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글로리(glory)’는 맥락에 따라 영예(榮譽), 부귀(富貴), 광휘(光輝) 등 여러 뜻으로 쓴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는 무엇일까? 나는 ‘자랑’ 또는 ‘존엄’으로 해석한다. 돈 많고 키 크고 잘 생겼고 ‘나이스’한 하도영은 박연진의 자랑이다. 문동은은 모든 가해자가 가졌거나 가지려 한 글로리를 파괴함으로써 존엄을 확인했다. 자신의 글로리를, 박연진은 남한테 내보인 반면 문동은은 혼자 간직했다. 삶의 무게추를 박연진은 타인의 시선에 두었고 문동은은 자신의 내면에 두었다. 그런 점에서 하도영은 문동은과 같은 유형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이스’한 행동을 하는 것이 하도영의 글로리다. 그래서 충실하지 않은 아내와 생물학적으로는 남의 딸인 예솔을 비현실적일 정도로 ‘나이스’하게 대한다. 나는 등장인물이 저마다 추구하는 글로리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그 드라마를 보았다.
무협지 같은 회고록
이인규 씨가 회고록을 냈다. 제목은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이고, 부제는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이다. 출판사 조갑제닷컴의 발행인 조갑제 씨는 젊을 때 글 잘 쓰는 기자로 이름을 날렸고 나이 들어 극우 논객으로 변신한 인물이다. 이인규 씨는 책 후기에 조 씨가 원고를 윤문(潤文)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어떤 내용을 담은 어떤 문장이 조씨의 작품인지, 알 만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직 검사의 흔한 회고록은 아니다. 서문부터 부록까지 529쪽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과 무관한 것은 27쪽부터 90쪽까지가 전부다. 부록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개요>는 용어와 문장과 내용 모두 검찰 수사기록 요약 보고서라고 할 만하다. 개인의 기억력과 메모에 의지해 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중수부장 직을 사임할 때 수사기록 사본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는지, 혹시 검찰 관계자가 보관하고 있는 수사기록을 제공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4월 30일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김해 봉하마을 사저를 떠나는 모습. 연합뉴스 본문 장르는 ‘무협지’에 가깝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검사의 임무는 법을 위반한 사람을 찾아내고 법정에서 범죄행위를 증거로 입증함으로써 법이 정한 벌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협지의 주인공은 ‘나쁜 놈 중에서도 힘센 나쁜 놈을 처단하려고 검사가 되었다’고 한다.(26쪽) 그는 1985년 서울지검에서 검사의 첫걸음을 뗐다. 그때는 전두환이 대통령이었다. 힘세고 나쁘기로는 한국현대사에서 단연 으뜸인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인규 씨가 전두환과 그 패거리를 처단하려고 애쓴 흔적은 없다. ‘힘센 나쁜 놈’이 누군지에 대해서 이인규 씨는 그때도 지금도 헌법이나 상식과 크게 다른 관념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경동고와 서울법대를 나온 그는 명문고 인맥이 판치던 검찰조직에서 학연‧지연‧혈연으로 얽힌 이들의 청탁을 거절하는 청렴성과 원칙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특수부 에이스가 되었고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자리까지 올라갔다. 회고록에서 SK 최태원 회장 구속(2002년)부터 대선자금 수사(2003년)를 거쳐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2009년)까지 ‘힘센 나쁜 놈’을 처단한 자신의 업적을 깨알같이 자랑했다. 정홍원‧우병우‧홍만표‧한동훈‧박영수 등 함께 활약한 ‘훌륭한 검사’는 실명을 밝혔다. 검찰을 완전 정의로우며 오류라곤 없는 조직으로 묘사했다.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데 필요한 때만 검찰의 작은 잘못을 슬쩍 비추었고 관련 검사 이름은 익명 처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랑뿐인 ‘나 때는’ 회고록이다. 그가 검사로 재직한 전두환‧노태우 시대에 무고한 시민을 수도 없이 구속하고 기소한 검찰의 조직범죄와 성폭력‧뇌물수수‧증거조작 등 검사의 범법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반성도 성찰도 없다.
검사의 글로리
회고록 제목은 이인규 씨의 글로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대한민국 검사’, 그리고 표지의 저자 이름 뒤에 적은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그의 글로리다. 24년 6개월 동안 검사로 일한 이인규 씨는 노무현 대통령이 목숨을 끊은 일로 2009년 7월 사직했다. 무려 14년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검사’라는 지위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중수부장’이라는 직함으로 자부심을 드러낸다. ‘법률가’라든가 ‘변호사’ 같은 것은 이인규의 글로리가 될 수 없다. ‘검사’나 ‘중수부장’은 내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언어가 아니다. 타인에게 자랑하고 과시하는 데 적합한 표식이다. 인간 이인규는 그런 점에서 문동은이나 하도영이 아니라 박연진과 같은 과에 속한다. 내면의 가치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을 글로리로 여긴다.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회고록은 아니었으나 윤석열 대통령과 검사정권의 행태를 이해하는 데는 유용했다. 그들은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와 비슷한 확신을 지니고 유사한 감정을 느끼면서 권력을 휘두르는 중이다. “기업인과 정치인을 비롯해 사회의 힘센 자들은 모두 잠재적인 범죄자다. 시장권력과 정치권력으로 국민을 약탈해 사리사욕을 채운다. 이것을 바로잡아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세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능하고 청렴한 검찰조직과 검찰에서 능력을 기른 전직 검사뿐이다. 우리는 사심 없는 엘리트로서 ‘힘센 나쁜 놈’들이 장악하고 있던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고 있다.”
<한겨레21>이 최근 인용 보도한 참여연대와 법무부의 자료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는 검찰왕국 건설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법무부장관을 포함해 검사 출신 국무위원이 4명이고 국무총리 비서실장부터 국민연금기금 운용위원회 상근 전문위원까지 검사 출신 차관급 공직자는 9명이다. 인사비서관에서 국제법무비서관까지 대통령실에 근무하는 검사 출신 비서관은 7명이다. 외교부와 국제기구 등 법무부 이외 기관에 파견나간 현직 검사가 50명이 넘으며, 검사 아닌 검찰공무원도 10명이나 파견 근무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 몫 대법관과 헌법재판관 후보로 주로 전직 검사를 추천하고, 김기현 체제를 통해 영남을 비롯한 국힘당 강세 선거구에 검사 출신 국회의원 후보를 밀어 넣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돈과 정보와 권력이 있는 자리에 이름과 얼굴은 다르지만 생각과 감정은 이인규 씨와 똑같은 사람을 찾아 임명하고 있다. 이인규 씨도 조만간 한자리 받을지도 모르겠다.
노무현의 글로리
회고록 부제에 이인규 씨는 이런 주장을 담았다. ‘나는 노무현을 죽이지 않았다.’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 글로리를 되찾으려면 그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노무현을 죽인 정치검사가 아니다. 평생 힘센 나쁜 놈을 처단한 대한민국 검사다. 노무현은 힘센 나쁜 놈이었다.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박연차에게 뇌물을 받았다. 그가 자살한 것은 변호인 문재인의 무능과, 죽으라고 몰아세운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 진보언론 때문이다. SBS의 ‘논두렁시계’ 보도는 검찰이 아니라 국정원이 한 짓이다.”
그의 주장 가운데 그나마 다툴 가치가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노무현재단의 입장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나머지는 사실 공방을 할 가치도 없다. 예컨대 박연차와 면담하면서 노 대통령이 했다고 그가 주장하는 말들은 지어낸 것이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이루어진 짧은 면담은 영상녹화실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자신과 문재인 대통령의 증언 중에 어느 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인규 씨는 누구보다 잘 안다.
적어도 내게는, 이인규 씨의 노력이 쓸데없었다. 나는 그가 노무현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노무현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 뿐이며 이명박 정권의 망나니 노릇을 검사의 일로 착각했을 따름이다. 그가 본 ‘힘센 나쁜 놈’은 그런 일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수모를 견디며 비굴하게 살아가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검사 이인규는 노무현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러면 죽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박연진이 문동은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검사 이인규는 인간 노무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찌 ‘미필적 고의’를 품었겠는가.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의도하지 않았던 오류에 대해 죽음으로 책임진 행위’로 받아들인다. 정치는 때로 짐승이 되는 수모를 감수하면서 야수의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사업이다. 그것이 ‘노무현의 글로리’였다. 그는 수모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는 사람이 아니다.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기 위해 야수의 탐욕과 싸워나갈 벗들에게 짐이 아니라 힘이 되려고 그런 방식으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나의 글로리를 지키겠다. 슬퍼하지도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말라.’ 대통령의 마지막 글을 나는 그렇게 읽었다.
이인규 씨에게 말하고 싶다. “맞습니다. 그대는 대한민국 검사였습니다. 그 사실을 그대만의 글로리로 간직하십시오. 당당히 얼굴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십시오, 그러나 굳이 타인의 동의를 구하지는 마십시오. 노무현의 글로리를 알아보았고 그의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과 이름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노무현의 죽음을 해석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대는 노무현의 글로리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핫포엔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하 중 한명의 저택으로 400년의 역사가 있다. 12,000평 대지에 일본식 정원과 전통 가옥이 있던 장소로 80년 전부터는 정원, 고급요리점, 만찬장, 결혼식장으로 이용되는 상업시설로 사용되며, 일본 상류층의 결혼장소로 인기있는 장소이다. 우리의 개념상 이런 비슷한 장소는 없지만 신라호텔 정도의 최고급 호텔 개념으로 보면 될 듯 하다.
핫포엔이라는 곳의 브랜드 이미지 광고이다. 이걸 보면 어느 정도 핫포엔이 어떤 곳인지, 어떤 수준인지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핫포엔 정문 전경.
핫포엔 내에 코추안(壺中庵)이라는 고급요리점인 요정에서 바이든과의 만찬이 진행되었다.
코추안 전경
코추안에서 바이든이 접대받은 음식은 카이세키 요리로 일본에서 상대를 가장 극진히 대접할 때 이 요리를 대접한다.
카이세키 요리는 원래 사찰음식으로 그 계절의 제철재료로서 만들기 때문에 계절에 따라 음식의 종류가 바뀐다.
정보를 보니 사법고시 37회, 사법연수원 27기라는 기초 정보가 나온다. 어디서 많이 본 기순데?
어디서 봤지? 최근에 국수본부장에 임명되었다가 아들 학폭 사태가 불거지면서 자진 사퇴한 사람 뉴스가 핫했을 때 정순신이 화제가 되었고, 최종 검증한 법무부장관 한동훈에 대한 책임론이 나온 적이 있다. 그리고 정순신과 한동훈이 연수원 동기였다는 사실이 기사에 난 적이 있었다.
10년 전쯤에 혜민이 한창 잘나가던 시절 이런 소리를 했었다. 당시는 혜민이 뜨기 시작하던 때라 큰 논란은 되지 않았지만 몇 년이 지나 혜민의 풀소유의 본색(혜민의 실제 삶이 어떠했는지는 조금만 검색해봐도 나오니 여기선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이 드러나면서 과거 발언까지 소환되서 두드려 맞았고 이때 법정 스님이 재조명 되었다.
미국이 의료보험도 개판이고 부의 양극화도 정말 심해지고 있고 총기사고는 매일 나고 정말 우리가 보기엔 아비규환으로 보여도 사회가 유지되는게 사법시스템의 정의가 살아있고 교육계등 사회 전부문에서 비리사건이 나면 지위고하 성별, 빈부에 상관없이 다 작살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지금 위태로운 건 법이 거지같아서 그런게 아니라 그 법을 수호하라고 권력을 준 검사 새끼들이 거지같기 때문이다.
검사 기득권 카르텔에 속한 자들은 강간을 저지르든 마약을 빨든 주가조작을 하든 사기를 치든 논문을 표절하든 경력을 허위조작하든 아예 검사가 기소조차 하지 않고 다 봐주고, 검사에게 밉보이면 없는 죄도 뒤집어 씌워서 가정을 멸문에 이르게 하는 잔혹무도함을 예사로 저지른다.
'김 씨는 지난 14일 오전 2시부터 4시, 오후 1시 총 3회에 걸쳐 6차례에 걸쳐 자신의 차 안에서 흉기로 자신의 목과 가슴 부위를 여러 차례 찔러 자해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
김만배씨가 자살을 하려 했고 11시간 동안 목과 가슴을 6차례 찔렀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이해가 되는가? 자살을 하려는데 일단 목을 찔러서 죽으려 했는데 안죽으니까 2시간쯤 있다가 또 가슴을 찌르고 그래도 안죽으니까 9시간이 지나서 또 자신을 찔렀다는 것이다. 김만배씨가 무슨 터미네이터인가?
지난번 칼럼이 좀 시끄러웠기에 한 번 더 쓴다. ‘조금박해’는 하나의 현상이다. 비평할 가치가 있다. 지난번 글을 「조금박해1」, 이 글은 「조금박해2」라고 하자. 필요하면 「조금박해3」도 쓸 생각이다. 어떤 기자들이 「조금박해1」에 없는 말을 지어내 보도했고 관련자들이 즉각 반응했다. ‘진보논객’에서 ‘친윤논객’으로 전향한 대학교수도 한 마디 보탰다. 어떤 신문과 방송은 늘 하던 ‘제목장사’를 했다. 놀라거나 화낼 필요는 없다. 그런 것도 ‘조금박해 현상’의 일부다.
밥과 비평 사이
「조금박해1」에 대한 관련자와 제3자의 반응을 일일이 평하지는 않겠다. 논쟁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토론할 만한 쟁점을 내놓지 않아서다. 조금박해와 기자들은 내가 제기한 문제의 핵심을 외면했다. 독해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논쟁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내가 글을 잘못 쓴 탓일지도 모르니 초점을 가리는 곁가지를 정리하자.
첫째, 왜 칼럼을 쓰는가? 시민들이 보라고 쓴다. 비평의 대상이 된 사람도 독자일 수 있지만 특별히 고려하지는 않는다. 「조금박해1」을 쓸 때 조금박해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낱 칼럼 따위로 사람의 생각을 어찌 바꾸겠는가. 누가 뭐라 해도 조금박해는 가던 길을 계속 갈 것이다. 자신을 비판한 칼럼을 읽고 성찰하는 정치인은 극히 드물다. 대개는 씨근덕거리며 욕을 한다. 그게 정상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비평가한테 화를 내서 좋을 건 없다. 화난 티를 내지 말고 유권자의 호감을 얻는 데 도움 되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나랏일 하는 정치인은 감수해야 하는 ‘불공정’이다.
둘째, 어떤 정치인이 달라지기를 기대할 때는 어떻게 하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편지를 쓰기도 한다. 여의치 않으면 문자나 톡을 보낸다. 젊은 사람이면 만날 때 내가 밥값을 낸다. 그래 놓고서 칼럼으로 까는 건 뭐냐고 항변하지 말라. 기대가 있으면 만나고 없으면 비평한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주권자의 권한과 비평가의 정체성을 절충한다. 누구나 그렇게 하는 건 아니다. 대통령에 대한 비평을 대통령이 보라고 쓰는 칼럼니스트도 있다. 불러달라고 대통령에게 소리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언론 자유를 빙자해 대통령의 정적과 비판자에게 대놓고 침을 뱉는다. 그렇게 해서 어떤 이는 대통령의 참모가 되었고 어떤 이는 여당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슬기로운 비평생활’이다.
비평가의 책임과 마이크 파워
셋째, 비평가는 무엇을 책임지는가? 비평가는 자신의 논리와 관점에 대해 책임을 진다. 나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와 평가에 도움을 주려고 칼럼을 쓴다. 내 시각과 논리와 해석이 옳다는 증거는 없다. 세상의 여러 견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만 논리의 정합성과 철학의 일관성은 지키려고 노력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러니 비평가인 내게 다른 것을 요구하지 말라.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 정치 경험이 있는 비평가일 뿐이다. 유권자로서 민주당을 지지한다. 하지만 당원은 아니다. 민주당에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도 없고 하지도 않았다. 민주당이 내가 하라는 대로 무언가를 한 일은 과거에 없었고, 지금 없으며, 앞으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 유시민 때문에 민주당이 잘 되었느니 어쩌니, 민주당을 얼마나 사랑하느니 마니 하는 말은 접어두시라. 나는 그런 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넷째, 마이크 파워를 키우는 게 비난할 일인가? 아니다. 마이크 파워는 말과 글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치인이든 비평가든 작가든, 마이크 파워는 누구나 원한다. 마이크 파워를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나쁘게 볼 이유는 없다. 나는 조금박해의 의도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들이 유명해지려고 민주당에 ‘쓴소리’를 한다고 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조금박해1」을 왜곡해서 내가 그렇게 말한 것처럼 쓴 것이다.
나는 조금박해가 옳은 일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라 생각한다. 달리 판단할 근거가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대중의 신뢰를 받아야 할 정치인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언행은 삼가야 한다. 예컨대, 유시민에게 관심을 끊은 지 오래고 유시민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도 못한다면서 「조금박해1」을 반박하면 득 될 것이 없다. 귀는 막고 입만 여는 정치인이라는 오해를 받기 딱 좋다. 자신을 비판한다고 해서 독재자 아니냐며 발끈할 거라면 남한테 툭하면 사퇴하라고 소리치는 행위만큼은 그만두어야 한다. 젊은이가 그렇게 하면 더 이상해 보인다.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비평가더러 짠하다느니 불쌍하다느니 따사로운 말을 하는 것도 현명하지 않다. 성정이 야비하다는 인상을 줄 위험이 있다. 충고로 오해하지 마시라. 남이 듣게 말하는 건 충고일 수 없다. 비평가의 직업병이 도져서 하는 말이다.
조금박해가 외면한 것
어떤 민주당 정치인이 있다. 그는 옳은 일을 하려고 한다. 어떤 문제에 대해 옳다고 생각하는 말과 행동을 했다. 그렇지만 옳고 그름을 가리는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게 아님을 안다. 독선에 빠지지 않으려고 여론을 살핀다. 그래서 언론 보도를 본다. 언론이 여론을 반영하고 또 여론을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문방송이 긍정적으로 보도했고 기사 건수도 많았다. 자신을 가리켜 비주류나 소수파가 아니라 ‘소신파’라고 했다. 진영논리가 판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소신파’가 오만과 독선에 빠진 의회 다수당을 건강하게 만들고 우리 정치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칭찬했다. 그는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는 믿음을 품고 신문과 인터뷰하고 방송에 출연한다. 그러자 우호적인 기사가 더 많이 나왔다. 정신 건강을 위해 당원과 시민들이 쓴 문자나 댓글은 보지 않는다.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당을 망치는 ‘악성 팬덤’이라고 훈계한다. ‘악성 팬덤’에서 민주당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불태운다.
나는 조금박해의 언행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들이 민주당의 다수파를 공격하거나 주류 정치인을 공격해서 이익을 얻었는가? 그렇지 않다. 손해만 보았다. 국회의원 후보 경선에서 떨어졌고 당직 선거에서 참패했다. 문자폭탄과 악성댓글에 시도 때도 없이 시달렸다. 그런데도 왜 줄기차게 ‘쓴소리 노선’을 밀고 갈까?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박지현 씨가 자신의 마이크 파워가 누구 못지않다고 말하는 걸 듣고서야 나는 그걸 깨달았다. 그래서 「조금박해1」에서 박지현 씨를 함께 다루었던 것이다.
나는 언론사의 90퍼센트가 ‘친윤석열’인 상황에서 그래도 되느냐고 물었다. 기자들은 그 질문을 못 본 척했고 조금박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묻는다. 우리 국민은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과 이재명을 50:50으로 지지했고 최근 민주당의 지지율은 국힘 지지율보다 적어도 낮지 않다. 그런데 언론은 90퍼센트가 ‘친윤석열’ ‘친국힘’이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 보도량이 많다고 해서 마이크 파워가 크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 아닌가? 언론이 우호적으로 보도한다고 해서 옳은 일을 한다고 확신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은가? 비난 문자를 보내는 당원들이 옳을 가능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가? 지난번에도 이렇게 물어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다 내 잘못이다.
신문 방송의 정치적 사유화
친윤언론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불리한 일은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나는 공영방송과 극소수 신문을 제외한 온오프라인 신문 방송이 거의 다 친윤이라 본다. 친윤언론이 90퍼센트라는 것을 데이터로 증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난여름 어느 새벽 대통령이 강남의 술집에 있었다는 의혹이나 대통령 부인의 주가조작 의혹을 대하는 언론의 행태를 보면 그 정도로 추산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날 새벽 술집에 있지 않았다면 대통령이나 법무부장관이 부재증명을 하면 된다. 2003년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무성 의원은 내가 2002년 12월 대선 직전 중국 북경의 북한대사관에 가서 이회창 씨 부친 관련 자료를 받아 나왔다고 폭로했다. 목격자가 있다면서 ‘친북세력이 국회까지 들어와 암약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나는 중국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음을 출입국기록과 여권으로 즉각 증명했고 김무성 의원은 사과했다. 고소 고발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공직자는 때로 부당한 의혹을 받을 수 있다. 대통령과 법무부장관도 부당한 의혹 제기에는 그렇게 대응하면 된다. 일정표, 자택 CCTV, 휴대전화 접속기록 등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재증명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부재증명을 요구하거나 사실 여부를 심층 취재하는 신문 방송은 거의 없다. 국회에서 의혹을 제기한 김의겸 의원을 비난하고 제보자와 「더탐사」의 신뢰성을 공격하는 기사만 앞을 다투어 쏟아낸다. 수사기관이 언론사인 「더탐사」를 마구잡이 압수수색해도 일절 비판하지 않는다. 대통령 부인의 주가조작 의혹은 한술 더 뜬다. 탐사전문 매체가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거나 다른 피고인 재판에서 중대한 범죄 혐의가 드러나도 친윤언론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는 신문 방송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친윤언론은 또한 야당 대표를 정치적 시체 안치실로 보내기 위해 검찰 조직을 총동원해 벌이는 ‘정적 제거 수사’에 적극 협력한다. 법률적 사실적으로 별 가치가 없는 ‘카더라 발언’을 중대한 사실인 양 포장해 비리의 증거가 나온 듯한 분위기를 만든다. 그래서 어떻다는 게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언론이 대부분 친윤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뉴스를 소비하자는 것이다.
언론사는 대부분 사기업이다. 언론사의 대주주들은 대한민국 0.0001퍼센트 부자이며 최고 특권층이다. 대기업이 큰손 광고주다. 대주주와 광고주가 ‘친국힘’ ‘친윤석열’이니 경영진과 데스크도 당연히 그런 사람들로 붐빈다. 그들은 국힘당이 부자와 강자의 이익을 지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안다. 국힘당을 지지하는 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기자는 상사의 지시를 받고 일하는 회사원이다. 기자가 자본과 정치권력에 맞서 언론 자유와 편집권 독립을 위해 싸우던 시대는 지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예전의 신문 방송은 사회의 공론장을 자처하면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이젠 그런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신문 방송의 정치적 사유화’로 이해한다.
대주주와 경영진이 정치적으로도 사유화한 신문 방송은 민주당을 적으로 간주한다. 민주당에 해가 되는 정보는 사실이 아니어도 최대한 키우고 대통령과 여당에 해가 되는 정보는 사실이라도 무시한다. 민주당 정치인과 진보 지식인에 대해서는 부정적 기사만 낸다. 민주당을 포함해 진보진영에 발끝이라도 걸쳤던 사람 가운데 자기네가 원하는 말을 하는 사람을 특별히 우대한다. 귀순자를 내세워 북한 정권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들은 민주당을 북한 정권만큼 싫어하는 듯하다. 친윤언론에게 조금박해는 북한 내에서 김정은을 비판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용도로 조금박해의 말과 행동을 소비한다.
다시 말한다. 나는 조금박해가 ‘이적행동’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옳은 일을 하려고 한다고 믿는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조금박해의 주관적 동기와 무관하게 친윤언론이 조금박해를 자기 목적 달성에 활용하려고 ‘조금박해 현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친윤언론은 내가 박지현과 조금박해의 인격을 공격한 것처럼 조작하고, 그에 대한 관련자와 제3자의 반응을 다루는 기사를 냈다. 이 글은 어떻게 할지 모르겠으나 기사를 써도 ‘신문 방송의 정치적 사유화’ 문제는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데 오백 원을 건다. 조금박해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도 오백 원을 건다. 그러다 돈 천 원을 잃으면?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다.
사족을 하나 달자. 나더러 ‘맛이 갔다’고 한 ‘친윤논객’에 대해서는 비평하지 않겠다. 그는 사실과 데이터를 무시한다.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판단한다. 글과 말로 감정을 배설한다. 친윤언론이 그것을 퍼나른다. 배설물을 어찌 비평하겠는가. 피하는 게 유일한 대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