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과 같이 현 세기를 살아나가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가진 문제의식을 21가지 주제를 가지고 풀어쓴 내용.

맨 뒤의 명상 챕터는 다소 사변적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되기는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니체가 외치는 초인처럼 덧없는 이야기라고 느껴지긴 한다.

그리고 고통만이 실재다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 논의가 깊긴 하지만 다소 너무 간단하게 실체를 정의한 감이 없지않다.

1번만 읽어서는 평가하긴 곤란하긴 하다. 최소 3독은 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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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

 20세기가 끝날 무렵 파시즘,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거대한 이념 전쟁은 자유주의의 압도적 승리로 귀결되는 듯 보였다. 민주적 정치와 인권, 그리고 시장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정복하도록 예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역사는 예상 밖의 선회를 했고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 지금 자유주의는 곤경에 처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이 질문이 특히 통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분야의 쌍둥이 혁명이 지금껏 인류가 맞닥뜨려온 최대 과제를 던지는 이 시점에서 자유주의가 신뢰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을 합친 힘은 조만간 수십억의 사람들을 고용 시장에서 밀어내고 자유와 평등까지 위협할 수 있다.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모든 권력이 소수 엘리트의 수중에 집중되는 디지털 독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럴 경우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지경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무관함 irrelevancce 이다.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의 융합에 관해서는 이미 전작 《호모 데우스》에서 상세히 논했다. 하지만 그 책은 장기적인 전망 - 수 세기, 심지어는 수천 년의 관점 - 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 책은 당면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 집중한다. 이 책에서 관심은 비유기적 생명의 창조 여부보다는 복지국가, 특히 유럽연합과 같은 제도에 닥친 위협에 있다.

 이 책에서 신기술이 야기할 모든 영향을 다룰 생각은 없다. 특히 오늘날 기술은 많은 놀라운 약속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 나의 의도는 주로 그것이 초래할 위협과 위험을 조명하는 것이다. 기술 혁명을 주도하는 기업과 사업가 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을 예찬하는 노래를 부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회학자나 철학자 그리고 나 같은 역사학자가 할 일이란 경고음을 내고 치명적인 잘못을 유발할 모든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p15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여유가 없다. 철학과 종교, 과학 모두 시간이 다 돼간다.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인생의 의미를 두고 논쟁해왔다. 그러나 이 논쟁을 무한정 계속할 수는 없다. 다가오는 생태학적 위기, 커져가는 대량 살상무기의 위협, 현상 파괴적인 신기술의 부상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인공지능과 생명기술이 인간에게 생명을 개조하고 설계할 힘을 건넬 것이다. 머지않아 누군가 인생의 의미에 관한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어떤 이야기를 기반으로 이 힘을 어떻게 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공학자는 인내심이 평균보다 훨씬 낮고 투자자는 최악이다. 생명을 설계할 힘으로 무엇을 할지 당신이 모른다 해도, 답을 찾을 때까지 1,000년의 시간을 시장 권력이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자신의 맹목적인 답을 당신에게 강요할 것이다. 인생의 미래를 분기 수익 보고서에 맡기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p22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닥친 이래 전 세계 사람들은 자유주의 이야기에 점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장벽과 방화벽이 다시 유행이다. 이민자와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저항감은 높아만 간다. 겉만 민주적인 정부들은 사법 체계의 독립성을 전복하고, 언론자유를 제한하며, 어떤 반대도 반역으로 몰아간다. 터키와 러시아 같은 나라의 스트롱맨은 새로운 유형의 반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노골적인 독재를 실험한다. 오늘날 중국 공산당을 두고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 있다고 자신 있게 선언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부상으로 뚜렷이 각인된 해였던 2016년은 이러한 환멸의 파도가 서유럽과 북미의 핵심 자유주의 국가들에까지 가 닿은 순간임을 의미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인과 유럽인은 이라크와 리비아를 무력으로 자유화하려 애썼지만, 이제는 켄터키와 요크셔 주님의 다수가 자유주의 청사진을 바람직하지 않거나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옛날의 계층화된 세상을 다시 그리워하게 되었고, 이제와서 인종적, 민족적, 젠더적 특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또다른 이들은 (옳든 그르든) 자유화와 세계화라는 것이 결국에는 대중을 제물로 소수 엘리트들에게 힘을 건넨 거대 사기라고 결론 내렸다.

 

 1938년, 사람들에게 주어진 전 지구적 이야기의 선택지는 세 가지였고, 1968년에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98년에는 한 가지 이야기만 득세하는 듯 보였다. 급기야 2018년이 우리 앞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세계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충격과 혼미의 상태에 빠진 것도 당연하다. 하나의 이야기만 존재한다는 것은 가장 마음이 놓이는 상황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아무런 이야기도 없어진 상태는 끔찍한 일이다. 아무런 의미도 파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흡사 1980년대 소련의 엘리트처럼 지금 자유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 역사가 예정된 경로에서 벗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을 해석할 대안적인 프리즘도 가진 게 없다. 방향감을 잃은 이들은 마치 역사가 자신들이 머릿속에 그린 해피 엔딩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마겟돈을 향해 돌진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종말론적 사고에 빠져들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정신은 재앙적 시나리오에 집착하게 된다. 지독한 두통을 치명적인 뇌종양의 신호라고 상상하는 사람처럼,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이 인류 문명의 종언을 예고한다고 우려한다.

 

p27

 생명기술과 정보기술의 혁명ㅇ은 기술자와 기업가, 과학자 들이 만들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는지 거의 알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대표하지 않는다. 의회와 정당이 알아서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그럴 것 같지 않다. 기술의 파괴적 혁신은 정치적 의제에서 우선 사안도 아니다. 그 결과, 2016년 미국 대선 기간에도 파괴적 기술과 관련해 주로 언급된 것은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이었고, 실직에 관한 온갖 이야기 중에도 자동화의 잠재적 충격 문제는 어느 후보도 언급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는 유권자들에게 그들의 일자리를 멕시코와 중국이 가져갈 것이며, 따라서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건설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알고리즘이 일자리를 가져갈 거라는 경고는 하지 않았고, 캘리포니아 접경에 방화벽을 세워야 한다는 제안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자유주의 서방의 심장부에 있는 유권자들조차 자유주의 이야기와 민주적 절차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는 한 가지(유일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유가 될지 모른다. 보통 사람은 인공지능과 생명기술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옆을 지나가는 미래를 감지할 수는 있다. 1938년 소련과 독일 혹은 미국에 살았던 보통 사람은 삶의 조건이 암울했을 수는 있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며 미래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다(물론 그가 유대인이거나 흑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임을 전제로 했을 때 얘기다). 그는 선전 포스트를 보았고 - 여기에는 보통 석탄 캐는 광부, 철강노동자, 영웅적인 포즈를 취한 가정주부가 그려져 있었다 - 그 속에서 자신을 봤다. "저 포스터 속에 있는 건 나야! 나는 미래의 주인공이야!

 하지만 2018년의 보통 사람은 점점 자신이 사회와 무관하다고 느낀다. 수많은 신비한 단어들 - 세계화, 블록체인, 유전공학, 인공지능, 기계 학습 machine learning - 이 테드 강연과 정부 싱크탱크, 하이테크 콘퍼런스 같은 곳에서 신나게 오르내리지만, 보통 사람은 이 중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다고 의심할 법하다. 자유주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보통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하면 사이보그와 알고리즘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도 그런 적실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20세기에 대중은 착취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고, 경제에서의 핵심적 역할을 정치권력으로 환산하려 했다. 이제 대중은 자신이 사회와 무관해질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너무 늦기 전에 자신에게 남은 정치권력을 사용하는 데 필사적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부상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혁명과는 반대되는 궤도의 사례를 보여준 것일 수 있다. 러시아, 중국,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킨 것은 경제에서는 핵심적이었으나 정치권력은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었던 반면, 2016년 트럼프와 브렉시트를 지지한 것은 아직 정치권력은 누리고 있지만 자신의 경제 가치를 잃는 것이 두려웠던 많은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21세기 포퓰리즘 반란은 사람들을 착취하는 경제 엘리트가 아니라 더 이상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제 엘리트에 맞서는 구도로 전개될 것이다. 이는 지는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착취에 반대하는 것보다 사회와 무관해지는 것에 맞서 투쟁하기가 훨씬 힘들기 때문이다.

 

p30

 특히 자유주의 이야기는 공산주의로부터 배운 결과, 공감의 반경을 넓혀 자유와 나란히 평등까지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였다.

 자유주의 이야기는 초기에만 해도 주로 중산층 유럽 남성의 자유와 특권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노동계급이나 여성, 소수자, 비유럽인의 고충에는 눈을 감은 듯 보였다. 1918년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들떠서 자유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세계 전역에 이르는 제국의 신민들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인도가 자치권을 요구했을 때 영국은 1919년 암리차르 대학살로 응징했다. 당시 영국 육군은 비무장 시위대 수백 명을 학살했다.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에도 서방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른바 보편적 가치를 비서방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데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리하여 1945년 네덜란드가 5년에 걸친 야만적인 나치 점령에서 해방됐을 때도, 그들이 거의 맨 처음 한 일은 옛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해 세계 절반을 가로질러 파병한 것이었다. 1940년 네덜란드가 나치의 침공을 받았을 때는 개전 4일 만에 독립을 포기했지만, 자신들이 인도네시아 독립을 진압하는 데는 4년이 넘는 길고 격렬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민족해방 운동이 자유의 수호자라고 자처한 서방보다 공산주의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희망을 건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 이야기는 조금씩 지평을 넓혀갔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모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예외 없이 존중하게 되었다. 자유의 원이 확대되면서 또한 자유주의 이야기는 공산주의식 복지 제도의 중요성에도 눈떴다. 자유도 어떤 유의 사회 안전망과 결합되지 않으면 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회 민주적 복지국가는 민주주의와 인권과 더불어 국가가 지원하는 교육과 의료를 한데 결합했다. 심지어 초자본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도 자유의 보호에는 최소한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복지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굶는 아이에게 자유는 없다.

 1990년대 초까지 사상가들과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역사의 종언'을 반겼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과거의 정치적, 경제적 문제는 다 해결됐으며,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 시장과 정부의 복지 서비스로 재단장한 자유주의 패키지야말로 여전히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패키지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모든 국경을 지우는 한편, 인류를 하나의 자유로운 지구 공동체로 바꿔놓을 운명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순간과 히틀러의 순간, 체 게바라의 순간에 이어 이제 우리는 트럼프의 순간에 처했다. 그렇지만 이번에 자유주의 이야기가 마주한 상대는 제국주의나 파시즘, 공산주의처럼 일관된 이데올로기를 가진 적수가 아니다. 트럼프의 순간은 훨씬 더 허무주의적이다.

 20세기의 주요 운동은 모두 전 인류를 위한 미래 청사진이 있었던 데 반해 도널드 트럼프는 그런 것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와는 정반대다. 그의 주된 메시지는 어떤 지구 차원의 청사진을 만들고 증진하는 것은 미국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국 브렉시트 지지자들도 '분리된 영국'의 미래를 위한 별다른 계획이 없다 - 유럽과 세계의 미래는 자신들의 지평을 훨씬 넘는 것이라고 본다. 트럼프와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 대부분은 자유주의 패키지를 전면 거부한 게 아니다. 주로 세계화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인권, 사회적 책임을 믿는다. 하지만 이런 좋은 생각들도 국경에서는 제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들은 요크셔와 켄터키에서 자유와 번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외국인에 대해서는 비자유주의적 정책을 체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떠오르는 중국의 슈퍼파워도 거의 거울처럼 닮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중국은 국내 정치 자유화는 경계하면서도, 세계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자유주의적인 접근법을 택해왔다. 사실상 자유 무역과 국제 협력에 관한 한 시진핑이야말로 오바마의 진정한 계승자처럼 보인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잠시 뒤로 제쳐둔 채, 자유주의 국제 질서에 꽤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다.

 다시 기승을 부리는 러시아는 자신을 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훨씬 강력한 경쟁자로 본다. 하지만 러시아는 군사력은 재편했어도 이념적으로는 파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와 세계 곳곳의 다양한 우파 운동 진영에서는 확실히 인기가 있다. 하지만 스페인 실직자난 불만에 찬 브라질 국민,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케임브리지 학생 들까지 사로잡을 전 지구적 세계관은 갖고 있지 않다.

 러시아는 자유민주주의에 대안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 모델은 하나의 일관성을 가진 정치 이념이 아니다. 그보다는 몇몇 올리가르히(과두재벌)들이 국가의 부와 권력 대부분을 독점하고는, 언론 통제를 통해 자신들의 활동을 숨기고 지배를 다지는 정치 관행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에이브러험 링컨의 원칙 위에 서 있다. "모든 국민을 잠시 속일 수 있고, 일부 국민을 늘 속일 수 있어도, 모든 국민을 늘 속일 수는 없다." 정부가 부패해서 국민 생활을 개선하지 못하면, 결국 그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정부를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는 상황에서는 링컨의 논리는 힘을 잃는다. 시민이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막기 때문이다. 집권 과두제는 언론 독점을 통해 모든 정책 실패를 반복해서 남 탓으로 전가하고 국민의 관심을 외부 위협 - 실제든 상상이든 - 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런 과두제 아래 살다보면 늘 이런저런 위기가 국민 의료나 공해 같은 따분한 문제보다 우선한다. 국가가 외부 침략이나 끔찍한 전복 사고에 직면했다는데 누가 과밀 병원과 강물 오염에 대해 걱정할 시간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끝없는 위기의 흐름을 만들어 냄으로써 부패한 과두제는 지배를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과두제 모델은 실행력에서는 지속성이 있어도 아무에게도 매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다른 이데올로기들은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청사진을 설파하는 데 반해, 올리가르히들은 집권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통치에 자부심이 없어 다른 이데올로기로 연막을 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러시아는 민주주의인 체하고, 지도부는 과두제보다 러시아 민족주의와 정교회의 가치에 대한 충성을 공언한다. 프랑스와 영국의 우익 극단주의자들이 러시아의 지원에 의존하고 푸틴에 대한 흠모를 표시하는 일은 있을 법도 하지만, 두 나라의 유권자들조차 실제로 러시아 모델을 빼닮은 나라 - 고질적인 부패와 각종 서비스 장애, 법치주의 부재, 엄청난 불평등의 나라 - 에서는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는 국부의 87퍼센트가 상위 10퍼센트 부유층 손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프랑스 '국민전선'을 지지하는 노동계급 유권자 중에서 이런 부의 분배형을 자국에도 이식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자신의 발로 투표한다.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미국이나 독일, 캐나다, 호주로 이민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이 만나봤다. 중국이나 일본으로 이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로 이민 가는 게 꿈이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p37

 자유주의의 고장으로 공백이 생기자 잠정적이나마 각 국가의 지나간 황금시절을 그리워하는 환상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의 고립주의에 대한 촉구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약속을 연결했다. 마치 1980년대나 1950년대의 미국이 21세기에도 미국인들이 어떻게든 되살려야 하는 완벽한 사회였다는 듯이. 브렉시트 지지자들 역시 영국을 독립 강국으로 만드는 꿈을 꾼다. 마치 아직도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살고 있다는 듯이. 그리고 지난 시절에나 통했던 '영광의 고립'이 인터넷과 지구 온난화 시대에도 실행 가능한 정책이라는 것처럼. 중국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제국과 유교의 유산에 다시 눈을 뜨면서 그것을 서방에서 수입해온 미심쩍은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의 보완재나 대용품으로까지 생각한다. 러시아에서 푸틴이 공식적으로 제시하는 청사진도 부패한 과두제의 건설이 아니라 옛 차르 제국의 재건이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푸틴은 러시아 민족주의와 정교회의 신앙심에 힘입은 전제 정부를 통해 옛 제정 시대의 영광을 되찾는 한편 발트해에서 캅카스까지 세력을 확장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처럼 민족주의적 애착과 종교적 전통을 뒤섞은 향수 어린 꿈은 인도와 폴란드 외에도 수많은 체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환상의 힘이 중동만큼 극단적인 곳도 없다. 이곳 이슬람주의자들은 1,400년 전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디나 시에서 세운 체제를 그대로 모방하고 싶어 한다. 이스라엘의 근본주의 유대교들도 한술 더 뜬다. 2,500년 전 성경 시대로 돌아가려는 꿈을 꾼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슬람주의자들마저 능가한다. 이스라엘 집권 연립정부의 각료들은 지금 이스라엘의 국경을 성경 속의 이스라엘에 좀 더 가깝게 확장하려는 희망을 공공연히 밝힌다. 심지어 알아크사 이슬람사원 자리에 고대 예루살렘의 야훼 신전을 재건하려 든다.

 자유주의 엘리트들은 이런 상황을 공포의 눈길로 본다. 그리고 인류가 늦지 않게 자유주의의 길로 복귀해 재난을 피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16년 9월 오바마 대통령은 마지막 유엔 연설에서 청중을 향해 "세계가 민족과 부족, 인종, 종교와 같은 해묵은 분할선을 따라 날카롭게 나뉘고 궁극에는 갈등 속으로 퇴보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대신 "자유 시장과 책임 정부, 민주주의와 인권, 국제법의 원칙이 (....) 금세기 인간 진보를 위한 확고한 기반으로 남기"를 기원했다.

 오바마가 자유주의 패키지를 두고 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대안보다도 실적이 훨씬 좋았다고 한 것은 옳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21세기 초 자유주의 질서의 보호 아래 경험했던 것보다 더 큰 평화나 번영을 누려본 적이 없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전염병에 의한 사망자가 고령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적었으며, 폭력에 의한 사망자가 사고로 인한 사망자보다 적었다.

 

p51

 결국, 우리가 보호해야 할 궁극의 목표는 사람이지 일자리가 아니다. 남아도는 운전사와 의사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p58.  새로운 일자리라고?

 

 예술에서 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전통적인 일자리 다수가 사라지면 새로운 인간 일자리의 창출로 상쇄될 것이다. 알려진 질병을 진단하고 익숙한 치료를 관장하는 데 집중하는 일반 의사들은 AI 의사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획기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신약이나 수술 절차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인간 의사와 연구소 조교에게 훨씬 더 많은 돈을 지급해야 할 것이다.

 AI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인간 일자리 창출을 도울 수 있다. 인간은 AI와 경쟁하는 대신 AI를 정비하고 활용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드론이 인간 비행사를 대체하면서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정비와 원격 조정, 데이터 분석, 사이버 보안 분야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많이 생겨났다. 미군의 경우 무인기 프레데터나 리퍼 드론 한 대를 시리아 상공으로 날려보내는 데 30명이 필요한데, 그렇게 수집해 온 정보를 분석하는 데는 최소 80명이 더 필요한다. 2015년 미 공군은 이 직무를 맡을 숙련자가 부족해, 무인 항공기 운용 인력 부족이라는 역설적인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2050년 고용 시장은 인간-AI의 경쟁보다도 상호 협력이 두드러진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경찰부터 은행 업무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AI가 한 팀을 이루면서 인간과 컴퓨터 모두를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 IBM의 체스 프로그램인 딥 블루가 세계 챔피온 가리 카스파로프를 꺽은 후에도 인간이 체스를 그만두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AI 트레이너 덕분에 인간 체스 챔피언은 실력이 유례 없이 좋아졌고, 잠시나마 '켄타우로스'로 알려진 인간-AI 팀이 체스에서 인간과 컴퓨터 모두를 능가했다. 마찬가지로 AI는 인간이 사상 최고의 형사, 은행원, 군인으로 단장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생겨난 새로운 일자리는 모두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비숙련 노동자의 실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이다. 그런 일자리를 실제로 메울 사람을 재교육하기보다 아예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더 쉬운 일로 판명될 수 있다. 이전에 자동화 물결이 밀려들었을 때, 사람들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기계적인 작업을 또 다른 비슷한 수준의 일로 바꿀 수 있었다. 1920년 농업이 기계화다하면서 해고된 농장의 일꾼은 트랙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새 일을 찾을 수 있었다. 1980년 공장 노동자는 실직하더라도 슈퍼마켓의 현금출납원을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작업 변화가 가능했다. 농장에서 공장으로, 다시 공장에서 슈퍼마켓으로 옮겨가는 데는 훈련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2050년에는 현금출납원이나 방직공장 노동자가 로봇에게 일자리를 잃고 나서 암 연구원이나 드론 조종사, 혹은 은행의 인간-AI 팀원으로 새 일을 시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필요한 기술을 갖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징집돼 온 수백만의 신참 병사에게 기관총을 맡기고 수천 명의 전사자를 낸 것은 그래도 이해할 만하다. 개별 기술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아무리 드론 조종사와 데이터 분석가가 부족하다 해도 미 공군은 그 자리를 월마트 퇴직원으로 메울 리는 없다. 경험 없는 신병이 아프가니스탄의 결혼 축하 파티를 탈레반의 고위급 회의로 오인하는 사고를 바랄 사람은 없다.

 결과적으로, 인간 일자리가 많이 생긴다 해도 새로운 '무용' 계급의 부상은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두 세계의 최악을 함께 겪을 수도 있다. 높은 실업률과 숙련 노동력의 부족이 동시에 닥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19세기의 마차 몰이꾼이 아닌 말의 운명을 맞을 수 있다. 마차 몰이꾼은 택시 기사로 전환활 수 있었지만, 말은 점점 고용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해 결국에는 완전히 퇴출됐다.

 더욱이 남은 인간 일자리도 결코 미래 자동화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을 것이다. 기계 학습과 로봇은 계속 개선될 것이기 때문이다. 40세에 실직한 월마트 현금출납원이 초인적인 노력 끝에 간신히 드론 조종사가 됐다 해도 10년 후에는 그는 다시 자기 변신을 해야만 할 수 있다. 그때쯤이면 드론을 날리는 일도 자동화됐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노조를 조직하거나 노동권을 확보하는 일도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오늘날에도 선진국에서 생겨나는 많은 신규 일자리는 보호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거나 자유계약직, 혹은 일회성 업무직이다. 버섯구름처럼 급속하게 생겨났다가 10년도 안 돼 사라지는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노조를 결성할까?

 마찬가지로 인간-컴퓨터 켄타우로스 팀도 평생 동반자 관계로 정착하는 대신 인간과 컴퓨터 간의 끊임없는 주도권 다툼으로 얼룩질 가능성이 높다. 인간들로만 이뤄진 팀 - 가령, 셜록 홈스와 왓슨 박사 - 은 보통 서로 협력해서 수십 년을 이어갈 항구적인 위계질서와 틀을 잡는다. 하지만 IBM 왓슨 컴퓨터 시스템(2011년 미국 TV쇼 <제퍼디!>에서 우승하며 유명해진 컴퓨터)과 한 조를 이룬 인간 탐정이 겪게 될 정해진 틀이라고는 수시로 찾아드는 파괴적 혁신일테고, 항구적인 위계질서라고는 반복되는 기술 혁명뿐일 것이다. 어제의 (로봇) 조수는 내일의 감독관으로 변신할 가능성이 높은 데다 모든 상호 업무 규약과 지침서는 매년 다시 써야만 할 것이다.

 체스 세계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장기적으로 상황이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딥 블루가 카스파로프를 꺽고 난 후 수년 동안 체스에서 인간-컴퓨터의 협력이 빛을 발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컴퓨터의 체스 실력이 너무나 좋아진 나머지 이제 인간 협력자의 가치는 사라졌고, 조만간에는 완전히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될 상황에 처했다.

 결정적인 이정표가 세워진 날은 2017년 12월 7일이었다. 체스에서 컴퓨터가 인간을 이겼을 때가 아니라, 구글의 알파제로 프로그램이 스톡피시 8 프로그램을 꺽은 순간이었다. 스톡피시 8은 2016년 세계 컴퓨터 체스 챔피언이었다. 수백 년 동안 체스에서 쌓아온 인간의 경험은 물론 수십 년간 누적된 컴퓨터의 경험에 접속할 수 있었고, 초당 7,000만 수를 계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반면 알파제로는 불과 초당 8만 수의 계산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인간 창조자는 알파제로에게 어떤 체스 전술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심지어 표준 오프닝 standard opening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그 대신 알파제로는 최신 기계 학습 원리를 자가 학습 체스에 적용해 자신을 상대로 한 시합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신참 알파제로는 스톡피시를 상대로 모두 100회의 시합을 벌여 28승 72무를 기록했다. 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알파제로는 인간으로부터 배운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시합에서 승리했을 때 알파제로가 구사한 수와 전술의 상당수가 인간의 눈에는 파격적이었다. 완전히 천재적이진 않아도 충분히 독창적이라고 할만했다.

 알파제로가 백지 상태에서 체스를 학습하고 스톡피시를 상대로 한 시합을 준비하며 자신의 천재적 개능을 개발하는 데 걸린 시간이 얼마인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네 시간이었다. 오자가 아니다. 수 세기 동안 체스는 인간 지능의 더 없는 자랑거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알파제로는 완전 무지 상태에서 네 시간 만에 창의적 완숙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지도하며 준 도움도 전혀 없었다.

 알파제로 말고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소프트웨어는 더 있다. 이제는 체스 프로그램의 다수가 단순한 수의 계산뿐 아니라 '창의성'에서도 인간 선수를 능가한다. 인간만 출전하는 체스 토너먼트 시합에서 심판은 선수들이 몰래 컴퓨터의 도움을 얻는 속임수를 적발하느라 여념이 없다. 속임수를 적발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선수가 구사하는 독창성의 수준을 모니터하는 것이다. 만약 선수가 이례적으로 창의적인 수를 구사하면 심판은 사람의 수일 리가 없다고 의심할 때가 많다. 컴퓨터의 소행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적어도 체스에서는 창의성은 이미 인간보다 컴퓨터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따라서 체스가 탄광의 카나리아라면, 우리는 이것을 카나리아가 죽어가고 있다는 경고로 이해해야 한다. 지금 인간-AI 체스팀에 일어나고 있는 일은 앞으로 경찰, 의료, 은행 업무에서 활동할 인간-AI 팀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인간을 재교육하는 일은 단 한번의 노력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AI 혁명은 일대 분수령을 이룬 뒤에 고용 시장이 새로운 평형 상태에서 안정을 찾는 식의 일회성 사건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점점 커지는 (혁신적) 파괴의 폭포가 될 것이다. 이미 지금도 자신이 평생 같은 일을 할 거라고 보는 사람은 극소수다. 2050년이면 '평생 직장'이 라는 생각뿐 아니라 '평생 직업'이라는 생각까지 원시적이라고 간주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재훈련할 수 있다 하더라도, 평균적인 인간이 그런 끝없는 격변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감정의 근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변화는 늘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21세기 초 세계는 미친 듯 바빠지면서 온 지구는 스트레스라는 유행병을 앓고 있다. 고용 시장과 개인 직업의 변동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현실에 잘 대처해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사피엔스의 정신이 나가는 것을 막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효과가 큰 스트레스 경감기술 - 약물로부터 뉴로피드 백neuro-feedback, 명상에 이르기까지 - 이 필요할 것이다. 2050년 '무용' 계급이 출현하는 원인에는 일자리의 절대 부족이나 관련 교육의 결여뿐 아니라 정신 근력의 부족도 포함될 것이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추측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 2018년 초 - 도 자동화로 많은 산업이 파괴됐지만 대규모 실업은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 많은 나라에서 미국과 같이, 실업률은 사상 최저를 기록 중이다. 기계 학습과 자동화가 미래에는 달라질 직업들에 어떤 유의 충격을 줄지 아무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관련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구체적으로 추정하기란 극도로 어렵다. 그 이유는 특히 정치적 결정과 문화적 전통이 순전히 기술적인 돌파 못지않게 상황 전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율주행 차량이 인간 운전자보다 안전하고 저렴한 것으로 판명난 후에라도 정치권과 소비자들이 수년 동안, 아마 수십 년까지도 변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할 수는 없다. 새 일자리가 사라진 일자리를 충분히 메워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전의 자동화 물결 기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21세기의 아주 다른 조건 아래서도 같은 일이 반복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혼란은 너무나 두려운 것이어서, 시스템 전반에 걸친 대량 실업의 개연성이 낮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19세기에 산업혁명은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모델로는 대처할 수 없는 새로운 조건들과 문제들을 야기했다. 봉건주의와 군주제, 전통 종교는 산업화된 대도시와 수백만의 뿌리 뽑힌 노동자, 본성상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인 근대 경제를 경영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인류는 완전히 새로운 모델 -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독재, 파시즘 체제 - 을 개발해야 했고, 이 모델들을 실험하여 쭉정이에서 알곡을 가려내고 최선의 해법을 실행하기까지 1세기에 걸쳐 끔찍한 전쟁과 혁명을 겪어야 했다. 디킨스 소설에서 묘사된 탄광의 아동 노동, 제1차 세계대전과 1932~1933년의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인류가 치른 수업료의 일부에 불과했다.

 21세기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이 인류에게 제기한 과제들은 이전 시대에 증기기관과 철도, 전기가 제기한 것들보다 훨씬 더 크다. 우리 문명의 막대한 파괴력을 감안하면 더 이상 실패한 모델이나 세계대전, 유혈 혁명을 용인할 여유가 없다. 이번에는 실패하면 핵전쟁이나 유전공학에 의한 괴물, 생태계의 완전한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산업혁명에 직면했을 때보다 더 잘해야 한다.

 

p68

 예를 들어 공산주의를 보자. 자동화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기반까지 흔들려고 위협함에 따라 혹자는 공산주의가 부활할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그런 종류의 위기를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념이 아니다. 20세기 공산주의 사상가들이 프롤레타리아에게 가르친 것은 이들의 막대한 경제적 힘을 정치적 영향력으로 전환하는 방법이었다. 공산주의 정파는 노동 계급에 의한 혁명을 촉구했다. 하지만 대중이 자신들의 경제적 가치를 잃는다면, 그래서 착취가 아닌 자신의 무관함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면 그런 교의가 얼마나 의미 있을까? 노동 계급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노동 계급 혁명을 시작할까?

 혹자는 인간이 작업장에서 AI와 경쟁할 수 없더라도 소비자로서는 늘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경제적으로 사회와 무관한 존재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래 경제가 우리를 소비자로서조차 필요한 존재로 여길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그 역할도 기계와 컴퓨터가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경제도 충분히 가능하다. 광산 기업이 철을 생산해서 로봇 기업에 팔고. 로봇 기업은 로봇을 만들어 광산 기업에 팔고, 다시 광산 기업은 더 많은 철을 생산하고, 이렇게 생산된 철은 다시 더 많은 로봇을 만드는 데 쓰이고,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이런 기업들은 은하계 멀리까지 성장하고 확장해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는 로봇과 컴퓨터뿐이다. 자신들의 생산물을 인간이 사주는 일조차도 필요하지 않다.

 

p78

 보편 기본 지원이 2050년 평균인의 객관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은 꽤 높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주관적으로 더 만족하는 것과 사회적 불만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 지원은 스포츠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른 의미 있는 추구에 의해 보완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스라엘에서 행해진 실험이 일 - 이후 세계에서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으로는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의 약 50퍼센트가 일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종교 의식을 수행하는 데 삶을 바친다. 그들과 가족들이 굶어 죽지 않는 비결은 흔히 부인들이 일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에 부족함이 없도록 정부가 보조금과 무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그런 말이 생기기도 전'의 보편 기본 지원이다.

 이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들은 가난하고 직업도 없다. 하지만 설문조사를 해보면 삶의 만족도가 이스라엘 사회의 다른 어떤 분파보다 높게 나온다. 이는 공동체의 유대감이 주는 결속력과 더불어, 성경 공부와 의례 수행에서 찾을 수 있는 깊은 의미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로 가득한 대형 직물공장보다, 남성들이 함께 모여 탈무드를 공부하는 작은 방에서 더 큰 즐거움과 참여감과 통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를 묻는 조사에서 이스라엘이 상위권에 오르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무직의 가난한 사람들이 점수를 올려주기 때문이다. 

 비유대교 이스라엘인은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이 사회 기여도가 낮고 다른 사람의 근로에 기생한다고 극심하게 비판할 때가 많다. 특히 초정통파 유대교인 가족은 자녀가 평균 일곱 명이라는 점을 들어, 그런 삶의 방식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조만간 국가가 그 많은 실업자들을 계속해서 지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로봇과 AI가 인간을 구직 시장에서 밀어내면, 오히려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이 과거의 화석이 아니라 미래의 모델로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사람이 초정통파 유대교인이 되어 예시바에 가서 탈무드를 공부할 거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삶에서 의미와 공동체의 추구가 구직열을 압도할지도 모른다.

 만약 보편적인 경제 안전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알고리즘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이 실제로 축복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은 훨씬 무서운 시나리오다. 대량 실업의 위험과는 별도로, 우리가 훨씬 더 걱정해야 할 일은 인간의 권위가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자유주의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고 디지털 독재의 부상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지도 모름다.

 

p83

 국민투표와 선거는 언제나 인간의 느김에 관한 것이지 이성적 판단에 관한 것이 아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이성적인 의사 결정의 문제라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혹은 그 어떤 투표권도 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박식하고 이성적이라는 증거는 충분하다. 경제나 정치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에 관한 한 확실히 그렇다. 브렉시트 투표가 있고 난 후에 저명한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을 포함한 영국 대중의 대다수는 (이 문제를 두고) 국민트표에서 투표하도록 요구받는 일이 없어야 했다면서, 그들에게는 경제학과 정치학의 필요한 배경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차라리 아인슈타인이 대수학을 맞게 풀었는지 결정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거나, 조종사가 어느 활주로에 착륙해야 할지를 두고 승객에게 투표하게 하는 것이 낫겠다."

 

p84

 느낌에 이끌리는 것은 유권자뿐 아니라 지도자도 해당된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트표에서 탈퇴 캠페인을 이끈 지도자는 보리스 존슨과 마이클 고브였다. 데이비드 캐머런이 사임한 후 고브는 처음에 존슨을 총리로 지지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고브는 존슨이 부적격자라고 선언하고 자신이 직접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다. 존슨이 기회를 날려버린 고브의 행동을 두고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적인 정치적 암살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고브는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느낌에 호소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정치 인생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왔다. '무엇이 옳은 일인가? 너의 마음은 네게 뭐라고 하는가?" 고브에 따르면, 그가 브렉시트를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운 이유도, 그때까지 동지였던 보리스 존슨의 등에 칼을 꽂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자신이 우두머리 자리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즉, 그의 마음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음에 대한 이런 의존은 자유민주주의의 아킬레스건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베이징이나 샌프란시스코의) 누군가가 인간의 마음을 해킹해서 조작하는 기술력을 얻게 되면, 민주 정치는 감정의 인형극으로 돌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p86

 따라서 감정은 합리성의 반대가 아니다. 감정이 체화한 것이 진화적 합리성이다.

 

p96

 2012년 3월 일본 관광객 세 명이 호주 연안의 작은 섬으로 당일 치기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들은 차를 몰고 가다가 그대로 태평양에 뛰어들었다. 운전을 했던 21세 유주 노다 씨는 나중에 자신은 GPS를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GPS가 우리한테 그쪽으로 곧장 갈 수 있다고 했엉. 길로 안내해줄 거라고 계속 말하더군요. 그러다 꼼짝없이 빠졌지요." 그와 비슷하게 사람들이 GPS 지시만 믿고 차를 몰고 가다가 호수에 빠지거나 철거된 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길 찾기 능력은 근육과 같다. 사용하지 않으면 잃는다. 배우자나 직업을 고르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p106

 우리는 인공지능의 부상이 대다수의 인간을 고용 시장에서 몰아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앞에서 봤다. 여기에는 운전자와 교통경찰까지 포함된다(소동을 빚는 인간을 순종적인 알고리즘으로 대체하면 교통경찰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철학자에게는 새로운 출구가 생길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시장 가치가 크지 않았던 철학자의 기량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치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일 미래에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는 무언가를 공부하고 싶다면 철학에 운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p113

 20세기 후반 민주주이가 독재를 능가했던 것은 데이터 처리에서 우월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정보를 처리하고 결정하는 권한을 사람과 기관에 분산하는 반면 독재는 한곳에 집중했다. 20세기 기술로 보면 너무 많은 정보와 힘을 한곳에 모으는 방식이 비효율적이었다. 그 누구도 모든 정보를 충분히 빠르게 처리하면서 옳은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미국보다 훨씬 나쁜 결정을 내리고 경제도 훨씬 뒤처진 데에는 이런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AI가 등장하면서 조만간 시계추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AI 덕분에 막대한 양의 정보를 중앙에서 모두 처리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AI는 중앙 집중 체계의 효율을 분산 체계보다 훨씬 높일 수 있는데, 기계 학습은 분석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을수록  성능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알고리즘 훈련에 관한 한,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는 무시한 채 10억 인구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데이터베이스 한곳에 모으는 편이, 개인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100만 명에 관한 부분적인 정보만 데이터베이스에 두는 것보다 훨씬 낫다. 가령, 어떤 권위주의 정부가 모든 시민에게 DNA 스캔을 받게 하고 모든 의료 데이터를 중앙 정부 기관과 공유하도록 명령한다면, 의료 데이터를 엄격하게 사적으로 보호하는 사회보다 유전학과 의학연구에서 엄청나게 유리할 것이다. 20세기 권위주의 정권의 주요 장애 - 모든 정보를 한곳에 집중하려는 시도 - 가 21세기에는 결정적인 이점이 될 수 있다.

 

p124

 재산은 장기 불평등을 낳는 전제 조건이다.

 

 

 하지만 근대 후반에 이르러 평등은 거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이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부상이 일부 작용했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대중이 전례 없이 중요해진 요인도 있었다. 산업 경제는 평민 노동자 대중에게 의존했고, 산업화된 군대 역시 평민 병사 대중에게 의존했다. 민주주의와 독재 정부 모두가 대중의 건강과 교육, 복지에 대거 투자했다. 생산 라인을 가동할 건강한 수백만 노동자들과 참호에서 싸울 충성스런 수백만 병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세기 역사는 상당 부분 계급과 인종, 성별 간 불평등 감소를 둘러싸고 전개됐다.. 세계가 2000년을 맞았을 때 그때까지도 여전히 계급제의 잔재는 남아 있었지만 1900년의 세계에 비하면 훨씬 평등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처음 몇 년 동안 사람들은 평등화의 과정이 계속 이어지고 속도도 더욱 빨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세계화가 세계 전역에 걸쳐 경제적 번영을 확산시키고, 그 결과 인도와 이집트의 국민들도 핀란드와 캐나다 국민 같은 기회와 권리를 누리게 되기를 바랐다. 모든 세대가 이런 가능성 위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이제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할 것 같다. 세계화가 인류의 다수에게 혜택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사회 내부는 물론 사회들 간에도 불평등이 커지는 신호가 뚜렷해지고 있다. 세계화의 과실을 일부 집단이 점점 독점해가는 반면 나머지 수십억은 뒤쳐져 있다. 이미 지금도 최고 부유층 1퍼센트가 세계 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최고 부유층 100명이 최저 빈곤층 40억명보다 더 많은 부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추세는 훨씬 더 심해질 수 있다. 앞 장에서 설명했듯이, AI가 부상하면서 인간 대다수의 경제적 가치와 정치적 힘이 소멸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생명기술이 발전하면서 경제 불평등을 생물학적 불평등으로 전환하는 일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슈퍼리치는 마침내 자신들의 엄청난 부에 상응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을 살 수 있었던 반면, 머지않아 생명 자체를 돈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수명을 늘리고 육체적, 인지적 능력을 증강하는 새로운 치료를 받는 데 많은 돈이 든다면 인류는 여러 생물학적 계층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부자들과 귀족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한 기량을 갖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드링 지배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평균적인 공작의 재능이 평균적인 농민보다 낫지 않았고, 그의 우월함이란 단지 불공정한 법적, 경제적 차별에 힘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2100년에는 부유층이 정말로 빈민촌 거주자들보다 더 재능 있고 창의적이고 똑똑할 수 있다. 일단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실제로 능력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면 그것을 좁히기란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만약 부유층이 우월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부를 더 늘리고, 더 많은 돈으로 육체와 두뇌까지 증강할 수 있게 되면, 시간이 갈수록 빈부 격차는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100년까지 최상의 부유층 1퍼센트는 세계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미美와 창의력, 건강까지 대부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과정이 합쳐지면, 즉 Ai의 부상과 생명공학이 결합되면 인류는 소규모의 슈퍼휴먼 계층과 쓸모없는 호모 사피엔스 대중의 하위 계층으로 양분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대중이 경제적 중요성과 정치적 힘을 잃으면서 국가는 이들의 건강과 교육, 복지에 투자할 동기를 적어도 일부는 잃을 수 있다.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럴 경우 대중의 미래는 소수 엘리트의 선의에 좌우될 것이다. 그 선의는 수십 년 동안은 유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위태로운 시기가 닥치면 - 가령 기후 재앙 - 잉여 인간들은 배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유혹이 커질 테고, 그것은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프랑스와 뉴질랜드처럼 자유주의 신념과 복지국가 관행이 오랜 전통인 나라에서는 엘리트가 대중을, 그들이 필요없을 때조차 계속해서 돌봐줄지 모른다. 하지만 보다 자본주의적인 미국에서는 미국식 복지국가의 잔여분마저 해체해버릴 첫 기회로 삼을지도 모른다. 훨씬 심각한 문제는 인도와 중국, 남아프리카, 브라질과 같이 인구가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겪게 될 것이다. 보통 사람이 경제 가치를 잃고 나면 불평등이 급격히 치솟을 수 있다.

 그 결과 세계화는 세계의 통일로 가기보다 실제로는 '종의 분화'로 귀결될 수도 있다. 인류가 다양한 생물학적 계층 혹은 심지어 다양한 종으로 분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세계화는 수평적으로는 세계를 통일하고 국경을 없애지만, 동시에 수직적으로는 인류를 분할할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같은 다양한 나라에서는 과두 지배계층이 뭉쳐 평범한 사피엔스 대중에 맞서 공동 목적을 추구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 포퓰리즘이 '엘리트'에 분개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앞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실리콘밸리 재벌과 모스크바 억만장자의 손주들이 애팔래치아 시골뜨기와 시베리아 촌사람의 손주들보다 우월한 종이 될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런 시나리오가 세계를 탈세계화할 수도 있다. 상위 계층은 자칭 '문명' 내부로 모여들면서 그 둘레에는 성벽과 해자를 만들어 '야만인들' 무리와 격리된 삶을 사는 것이다. 20세기 산업 문명은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와 시장을 얻기 위해 '야만인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복하고 흡수했다. 반면, 21세기 후기 산업 문명은 AI와 생명공학과 나노 기술에 의존하면서 훨씬 더 자족적이고 자생적이 된다. 그럴 경우 계급 차원을 넘어 나라와 대륙이 통째로 관심 밖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드론과 로봇이 지키는 요새 안의 자칭 문명 구역에서는 사이보그들이 논리폭탄으로 경쟁을 벌이는가 하면, 그와 격리된 야만인의 땅에서는 야생의 인간들이 칼과 칼라슈니코프 자동소총으로 싸운다.

 이 책에서 나는 인류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며 1인칭 복수형을 자주 사용했다. '우리의' 문제에 관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마도 앞으로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짐자건대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다양한 인가 집단이 서로 완전히 다른 미래를 맞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세계 어떤 지역에서는 자녀에게 컴퓨터 코딩을 가르쳐야 하는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재빨리 총을 뽑아 명중시키는 법을 가르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p129

 데이터를 손에 넣기 위한 경주는 이미 시작됐다. 선두 주자는 구글과 페이스북, 바이두, 텐센트 같은 데이터 거인들이다. 지금까지 이 거인들의 다수가 채택해온 사업 모델은 '주의 장사꾼'처럼 보인다. 무료 정보와 서비스, 오락물을 제공해 우리의 주의를 끈 다음 그것을 광고주들에게 되판다. 하지만 데이터 거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이전의 그 어떤 주의 장사꾼들보다 훨씬 높다. 이들의 진짜 사업은 결코 광고를 파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아 우리에 관한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광고 수익보다 훨씬 가치가 크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객이 아니라 그들의 생산품인 것이다.

 중기적으로 볼 때 이런 식으로 데이터가 비축되면 근본적으로 다른 사업 모델이 열리는데, 그 첫 희생자는 광고 산업 전체가 될 것이다. 새로운 모델의 기반은 인간의 권위가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것을 골라서 구매하는 권위까지 포함된다. 알고리즘이 위를 위해서 뭔가를 고르고 구매하기 시작하면 전통적인 광고 산업은 파산할 것이다. 구글을 보자. 구글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는 우리가 구글에 무엇이든 질문할 수 있고, 그게 대한 세계 최선의 해답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구글에 '안녕 구글, 네가 차에 대해 아는 모든 것과 나에 대해 아는 모든 것(나의 욕구와 습관, 기후변화를 보는 관점, 중동 정치에 대한 나의 견해까지 포함)을 감안했을 때, 내게 가장 좋은 차는 뭐라고 생각하니?" 라는 질문까지 할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약 구글이 그 질문에 좋은 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경험은 통해 우리의 쉽게 조종당하는 감정보다 구글의 지혜를 더 신뢰하게 된다면 차량 광고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장기적으로는 충분한 규모의 데이터와 더불어 컴퓨팅 능력이 충분히 커지면 데이터 거인들은 생명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 해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지식을 사용해 우리 대신 선택을 하고 우리를 조종할 뿐만 아니라, 유기적 생명을 재설계하고 비유기적 생명체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광고 판매는 단기적으로 거인 기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앱과 상품과 기업을 평가할 때도 매출액보다도 그것을 통해 모을 수 있는 데이터를 기준으로 삼는다. 인기 많은 앱이 사업 모델로는 부적격이고 단기적으로는 손실을 초해할 수도 있지만, 데이터를 빨아들이는 것으로 보자면 그 가치는 수십억 달러에 이를 수 있다. 지금 당장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 모른다 해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다. 데이터야말로 미래에 생활을 통제하고 형성하는 데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데이터 거인들이 얼마나 명확하게 그런 측면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이 단순히 돈보다는 데이터를 모으는 데 가치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152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외면할 때가 많다. 자신들의 핵심적인 정치적, 종교적 가치에 관해서라면 특히 더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가 옛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귀중한 유산이라고 고집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의 조상이 오래전에 죽었으며 이제는 스스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를 보자. 오늘날 초정통파 유대교인들은 공공장소에서 여성 사진을 금지한다. 이들을 겨냥한 게시판과 광고에는 남자와 소년만 묘사돼 있을 뿐 여성과 소녀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2011년 그로 인한 사건이 터졌다. 뉴욕 브루클린의 초정통파 유대교 신문인 디 차이퉁Di Tzeitung이 미국 관리들이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 공습을 지켜보는 사진을 실으면서 디지털 기술로 힐러리 클린터 국무장관을 포함한 모든 여성을 삭제한 것이다. 이 신문은 유대교의 '겸손법'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해명했다. 비슷한 사건은 또 있었다. 이스라엘의 하메바세르HaMevaser 신문이 샤를리 에브도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 사진에서 앙겔라 메르켈을 지운 것이다. 애독자들의 마음속에 음탕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초정통파 유대교 신문인 하모디아Hamodia의 발행인은 이런 정책을 변호하면서 '우리는 수천 년 유대교 전통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했다.

 유대교 회당만큼 여성의 노출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곳도 없다. 정통파 유대교 회당에서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커튼 뒤 제한 구역에 있어야 한다. 남성들이 기도하거나 경전을 읽을 때 우연하게라도 여성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수천 년 유대교 전통과 변치 않는 신법의 지지를 받고 있다면, 고고학자들이 이스라엘에서 출토한 미쉬나와 탈무드 시대의 예배당 유적에 남녀가 격리된 흔적은 조금도 없었고, 오히려 아름다운 바닥 모자이크 그림과 천정 그림에 여성이 묘사돼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여성은 몸을 다 드러내다시피 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쉬나와 탈무드를 저술한 랍비들조차 이런 예배당에서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공부했건만, 오늘날 정통파 유대교인들은 그들이 불경스럽게도 옛 전통을 모독했다고 할 것이다.

 옛 전통을 왜곡하는 일은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IS는 자신들이 이슬람교의 순수 원형으로 돌아갔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해석이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물론 그들은 유서 깊은 문헌을 많이 인용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것을 취사선택할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심혈을 기울인다. 실제로 성스러운 문헌을 해석할 때 이들이 보이는 'DIY Do It Yourself'식 태도야말로 대단히 현대적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경전 해석은 박식한 울라마(카이로의 알아자르 같은 저명한 기관에서 이슬람법과 신학을 공부한 학자)의 독점 영역이었다. IS 지도자들 중에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은 거의 없었고, 존경받는 울라마들도 대부분 최고 지도자인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와 그 일당을 무지한 범죄자로 일축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IS가 '비이슬람적'이거나 '반이슬람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특히 버락 오바마 같은 기독교인 지도자가 무모하게도 아부 바르크 알바그다디 같은 자칭 무슬림에게 무슬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야기한 것은 역설적이다. 이슬람의 진정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두고 벌어진 열띤 논쟁은 한마디로 무의미하다. 이슬람교에서는 고정된 DNA가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무슬림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p173

 사람들이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구축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일 부족 차원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p179

 불행히도 우리는 이런 성취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불장난을 방치하기도 한다. 러시아와 미국은 최근에 새로운 핵 군비 경쟁에 착수했다....

 그 와중에 대중은 핵폭탄을 걱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좋아하게 되었다. 혹은 핵폭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망각했다. 

그러다 보니 주요 핵 강국인 영국의 브렉시트 논쟁에서도 주로 거론된 것은 경제와 이민 문제였을 뿐, 유럽연합이 유럽과 지구적 평화에 어떤 공헌을 하는지는 대체로 무시됐다. 수 세기 동안 끔찍한 유혈 사태를 겪은 후에야 마침내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영국이 유럽 대륙의 조화를 보장해줄 장치를 구축했음에도, 이제 와서 영국 대중은 기적적으로 탄생한 이 기계 안에다 공구를 던져 넣어버린 것이다.

 

 

19세기 국가들이 민족주의 게임을 벌이면서도 인류 문명을 파괴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히로시마 시대에나 있던 일이었다. 그 후 핵무기의 등장으로 상황은 더 엄중해졌고 전쟁과 정치의 근본 성격이 바뀌었다. 인류가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농축하는 법을 알게 된 이상, 어느 특정 국가의 이익보다 핵전쟁 예방을 우선시하는 것에 모두의 생존이 달렸다. "우리 나라 최우선!"이라고 외치는 열혈 민족주의자들은 과연 튼튼한 국제 협력 체제 없이 혼자서 자국은 물론 세계의 핵 파괴를 막을 수 있을지 자문해봐야 한다.

 

p180

 핵전쟁 외에도, 인류는 앞으로 수십 년 안에 1964년 정치 레이더망에는 거의 포착되지 않았던 새로운 실존적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바로 생태학적 붕괴다. 인간은 여러 면에서 지구 생물권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자연환경에서 점점 더 많은 자원을 가져오면서도, 자연에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와 독성 물질을 쏟아내 흙과 물과 대기의 성분까지 바꿔놓고 있다.

 

 이러한 가공할 실험은 이미 진행되기 시작했다. 핵전쟁이 미래의 잠재적인 위협인 것과 달리, 기후변화는 현재 닥친 실제 상황이다. 인간 활동, 특히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 배출 때문에 지구의 기후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데는 과학적 합의가 이뤄진 상태다. 회복 불가능한 대재앙을 촉발하지 않는 선에서 이산화탄소를 정확히 어느 정도까지만 대기 중에 쏟아낼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최선의 과학적 추산으로는 앞으로 20년 안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극적으로 줄이지 않으면 지구의 평균 온도는 산업혁명 이전보다 섭씨 2도 이상 올라가는가 하면, 사막의 확장과 만년설의 소멸, 해수면의 상승, 허리케인과 태풍 같은 극단적인 날씨 증가에 직면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역으로 농업 생산에 지장을 주고, 도시를 침수시키고, 세계의 많은 지역을 살기 어려운 곳으로 만들어 수억 명의 난민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더욱이 지금 우리는 수많은 임계점에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다. 이 점을 넘어가면 설사 온실가스 배출을 극적으로 감축한다 해도 지금의 추세를 되돌려 전 세계의 비극을 막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로 극지방의 얼음층이 녹으면서 지구에서 우주 공간으로 반사되는 태양빛의 양이 줄었다. 이 말은 지구가 흡수하는 열의 양이 많아지고, 따라서 기온은 훨씬 더 오르고 얼음이 녹는 속도는 훨씬 빨라진다는 뜻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결정적인 문턱을 넘어가면 불가항력의 탄력이 붙으면서 극지의 모든 얼음이 녹게 된다. 그때 까서는 인간이 석탄과 석유, 가스의 연소를 전면 중단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험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바로 지금 그것에 대한 뭔가를 실행하는 일이 다급하다.

 

 이토록 걱정스러운 그림에 민족주이가 들어설 자리가 있겠는가? 생태학적 위협에 민족주의가 나름의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지구온난화를 혼자서 중단시킬 수 있을까? 개별 국가들은 확실히 다양한 녹색 정책들을 채택할 수 있다. 이 중 다수는 환경에는 물론 경제에도 좋다.

 

 민족주의적 고립은 십중팔구 핵전쟁보다 기후변화의 맥락에서 훨씬 더 위험하다. 전면적인 핵전쟁은 모든 국가를 무차별 파괴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일에서는 모든 국가가 동등한 지분을 갖는다. 반면에 지구온난화가 초래할 충격은 국가마다 다를 가능성이 크다. 어떤 나라는, 특히 러시아는 실제로 혜택을 누릴 수도 있다. 러시아는 해안 지대가 상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해수면 상승에 대한 걱정도 중국이나 키리바시보다 덜하다.

 

p199

  하지만 종교 지도자가 과학자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바로 그 해석의 천재성 때문이다. 과학자도 지름길을 찾아내고 증거를 비트는 법을 안다. 하지만 궁극에 가서 과학이 보여주는 특징은, 언젠든지 잘못을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는 점점 더 농작물을 잘 키우고 더 나은 의약품을 개발하는 법을 알게 되는 데 반해, 사제와 구루는 더 나은 변명거리를 내놓는 법만 익히게 된다. 수 세기에 걸쳐 참된 신앙인들조차 그런 차이에 주목해왔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종교는 기술적인 영역에서 갈수록 권위를 잃어왔다.

 

p205

 이들이 타고 다니는 차도 다를 것이다. 복음주의자는 기름을 많이 먹는 대형 SUV 차량을 몰고 다닐 테지만, 독실한 카톨릭 신도는 미끈한 전기차에 "지구를 태워라, 그리하면 지옥에서 타 죽으리!"라고 적힌 범퍼 스티커를 붙이고 다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자기 입장을 변호하는 데 다양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더라도, 견해 차이의 진정한 원천은 근대 과학 이론과 정치 운동에 있지, 성경에 있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는 우리 시대의 거대한 정책 논쟁에 기여하는 바가 사실상 별로 없다.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했듯 종교는 겉치장일 뿐이다.

 

p206

 인간의 힘을 대규모 협동에서 발휘되는데, 대규모 협동을 끌어내려면 그만큼 큰 정체성을 구축해야 한다. 거대한 정체성이 기반으로 삼는 모든 것은 허구의 이야기지, 과학적 사실이나 경제적 필요가 아니다. 21세기에 와서도 인간이 유대인과 무슬림,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여전히 종교적 신화에 의거하고 있다.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의 정체성을 과학적으로 인종과 계급으로 결정하려 했지만 그것은 위험한 사이비 과학으로 판명되었다. 그 후로 과학자들은 인간의 '자연적인' 정체성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p208

 근대 세계에서 전통적 종교가 힘과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를 들자면 아마도 일본일 것이다. 1853년 미국 함대가 일본을 향해 근대 세계로 문을 열라고 강요했을 때, 일본은 극단적인 근대화를 급속히 추진했고 성공했다. 몇 십 년 걸리지 않아 과학과 자본주의, 최신 군사 기술로 무장한 강력한 관료 국가로 발돋움한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를 꺽고 타이완과 한국을 점령한 데 이어, 진주만에서 미군 함대를 격침시키고 극도에서 유럽 제국까지 격파했다. 하지만 일본은 서구의 청사진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보호하고, 과학이나 근대성, 그리고 어떤 모호한 지구 공동체가 아닌 일본에 충성을 바치는 나라가 되기 위해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 목적을 위해 일본은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를 일본 정체성의 초석으로 고수했다. 사실 신도를 재발명했다. 전통 신도는 다양한 정령과 신령, 귀신에 대한 믿음이 뒤섞인 애니미즘 신앙이었다. 모든 마을과 신사가 자기만의 정령과 지역 관습을 갖고 있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일본은 국가 공인 신도를 만들면서 수많은 지역 전통들을 억압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 신도'에는 민족성과 인종이라는 대단히 근대적인 사상이 주입됐다. 일본 엘리트들이 유럽 제국주의에서 따온 요소였다. 불교와 유교, 사무라이 봉건 윤리 등에서도 국가 충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모두 가져다 뒤섞었다. 그 위에다 일본의 황제 숭배를 최고 원리로 신성시했다. 이들은 일본 황제를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직계 후손이자 살아 있는 신으로 간주했다.

 얼핏 이 이상한 신구의 조합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 착수한 국가로서는 부적절한 선택처럼 보인다. 살아 있는 신? 애니미즘 정령? 봉건 윤리? 근대 산업 강국이 아니라 신석기 족장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마술처럼 통했다. 일본은 숨가쁘게 근대화했고, 동시에 국가에 대한 광신적인 충성을 이끌어냈다. 국가 신도가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은 정밀유도미사일을 개발해 처음 사용한 강대국이 일본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스마트 폭탄을 실전 배치하기 수십 년도 전에, 나치 독일이 V-2 로켓 발진을 시작하려던 무렵에 이미 일본은 연합국 군함 10여 대를 정밀유도미사일로 격침했다. 이 미사일은 바로 우리가 아는 가미카제다. 오늘날 정밀유도 무기에서 방향을 인도하는 일은 컴퓨터가 하지만, 카미카제는 일반 항공기에 폭탄을 싣고 인간 조종사가 편도 비행의 임무를 수행하는 식이었다. 이런 결의는 죽음을 각오한 희생정신의 산물이었는데, 바로 국가 신도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처럼 가미카제는 첨단 기술과 첨단 종교적 교리 주입의 결합에 의존했다.

 부지불식간에 수많은 정부들이 오늘날 일본의 사례를 따른다. 이들은 근대화의 보편적 도구와 구조를 채택하는 동시에 독특한 국가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전통 종교에 의존한다. 일본에서 국가 신도가 했던 역할을 러시아에서는 정교회 기독교가, 폴란드에서는 가톨릭이, 이란에서는 시아파 이슬람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와하비즘이,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가 한다. 종교가 아무리 고리타분해 보여도 약간의 상상력과 재해석을 거치면 최신의 기술 도구와 가장 정교한 근대 제도와도 거의 언제든지 결합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국가가 독특한 정체성을 위해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도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북한이다. 북한 정권은 광란적인 국가 종교인 주체사상을 신민들에게 주입한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고대 한국의 전통, 한국인의 고유한 순수성에 대한 인종주의적 믿음, 김일성 일가의 신격화가 결합된 것이다. 김씨 가문이 태양신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김씨 일가는 역사 속의 그 어떤 신보다 더 열렬히 숭배된다. 마치 일본 제국이 결국에는 패한 것을 염두에 둔 듯, 북한의 주체사상은 핵 개발을 최고의 희생도 감수할 만한 신성한 의무로 언명하면서, 오랫동안 줄기차게 자신들의 조합물에 핵무기를 추가하려고 애써왔다.

 

p294

 모든 형태의 겸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신 앞에서의 겸손일 것이다. 사람들은 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자신을 극도록 낮춘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신의 이름을 활용해 신도들 위에 군림한다.

 

p317

 물론 모든 도그마가 똑같이 해로운 것은 아니다. 어던 종교적 믿음은 인류를 이롭게 했듯이 마찬가지로 세속주의 도그마들 중에서도 어떤 것들은 이로웠다. 특히 인권의 신조가 그렇다. 우리가 중시하는 권리가 존재하는 유일한 장소는, 이간이 발명하고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 속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종교적 광신과 전제 정부에 맞서 투쟁을 벌여오는 동안 자명한 교리로 신성시하게 된 것들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명이나 자유의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어도, 이 이야기에 대한 믿음 덕분에 권위주의 정권의 권력을 억제했고, 소수자들의 피해를 막았으며, 수십억 인구를 빈곤과 폭력의 최악의 결과로부터 보호했다. 역사상 이보다 더 인류의 행복과 복지에 기여한 신조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역시 도그마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엔 인권 선언은 19조에서 "누구의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명시했다. 이것을 우리가 정치적 요구 사항("누구나 의견의 자유권을 가져야 한다")으로 이해하는 한에서 이는 전적으로 타당한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피엔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의견의 자유권이 주어졌으며, 따라서 어떠한 검열도 자연법에 반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인류에 관한 진실을 놓치게 된다. 자신을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을 지닌 개인'으로 규정하는 한,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자신이 속한 사회와 자신의 정신('자연권'에 대한 믿음까지 포함해서)을 규정하는 역사적 힘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무지는 20세이게는 별로 문제되지 않았을 수 있다. 사람들은 히틀러, 스탈린과 싸우느라 바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생명기술과 인공지능이 이제 인간성 자체의 의미를 바꾸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생명권을 신봉한다면, 그 말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생명기술을 이용해햐 한다는 뜻까지 함축할까? 만약 자유권을 신봉한다면, 우리의 숨은 욕망을 찾아 읽어내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고리즘에 힘을 부여해야 할까? 만약 모든 인간이 동등한 인간적 권리를 누린다면 초인간은 초인권을 누려도 될까? '인권'이라는 도그마의 믿음을 고수하는 한, 세속주의를 따르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질문에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권의 도그마는 이전 세기 동안 종교재판관과 '앙시앵 레짐', 나치, KKK에 맞서 싸우기 위한 무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앞으로 초인간, 사이보그, 초지능 컴퓨터를 다루기에는 맞지 않다. 인권 운동은 종교적 편견과 인간 폭군을 상대로는 아주 인상적인 주장과 방어의 병기들을 개발해왔지만, 이 병기들이 앞으로 닥칠 소비자주의의 범람과 기술 유토피아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 같지는 않다.

 

p324

 지난 몇 세기 동안 자유주의 사상은 합리적 개인에 대한 엄청난 믿음을 키워왔다. 개개인을 독립적인 이성적 주체로 그리고는 이런 신화적인 창조물을 근대 사회의 기초로 삼아왔다.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는 생각 위에 서 있고,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고객은 언제나 옳다고 믿으며, 자유주의 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하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합리적 개인을 과신하는 것은 실수다. 탈식민주의 사상가들과 페미니즘 사상가들은 이 '합리적 개인'이야말로 상류층 백인 남성의 자율성과 권력을 찬양하는 서구의 국수주의적 환상일 뿐이라고 지적해왔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행동경제학자들과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결정은 대부분 이성적 분석보다는 감정적 반응과 어리짐작식의 손쉬운 방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우리의 감정과 어림짐작은 석기시대를 살아가는 데는 적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리콘 시대에는 한심할 정도로 부적합하다.

 합리성뿐 아니라 개인성 또한 신화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보다는 집단 속에서 사고한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마을이 협력해야 하는 것처럼, 도구를 발명하고 갈등을 풀고 질병을 치료하는 데도 부족이 힘을 모아야 한다. 교회를 짓든 원자폭탄을 만들든 비행기를 띄우든, 어느 한 개인이 그 과정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모든 동물들보다 경쟁에서 우위를 보이고 마침내 지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 개인의 합리성이 아니라 대규모로 함께 사고할 수 있는 전례 없는 능력 덕분이었다.

 인간 개인이 세상에 관해 아는 것은 창피할 정도로 적다. 더욱이 역사가 진행되가면서 개인이 아는 것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석기시대의 수렵 · 채집인은 자기 옷을 만들고 불을 붙이고 토끼를 사냥하고 사자를 피하는 법을 알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실제로 우리가 아는 것은 훨씬 적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거의 전부를 다른 사람의 전문성에 의존해서 얻는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한 실험에서 연구진은 먼저 사람들에게 지퍼의 작동 원리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물어봤다. 응답자 대다수는 아주 잘 안다고 자신 있게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퍼야 우리가 늘 사용하는 것 아닌가. 그런 다음 실험자는 응답자들에게 지퍼가 작동하는 과정을 가능한 한 자세히 묘사해보라고 주문했다. 이번엔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답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스티븐 슬로먼과 필립 페른백은 '지식의 착각'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우리가 꽤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아는 게 미미한데도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든 지식을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반드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런 집단사고에 의존한 덕분에 우리는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고, 지식의 착각 덕분에 스스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불가능한 노력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남들의 지식을 신뢰한 것이야말로 호모 사피엔스에게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시대에는 통했지만 근대에 와서는 곤란을 초래하는 다른 인간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지식의 착각 역시 부정적인 면이 있다. 세계는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기상학과 생물학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기후변화와 유전자변형농작물에 관한 정책을 제안하고, 이라크나 우크라이나가 지도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지역의 정책을 두고 극도로 강한 견해를 고집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헤아리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로 가득한 반향실反響室과 자기 의견을 강화해주는 뉴스피드 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믿음은 계속해서 공고해질 뿐 도전받는 일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우리 견해는 개인의 합리성보다 공동체의 집단사고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고수하는 것도 집단을 향한 충성심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사실을 쏟아 놓고 그들 개인의 무지를 들춰낼 경우에는 오히려 역풍을 맞기 쉽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사실을 싫어한다. 게다가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는 것은 더더욱 싫어한다. 티파티Tea Party 운동 지지자들에게 지구온난화에 관한 통계 자료를 보여주고 진실을 믿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집단사고의 위력은 너무나 만연해서 얼핏 자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믿음도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가령, 미국에서는 한경오염과 멸종위기종 같은 문제에 관한 한 우파 보수주의자들이 좌파 진보주의자들에 비해 관심이 훨씬 낮다. 보수 지역인 루이지애나 주의 환경 규제가 진보 성향의 매사추세츠 주보다 훨씬 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말 그대로 보수주의자라면 오랜 생태계의 질서를 보존하고 선조들의 땅과 숲과 강을 보호하는 데 훨씬 많은 관심을 쏟을 거라고 짐작할 것이다. 반면에 진보주의자는 지방을 급진적으로 바꾸는 일에, 특히 그 목표가 사회진보를 앞당기고 인간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라면 그런 문제에 훨씬 개방적일 거라고 예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역사적 변수에 의해 정당의 노선이 한 번 결정되고 난 결과, 보수주의자들은 으레 하천 오염이나 조류 멸종 같은 문제는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된 반면, 좌파 진보주의자들은 오랜 생태계 질서를 교란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두려워하는 경향을 보인다.

 심지어 과학자들도 집단사고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사실이 여론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과학자들 자신도 과학자 집단사고의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 과학 공동체는 사실의 효력을 믿는 집단이다 보니, 이런 공동체에 충직한 학자들은 올바른 사실만 열거해도 공적인 토론에서 이길 수 있다고 줄기차게 믿지만, 경험상 정반대의 경우가 다반사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합리성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믿음 자체가 자유주의자들이 집단사고의 산물일 수 있다. 몬티 파이튼이 <브라이언의 삶>에 나오는 절정의 장면 중 하나에서 홀딱 반한 신도 무리가 브라이언을 메시아로 착각한다. 브라이언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를 필요가 없다. 어느 누구든 따를 필요가 없다! 너희는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너희는 모두가 개인이다! 너희는 다 다르단 말이다!"라고 하자 열광하는 무리는 한목소리로 제창한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가 개인이다! 그렇다, 우리는 다 다르다!"

 몬티 파이튼의 이 장면은 1960대를 휩쓴 반反문화의 교조주의를 풍자한 것이었지만, 여기서 전하려는 요지는 합리적 개인주의에 대한 믿음 전반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근대 민주 사회를 가득 메운 군중 역시 한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그렇다, 유권자가 제일 잘 안다! 그렇다, 고객은 언제나 옳다!"

 

p331

 거대 권력은 블랙홀처럼 주변 공간 자체를 왜곡한다. 그 곁에 가까이 갈수록 모든 것이 더 심하게 뒤틀린다.

 

 

 몇 년 전 나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만찬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내 친구들은 가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런 비공개 행사장 안에서 중요한 인사들 사이에서만 새 나오는 어떤 큰 비밀들을 들을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날 참석자는 한 서른 명쯤 됐는데, 모두가 권력자의 관심을 끌고, 재치 있는 말로 그를 감명시키고, 비위를 맞추고, 그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려 애를 썼다. 만약 그 중 어느 누구라도 어떤 큰 비밀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는 더없는 수완을 발휘한 셈이었다. 이것은 네타냐후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사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권력이 갖고 있는 중력 탓이었다.

 진심으로 진실을 바란다면 권력의 블랙홀을 피하고, 중심에서 떨어진 주변부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오랜 시간을 허비할 수 있어야 한다. 혁명적인 지식은 권력의 중심에서 출현하는 경우가 드물다. 왜냐하면 중심은 언제나 존재하는 지식을 토대로 구축되기 때문이다. 구질서의 수호자가 권력의 중심에 다가올 수 있는 자를 결정하는데, 이때 전통에서 벗어난 파괴적 사상을 가진 자는 걸러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쓸데없는 지식도 걸러낸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지혜를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주변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다보스 포럼에서 오가는 논의 중에는 어떤 눈부신 혁명적 통찰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확한 정보에 기초하지 않는 추측과 한물간 모델, 신화적인 도그마, 터무니없는 음모 이론 등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만약 권력의 중심에만 머물러 있으면 세계를 보는 눈이 극도로 왜곡될 것이다. 그렇다고 주변부로 모험을 감행하면 귀중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할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갈수록 악화될 것이다.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복잡해짐에 따라, 결과적으로 인간 개개인은 - 장기판의 왕이 됐든 졸이 됐든 - 세계를 구성하는 기술 도구와 경제 흐름, 정치 동학에 훨씬 더 무지해질 것이다. 2,000년도 더 전에 소크라테스가 관찰했듯이, 그런 조건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개개인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도덕과 정의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옳고 그름과, 정의와 불의의 차이를 분별하길 기대할 수 있을까?

 

p337

 세상이 짜인 방식이라는 게,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무지 속에 남아 있을 수 있고, 정작 알려고 애쓰는 사람은 진실을 알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돼 있다. 

 

p338

 근대 역사에서 최대 범죄는 증오나 탐욕이 아니라 무지와 무관심에서 더 많이 나왔다.

 

p340

 지금 세계에서 불의의 대부분은 개인의 선입견보다는 대규모의 구조적 편향에서 나온다. 하지만 우리 수렵 · 채집인의 뇌는 그런 구조적 편향을 감지하도록 진화하지는 않았다. 그런 편향의 적어도 일부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 연루돼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 자신이 그 교훈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글로벌 이슈를 논할 때 나는 늘 다양한 소외 집단들보다 글로벌 엘리트들의 관점을 우선시하는 위험에 빠진다. 글로벌 엘리트들은 대화를 주도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관점은 놓칠 수가 없다. 반면에 소외된 집단들은 대개 말이 없다. 그러다 보면 그들의 존재마저 잊기 쉽다. 이 모든 게 고의적인 악의가 아니라 순전한 무지에서 생기는 일이다.

 

p348

 어느 편을 지지하든, 우리는 실제로 무서운 탈진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듯 보인다. 비단 특정한 군사적 사건뿐 아니라 전 역사와 민족마저 가짜로 조작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만약 지금이 탈진실의 시대라면 진실의 태평성대는 정확히 언제였나? 1980년대였나 아니면 1950년대? 1930년대? 탈진실의 시대로 넘어가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나? 인터넷인가? 소셜미디어인가? 푸틴과 트럼프의 부상인가?

 역사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정치 선전과 거짓 정보는 새로운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민족을 통째로 부인하고 가짜 국가를 만드는 습관조차 유서가 깊다. 1931년 일본 육군은 중국 침략을 정당화하려고 자작 모의공격을 벌였고, 그런 다음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정복을 정당화했다. 그런 중국 자신은 티베트가 독립국가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부인해왔다. 영국은 호주 점령을 '무주지terra mullius 선점'의 법리로 정당화해 사실상 5만 년 원주민의 역사를 지워버렸다.

 20세기 초 시온주의자들은 가장 좋아하는 슬로건으로 '땅 없는 사람(유대인)의 사람(팔레스타인인) 없는 땅으로의' 귀환을 내세웠다. 그 지역에 있던 아랍 사람들의 존재는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무시됐다. 1969년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가 팔레스타인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한 적도 없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그런 견해는 지금도 이스라엘 내부에서 아주 흔하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와 수십 년째 무력 분쟁을 해왔으면서도 말이다. 가령, 2016년 2월 이스라엘의 국회의원 아나트 베르코는 의회에서 연설하던 중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체와 역사를 의문에 붙였다. 그녀가 제시한 증거가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팔레스타인이라는 단어의 머리글자일 'p'조차 아랍어 철자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팔레스타인 사람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었다. (아랍어에서는 f가 p에 해당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Palestine을 아랍어로 표기하면 Falastin이 된다.)

 

p350

 사실 인간은 늘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왔다. 호모 사피엔스야말로 탈진실의 종이다. 호모 사피엔스 특유의 힘은 허구를 만들고 믿는 데서 나온다. 석기시대 이래 줄곧 자기 강화형 신화는 인간 집단을 하나로 묶는 데 기여해왔다. 실로 호모 사피엔스가 이 행성을 정복한 것도 무엇보다 허구를 만들고 퍼뜨리는 독특한 능력 덕분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이방인들과도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동물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도 허구의 이야기를 발명하고 사방으로 전파해서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까지 그 이야기를 믿도록 납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허구를 믿는 한, 우리는 다 같이 동일한 법을 지키게 되고, 그럼으로써 효과적으로 협력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무서운 탈진실의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을 두고 페이스북이나 트럼프, 푸틴을 탓한다면, 수 세기 전 수백만 기독교인이 자기 강화형 신화의 버블 속에 자신을 가둬둔 사실을 떠올리기 바란다. 그때도 성경의 진위 여부는 조금도 의심하려 들지 않았다. 수백만 무슬림 역시 쿠란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옛 1,000년 동안 사람들의 당시 소셜 네트워크에서 '뉴스'와 '사실'로 통했던 것들의 상당수는 기적과 천사, 귀신과 마녀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시대의 대담한 리포터들은 지하세계의 가장 깊은 수렁에서 일어난 일도 생중계하듯 전했다. 하지만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빠졌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전혀 없다. 모든 불신자는 죽은 후 영혼이 지옥에서 불탄다거나, 브라만 계급과 불가촉천민 계급의 결혼은 우주의 창조주가 싫어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수십억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이런 이야기들을 믿어왔다. 어떤 가짜 뉴스들은 영원히 남는다.

 

p359

 사실,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데 거짓 이야기는 진실보다 본질적인 이점이 있다. 만약 자신이 속한 집단의 충성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보고 싶다면, 시험 삼아 사람들에게 분명히 참인 사실보다 어떤 불합리한 것을 믿어보라고 요구하는 편이 훨씬 낫다. 조직의 보스가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라고 말할 때는 굳이 그에 대한 충성심이 없더라도 박수를 칠 수 있다. 하지만 보스가 "태양은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진다"라고 할 때는 진정한 충성파들만 박수를 보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고 믿어준다면, 당신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도 그들은 당신 편을 들어주리라 신뢰할 수 있다. 공인된 사실만 믿겠다는 사람이라면 그의 충성심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p361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성경이나 베다, 모르몬교 경전을 신성시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것을 신성시하는 다른 사람들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접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우리가 신성한 책을 존중하게 되는 과정이나 지폐를 존중하게 되는 과정이나 알고 보면 정확히 동일하다.

 

p363

 진실과 권력의 동반 여행은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하다. 머지않아 각자의 길을 가게 돼 있다. 권력을 바란다면 어느 지점부터는 허구를 퍼뜨리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반면, 세상에 관한 모든 허구는 배제한 채 진실만을 알고 싶다면, 어느 지점부터는 권력을 단념해야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자신의 동조자를 얻고 추종자를 격려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실들마저 인정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훨씬 더 결정적인 것은, 자신과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원천, 그리고 자신이 더 많은 권력을 바라는 이유에 관한 어떤 불편한 사실들마저 인정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진실과 권력 사이에 이런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등 신비로울 게 없다. 직접 목격하고 싶다면, 전형적인 미국 와스프 WASP를 찾아가 인종 문제를 제기하거나, 주류 이스라엘인을 찾아가 팔레스타인 점령 문제를 화제에 올리거나, 영국의 전형적인 남성bloke 에게 가부장적 문제로 말을 걸어보라.

 호모 사피엔스 종으로서 인간은 진실보다는 힘을 선호한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통제하려는 데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도, 그러면 통제하기가 쉬워질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이 지배하고 신화는 무시되는 사회를 꿈꾼다면 '호모 사피엔스'에게서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 차라리 침팬지에게 운을 시험해보는 게 낫다.

 

p365

 우리의 편견을 드러내고 정보원을 검증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무다. 앞 장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 조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선호하는 정보원을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신문이든, 웹사이트든, 티브이 방송이든, 어떤 개인이든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세뇌를 피하고, 현실과 허구를 구분할지에 대해서는 20장에서 훨씬 깊이 있게 살펴볼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개략적인 요령 두 가지만 제시하겠다.

 첫째, 믿을 만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만약 뉴스를 공짜로 얻는다면 당신이 상품이기 쉽다. 어떤 수상한 억만장자가 당신에게 이런 거래를 제시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에게 매월 30달러를 주겠다. 그 대신 당신은 내가 바라는 정치적, 상업적 편견을 당신 머릿속에 심을 수 있도록, 매일 한 시간 당신을 세뇌할 수 있게 해달라." 이런 거래를 받아들이겠는가? 제 정신이라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자 수상한 억만장자는 조금 다른 거래를 제안한다. "매일 한 시간 내가 당신을 세뇌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 그 대신 이 서비스의 비용을 당신에게 물리지 않겠다." 그러자 갑자기 수억 명의 사람들이 솔깃해 한다. 부디 그런 사례를 따라가지 않기를 바란다.

 두 번째 요령은, 만약 어떤 이슈가 특별히 중요해 보인다면 그것에 관련된 과학 문헌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과학 문헌이란 동료 평가를 거치는 논문, 저명한 학술 출판사가 낸 책, 명망 있는 기관의 교수가 쓴 저술이다. 과학 역시 나름의 한계가 분명히 있다. 과거에도 많은 오류가 있었다. 그럼에도 과학 공동체는 수 세기 동안 우리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원천이었다. 만약 당신이 과학 공동체가 어떤 문제에 관해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적어도 당신이 거부하는 과학 이론을 알아야 하고,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경험적 증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자극적으로 공적 토론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 특히 토론 내용이 자신의 전문 영역으로 넘어왔을 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분야가 의학이 됐든, 역사 됐든 마찬가지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 유지를 편드는 것이다. 물론 학문적 연구를 계속 해나가고 그 결과물을 소수의 전문가들만 읽는 대중 과학서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최신 과학 이론을 전파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술과 허구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일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과학자가 공상과학 소설SF도 쓰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사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예술은 사람들의 세계관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21세기에 와서는 공상과학 소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장르라는 주장도 있다. AI라든가 생명공학, 기후변화 같은 문제에 관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이해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좋은 과학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좋은 SF 영화 한 편이 <사이언스>나 <네이처>에 실린 논문 한 편보다 훨씨 가치가 크다

  p369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협력을 잘할 수 있기 때문이고, 협력을 그토록 잘할 수 있는 비결은 허구를 믿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과 화가, 극작가는 최소한 군인과 기술자 만큼이나 중요하다. 

 

p370

 사실 우리는 알고리즘으로 증강된 소수의 슈퍼휴먼 엘리트와 무력해진 다수 하위 계층의 호모 사피엔스 간의 갈등을 두려워해야 한다.

 

p373

 오늘날 과학 기술 혁명의 결과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진정한 개인과 진짜 현실이 알고리즘과 티브이 카메라에 의해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자체가 신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상자 안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이미 자신들이 상자 - 자신의 뇌 - 안에 갇혀 있으며, 그 상자는 다시 더 큰 상자 - 무수히 많은 기능을 갖춘 인간 사회 -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매트릭슬르 탈출했을 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더 큰 매트릭스일 뿐이다. 1917년 러시아 농부들과 노동자들은 차르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에는 스탈린 체제로 귀결됐다. 세계가 당신을 조종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탐구하기 시작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핵심적 정체성은 뇌신경망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뿐이다.

 사람들은 상자 안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정작 세상의 모든 경이로움은 놓치고 만다. 네오가 매트릭스 안에 갇혀 있는 한, 그리고 트루먼이 티브이 스튜디오 안에 묶여 있는 한, 그들은 피지 섬도, 파리도, 마추픽추도 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다. 매트릭스 밖으로 탈출하든, 피지 섬으로 여행을 가든 그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당신 마음속 어딘가에 '피지 섬에서만 개봉할 것!'이라는 커다란 붉은색 경고문이 적힌 강철 심장이 있어, 남태평양으로 여행을 가서 그 심장을 열었을 때에야 비로소 피지 섬에서만 누릴 수 있는 온갖 특별한 감정과 느낌이 발산되는 것이 아니다. 피지 섬에 가보지 못하면 이런 특별한 느낌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피지 섬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세계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다. 심지어 매트릭스 안에서도 가능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매트릭스' 스타일의 거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모든 민족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이야기와 상출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정신적 체험은 실재하는 것이다. 만약 인류의 역사가 지르콘 행성에서 온 쥐 과학자들에 의해 슈퍼컴퓨터로 운영되는 정교한 시뮬레이션으로 밝혀지면 카를 마르크스와 IS로서는 꽤 당혹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이 쥐 과학자들도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과 아우슈비츠 문제에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지르콘 대학의 윤리위원회를 통과할 수 있었단 말인가? 비록 가스실이 실리콘칩 찬의 전기 신호에 불과했다해도, 그때 희생자들이 체험한 고통과 공포, 좌절감의 극심함은 조금도 덜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은 고통, 공포는 공포, 사랑은 사랑이다. 매트릭스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 바깥 세계의 원자가 모여서 일어나는 것이든, 컴퓨터가 조종하는 전기 신호에서 생겨나는 것이든 상관없다. 어떻든 두려움은 실재한다. 따라서 우리 정신의 실체를 탐구하고 싶다면 매트릭스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어디서나 가능하다.

 지금까지 나온 최선의 과학적 이론과 최신의 기술 장비에 따르면 정신은 어떤 경우에도 조작에서 자유롭지 않다. 조작용 껍질 안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진정한 자아는 없다. 그런데도 대다수 SF 영화는 여전히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른바 물질에 대한 정신의 승리다.

 

p390

 오늘날 아이들이 배우는 것의 대부분은 2050년이면 별 소용이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p391

 이런 세상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전수해야 할 교육 내용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바로 '더 많은 정보'다. 정보는 이미 학생들에게 차고 넘친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식별하는 능력이며, 무엇보다 수많은 정보 조각들을 조합해서 세상에 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다.

 사실, 이런 능력은 수 세기 동안 서구의 자유주의 교육이 추구해 온 이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서양의 많은 학교들조차 그런 이상을 추구하는 데 오히려 태만했다. 학생들에게는 '스스로 생각하라'고 권장하면서 정작 교사 자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데이터를 밀어넣는 데만 집중했다. 자유주의 학교들은 권위주의를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특히 거대 서사에는 질색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학생들에게 많은 데이터와 약간의 자유만 주면 학생들이 자기 나름의 세계상을 만들어낼 것으로 여겼다. 지금 세대는 설명 모든 데이터를 종합해서 세계에 관한 하나의 일관되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도, 장래에는 훌륭한 종합을 이뤄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시간이 없다. 다음 수십 년 사이에 우리가 내릴 결정들이 생명 자체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기초로 해서만 그 결정들을 내릴 수 있다. 지금 세대에 우주에 관한 포괄적인 견해가 없다면 생명의 미래는 무작위로 결정될 것이다.

 

p393

 그렇다면 우리는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까? 많은 교육 전문가들은 학교의 교육 내용을 '4C', 즉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의사 소통 communication, 협력 collaboration, 창의성 creativity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학교는 기술적 기량의 교육 비중을 낮추고 종합적인 목적의 삶의 기술을 강조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며, 낯선 상황에서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일 것이다. 2050년의 세계에 발맞춰 살아가려면 새로운 생각과 상품을 발명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재발명해야만 할 것이다.

 

p424

 대부분의 이야기는 기초가 튼튼해서라기보다는 지붕의 무게 덕분에 탈 없이 유지된다. 기독교 이야기를 보자. 기초는 엉성하기 짝이 없다. 온 우주의 창조자의 아들이 2,000년 전쯤 은하수 어딘가에서 탄소 기반 생명으로 태어났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나? 그런 일이 로마 속주였던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처녀였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나? 그럼에도 전 지구에 걸쳐 막대한 기관들이 그 이야기 위에 세워졌고, 그 무게가 너무도 압도적인 힘으로 내려 누르는 덕분에 그 이야기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이야기에서 단어 하나를 바꾸려는 것을 두고도 전면전이 벌어졌다. 서유럽 기독교도와 동방적교회 기독교도 간에 1,000년 동안 계속된 균열은 최근에는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간의 상호 살육전으로 표출되기도 했는데, 애초에 '필리오케filioque'(라틴어로 '또한 성자에게서'라는 뜻)라는 한 단어가 발단이었다. 서유럽 기독교도는 기독교인의 신앙고백 안에 이 단어를 넣고 싶어 한 반면, 동방적교회 기독교도는 격렬히 반대했다.(이 단어를 추가하는 것이 갖는 신학적인 함의는 너무나 불가사의해서 여기서 이해가 되도록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궁금하면 구글에게 물어보라.)

 일단 이야기 위에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전 체계가 구축되고 나면, 이야기를 의심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을 뒷받침 하는 증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개인적, 사회적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아봤을 때, 때로는 지반보다 지붕이 더 중요하다.

 

p426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신봉자에게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천주교 사제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잔을 들고서는 빵은 그리스도의 살이며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라고 선포한다. 신도는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의 교감을 얻는다. 그리스도를 실제로 입안에 넣고 맛보는 것보다 무엇이 더 생생할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사제는 성찬식 때 이런 과감한 선포를 라틴어로 했다. 라틴어는 고대 종교와 법률 그리고 생명의 비밀을 이야기할 때 쓰는 언어였다. 모여 있던 농민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사제는 빵 한 조각을 높이 들고 이렇게 선포했다.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Hoc est corpus!. 이것은 몸이다!)" 그러면 아마도 그 방은 그리스도의 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라는 라틴어를 몰랐던 까막눈의 농민들 머릿속에서는 그 말이 "호쿠스 포쿠스Hocus pocus!"로 와전됐고, 그 뒤 이것은 개구리를 왕자로 변하게 하고 호박을 마차로 바꿔놓는 강력한 주문으로 거듭났다.

 

p429

 근대 서구에서는 유교가 의식에 집착한 것을 두고 흔히 인간에 대한 얕은 이해와 의고擬古주의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공자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하지 않는 인간 본성을 깊이 꿰뚫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 문화 - 중국을 필두로 이웃 나라인 한국과 베트남, 일본 - 에서 극도록 수명이 긴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의례와 의식이 거대한 장애물이다. 하지만 공자와 같이 사회의 안정과 조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실은 골칫거리일 때가 많다. 그런 사람에게는 의례와 의식이야말로 최선의 동맹이다.

 

p431

 모든 의식 중에서도 가장 잠재력이 큰 것은 희생이다. 세상 모든 것 중에 고통이야말로 가장 실감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은 결코 누구도 무시하거나 의심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어떤 허구를 정말로 믿게 만들고 싶다면, 그것을 대신해서 희생하는 쪽으로 그들을 유도하라. 누구라도 이야기를 위해 고통을 체험하고 나면 대부분 그 이야기가 실제라고 확신하게 돼 있다.

 

 p437

 이스라엘에서는 공교적인 유대인들이 세속화된 유대인들과 심지어 완전한 무신론자들한테까지 이런 금기를 강요하려 들 때가 많다. 이스라엘 정치에서 정통파 유대교 정당들이 대체로 힘의 결정권을 행사하게 된 뒤로, 안식일에 모든 종류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을 대거 통과시켰다. 안식일에 개인 차량을 사용하는 것을 불법화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중교통 운행을 금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전국에 걸쳐 종교적 희생을 강제한 이 조치는 주로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에 타격을 준다. 특히 토요일은 노동계급 사람들이 자유롭게 먼 친척이나 친구를 방문하거나 관광 명소로 여행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할머니야 신형 자가용을 몰고 다른 도시에 사는 손주를 찾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가난한 할머니는 버스와 기차가 모두 운행을 하지 않으니 어디에도 오갈 수가 없다.

 

p443

 악의 문제는 악이 실제 삶 속에서는 반드시 추악하지는 않다는 데 있다. 악은 사실 대단히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기독교는 할리우드보다 현명했다. 전통적 기독교 미술에서는 사탄을 대단히 매력적인 정부情婦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탄의 유혹에 저항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파시즘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파시즘의 거울로 자신을 들여다보면 추악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눈에 띄지 않는다. 1930년대에 독일인들이 파시즘의 거울로 자신들을 봤을 때는 독일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족으로 보였다. 지금 러시아인들이 파시즘의 거울을 보면 러시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파시즘의 거울을 보면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들 모두 그 아름다운 집합체 속에 자신도 빠져들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fascis'에서 나왔다. '막대 다발'이라는 뜻이다. 세계사에서 가장 흉포하고 살인적인 이데올로기치고는 별 매력 없는 상징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고 사악한 의미가 있다. 막대 하나는 대단히 약하다. 누구나 쉽게 부러뜨릴 수 있다. 그렇지만 여러 개를 다발로 묶으면 부러뜨리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는 각 개인은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집단으로 한데 뭉치면 대단히 강력하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파시스트들은 어떤 개인보다도 집단의 이익이 특권을 갖는다고 믿으며, 어떤 하나의 막대도 다발의 결속을 깨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한다.

 

p448

 근대 문화가 부상하면서 상황은 뒤집혔다. 신앙은 점점 정신적 노예처럼 보였고, 의심은 자유의 전제 조건으로 비치게 되었다.

 1599년에서 1602년 사이 어느 시기에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햄릿》이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한 자기 나름의 <라이온 킹>을 썼다. 하지만 심바와 달리 햄릿은 생명의 원을 완성하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회의적이고 양면적인 상태로 남아,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지도 못하고, '사느냐 죽느냐'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나은지 결정도 못 내린다. 이 점에서 햄릿은 전형적인 근대의 영웅이다. 근대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과다한 이야기들을 거부하지는 않아다. 대신 그것들을 파는 슈퍼마켓을 차렸다. 근대 인간은 그 모두를 자유롭게 시식해볼 수 있는데,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이면 무엇이든 고르거나 조합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자유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한다. 파시즘 같은 근대 전체주의 운동은 의심에 찬 사상들의 슈퍼마켓에 격렬히 반발했고, 오직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절대적 믿음만 요구하는 데에서는 전통 종교들까지 능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근대 사람들은 믿음의 슈퍼마켓이 마음에 들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모를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선택의 가능성 자체를 신성시한다. 영원토록 슈퍼마켓 통로에 서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택할 능력과 자유가 있는 한, 자기 앞에 진열된 상품을 살펴보기만 한다. (...) 그러다 어느 순간 화면 정지, 컷, 끝.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p455

 이제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시대가 되어 이런 개인의 신화 제조 과정을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의 일부야말로 우리 정신이 하던 일을 컴퓨터에 아웃소싱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완벽한 자아를 구축하고 장식하는 데 무수한 시간을 쏟는 가운데, 점점 자신의 창작물에 고착돼가고, 자신의 실체와 그것을 착각하는 것을 보면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두렵다. 그 덕분에 실상은 교통 체증과 사소한 말다툼, 긴장된 침묵으로 가득할 뿐인 가족 휴가는 아름다운 풍경의 파노라마와 완벽한 저녁식사, 웃음 가득한 얼굴들의 모음으로 둔갑한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의 99퍼센트는 자아의 이야기에서 누락된다. 

 우리의 실제 경험은 신체적인 데 반해, 우리의 환상 속에서 빚어지는 자아는 아주 시각적이기 쉽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싶다면 페이스북 계정이나 자기 내면에서 하는 이야기와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몸과 마음의 실제 흐름을 관찰해야 한다. 그러면 이성의 많은 개입 없이도, 그리고 자신의 아무런 지시 없이도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이 스스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이런 저런 바람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바뀌어 불면서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것과 같다. 당신은 바람이 아닌 것처럼, 당신이 체험하는 생각과 감정과 욕망의 혼합체도 아니다. 또한 그것들을 지나오고 난 눈으로 보고 들려주는 세탁된 이야기도 분명히 아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체험했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는 없다. 가질 수도 없다. 그 체험들의 합도 아니다. 사람들은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런 다음 어떤 이야기를 들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할 첫 번째 사실은, 당신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p485

 오늘날 모든 나라는 세 가지 주요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이것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과제란 핵전쟁, 기후변화, 기술 혁신에 따른 파괴입니다.

 

p492

 당신은 어떤 것 - 고통이든 쾌락이든 - 을 경험하면서 그 밖의 것을 바랍니다. 고통을 경험할 때에는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쾌락을 경험할 때는 쾌락이 강해지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실체의 부정이 모든 괴로움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스스로 훈련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고통에서 달아나고 더 많은 쾌락을 쫓아 달려가는 대신, 보다 균형 잡힌 정신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통과 쾌락에 대해 불필요한 괴로움을 일으지키 않고 둘 다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유시민의 여행 에세이. 

유럽 관광의 머스트비인 4개의 도시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일반적인 신변 잡기식의 여행기와는 좀 차별화되긴 하는데 그래도 역시 여행 에세이이니만큼 캐쥬얼하다.

가볍고 재밋게 읽을만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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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84

 베르사유 궁전 안내서는 건축 과정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궁전과 정원을 만든 과정과 방법을 알면 그곳에서 미학적 쾌감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리라. 베르사유 궁전은 모든 면에서 전제군주제의 폭력적 본성을 증언한다. 루이 14세는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차별을 없앤 앙리 4세의 칙령을 폐지했다. 그러자 부당한 차별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 때문에 개신교도 수십만 명이 종교적 관용이 있는 주변 국가로 떠나버렸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상공업에 종사하던 이가 많아서 프랑스의 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파리를 비롯한 도시의 거리에는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은 시신이 즐비했지만, 잦은 전쟁 때문에 국가의 재정이 바닥을 보인 탓에 정부는 적극적인 빈민 구제 사업을 할 수 없었다.

 루이 14세는 이런 상황에서 백성을 강제 동원해 공사를 벌였다.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으면 아무 보상도 하지 않고 묻어버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지은 호화 궁전에 귀족들을 불러 모아 사냥과 승마, 당구와 춤을 즐겼다.

 '태양왕'이라는 별명은 어릴 때부터 발레를 했던 그가 태양신 아폴로 역으로 공연에 출연한 일과 관련이 있다. 그는 1715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어린 증손자에게 후회가 담긴 유언을 남겼다. "전쟁을 피하고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치를 해라." 루이 14세의 자녀와 손자들이 대부분 천연두와 홍역을 비롯한 전염병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왕위가 증손자에게 바로 내려간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70년 넘게 재위했던 왕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p287

 전염병은 지금도 '공정'하다. 권력자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만인을 전염병에서 해방해야 한다. 19세 후반 이후 문명국가들은 생물학, 병리학, 공공보건학, 도시계획학, 건축학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는 전문가들의 능력을 모아 악성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구촌에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이 여전히 많다. 어디선가 전염병이 창궐한다는 뉴스가 들리면 그 지역의 국가조직 자체가 붕괴했거나, 아니면 지극히 무능하거나, 사악하거나 또는 둘 모두인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해볼 충분한 이유가 된다.

==> 코로나19 정국에 굉장히 시의적절하다.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인 우치다 타츠루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론. 무엇보다도 굉장히 재밋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무언가 아싸리하게 끝나는 맛이 없다는 점이 있다. 사진으로 말하자면 약간은 흐릿하게 핀트가 엇나간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우치다 타츠루의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작품론과 해석을 보면서 내 그런 느낌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구나라는 것과, 그것이 왜 그런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조각에는 양각과 음각이 있다. 양각은 보여주려는 바를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고, 음각은 그와는 반대로 보여지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기법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하루키는 음각을 통해 이 세상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머리에는 팬의 입장으로 편애한다고 써놨지만, 내가 보기엔 하루키를 편견없이 바라본 객관적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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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이라는 초기 3부작은 비슷한 테마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는 별도로, 이 작품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개인사에 깃든 트라우마적 경험을 써낸 것입니다. 꼭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더라도 현실 이상으로 실감나는 사건입니다. 심지적인 원풍경이라고 해도 좋고, 심층구조라고 해도 좋습니다.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낄 때 틀 자체를 형성하는 사건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글로 쓰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적 경험'입니다.

 트라우마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상처가 아프다는 점보다는 외상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불가능함 자체가 인격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기묘하게도 우리가 타인을 판단하는 요소는 그 사람이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주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가, 어떤 화제를 신경증적으로 기피하는가 하는 점입니다(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잖아요. '아이는 있나요?' 하고 누가 물으면 갑자기 부르르 떨며 사람 목을 조르는 놈!).

 

 '트라우마적 경험'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살아갈 의미(와 무의미)가 모조리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화제'로 편성됩니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사건과 마주치더라도, 어떤 미지의 사항을 입력하더라도, '옛 상처'가 빚어내는 정형화된 반응으로 귀착하고 말지요. 어떤 인간과 만나더라도, 어떤 말을 듣더라도, 어떤 것을 만지더라도, 미지의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세계' 안에 갇힌 채 시간이 멈추는 것, 이것이 트라우마적 증상입니다.

 따라서 '트라우마적 문학' 또는 '문학적 트라우마'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쓰더라도 동일한 틀로 돌아가 자신의 발언에 스스로 동의하는 '혼자만의 끄덕거림'을 되풀이합니다. 독자에게는 '설명'하지 않고 뜻 모를 고유명사를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늘어놓으면서 '너 따위가 내 기분을 어떻게 알겠어?' 하고 소리 지르며 주먹을 휘두릅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작가로서 먹고살 수는 있습니다(아니, 그런 작가는 꽤 많지요. 실명을 거론하면 난처해질 테니까 참겠습니다만). 그렇지만 특정한 독자층만이 사랑하는 작가이기를 포기하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젠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을 반복적으로 '그곳'으로 돌려보낸는 트라우마적 경험과 단절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트라우마는 '공허'한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언어화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양태로만 존립하니까요. 술술 언어화할 수 있다면 '트라우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해 남김없이 이야기하는 일'이란 '사실 난 이런 경험을 억압하고 있었다'는 식의 커밍아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종류의 결락이나 결여에 대해, 다시 말해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무언가를 상실하고 깊이 훼손당한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도넛 구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도넛 구멍 자체를 직접 '이것'이라고 지명할 수는 없습니다. 도넛을 만들어 먹어보지 않으면 도넛 구멍의 맛이나 기능을 이해할 수 없지요. 트라우마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넛 구멍을 포함하고 있는 도넛을 만드는' 작업과 닮았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20대까지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트라우마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기 절개切開를 시도했습니다.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상당히 쓰라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트라우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p64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전사자들을 향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분은 중국 대륙에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겪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아무 의미도 없이 불필요할 정도로 잔혹하게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거의 선친은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할 수 없었고, 구태여 언어화하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아마도 언어로 치환해버리면 자신의 경험이 지닌 본래의 '절박함'이 희박해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빈 동굴처럼 자기 몸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순수한 상태로 보존하는 길을 선택하고, 평생 그런 마음을 품은 채 죽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아버지의 'soul'이자 유일무이성을 지켜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것은 타자에게 이해받고 타자와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 '대체 불가능성'이라고 정의한 생명의 정의와 어긋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형성하는 것은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언어화하기 지극히 곤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작가의 일은 생명을 남김없이 기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에 살며시 '다가붙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의 말을 빌리면 '생명과 생명을 잇는joining souls together' 일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버지'를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왜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그 과정을 주제로 삼아 묘사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가 다가붙으려고 하는 알이 취약하다는 말이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중화요리를 일절 먹지 않습니다. 먹을 수 없습니다. 그는 중국과 관련된 강박관념일지도 모른다고 어느 글에선가 썼습니다. '목구멍으로 삼킬 수 없다'는 것은 두드러지게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그는 중국에 관한 어떤 경험(그것은 자신의 경험도 아닙니다)이 이름 붙여지고, 타인의 이해를 받고, 분류당하고 잊히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초기의 명작인 <중국행 슬로 보트>는 화자인 '내'가 해를 끼칠 생인인 우치다 타츠루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론. 무엇보다도 굉장히 재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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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이라는 초기 3부작은 비슷한 테마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는 별도로, 이 작품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개인사에 깃든 트라우마적 경험을 써낸 것입니다. 꼭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더라도 현실 이상으로 실감나는 사건입니다. 심지적인 원풍경이라고 해도 좋고, 심층구조라고 해도 좋습니다.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낄 때 틀 자체를 형성하는 사건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글로 쓰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적 경험'입니다.

 

 트라우마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상처가 아프다는 점보다는 외상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불가능함 자체가 인격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기묘하게도 우리가 타인을 판단하는 요소는 그 사람이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주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가, 어떤 화제를 신경증적으로 기피하는가 하는 점입니다(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잖아요. '아이는 있나요?' 하고 누가 물으면 갑자기 부르르 떨며 사람 목을 조르는 놈!).

 

 

 

 '트라우마적 경험'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살아갈 의미(와 무의미)가 모조리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화제'로 편성됩니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사건과 마주치더라도, 어떤 미지의 사항을 입력하더라도, '옛 상처'가 빚어내는 정형화된 반응으로 귀착하고 말지요. 어떤 인간과 만나더라도, 어떤 말을 듣더라도, 어떤 것을 만지더라도, 미지의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세계' 안에 갇힌 채 시간이 멈추는 것, 이것이 트라우마적 증상입니다.

 

 따라서 '트라우마적 문학' 또는 '문학적 트라우마'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쓰더라도 동일한 틀로 돌아가 자신의 발언에 스스로 동의하는 '혼자만의 끄덕거림'을 되풀이합니다. 독자에게는 '설명'하지 않고 뜻 모를 고유명사를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늘어놓으면서 '너 따위가 내 기분을 어떻게 알겠어?' 하고 소리 지르며 주먹을 휘두릅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작가로서 먹고살 수는 있습니다(아니, 그런 작가는 꽤 많지요. 실명을 거론하면 난처해질 테니까 참겠습니다만). 그렇지만 특정한 독자층만이 사랑하는 작가이기를 포기하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젠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신을 반복적으로 '그곳'으로 돌려보낸는 트라우마적 경험과 단절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트라우마는 '공허'한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언어화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양태로만 존립하니까요. 술술 언어화할 수 있다면 '트라우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해 남김없이 이야기하는 일'이란 '사실 난 이런 경험을 억압하고 있었다'는 식의 커밍아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종류의 결락이나 결여에 대해, 다시 말해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무언가를 상실하고 깊이 훼손당한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도넛 구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도넛 구멍 자체를 직접 '이것'이라고 지명할 수는 없습니다. 도넛을 만들어 먹어보지 않으면 도넛 구멍의 맛이나 기능을 이해할 수 없지요. 트라우마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넛 구멍을 포함하고 있는 도넛을 만드는' 작업과 닮았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20대까지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트라우마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기 절개切開를 시도했습니다.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상당히 쓰라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트라우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꼭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p64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버지는 매일 아침 전사자들을 향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분은 중국 대륙에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겪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아무 의미도 없이 불필요할 정도로 잔혹하게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거의 선친은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할 수 없었고, 구태여 언어화하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아마도 언어로 치환해버리면 자신의 경험이 지닌 본래의 '절박함'이 희박해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빈 동굴처럼 자기 몸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순수한 상태로 보존하는 길을 선택하고, 평생 그런 마음을 품은 채 죽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아버지의 'soul'이자 유일무이성을 지켜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것은 타자에게 이해받고 타자와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 '대체 불가능성'이라고 정의한 생명의 정의와 어긋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형성하는 것은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언어화하기 지극히 곤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작가의 일은 생명을 남김없이 기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에 살며시 '다가붙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의 말을 빌리면 '생명과 생명을 잇는joining souls together' 일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버지'를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왜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그 과정을 주제로 삼아 묘사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가 다가붙으려고 하는 알이 취약하다는 말이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중화요리를 일절 먹지 않습니다. 먹을 수 없습니다. 그는 중국과 관련된 강박관념일지도 모른다고 어느 글에선가 썼습니다. '목구멍으로 삼킬 수 없다'는 것은 두드러지게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그는 중국에 관한 어떤 경험(그것은 자신의 경험도 아닙니다)이 이름 붙여지고, 타인의 이해를 받고, 분류당하고 잊히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걱초기의 명작인 <중국행 슬로 보트>는 화자인 '내'가 해를 끼칠 생각도 없는데도 계속하여 무의식적으로 중국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몇몇 짧은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핵'을 이루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이름 붙여지고, 타인의 이해를 받고, 분류당하고 잊히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 아버지의 생명 중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들'이 그것을 무언중 물려받았다는 것, 적어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p73

 트라무아는 기억이 '바꾸어 쓰기를 거부하는' 증상을 가리킵니다. 어떤 기억의 단편이 어떤 이유에 의해 동일한 형태와 의미(라기보다는 무의미)를 계속 유지하면서 일체의 수정이나 교체도 거부할 때, 우리의 정신은 기능부전機能不全에 빠집니다. 트라우마를 해제시키려면 '강력한 서사의 힘'이 필요합니다. '동일한 형태와 (무)의미를 사수하려고 하는 기억의 단편을 다른 형태, 다른 의미로 '바꾸어 읽는' 힘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바로 '강력한 서사'입니다.

 

p76

 어느 사회집단이든 각자에게 고유한 '그곳의local 아버지'를 갖고 있습니다. '신'이나 '하늘'이라는 이름의 존재이기도 하고, '절대정신'이나 '역사를 관통하는 철의 법칙성'으로 불리기도 하며, '왕'이나 '예언자' 같은 인격적인 모습을 취하기도 합니다.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을 무언가가 전일적專一的으로 '솜씨 좋게 처리하고manipulate'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회집단은 그 사실로 인해 '부권제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선의를 품었다 해도 약자나 박해받는 자에게 동정적이라 해도, '이 세상의 악은 조종자manipulator가 조작하고 있다'는 전제를 채용하는 모든 사회이론은 '부권제 이데올로기'입니다. '부권제 이데올로기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세계에는 악의 근원이 존재한다'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는 자가 되어버립니다.

 왜 우리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요청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세게에는 질서를 제정한 자가 없다는 '진실'을 여간해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불행에 처하고, 이유도 없이 학대당하며, 어떤 교화의 의도도 없이 벌을 받고, 농담처럼 살해당합니다. 천재지변은 선인만 살려주고, 악인의 머리 위에는 벼락이나 화산 바위를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가장 아까운 사람은 요절하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재앙처럼 보이는 인간은 남보다 훨씬 건강합니다. 그런 사례를 우리는 질릴 만큼 보아왔습니다.

 자, 그러면 세계는 완전하게 무질서하고, 모든 것은 무원칙하게 일어나고 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부분적으로 '질서 같은 것'이 있습니다. 세계를 두루 포섭하는 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선 손이 닿는 범위 안에 '질서 같은 것'을 정립할 수는 있습니다.

 사고가 과학적이고, 판단이 공정하고, 신체 감수성이 높고, 상상력의 발동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면, 그 작은 집단에서는 상대적으로 '어떤 질서 같은 것'이 '무질서'를 제어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승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질서 같은 것'을 일정 이상의 범위로 확장하는 일은 불가능하니까요. '질서 같은 것'은 그곳에만 있다는 조건을 받아들일 때만 질서답게 기능합니다. 보편성을 요구하는 순간, 무질서 속으로 곤두박질치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가 서술한 것처럼, 정의를 한꺼번에 사회 전체적으로 실현시키려는 운동은 반드시 숙청이나 강제수용소 중 하나를 채용하기 마련입니다. 역사는 오늘날 이 교훈에 예외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요청해서는 안 됩니다. 그곳의 질서를 확대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이 닿는 범위'를 산술적으로 더하는 것 이상을 해서는 안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예루살렘 연설을 빌려 표현하자면, '생명과 생명을 잇는' 것 이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부권제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축으로서 '그곳의 공생 조직'을 넘어서는 것을 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딱히 사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이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p92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 Totalite et Infini》(마르티누스, 1961)의 끝부분에서 '아이 갖기'와 '여성화하기'라는 수수께끼 같은 주제를 제시했습니다. 이에 대해 일찍이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에로스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죽음이 삶의 꼬리를 물고 있는 우로보로스 뱀과 비슷한 불가사의한 순환구조에 얽혀들어 있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관능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각 상대방의 관능이며, 상대방의 관능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자기 자신의 관능이기 때문이다.

 관능적인 주체의 근거는 사랑하는 사람 안에도 없고, 사랑받는 사람 안에도 없다. 사랑에 관해 에로스의 주체는 '난 ... 할 수 있다'는 기능의 용어로 관능을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을 둘러싸고 내 주체성에 근거를 부여해주는 것은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자신의 기능을 스스로 행사함으로써가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는 수동성을 통해 자기 동일성을 이끌어낸다.

《전체성과 무한》

 

 이때 주체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능동성이 아니라 수동성이며, 자신의 확실함이 아니라 불확실함입니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관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결정적인 주체의 변용을 '여성화'라고 불렀습니다.

 

 주체의 불확실함은 주체의 자기 통제력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것은 주체의 유연화attendrissement, 주체의 여성화effemination 인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

 레비나스가 '여성'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경험적인 여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범주라는 말은 이제껏 몇 번이나 반복해왔다. 이제 그것이 어떤 것인지, 겨우 그 윤곽이 뚜렷해졌다. '여성'이란 수동성을 양식으로 삼는 주체성 - 모든 주체성에 선행하는 주체성 - 의 다른 이름이다.

 우치다 타츠루,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レヴィナスと愛の現象学》, 세리카쇼보 2001

 

p115

 범속적인 '선악'의 기준이 없는 세계에서 '선'을 행하는 것, '옳고 그름'의 절대적 기준이 없는 세계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 이것이 절망적일 만큼 이루어내기 힘든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절망적일 만큼 이루어내기 힘든 일에 직면해 있다는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p119. 한국 드라마 <겨울 연가>와 《양을 쫓는 모험》의 설화론적 구조

 

 BSJ(배용준 서포터즈 인 재팬)의 주재主宰로 제1회 일본 욘욘 학회가 교토 캠퍼스 플라자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런 으리으리한 자리에 제1회 특별강연자로 나서는 영광을 입었지요. 열기에 휩싸인 회의장은 남성 2명(나와 스태프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원 다 여성이었습니다. 우선 개회 인사로 모두들 입을 모아 '안녕하십니까?'를 제창했습니다. 멀리 도쿄에서 참석한 두 사람에게는 '욘욘 순례자'라는 칭호를 주었고, 가장 연장자인 참가자에게는 '오늘의 최고 상궁님'이라는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곧바로 학회 발표가 시작되었습니다. 발표 의제는 '용준 가족의 아홉 유형 분석', '<겨울 연가> 1개생의 사랑과 눈물의 나날', '<겨울 연가> 사이드 스토리의 세계적 전개' 이렇게 세 가지였습니다. 나는 벌써 일본 프랑스어 프랑스문학회, 일불日佛 척학회, 일본 영상학회에 등을 돌린 몸입니다(지금 회원 명부에 이름이 남아 있는 학회는 일본유대학회뿐입니다). 어느 학회를 가더라도 나를 듣는 이로 상정해주는 발표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 흥미도 못 느끼는 주제를 가지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언jargo으로 이야기하는 발표를 듣고 앉아 있는 것은 순전히 소모적일 뿐입니다. 그런 식밖에 안 되는 학회 참여는 그만두어버렸습니다. 따라서 학회 발표를 듣고 무릎을 치며 배꼽을 잡고 웃기는 참으로 오래간만이었습니다. 이토록 비평성과 유머 감각이 넘치는 발표를 듣기는 가뭄에 콩 나듯 아주 드문 일이었지요.

 지적 위신을 내세운다든가, 남의 학설을 폄하한다든가, 박식을 자랑한다는가 하는 '꼴불견'의 동기는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배용준에 대한 경험을 통해 어떻게 최대한의 쾌락을 이끌어냈는가' 하는 데 지성과 정서를 힘껏 쏟아붓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순수한 동기 ... 가히 학술이란 이런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발표가 끝나자 내 순서가 돌아와 한 시간쯤 강연을 했습니다. '죽은 자를 어떻게 죽게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죽은 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관점으로 <겨울 연가>를 해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가 어제 막 생각해낸 것이라 당연하지만) <겨울 연가>는 복신 몽환 노能와 동일한 극적 구성을 띠고 있습니다. 어딘가 있을 법한 곳에서 '그림자의 나라에서 온' 인물과 만나는 구조는 이런 키워드로 이야기의 막을 엽니다.

 "왜 당신은 다른 사람처럼 사라지지 않고 여기에 머무르는 것입니까?" 바꾸어 말하면 "왜 당신은 죽은 나라에서 돌아온 것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지요. 이 물음에 대하여 주인공은 "그러면 진실을 말씀드리지요" 하는 예고와 동시에 다리에서 모습을 감춥니다(여기에서 막간).

 그다음 막간 노래가 나오고 모습을 바꾼 주인공이 무대에 등장합니다. 다시 몸을 꾸미고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이 된 주인공이 질문을 던진 사람을 청자로 삼아 트라우마적 경험을 남김없이 털어놓으며 그 경험을 재구성해갑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럼 뒷일을 부탁하네' 하며 망령은 황천으로 사라집니다.

 <겨울 연가>에서 이승의 주인공은 민형이고, 저승의 주인공은 준상입니다. 그리고 청자는 유진입니다. 유진이 첫눈이 내리는 서울 거리에서 민형과 만나면서 몽환 노는 시작합니다. 중간의 막간은 민형이 당하는 두 번째 교통사고입니다. 기억을 회복한 준상이 침대에서 갈라진 목소리로 '유진아' 하고 부르는 것이 막간 노래에 해당합니다. 이 한마디 말을 전환점으로 삼아 이야기는 극적인 전개를 이룩합니다. 유진을 청자로 삼은 저승의 주인공은 '자기가 누구인지' 찾아 헤매며 '트라우마적 서사(준상은 왜, 그리고 어떻게 죽었을까?)'를 재구성하는 분석적인 여행을 떠납니다. 저승의 주인공은 자신을 죽인 것이 '어머니'라는 것, 자신을 버린 것이 '아버지'라는 것, 그리고 유진 이외의 모든 친구와 지인이 준상의 죽음(그리고 민형으로 다시 태어남)을 바란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준상이 죽지 않기를 바란 것은 이 세상에 유진밖에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녀만이 단 한 사람, 세계에 남은 유일한 '올바른 상제喪制'였습니다. 왜냐하면 유진은 준상에 관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준상이 죽은 뒤에도 '준상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2월 31일 밤, 넌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야?"

 춘천의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커피를 들고 돌아온 유진에게 등을 돌린 채 준상이 "하고 싶었던 말이 생각났어...." 하고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계속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 왜 울었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 순간에 상제와 죽은 자 사이에 통신 라인이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목소리가 상제에게 닿아 '장례'가 대단원을 맞이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내 몸과 마음의 고층古層에 가로놓여 있던, '인간이 비로소 인간이 되는 순간'의 감동이 되살아나면서 눈물이 흘러넘쳤던 것입니다. 장례를 올바르게 치르면 우리는 죽은 자의 메시지를 똑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써 인류의 조상은 다른 영장류와 구별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기점을 알리는 표식이 세워진' 그때의 감동을 추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장례란 죽은 자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때 죽은 자들은 그들만의 세계로 사라집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에 머물러 갖가지 앙화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상제는 죽은 자를 향해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물음에는 원리적으로 답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물은 반드시 영구적입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우리가 죽은 자에게 계속 물음을 던지고 죽은 자의 응답을 기다릴 때, 불현듯 정신을 차려보니 죽은 자는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묻기를 그치고, 죽은 자는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왜냐하면 죽은 자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은 자는 '죽은 자의 나라'에서 돌아옵니다.

 준상이 '그림자의 나라'에서 돌아온 것은 유진 이외의 모든 이가 장례를 잘못 치른 탓입니다. '그의 장례식은 끝났어. 이제는 그를 잊어버리자' 하고 모두들 굳게 결의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준상=민형은 '유령'으로 돌아왔습니다.

 <겨울 연가>는 '유령'이 유진의 도움으로 '성불'하는 이야기입니다. 노에서는 청자인 인물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까?" 하고 물으면 "나는 왜 여기로 돌아온 것입니까?" 하며 저승의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되묻습니다. 죽은 자 스스로가 "나는 죽었지만 올바른 장례를 경험하지 못한 탓에 아직 제대로 죽지 못하고 있다"는 대답을 찾아낼 때까지 이 문답은 이어집니다. "나는 '내가 이미 죽었다'는 말을 당신에게 전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말을 죽은 자 자신이 발견했을 때, 장례는 끝납니다.

 죽은 자 자신이 스스로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준산이 겨울 바다에서 모든 추억을 바다에 버리는 대목에서 '트라우마적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분석적 여정이 완료됩니다. 따라서 그 이후의 에피소드는 서사적 구조로 볼 때 불필요하지요. 더 이상 어떤 인위적인 시도도 준상을 산 자의 세계로 데리고 올 수 없습니다.

 드라마의 마지막 편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해변에 지은 집의 풍경은 '그림자의 나라=죽은 자의 나라'에서 준상이 꾸는 '꿈'입니다. 여기에 이르는 기나긴 이야기가 없었다면 준상은 그 '꿈'을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은 준상=민형'은 유진의 올바른 장례를 통해 겨우 죽은 자의 나라에서 그 꿈을 볼 권리를 손에 넣었던 것입니다.

 나는 강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한 '배용준 가족' 여러분은 '준상은 죽은 자'라는 대담한 가설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냉정한 분석을 발표하여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서사론의 측면에서는 '이것 말고는 해석의 가능성이 있을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을 정도로 내 분석은 정합적입니다. 올바른 장례를 치러주지 않은 죽은 자는 상제가 짊어져야 할 산 자의 삶으로 계속 찾아온다는 서사적 유형은 인류의 발생만큼 오래된 것이니까요. 그래서 온갖 문학작품에는 그런 유형이 되풀이하여 나타납니다

 자, 여기까지 읽으면 예감이 스치는 사람도 꽤 많지 않을까요. <겨울 연가>와 아주 닮은 설화구조를 지닌 작품으로 《양을 쫓는 모험》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쥐'는 '내'가 올바르게 추도하는 데 실패한 죽은 자입니다. 쥐는 제대로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를 향해 알 수 없는 여러 신호를 보냅니다. '나'는 그 신호를 받아들여 "쥐는 도대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해 '쥐'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애쓸 대 '올바른 장례'의 집행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무슨 의미인지, 물론 '나'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메시지인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메시지라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죽은 자뿐이라는 점입니다.

 '나'는 쥐에게 몇 가지 '심부름'을 명령받습니다. 또는 심부름을 명령받았다는 해석을 채용합니다. 양의 사진을 공개하는 것, 쥐가 맡긴 편지를 그녀에게 전달하는 것, 마지막에 시계의 태엽을 감는 것... 이 모든 심부름에 대해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나'는 그저 심부름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이행할 뿐입니다. 이를테면 두 사람의 고향인 항구까지 편지를 전달할 때 '나'와 그녀는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고작 이것 때문에 도쿄에서 일부러 온 거에요?"

 "뭐, 그렇지요."

 "친절하군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습관적일 뿐이에요.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 사람도 그렇게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그 사람이 그렇게 해준 적이 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언제나 서로 비현실적인 폐를 깨쳐왔어요. 그것을 현실적으로 처리할지 안 할지는 또 다른 문제지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양을 쫓는 모험》

 

 그녀의 말대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내'가 쥐의 상제로 뽑힌 바로 그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별달리 편지를 그녀에게 전해달라고 쥐에게 부탁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이다. 누구한테 부탁받지도 않은 일을 해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인 것처럼 생각하는 인간만이 장례를 치를 수 있는 법입니다.

 "편지를 갖고 왔어요." 나는 말했다.

 "나한테요?" 그녀가 말했다.

 전화 소리는 너무 먼데다가 혼선까지 일으켜 필요 이상으로 큰 못소리로 이야기해야 했고, 그 때문에 서로가 하는 말은 미묘한 뉘앙스를 잃어버렸다. 비바람 부는 언덕 위에서 코트 깃을 세우면서 이야기하는 듯했다.

 "사실은 내 앞으로 온 편지인데, 어쩐지 당신 앞으로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생각이 들었군요."

 "네, 그래요." 나는 말했다. 그렇게 말해버리고 나니 자신이 아주 멍청한 짓을 하는 것 같았다.

 

 별장에서 '나'와 최후의 이별을 할 때, 쥐는 비로소 그가 보낸 신호와 그 의미에 대해 밝힙니다(그 설명은 사태를 절반쯤밖에 설명하지 못했지만).

 "나는 제대로 된 나 자신으로 너하고 만나고 싶었어. 나 자신의 기억과 나 자신의 연약함을 지닌 나 자신으로서 말이야. 너한테 암호 같은 사진을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어. 만약 우연이 너를 이곳으로 데려와준다면 나는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이지."

 "그래서 구원은 받았어?"

 "구원받았어." 쥐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이 대화와 <겨울 연가>의 마지막 장면을 겹쳐놓고 싶다는 욕구를 억누를 수 없습니다. 바다에 잠기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서로 껴안을 때, 두 사람이 발화하는 드라마 최후의 언어로서 익것보다 더 어울리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난 계속 그렇게 생각했어. 만약 우연이 너를 이곳으로 데려와준다면 난 마지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이지."

 "그래서 구원은 받았어?"

"구원받았어."

 

p129

 무라카미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의 서평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줄거리를 대강 늘어놓은 서평은 좀 곤란하지요. 특히 결말까지 밝혀 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 일반론적으로 말해 서평은 사람들의 식욕을 돋우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부정적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심한 말을 듣다니, 어떤 작품인지 좀 읽어보고 싶어지는군'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해주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서평가의 솜씨가 아닐는지요.

 

 

 반대로 '식욕을 돋우지 않는 비평'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줄거리를 줄줄 늘어놓거나 결말까지 밝혀버리는' 비평이 바로 몹쓸 비평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의 표층을 시간 배열 그대로 베끼며 결말까지 더듬어가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나 '주제'를 알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인간이 쓴 글, 그것이 쓸데 없는 비평이지요.

 '식욕을 돋우는 비평'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수께끼'를 중심으로 펼쳐 보이는 안내presentaion를 말합니다. 어떤 책 전체를 '수수께끼'로 가득 찬 텍스트로 여기는 독해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책을 읽어내는 사람은 표지를 보면서부터 '오호, 이 표지 색깔에는 무언가 숨은 뜻이 있겠군...' 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목차를 훑어보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낮 1시에 시작한 면접은 부인 5명을 끝내고 났을 때 저녁 6시가 되었다"는 첫 페이지의 첫 줄에 벌써 감탄의 숨을 몰아쉬며 '흠잡을 곳이 없는 첫머리로군. 이래야 문학이지' 하며 감동합니다. 그리고 서둘러 책을 읽습니다.

 모든 대목에서 툭하면 문학적 감흥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는 독자야말로 '식욕을 돋우는 비평'을 쓸 수 있는 글쓴이일 것입니다. 그런 비평이 좋은 비평입니다.

 지금은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다른 분야의 비평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비평에는 '미지未知'에 초점을 맞춘 비평과 '기지旣知'에 무게중심을 두는 비평, 두 가지가 있습니다. 대상이 문학작품이든 살아 있는 사람이든 별반 다를 바 없지요. 비평하는 인간은 '거기에 있는 미지의 요소'에 마음이 끌리는 동시에 '거기에 있는 기지의 요소'에도 감응합니다. 

 후지산을 보고 '오오, 보자기에 그려진 그림처럼 예쁘구나'하는 비평은 '기지로 환원하는' 비평입니다. 이런 방식을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감축減縮하는 비평법'은 때로 필요하며 유용하기도 합니다. '뭐, 그렇지. 세상은 그런거야'하는 뒷방 늙은이 같은 태도도 대체로 감축형 또는 환원형 비평에 속합니다.

 이러한 비평의 대표자로 아가사 크리스티가 형상화해낸 미스 마블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노파는 태어나 자란 마을에서 한 발자국도 외부에 나간 적이 없는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인데, 경탄할 만한 기억력으로 '옛날 이 마을에서 일어났던 아주 비슷한 사건'과 결부지어 온갖 사건의 진상을 밝혀냅니다.

 인간의 욕망이나 환상의 구조가 대단히 단순한 도식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틀리없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건을 기지로 환원하는 비평'은 사실 '인간의 정신은 숙명적으로 빈곤하다'는 통렬한 진리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만 인간 세계의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족합니다.

 '아무리 맛있는 요리도 단지 짐승의 고기와 식물과 기름의 혼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결국은 ... 에 지나지 않는다'로 끝내는 비평적 어법은 어떤 측면에서는 속이 시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한정된 식재료를 조합하여 훌륭한 요리사만 낼 수 있는 기적의 '맛'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습니다.

 

 p133

 무라카미 하루키는 '문단'에서는 고립되어 있는 작가입니다. 등장할 때부터 순문학의 비평가들은 그를 낮게 평가했지요. '이상할 정도로' 낮게 평가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층은 《브루투스BRUTUS》나 《보물섬》을 읽는 사람, '대중적이고 가벼운 도시 지향의 경박한 놈들'이라는 고정관념이 나왔고, 그것이 결국 정설이 되어버렸습니다.

 분명 1980년대 고도소비사회라는 분위기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등장한 것은 사실입니다. '대중적이고 가벼운'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한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누구의 지지를 받았느냐에 의해 그 작품의 사회적 성격이 결정된다는 추론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김정일이 할리우드 영화를 열렬히 좋아한다고 해서 할리우드 영화가 북한 취향이라고 추론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떤 부류의 도시생활자들로부터 '마치 내 이야기를 쓴 것 같다'는 공감(상당할 정도의 착각이라고 해도 좋을)을 얻고 있다고 해서 적지 않은 문예비평가들은 대기업 광고회사인 덴쓰와 최대 대중잡기 출판사인 매거진하우스의 미디어 컨트롤에 의해 선동당하는 어리벙벙하고 머리 나쁜 독자들을 위한 문학이라고 그의 문학을 규정해버립니다. 그러한 판정은 데뷔 이후 사반세기가 지났는데도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저주'처럼 들러붙어 있습니다.

 

 오늘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세계 각국ㄱ의 언어로 번역되어(영어, 불어, 독어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어, 중국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인도네시아어, 아이슬란드어, 터키어에 이르기까지) 해외의 숱한 문학 연구자가 그의 작품에 담긴 매력을 해명하고자 애를 쓰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타일을 모범으로 삼습니다. 이미 영어권을 중심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추종자'까지 출현하기 시작했지요. 《해변의 카프카》는 2005년 뉴욕타임스의 '올해의 베스트 10'에 뽑혔고, 2006년에 그는 '프란츠 카프카상'을 수상했습니다. 그가 현재 노벨문학상에 가장 가까운 일본 작가라는 점에 세간의 의견은 일치하지요. 그럼에도 일본의 비평가들 가운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계적인 대중성을 획득한 이유를 냉정하게 해명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놀랄 만큼 적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노릇입니다.

 비평적 지성이란 본성적으로 '잘 설명할 수 없는 것'에 강하게 끌리는 법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만 골라내어 정형적인 틀에 끼워 맞춘 다음 좋으니 나쁘니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비평이 끝나버린다면, 이 세상에 비평 같은 것이 없어도 아쉬울 사람은 없습니다(적어도 난 아쉬울 것 없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문제'는 비평가들에게 이중으로 곤란한 질문을 들이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어떤 이유로 하루키는 세계적 대중성을 획득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이고, 또 하나는 '왜 그것을 일본의 비평가들은 설명할 수 없는가(또는 전혀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일본의 비평가 중에 내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무라카미 하루키 옐로 페이지》의 필자 가토 노리히로뿐일 것입니다.

 그는 《양을 쫓는 모험》 발표 직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무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비평을 써냈고, 이 책을 포함하여 연구서를 네 권이나 출판했습니다. 가토 노리히로가 작가 한 사람에 대해 연구서를 네 권이나 낸 일은 없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반세기에 걸쳐 그에게 매혹적인 '수수께끼'였던 셈입니다.

 가토 노리히로의 《무라카미 하루키 논집》 앞머리에 수록된 <자폐와 쇄국 :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은 1982년 《양을 쫓는 모험》이 출간된 직후에 쓰였습니다. 그가 쓴 최초의 무라카미 하루키론이지요. 이 글에서 그는 《양을 쫓는 모험》의 구성적인 하자에 주목하여 꽤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니까 별 볼일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한 비판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성립하기 위해 이 결점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은 어떤 상황적 요청에 의한 것일까라는 물음을 통해 한 단계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비판이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비평적 태도를 높이 삽니다. 작품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데 급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문학의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한쪽에 작품을 쓰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저자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것에 깊이 공감하는 독자가 있을 때, '작가와 독자에게 이런 일이 왜 벌어졌을까?'를 묻는 것입니다.

 작품의 좋고 나쁨에 대한 문학의 판정에는 다양한 기준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일찍이 '계급적 관점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던 시대가 있었지요. 그 후에도 '젠더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 '피억압자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있으냐 없느냐', '타자와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느냐 아니냐' 등등, 문학작품에 여러가지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어떤 잣대가 올바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각각의 잣대로 문학작품의 좋고 나쁨을 말하는 것은 비평가의 자유에 속하고요. 그러나 어떤 '잣대'를 사용하더라도 어느 작가의 작품이 동시대의 독자에게 우선적으로 선택받는 이유를 해명하는 일은 비평가의 임무입니다.

 

 일본의 비평가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살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비평가들의 '잣대'를 무효화해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쪽이 성립하면 저쪽이 성립하지 않는' 상대적인 관계가 양자 사이에 존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비평가들의 조직적인 '무시'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p139

 진실로 '예민한 작가'는 그의 시대에 과잉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쓰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글로 쓴다 해도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배금주의적인 샐러리맨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해도, 정서적 발달이 뒤떨어진 비상식적인 청년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해도, 독자들이 그런 작품에 깊이 감동을 받을 리 없습니다(감동을 보이는 것은 문학상의 심사위원 정도겠지요).

 실로 뛰어난 작가는 그 시대가 심하게 결여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 시대의 성격이 규정되는 것에 대해, 글을 씁니다. 예컨대 그 사회의 '그림자'에 대해...

 

p141

 언제나 그렇지요. '지금 실로 혁명적 변동이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거기에 숱한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화답할 때 혁명적 변동이 일어난 일은 역사상 한 번도 없습니다. 지적 의미에서 근본적인 변동이 일어날 때 만약 그것이 진정 근본적인 사건이라면,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을 이야기할 언어가 아직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로 나타낼 언어가 아직 없다'는 결성적 상황 자체가 주제로 떠오를 것입니다.

 

p144

 우리가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함께 '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평가들은 이러한 역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알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알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했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계성을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알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오로지 그것만을 이야기했기 대문에 세계성을 획득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결여하고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임에도 우리 산 자의 행동이나 판단 하나하나에 심오하고 강렬하게 관계를 맺는 것, 단적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의 절박함이라는 결성적 리얼리티입니다.'

 산 자와 산 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세계 각지마다 다 다릅니다. 그렇지만 죽은 자가 '존재와는 다른 방식으로autrement qu'etre' 산 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세계 어디에서나 똑같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의 어법'에 의해, 다시 말해 각각의 '맥락'이나 '국어'에 의해 결코 침범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죽은 자가 결성적 방식으로 오로지 산 자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만 계속 써왔습니다. 그 이외의 주제를 선택한 적이 없을 만큼 과잉된 절도(이런 것이 있답니다!)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순도를 높이고, 그의 문학적 세계성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토 노리히로는 최초의 무라카미 하루키론을 통해(아마도 가토 노리히로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본질을 꿰뚫는 결정적인 언어를 기술했다고 봅니다. 그는 올바르게도 이곳에는 '인간이 살지 않는다'고 적었던 것입니다.

 

p202

 무라카미 : 걸핏하면서 일본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 문학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 같은 게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문학이라면 처음부터 엉망이 아니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뻔뻔하게 말하자면요.

 

p267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소설이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미친 가장 큰 영향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어떤 인간에게 '천직'으로 느껴진다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마도 청년기의 어느 단계에 자기가 하는 일이 '보초', '파수꾼' 또는 '야경꾼night watchman'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감지했을 것입니다.

《애프터 다크》는 두 사람의 '보초(다카하시 군과 가오루 씨)'가 '야경'을 돌다가 경계선의 끝까지 와버린 젊은 여자들 중 한 명을 '끝 모를 어둠'에서 데려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자그마한 노력 덕분에 몇몇 파탄이 치명적이 되기 전에 봉합되어 세계는 한때의 균형을 회복합니다. 그렇지만 이 불안정한 세계에는 한쪽 진영의 '최종적인 승리'도 없을뿐더러, 천상적인 것의 기적적 개입deus ex machina에 의한 해결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보초들의 일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그것은 《댄스 댄스 댄스》에서 '문화적 눈 치우기'라고 일컬어진 일과 비슷합니다.

 누구나 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누군가 하지 않으면 나중에 누군가가 곤란해지는 일을 특별한 대가나 칭찬을 기대하지 않고 혼자서 묵묵히 해두는 것... 이러한 보잘것없는 '눈 치우기'를 말없이 해나가는 것밖에 '사악한 것'의 침입을 저지할 방법은 없습니다.

 정치적 격정이나 시적 법열法悅이나 성적 황홀감은 '사악한 것'의 대립항이 아니라 종종 공범자입니다. 세계에 간신히 균형을 유지시켜준 것은 '보초'들의 '적절한'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니 일은 야무지고 성실하게 합시다.

 의식주는 생활의 기본입니다! 가족은 소중하게 여기고, 고운 말을 씁시다!

 이것이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교훈'입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문학이 되지 못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초월적으로 사악한 것'에 대항하여 인간이 제시할 수 있는 최후의 '인간적인 것'이라는 지점에 다다르면, 서사는 급작스레 신화적 오라aura를 띠게 됩니다.

 그러면 노동자적 에토스ethos에 바탕을 둔 일상과 우주론은 어떻게 접합하느냐고요? 물론 그것은 '장어'가 나오기 때문이지요(어이쿠, 장어를 모르신다고요? 그러면 곤란한데...)

 어찌 되었든 우리의 평범한 일상 자체가 우주론적 드라마의 '현장'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면 조금 기운이 나서 청소하거나 다림질하거나 친구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것은 하늘만큼 땅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p297

 여자들이 '떠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움'에 대해 가장 잘 와 닿도록 설명한 대목이 <독립기관>에 나옵니다.

 

 모든 여성에게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특별한 독립기관 같은 것이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도카이의 개인적 견해였다. 어떤 거짓말을 어디에서 어떻게 할까. 그것은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모든 여성은 어느 시점에 반드시 거짓말을 하며, 그것도 중요한 일에 거짓말을 한다. 중요하지 않는 일에도 물론 거짓말을 하지만 그야 그렇다 치고, 가장 중요한 때 거짓말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대부분의 여성은 안색 하나, 목소리 하나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에게 갖추어진 독립기관이 멋대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을 함으로써 그녀들의 아름다운 양심이 고통을 받거나 그녀들의 곤한 잠이 방해를 받는 일은 - 특수한 예외를 별도로 친다면  일어나지 않는다.   <여자 없는 남자들>

 

 화자는 "나도 도카이 씨의 의견에 기본적으로 찬성할 수밖에 없다"고 커밍아웃을 합니다. "아마 나와 그는 각기 다른 개별적인 등반 규칙을 더듬어 그리 즐겁지도 않은 똑같은 산꼭대기에 올라갔다는 말이 될 것이다"라고.... 나 역시 도카이 씨와 화자에게 '찬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작가 자신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이 어느 날 도착하게 될 '산꼭대기'일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점은 이렇습니다. 그녀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거짓말을 하는 까닭은 그것이 어떤 유형의 거짓말보다 남자들이 깊이 상처 입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거짓말이라면 이해가 갑니다.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짓말이라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합리적인 거짓말이라면 남자들은 상처를 입더라도 그렇게 심각한 상처를 입지는 않습니다. 여자가 왜 거짓말을 하는지, 그 의미만은 알기 때문이지요. 그녀가 자기가 가진 무엇을 훼손시킬 작정이었는지, 자기로부터 무엇을 빼앗아갈 의도였는지, 자신의 어디를 미워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타깃'만 확인할 수 있다면 거기에 약을 바르든지, 부목을 대든지, 경우에 따라서는 그 부분을 절단함으로써 남자들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립기관'이 하는 거짓말에는 합리성이 없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것은 순수하게 남자를 상처 입히는 효과만 있을 뿐, 거짓말을 하는 여자에게는 어떠한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도 행복하게 하지 않고, 누구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순수한 악의입니다.

 그런 것이 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알아두는 편이 좋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다양한 작품에서 '순수한 악의'를 그려왔습니다.('어둠'이나 '리틀 피플'이나 '지렁이'나 '와타나베 노보루' 같은 표상을 통해). 그렇지만 이 단편집에 나오는 순수한 악의는 그러한 연극적이고 다채로운 형상을 띠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대개 그것이 '단순한 여자의 부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녀들의 부재는 결정적인 타이밍에, 결정적인 장소에서, 결정적인 방식으로 남자를 한 방에 넘어뜨립니다.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알아두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작가는 또 하나 중요한 경험지經驗知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상처를 입을 때에는 제대로 상처를 입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울부짖는다든가, 매달린다든가, 원망에 찬 말을 한다든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욕을 한다든가, 누군가 '책임자'를 찾아내어 처벌하려고 한다든가... 어쨋든 무엇이든 좋으니 자존심을 잃는 행동을 자제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 행동을 끝까지 자제한 남자는 그 사실에 의해 더욱 깊이 상처 입습니다.

 자지가 얼마나 깊이 그 여자오 맺어져 있고, 여자가 떠난 탓에 자신이 얼마나 갈가리 찢겨버렸는지 커밍아웃을 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자기가 무너지는 모습이 아무리 꼴 보기 싫어도 몸으로 표현하는 편이 차라리 낫습니다. 자기가 그 여자에게(정확히 말하면 그 여자의 '독립기관'에게)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존재였는가를 받아들이는 편이 낫습니다. 그런 뜻에서 <독립기관>의 도카이 의사가 상처 입는 방식은 '정통적'입니다('이상적'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요).

 '여자에게 버림받은 남자들' 중에서는 어떤 의미로 도카이 의사가 가장 올바르게 상처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게 죽었을 것입니다. 거꾸로 가장 괴로운 경험의 당사자는 <기노>의 주인공 기노입니다. 그는 어디에서 잘못되었을까요?

 

 헤어진 아내나 그녀와 잠을 잔 옛날 동료에 대해 분노나 원망의 마음은 어쩐지 생기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강한 충격을 받았고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가 얼마 동안 계속되었지만, 나중에는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는 식이 되었다. 결국 그런 일을 당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순수한 악의'에 대해 너무나도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것은 자제심과 자존심이 강한 남자가 절망에 빠지는 최악의 함정입니다. 그것에 의해 '악의'는 갈 곳을 잃습니다. 받아줄 곳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받아줄 곳을 잃은 악의는 증상으로서 계속 돌아옵니다. 영원토록....

 경험적으로 말하면 악의가 몸에 끼칠 때 할 수 있는 '가장 괜찮은' 대응책은 그것을 '잘게 나누어' 치사량이 한 사람에게 작용하지 않도록 주변으로 분산하는 것입니다. '팔방으로 화풀이를 한다'는 것은 이른바 '악의를 여덟으로 쪼개어 하나하나가 치사량에 이르지 않도록 안배한다'는 뜻입니다.

 

 행복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해서 의식의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가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발견을 한 저자가, 그렇다면 의식의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는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에 대한 고민에 대한 30년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한 책. 긍정 심리학이라는 분야를 창시한 위대한 저서일 듯 하다.

이번이 3번째 완독인데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진지한 인생을 살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총체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고전으로 남을 것 같다. 사실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핵심적인 내용은, 몰입이란 자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의식의 질서가 유지된 상태이다(예를 들어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마약을 해도 의식의 질서가 유지되는데, 이것은 자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식의 질서(쉽게 말해서 평정심을 가지고 무언가에 집중된 상태를 의미한다)는 외부적 요인(사람, 상황,...)에 의해서 도전을 받게 되면 유지 상태가 깨지면서 혼란,불안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경험한다. 이런 부정적 감정을 극복해 나가면서 자신의 정신적(육체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주로 이 책은 정신적인 면을 다룬다)인 평형상태를 유지하면서 자기 목적적인 인생을 구축해나가는 방법론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몰입의 과정과 그로 인해 얻은 긍정적 효과는 인생의 전 과정에서 반복되는데, 주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몰입의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복합성의 단계를 높여나간다. 복합성은 쉽게 말하자면 RPG게임에서 레벨(업)과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된다. 게임 초반에는 게이머의 레벨도 낮지만 해결해야 할 미션 또한 쉽다. 레벨업이 되면서 그에 걸맞게 난이도가 높여진 미션이 나오게 되는 것처럼, 인생의 난관을 극복해나가면서 복합성이 높아진다는 개념이다.

몰입은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적절한 난이도의 도전과제가 주어질 때 얻어진다는 측면은 게임의 난이도가 적절해야 게임이 재밋는 것과 비슷하다.

좋은 책에도 여러가지 효용들이 있다. 지식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책, 노하우를 전달하는 책, 인생관을 바꾸는 책 등등.

이 책은 좋은 책의 거의 모든 효용들을 체감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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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중.

 

 이 책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단순한 요령 따위를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사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즐거운 인생이란 어떤 요령을 따라서라기보다는 개개인이 창조적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요령을 제시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따분하고 무의미한 삶을 기쁨이 충만한 삶으로 바꾸기 위한 일반적인 원리들과 이러한 원리들을 자신의 삶에 접목시킨 구체적인 예들을 제시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만들어 가는 데 지름길은 없다. 그러나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틀림없이 이 책에 담겨 있는 이론들을 끄집어 내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보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1장. 행복, 다시 생각해 보기(Happiness Revisited)

 

p25

 "행복이란 것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나의 '발견'이다. 행복은 운이 좋아서라든지 어쩌다 생긴 기회의 산물이 아니다. 돈이나 권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외부에 있는 사물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다. 실제로 행복은 우리가 준비해야 하고, 마음속에서 키워가야 하며, 사라지거나 빼앗기지 않도록 스스로 지켜내기도 해야 하는 특별한 것이다. 자기 내면의 경험들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삶의 질을 결정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의식적으로 찾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네 스스로에게 지금 행복하냐고 물어보는 순간, 행복은 달아난다"고 철학자 밀은 말했다. 행복을 직접적으로 찾을 때가 아니라 좋든 싫든 간에 우리 인생의 순간 순간에 충분히 몰입하고 있을 때만이 행복은 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공에 집착하지 마라. 성공에 집착할수록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성공이란 것도 의식적으로 얻으려 한다고 해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공은 자기 자신의 이해보다 더 큰 목표에 헌신할 때에 얻어지는 부산물일 뿐이다."

 

p28

 자기의 인생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최적 경험들을 하나둘씩 축적하다 보면 어느덧 자기가 인생의 내용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고 주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강렬한 자각, 바로 이러한 느낌이 우리가 염원하는 행복에 가장 가까운 상태가 아닐까?

 

p32

 모든 가치 있는 모험이 쉬운 것이 아니듯 지적인 노력 없이, 또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숙고해 보려는 각오 없이는 이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 책의 내용을 음미하고 곱씹어보고, 내가 겪었던 인생의 경험에 비추어 반추해보고 그것으로부터 얻는 교훈들을 체화하면서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굳건히 하고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천하고 피드백, 반성, 개선해나가는 노력이 없이 책만 읽는 것처럼 헛된 것은 없다.

 

p33

 내적 경험의 최적 상태는 의식이 질서를 가지고 움직일 때이다. 이 최적 상태에서는 우리의 심리적 에너지의 주의가 구체적인 목표에 집중적으로 투자되며,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능력)이 최적의 상태로 활용된다. 목표를 추구할 때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목표 외의 다른 것들은 잠시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의식에 질서가 생기게 된다. 이런 까닭에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적인 과제들을 완수해 보려고 애썼던 시간들을 우리가 나중에 돌이켜 보면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3장). 자기의 심리적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그 결과 이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원하는 목표에 쏟아 넣는 사람들은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해 나갈 것이다. 또한 그가 가지고 있는 기술 수준을 향상시키고 좀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함으로써 점차 특별한 인간이 될 수 있다.

 

p35

 어떻게 하면 최적의 플로우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를 방해하는 인간의 조건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옛날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그 이후로는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라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항상 험난한 고비들을 넘겨야 하는데, 이는 인간의 정신에게도 해당된다. 내가 보기에 인간이 행복을 얻기가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창조한 여러 신화들과는 달리, 우주는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좌절은 인생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기본적 욕구들이 채워지는 순간 또다시 우리는 다른 것을 원하게 된다. 이런 만성적인 불만족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p41

 인간은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자연의 변덕스러움과 가공할 만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것의 한 방법으로 인간은 신화와 종교적 믿음을 발전시켜 왔다. 문화는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자연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논리적 힘과 심리적 위안의 구실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문화의 핵심적 역할은 그 문화구언에 속한 사람들을 정신적 카오스 상태로부터 보호하고, 자신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확신시켜 주는 데 있다. 에스키모 · 아마존 유역의 수렵 인종 · 중국인들 · 나바호 족 · 호주 원주민 할 것 없이 모두들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믿었으며, 자신들이 신의 섭리에 따라 미래에는 온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선민 의식이 없었다면 자연의 시련을 견디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신화대로 세상이 움직일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때때로 호의적으로 보였던 자연으로부터 얻은 안정감이 위태로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자신이 속한 문화가 신화나 믿음을 통해서 만들어 냈던 사실적이지 못한 방패들이 그 기능을 잃어버리는 순간 믿었던 만큼의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이다.

 이런 순간은 대부분 하필이면 그 문화의 운세가 좋아서 마치 자연의 무서운 힘을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착각하는 순간에 온다. 문화의 절정기에 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선택받았다고 여길 것이며,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몇 세기 동안 지중해를 장악해 온 로마 제국도 이런 믿음에 도달했을 것이고, 몽고 제국의 침입을 당하기 전의 중국이 그랬을 것이며,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의 아즈텍 문명 또한 그랬을 것이다.

 원래 인간의 욕망에는 무관심한 것이 우주 자연일진데, 자연이 우리만을 지켜 줄 것이라는 문화적 교만이 문제가 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결국 보장할 수 없었던 안정감은 뼈아픈 각성을 초래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사람들은 사소한 어려움에도 용기와 결단력을 잃고 만다. 한때 자신들이 그렇게 믿었던 것들이 완전히 허상임을 깨달았을 때 그들이 배워 왔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믿음은 내팽개쳐지고 만다. 이제 자기들을 지켜 주었었던 전통 문화적 가치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불안과 무관심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p48

 도대체 왜 이럴까? 우리의 선조들이 꿈꾸지도 못했던 물질적 번영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왜 자꾸만 더 무기력해지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 경험의 내용을 증진시키는 방법들에 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별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p49

 "자, 과거의 경험들이 어떠했던 간에 지금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미래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현대의 삶에서 느끼는 불안과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가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의 달콤한 매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러한 자율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상도 주고 벌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외적 여건이 어떻든지 간에 스스로 즐거움과 삶의 목적을 발견해 나가는 능력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쉽다고 할 수도 있고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쉽다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점이고, 어렵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도 쉽지 않을 자기 단련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경험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가에 관하여 자기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지금보다 더 중요하다는 당연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어려서부터 익히면 어른이 되어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학교 선생도 공부가 지금은 재미없게 느껴질지라도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꼭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설득한다. 회사의 간부들도 신입 사원에게 열심히 하면 남보다 빠르게 진급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그러나 미래를 위한 현재의 이런 분투를 마칠 때쯤이면, 은퇴의 황혼이 일찌감치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다.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살아가려고 바동대기는 하지만, 정말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물론 훗날의 영광을 위해 고진감래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요한 덕목이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시피, 문명이란 것은 사람들의 욕망을 억압한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 구성원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이나 규범을 습득하지 않는다면 사회의 질서나 노동의 분화 등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사회화 과정, 즉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는 하다. 사회화의 목적은 그 구성원을 잘 통제할 수 있고, 사회에서 주는 당근과 채찍에 따라서 예측 가능한 반응을 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가장 잘 된 사회화의 형태는 구성원들이 사회의 질서를 완전히 내면화한 나머지 이를 어기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사회화하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강력한 연합군들이 있다. 바로 우리의 생존적인 욕구 및 유전자의 희망 사항이다. 사회적 통제라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해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독재 국가에서 독재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가장 문명화가 되었다는 영국에서조차도 준법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방법은 태형 · 채찍질 · 능지처참 따위의 야만적인 폭력이었다.

 사회가 처벌만으로 잘 통제되지 않을 때 사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쾌락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본성(성적인 욕구 · 공격 본능 · 안정에 대한 요구 · 변화에 적응하고 싶은 마음 등)은 정치인들 · 종교 단체 · 기업 · 광고주들이 선호하는 공략의 대상이었다. 16세기 투르크 제국은 용병을 모집할 때, 정복한 땅의 여성들을 겁탈할 수 있다는 유인책을 제시한 적도 있다. 오늘날에도 미군을 뽑는 광고에는 육군이 되면  '온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는 문구가 버젓이 적혀 있지 않은가.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의 편익을 위해서라기보다 종족 보전을 위한 유전자의 반사적 반응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식도락이라는 말도 결국에는 신체에 필요한 자양분을 보충하는 것의 현학적 표현이 아니던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행위도 우리의 유전자가 자기의 영속성을 위해서 우리 몸에 집어넣은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성적 욕망을 느낄 때, 그는 이것이 본인 스스로가 느낀 관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의 성적 관심은 보이지 않은 유전적 부호에 의해서 조절되고 있을 뿐이다.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이 순전히 생물학적 반사라고 한다면, 인간의 의식의 역할은 최소한에 그치고 말 것이다. 물론 이런 유전적 프로그램을 따르고 그 결과를 즐기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단지 이제 우리가 쾌락이라는 것의 실체를 파악하고, 쾌락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 높은 순위를 매긴 자신의 일을 위해서는 쾌락 경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문제는, '필(feel)'을 느끼는 것만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최근의 시대적 흐름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가장 신뢰하는 것이 '본능'이다. 좋은 느낌이 오면, 그리고 그 느낌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생겨났다면, 그것은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우리를 통제해 왔던 사회적이고 유전적인 힘들을 아무 의심 없이 무조건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곧 자기의 의식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술과 음식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섹스에만 온갖 관심이 쏠려 있는 사람은 그의 심리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가 없다.

 인간 본성에 관한 이런 '해방된' 입장,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본성이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이런 입장은 자칫하면 반동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현대의 '실재론'은 과거 시절 '운명론'의 변화된 형태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자연스러운 본능을 따라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모순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우리는 자연적으로 무지 상태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자연 상태로 있어야만 한다면, 무언가를 배우고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많은 남성 호르몬을 몸 안에 갖고 있고, 그 결과로 좀더 공격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면 이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해도 무방하단 말인가? 자연적 현상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을 넘어서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닐까?

 

 유전적 프로그램에 복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스스로 무기력해지고 만다. 필요한 상황에서 유전적 지시를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은 매우 허약해진다. 개인적 목표에 따라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대신에, 자신의 신체에 적용된 프로그램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독립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본능적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 욕구를 조작하는 남들에게 당하기 쉽다.

 

완전히 사회화가 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된 보상을 받고 만족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 보상은 본인이 원했던 게 아니다. 그리고 이런 보상은 종종 그의 유전적 프로그램을 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 생긴 본능을 충족시켜 주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본인의 마음을 행복하게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많은 경험들을 이미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과하는 것이다. 그는 오직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마련된 목록들을 얻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복잡다다한 사회에서 여러 가지의 강력한 집단들이 서로 다른 목표들을 우리에게 주입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학교 · 교회 · 은행등의 집단들이 우리들을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는 사람들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다른 한편에선 상인 · 제조업자 · 광고주들이 우리들의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서 꼬드긴다. 심지어는 전문 도박꾼 · 포주 · 마약 밀매업자등에 의해서 움직이는 어둠의 세계조차도 우리가 돈만 내면 원하는 것을 다 해주겠다는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지 않던가. 각 집단마다 전하는 메시지의 내요은 약간씩 다르지만, 그 메시지에 복종한 결과는 동일하다. 그것은 우리를 목적 달성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결국에는 우리들이 그 사회의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현대와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외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뒤로 미루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사회의 통제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꼭두각시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를 위해서 어떻게 사회적 보상들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보상으로 대체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사회에서 원하는 일들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이 일들 이외에 우리 스스로의 목표를 만들라는 것이다.

 자신을 사회적 통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순간 순간에 주어지는 보상을 발견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경험의 흐름에서 주어지는 의미를 발견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사회적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보상을 자기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 동안 사회에 맡겨 두었던 본인의 힘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이젠 더 이상 미래라는 허울 속에 숨어 버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아옹다옹할 이유가 없다. 또한 언젠가는 좋은 일이 일어나겠지 위안하며 매일 따분한 하루를 보낼 필요도 없다.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목표를 위해서 영원히 노력하는 대신 삶이 주는 참 보상을 수확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태는 우리 스스로를 원초적 욕망에 탐닉하게 함으로써, 그래서 사회의 통제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몸이 원하는 것으로부터 독립적이 되어야 하며, 우리 마음속의 조인이 되어야 한다. 고통과 쾌락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며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물학적 욕구를 이용해 우리를 조절하는 이 사회의 자극-반응 양식에 순종하는 한, 우리는 외부의 힘에 의해서 통제될 뿐이다. 현란한 광고에 침을 흘리고, 직장 상사의 찡그린 얼굴이 우리의 하루를 망치도록 방치하는 한 우리는 스스로의 경험을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고, 외부의 꼬임과 협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함을로써 우리는 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로마 제국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오래전에, "사물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지각하는가, 단지 이것이 무서울 뿐이다"라고 했다.

 또한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네가 외적인 일들로 인해서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일들때문이 아니라 네가 그것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에 의해서다. 그 평가와 판단을 한꺼번에 지워버릴 수 있는 것도 너의 손안에 달려 있다."

 

p55

 프로이트는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서 날뛰는 두 개의 폭군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 하나는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개인의 본능적 욕구인 이드(id)요, 다른 하나는 사회적 압력의 종인 초자아(superego)이다. 그리고 이들과 맞서는 것이 자신의 본질적 요구를 대변하는 자아(ego)이다.

 

p56

 우리의 의식에 해방을 가져다주는 현명함이라는 지식은 본질적으로 누적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그 첫 번째 이유가 있다. 이것은 공식화되지 못하며, 암기해서 단순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명한 정치적 판단, 세련된 미적 감각과 같은 전문적 영역처럼 의식을 해방시키는 방법도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서 값지게 얻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통제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지적 기술이 아니다. 지능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것은 감정의 몰입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앎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작곡가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고 해도 수많은 연습을 거쳐야 좋은 곳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리학이나 유전공학처럼 가시적인 세계에서의 학문적 진보는 상대적으로 빠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습관과 욕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지식이 활용되어야 하는 이 분야에서의 진보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더디기만 하다.

 두 번째 원인은,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지식은 문화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 요가나 선 수행자들의 지혜는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고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현대의 캘리포니아에 그대로 옮겨 놓는다면 그 신비한 힘은 효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지혜들은 원래의 환경들과 어울리는 요인들을 반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지엽적인 요인들을 본질적 요인들과 분리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식적 요소만 빌려 온다면 옛 지혜들은 빈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의식을 통제하는 것은 제도화될 수 없다. 이것이 사회적 규범이나 제도의 한 부분이 되는 순간 더 이상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기계적인 관례화나 순서화는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아(ego)를 억압하는 힘들로부터 해방하자는 프로이트의 노력은 이미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하나의 고착된 이데올로기로 변화했다. 마르크스의 경우는 더 심하다. 경제적 착취로부터 우리의 의식을 해방하자는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 자신도 섬뜩할 정도의 억압적인 사회 제도로 변질되지 않았던가. 또한 토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말했듯이, 만약 중세 시대에 예수가 자신이 설파했던 해방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다시 돌아왔다고 해도, 예수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가지고 있던 세속적 종교 지도자는 다시 예수를 십자가로 못 박았을 것이다.

 

2장. 의식에 관해서 알아보기(The Anatomy of Consciousness)

 

p65

 외부의 사물은 우리가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식은 어찌 보면 주관적으로 경험한 현실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느끼고, 냄새 맡고, 듣고,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의식의 내용을 구성하는 후보들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이 우리의 의식을 구성한다. 따라서 의식은 - 우리의 신체 안팎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감각 정보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지만 - 선별적으로 반영하고 능동적으로 사건들을 구성하며 이들을 새로운 현실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의식을 통해서 반영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p67

 우리가 유전적으로 물려받거나 습득한 의도들은 위계를 가지고 있고, 이 위계에 따라서 우선 순위가 정해진다. 저항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정치적 변혁은 생명을 포함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소중한 것이고, 이 목표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우선인 것이다. 일반인들은 이에 비해서 좀더 현실적인 목표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신체적인 욕구 충족을 위한 것(건강하게 장수하는 것, 섹스를 하는 것, 잘 먹고 평한하게 지내는 것 등)과 사회에 의해서 조건화된 것(모범생이 되는것, 열심히 일하는 것, 가능한 한 소비 생활을 많이 하는 것,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사는 것 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이런 목표들을 추종하지 않는 예외적인 사례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사회적 규범을 초월하거나 일탈한 사람들(영웅 · 성자 · 현자 · 예술가 · 시인 · 광인 · 범죄자 등)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의 목표를 갖는다. 이런 사람들의 존재는, 우리의 의식이 서로 상인한 목표와 의도들로 순서화될 수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 내면의 주관적 세계를 통제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p76

 지금까지의 논의를 참을성 있게 따라와 준 독자라면, 이 시점에서 나의 얘기가 약간 순환론적이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자아라는 것이 의식의 내용물과 목표들의 총합을 나타낸다고 정의하자. 그런데 의식의 내용물과 목표들은 주의에 의해 선택된 결과물이고, 이런 주의는 자아에 의해 통제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인과가 명확하지 않은 체 계속 순환하는 논리 체계를 갖게 된다. 한편으로는 자아는 주의를 통제한다고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주의가 자아를 결정한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은 두 관점이 다 맞다. 의식은 직선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순환적 인과 관계가 성립하는 체계인 것이다. 주의는 자아를 형성해 가고, 자아는 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p79

 물론 삶은 외적인 일들 - 예를 들어, 복권으로 대박을 터뜨리든지, 자기와 잘 어울리는 배우자를 얻는다든지, 사회 부조리를 개혁하는 데 동참한다든지 - 을 통해서 향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단한 일들조차도 삶의 질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 속에 그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고, 우리의 자아와도 긍정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어야만 한다.

 

p87

 우리가 가능한 한 자주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의식을 조절하면 삶의 질은 저절로 향상되게 마련이다. 리코나 팸의 경우처럼 직장의 따분한 일상도 목적이 있는 즐거운 경험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플로우 상태에서 우리는 심리적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 그때에는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의식의 질서를 더하게 만든다.

 

p88

 플로우 경험을 하고 나면, 이전과 비교해서 우리는 더욱 복합적인 자아로 발전한다. 복합적인 자아가 됨으로써만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복합성(complexity)이라는 것은 두 가지 심리적 과정을 거친 결과인데, 이 두 가지 과정은 각각 분화(differentiation)와 통합(integration)을 말한다. 분화라는 것은 자신의 유일하고 고유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고, 또한 본인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하는 방향으로 나아려는 경향을 말한다. 한편 통합이라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아이디어들과 합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복합적 자아란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자아를 일컫는다.

 

p90

 분화만 되고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람은 큰 개인적 성취를 이룰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나친 이기주의가 되기 쉽다. 반대로 통합만 이루어지고 분화가 되지 못한 자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소속감과 안전감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지만, 자율적인 개성은 갖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한 개인이 그의 심리적 에너지를 이 두 가지 과정을 위해서 균등하게 배분할 때에, 그 결과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순응적이지 않을 때 그의 자아는 복합성을 갖추게 된다.

 우리는 플로우를 경험함으로써 복합적인 자아를 갖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다른 외적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행위 자체를 즐길 때 우리의 삶이 향상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위해서 최고의 집중력을 보일 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즐거움을 맞보기 시작하면 다시 이를 경험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고, 이런 과정의 순환을 통해서 우리의 자아는 성장한다.

 

3장. 즐거움을 통해 삶의 질 향상하기(Enjoyment and the Quality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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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쾌락은 주는 경험은 즐거움을 줄 수가 있다. 그러나 쾌락과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정서는 같지 않다. 예를 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쾌락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음식을 즐기는 것은 좀 다른 문제이다. 식도락가가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는 상당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말은 정신적 노력 없이도 쾌락을 느낄 수는 있지만, 즐거움이라는 것은 비범한 주의를 기울여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아무 노력 없이도 - 뇌의 특정 부위가 전기 자극을 받거나, 약물에 의한 화학적 작용을 통해서도 - 쾌락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집중을 하지 않으면 테니스나 독서 그리고 대화를 즐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쾌락이 매우 덧없으며 자아가 쾌락 경험에 의해 성장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복합성은, 새롭고 또한 상대적으로 도전적인 목표에 심리 에너지를 쏟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과정은 어린아이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다. 태어난 후로 몇 년 동안 모든 아이들은 새로운 동작과 새로운 말을 매일 시도하는 작은 '학습 기계'가 된다. 아이들이 새로운 능력을 학습할 때 보여 주는 황홀한 표정은 즐거움이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 준다. 이런 즐거운 경험 하나하나가 더해져서 아이들의 자아를 복합적으로 발달시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성장은 곧 즐거움이라는 연관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는 것 같다. 아마도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함과 동시에 '학습'이 외부의 요구에 대한 반응이 되어가면서 새로운 능력을 습득한다는 짜릿한 희열이 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춘기에는 자신만의 좁은 자아 속에서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곳에 심리 에너지를 투자해 보았자 외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짓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인생을 즐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단지 쾌락만이 우리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는 경험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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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움이라는 현상은 여덟 가지의 주요 구성 요소를 갖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사람들이 가장 긍정적인 경험을 할 때 어떠한 느낌을 가졌는지에 대해 반추해 보면 그들은 다음 여덟 가지 요소들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는 언급을 한다물론, 여덟 가지 모두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첫째, 그 경험은 일반적으로 본인이 완성시킬 가능성이 있는 과제에 직면했을 때 일어난다.

 둘째, 본인이 하고 있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와 넷째, 수행하는 과제에 대한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일상에 대한 걱정이나 좌절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고도 깊은 몰입 상태로 행동할 때이다.

 여섯째, 즐거운 경험은 사람들에게 본인의 행동에 대한 통제감을 느끼도록 해준다.

 일곱째, 자아에 대한 의식이 사라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플로우 경험이 끝나면 자아감이 더욱 강해진다.

 마지막 여덟째, 시간의 개념이 왜곡된다. 즉 몇 시간이 몇 분인 것처럼 느껴지고,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의 결합이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은 너무나 충만한 느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위해 많은 정력을 쏟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적 경험의 훨씬 많은 경우가 목표 지향적이고 규칙에 의해 제약을 받는 활동에서 발생한다고 보고되었는데, 그 활동들은 심리 에너지를 요구하며 적절한 기술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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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면에서 경쟁은 복합성을 발달시켜 주는 지름길이다. 에드먼드 버크는 "우리와 대적하는 자는 우리의 정신을 강화시켜 주고 우리의 능력을 다듬어 준다. 적은 결국에는 나에게 큰 도움을 주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경쟁할 때 생기는 도전 의식은 자극적이며 즐겁다. 그러나 상대를 이기려는 마음이 너무 앞서게 될 때 즐거움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경쟁은 그것이 자신의 기술을 완성하는 수단이 될 때에만 즐거운 것이다. 경쟁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흥미로운 도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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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표가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지 못하는 창의적 활동을 할 때, 사람들은 본인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강한 개인적 감각을 발달시켜야 한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시각적 영상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림을 어떤 시점에까지 그리게 되면 자기가 원했던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일을 즐기는 화가는 '좋고, 나쁨'에 대하여 내면화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붓이 가고 난 후 "그래, 바로 이거야. 아니, 이건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내적인 지침이 없다면 플로우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117

 어떤 종류의 피드백일지라도 만일 그것이 심리 에너지를 쏟았던 목표와 논리적으로 연관이 된다면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만일 내가 콧등 위에 막대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흔들거리는 막대를 보는 것도 잠시 동안은 즐거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가치를 갖도록 학습되기 때문에 자기에게 중요한 가치를 주는 정보를 더 소중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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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 속에서 날마다 우리는 의식에서 원하지 않는 강요된 사고와 근심의 포로가 된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직업과 가정 생활은 잡념이나 불안이 자동적으로 배제될 만큼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일상적인 마음의 상태는 원활한 심리 에너지를 간섭하는 엔트로피의 요소를 포함한다. 바로 이 점이 플로우가 경험의 질을 변환시키고 향상시키는 한 가지 이유이다. 행동에 대한 명확한 요구가 우리의 의식에 질서는 부여하고 무질서의 간섭은 배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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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예들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통제되는 상황속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 스스로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타성에 박힌 일과의 안전함을 포기하지 않고는 진정한 통제감을 경험할 수 없다. 결과의 성공 여부가 불확실하고 자시이 그러한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때만 진정 본인이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p127

 자의식의 소멸은, 플로우 상에 있는 개인이 심리 에너지에 대한 통제를 포기한다거나 몸이나 마으메서 무엇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그 반대가 성립한다. 사람들이 처음에 플로우 경험을 배울 때 자의식의 결여는 편하게 흘러가는 것, 즉 그냥 자기를 망각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최적 경험은 자아의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포함한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악보마다 분석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인 구상의 측면에서 전체적으로 연주하고 있는 작품의 모든 형식 및 귀에 들리는 음과 함께 손가락의 모든 움직임을 잘 인식해야만 한다. 훌륭한 육상 선수는 전체적인 경기의 전략에서 경쟁 선수의 성적뿐만 아니라 자신의 호흡 리듬, 신체의 모든 관련 근육을 알고 있다. 체스 선수가 그의 기억에서 이전의 위치, 과거의 조합을 마음대로 생각해 낼 수 없다면 경기를 즐길 수 없다.

 

p130

 플로우를 경험할 때 처음에는 자아감을 잃어버리지만 경험한 후에는 자아감이 더욱 충만해지는 것이 모순된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의식을 버리면 더 강력한 자아 개념을 구축하게 된다. 그 이유는 매우 명확하다. 플로우 상태에서는 최선을 다하도록 도전 받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러한 노력이 자아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자아에 대한 생각을 하는 순간 깊은 몰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로우 경험이 끝다고 자의식이 생겨나면서부터 바라보는 자기 자신은 이미 과거의 자기가 아니다. 새로운 능력과 성취에 의해서 풍요로워진 자기를 느끼게 된다.

 

p133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처음에 강요로 인해 시작된 것들 중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적인 보상을 받는 결과를 낳는 것도 있다. 몇 년 ㅈㄴ에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던 내 친구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일이 지겨워지면 그는 반쯤 감은 눈으로 고개를 살짝 들고서는 음악 작품(바흐 합창곡, 모짜르트의 협주곡, 베토벤의 교향곡 등) 하나를 콧노래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콧노래가 아니었다. 그는 특정 소절에 관여하는 주요 악기를 목소리로 흉내를 내며 전체 작품을 노래하였다. 그는 바이올린과 같이 애절한 소리를 내고, 바순처럼 저음을 내며, 바로크 트럼펫 소리까지 낼 수 있었다. 사무실의 동료들은 이 소리를 듣고 무아지경이 되어 생기를 얻고는 하였다. 궁금한 것은 그 친구가 이러한 재능을 개발한 방법이다. 세 살 때부터 그의 아버지는 그를 클래식 음악 콘서트에 데리고 다녔는데, 이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겨웠다고 한다. 그는 자라면서 콘서트와 클래식 음악은 물론이고 아버지마저 싫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계속해서 강요받았다. 그러던 일곱 살의 어느 날 모차르트의 오페라의 서곡이 시작되는 동안 그는 놀라운 통찰을 경험하였다. 그때까지 구별이 되지 않던 멜로디들이 선명히 구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갑자기 자신 앞에 열려진 새로운 음악적 세계를 발견했다. 무의식적이든 아니든지 간에 모차르트 음악이 주는 도전을 이해하는 능력이 발견되기까지는 3년의 고통스러운 청취의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운이 좋았다. 많은 아이들은 그들이 강요된 활동을 꽃 피우기 전에 영원히 그 활동을 싫어하게 되기도 한다. 부모들이 악기를 연습하도록 강요하여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클래식 음악을 싫어하게 되었는가?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많은 주의가 필요한 활동에 첫 발을 딛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동기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즐거운 활동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활동은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일단 상호 작용이 개인의 능력에 대해 피드백을 제공하기 시작하면, 대개 이러한 활동은 냊거으로 보상을 주기 시작한다.

 

p135

 그러나 이미 통제감과 관련된 부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플로우와 잠재적인 중독성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떠한 것도 완전히 긍정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힘은 오용될 수 있다. 사랑은 증오로 바뀔 수 있으며 과학을 파괴를 낳고 검증되지 않은 기술은 오염을 낳는다. 최적 경험은 한 형태의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도움이 되거나 파괴를 낳을 수 있다. 불은 따뜻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집을 태워버릴 수도 있다. 원자 에너지는 전기를 발생할 수도 있지만 세계를 완전히 날려 버릴 수도 있다. 에너지는 힘이지만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 에너지가 적용되는 목표는 삶을 풍부하게 할 수도 있으며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베느탐이나 여러 전쟁터의 참전 용사들은 전선에서 활동을 플로우 경험으로 설명하며, 그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로켓 발사대 옆의 참호에 앉아 있으면 삶은 매우 명확하게 집중된다. 목적은 적이 나를 죽이기 전에 적을 내가 먹저 죽이는 것이다. 선악은 자명하다. 통제의 수단은 손 안에 있다. 혼란은 없어진다. 전쟁을 싫어한다 해도 전투 경험은 보통의 생활 속에서 접하는 어떠한 것보다도 즐거운 일일 수 있다.

 범죄자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밤중에 남의 집에 들어가서 주인을 깨우지 않고 보석을 들고 나오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보여 주기만 한다면 당장 그것을 하겠다."

 청소년 비행이라고 일컫는 대부분의 것(자동차 절도 · 파괴 행위 · 일상의 난폭한 행동)은 일상 생활에서 얻을 수 없는 플로우 경험을 하고자 하는 필요성에 의해 동기화된다. 사회에서 의미 있는 도전에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고 또 그러한 도전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폭력과 범죄가 사람들을 유혹한다는 사실을 예상해야 한다.

 

p137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경계심이다"라는 제퍼슨의 격언은 정치 이외의 분야에도 적용된다. 이는 우리의 습관과 과거의 지식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간과하지 않도록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장. 플로우의 조건들 알아보기(The Conditions of F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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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로우 활동이 성장과 발견을 이끌어 내는 이유는 바로 이 역동적인 특성에 있다. 어느 누구도 같은 수준에서 같은 일을 장기간 할 때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다. 싫증을 느끼거나 좌절하게 되고, 이후 다시 즐거움을 찾고 싶은 바람에서 자기 기술을 향상시키거나 혹은 그 기술을 사용할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려는 행위를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p150

 이른바 '종교'라 불리는 것들은 의식의 질서를 이루려는 가장 오래된 야심찬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종교 의식은 심오한 즐거움의 원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미술 · 연국 그리고 일반적인 삶에서 초자연적인 의미는 퇴색되어 버렸다. 과거 인류 역사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의미 있게 해주었던 우주 질서는 서로 무관한 단편들로 부서지고 말았다. 대신 인간의 행동 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고 서로 경쟁을 하고 있다. 공급 · 수용의 법칙과 '보이지 않는 손'의 논리는 우리의 이성적 경제 선택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바탕이 되는 '계급 갈등의 법칙'은 인간의 비이성적 정치 행동을 설명하였고, 사회생물학의 기초가 되는 유전적 경쟁 이론은 왜 인간이 어떤 사람들은 도와주고 어떤 사람들은 배척하려는지에 대해 설명해 준다. 심리학의 행동주의 이론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쾌락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러한 이론들은 사회과학에 근간을 둔 현대판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우주의 질서를 설명했던 과거의 모델만큼 미적인 비전이나 또는 양질의 즐거움을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p157

 문화란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요인들이 우리 경험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설계된 방어 기제이다. 

 

 문화가 일련의 목표와 규칙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여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술과 조화를 잘 이루고 그 결과로 구성원들이 보통 이상의 빈도와 강도로 플로우 경험을 하게 되면, 게임과 문화의 유사점은 한층 더 커진다. 이러한 경우에, 전체적으로 문화가 '굉장한 게임'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몇몇 고전 문명은 이러한 상태에서 성공적으로 도달했을 것이다. 아테네 시민들 · 강인함(virtus)을 통해서 행동을 표현했던 로마인들 · 중국의 지식인들 · 인도의(사제,승려 계급이자 최고 계급인) 브라만은, 춤을 통해서 얻는 희열과 같은 즐거움을 다양한 도전을 극복해 가며 경험했을 것이다. 아테네의 폴리스 · 로마의 법률 · 신권(神權)에 토대를 둔 중국의 관료주의 그리고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인도의 영적 질서는 어떻게 문화가 플로우 경험을 촉진시키는지에 대해서 보여주는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운 좋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플로우를 높이는 문화가 도덕적 의미에서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다. 스파르타의 규칙은, 그 당시의 사회 구성원을 동기화시키는 데는 누가 보아도 성공적이었지만, 20세기 관점에서 볼 때는 잔인한 것이다. 유목민인 타타르 족이나 터키의 친위 보병이 전투와 학살을 통해서 쾌락을 얻었다는 것은 전설적인 예다. 1920년대의 혼란스러운 경제와 문화 충격에 당황했던 많은 유럽인들에게 나치 정권과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매력적인 게임의 계획을 제시해 주었다. 즉 단순한 목표들을 제시하였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명료하게 주었다. 사람들이 다시 새롭게 삷에 몰두하도록 한 것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이전의 불안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p163

 '과도한 자의식' 역시 플로우 경험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장애 요인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며, 나쁜 인상을 주지는 않을까 혹은 남이 못마땅해 할 일을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정한 즐거움을 영원히 경험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보통 자기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대신에 무엇이든 사소한 것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바람과 얼마나 일치되는가를 따져서 평가한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뭐든지 그 자체로는 가치도 없다고 본다. 자신의 흥미를 끌지 않는 여자나 남자에게는 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자신의 목적에 맞추어 자의식이 구조화되어 있으며,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어떠한 것도 의식 안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자의식적인 사람들은 많은 점에서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심리적 에너지를 충분히 통제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쉽게 플로우 경험을 하지 못하는 점은 똑같다. 두 유형의 사람들 모두에게는 활동 자체를 위하여 요구되는 주의의 융통성이 부족하다. 너무 많은 심리적 에너지를 자기를 위해서 쏟고, 주의를 두는 것 역시도 자아의 욕구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된다. 이러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상호 작용 그 자체 말고는 어떤 보상도 따르지 않는 자기 목적적 활동에 몰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p165

 사회 병리 상태를 기술하는 두 가지 용어, 즉 '사회적 무질서(anomie)'와 '소외'는 플로우 경험을 어렵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먼저 사회적 무질서란 말 그대로 '규칙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으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이 행동의 규준이 혼란했던 사회 상태를 지칭했던 용어이다. 무엇이 허용되며 허용되지 않는지 더 이상 분명하지 않을 때, 대중의 의견 중 어떤 것이 가치로운지 불확실할 때, 행동은 엉뚱해지고 무의미해진다. 의식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의 질서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무질서 상태는 경제가 붕괴되거나 혹은 한 문화가 다른 문화에 의해서 파괴될 때 일어날 수 있다. 또한 경제나 너무 급속하게 발전할 때나 절약과 근면이라는 가치가 더 이상 예전만큼 의미가 없을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

 소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무질서 상태와 반대로 해석된다. 즉 소외란, 사람들이 사회 체계에 의해 제한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작업장의 조립 라인에서 무의미하고 똑같은 과제를 수백 번씩 반복해야 하는 노동자는 소외를 겪을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소외를 일으키는 가장 짜증나는 일은, 불가피하게도 여가 시간의 상당 부분을 음식과 옷을 사기 위해서, 공연을 보기 위해서 또는 끝없이 복잡한 허가 절차를 밟기 위해서 줄을 서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무질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어떤 것에 심리적 에너지를 쏟는 것이 가치로운지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플로우 경험이 힘들다. 반면에 이와 같은 사회에서 소외가 일어날 때의 문제는, 분명히 바람직한 것이 있는 줄 알면서도 심리적 에너지를 투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플로우를 방해하는 두 가지 사회적 요인(사회적 무질서와 소외)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사회적 방해 요인은 두 가지의 개인적 병리(주의력 결핍과 자기 중심성)와 기능적으로 동질적인 것이다. 개인과 집단이라는 두 수준에서 플로우 경험을 방해하는 것은, 사회적 무질서와 주의력 장애에서처럼 주의 과정의 분열로 인해서, 또 소외와 자기 중심성에서 볼 수 있는 거서럼 지나친 경직으로 인해서 문제가 된다. 개인적 수준에서 볼 때 무질서는 불안과 일치하는 것이며, 소외는 지루함에 대응되는 것이다.

 

p167

 의식에서 실제에 대한 표상을 하기 위해 많은 외부의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을 사용하기 위해서 외적인 환경에 더 의존한다. 그들은 자신의 사고에 대한 통제력이 적어지고 결국 이는 그들의 경험을 즐기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대조적으로, 의식에서 사건들을 표상하기 위해서 단지 소수의 외적 단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좀더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의 주의력을 융통성 있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외적 경험을 머릿속에 표현하는 것이 쉽고, 그 결과 더욱 자주 최적 경험에 도달하게 된다.

 

p169

많은 연구에 따르면, 부모와 자식의 상호 작용 형태는 아이가 성장해서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는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시카고 대학에서 라순디 박사가 실시한 연구를 예로 들어보자. 이 연구에 따르면, 자기 부모와 특정한 유형의 관계를 형성한 10대들이 그렇지 못한 또래보다 대부분의 일상에서 더 행복해하고, 만족하고, 의지가 강한 경향이 있다고 한다. 

 최적 경험을 유발하는 특정 가정 환경 유형의 특징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명료성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명료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가족의 상호 작용에서 목표와 피드백이 명확하다.

 두 번째는 중심성이다. 즉 이것은 부모가 자녀들이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지금 현재 자녀들이 하고 있는 일의 구체적인 경험과 감정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믿는 자녀의 지각이다.

 세 번째로는 선택성이다. 아이들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해서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질 수 있다면 부모가 세운 규칙도 깰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의 특징은 자녀가 부모의 보호 아래 충분히 편안함을 느껴 자기가 관심 있는 어떤 것이든 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부모의 신뢰성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도전성인데, 이는 자녀들에게 점차 복합적인 행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부모의 헌신을 말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조건은 삶을 즐길 수 있는 이상적인 연습의 기회를 주기 때문에 '자기 목적적 가정 환경'으로 일컬어진다. 분명히 다섯 가지 특징은 플로우 경험의 차원과도 매우 비슷하다. 목표와 피드백의 명료한 제시, 통제감, 당면한 과제에 대한 집중, 내적 동기화 및 도전 의식을 독려하는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은 환경의 아이들과 비교해 볼 때,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더 나은 기회를 갖는다.

 

 자기 목적적이 아닌 가정의 아이들은 많은 에너지를 끊임없는 협상과 다툼에 소진한다. 아이들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목표에 의해서 압도되지 않기 위해, 또한 자신의 연약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심리적 에너지를 써 버리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자기 목적적 환경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더 행복하고, 강하고, 명랑하고, 만족스러워했다. 이 차이는 아이가 혼자서 공부할 때나, 학교에서 공부할 때도 나타났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자기 목적적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한층 더 쉽게 플로우 경험을 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아이들이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자기 목적적 환경의 청소년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즉 가정이 자기 목적적인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아이들은 친구와 함께 있을 때 긍정적인 정서를 경험한다.

 

p177

 세상에 대한 관심, 즉 적극적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으려는 욕망이 없다면 사람은 스스로 고립된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인 버트란트 러셀은 개인적 행복을 성취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점점 나는 내 자신과 나의 결점들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법을 배웠다. 점차 내 주의의 중심은 외부의 대상, 즉 만물의 상태, 다양한 지식의 영역, 내가 애정을 느끼는 개인들에게 맞추어졌다."

 그는 이처럼, 자기 목적적인 성격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지를 짧지만 적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부분적으로 그러한 성격은 생물학적 유전과 초기의 양육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은 신경학적으로 좀더 집중을 잘하고 융통성 있는 능력을 타고났거나, 또 어떤 사람은 운이 좋게도 비자의식적 개인주의를 함양시켜 준 부모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은 훈련과 훈육을 통하여 완전하게 숙달할 수 있는 기술, 즉 계발 가능성이 있는 능력이다.

 

p188

 연구 결과, 사람들이 값비싼 물질적 자원이 필요한 여가 활동(값비싼 장비가 있어야 하거나, 자동차 운전 또는 TV 시청처럼 석유나 전기 등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활동)을 할 때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여가 활동 때보다 그 즐거움이 훨씬 감소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게 느낄 때는 그저 서로 담소를 나눌 때, 정원을 손질할 때, 뜨개질을 할 때 혹은 여타의 취미 생활을 즐길 때였다. 이와 같은 활동들은 외적 자원이 거의 들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고도의 심리적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 일들이다. 반면, 외적 자원을 필요로 하는 여가 활동에는 상대적으로 주의를 덜 집중하기 때문에 기억할 만한 추억이 줄어드는 것이다.

 

p196

 인도 사람들은 고도의 자기 통제 기술에 지나치게 매료된 나머지 자연 환경의 물리적 도전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대다수 국민들 사이에 무력감과 무관심이 팽배해졌고, 결국은 자원의 빈약과 인구 과잉으로 인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반면에, 물질적 에너지 사용의 극대화를 꾀한 서양은 가능한 모든 자원을 개발하고 급속도로 소모해 왔기 때문에 환경의 고갈을 초래하였다. 정신 세계와 물질 세계의 저화로운 균형을 이루는 사회야말로 완벽한 사회라 할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요가는 '함께 있게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람과 신을 일체가 되도록 하는 요가의 목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먼저 신체의 각 부분이 서로 하나가 되도록 하고, 그렇게 하나가 된 육체와 의식이 함께 질서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약 1,500년 전에 파탄잘리에 의해 집대성 된 요가의 교본에는 이러한 목표에 이르는 여덟 단계가 제시되어 있는데, 각 단계로 올라갈수록 난이도는 점차 증가한다. 윤리적 준비를 하는 처음 두 단계는 각 개인의 태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의식을 정리하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정신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는 노력을 시도하기 전에 우선 심리적 엔트로피를 최대한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첫 단계인 야마(yama)에서는 거짓말 · 도벽 · 욕망 · 탐욕 등 타인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생각과 행동을 자제하라고 한다.

 두 번째 단계는 순종을 의미하는 니야마(niyama)이다. 이는 곧 청결과 수련 그리고 신에 대한 순종을 질서 정연한 일과를 따름으로써 예측 가능한 형태로 만들고, 이 과정을 통해서 주의를 통제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의 두 단계는 육체적 준비를 하는 단계로, 요기라고 불리는 수행자들이 감각의 유혹을 이겨내고, 지치거나 사념에 얽매이지 않고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습관을 기르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아사나(asana)라고 하는 다양한 '좌자세'나, 동일한 자세를 오랜 시간 동안 긴장이나 피로에 굴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천을 두르고 머리를 땅에 대면서 발은 목뒤로 접은 채 꺼꾸로 서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서양에 알려진 익숙한 요가 형태, 즉 아사나이다.

 네 번째는 프라나야마(pranayama), 즉 호흡법으로서 신체의 긴장을 완화하고 호흡의 리듬을 안정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다섯 번째 단계는 지금까지의 준비 운동과 본격적 요가 수행의 연결 단계로 프라트야하라(pratyahara)라고 한다. 이것은 감각 정보 입력을 통제함으로써 외부 물체로부터 주의를 끊고 궁극적으로는 본인이 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단계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단계들을 보면, 이번 장에서 설명하는 플로우 활동의 목적, 즉 의식 세계의 통제와 요가의 목적이 얼마나 유사한지를 알 수 있다.

 나머지 세 단게는 지금 우리의 주제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 왜냐하면 나머지 단계에서는 육체적 기술보다는 순수한 정신 작용을 통한 의식의 통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맥락을 유지하기 위해, 또 결국에는 이런 정신적 수행이 이에 앞서 행해지는 육체적 수행에 전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계속 설명하기로 한다. 다라나(dharana)는 오랜 기간 동안 단일한 자극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앞 단계인 프라트야하라와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우선 사물을 의식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배우고, 그 다음 그것을 의식에 다시 넣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고도의 명상을 수행하는 드야나(dhyana)가 일곱 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 받지 않고, 앞 단계에서와 같은 단일 자극도 필요치 않은 집중 상태에서 자신을 잊는 법을 배우게 된다. 최종적으로 수행자는, 명상하는 사람과 명상의 대상이 하나가 되는 상태인 사마디(samadhi)를 성취하게 된다. 사마디를 성취한 사람들은 이를 그들 생애에서 최고로 행복한 경험으로 묘사한다.

 

p199

 요가와 플로우의 유사성을 뒷받침해 주는 또 다른 점은 해방에 이르는 마지막 단계까지도 수행자가 계속해서 의식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의 통제 없이는 자아를 버릴 수 없으며, 자아를 버리는 그 순간조차 의식의 완전한 통제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능과 습관 그리고 욕망이 있는 자아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고도로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요가야말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체계저그로 플로우 경험을 낳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205

  음악은 조직화된 청각적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정리해 줌으로써, 심리적 엔트로피 - 즉 관련 없는 정보들이 우리가 목표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할 때 경험하게 되는 무질서 - 를 감소시켜 준다. 음악을 들으면 지루함이나 근심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있고, 진지하게 감상할 때는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이는 기술의 발달로 음악을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삶의 질이 상당히 향상됐다고 주장할는지도 모른다. 라디오 · 테이프 · CD · 레이저 디스크 등을 통해 선명하게 녹음된 최신 곡들을 하루 종일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계속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 삶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어 주어야 이론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흔히 행동과 경험을 혼동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녹음된 곡을 며칠이고 계속해서 듣는 것이 몇 주일 동안 고대하던 콘서트에서 단 한 시간 음악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울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는 것은 음악이 귀에 항상 가깝게 있다는 사실이 아니고,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서 귀를 열고 들을 때만이다. 예컨대 식당이나 가게에서 나오는 배경 음악을 들을 때 그것을 귀기울여 듣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따라서 그로 인해 플로우를 경험하기는 극히 어려운 것이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도 즐기기 위해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현대인들은 녹음 기술의 발달로 음악을 듣기가 너무 편리해진 나머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음악을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도 그만큼 감소될 수 있는 것이다. 녹음 기술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종교 의식에 완전히 통합되어 있던 시절의 음악이 자아내는 것과 같은 경외감을 라이브 음악 공연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교향악단은 물론이요, 마을의 무도회 반주 그룹까지도 이와 같은 조화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는 신비한 기술을 잘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당시에는, 한 번의 공연이 유일무이한 것이며 다시 되풀이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사람들이 이런 행사에 거는 기대가 매우 높았던 것이다.

 오늘날 록 콘서트와 같은 라이브 공연의 관객들도 어느 정도는 이와 같은 의식적 행위에 참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 말고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같은 행사를 보고, 같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며, 동일한 정보를 처리하게 되는 예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집단으로 행사에 함께 참여하는 관중들은 뒤르켐이 명명한 '집단적 흥분'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어떤 집단에 확고히 소속되어 있다는 존재 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뒤르켐은 이러한 느낌이야말로 근원적인 종교적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라이브 공연은 듣는 이로 하여금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재생된 음악을 들을 때보다 공연장에서 플로우를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다.

 라이브 연주가 녹음된 음악보다도 원래 더 즐거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와 반대의 경우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당성이 희박하다. 듣는 이가 진지한 자세만 갖춘다면 어떤 음악도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사실상, 야쿠이 족의 마술사가 인류학자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에게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음과 음 사이의 정적까지도 면밀히 들으면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희귀 음반까지 탐내면서 많은 음악을 수집해 두고 있지만, 그것을 실지로 즐기지는 않는다. 몇 번 음악을 들으면서 음향 시설이 내는 선명한 음에 감탄하고서는, 더 좋은 음향 기기가 나와 그것을 새로 구입할 때까지 잊어버리고 다시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음악에 내재한 기쁨의 잠재성을 최대로 살리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을 플로우로 변화시킬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우선 일정한 시간을 음악 감상에 할애한다. 그 시간이 되면 불을 끄거나,  제일 좋아하는 의자에 앉거나, 혹은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어떤 방법을 통해 집중도를 높인다. 그들은 감상할 음악을 미리 신중히 선곡하며, 감상 시간에 맞는 구체적 목표를 설정해 둔다.

 음악 감상은 처음에는 감각적 경험 단계에서 출발한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 신경계에 유전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유쾌한 육체적 반응을 유발시키는 음색에 반응을 보인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그런 특정 가락이나, 플루트의 애조를 띤 호소, 또는 활달한 트럼펫의 곡조에 반응을 나타낸다. 우리는 특히 드럼이나 베이스의 리듬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데, 이런 리듬이 록 음악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누군가는 이와 같은 리듬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처음으로 듣게 되는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상기시켜 준다고 하기도 한다.

 다음 단계는 유추적 감상 단게이다. 이 단계에서는 음의 양식에 따라 감정과 이미지를 떠올리는 기술을 갖추게 된다. 음울한 색소폰의 악절은 대평원 상공에서 먹구름이 몰려드는 것을 바라볼 때 느꼈던 경외감을 상기시켜 준다. 또 차이코프스키의 곡은 눈이 가득 덮인 숲 속에서 종을 딸랑거리며 썰매를 달리는 광경을 눈으로 보는 듯하게 해주기도 한다. 대중 가요도 물론 그 노래가 어떤 분위기와 어떤 이야기를 나타내는 곡인가를 가사로 명확히 알게 해줌으로써, 이와 같은 유추적 감상법을 최대로 활용한다고 하겠다.

 음악 감상의 가장 복합적인 단계는 분석적 감상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음의 감각적 혹은 서사적 측면보다는 음악의 구조적인 요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감상 기술이 이와 같은 수준이 되면, 그 작품 저변의 양식 및 그와 같은 화성을 이루어 낸 방법을 인식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수준의 감상 기술을 익히게 되면, 각 공연마다 상이한 음향의 질을 비교 평가할 수 있으며, 공연 작품을 그 작곡가의 초기 및 후기 작품과 비교하기도 하고, 동시대의 다른 작가가 만든 작품과도 비교할 수 있다. 또한 같은 관현악단, 지휘자, 악단의 초기 공연과 후기 공연을 비교해 보거나, 다른 악단과 지휘자는 같은 작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분석적 감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블루스 곡을 다양하게 변화시킨 편곡 작품들을 서로 비교하기도 하고, "카라얀이 1975년에 지휘한 제7번 교향곡 제2악장이 1963년 공연 당시와 어떻게 다른가 한번 볼까?"라든지, "시카고 교향악단의 금관악기부가 베를린 교향악단보다 정말 더 나은가?"라는 생각들을 염두에 두고 감상을 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목표를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듣는다는 직업은 하나의 적극적인 경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카라얀이 빠르기를좀 늦추었네"라든지, "베를린 교향악단의 관현악부의 소리는 더 선명하지만 부드러운 맛이 좀 적군"등과 같은 계속적인 피드백을 얻는다. 이와 같은 분석적인 감상 기술을 익혀나가게 되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p215

 반드시 억제한다고 해서 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억제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위축되게 마련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방어적이고 완고해지고, 자아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오직 자율적으로 선택한 규율을 통해서만, 인생을 즐기면서도 이성의 한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만일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기 때문에 자신의 본능적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면, 중독되지 않고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음식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거부하는 금욕주의자처럼 스스로에게나 다른 이에게 권태감을 준다. 이러한 양극단 사이에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6장. 지적 활동을 통해 플로우 찾기(The Flow of Thought)

p221

 운동 선수들은 어느 한계 이상으로 그들의 성적을 향상시키려면, 먼저 정신을 가다듬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얻게 되는 내적 보상은 좋은 컨디션뿐만이 아니라 개인적 성취감과 자긍심의 강화까지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모든 정신적 활동을 위해서 신체적 상태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체스는 가장 두뇌를 많이 쓰는 게임 중의 하나이지만, 체스의 고수들은 달리기나 수영을 하면서 늘 체력을 다져야 한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체스 대회에서 장시간 동안 고도로 정신을 집중한 상태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p223

 우리는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잘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습관에 의해 심리 에너지가 너무도 잘 배분되는 까닭에 거침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자명종 시계가 울리면 우리는 잠에서 깨어 의식을 찾은 후 목욕탕으로 가서 이를 닦는다. 그러고 나면 문화가 규정해 주는 사회적 역할이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 주며, 하루가 저물 때까지 일정한 양식에 따라 자동적으로 행동하다가 밤이 되면 잠을 자면서 의식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특별하게 할 일이 없는 상태로 혼자 남겨졌을 때는 본능적인 무질서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별로 할 일이 없으니 이것저것 생각해 보다가 대개는 뭔가 고통스럽고 신경 쓰이는 일에 생각이 멈춘다.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한,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일로 관심이 모아진다. 실제 혹은 가상의 고통이나, 최근에 유감스러웠던 일, 또는 오래된 갈등 등에 관심이 쏠린다. 이런 쓸모도 없고 즐겁지도 않은 엔트로피가 바로 정상적인 의식의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피하기 위해 현재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로 -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머릿속을 채움으로써, 더 이상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가,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막대한 시간을 텔레비전 보는 일에 소모하는가 하는 의문을 풀어준다. 독서나 다른 사람과의 대화 혹은 취미 활동과 비교해 볼 때, 텔레비전은 심리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투자하고도 쉽고 지속적으로 시청자들의 주의를 끌게 해준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동안은 골치 아픈 개인적 문제를 떠올리게 될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일단 사람들이 정신적 혼돈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이런 미봉책을 쓰기 시작하면, 그 습관을 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TV 시청처럼 어떤 외적 자극에 정신을 내맡기기보다는, 습관을 통해서 정신을 통제하는 것이 의식의 혼돈 상태를 피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며, 플로우 활동에 의레 따르는 목표와 규칙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정신을 이용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공상을 들 수 있다. 이는 마음속에서 가상으로 어떤 일련의 사건들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하는 일에 이처럼 쉬워 보이는 방법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공상 및 정신적 심상에 대해 다른 어떤 학자보다 많은 연구를 한 예일 대학의 싱어 교수에 따르면, 전혀 공상을 할 줄 모르는 아이들도 많다고 한다.

 공상은 유익한 점이 많다. 먼저, 공상 속에서나마 불쾌한 현실을 보상함으로써 -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벌받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서 좌절감이나 적개심을 어느 정도 해소시키는 것처럼 - 감정의 질서를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공상은 의식의 복합성을 높이는 일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컨대 아이들이 -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 상상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반복적으로 재현해 봄으로써 지금껏 문제 해결에 최선이라고 생각해 왔던 방법을 수정할 수도 있고, 다른 대안도 생각해 보며, 예상치 않은 결과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을 닦는다면 공상도 매우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p236

 "행복이란 것은 힘이나 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진실과 다양함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유쾌함과 자신감은 최고의 선이다."

 칸트가 끓는 물 속에다 자신의 시계를 집어넣고 손에다는 계란을 들고 계란이 익는 시간을 재려했을 때는, 그의 모든 심리 에너지가 추상적 사고를 조화롭게 정리하는 데 투자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p237

 내적 상징 체계가 없는 사람은 너무도 쉽게 대중 매체의 포로가 된다. 이들은 선동 정치가들에게 쉽게 현혹되며, 연예인들을 보고 쉽게 기분이 풀리고, 장사꾼들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우리가 텔레비전이나 마약 그리고 유창한 정치적 구호나 종교적 구원에 의존하게 되는 것은 의지할 것이 너무 없어서, 즉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방지해 주는 내적 규칙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보를 제공할 능력이 없을 때 우리의 생각은 무질서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의식의 질서를 찾기 위해서 자신이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는 외부로부터의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기술과 지식으로부터 자생적으로 성장하는 내적 방법을 따를 것인가의 여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p240

 단어를 사용해 우리 삶의 질을 고양시킬 수 있는 훨씬 더 실재적인 방법은,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진 '대화의 기술'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공리주의 관념에 따라 우리는 대화의 주된 목적이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실용적 지식을 전달해 주는 간결한 의사 소통을 중시하며, 그밖의 것들은 하찮은 시간 낭비라고 여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관심이나 지식을 갖고 있는 협소한 화젯거리를 벗어나서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우리들 중에서 "미묘한 대화, 그것이야말로 에덴 동산이다"라고 서술한 알리의 열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대화의 주된 기능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p243

 오늘날에는 다른 많은 의사 소통의 매체가 글을 대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글쓰는 습관을 경시하게 되었다. 전화 · 녹음기 · 컴퓨터 · 팩스 등을 통해서 뉴스를 더욱 효율적으로 전할 수 있다. 만일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글쓰는 습관이 쇠퇴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글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보를 창조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p255

 수세대를 거치면서 그 제도 자체가 일으킨 문제들이 원래의 목적보다 우선하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예컨대 현대 국가들은 적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서 군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곧 군대 자체의 목적과 정치가 생겨났고, 이제는 가장 성공적인 군인이 국가를 가장 잘 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군대를 위해 돈을 가장 많이 얻어오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p257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연구자가 수동적인 소비자의 지위를 뛰어넘어 능동적인 생산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시점이 온다. 자신이 통찰한 내용을 언젠가 후대에서 경외김을 가지고 있을 것을 기대하며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지나친 오만이다. 더군다나 그와 같은 '외람됨'이 인간사에 많은 악영향을 미쳐 왔다. 그러나 자신이 당면했던 주된 의문점들을 명료하게 표현하려는 내적 동기로 인해 생각을 기록하고, 자신의 경험을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해결책을 진술하고자 한다면, 그 아마추어 철학자는 가장 어렵지만 보람도 큰 영역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법을 이미 배운 것이다.

p260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배움을 포기하는 이유는, 13~20년에 걸친 교육이 외적 동기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배운다는 것이 불유쾌한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주의력이 오랜 기간 동안 외부에 의해, 즉 교과서와 교사들에 의해 조종되어 왔기 때문에 그들은 졸업을 첫 자유의 날로 간주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징적 기술의 사용을 포기하는 사람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그의 사고는 이웃의 의겨니나 신문의 사설 그리고 텔레비전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전문가'의 조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외적 동기에 의한 교육이 종결되는 시점을 내적인 동기로 교육을 받게 되는 출발점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 시점에서 공부의 목적은 더 이상 학점을 받거나 졸업장을 타는 것 그리고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 그리고 자기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사상가는 심오한 기쁨을 느끼는 되는 것이다.

 

7장. 일 속에서 플로우 경험하기

 

p277

 다시 말해 유(流)의 신비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어떤 초인간적인 대도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주변에 있는 행동의 기회에 점차로 주의를 집중시켜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연마되는 기술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너무나 완벽한 수준에 이르러 겉보기에는 자동적이고 초월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가 되는 것이다.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가나 훌륭한 수학자들의 성취는 공히 난관 극복과 점진적 기술 연마의 결과임이 확실하지만, 마치 초인적인 것처럼 보인다.

 

p287

 일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상호 보완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사냥 · 가내 직조 수공업 · 수술 등과 같은 플로우 활동과 최대로 비슷해질 수 있도록 일을 재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행동의 기회를 파악하고 기술을 연마하고 합당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을 통해서 사람들이 세라피나와 조 그리고 포정의 경우처럼 자기 목적적 성격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위의 두 전략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일을 더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두 가지가 상호 보완이 되어야만 최적 경험의 창출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이다.

 

p292

 이것이 바로 역설적인 상황인 것이다. 직장에서 사람들은 훨씬 많은 기술을 사용하고 직면하는 도전들도 많다고 느끼기 때문에, 스스로 더 행복하고 강하고 창의적이라 느끼며 더욱 큰 만족감을 갖는다. 여가 시간에는 대체로 별로 할 일도 없고 자신의 기술도 많이 쓰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스스로 우울하고 약하고 지루하고 불만족스럽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일보다는 여가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순되는 양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결론이 하나 있다. 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이 내리는 판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직접 경험의 질은 무시해 버리고, 일에 대한 깊은 문화적 고정 관념에 의거해 자신의 동기를 결정 짓는다. 일이란 부담이고 구속이며 자신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p294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미국인들이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 세 가지를 발견했는데, 세 가지 모두 직장에서 겪는 전형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바와 같이, 직장에서의 경험이 집에서의 경험보다 더 나은 경우가 많음에도 직업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이다(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봉급이나 다른 물질적 문제는 대체로 이들의 가장 절박한 관심사에 들지 않았다).

 가장 많이 지적되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 불만족의 첫 번째 원인은 다양성과 도전감의 결여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문제가 될 수 있으나, 특별히 단조로운 작업을 하는 하급 직책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두 번째 불만은 직장에서 겪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 특히 상관과의 갈등이다.

 세 번째로는 심신의 소모가 지적되었다. 압력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자신을 위한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 그리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고위 직급에 있는 사람들, 즉 경영직이나 관리직에 있는 사람일수록 심각하게 느끼는 문제였다.

 이러한 불만들은 객관적인 것들도 있지만, 각자의 의식의 주관적 변화에 따라 좌우되는 것들도 많다. 예를 들어, 다양성이나 도전은 직업이 본연적으로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각자가 기회를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들이다. 포정과 세라피나 그리고 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조롭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에서 도전을 찾아냈다. 어떤 직업이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가는 궁극적으로 볼 때 실질적 노동 조건보다는 그 직업에 대한 각자의 접근 방식에 좌우되는 것이다.

 다른 불만의 원인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직장 동료들이나 상사와 잘 지내는 것이 어렵기는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이ㅘ 같은 일은 노력만 한다면 어느 정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직장에서의 갈등이란 종종 체면이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방어적 심리를 갖게 될 때 발생한다. 자신의 특정 목표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 주어야 한다는 기준을 설정해 놓고, 다른 사람들이 그 기준을 따라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처럼 계획된 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른 사람들도 나름대로 설정해 놓은 기준과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교착 상태를 피해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상사나 동료들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이 방법이 주변의 상황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이해만을 추구해 나가는 것보다 덜 직접적이고 시간도 많이 들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실패하는 확률이 거의 없다.

 최종적으로 스트레스와 압력은 직업에 따르는 가장 주관적인 측면이므로 그만큼 의식의 통제를 받기 쉽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트레스는 우리가 그것을 느껴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완전히 지쳐버리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조직의 개선, 책임의 위임, 동료나 상사와의 좀더 원활한 의사 소통 등에 의해 해결되는 것들도 있고, 가정 생활의 개선, 여가 활동의 변화와 같이 직업 외적인 요인들이나 초월적 명상과 같은 내적 훈련 등으로 해소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이와 같은 단편적인 해결책들도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직업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대책은 그러한 스트레스를 전반적 경험의 질로 향상시키기 위한 도구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말로 하기는 쉽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신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며, 어쩔 수 없이 정신이 산만해지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설정해 놓은 목표에만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 외적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다양한 방법은 9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여가 시간의 활용을 통해 전반적 삶의 질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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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지 수동적으로, 그리고 자기 지위를 과시하려는 것과 같은 외적인 이유로만 주의를 기울게 된다면, 대중적 여가, 대중 문화, 심지어는 고급 문화까지도 모두 우리 정신을 좀먹는 기생충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심리적 에너지만을 흡수할 뿐이며, 그 대가로 어떤 실재적인 힘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결국 우리들을 이전보다 더욱 지치고 의기소침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일이나 여가 시간 모두 우리가 통제하지 못한다면 실망스럽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일과 많은 여가 활동, 특히 대중 매체의 수동적 소비와 관련된 것들은 우리들을 행복하고 강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이를 통해 금전적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우리가 이 상태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 삶의 정수를 모두 고갈시켜 빈 껍데기만 남게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일과 여가도 우리 필요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일을 즐길 수 있고, 여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삶이 전반으로 훨씨 더 가치 있게 되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브라이트빌은 "미래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의 것일 뿐 아니라, 여가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하도록 교육받은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8장. 혼자 있음과 함께 있음을 즐기기(Enjoying Solitude and Other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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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으로는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다른 어떤 것과도 마찬가지로, 관계도 좋을 때는 우리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고, 나쁠 때는 매우 우울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환경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융통성이 많고 가장 변화하기 쉬운 측면을 지니고 있다. 동일한 한 사람이 아침에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가도 저녁에는 비참한 기분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애정과 승인에 너무도 많이 의존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해 주는가에 따라 극심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과 원만히 지내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삶의 질 전반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친구를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방법'과 같은 제목의 책들을 쓰고 또 읽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기업의 경영인들은 더욱 효과적인 경영을 위하여 의사 소통을 좀 더 원활하게 하고자 애쓰며, 사교계에 처음 나서는 사람들은 에티켓에 관한 책을 읽어 그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이러한 관심사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는 외적인 욕구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단지 사람들이 우리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그 자체로서 하나의 소중한 대상으로 대우를 한다면, 사람들은 가장 풍부한 행복의 원천이 된다.

 관계가 갖는 바로 이 같은 융통성으로 인해 불유쾌한 상호 작용이 참을만한 것으로도, 심지어는 흥미로운 것으로도 변화될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고 해석하는지에 따라 서로를 어떻게 대하고, 그렇게 하면서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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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롭다는 것은 어째서 그렇게 부정적인 경험이 되는 것일까? 가장 기본적인 대답은 내적인 정신의 질서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계속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는 외적이 목표와 외적 자극 그리고 외적 피드백이 필요하다. 외적 입력이 부족할 때는 주의가 산만해지고 사고의 혼란이 초래되어, 우리가 2장에서 살펴본 '심리적 엔트로피' 상태에 빠지게 된다.

 청소년들이 혼자 있을 때 하는 대표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내 여자친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 얼굴에 나는 것이 혹시 여드름인가? 수학 숙제를 제시간에 끝낼 수 있을까? 어제 나랑 싸웠던 녀석들이 나를 때릴까?

 다시 말해, 할 일이 없으니,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차지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른들도 의식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이와 똑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 자신의 애정 생활에 대한 염려와 건강 · 투자 · 집 · 직장의 문제들이, 눈앞에 급히 해야 할 일이 없어진 순간부터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텔레비전이 그다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 시청이 결코 긍정적 경험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수동적이고, 힘이 없고, 신경이 예민해지고, 슬픈 기분을 느낀하고 한다 - 최소한 눈앞의 깜박이는 화면이 의식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줄거리, 눈에 익은 주인공들, 심지어는 반복되는 광고까지도 일종의 안심을 주는 자극이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은 다루기 쉽고, 제한된 환경의 한 측면으로서 우리의 주의를 끈다. 텔레비전과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 동안은 우리의 머릿속에 개인의 걱정거리가 떠오루지 않는다. 화면을 통해서 전달되는 정보는 불쾌한 걱정들을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차단시켜 준다. 물론 이런 식으로 우울함을 떨쳐버리려 하는 것은 주의의 낭비이다. 크게 얻는 것도 없이 많은 양의 주의력을 소모해 버리기 때문이다.

 습관적 마약의 사용으로부터 끊임없이 집안 청소, 충동적 성해위에 이르는 다양한 강박적 행위들에 의존해 고독의 두려움을 벗어나 보려는 극단적 방법도 있다. 약의 영향을 받게 되면 자아가 심리 에너지를 지휘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해방된다. 그저 느긋하게 앉아서 약이 제공해 주는 생각에 빠져들면 되는 것이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내 알 바가 아니다.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마약도 우리가 우울한 생각에 직면하지 않도록 해준다.

 술이나 향정신성 의약들도 최적 경험을 제공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는 복합성이 매우 낮은 수준의 경험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많은 전통 사회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고도로 기술적인 제식을 통해 마약을 취하지 않는 한, 실제로 마약은 우리의 판단(성취 가능한 일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한 개인으로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을 혼미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것은 기분 좋은 상태이기는 하지만, 행동의 기회와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증가' 시킴으로 인해 맛보는 즐거움을 그릇되게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마약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이처럼 설명한 것에 대해 강력히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난 25년 동안 마약이 '의식을 확장시켜 주며' 마약을 사용하면 창의성이 증가한다고 줄곧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의 화학 성분이 의식의 내용과 조직을 바꾸어 주기는 하지만, 자아의 통제력을 신장시키거나 증대시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 창의적인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런 통제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향정신성 의약들은 정상적 감각 조건에서보다는 다양한 정신적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경험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제공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현대의 예술가들은 콜러리지가 마약에 취해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쿠빌라이 칸>과 같이 신비롭고 잊혀지지 않는 작품을 창작하고자 환각제를 사용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어떤 종류의 예술 작품이든 그것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맑은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약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좋은 예술 작품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복합성이 떨어져서 너무나 명백하고 자아 도취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화학 물질에 힘입어 예민해진 의식은, 나중에 작가가 명료한 정신으로 돌아와 사용할 수 있는 색다른 이미지나 생각, 감정 등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정신을 점차 화학 물질에 의존하게 되어 결국은 스스로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위험이 따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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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중이 필요하고 기술을 증진시켜 주며 더 나아가 자아를 성장시켜 주는 활동을 하면서 자유 시간을 보내는 것과 텔레비전을 보거나 마약을 하면서 남는 시간을 때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위의 두 전략이 혼돈의 위협에 대처하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보일 수도 있고, 존재론적 불안에 대해 각기 다른 방어 기제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전자는 성장으로 이끌어 주고, 후자는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할뿐이라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좀처럼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외부 환경의 지속적 도움 없이도 순간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창의적인 삶의 성취 여부를 판가름하는 시험에 합격했다고 할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특히 젊은 시절에 더욱 중요하다.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청소년들은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진지한 정신적 각오를 해야 하는 과업을 수행하지 못한다. 방과 후 집에 돌아와서 가방을 자기 방에 던져 놓고, 냉장고에서 간식을 꺼내 먹은 후, 즉시 전화기를 들고 친구들과 통화를 시작하는 것이 많은 부모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전형적인 십대의 행동이다. 통화가 별 볼일 없어지면 전축이나 텔레비전을 켠다. 혹시라도 책을 펴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복잡한 형태의 정보에 집중을 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일지라도 얼마 안 지나 어려운 책의 내용을 떠나 좀더 즐거운 생각을 하려 한다. 그러나 마음대로 즐거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조직되지 않은 마음에 늘상 떠오르는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채우게 된다. 외모나 인기 그리고 인생의 성공 가능성 등에 관해 염려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식을 점유할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다. 공부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십대들은 너무 많은 정신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만 아니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하려 든다. 다시 익숙한 음악이나 텔레비전 그리고 함께 시간을 때울 친구를 찾는 것이 이들 청소년들이 대체로 찾는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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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을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은 '단련'이 되지 못한 성인으로 성장한다. 이들에게는 경쟁적이고 정보 집중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복합적인 기술이 결핍되어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삶을 즐기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숨겨진 성장의 잠재성을 개발하도록 이끌어 주는 도전을 찾아내는 습관을 익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십대의 청소년 시절만이 고독이 주는 기회를 활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는 아니다. 불행하게도 너무나 많은 성인들이 20대나 30대에 이르면 그리고 40대가 되면 예외 없이 이미 자신의 몸에 밴 습관 속에 안주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미 경험을 충분히 쌓았으며, 생존에 필요한 책략들을 익혔으니 지금부터는 느긋하게 살아가면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결국, 극히 최소한의 내적 단련이 되었을 뿐인 이들에게는 해가 갈수록 엔트로피가 축적된다. 직장에서 느끼는 실망, 신체적 건강의 약화 그리고 일상적인 걱정거리들이 점차로 마음의 평정을 위협하는 거대한 부정적 정보로 쌓이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에 과연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 것일까? 만일 혼자 있을 때 주의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마약, 오락, 재미 등과 같이 정신을 둔화시키거나 주의를 돌려줄 수 있는 손쉬운 외적 해결책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대응 방법은 퇴보적인 것이어서 발전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발전할 수 있는 길은, 불가피한 삶의 조건인 엔트로피부터 한층 더 고차원적인 형태의 질서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즉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그것을 억압하거나 회피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배움의 기회로 그리고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상황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에너지를 외부 세계의 정복으로부터 심오한 내적 세계의 탐구로 전환시킬 시기가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이제는 스스로 추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 예를 들면 프루스트의 작품을 읽거나 체스를 두기도 하고, 과수를 돌보거나 신에 대한 생각 등을 마침내 해 볼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고독한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위와 같은 것들 중 하나라도 성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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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까지 되지는 않더라도, 혼자 살려면 다른 사람들이나 직업 · 텔레비전 · 극장 · 레스토랑 · 도서관 등 문명 생활의 도움 없이도 플로우를 성취할 수 있도록 자신만의 정신적 일과를 설정해야 한다.

 

 공간을 조직화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시간을 조직화하는 일일 것이다.

 

 사람은 고독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엔트로피가 정신을 와해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의력을 조직하는 일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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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쾌락에 의존하는 생활 방식은, 고된 노동과 그러한 노동에서 얻는 즐거움을 기초로 형성된 복합적인 문화와 공생의 형식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합적인 문화가 비생산적인 쾌락주의자들, 즉 쾌락에 중독되고 기술과 수양이 부족하여 자활 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을 더 이상 지원해 줄 수 없거나, 지원할 의사가 없어질 때 그들은 방향을 잃고 무력해지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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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을 즐기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생의 많은 부분이 그 부작용을 회피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점철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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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공국이 두 방법 중 어느 재산상속제를 채택하였는가는 전적으로 우연의 소산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선택의 결과는 그들의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장자상속제를 채택했던 공국들은 자본의 집중이 이루어져 결국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던 반면, 분할상속제를 채택했던 나라들은 자본의 분산으로 산업화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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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부모와 자녀들이 외적 이유로 인해 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집안에서 모여 사는 경향이 있었다. 과거에 이혼율이 극히 낮았던 이유는 부부간의 애정이 오늘날보다 깊었기 때문이 아니다. 남편들은 요리를 하며 살림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아내들은 돈을 벌어다 줄 사람이 필요했으며, 자녀들은 먹고, 자고, 세상살이를 시작하기 위해 부모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젊은 사람들에게 주입했던 '가족을 중시하는 가치관'은 종교적, 도덕적 명분이 앞세워졌을 때조차도, 결국은 이 같이 단순한 필요성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물론 한때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이 득세하여 사람들이 그러한 가치관을 배우게 되고, 그것이 가족의 붕괴를 막는 데 큰 몫을 담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도덕적 규칙은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것으로, 그리고 남편, 아내, 자식들을 옭아매는 외적 구속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더욱 흔했다. 그러게 되면 그 가족이 겉으로는 온전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내부적으로는 갈등과 증오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만연하는 가정의 '와해' 현상은 결혼 생활을 지속해야 할 외적 요인들이 서서히 사라지게 된 결과이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것은 사랑이나 도덕적 힘이 약화되서라기보다는, 여성 인련의 채용 기회 증대로 대표되는 노동 시장의 변화와 노동을 절감해 주는 가사 용품의 보급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외적인 이유들만으로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가족의 범주 안에서 함께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가정 생활은 가정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기쁨과 성장의 좋은 기회들을 제공해 주며, 이러한 내적 보상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실상, 이러한 경험을 하기에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이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단지 편의만을 위해 함께 사는 전통적 가족 형태가 쇠퇴하는 경향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견디는 가정의 수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다. 물론 아직도 외적 요인들이 내적인 보상보다는 훨씬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앞으로도 한동안은 가정 생활의 분열이 심화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람직한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는 가정들은, 자신의 의사에 반해 어쩔 수 없이 함께 사는 가정들에 비해 각 구성원들의 자아 개발에 훨씬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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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레로는 인간이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일련의 법규의 노예가 되어야만 한다고 저술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제약을 받아들이는 일이 곧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심리 에너지를 일부일처적 혼인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어떠한 문제와 장애가 발생해도 혹은 나중에 다음이 더 끌리는 선택의 여지가 생겨나더라도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전통적 혼인이 요구하는 책임들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그리고 관례에 따라서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기꺼이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인가 혹은 다른 사람들은 더 나은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닌가 따위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결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많은 에너지를 삶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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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랜시스 베이컨은, "최악의 고독이란 진실한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친구 관계는 가족 관계에 비해서 한결 즐거운 것이 되기 쉽다. 우리가 공통의 관심사와 상호 보완적 목표에 입각해서 친구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와 함께 있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는 없다. 친구는 우리의 자아 의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해 준다. 쓰레기를 내다버린다거나 마당의 낙엽을 쓰는 일과 같이 집에서는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지루한 일들이 많다 그러나 친구와 함께 있을 때는 '재미있는' 일들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일상적 경험의 질에 관해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던 우리의 연구에서, 친구오 함께 있을 때 가장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게 된다는 응답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이는 반드시 십대 청소년들에게만 국한된 사실이 아니다. 젊은 성인들도 역시, 배우자를 포함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즐겁다고 응답했다. 은퇴한 노인들도 배우자나 가족과 함께 있을 때보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즐겁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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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종류의 사교는 친구 사이의 교제를 모방한 것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친구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 누구나 때로는 잡담을 하면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마치 매일 마약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것처럼 이러한 피상적 교제에 극심하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고독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집에서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러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다. 

 강한 가정적 결속이 결핍된 십대 청소년들은 친구들 그룹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나머지 그 그룹 속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불사하려 든다. 다음은 약 20년 전 애리조나 주의 투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규모가 큰 어느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모두가, 그 학교를 그만두었으나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과 계속 '우정'을 유지하던 한 나이 많은 퇴학생이 급우들을 죽여서는 시체를 사막에 매장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사건은 경찰의 우연한 수사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다. 모두 유복한 중류 가정의 자녀들이었던 이 학생들은,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할 것이 두려워 살인을 신고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일 투산의 십대 청소년들에게 강한 가족적 결속이 있었더라면 혹은 이들이 그 지역 사회의 다른 어른들과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더라면, 친구들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그렇게 견디기 힘든 일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고독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이 또래 친구들밖에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굉장히 희귀한 사건은 아니다. 이따금씩 이와 매우 유사한 사건들이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p344

 사람들은, 마치 가족의 관계처럼 친구 관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고, 관계에 금이 가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으로 여기며 그저 상심만 하고 만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관심사가 많고, 관계에 투자할 만한 자유 시간도 많은 청소년기에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면 친구 관계는 결코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친구 관계도 직장이나 가정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처럼 열심히 가꾸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p345

 불행하게도 공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높은 복합성을 가진 행위를 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들은 권력을 좇으며, 박애가들은 명예를 추구하고, 성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정의로운가를 증명하려 한다. 이러한 목표들은 충분한 에너지만 투자한다면 성취하기가 그리 어려운 것들이 아니다. 한층 더 위대한 도전은 자기 자신에게 득이 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정치가들이 실제로 사회 상황을 변화시키고, 박애가들은 곤궁한 사람들을 도우며, 성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삶의 전형을 제시하기란 매우 어렵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큰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단지 물질적인 결과만을 고려한다면, 자신만을 위해 부와 권력을 얻으려 하는 이기적 정치가들을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적 경험이 인생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공동의 선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정치가들이야말로 보다 높은 노력의 목표에 도전함으로써 스스로 진정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그만큼 더 많이 가지게 된다는 점 때문에 말이다.

p346

 지난 수세기 동안 경제적 합리주의가 너무도 만연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인간의 노력이든 그 '결과'를 금전적 가치로 측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인생을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합리적이지 못하다. 진정한 가치는 경험의 질과 복합성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지역 사회의 척도는 기술적 진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최대한 여러 측면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면서, 이들이 더 높은 도전을 추구하며 자신의 잠재 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역 사회야말로 이상적인 사회라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의 가치도 그 명성이나, 삶의 필요에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마늠 학생들이 배움을 평생의 즐거움으로 여길 수 있도록 가르치는가에 있는 것이다. 또 반드시 이익을 최대로 올리는 공장이 아니라, 직원들과 소비자들의 삶의 질적 향상에 큰 기여를 하는 공장이야말로 좋은 공장인 것이다. 그리고 정치의 참된 기능도 사람들을 더욱 풍요롭고 안전하게 혹은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복합성을 증가시켜 가는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의식 변화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회적 변화도 실현될 수 없다. 한 젊은이가 칼라일에게 어떻게 하면 세상을 개혁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했다. 칼라일은 "당신 자신을 먼저 개혁하시오. 그리 되면 세상에서 악당이 한 명 더 줄어들게 되는 것이니까"라고 대답했다. 이 충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도 못했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9장. 혼란에서 벗어나기(Cheating Chaos)

 

p350

 물론 구체적인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고 나서야 비로소 플로우가 그들 삶의 질적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최적 경험은 건강이나 부와 같이 기본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케이크 위의 크림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는 보잘것없는 하나의 장식에 불과할 뿐이다. 더욱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적 요건 위에서만 플로우가 삶의 주관적 양상을 만족스럽게 변화시켜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이론은 위와 같은 결론을 반박하는 것이다. 주관적 경험은 단지 삶의 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물질적 조건들은 부착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다. 반면에 플로우는 우리 삶의 질에 직접적인 이익을 준다. 건강, 금전 그리고 다른 물질적인 편의들은 삶을 개선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심리 에너지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물질적 편의도 쓸모 없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이에 반해, 모진 고난을 겪고서도 그 곤경을 이겨 냈을 뿐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게 된 사람도 많다.

 

p365

 그러나 혼란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변형적 대처'라 하고, 이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일컫는 것만으로는 이 놀라운 재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수면을 '잠자는 힘'에 의해 야기되는 현상이라고 한 몰리에르 작품 속 인물의 말처럼, 효과적인 대처가 용기라는 미덕에 의해 야기된다는 말 역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름과 설명뿐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아직도 상당히 무지하다 할 수 있다.

 

p367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좋은 일들만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가능성도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실망감, 극심한 질병, 재정적 위기 그리고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죽음 등 자신의 목표와 상충되는 사건들을 겪게 마련이다. 이런 종류의 사건들은 우리의 정신에 무질서를 불러오는 부정적인 피드백들이다. 이 같은 사건들은 모두 자아를 위협하고 그 기능을 저해한다. 그 충격이 몹시 크면 그 사람은 꼭 필요한 목표에 집중할 능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자아는 이미 그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극심한 타격을 받게 되면 의식이 통제를 벗어나 그 사람의 '정신이 나가게' 되며, 이에 따라 다양한 정신 질환의 증상이 나타난다. 위협을 받던 자아가 살아남기는 하지만 더 이상 성장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공격을 피하려고 움츠린 채로 대량의 방어 기제를 동원하여 후퇴를 하게 되며, 계속 의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정신의 소산 구조들이라 할 수 있는 용기, 회복력, 인내, 성숙한 방어 혹은 변형적 대처 등이 절대저그로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없다면, 우리의 심리는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끊임없이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이와 같은 긍정적 전략을 배운다면, 대부분의 부정적 사건들이 최소한 중립적인 것이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아를 강화시키고 복잡성을 높여 주는 도전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p374

 예전 동료였던 G는 그가 공군에 복무하던 시절에 겪었던 일을 들려준 적이 있다. 그것은 안전에 대한 지나친 염려 때문에 모든 신경을 그 문제에만 집중하여 현실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섬뜩한 사건이었다. 한국전쟁 때 G의 부대가 정규 낙하산 훈련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부대원들이 낙하훈련 준비를 하다가 정규 낙하산의 개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오른손잡이였던 한 병사가 어쩔 수 없이 왼손잡이용 낙하산을 착용할 수밖에 없었다. 병기 담당 하사관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왼손잡이용 낙하산도 다른 낙하산들과 다를 바 없다. 다만 펼치는 줄이 멜빵의 왼쪽에 달렸을 뿐이다. 어느 손을 사용해도 낙학산을 펼칠 수 있으나, 오른손보다는 왼손을 사용하는 편이 더 쉬울 것이다."

 그 팀이 비행기에 탑승을 하고, 목표 지점 위의 2천 5백 미터 상공에 도달하여 한 명씩 차례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병사 전원이 성공적으로 훈련을 마쳤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한 명의 낙하산이 펴지질 않았던 것이다.

 G는 조사 팀의 일원이 되어서 그 병사의 낙하산이 펴지지 않은 원인을 조사하도록 파견되었다. 사망한 병사는 왼손잡이용 낙하산을 받은 바로 그 병사였다. 그의 군복에서 정규 낙하산의 줄이 일반적으로 위치하게 되는 가슴 우측 부분은 완전히 찢겨 나가고 없었다. 심지어는 그의 가슴 부위 살점마저도 그의 피묻은 오른손에 의해 뜯겨져 있었다. 왼쪽으로 불과 몇 인치 옆에 바로 낙하산을 펼치는 줄이 있었건만, 그 줄에는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낙하산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문제는 이 병사가 그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동안, 낙하산을 펼치려면 자신이 늘 잡아당기던 바로 그 위치에서 낙하산 줄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착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극심한 공포를 느낀 나머지 손을 조금만 움직이면 안전하게 낙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만 잊었던 것이다.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심리 에너지를 내부로 동원해 위협에 대한 방어로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고난 대응이 오히려 대처 능력을 손상시키는 경우가 흔히 있다. 즉 본능적 반응이 내적 혼란을 더 악화시키고, 대응의 융통성을 감소시키며, 최악의 경우 그 사람을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시켜 홀로 좌절감을 맛보게 할 수도 있다. 반면,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계속 파악하고 있다면, 새로운 가능성들이 생겨나고 새로운 대처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삶의 흐름에서 완전히 차단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p376

 우리가 살면서 겪는 거의 모든 상황이 성장의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실명이나 신체 마비와 같은 절망적 재난들도 즐거움과 복합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 변화될 수 있다. 심지어는 다가오는 죽음마저도 절망을 주기보다는 의식 속의 조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처럼 되기 위해서는 예기치 않은 기회를 파악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유전적 소인과 사회적 조건화에 의해 형성된 관습적 상례에 너무도 젖어 있어서, 어떠한 다른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는 전적으로 유전적 소인과 사회적 통념만을 따르며 사는 것도 괜찮다. 그러나 생물학적 · 사회적 목표들에 차질이 생기게 되면 - 이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 자신을 위한 새로운 플로우 활동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적 갈등을 겪느라 모든 에너지가 낭비되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이러한 대체적 전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답은 기본적으로 간단하다. 자의식 없는 자신감을 갖고 주변 환경에 대해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그 안에서 융통성 있게 대처하면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찾는 과정은, 예술가가 독창적인 작품을 창장하려 애쓰는 과정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독창성이 결여된 화가는 무엇을 그릴 것인지 마음을 미리 정한 후 끝까지 본래의 의도대로 작품을 완성시킨다. 반면, 창의성이 풍부한 화가는 같은 기술적 수준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마음속 깊이 느낌은 있지만 아직 확정되지 않은 목표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캔버스에 나타나는 예기치 않은 색과 형태에 따라 그림을 계속 수정해 나가 결국 애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창작품을 탄생 시키는 것이다. 만일 화가가 자신의 내적 감정을 잘 살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며, 캔버스 위의 변화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좋은 작품이 나오기 마련이다. 반면, 완성된 그림이 어떠해야 한다고 미리 생각해 둔 고정 관념에만 집착하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형태가 제시하는 여러 가능성들을 무시해 버리는 화가의 그림은 진부한 작품이 되고 만다.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가에 관한 선입견을 가지고 시작한다. 여기에는 생존을 위해 우리의 유전자 속에 내재된 욕구들(음식과 안락함, 성에 대한 욕구 및 다른 동물들보다 우위를 점하려는 욕구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우리의 특정한 문화가 우리에게 주입한 욕구들(날씬하고, 부자이며, 교육을 많이 받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욕구들)도 있다. 우리가 이러한 목표들을 채택하고 또 운이 좋다면, 우리가 사는 시대와 장소에서 이상적이라 여겨지는 육체적 · 사회적 이미지를 복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것이 우리의 심리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는 길인가?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러한 목표들은 달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캔버스에 나타나는 상황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고 살피는 화가처럼,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언제나 관심을 기울이며, 그러한 사건들을 선입견에 좌우되지 않고 감정이 느끼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다른 가능성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자아 성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게 되면 우리에게 이제까지 주입되어 온 생각들은 크게 달라진다. 이를테며, 어떤 사람을 때려주는 것보다는 그 사람을 돕는 것이 더 만족을 주며, 회사 사장과 골프를 치는 것보다 두살박이 꼬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p379

 '자기 목적적 자아'의 소유자는 위협의 소지가 되는 요인들을 즐거운 도전으로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쉽사리 권태를 느끼지 않고 좀처럼 근심 걱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또 주변의 상황에 늘 깨어 있으면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플로우를 경험한다. '자기 목적적 자아'라는 용어는 글자 그대로 '스스로 만들어 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자아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목표들을 상대적으로 덜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물학적 욕구와 사회적 통념에 의해 형성되어지므로, 자기 자아에서 발현된 목표들이 아닌 것이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엔트로피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경험을 플로우로 변화시킨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개발할 수 있는 규칙들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 규칙들은 플로우 모델에서 직접 도출된 것들로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1. 목표를 설정하기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으려면 노력의 대상이 될 분명하고 혁신적인 목표들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결혼을 하거나 작업을 정하는 등 일생 동안의 책임을 수반하는 선택에서부터, 주말 계획을 세운다거나 치과에서 진료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지와 같은 사소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안달하거나 당황함이 없이 선택을 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목표의 설정은 어떤 것을 도전으로 인식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만일 내가 테니스를 배우기로 결정을 한다면, 서브하는 법과 백핸드 및 포어핸드 사용법을 배워야 하며 지구력과 반사 능력을 키워야 한다. 혹은 그 반대로, 공을 쳐서 넘기는 것 자체가 좋아서 테니스를 배워야겠다는 목표를 세울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목표와 도전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목표와 도전을 달성하기 위한 일련의 행동 체계가 규정되면, 그 체계안에서 필요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내가 만일 현재의 직업을 그만두고 휴양지의 경영자가 되기로 결정한다면, 호텔 경영 · 재정 관리 · 상업적 위치 선정 등 여러 가지를 배워야 한다. 물론 역순으로 일이 시작될 수도 있다. 자신이 어떠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그러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특정한 목표를 세울 수도 있다. 즉 본인 스스로 적합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여 휴양지 경영인이 되기로 결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피드백을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유능한 휴양지 경영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업 자금을 대여해 줄 가능성이 있는 금융인들이 내가 제출한 사업 계획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고객이 좋아하는 것들은 무엇이며, 또 그들이 싫어하는 것들은 무엇인지도 알아야만 한다. 피드백에 지속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곧 행동 체계로부터 이탈되어 더 이상 기술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유능한 경영인이 되기 어렵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든 그 목표를 선택한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는 바로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기본적인 차이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 같은 사실은 서로 상반되는 듯이 보이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한다. 그 하나는,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는 점을 주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에 더욱 충실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람의 행동은 믿을 수 있으며, 스스로 통제된다. 또 다른 하나는, 결국 자신의 결정이기 때문에 그 결정 사항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 이상 이치에 만지 않을 때는 언제고 자신의 목표를 수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 목적적인 사람의 행동은 더욱 꾸준하기도 한 동시에 더욱 많은 융통성도 가질 수 있다.

 

2. 활동에 몰입하기

 일련의 행동 양식을 선택하고 나면 자기 목적적 성격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깊이 몰입한다. 전 세계를 무착륙으로 비행하든, 아니면 저녁식사 후 설거지를 하든지 간에 현재 하고 있는 눈앞의 일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행동의 기회들과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간의 균형을 잘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를 구한다든지, 혹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백만장자가 된다는 것과 같은 현실적이지 못한 기대를 갖고 시작을 한다. 이러한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담을 하고, 헛된 시도로 인한 심리 에너지의 손실 때문에 그들의 자아는 위축된다. 또 다른 극단으로, 자신에게 잠재된 능력을 스스로 믿지 않아서 침체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안전은 하지만 사소한 목적을 선택하여, 최대한 가장 낮은 수준에서 복합성의 성장을 중지시키고 만다. 행도에 몰입할 수 있으려면 환경의 요구와 자신의 활동 능력간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사람들로 가득 찬 방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사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을 했다고 치자. 만일 자기 목적적 자아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는 혼자서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시작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여, 구석으로 가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주목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또는 떠들썩하게 행동하거나 지나치게 말솜씨가 좋은 척하여, 결국 이 같은 부적절하고 피상적인 친근감으로 인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런 두 전략을 가지고는 성공을 한다거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반면에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그 방에 들어서자마자 주의를 자신으로부터 파티, 즉 자신이 가담하고 싶은 '행동 체계'로 돌릴 것이다. 그는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관찰하여 그들 중 자기와 공통적인 관심사를 갖고 있으며 성격 또한 비슷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려내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쌍방 모두가 관심이 있을 듯한 주제로 그 사람과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만약 피드백이 부정적이라면, 즉 대화가 지루해지거나 어느 한 사람에게 너무 어려워 이해가 되지 않는 주제라면 다른 주제를 택하거나 새로운 대상과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행동 체계의 기회와 걸맞을 때만이 진정한 몰입이 가능하다.

 몰입은 집중력에 의해 크게 촉진된다. 주의력 결핍 증세가 있는 사람이나, 끊임없이 주의가 산만한 사람은 인생의 플로우에서 언제나 제외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들은 매순간의 일과성 자극에 큰 영향을 받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려지는 것은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주의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만일 책을 읽는 것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면, 우리는 집중력을 높이려 하는 대신 습관적으로 텔레비젼을 틀게 마련이다. 그러나 텔레비전 시청에는 최소한의 주의력만 있으면 된다. 더군다나 사실상 그 얄팍한 주의력조차 광고와 알맹이 없는 내용에 의해 분산되고 만다.

 

 3. 주변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기

 집중을 하면 몰입을 하게 되며, 이와 같은 몰입은 지속적인 주의력 투입이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육상 선수들은 경기 도중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시합에 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량급 권투 선수가 상대방의 어퍼컷이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녹아웃되고 말 것이다. 또한 농구선수가 관중들의 함성에 정신이 팔린다면 정확히 슛을 하지 못할 것이다. 복합성의 체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이와 똑같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 체계 속에 계속 남아 있으려면 심리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자녀의 말을 집중해서 들어주지 않는 부모는 부모와 자식간의 상호 작용을 저해시킬 수 있고, 주의가 산만한 변호사는 소송에서 패소할 수 있으며, 한눈을 파는 외과 의사는 환자를 죽음으로 몰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몰입을 지속할 능력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장 흔하게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자의식도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해 걱정을 하는 대신 온 마음으로 자신의 목표에 전념할 수 있다. 너무 깊이 몰입을 한 나머니 자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와는 반대로 자의식이 별로 없기에 깊은 몰입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자기 목적적 성격의 구성 요소는 상호 인과 관계의 고리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목표 선정, 기술 개발, 집중력의 향상 혹은 자의식을 없애는 일 가운데 어떤 것을 먼저 선택해 시작을 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플로우 경험이 일단 시작되면 다른 요소들도 취득하기가 훨씬 용이해지므로 어느 것을 먼저 시작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상호 작용에 주의를 집중하는 사람은 역설적인 결과를 얻는다. 더 이상 자신을 독립된 개체로 느끼지 않지만, 동시에 그 사람의 자아가 한층 강화되는 것이다. 자기 목적적인 사람은 심리 에너지를 자신이 포함된 체계에 투자함으로써 개인의 한계를 벗어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이와 같은 개인과 체계간의 결합으로 인해 자아가 복합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잃는 편이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 견해에서 파악하는 사람의 자아가 좀더 확고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는 기꺼이 헌신을 하고 몰입을 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작용을 위해서 주변의 상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의 자아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카고 시청 건너편의 광장에서 열렸던 피카소의 거대한 야외 조각 작품 제막식에서 나는 우연히 옆에 서게 된 개인 상해 전문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기념 연설이 장황히 지속되고 있을 때, 나는 그가 무엇인가에 집중을 한 표적으로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고 묻자, 만일 아이들이 저 조각 작품에 기어오르려다 다치게 되어 소송을 건다면 시카고시가 지불해야 할 소송 비용을 추산해 보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였다.

 모든 것을 자신의 기술이 해결할 수 있는 직업적 문제로 변화시켜 지속적인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이 변호사를 과연 운이 좋은 사람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일들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그 행사의 심미적 · 시민적 · 사회적 의미를 무시함으로써 스스로 성장의 기회를 박탈하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인가? 두가지 해석 모두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세상을 전적으로 자신의 자아가 감당할 수 있는 협소한 창으로 파악하는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게 된다. 명성이 높은 정신과 의사나 미술가 혹은 정치가들조차도, 유일한 관심사가 이 우주 속에서 자신이 맡은 제한적 역할에만 국한될 때는 공허한 존재가 되어 더 이상 삶을 즐길 수 없는 것이다.

 

4. 지금 현재의 경험 즐기는 법 배우기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갖춤으로 해서 - 목표를 설정하는 법을 배우고, 기술을 개발하고, 피드백에 늘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하고 몰입하는 법을 체득함으로써 - 얻을 수 있는 결과는, 객관적 상황이 몹시 좋지 않을 때도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어떤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 일이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몹시 더운 날 시원한 산들바람을 느끼는 것, 고층 건물의 유리벽에 반사되는 구름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 강아지와 노는 아이를 보는 것, 물 한잔을 마시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이 깊은 만족감을 주는 경험이 되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력을 얻기 위해서는 결의와 훈련이 전제되어야 한다. 최적 경험은 향락적이거나 안일한 삶의 자세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긴장이 풀린 자유 방임적 태도로 혼란에 대한 충분한 방어가 되지 못한다. 이 책의 초반부에서부터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읨의적 사건들을 플로우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능력을 신장시키고, 한결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는 기술을 닦아야만 한다.

 플로우는 각 개인이 창의적이고 뛰어난 성취를 이루도록 해준다.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 고도의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필연성이 있었기에 문화적 진보도 가능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필연성으로 인해 각 개인과 문화들이 한층 더 복합적인 존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경험의 질서를 창조해 냄으로써 얻는 보상이 진화를 촉진시키는 추진력이 되어 왔으며,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우리들보다 더 현명하고 복합적인 삶을 사는 우리의 후손들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모든 생활을 플로우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단지 매순간의 의식 상태를 통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일상의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각 목표들의 전후 관계를 파악하는 일 역시 필요한 것이다. 만일 서로 연결되는 질서가 없이 이 플로우에서 저 플로우로 옮겨 다닌다면, 훗날 인생을 정리하는 시기를 맞아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자신의 과거에서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일에서 조화를 창조하는 것이 최적 경험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플로우 이론이 제시하는 마지막 과제이다. 이는 지속적인 목적 의식을 제공해 주는 통합된 목표들을 추구해 가면서, 삶 전체를 하나의 플로우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10장. 의미 창조하기(The Making of Meaning)

 

p392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일생 동안 심리 에너지의 질서를 창조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한 흥미를 돋우는 것이라면 그 궁극적 목표가 무엇이 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도전의 목표는 천차만별이다. 주위에서 가장 훌륭한 맥주병들을 수집하여 소장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암 치료법을 발견하려는 결의일 수도 있으며, 혹은 살아남아 훌륭히 성장할 자녀를 두는 생물학적인 의무와 관련된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목적과 분명한 행동 규칙 그리고 집중하여 몰입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는 한, 어떤 목표가 되든 한 개인의 삶에 의미를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전기 기술자, 비행기 조정사, 사업가, 교사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그 외 아랍 산유국들 출신의 몇몇 회교도들과 잘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한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 대부분이 느긋한 자세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하자 그들은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변을 했다.

 "별거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의 삶이 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케 동요하지 않습니다. 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그것을 그저 받아들일 뿐이랍니다."

 우리 문화에도 이와 같은 무조건적 신앙이 널리 퍼져 있던 때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이런 신앙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우리는 전통적 신앙의 도움이 없이 인생에 의미를 줄 목표를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p394

 플로우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시합에서 승리하는 것, 어떤 사람과 사귀는 것, 어떤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성취하는 것 등과 같은 자신의 행동 목표가 설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대체로 목표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목표가 그 사람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성취 가능하며 즐거운 활동에 몰입하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이처럼 전 생애에 걸쳐서 자신의 심리 에너지를 뚜렷하게 집중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각 플로우 활동의 서로 다른 목표들이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일련의 도전 목표들로 통합되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목표 지향성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들은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 나폴레옹은 기꺼이 수십만 명의 프랑스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오로지 권력 추구에 전 생애를 바쳤다. 테레사 수녀는 신앙에 바탕을 둔 무조건적인 사랑에 삶의 목적을 두고 곤공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투자했다.

 순수한 심리학적 견지에서 본다면, 나폴레옹이나 테레사 수녀 모두 같은 수준의 내적 목적 의식을 갖고 같은 수준의 최적 경험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갖는 명백한 차이점은 한층 더 광범위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해 준다. 즉 당사자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던 이들 두 방식으로 초래된 결과가 무엇이었나 하는 점이다. 나폴레이옹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반면, 테레사 수녀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엔트로피를 감소시켰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행동의 객관적 가치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기로 한다. 그 대신 통일된 목적이 개인의 의식에 가져달 줄 수 있는 주관적 질서를 설명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도록 하자. 이런 뜻에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놀라우리만큼 간단한 것이다. 즉 삶의 의미란 바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디에서 오는 것이든 통합된 하나의 목적이 바로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다.

 

 

 

 여러 목표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주는 목적을 찾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목적을 끝까지 달성해야 하며 그에 따르는 어려움들을 극복해 내야 한다. 목적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의도한 바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러한 것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결의(resolution)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사람이 처음 설정한 목표를 실지로 달성했는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충분한 노력을 경주하면서 노력을 분산하거나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창백한 사고의 그늘에 가리워 결의가 가졌던 본래의 색조가 변하면, 우리의 중요한 진취적 기상은 행동이라는 이름을 잃게 된다"라고 햄릿은 말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으나 그것을 하기 위해 충분한 에너지를 집중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슬픈 일도 드물다. 블레이크는 예의 그 힘찬 필치로 다음과 같이 썼다.

 "바라기는 하되 행동하지 않는 자는 해악을 낳는다."

 

p397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줄 만한 궁극적 목적을 찾기 위한 시도가 수없이 많이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시도의 종류도 다양했다. 예를 들어 사회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는 남자들이 영웅적인 행위를 통하여 불후의 명성을 얻으려 했다. 아렌트는 궁극적 목적이란 죽음에 관한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죽음 이후에까지 연장될 수 있는 어떠한 목적의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후의 명성이나 영생 모두 이 점을 해결해 주시만, 그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스 시대 영웅들은 자신의 용맹스러운 행위가 노래와 전설로 대대손손 전해질 것을 기대하며 동료들의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는 숭고한 행위를 하였다. 그렇게 되면 후손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자들은 후일 신의 곁에서 영원히 살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가 신의 의지에 부합할 수 있도록 스스로 개인성(個人性)을 포기했다.

 영웅이나 성자들 모두 일생에 걸쳐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하도록 해준,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목표에 모든 심리 에너지를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통일된 플로우 경험으로 변화시킨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은 성자나 영웅의 예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러한 뛰어난 모델을 본보기로 삼아 자신들의 행위를 규제함으로써 삶에 어느 정도 적절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분명 모든 인간의 문화에는 각 개인의 목표들을 정리해 줄 수 있는 망라적 목적의 역할을 하는 의미 체계가 있다. 소로킨은 서양 문명의 다양했던 시대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는데, 2,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 유형이 번갈아서 나타났으며 각 유형이 길게는 수백 년 짧게는 불과 수십 년 정도만 지속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유형들을 각각 감각주의적(sensate) · 관념주의적(ideational) · 이상주의적(idealistic) 문화의 시기라고 명명하고,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의 우선 순위들이 존재의 목적을 정당화시켜 주었음을 입증하려 했다.

 감각주의적 문화는 감각을 만족시키도록 고안된 세계관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문화들은 쾌락주의적 · 공리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으며, 주로 구체적 욕구에 중점을 둔다. 이 같은 문화에서는 예술 · 종교 · 철학 그리고 일상적인 행위들이 주로 실체적인 경험 위주의 목표들을 찬미하고 정당화시켜 준다. 소로킨에 따르면, 이러한 감각주의적 문화가 기원전 약 440~200년까지 유럽에서 우세하였으며, 기원전 420~400년 사이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19세기에도 최소한 선진 산업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감각주의적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 반드시 더 유물론적이지는 않다. 그렇지만 추상적인 원칙들보다는 주로 쾌락과 실용성에 입각해서 목표를 조직하고 행동을 정당화시킨다. 이들의 도전 목표는 전적으로 인생을 더 쉽고, 안락하며, 쾌락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들이다. 이들은 쾌감을 주는 것을 선으로 여기며 이상화된 가치들은 불신한다.

 관념주의적 문화들은 감각주의적 문화와는 상반되는 원칙에 입각하여 조직된다. 즉 실체적인 것들을 경멸하고, 정신적 · 초자연적인 목적들을 위해서 노력한다. 이러한 문화들은 추상적인 원칙들과 금욕주의 그리고 물질저인 관심으로부터의 초월을 강조한다. 예술 · 종교 · 철학 그리고 일상적 행위의 정당화는 이러한 정신적 질서의 구현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종교나 관념에 관심을 두며 삶을 더욱 쉽게 하려는 목적보다는 내면 세계의 명료함과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 도전이 목표를 설정한다. 기원전 600~500년까지 그리스와 기원전 200~서기 40년에 이르는 서유럽에서 이 같은 세계관이 절정을 이루었다고 소로킨은 말한다. 좀더 최근의 유감스러운 예로는, 자치 독일 · 공산 러시아 · 중국 그리고 이란에서의 회교 세력 부활 등을 들 수 있다.

 간단한 예로 감각주의적 문화와 관념주의적 문화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파시스트적 사회는 물론이고 우리의 사회에서도 신체적 건강이 중시되며 인간의 육체적 아름다움이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이유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의 감각주의적 문화에서는 건강과 쾌락을 위하여 육체를 가꾼다. 관념주의적 문화에서 육체가 중시되는 주된 이유는, '아리안 인종의 우월성' 혹은 '로마인의 용기'와 같은 관념과 관련된 형이상학적 완전성이라는 추상적 원칙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감각주의적 문화에서는 잘생긴 젊은이의 포스터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성적 반응을 유발시킨다. 반면, 관념주의적 문화에서는 똑같은 포스터가 이념적인 성명서가 되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시대의 어느 민족도 다른 관점은 배제하고 위에서 소개된 경험을 정리하는 두 관점에만 입각하여 목적을 설정하지는 않았다. 다양한 하위 유형들 및 감각주의적 관점과 관념주의적 관점이 복합된 세계관이 같은 문화 안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한 사람의 의식 속에서도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피적 생활 양식은 주로 감각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것이며, 미국 남부의 신앙이 두터운 바이블 벨트 지역의 근본주의는 관념주의적 전제에 기초를 둔 것이다. 위의 두 형태는 서로 많은 차이점을 보임에도 불고하고 현재 미국 사회 체제 내에서 다소 거북하게나마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목표 체계로서 기능을 하는 위의 두 방식 모두 삶을 조직화하여 하나의 일관된 플로우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데 각각 기여하고 있다.

 문화뿐만 아니라 각 개인들도 역시 이와 같은 의미 체계를 행동으로 구현한다. 기업가다운 확고한 도전 목표들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왔던 아이아코카나 로스 페로와 같은 유수 기업인들은 종종 감각주의적 삶의 특징들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보다 더 초보적인 감각주의적 세계관을 잘 보여 준 사람은 휴 헤프너로서, 그의 '플레이보이 철학'은 단순한 쾌락 추구의 극명한 예가 된다. 신의 섭리에 대한 맹목적 신앙과 같은 단순하고도 초월적인 해결책을 주창하는 공상가나 신비주의자들은 무분별한 관념주의적 접근의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다른 변형된 형태들도 많다. 베이커 부부나 지미 스와거트와 같이 텔레비전을 통해 설교를 하던 복음 전도자들은, 시청자들에게는 공공연히 관념주의적 목표들을 중시하라고 권고하면서 실제 그들은 사치와 감각적 쾌락에 젖은 생활을 했다.

 때로는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위의 두 원칙들을, 양자의 장점은 모두 유지하면서도 각각의 단점들은 최소화시켜 설득력 있는 하나의 통일체로 통합하는 문화들도 있다. 소로킨은 이 같은 문화들을 '이상주의적' 문화라 명명한다. 이러한 문화는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을 수용하면서도 정신적 측면에 대한 경외도 가지고 있다. 소로킨의 분류에 따르면, 서유럽에서는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시대가 비교적 가장 이상주의적 문화를 이루었던 시기이며, 14세기 처음 20년 동안이 그 절정기였다고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흔히 순수한 유물사관의 부작용인 무기력함과 많은 관념주의적 체제들의 폐해라 할 수 있는 지나친 금욕주의를 피할 수 있는 이상주의적 해결책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문화를 단순히 삼분하여 해석하는 소로킨의 분류법은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궁극적 목적을 설정할 때 기준이 되는 일부 원칙들을 설명하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 구체적 도전 목표들에 대응해 나가며 대체로 물질적 목적을 지향하는 플로우 활동을 중심으로 삶의 형태가 이루어지는 감각주의적 삶의 양식은 언제나 인기가 높다. 이 양식이 갖는 장점의 하나는 모든 사람이 규칙을 이해할 수 있으며 피드백이 비교적 명확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건강 · 금전 · 권력 · 성적 만족을 바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관념주의적 양식 또한 나름대로의 장점들을 갖고 있다. 형이상학적 목표들의 성취가 불가능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렇다고 성취에 실패했다는 것도 결코 입증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진정으로 관념주의적 가치를 신봉하는 사람은 언제나 피드백을 왜곡해서 결국 자신이 옳았으며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 중의 하나임을 증명하는 데 이용한다.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플로우 활동으로 삶을 통합할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방법은 아마도 이상주의적 양식일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정신적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도전 목표들을 설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문화의 전반적 성격이 감각주의인 경우에는 그 어려움이 커지게 마련이다.

 각 개인의 행동 양식을 어떻게 설정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이들이 스스로를 위해 세운 도전 목표의 내용보다는 복합성의 정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유물론적인가 혹은 이상주의적이가 하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그런 분야에서 추구하는 목표들이 얼마나 분화되어 있으며 또 통합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복합성이란 어떤 체제가 나름대로의 장점과 잠재 능력을 얼마나 잘 개발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장점들의 상호 연계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충분히 숙고한 후 결정한 감각주의적 삶의 자세, 즉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인간의 경험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자세가 무분별한 관념주의나 감각주의보다 바람직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p403

 앞의 설명에서, 복합적인 의미 체계의 구축은 관심을 자아와 타인에게 번갈아 집중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이즌 것 같다. 첫 번째는, 심리 에너지를 생물학적 욕구에 투자하는 단계로, 이 단계에서 정신적 질서는 곧 쾌락에 해당한다. 이러한 수준에서 잠정적으로 도달하게 되면 지역 사회의 목표들에 관심을 투자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집단적 가치를 반영한 의미 있는 것들 - 즉 종교와 애국심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과 존경 등 - 이 내적 질서의 변수가 된다. 다음의 변증법적 단계에서는 관심이 다시 자아로 이동을 한다. 더욱 광범위한 큰 인간 체제에서 소속감을 성취했으므로 이제는 개인적 잠재력의 한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자아의 실현을 위한 시도들로 이어지며, 이때 각기 다른 기술과 사상 그리고 원칙들을 시험해 보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쾌락(pleasure)보다는 즐거움(enjoyment)이 주된 보상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이는 끊임없는 추구의 단계이므로, 한편으로는 중년의 위기, 직업의 변화 그리고 개인적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등에 의해 점증하는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시점부터는 에너지의 방향을 마지막으로 재설정할 준비가 갖추어진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 즉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궁극적 목적이 한 개인보다는 큰 체계, 즉 명분 · 사상 · 초월적 존재 등에 통합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같은 복합성의 상승 단계를 거치는 것은 아니다. 첫 단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존 요구가 집요하게 어어질 때는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충분한 관심을 기울일 수 없으며, 가족이나 나 더 넓은 지역 사회의 목표들에 투자할 만한 심리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자신의 권익 추구만으로도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족 · 회사 · 지역 사회 혹은 국가의 안위가 주된 의미를 부여해 주게 되는 발달의 두 번째 단계에서 편안하게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반성적 개인주의의 단계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또한 그 중에서도 한정된 소수만이 보편적인 가치와의 통합을 이룬다. 이러한 단계들은 실제로 반드시 순서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운이 좋아서 의식을 성공적으로 통제하는 사람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개략적으로 소개한 네 단계는 복합성을 서서히 높여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가 생겨나게 됨을 설명하는 모델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종류에 속한다. 이 과정을 여섯 단계 혹은 심지어 여덟 단계로 나누는 모델도 있다. 몇 단계로 이루어지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이론들이 이같이 한편으로는 분화를 또 한편으로는 통합을 번갈아 이루는 변증법적인 힘의 균형 상태의 중요성을 모두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각 개인의 인생은 일련의 각기 다른 '게임'들로 이루어지는데, 이 게임들은 서로 다른 목표와 도전들로 갖추고 있으며 개인이 성숙해감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우리들이 이처럼 복합성을 높여 자율적이며, 자립적이고, 자신의 개성과 한계를 의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기술들을 더욱 연마하는 일에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개인적 한계를 능가하는 힘에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찾아내는 데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반드시 이와 같은 계획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조만간에 후회할지도 모른다.

 

p406

 그리고 이들이 이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이들이 세웠던 목표들이 원래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는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실제로 보람과 가치가 있는 일들이 되었다. 또한 이들 청교도들의 목표가 헌신을 통해 소중한 것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들의 생애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었다.

 어떠한 목표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각 목표에는 일련의 결과들이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각자가 이러한 결과를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목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오르기 어려운 봉우리를 정복하려고 결심한 등반가는 자신이 등반을 하는 동안 내내 지칠 것이며 어려움에 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너무도 쉽게 포기를 해버린다면 그의 추구는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모든 플로우 경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목표와 그 목표를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에는 밀접한 상호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목표들이 그 목표를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을 정당화해 주지만, 나중에는 바로 그러한 노력들이 목표를 정당화해 준다.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까닭은 배우자를 자신과 평생을 함께 보낼 만한 사람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 후 이 판단이 옳았던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부부 관계는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조합해 본다면, 인류에게 자신들의 결심을 뒷받침할 만한 용기가 부족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시대의 모든 문화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희생해 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인생이 한층 더 의미 깊은 것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초지와 가축을 보전하기 위해 모든 에너ㅓ지를 바쳐 왔을 것이다. 종교와 국가 혹은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통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인생 전체를 하나의 연장된 플로우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즉 이들의 삶은 중심이 확실하고, 집중이 되고, 내적 일관성이 있으며, 논리적으로 정연한 일련의 경험들의 연속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들의 내적 질서로 인해 각자가 삶을 의미 깊고 즐겁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p411

 행동과 관조는 서로 보완하고 지지해 주어야 이상적이다. 행동 그 자체는 맹목적이며 관조는 무기력하다. 어떤 목적에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기 전에 근본적인 의구심을 가져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이것이 과연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하는 일인가? 이 일을 하면서 나는 즐거운가? 앞으로도 이 일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 나와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추구할 가치가 있는 목적인가? 이 목적을 달성하고 난 후의 내 자신에게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p414

 동물들이 인간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목적들이 좌절될 때이다. 그들은 굶주림과 고통 그리고 충족되지 않은 성적 욕구가 주는 괴로움을 느낀다. 인간의 친구가 되도록 길러진 개들은 주인과 떨어져 혼자 있게 되면 불안해한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야기시킬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그들은 모든 욕구가 충족되고 난 후에도 혼란과 절망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진화되어 있지 않다. 외적 요인으로 인한 갈등이 해결되면, 동물들은 자기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게 되어 우리 인간들이 플로우라고 부르는 완전한 몰입의 상태를 경험한다.

 인간에게만 독특하게 있는 심리의 엔트로피는 자신이 실지로 성최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들을 바라고, 여건이 허락하는 것 이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처럼 느끼는 데서 오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한 번에 하나 이상의 목표들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서로 상충되는 욕구들을 동시에 의식할 때만 이러한 상태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우리의 정신이 현재의 상태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대안이 있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까지도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체계가 복합적일수록 대안의 여지가 많아져서 그만큼 체계 안에서 잘못되어지는 일도 많다. 인간 정신의 진화도 이에 해당되는 경우이다. 인간 정신의 정보 처리 능력이 증대됨에 따라 내적 갈등의 가능성도 그만큼 증가되어 왔다. 욕구와 삶의 선택 사항들과 도전들이 너무 많아지면 우리는 불안해지며, 또 너무 적어지면 지루함을 느낀다.

 

p417

 

 단순한 의식이 아무리 조화로운 것이라 해도 복합적 의식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지의 평온함,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원시 종족들의 자세, 그리고 현재의 일에만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아이들의 단순함에 경탄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곤경을 해결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 단순하고 순진함에 기초한 질서는 이미 우리의 손을 떠났다. 이미 선악과를 딴 이상 우리는 영원히 에덴 동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p419

 두 개념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즉 자신이 발견한 인생의 주제가 있는 사람은 개인적 경험과 선택에 대한 인식에 입각해 자신의 행동을 위한 대본을 직접 쓰는 사람이며, 받아들인 인생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오래전에 이미 작성해 놓았던 대본에 미리 규정되어 있는 역할을 그저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러한 두 종류의 인생 주제들 모두 인생에 의미를 주기는 하지만 각각 그 나름대로의 단점을 가지고 있다. 사회 체계가 안정되어 있다면 수용한 인생의 주제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여건이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이러한 주제들이 사람을 편협한 목적 속에 가두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냉정하게 수만 명의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냈던 나치당원 아이히만은 관료주의적 규칙을 신성시했던 사람이다. 복잡한 열차 운행표를 뒤적이면서, 수량이 부족한 열차를 필요할 때 꼭 사용할 수 있도록 조처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많은 유태인들을 수송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면서 그는 아마도 플로우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구심을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듯하다. 명령을 따르는 동안에 그의 의식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게 인생의 의미란, 강력하고 조직화된 기관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평화롭게 질서가 잘 유지되는 시대였다면 아이히만 같은 사람은 존경받는 사회적 지주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것과 같은 인생의 주제는, 부도덕하고 정신착란 상태인 사람들이 사회의 통제권을 쥐게 될 때 그 취약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와 같은 강직한 시민이 자신의 목적을 바꿀 필요도 없이, 또 자신이 하는 행위의 비인간성을 깨닫지도 못한 채 범죄의 공범이 되는 것이다.

 '발견한 인생 주제'의 취약성은 다른 곳에 있다. 이러한 인생의 주제는 인생의 목적을 찾고자 하는 개인적 투쟁의 산물이므로 사회적 정통성이 결여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새롭고 특이한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무모하다거나 파괴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도 많다. 가장 강력한 인생의 주제들 중에는 오래된 인간의 목적에 기초한 것들도 있지만 개인별로 이를 다시 새롭게 발견하고 자유롭게 선택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린 시절 말콤 엑스는 빈민가 젊은이들의 행동 양식을 고스란히 본받고 자라 싸움을 일삼고 마약 거래에도 손을 댔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독서와 명상을 통해 존엄과 자긍심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또 다른 일련의 목적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앞 시대의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성취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마약 업자와 포주가 걷는 길을 계속 답습하는 대신, 그는 흑백을 막론한 다른 많은 주변인들의 삶에 질서를 찾아주는 매우 복합적인 높은 목적을 창안해 냈다.

 

p427

이러한 사람들과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어서 언급하기조차 무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어서 언급하기조차 무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간과되어 온 게 사실이다. 특히 요즈음은 더욱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한 번 살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전략이란, 옛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 속에서 자신의 마음속의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것들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는 이러한 용도로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많은 지식, 다시 말해 잘 정돈된 정보들이 축적되어 있다. 누구나 위대한 음악 · 건축 · 미술 · 시 · 연극 · 무용 · 철학 · 종교 등을 통해서 혼돈 속에서 조화를 창조해 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들을 간과해 버리고는, 자신들만의 기제로 살믜 의미를 창조해 내고자 한다.

 혼자서 해보겠다는 것은 마치 각 세대마다 맨 처음부터 물질 문화의 구축을 다시 시작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바퀴 · 불 · 전기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인간의 환경의 일부로 당연시하는 수많은 물체와 과정들을 다시 발명라혀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선생님이나 책 그리고 모델등을 통해 배움으로써 과거의 지식으로부터 혜택을 받고, 결국은 그것을 능가하게 된다. 조상들이 축적해 놓은 삶에 대한 지식을 버린다거나 혼자서 실행 가능한 일련의 목표들을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일은 잘못된 오만이다. 이러한 일에 성공할 가능성이란, 물리학적 지식과 도구 없이 전자 현미경을 발견하려고 할 때만큼이나 희박한 것이다.

 성인이 되어 일관성 있는 인생의 주제를 발견한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책을 읽어주던 일을 회상하곤 한다. 자신이 신뢰하는 애정 깊은 어른들로부터 동화나 성서 이야기, 역사적 영웅들의 무용담, 실감나는 가족사 등을 들으면서, 아이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번도 어떤 목표에 집중해 보지 않았거나 혹은 주변 사회의 목적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던 사람은, 어린 시절 부모님이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들려준 기억이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토요일 아침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아이들 대상의 무의미한 감각주의적 쇼는 위와 같은 목적을 결코 달성할 수 없다.

 각자의 성장 배경이 어떤 것이든 과거로부터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기회는 인생을 살면서 얼마든지 있다. 복합성을 가진 인생의 주제를 발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몹시 존경하여 귀감으로 삼았던 연장자나 역사적 인물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또한 책을 통해서 새로운 행동의 기회들을 찾아냈던 일들을 기억한다. 예를 들어, 고결한 인품으로 널리 존경을 받는 당대의 한 유명한 사회과학자는 십대 시절에, 『두 도시의 이야기』를 읽으며 디킨스가 묘사한 사회적 · 정치적 혼란상 - 그의 부모가 일차대전 후 유럽에서 겪은 바와 같은 혼란상 - 에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평생을 왜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가를 이해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가혹한 고아원에서 자라난 다른 어떤 소년은 호레이쇼 엘저의 이야기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가난하고 외로운 소년이 열심히 일도 하고, 약간의 운도 따른 덕에 인생에서 성공한다는 이야기였다. 소년은 이 이야기를 일고, "그도 할 수 있었는데,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 소년은 은퇴한 은행가가 되었는데, 자선 사업가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다. 플라톤의 『대화론』의 논리적 질서, 혹은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용감한 행위에 감명을 받아 영원히 변모하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다.

 문학에는 행동, 귀감이 되는 목적 그리고 의미 깊은 목적을 푯대 삼아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에 관한 정보들이 정리되어 담겨 있다. 삶의 무질서함에 직면해 본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유사한 문제를 겪었으며 결국 그러한 난관들을 극복해 냈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을 되찾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문학의 예일 뿐인데, 음악 · 미술 · 철학 그리고 종교는 또 어떠하겠는가?

 

p430

 마침내 무엇인가 색다른 것을 시도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단테의 『신곡』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세미나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한 6백 년도 넘은 이 단테의 운문이 중년의 위기와 그 해결책에 관해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서술이기 때문이다. 단테는 그의 몹시 길고도 풍부한 이 시의 첫 행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인생의 여정 한 가운데서, 나는 어두운 숲 속에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옳은 길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중년기에 겪게 되는 어려움들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적절히 묘사한 흥미로운 내용이 계속 이어진다.

 우선, 길을 잃어 어두운 숲 속으로 접어들게 된 단테는 세 마리의 사나운 짐승들이 입맛을 다시며 자신을 몰래 뒤쫓아 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짐승들은 사자 · 시라소니 · 늑대였는데, 이들은 각각 야망 · 육욕 · 탐욕을 상징한다. 1988년의 베스트셀러였던 톰 울프의 작품 『허영의 불꽃』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뉴욕의 한 중년 주식 거래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테의 적들은 권력과 성 그리고 돈에 대한 갈망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로부터 해를 입지 않기 위해 단체는 언덕으로 피신하려 한다. 그러나 그 짐승들은 계속 더 가까이 다가오고, 절박한 나머지 단체는 신의 도움을 요청한다. 환영을 통해 그는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 그 환영은 버질(Virgil)의 유령이었는데, 그는 단테가 태어나기 약 천 년 전에 죽은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으나, 단테가 그의 현명하고 웅장한 시를 너무도 흠모한 나머지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어두운 숲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희소식을 전하며 버질은 단테를 안심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 길은 지옥을 통과하는 길이라는 좋지 못한 소식도 더불어 전한다. 그들은 서서히 지옥을 통과해 나가면서, 목적을 한 번도 설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본다. 또 인생의 목적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이었던 소위 '죄인들'의 더욱 혹심한 운명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시간에 쫓기는 기업의 중역들이 이처럼 해묵은 우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다소 염려스러웠다. 그들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음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기우였다. 신곡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부터, 중년의 위기와 중년 이후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여러 선택들에 관해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마음을 열고 진지한 토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참석자들 중 몇 사람이 사석에서, 단테의 시로 세미나를 시작하는 것이 매우 좋은 생각이었다고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단테의 시는 세미나의 주제를 너무도 명료하게 조명해 주어서 나중에 그 주제에 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기가 훨씬 용이했던 것이다.

 단테는 또 다른 이유에서도 하나의 중요한 본보기가 된다. 그의 시는 깊은 종교적 윤리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읽는 사람 누구나 단테의 기독교 신앙이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발견한' 신앙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창조한 종교적 인생 주제는 최상의 기독교적 통찰과 최상의 그리스 철학 그리고 유럽으로 전해진 회교적 지혜의 총합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신곡』의 지옥편에는 영원한 저주로 고통받는 교황 · 추기경 · 사제들이 매우 많이 등장한다. 그의 첫 번째 안내자인 버질조차도 기독교 성자가 아닌 이교도 시인이었다. 단테는 영적인 질서 체계가 조직화된 교회와 같은 세속적 구조에 좌우되면 엔트로피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앙 체계로부터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 체계 속에 담겨 있는 정보를 자신의 구체적 경험과 비교하여 사리에 맞는 부분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거부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위대한 종교의 영적 통찰력에 기초한 내적 질서를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신문지상에서 접하는 주식시장의 부도덕성, 군수 산업체들의 부패, 원칙이 결여된 정치계의 소식들에도 불구하고 그와 대조되는 예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의미 있는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믿고, 일정한 시간을 할애해 병원을 찾아가 죽어 가는 환자들과 함께 있어 주는 성공한 기업인들도 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힘과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으며, 자신만의 의미 있는 신앙 체계를 통해 강력한 플로우 경험을 위한 목적과 규칙들을 얻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통적 종교들이나 신념 체계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되어지고 세속화된 교리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오류를 용납하지 않는 어떤 교리 덕분에 진리도 함께 거부되고 마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너무도 절박하게 어떠한 질서를 필요로 한 나머지, 결점이 있는 것일지라도 우연히 접하게 된 신념 체계에 그대로 집착하여 근본주의적 기독교인이나 회교도 혹은 공산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다음 세대에 살 우리의 자손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새로운 목표와 수단의 체계가 생겨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누군가는 기독교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혹은 아직도 공산주의가 인간 경험의 혼란상을 해결해 줄 것이며, 그 질서가 전 세계로 확산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것들이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신념이 되려면, 우리의 지식과 감정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과 두려워하는 것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어어먄 한다. 우리의 심리 에너지를 의미 있는 목표들에게로 인도해주며,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삶의 방식에 필요한 규칙들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신념 체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념 체계는 어느 한도까지는 인간과 우주에 관해 과학이 밝혀 놓은 사실들에 입각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기초가 없다면 우리의 의식은 신념과 지식 사이에서 분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도움을 주려면 과학도 변화되어야 한다. 특정한 현실적 측면을 기술하고 통제하기 위한 다양한 원칙들 외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지식을 총괄적으로 통합하여 그것을 인간과 인간의 운명에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화의 개념을 통해서 이를 성취할 수 있는 길도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떠한 힘이 우리의 삶을 결정 짓는가?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으며, 우주 전체와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우리가 하는 행위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 사항들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나아가서는 앞으로 알게 될 지식들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논의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서 전반적 과학은 물론 진화의 과학은 현재의 상태를 다루는 것이지 미래의 당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반면에, 신앙과 신념은 옳은 것과 바람직한 것들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성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진화론적 신념을 통해 현재의 사실과 미래의 당위를 좀더 밀접하게 통합시킬 수 있다. 우리가 현재의 우리를 만든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더 깊이 이해를 하고, 본능적 충동 · 사회적 통제 · 문화적 표현 등 우리의 의식의 형성에 기여한 모든 요소들의 기원에 대한 인식을 한층 넓혀 간다면, 우리의 에너지를 바람직하게 사용하는 일이 훨씬 용이해질 것이다.

 또한 진화론적 관점은 우리의 에너지를 투자할 가치가 있는 목표를 지적해 준다. 수십억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차 복합적 생명 형태가 지구상에 출현하게 되었으며, 결국은 매우 복잡한 인간의 신경 체계까지 탄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대뇌 피질의 진화로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현재 이러한 인간의 의식은 마치 대기권만큼이나 지구를 철저히 감싸고 있다. 복합화라는 현실은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의 당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일어나 왔고, 지구를 지배하는 조건들을 고려해 볼 때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진화의 미래를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 - 진화로 볼 때는 눈 깜짝할 시간에 불과하지만 - 인간의 의식의 분화에 놀라운 진보를 이룩해 왔다. 우리는 인간이 다른 생물 형태와는 구별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각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르다는 사실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또한 추상 개념과 분석 능력도 개발해 냈다. 즉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를 그 무게와 질량으로 측정하는 능력과 같이, 물체의 각 차원과 과정들을 구분 짓는 능력도 갖게 된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의식의 세분화 과정 동안 과학과 과학 기술 그리고 인간의 환경을 구축도 하고 파괴도 하는 전례 없는 능력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복합성은 분화뿐만이 아니라 통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세대에서의 인간의 임무는 개발되지 않은 정신적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환경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듯이, 이제 우리는 어렵게 얻은 우리의 개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우리 주변의 존재들과 우리 자신을 재통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미래의 가장 유망한 신념은, 우주 전체가 불문율에 의해서 서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이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꿈과 열망을 자여에 강제하려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깨달음에 기초한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의 의지의 한계를 인식하고, 우주 속에서 지배적이기보다는 협조적인 역할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마침내 고향에 돌아가게 된 유랑자의 안도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각 개인의 목적이 우주적 플로우에 융합되면서 의미를 찾는 문제도 더불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발생부터 최근의 과학혁명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의 주요한 분기점들의 주요한 내용을 통사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뼈대는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다루는 내용은 상당히 새로운 시각으로 가득하다.

 읽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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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이들 종을 단일 계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에르가스터가 에렉투스를 낳고 에렉투스가 네안데르탈을 낳고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 오리 종이 되었다는 식이다. 이런 직선 모델은 오해를 일으킨다. 어느 시기를 보든 당시 지구에 살고 있던 인류는 한 종밖에 없었으며, 모든 오래된 종들은 우리의 오래된 선조들이라는 오해 말이다. 

 

 사실은 이렇다 2백만 년 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지구에는 다양한 인간 종이 살았다. 왜 안 그랬겠는가? 오늘날에도 여우, 곰, 돼지 등 수많은 종이 동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몇만 년 전의 지구에는 적어도 여섯 종의 인간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은 옛날에 여러 종이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딱 한 종만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 사실은 우리 종의 범죄를 암시하는 것일지 모른다. 곧 살펴보겠지만, 우리 사피엔스 종에게는 사촌들에 관한 기억을 억압할 이유가 있다.

 

(개인생각)

인간이 무리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외부의 위협(공룡, 사자 등과 같은 인간보다 힘이 세고 인간들을 사냥하는 짐승과 같은)으로부터 좀 더 살아남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마치 현재의 미어캣처럼)

(주요 호모 속 연표) 인류와 침팬지의 공통 조상이 6백만 년 전, 25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호모 속이 진화하고 석기를 사용. 2백만 년 전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퍼지고, 다양한 인간 종의 진화, 50만 년 전 유럽과 중동에서 네안데르탈인 진화, 30만년 전 불의 사용, 20만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호모 사피엔스 진화, 7만년 전 인지혁명,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 역사의 시작.

 

p32

 일부 학자는 익혀 먹는 화식火食의 등장, 인간의 창자가 짧아진 것, 뇌가 커진 것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다란 창자와 커다란 뇌를 함께 유지하기는 어렵다. 둘 다 에너지를 무척 많이 소모하기 때문이다. 화식은 창자를 짧게 만들어서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게 해주었고, 의도치 않은 이런 변화 덕분에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는 커다란 뇌를 가질 수 있었다. 

 

p36

 

 이 논쟁에는 많은 것이 걸려 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7만 년 이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다. 만일 '교체이론'이 맞다면,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은 대체로 같은 유전자들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 사이의 유전적 차이는 무시해도 좋은 정도다. 하지만 '교배이론''이 맞다면, 아프리카인, 유럽인, 아시아인 사이에는 수십만 년의 연원을 둔 유전적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정치적 화약고로서, 폭발력을 지닌 인종이론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최근 몇십 년은 교체이론이 이 분야의 상식이었다. 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상대적으로 더 확고하며 정치적으로도 더 올바른 것이었다(현대 인구집단들에게 유의미한 유전적 다양성이 있다고 말하면 인종주의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2010년에 끝이 났다. 4년간의 연구 끝에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지도가 발표된 것이다. 유전학자들은 화석에서 충분한 양의 온전한 네안데르탈인 DNA를 얻어서 그것과 현대인의 DNA를 폭넓게 대조해볼 수 있었다.

 그 결과는 과학자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중동과 유럽에 거주하는 인구집단이 지닌 인간 고유의 DNA 중 1~4퍼센트가 네안데르탈인 DNA로 밝혀졌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두 번째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과학자들이 2008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한 손가락뼈에서 추출한 DNA로 유전자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 현대 멜라네시아인과 호주 원주민의 인간 고유 DNA 중 최대 6퍼센트가 데니소바인의 DNA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가 유효하다면 - 이런 결론을 강화하거나 수정할 가능성이 있는 추가 연구과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 최소한 교배이론에 뭔가 근거가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체이론이 완전히 들린 것은 아니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오늘날 우리의 게놈에 아주 작은 양만 기여했기 때문에, 사피엔스와 다른 인간 종의 합병을 이야기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들 간의 차이가 번식 가능한 성관계를 완전히 차단할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런 접촉을 매우 드물게 만들 정도이기는 했다.

 그러면 우리는 사피엔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의 생물학적 연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들이 말과 당나귀처럼 완전히 다른 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불도그와 스패니얼처럼 동일 종의 각기 다른 집단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 실체는 흑과 백이 아니다. 회색 지대들도 중요하다. 예컨대 말과 당나귀처럼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진화한 두 종이라면 다들 어느 시기에는 불도그와 스패니얼처럼 같은 종의 두 집단이었다. 그러다가 두 집단이 이미 확연히 달라진 시점, 그러면서도 드물게 서로 성관계를 해서 번식 가능한 후손을 낳을 수 있는 시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후 또 다른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최후의 연결선은 끊어졌고, 집단들은 각기 다른 진화적 경로를 밟게 되었다.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은 약 5만 년 전 이런 경계선에 섰던 것 같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종은 아니지만 대체로 별개의 종이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듯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은 유전부호나 신체 특징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인지능력, 사회적 능력에서도 차이가 났다. 하지만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번식 가능한 후손을 낳는 일이 드물게나마 여전히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 집단이 합병한 것은 아니고 일부 운 좋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사피엔스 특급에 편승한 것이었다. 우리 사피엔스가 과거 언젠가 다른 종의 동물과 성관게를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는 생각은 심란하다. 그러나 한편 짜릿하기도 하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사피엔스에 합병된 것이 아니라면 이들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가능성은 사피엔스가 이들을 멸종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상상해보자, 사피엔스의 한 무리가 발칸 반도의 어느 계곡에 도착했는데, 네안데르탈인이 이곳에서 수십만 년 전부터 살고 있었다. 새로 도착한 사피엔스들은 사슴을 사냥하고 견과류와 장과류를 채취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네안데르탈인의 주식이기도 했다.

 사피엔스는 기술과 사회적 기능이 우수한 덕분에 사냥과 채취에 더 능숙했다. 이들은 번식하고 퍼져나갔다. 이들보다 재주가 떨어지는 네안데르탈인은 먹고 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집단의 크기는 줄어들과 서서히 모두 죽어갔다. 이웃의 사피엔스 집단에 합류한 한두 명의 예외를 제외하면 말이다.

 

 또 다른 가능서도 있다.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폭력과 대량학살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관용은 사피엔스의 특징이 아니다. 현대의 경우를 보아도 사피엔스 집단은 피부색이나 언어, 종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곧잘 다른 집단을 몰살하지 않는가.

 

 원시의 사피엔스라고 해서 자신들과 전혀 다른 인간 종에게 이보다 더 관용적이었을까?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마주친 결과는 틀림없이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심각한 인종청소였을 것이다.

==> 최근의 해석은 아프리카에서 발원한 사피엔스가 10만 년 전 최초로 유럽대륙으로 진출을 하려다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월등한 신체적능력을 가진 네안데르탈인에 의해 좌절된다. 3만 년 후, 인지 혁명을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집단의 전투전략을 발전시킨 사피엔스가 다시 유럽대륙 진출을 도모하고 이때,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호모 속을 제거하면서 다른 대륙으로의 진출을 가속화시킨다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p41

 사피엔스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생태적으로 전혀 다른 오지의 서식지에 그처럼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다른 인간 종들을 망각 속으로 밀어넣었을까? 튼튼하고 머리가 좋으며 추위에 잘 견뎠던 네안데르탈인은 어째서 우리의 맹공격을 버텨내지 못했을까? 논쟁은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가장 그럴싸한 해답은 바로 이런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언어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었다.

 

p46

 인간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무엇보다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협력은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개별 남성이나 여성이 사자와 들소의 위치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보다는 무리 내의 누가 누구를 미워하는지, 누가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는지, 누가 정직하고 누가 속이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40~50명 정도의 사람들 사이에서 수시로 변해가는 관계를 저장하고 추적하는 데 필요한 정보의 양은 어마어마하다(50명으로 구성된 무리에는 1,225개의 일대일 관계가 있으며 이보다 복잡한 사회적 조합이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모든 유인원은 이런 사회적 정보에 예리한 관심을 나타내지만, 이들에게 효율적으로 소문을 공유할 수단이 부족하다. 네안데르탈인과 원시 호모 사피엔스 역시 소문을 공유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샆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획득한 능력은 이들로 하여금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주었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뒷담화이론은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가 무수히 많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의사소통의 대다수가 남 얘기다. 이메일이든 전화든 신문 칼럼이든 마찬가지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의 언어가 이런 목적으로 진화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p48

 우리 언어의 진정한 특이성은 사람이나 사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뿐이다.

 전설, 신화, 신, 종교는 인지혁명과 함께 처음 등장했다. 이전의 많은 동물과 인간 종이 "조심해! 사자야!"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인지혁명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자는 우리 종족의 수호령이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침을 먹기도 전에 불가능한 일을 여섯 가지나 믿어버릴 수 있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원숭이를 설득하여 지금 우리에게 바나나 한 개를 준다면 죽은 뒤 원숭이 천국에서 무한히 많은 바나나를 갖게 될 거라고 믿게끔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p60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상의 실재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강과 나무와 사자의 생존이 미국이나 구글 같은 가상의 실재들의 자비에 좌우될 지경이다.

 

p68

 인지혁명 이후 생물학과 역사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생물학은 호모 사피엔스의 행동과 능력의 기본 한계를 결정한다. 모든 역사는 이런 생물학적 영역의 구속 내에서 일어난다.

2. 하지만 이 영역은 극도로 넓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게임을 할 수 있다. 사피엔스는 픽션을 창조하는 능력 덕분에 점점 더 복잡한 게임을 만들었고, 이 게임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더욱 발전하고 정교해진다.

3. 결과적으로, 사피엔스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들의 행동이 역사적으로 진화해온 경로를 서술해야 한다. 우리가 생물학적 속박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면서 선수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보다는 운동장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는 라디오 아나운서와 다를 바 없다. 

 

 우리 석기시대 조상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어떤 게임을 했을까? 우리가 아는 한, 3만 년 전쯤 슈타델의 사자-남자를 조각한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육체적, 감정적,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무엇을 했을까? 아침으로는 무얼 먹었을까? 점심으로는? 그들의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일부일처제를 맺고 핵가족을 유지했을까? 전쟁은 치렀을까?

 

p81

 가끔은 자기 세력권을 벗어나 새로운 땅을 헤매는 무리들이 있었다. 원인은 자연재해, 폭력적 분쟁, 인구 증가에 의한 압박,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결단 등이었다. 이런 방랑은 인간이 외부 세계로 팽창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수렵채집인 한 무리가 40년마다 한 번씩 둘로 나뉘며, 갈라져 나온 집단이 원래 있던 곳보다 1백 킬로미터 동쪽에 있는 새로운 영토로 이주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동부 아프리카에서 중국까지 1만 년이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p85

 모든 시기 대부분의 장소에서 수렵채집은 가장 이상적인 영양소를 제공했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이런 식단을 수십만 년 동안 먹어왔고, 신체 역시 여기에 잘 적응했다. 고대 수렵채집인은 후손인 농부들보다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는 일이 적었으며, 화석 뼈에 나타난 증거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키가 더 크고 신체도 건강했을 가능성이 많다. 다만 평균 기대수명은 30~40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어린이 사망률이 높은 탓이었다. 출생 1년 이내의 영아 사망률이 가장 높았으며, 이 시기를 지난 아이는 60세까지 살 가능성이 높았고 일부는 80세까지 살았다. 현대 수렵 채집인의 경우 45세인 여성은 향후 20년 더 살 것으로 기대되며 구성원의 5~8퍼센트는 60세 이상이다.

 

 수렵채집인은 굶어 죽거나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았다. 이들의 성공비결은 다양한 식단에 있었다. 농부는 매우 제한된 종류의 식품을 먹으며 불균형인 식사를 한다. 특히 현대 이전에 농업인구를 먹여 살린 칼로리의 대부분은 밀이나 감자, 쌀 등 단일작물에서 왔다. 여기에는 일부 비타민, 미네랄을 비롯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여타 영양소가 부족하다. 중국 전통사회의 전형적 농부는 아침, 점심, 저녁에 쌀밥을 먹었다. 운이 좋으면 다음 날도 그렇게 먹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해 고대의 수렵채집인은 수십 가지의 다양한 식품을 규칙적으로 먹었다. 농부의 조상인 수렵채집인은 아침에 각종 베리와 버섯, 점심에 과일 및 달팽이와 거북, 저녁에는 토끼 스테이크에 야생 양파를 곁들여 먹었을 것이다. 다음 날에는 전혀 다른 음식을 먹었을지 모른다. 이처럼 다양한 식품은 고대 수렵채집인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를 확실히 섭취하게 해주었다. 

 게다가 단 한 가지 식량에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식량의 공급이 끊어져도 문제가 덜했다. 농경사회는 가뭄이나 화재, 지진 때문에 쌀이나 감자 농사를 망치면 기근에 휩싸인다. 수렵채집 사회도 자연재해를 당하고 결핍과 굶주림의 시기를 겪었지만 대체로 이런 재앙을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주식이 되는 일부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하면 다른 것을 사냥하거나 채집할 수 있었고, 영향을 덜 받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고대 수렵채집인은 전염병의 영향도 덜 받았다. 농경 및 산업사회를 휩쓴 대부분의 전염병(천연두, 홍역, 결핵)은 가축이 된 동물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이것이 사람에게 전파된 것은 농업혁명 이후부터다. 고대 수렵채집인이 기르는 가축은 개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이런 괴로움이 없었다. 게다가 농업 및 산업 사회 사람들은 인구가 밀집한 비위생적인 거주지에 영구적으로 살았는데, 이는 질병이 퍼지기 이상적인 온상이었다. 수렵채집인들은 떠돌며 생활했는데, 무리도 소규모여서 전염병이 널리 퍼질 수 없었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을 다양하게 먹고, 주당 일하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짤브며, 전염병도 드물었으니, 이를 두고 많은 전문가는 농경 이전 수렵채집 사회를 '최초의 풍요사회'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대인의 삶을 이상적인 것으로 그리면 실수일 수도 있다. 이들이 농업 및 산업 사회 사람 대다수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삶은 거칠고 힘든 것이었다. 고난과 결핍의 시기가 종종 닥쳤고, 어린이 사망률이 높았으며, 오늘날 같으면 사소했을 사고가 쉽게 사망선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떠돌이 무리 내에서 두터운 교분을 향유했겠지만, 무리 내에서 적개심이나 비웃을 받는 사람들은 끔찍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p111

 보온복과 사냥기술이 개선되자 사피엔스는 얼어붙은 지역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들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의복, 사냥기술을 비롯한 생존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했다.

 그런데 왜 이런 수고를 무릅썼을까? 도대체 왜 스스로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을까? 일부 무리는 전쟁, 인구 증가의 압박, 자연재해 때문에 북쪽으로 내몰렸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예컨대 동물성 단백질 같은 긍정적인 이유로 북쪽으로 이끌린 집단도 있었을지 모른다. 북극 땅은 순록이나 매머드처럼 군침이 도는 대형동물이 풍부했다. 매머드는 한 마리만 잡아도 엄청난 양의 고기(기온이 낮기 때문에 얼렸다 나중에 먹을 수도 있었다)와 맛있는 지방, 따뜻한 모피, 귀중한 상아를 제공하였다. 숭기르의 유적이 증언하듯, 매머드 사냥꾼들은 북쪽 동토에서 단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번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무리는 매머드와 마스토돈, 코뿔소, 순록을 쫓아 더 멀리 퍼져나갔다.

 

 기원전 14,000년쯤 이 중 일부가 사냥감을 쫓아 시베리아 북동부에서 알래스카까지 가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이 신세계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매머드에게나 인류에게나 알래스카는 시베리아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빙하 때문에 알래스카에서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었다. 더 남쪽을 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소수의 고립된 개척자들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기원전 12,000년쯤 지구 온난화로 얼음이 녹고 좀 더 쉬운 통로가 열렸다. 새로운 통로를 이용해서 인류는 떼를 지어 남쪽으로 이동했고, 대륙 전체로 퍼져나갔다. 원래는 대형동물을 사냥하는 데 적응했던 기업터 터였지만 이들은 곧 극히 다양한 기후와 생태계에 적응했다.

 

 시베리아인의 후예들은 미국 동부의 울창한 숲, 미시시피 삼각주의 늪지대, 멕시코의 사막, 중미의 찌는 듯한 밀림에 정착했다. 아마존 강 유역의 세계에 둥지를 틀었는가 하면 안데스 산맥의 골짜기나 아르헨티나의 대초원에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단 1천 년이나 2천 년 만에 일어났다. 기원전 10,000년이 되자 인류는 미 대륙 최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까지 정착했다.

 인류의 이런 진격전은 호모 사피엔스의 뛰어난 창의력과 적응력을 증언한다. 다른 동물은 이토록 극단적으로 다양한 서식지들에 사실상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상태로 그토록 빨리 이주한 예가 전여 없다.

 

p121

 

 인류가 농업으로 이행한 것은 기원전 9500~8500년경 터키 남부, 서부 이란, 에게 해 동부 지방에서였다. 시작은 느렸고 지리적으로 제한된 지역만을 대상으로 했다. 밀을 재배하고 염소를 가축화한 것은 기원전 9000년경이었다. 완두콩과 렌즈콩은 기원전 8000년경, 올리브나무는 기원전 5000년, 포도는 기원전 3500년 재배가 시작되었고, 말은 기원전 4000년부터 기르기 시작했다. 낙타와 캐슈넛 같은 일부 동식물은 더 나중에 가축과 재배작물이 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3500년이 되자 가축화와 재배작물화의 주된 파도는 지나갔다. 온갖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인류를 먹여 살리는 칼로리의 90퍼센트 이상이 밀, 쌀, 옥수수, 감자, 수수, 보리처럼 우리 선조들이 기원전 9500년에서 3500년 사이에 작물화했던 한줌의 식물들에서 온다. 지난 2천 년 동안 주목할 만한 식물을 작물화하거나 동물을 가축화한 사례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이 수렵채집인 시대의 것이라면, 우리의 부엌은 고대 농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한때 학자들은 중동의 어느 특정 지점에서 농업이 시작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중동 농부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수출한 게 아니라 농업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생겨났다는 생각에 합의하고 있다. 중미 사람들은 중동에서 밀과 완두콩을 재배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옥수수와 콩을 작물화했다. 남미 사람들은 멕시코나 지중해 지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채 감자를 재배하고 라마를 키우는 법을 익혔다. 중국의 초기 혁명가들은 쌀과 수수를 작물화하고 돼지를 가축화했다. 북미의 첫 정원사는 먹을 수 있는 호리병박을 찾아 땅속을 샅샅이 뒤지는 데 진력이 나서 호박을 재배하기로 결심하였다. 뉴기니 사람들은 사탕수수와 바나나를 길렀고, 그동안 서부 아프리카 최초의 농부들은 아프리카 수수, 아프리카 쌀, 수수와 밀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도록 작물화했다. 이들 지역에서 농업은 널리 퍼져나갔다. 기원후 1세기쯤이 되자 세계 대부분의 지역 사람들 대다수가 농민이 되었다.

 

 중동, 중국, 중미에서 일어난 농업혁명이 호주, 알래스카,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대부분의 식물과 동물 종은 작물화나 가축화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사피엔스는 맛 좋은 송로버섯을 캐거나 털이 부숭부숭한 매머드를 사냥할 수는 있었지만, 이를 재배하거나 가축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버섯의 곰팡이는 형체가 너무 불분명했고 야수는 너무 사나웠다. 우리 조상들이 잡거나 채취했던 수천 종의 동물과 식물 중에 농업과 목축업에 맞는 후보는 몇 되지 않았다. 이들 종은 특정 장소에 살았고 그 장소들이 바로 농업혁명이 일어난 지역이다.

 

p124

 

 진화는 점점 더 지능이 뛰어난 사람들을 만들어냈고, 결국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져서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고 양을 길들이며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게 가능해지자마자 지겹고 위험하고 종종 스파르타처럼 가혹했던 수렵채집인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농부의 즐겁고 만족스러운 삶을 즐기기 위해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환상이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더욱 총명해졌다는 증거는 없다. 수렵채집인들은 농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자연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사냥하는 동물과 채집하는 식물을 잘 알고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수렵채집인들은 그보다 더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이 적었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왕이나 사제, 상인은 아니었다.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잠시 농업혁명을 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1만 년 전 밀은 수 많은 잡초 중 하나일 뿐으로서 중동의 일부 지역에만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과 몇천 년 지나지 않아 세계 모든 곳에서 자라게 되었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의 기본적 기준에 따르면 밀은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식물이 되었다. 북미의 대초원 지역 같은 곳에는 1만 년 전 밀이 한 포기도 없었지만 지금은 수백 킬로미터를 걷고 또 걸어도 밀 이외의 다른 식물을 볼 수가 없다. 세계적으로 밀이 경작되는 지역은 225만 제곱킬로미터쯤 되는데 이는 브리튼 섬(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포함)의 열 배에 이른다,

 어떻게 이 잡초는 그러그런 식물에서 출발해 어디서나 자라는 존재가 되었을까? 밀은 호모 사피엔스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작함으로써 그렇게 해낼 수 있었다. 약 1만 년 전까지 이 유인원은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상당히 편안하게 살고 있었으나, 이후 밀을 재배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2천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많은 지역의 인간은 통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밀을 돌보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밀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밀은 바위와 자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밭을 고르느라 등골이 휘었다. 밀은 다른 식물과 공간, 물, 영양분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온종일 잡초를 뽑는 노동을 했다. 밀은 병이 들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해충과 마름병을 조심해야 했다. 밀은 자신을 즐겨 먹는 토끼와 메뚜기 떼에 대한 방어책이 없었기 때문에, 농부들이 이를 막아야 했다. 밀은 목이 말랐기 때문에, 인간들은 샘과 개울에서 물을 끌어다 댔다. 밀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밀이 자라는 땅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동물의 변을 모아야 했다.

 사피엔스의 신체는 이런 과업에 맞게 진화하지 않았다. 사과나무에 기어오르고 가젤을 뛰어서 뒤쫓는 데 적응했지, 바위를 제거하고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데 적합한 몸이 아니었다. 인간의 척추와 무릎, 목과 발바닥의 장심이 대가를 치렀다. 고대 유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농업으로 이행하면서 디스크 탈출증 관절염, 탈장 등 수많은 병이 생겨났다. 새로운 농업노동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사람들은 밀밭 옆에 영구히 정착해야만 했다. 이로써 이들의 삶은 영구히 바뀌었다.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길들이다, 가축화하다'라는 뜻의 단어 'domesticate'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 'domus'가 어원이다. 집에서 사는 존재는 누구인가? 밀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다.

 

 밀은 어떻게 호모 사피엔스로 하여금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삶을 더 비참한 생활과 교환하도록 설득했을까? 무엇을 보상으로 제시했을까? 더 나은 식사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명심하자, 인류는 아주 다양한 음식을 먹고사는 잡식성 유인원이다. 농업혁명 이전 식사에서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적었다. 곡률르 중심으로 하는 식단은 미네랄과 비타민이 부족하고 소화시키기 어려우며 치주조직에 해롭다. 밀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농부의 삶은 수렵채집인의 삶보다 불안정했다. 수렵채집인은 수십 종의 먹을거리에 의지해 생존했기 때문에 설령 저장해둔 식량이 없더라도 어려운 시절을 몇 해라도 견뎌나갈 수 있었다. 특정한 종을 손에 넣기가 힘들어지면 다른 종들을 사냥하고 채집할 수 있었으니까.

 농경사회는 극히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칼로리를 극소수의 작물을 통해 섭취했다. 오랜 세월 이들 사회는 밀이나 감자, 쌀 등 단 하나의 주식에 의존했다. 비가 내리지 않거나, 메뚜기 떼가 덮치거나, 곰팡이가 주식인 작물을 감염시키면, 농부들은 수천 수백만 명씩 죽어나갔다. 밀은 인간 사이의 폭력에 대한 안정망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초기 농부들은 수렵채집인 조상보다 더하진 않았을지언정 그 못지않게 폭력적이었다. 농부들은 재산이 더 많았으며 경작할 토지를 필요로 했다. 이웃의 습격으로 목초지를 잃는 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였기에, 타협의 여지가 매우 적었다. 수렵채집인 무리는 강력한 라이벌에게 몰리면 보통 다른 장소로 옮길 수 있었다. 힘들고 위험하지만 실행할 수는 있었다.

 농촌 마을이 강력한 적의 위협을 당할 경우, 후퇴는 곧 목초지와 집, 곡물창고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많은 경우 이런 피난민들은 굶어 죽었다. 그러므로 농부들은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최후까지 싸우는 경향이 있었다. 많은 인류학적, 고고학적 연구는 부락이나 종족을 넘어서는 정치적 틀이 없는 단순 농경사회에서 사망의 15퍼센트가 인간의 폭력 탓임을 시사한다. 남성의 경우에는 폭력적 사망이 25퍼센트에 이른다. 오늘날 뉴기니를 보면, 농경 부족사회의 다니족에서 남성 사망의 30퍼센트가 폭력 때문이고, 엥가족에서는 35퍼센트가 폭력 때문이다. 에콰도르의 경우 와오란족 성인의 약 50퍼센트가 다른 인간의 폭력으로 죽는다.

 

 시간이 흐르고 도시, 왕국, 국가 등 보다 큰 사회적 틀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폭력은 통제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크고 효율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수천 년이 걸렸다. 최초의 농부들은 마을에 사는 생활양식 덕분에 야생동물이나 비, 추위로부터 보호받는 등 어느 정도 직접적인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평범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익보다 손해가 더 컸을 것이다. 오늘날 번영사회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요즘 우리는 풍요와 안전을 누리고 있고 그 풍요와 안전은 농업혁명이 좋은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농업혁명이 놀라운 개선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수천 년의 역사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보다 훨씬 더 대표성이 있는 관점은 1세기 무렵 중국에서 아버지가 농사에 실패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세 살짜리 딸의 관점이다. 아이는 과연 "나는 영양실조로 죽어가지만, 앞으로 2천 년 내에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풍부한 세상에서 에어컨이 딸린 큰 집에서 살게 될 테니 나의 고통은 가치 있는 희생이다"라고 말할까?

 그렇다면 밀은 영양실조에 걸린 중국 소녀를 비롯한 농업종사자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사람들 개개인에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 종에게는 무언가를 주었다. 밀 경작은 단위 토지당 식량생산을 크게 늘렸고, 그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기원전 13000년경, 사람들이 야생식물을 채취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면서 먹고살던 시기에 팔레스타인의 여리고(Jericho) 오아시스 주변 지역이 지탱할 수 있는 인구는 기껏해야 1백 명 정도의 건강하고 영양상태가 비교적 좋은 방랑자들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8500년 야생식물이 밀에게 자리를 내어준 뒤, 이 오아시스에는 1천 명이 사는 마을이 생겼다. 마을은 크지만 집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과거보다 많은 사람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허덕였다.

 어느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했느냐의 여부는 굶주림이나 고통의 정도가 아니라 DNA 이중나선 복사본의 개수로 결정된다. 한 회사의 경제적 성공은 직원들의 행복이 아니라 오직 은행잔고의 액수로만 측정된다. 마찬가지로 한 종의 진화적 성공은 그 DNA의 복사본 개수로 측정된다. 만일 더 이상의 DNA 복사본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종은 멸종한 것이다. 돈이 없는 회사가 파산한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한 종이 많은 DNA 복사본을 뽐낸다면 그것은 성공이며 그 종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천 벌의 복사본은 언제나 1백 벌보다 좋다.

 

 농업혁명의 핵심은 이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하지만 이런 진화적 계산법에 왜 개인이 신경을 써야 하는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호모 사피엔스 DNA 복사본의 개수를 늘리기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p130

 호모 사피엔스는 약 7만 년 전 중동에 도착했다. 그후 5만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농업 없이 번성했다. 그 지역의 자연자원은 인구를 지탱하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시절에는 아이를 좀 더 많이 낳았고 궁핍한 시절에는 약간 덜 낳았다. 인간은 다른 많은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번식을 조절하는 호르몬과 유전자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풍족한 시절에 여자아이는 사춘기가 일찍 오고 임신 가능성이 조금 높아진다. 어려운 시절에는 사춘기가 늦게 오고 번식력이 떨어진다. 

 이런 자연적 인구조절에 문화적 메커니즘이 추가된다. 아기와 어린이는 동작이 굼뜨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방랑하는 수렵채집인들에게 부담이었다. 사람들은 3~4년 터울로 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여성들은 24시간 내내, 늦은 나이까지 아이에게 젖을 먹임으로써 터울을 두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완전하거나 부분적인 금욕, 낙태, 때로는 유아 살해 등이 있었다.

 

p133

 

 사람들은 왜 이렇게 치명적인 계산오류를 범했을까?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는 이유와 동일한 이유에서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p134

 그렇다면 왜 계획이 빗나갔을 때 농경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사회를 바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리고 그때쯤이면 자신들이 과거에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 때문에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렸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쟁기질을 도입함으로써 마을의 인구가 1백명에서 110명으로 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중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이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열 명이 있었겠는가? 돌아갈 길은 없었다. 덫에 딱 걸리고 말았다.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더 어렵게 되어버린 셈이었고, 이것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 중 상당수는 돈을 많이 벌어 35세에 은퇴해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유수 회사들에 들어가 힘들게 일한다. 하지만 막상 그 나이가 되면 거액의 주택 융자, 학교에 다니는 자녀, 적어도 두 대의 차가 있어야 하는 교외의 집, 정말 좋은 와인과 멋진 해외 휴가가 없다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들이 뭘 어떻게 할까? 뿌리채소나 캐는 삶으로 돌아갈까? 이들은 노력을 배가해서 노예 같은 노동을 계속한다.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낸느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우리 시대의 친숙한 예를 또 하나 들어보자.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 기계를 무수히 발명했다. 세탁기, 진공청소기, 식기세척기, 전화, 휴대전화, 컴퓨터, 이메일.... 이들 기계는 삶을 더 여유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과거엔 편지를 쓰고 주소를 적고 봉투에 우표를 붙이고 우편함에 가져가는 데 몇 날 몇 주가 걸렸다. 답장을 받는 데는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개월이 걸렸다. 요즘 나는 이메일을 휘갈겨 쓰고 지구 반대편으로 전송한 다음 몇 분 후에 답장을 받을 수 있다. 과거의 모든 수고와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내가 좀 더 느긋한 삶을 살고 있는가?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다. 종이 우편물 시대에 편지를 쓸 때는 대개 뭔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머릿속에 처음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적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역시 그렇게 심사숙고 한 답장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고받는 편지가 한 달에 몇 통 되지 않았으며 당장 답장을 해야 한다는 강요를 받지도 않았다. 오늘날 나는 매일 열 통이 넘는 메일을 받고, 상대방은 모두 즉각적인 답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이메일 계정 만들기를 거부하는 신기술 반대론자도 드문드문 있기는 하다. 마친 수천 년 전 농경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사치품 함정을 비켜갔던 일부 인간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농업혁명은 해당 지역의 모든 무리의 동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동이나 중미 어느 지역에서든 일단 한 무리가 정착해서 경작을 시작하면 농업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농경이 급속한 인구성장의 조건을 만들어준 덕분에, 농부들은 순수한 머릿수의 힘만으로 언제나 수렵채집인들을 압도할 수 있었다. 수렵채집인은 자신들의 사냥터를 들판과 목초지로 내주고 도망치거나 스스로 쟁기를 잡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어느 쪽이든 과거의 삶의 방식은 끝난 것이었다.

 사치품의 함정 이야기에는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다. 인류가 좀 더 편한 생활을 추구한 결과 막강한 변화의 힘이 생겼고 이것이 아무도 예상하거나 희망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일부러 농업혁명을 구상하거나 인간을 곡물 재배에 의존하게 만들려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배를 좀 채우고 약간의 안전을 얻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은 일련의 사소한 결정이 거듭해서 쌓여, 고대 수렵채집인들이 타는 듯한 태양 아래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p137

 

 그러나 드문 진상을 보여주는 단서를 찾아내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1995년 고고학자들은 터키 남동부의 괴베클리 테페 지역 유적지를 파내기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지층에서 정착지, 주거, 일상 활동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멋진 조각이 새겨진 기둥을 갖춘 기념물이 발견되었다. 개별 돌기둥의 무게는 최대 7톤이었고 높이는 5미터에 달했다. 그 인근의 채석장에서 학자들은 끌로 반쯤 깍다가 만 50톤의 기둥을 발견했다. 모두 합쳐서 열개 이상의 기념비 구조물이 드러났는데, 가장 큰 것의 폭은 30미터에 육박했다.

 고고학자들은 세계 도처에 있는 이런 기념비적 구조물과 친숙하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스톤헨지다. 하지만 이들은 괴베클리 테페를 조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스톤헨지는 기원전 2500년의 발달된 농경사회 사람들이 건설한 것이다. 이에 비해 괴베클리 테페의 구조물들은 연대가 기원전 9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바, 이 구조물은 수렵채집인들이 세운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처음에 이 발견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조사를 거듭할수록 이 구조물의 오랜 연대와 이를 세운 시기가 농경사회 이전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고대 수렵채집인의 능력과 문화적 복합성은 우리가 이전에 추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것 같다.

 수렵채집 사회 사람들은 왜 이런 구조물을 세웠을까? 뚜렷한 실용적 목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매머드 도살장도 아니고 비를 긋거나 사자를 피해서 숨는 장소도 아니었다. 뭔가 미스터리한 문화적 이유에서 세워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고고학자들은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수렵채집인들은 거기에 막대한 노력과 시간을 투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괴베클리 테페를 건설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 무리와 부족에 속한 수천 명의 수렵채집인을 오랫동안 협력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런 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련된 종교나 이데올로기 시스템밖에 없다.

 괴베클리 테페는 또 하나의 놀라운 비밀을 지니고 있다. 유전학자들은 작물화된 밀의 기원을 오랫동안 추적하고 있었는데, 최근의 발견이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작물화된 밀의 변종 중 하나인 외알밀은 괴베클리 테페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카라사다그 언덕이 발상지다.

 이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라는 문화적 중심지는 인류에 의한 밀의 작물화, 밀에 의한 인간 길들이기와 어떻게든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기념물을 건설하고 이용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많은 식량이 필요했다. 어쩌면 수렵채집인들이 야생 밀 채취에서 집약적인 밀 경작으로 전환한 목적은 정상적인 식량공급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원의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기존에 우리는 개처자들이 처음에 마을을 세우고 이것이 번영하면 그 중앙에 사원을 건설했을 것이라고 보았지만, 괴베클리 테페가 시사하는 바는 그 반대다. 먼저 사원이 세워지고 나중에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p163

 

 우리는 사람을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하는 것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 또한 신화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인가?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난 어딘가에 우리가 진정으로 평등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있단 말인가?

 

p176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인 중 다수가 상호 주관적이다. 법, 돈, 신, 국가가 모두 그런 예다.

 

 상상의 질서를 빠져 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일 뿐이다.

 

p183

 

 쓰기는 유형이 기호를 통해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이다. 수메르의 쓰기 체계는 점토판에 눌러 쓴 두 종류의 기호를 이용했다. 기호의 한 유형은 숫자를 나타냈다. 각각 1, 10, 60, 600, 3,600, 36,000을 나타내는 기호가 있었다(수메르 사람들은 6진법과 10진법을 섞어서 썼다. 6진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눈다거나 원을 360도로 분할하는 것이 그런 예다). 또 다른 유형의 기호는 사람, 동물, 사유품, 토지, 날짜 등을 나타냈다. 두 유형의 기호를 결합함으로써 수메르인들은 많은 데이터를 보존할 수 있었다. 어떤 한 인간의 뇌가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어떤 한 DNA 사슬이 부호화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었다.

 

p195

 쓰기는 인간의 의식을 돕는 하인으로 탄생했지만, 점점 더 우리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 컴퓨터는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말하고 느끼고 꿈꾸는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숫자 언어로 말하고 느끼고 꿈꾸라고 가르치고 있다. 게다가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공지능 분야는 오로지 컴퓨터의 이진부호에 기반을 둔 새로운 종류의 지능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다.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 같은 SF 영화는 이런 이진부호가 인간이 씌운 굴레를 벗어던지는 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반항적인 문자체계를 다시 통제하려고 하자, 그 체계들은 그 반응으로 인류를 쓸어버리려고 한다.

 

p217

 하지만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 장기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화한 것이 아니며, 그 사용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인체의 장기 중에 그것이 원형 상태로 수억 년 전 처음 등장했을 때 했던 일만을 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장기는 특정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진화하지만, 일단 존재하게 되면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방향으로도 적응할 수 있다. 가령 입이 등장한 것은 가장 초기의 다세포 생명체가 영양소를 몸 안으로 섭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고, 우리는 지금도 그런 용도로 입을 사용하지만, 동시에 키스하고 말하는 데도 사용한다. 람보라면 수류탄 핀을 뽑을 때도 써먹는다. 이런 용도 중 어느 하나라도 부자연스러운 것이 있을까? 벌레 비슷하게 생겼던 6억 년 전의 우리 선조가 입으로 하지 않던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p235

 모순이 없는 물리법칙과 달리, 인간이 가진 모든 질서는 내적 모순을 지닌다. 문화는 이런 모순을 중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이런 과정이 변화에 불을 지핀다.

 

p237

 프랑스 혁명 이래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은 점차 평등과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 가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가치는 서로 모순된다.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 없다. 모든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면 필연적으로 평등에 금이 간다. 1789년 이래 세계 정치사는 이 모순을 화해시키려는 일련의 시도로 볼 수 있다.

 

p245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욱 중요한 발전이 기원전 첫 밀레니엄(기원전 1000년~기원전 1년) 동안 이루어졌는데, 바로 보편적 질서라는 개념이 뿌리를 내린 시점이었다.

 

p246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이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다. 세 후보 중 하나를 믿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세계 전체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법 체계로 통치되는 하나의 단위로 상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두가 '우리'였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폐 질서였다. 두 번째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였다. 세 번째 보편적 질서는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

 

p249

 

 점차 우세를 차지한 기독교인들은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모스크를 부수고 교회를 지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금화와 은화를 발행하여 십자가와 함께 이교도들과의 싸움을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감사한다는 내용을 새겼다. 하지만 승리자들은 새로운 화폐와 함께 또 다른 종류의 주화도 찍어냈는데, 밀라레스라는 이 주화에는 좀 다른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기독교인 정복자들이 찍어낸 사각형 주화에는 유려한 아라비아 문자로 다음과 같은 선언이 새겨져 있었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다." 카톨릭의 멜구에일 주교와 아그데 주교조차도 인기 있는 이 무슬림 주화를 충실히 복제해 발행했고, 신을 두려워하는 기독교인들은 이를 기쁘게 사용했다.

 

 관용은 언덕 너머에서도 넘쳐흘렀다.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상인들은 피렌체의 플로린 금화, 베네치아의 두카트 금화, 나폴리의 기글리아토 은화 같은 기독교 주화를 이용해 사업을 했다. 이교도인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성전을 벌였던 무슬림 통치자들조차 경배의 표시로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새겨 넣은 주화로 세금을 받았다.

 

p274

 

 제국은 인류의 다양성을 급격히 축소시킨 주된 이유의 하나였다. 제국이라는 증기롤러는 수많은 민족의 독특한 특징을 지워버리고(예컨대 누만시아), 그로부터 훨씬 더 크고 새로운 집단들을 만들어냈다.

 

 실제 제국은 지난 2,5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정치조직이었다. 이 시기에 살던 인류의 대부분은 제국에 속해 있었다. 제국은 매우 안정된 형태의 정부다. 대부분의 제국은 반란을 너무나 쉽게 진압했다.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대개 외부의 침공이나 내분에 따른 지배 엘리트의 분열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복당한 민족이 제국의 지배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기록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대부분은 수백 년에 걸쳐 복속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제국에 서서히 소화되어 고유의 문화가 흐지부지되는 게 보통이었다.

 

p299

 

 종교는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질서를 정당화할 능력이 있지만, 모든 종교가 그 잠재력을 작동시킨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인간 집단들이 사는 광대한 영역을 자신의 가호 아래 묶어두려면, 종교에는 두 가지 추가적인 속성이 필요하다. 첫째, 언제 어디서나 진리인 보편적이고 초인적인 질서를 설파해야 한다. 둘째, 이 믿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고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달리 말해, 종교는 보편적이면서 선교적이어야 한다.

 

 이슬람교나 불교처럼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종교는 보편적이고 선교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그렇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상 대부분의 고대 종교는 지역적이고 배타적이었다. 신자들은 국지적 신과 영혼을 믿었으며, 인류 전체를 개종시키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우리가 아는 한 보편적이고 선교적인 종교는 기원전 1000년에 와서야 비로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출현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혁명의 하나였고, 보편적 제국과 보편적 화폐의 등장과 매우 비슷하게 인류의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애니미즘이 지배적인 신념체계일 때, 인간의 규범과 가치는 동물, 식물, 요정, 유령 등 다양한 존재들의 관점과 이익을 고려해야 했다. 예컨대 갠지스강 유역의 수렵채집인 무리는 유달리 큰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베지 못하게 하는 규칙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나무의 정령이 노해서 복수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다. 인더스강 유역에 살았던 또 다른 수렵채집인 무리는 흰꼬리여우의 사냥을 금지했을지 모른다. 언젠가 흰꼬리여우가 부족의 현명한 노파에게 귀중한 흑요석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는 세계관이 매우 국지적이었고, 특정 장소나 기후현상이 지닌 독특한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부분의 수렵채집인은 면적 1천 제곱킬로미터도 안 되는 지역에서 평생을 보냈다 살아남기 위해서, 특정 계곡에 사는 사람들은 그 계곡을 지배하는 초인적 질서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먼 곳의 다른 계곡에 사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규칙을 따르라고 설득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인더스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이 갠지스강 유역에 선교단을 보내 흰꼬리여우를 사냥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수고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농업혁명은 종교혁명을 동반한 것으로 보인다. 수렵채집인들이 채집한 식물과 사냥한 동물은 호모 사피엔스와 동등한 지위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호랑이가 인간을 사냥한다고 해서 인간이 호랑이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 없듯이, 인간이 양을 사냥한다고 해서 양이 인간보다 열등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은 서로 직접 의사소통을 했고, 자신들이 더불어 사는 거주지를 다스리를 질서에 대해 협의했다. 농부들은 달랐다. 이들은 동식물을 소유하고 조작했다. 자신의 소유물과 협의함으로써 스스로를 격하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농업혁명이 미친 최초의 종교적 효과는 동식물을 영혼의 원탁에 앉은 동등한 존재에서 소유물로 끌어내릴 것이다.

 

p327

 

 모든 인본주의자는 인간성을 숭배하지만 그에 대한 정의는 각기 다르다. 기독교의 경쟁 분파들이 신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것처럼, 인본주의는 '인간성 humanity'의 정확한 정의를 두고 다투는 세 개의 경쟁 분파로 나뉘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인본주의 분파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다. 이 사상은 '인간성'은 개별 인간의 속성이며 개인의 자유는 더할 나위 없이 신성하다고 믿는다. 자유주의자에 따르면, 인간성의 신성한 성질은 모든 개별 사피인스의 내면에 갖춰져 있다. 개개인의 내면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된다. 만일 우리가 윤리적, 정치적 딜레마와 마주친다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인간성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주된 계명들은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지닌 자유를 침입이나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계명들을 통칭하여 '인권'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중요한 분파는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다.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성'이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이 신성하게 보는 것은 개별 인간의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체 호모 사피엔스 종이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가 개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반해,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자에 따르면 불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다.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아니라 주변적 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령 부자가 가난한 자에 비해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본질보다 돈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가 된다. 사회주의적 인본주의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일신론의 토대 위에 건설되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모든 영혼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일신론적 확신의 개정판이다.

 

 전통적 일신론의 속박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본주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로, 가장 유명한 예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다. 나치가 다른 인본주의 분파와 구별되는 점은 '인간성'에 대해 진화론에 깊이 감화된 좀 색다른 정의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치는 다른 인본주의자들과 달리 인류를 보편적이고 영원한 무엇이 아니라 진화하거나 퇴화할 수 있는, 변하기 쉬운 종으로 보았다. 인간은 초인으로 진화할 수도, 인간 이하로 퇴화할 수도 있었다. 

 나치의 주된 야망은 인류의 퇴화를 막고 진보적 진화를 부추기는 것이었다. 나치가 인류의 가장 발전된 형태인 아리아인을 보호육성해야 하고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정신병자 같은 호모 사피엔스의 퇴화된 종류를 격리하거나 심지어 근절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p338

 사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후의 깨달음에 의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명백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역사의 철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최악의 위기가 곧 닥쳐올 예정인가? 중국이 성장을 계속해서 선도적 초강대국이 될까? 미국은 헤게모니를 잃을까? 일신론적 근본주의가 급증하는 것은 미래의 파도일까 아니면 장기적 중요성은 별로 없는 국지적 소용돌이일까? 우리는 환경적 재앙으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술적 파라다이스로 향하고 있는가? 어느 쪽이든 이를 뒷받침하는 훌륭한 주장이 존재하지만, 확실히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부로가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명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특히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아주 희박해 보였던 가능성이 종종 실현되곤 한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30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기독교는 비밀스러운 동방의 분파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에 이 종교가 곧 로마의 국교가 될 참이라고 누가 말했다면, 사람들은 웃다 못해 방 밖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오늘날 당신이 2050년이 되면 힌드교의 하레 크리슈나 교단이 미국의 국교가 될 것이라고 말할 경우 당할 일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1913년 10월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작은 급진주의 파벌에 지나지 않았다.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파벌이 불과 4년 내에 이 나라를 접수하리라고는 예측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후 600년에는 사막에 살던 한 무리의 아랍인이 머지않아 대서양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더더욱 터무니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만일 비잔틴 제국의 군대가 이슬람의 첫 맹공을 격퇴할 수 있었다면, 이슬람교는 오늘날 한 줌의 전문가들만이 아는 무명의 종교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학자들은 메카의 중년 상인에게서 내려진 계시를 기반으로 한 신앙이 어째서 널리 퍼질 수 없었는지를 매우 쉽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결론은 역사가 결정론적이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결정론은 호소력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국민국가에 살며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경제를 조직하고 인권을 열렬하게 신봉하는 것은 역사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결정론적이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민족주의, 자본주의, 인권이 우연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사는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도 예측될 수도 없다. 역사는 카오스적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힘이 작용ㅎ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너무 복잡하므로, 힘의 크기나 상호작용 방식이 극히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에는 막대한 차이가 생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역사는 이른바 '2단계' 카오스계다. 카오스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1단계 카오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을 하지 않는 카오스다. 가령 날씨는 1단계 카오스계다. 날씨는 무수히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요인을 고려하는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점점 더 정확하게 에보할 수 있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시장이 그런 예다. 만일 우리가 내일의 석유 가격을 1백 퍼센트 정호학히 예측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석유 가격은 예측에 즉각 반응할 것이고, 해당 예측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가격이 배럴당 90달러인데 내일은 1 백 달러가 될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옳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예측한다면 어떻게 될까? 겨래인들은 그 예측에 따른 이익을 보기 위해 급히 매입 주문을 낼 것이고, 그 결과 가격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배럴당 1 백 달러로 치솟을 것이다. 그러면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도 모른다.

 

 정치도 2단계 카오스계다. 소련 연구가들은 1989년 혁명을 예측하지 못했고, 중동 전문가들도 2011년 '아랍의 봄' 혁명을 예측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비난하고 혹평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비난은 공정하지 못하다. 혁명은 그 정의상 예측이 불가능하다. 예상 가능한 혁명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왜일까? 지금이 201년이라고 가정하고 다음과 같은 일을 상상해보자. 천재적인 일부 정치학자들이 컴퓨터 천재들과 손잡고 결코 틀릴 수 없는 컴퓨터 알고리즘을 개발한다. 이 알고리즘을 매력적인 인터페이스와 결합하면 혁명 에측장치로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이들은 많은 선금을 받고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이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예측에 의하면 이듬해에 틀림없이 이집트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면 무바라크는 어떻게 반응할까? 가장 가능성이 큰 행동은 즉시 세금을 낮추고, 시민들에게 수십억 달러의 지원금을 풀고, 만일에 대비해 비밀경찰을 보강하는 것이다.

 

 이런 선제 조치는 효과를 낸다. 해가 바뀌고 시간이 흘렀지만, 놀랍게도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바라크는 환불을 요구한다. "당신네 알고리즘은 쓸모가 없어!"그는 정치학자들에게 소리친다. "그 돈을 뿌리지 않았다면 궁을 하나 더 지을 수 있어어!" 정치학자는 반론을 편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예측했기 때무잉니다." 무바라크는 경호에들에게 그들을 체포하라고 손짓하면서 말한다. "일어나지 않는 일을 예언가라고? 그런 놈이라면 카이로 시장에 가서 거의 공짜나 가까운 값에 열몇 명이나 고용할 수 있겠어지."

 

 그러면 왜 역사를 연구하는가? 물리학이나 경제학과 달리, 역사는 정확한 예측을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재상황이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가령 유럽인이 어떻게 아프리카인을 지배하게 되었을까를 연구하면, 인종의 게층은 자연스러운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세계는 달리 배열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p343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문화를 일종의 정신적 감염이나 기생충처럼 보고 있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새 숙주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바이러스 같은 기생체는 숙주의 몸속에서 산다. 이들은 스스로를 복제하며 숙주에서 숙주로 퍼져나가고, 숙주를 먹고 살면서 약하게 만들고 심지어 죽게 할 때도 있다. 숙주가 기생체를 퍼뜨릴 만큼 오래 살기만 하면, 기생체는 숙주의 상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문화적 아이디어는 인간의 마음 속에 산다. 증식해서 숙주에서 숙주로 퍼져나가며, 가끔 숙주를 약하게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한다. 기독교의 천상의 천국이나 공산주의자의 지상낙원에 대한 믿음 같은 문화적 아이디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의 전파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고서 헌신하게 만든다. 해당 인간은 죽지만, 아이디어는 퍼져나간다.

 

 이런 접근법에 따르면, 문화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이 꾸며낸 음모(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우연히 출현해서 자신이 감염시킨 모든 사람을 이용하는 정신의 기생충에 더 가깝다. 이런 접근법은 때로 문화 구성요소학, 혹은 밈 연구라고 불린다. 유기체의 진화가 '유전자gene'라 불리는 유기체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진화는 '밈meme'이라 불리는 문화적 정보 단위의 복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공적인 문화란 그 숙주가 되는 인간의 희생이나 혜택에 무관하게 스스로의 밈을 증식시키는 데 뛰어난 문화다.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은 밈 연구를 멸시한다. 문화적 과정을 조악한 생물학적 유추를 통해 설명하려는 아마추어적 시도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학자 중 많은 이가 밈 연구의 쌍둥이 자매 격인 포스트모더니즘을 고수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는 문화를 건축하는 벽돌로서 밈이 아니라 '담론discourse'을 들먹이지만 이들 역시 문화는 인간의 이익과 무관하게 스스로 퍼져나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가령 민족주의를 19세기와 20세기에 퍼져서 전쟁, 압제, 증오, 인종청소를 일으킨 치명적 전염병으로 묘사한다. 한 나라의 사람들이 거기 감염되는 순간, 이웃 나라의 사람들도 그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이 컸다. 민족주의 바이러스는 스스로가 인간에게 혜택이 된다고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주로 자기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었다.

 

 사회과학에서 게임이론의 비호 아래 비슷한 주장이 흔히 이야기된다. 게임이론은 다수가 참여하는 게임에서 어덯게 모두에게 해가 되는 시각과 행동 패턴이 뿌리를 내리고 퍼져나가는지를 설명해준다. 유명한 예가 군비 경쟁이다. 군비 경쟁은 참여하는 모든 당사국들을 파산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군사력의 균형을 실제로 바꾸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파키스탄이 첨단 항공기를 구입하면, 인도가 동일한 조치로 대응한다. 인도가 핵폭탄을 개발하면, 파키스탄도 그대로 따라한다. 파키스탄이 해군력을 확장하면, 인도가 그에 대응한다. 이 과정의 끝에 다다르면, 힘의 균형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동안 교육과 의료에 투자할 수 있었을 수십억 달러가 무기의 구입과 개발에 사용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군비 경쟁의 역학은 저항하기 힘들다. '군비 경쟁'은 하나의 행동 패턴으로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며 모두에게 해를 끼친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이롭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적 기준에서 보면 그렇다(군비 경쟁은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자각이 없다는 점을 기억해두라. 그것이 의식적으로 생존과 번식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역학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 그것이 전파되는 것뿐이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든 - 게임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밈 연구 - 역사의 역학은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문화가 반드시 호모 사피엔스에게 가장 좋은 문화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 진화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개별 유기체의 행복에 무관심하다. 그리고 개별 인간은 너무나 무지하고 약해서, 대개는 역사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p376

 

 역사를 통틀어 사회를 고통스럽게 했던 가난은 두 종류였다. 남들은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나는 이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가난 그리고 식량과 집이 없어서 개인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생물학적 가난이었다. 사회적 가난은 아마도 결코 근절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많은 국가에서 생물학적 가난은 옛말이 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물학적 빈곤선 부근을 떠돌았다. 그 선 이하로 내려가면 목숨을 오래 부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약간의 계산 착오나 불운만 생겨도 사람들은 쉽게 그 선 이하, 즉 아사 상태로 빠질 수 있었다. 자연재해와 인간이 만든 재난은 가끔 국민 전체를 나락으로 떨어뜨려 수백만 명의 죽음을 불렀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 발밑에는 안전망이 쳐져 있다. 보험, 국가가 후원하는 사회보장, 아주 많은 지역적, 국제적 NGO들이 사람들을 개인적 불행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한 지역 전체에 재난이 닥치면 범세계적인 구호 노력이 이어지고, 덕부에 최악의 사태를 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수모와 모욕, 가난으로 인한 질병에 시달리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선 굶어 죽지는 않는다.

 

p394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이보다 더 나쁜 운명을 맞았다. 아주 훌륭한 고립 속에서 1만 년을 살아남았던 이들은 쿡이 도착한 지 1세기도 지나지 않아 마지막 남자, 여자,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제거되었다. 유럽 정착민들은 처음에 이들을 섬의 가장 비옥한 영영에서 몰아냈고, 이어 남아 있는 황무지까지 탐낸 나머지 이들을 체계적으로 사냥하고 살해했다. 몇 되지 않은 생존자들은 기독교 복음주의교파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선의를 지녔지만 그다지 열린 마음을 갖지 못한 선교사들이 서구 세계의 방식으로 이들을 가르치려 했다. 태즈메이니아인들은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기독교를 배웠으면, 천을 바느질하고 농사를 짓는 등 다양한 '생산적 기술'을 교육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학습을 거부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더욱더 우울해했으며, 아기를 갖지 않게 되고 삶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마지막에는 과학과 진보의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 죽음을 선택했다. 아, 과학과 진보는 이들의 사후세계에까지 좇아갔다. 인류학자들과 큐레이터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마지막 태즈메이니아인들의 사체를 강탈했다. 그들은 사체를 해부하고, 무게를 재고, 측정하여, 그 분석 결과를 학술지에 실었다. 태즈메이니아 박물관은 1976년에 이르러서야 1백 년 전에 죽은 최후의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트루가니니의 시신을 매장할 수 있도록 내놓았다. 영국 왕립외과대학은 그녀의 피부와 머리카락 표본을 2002년까지 보유했다.

 

p399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에게 부족했던 것은 증기기관 같은 기술적 발명이 아니었다(그거라면 공짜로 베끼거나 사들일 수도 있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서구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형성되고 성숙한 가치, 신화, 사법기구, 사회정치적 구조였다. 이런 것들은 빠르게 복사하거나 내면화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재빨리 영국의 발자국을 뒤따랐던 것은 가장 중요한 신화와 사회구조를 이미 영국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과 페르시아인은 사회에 대한 생각과 사회의 조직 방식이 달랐던 탓에 그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런 설명은 1500년에서 1850년 사이 시기를 새롭게 조명하게 한다. 이 시기 유럽은 아시아 열강보다 기술, 정치, 군사, 경제의 우위를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독창적 잠재력을 구축했고, 1850년 경이 되자 그 중요성은 갑자기 뚜렷해졌다. 1750년에 유럽과 중국, 이슬람 세계가 외관상 동등해 보였던 것은 신기루일 뿐이었다. 매우 높은 탑을 세우고 있는 두 건축가를 상상해보자. 한 사람은 나무와 진흙 벽돌을, 다른 사람은 강철과 콘크리트를 재료로 쓴다. 처음에는 두 방법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두 탑이 모두 비슷한 속도로 비슷한 높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결정적 문턱을 지나면, 나무와 진흙은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이에 비해 강철과 콘크리트는 시야가 미치는 한 층층이 계속 올라간다.

 근대 초기에 유럽은 어떤 잠재력을 개발했기에 근대 후반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는 서로 보완적인 두 가지 답이 존재하는데, 바로 현대 과학과 자본주의다. 유럽인은 기술적 우위를 누리기 전부터도 과학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술의 노다지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유럽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그것을 잘 부릴 수 있었다. 따라서 과학과 자본주의가 유럽 제국주의가 21세기 유럽 이후 세상에 남긴 가장 중대한 유산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럽과 유럽인은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지 않지만, 과학과 자본의 힘은 나날이 강력해지고 있다.

 

p403

 1969년 7월20일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은 달 표면에 착륙했다. 탐험에 앞서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들은 몇 개월간 달과 환경이 비슷한 미국 서부 사막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 지역은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 공통체의 고향인데, 우주비행사들과 한 원주민과의 만남을 담은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날 훈련 중이던 우주비행사는 늙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우연히 마주쳤다. 남자는 우주비행사들에게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달을 탐사하기 위해 곧 떠날 원정대의 대원들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들은 노인은 잠깐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자신을 위해 부탁을 하나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원하세요?" 그들은 물었다.

 "우리 부족 사람들은 달에 신성한 정령들이 산다고 믿는다오. 그들에게 우리 부족에게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를 당신들이 전해줄 수 있을까 해서."

 "그 메시지가 뭔데요?" 우주비행사들이 물었다.

 남자는 자기 부족의 언어로 뭐라고 말했고, 우주비행사들에게 그 말을 정확히 외울 때까지 계속 되풀이해서 말하게 시켰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우주비행사들은 물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이 말의 뜻은 우리 부족과 달의 정령들에게만 허락된 비밀이랍니다."

 기지로 돌아온 우주비행사들은 그 부족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통역할 사람을 찾아내어, 비밀 메시지를 해석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이 암기한 내용을 되뇌자 통역자는 껄껄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잦아들자 우주비행사들은 무슨 뜻인지 물었다. 통역자는 비행사들이 조심스럽게 암기한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한 마디도 믿지 마세요. 이들은 당신들의 땅을 훔치러 왔어요."

 

p407

 최초의 근대인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였다. 그는 1499년~1504년 사이에 여러 차례 아메리카 탐험대에 참가했던 이탈리아 선원이었다. 1502년부터 1504년 사이, 그 탐험의 내용을 담은 두 건의 문서가 유럽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베스푸치로 되어 있었다. 이들 문서의 주장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새로 발견한 섬들은 동아시아 연안의 섬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대륙이었다. 성경이나 고전 지리학자나 동시대 유럽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1507년, 이런 주장을 확고하게 믿은 존경받는 지도 제작자 마르틴 발트제뮐러는 최신판 세계지도를 출간했는데, 그것은 유럽에서 서쪽으로 항해한 선단이 착륙했던 곳을 별개의 대륙으로 표시한 최초의 지도였다. 대륙을 그려 넣은 발트제뮐러는 이름을 부여해야 했다. 그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아메리고 베스푸치라고 잘못 알고 있던 터라, 이 대륙에 아메리고를 기리는 이름을 붙였다. 아메리카라고. 발트제뮐러의 지도는 인기를 끌었고, 수많은 다른 지도 제작자들에 의해 복제되었다. 그가 새 땅에 부여한 이름도 함께 퍼져나갔다. 세계의 4분의 1에, 즉 일곱 대륙 중 두 곳에 거의 무명이던 이탈리아인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가 유명할 이유라고는 "우리는 모른다"라고 말할 용기가 있었던 점 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 사실에는 어떤 시적 정의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과학혁명의 기초가 되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유럽인에게 과거의 전통보다 지금의 관찰 결과를 더 선호하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뿐 아니라 아메리카를 정복하겠다는 욕망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지식을 맹렬한 속도로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방대한 새 영토를 통제하기를 원한다면 신대륙의 지리, 기후, 식물상, 동물상,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해서 막대한 양의 새로운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기독교 성경이나 옛 지리서, 고대 구비 전통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제 유럽의 지리학자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일하는 학자들은 채워 넣을 공백이 있는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이론이 완전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들 가운데 아직도 모르는 것이 있다고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p436

 

 만일 신용이 그토록 놀라운 것이라면, 어째서 아무도 좀 더 일찍 그것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물론 과거에도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이런저런 종류의 신용 거래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했으며, 그 기원은 최소한 고대 수메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옛 시대의 문제점은 아무도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다거나 활용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신용을 크게 확장하려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시대보다 과거가 더 좋았으며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쁘거나 기껏해야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믿었다.

 경제용어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부의 총량이 더 줄지는 않더라도 한정되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 개인이든, 자신들의 왕국이든, 세계 전체든 앞으로 10년간 과거보다 더 많은 부를 생산하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한 행태라고 생각했다. 사업은 제로섬 게임처럼 보였다.. 물론 특정 빵집의 이익이 증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 옆 빵집의 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베네치아가 번영할 수는 있지만, 이는 오직 제노바를 가난하게 만듦으로써만 가능했다. 영국 왕이 자신을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은 프랑스 왕의 것을 훔치는 것밖에는 없었다. 파이를 자르는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어느 방법도 파이를 더 크게 만들지는 못한다. 수많은 문화권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죄악이라고 결론 내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수가 말했듯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우니라"였다.

 만일 파이의 크기가 정해져 있는데 내가 그중 많은 부분을 가졌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은 게 분명하다. 부자는 자신의 잉여 재산을 자선에 기부함으로써 악행을 속죄해야 했다. 만일 지구 전체의 파이가 똑같은 크기로 남아 있다면, 신용이 파고들 여지가 없다. 신용은 오늘의 파이와 내일의 파이 간의 차이다. 만일 파이 크기가 늘 같다면 왜 외상을 주겠는가? 당신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손을 벌리는 제빵사나 왕이 다른 경쟁자의 파이 조각을 훔칠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 한, 그런 위험은 감수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 이전 세계에서 대출을 받기는 힘들었고, 만일 빌리더라도 소액으로 단기간에 높은 이자를 무는 것이 보통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기업가는 새 빵집을 열기 어려웠고, 왕궁을 짓거나 전쟁을 일으키려는 위대한 왕들은 세금과 관세를 무겁게 매겨서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왕은 그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빵 굽기에 대한 뛰어난 아이디어로 신분상승을 바라는 하녀는 왕궁의 부엌 바닥을 박박 닦으면서 부를 꿈꾸는 것 외에 보통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모두에게 부정적인 결과였다. 신용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규 사업의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신규 사업이 힘들었기 때문에 경제는 성장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성장이 없었으니 사람들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판단했고,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외상 주는 것을 경계했다. 불황에 대한 기대는 자기 실현적이었다.

 

p456

 

 17세기가 끝나가면서 네덜란드는 뉴욕을 잃었고, 금융 및 제국의 심장이라는 유럽 내에서의 지위도 내놓았다. 여기에는 현상에 안주한 자세도 한몫했고, 대륙전쟁을 치르느라 경비를 너무 많이 지출한 탓도 있었다. 네덜란드가 빠져나간 공백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은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처음에는 프랑스가 훨씬 유리해 보였다. 프랑스는 덩치가 더 크고 자금과 인구도 더 많았으며 경험 많은 군대를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금융제도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한 데 비해, 프랑스는 스스로 신용할 수 없는 대상임을 드러냈다. 프랑스 왕의 행태는 18세기 유럽 최대의 금융 버블이라 불리는 미시시피 버블 과정에서 특히 악명을 떨쳤다.

 이 이야기도 제국을 세운 주식회사와 함께 시작된다. 1717년 프랑스에서 사업승인을 받은 미시시피 사는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뉴올리언스 시를 건설했다. 야심찬 계획을 실현할 자금을 모으고자, 프랑스 루이 15세의 궁정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던 회사는 파리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팔았다. 회사 사장이던 존 로는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이기도 했다. 게다가 왕은 그를 오늘날의 재정부장관과 비슷한 정부 금융 총책 자리에 임명했었다.

 1717년 미시시피 하류의 연안 지대는 늪지와 악어를 제외하면 그다지 매력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미시시피 사는 여기에 엄청난 부와 무한한 기회가 있다고 떠벌렸다. 프랑스의 귀족, 사업가, 도시 부르주아 중 둔한 사람들이 이런 환상에 속았고, 회사 주식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애초에 주식은 한 주에 50리브르(프랑스의 옛 화폐단위-옮긴이)에 발행되었다. 1719년 8월 1일에는 2,750리브르에 거래되었다. 8월 30일에는 4,10리브르, 9월 4일에는 5천 리브르가 되었다.

 12월 2일이 되자 주식은 한 주당 1만 리브르를 돌파했다. 황홀감이 파리의 거리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팔고 대규모 대출을 받아 미시시피 사의 주식을 샀다. 부자가 되는 손쉬운 방법을 발견했다는 것이 모든 사람의 생각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공황이 시작되었다. 일부 투자자들은 주식 가격이 완전히 비현실적이며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은 가격이 정점을 찍을 때 파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매도 물량이 늘어나자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보자 빨리 손을 털고 싶었고, 가격은 더욱더 떨어져서 눈사태처럼 무너져버렸다. 

 프랑스 중앙은행은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총재인 존 로의 지시에 따라 미시시피 주식을 구매했지만, 영원히 매수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자금이 떨어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부 재정 총 책임자이기도 했던 존 로는 돈을 더 찍어내도록 인가했다. 중앙은행이 주식을 더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프랑스의 재정시스템 전체가 거품 속으로 들어갔다. 더군다나 그런 금융상의 마법으로도 곤경을 면할 수 없었다. 미시시피 사의 주식값은 1만 리브르에서 1천 리브르로 떨어졌고, 그 다음엔 완전히 붕괴하여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게 되었다. 이즈음 프랑스 중앙은행과 왕국 재무성은 돈은 한 푼도 없으면서 무가치한 주식만 엄청나게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큰손 투기꾼들은 제때 주식을 판 덕분에 대체로 큰 손실 없이 벗어났지만, 개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미시시피 버블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금융붕괴 사태였고, 프랑스의 금융 시스템은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미시시피 사가 어떤 식으로 정치적 연줄을 이용해 주가를 조작하고 매수 광풍에 불을 질렀는지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에, 대중은 프랑스 은행 시스템과 프랑스 왕의 현명함에 대해 불신했다. 루이 15세는 신용대출을 받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이것이 해외의 프랑스 제국이 영국의 손에 떨어진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영국인들은 자금을 저리로 쉽게 빌릴 수 있었던 데 비해, 프랑스인들은 융자를 받기도 어려웠고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프랑스 왕은 점점 불어나는 빚을 갚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더욱더 높은 이자율로 빌려야 했다. 그가 죽자 왕위에 오른(1774년) 손자 루이 16세는 1780년대에 이르러 자신이 파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간 예산의 절반이 대출금에 대한 이자 지불금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1789년 그는 마지못해 삼부회(사제,귀족, 제3신분으로 이뤄진 신분제 의회)를 소집한다.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해 150년 동안 열린 적이 없던 의회를 소집한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p460. 자본의 이름으로.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국유화(1800년), 영국의 인도 국유화(1858년)가 이루어졌지만, 이로 인해 자본주의와 제국의 포옹이 끝났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양자의 관계는 19세기에 더 끈끈해졌다. 주식회사는 더 이상 민간 식민지를 개척하고 지배할 필요가 없었고, 이제 사장과 대주주들은 런던, 암스테르담, 파리에서 권력의 끈을 조종했다. 이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뒷배를 봐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 비평가들이 빈정댔듯이, ,서구 정부는 자본주의자들의 노동조합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부가 큰돈을 벌려고 나선 가장 악명 높은 사례가 영국과 중국이 벌인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이다. 19세기 전반 영국 동인도회사와 잡다한 영국 사업가들은 마약 수출로 돈을 벌었는데, 특히 중국에 아편을 수출하는 것이 주종이었다. 수백만 명의 중국인이 중독자가 되었고, 나라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쇠약해졌다. 1830년대 말 중국 정부는 마약 거래를 금지하고 포고령을 내렸으나 영국 마약 상인들은 법을 완전히 무시했고, 중국 당국은 배에 실려 있던 마약을 압류해 파괴하기 시작했다. 마약 카르텔들은 웨스트민스터와 다우닝 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많은 의원과 각료들이 마약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에게 행동에 나서라는 압력을 넣었다.

 1840년대 영국은 '자유무역'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은 식은 죽 먹기였다. 자신감 과잉이던 중국은 증기선, 대구경 대표, 로켓, 신속발사 소총 같은 영국의 신무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어진 평화조약에서,, 중국은 영국 마약 상인의 활동을 제약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중국 경찰이 마약 상인에게 끼친 피해도 보상하기로 했다. 더구나 영국은 홍콩의 조차租借를 요구해 통치함으로써 그곳을 안전하게 마약 거래 기지로 계속 사용했다(홍콩은 1997년까지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9세기 말 중국 인구의 10분의 1에 이르는 약 4천만 명이 마약 중독자였다.

 이집트 역시 영국 자본주의의 힘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투자자들은 이집트의 지배자들에게 거액을 빌려주었는데, 처음에는 수에즈 운하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였고 나중에는 이보다 훨씬 성공적이지 않은 다른 사업들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였다. 이집트의 빚은 점점 더 많아졌고, 유럽인 채권자들은 이집트 내정에 점점 더 많이 관여했다. 1881년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모든 외국 채무를 갚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이것이 불쾌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1년 후 나일강에 육군과 해군을 파견했고, 이집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었다(보호령으로 유지된 기간은 명목상 1914~1922년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수에즈 운하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며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이집트를 핵심 전략 기지로 삼았다).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 치러진 전쟁이 이것들뿐만은 아니었다. 사실 전쟁 자체가 아편처럼 재화가 될 수 있었다. 1821년 그리스인들은 오토만 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영국의 자유주의자 및 낭만주의자 무리에게 큰 공감을 불렀다. 시인 바이런 경은 반란군과 함께 싸우기 위해 그리스에 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런던의 금융인들은 여기서 돈벌이 기회를 보앗다. 이들은 반군 지도자들에게 런던 주식거래소에서 그리스 반군 공채를 발행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스는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하면 이자를 포함해 채권을 갚기로 했다.

 민간인 투자자들은 이윤을 얻기 위해, 혹은 그리스의 명분에 공감해서, 혹은 두가지 이유 모두로 채권을 구매했다. 그리스 반군 채권 가격은 주로 헬라스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승패에 발맞춰 등락을 거듭했다. 점차 터키인들이 우위를 점했다. 반란군의 패배가 눈앞에 다가오자 채권 소유자들은 돈을 잃을 위험헤 직면하게 되었다. 채권 소유자의 이해는 나라의 이해였기에 영국은 국제 함대를 조직했고, 1827년 이 함대는 나바리노 전투에서 오토만 제국의 주력인 소함대를 침몰시켰다. 여러 세기에 걸친 복종을 딛고 그리스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지만, 자유는 엄청난 빚과 함께 왔고 독립 그리스는 이를 갚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스 경제는 향후 수십 년간 영국 채권자들에게 저당 잡힌 신세였다.

 자본과 정치의 힘찬 포옹은 신용시장에서 크나큰 의미가 있었다. 어떤 경제가 지닌 신용의 양은 새로운 유전의 발견이나 새 기계의 발명 같은 순수한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체제 변화나 좀 더 대담한 해외정책 같은 정치적 사건들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나바리노 전투 이후 영국 자본주의자들은 해외의 위험한 거래에 돈을 투자할 용의를 더 많이 나타냈다. 외국의 채무자가 변제를 거부한다면 여왕의 군대가 돈을 받아내주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한 나라의 신용등급이 천연자원보다 경제적 복지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용등급은 그 나라가 부채를 갚을 가능성을 가리킨다. 순수한 경제적 데이터 외에도 정치, 사회, 심지어 문화적 요인을 고려해서 매겨진다. 석유가 풍부한 나라라도 독재 정부에 전쟁이 만연하고 사법 제도가 부패해 있다면 등급이 낮은 것이 보통이다. 그 결과 이 나라는 상대적 빈곤국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석유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 필요한 자본을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꾸로 천연자원이 없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며, 사법제도가 공정하고, 자유정부를 가진 나라는 신용등급을 높게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나라는 싼 대가로 많은 자본을 모아 좋은 교육제도를 지원하고 하이테크 산업을 육성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p468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적 증오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주식을 구매한 개인이나 그것을 판매한 중개인, 노예무역 회사의 경영자는 아프리카인에 대해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탕수수 농장 소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농장주들이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고, 그들이 원한 유일한 정보는 손익을 담은 깔끔한 장부였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그것만 아니라면 흠이 없었을 기록에 새겨진 유일한 오점이 아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앞장에서 이야기했던 벵골 대기근 역시 이와 비슷한 역학에 의해 유발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인 1천만 명의 삶보다 자기 이익에 더 신경을 썼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벌인 군사작전에 돈을 댄 것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자선사업에 돈을 내고, 좋은 음악과 미술을 즐기는 네덜란드의 정직한 시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바, 수마트라, 말라카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중히 여기지 않았다. 지구의 한켠에서 현대 경제가 성장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범죄아 악행이 뒤따랐다.

 

 19세기에도 자본주의 윤리를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유럽을 휩쓴 산업혁명은 은행가와 자본 소유잘르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는 비참하고 가난한 삶을 선고했다. 유럽 식민지에서는 사태가 더욱 나빴다. 1876년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중부 아프리카를 탐사하고 콩고 강 유역의 노예무역과 싸우는 것을 사명으로 내건 비정부 인도주의 기구를 설립했다. 기구에는 도로와 학교와 병원을 건설해 해당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책임도 주어졌다. 1885년 유럽 열강들은 이 기구에 콩고강 유역 230만 제곱킬로미터의 통제권을 부여하기로 합의했다. 벨기에 국토의 75배에 이르는 그 땅은 이후 콩고 자유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곳에 사는 주민 2천만~3천만 명의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도주의 기구는 눈 깜빡할 사이에 성장과 이윤이 진정한 목적인 기업으로 변했다. 학교와 병원은 잊혔고, 콩고강 유역은 광산과 농원으로 채워졌다. 그 운영은 대부분 벨기에 관리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현지인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고무 산업은 특히 악명 높았다. 고무는 빠른 속도로 중요한 산업 필수품이 되었고, 고무 수출은 벨기에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고무를 수집하는 아프리카 촌마을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많은 할당량이 주어졌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게으름'을 이유로 잔인한 벌이 주어졌다. 팔을 절단해버리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한 마을 전체를 학살하기도 했다. 가장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1885~1908년 성장과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은 6백만 명(콩고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에 이르렀다. 일부에선 1천만 명에 육박한다고 추정한다.

 1908년 이후, 특히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탐욕에는 어느 정도 고삐가 죄어졌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불평등은 여전히 만연했다. 2014년의 경제적 파이는 1500년보다 크지만, 분배는 너무나 불공평해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아프리카의 농부와 인도네시아의 노동자가 집에 가져오는 식량은 5백 년 전보다 더 적다.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현대 경제의 성장은 거대한 사기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인류와 세계 경제는 성장을 거듭했을지라도 기아와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더욱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는 이 같은 비판에 두 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자만이 운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려 했던 유일하게 진지한 시도는 공산주의였으나, 그것은 거의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나빴기 때문에 다시 시도해볼 배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원전 8500년의 사람은 농업혁명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지만 농업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두 번째 대답은 우리가 인내심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천국이 눈앞에 와 있다고 약속한다. 인정하건대, 대서양 노예무역이나 유럽 노동계층 착취 같은 실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교훈을 얻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파이가 좀 더 커지도록 놔두면, 모두에게 좀 더 두꺼운 조각이 돌아갈 것이다. 성과가 평등하게 분배되는 일은 영영 없겠지만, 모든 남자와 여자, 어린이를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도아갈 것이다. 심지어 콩고에서도.

 실제로 긍정적인 신호가 조금 보인다. 최소한 순수한 물질적 기준에서는 - 기새수명, 어린이 사망률, 칼로리 섭취 - 2014년 평균적 인간의 생활수준은 1914년에 비해 상당히 나아졌다. 인구가 지수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하지만 경제적 파이가 무한히 커질 수 있을까? 모든 파이에는 원자재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두운 결말을 예언하는 사람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조만간 우리 지구의 원자재와 에너지를 고갈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p481

 화학자들이 알루미늄을 발견한 것은 1820년대였지만, 광석에서 이것을 분리해내기는 극도록 힘들었고 비용이 많이 들었다. 수십년간 알루미늄은 금보다 더 비쌌다. 1860년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황제는 가장 신분이 높은 손님들 앞에는 알루미늄 식기를 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보다 신분이 떨어지는 사람들 앞에는 금으로 된 나이프와 포크가 놓였다. 하지만 19세기 말 화학자들이 막대한 양의 알루미늄을 값싸게 추출하는 방법을 알아냈고, 오늘날 연간 총 생산량은 3천만 톤에 이른다. 만일 나폴레옹 3세가 자기 백성의 후손들이 샌드위치를 싸거나 남은 음식을 가져갈 때 값싼 알루미늄 호일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정말 놀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봉쇄를 당해 심각한 원자재 난을 겪었다. 특히 화약을 비롯한 폭발물의 원료가 되는 초석이 부족했다. 가장 중요한 초석 산지는 칠레와 인도에 있었고, 독일 내에서는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 사실 초석은 암모니아로 대체할 수 있지만 생산 단가가 비싸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독일 시민이었던 유대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가 1908년 말 그대로 공기에서 암모니아를 생산해내는 공정을 발견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독일은 하버의 발견을 이용해 화약을 산업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원자재는 공기였다. 하버의 발견이 없었더라면 독일은 1918년 11월 이전에 항복했을 것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하버는 이 발견으로 1918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화학상이었지만 평화상은 아니다(하버는 전쟁터에서 독가스를 사용하는 분야의 개척자기이도 하다).

 

p509

 현대사회에서도 핵가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국가와 시장은 경제적, 정치적 역할의 대부분을 가족에게서 빼앗으면서도 일부 중요한 감정적 기능은 남겨두었따. 현대 가족은 국가와 시장이(아직은) 제공할 수 없는 사적인 욕구를 제공하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가족은 심지어 이 영역에서도 점점 더 많은 개입을 겪고 있다. 시장이 사람들의 연애 및 성생활 방식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는 가족이 중매쟁이 역할을 맡았지만, 오늘날 연애와 성적 신호를 조종하고 그것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은 시장이다.

 다만 그 비용이 비싸다. 옛날에는 신랑과 신부는 집 안의 거실에서 만났고, 한쪽 아버지에게서 다른 쪽 아버지로 돈이 건네졌다. 오늘날 연애는 술집과 카페에서 이루어지고, 돈은 연인의 손에서 웨이트리스에게 건네진다. 이보다 더 많은 돈이 패션 디자이너, 헬스 클럽 매니저, 다이어트 전문가, 미용사, 성형외과 의사의 은행계좌로 건너간다. 이들 모두는 우리가 시장이 제시하는 미의 이상에 가급적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하고서 카페ㅔ 도착하다록 도와준다. 

 국가 역시 가족관계를 예전보다 더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는데,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주목한다. 부모에게는 아이들을 정부의 학교에 보내 교육받게 할 의무가 있다. 특별히 아이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는 국가의 저지를 당할 수 있다. 필요한 경우 국가는 심지어 부모를 감옥에 보내고 아이들을 다른 가정에 위탁할 수도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모가 자녀를 때리거나 모욕하지 못하도록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누가 주장했다면 말도 안 되고 실행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무시당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부모의 권위는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부모에 대한 존경과 복종은 가장 신성한 가치에 속했고, 부모는 거의 모든 행위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신생아를 살해하거나, 아기를 노예로 팔거나, 딸을 나이가 두 배가 넘는 남자와 결혼시키는 것이 모두 가능했다. 오늘날 부모의 권위는 완전히 후퇴했다. 젊은이들은 연장자의 말을 따를 의무가 점점 줄고 있고, 이에 비해 부모들은 자녀의 삶에서 무엇이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비난을 받는다. 엄마와 아빠는 스탈린 치하의 여론조작용 재판에 출석한 피고인처럼, 프로이트의 법정에서 비난을 받는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p515

 지난 2세기에 걸쳐 일어난 혁명들은 워낙 빠르고 과격한 나머지 사회질서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 대부분을 변화시켰다. 전통적으로 사회질서는 단단하고 고정된 무엇이었다. '질서'는 안정성과 연속성을 의미했다. 급격한 사회혁명은 예외였고, 대부분의 사회 변화는 수많은 작은 단계가 축적된 결과였다. 사람들은 사회구조란 확고하고 영원하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족과 공동체가 그 질서 내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를 변화시키려 분투할 수는 있었지만, 스스로 질서의 근본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은 낯선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것은 과거에도 늘 그랬고 앞으로도 늘 이렇게 이어질 거야"라고 선언하면서 현재 상태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지난 2세기 동안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빨랐고, 그런 나머지 사회질서는 동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현대의 혁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1789년(프랑스 혁명), 1848년(유럽의 연쇄적 민주화 혁명), 혹은 1917년(러시아 혁명)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은 모든 해가 혁명적이다. 요즘은 심지어 30세밖에 되지 않은 사람도 십대를 향해 "내가 어렸을 때는 세상이 지금과 완전히 달랐어"라고 말할 수 있다. 십대는 그 말을 믿지 않겠지만, 그 말은 사실이다. 예컨대 인터넷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90년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의 속성을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카멜레온의 색을 규정하려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속성은 끊임없는 변화다. 우리는 여기에 익숙해져,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질서를 바뀔 수 있는 무엇, 우리가 마음대로 가공하고 개선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이전 지배자들의 주된 약속은 전통적 질서를 수호하겠다거나 심지어 잃어버린 모종의 황금시대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지만, 지난 2세기 동안 정치에서는 구세계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더 나은 것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가장 보수적인 정당조차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만 약속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사회 개혁, 교육 개혁, 경제 개혁을 약속하고, 어떤 때는 공약을 실천하기도 한다.

 

p518. 우리 시대의 평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지에 대해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 중에 천 년 동안 살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과거 세상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쉽게 망각한다. 그리고 전쟁이 점점 드물어질수록 한 번 발발하면 더욱 많은 관심을 끈다. 브라질 사람과 인도 사람이 누리는 평화를 떠올리는 사람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집단 전체보다 개인의 고통에 더욱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거시적 역사 과정을 이해하려면, 개인의 이야기보다 대중의 통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2000년에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31만 명, 폭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는 이와 별도로 52만 명이었다. 개별 희생자는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파괴된 세계이고, 파탄 난 가정이며, 친구와 친척이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상처다. 하지만 거시적 시각에서 보면, 이 83만 명은 2000년의 총 사망자 5,600만 명에서 1.5퍼센트를 차지할 뿐이다. 그해에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26만 명(총 사망자의 2.25퍼센트), 자살로 인한 사망자는 81만 5천 명(1.45퍼센트)이었다. 2002년의 수치는 더욱 놀랍다. 총 사망자 5,700만 명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17만 2천 명, 폭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는 56만 9천 명에 불과했다(인간의 폭력에 의한 전체 사망자는 74만 1천 명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살자는 87만 3천 명에 이르렀다. 9.11 테러가 일어난 다음 해라 테러와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을 죽이는 것은 테러리스트나 군인, 마약상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일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면서 한밤중에 이웃 부족이 자기 마을을 둘러싸고 모두를 학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지 않는다. 부유한 영국 시민은 녹색 옷을 입은 명랑한 강도들이 자신을 습격해 돈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노팅엄에서 셔우드 숲을 지나 런던으로 매일 여행한다. 학생들은 선생의 채찍질을 견디지 않으며, 아이들은 부모가 청구서의 돈을 내지 못해 노예로 팔릴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여성들은 남편이 자신을 때리거나 외출을 막는 것을 법이 금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이런 기대는 점점 더 많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폭력이 감소한 것은 대체로 국가의 등장 덕분이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폭력은 가족과 공동체가 서로 일으키는 국지적 반목의 원인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지역 공동체보다 큰 정치 조직을 알지 못했던 초기 농부들은 만연하는 폭력으로 고통받았다.

 왕국과 제국이 강력해지면서 공동체의 고삐를 죄자, 폭력은 줄어들었다. 중세 유럽의 지방분권형 왕국의 경우 해마다 인구 10만 명당 20~40명이 살해되었으나, 최근 몇십 년간 국가와 시장이 무소불위의 힘을 얻고 공동체가 소멸하자 폭력의 발생률은 아주 낮아졌다. 오늘날 세계 평균을 보면 연간 10만 명당 피살자는 아홉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살인은 소말리아나 콜롬비아 같은 취약한 국가에서 발생한다. 유럽의 중앙집권적 국가에서는 평균 살인사건 발생률이 연간 10만 명당 한 명에 불과하다.

 국가가 권력을 이용해서 자국민을 살해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런 사례가 우리의 기억과 두려움에 크게 다가올 때도 종종 있다. 20세기에 자국의 보안 병력에 의해 살해된 국민은 수억 명은 아니지만 수천만 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거시적으로 볼 때 국가가 운영하는 법원과 경찰 덕분에 세계 전체의 안전 수준은 아마 높아졌을 것이다. 심지어 가혹한 독재정권 아래일지라도,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은 현대 이전에 비해 훨씬 낮아졌다.

 1964년 브라질에서 군사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 통치는 1985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20년 동안 수천 명의 브라질인이 정권에 의해 살해되었고, 또 다른 수천 명이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이 정권 최악의 시기에도 평균적인 리우데자네이루 시민이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을 확률은 와오라니, 아라웨테, 야노마뫼 족의 평균보다 훨씬 더 낮았다. 아마존 밀림 깊은 곳에 사는 이들 토착민에게는 군대도 경찰도 감옥도 없다. 인류학적 연구에 따르면 이 종족 남성의 4분의 1에서 2분의 1가량은 이르든 늦든 재산이나, 여성, 특권을 두고 벌어진 폭력적 충돌로 인해 사망한다. 

 

p526

 이처럼 행복한 진전을 설명하기 위해서, 학자들은 우리가 결코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책과 논문을 써서 이 현상에 기여하는 요인을 몇 가지 확인했다.

 첫 번째이자 다른 무엇보다, 전쟁의 대가가 극적으로 커졌다. 모든 평화상을 종식시킬 노벨 평화상은 원자폭탄을 개발한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에게 주어졌어야 할 것이다. 핵무기는 초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집단 자살로 바꾸어놓았으며, 군대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둘째, 전쟁의 비용이 치솟은 반면 그 이익은 작아졌다.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정치조직체들은 적의 영토를 약탈하거나 병합함으로써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부는 들판과 가축, 노예와 금 같은 물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약탈이나 점령이 쉬웠다. 오늘날 부는 주로 인적 자본과 조직의 노하우로 구성된다. 그 결과 이것을 가져가거나 무력으로 정복하기가 어려워졌다. 캘리포니아를 생각해보자. 처음에 그 부의 원천은 금광이었지만, 오늘날은 실리콘과 셀룰로이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 말이다. 만일 중국이 캘리포니아를 침공해 샌프란시스코 해변에 1백만 명의 병사를 상륙시키고 내륙으로 돌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들이 얻을 것은 별로 없다. 실리콘밸리에는 실리콘 광산이 없다. 부는 구글의 엔지니어들과 할리우드의 대본가, 감독, 특수효과 전문가의 마음속에 있다. 이들은 중국의 탱크가 선셋대로에 진입하기 전에 인도의 방갈로르나 뭄바이로 향하는 첫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을 것이다.

 가령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처럼 아직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몇 안 되는 국제적 전면전이 구식의 물질적 재화가 부의 척도인 지역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쿠웨이트의 왕족들은 해외로 달아날 수 있지만, 유전은 그대로 남아 점령되었다. 전쟁의 이익이 전만 못해진 데 비해, 평화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수익성이 좋아졌다. 전통 농업 경제체제에서 장거리 교역과 해외 투자는 부차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전쟁 비용을 피하는 것을 차치하면, 평화는 그다지 수익을 낳지 못했다. 만일 1400년 프랑스와 영국이 평화 관계였다면, 프랑스인들은 무거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영국 침략군의 파괴에 고통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평화가 딱히 프랑스인들의 지갑을 불려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대외 교역과 투자는 매우 중요해졌다. 그러므로 평화는 훌륭한 배당이익을 낳는다. 중국과 미국이 평화를 유지하는 한, 중국인들은 미국에 제품을 파고 월스트리트에서 거래하며 미국의 투자를 받아서 번영할 수 있다.

 마지막 요인은 세계 정치 문화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역사상 많은 엘리트들은 - 예컨대 훈 족장, 바이킹 귀족, 아즈텍 사제 - 전쟁을 긍정적인 선으로 보았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악으로 보기는 했지만 필요악으로 여겼으므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 시대는 평화를 사랑하는 엘리트가 세계를 지배하는 역사상 최최의 시대다. 정치인, 사업가, 지식인, 예술가 등은 진심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악이라고 본다(과거에도 초기 기독교도와 같은 평화주의자가 있기는 했지만, 이들도 드물게 권력을 잡은 경우 "너의 왼뺨을 내밀어라"는 주문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세 요인 사이에는 양의 되먹임 고리가 존재한다. 핵무기에 의한 대량학살 위협은 평화주의를 육성한다. 평화주의가 퍼지면 전쟁이 물러가고 무역이 번창한다. 무역은 평화의 수익과 전쟁의 비용을 모두 늘린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되먹임 고리는 전쟁에 또 다른 장애물을 만들어내는데,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모든 장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점점 치밀해지는 국제적 연결망은 국가들의 독립성을 서서히 약화시켜,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인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더 이상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이제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스라엘, 이탈리아, 멕시코, 타이 국민들이 독립성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을지라도, 사실 그들의 정부는 독립적인 경제, 외교 정책을 수행할 수 없으며 혼자 힘으로는 전면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것도 확실하다. 3장 <제국의 비전>에서 설명했듯, 우리는 지구 제국의 형성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이전의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제국 역시 그 국경 내에서 평화를 강제한다. 그리고 그 국경이 지구 전체를 아우르기 때문에, 세계 제국은 세계 평화를 효과적으로 강제한다.

 

 자, 그렇다면 현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와 히로시마의 버섯 구름과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잔악한 광인들로 대표되는 무분별한 대량학살, 전쟁, 압제의 시대인가? 아니면 남미에서 파인 적 없는 참호, 모스크바와 뉴욕에서 피어오르지 않은 버섯구름,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서 킹의 평화로운 얼굴로 대표되는 평화의 시대인가? 여기에 대한 답은 시기 선택의 문제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최근 몇 년간의 사건에 의해 얼마나 크게 왜곡되는지를 깨닫는 것은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다. 만일 이 장이 1945년이나 1962년에 쓰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분위기가 어두웠을 것이다. 이 책은 2014년에 쓰였기에 현대사에 대해 상대적으로 밝은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도 있겠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서 있다. 한쪽으로 난 문과 다른 쪽으로 열린 입구 사이에서 초조하게 오락가락하고 있다. 역사는 우리의 종말에 대해 아직 결정 내리지 않았으며, 일련의 우연들은 우리를 어느 쪽으로도 굴러가게 만들 수 있다.

 

p532

 

 행복의 장기적 역사를 연구한 사람은 드물지만, 거의 모든 학자와 보통 사람이 여기에 대해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흔히들 역사가 지속되는 기간 동안 인간의 능력은 계속 커졌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불행을 줄이고 자신의 소망을 충족하는 일에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그렇다면 우리는 중세 시대의 선조에 비해 틀림없이 행복할 것이다. 또한 중세 사람은 석기시대 수렵채집인보다 틀림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보적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익히 아는 바대로 새로운 재능, 행태, 기술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농업혁명에서 농경을 배웠을 때, 집단으로서 이들이 환경을 바꾸는 힘은 커졌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개인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농부들은 수렵채집인보다 열심히 일해야 했지만, 먹는 음식은 영양가도 더 적었고 근근이 버틸 양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질병과 착취에 훨씬 더 많이 노출되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유럽 제국의 확대는 아이디어와 기술과 농작물을 이동, 순환시키고 새로운 상업로를 개척한 덕분에 인류의 집단적 힘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 아메리카 원주민, 호주 원주민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인간이 권력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어 있다. 이를 감안하면 사람들이 더 많은 영향력을 누리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태도로 보인다.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 중 일부는 정반대 입장을 취하여, 인간의 능력과 행복 사이에는 역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며, 인류가 점점 더 많은 힘을 갖게 될수록 우리의 진정한 욕구와는 동떨어진 차가운 기계적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진화의 결과 우리의 마음과 신체는 수렵채집인의 삶에 맞도록 주조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에 농업으로, 그다음에 산업으로 이행한 탓에,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타고난 성향과 본능을 모두 표현할 수 없으므로 가장 깊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도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이루는 어떤 것도 매머드 사냥에 성공한 수렵채집인 무리가 경험한 흥분의 도가니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근접할 수 없다. 새로운 발명이 하나씩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는 에덴의 낙원으로부터 몇 킬로미터씩 떨어질 뿐이다.

 하지만 이처럼 모든 발명의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만을 보려는 낭만적 고집은 진보가 필연이라는 믿음에 못지않게 교조적이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수렵채집인과 접촉이 끊겼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지난 2세기 동안 발전한 현대 의학 덕분에 어린이 사망률은 33퍼센트에서 5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이 사실이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사망했을 어린이 본인뿐 아니라 그 가족과 친구들의 행복에 엄청나게 기여했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보다 좀 더 미묘한 것은 중도를 취하는 입장이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권력과 행복 간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없었다. 중세 농부는 실제로 그들의 수렵채집인 조상보다 더욱 비참하게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류는 스스로의 능력을 더욱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현대 의학의 승리는 한 예에 불과하고, 이외에도 전대미문의 성취가 많다. 폭력은 급격히 줄었고, 국제전은 사실상 사라졌으며, 대규모 기근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이 또한 과도한 단순화다. 첫째, 낙관적 평가의 표본으로 삼은 기간이 너무 짧다. 인류 대다수가 현대 의학의 결실을 누리기 시작한 것은 1850년 이후의 일이고, 어린이 사망률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현상이다. 대규모 기근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상당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58~1961년 중국 공산당의 대약진운동 당시 1천만~5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국제전이 드물어진 것은 1945년 이후에 와서였는데 대체로 핵무기로 인해 인류가 절멸할 위협이 새로 등장한 덕분이었다. 따라서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최근 몇십 년이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황금시대였지만, 이것이 역사의 흐름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을 대변하는 현상인지 아니면 단명할 행운의 회오리바람에 불과한지 말하기는 이르다. 우리는 현대성을 판단할 때 21세기 서구 중산층의 시각을 취하려는 유혹을 크게 느끼지만, 우리는 19세기 웨일스의 광산 노동자, 중국의 아편 중독자,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시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원주민 트루가니니는 호머 심슨보다 그 중요성이 덜하지 않다.

 둘째, 지난 반세기는 짤막한 황금시대였는데 이것조차 미래에 파국을 일으킬 씨를 뿌린 시기였다는 사실이 나중에 확인될지도 모른다.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지구의 생태적 균형을 수없이 많은 새로운 방법으로 교란해왔으며, 이것이 끔찍한 결과를 빚고 있는 중인 듯하다. 우리가 무모한 소비의 잔치를 벌이면서 인류 번영의 기초를 파괴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증거는 많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 없는 성취를 자축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질병과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물질적 부를 자랑하지만, 그중 많은 부분은 실험실의 원숭이, 젖소, 컨베이어 벨트의 병아리의 희생 덕분에 축적된 것이다. 지난 2세기에 걸쳐 수백억 마리의 동물들이 산업적 착취체제에 희생되었으며, 그 잔인성은 지구라는 행성의 연대기에서 전대미문이었다. 만일 우리가 동물권리 운동가들의 주장을 10분의 1만이라도 받아들인다면, 현대의 기업농은 역사상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르는 중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오로지 상류층이나 유럽인이나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류만의 행복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p543

 현실이 그와 같다면, 심지어 영원한 생명도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번 상상해보자. 모든 질병을 고치는 치료법, 노화를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요법, 젊음을 영원히 유지하는 회춘요법 등을 찾아냈다고 하자. 그 직접적인 결과는 분노와 불안이 사상 유례없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새로운 기적의 요법을 받을 돈이 없는 사람 - 대다수의 사람 - 들은 격렬한 분노에 휩싸일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가난하고 압박받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해온 것은 적어도 죽음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믿음이었다. 부자나 권력자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은 죽어야 하는데 부자는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요법을 받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그렇게 희열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법이 생명과 젊음을 연장해줄 수는 있지만, 시체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나와 내 사랑하는 이가 영원히 살 수는 있지만 트럭에 치이거나 테러리스트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아주 조그만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이며, 배우자나 자녀, 친한 친구를 잃는 데 따르는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p556

 

 그 결과,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은 행복에 대해 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불교의 입장은 특히 흥미롭다. 불교는 행복의 문제를 다른 어떤 종교나 이념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했다. 불교도들은 지난 2,500년에 걸쳐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 불교 철학과 명상법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복에 대한 불교의 접근방식은 생물학적 접근방식과 기본적 통찰의 측면에서 일치한다. 즉, 행복은 외부 세계의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 한 통찰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교는 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불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운 감정과, 고통을 불쾌한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자신의 느낌을 매우 중요히사며, 점점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은 다리를 긁든 의자에서 꼼지락 거리든, 세계대전을 치르든 모두 그저 즐거운 감정을 느끼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바다의 파도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순간적 요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5분 전에 나는 즐겁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지금 나는 슬프고 낙담해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즐거운 감정을 경험하고 싶다면, 불쾌한 감정을 몰아내면서 즐거운 감정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설령 한 번 그러는 데 성공했다 해도 곧바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토록 덧없는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토록 힘들게 분투할 필요가 무엇인가?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븜을 느낄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의 덧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추구를 중단하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고, 만족스러워진다. 즐거움, 분노, 권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하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평생 미친 듯이 쾌락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평정이다. 그런 사람은 바닷가에 수십 년간 서 있으면서 모종의 '좋은' 파도를 받아들여 그것이 흩어져버리지 못하도록 애쓰는 동시에 모종의 '나쁜' 파도는 밀어내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해변에 서서 무익한 노력을 거듭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힌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모래에 주저앉아, 파도가 마음대로 오고 가게 놔둔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현대의 자유주의적 문화의 입장에서 이런 사랑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래서 서구의 뉴에이지 운동은 불교의 통찰을 처음 대했을 때 이를 자유주의적 용어로 바꿔버렸다. 완전히 꺼꾸로 받아들인 것이다.   

 뉴에이지 문화는 주로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 내면의 느낌에 좌우되는 것이다. 부나 지위와 같은 외적 성취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내면의 느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혹은 보다 간결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생물학자들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슬로건이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과는 거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이 외적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는 점에서 부처의 생각은 현대 생물학이나 뉴에이지 운동과 궤를 같이하지만, 부처의 가장 심원하고 중요한 통찰은 따로 있다.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도 무관하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괴로움도 더욱 심해진다. 부처가 권하는 것은 우리가 외적 성취의 추구뿐 아니라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주관적 안녕을 묻는 설문은 우리의 안녕을 주관적 느낌과 동일시하고, 행복의 추구를 특정한 감정 상태의 추구와 동일시한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 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 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분노를 느끼면 '나는 화가 났다. 이것은 나의 분노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감정을 피하고 또 다른 감정을 추구하느라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전체는 오도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적 감정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고대의 수렵 채집인이나 중세의 농부보다 이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을까?

 

p561

 하지만 21세기에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는 중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한 십년 전쯤인가? 이 분이 확 떴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에 2012년도에 방송한 SBS의 아이러브인이라는 교양프로그램에서 김정운 씨가 강연했던 프로그램을 봤다. 엄청 재밋어서 이 분 책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이 분은 몇년 전에 대학교수직을 관두고 갑자기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대중에게 잊혀져 갔는데, 최근에 돌아와서 여수에 작업실을 만들어 정착(가족들과는 따로)을 한 모양이다. 

 외딴 섬에서 여러가지 단상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놨다.

 일반적인 에세이랑은 좀 다른게, 심리학 박사이기 때문인지 어떤 주제나 현상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이 독특하다. 그리고 간혹 날카로울 때가 있다.

 이 책의 주된 주제는 공간, 저자가 50대 이후 새로운 그의 인생의 의미를 찾기 시작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한 자신의 공간에 대한, 그리고 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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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시선은 곧 마음이다. 내 시선이 내 생각과 관심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 눈의 흰자위가 그토록 큰 이유는 시선의 방향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흰자위와 대비되어 시선의 방향이 명확해지는 검은 눈동자를 통해 인간은 타인과 대상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함께 보기 joint-attention' 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바로 이 '함께 보기'에 기초한다. 다른 동물들은 시선의 방향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눈 전체가 거의 같은 색이거나 흰자위가 아주 작다. 소통이 아니라 사냥하기 위해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시선의 방향이 드러나지 않아야 사냥에 더 유리하다.(이제까지 살면서 '눈 적은 사람'이 만만했던 적은 없다. 흰자위가 다 드러나는 '눈 큰 사람'은 대개 참 편안했다. 뭐 내 개인적 편견이다.)

 

p41

 '물때'다 여수에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밀물과 썰물이 하루 두 번씩 반복되는 건 알았지만, 만조와 간조 시각이 매일 정확히 49분씩 늦어진다는 것은 몰랐다. 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시간이 24시간 49분이기 때문이다. 매일 물이 들락거리는 속도도 달라지고, 물의 양도 달라진다. 물이 가장 많이 들고 빠지는 때가 '사리'다 물이 가장 조금 들고 빠지는 때는 '조금'이다. 사리 때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 물이 빠지면 수백 미터 앞까지 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배를 끌고 나갔다가는 바다에서 몇 시간을 그냥 떠 있어야 한다.

 

p44

 시간은 기울어져 흐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바꿔가며 시간이 흐르는 이유도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기울어져 흐르는 시간이 못마땅하다고 지금 당장 기둥을 수직으로 곧추세우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흐름을 배제한 평등은 가짜다. 50대 50의 공간적 평등은 없다는 이야기다. 흐르는 시간에 따라 권력의 주체가 기울고 바뀌어야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다. 이내 또 기울 것을 알아야 겸허해진다.

==> 지구의 자전축은, 지구의 공전궤도의 중심축에 대해 23.5도 기울어져 있다. 때문에 태양을 공전하면서 태양과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태양에너지를 받는 면적과 시간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 차이로 인해서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기후변화가 생겨나며, 북반구가 여름일 때(태양에너지를 받는 면적 및 시간이 최대일때) 남반구는 겨울이 된다.(태양에너지를 받는 면적과 시간이 최소). 

 만일 지구의 자전축이 공전궤도의 중심축과 평행했다면 지구의 적도는 지금보다 훨씬 뜨거웠을 것이고, 남극과 북극은 지금보다 훨씬 차가울 것이다. 이런 차이가 사실 현재보다 더 나쁠지 좋을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과 같은 전지구적인 기후 다양성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기후 다양성이 줄어든다면 아마도 생물의 다양성도 줄어들게 될 것이고, 지구의 모습은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p57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섬의 내 작업실 공사는 그해 여름부터 시작되었다. 내 고독한 결정의 기준은 분명했다. '교환가치 Tauschwert'가 아니라 '사용가치 Gebrauchswert'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망했지만,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분한 경제학자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여전히 유효하고 탁월하다. 각 개인의 구체적 필요에 의해 생산된 물건이 '화폐'라는 '교환가치'에 의해 평가되면서 자본주의의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마르크스는 진단한다. 이른바 '사용가치'라는 '질적가치'와 '교환가치'라는 '양적 가치' 사이의 모순이다.

 '교환가치'는 내 구체적 필요와는 상관없는, 지극히 추상적 기준일 뿐이다.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은 무엇보다도 주택이 '사는 곳(사용가치)'이 아니라 '사는 것(교환가치)'이 되면서부터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십 대 후반이 나이가 되도록 난 한 번도 내 구체적 '사용가치'로 결정한 공간을 갖지 못했다. 이 나이에도 내 '사용가치'가 판단기준이 되지 못하고, 추상적 '교환가치'에 여전히 마음이 흔들린다면 인생을 아주 잘못 산 거다. 추구하는 삶의 내용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섬 작업실 공사의 경제학적 근거는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에 대해서는 심리학적으로 더욱 간단히 정리했다. 후회는 '한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action'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 regret of inaction'로 구분해야 한다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심리학과의 닐 로스Neal J. Roese 교수는 주장한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잘못되었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쉽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내가 한 행동, 그 단 한가지 변인만 생각하면 되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그 일을 했다면' 일어날 수 있는 변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심리적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는 이야기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기억이 그토록 오래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 이 섬의 미역창고에 작업실을 짓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할 것임이 분명하다. 반대로 섬에 작업실이 완공되어 습기와 파도, 바람 때문에 아무리 괴롭고 문제가 많이 생겨도 난 내가 한 행동에 대해 합당한 이유를 얼마든지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섬에서 왜 행복한가의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낼 것이다.

 

p78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이 진짜다. 다른 사람의 귀를 의식하는 허세가 사라지는 까닭이다.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때 나는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리트Lied>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 Sebastian Bach의 <평균율 Das wohltemperierte Klavier>를 가능한 한 심각한 표정으로 듣는다. 폼 난다. 그러나 '아재용 넥밴드'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은 죄다 '7080 가요'다 우연은 아니다. 평생 좋아하며 듣게 되는 음악은 청소년기가 끝나고 청년기가 시작되는 20세 전후에 들었던 것이 대부분이라는 심리학 연구 결과가 여럿 있다. 정서적으로 가장 예민한 시절에 듣는 음악인 까닭이다.

 

p83

 

 '공연한 불안'의 개념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그 개념들을 '가나다순'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해보는 것도 좋다.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는 것은 '개념의 개념화', 즉 '메타 개념화'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생각'인 '자기 성찰' 또한 이런 메타 기념화'의 한 형태다. 개념화된 불안을 다시 한 번 상대화하면 불안의 실체가 더욱 분명해진다. 더 이상은 정서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불안은 기하급수적으로 부풀어 오른다.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힘으로 도무지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불안과 걱정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이가 주위에 참 많다.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한들 밤마다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성공인가. '96퍼센트의 쓸데없는 걱정'에서 자유로워야 성공한 삶이다.

 

 자주 웃고, 잠 푹 자는 게 진짜 성공이다!

 

p85

 

 수시로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전제들을 성찰하며 상대화해야 명함이 사라져도 당황하지 않는다. '탈맥락화Dekontextualisierung'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탈맥락화'는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철학에서는 '자기 성찰'이라 하고, 심리학에서는 '메타 인지meta-cognition'라 한다. 미술에서는 '추상Abstraktion'이라고 한다.

 

p95

 

 흥미롭게도 프로이트나 아들러 모두 '유대인'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내 일상의 유치한 열등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다. 매일같이 경험하는 인종차별로 인한 뿌리 깊은 열등감의 상처를 유대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결했다. 우선 독일인보다 더 철저한 '독일인'이 되는 방식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가스를 개발한 유대계 독일인 프리츠 하버Fritz Haber 같은 이다. 암모니아 합성 비료를 발명한 그는 자신의 발명품이 독가스로 사용되는 것에 적극 동조했다. 그의 아내는 이를 반대하며 자살까지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의 독가스는 결국 히틀러에 의해 자신의 유대인 친척까지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두 번째는 시오니즘이다. 유럽에서 그토록 멸시받느니 스스로를 격리하여 '유대 국가'를 세우자고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계 작가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은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기원이 된다. 시오니즘은 주로 '동유대인Ostjuden'이라 불렸던 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러나 시오니즘이라는 인종 갈등 뒤에는 가난한 '동유대인'과 부유한 '서유대인Westjuden' 사이의 계급 갈등이 숨겨져 있었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을 둘러싼 논쟁처럼 20세기 초반의 유대인 문제는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문제였다.

 

 독일인이 되기도 거부하고, 히틀러식 인종주의의 또 다른 극단인 시오니즘도 거부하며 '평화로운 유럽인'이 되고자 했던 유대인들도 있었다.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물론 카를 크라우스Karl Kraus,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와 같은 이들이다.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들의 깊은 인문학적 사유의 원천은 이들이 끝까지 부둥켜안고 씨름해야 했던 '유대인 열등감'이다. 유대인이 위대한 이유는 노벨상을 많이 받아서가 아니다. 인종적 열등감을 풍요로운 상상력의 원천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을 만드는 것은 가장 게으른 방식이다. 내면을 향한 칼끝을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 이슈든 양극단에 치우친 이들의 이해하기 힘든 공격성과 적개심에는 이같은 '투사Projektion'의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도 여전히 적을 만들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들이다. 그러다 죄다 한 방에 훅 간다. 열등감은 외부로 투사하여 적을 만드는 방식으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적'은 또 다른 '적'을 부르기 때문이다. 타인들과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한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속에 깊이 박힌 대못'처럼 그저 성찰의 계기로 품어야 한다.

 

p110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하고, 싫어하는 것을 줄이면 된다. 제발 '좋은 것'과 '비싼 것'을 혼동하지 말자! 자신의 '좋은 것'이 명확지 않으니 '비싼 것'만 찾는 거다.

 

p114

 

 나와 아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저자의 책을 읽었다. 『불행 피하기 기술』의 저자 스위스의 롤프 도벨리Rof Dobelli다. 원어 제목은 '좋은 삶의 비결DSie Kunst des guten Lebens'이다 지구 반대편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참 즐겁다. 저자의 주장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좋은 삶guten Leben'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기는 힘들어도, '나쁜 삶'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에게나 분명하다는거다. '신이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신이 그렇지는 않다'고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는 중세 '부정의 신학negative theology'의 방법론처럼 우리도 '나쁜 삶'의 요인들을 하나씩 제거하면 행복해지지 않겠냐는 거다.

 

 '좋은 것'을 추상적으로 정의하고, 각론의 부재에 괴로워하기보다는 '나쁜 것', '불편한 것'을 제거하자는 생각은 독일의 오래된 실용주의 전통이다. 1920년대 '바우하우스'에서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FFF Form folgt Funktion '의 디자인 원칙이 강조되었다. 삶을 불편하게 하는 불필요한 장식을 죄다 제거하자는 이야기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는 아예 "장식은 죄악이다"라고 했다. 현대 미니멀리즘의 선구자인 디자이너 디터 람스Deter Rams도 자신이 추구하는 디자인을 한마디로 '좋은 디자인gutes Design'이라고 정의했다. "적지만, 더 좋은 Weniger, aber Besser"이라는 그의 디자인 철학은 오늘날 애플의 모든 스마트 기기 디자인에 적용되었다. 여기서 미니멀리즘이란 무조건 줄이는 게 아니다. '나쁜 것'을 줄이는거다!

 

p130

 개별적 사건과 경험들에 대한 기억은 주체적 관심에 따라 서로 연결되며 의식의 차원으로 올라온다. 인간의 의식 또한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다 '입자'와 같은 개별 사건들을 연결하는 그 행위가 바로 '의미 부여'다 개별 사건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순한 '팩트'에 불과한 사건들을 연결하는 그 '의미 부여'가 의식의 본질이다.

 

p139

 

 습관적으로 '나쁜 이야기'만 소셜 미디어로 보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과 '친구'를 맺으면 아주 고통스럽다. 밤새 '나쁜 이야기'만 쌓여 있기 때문이다. 죄다 남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이야기뿐이다. 희한하게 '사회정의'로 정당화하며 즐거워한다. '나쁜 이야기'에 서로 '좋아요'를 죽어라 눌러댄다. 각자의 소셜 미디어에 쌓이는 '나쁜 이야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모여 앉아도 남 욕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러고 사는 걸까?

 

 타인의 관심을 얻기에 '나쁜 이야기'가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원시시대를 한번 생각해보자. '저기 바나나가 있다'는 정보와 '저기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정보 중에 내가 지금 살아남는 것과 관련해 어느 이야기가 더 중요할까? 당연히 '저기 호랑이가 있다'는 '나쁜 이야기'다. 바나나는 내일 먹어도 된다. 그러나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무시하면 바로 잡아먹힌다. '나쁜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보다 생존에 훨씬 더 중욯했다.

 

 우리가 '나쁜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바로 이 원시적 본능이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잠시만 한눈팔아도 못굼이 날아가던 원시시대 이야기다. 문명화된 사회란 날것의 위험들을 제어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갖춰진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도 사방에 '나쁜 이야기'들뿐이다.

 

 '나쁜 이야기'에 끌릴 수밖에 없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불안한 인간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불안한 이들이 불안을 유포해 혼자만 불안하지 않으려는 아주 웃기는 현상이다.

 

p144

 

 공연히 불안하면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그곳은 불안을 극복한 인류의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하는 느닷없는 질문으로 조급해진다면 음악회를 찾는 게 좋다. 몸으로 느껴지는 음악은 삶의 시간을 여유롭게 만들어준다.

 

p171

 

 지난주에는 독일 공영방송인 체데에프ZDF에서 하는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를 봤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이 직접 찍은 영상을 모아 보여주고, 그들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평양의 그로테스크한 풍경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독일 내레이터의 마지막 코멘트는 충격이었다. 남과 북 모두 '같은 민족'이라며 통일하겠다고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저토록 다른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같은 민족'이냐는 거다. 아차 싶었다.

 

 '민족'은 원래 없었다. 단어 자체가 아예 없었다. '민족'은 메이지 시대에 이와쿠라 사절단 일원으로 구미 각국을 여행한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가 1878년 펴낸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에 처음 나타난 표현이다. 그 후 독일제국의 국가론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민족'은 '국가Nation'와 '종족Volk'이 결합한 뜻으로 본격 사용되기 시작한다. '국민', '민족', '종족'의 의미론은 이때부터 마구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 메타포'는 아주 기막혔다. 특히 일본에서 고안된 '민족' 개념과 무척 잘 어울렸다. '민족'에 내재한 '가족 메타포'는 동양에선 아주 쉽게 이해되고 실천되었다. 분단의 한반도에서 '민족=가족' 이데올로기의 파워는 더욱 강력해졌다. 서구가 수백 년 걸린 근대화 과정을 수십 년 만에 해치울 수 있었던 그 엄청난 저력도 '흩어진 가족'과 같은 민족의 '한恨'이었다. 어떻게든 돈 많이 벌어 흩어진 가족이 다시 모여야 했다. 그래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민족의 분단은 항상 '이산가족'의 슬픔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 스스로 한번 확인해봐야 한다.

 

 정말 우리가 분단을 이산가족의 슬픔처럼 느끼고 있느냐는 거다.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들을 내 가족처럼 느낄 수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독일 통일 현장을 경험한 나로서는 지극히 비판적이다. 심리적 통일까지 이루려면 분단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한다. 과연 우리는 북한 사람들을 위해 칠팔십 년 넘는 세울을 인내할 수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김정은이 나타나면 감격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박수 치고 눈물까지 흘리는 저 북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 각자는 그 엄청난 '통일세'를 수십 년 동안 기꺼이 낼 수 있을까? 통일 후,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의 오만함에 분노하여 '김정은 시절이 더 좋았다'며 '조선노동당'을 다시 창당하면 도대체 무슨 느낌이 들까? 그 '조선노동당'이 북한 지역에서 몰표를 얻어 대한민국 국회의 한구석을 당당히 차지하는 모습을 '가족처럼'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을까?(이는 독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제 남북한 '단일민족'의 이념과 '통일'이라는 '무의식적 전제'들을 '숭고한 멜랑콜리'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민족'이라는 '당연한 젼제'를 해체하면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는 아주 달라진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옵션도 확연히 넓어진다.

 

p184

 

 '사회주의적 계몽'은 '자본주의적 욕망'을 결코 이길 수 없다.

 

p195

 

 은퇴하면 바로 죽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은퇴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기준이 바로 그 시절의 가치에 맞춰져 있다. 삼십여 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우리 모두가 지금 아무 생각 없다. 바로 앞선 세대의 '노욕老慾'을 보면서, 도대체 왜 저럴까 싶었던 것이 '짤리고 보니' 다 이해된다고도 했다. 특히 정치, 경제권에서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했던 선배들에게 주어진 그 '기회'가 부럽다고도 했다. 이렇게 오래 살 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첨예한 갈등 배후에는 죄다 '느닷없는 생명 연장'이 숨겨져 있다. 단순한 이념적 갈등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평균 수명 50세도 채 안 되던 지난 세기의 낡은 사회 설명 모데로 한국 사회를 설명할 수는 없다(이건 정말 중요한 포인트다!). 인류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이 엄청난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롤 모델'도 전혀 없다. 각자 '용감하게' 찾아야 한다. '손'으로 하는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와 더불어 현대인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개념이 있다면 마르크스의 '소외Entfremdung'다. 자신이 만든 생산물과는 아무 관계없이, 그저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으로 살아야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 심리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노동의 결과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삶을 마르크스는 '소외된 삶'이라 했다. 정신이 자연에 변화를 가져와 자아실현이 가능해진다는 헤겔의 낭만적 '외화Entäußerung' 개념을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맥락에 맞춰 비판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개념들은 대부분 공허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심리학적으로 그의 '소외론'은 여전히 통찰력 있고 의미 있다.

 

 사무직에서 일했던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배우는 것이 좋다. 두 번째 인생에는 노동의 결과를 눈으로 직접 판단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을 해야 심리적으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교수, 기자, 선생과 같이 말과 글로 먹고 산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말년의 성품이 무난해지며 '꼰대'를 면할 수 있다. 아니면 컴컴한 방에서 혼자 인터넷에 악플이나 달며 삼십여 년을 더 살아야 한다. 달리 할 일이 있는가? 그래서 아직 체력 좋은 범재에게는 '용접 일'이 만장 일치로 추천되었다.(진지하게 나눈 이야기다. 우리 모두 대학 사 년 그렇게 대충 다니고 삼십 년 가까이 잘 먹고 잘살았으면 감사해야 한다. 앞으로 삼십여 년을 더 살려면 뭔가를 처음부터 새롭게 배우는 게 당연하다.)

 

p201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환경에 놓여 있는지 모른다. 내가 서울에서 운전하며 가장 괴로울 때는 차선을 바꿀 때다. 다들 '차선 바꾸겠다는 신호'를 '빨리 달려오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잽싸게 달려들어 차선을 바꿀 여유를 절대 안 준다. 어어, 하다 보면 뒤에서 빵빵거리며 난리 난다. 정신이 혼미해지며 그냥 울고 싶어진다. 주로 남자들이 그렇다. 한국 남자들은 자기 자동차 앞을 양보하면 인생 끝나는 줄 안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걸까?

 

 자동차 안이 유일한 자기 공간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집의 안방은 아내 차지가 된 지 오래다. 아이들도 이제 안방을 '엄마 방'이라고 한다. 거실은 TV와 뜬금없이 커다란 소파가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코를 심하게 골아 같이 잠을 못 자겠다는 아내의 불평에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한 지 이미 수년째다. 수면 무호흡으로 이러다 죽겠다 싶어 새벽에 잠을 깨면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래서 자동차 안이 그렇게 행복한 거다. 한 평도 채 안 되지만 그 누구도 눈치 볼 필요 없는 나만의 공간이다. 밟는 대로 나가고, 서라면 선다. 살면서 이토록 명확한 '권력의 공간'을 누려본 적 있는가? 그러니 도로에서 누가 내 앞길을 막아서면 그토록 분노하는 거다.

 

p211

 

 더 중요한 자유가 있다. '시선의 자유'다. 이건 한국 사내들에게 매우 절박한 자유다. 평생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기 때문이다.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처럼 치명적인 것은 없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누군가 지켜본다고 생각하며 평생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p214

 

 '관찰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맘대로 '볼 수 있는 자유'가 행복의 핷미이다.

 

p218

 

 '하염없음'은 시간이 정지되고, 유체 이탈처럼 '또 다른 나'가 공중 부양하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경험이다. 철학적 '자기 성찰'이란 심리학적으로는 '경외감'과 '하염없음'으로 야기되는 '인지적 전환cognitive shift'이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대자연 앞에서 내가 갖고 있는 현재의 인지 체계로는 그 어떠한 설명과 해석도 불가능하다. 남은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내 인지 체계를 통째로 바꾸는 일이다. 인간의 모든 미학적 경험은 이 같은 '인지적 전환'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p221

 

 지금 내 삶이 지루하고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지금의 내 관점을 기준으로 하는 인지 체계가 그 시효를 다했다는 뜻이다. 내 삶에 어떤 감탄도 없이, 그저 한탄만 나온다면 내 관점을 아주 긴급하게 상대화시킬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조승연의 뉴요커에 대한 그리고 뉴욕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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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뉴요커는 이민 이후의 생존 경험을 통해, 주변 사람의 부러운 시선이나 허울 좋은 체면치레 같은 것은 생존에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진정한 자유와 존재감은 경제적 자립에서만 온다. 이것이 뉴요커의 행복 공식이다.

 우리가 부모 세대의 기대치, 사회의 이목에서 자유로워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부모를 포함해서 모든 타인에게 돈 때문에 손 벌리지 않아도 되는 겨엦적 자립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첫 단추는 질긴 생존력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내 행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뉴요커가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인생학 레슨이다.

 

p27

 

 겉치레가 쌓이면서 인생에 피로라는 때가 끼게 된다.

 

p30

 "하나씩만, 그리고 제대로 하라."

 

p48

 세상에는 머리가 좋아 뛰어난 논문을 발표하는 사람도 있고, 뛰어난 안목으로 인스타그램에 아름다운 사진을 올려 인정받는 사람도 있으며, 개인 방송으로 인기를 끄는 사람도 있다. 돈을 버는데만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만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 재능도 한눈 팔지 않고 갈고 닦아야 빛이 나고, 그래서 한 가지만 제대로 이루어 내기도 힘들다. 뉴요커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반면에 학창시절부터 전 과목 점수를 평균 내는 교육 제도에서 수행평가까지 받으며 학교를 다니는 우리 한국인은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에 더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10과목에서 만점이 나와도 한과목의 점수가 낮으면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기 때문일까? 사람은 원래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이 많기 마련인데, 우리 사회는 모두가 성격이 좋고, 외모도 준수하고, 공부도 잘하고, 손재주도 좋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10가지를 잘해도 하나가 부족한 타인을 평가할 때도 잔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타인의 장점보다 단점을 보고 자신도 모든 것을 다 잘하려고 하다 보니 인생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혼자 다 해낼 수 있는 능력자만 모여 사는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일까?

 세상에 사람은 많다. 그리고 제각각 다른 분야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한 명의 역할이 아닌 10명의 역할을 혼자서 해내야 한다며 불필요한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많은 장점을 가진 타인이 가진 단 하나의 단점만을 보려고 할까? 뉴요커들처럼 인간은 원래 완벽해질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하나의 장점에 집중해서 나만의 고집과 집념을 가지고 실행 가능하도록 밀어붙이는 배짱이 생길 것이고 타인의 여러 장점에 집중해 나와 어떻게 서로 보완하며 살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어 다른 사람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p77

 파리와 뉴욕의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작품의 성격은 확연히 다르다. 뉴욕과 파리 예술의 차이를 한마디로 대변하는 일화가 있다. 뉴욕 브로드웨이의 유명 작곡가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이 파리에서 프랑스 클래식 음악 대가 드뷔시의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고 한다. 드뷔시의 절제미와 부드러운 선율에 깊이 감동한 거슈윈은 관계자에게 드뷔시를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다. 거슈윈은 드뷔시를 만나자 자기가 지금까지 작곡한 것은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이 공연을 보며 깨달았다며, 견습생으로 들어가 드뷔시 밑에서 레슨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드뷔시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브로드웨이에서 작곡을 하면 얼마나 벌어요?"

 거슈윈이 솔직히 대답하자, 드뷔시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저를 뮤지컬 작곡 제자로 받아주시죠."

 

 물론 이것은 줄리어드 음대생과 교수들 사이에 도는 우스갯소리다. 하지만 이 일화는 세계 예술의 중심지로서 파리와 뉴욕의 차이점을 단순 명쾌하게 말해준다. 뉴욕을 포함한 미국의 예술가들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프랑스 예술의 깊이에 무한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다. 마돈나와 존 말코비치 같은 할리우드의 예술인도 파리에 자택을 두고 자주 기거하는 경우가 많고, 유럽 안에서도 가장 고전적인 동네에 살아보려고 한다. 그에 비해 프랑스 예술가들은 고지식한 전통에서 벗어나 파격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할 수 있는 뉴욕의 자유로움과, 시장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이런저런 평론가의 잔소리를 듣는 대신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는 뉴욕의 예술시장 시스템에 대한 매력과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

 

p93

 뉴요커의 민간 영웅담은 무법자를 경외의 눈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뉴욕의 명소에는 마피아, 마약 거래, 성매매로 유명해진 장소가 포함되어 있고 DUMBO(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맨해튼 다리의 고가도로 밑)도 그중 하나다. 1989년 마피아 보스인 존 고티John Gotti는 체포되어 수갑을 차고 끌려가면서도 번듯한 새 양복 차림에 여유로운 웃음으로 당시 뉴욕에서 최고의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또한 150여 년 전에 뉴욕시 전체를 타락시킨 보스 정치의 대명사 윌리엄 트위드William M. Tweed는 지금도 많은 영화에서 카메오로 등장하는 인물로서, 그 역할이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뉴요커는 이런 사람을 '색채가 강한 인물Colorful Character'로 여겨 그들과 관련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는 매진 행렬을 이루기도 한다.

 그렇다면 뉴요커의 윤리 나침반이 고장이라도 난 걸까? 그들은 왜 이런 무법자를 좋은 쪽으로 기억하려는 걸까?

 그 이유는 뉴요커 중 많은 사람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던 소수자 출신이라는 점도 있을 것이다. 뉴요커는 낯선 나라에 이민을 와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사연 많은 사람들이다. '절박함 앞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스토리가 뉴욕에서 가장 사랑받는 예술가, 극작가, 영화 감독이 주목하는 스토리 라인이다.

 1970년대 브루클린 남부에서 발생한 한 강도 사건은 뉴요커 사이에서 '들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연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보여준다.

 1972년, 세 명의 괴한이 브루클린 남쪽에 위치한 체이스맨해튼 은행 지점에 총을 들고 습격해 돈을 요구했다. 이들의 이름은 존 보이토비츠John Woitowicz, 살바토레 나투랄레Salvatore Naturale 그리고 로버트 웨스텐베르그Robert Westenberg다. 웨스텐베르그는 경찰이 출동하자 홀로 도주했다. 나머지 두 명은 14시간 동안 은행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경찰의 회유와 위협에 저항햇다. 결국 나투랄레는 FBI의 총에 사살되고, 보이토비츠는 체포되어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의 사연은 정말로 기구했다. 보이토비츠는 폴란드계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마도 보수적인 천주교 가정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청년기에는 베트남전에 참전해 나라를 위해 싸웠고, 은행 지점 창구에서 일한 적도 있다. 22살이 되던 해에 카멘 비풀코라는 여성을 만나 결혼해서 두 명의 아이까지 낳았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결혼 4년째가 되던 어느 날, 보이토비츠는 이탈리아계 이민자에게 1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인 산 제나로San Gennaro 축제에 참석했다가 엘리자베스 이든이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녀와 사귀는 동안 보이토비츠는 점차 자기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다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나 깊었는지 헤어지지 않으려고 엘리자베스가 성전환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수술비가 없어서 보이토비츠는 수술비를 구하려고 친구들과 모의해 은행을 털기로 한 것이다.

 이런 사건이 뉴욕 이외의 지역에서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반인륜적이고 엽기적인 범죄를 다루는 미디어의 가십면에나 올랐을 것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과는 무관한 엽기적인 사건이라며 무시당하지 않았을까? 보이토비츠의 어리석은 선택을 손가락질하거나 인간 말종이라고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이것 봐, 이민자들은 범죄 가능성이 높다니까" 하면서 이탈리아나 폴라드인의 민족성 또는 종교를 문제 삼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뉴욕의 예술인들은 이 스토리를 세계인의 칭송을 받는 걸작 영화로 만들었다. 뉴욕의 <라이프>지는 존 보이토비츠의 기구한 사연을 상세히 실었다. 그리고 뉴욕에서 활동하던 영화감독 시드니 루멧Sidney A. Lumet은 그 이야기를 <개 같은 날의 오후Dog day afternoon>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었다. 대본을 쓴 프랭크 피어슨은 아카데미 극본상까지 받았다. 물론 할리우드는 보이토비츠에게 그의 인생사를 영화로 만들 권리를 돈으로 샀다. 비극적이게도 보이토비츠의 애인 엘리자베스 이든은 그 돈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자 그를 떠나서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에이즈로 사망하자, 보이토비츠가 추도 연설을 했을 만큼 두 사람의 사랑은 특별했다.

 

p96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럽고,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인간의 본질적 모습을 벌거숭이처럼 드러낸다. 이것이 <위대한 개츠비>(살인을 저지른 부자), <렌트Rent>(에이즈로 죽어가는 예술가) 등 뉴욕의 걸작이 가진 공통적 테마다.

 

p98

 이처럼 뉴요커는 기구한 인생을 사랑한다. 그래서 새로운 콘텐츠가 끊이지 않는다. 내가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파리 외곽에 사는 알제리, 모로코 이민자 출신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곳의 높은 범죄율과 문맹률을 보고 "역시 프랑스 사람과 알제리 사람은 달라"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한두 번 들어본 게 아니다. 프랑스의 주류층은 자기가 비주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뉴요커는 인간의 공통점을 믿는다. 극단적인 상황에 많이 처해본 도시에서 뉴요커는 인간이 압박을 받으면 이상한 선택을 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사회가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은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그와 내가 처한 상황이 달라서일 뿐이라는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한 선택은 내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역지사지'라는 우리의 옛말처럼, 미국에도 '남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기 전에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교육수준, 사회계층, 문화권의 사람과는 역지사지 할 수 있지만, 존 보이토비츠와 같은 사람은 사연을 들어볼 가치조차 없다며 무시한다.

 만약 내가 알고 있는 스토리가 획일적이이서 창의적인 콘텐츠를 찾기가 어렵고 내 사고가 좁다고 느낀다면 그처럼 비참하고 엽기적인 사연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 발성되지 않는 목소리들이 바로 우리 사회가 그렇게 갈구하던 '새로운 콘텐츠'인 것이다. 새로운 콘텐츠는 남의 스토리가 나에게 중요할 때 가장 잘 발견된다. 선입견을 내세우지 않고 일단 귀를 여는 것, 이것이 바로 뉴욕 문화 파워의 근원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p123

 뉴욕의 사교육 경쟁은 엄마의 임신 때부터 시작된다. 얼마 전에 뉴욕에 사는 내 친척이 아기를 낳았다. 그 엄마는 아기를 임신하는 순간부터 비상이었다. 일단 미국에서는 유급 육아휴직이라는 개념이 없다. 육아휴직 기간에는 급료가 나오지 않는다. 또 회사 지원 의료보험도 정지된다. 그래서 의료보험료로 한 달에 우리나라 돈으로 수백만 원씩 내야 한다. 휴가 기간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지만, 이런 문제때문에 출산 후에는 가급적 빨리 직장에 복귀한다. 따라서 아기를 보육시설에 맡기기 전까지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 친척은 양가 부모님이 아직 일을 하고 계셔서 아기를 장기간 대신 맡아줄 형편이 못되었다. 그런데 뉴욕에는 육아를 위탁할 수 있는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뉴욕에서 아기를 괜찮은 보육시설에 보내려면 임신 초기부터 신청하고 대기를 하더라도 엄마의 출산휴가 일정에 맞추어서 입학 허가를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중산층 이상은 임신 후 적절한 시기를 보아서 괜찮은 어린이집 여러 군데에 신청을 해둔다. 내 친척은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은 어린이집 중 하나에서 입학을 취소한 아이가 생겨 빨리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마치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듯 좋아했다. 그런데도 입학할 때까지 출산 후 6개월은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비용도 문제다, 안전하고 교육 프로그램이 좋은 곳에서는 보통 한 달 보육료로 400~700만 원을 받는다. 그 비용에도 아기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돌봐준다. 부모 중 한 명은 칼퇴근을 해야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보육료는 수요 공급에 맞추어 변동되기 때문에 이달에는 400만 원이던 것이 다음 달부터는 갑자기 500만 원으로 뛰기도 한다.

 이런 열악한 자녀 교육 환경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뉴욕에서 나간다. 뉴욕의 좁은 아파트보다 낮은 가격으로 인근 외곽지역의 정원 딸린 집을 사서, 아이들에게 맑은 공기를 마시며 마음껏 뛰어 놀도록 하고 부모는 지하철로 출퇴근을 한다. 하지만 일부 뉴요커는 굳이 아기를 뉴욕에서 키운다. 좁은 집 안에 칸막이를 설치해 아기방을 만들고, 어린이집과 유치원, 초등학교까지 내내 을이 되어 산다.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 나는 궁금했다.

 게다가 뉴욕에서는 아이가 10대가 된 후에도 경제적인 고통이 계속된다. 대부분의 뉴욕 부모는 충분한 돈을 벌어 자식을 트리니티나 레지스, 호라스만, 리버데일 가은 검증된 사립 고등학교에 보내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제적인 능력이 뒤따라야 한다. 뉴욕에서 가장 좋은 사립학교 중 하나인 트리니티는 졸업반의 1년 학비가 2017년 기준으로 5만 달러(6천만 원)에 이른다. 아마 지금은 더 올랐을 것이다. 뉴욕 상류층 가정 자녀들의 방탕한 삶을 그려 화제가 된 미국 드마라 <가십 걸>은 나이팅게일-밤포드 고등학교에서 일어났던 몇몇 스캔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는데, 이 학교의 1년 학비는 약 10년 전에 4만 6,500달러였다. 아이비리그 대학교의 학비와 비슷하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 학비만 내는 것이 아니다. 부수적인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 정도 학비라면, 일반 중산층 가정의 맞벌이 부부 수입으로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

 

p136

 

 사회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Richard Nisbett은 아시아인이 서양인에 비해 '인 그룹(나와 잘 아는 사람들의 그룹)'과의 소통에 훨씬 적극적인 반면, '아웃 그룹(나와 사회적으로 관계가 먼 사람들의 그룹)'과의 소통은 서양인에 비해 소극적이라고 <생각의 지도>라는 책에서 쓴 적이 있다.

 

 

 

혐오의 프레임으로 적과 나를 가르는 전략은 우리 보수우파의 정치적 스탠스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대한민국 건국 이후 줄곧 쓰이던 방법론이다.

 

대표적인 것이 빨갱이 프레임이며 이를 통해 친일보수우파는 매국노의 이미지를 상쇄시켜나갔다.

 

이 혐오의 프레임에 의해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사회,경제의 문제가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히 이 책은 한국 보수개신교가 중심이 된 혐오의 프레임에 대해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 위배되는 한국개신교의 도그마적 위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모든 혐오의 프레임을 벗어야 할 필요가 있는 때에 하나의 제시로서 이 책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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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5.

 제자들이 예수 십자가처형 사건을 전후로 배반자가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인생 말년의 행보는 이와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기록된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대부분 '순교'했다. 첫 번째 순교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는 칼로 목이 베여 죽었고(사도행전 12:1-2), 마태는 칼에 맞은 후 시름시름 앓다 죽었으며,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는 돌 맞아 중상을 입은 가운데 끝내 참수당해 죽었고, 유다와 시몬은 예수처럼 십자가형을 당해 죽었고, 도마는 칼에 찔려 죽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30m 높이에서 던저졌고 그래도 살아 있자 곤봉에 맞아 죽었다. 이야기 들어보니 안드레는 십자가에서 죽을 때 "이 순간을 기다렸다"라며 행복해했다고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겠다며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사도들이 예수를 끝까지 따랐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 또는 설화로 보는 관점도 있다.

 

p101.

 열두 명의 남성 제자처럼 예수를 뒤따른 여성 제자가 적지 않아보인다. <누가복음> 8장 2-3절에 나온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라는 여성이 그렇다. 그들은 특정시기에 동네에 나타나신 예수를 한 차례 잘 대접한 정도가 아니다. 그를 수행하며 가사일까지 도운 것으로 추정된다. 식사, 빨래를 도맡아 한 정황이 있다는 것이다. 이중 요안나는 (세례자 요한을 처형했던 헤롯 영주 밑에서 일하던) 공직자를 남편으로 둔 고관의 아내였다.

 그렇다면 성서는 왜 이 여성들의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온전한 존재이지만, 성서의 기자는 온전하지 못하다고 보면 된다. 고대 히브리어나 아람어는 여성을 일컫는 여성명사가 없다고 한다. 오병이어 사건만 보더라도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은 '장정인 남성'만 셈했다. 무엇을 의미하나. 여성은 투명인간이었다.

 하지만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은 <가난한 예수>(동녁, 2017)에서 "예수에게 여성 제자가 실제로 있었다. 그런데 여성제자를 가리키는 단어가 네 복음서에 없으므로 예수에게 여성 제자가 없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존재에서 출발하여 단어를 추적해야 옳은데, 단어에서 출발하여 존재를 추정하는 잘못된 방법을 그들은 택하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p107.

 함석헌 선생이 고난에 대해 풀이했던 말이다.

 

 고난이란 무엇인가. 영이 물질에 대하여, 양심이 욕(망)에 대하여, 생명이 사망에 대하여 항쟁하는 일이다. 생명이 그 반대물을 완전히 극복하는 때까지 고난은 없을 수 없다. 고난이란 살았다는 말이요, 생명이 자란다는 말이다. 도덕적으로 진리적으로 자란다는 말이다. 고난 없이 혼의 완성은 있을 수 없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고 남으로 생명은 일단의 진화를 한다. 핍박을 받음으로 대적을 포용하는 관대가 생기고, 궁핍과 형벌을 참음으로 자유와 고귀를 얻을 수 있다. 고난이 닥쳐올 때 사람은 사탄의 적수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친구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난은 육에서는 뜯어 가지만 영에서는 점점 더 닦아낸다. 고난이 주는 손해와 아픔은 한때이나, 보람과 뜻은 영원한 것이다. 개인에 있어서나 민족에 있어서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

 

p120.

 나는 성서에 기록된 역사를 진리로 믿는다. 그것은 사실로 규명돼서가 아니다.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신념의 영역으로 넘어간 사안이다.

 

p125.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 2003)에서 외세에 기댔다가 단단히 낭패 본 비운의 한반도 역사를 적나라하게 짚었다. 요컨대 이러하다. 고구려를 제압하려고 외세 당나라를 끌어들인 통일신라, 끝내 우리 삶의 기반인 만주를 포기하고 말았다. 만주 잃은 '이빨 빠진 호랑이' 한민족은 거란족, 여진족 등 북방 민족 공세에 숱하게 시달렸다. 고려 윤관, 최영 장군이 꾸준히 북벌을 모색했지만, 반대세력 즉 사대주의 세력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좌절했다. 이로써 조선을 창건한 이성계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에 머물고 말았다. 사대주의자들은 해방공간에서 분단세력으로 세력을 재편해 한반도의 허리를 70년 동안 끊어 그 틈을 점점 벌리고 있다. 기시감의 결정체가 역사라고 했던가.

 "남북 간 군사적 적대관계가 계속되는 한 먹을거리가 생기는 소위 방위산업체, 이렇게 냉전구조 하에서 번성했던 기득권 세력이 분단체제를 계속 연장하려 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진단이다.

 그런데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또 민족의 번영을 위해 함께 새 출발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이런 북한에 대한 의심의 눈길, 쉽게 지울 수 없음도 이해한다. 그러나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번번히 깬 데에는 미국 책임이 크다. 19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 등에서 맺은 약속을 미국은 일방적으로 엎었다. 그래서 북한은 각각 협상파기, 핵실험으로 엇나갔다. 북한의 약속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 없다. 하지만 북한과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면서 비핵화의 길을 가려는 미국의 의지는 단 한 번도 그 진정성을 입증받지 못했다.

 

p134.

 이승만이 독립운동과 담쌓은 점은 김상웅의 저서 <독부 이승만 평전>(책보세, 2012)을 요약한 블로거 '그노마' 님의 글로 정리된다. 다음은 윤문한 것이다.

 

 하와이에서 한인 소년병학교와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한 무장독립운동가 박용만 선생, 끝내 이승만에게 쫓겨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고 재판에 넘겨졌을 때 통역을 요청받았던 이승만은 그들을 살인자라고 규정하더니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변호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후에도 이승만은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테러라고 매도하며 임시정부에 대일 무장투쟁 중단을 요구했다. 하는 행보 하나하나가 어쩌면 그렇게 일본의 이익에 빈틈없이 부합되는지 싶었다. 이뿐 아니다.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라도 'president'라는 직함을 달라고 생떼를 뜨더니 스스로 대통령 명함을 파고 다녔다. 끝내 대통령 직함을 얻었음에도 임시수도 상하이를 떠나 있었다. 한술 더 떠 미국에 눌러앉아 위임통치론 같은 임시정부의 방침에 반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았다"라고 탄식했다. 어쩌면 이 정도는 약과일 수 있다. 외교활동에 쓴다며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의 약 75%를 횡령해 관광 유람을 즐겼다고 하니 이승만 행각에 열불나지 않으면 성자라 할 것이다.

 

 때마침 일본이 패망했다. 독립국 한국의 최고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승만의 노욕이 불붙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승만에게는 국내 권력 기반이 없었다.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킨 민족지사 앞에서 초라하기만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일본을 몰아낸 게 아닌 터, 이승만은 승전한 미군의 수장, 맥아더에게 마음을 사는 것으로써 돌파구를 마련하려 한다. "내가 남한 지도자가 되도록 도와주면 충성을 다하겠다"며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다짐했으리라는 추정은 어렵지 않다. 맥아더는 한국을 지배하던 미군 사령관 하지 준장을 불러 이승만에게 예우할 것을 명한다.

 이승만을 잘 알지 못했던 하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만난 횟수가 더해갈수록 그에 대한 실망감을 노골화했다. 그러다보니 1947년 한국을 떠날 시점에는 이승만과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하지는 송별사에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기회주의적 정치가들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언급된 '기회주이적 정치가들'에 이승만이 포함됐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정용욱 서울대 교수는 하지가 1947년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내용을 소개했다.

 

 그 노인네가 작년에 한 배신행위는 내게는 힘들고 쓰라린 경험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곳에서 미국의 노력에 대해 입에 발린 말을 하고 다녔지만 나는 지난 몇 달씩 그가 뭔가 의심스러운 일을 크게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배신행위'라는 표현이 특정하는 어떤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배신의 행위자 즉 이승만만 주목하면 된다. 배신은 이승만에게 일상이었다. 미군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편지에는 이승만을 겨냥한 'son of a bitch'라는 욕도 담겨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지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이승만은 단독정부 대통령이 됐으니 승자는 이승만인 셈이다. 이승만의 '필살기'는 독립운동가와 미 군정의 틈을 최대한 벌린 것이다. 미국이 치 떨어야 하는 소련을 독립운동가들이 대변한다고 흑색선전을 편 적이다. 이승만의 간계는 통했다.

 그런 이승만은 집권하자마자 여수 순천 시민들을 학살했다. 함포사격도 했다고 했다. 남해에서 함선으로 여수 순천을 겨냥해 포격한 것이다. 여수 순천 사람은 다 죽어도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여수순천사건은 토벌 즉 학살로 봐야 마땅하다.

 여수 순천 민중이 거역한 것은 대한민국 국체가 아니라 제주 토벌 명령이었다. 4.3 사건이 진행 중인 제주도에 가서 '민간인을 죽이라'는 지시 말이다. 여수 순천의 군인은 향토방위 체제에서 군사의 한 축이었던 민중의 뜻, 제주 진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4.3 사건은 그래서 여수순천학살의 연장전이다. 이승만은 당시엔 법에도 없던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수많은 제주도민을 학살했다. 무기를 손에 쥐지 않았던 제주 민간인을 군대가 제압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p172.

 나는 우리에게로 온 하나님의 아들을 과학이나 이성의 틀 위에서 사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생애와 부활이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성서가 말하는 예수의 역사를 신앙으로써 믿으면서도, 그 믿음을 나의 고유한 신념체계 안에 묶어둔다.

 

p175. 인간의 육식

 이런 전제로 <창세기> 1장을 보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거리가 될 것이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거리로 준다."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창세기 1:29-30-

 

 29절과 30절을 쉬 지나쳐서는 안 된다. 여기서 하나님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준다"(30절)라고 했다. 인간이나 동물 모두에게 초식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다가 노아 홍수 사태 이후 조건부 육식을 허용했다. 조건은 기름과 피를 먹지 않는 것이었다. 독일성서공회의 관주성서는 이를 두고 "굶주린 인간이 행여 야만적으로 짐승을 살육할까봐 염려해 제한적으로 허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런 의미에서 동물권도 창조 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독일은 이미 세계 최초로 헌법에 동물권을 명시한 바 있다. 인간이 타인으로부터 고통받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 할 수 있듯 동물에게도 비슷한 권리가 보장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는 동물 축제가 눈에 밟힌다.

 '성공한 지역 축제'로 꼽히는 화천 산천어축제는 외지의 산천어를 부화시킨 뒤 화천 내 좁은 호수로 들여와 그 안에 가둬놓고 사냥감이 되게 하는 축제다. 축제가 끝나면 살아남은 상당수 산천어조차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간다. 이와 관련, 2018년 6월 '동물 축제 반대 축제 기획단'은 동물을 이용한 축제의 84%가 심각한 위해를 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힌 바 있다.

 

 제레미 리프킨이 쓴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2)에서 본 것이다. 소를 뜻하는 영어 'cattle'은 자본은 뜻하는 'capital'과 어원이 같다고 한다. 중세까지 소는 신성한 동물이었고 그 고기가 밥상에 올라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힘들었지만 이는 시장이 형성되기 전 이야기. 어마어마한 수요가 이어졌고 공급도 이에 발맞추면서 양상이 전혀 달라졌다고 한다. 미국 축산업자들은 끝내 대규모 축산 단지 건설을 행했고 이에 상응해서 인디언은 생활터전을 상실해갔다.

 브라질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는 축산업자들의 남미 열대우림 파괴를 반대하다가 1988년 흉탄에 살해당했다. 그렇게 열심히 소의 고기를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생산하다가 인류는 광우병이라는 역풍을 맞았다. 광우병만인가, 닭에게서는 조류 인플루엔자, 돼지는 구제역으로 우리는 절기 행사처럼 역병을 치러야만 한다. 성서의 말씀을 존중한다면 과도한 육식은 삼가는 것이 옳다.

 

p177. 하려면 뚝심 있게

 <레위기>를 보면 굽 있는 짐승을 먹지 말라고 못 박았다. 굽 있는 짐승은 멀리서 찾을 것 없다. '고기의 대명사' 소와 돼지다. 20여 년 전 대학생 때 에피소드. 성서 통독 모임에서 강사 목사님은 "성서(레위기)에 나와 있는 대로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해설했다. 굽 있는 짐승만인가, 비늘 없는 생선도 안된다는 성서의 엄명이 있다. 때마침 점심 공동식사가 이어졌다.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오징어 볶음이 식탁 위에 올랐다. 당시 그 목사님의 묘한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식단에는 그다지 간섭 안 하신 듯 보였다. 

 성서가 동성애를 가증하게 여긴다며 맥락도 배경도 안 따지고 절대 율법시했던 신학교, 그 신학교의 구내식당 메뉴를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돼지고기볶음, 참치 김치찌개가 보였다. 굽 있는 돼지의 고기와 비늘 없는 생선 참치로 구성된 식단이었다. 지행합일, 언행일치도 볶아먹고 끓여 먹은 모양이다.

 

 왜 성서에서 지킬 것, 안 지킬 것을 자의적으로 구분하나. 무식하고 미련해도 지조 있고 용렬하게 '성서대로' 실천한다면 인정받기라도 한다. 성경에서 굽 있는 고기, 비늘 없는 생선 먹지 말라고 하면 뚝심 있게 소, 말, 양, 염소, 돼지, 꽁치, 가물치, 갈치, 넙치, 멸치, 참치, 오징어, 상어, 숭어, 홍어, 고등어 먹지 않아야 한다.

 <로마서> 13장 "모든 권력에 순종하라"해서 박정희 전두환 정부에 순종했다면 뚝심 있게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도 순종해야 한다. 성경에서 "사랑하라"하면 저 좋아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뚝심 있게 동성애자뿐 아니라 빨갱이, 난민, 타종교인도 사랑해야 한다. 보수 신앙을 신주단지처럼 여기는 교인들, 어떤 건 맥락 무시하고 "옳다"가며 믿고, 어떤 건 이런저런 이유 붙여가며 "시대에 맞지 않는다" 하며 일축한다. 안 된다. (여담이다. 언제부터 기독교는 육식에 대해 아무 꺼리낌이 없어졌을까. 토마스 아퀴나스가 활동했던 중세였던 것 같다.)

 

p184.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하나님은 성서에서 자살한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지 않았다. 자살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도 정확한 의중은 '간곡한 만류'이다. <에스겔> 16장6절에 "핏덩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했다"는 말씀이 있다. 이 메시지의 맥락은 극단적으로 소외되거나 절망감에 싸여도 '살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갓난아기가 탯줄을 절단받지 않았고 누구로부터도 씻김받지 않았으며 강보에 싸이지도 않은 채 들에 버려진 상태. 또 맹수가 물어가거나 요행히 그런 일이 없어 굶어 죽어도 관심조차 받지 못할 사정. 이 생각만 해도 참혹한 상황에서도 살라는 당부다. 요컨대 노회찬 형제가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목숨 끊은 이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천국 아닌 다른 곳에 가게 되는 것일까. 목사였던 아버지는 40년 목회를 회고하며 가장 힘든 사역으로 자살자 추도예배를 꼽았다. 그래서 영정 앞에서 고인의 구원 여부 언급은 삼가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내용으로 설교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자살자의 '천국행'에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구원할지 말지는 하나님이 결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좁은 헤아림에 갇혀 판단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사하게라도 '자살한 사람은 지옥 간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세상 떠난 이의 운명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아픈 마음에 파르르 떠는 유가족을 돌보면 된다.

 

 현대 사회에서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살률이 급증한 계기는 1997년 외환위기였다고 한다. <경향신문> 안호기 경제부장의 2014년 1월6일 자 칼럼 중 일부다. 

 "외환위기 이후 자본은 노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구조조정 허울을 씌워 수많은 노동자를 거리로 내몰았다. 양질의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빠진 '신빈곤층'이 크게 늘었다. 탈출구를 찾지 못한 일부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의 자살은 사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사회적 타살'이다.

 사실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 공동체성이 해체되면서 자본이 모든 물적 정신적 주도권을 제패하는 계기가 됐다. '비정규직' '정리해고'가 당연시되면서 '무능한 자' '가난한 자'는 거침없이 잔인하게 솎아졌다. 힘없는 일개인은 그저 '쫄리면 뒈지시던가?'하는 대접을 받았다. 자살자를 탓하려면 이 비정한 사회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다. 삶의 활로가 다 막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송파구 세 모녀를 누가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p186. 어떤 이타적 죽음.

 

 노회찬 형제 죽음은 그렇다면 전태일 열사의 자결과 같은가, 이렇게 물어볼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노회찬 형제가 정치자금법 위반 건에 대한 수사와 처벌이 두려워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는 것, 의원직을 잃는 것이, 그보다 더한 험한 길을 걸어온 노회찬에게 죽음과 맞바꿀 고난일까? 김동호 목사가 한 말이 있다.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역경에 강하다."

 노회찬이 받은 돈의 액수는 매우 적은 것이었다. 대가성 따위도 없었으니 뇌물 수수로 보기 어렵다. 굳이 과실을 물으려 한다면 정치자금법 위반 정도다. 일의 전모가 이렇다면 극단적 선택의 이유를 다른 배경에서 찾음이 온당할 것이다. 혹시 가뜩이나 취약한 지지기반 위에 서 있는 정의당의 앞날 곧 진보정치의 미래가 혹시 자기 일로 인해 타격받지 않을까 염려함은 아니었을지. 노회찬 형제는 자신이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주목받은 현실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허물이 곧 진보정치의 허물이 될까봐, 말하자면 '즈엉이당' 운운하는 자들로부터 진보정치가 통째로 부정당하게 될까봐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그 상황이 현실로 나타나기 전,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손절매하려 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죽음을 결행하기에 앞서 노회찬 형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언 노 전 대통령, 자신의 허물로 비롯된 문제라면 그는 살아서 모든 책임을 졌을 것이다. 그에게는 감옥이 낯설지 않은 공간이다. 노동운동 때문에 수감된 이력이 있었으니까. 또한 자신이 변호사인지라 스스로 버리적 구제의 길을 모르지 않아을 것이다. 당시에도 '서초동' 주변에서는 노 전 대통령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긴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당시 대통령 이명박 씨도 노 전 대통령 명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게 목적이었지 그의 처벌 여부에 대해서는 별무관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견디지 못하게 한 것은 '자신의 뇌물 수수 의혹 수사가 민주진보진영 전체를 폐족으로 만드는 도화선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죄가 없다면 그런 걱정을 왜 하느냐, 모든 시시비비는 법정에서 가려지지 않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사법 영역에서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여론재판은 별개다. 법전에 있는 '무죄 추정 원칙'은 허울일 뿐이고, 짧으면 1년, 길게는 2-3년 동안 일국의 전직 대통령이 재판정에 끌려다니며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는 굴욕을 감내해야 하며, 설령 최종적으로 무죄가 난들 잃어버린 시간 또 사건 이전의 삶을 보장받지 못한다. 여론재판이 이렇다. '심판받지 않는 권력' 검찰은 이렇게 다방면으로 그리고 치명적으로 한 인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할 수 있다. 절대자다.

 실제 '노무현 수자'의 불똥이 튈까봐, 민주당 일각에서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굿바이'를 외치고, 심지어 진보언론에서는 '마지막 승부수'라는 표현을 써가며 극단적 선택을 압박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죽기 전 "자신은 더 이상 개혁의 전범이 될 수 없으므로 노무현을 버리고 가라"고 했다. 노회찬 형제도 "나는 멈추지만, 정의당은 앞으로 나아가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노회찬 형제는 자기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왜, 노무현을 잃고 땅을 쳤으면서도, 노회찬에게 제2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지 못했을까. 통탄하고 또 통탄한다.

 노회찬은 이타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생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자기 명예에 집착함이 없었다. 예수가 그러하지 않았는가. 예수는 죽음을 운명으로 알았다. 강만원 종교칼럼니스트는 "예수님이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고, 그가 또한 핏방울 떨어듯이 땀을 흘리시며 밤이 새도록 처절하게 기도하신 것은 결코 도피가 아니라 몸으 던져 행동하기 위한, 다시 말해 생명을 바쳐 순종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말했다. 병자 또 망자를 고치고, 수천 명을 먹이며, 미친 사람 머리에 침투한 악마를 몸 밖으로 끌어내는 초능력을 지닌 그가 피할 능력이 없어 소수의 로마병정에게 잡혀가 채찍질 등 모욕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렸겠는가. 그는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으니 그것은 의롭고 선한 동기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결심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가. 기독교인은 이를 통해 인류가 죄와 율법,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 광명을 찾았다고 찬송한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을 일이라고 고백한다.

 

p233.

 세월호 마지막 두 실종자 중 한 사람의 어머니가 어느 성탄절엔가 팽목항에 모여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 팽목항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와 함께 계세요. 저 깊고 냄새나는 캄캄한 배에서 하나님은 우리 아이를 안고 계셔요. 우리는 그렇게 믿어요." 

 우치다 타츠루의 시사 만평 모음집.

일본의 정치,경제,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진보적 스탠스를 취하는 언론인이라 일본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꽤나 유익하다.

특히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일본사회의 변화에 대한 일본 진보지식인의 감상과 생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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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6. '고학'을 권함

 일본 대학의 수업료는 비싸도 너무 비싸다. 국립대학도 첫해 납입금이 80만 엔을 넘는다. 수업료 감면이나 장학금 등 구제 대책은 있지만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학생 스스로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70년에는 국립대학 입학금이 4000엔, 한 학기 수업료가 6000엔.... 창구에 1만 엔 지폐를 내면 학생증을 받을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시급이 600엔이었으니까 2시간 일하면 한 달 학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학생들은 부모의 지갑에 손대지 않고 고학苦學할 수 있었다.

 그 후 교육행정 지도에 의해 학비는 급커브를 그리며 상승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고학생'이 사라졌다.

 고학이 불가능해진 탓에 사회는 엄청나게 변했다. 하나는 진로 결정에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자식이 '하고 싶은 일'과 부모가 '시키고 싶은 일'은 대개 다르기 마련이다. 고학이 불가능해졌다는 말은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부모가 절대로 동의해주지 않을 것 같은 분야)'를 단념하는 아이들이 아마 수백만 명 단위로 출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본의 지적 생산성을 얼마나 떨어뜨렸던 것일까? 그것 때문에 잃어버린 지적 자산은 수업료의 인상으로 국고에 거두어들인 금액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2009년 3월9일)

p168. 조직이 바라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다.

 많은 학생들은 취직 준비를 수험 공부와 비슷하다고 여긴다. 성적이 우수하고, 말솜씨가 빼어나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뽑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떨어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채용 여부의 기준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다. 모든 조직은 집단의 수행 능력을 향상시키는 사람을 원한다. 조직이 바라는 인간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마음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런 자질은 반드시 '능력'과 일치하지 않는다.

 아무 조건 없이 리더를 지원해주는 '예스맨'의 능력ㄷ, 집단 내부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분위기 메이커'의 능력도, 논쟁이 달아오를 때 삐딱한 역설을 통해 찬물을 끼얹는 '심통쟁이'의 능력도, 하나같이 집단이 건전하게 기능하는 데 꼭 필요한 능력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수험 경쟁을 통해 배운 것은 탁 까놓고 말해 '타자의 능력 발휘를 방해하고 그 평가를 깍아내리는' 기술이다. 그런 능력은 현실 사회로 나갔을 때 백해무익하다. 경쟁 상대를 필사적으로 떨어뜨리려고 발버둥치는 학생은 경쟁 심리 때문에 면접관에세 낮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누구도 학생들에게 이를 가르쳐주지 않는다.(2009년 4월20일)

p170. 될수록 캠퍼스에 오래 머물라.

 신학기 오리엔테이션에서 신입생에게 학생 생활의 기본적인 요령을 말해주었다. 그것은 '될수록 오랜 시간을 캠퍼스에서 지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수강신청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아야 한다. 대학생의 수업은 강의 1시간 당 예습과 복습에 드는 2시간을 더해야 한다는 전제 때문이다.(15주 동안 이렇게 3시간이 들어가는 강의를 1학점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것이 빈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시간 수업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두어 배 시간을 더 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은 경험상 맞는 말이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고 밥을 먹은 뒤에 '휴식'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식이 온몸에 속속들이 퍼지게 하려면 앞뒤로 그 정도의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또 하나의 요령은 될수록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학생은 '가난을 기본으로' 생활을 설계해야 한다. 가난하면 캠퍼스를 떠돌아다니는 정도밖에 할 일이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예배 시간에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듣고, 정원에서 꽃을 바라보고, 교사 사이를 산책한다. 그러는 동안 만약 학생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아름다운 것' '지적인 고양을 느끼게 하는 것'을 추구했다면, 그것은 이미 '배움'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심신의 감도를 높일 수 있는 곳이야말로 학교라는 공간이다. 또한 이것이 대학이 학생들에게 제공해주는 가장 훌륭한 선물이다. 건투를 빈다.(2009년 5월4일)

p210. 정치인들이 실언을 반복하는 이유.

 자, 청중을 이끌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방금 즉흥적으로 생각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 이 방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요즘의 예능인이다.

p238. '일시적으로나마 안심할 수 있는 말'을 듣고 싶다.

 민주당의 대표 선거가 끝나고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이 발족했다. 이 내각의 긴급한 과제는 당내 통합과 야당과의 협조다.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최우선의 정치 과제인 것이다. 이 선택에는 현재 일본에 만연한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는 동안 어떻게든 되겠찌'하는 체념과 어렴풋한 희망이다.

 대지진의 피해, 쓰나미,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국나의 위기 직후에는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재편에 착수해야 한다는(분노와 슬프이 뒤섞인) 목소리가 일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후 반년 동안 정부와 지방자치 단체의 졸렬한 대응, 정보의 조작과 은폐, 기득권층의 반격 같은 흐름 속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차츰차츰 잦아들었다. 시스템의 기능 저하가 지나차게 심각한 상태라서 근본적인 재편 같은 것은 바랄 수도 없다는 현실을 뼛속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치가, 관료, 경제인, 방송인 등을 통틀어 일본의 지배 체제에는 신뢰할 만한 인물이 없다. 일본 국민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들 어떤 변화도 시도하지 않으리나는 깊은 절망에 익숙해지고 있다.

 '성장 전략 없이 재정의 재건은 있을 수 없다.' 오늘도 신문에는 이 말이 쓰여 있었다. 아마도 이 말을 쓴 장본인도 '성장 전략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달리 쓸 말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쓴다. '성정 전략 없는 재정 재건'이란 '오로지 가난해 질 뿐'이라는 뜻이다. 우리도 필시 그렇게 되리라고 마음속 깊이 생각한다. 다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중뿔나 보이기'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다.

 따라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중뿔나게 나서지 않는' '귀에 거슬리는 말은 하지 않는' 총리의 등장은 '시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가면 일본은 불가피하게 가난하고 활기 없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래도 그 속도를 늦출 수는 있다. 파국을 맞이하는 시기를 연기할 수는 있다. 그렇게 해서 '시간 벌기'를 하는 동안 외부로부터 생각하지 못한 어떤 계기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일본인은 이렇게 미미한 기대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하다못해 '일시적으로나마 안심할 수 있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2011년 9월12일)

p260. 백성의 안녕은 지고의 법

 국회 질문에서 아베 총리는 민주당 의원에게 인권에 대한 조문을 질문받았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자, 총리는 일본국 헌법에서 포괄적인 인권 보장을 정한 조문이 몇 조인지 알지 못한다고 이해해도 좋겠습니까?"하고 질타당하는 인상 깊은 사건이 있었다. 개헌파의 우두머리가 '숙적'과 같은 포괄적 인권 보장을 정한 조문을 잊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는 보지 않지만, '그런 것은 없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라면 언젠가 그것의 존재 자체가 흐릿해지기도 하는 법이다. 어쩌면 총리가 생각하는 일본국 헌법은 벌써 불확실한 것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헌법 13조의 조문은 이렇다. "모든 국민은 개인으로서 존중받는다. 생명,자유 및 행복 추구에 대한 국민의 권리는 공공복지에 반하지 않는 한 입법 등 국정 안에서 최대의 존중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자민당의 헌법 개정 초안은 이렇다. "모든 국민은 사람으로서 존중받는다. 생명, 자유 및 행복 추구에 대한 국민의 권리는 공익 및 공공질서에 반하지 않는 한 입법 등 국정 안에서 최대한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지금의 '공공복지'를 개정안이 '공익 및 공공질서'로 바꾼 것이다. '공공복지'는 기본적 인권을 정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법적 근거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오랫동안 헌법학의 논쟁거리였고, 지금도 단일화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자민당의 개정안은 여기에 '공익 및 공공질서'라는 한정적이고 일의적인 해석을 부여한 것이다.

 '공공복지'라는 말의 용례는 저 멀리 법에 관한 키케로(Cicero)의 격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성의 안녕 salus populi은 지고의 법이다" 법치국가는 이것에 위배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그러나 '백성의 안녕'과 '공익 및 공공질서'는 말뜻이 다르다. 라틴어 salus는 '건강,행복,안녕,무사,생존'이라는 내포하기 때문이다. '공익과 공공질서'의 유지는 '백성의 안녕'을 위한 요건의 일부이기는 해도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공익과 공공질서를 지키기 위해 백성의 행복과 생존을 희생시키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통치자는 역사상 무수히 많았고, 지금도 많다.(2013년4월15일)

p263.

 공인의 적성은 '자신의 반대자를 포함해 집단을 댚해내겠다는' 각오에 달려 있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 

 자신을 지지하고 동의하는 사람만 대표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리 거대한 조직을 이끈다고 할지라도 '권력을 가진 사인私人'일 따름이다. 나는 '공인'이 통치자의 사리에 오르기를 바란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e Ortega y Gasset는 자유민주주의를 "적과 함께 살아가고, 반대자와 함께 통치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렇게 기술했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역설적이고, 이토록 우아하고, 이토록 곡예와 비슷하고, 이토록 반자연적인 것을 생각해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참으로 잘 짚어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말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정치적 이상이 있다고 할 수 있을가?

p268. 귀담아들어야 할 자연과학지의 조언

 영국의 종합학술잡지 <네이처>가 (2013년) 9월5일자에 '핵 에러'라는 제목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문제를 다룬 논설을 게재했다. 그 글은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의 원자력발전소 사고 처리가 부적절하다는 점을 상당히 날카롭게 지적했다. 자연과학 학술지가 한 나라의 정부와 민간 기업이 저지른 그릇된 행적을 대상으로 논란을 벌이는 일은 지극히 예외적이다.

 '무책임하다고까지는 못해도 부주의한' 도쿄전력의 감시 시스템에 의해 오염수 탱크에서 새어나온 누수를 체크하지 못했다는 점. 당초에 '단순한 이상'이라고 경시한 누수가 실은 사고 이후 최대 규모의 '진짜 위기'였다는 점. 위기를 언제나 과소평가하고 정보를 불충분하게 제공해왔다는 점에 그 논설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일본정부나 도쿄전력이나 과학자의 시각으로 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무시해왔다. 오염수가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가 세계적인 환경 문제에 파급을 미치지는 않을까, 국제사회는 진심으로 우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글은 일본이 전세계 연구자의 지원과 전문적인 조언을 바탕으로 국력을 기울여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그런데도 이 나라 사람들은 올림픽 유치와 그에 따른 경제적 효과에 들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원자력발전소 문제에 대해 매스컴이 집중적으로 질문을 퍼붓자 올림픽 유치위원회 이사장은 초조한 나머지, "도쿄와 후쿠시마는 250킬로미터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후쿠시마의 사고를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으로 여길 수 없다'는 위기감이 세계적으로 드높아지고 있을 때, 일본인은 태연하게 '후쿠시마의 사고는 강 건너 불구경'이라고 말해버린 꼴이다. 아베 총리는 "오염수의 영향은 원자력발전 사고가 일어난 항만 내로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고 하고, "지금까지도 그렇고, 현재나 미래에도 건강에는 문제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앞의 논설을 이렇게 서술한다. "일본은 지원을 위한 조언을 얻기 위해 국제적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되었다. 연구와 오염 제거를 위한 국제적인 연대는 모니터링과 위기관리의 유용성과 유효성을 둘러싸고 산산히 무너진 공적 신뢰를 회복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대체 어떻게 '산산이 무너진 공적 신뢰'를 회복할 셈인가? 그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다.(2013년 9월23일)

p276. 진심으로 '전쟁'을 의식하고 있는 정부

 국가안전보장회의 관련법, 특정비밀보호법, 공모죄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은 아베 정권이 진심으로, '전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일본 국민이 '진심으로 전쟁을 개시할 마음이 있는 정부를 받든 것은 전후 처음이다. 최근 2개월 동안 일본은 법제적으로 '언제라도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고 말았다.

 만약 내각총리대신이 센카쿠 열도 근처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군사적 충돌을 '영해 침입, 불법 상륙 사안'으로 인정한다면, 그래서 '신속하고 적절한' 군사 행동을 개시함으로써 전투 행위가 벌어진다면,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포기할 것"이라는 헌법 9조는 사실상 폐기된다. 정책 결정 과정에 어떤 정보가 올라가고, 어던 논의가 이루어지고, 무엇을 결정했는가에 대해 국민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곳에서 논의한 것은 '국가의 안전 보장에 관련된 특정 비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동중국해에서 어떤 중대 사안이 발생했고, 정부가 그것에 신속하게 적절하게 대응했다'는 '대본영의 발표'를 얼빠진 표정으로 듣는 것 말고는 할수 있는 일이 없다.

 10월에 열린 자위대 열병식에서 아베 총리는 "방위력은 그 존재만으로 억지력이 된다는 종래의 발상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핵 억지력은 '상호확증파괴'에 의해 성립한다. 핵을 사용하면 어느 쪽이든 멸망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서로 억지하도록 기능하겠다는 합의가 핵전략을 '정당화'해왔다. 아베 총리가 상정하는 것은 서로 확실하게 파괴한 적이 없는 수준의 전쟁이다. 완전하게 '통제 아래'있는 전쟁, 말하자면 비전투원도 죽이지 않고, 도시도 파괴하지 않ㅎ고, 매스컴이 호전적인 여론을 떠들기만 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위신만 과시할 수 있는 '계획적이고 비용 대비 효과가 좋은 전쟁'말이다. 아베 총리는 과연 그런 전쟁이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사용할 수 있는 억지력'이라는 발상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일본 국민은 두 번에 걸친 국정 선거를 통해 '민주당을 따끔하게 혼내주겠다'든지 '결정할 수 있는 정치'라든지 '뒤틀림 해소'같은 일상어로 정치를 논했다. 그러는 동안 비일상적인 상황으로 빠져들고 말았다.(2019년12월30일)

p279.

 애초부터 오키나와에 기지가 들어서야 할 지정학적 이유는 없다. 미군 기지가 훗카이도에 없고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소련'을 적국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훗카이도를 통해 남하하면서 일본 열도의 방어 거점을 모조리 파괴하더라도 미군의 주력이 주둔한 오키나와만큼은 온전하게 남는다. 오키나와 기지는 이를 위한 포진이다. 따라서 미국의 가상 적국인 소련이 사라진 오늘날, 미군이 오키나와에 꼭 있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

p280.

 비상사태가 발생해 모든 재산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몸 하나만 달랑 도피하려고 할 때, 금이라면 최대 10킬로그램(약 4500만엔, 2019년 11월6일 현재 대한민국 기준 5.5억원)쯤 소지할 수 있다. 그래도 걷고 달리는 동안 허리가 아프고 원망스러울 것이다.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재산의 한도는 기껏해야 이 정도다. 그것을 실감으로 표상해내는 것이 금이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떡거렸다. 분수에 넘치게 자산을 갖고 있으면 거추장스러워진다. 그렇다면 '희사'하는 것이 좋다. 희사하기 싫은 사람은 병에 넣어 땅에 파묻어도 좋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살아있는 인간의 몸으로 제어할 수 없는 돈은 타인에게 주는 것 말고는 사용할 길이 없다. 이렇게 하면 부의 편재는 해소할 수 있다.

p286. '개헌파'가 아니라 '폐헌파'라고 이름 붙여야

 헌법기념일에 자민당의 헌법개정추진본부장 후나다 하지메(船田元)는 "9조 개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위기적 상황을 생각하면 해석의 확대에 의해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명문 개헌의 방향은 어디까지나 유지한다고 한다. 즉 "임시변통일지도 모르지만 이해하기 쉬운 환경권 등을 부가하는 것을 첫 번째 국민투표에 부치고, 그 다음 사람들이 개정에 익숙해지고 나서 9조 개정에 착수하고 싶다." 솔질한 발언이다.

 해석 개헌으로 나갈 수 있는 데까지 나가고, 그것이 무리라면 명문 개헌으로 나가려는 정치가는 헌법 이념의 실현보다 그가 속한 정당의 정책 실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헌법을 철저하게 경시할 수 있는 정치가들이 뻔뻔한 낯짝으로 헌법 운운하고 이야기하는 꼴을 보면 속이 거북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아베 총리대신은 헌법 99조가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할 공무원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음에도 헌법에 결점이 있다드니, 애초부터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드니 하면서 헌법의 실질적인 공동화空洞化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속한 당의 개헌 초안 102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국민은 이 헌법을 존중해야 한다." 즉 국민 전체에게 헌법을 준수할 의무와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다는 이러한 헌법관이 마음에 걸린다. 왜냐하면 순조롭게 개헌에 성공한 뒤 그가 현행 헌법을 대한 것처럼 국민이 신헌법을 대할 때, 총리는 어떤 논리로 그것을 금지할 생각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나는 공문원이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지만, 제군은 내가 정한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해야 한다." 이런 요구를 관철하려면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헌법은 그때마다 정부의 형편에 따라 지킬 수도 있고 폐지할 수도 있는 일개 정치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는 이런 리얼리즘도 '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머릿속에 있는 생각에 맞추어 정당의 강령도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고 싶다.

 차라리 '헌법 폐지'가 낫지 않겠는가? 긴요한 사안은 내각회의에서 결정해서 주저 없이 실시하면 그뿐이다. 입법부의 심의에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 헌법 조문을 내각의 형편에 따라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 이것을 통치의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을 '개헌파'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폐헌파'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타당하리라.(2014년 5월19일)

p320.

 이러한 사고방식의 밑바탕에는 글로벌리스트의 공통적인 생각, 즉 '모든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인간관이 깔려있다.

 그러나 일정한 비율로 '돈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인간'이 없다면 나라는 멸망한다. '돈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인간'은 그런 의미에서 '나라의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돈으로 움직이는 이유는 세계 어디에서나 비슷하지만, 어떤 사람이 '돈으로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국제적인 공통성이 없다. '이곳에서만 통하는' 국지성이 최후의 순간에 한 나라의 토대를 받쳐주는 것이다.(2011년 3월7일)

p322. 다시, 폐를 끼치는 삶을 배우자

 소프트뱅크의 손 마사요시孫正義 사장이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자 구제를 위해 100억 엔과 공무원의 보수 전액을 기부하겠다고 한 발언이 화제로 올랐다. 그전에는 야나기 다다시柳井正 유니클로 사장(유니클로 창업자)이 개인적으로 10억 엔, 프로골퍼 이시카와 료石川遼 씨가 2억 엔을 '목표'로 상금을 기부하겠다고 한 것을 매스컴이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기사에 반드시 '냉소적'인 어조가 감돌았겠지만 이번 보도에서는 누구나 냉소를 삼갔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위선적'이라는 둥, '이름을 판다'는 둥, '잘못을 무마하려는 면피용'이라는 둥...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이러한 상투적인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는 커다란 흐름 변화가 아닐까 한다. '공공의 복리를 위해 사재를 터는 행위'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까지만 해도 '성공을 거두고 이름을 날린' 인물이 짊어진 의무였다. 그때는 다들 한 사람이 거둔 사회적 성공이 무수한 사람들의 지원 덕분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성공을 자신의 노력이 거둔 결과로 보고 독점하려는 태도는 '잘못'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생각이 상식으로 통하지 않게 된 지 반세기가 흘렀다. 그후 오랫동안 사람들은 '내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남이 나한테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을 모범적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풍요롭고 안전한 시대는 오래 가지 않았다. 우리는 또다시 '남에게 폐를 끼치기도 하고 남이 나한테 폐를 끼치기도 하는' 삶을 학습해야 했다. 옛날에도 그럴 수 있었으니까 오늘날에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2011년 4월18일)

p325.

 인생은 어긋남의 연속이다. 우리는 대학도 잘못 선택하고, 취직할 회사도 잘못 선택하고, 배우자도 잘못 선택한다. 그럼에도 어떻게 상황을 헤쳐 나가느냐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다. "자원봉사자의 선의와 현장의 요구가 어긋난다고 해서 풀이 죽을 것은 없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더니 젊은 건축가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피해 지역에 갈게요. 그 사람들이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이더라도 커튼 치는 일을 계속할게요." 그렇지, 그렇게 하면 되는거야.(2011년 5월2일)

p328. '만사는 돈 문제'라는 사람의 속마음.

 대지진의 피해가 발생한 직후 블로그에 '소개

 우치다 타츠루의 시사 만평 모음집.

 

일본의 정치,경제,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진보적 스탠스를 취하는 언론인이라 일본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꽤나 유익하다.

 

특히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일본사회의 변화에 대한 일본 진보지식인의 감상과 생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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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6. '고학'을 권함

 

 일본 대학의 수업료는 비싸도 너무 비싸다. 국립대학도 첫해 납입금이 80만 엔을 넘는다. 수업료 감면이나 장학금 등 구제 대책은 있지만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학생 스스로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70년에는 국립대학 입학금이 4000엔, 한 학기 수업료가 6000엔.... 창구에 1만 엔 지폐를 내면 학생증을 받을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시급이 600엔이었으니까 2시간 일하면 한 달 학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학생들은 부모의 지갑에 손대지 않고 고학苦學할 수 있었다.

 

 그 후 교육행정 지도에 의해 학비는 급커브를 그리며 상승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고학생'이 사라졌다.

 

 고학이 불가능해진 탓에 사회는 엄청나게 변했다. 하나는 진로 결정에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자식이 '하고 싶은 일'과 부모가 '시키고 싶은 일'은 대개 다르기 마련이다. 고학이 불가능해졌다는 말은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부모가 절대로 동의해주지 않을 것 같은 분야)'를 단념하는 아이들이 아마 수백만 명 단위로 출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본의 지적 생산성을 얼마나 떨어뜨렸던 것일까? 그것 때문에 잃어버린 지적 자산은 수업료의 인상으로 국고에 거두어들인 금액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2009년 3월9일)

 

p168. 조직이 바라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다.

 

 많은 학생들은 취직 준비를 수험 공부와 비슷하다고 여긴다. 성적이 우수하고, 말솜씨가 빼어나고,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뽑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떨어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채용 여부의 기준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다. 모든 조직은 집단의 수행 능력을 향상시키는 사람을 원한다. 조직이 바라는 인간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마음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런 자질은 반드시 '능력'과 일치하지 않는다.

 

 아무 조건 없이 리더를 지원해주는 '예스맨'의 능력ㄷ, 집단 내부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분위기 메이커'의 능력도, 논쟁이 달아오를 때 삐딱한 역설을 통해 찬물을 끼얹는 '심통쟁이'의 능력도, 하나같이 집단이 건전하게 기능하는 데 꼭 필요한 능력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수험 경쟁을 통해 배운 것은 탁 까놓고 말해 '타자의 능력 발휘를 방해하고 그 평가를 깍아내리는' 기술이다. 그런 능력은 현실 사회로 나갔을 때 백해무익하다. 경쟁 상대를 필사적으로 떨어뜨리려고 발버둥치는 학생은 경쟁 심리 때문에 면접관에세 낮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누구도 학생들에게 이를 가르쳐주지 않는다.(2009년 4월20일)

 

p170. 될수록 캠퍼스에 오래 머물라.

 

 신학기 오리엔테이션에서 신입생에게 학생 생활의 기본적인 요령을 말해주었다. 그것은 '될수록 오랜 시간을 캠퍼스에서 지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수강신청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아야 한다. 대학생의 수업은 강의 1시간 당 예습과 복습에 드는 2시간을 더해야 한다는 전제 때문이다.(15주 동안 이렇게 3시간이 들어가는 강의를 1학점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것이 빈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시간 수업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두어 배 시간을 더 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은 경험상 맞는 말이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고 밥을 먹은 뒤에 '휴식'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식이 온몸에 속속들이 퍼지게 하려면 앞뒤로 그 정도의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또 하나의 요령은 될수록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학생은 '가난을 기본으로' 생활을 설계해야 한다. 가난하면 캠퍼스를 떠돌아다니는 정도밖에 할 일이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예배 시간에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듣고, 정원에서 꽃을 바라보고, 교사 사이를 산책한다. 그러는 동안 만약 학생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아름다운 것' '지적인 고양을 느끼게 하는 것'을 추구했다면, 그것은 이미 '배움'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심신의 감도를 높일 수 있는 곳이야말로 학교라는 공간이다. 또한 이것이 대학이 학생들에게 제공해주는 가장 훌륭한 선물이다. 건투를 빈다.(2009년 5월4일)

 

p210. 정치인들이 실언을 반복하는 이유.

 

 자, 청중을 이끌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방금 즉흥적으로 생각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 이 방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요즘의 예능인이다.

 

p238. '일시적으로나마 안심할 수 있는 말'을 듣고 싶다.

 

 민주당의 대표 선거가 끝나고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이 발족했다. 이 내각의 긴급한 과제는 당내 통합과 야당과의 협조다.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최우선의 정치 과제인 것이다. 이 선택에는 현재 일본에 만연한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는 동안 어떻게든 되겠찌'하는 체념과 어렴풋한 희망이다.

 

 대지진의 피해, 쓰나미, 원자력 발전소 사고라는 국나의 위기 직후에는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재편에 착수해야 한다는(분노와 슬프이 뒤섞인) 목소리가 일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후 반년 동안 정부와 지방자치 단체의 졸렬한 대응, 정보의 조작과 은폐, 기득권층의 반격 같은 흐름 속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차츰차츰 잦아들었다. 시스템의 기능 저하가 지나차게 심각한 상태라서 근본적인 재편 같은 것은 바랄 수도 없다는 현실을 뼛속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치가, 관료, 경제인, 방송인 등을 통틀어 일본의 지배 체제에는 신뢰할 만한 인물이 없다. 일본 국민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들 어떤 변화도 시도하지 않으리나는 깊은 절망에 익숙해지고 있다.

 

 '성장 전략 없이 재정의 재건은 있을 수 없다.' 오늘도 신문에는 이 말이 쓰여 있었다. 아마도 이 말을 쓴 장본인도 '성장 전략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달리 쓸 말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쓴다. '성정 전략 없는 재정 재건'이란 '오로지 가난해 질 뿐'이라는 뜻이다. 우리도 필시 그렇게 되리라고 마음속 깊이 생각한다. 다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중뿔나 보이기'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다.

 

 따라서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 '중뿔나게 나서지 않는' '귀에 거슬리는 말은 하지 않는' 총리의 등장은 '시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가면 일본은 불가피하게 가난하고 활기 없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래도 그 속도를 늦출 수는 있다. 파국을 맞이하는 시기를 연기할 수는 있다. 그렇게 해서 '시간 벌기'를 하는 동안 외부로부터 생각하지 못한 어떤 계기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일본인은 이렇게 미미한 기대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하다못해 '일시적으로나마 안심할 수 있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2011년 9월12일)

 

p260. 백성의 안녕은 지고의 법

 

 국회 질문에서 아베 총리는 민주당 의원에게 인권에 대한 조문을 질문받았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자, 총리는 일본국 헌법에서 포괄적인 인권 보장을 정한 조문이 몇 조인지 알지 못한다고 이해해도 좋겠습니까?"하고 질타당하는 인상 깊은 사건이 있었다. 개헌파의 우두머리가 '숙적'과 같은 포괄적 인권 보장을 정한 조문을 잊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는 보지 않지만, '그런 것은 없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라면 언젠가 그것의 존재 자체가 흐릿해지기도 하는 법이다. 어쩌면 총리가 생각하는 일본국 헌법은 벌써 불확실한 것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헌법 13조의 조문은 이렇다. "모든 국민은 개인으로서 존중받는다. 생명,자유 및 행복 추구에 대한 국민의 권리는 공공복지에 반하지 않는 한 입법 등 국정 안에서 최대의 존중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자민당의 헌법 개정 초안은 이렇다. "모든 국민은 사람으로서 존중받는다. 생명, 자유 및 행복 추구에 대한 국민의 권리는 공익 및 공공질서에 반하지 않는 한 입법 등 국정 안에서 최대한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지금의 '공공복지'를 개정안이 '공익 및 공공질서'로 바꾼 것이다. '공공복지'는 기본적 인권을 정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법적 근거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오랫동안 헌법학의 논쟁거리였고, 지금도 단일화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자민당의 개정안은 여기에 '공익 및 공공질서'라는 한정적이고 일의적인 해석을 부여한 것이다.

 

 '공공복지'라는 말의 용례는 저 멀리 법에 관한 키케로(Cicero)의 격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성의 안녕 salus populi은 지고의 법이다" 법치국가는 이것에 위배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그러나 '백성의 안녕'과 '공익 및 공공질서'는 말뜻이 다르다. 라틴어 salus는 '건강,행복,안녕,무사,생존'이라는 내포하기 때문이다. '공익과 공공질서'의 유지는 '백성의 안녕'을 위한 요건의 일부이기는 해도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공익과 공공질서를 지키기 위해 백성의 행복과 생존을 희생시키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통치자는 역사상 무수히 많았고, 지금도 많다.(2013년4월15일)

 

p263.

 

 공인의 적성은 '자신의 반대자를 포함해 집단을 댚해내겠다는' 각오에 달려 있다. 나머지는 부차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 

 

 자신을 지지하고 동의하는 사람만 대표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리 거대한 조직을 이끈다고 할지라도 '권력을 가진 사인私人'일 따름이다. 나는 '공인'이 통치자의 사리에 오르기를 바란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e Ortega y Gasset는 자유민주주의를 "적과 함께 살아가고, 반대자와 함께 통치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렇게 기술했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역설적이고, 이토록 우아하고, 이토록 곡예와 비슷하고, 이토록 반자연적인 것을 생각해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참으로 잘 짚어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말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정치적 이상이 있다고 할 수 있을가?

 

p268. 귀담아들어야 할 자연과학지의 조언

 

 영국의 종합학술잡지 <네이처>가 (2013년) 9월5일자에 '핵 에러'라는 제목으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문제를 다룬 논설을 게재했다. 그 글은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의 원자력발전소 사고 처리가 부적절하다는 점을 상당히 날카롭게 지적했다. 자연과학 학술지가 한 나라의 정부와 민간 기업이 저지른 그릇된 행적을 대상으로 논란을 벌이는 일은 지극히 예외적이다.

 

 '무책임하다고까지는 못해도 부주의한' 도쿄전력의 감시 시스템에 의해 오염수 탱크에서 새어나온 누수를 체크하지 못했다는 점. 당초에 '단순한 이상'이라고 경시한 누수가 실은 사고 이후 최대 규모의 '진짜 위기'였다는 점. 위기를 언제나 과소평가하고 정보를 불충분하게 제공해왔다는 점에 그 논설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일본정부나 도쿄전력이나 과학자의 시각으로 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무시해왔다. 오염수가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가 세계적인 환경 문제에 파급을 미치지는 않을까, 국제사회는 진심으로 우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글은 일본이 전세계 연구자의 지원과 전문적인 조언을 바탕으로 국력을 기울여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그런데도 이 나라 사람들은 올림픽 유치와 그에 따른 경제적 효과에 들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원자력발전소 문제에 대해 매스컴이 집중적으로 질문을 퍼붓자 올림픽 유치위원회 이사장은 초조한 나머지, "도쿄와 후쿠시마는 250킬로미터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후쿠시마의 사고를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으로 여길 수 없다'는 위기감이 세계적으로 드높아지고 있을 때, 일본인은 태연하게 '후쿠시마의 사고는 강 건너 불구경'이라고 말해버린 꼴이다. 아베 총리는 "오염수의 영향은 원자력발전 사고가 일어난 항만 내로 완전히 차단하고 있다"고 하고, "지금까지도 그렇고, 현재나 미래에도 건강에는 문제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앞의 논설을 이렇게 서술한다. "일본은 지원을 위한 조언을 얻기 위해 국제적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되었다. 연구와 오염 제거를 위한 국제적인 연대는 모니터링과 위기관리의 유용성과 유효성을 둘러싸고 산산히 무너진 공적 신뢰를 회복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대체 어떻게 '산산이 무너진 공적 신뢰'를 회복할 셈인가? 그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다.(2013년 9월23일)

 

p276. 진심으로 '전쟁'을 의식하고 있는 정부

 

 국가안전보장회의 관련법, 특정비밀보호법, 공모죄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은 아베 정권이 진심으로, '전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일본 국민이 '진심으로 전쟁을 개시할 마음이 있는 정부를 받든 것은 전후 처음이다. 최근 2개월 동안 일본은 법제적으로 '언제라도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고 말았다.

 

 만약 내각총리대신이 센카쿠 열도 근처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군사적 충돌을 '영해 침입, 불법 상륙 사안'으로 인정한다면, 그래서 '신속하고 적절한' 군사 행동을 개시함으로써 전투 행위가 벌어진다면,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포기할 것"이라는 헌법 9조는 사실상 폐기된다. 정책 결정 과정에 어떤 정보가 올라가고, 어던 논의가 이루어지고, 무엇을 결정했는가에 대해 국민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곳에서 논의한 것은 '국가의 안전 보장에 관련된 특정 비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동중국해에서 어떤 중대 사안이 발생했고, 정부가 그것에 신속하게 적절하게 대응했다'는 '대본영의 발표'를 얼빠진 표정으로 듣는 것 말고는 할수 있는 일이 없다.

 

 10월에 열린 자위대 열병식에서 아베 총리는 "방위력은 그 존재만으로 억지력이 된다는 종래의 발상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핵 억지력은 '상호확증파괴'에 의해 성립한다. 핵을 사용하면 어느 쪽이든 멸망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서로 억지하도록 기능하겠다는 합의가 핵전략을 '정당화'해왔다. 아베 총리가 상정하는 것은 서로 확실하게 파괴한 적이 없는 수준의 전쟁이다. 완전하게 '통제 아래'있는 전쟁, 말하자면 비전투원도 죽이지 않고, 도시도 파괴하지 않ㅎ고, 매스컴이 호전적인 여론을 떠들기만 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위신만 과시할 수 있는 '계획적이고 비용 대비 효과가 좋은 전쟁'말이다. 아베 총리는 과연 그런 전쟁이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믿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사용할 수 있는 억지력'이라는 발상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일본 국민은 두 번에 걸친 국정 선거를 통해 '민주당을 따끔하게 혼내주겠다'든지 '결정할 수 있는 정치'라든지 '뒤틀림 해소'같은 일상어로 정치를 논했다. 그러는 동안 비일상적인 상황으로 빠져들고 말았다.(2019년12월30일)

 

p279.

 

 애초부터 오키나와에 기지가 들어서야 할 지정학적 이유는 없다. 미군 기지가 훗카이도에 없고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소련'을 적국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훗카이도를 통해 남하하면서 일본 열도의 방어 거점을 모조리 파괴하더라도 미군의 주력이 주둔한 오키나와만큼은 온전하게 남는다. 오키나와 기지는 이를 위한 포진이다. 따라서 미국의 가상 적국인 소련이 사라진 오늘날, 미군이 오키나와에 꼭 있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

 

p280.

 

 비상사태가 발생해 모든 재산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몸 하나만 달랑 도피하려고 할 때, 금이라면 최대 10킬로그램(약 4500만엔, 2019년 11월6일 현재 대한민국 기준 5.5억원)쯤 소지할 수 있다. 그래도 걷고 달리는 동안 허리가 아프고 원망스러울 것이다.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재산의 한도는 기껏해야 이 정도다. 그것을 실감으로 표상해내는 것이 금이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떡거렸다. 분수에 넘치게 자산을 갖고 있으면 거추장스러워진다. 그렇다면 '희사'하는 것이 좋다. 희사하기 싫은 사람은 병에 넣어 땅에 파묻어도 좋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살아있는 인간의 몸으로 제어할 수 없는 돈은 타인에게 주는 것 말고는 사용할 길이 없다. 이렇게 하면 부의 편재는 해소할 수 있다.

 

p286. '개헌파'가 아니라 '폐헌파'라고 이름 붙여야

 

 헌법기념일에 자민당의 헌법개정추진본부장 후나다 하지메(船田元)는 "9조 개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위기적 상황을 생각하면 해석의 확대에 의해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명문 개헌의 방향은 어디까지나 유지한다고 한다. 즉 "임시변통일지도 모르지만 이해하기 쉬운 환경권 등을 부가하는 것을 첫 번째 국민투표에 부치고, 그 다음 사람들이 개정에 익숙해지고 나서 9조 개정에 착수하고 싶다." 솔질한 발언이다.

 

 해석 개헌으로 나갈 수 있는 데까지 나가고, 그것이 무리라면 명문 개헌으로 나가려는 정치가는 헌법 이념의 실현보다 그가 속한 정당의 정책 실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헌법을 철저하게 경시할 수 있는 정치가들이 뻔뻔한 낯짝으로 헌법 운운하고 이야기하는 꼴을 보면 속이 거북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아베 총리대신은 헌법 99조가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할 공무원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음에도 헌법에 결점이 있다드니, 애초부터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드니 하면서 헌법의 실질적인 공동화空洞化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속한 당의 개헌 초안 102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국민은 이 헌법을 존중해야 한다." 즉 국민 전체에게 헌법을 준수할 의무와 적용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다는 이러한 헌법관이 마음에 걸린다. 왜냐하면 순조롭게 개헌에 성공한 뒤 그가 현행 헌법을 대한 것처럼 국민이 신헌법을 대할 때, 총리는 어떤 논리로 그것을 금지할 생각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나는 공문원이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지만, 제군은 내가 정한 헌법을 존중하고 옹호해야 한다." 이런 요구를 관철하려면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헌법은 그때마다 정부의 형편에 따라 지킬 수도 있고 폐지할 수도 있는 일개 정치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는 이런 리얼리즘도 '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머릿속에 있는 생각에 맞추어 정당의 강령도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고 싶다.

 

 차라리 '헌법 폐지'가 낫지 않겠는가? 긴요한 사안은 내각회의에서 결정해서 주저 없이 실시하면 그뿐이다. 입법부의 심의에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 헌법 조문을 내각의 형편에 따라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 이것을 통치의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을 '개헌파'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폐헌파'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타당하리라.(2014년 5월19일)

 

p320.

 

 이러한 사고방식의 밑바탕에는 글로벌리스트의 공통적인 생각, 즉 '모든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인간관이 깔려있다.

 

 그러나 일정한 비율로 '돈으로 움직일 수 없는 인간'이 없다면 나라는 멸망한다. '돈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인간'은 그런 의미에서 '나라의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돈으로 움직이는 이유는 세계 어디에서나 비슷하지만, 어떤 사람이 '돈으로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국제적인 공통성이 없다. '이곳에서만 통하는' 국지성이 최후의 순간에 한 나라의 토대를 받쳐주는 것이다.(2011년 3월7일)

 

p322. 다시, 폐를 끼치는 삶을 배우자

 

 소프트뱅크의 손 마사요시孫正義 사장이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자 구제를 위해 100억 엔과 공무원의 보수 전액을 기부하겠다고 한 발언이 화제로 올랐다. 그전에는 야나기 다다시柳井正 유니클로 사장(유니클로 창업자)이 개인적으로 10억 엔, 프로골퍼 이시카와 료石川遼 씨가 2억 엔을 '목표'로 상금을 기부하겠다고 한 것을 매스컴이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평소였다면 이런 기사에 반드시 '냉소적'인 어조가 감돌았겠지만 이번 보도에서는 누구나 냉소를 삼갔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위선적'이라는 둥, '이름을 판다'는 둥, '잘못을 무마하려는 면피용'이라는 둥...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이러한 상투적인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는 커다란 흐름 변화가 아닐까 한다. '공공의 복리를 위해 사재를 터는 행위'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까지만 해도 '성공을 거두고 이름을 날린' 인물이 짊어진 의무였다. 그때는 다들 한 사람이 거둔 사회적 성공이 무수한 사람들의 지원 덕분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성공을 자신의 노력이 거둔 결과로 보고 독점하려는 태도는 '잘못'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생각이 상식으로 통하지 않게 된 지 반세기가 흘렀다. 그후 오랫동안 사람들은 '내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남이 나한테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을 모범적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풍요롭고 안전한 시대는 오래 가지 않았다. 우리는 또다시 '남에게 폐를 끼치기도 하고 남이 나한테 폐를 끼치기도 하는' 삶을 학습해야 했다. 옛날에도 그럴 수 있었으니까 오늘날에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2011년 4월18일)

 

p325.

 

 인생은 어긋남의 연속이다. 우리는 대학도 잘못 선택하고, 취직할 회사도 잘못 선택하고, 배우자도 잘못 선택한다. 그럼에도 어떻게 상황을 헤쳐 나가느냐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다. "자원봉사자의 선의와 현장의 요구가 어긋난다고 해서 풀이 죽을 것은 없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더니 젊은 건축가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피해 지역에 내갈게요. 그 사람들이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이더라도 커튼 치는 일을 계속할게요." 그렇지, 그렇게 하면 되는거야.(2011년 5월2일)

 

p328. '만사는 돈 문제'라는 사람의 속마음.

 

 대지진의 피해가 발생한 직후 블로그에 '소개疎開를 권함'이라는 글을 올렸다. 찬반양론이 있었다. 내 귀에 들린 목소리는 거의 다 '찬성'(이라기보다는 '벌써 소개했다')이었다.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혼란을 부채질하지 말라'는 비판이 있었다. 내가 한 말은 이것뿐이었다. "임산부나 어린이, 노인과 병자 등 대혼란이 일어났을 때 자력으로 탈출하기 힘든 사람들은 교통과 통신 인프라가 기능하는 동안 빨리 안전한 곳으로 소개하는 것이 좋다." 무조건 '다들 도망가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대해 이런 반론이 들려왔다. "소개 때문에 인구가 줄어들면 경기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수도권에 머물면서 평소처럼 소비활동을 계속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나는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반면, 그들은 '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톱니가 맞아 들어갈 리 없다.

 원자력발전을 둘러싼 대책이 지지부진한 까닭은 '국토의 보전과 국민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할 정계와 재계의 관리들이 실은 그것을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국토의 보전과 국민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돈을 어떻게 충당할까?'하는 생각이 가득 차 있다.

 그들에게 최우선 과제는 방사선량의 측정이나 원자력발전의 멜트스루melt-through에 대처하는 기술적인 대응이 아니라 추경예산과 국채다. 그것은 '돈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는 리얼리즘을 채용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돈만 있으면 어떤 곤경도 처리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을 고백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만사는 돈 문제'라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은 스스로를 '리얼리스트'라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것은 돈이 없는 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실로 '돈만 있으면(돈은 없지만) 모든 것은 잘 풀린다(풀릴 것이다)'는 조건법 구문을 통해 이 세계가 그렇게 부조리하지 않다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마법의 돈'을 두고 정신없이 주판알을 튕기는 동안에만 그들은 공포의 대상에서 눈을 떼고 한때의 평안을 후무릴 뿐이다.(2011년 7월4일)

 p338. '이기적'으로 굴 수 있는 까닭

 1970년 이후 42년 만에 국내의 모든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정지시켰다. 나는 올해가 '원자력발전 제로 원년'으로서 오랫동안 국민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

<마이니치신문>(2012년) 5월8일자 여론조사에서 올해 여름 원자력발전을 중단한 탓에 전력이 부족하리라고 에측하고, "절전과 정전에 따른 불편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하는 물음에 74퍼센트가 '참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얼마나 씩씩하고 믿음직한 국민인가?

 원자력발전 재가동 추진파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은 뜻밖의 숫자가 아닐까? 왜냐하면 74퍼센트 중에는 전력을 마음껏 사용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원자력발전의 위기를 깨닫더라도 '딴 일에는 마음을 쓸 수 없는' 절체절명의 리얼리즘에 굴복할 것이라고 재가동 추진파는 예측했을 것이다. 국토가 오염되는 위기에 빠지든말든, 후손에게 핵폐기물 처리 비용을 떠넘기든 말든, 그들은 그런 것보다 '당장 내일 먹을 끼니'를 걱정한다. 지금 당장만 좋으면, 나만 좋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재가동 추진파는 그런 자포자기의 리얼리즘으로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셀제로는 일본 국민의 과반수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다. 같은 설문조사를 보면 "당신은 원자력발전의 안전성에 대한 정부의 설명을 믿습니까?"라는 물음에 77퍼센트가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더 이상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마음... 이것이 불편함을 참겠다는 국민적 결단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좋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도리에 어긋난 이기적인 언사를 떠들어댈 수 있는 경우는 역설적으로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공공의 복리를 생각하고 비이기적으로 행동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때뿐이다. 고속도로가 정체되어 있을 때 갓길로 달리는 운전자는 자기 이외의 다른 운전자가 긴급 차량을 위해 갓길을 비워둔 경우에만 편익을 취할 수 있다. 

 일본 국민은 '일단 나 혼자만이라도 비이기적으로 행동하자'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웃전'의 선의나 양식을 더 이상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2012년 5월27일)

p341.

 원자력발전 사고를 거친 이래 일본 시스템은 치명적으로 낙후하고 있다.

p342.  이 나라에 '어른'은 있는가?

 원자력발전 사고 직후 미국정부는 군용기로 방사선을 측정하고 상세한 '오염 지도'를 작성했다. 지도는 방사성 물질이 북서 방향으로 띠 모양으로 튀어 흩어진다는 것을 밝혔다. 경제산업성 원자력안전-보안원과 문부과학성은 그 데이터를 공표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총리 관저와 원자력안전위원회에도 전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잘못된 방향으로 피난을 떠난 많은 주민들이 피폭당하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했다.

 '말단 벼슬아치나 저지를 수 있는 실수'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들을 지배하는 원칙은 '규정으로 정해놓지 않은 사안은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것과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판단을 보류하고 웃전의 지시를 기다린다.

 웑자력발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일본의 관청은 실효 있는 매뉴얼을 갖고 있지 않았다. 원자력발전 사고는 '일어날 리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고는 일어났다. 모든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관리들은 판단을 보류했다.

 관리들도 '오염 지도'의 중요성은 금방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활용해 주민의 피폭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행동한 관리는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좀 놀랄 필요가 있다. '원자력발전 사고가 일어나면 외국 정부가 제공해준 데이터를 어떻게 취급할까?'에 대한 규정이 예규집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규정상 그들의 행동(이라기보다는 비행동)에 하자는 없다. 그러나 요직에 있는 사람은 때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은지에 대해 적절한 기준이 없을 때 적절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 나라에서는 예부터 그렇게 할 줄 아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불렀다.

 일본 관리의 열등함은 제도적인 문제가 아니다. 업무 규정을 세밀화하고, 근무 고과를 엄격하게 정하면 어떻게든 정상화되리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질 자체가 열등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제대로 생각할 줄 아는 '어른'을 등용할 수 있을까? 무엇을 기준으로 '제대로 된 어른'과 그렇지 않은 인간을 식별할 수 있을까? 문부과학성과 경제산업성은 '직업교육'이나 '글로벌 인재 육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내부에는 왜 어른이 없을까?'를 자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2012년 7월2일)

p352. 제국의 수도 하늘은 지금보다 파랗고...

 (2013년) 10월6일 조간에는 1940년에 작성한 '환상의 도쿄 올림픽' 영어판 계획서를 발견한 어느 수집가의 기사가 났다. 도청과 박물관에도 없는 귀중한 사료라고 한다. 나는 이 계획서의 불어판을 읽은 적이 있다. 스위스 로잔에 있는 올림픽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자료실 '일본' 코너 책장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1964년 도쿄 올림픽 계획서라고 생각하고 펼쳐보았는데, 거기에 나온 수도의 사진이 내가 아는 도쿄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그래서 새삼 표지를 다시 보았더니 1940년 올림픽 계획서였다. 해가 저물 때까지 열람실에서 읽어나갔다. 실현하지 못한 행사 계획서는 현실과 몽상 중간에 머무는 반투명한 유령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올리픽의 도쿄 개최가 정해진 것은 1936년이었다. 다음해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38년에 개최가 취소되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과 1944년(런던이 개최 예정 도시였다.)은 올림픽이 없었다.

 '환상의 도쿄 올림픽'에 대해 나는 그런 계획이 있었다는 것밖에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치의 정치 쇼였던 베를린 올림픽과 비슷하게 이데올로기 색채가 강한 야외극을 구상했을 것이라고 멋대로 상상했다.

 그러나 계획서를 읽어보니 뜻밖에도 꽤 진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비상시에 스포츠에 열광할 여유가 있어?'하고 말할지도 모르는 군부와 여론에 마음을 쓴 탓인지, 신규 건축물은 적고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경기장과 선수촌 사진을 보고 나는 특히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 1930년대 제국의 도시 하늘은 무척 넓고 파랗다는 것(흑백사진이지만 '투명하고 깨끗한 창공'이라는 점은 알 수 있었다.). 둘째 이때 올림픽에 출전할 운동선수 대다수는 그 후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열람실 책상에 팔꿈치로 턱을 괴고 나는 '1940년에 도쿄 올림픽을 개최한 세계'를 공상해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 나오는 '평행세계'적인 공상이다. 그 다음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회파한 대일본제국을 상상했다. 제국의 수도 하늘이 지금보다 파랗고, 청년들이 지금보다 조용하고 수수한 일본을 상상했다.(2013년 10월21일)

서두에도 써놨듯이 그간의 도올 선생님의 책이 어렵다는 불만(?)이 많아서 작심하고 쉽게 쓰셨다고 한다.

쉽긴 하다. 선생 글의 특징인 기나긴 서론과 말미에 축약된 주제의 구성은 역시 변함이 없다.

반야심경과의 만남에 이르기까지의 불교와의 인연, 그리고 반야심경을 이해하기 위한 불교사적인 배경 지식,

한국 근대사의 불교의 모습과 그런 모습에 이르기까지 조선사에 흐르는 한국 불교의 전통에 이르기까지 막힘없이 술술 풀어나가는 선생의 이야기 솜씨에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바가 있다.

선생님의 불교 관련 서적이 금강경 강해,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3권)의 2책(권수로는 4권)이 있었는데 이 책으로 어느 정도 불교에 대한 선생의 생각도 정리가 된 듯 하다.

개인적으론 선생이 아직 힘이 있으실 때, 조선역사에서 현대사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사상사를 한 번 정리해주시면 좋겠다라는 바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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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6.  엄마의 공안

 엄마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용옥아! 왔구나!" 그 말씀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엄마의 눈에는 아들 용옥이만 보였지, 승복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그 순간 종교보다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p41. 서산의 입적시

 팔십년전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후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전에는 거시기가 난 줄 알았는데

 팔십 년을 지나고 보니 내가 거시기로구나!"

아주 간단하고 간결한 명제입니다. 자기 자신의 화상(畵像 )을 놓고 하는 말이니 거시기는 객체화된 "자기Ego"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나의 모습이 나의 밖에 객체로서 걸려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인식이 자기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을 때가 되어 철들고 보니 여기 살아있는 나가 곧 거시기, 즉 거시기는 주체적인 나의 투영일 뿐, 영원히 살아있는 실상은 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p43. 거시기와 예수, 거시기의 철학

 거시기를 "예수"로 바꾸어 놓고 보아도 똑같습니다. 보통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상이 신앙의 대상으로서 거시기화 되어 있는 것입ㄴ니다. 그러나 신앙의 궁극에 도달한 자는 깨달을 것입니다. 예수가 나의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곧 예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내가 곧 십자가를 멘 예수가 될 때에만이 그리스도(=구세)의 의미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p68. 사람이 없다.

 깨달음이란 타인에게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전한다는 것은, 타인이 나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있을 때 그 깨달음의 경지가 스스로 이입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나의 깨달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공감의 전입이 가능한 그러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그만큼 경허의 깨달음은 지존한 것이었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다! 이것은 진정 성우 경허의 대오의 경지를 나타내는 확철한 고독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p82. 머슴살이 김 서방, 이 서방이 모두 부처님이외다.

 "절간에 재물이 쌓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외다. 이 돈으로 인근 30리 굶주린 백성들에게 양식을 나눠주시는 것이, 훗날 강 선생님께서 극락왕생하시는 큰 공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사님, 저도 이 천장사 부처님께 시주를 해서 복을 좀 지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은 이 천장사에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머슴살이 하는 김 서방, 이 서방, 농사직소 사는 박 첨지, 서 첨지, 이들이 다 부처님이오이다. 못 먹고 못 입는 사람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부처님께 시주하는 것과 똑같은 것, 머슴이나 하인이나 백성들을 잘 보살펴주시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불공입니다."

p131. 아트만이 없다=실체가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아(我)는 서양철학언어를 빌리면 "실체Substance"에 해당됩니다. 아주 간닪히 얘기하면 모든 사물을 실체가 없다. 즉 자기동일적 분별태가 없다. 모든 사물은 본질이 없다. 실체라는 것은 "아래에sub-" "놓인 것stance"이라는 의미이니까,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질, 본체, 영원한 이데아를 의미합니다. 모든 존재하는 사물에는 그러한 아트만이 없다는 것이죠.

p136. 무전연기와 환멸연기

 유전연기流轉緣起(생성적 인과) :  고제苦諦 과果 / 집제集諦 인因

 환멸연기還滅緣起(소멸적 인과) : 멸제滅諦  과果 / 도제道諦 인因

 p139. 불교사의 특징 : 전대의 이론을 포섭하여 발전

 사성제의 진리이론도 매우 간단한 듯이 보입니다. 인생은 고통스럽고, 그 고통에는 집적된 원인이 있고, 그 집착을 없애면 열반적정에 든다. 그런데 그 멸집滅執에 8가지 방법이 있다. 그 8가지 방법을 요약하면, 계.정.혜 삼학이다.

계戒 sila : 정어定語  정업定業  정명定命

samadhi : 정념定念 정정正定                  이 모두를 실행하는 정정진正精進

혜慧 panna : 정견定見 정사유正思惟`

p142. 자기 삶의 화두만 유효하다.

 득도라는 것은 오직 자기 삶의 느낌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느낌의 심화는 "혜"의 공부에서 생기는 것이지 "간화看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삼학에 이미 선종과 교종이 다 들어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대장경이 다 들어있는 것이죠.

p153.

 우리가 역사를 공부할 때, 지명 하나, 인명 하나, 나라이름 하나를 그냥 적당히 넘어가면 생동하는 역사의 흐름의 핵을 유실하게 됩니다. 

P155.

 이러한 확대과정에 역행하여 극도의 축약화작업이 이루어집닏. 그리고 이 축약은 단순한 축약이 아니라 단행본으로서 자체의 유기적 독립성을 갖는 단일경전이 되는 것이죠. 이 반야경 중에서 독립적 단일경전으로 대표적인 것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따로따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두 경전은 동일한 반야경전그룹 내의 두 이벤트일 뿐입니다. <금강경>도 <금강반야바라밀경>이고 <반야심경>도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입니다. 둘 다 "반야바라밀"이라는 주제를 설파한 경전들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금강경>은 현장의 <대반야경>체제 속에 편입되어 있는데 반해(600권 중에 577권이 <금강경>이다), <반야심경>은 극히 짧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반야경>에 포섭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만큼 <반야심경>은 독자적 성격이 강했다고 말할 수 있지요.

P179. 기독교역사는 대승기독교를 허락치 않았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도 일정한 권위의 틀 속에서만 머문 것이고 진정한 대승의 종교혁명을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아나밥티스트들Anabaptists(자각적이지 못한 유아세례는 무효라는 것을 주장한 사람들)의 주장도 수용하지 못하고 박해했으며, 토마스 뮌처Thomas Muntzer, 1489~1525(종교개혁시대의 래디칼한 신비주의 설교자. 루터에 반대)의, 성경은 단지 과거의 영적 체험의 잔재일 뿐, 그것이 내 마음속에서 영적 생명력을 갖지 않는 한 휴지쪽일 뿐이라는 주장을 이단으로 간주했습니다. 뮌처는 비참하게 고문당하고 처형되었습니다.

P186. 6바라밀의 등장

 새로운 대승의 실천원리가 이른바 "6바라밀六波羅蜜 "(육도六度)이라고 하는 것이죠. 1)보시布施 2)지계持戒 3)인욕忍辱 4)정진精進 5)선정禪定 6)지혜智慧(혹은 智惠)라는 것인데, 250계율과 같은 것에 비하면 매우 일반화 되고 추상화 되고 유연성 있는 원칙이 된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6번째의 지혜라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반야"인데, 6바라밀은 반야의 바라밀에서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죠. 다시 말해서 앞의 5바라밀은 제6바라밀을 위한 전 단계에 불과한 것이죠.

p190.

 타율적 계율이 느슨하게 되면 인간의 자율적 지혜는 고도의 자기 조절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인간이 자율적 자기컨트롤 능력이 없을 때는 당연히 타이트한 계율 속에서 사는 것이 더 낫습니다. 

 대승의 발전은 계율의 느슨함을 초래함과 동시에 지혜의 특별한 수행, 특별한 자각적 바라밀다, 완성의 길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p192.

 결국 "지혜의 완성" "지혜의 배를 타고 피안으로 고해를 건너가는 과정"이라는 것은 바로 아상我相을 죽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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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원문(나무위키 + 도올선생 해석)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을 건너느니라.

(도올) 관자재보살께서 심원한 반야의 완성을 실천하실 때에 오온이 다 공이라는 것을 비추어 깨달으시고, 일체의 고액을 뛰어넘으셨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 감각ㆍ생각ㆍ행동ㆍ의식도 그러하니라.

(도올) 사리자여! 오온개공이라는 말이 과연 무엇이겠느냐? 색이 공에 다르지 않고, 공이 색이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나머지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는 뜻이다.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모든 법의 공한 형태는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도올) 사리자여! 지금 내가 깨달은 세계, 반야의 완성을 통해 조견한 세계, 제법이 공한 이 모습의 세계는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

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실체가 없고 감각ㆍ생각ㆍ행동ㆍ의식도 없으며,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무의식계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의식도 없고,
색깔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감촉도,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도올) 그러므로 공의 모습 속에는 색도 없고, 수도 없고, 상도 없고, 행도 없고, 식도 없다. 따라서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또한 안식계에서 의식계에 이르는 모든 식계도 없다.

無無明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멸집도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고집멸도도 없다. 

(도올) 뿐만이냐! 싯달타께서 깨달으셨다고 하는 12연기의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도 없다. 이렇게 12연기의 부정은 노사의 현실에까지 다다른다. 그러니 노사도 없고 노사가 사라진다는 것도 없다. 그러니 이러한 12연기를 요약적으로 표현한 고.집.멸.도 또한 없는 것이다.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무소득이기 때문이다.

(도올) 앎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다. 반야 그 자체가 무소득이기 때문이다!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도올) 보리살타 즉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다. 마음에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는 고로, 공포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전도된 의식과 꿈같은 생각들을 멀리 벗어나 버리고, 끝내 열반에 도달한다.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무상의 정등각을 얻는다.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 일체고 진실불허고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도올)그러므로 그대들은 다음의 사실을 숙지해야 할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야말로 크게 신비로운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더 이상 없는 주문이며, 비견할 바 없는 뛰어난 주문이라는 것을! 이 주문이야말로 일체의 고를 제거할 수 있다. 진실한 것이요, 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 주문을 말하니 이러하니라.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가자 가자 넘어 가자, 모두 넘어가서 깨달음을 이루자

(도올)마지막으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겠습니다. 곧 그 주문은 다음과 같이 설하여집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추가 해석)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

=> 건너간 자여, 건너간 자여! 피안에 건너간 자여! 피안에 완전히 도달한 자여! 깨달음이여! 평안하소서!

 

일본의 저널리스트인 오노가즈모토가 일본의 시사잡지 보이스에서 저명학자들과의 인터뷰를 베이스로 엮은 책.

원제 "未來を讀む AIと格差は世界を滅ぼすか 미래를 읽는다. AI와 격차는 세계를 망가뜨릴 것인가"

에서 드러나듯 최근의 이슈화되는 인공지능, 부의 양극화, 계급의 격차, 수명연장, 핵 문제들을 각각의 전문가와 함게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고 되어 있다. 

개인적으론 유발하라리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주장 정도가 공감된다. 하지만 이것도 하라리와 다이아몬드의 기존의 책의 주장의 반복이기 때문에 굳이 이들의 주요 작품을 본 사람에겐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맨 뒤의 윌리엄 페리는 특히 동북아시아에서의 정세, 그 중 북한 문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1990년대의 북핵 상황에 대한 미국의 견해를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최근 남북 관계 개선과 북미의 핵협상으로 이 부분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데 윌리엄 페리보다는 한국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책이 훨신 내용도 많고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의 인터뷰어이자 편집자가 일본인이라 그런지 마지막 한국정세에 관한 문제에선 조금은 편향된 시각이 읽힌다. 어떤면에선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어떤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시사대담같은 내용으로 가볍게 읽을만하다.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전작(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어보고 나서 새로 출간된 작품이 있기에 읽어본 작품. 개인적으론 철학은~ 보다는 더 좋은 것 같다.(철학은~에 비해서 주제가 명확하고 내용도 조리있다. 철학은~ 뒤로 갈수록 주제가 내용이 뭘 말하려는건지가 애매해지는 느낌이다.)

저자가 대학을 나오고 나서 사회생활을 한 이후에 쌓은 커리어에서 필요한 내용들은 모두 독학으로 습득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독학이 필요한 이유와 사회인으로서 필수교양을 쌓기 위한 11가지 분야와 그 분야별로 저자의 추천도서가 수록되어 있다.

 

일본의 대표적 진보인사(이 책 보고 알았음)인 우치다 다쓰루와 좀 더 젊은 진보적 지식인 시라이 사토시와의 대담집.

주로 우치다 다쓰루가 거의 이야기를 다하고 시라이 사토시가 추임새를 넣는 정도로 보면 된다.

일본 지식인들의 일본에 대한 혼네(본 마음)를 알 수 있다.

아주 가끔 한국에 대한 감상도 나오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조금 틀리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로

생각할 꺼리를 주긴 한다.

또한 나치에 협력했던 프랑스 비시 정부에 대해서도 내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됐다.

일본에 관심이 있고 현재 한일관계의 문제점 그리고 왜 한일관계가 어려운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읽으면 좋을 내용이다.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용으로 딱 알맞은 내용이다.

작가가 된다는 것, 그리고 작가가 되서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와 그에 따른 실무적인 안내가 들어있다.

실무서의 가장 큰 덕목이 쉽게 잘 읽혀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굉장히 잘 되어 있다.

글을 읽은 이들의 서평도 의외로 꽤 많고 모두 좋다. 우리나라에 글을 쓰려는 이들의 니즈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조승연의 신작.

그의 프랑스 유학시절 및 귀국이후에도 간혹 프랑스에 들를 때마다 프랑스의 친구들과 겪은 경험을 통해 얻은 프랑스와 프랑스인들에 대한 인상과 우리와의 차이점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을 읽은 전체적인 감상은 프랑스인과 우리의 가장 큰 차이점은 프랑스인은 과정을 중시하고, 우리는 결과를 중시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서양의 문명이라 함은 주로 미국을 의미하는데 미국의 결과 중시적인 문화의 영향으로 우리도 많은 면에서 합리적이고 결과 중시적인 면이 많다.

결과를 중시하고 남들을 의식하고 살면서도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모습이 되어가는 우리의 모습에 비해, 자신의 삶을 중시하고 이기적인 듯 하면서도 관계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프랑스인과의 비교를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책의 서문의 마지막 구절이 인상적인 인용구로 시작한다.


니체가 말했듯이 인생의 'Why'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How'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1. 저자 : 조승연, 책표지의 설명에 따르면 세계문화 전문가(책을 보니 상당한 역량을 갖춘 분이며, 본인의 궁극적 희망이기도 하다.). 난 개인적으론 도올 선생의 차이나는 도올이라는 교양프로그램에서 알게 되었는데 프로당시는 젊은데다가 존재감이 크지 않게 느껴져서 관심이 없었다. 최근 EBS의 굿모닝팝스의 진행자를 새로 맡아서 하고 있기도 하며, 이 책을 읽고 나서 어학분야에서 상당한 실력자라는 걸 알게 됐다.

2. 주제 : 언어의 유창성에 대하여(영어 유창성의 비밀이라는 부제처럼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방법론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언어라는 포괄적 주제로 봐도 거의 대차가 없을 것이다.)


3. 키워드 : 링구아 프랑카, 영어적 사고, 형태소를 통한 단어의 이해, 문화 독해력, 시의 낭독, 철학의 이해, 두 개의 마음


4. 요약 :  영어를 잘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엄청난 투자를 하지만, 과거 식민지 시대(1930년대) 영국의 고급 영어를 보급하기 위한 시대에 뒤떨어진 영어교육을 고수하고 있음으로 인해 영어교육의 투자 대비 엄청난 낭비가 이루어지고 있고 실효성도 없다.

 영어의 세계에서의 위치와 사회문화적 특징으로부터의 고찰을 통해, 과연 영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영어교육은 출발해야 한다. 

 언어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의 사고방식이 투영되어 발전한다. 초기 영국(책에 의하면 어원은 게르만과 브리튼족의 언어의 혼합으로부터 탄생되고, 더 멀리는 라틴어와 그로부터 파생된 프랑스, 이탈리어의 영향도 받는다는 복잡한 계보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책에는 나온다.)으로부터 시작된 이 언어는 식민지 시대를 통해, 미국 그리고 인도와 동남아시아까지 보급되면서 언어적 다양성 또한 급격히 팽창된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변화속에서 영어 자체가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최신의 영어 사용예를 통한 살아있는 영어를 배우는 것 또한 중요하다. 

 학습의 방법론으로는 문법과 단어 암기 위주의 교육이 수 십년간 진행되면서, 10년 이상의 영어학습을 받으면서도 영어권 사람들과 실제 회화를 통한 의사소통은 초보적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필자 자신도 중학교때 이민을 가기 전 영어회화를 3년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가서 영어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상태로 갔지만(이 이야기는 다른 책에 나온다. 14살 허당 유학생 영어 정복기), 실제 미국 아이들의 대화를 거의 알아듣지 못해서 충격을 받고, 영어공부를 다시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미국을 포함 서양 사람의 사고방식과 동양의 사고방식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외국어 학습의 출발점이며, 그런 차이를 모르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일상적인 표현들에도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학적인 지식을 통해 영어라는 외국어의 구조적 특성을 알아두는 것 또한 필요하다.(모국어는 무의식적인 무수한 반복연습과 살아가면서 쌓아가는 사회,문화,철학적 함의를 우리가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데, 외국어를 배울때는 이러한 내용들중에서 최소한의 핵심사항들을 따로 정리해서 파악해야 한다.) 

결국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언어 자체가 아니라, 그 언어의 기저를 이루는 철학과 사고방식, 그리고 언어가 생성되어온 역사를 배우는 것이기에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며, 단순하게 문법과 단어를 달달 외우는 방식의 시험을 대비한 영어학습과 TOEIC, TOEFL과 같은 형태의 공부방식은 영어회화를 유창하게 하는 목적과는 거리가 먼 학습법이다.

 한자문화권이자 유교국가였던 과거의 조선과 일본의 지배계급은 유교의 경전인 사서삼경을 기본적으로 줄줄 외울 정도로 배워야했다. 한자로 된 이 경전들을 줄줄 외울(그 내용의 이해없이는 그 방대한 양을 외울 도리가 없다.)정도로 학습한 사람들은 중국말을 전혀 하지 못해도, 한자를 이용한 필담으로 중국인들과 실용적인 대화뿐 아니라 사회,문화,정치,예술 등 모든 다방면에 걸친 심도깊은 대화가 가능했다. 또한 중세 서양에서도 귀족집단은 나라와 민족이 틀려도 당시의 세계어(링구아 프랑카)인 라틴어로 상호간의 대화가 가능했으다. 그 당시의 동양과 서양의 모든 언어 학습법의 근간은 따로 언어학습의 문법과 단어장을 따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동양의 경우는 천자문을 읽고 쓰고 외우는 것이 시작이었으며, 서양은 플라톤을 읽고 쓰고 토론하고 외우는 것을 통해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도 미국과 영국의 학교에서 영어(그 나라로는 국어)교과서는 세익스피어, 마크트웨인과 같은 유명한 문호들의 시와 소설을 통해 자기 나라말을 배운다.(우리도 가나다와 철수와 영희를 배운 후에는 윤동주의 시를 배우며 한글의 맛을 깨쳐나가는 것과 동일하다.)

 이 책의 결론중 하나는 과거의 인문학적 학습법이 도리어 언어 습득에 있어서는 시간이 걸릴지라도 최고의 방법(이건 사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이라는 깨달음이다.

 그리고 언어란 세상의 변화에 의해 변화하고 사멸한다. 기원전 역사적으로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수메르에서 사용된 아카드어는 당시의 링구아 프랑카(책에는 트로이 전쟁당시 지중해 지역의 아테네, 스파르타, 트로이의 언어가 모두 달랐겠지만, 지배계급인 귀족들은 모두 아카드어를 사용했을 것이고, 우리가 아는 유명한 아킬레스와 헥토르도 서로 아카드어로 소통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였고, 중세시대에는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지금은 동양도 공용어는 영어를 사용하겠지만, 식민지 시대 이전인 1800년대말까지만 해도 아시아지역의 공용어는 중국어(정확히는 한자)가 사용되었다. 지금도 영어는 점점 더 사용영역을 넓혀나가면서 새로운 민족과 문화의 다양성을 흡수하고 변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시기에 맞게 영어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이 영어의 유창성을 확보하는 가장 정확하며 빠른 길이다.

5. 총평 : 외국어 학습법에 대한 방향과 실질적인 Tip들을 제공한다. 외국어 학습을 제대로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봐야 할 내용이다.

 저자인 조승연씨는 최근 방송 활동과 인문학 서적 집필로 바쁜 것 같다. 이 책과 이어지는 좀 더 구체적인 영어 학습법에 대한 책이 더 나왔으면 하는게 개인적 바램이다. 

 


인간은 종종 소외감을 느낀다. 이러한 소외감이 심해지면 그 증상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정신병이라 한다.


이 책은 정신과 전문의인 작가가 기존 현대 의학이 결과에 집중하는 치료법으로 한계에 이른 정신적 증상들을

애착모델로 설명하고 치료한 이력들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을 보니 나는 회피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본인이나 가족들이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 혹은 그런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보면 도움이 꽤 될 것 같다.


심리학에 대해서 많은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된 책이다.



우연히 보게 된 작품. 강풀의 순정만화, 26년, 무빙을 보면 그만의 특유의 감정선이 있는데

보다 보니 진부해진 느낌에 다른 작품을 볼 생각을 하진 않았다.

좀비물이라는 특징에 호기심을 느껴 보기 시작했다가 결국 다 보고 말았다.


좀비라는 설정을 통해 인간의 원초적 감정과 행복이라는 주제를 극단적 상황속에 녹여내는

그의 스토리텔링의 솜씨는 과연이라는 감상이다.


이야기가 누적되면서 감정선을 건드리는 것은 강풀의 작품을 잘 보지 않게 되는 이유중 하나이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눈물샘이 터질 수 있으니, 누가 있는 곳에선 보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별로(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책을 읽어보면 만만치 않은 내공을 보여준다.

200페이지의 그리 많은 내용은 아니지만 독서라는 주제에 관해서 거의 필요한 모든 정보를

이 책은 함축하고 있다.


특히 지식서와 수필서라는 개념으로 책의 분류를 나눈 것과 그 효용에 대해서 논한 부분은

다른 책에서는 보지 못한 부분이라 새롭다(다른 어떤 책에도 있을지는 모르지만)


책읽기에 관한 입문서로도 괜찮지만, 어느 정도 책읽기라는 부분에 있어서 중급정도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빈틈없이 모아놓은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수 많은 독서에 관한 책들이 시끄럽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시장통같은 소란함으로 난무하는 가운데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조용하지만 깊은 향기를 피우는 난초 같은 느낌의 책이다. 




일본은 이미 65세 이상 고령자의 비율이 3500만명으로 인구의 25%를 넘었다. 또한 90을 넘은 노인도 200만명으로,

세계 최고의 초고령사회이다. 


이 책은 수명의 증가, 즉 장수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고령화와 그에 따른 노환 등의 병의 발생으로 인한 가족내 문제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본은 이미 독거노인의 숫자가 600만명을 넘어섰으며 이로 인해 독거노인의 고독사등의 문제가 이미 사회적 이슈로 자리잡고 있고,

이를 위해 엄청난 재정을 투입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조차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한민국도 이제 점점 저출산, 고령화의 영향으로 향후 10~20년후면 일본과 같은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 것이 확실하다.

현재 일본이 겪고 있는 노인문제는 바로 10년 후 우리 한국의 문제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본과 같은 재정적인 여유가 10년후 대한민국에 있을것인가 하는 부분에서 사실상 대한민국은 일본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에 빠질지도 모른다.

내용은 보면서 내내 마음이 무겁지만, 미래를 대비한다는 의미에서 한 번쯤은 새겨둘만한 일본의 사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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