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밋고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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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6

 "공부 좀 했네."

 우리 부모님은 내가 평균 80점대만 받아와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어쩐지 욕심이 나서 스스로 아쉬운 마음에 학원을 다녀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친구들이 다 방이역에 있는 종합학원에 다닌다기에 "그럼 나도 다녀볼까?" 했더니, 친구들이 "그래, 너 왜 학원 안 다녀? 너 그러다 큰일 나, 대학 가려면 학원 다녀야 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버지께 학원에 등록하고 싶다고 얘기해서 카드를 받아다 혼자 등록했다. 이 학원을 떠올리면 지금 생각해도 손끝이 아려오는 추억이 있다.

 수업 첫날, 문제를 많이 틀렸다. 그때는 체벌이 존재할 때였고(조민 씨가 그리 나이가 많나? 하고 알아봤다. 2010년 11월 서울시 교육청이 모든 형태의 체벌을 금지했다. 아마 다른 시/도도 비슷한 시기일 것이다. 조민 씨는 1991년 생으로 기록에 의하면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중,고등학교를 재학했다. 그러니 체벌이 존재하는 시기에 중,고등학교를 보냈다. 내 생각보다는 체벌이 없어진 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학원의 방침은 틀린 만큼 맞는 것이었다(내가 학교 다닐때도 이런 거지같은 경우가 아주 많았다. 첫시험에 100점을 맞고 다음 시험에 1개 틀려 95점을 맞으면 1대-문제갯수, 혹은 5대-점수대로-를 맞는 경우도 있었다. 참으로 야만의 시절이었다. 물론 나는 100점을 맞아본 적은 별로 없다). 첫날이니 뭐 아는 게 있었겠는가. 엄청나게 틀리고 손을 내밀라기에 내밀었다. 그간 체벌을 당해본 적이 없는데 - 부모님은 한번도 나를 때린 적이 없다. 미국 학교에서도 물론 - 처음으로 학원에서 손을 내밀라기에 '손을 왜 내밀까?' 했더니 회초리로 때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틀린 개수만큼.

 일단 손을 올려 한 대를 맞았다. 너무 아팠다. 두 번째 맞을 때 움찔, 피하면 더 아픈 법이다.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데 피하면서 손가락뼈를 맞았다. 그래도 '때린 선생님 잘못이 아니라 피한 내 잘못'이었던 시절이다. 수업을 듣는데 나아지질 않고 점점 아파서 정형외과에 갔더니 뼈에 금이 갔다는 것이 아닌가. 내가 피하다가 뼈에 제대로 맞은 거였다. 그대로 깁스를 하고 집에 갔다.

 집에 가니 아버지는 기가 막히다며 할 말을 잃으셨다. 그간 매 한 번 들지 않고 나를 키우셨는데 제 발로 카드를 들고 가서 학원비를 긁고 오더니, 손가락뼈에 금이 가서 돌아왔으니 황당하실 만도 하다. 부모님은 바로 학원에 연락해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학원 정책은 존중하지만 내 딸 체벌하는 곳에는 못 보내겠다"고 말하고 남은 수강 일수만큼 환불받았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체벌의 기억이다.

 

p67

 부산대 의전원 입학 취소 결정에 대한 항소를 포기할 지 생각할 때, 고민이 많았다. 주변에서는 내가 포기하면 일단 실질적 이득이 사라지기 때문에 어머니가 세상에 빨리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또, 재판을 받고 있는 아버지에게도 유리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이건 사실 내 인생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이유로, 부모님을 위해 나의 지난 10년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부모님을 1순위에 놓고 내 인생을 생각하기에는 내 삶이 우선 너무 힘들었다. 부모님 또한 부모님 때문에 내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나에게 평생의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기보다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고민했다. '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선택은 무엇인지 고민해보았다.

 내 인생에서 사람들의 평가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시선을 내 인생의 판단기준으로 삼아버리면, 그 순간부터 내 삶은 남의 것이 된다. 외적이 요소에 내 내면이 휘둘리게 둘 수는 없다. 나는 나의 깊은 내면에서 정말 내려놓을 만한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아는 '정치인 자녀'들은 대개 다음의 세 부류에 속했다.

 1. 조용히 숨어 산다.
 2. 아예 정치를 한다(혹은 정치적으로 발언하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3. 변두리에서 사고를 친다.

 이 세 부류는 모두 타자화된 자신이다. 세 경우 모두 끊임없이 평생을 '누구 딸 누구' '누구 아들 누구'라는 이름표를 단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그 이름표로만 남을 뿐이다. 조용히 살면 어떨까? 부모를 빼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조용히 숨어 살아도 정치인의 자녀, 정치를 하면 부모의 후광을 업은 정치인, 사고를 쳐도 사고를 친 정치인 자녀로 정리된다.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셋 중 어느 쪽도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정치인이 될 생각이 없다. 사회적으로 너무 알려져서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이미 늦었고, 아버지의 후광을 이용하거나 정치와 연관된 일을 하고 싶지 않다.

 조민이라는 이름으로 성공하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정치적인 발언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숨어있고 싶지 않으니 세상에 나왔다. 나오되, 비정치적이고 싶었다. 비정치적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이룰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찾아가는 중이다.

 어른들, 특히 정치 쪽에 몸담은 분들은 주변에서 나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

 "너 누구 딸인데 이렇게 행동해야 하지 않겠니?"
 "인스타에 봉사활동 하는 거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미지 좋아지게 어려운 환경에서 땀 흘리는 것 좀 보여줘라."
 "마라톤 대회 나가서 몸 쓰는 거라도 좀 보여줘."

 정치하는 사람들은 땀 흘리는 모습, 봉사하는 모습을 참 좋아한다. 이유가 어떻든 땀 흘리는 이미 그 자체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말이다.

 내가 그분들의 말을 따르면 나는 정치인이자 사회인 '조국'의 딸로서만 이미지가 굳어질 것이다.

 사람들이 나에게 원하는 게 그것일 수도 있다. 아버지 딸로서 아버지를 서포트하고, 착하고 예쁘게 잘 자란 딸로서 행동했으면 하는 사람들의 바람과 기대를 나는 온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정말 감사한 조언들이지만 나는 하나도 듣지 않는다. 나에게는 자신의 개성이 있다. 누구 딸로서의 그런 개체가 아닌, 사람들이 원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 그 자체, 나 자신을 알리게 되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재판에 나갈 때, 브랜드 이름이 알려진 가방을 들고 나갔다. 정가 70만 원 정도 하는 가방이었다. 나는 명품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실제로 그 가방도 내가 가진 것 중 비싼 축에 속하는 가방이었다. 그런데 기어이 그게 문제가 됐다. 정치계 사람들은 말했다.

 "앞으로 그 가방 들지 마라. 사람들이 비싸다고 욕한다"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반대다. 아예 다른 생각이다. 나는 아버지 말도 수긍하기 어렵다면 듣지 않는다.

 "그 가방 가지고 언론 기사에 여럿 나오던데 그거 꼭 들어야겠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 가방을 또 들었다. 우리집 형편이 아주 어렵지 않다는 걸 사람들은 안다. 70만 원 정도 하는 가방을 내가 드는 게 아주 못할 짓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빚을 져서 초고가 명품을 드는 것도 아니고, 내가 돈을 벌어 구매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방을 처음 들었을 때만 떠들썩하지, 같은 가방을 두 번 세번 들면 이슈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그 가방을 들고 다시 문밖을 나선다. 

 

p119

 내가 유일하게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의사로서의 일이다. 어릴 때부터 장래희망으로 꼽았던 일을 법적으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삶에는 언제나 득실이 있게 마련이라던데,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은 의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득이 앞으로 내 삶에 있을까 생각해보지만, 아마 절대 없을 것 같다. 평생 꾸어온 꿈이 가로막히자, 처음에는 막막함과 동시에 앞으로 무얼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하면서 두려웠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의사의 길도 인생에 놓인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꾸 말한다. 대학은 다시 가든, 외국에 가든 다시 시작하라고. 어떻게든 의사 면허를 되찾을 방법을 모색해보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학을 다시 가라고 하는 건 내 학력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일부 지인들의 희망이지 나의 희망사항은 아니다.

 나는 요즘 학력이라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중이다. 만일 내게 정말 의학 공부에 대한 의지가 있고 진정 원한다면 다시 시도해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지금 내게 지금 어떠한 의지와 각오가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지금은 특별히 공부하고 싶은 게 없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내가 왜 다시 학교에 가야 하는 걸까? 결국 고졸 학력으로 살아가기겐 우리 사회가 좀 만만하지 않으니까 졸업장을 따놓으라는 것 아닐까? 나는 남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학력'을 위해 '적당한 과'를 선택해 대학에 다시 갈 생각이 없다. 물론 살면서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정말로 대학 졸업장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또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대졸자만 가능하다면, 그때는 기꺼이 다시 공부해서 졸업장을 따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내가 왜 지금 인생의 10년을 되돌리기 위해 또 10년을 투자해야 하는가. 그것은 내 뜻에도, 인생의 가성비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면 또 누군가 반문할 것이다. 의사를 하려는 의지가 원래 이렇게 희박했느냐고. 의사고 되고 싶어 한 사람이 맞긴 한 거냐고.

 나라고 10년 공부한 것이 왜 아깝지 않겠는가. 내가 인생에서 가장 간절했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응급의학과에 꼭 가고 싶었다. 힘들게 공부하고 밤잠을 설치면서도 나는 평생을 병원에서 보낼 생각으로 살았다. 살면서 의사라는 길만 보고 달려왔기 대문에 지금처럼 어떤 제동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내가 하고 싶은 다른 일들을 찾아보고 있는 나날이 힘겨울 때도 많다. 그러나 어쩌면 이 또한 생의 과정이지 않을까?

 나는 늘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전문의를 위한 수련 시기를 놓쳤다. 동기들과 흔히 '로컬 시장'이라고 하는데, 내가 '의사'라는 이름만 달고 싶은 거라면 인턴을 할 필요도 없이 졸업하자마자 연봉을 가장 많이 주는 동네 의원에 취직하든 개업을 하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당직만 서는 알바의사를 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내 나람의 보람, 내가 느끼는 보라믄 로컬 시장이 아니라 응급실이라는 작지만 큰 공간 안에 있었다.

 '내가 느끼는 보람'과 '사회의 시선'이라는 대립항 사이에서 내가 의사로 일하면 지탄받는 상황이라면 내가 과연 이걸 유지하는 게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의사 면허가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만일 내가 응급의학과 수련을 못 받는다면, 의사로 계속 살 이유가 있을까?

 누군가는 내게 수련을 꼭 종합병원이나 응급의학 쪽으로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묻는다. 왜냐면 작은 응급실의 경우 전문의가 부족하여 일반의도 모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은 병원에서 형식적으로 수련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나중에 현장에 투입되었을 때 대처 능력이 떨어질 수도 있고 경험이 부족해 뜻하지 않은 사고를 낼 가능성도 커진다.

 교수님의 가르침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훌륭한 의사는 착한 의사가 아니다. 실수하지 않는 똑똑한 의사다. 사람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착하고 멍청한 의사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래, 그럴 거면 안 하는게 낫다.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응급실 현장에서, 불충분한 수련을 받고 싸워낼 수 있을까? 생가가 오가는 상황에서 내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환자에게 오진을 내릴 수도 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수련을 제대로 못 받고 응급실에 설 거라면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료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많은 곳에, 사실상 의료 혜택을 못 받는 곳에 나의 작은 손길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누군가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지도 모른다. 조건이 닿는다면 그렇게라도 살고 싶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다. 명지병원도 경상대병원도 수련의로 받아주지 않았다. 나보다 성적이 낮은 사람도 붙었는데, 블라인드가 원칙이라고 모집요강에 크게 적어뒀던 경상대병원에서는 면접관이었던 병원 고위 관계자가 내 이름과 상황을 언급하며 왜 우리 병원에 지원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아, 이제 나는 아무 데서도 안 받아주는구나. 앞으로 수련은 글렀구나.'

 응급의학과는 항상 모집정원이 차지 않아 추가 모집하는 경우가 있고 가을에도 모집한다. 주변 친구들이 여기 비었다고 지원해보라고 추천을 많이 해줬다. 하지만 더 지원해봤자 기삿거리만 늘어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의사로서의 내 앞길이 막혀버린 순간이었다.

 보건복지부에서 나의 의사 면허를 취소하기 전에 나는 의사 면허를 반납하겠다고 선언했다.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뉴스에서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으면 면허를 반납하고 소송을 취하해야지"라고 하던 패널이 막상 내가 면허를 반납하고 소송을 취하했더니 "기소를 피하려고 쇼하네"라고 한다. 공중파 뉴스에까지 나와서 떠드는 사람이 저렇게 앞뒤가 안 맞을 수 있을까? 또 어떤 분은 "아버지 총선 출마를 위해 네가 희생했구나, 잘했다. 넌 딸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성공이 곧 너의 성공이다. 그때 시집가거라"와 같은 성차별적 망언을 쏟아냈다.

 예전에는 어른들의 말은 다 맞는 줄 알았다. 웃어른은 존경할 대상이고, 나보다 큰 지혜를 담은 사람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분명 아닌 사람도 정말 많다. 존경심은 나이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정말 존경할 만한 사람일 때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하지만, 의사 면허 반납은 여러 요소를 고려해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인생에 레몬이 주어지면, 레모네이드를 만들라"는 격언이 있다.

 비록 지금 인생의 대부분을 부정당했지만, 이 상황을 나는 제2의 자아실현 기회로 만들어보려 한다. 한 길만 바라보고 달려온 나에게 이 같은 강제 멈춤은 아마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하는 트라우마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막힌 상태를 기꺼이 누려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멈추어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이 좁고 긴 길이었던 데 반해 이제부터 펼쳐질 길은 꽃도 피어 있고 산도 보이는 그런 길일지도 모른다. 그 길을 천천히 즐기며 걷다 보면 나의 세상도 확장되어 더 큰 행복을 안겨다 줄지도 모른다.

 

p156

 지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다. 한 살 후배여서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함께 밴드 활동을 하며 가까워졌다. 이 친구가 성인이 되었을 때 첫 여행을 함께 갈 정도로 친했다. 친구 부모님은 지수가 나와 여행 간다고 하면 다 보내주시고 나도 이 친구와 어디든 간다고 하면 부모님도 오케이, 지원해주셨다. 

 지수를 만난 이후로 모든 생일을 함께 보냈다. 친구 부모님도 나를 정말 잘 챙겨주셨고, 서로 남자친구도 소개 해주고, 서로의 친구들도 다 소개해주었다. 함께 여행도 자주 다니고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아버지가 민정수석, 법무부장과으로 잘 나갈 때는 매일 같이 밥 사준다 술 사준다, 누구 소개해주고 싶다, 선 자리 마련해주고 싶다, 이 말 아버지께 꼭 좀 전해달라, 부탁할 게 있다, 돈 빌려달라 연락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툭 끊겼다.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원래도 그런 자리, 그러니까 아버지 때문에 부른 자리에 나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던 나는 오히려 잘 되었다 싶었다.

 내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애초에 나를 '조국의 딸'로 보지 않았다. 그냥 '조민'으로 보았다. 이런 친구들만 남으니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그저 집 앞에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마시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하고 서로 밥값 내겠다고 싸우는, 지금 남아 있는 친구들이 진짜다.

 그 친구들의 선봉에는 항상 지수가 있었다.

 집이 압수수색을 당한 날, 내 생일 전 날이었다. 가족 중 누구도 당연히 내 생일을 신경 쓰지 못했다. 나조차도 내 생일을 잊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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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3일 조국 장관 자택 압수수색 뉴스, 방송 날짜는 9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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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들이닥쳐 집을 뒤지고 물건을 가져가고, 눈 앞에서 낯선 사람들이 내 방을 오갔다.

 너부 놀란 마음에 그저 앉아 있는데, 지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언니 집 앞에 기자가 왜 이렇게 많아요?"

 "너 어디야? 뉴스 봤어?"

 "아니, 언니 집 근처에 한 번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엄마가 언니 생일 밥 사주라고 카드 줬는데 어떻게 나오지?"

 "정말? 나 못 나가. 나가면 카메라 한 100대는 있을걸?"

 "언니, 뒷문으로 한번 나와봐요. 한번 어떻게든 나와봐."

 집이 털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어머니를 남겨두고 혼자 가겠는가. 어머니도 정신이 없는데, 그런데 통화 내용을 들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민아, 너라도 나가. 너 혼자 나가."

 "아니, 나도 그냥 여기 같이 있을게요."

 "아니냐, 여기는 지금 사람 몇 명만 있으면 되고, 여기 있어봤자 압수수색이 언제 끝날지 몰라. 계속 지연될 수도 있고 영장 추가로 나오는 것도 기다리고 하면 12시간이 걸릴지 24시간이 걸릴지 몰라. 그러니 차라리 나가서 있다가 와라."

 그렇게 나는 기자들의 눈을 피하려 경비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옥상을 통해 옆 라인으로 가서 옆 라인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수가 나를 데려간 곳은 친구가 일하던 회사에서 임직원 할인이 되는 레스토랑 중 가장 좋은 음식점이었다. 고급 레스토랑이라 망설였는데, 지수는 나를 잡아끌었다. 이 음식점은 훗날 뉴스에 나왔다. 한 변호사가 내가 '호화 생일 파티'를 했다며 제보해 보도한 것이다.

 그래, 호화라면 호화였다. 지수와 나 여자 둘이 요리 세 가지에 음료수 한 잔씩을 마셨으니.

 그런데 정말 신박한 뉴스가 나왔다. 그 가게에서 제일 비싼 코스요리를 10명이 먹어서 돈 100만 원 가까이 나왔다면서. 아, 허위 기사라는 게 이렇게 나는구나를 그때 제대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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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iz.heraldcorp.com/view.php?ud=20190927000015

 

강용석 “조국 딸 생일파티 71만원 영수증 알고보니 가짜”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가 지난 25일 조국 법무부장관의 딸 조모씨가 생일에 방문한 중식당의 식사내역이라며 소개한 영수증이 허위로 알려졌다.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 운영

biz.heraldcorp.com

(당시 조민 씨 호화 생일파티 관련 가짜 뉴스, 출처는 그 악명 높은 가로세로연구소, 강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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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전통이 있었다.

 1. 생일마다 서로 풀코스로 대접하기
 2. 선물은 예산 5만 원 내로 사기

 나는 상대적으로 환경이 유복한 유학생들 사이에서 자랐고, 젊은 세대의 SNS 문화로 고가의 브랜드 쇼핑백이 담긴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서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지수와 서로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마음과 진심은 주고받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든 룰이었다.

 그렇게 나는 작년 5월, 대부도로 지수를 데려갔다. 조개구이도 먹고, 전동 이륜바이크도 타고, 바다 앞에 텐트를 펼쳐놓고 고기도 구워먹었다. 지수의 생일 파티였다.

 

지수는 핼러윈 데이 저녁에 잠시 이태원에 들러야 한다고 했다. 나는 코로나 이후로 처음 맞는 핼러윈이라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다른 친구들과 신사동에 가기로 했다. 지수에게는 신사동으로 오라고 했다

 '오늘 이태원 사람 너무 많을 것 같은데, 너도 신사동으로 와.'
 ' 그럼, 잠시 이태원에 들러 친구 지인들한테만 인사만 하고 바로 넘어갈게!'

 그런데 지수는 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수의 장례식이 열렸다.

 귀국한 지수의 부모님께서 지수를 보러 영안실에 들어가실 때 따라 들어가서 나도 그녀의 마지막을 볼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지수 생일 때 지수와 대부도에 가서 찍은 사진을 올린 적이 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찍어준 나의 소중한 추억, 그것을 내 계정에 올려두고 싶었다. 소중한 기억, 기억하고 싶은 지수를 간접적으로 담은 장면. 그리 생각하고 올린 사진이었다.

(지수 씨가 찍어준 사진, 출처 : 조민 씨 인스타)

 

누군가는 이 사진을 올린 의도가 무어냐며 내 정신상태까지 언급했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그 사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붙인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내가 해명한답시고 무언가 언급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내가 입을 열면 열수록 기사가 크게 나고, 기사가 크게 나면 지수가 뉴스에 나오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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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ews1.kr/articles/?4947103

 

조민 '대부도 캠핑' 사진 구설…"이태원 고인이 찍었나" "확대 해석 말길"

(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장녀 조민씨의 인스타그램이 연일 화제다. 이번에는 지난 1월 올린 대부도 캠핑 사진을 두고 "이태원 참사로 고인이 된 지인이 찍어준 거 아니

www.news1.kr

(당시 사이코패스 한국 언론들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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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상관 없지만, 지수를 가십거리로 올리는 건 싫었다. 지수의 부모님은 또 얼마나 힘드실까 하고 그냥 내가 조금 욕을 먹고 말자고 생각했다.

 얼마 전, 지수의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지수가 찍어준 사진으로 기사가 나서 죄송해요."
 "아니, 아줌마는 민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사진을 올렸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누가 뭐라든 괜찮아. 오히려 지수와의 추억을 생각하며 사진 올려줘서 엄마로서 고맙지."

 어머니는 그 사진을 보면 나를 찍어주는 지수가 보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사진을 지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정말 감사했다. 내게는 소중한 친구이자 어머니에게는 사랑하는 딸인 지수는 그렇게 우리 마음에 남아있다.

 

p216

 어느 날, 백호에게 친구가 있으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포인핸드 앱을 보다 놀라운 사진을 보았다. 골프연습장에 고양이가 출연한 거다. 퍼팅장에서 고양이가 골프공으로 축구하며 골프장 손님들을 방해하는 사진이었다. 공들 사이로 돌아다니는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불안해 보였다.

(백호 : 출처 조민 인스타그램)

 골프연습장 주인이 포인핸드에 입양 글을 올려두었다. 누가 보아도 한국 토종 길고양이었다. 치즈태비무늬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정말이지 귀여웠다. 엄마 없는 아기 고양이인데 겨울에 얼어 죽을 것 같아 빨리 누가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었다.

 지역을 보니 일산이었다. 쌍문동에 살 때라, 운전해서 가면 금방이었다. 연습장 사무실에 가서 보니 마치 아랫목처럼 전기담요 아래 푹신한 이불을 깔고 고양이가 자고 있었다. 골프연습장 주인 아주머니는 회원들이 가져다준 사료와 간식을 주었다며, 용변도 자기가 알아서 가려 흙에 가서 한다고 했다.

 "냥냥아 안녕?" 하면서 츄르를 들고 살며시 다가갔다. 태어난 지 삼 개월 쯤 되었을까, 솜털도 아직 빠지지 않아 부스스한 털을 가진 아기 냥이었다. 가만히 보니 정말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묻어 있었다. 제법 츄르 먹어본 경험이 있는지 미친 듯이 먹었다. 그러더니 마구 애교를 부리고 몸을 부볐다. 백호와는 정반대였다. 

 피부병도 없고 건강해 보이는 데다가 폴짝거리는 게 너무나도 귀여웠다. 하지만 집에서 생활하려면 야외 생활은 청산해야 했기에 마음에 걸렸다. 저렇게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데.

 하도 팔짝팔짝 뛰어다녀서 잡는 건 포기하고 다시 한 번 "나랑 갈까? 츄르 줄까?" 했더니 차까지 따라왔다. 케이지에 넣어서 지퍼를 잠갔다. 심바를 데리고 떠날 때, 아주머니는 남은 사료를 챙겨주셨다. 

 골프장 아주머니와 그 가족들은 그새 고양이에게 정이 들었는지 가끔 소식을 전해달라고 했다(지금도 가끔 사진을 찍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제 가자, 하고 가는데 고양이가 계속 나오겠다며 야옹거렸다. 

 껴내주었더니 뒷 좌석부터 쭉 스캔을 시작했다. 운전석 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내 쪽으로 오려고 하면 옮기고 그냥 운전만 하던 어느 순간, 고양이가 무릎 위에 앉았다.

 "뭐야 너어."

 내 허벅지 위에 갑자기 딱 눕더니 잠드는 거였다. 일산에서 쌍문까지 밀리는 차 안에서 한 시간 반을 고양이는 내내 잠들어 있었다. 처음 본 인간 무릎 위에서.

 동물병원에 가보니 다행히 건강하고 귀 진드기만 조금 있었다. 한 달 정도 통원치료하면서 백호가 있던 방에 격리시켰다. 백호는 갑자기 나타난 작은 녀석이 자기 영역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꼬리를 펑! 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심바 : 출처 조민 인스타그램)

 

 백호가 서열을 과시하기 위해 심바를 끈질기게 괴롭혔는데, 심바는 괴롭히면 괴롭히는 대로 당하는 순둥이다. 밥도 백호가 먼저 먹고 나서야 심바가 먹고, 캣타워에서도 백호가 맨 윗자리를 차지한다. 백호는 소형종이고, 심바는 중형종이라, 심바가 성장할수록 점점 백호의 크기를 넘어선다. 지금은 백호가 3.8kg,  심바가 5.4kg이다. 덩치만 보면 사실상 심바가 서열을 뒤집는 게 맞는데, 캣타워 맨 위에 있는 우주선에만 가끔 가서 잘 뿐, 나머지는 백호한테 아무리 맞아도 져준다. 백호와 심바는 이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자매가 되었다. 일 년에 한 번은 둘이 껴안고 자는 걸 목격했기 때문에 확실하다.

(백호와 심바 : 출처 조민 인스타그램)

 

 두 녀석이 서로 자기를 만져달라고 애웅거릴 때, 잠자고 일어나 내 곁에 곤히 잠든 녀석들을 볼 때, 집에 들어가면 꼬리를 치켜들고 반겨줄 때....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하고 느낀다. 

 

    너를 사랑하는 일은 아주 쉬웠어
    네 눈 속엔 우주가 담겨 있었거든
    함께하는 일상은 금방 습관이 돼
    내 작고 예쁜 보송한 천사야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가만히 잠들고 일어나자
  

     -미닝, 내 고양이 (My Cat) 중에서

 

 

p242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유명하다고 해서 읽어본 작품인데, 나에겐 하나도 어쩐지 재미없었다. 얼마나 재미가 없었으면 제목으로만 기억나는지.... 정말이지 배우 둘이 벤치에 앉아 있다가 끝났다. 고도라는 사람이 실제로 등장했는지도 기억에 없는 걸 보니, 그는 끝까지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p244

 A Poison Tree. By William Blake

 

 I was angry with my friend;
 I told my wrath, my wrath did end.
 I was angry with my foe:
 I told it not, my wrath did grow.

 And I watered it in fears,
 Night & morning with my tears:
 And I sunned it with smiles,
 And with soft deceitful wiles.

 And it grew both day and night.
 Till it bore an apple bright.
 And my foe beheld it shine,
 And he knew that it was mine.

 And into my garden stole,
 When the night had veild the pole;
 In the morning glad I see;
 My foe outstretche beneath the tree.

 

 (해석은 책에는 없는데 인터넷 등을 참고해서 내 나름대로 해석을 붙였다)

 나는 친구에게 화가 났다;
 나의 분노를 얘기했더니, 분노는 사라졌다.
 나는 적에게 화가 났다:
 나는 말하지 않았고, 분노는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그것에 물을 주었다.
 밤낮으로 흘리는 나의 눈물로:
 나는 미소로 그것에 햇빛을 쬐어주었다.
 그 미소 뒤에 교묘한 속임수를 섞어서.

 분노는 밤낮으로 자라
 밝게 빛나는 사과를 맺게 되었다.
 적은 사과가 빛나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것이 내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곤 내 정원에 숨어들어왔지,
 밤이 별빛을 가릴 때.
 아침이 되어 난 기뻤지.
 나의 적이 나무 아래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윌리엄 블레이크의 <독나무>는 내가 좋아하는 시 중 하나다. 고등학교 때 유학반에서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처음 접한 시로, 어린 나이에 적잖이 충격받았다. 이 시에서 화자는 분노의 두 가지 표출 방법을 다루는데, 친구에게 화가 나면 분노를 표출하자 분노가 사라졌다고했다. 하지만 친구가 아닌 적에게 화가 날 때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그 분노를 나무처럼 키워서 사과가 맺힐때까지 기다린다. 적이 그 탐스러운 사과를 훔쳐먹고 나무 아래 죽어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게 시의 내용이다. 이렇게만 보면 기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분노라는 감정을 이렇게 다룬 시를 처음 보아서인지 매우 인상적이었다. 화자의 분노를 자양분 삼아 자라는 사과라니. 분노와 눈물, 두려움을 안으로 삼키면서 겉으로는 미소만 짓고 있는 화자. 화자는 적에게 복수하기 위해 분노라는 사과를 키웠지만, 그 사과를 키우는 과정에서 그는 본인도 의도하지 못했던 변화를 경험한다. 가식적이고 순수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분노는 상대방뿐 아니라 본인 자신도 망가뜨린다는 이야기 아닐까.

 

p254

 최근 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깊어지면서, 제 가치관 및 삶의 일부를 드러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살기에 저의 가치관과 주체성은 너무나도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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