졌다는 거죠. 정말 단기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1990년대의 대학설치기준 대강화에 의해 대학들에게 자유선택권이 주어지기는 했지만 등급을 매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모든 대학이 서로 모방하고, 비슷한 연구에, 교육내용을 체택해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반복한 결과 일어난 일입니다.

 

p173

 저는 대학 교단에서 일본 대학의 학술적 생산력이 굉장히 높았던 시절과 완전히 사라진 시대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양쪽을 본 사람으로서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등급 매기기에 몰두하는 일은 집단이 가진 힘을 저하시키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등급 매기기는 객관성과 정밀도를 요구합니다. 반면에 다양성은 부정됩니다. 모든 경쟁 상대가 똑같은 조건으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죠. 결과적으로 비평적인 사고도, 혁신적인 발상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능력도 사라지게 됩니다. 

 

p174

 교육 이외의 분야나 다른 나라, 특히 한국에서 뚜렷하게 나타날 거라 생각하는 현상이 있는데요, 젊은 사람들 쪽에서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요구하는 겁니다. 

 일본에서는 지방에 사는 젊은 사람들이 도쿄로 몰려듭니다. 한국의 경우는 서울이겠죠. 도쿄는 공기도 안 좋고 물가도 높으며 고용환경조차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젊은 사람들은 도쿄로 몰려듭니다. 모두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 상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평가의 정밀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시골 마을에서는 '너는 센스가 탁월하다'라는 소리를 들어도 납득하지 못합니다. 뮤지션이나 배우,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수많은 사람이 격렬한 경쟁을 반복하는 환경에 스스로 뛰어듭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이 아닌 모두가 하는 일이 젊은이를 끌어들이는 겁니다. 보통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물으면 '모처럼 태어난 인생이니 나만이 할 수 있는 하고 싶다'라고 할 법도 한데,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젊은이는 드뭅니다. 다들 남들이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경쟁 상대가 많은 곳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정밀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신기하게도 등급이 낮아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높은 평가'가 아니라 '정확한 평가'인 겁니다. 본인이 동세대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어떤 사회적 지위를 요구할 수 있을지, 얼마의 수입을 기대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수준의 배우자를 얻을 수 있는지 최대한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하죠.

 지금의 일본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답게 행동해라'라는 사회적 압력이 존재합니다. 사실 부모가 가난하고 말고는 아이의 개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어느 싱글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아이가 학교에서 주변으로부터 받는 압력 때문에 늘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아이 본인의 개성은 그게 아닌데 말이죠. 가난한 집 아이는 가난뱅이답게 어두운 표정을 지으라는 사회적 압력이 굉장히 강한 겁니다. 빈곤층이 쾌활한 성격이나 오픈 마인드를 갖는 것을 주변에서 용납하지 않는 것이지요. 이처럼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요구하고, 자신의 지위에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를 빨리 알고 싶어 합니다.

 저는 일본이 가난한 시기에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을 수없이 봐왔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각자 개성이 있었고, 집이 가난하니까 음울하다거나 위축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1950년대의 아이들, 청년들 중에는 자신의 정확한 사회적 위치라든지 요구할 수 있는 지위, 가져도 될 야심, 기대할 수 있는 수입에 대해 빨리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금의 일본은 그때보다 훨씬 윤택합니다. 그런데도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 추구할 수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해 훨씬 좁은 가능성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나라가 쇠퇴하고 경제력이 약해진다고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21세기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인구가 감소하거나 경제 성장이 멈춰 정체되는 상황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은 예상했습니다만, 실제로 일어난 사회 변화는 제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분배하기 위해 객관적이고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 모두 똑같은 일을 하는 사회가 출현한 겁니다.

 결국 일본의 문제는 인구 감소라든지 경제 성장의 침체와 같은 역사적 과정 속에서 어떻게 국력을 다시 높일지를 고미하는 방향이 아닌 등급 매기기와 차별, 균일화의 길로 달렸다는 점에 있습니다. 지금의 일본은 인구 감소 문제에서든 성장의 정체에 있어서든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했으니 말이죠. 당연히 경제 성장도 더이상은 없습니다. 몇 년 후면 한국이나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공평하게 분배하느냐를 놓고 '정밀한 등급 매기기를 하자'는 주장이 반드시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식별 지표로 영어 회화 능력에 의한 차별화를 채택할 것입니다.

 영어 회화 능력을 중시하는 것은 그게 유용한 능력이라서가 아니라 간단히 차별화할 수 있는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등급 매기기라는 것은 하나의 병폐입니다. 등급 매기기에 몰두하다 보면 사회의 활력이 점점 떨어집니다. 안 그래도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가 정체되는 상황에서 한층 국력을 저하시키는 그런 해결책을 택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일본의 실패 사례를 통해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저출산화, 고령화, 경제 침체..... 그런 상황 속에서 호흡하기 편한 사회를 유지하고 유쾌하고 살고자 한다면 가능한 다양한 삶의 방식을 허용해야 합니다. 경쟁해서는 안 됩니다.

 

2019 다섯 번째 이야기

 

교육과 계급 : 이 · 생 · 망 동지들에게

 

p243

 현재 한일관계가 지극히 악화된 원인의 99퍼센트는 일본 측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만연한 혐한 감정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은 한마디로 질투심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버블 경제 이후 30년에 걸쳐 계속 국력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경쟁력이 정점에 달했던 1988년에는 일본의 1인당 GDP가 세계 2위였는데 30년이 지난 2018년에는 세계 26위였습니다. 2위에서 26위까지 일직선으로 급강하한 거죠. 그 외에도 대부분의 주요 경제 지표가 일본의 국력 저하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교육에 대한 투자, GDP 대비 공교육 지출입니다. 이 항목에서 일본은 거의 20년간 OECD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술적 발신력의 지표로 자주 거론되는 인구당 논문 수 또한 한국, 대만, 중국, 싱가폴에 뒤쳐졌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 문화적 발신력이나 미래 사회에 대한 리더십이 뚝 떨어진 겁니다. 한마디로 미래 비전력이 완전히 쇠퇴했습니다.

 

p245

 1980년대 말의 일본인들은 돈으로 주권을 되사고 속국 신분에서 벗너알 수 있지 않을까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은 그런 꿈을 품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일본 측에서 괌이나 티니안 등 태평양에 있는 섬에 비행장을 비롯한 제반 시설을 마련해줄 테니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철수시켜달라고 요구할 만큼 경제력이 실제로 있었으니까요. 1980년대 일본인만큼 돈의 전능성을 맹신했던 집단도 드물 겁니다. 일본인이 탐욕적이라든지 수전노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돈의 힘으로 국가주권을 되산다는 역사상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품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주권이나 국토를 전쟁이나 수완 좋은 외교적 교섭으로 회복한 사례는 있어도 돈으로 구입했다는 사례는 역사상 한 번도 없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고도 경제 성장 이후 일본인들이 경제 동물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돈벌이에 필사적이었던 것은 풍족한 삶보다는 주권 회복을 바랐기 때문일 겁니다. 일본은 '일본국 헌법 제9조 2항'에 의해 전쟁을 포기한 상태였으며, 외교적인 힘도 없었습니다만, 돈만큼은 있었습니다. 그러니 돈으로 주권을 회복한단느,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 되어 자국의 역량을 행사한다는 선택지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에 대해 전 국민의 암묵적 합의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버블 경제는 1992년에 붕괴해버렸고, 급격한 경제 성장도 거기서 멈춰버렸습니다. 그 후로도 일본은 2010년까지 20년 가까이 GDP 세계 2위를 유지했습니다만, 우리는 이 시기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부릅니다. 중국에게 GDP에서 뒤쳐진 것이 2010년의 일입니다. 겉으로는 십수년에 걸쳐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일본은 표류 중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던 거죠. 일본인들이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30년에 걸쳐 유지해온 '어쨋든 부자가 되자', '우선 부자가 돼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자'라는 암묵적 비전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던 중 일본에 고이즈미 준이치로라는 총리대신이 등장했습니다. 그의 인기는 굉장했습니다. 내각 수립 직후의 지지율이 90퍼센트를 넘었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과연 그에게 무엇을 기대한 걸까요?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제시한 것은 정치 대국이 되어서 미국과 대등한 관계even partner를 맺자는 전략이었습니다. 돈의 힘으로 국가주권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니, 이번에는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를 높임으로써 세계적인 대국이 되자고 생각한 거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본에게 국제 사회를 향해 발신할 만한 메시지가 없었습니다.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 이상적인 국제 사회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지, 일본은 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결국 고이즈미 내각이 세계적인 정치 대국이 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미국의 모든 정책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 조지 W. 부시라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무능한 권력자였다는 점은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행운이었습니다. 부시 지지율은 30퍼센트도 안 됐고, 그가 제시하는 정책에 대한 국제 사회의 평가 또한 지극히 낮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를 지지한 사람이 바로 고이즈미 준이치로였죠. 부시에게 있어서 고이즈미는 미국의 모든 정책을 지지해주는 극히 예외적이고 고마운, 보기 드문 파트너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의 파트너인 일본이 정치 대국으로 우뚝 서서 국제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2005년, 일본은 미국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에 입후보했습니다. 이들 상임이사국은 중국, 프랑스, 러시아, 영국, 미국의 5개국인데, 이를 확대하여 독일, 일본, 브라질을 추가시키자는 제안이 나왔고 일본이 여기에 응한 겁니다. 이 안은 결국 기각되었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일본이 상임이사국 취임을 지지하는 국가가 아시아에 거의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한국도 중국도 일본을 지지하지 않았지요. 당시 많은 나라가 일본의 상임이사국 취임에 반대한 이유는 일본이 상임이사국이 되어봤자 미국 표가 하나 늘어날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정책을 모두 수용함으로써 어떻게든 상임이사국이 되어보려 했지만, 국제 사회는 미국과 똑같은 말밖에 하지 않는 나라가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세계 각국이 모델로 삼고자 하는 리더십이란 나름의 꿈이나 이상을 갖고 이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나라에서 나온 리더십일 겁니다. 강대국에 붙어서 아부하는 나라에서 그런 리더십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죠.

 이 2005년의 참패,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입 실패라는 사건은 일본인에게 있어 또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 된다는 꿈과 굴지의 정치 대국이 되어 많은 나라에게 리더로 존경받는다는 꿈, 두 개의 꿈이 동시에 사라진 겁니다.

 그 후 15년 가까이 지났지만, 일본의 경제력이 회복될 기미도 국제적 위신을 확립하고 일본 고유의 리더십을 인정받을 만한 메시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돈도 없고,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습니다. 이것이 지난 15년간 일본의 국력이 급격하게 저하된 원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p258

 미국이라는 나라는 기본적으로 동맹국에게 미눚제를 강요하지 않으며, 미국의 뜻에 따르기만 하면 통치 형태가 독재든 아니든, 얼마나 부패했든 일절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베트남의 괴뢰 정권이나 필리핀, 인도네시아, 칠레, 일본, 한국 등의 사례를 봐도 명백합니다. 민주적인 정치 체제는 동맹국의 조건이 아니며, 미국의 말만 잘 들으면 국내 통치를 어떤 형태로 하든 관여하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그 나라의 이익에 반하는 요구도 무리해가며 추진할 수 있는 강권적인 독재 체제를 선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보면 지금 일본에서 이상할 정도로 만연한 혐한 감정, 특히 정부가 솔선해서 부추기고 있는 혐한 운동이 단순히 정서적인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방향성을 정하기 위한 국가 전략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언론이 '한국은 민주화에 실패했다'거나 '경제가 붕괴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의 지지를 잃고 있다', '한국인들이 이분화되고 있다'는 등의 혐한 언설을 필사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민주화와 시장 경제의 조합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ㅡㄴ 메시지를 일본 국민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p274

 주식회사라는 형태는 유한책임 체제입니다. 도산하면 끝이고, 경영자는 그 이상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도산이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도자의 실수로 국부를, 국토를, 주권을 잃고 국가가 붕괴한 다음에 '죄송하다'는 말로 끝낼 수는 없으니까요. 주식회사는 경영 방침이 잘못되더라도 도산하면 끝이지만 국가 정책이 잘못되었을 경우 나라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국민 모두가 수십, 수백 년에 걸쳐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국가는 무한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주식회사를 모델로 지자체나 학교, 국가 등의 제도를 설계해서는 안 됩니다.

 

 

어른을 찾습니다.

 

 

p292

 포퓰리즘의 근본은 현재 사회가 겪고 있는 불행이 단일한 원인으로 인한 것이라는 발상입니다. 이 단일한 원인, 제악의 근원을 제거하면 다시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되찾을 거라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단순주의simplism나 음모사관(음모사론, Conspiracy Theory)이라고도 합니다.

 근대 음모사관은 프랑스혁명 직후에 태어났습니다. 프랑스혁명으로 특권을 빼앗긴 왕족이나 귀족들은 영국으로 도망쳤고, 이들은 매일 밤 런던의 클럽에 모여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영원할 것 같던 부르봉 왕조가 어떻게 하룻밤 만에 몰락했을까?'라는 주제로 논의를 계속했습니다. 그들에게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요인으로 인해 수많은 '재도적 피로'가 쌓이다가 동시에 터짐으로써 복수의 요소가 상호 작용하여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식의 해석은 불가능했습니다. 혁명이란 상황만 놓고 보면 단순한 하나의 정치적 사건에 불과하지만, 거기에 관여하는 요소는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들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온갖 분야에서 동시에 이변이 일어났고, 그 징후를 경찰도 군대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이런 사실로부터 그들이 추론해낸 것은 정치, 경제, 언론, 학술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며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하룻밤 만에 체제를 뒤집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비밀결사'가 존재한다는 가설이었습니다. 부르봉 왕조을 무너뜨린 비밀결사가 존재한다는 하나의 스토리가 탄생한 겁니다. 그 뒤로는 비밀결사의 정체가 무엇일까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성당기사단(템플나이츠) 그리고 유대인 등이 흑막으로 지목됐습니다.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존재라는 조건만 맞으면 뭐든 상관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프랑스혁명 후 결과적으로 가장 많은 이익을 얻은 것은 유대인이었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대인은 차례차례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 템플나이츠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유대인은 실제로 나타나서 경제, 재계, 언론으로 진출하며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프랑스혁명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이 프랑스에 살던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를 근거로 18,19세기의 이론가들은 프랑스혁명으로 이익을 본 것이 유대인이니 프랑스혁명을 계획한 것도 유대인이라는 식의 추론을 했습니다. 어떤 정치적 변화로 혜택을 본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들이 변화를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주장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지만, 당시 사회 이론가들은 이 지극히 단순한 이론을 채택했습니다. 이것이 음모사관의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인들의 이런 망상이 훗날 홀로코스트까지 이어져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의 학살로 귀결된 셈이니, '망상에 불과하다'라며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런 음모사관을 비판하기 어려운 이유는 언뜻 무작위하게 보이는 모든 사상의 배후에 하나의 단일 의지가 존재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일신교의 사고 구조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반유대주의는 기본적으로 일신교 문화권에만 존재합니다. 이슬람교라든지 힌두교, 유교 등 다양한 문화권이 있습니다만, 폭력적이라고 해야 마땅할 반유대주의가 존재하는 것은 대표적인 일신교 기독교 문화권뿐입니다. 랜덤으로 보이는 사상의 배후에 단일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특히 일신교적 사고관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 지극히 당연한 발상입니다. 사실 정치적인 사건이든 경제적 변화든 문화적 사건이든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은 요소의 상호 작용으로 일어나고, 단일한 작자author가 모든 것을 컨트롤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렇게 믿음으로써 '단일한 작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지적인 부하가 상당히 줄어듭니다. 따라서 현재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만연하며 단순한 발상을 취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단일한 작자나 사악한 의지를 가진 흑막이 모든 악행을 일으킨다는 음모론이 횡행하는 이유는 원인이 너무 복잡해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지성이 있기 때문에, 변수가 늘어나면 그에 맞추어 자신의 방정식을 다원화하게 됩니다. 다차원방정식으로 다양한 변수를 풀어낼 수 있도록 진화하는 겁니다. 그러나 변수의 종류가 한계를 넘어서면 수중에 있는 방정식으로는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방벙식을 복잡화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지적 부하를 덜어내기 위해 단일의 작자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본인도 믿지 않는 주장을 펼치며 가장 단순한 일차방정식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일본과 한국을 포함해서 현재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만연하며 굉장히 단순한, 예를 들어 일본이라면 '전부 한국 탓이다', 유럽의 경우 '이슬람 난민이 만악의 근원이다', 영국은 'EU가 원인이다', 미국에서는 '멕시코 난민 탓이다'라는 식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해답에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밎지 않으면서도 지지를 보내며 모여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유아화되면서 어른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엄밀하게 보자면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복잡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변화가 완만하게 일어나며 변수가 차근차근 늘어난다면 인간도 거기에 맞추어 스스로를 복잡화시키고 지성을 고도화함으로써 문제에 대처할 수 있지만, 변수의 증가가 일정 수준을 넘어 가속하기 시작하면 개인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됩니다.

 

p298

  현재 일본의 인구는 약 1억 2700만 명인데, 81년 후인 2100년에는 5000만으로 감소할 것이라 예상되고 있습니다. 81년 만에 7700만 명, 해마다 약 90만 명이 줄어드는 거죠. 동시에 고령화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인구 5000만 명 중 4할은 노년층일 것입니다. 그게 어떤 사회일지 예측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한국도 곧 일본을 뒤따라서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시작될 것입니다. 중국은 현재 인구가 약 14억에 달합니다만, 앞으로 수년 내에 15억을 정점으로 급격한 인구 감소가 시작되어 2050년 정도에는 7억 명으로까지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중국은 인구와 함께 경제력이 늘어나며 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지위도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만, 얼마 뒤면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내수 시장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대처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아직 아무 계획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p302

 어느 경제학자의 정의에 따르면, 윤택한 사회란 필요한 것이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장소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사회입니다. 굳이 경제가 성장하지 않더라도, 인구가 늘어나지 않더라도 필요한 것을 적절한 시기에 적합한 장소에서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곳은 윤택한 사회이고, 그런 사회를 어떻게 설계하고 유지할지를 고민하면 됩니다.

 

 

p306

 대안적 사실 altenative facts 이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참여한 청중이 오바마 대통령 때보다 적다는 여론이 일자 백악관에서 이를 부정하며 많은 청중이 참여했다는 증거로 가짜 사진과 수치를 근거로 제시했다가 발각된 사건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왜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했을까 묻는 기자의 질문에 보도관이 "거짓말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을 제시한 것"이라고 대답해서 조롱거리가 됐죠. 이런 대답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당신에게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주관적인 관점에 불과하다. 물론 내가 보는 것도 주관적인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나는 나의 세계를 각자의 방식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 대해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일본계 미국인 사회학자 미치코 가쿠타니의 <진실의 끝>인데요, 현재 미국이 언론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한 이 책에서 그는 1970년대에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이야기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온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가 각자의 성별이나 국적, 종교, 이데올로기 등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실제로 인간의 모든 인식은 계급이나 성별, 종교, 인종에 따라 치우칠 수밖에 없지요. 여기서 객관적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계급이나 성별, 이데올로기나 종교에 의한 편견으로 인해 특히나 더 비틀린 세계상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왜곡된 세계를 보고 있으니 전부 평등하다는 겁니다. 누구나 '그건 네 주관이야. 나한테 그렇게 안 보여'라고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게 포스트모더니즘이 탄생시킨 무시무시한 사고방식인데,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긴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퍼지면서 타인의 의견을 개인의 주관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비판으로서 성립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인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서 주관적인 의견에 대해 틀렸다고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발상에 기초한 '진실은 없다'는 원리주의에 저항할 방법이라고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알겠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는 식의 반응뿐입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듣다 보니 닭살이 돋았다든지, 속이 쓰리다는 비판밖에 할 수 없는 거죠.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진실이 사라진 상황에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곳은 그런 지극히 신체적인 반응뿐입니다.

 마가 복음을 베이스로, 예수 1인칭 관점을 가정하여 쓴 예수의 공생애 일대기.

당연히 저자인 김용옥 선생이 바라보는 예수에 대한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 

도올 선생의 과거 기독교 저작들과 영상 강의를 들어본 이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들이 있다.

예수에게서 신화적 부분을 싸악 걷어내고 인간적인 관점과 심리에서 접근했다고 보면 이해가 된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신의 자식으로 죽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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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

 20세기의 서구의 가장 위대한 성서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는 루돌프 불트만은 이와같이 말했습니다: "바울의 담론을 통해서도, 어떠한 복음서의 기술을 통해서도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에 관한 진실은 알려질 길이 없다. 그 모든 담론이 이미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적 담론이며, 초대교회는 종말론적인 회중이다. 이미 신화 속에 갇힌 사람들이다." 세상사람들이 불트만을 진보적 신학자로서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철저히 성서의 신화적 기술을 비신화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2천 년 전의 신화적 세계관을 오늘 과학적 세계관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합리주의정신을 표방했기 때문입니다.

 

p44

 내가 세례 요한을 만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 몇 가지를 얘기해둘 것이 있습니다. 나는 갈릴리 나자렛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의 어머니 마리아는 매우 평범한 여인이며, 결코 성모聖母라고 컬트화 될 수 있는 그런 여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중동 지역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까만 보자기를 쓴 보통의 여인,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의 그리스도됨을 원한다면 그 신령성을 나의 삶 속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가족을 장식물로 삼아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짓입니다. 마리아는 아람어로 마리암Mariam인데 그것을 희랍어로 적으면 마리아Mαρια가 됩니다.

 나의 엄마 마리아는 나의 아버지 요셉과 결혼하여 아들을 다섯 명, 딸을 셋 낳았습니다. 나는 8남매 중 둘째입니다. 그러니까 맏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녀잉태 같은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문명의 로컬 컬트와 결합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하나의 문화전통이니까 부정 · 긍정의 논란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나 예수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진지하게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런 유치한 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p66

 마가는 세례 요한의 사상과 나의 사상의 다른 점을 단적으로 "물의 세례"와 "성령(프뉴마 πνεμα)의 세례"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1:8). 마태는 "성령의 세례"라는 말 대신에 "성령과 불(퓌르 πνρ)의 세례"라는 말을 썼습니다(마 3:11). 누가도 "성령과 불의 세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눅 3:16).

 "프뉴마"라는 것은 본시 "숨"을 의미합니다. 동양언어에도 "기氣"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는 신령한 그 무엇이면서도 우주 전체에 깔려있는 물질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는 결국 숨breath입니다. 숨은 콧구멍을 들락거리는 공기, 바람이기도 하죠. 숨은 곧 생명의 근원, 증거이기도 합니다. 내가 쓰는 헬라문명권 언어의 이 프뉴마는 동양의 기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것은 숨이며, 바람이며, 호흡이며, 생명이며, 신적 영감 divine inspiration이며, 신의 영이며 사람의 영입니다. 물의 세례는 매우 구체적인 물질적 접촉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세례를 의미하지만, 영의 세례, 즉 기의 세례는 생명의 토탈한 뒤바뀜, 전 인격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불"은 물질을 대변한 말이 아니라, 프뉴마의 신생新生의 뜨거움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물의 세례보다는 불의 세례 한 차원 높은 어떤 영적 트랜스포메이션spiritual transformation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나의 사상과 세례 요한의 사상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균열이 생기면 결국 이별하게 됩니다. 이별하게 된다는 것은 나 예수가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아주 쉽게 말하자면 나는 세례 요한 밑에서 공부하면서 세례 요한보다 더 상위권의 비젼을 획득하고 그와는 다른 길을 개척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 시점이 아주 오묘했습니다. 내가 세례 요한과 결별하게 되는 시점 그 즈음에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마캐루스성채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운동은 통치자 안티파스를 위협할 정도의 사회적 셰력을 형성하였고, 그것은 그의 전성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례 요한의 터무니없는 몰락을 목격하면서, 나의 영적 세례운동은 정치적 세력을 형성해서는 아니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p125

 그런데 마가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예수는 천국의 비밀을 사람들이 함부로 쉽게 알아차릴 수 없도록 비유로 말하였다."(4:11). 마가는 훌륭한 작가이지만, 이 말만은 매우 그릇된 생각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 호반에 앉아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누구든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9장. 비유는 상식적 민중의 담론이다.

 

 우선 비유가 무엇일까요? 비유는 헬라말로 "파라볼레παραβολη"라고 하는 것인데, "파라"는 "나란히", "함께"라는 뜻이고, "볼레"는 "던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 말을 하고 있는데 또 하나의 말이 동시에 나란히 던져지고 있다는 뜻이지요. 여태까지 나는 파라볼레의 어법을 계속 활용해왔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어찌 사탄이 사탄을 궤멸시킬 수 있겠는가," "잔치집에 온 신랑친구들이 어찌 신랑과 함께 있는 단식을 할 수 있으랴!"는 등등, 한 가지 말의 이면에 또 하나의 말이 있었다는 얘기지요.

 "씨 뿌리는 자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면에 "천국의 비밀"이 같이 얘기되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비유담론은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복합적으로 많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죠.

 비유는 민중의 언어입니다. 조선말에 "속담"이라는 말이 있지요. "속담"이란 "세속의 이야기"라는 뜻이죠. 즉 "민중의 이야기 방식"이라는 뜻이죠. 속담은 짧은 경구警句라 할지라도 파라볼레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속담의 특징은 적재적소에  쓰이면 누구든지 쉽게 알아듣는다는 것이죠. 그것은 "카이로스(타이밍)의 예술"이지요.

 

p230

 먼저 성전에 오는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것은 정결한 코셔기준the kosher requirements에 맞는 동물을 희생으로 써야 합니다. 그런데 희생 동물은 순례자가 아무리 깨끗이 길러서 가지고 와도 코셔검사를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성전회랑에서 파는 동물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패구조 때문이죠.

 사실 성실한 본인이 잘 키운 것이 제일 깨끗할 텐데 그러면 성전에는 우수리가 안 떨어집니다. 성전회랑에는 파는 동물은 자기가 기른 것이나 시중에서 파는 것의 보통 몇 배를 호가합니다. 터무니없이 비싸지만 그 가격을 안 낼 수가 없습니다. 제사를 지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못 지내면 야훼의 축복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일년 동안 집안운수가 꽝이 된다고 생각하니 안 낼 수도 없죠. 10원에 해결될 것을 100원에 내야만 하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성전입니다. 90원을 착복한 상인의 이문의 대부분은 다시 제사장들, 사두개인, 서기관, 그리고 궁극적으로 산헤드린의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환전상이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서 쓰는 돈은 세속적인 로마화폐를 쓸 수가 없습니다. 모든 튀리안화폐the Tyrian currency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 튀리안화폐가 있어야 성전세를 낼 수 있고 또 성전에서 행하는 여러가지 활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환전하는 데도 상식적인 환율의 몇 배가 되는 환율이 적용되는 것이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헤롯성전이 AD 66년에 완성되었을 때, 그해 유월절에만 자그마치 25만 5천 6백 마리의 양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예수살렘성전의 제식규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환전과 희생동물매매의 수익은 천문학적 숫자에 달합니다. 나는 이 부패의 연결고리를 방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갈릴리 민중의 고초의 근본원인이 이러한 종교조직과 율법과 그릇된 신관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종교혁명, 정치혁명, 사회혁명의 한 고리라도 내 힘으로 달성해야겠다는 신념, 그 신념을 고취시키는 하나님의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는 누구도 이 나의 갈망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맥없이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민중의 마음에 확고한 씨를 뿌리지 않으면 내가 말하는 천국은 도래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첩격이 갈릴리 촌구석에서 행하는 이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성전을 뒤엎는 사회적 행위, 상식적 행위, 사람들의 마음을 경이롭게 만드는 의로운 거사에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었습니다. 힐링이 기적이 아니라 힐링을 가능케 하는 민중의 마음이 기적이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 믿음의 궁극적 행태는 율법의 전승 그 자체를 단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종교적 하이어라키를 전복시켜야 평등한 세상이 오고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나는 갈리리 촌놈에 불과합니다. 나는 서른댓 살의 청년에 불과합니다. 나를 마술사로 그리고, 나를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노인처럼 그리는데 정말 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만을 세상은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피 끓는 청년이고, 근원적인 사회변화를 꾀하는 운동가입니다.

 나는 그 거대한 헤롯성전에 들어서자마자 닥치는 대로 사고 팔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며 환전상들의 탁자를 다 엎어버리고, 비둘기장수들, 희생양을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었습니다(11:15). 그리고 제사기구들을 나르느라고 성전뜰을 왔다갔다 하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이것은 성전제사 자체를 금지시키는 반유대교적 행동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갈릴리 촌놈입니다. 아무리 메시아 운운한다 할지라도 로마병정의 칼자루에 간단히 목이 날아갈  그런 연약한 존재입니다. 어떻게 갈릴리 촌놈인, 서른댓 살의, 아무 조직배경도 없는 청년이 이 무시무시한 대성전에서 이러한 난동을 부릴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런 행위가 용인될 수 있었고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채찍까지 휘둘렀습니다. 폭력적인 힘까지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크게 소리쳤습니다.

 

 "성서에 하나님께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조용한 집이 되어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a den of robbers로 만들었구나!"

 

 나는 이 거대한 예루살렘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규정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나의 언행이 용납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이 예루살렘성전이 로마군대가 직접 관장하는 곳이었다고 한다면 나는 초반에 바로 살해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는 다신론적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지역의 총교생활에 관해 매우 관용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헤롯왕가를 통한 간접통치방식을 취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반자치구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제기한 반종교적 행위는 로마권력자들의 입장에서는 강 건너 불이었습니다.자기들이 직접 다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유대교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행위는 반역이었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언행을 듣고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모의하였다."

 

 그런데 왜 목 죽였을까요? 여기에 복음서가 기록하지 않은 중요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종교적 당국은 내가 민중의 마음을 얻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민중이 예수의 가르침에 감탄하였다"(11:18)

 

 다시 말해서 나의 성전전복행위는 나 홀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민중이 마음으로 성원했고 나와 같이 행동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환전상들의 탁자를 뒤엎어 동전이 여기저기 흩어질 때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통쾌했겠습니까? 마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석양이 뉘엿뉘엿할 때야 예수와 제자들은 성밖으로 나갔다."

 

다시 말해서 나의 전복행위는 하루종일 계속된 것입니다. 그 35에이커 면적을 커버하는 회랑을 뒤엎는 작업은 하루종일 진행된 민중항쟁의 대사건이었습니다. 나느 성공했습니다. 나는 이제 진정한 패션Passion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새로운 약속의 임재를 위하여 구약을 말소시키는 깨끗한 청소를 단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예루살렘 이틀째의 하룻일이었습니다. 나는 이날 밤도 베다니에서 잤습니다.

 

 

 

 

 

 애널리스트이인 홍춘욱의 프랑스 탐방기. 당시 중학생인 아들과 프랑스 여행을 하면서 아들의 질문 내용을 모티브로 쓴 책이다. 손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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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6

 마지막으로 유럽과 동양의 운면을 가른 요인은 '농업'이었습니다. 중세까지는 동아시아나 유럽이나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농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두 지역에서 재배되는 작물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유럽은 밀리 주로 재배된 반면 아시아는 벼가 일반적이었죠. 벼는 밀에 비해 훨씬 수확량이 많습니다. 따라서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시아의 벼는 몇 십년간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2모작이나 3모작이 가능하지만 유럽에서는 같은 땅에서 연이어 농사를 짓지 못합니다. 밀은 지력 고갈이 심한 작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재배 작물의 생산성에 큰 차이가 발생하다 보니 유럽과 중국의 인구 격차가 끝없이 벌어집니다. 19세기 초반 영국의 인구는 1천 2백만 명 남짓했지만 청나라 인구는 4억을 돌파합니다. 토지가 아무리 넓다 하나 인구가 워낙 많으니 1인당 소득이 낮아집니다. 당연히 저축의 여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죠.

 물론 사회 전체의 소득은 증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인건비가 싸니 사람을 투입함으로써 생산을 계속 늘려나갈 수 있거든요. 특히 유럽 사람들은 은을 들고 비단과 차, 면직물을 사러오니 가계 소득은 늘어납니다.

 중국이 아주 적은 생산량 증가를 위해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는 동안 영국에서는 전혀 다른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원래 인구가 적고 1인당 소득도 높으니 저축 수준도 높습니다. 왜냐하면 사람 몸값이 비싸니까 대신 기계를 써서 고용을 절약하는 게 남는 장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로버트 앨런 교수는 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려면, 영국의 발명가들이 많은 시간과 돈을 필요로 하는 기계를 만드는 데 몰두했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증기기관을 비롯한 값비싼 기계는 노동을 절약할 수 있었죠. 워낙 영국의 인건비가 비쌌기에 기계는 충분히 값을 했습니다. 반면 베이징에서는 이익이 나지 않습니다.

 중국은 인건비가 싸고 사람도 넘치니까 웬만한 일은 그냥 사람을 쓰는 방향으로 갑니다. 반대로 영국은 사람도 적고 인건비도 비싼 편이니 인건비를 절약하는 종류의 기계를 사용하는 데 거침이 없죠. 특히 영국은 발명 특허권이 잘 발달되어 있어 발명가가 큰돈을 벌 수 있었다는 것도 한몫했습니다.

 

 김정운. 직업은 뭐라고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원래 대학교수였는데 지금은 그저 김정운 이라는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지식인이라고 해야 할까? 

 

 제목처럼 창조란 편집이다라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람 시각은 독특한 면이 있다.  난 이 분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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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창조적 사고는 이 같은 일상의 당연한 경험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를 가리켜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시클롭스키Shklovsky는 '낯설게 하기ostranenie' 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가장 창조적 작업인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반복과 익숙함을 낯설게 해 새로운 느낌을 느끼게 만드는 데 있다는 거다.

 우리 삶이 힘든 이유는 똑같은 일이 매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아, 남의 돈 따먹기 정말 힘들다!' 며 출근하고 끝없이 참고 인내해야 하는 삶에는 그 어떤 탈출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적이고 싶다면 무엇보다 이 따분하고 지긋지긋한 삶을 낯설게 해야 한다. 우리 삶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다.

 

p22

 19세기 말 인상파로부터 20세기 초반의 피카소, 칸딘스키 등의 추상회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천 년간의 회화 표현 방식이었던 재현의 해체가 시작된다. 더 이상은 외부 대상을 모방하지 않겠다는 구상회화의 포기는 '창조적 작업으로서의 예술'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p24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정보가 공유되고 지식이 구성되는 세상의 변화에 대해 애플의 스티븐 잡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민주주의에는 자유롭고 건강한 언론이 중요하다. ... 뉴스를 모으고 편집하는 조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나는 미국이 블로거들의 세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편집자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2010년 《월스트리트저널》 주최로 열린 제8회 'All Things Digital' 컨퍼런스에서 한 이야기다. 에디터, 즉 편집자에게로 권력이 이동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거다. 스티브 잡스가 옳다. 더 이상 정보 자체가 권력이 아닌 세상이다. 정보 독점은 이제 불가능하다. 세상의 권력은 정보를 엮어내는 편집자들의 몫이다.

▶ 요즘은 미디어의 발달로 수퍼 콘텐츠 크리에이터(인플루언서를 뛰어넘는 이들, 유발 하라리, 먹방 스타인 쯔양 등)가 직접 SNS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독자들과 소통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도 수퍼 편집자라 볼 수 있다

신문사의 젊은 기자들은 한결같이 데스크에 앉아 자신들이 작성한 기사에 연필로 밑줄 그어가며 맞춤법까지 문제 삼는 선배들을 욕한다. 편집의 권력을 일방적으로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이 신문 데스크의 그 막강한 권력도 이제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젊고 어설픈 편집자에게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포털 사이트의 헤드라인에 올라가는 기사를 선택하는 권력은 전국 종이 신문 데스크 권력을 다 합친 것보다 강하다.

 

p28

 한국 사회의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다들 그의 논문이 참인지 거짓인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국가적 자존심의 훼손만 걱정했다. 그러나 황우석 사건의 본질은 따로 있었다. 지식권력이 이제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식권력인 대학의 붕괴는 이미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그 징조들이 황우석 사건을 통해 폭발한 것이다. 여태까지의 지식은 대학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지식은 대학이 정한 절차에 따라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교수는 지식을 심사하고, 그 결과에 권위를 부여하는 지식권력 시스템의 최정점이었다.

 이 같은 국가 공인의 지식권력이 보장하고, 세계적 지식권력에 의해 검증된 국가적 자부심인 황우석의 논문이 정체불명의 하찮은(?) 네티즌들에 의해 처절하게 붕괴된 것이다. 지식 편집의 독점권을 가진 대학의 붕괴가 황우석 사건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도 논하지 않는다.

▶ 황우석 사건이 대중에게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은 물론 PD수첩에서 방송되고 난 이후다. 하지만 PD수첩에서 방송이 되어 전에 이미 BRIC(Biological Research Information Center), 즉 생물학연구 정보센터라는 생물학 전문가들이 이용하는 인터넷 포럼에서 황우석의 줄기세포 논문이 위조여부가 이슈가 되어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우석의 논문이 정체불명의 하찮은 네티즌들이라고 하기에는 과장이 크다. 이 포럼에는 한국의 생명공학, 생물학, 생화학 등의 최고 전문가들이 여전히 활동중이다.

 

p41

 자기 텍스트를 써야 제대로 학문을 하는 거다. 오늘날 인문학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한국의 콘텍스트에 맞는 텍스트 구성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텍스트로 서양의 학문을 하니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거다.

 텍스트는 반드시 해당 콘텍스트에서 생성된다. 하버마스의 비판이론도 프랑크푸르트학파, 실증주의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라는 20세기 유럽 지성사의 콘텍스트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하버마스가 한국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다. 하버마스를 전공한 국내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러나 정작 하버마스는 뜬금없는 이야기만 하다 갔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된다. "한국에도 위대한 정신 · 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 콘텍스트에 근거한 이론이 구성되어야 한다."

 

p57. 검증 가능성 - 반증 가능성 - 편집 가능성

 과학과 비과학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검증 가능성verifiablility' 을 주장한다.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이론만이 과학적 지식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포퍼Karl R. Popper는 인간의 경험은 시공간적으로 한계가 있기에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는 없다며 논리실증주의의 검증 가능성을 비판한다.

 

 포퍼는 과학적 지식과 비과학적 지식의 기준으로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 을 내세운다. '백조는 희다' 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백조를 검증할 수는 없지만, 검은 백조 한 마리만 발견되어도 그 가설은 틀린 것이 된다. 모든 지식은 이렇게 반증의 사례가 발견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옳은 것이고, 과학적 지식은 이렇듯 반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포퍼에 따르면 마르크스 이론이나 프로이트 이론은 비과학적이다. 반증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부의 논리 구조는 그럴듯하지만, 이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가능성 자체가 아예 닫혀 있다. 그러나 포퍼의 과학과 비과학을 나누는 반증 가능성에는 시간이라는 요인이 빠져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되고, 변화하는 '구성주의적 세계관' 과는 거리가 먼, 날근 실증주의적 세계관의 변종이다. 주체적 행위의 개입이 불가능한, 인식의 주체와 개체가 철저하게 격리된 세계관일 따름이다.

 21세기에는 지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증명해야 하고, 확인해야 할 '객관적 세계'에 대한 신념 자체가 폐기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옳고 그름보다는 '좋은 지식'과 '좋지 않은 지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좋은 지식의 기준은 '편집 가능성'에 있다. 현재 진행형의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가능케 하는 주체적 행위가 가능한 지식이 좋은 지식이다. 편집 가능성이 있는 지식이 좋은 지식인 것이다.

 

 

p65

 몽타주 기법의 창시자로 불리는 소비에트의 쿨레쇼프Kuleshov는 소위 '쿨레쇼프 효과'라고 불리는 흥미로운 실험으로 몽타주 기법의 심리적 효과를 확인했다. 그는 소비에트의 유명한 배우인 모주힌Mozzhukhin의 무표정한 얼굴이 찍힌 화면에 각기 다른 세 가지 화면을 이어붙였다. 하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 또 하나는 관에 누워 있는 여인, 마지막으로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였다.

 흥미롭게도 관객들은 모주힌의 무표정한 얼굴을, 그 뒤에 이어진 화면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수프가 이어진 장면에서 모주힌이 배고파하며 수프를 먹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느꼈다. 관에 누워 있는 여인이 이어진 장면에서는 모주힌이 여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으로,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가 이어진 장면에서는 아이를 예뻐하는 모습으로 보았다. 동일한 배우의 표정이 어떻게 편집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몽타주 기법의 핵심은 'A장면'과 'B장면'의 합은 'A,B'가 아니라 'C'가 된다는 데 있다. 이는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명제와 동일하다. 각각의 부분이 합쳐지면 부분의 특징은 사라지고, 전체로서의 전혀 다른 형태Gestalt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 같은 몽타주 기법이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완결성의 법칙law of closure'이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폐쇄성의 법칙'으로도 불리는 이 완결성의 법칙은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시켜 완전한 형태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본능적 경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중간중간이 떨어져 있는 원 모양의 띠를 완벽하게 이어져 있는 원으로 인식하는 경우다.

 

p85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의 발견으로 비롯된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통찰이 의사소통의 문제로 연결되는 이유는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joint-attention' 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에서는 객관성이란 단어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으로 대체한다.

 상호주관성의 시대에는 각 주체들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혹은 상호주관적 시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퍼스펙티브를, 각 주체들 간 상호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객관적 관점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자주 있다. 이때는 반드시 어떤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의심해야 한다.

 

p116

 독일의 국경은 수시로 변경되었다. 잦은 전쟁으로 승전과 패전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은 뼈아팠다. 전쟁이 끝난 후 이뤄진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납하는 등 영토의 13퍼센트를 잃었다. 물론 이 땅들 대부분은 이전의 전쟁에서 빼앗아 온 것이었다. 하지만 패전에 이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영토를 잃은 독일인들의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히틀러가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권' 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타났다. 1924년 뮌헨 반란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집필한 『나의 투쟁』에서, 독일 민족은 유럽 전체를 독일의 레벤스라움, 즉 독일의 생활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히틀러는 주장한다. 그가 사용한 레벤스라움이라는 개념은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이 'Lebens생활' 과 'Raum공간' 을 합쳐 만든 조어다. 다윈의 진화론을 국가에도 적용해, 국가도 다른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먹고, 자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레벤스라움이 히틀러의 용어가 되는 데는 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 라는 인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뮌헨 대학의 교수였던 하우스호퍼는 어릴 때부터 부친과 친구였던 라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라첼과 마찬가지로 하우스호퍼도 국경은 생명체의 피부처럼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히틀러에게 전달한 사람은 후에 나치 독일의 2인자가 된 루돌프 헤스Rudolf Hess 였다. 헤스는 뮌헨 대학 재학 당시, 하우스호퍼의 조교였다.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은 나치 독일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하우스호퍼는 독일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며, 두 나라의 제국주의가 닮은 꼴이 되도록 가교 역할을 했다. 하우스호퍼는 실제 일본이 한반도를 집어삼키기 바로 이전 해인 1909년에 일본에서 1년간 살았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어가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략을 지켜보며 자신의 레벤스라움 개념을 가다듬었다.

 독일로 돌아온 하우스호퍼는 일본을 극동아시아 레벤스라움의 지배자로 찬양한다. 가는 곳마다 일본을 레벤스라움 이데올로기의 모범적 사례로 소개했다. 그의 활동에 감동한 일본은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을 일본 제국주의의 이론적 토대로 받아들였다. 그를 흉내 낸 개념도 만들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이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히틀러가 부르짖은 레벤스라움의 변종이라는 이야기다. 이렇듯 히틀러의 레벤스라움은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한반도와도 이토록 깊은 관련이 있다. 그 당시에도 세상은 참으로 좁았다.

 

 하우스호퍼를 통해 레벤스라움을 알게 된 히틀러는 이 개념은 자신의 나치 이데올로기에 바로 적용한다. 베르사유조약으로 영토를 빼앗긴 독일은 인구에 비해 영토가 형편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국민을 먹여 살릴 충분한 영토를 얻기 위해서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에 있는 슬라브인들의 땅을 빼앗아야 한다고 선전한다. 그들은 독일의 아리아 민족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는 것이다. 이때 독일 영토가 지난 수백 년간 어떻게 줄어들었는가를 보여주는 하우스호퍼의 지도는 독일의 레벤스라움이라는 생명체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었다.

 히틀러의 레벤스라움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도 '공간Raum'을 이야기했다. 소설가 한스 그림Hans Grimme이다. 아프리카를 오가며 장사하는 상인이었던 그림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독일에 눌러앉아 작가가 된다. 이때 그가 발표한 소설이 『공간 없는 민족Volk ohne Raum』이다.

 

 1926년에 출판된 그의 소설은 당시 독일의 모든 사회문제는 '공간 부족'때문이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독일이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간 확장밖에는 해결책이 없다고 주장한다. 당시 독일인들에게 이처럼 인과관계가 명확한 설명은 없었다. 한스 그림의 소설을 히틀러가 사랑하고, 수시로 언급한 것은 당연했다.

 공간 상실에 대한 강박으로 시작한 나치 독일은 또 다시 엄청난 공간 상실로 끝이 났다. 전쟁 후, 동쪽 국격이 오데르-나이세Oder-Neisse 라인으로 그어졌다. 동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 고유 영토로 여겨졌던 상당한 크기의 공간을 빼앗긴 것이다. 뿐만 아니다. 남은 독일 영토도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승전국들의 관리를 받게 된다. 독일이 자기 국토를 다시 회복한 것은 채 30년도 되지 않는다.

 

p140

 아동이나 가족, 부부의 개념이 문화적 산물이라면, 보다 보편적인 '개인'과 같은 개념은 어떨까? 이 또한 문화적 구성물일까? 물론이다. 개인 혹은 사회, 문화라는 개념들은 모두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졌다.

 서구의 근대를 가능케 한 'culture' 'society' 'individual'에 조응하는 개념이 과거 동양에는 없었다. 이들 개념의 번역인 '문화' '사회' '개인'과 같은 단어는 일본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이 만들어냈다. 이 개념들을 오늘날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 것은 고작 100여 년에 불과하다.

 

 

 

 한번 생각해보라.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과 사회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것이 도대체 상상이 되는가? 개념이 없다는 것은 개인과 사회에 관한 의식 자체가 없었다는 말이다.

 

p141

 문명화civilization의 어원인 'civil'은 원래 '예절 바른'을 뜻한다. '사회적social'이라는 단어와는 거의 동의어로 쓰였다. 문명화란 말 그대로 품위 있고, 예의 바른 행동으로 발전을 뜻한다는 이야기다. 문명화 과정의 핵심 내용인 '합리화rationalization' 란 본능적 감정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세련된 표현으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노베르트 엘리아스Nobert Elias의 주장이다.

 합리적인 문명사회는 각 개인이 예절 바른 교양인이 되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서구 근대에서 아동 개념의 탄생은 이러한 교양 교육의 맥락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아리에스의 주장이다. 그저 '작은 어른'일 따름이었던 아이들이 별도의 교육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원시적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합리적 성인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합리적인 성인으로 발달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를 '아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p143

 아동과 마찬가지로 청소년 또한 교육을 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아주 다르다. 아동 개념에는 그래도 '사랑스러움'이나 '귀여움'과 같은 긍정적 정서가 동반된다. '사랑과 관심의 공동체'로서의 가족이라는 사회적 표상social representation에는 항상 아동이 부부 사이에 있다. 그러나 청소년은 달랐다.

 청소년은 처음부터 불량한 개념이었다. 청소년의 또 다른 이름 'juvenile'은 거의 청소년 범죄juvenile delinquency'의 축약어로 쓰인다. 스탠리 홀은 이 청소년기를 '질풍노도Strum und Drang'의 시기로 명명하며 그 불안정한 특징을 더 노골화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청소년 개념을 편집할 사회구조적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급격한 산업화 때문이다. 일단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를 위해 훈련된 노동력이 급하게 필요했다. 그러나 기존의 소규모 도제제도와 같은 교육 방식으로는 당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대규모 노동력을 키워낼 수 없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가족 또한 더 이상 교육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가족에서 교육의 기능이 떨어져나갔다. 교육은 모두 학교에 맡겨졌다.

 학교는 자신들이 담당해야 할 교육의 필요성을 정당화해야 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불안하고, 위험하고,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소년의  표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청소년은 매우 불안하고 위험한 존재이기에 반드시 학교에서 교육받아야 한다' 는 이데올로기다.

 한국에서 청소년 개념도 비슷한 경로로 자리 잡았다. 1991년 청소년기본법이 제정된 후 청소년지도사, 청소년상담사와 같은 자격증이 만들어졌다. 아울러 이를 위한 전문 교육기관이 대학에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청소년 지도' '청소년 상담' 과 같은 개념은 '청소년은 반드시 지도와 상담이 필요한 불안한 존재'라는 근대적 표상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어의 청소년 개념 또한 항상 '비행-청소년' 아니면 '청소년-문제'로만 연결되는 것이다. (청소년 개념이 달리 연결되는 것을 보았는가?)

 

 아동과 청소년의 개념은 근대 이후 탄생한 '개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편집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근대적 주체가 그 산업 사회적 존재 양식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객체화'라는 '소외Entfremdung 현상' 을 동반하듯, 근대적 개인은 각 연령에 따라 아동, 청소년과 같은 각 발달단계로 귀속되어 또 다른 형태의 소외된 아이덴티티를 얻게 된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또 다른 연령대의 개인이 새롭게 편집되기 시작했다. '노인'이다. 이제까지의 발달은 성인이 되면 완성되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 생산활동을 하다가 은퇴하면 바로 죽었기 때문이다. 평균수명이 그만큼 짧았다. 더 이상의 발달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은퇴한 이후에도 수십 년을 더 살아야 한다. 평균수명이 100세에 가까워지고 있다. 개인의 발달이 성인 단계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편집의 내적 필연성이 생긴 것이다. 계속 발달하지 않으면 죄다 '성질 고약한 노인네' 가 되기 때문이다.

 성질 고약한 노인데는 비행 청소년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래서 요즘 발달심리학에서는 '전생애발달life-span-development' 를 이야기한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발달해야 한다는 거다. 근대 이후 생겨난 개인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편집의 과정을 겪고 있다.

 

 

p145

 역사적 사건은 물론 인식을 가능케 하는 정신의 도구, 즉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편집되었다는 관점을 갖게 되면 주체적 행위의 가능성과 한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 같은 구성주의 혹은 구조주의적 서술은 실증주의적 역사 서술의 근본 전제를 상대화하는 메타적 방법론이다. 개념들의 '생성'에 관한 엘리아스와 아리에스의 메타적 편집 테크닉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의 지식계보학 혹은 지식고고학에서 절정을 이룬다.

 실제로 푸코는 아리에스가 없었다면 자신의 책을 출판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읽히고 있는 푸코의 대표작 『광기의 역사』 는 당시 대부분의 유명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당했던 원고다. 마침 플롱 출판사에서 출판 기획을 맡고 있던 아리에스가 우연히 그의 원고를 읽고, 반대를 무릎쓰며 출판을 고집한다. 그 결과 푸코의 첫 저작인 『광기와 비이성 :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 가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이다.  

 

p148

 현대 심리학의 '일관된 자아' 에 대한 요구는 자아 구성 과정에 관한 무지에서 나온다. 내 안의 나는 항상 많다. 당연히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괴로워하거나 노여워하는 것은 '오버'다. 일관된 자아에 대한 오버는 '억압'을 낳는다. 자아에 대한억압된 기억은 타인의 내러티브를 왜곡하고 부정한다.

 

p151

 빌 게이츠의 이야기는 백 번 옳다. 훌륭하다. 그리고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도 안 재미있다는 거다. 별로 흥미롭지 않다. 안 들어도 다 아는 이야기 같다. 반면 기부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관해 어떠한 이야기도 한 적 없는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는 뭔가 감동이 있다. 울림이 크다. 듣고 싶어진다.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계몽'이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이 스스로 의미를 편집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일방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재미없는 거다.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내러티브는 진리를 강요할 뿐, 일리一理 의 해석학이 빠져있다. 반면 스티브 잡스의 내러티브는 상호작용적이다. 편집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잡스의 정서적 · 모순적 · 자극적 내러티브는 듣는 이들의 적극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주체적으로 편집해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낼 때만 의미 있다. 남이 만들어주는 의미는 전혀 의미 없다. 진리를 계몽하던 시대는 지났다. 듣는 이로 하여금 '주체적 편집의 기회'를 제공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한국 기업 CEO의 이야기에서 이런 감동을 얻고, '의미 편집'의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거다. 한국 정치인의 연설에서 눈물 흘리며 삶의 가치와 사회변혁의 용기를 스스로 편집해낼 수 있어야 내 나라가 자랑스러워지는 거다.

 

p164

 민족은 근대 이후에야 기능하기 시작한 가공의 이념이다. 그 이전에는 왕의 국가, 신의 국가였을 따름이다. 절대왕권이 사라진 이후, 국가를 지속하게 할 이념으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나타난 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던 1900년대 이후에나 민족 개념이 나타났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저항의 이념으로 우리의 '민족' 개념은 편집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오늘날 세계화의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상상 공동체는 해체되고 있다. 민족 개념 자체가 부정적 개념으로 변하고 있다. 그 화용론적 생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다. 당시 독일인들은 "우리는 한 민족이다! Wir sind ein Volk!" 라고 장벽 앞에서 외쳤다. 그러나 통일되지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동독 사람들은 동독 공산당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우리가 바로 그 인민이다! Wir sind das Volk!" 라고 외쳤었다. 공산당의 주체인 바로 그 '인민Volk' 이라는 주장이다.

 정관사 das에서 부정관사 ein으로 바뀌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인민'이 '독일 민족'으로 바뀐 것이다. 당시 독일 지식인들은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의 한 민족 즉 'ein Volk'는 세계화라는 대세에 부응해 몇 년 후 유럽연합의 유러피언european으로 변신한다.

 유독 우리나라만 여전히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한민족'이다. 남북 분단 때문이다. 그래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는 거다. 한 민족이 헤어져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산가족의 당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헤어진 가족을 만났다고 울며불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제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산가족 찾기'라며 전쟁 때 헤어졌던 가족들이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 온 나라가 감격했던 적이 있다. 우리 집안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전쟁 때 사라졌던 아버지의 가까운 친척이 나타난 거다. 감격한 아버지는 내게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을 소개하며 삼촌, 형, 동생이라 부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 한동안 우리 가족은 너무 괴로웠다. 그 삼촌이라는 이가 도박 중독, 알코올 중독이었다. 매번 아버지를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부리고 협박했다. 그가 객사한 후에야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물론 드문 예일 수 있다. 그러나 헤어졌던 가족이 다시 만난다고 바로 '그리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와 같은 옛날 이야기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또 다른 방식의 '지지고 볶는 삶이 시작될 뿐이다. 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통일 후, 다시 만난 가족이 지속적으로 왕래하며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민족 통일의 기쁨은 아주 추상적이고, 체감하는 현실은 지극히 구체적이다. 독일의 민족 개념이 변증법적 해체의 과정을 걷는 것처럼 민족이라는 낡은 이념도 발전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더 이상 새로운 시대가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는 거다. 이 낡은 '민족' 개념의 해체를 위해서다.

 저출산 문제는 '아기를 많이 낳자'고 홍보하고, 출산 지원금을 손에 쥐어 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적극적인 이민 정책으로만 해결 가능한 문제다. 그러나 한민족의 민족주의가 해체되지 않는 한, 적극적 이민정책이 자리 잡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래저래 통일이 안 되면 대한민국은 참 어려워지게 되어 있다.

 

p166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내면을 연구하는 대신 '자극input'과 '반응output'이라는 눈에 보이고 통제할 수 있는 요인만을 심리학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왓슨J.Watson이나 스키너B.F.Skinner의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통제할 수도 없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요인을 건드리면 어떤 행동이 나오는가만 알면 된다.

 행동주의는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의 그 유명한 '침 흘리는 개'를 획기적으로 변형시킨 이론이다. 먹이를 줄 때마다 종소리를 듣게 하면, 나중에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린다는 그 파블로프의 개는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다. 그저 묶여서 먹이를 받아먹고, 종소리를 들을 따름이다. 침도 가끔 흘리고.

 반면 '스키너 상자'에 갇힌 쥐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벽의 지렛대를 눌러야만 먹이를 얻어먹을 수 있다. 먹이를 먹으려면 반드시 주인이 원하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상과 처벌이라는 '강화reinforcement'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유기체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미국식 이데올로기가 확립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스키너의 이 같은 행동주의를 '조작적 조건화Operant Conditioning' 라고 하여,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화Classical Conditioning'와는 확실하게 구별한다.

 스키너의 행동주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암묵적 토대가 된다. 즉, 성과에 따른 보상과 처벌을 다양한 방식으로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듣보잡' 미국식 경영학이 오늘날 대학의 최고 인기 분야가 된 것도 바로 이 스키너식 행동주의를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경영학의 중요 영역인 인사관리 시스템이란 그 근본을 들여다보면 스키너의 행동주의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행동주의 심리학이 미국에서 꽃피운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증명할 수 없는 가설들로 인간 심리를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확실한 방법론을 찾아내려 했을 따름이다. 인간 행동을 수치화하고, 실험실 조작을 통해 행동을 관찰하고 예측할 수 있는 계량화된 방법론이다.

 

p169

 모든 성과를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하는 미국식 심리학의 전성시대는 오늘날 '피로사회Mudigkeitgesellschaft'라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모순으로 이어진다.

 

p190

 실제로 언어철학에는 객관적 현상이 먼저 존재하고 언어(혹은 개념)는 이 객관적 현상을 '표상representation'할 뿐이라는 실재론적 입장과, 각 언어나 개념에 대응하는 독립적인 실제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던 이론이 양극단에서 대립한다.

 

 특히 소쉬르에서 롤랑 바르트로 이어지는 후기구조주의 언어철학은 '언어 없는 실재는 없다'라는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언어와 대상의 관계는 그 어떠한 내재적 필연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철저하게 사회 · 문좌적인 약속일 뿐이라는 전제로부터 소쉬르의 '기호학semiology'은 출발한다.

 

p192

 대신 한국인들은 '구강기 고착'의 성격인 듯하다. 입이 거칠다는 말이다. 목소리도 크고, 담배도 많이 피운다. 욕도 정말 다양하게 잘한다.

 실제로 한국 욕의 종류를 정리해보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본이나 독일의 욕은 몇 개 안 된다. 미국 사람들도 가만 보면 나름 한다는 욕이 매번 'shit', 'fuck you'가 전부다. 한국처럼 다양하고 화려한 욕설은 세계사의 유례가 없다.

 한국인들에게는 왜 이런 구강기 고착의 퇴행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지난 세월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세월이 거의 없었다. 한 번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 오죽하면 풀뿌리,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살았을까? 당연히 아기들은 엄마의 젖을 충분히 먹을 수 없었다. 입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경험이 박탈된 것이다. 빈곤에 의한 구강기 고착 현상은 지형이 거칠고 풍료롭지 못한 지역의 욕이 훨씬 더 다양하고 화려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요즘 북한 사람들의 욕을 생각해보라.

 

p195

 내 이야기가 가능하려면 사용 가능한 데이터가 풍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자유롭게 연결할 때 얻어지는 메타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부다. 내가 축적한 데이터를 꼭 써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데이터를 축적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 데이터들에 관한 메타언어를 익히게 되면 데이터베이스의 일차적 목적은 달성된 거다. 이를 나는 '커닝 페이퍼 효과'라고 부른다.

 커닝 페이퍼를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그 내용을 다 숙지하게 된다. 정작 커닝 페이퍼를 사용할 필요는 없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다.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며 나름의 개념 체계를 만들다 보면, 어느새 전혀 다른 차원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p196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엄숙한 독서법'을 신앙처럼 교육받아온 이들이 느꼈을, 모독당한 듯한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내 질문이 없고 내 생각이 없으니,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말 재미있는 책은 다 읽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읽게 된다. 그러나 억지로 책을 다 읽다 보면 내 생각은 중간에 다 날아가 버린다. 읽어야 할 자료도 산처럼 쌓여 있다. 어찌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수 있겠는가.

 

 

 

 목차와 찾아보기는 주체적 독서를 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주체적 책 읽기'란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목적이 분명함을 뜻한다. 주체적 책 읽기는 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책을 들춰 목차를 볼 때, 내 눈길을 끄는 내념들이 있다면 그 책을 선택하게 된다. 책 내용을 대충 훑어볼 때, 흥미로운 개념이 나타나면 그 부분을 잠시 읽게 된다. 그리고 저자이력이나 찾아보기, 참고문헌 목록을 보며 책의 구입 여부를 결정한다.

 내게 흥미로운 내용은 내게 이미 익숙한 개념과 책에 나타난 개념의 교차 비교 과정에서 확인된다. 독서는 내가 가진 개념과 저자의 개념이 편집되는 에디톨로지 과정이다. 그래야만 저자의 생각이 내 생각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절대 아니다.

 

 

 아주 조심스러운 조언으로 책을 끝내려 한다. 정말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다. 자신의 생각을 풍요롭게 편집하려면 무엇보다도 언어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오십 넘어 새롭게 일본어를 배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작 영어 자료 하나 소화하는 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이만큼이라도 성취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영어와 함께 독일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읽는 자료의 내용이 남들과 달랐다. 축적된 데이터가 다른 까닭에 생산되는 지식의 내용도 달랐다.

 일본어 자료를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지식 편집의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이 커졌다. 같은 개념이라도 한국어, 일본어, 독일어, 영어의 설명이 다르다. 전문 개념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그렇다. 편집에 사용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려면 영어 이외에 꼭 한 가지 언어를 더 배워야 한다. 두 개 이상의 외국어와 데이터베이스 관리 습관을 갖추면, 뭘 하든 그리 두려울 게 없다. 아, 물론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p202

 뭔가 새로운 것을 손에 쥐려면, 지금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 꽉 쥔 채 새로운 것까지 손에 쥐려니, 맘이 항상 그렇게 불안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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