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호사카 유지 교수는 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학부는 도쿄대 금속공학과를 들어갔으나, 대학 재학 시절중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알고 이로부터 일본이 왜 아시아를 침략했는가에 대한 주제에 의문이 생겼다고 한다. 대학졸업후 고려대 한국어학당에 들어간 후, 고려대 정치학과에 편입한다. 이후 동 대학원의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정치학 박사가 된다. 이후 세종대 교수가 되고 독도문제 연구소 소장에 이른다.

한일 근대사에 대한 전문가이며, 개인적으로는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와 뉴스공장을 통해 접하게 되어서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아베정권의 뿌리와 그로부터 현재 한일갈등에 이르기까지를 일본 근대사의 계보로부터 그 연원을 풀어나가는 내용으로 현재의 한일 갈등에 대한 근본을 풀어주는 내용으로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필독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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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인들이 왜 히틀러와 나치당을 지지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1934년 6월 미국의 사회학자 세어도 아벨이 실시한 연구 성과가 좋은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그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에 이미 나치당원이 된 581명에 대해 작문 형식의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물을 1975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마클 교수가 다시 조사해 발표했다.

 '왜 자신이 나치당원이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약 30%가 '독일이라는 질서의 와해에 대한 충격과 독일 내 혁명론자들에게 반론하기 위해서'였다고 대답했다. 독일 내 혁명론자란 황제 제도를 폐지하여 독일을 공화제로 바꾼 사람들을 가리킨다. 다음은 어느 나치당원의 글이다.

 "1918년 11월9일(독일혁명으로 황제가 퇴위해 독일공화국이 성립된 날), 그날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일이 되어 나를 습격했는지, 나는 표현조차 할 수 없다. 비애국자들이 갑자기 고향에 주둔해 있던 군인들을 끌어내리고 완장을 찢어버렸고, 그동안 전쟁의 공로로 얻은 훈장을 가슴에서 떼어내버렸다. 그들은 수백만의 독일인이 그 아래에서 싸워 목숨을 바친 우리의 흑,백,홍의 국기를 하수구로 내던지고 있었다. 이런 독일 국민 모두에게 신성하고 자랑스러운 상징들을 모욕하는 사람들과는 평생 어떤 공통점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p27.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해반 후 연합국으로부터 받은 제재에 비하면,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패배한 후 연합국으로부터 받은 제재는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그런 조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다시 패배한 독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연합국들이 영토에 대해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고대로부터 일본 영토만을 인정했고 연합국으로서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일연의 조치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히틀러와 나치당과 같은 괴물이 다시 탄생하지 않도록 하는 연합국의 배려였다. 

 그러나 일왕은 인간 선언으로 '살아 있는 신'에서 인간으로 내려왔고, 절대군주에서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권력을 빼앗겼다. 이에 극우파를 중심으로 일왕을 다시 절대군주로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패전 후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 23명이 결정되었는데, 그들 중 7명에 대해서는 사형이 집행되었고 7명은 옥사했다. 이후로도 일본에는 전범이 없다면서 A급 전범의 복권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나타났다.

p29.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의 독일인처럼 일본 극우세력은 전쟁 패배로 빼앗긴 대일본제국의 제체와 신사들, 호전적인 교과서 등의 상징물을 모두 부활시키려 하고 있고, 이에 반대하는 한국에 적대감을 드러내며 일본 국민들을 선동하여 혐한 감정을 확산시키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과 같은 국가적 분위기를 만들어 히틀러를 출현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그들에게 있어 정치적, 혈통적으로 보아 아베 신조만큼 이에 적합한 인물은 없다.

p32.

 이런 상황에서 관료들은 총리나 총리 주변이 좋아할 일을 무조건 해야만 한다. 반대로 총리 관저의 불평을 살 우려가 있는 일은 아예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총리에게 정확한 정보가 올라오지 않게 될 우려가 커졌다. 나라의 최고 책임자가 현실에서 유리되어버린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인사권을 ㅌ오한 공포 지배를 실시한 국가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다.

p45.

 차기 총리 후보 중 한 사람인 현직 자민당 국회의원 이시바 시게루가 2019년 8월23일 자신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는데, 넷우익들에게 심한 공격을 받았다.

 "한일 관계는 문제 해결의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에 빠져버렸습니다.(중략) 우리나라(일본)가 패전한 후 전쟁 책임과 제대로 마주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 많은 문제의 뿌리가 되어 그것이 오늘날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된 것 같습니다."

 이에 인터넷에서는 '이시바는 매국노다', '절대로 총리로 뽑으면 안 된다'는 과격한 댓글들이 넘쳤다. 일본은 지금 혐한 여론에 반대 의견을 제기하면 매국노 취급을 받는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

p48.

 "전후 70년이나 되었는데, 한일 관계를 악화시킨 아베 정권의 죄는 크다. 피해를 준 측이 그 사실을 잊거나 무신경한 발언을 하고 피해자들의 분노를 증폭시키고 있다. 조부모 세대의 분노는 그다음 세대로 오히려 증폭되어서 계승되어간다. 그러므로 일본 시민들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현재 전쟁을 모르는 세대는 조선이나 대만에 대한 식민 지배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역사 수정주의 분위기가 만연되어 있다."

 미즈시마 아사호 와세다대 교수는 아베 정권과 일본의 혐한 분위기를 이와 같이 비판한다. 이런 양심적인 생각을 가지는 일본인들이 많이 필요한 시점이다.

p53.

 아베 아키에 총리 부인이 2018년 4월21일 오사카에서 열린 차별 주의 단체 재특회(재일 한국인에 대한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모임)가 일으킨 시위에 '편향 보도에 지지 마라! 아베 정권 힘내라 대행진 in 오사카!'에 뜨거운 응원 메시지를 보낸 것이 데모 주최자에 의해 밝혀졌다. 일본 총리의 부인이 배외주의를 호소하는 차별주의자들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으로 메시지를 보내 응원했다면, 총리 부인이 차별주의 단체 리더들과 깊은 관계에 있다는 이야기다. 아키에 여사가 차별주의적 사고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재특회라는 차별주의자와도 친하다고 하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완전히 넘어선 셈이다.

 내각총리 부인이라는 일본의 퍼스트레이디가 차별주의 단체 재특회의 교토 지부장인 우치코시 젠지로가 주도한 시위에 '아베 정권을 응원해준다'는 이유로 무분별한 응원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이는 국가로서 차별을 용인하고, 차별주의 단체에 보증을 주는 행위이며, 근대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다. 우치코시 젠지로라는 인물은 이전부터 재일 한국인의 '특권'이 있고 그것을 일소하자는 차별주의 단체 재특회가 조작한 유언비어를 신봉하는 차별주의자이다.

p54.

 2016년 3월18일 참의원 예산 위원회에서 당시 민주당의 아리타 요시오 의원이 아베 총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이것을 보면, 재특회를 비롯한 일본의 혐한 세력들이 나치 독일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타 : 재특회 회장 사쿠라이 마코토 씨가 인터넷상에서 특정 민족에 대해 헤이트 스피치에 해당하는 언동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용납되는가? [예를 들어] 2013년 2월17일 도쿄 신 오쿠보에서 혈린 혐한 시위에서는, 그들의 플래카드에 '집단 학살'을 상기시키는 혐한 표현들이 많았다. 지역에서도 나치 독일의 깃발 하켄크로이츠를 들고 시위를 하는 모습을 전국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가스실을 만들라'라는 말까지 외치고 있었다. 오사카의 츠루하시에서는 "츠루하시 대학살을 하자"라고 당시 열네 살의 소녀가 외치고 있었다.(후략)

 아베 정권은 내셔널리즘을 부추겨서 한일 관게를 의도적으로 악화시켜 내정 문제 등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을 다른 나라로 돌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또 아베 신조가 재특회를 이용해 재일 한국인이나 조총련 등에 강하게 대처하는 것처럼 꾸며 자민당 신봉자나 우익 보수주의자들이나 국수주의자들을 늘려 미국과의 전쟁에 가담시키거나, 최종적으로는 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목적으로 보인다.

p56.

 구한말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당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친일단체로 거론되는 '일진회'가 결성되었다. 일진회 구성원 중에는 서재필이 만든 독립협회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독립협회와 민중들의 염원이었던 민회 설립 운동을 테러로 무자비하게 파괴해버린 고종 독재 정권으로는 도저히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 수 없다며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생각한 것은 '일본과의 연합을 통한 새로운 국가 만들기'였다.

 당시 일본 세력은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에게 "일본과 대한제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자"고 회유했고, 일본의 다루이 토키치라는 학자는 새로운 나라를 '대동(大東)'이라고 명명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일진회 회원들은 그런 일본 측 전략에 말려들어갔다. 일진회로 대표되는 일부 한국인들은 고종 정권이 타도되고 일본과 한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한다면 좀더 나은 나라에서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대등한 '합방'이 아니라 일본이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드는 '병합'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에 분노한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억울한 나머지 분사했고, 많은 일진회 회원들이 일본인 회원들에게 거짓 주장의 책임을 지고 할복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진회의 잘못은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정확한 비전이 결여된 데다, 새 국가 건설의 동기 자체가 일본을 무비판적으로 긍정하고 대한제국의 절망적인 상태를 너무 비관한 데서 비롯됐다. 더불어 일본의 교활함을 간파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p58.

 현재 일본 내의 극우파 단체들은 친일파 지원 기금 제도를 만들어 한국인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한다. 유명한 단체는 사사가와 재단(현, 니폰 재단)이다. 이런 극으파 단체들의 돈을 받고 사실상 일본의 논리를 한국 사회에 침투시키려는 일본 앞잡이가 된 한국인들이 의외로 많다. 

 어떤 학자는 1년에 30번 정도 일본을 출입국 한다. 일본 측에서 부르기 때문이다. 부르는 사람들은 일본 정부 모 부처, 공안, 일본 보수 단체 등 여러 곳이다. 그들은 주로 비공개 회의에 참석시켜서 질의응답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게 한다고 한다. 그는 교통비, 체재비뿐만 아니라 사례비로 한 회당 500~1,000만 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렇게 일본을 왕래하면서 1년에 적게는 1억5,000만 원 정도, 많게는 3억 원 정도를 버는 셈이 된다.

 이런 유혹에 빠지면 일본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비판력을 상실해 버릴 것이다. 혹은 일본의 망언이나 경제 보복 같은 사건이 일어나도 그런 한국인들은 오히려 일본을 옹호하는 편에 설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담은 도서를 발간하고, 유튜브 방송 등을 통해 일본 측 논리를 퍼뜨리기도 한다.

p81.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에게 지불하려는 10억 엔은 배상금이 아니라 보상금이었다. '보상'이라는 것은 합법적인 과정에서 일어난 손해를 보존해주는 것이다. 보상에는 '합법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따라서 일본이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것은 위안부 문제는 사실상 합법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다 박근혜 정권은 위안부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합법적이었다는 데 합의하고 말았다.

 필자는 이때 두 정부 사이에 뒷거래가 오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베 정권은 박근혜 정권에 위안부 문제를 보상 수준으로 해결해주지 않으면 경제 보복을 가하겠다고 계속 협박했을 것이다. 최근의 한일 관계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때까지 지속적으로 법적 책임과 배상 책임을 강하게 요구해오던 박근혜 정권이 한순간에 인도적 책임 정도로 문제를 일단락하려고 한 정황은 아베 정권이 '경제 보복'으로 박근혜 정권을 협박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때부터 일본 아베 정권은 박근혜 정권을 친일 정권으로 보기 시작했다. 실제로 박근혜 정권은 2016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 등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위안부 합의 이후 박근혜 정권과 아베 정권은 관계가 꽤 좋아졌다.

p82.

 문재인 정권은 위안부 합의를 검증했고 외교적 문제는 없지만, 피해자들의 의견을 무시해서 맺은 합의였다고 밝혔다. 파기나 재협상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위안부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 합의에는 이면 합의로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그리고 위안부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설립된 화해,치유재단 이사들의 사임으로 인해 운영이 중지되었고 2019년 7월 해산 절차를 모두 끝내 정식으로 해산되었다.

p97.

 한국 정부의 한일 지소미아 파기에 대해 한국 내에서는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우려를 나타냈고, 진보 언론들은 환영했다. 이렇게 의견이 양분되는 근본적 원인은 한일 지소미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소미아가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우선 한일 지소미아는 한일 군사동맹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016년 지소미아를 체결하는 이유로 거론된 것은 한일 간에 북한 관련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라는 내용뿐이었다. 마치 그것이 지소미아 목적의 모든 것인양 보도되었다. 그러나 북한 관련 정보 교환은 한일 지소미아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북한 관련 정보는 지소미아 체결 이전에도 한,미,일 간에 공유되어 왔다. 즉, 북한 정보 교환은 지소미아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다.

 한일 지소미아의 본질은 한일 악사(ACSA)와 함께 보면 쉽게 이해된다. 악사란 군사 물자 교환 협정이다. 이것은 전쟁터나 분재 지역에서 한국군과 일본 자위대가 무기를 비롯한 여러 군사 물자를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이다. 한때 남수단에서 한국군이 일본 자위대로부터 만발 정도의 탄환을 공급받은 적이 있었는데, 한일 간의 협정이 없는 상황인데도 공급을 받았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한일 지소미아와 한일 악사 체결이 한꺼번에 추진된 적이 있었다. 이 두 가지가 체결되면 누가 봐도 한일 양국이 군사동맹으로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명박 정권은 국민들의 반발을 고려해서 체결 1시간 전에 전격적으로 서명을 보류하기로 했다. 그런 경위가 있어서 박근혜 시절에는 지소미아와 악사를 분리해서 체결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한일 지소미아 체결 다음은 한일 악사 체결이 순서가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당시 미국은 오바마 정권이었는데, 오바마 정권은 아시아 재균형 전략이라 칭하면서 북한과 중국 포위망을 구축해 나갔다. 그 일환으로 한국에 사드를 배치했고, 사실상 한,미,일 군사동맹 구축을 추진했다.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가는 단계가 한일 지소미아와 한일 악사인데, 결국 이 두 개의 협정은 무력으로 북한과 중국을 굴복시키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가장 피해를 입을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일본 아베 정권은 제2의 6.25가 일어나면 다시 일본의 경제적 도약을 기대할 수 있어 한,미,일 군사동맹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일본이 목표로 삼은 것은 미일 군사동맹에 예속되는 한국의 지위다. 이제는 한국을 경제적으로 망가뜨리는 것뿐 아니라 제2의 6.25로 아예 남북한을 무너뜨려서 자신들만의 이익을 목표로 한다는 악마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베 정권을 비롯한 일본의 극우 세력이다. 

 한일 지소미아는 유사시 일본 자위대와 한국군의 전시 암호체계를 교환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국군과 일본 자위대는 유사시 하나의 군대처럼 움직일 수 있게 설계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 한일 지소미아가 체결된 지 이틀 후인 2016년 11월25일, 일본이 한국에 요구한 첫 번째 군사정보는 '부산 한국군의 배치도'였다. 북한 정보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부산 한국군의 정보를 왜 일본이 첫 번째 군사정보로 한국에 요구했을까? 한국 내 한국군의 배치도 전체가 일본 측에 넘어간다면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의 적성국가가 될 경우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p105. 한일청구권 협정

 최근 한일 외교 관계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시발점이 된 사건이 있다. 바로 강제 징용자 판결 문제이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수출을 규제하려는 이유가 경제 보복이 아닌 안보 문제 또는 한국의 수출 관리 문제뿐이라고 계속해서 말을 바꾸며 둘러대고 있지만, 사실 한국 대법원에서 내린 강제 징용자 판결 문제가 직접적인 이유라는 걸 상식적인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실제로 세코 히로시케 일본 경제 산업성장관은 지난 7월1일 트위터에 "구조선 반도 출신 노동자(강제 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해 G20까지(한국정부가)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아 신뢰 관계가 현저히 손상됐다."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 사실상 경제 보복을 인정한 증거를 트위터에 손수 남긴 것이다.

 아베 총리와 스가 관방장관도 강제 징용자 판결 문제로 한일 양국의 신뢰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실시한다고 분명히 언급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 한일기본조약과 4개의 한일협정을 체결했고, 그중 하나가 한일청구권 협정이었다. 이때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게 무상으로 3억 달러, 유상으로 2억 달러를 지급하는 데 최종적으로 합의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굴욕적인 협정이라며 대학생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한일기본조약 반대 시위가 심하게 일어났다. 더군다나 일본 정부는 우리에게 현금을 직접 주기보다는 사람들의 노동력이나 기자재 등을 제공하고 이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식으로 보상 처리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합계 5억 달러 지불의 명목이 경제 협력이었지 배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 제2조 일부] 양 체결국은 ... 양 체결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음을 확인한다.

 일본 정부는 한일청구권 협정문에서 이 문장을 근거로 삼아 국민간의 청구권, 즉 일본과 한국의 모든 국민이 가진 청구권이 1965년 6월22일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 징용 피해자, 즉 원고의 승소 판결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아베 정권은 1965년에 이미 끝난 문제를 들춰내서 일본 정부에게 돈을 내라고 요구했으니, 이것은 한국과 일본 간의 조약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주장하는 바는 무엇일까? 

 먼저 이번 판결은 사법부의 판단이므로 행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기본 입장이다. 그리고 이번 소송 자체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이지 한국이라는 국가가 일본이라는 국가에게 배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므로 국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한국 정부의 입장이다. 피해자였던 개인이 가해자였던 일본 기업(기업도 법적으로 개인에 속함)을 상대로 낸 소송이므로 1965년 체결한 한,일 청구권 협정의 결론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국가는 이번 강제 징용 배상 판결에 개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 쪽의 반달이 끊이지 않자 한국 정보는 한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2019년 6월19일까지 나온 판결에 대해 일본 기업이 성실하게 배상을 한다면 이후에는 한일 관련 기업들이 기금을 조성해 강제 징용 피해자를 구제하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한국 내 피해자들도 그렇게 하면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오히려 한국 정부의 해결방안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 재판의 본질적 쟁점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한국인의 개인 청구권까지 소멸되었는가?'에 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일본은 이미 1991년에 답을 내렸다. 그때 일본 국회에서 당시 일본 외무성의 조약국장은 세 번에 걸쳐 똑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국가로서 갖고 있는 외교보호권을 포기했음을 확인한 것이고 소위 개인의 재산,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인 뜻으로 소멸시킨 것이 아니다."

 이 답변의 의미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문에 국민의 청구권이 해결되었다고 적혀 있지만 그것은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는 외교보호권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지, 개인 청구권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확정되었을 때 일본 외무상인 고노 타로도 11월14일의 일본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개인 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개인 청구권이 남아있으나 구제를 받지 못한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나 개인의 배상 문제가 1965년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했다.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를 살펴보자.

 고쿠타 위원(일본 공산당 고쿠타 게이지 의원) : ...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전 징굥공의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판정했습니다. 이 개인의 청구권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국회 답변 등에서 청구권 협정에 의해 한일 양국 간 청구권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피해를 입은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해 왔습니다. ..,

 고노 다로 외상 :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만, 개인 청구권을 포함해 한일 간 재산 청구권 문제는 한일청구권 협정에 의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 한일 청구권 협정에 있어서 청구권의 문제는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고, 개인의 청구권은 법적으로 구제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입니다. ...

 고쿠타 위원 : .. 한국 대법원 판결은, 원고가 요구한 것은 미지불 임금이나 보상금이 아니라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 행위를 전제로 한 강제 동원에 대한 위자료, 이것을 청구한 것이라고 돼 있다. 그리고 한일청구권 협정 교섭 과정에서 일본 정보는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근본적으로 부정했다고 지적하고 이런 상황에서는 강제 동원 위자료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현 일본] 정부는 한일청구권 협정 체결 시 한국 측으로부터 제출 받은 대일 청구 요강, 이른바 8개 항목에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이라고 기술되어 있고, 합의 의사록에는 이 대일 청구 요강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청구가 포함돼 있다고 하는데, 그 안에 위자료 청구권은 들어 있습니까?

 미카미 정부 참고인(외무성 국제법 국장) : 대답해 드립니다. 그런 청구권도 포함해서 전부 대상이 되었다는 입장입니다. ...

 고쿠다 위원 : 언제부터 그렇게 범위가 확대되었나요? 그런 이야기는 안 쓰여 있는데요. [외무성의] 야나이 조약 국장은... "쇼와 40년(1965년) 이 협정을 체결해서 그것으로 우리나라[일본]에서 한국과 한국 국민의 권리, 여기서 말하는 '재산, 권리 및 이익'에 대해 일정한 것을 소멸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이지만 그런 것들 중에 이른바 위자료 청구라는 것이 들어 있었다고는 기억하지 않습니다."라고 분명히 위자료 청구라는 것이 들어 있지 않았다, 들어 있었다고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 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어쨋든 간에 쇼와40년(1965년) 이 협정을 체결해서 우리나라(일본)에서 한국과 한국 국민의 권리, 여기에 말하는 재산,권리 및 이익에 대해서 일정한 것을 소멸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인데, 그런 것들 중에 이른바 위자료 청구라는 것이 들어 있었다고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분명히 이 일련의 청구권 협정과 관련된 협상 과정에서 이뤄진 문제에 대해 위자료 청구권은 들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몇 차례 분명히 했다. 이것이 그동안의 답변 아닌가요? 그 답변을 부정한다는 말씀입니까?

 미카미 정부 참고인 : ... 야나이 국장의 답변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일본 내에서 법률을 만들어서 그 실체적인 재산,권리,이익에 대해서는 소멸시킨 것입니다. 그러니 청구권이라는 것은 그런 재산,권리,이익과 같은 실체적 권리와 다른 잠재적인 청구권이기 때문에 그것은 국내법으로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야나이 국장은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법으로 소멸시킨 것은 실체적인 채권이라든가, 이미 그 시점에서는 확실한 재산, 권리 , 이익이므로 그 시점에서 실체화되지 않았던 청구권은 여러 가지 불버 행위라든가 재판을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소멸되지 않았다. 따라서 처음 말씀드렸듯이 권리 자체는 소멸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에 갔을 때 그것은 구제받지 않는다. [구제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양국이 약속했다고 생각합니다.

 고쿠다 위원 : ... 분명히 이 문제 대해서는 위자료 청구권은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 답변으로 지극히 명백해졌스니다. 게다가 당시의 답변은 그대로였다는 것을 확인해 두고 싶습니다.

 이상의 인용문을 보면 2018년 11월 시점에서도 일본 정보는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고 배상 문제는 한일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분명히 인정했다. 그런데도 재판에서 개인은 구제를 받지 못한다고 궤변을 늘어놓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한국이 1965년에 일본과 맺은 약속을 어기고 있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한국은 한일청구권 협정의 약속을 지키고 있고 그때 소멸되었다는 외교보호권을 발동하지 않았다. 단지 국가가 아니라 한국의 개인이 남아 있는 개인 청구권을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최근 일본 정부에서 내놓는 답변이나 의견 자체가 상당히 왜곡이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언론조차도 이에 대한 비판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p116. 개인 청구권 효력의 유지

 최근 한일청구권 협정을 두고 일본 정부의 말 바꾸기 문제가 심각하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 과연 진실이 무엇인지 깊이 파헤쳐 보도록 하자.

 일본 국회 회의록을 보면,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에서 개인 청구권이 아니라 국가의 외교보호권이 소멸되었다는 내용이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다음은 1991년 8월 27일 국회에서 나눈 질문과 답변의 일부를 원문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의 대표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야나이 순지 조약국장 : 양국 간의 청구권 문제는 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되었다. 그 의미는 한,일 양국간의 국민의 청구권을 포함해서 해결했다는 것이지만, 이것은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갖고 있는 외교보호권을 상호 포기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서 개인 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 양국 정부가 개인 청구권 자체를 국낸법적인 의미로 소멸시킨 것이 아니다. 양국 정부가 개인 청구권을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여 거론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발언을 같은 해 12월5일에 역시 국회에서 야나이 순지 일본 외무성 조약국장이 한 번 더 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야당 의원 : 한,일 간에는 목돈을 들여서 일단 국가 차원에서는 처리한 경위가 있다. 그러나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개인 청구권을 국내법적인 의미로 소멸시킨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갖고 있는 외교보호권을 상호 포기했지만 개인 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 따라서 청권권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야나이 순지 조약국장 : 청구권의 포기가 의미하는 바는 외교보호권의 포기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한국 국민의 청구권에 대해 일본 정부에 청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인 청구권이 국내법적인 의믜로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씀하신 대로다.

 같은 해 12월13일에도 일본 국회에서 야나이 순지 조약국장이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이들 규정은 양국 국민 간의 재산,청구권 문제에 있어서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갖고 있는 외교보호권을 포기했음을 확인한 것이고 소위 개인의 재산,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인 뜻으로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동안 말씀드린 대로다. 이것은 소위 조약상의 처리의 문제다.

 위의 자료처럼 일본 정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일본 국내에서만이라도 한국인의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키는 국내법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1965년 일본의 국내법 법률 제144호로 이른바 '재산권 조치법'이라고 불린다.

 [법률 제144호] 1. (전략) 대한민국 또는 그 국민의 재산권이자,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 및 경제 협력에 관한 일본국과 대한민국 사이에 협정 체 2조3의 재산,권리 및 이익에 해당되는 것은 1965년 6월22일에 소멸되었다.

 이 법률에 있는 1965년 6월22일은 한,일 청구권 협정이 체결된 날짜이다. 이때 한국인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자기들끼리 국내법을 만들어 정해버렸다. 전술하 바와 같이 2018년 11월14일 일본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일본 정부 외무성 국제법 국장 미카미 씨는 "일본 내에서 법률을 만들어서 그 실체적인 재산,권리,이익에 대해서는 소멸시킨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 법률 제144호를 뜻한다. 그러나 이 법률에서도 소멸시킨 것은 한국인의 '재산,권리 및 이익에 해당되는 것'으로 불법 행위에 관한 배상금이나 위자료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사항은 이 법률로 일본 정부는 일본인의 개인 청구권은 소멸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자국 국내법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권리 및 이익에 해당되는 개인 청구권만 소멸시키고 일본인의 개인 청구권은 그대로 남겨놓았다. 이런 면에서 이 국내법은 매우 불공평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대한민국은 자국의 국내법으로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의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키지 않았다. 이와 관련한 국내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내에서는 개인 청구권을 활용해 충분히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상황이 계속되는 것이다. 2005년 노무현 정권 때 가동한 청구권 협정에 관한 관민합동위원회에서도 재산,권리 및 이익에 관한 보상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종결되었으나 개인의 배상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2018년 10월 내려진 일본 기업에 대한 배상 명령, 즉 한국인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명령은 정당한 사법적 판단이었다.

p120.

 우선 2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일본 기업이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

 "일제강점기는 불법이며, 불법 강제 노동에 대한 개인의 손해배상은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선고에 따르면 1965년 청구권 협정에서는 일본이 '배상금'이 아닌 '보상금'을 낸 것이다. 보상금과 배상금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개념이다. 한국 대법원은 일제강점기가 불법이었고, 불법으로 강제 노동에 동원했으므로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다. 강제 징용자, 여자 근로 정신대 등 일제강점기의 피해자에 대해서 일본 기업은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위자료는 배상금의 개념이다. 1965년 청구권 협정 때나 2015년 위안부 합의 때 일본에서 한국 쪽에 건넨 돈은 모두 보상금이었다.

 여기서 보상금과 배상금의 개념을 다시 정리해보자. 보상금이라는 것은 적법 행위 과정에서 손해가 생기면 그것에 대해 지급하는 금전이고,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보상금은 전체적인 과정은 합법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내는 돈이다. 하지만 배상금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행위 자체가 위법 행위였고, 그 과정에서 손해가 발생해서 지급하는 금전을 말한다. 지금까지도 일본은 일제강점기를 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 측에 단 한 번도 배상금을 지급한 적이 없었다. 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일본이 항상 일제강점기를 합법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가장 최근의 사례를 보면 1998년 10월 한,일 양국은 파트너십을 선언했다. 이 파트너십 선언에서 일본은 과거에 한국에 피해를 입힌 가해자였다고 인정했고,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정식으로 사과했다. 이처럼 서로 인정하고 사과한 내용을 공식 문서에 적었다. 일본이 가해자였고 한국이 피해자였음을 선언하는 것은 일본이 위법 행위를 했다고 인정한 것이고, 따라서 일제 강점기는 불법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이런 의미에서 1998년 한,일 파트너십 선언문은 일제강점기가 불법이었다는 하나의 근거가 되는 문서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 아베 정권은 일제강점기가 불법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강제 징용자 판결 문제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보복 조치를 취하겠다고 여러 번 언급했다. 이러한 발언 자체가 일본 기업들에게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강압적 메시지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1991년 당시 일본 정부가 스스로 인정한 외교보호권의 소멸을 지금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외교보호권을 발동하고 있어 문제가 크다. 2012년 5월 한국대법원이 신일본제철에 배상금 지급을 명령했을 때 신일본제철 측은 처음 한국 법원의 판결을 따르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뒤에서 계속 막아왔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부당한 외교보호권의 발동이라고 할 수 있다.

 2019년 7월1일부터 시작된 아베 정권의 경제 보복도 외교보호권의 부당한 발동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2019년 3월13일 아소 다로 부총리는 일본 국회 중의원 재무금융위원회에서 강제 징용자 판결로 인해 일본 기업에 피해가 생길 경우 "관세를 올리는 일에 한정하지 말고 한국으로의 송금 정지, 비자 발급 정지 등 여러 가지 보복 조치가 있을 수 있다"고 발언했다.

 한국 대사를 역임했지만 대표적인 혐한파로 알려진 무토 마사토시는 2018년의 한국 대법원 판결 직후 한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핵심 부품을 규제한다든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수입하는 제품에 관세를 올리겠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고 했다. 이들 중 반도체 핵심 부품은 이미 수출규제가 되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일본이 부당한 외교보호권을 강하게 발동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991년 일본 정부가 스스로 입 밖으로 낸 사실, 즉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한일 양국의 외교보호권이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어기는 셈이 된다. 한,일 청구권 협정을 위반하는 나라는 다름 아닌 일본인 것이다.

 반면 한국 정부는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제소한 재판 결과에 대해 기본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방침을 고수해왔다. 이는 삼권 분립의 원칙을 지키는 올바른 자세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재 일본 아베 정권은 자국도 아닌 타국, 즉 한국의 사법주가 내린 판단에 개입하려 하고 있다. 이는 한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행위와 마찬가지이고 있을 수 없는 무례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은 한국의 정당함과 일본의 부당함을 계속 세계에 알려야 한다. 앞으로 일본의 보복 행위 자체를 막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은 일본에 그리고 국제 사회에 일본의 부당성과 한국의 정당성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p129.

 2005년 정부가 강제 징용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관민 합동위워뇌의 자료를 확인해보면 '한일청구권 협정은 채권,채무 관계를 해겨라기 위한 것이었다. 반인도적 불법 행위는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되어 있고 당시 백서에는 '피해자 개인들이 일본에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가능하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2005년 관민합동위 자문 위원이었던 조시현 씨는 "일본 정부와 기업이 책임질 때까지 피해자의 고통을 경감시킬 인도적인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보상조치를 실시하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하는 조치였다."고 당시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을 지급했다고 2019년 7월17일 MBC 뉴스에서 밝히기도 했다. 

 따라서 대법원의 2018년 판결은 정당하고, 2005년 노무현 정권의 입장과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 팩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일보 등은 2019년 7월,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보상은 이미 끝났고, 이 내용은 노무현 정부에서도 확인했다는 기사를 냈다. 이 기사의 결론은 한국이 일본에 더 이상 보상을 요구하면 안 된다는 함의가 들어 있다. 아무리 보상이 끝났다는 말이 옳다고 치더라도 조선일보 등은 '배상'문제는 남아 있다는 점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기사를 일본어판 신문에도 게쟇했다. 남아 있는 '배상' 문제를 숨기고 일본 정부의 판단이 옳다는 잘못된 기사를 왜 태연하게 일본어로도 발신했는지 그들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p137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일본이 우세했지만 미드웨이 해전(1942)을 계기로 전세가 미국으로 기울었다.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각각 투하되면서 1945년 8월15일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패전 후 연합국의 점령 통치를 받던 일본은 1951년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해 패전과 전범을 정한 국제재판의 판결을 인정하는 대신 주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와 동시에 미,일 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고 반공 진영에 편입되었다.

 일본에서 이러한 샌프란시크코 강화조약을 수용한 세력이 바로 '보수 본류'이다. 보수 본류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일본이 침략 국가이자 전범국가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보수 세력이라고 해도 보수 본류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나라임을 기본적으로 인정한다. 둘째, 평화헌법을 지키려고 한다. 1946년 미국의 주도로 제정된 일본국헌법은 평화헌법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제9조에 일본이 전쟁을 포기하고 전쟁의 수단으로서 군대를 가질 수 없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 보수 본류는 특히 헌법 제9조를 지키려고 한다. 그리고 보수 본류는 마지막으로 미국과 협력하려 한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서 전후 일본의 정치를 이해하려면 '55년 체제''라는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1950년대 전반 보수 정당의 일부 국회의원들이 전쟁 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을 개정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1955년 사회당의 좌파와 우파는 평화헌법 유지와 미,일 안전보장조약 강화 반대를 내걸고 다시 손을 잡아 사회당을 통합했다. 이에 대항해 일본의 보수 세력이었던 자유당과 일본 민주당도 자유민주당(자민당)으로 통합되었다.

 일본 국민들은 보수 정당인 자민당과 진보 정당인 사회당이 서로 견제하는 양당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자민당이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했고, 사회당이나 공산당 등 야당은 정치의 중심에서 소외되었다. 이러한 정치 체제를 '55년 체제'라고 부른다. '55년 체제'는 자민당 1당 우위 체제였다. 그런데 1993년 자민당 보수 본류에 속하는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자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해 '55년 체제'는 38년 만에 붕괴되었다.

 일본 보수에는 보수 본류와 대비해서 또 하나의 세력인 '보수 비주류'가 있다. 현재 자민당에서 아베 신조를 중심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극우파 세력이 원래는 보수의 비주류였다. 보수 비주류의 대표적인 인물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이다. 현재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기도 한 기시 노부스케를 일본 보수 비주류, 즉 극우파의 시작으로 본다. 지금은 비주류를 '극우파'라고 부른다.

 극우파는 보수 본류와는 정반대의 내용을 주장해 왔다. 우선 극우파 사람들은 일본이 침략 국가였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이들은 '역사 수정 주의자'로 불리며 역사를 상당히 왜곡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극우파는 샌프란시스코 체제도 변경하고자 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일본을 전범국가 또는 적성국가로 규정하고 있는 내용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가져왔다. 또 평화헌법을 개정해 자위대가 아닌 정식 군대인 '일본군'을 부활시키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협력하려고 한다. 이 부분은 보수 본류와 일치하기는 하지만 협력하고자 하는 내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그들은 미국과 함께 전쟁을 치르려고 한다.

p148.

 1996년 6월 자민당은 사회당과의 연립 내각을 탄생시켰다. 이때 자민당-사회당 연립정권의 총리는 당시 사회당 당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1924~)였다. 자민당은 사회당을 끌어들여서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는데, 사회당이 캐스팅 보드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당에서 총리가 탄생한 것이다. 자민당-사회당 연립정권에서는 자민당의 국회의원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연립정권으로 정권을 잡을 계획으로 사회당의 의석 수를 빌릴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 사회당의 당수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가 되었다. 이제 자민당 단독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 이후 연립 여당으로 자민당은 정권을 잡게 된다.

 하지만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사회당 출신으로 상당히 리버럴한 사상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무라야마 총리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게 되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1995년 8월15일 전후 50주년 기념식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세계를 향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이 담화는 일본의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공식 사죄로 평가되었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많은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는 역사적 사실을 겸하하게 받아들여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하지만 자민당 내 극우파 세력은 이 담화에 격렬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극우파들은 당 내에 역사검토위원회를 조직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라 아시아를 백인 지배하에서 구원한 '해방 전쟁'이라는 주장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자민당 안에 많이 남아 있었던 비주류 세력이 이제 자민당 내 주류가 되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민당 내 역사검토위원회는 1995년 8월15일 무라야마 담화 발표에 맞춰서 [대동아전쟁의 총괄]이라는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에서 자민당 내 극우파 사람들은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일본은 침략 전쟁이 아닌 해방 전쟁을 했으며 일본은 절대 전범국가가 아니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피력했다.

p180.

 한편 불행하게도 간 나오토 정부 시절 일본에서 큰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 태평양 연안에서 규모 9.0의 대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하면서 연안 지역은 큰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일본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동일본 대지진으로 사망자는 약 2만 명, 실종자는 약 2,500명에 이른다.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은 도시 가운데 하나가 이와테현(岩手県)이다. 

 이와테현 앞바다에서 지진이 발생해 쓰나미가 일어났는데 가장 높은 쓰나미는 15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반면 이와테현 바닷가의 제방 높이는 10미터에 그쳤다. 이와테현에는 예부터 쓰나미가 자주 발생했고 그동안 쓰나미의 최고 높이는 5.7미터였기 때문에 10미터 제방으로 충분히 쓰나미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고 현의 당국자들은 생각했다. 그런데 10미터를 넘는 거대한 쓰나미가 제방을 넘어 도시 전체를 휩쓸어버렸다. 이렇게 동일본 대지진은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재난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에 의해 이와테현 남쪽에 위치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시설이 파손되어 방사능이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원전 사고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면서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그 피해의 등급이 국제 원자력 사고 등급의 최고 레벨인 7이었다. 1986년 발생한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등급과 같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에 속해 있는 체르노빌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로 방사능 피해가 사방 약 600킬로미터에 미친다고 했다. 그러므로 당시 구소련은 체르노빌 원전을 콘크리트로 막았다. 따라서 같은 레벨인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사방 약 600킬로미터에 방사능 피해를 준다고 볼 수 있다. 후쿠시마에서 도쿄까지가 약 30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오사카까지 약 60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니 사실상 일본열도 중 매우 넓은 영역에서 방사능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구소련에서는 체르노빌의 원전을 콘크리트로 모두 막아서 밀폐시킨 후 100년 이상 지나야 방사능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다고 진단했다. 지금까지도 체르노빌은 주변 30킬로미터 내에는 출입 금지구역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은 콘크리트로 막는 조치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쿠시마에서는 원전의 반경 20킬로미터 내를 출입 금지구역으로 지정했다. 콘크리트로 막지도 않았는데 출입 금지구역이 체르노빌보다 좁다.

 일본 정부는 체르노빌처럼 사람들이 후쿠시마 원전 주변에 다시 살지 않을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원전을 콘크리트로 막아버리는 대신 방사능 수치를 낮추는 작업을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간 나오토 정부의 실책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일본 국민들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정부의 조치에 계속 불안을 느끼면서 간 나오토 정부의 지지율도 계속 떨어졌다.

 p190.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1833~1877)라는 인물이 있따. 이 사람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1828~1877),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1878)과 함께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메이지유신 삼걸'로 불린다.

 기도 다카요시는 한국과도 관련이 깊다. 1875년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이듬해에 강화도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는데, 기도 다카요시는 운요호사건을 주도한 인물이다. 기도 다카요시는 1868년 메이지 정부를 성립시킨 후 "조공하지 않는 조선에 위약의 죄를 물어 공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원조 정한파다. 요시다 쇼인의 왜곡된 사상의 영향으로 기도 다카요시는 에도시대에 12번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조선통신사를 조공사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도 초슈번 출신 인물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메이지 헌법을 기초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일본 헌정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당시의 일본 국회읜 제국의회를 개설하는 공로를 세웠으며, 무려 여섯 번이나 총리를 역임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국민적 영웅이었지만, 말년에 한국에 건너와서 을사늑약을 강요한 조선 침략의 원흉이 되었다.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되었다. 당시 일본에서의 영웅들은 한국이나 아시아에 있어서는 침략자들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매우 가까웠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는 청.일 전쟁 당시 조선 공사로 부임했다. 그는 일본을 위해 조선에서 공작 활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노우에 가오루의 추천으로 미우라 고로(三浦梧楼, 1846~1926)라는 군인이 그의 후임으로 조선 공사로 부임했다. 

 미우라 고로는 일본공사관 밖으로 나가지 않는 조용한 인물로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했다. 친로파가 된 명성황후 때문에 대한제국이 러시아로 넘어갈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이노우에 가오루-미우라 고로 라인에서 명성황후 시해를 결정해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그들은 명성황후 시해 계획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문서를 남기지 않는 작전을 썼기 때문에 을미사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내용들이 많다.

p197.

 요시다 쇼인의 핵심 주장에는 아시아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 그는 저서 [유수록(幽囚錄)}(1854)에서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등을 주창해 일본 메이지 정부의 팽창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음은 [유수록]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다.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에조(蝦夷=훗카이도)를 개척하여 제후를 봉건하여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유구(琉球=오키나와)에 말하여 제후로 만들고 조선을 책하여 옛날처럼 조공을 하게 만들고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들을 노획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

p201.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 초슈번 초혼장.

 초슈번의 젊은 지도자들은 스승 요시다 쇼인의 뜻에 따라 전쟁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초슈번 무사들의 위령제였다. 이 위령제는 현재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이 되었다. 위령제를 고안한 인물은 요시다 쇼인이 가장 아꼈던 애제자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1839~1967)였다. 그는 근대 일본군의 모체가 된 기병대를 만들고 지휘했고, 에도막부 타도를 주도하기도 했다. 

 다카스키 신사쿠는 아베 신조와도 관련이 깊다. 아베 신조(安部晋三)의 이름에서 '신(晋)'은 다카스키 신사쿠의 이름에서 따왔다. 아베 신조는 다카스키 신사쿠처럼 자신도 요시다 쇼인의 첫 번째 제자라는 생각을 갖고 활동한다고 이야기해 왔다. 아베 신조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部晋太郎) 역시 다카스키 신사쿠의 이름에서 '신'을 따왔다. 아베 신타로도 스스로를 쇼인의 첫 번째 제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들 신조가 아버지의 입장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초슈번의 군대와 에도막부 군이 불가피하게 수많은 전투를 치러야 했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희생되는 초슈번의 무사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카스키 신사쿠는 죽은 초슈번 무사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위령제를 거행했다. 위령제를 거행하는 장소인 초혼장은 초슈번 안에 시모노세키의 사쿠라야마 초혼장을 비롯해 총 열여섯 군데나 있었다. 이 초혼장들을 운영했던 중심 인물이 다카스키 신사쿠였다.

 초슈번에서는 쉬지 않고 위령제를 지내 죽은 무사들의 영혼을 달랬다. 위령제의 주된 목적은 에도막부와의 전쟁에서 초슈번 사람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다. 마침내 초슈번과 사쓰마번은 에도막부를 타도해 메이지 정부를 세우게 되었고, 메이지 2년이 되는 해인 1869년 초슈번 사람들은 초슈번에 있던 초혼장을 모체로 도쿄에 큰 초혼장을 건립했다. 이렇게 해서 도쿄 초혼사(招魂社)가 만들어졌다. 10년 뒤인 1879년 도쿄 초혼사는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로 명칭을 바꿨다. 따라서 야스쿠니 신사의 기원은 초슈번의 초혼장인 셈이다. 초슈번 계열인 아베 신조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계속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p298.

 아베 신조와 혐한 세력, 그리고 일본회의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은 침략 국가가 아니었다. 백인 지배하에 놓인 아시아를 해방해 줬을 뿐이다. 일본군은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 위안부 제도는 합법적인 제도였고 일본 병사들이 현지 여성들을 강간하지 않도록 만든 훌륭한 제도였다. 위안부는 모두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상업적 여성들이었다. 강제 연행이나 강제 동원은 거짓말이다. 난징 대학살은 연합군이 만든 날조다. 일본군은 어디로 가도 환영받았다. 앞으로도 일본군은 적극적 평화주의로 아시아에 평화를 실현할 것이다. 그리고 대일본제국은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대만을 근대화해 주었다. 조선인이나 대만인을 평등하게 대해주었고 교육했고 차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한국인들이다. 그들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다고 강조하고 여성들을 강제 연행해서 위안부라는 이름의 성 노예로 만들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한국인을 강제적으로 동원해 보상금이나 배상금을 버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아름다운 일본'을 '더러운 일본'으로 왜곡, 날조해 가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있으면 안 되는 존재다. 그들을 일본에서 쫓아내야 하고 한국에서도 못 살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 일본에 머리 숙여 굴복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들에 대한 혐한은 당연한 행위다. 혐한을 진실을 밝히는 정당행위다. 그리고 일본 국민들이 갖는 불만의 분출구로 한국과 한국인을 이용해야 한다.... "

 극우파들은 계속 외친다.

 "일본의 아래에 있어야 할 한국이 요새 너무 성장해 버렸다. 다 일본 덕분인데 은혜도 모르고 이제 일본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추월하려고 한다. 용납할 수 없다. 제2의 한국전쟁을 일으켜서라도 한국을 무너뜨려야 한다. 한국은 항상 아름다운 일본의 아래에 있어야 한다."

 이런 극우파들을 결국 심판할 사람들은 양식이 있는 일본인들일 것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너무 행동력이 없다. 국민의 50%는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시위를 해도 조금밖에 모이지 않는다. 그러나 극우파가 일본을 망가뜨렸다고 깨달은 일본인들이 조만간 나타나 선거에서 자민당을 패배시켜 아베 신조를 총리 자라에서 끌어내릴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극우파들은 이제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 아베 신조의 정책 집단이자 행동 부대인 일본회의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신사 본청은 국가의 승인을 받으면 다시 45년까지의 국가신도로 복원된다. 야스쿠니 신사도 국가신도의 중심적인 전쟁 수행 신사로 거듭난다. 혐한 분위기는 계속 확대되어 한국의 신친일파들을 동원하면서 한국인의 정신을 교란시킬 것이다.

 이런 일본의 도전에 적절히 대응하려면 한국에도 거대한 대(對) 일본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이러한 정세를 깨달은 한국인들이 그런 네트워크를 조속히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네트워크는 일본에 관한 남남 갈등을 해결해야 하고 일본의 극우파 논리를 극복해 그들을 굴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일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전후로부터 한국에 친일파를 양성해 왔다. 우리 대한민국은 120년의 적폐를 청산해 나가야 한다.

 

 

 

 


팟캐스트에서 광고를 듣고 본 책.

이 책을 본 후 든 생각은 정치란 아주 섬세한 과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사람의 마음, 유권자의 마음, 한 나라 전체를 이끌어갈 대통령이 되기 위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과연 진인사 대천명이로구나 하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이 책을 보면서 새롭게 안 사실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노무현과 정동영의 관계, 호남에 연고를 둔

정치인들의 마음의 한켠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식으로 생을 마감한 것은 안타깝지만, 그 희생때문에 우리나라의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의식수준이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세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유래가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겠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현대 정치의 이면에 담긴 고도의 정치철학과 진보와 보수, 우파, 좌파, 신좌파등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이 책에는 담겨져 있다.


탄핵 국면에서 나왔던 책으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던 책.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는 정치,사회분야에서 10위를 달리고 있다.

더욱 웃기는 건, 현재 박근혜 탄핵이후 대통령 대리를 하고 있는 황교안 국무총리에 대한

책이 "황교안 2017"이라는 이름으로 나와있는데, 이 책이 3위라는 사실이다.

보수라는 이름을 앞세워 대한민국을 농락하고 있는 세력(보통 이 계보를 조선시대 노론->식민시대 친일파->해방이후 척결되지 않고 사회곳곳에서 미군의 힘을 업고 살아남은 친일후손들)들이 만만치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 이전에 새누리의 대선후보였던 반기문은 대선후보로서의 검증작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꼬리를 내렸지만, 그래도 이 세력들이 반기문을 띄우는 사전작업으로 책 2권을 낸게 있었는데 그것도 베스트셀러 상위에 오른바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그리고 진솔해 보인다.(내가 이 사람 개인적으로 알수가 없기에 그게 사실인지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남자의 나이 60이 넘으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어느 정도 얼굴에 보인다. 이 사람은 지금 허허거리고 웃는 얼굴이지만 그리 우스운 사람이 아니다.

특히 노무현이 어떻게 갔는지를 옆에서 지켜봤기에 지금의 새누리와 그 잔당들은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될까봐 좌불안석일 것이다.(최근 영화 더킹에서 노무현만 안되기를 바랐던 검찰수뇌부처럼 말이다)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고, 2000년전에 이미 우매한 대중에 의한 민주주의란 것이 얼마나 국가를 피폐하게 하는 위험한 정치제도란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열망에 의한 대중의 지지란 것은 정말로 위험한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사랑이 식으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듯이.

우리가 정치인을 뽑는 행위는 무슨 연예인 투표같은게 아니다. 회사에서 경력직 사원을 뽑는 것과 비슷하다. 만일 그런 마음으로 우리 국민들이 대통령을 뽑았다면 아마도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2000년전 플라톤이 했던 대중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분석이 촛불과 박근혜의 탄핵으로 현대에 와서 희망적 대중민주주의를 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유종의 미가 19대 대선으로 완성될 수 있을지가 기대된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유력한 대선 후보중 1인인 그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은 봐두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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