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골든아워 2권, 기울어진배 에피소드 中)

(배경 설명 : 세월호 사건 당일, 긴급 구조 헬기를 타고 아주대학병원에서 진도 사건 현장으로 내려간 상황. 이 글에서 나는 이국종 교수를 의미함. 이 글에서 이국종 교수는 선박에 대해 상당항 해박한 지식을 기술하는데, 그 이유는 이국종 교수가 해군 출신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봐야 했다. 우리가 내려오는 동안 승객들이 다 구조된 것인지, 아니면 수면 위에 부상자들이 있는데 비행고도가 높아서 보이지 않는 것인지 하늘에 떠서는 알 수 없었다.(중략)

 뒤집어진 배 주위를 선회하며 배 쪽으로 가까지 다가가던 이상민이 갑자기 사고 해역 상공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 무슨 일입니까? 왜 강하하지 않습니까!

 - 상황실과 관제탐에서 계속 경고가 들어오고 있어요!

 사고 해역 상공 관할은 해양경찰이 맡았고, 다른 헬리콥터들의 진입은 충돌 사고 위험을 높인다며 밖으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 위에는 우리뿐이었으므로 나는 그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다.(중략)

 김승룡은 아는 것이 없었다. 내가 다시 물었다.

 - 그럼 혹시 배 안에 사람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핏발 선 눈갈로부터 김승룡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 지금 각 정부 부처마다 정보 공유가 전혀 안 되고 있습니다. 여객선 규모로 보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탔을 것 같은데 몇 명이 타고 있었는지, 몇 명이 구조됐는지 전혀 정보가 없습니다.

 그도 많이 답답해 보였다. 지역의 소방서장조차 이 정도밖에 정보를 얻지 못했다면 내가 더 알아볼 수도 없을 것이었다.

 부도 바로 옆 나대지에는 소방방재청 헬리콥터는 물론이고, 경찰청의 헬리콥터와 보건복지부의 헬리콥터가 '비행하지 않고' 착륙해 있었다. 앉아있는 헬리콥터들이 마치 철새 도래지에 집결해 있는 철새들같아 보였다. 여객선의 규모가 크다면 승객이 많을 것이었고, 승객이 많다면 모두를 완벽히 구조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사고 지점의 외곽 해역에도 수색이 필요하니 그쪽에라도 투입되어야 할 국보급 헬리콥터들이었다. 사고 해역 근처에는 한 대도 보이지 않던 기체들이 항구 옆 나대지에 이렇게 모여 앉아 있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다. 도열한 헬리콥터들의 값을 합치면 수천억원어치가 넘을 것이고, 그 수는 대한민국 소방항공대 전력의 절반에 가까웠다.

 항구 한쪽에는 민간 병원 의료진부터 보건복지부에서 보내온 지역 보건소 의료진, 소방대원들과 육군 병력들이 한 데 뒤섞여 있었다. 팽목항 부둣가는 장터처럼 북적거렸고, 바다는 무섭도록 고요했다. 가라않는 배에서 구조작업을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데, 분주한 항구에서는 사고의 실체를 그림자조차 느낄 수 없었다. 나는 그 기이함에 섬뜩해졌다.

 AW-139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인파 속에서 중앙구조단 김민수 기장과 항공대원들을 보았다. 몇몇은 수난구조복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만나 누가 사고 해역 영공의 비행을 금지시켰는지, 수난구조복장을 한 구조대원들이 왜 육상에 있는지, 모두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상민을 채근해 AW-139에 올라탔다. 사고 해역 영공으로 진입했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가라앉는 배 주위르 헤매다 항공유가 바닥을 보였다. 인근의 진도나 목포의 해양경찰 기지 또는 공항에서 급유를 받으려 했지만 모두 '공식적 절차'가 미리 통보되지 않아서 불가하다는 답변만 보내왔다. 서신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우리는 다급하게 급유지를 찾았다. 간신이 기름을 '얻어 쓸 수 있는 곳'을 찾아냈다. 사고 해역으로부터 까마득히 떨어져 있는 내륙 산간의 산림청 소속 항공 관리소였다.

 - 이런 빌어먹을....

 내 입에서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나는 기가 막혀 서신철에게 물었다.

 - 아니 목포에 공항도 있지 않습니까? 바다를 수색해야 할 우리가 왜 산악지대까지 갑니까?

 서신철이 씁쓸하게 말했다.

 - 행정 절차가 처리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중략)

 나는 해군 2함대 의무대장 박영진 소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해군이 가진 정보를 얻어보려 했으나 박영지도 정확한 인명피해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는 다만 한국 해군과 미 해군의 투입 현황을 알려주었다. 타 해역에서 작전 중이던 독도함을 비롯한 해군의 주력 함정들이 사고 해역으로 급히 변침했고, 해군 UDT들이 투입된다고 했다. 쌍용훈련(한미 연합상륙훈련)을 마치고 미 7합대 모항으로 복귀하던 USS 본험리처드(Bonhomme Richard)함에서 MH-60 시호크(Seahawk) 구조 헬리콥터들을 출동시켜 지원을 시작했다고도 알려왔다.

 독도함은 한국 해군에 단 한 대뿐인 경(輕)항공모함 역할이 가능한 다목적 상륙함이고, USS 본험리처드함 같은 미국의 초대형 상륙 강습함들은 강력한 공격형 무기인 동시에 웬만한 지역 병원을 능가하는 수술실 설비와 병원선 기능까지 완벽히 갖추고 있다. 특히 USS 본험리처드함은 많은 해병대원들이 작정 중 받을 수 있는 모든 피해 가능성이 고려된, 가장 뛰어난 구조 능력을 지닌 함이었다. 박영진의 말은 가장 최고 전력을 투입한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해군 수뇌부도 심각성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

 울리가 다시 바다로 날아들었을 때 여객선은 함수 부분의 푸른 바닥만 힘겹게 물 위로 내놓고 있었다. 기진한 배가 익사 직전 겨우 숨구멍이라도 내놓으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내 마음은 급했으나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는 달랐다.

 - 교수님, 여전히 사고 해역에서 빨리 나가라는 명령만 합니다. 더는 비행이 힘들 것 같아요.

 (중략)

 연락이 닿은 해군본부 의무과장 유동기 중령은 선박 안에 승객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심각히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미 해군 USS 본험리처드함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초대형 함정들까지 동원되어 구조에 나섰다고 했고, 다른 쪽의 말들은 구조작전이 순조롭지 않음을 의미했다. 지원은 많다고 전해지는데 해상과 영공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탄 AW-139 외에 가라앉고 있는 배 위로 비행하는 헬리콥터는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고, 가라앉고 있는 선체를 해상계류시키거나 잡아두는 작업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선체를 부수면서 들어가는 작업도 하지 않는 현장 상황은 의아하기만 했다. 서신철은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 더는 우리가 할 일이 없을 거라고 합니다.

(중략)

 오후 4시를 넘어가자 사고 해역이나 인근 도서 지역 어디에서도 새로운 구조 대상 여객이 발견되지 않았다. 2시 반에 학생들을 싣고 온 선박이 마지막이었다. 그사이 뒤집어져 푸른 뱃가죽을 드러낸 여객선의 밑창은 더 많이 가라앉은 듯 보였다. 그렇게 많이 투입됐다던 한미 해군 구조 자산들이 현장 해역에 특별히 보이지 않은 채로 구조작업이 마무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의 대부분의 승객이 구조된 것 같았고, 사고 해상에 더 이상의 표류 승객도 존재하지 않았다.

 떠날 채비를 할 때 진도체육관에 생존자들이 모여 있다는 말이 들렸다. 우리는 헬리콥터를 체육관 바로 옆 잔디밭에 착륙시켰다. 이상민이 더는 장시간 이곳에서 대기할 수 없고 경기 소방항공대로 복귀해야 한다고 했다. 이곳이 아마도 마지막 착륙지점이 될 것이었다.

 체육관은 규모가 컸고 새로 지은 듯했다. 깨끗한 외관과 높은 천정은 웅장해 보였다. 반듯한 매트가 중앙에 마련된 실내에는 구조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걱정과 불안이 체육관 안에 가득했다. 가장자리에는 지역 보건소와 관공소, 군부대 등에서 나온 사람들이 부스를 설치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구조된 사람들 전부인가요?

 - 저희들도 잘 모릅니다.

 - 혹시라도 구조되지 못하고 누락된 사람들에 대해서 구조 요청이 들어오고 있습니까?

 - 지금 막 도착해서 알지 못합니다.

 - 그럼 지금 사고 해역 현장과 이곳 통신을 담당하는 분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 글쎄요....

 대답은 한결같았다. '윗선으로부터 단지 이곳에 가라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들은 통일된 지휘 체계 안에 있지 않았고, 누가 자신들을 지휘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각자 소속된 조직 상부에서 내려오는 파편적인 집합 명령에 따라 모인 것뿐이었다. 

(중략)

 우리는 각자 흩어져 환자를 찾았다 구조자들은 대부분 어린 학생들이었다. 그동안 어디에서도 알려주지 않았던 정보를 학생들에게서 들었다. 수학여행에 나선 학생 수만 적어도 300여 명이라는 것. 체육관에 모인 학생 대부분은 침몰 초기에 구조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멈춰 서서 체육관 안을 둘러보았다. 대충 보아도 이 안의 구조자는 300명에 한참 못 미쳤다. 다른 곳에 임시 대피처가 마련되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디에 얼마나 많은 승객들이 구조되어 대피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중략)

 저녁 7시가 다 되어 병원에 도착했다. (중략) 헬리콥터에서 내린 노인 환자를 이동용 침대에 싣고 이동할 때 김태연이 뒤따라와 말을 건냈다. 표정이 어두웠다.

 - 교수님. 정말 큰일 났어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닌에요.

- 뭐가요? 빨리 말하세요!

 나는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화를 감출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하는 일 없이 하늘만 오가다 복귀한 참이다. 무책임한 말들 속에서 극심하게 지쳐 있었다. 더 큰일 날 것도 없어 보였다. 김태연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 확실치는 않지만, 승객들 중 적어도 200명 이상이 아직 선체 안에 있는 것 같답니다.

(중략) 경기도 보건국의 6급 주무관인 김태연이 다루고 생성하는 정보는 도지사에게 직접 보고가 올라가는 정보들이니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방금 들은 말은 현실감이 없어 명확히 머리에 꽂히지 않았다.

 - 뭐라고요?

 내가 다시 물었으나 김태연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다가와 있던 정경원이 대신했다.

 - 적어도 그 배에 승객이 400명 이상 타고 있었던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중 구조된 인원이 불과 200명에도 훨씬 미치지 못합니다. 적어도 200여 명 이상이 아직 배 안에 있는 게 맞습니다.

(중략)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 내가 비행하고 있을 때 이미 큰 구조작업도 더는 없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다는 거야?

 정경원은 말없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김태연을 쳐다보자 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다시 정경원을 응시했다.

 - 정 교수, 이게 말이야.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선체 내에 있었다면, 내가 바로 그 위를 비행하고 있었는데 배로 들어가든 부수든 간에 뭔가 사람들을 끄집어내려고 했을 거 아냐? 한미 해군이 모두 출동했다고 들었는데 그 선박 주위는 정말 조용했다고. 어느 정도 구조가 된 거 아니었어?

 정경원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 정말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잘 모르겠다.

 4월16일 하루 종일 들은 말이었다. 하긴 나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죽도록 비행하고 엄한 이착륙만 하다가 어깨만 아파져 돌아왔다. 현장에서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고 책임자라고 나서는 자도 없었다. 현장에 직접 있다가 온 나도 알 수 없었으므로 병원에 있던 정경원이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현재는 이미 날이 저문 데다 선체가 뒤집어져 본격적인 구조 활동은 힘든 모양입니다. 지금 관계기관들이 회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경원은 따라오면서 말했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명확한 건 한 가지였다. '회의만 죽도록 하겠구나. 정작 현장에서는 항공유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산림청까지 기어 들어갔는데.' 그러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 정 교수, 거기 지금 수온이 몇 도인지 알아? 이제 10도쯤일거야. 그 정도 수온에서 몸이 잠기면 몇 시간이나 견딜 수 있지?

 정경원은 말이 없었다. 그는 길어야 3시간이라는 말을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 그나마 구명조끼라도 입고 바다에 떠 있어야 저체온증 얘길라도 할 것 아니야? 배는 뒤집어져서 거의 가라앉았다고.

 나는 정경원에게 함수 밑창의 일부분만이 간신히 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200여 명이 정말 그 안에 있다면 이미 많은 수가 죽었거나 곧 죽을 것이다. 사람은 아무리 버텨도 10분 이상 숨을 참지 못한다. 여객선은 전투함이 아니다. 수백 개의 격실 구조로 이루어진 전투함정과 달리 개방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 선체가 뒤집어졌으므로 바닷물은 선체 구석구석을 쉽게 파고들 것이다. 그런 배 안에 남은 승객들이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제한적이다.

(중략)

 그 와중에 보건복지부 응급의료과 현수엽 과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가 심각했다.

 - 내일 중앙응급의료센터의 현장 지휘소를 보내겠습니다.

 '길어야 3시간'과 '내일'의 간극을 현수엽이라고 모를까. 나는 '내일' 앞에 생략되어 있는 수많은 절차들을 떠올렸고 '어쩔 수 없는'이라는 상황을 생각했다. 지금은 이해보다 무력한 분노가 차올랐다. 나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 이미 현장은 그런 의료 수요가 필요한 시점을 넘어선 것 같아 걱정입니다.

(중략)

 배가 수면 아래로 완전히 잠겼다. 정부의 많은 부처들은 바다 밑으로 배가 사라지고 나서야 분주해졌다. 구조작업의 가장 중요한 시점을 속절없이 보내버렸다. (중략)

 나는 아직 선체에 에어 포켓(Air Pocket)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 들으며 저체온증에 대한 내 상식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16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머리 한쪽에서 어제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사고 당일 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던 때, 나는 바다 위 상공에서 영공을 벗어나라는 경고만 들었다. 대부분의 헬리콥터들이 지상에 주기되어 있었고 미 해군까지 동원된 구조팀들은 현장에 들어오지 못했다. 항구는 여러 곳에서 급파된 의료진으로 분주했으나 구조된 사람은 없었다. 현장을 아는 사람도 상황을 파악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지휘자도 지시도 없는 그저 아비규환의 광경이었다. 그런데 배가 다 가라앉고 나니 모든 것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중략)

 현장에서 제일 신경 쓰는 사람들은 오열하는 가족들이라고 했다. 물 밑에 있는 대부분이 아이들일 것이므로, 물 밖의 가족들 대부분이 그 부모들ㄹ일 것이다. 어린 자식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채로 바다 아래에 수장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덤덤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없는 희망이라도 붙들고 싶을 것이나 대부분은 알게 될 것있어다. 아이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중략)

 세월호 침몰을 두고 '드물게' 발생한 국가적 재난이라며 모두가 흥분했다. 나는 그것이 진정 드물게 발생한 재난인지, 드물게 발생한 일이라 국가의 대응이 이따위였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든 국가든 진정한 내공은 위기 때 발휘되기 마련이다.

(중략)

 세월호 침몰 당시, 쌍용훈련을 마치고 미 7함대로 복귀하던 USS 본험리처드함은 최정예 해상 구조대원과 구명보트까지 장착한 특수 헬리콥터 MH-60 시호크 몇 대를 사고 해역으로 신속하게 출동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사고 해역 영공 진입 불허 방침으로 회항했다고 들었다. 나는 우리와 같은 시간에 사고 해역을 비행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미 해군의 시호크가 왜 보이지 않았는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알게 됐다. 한국 정부는 사고 다음 날 그들에게 사고 해역으로부터 17마일(약 27킬로미터) 떨어진 해역을 배정했고, 생존자 구조 임무가 아닌 사체 수거 임무를 맡겼다고 했다. USS 본험리처드함은 별다른 성과 없이 사고 주위 해역의 수색 작업을 종료하고 4월22일 미7함대로 돌아갔다.

USS 본험리처드함이 사고해역에서 벗어날 때, 몇몇 미 해군 사관들이 함미 갑판으로 나와 서서 세월호 침몰 지점을 향해 마지막 경례를 했다고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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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세월호 사고가 난지 5년이 지났다. 어떤 이들은 이제 세월호 사고는 됐다. 고만 이 정도로 마무리해야 한다라고도 한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알고 있듯, 당시의 상황을 직접 목격했던 이국종 교수의 이 책의 내용처럼 세월호 침몰 이후에 구조작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는 세월호 사고와 같은 재난상황에서 청와대는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라는 면피성 답변을 내어놓으면서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을 드러냈고, 국가의 운영을 맡을 능력이 없다는 자백을 하면서도, 대통령 이하 그 누구도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월호가 촉매가 되어, 청와대의 무능과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박근혜와 새누리의 정권이 무너지고, 새로이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세월호 침몰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아직도 세월의 선장과 그 선원 몇명이 유죄를 받았고, 당시 사고 해역담당으로 나와있던 해경의 중간 간부 하나가 이 일로 징역을 언도받은 외에 그 어떤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정부의 고위인사가 이 세월호 문제로 문책 혹은 사법적 처리를 받은 바가 없다.

 실질적으로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월호 문제는 그 근본원인을 알 수 없는 채로 왜 300여 명의 어린 학생들이 차가운 바다속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그 누구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아이를 잃은 부모중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이 일에만 매달려 있는 실정이다.

 세월호 사태가 마무리 되기 위해서는 2가지의 전제 조건이 해결되어야 한다.

1. 세월호가 침몰한 이유

2. 세월호가 가라앉고 3시간 남짓 있었던 골든아워 기간에 왜 구조활동이 없었는지. 아니 구조활동이 없었던 정도가 아니라 주변 해역에서 있던 자발적 어민들의 구조와 한미 해군이 사고 해역으로 긴급 출동해서 구조활동을 펼치려 했던 것을 청와대가 왜 막았는지에 대한 이유. 

 바로 이 두가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서는 세월호 사태는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키사고타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따라 죽림정사에 설법을 들으러 왔으 때, 그녀는 초췌한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몽롱한 눈동자에 눈두덩은 너무 울어서 통통 부어있었다. 등에 두 살 가량의 아기를 업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이미 죽어 악취를 풍겼다.

 아기가 죽자 너무 슬픈 나머지 그만 미쳐버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 아이에게 약을 주세요"라면서 매달렸다. 미쳐버린 키사고타미는 두려움도 모르고 세존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이 아이에게 약을 주세요."

 세존께서는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시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여, 잘 왔다. 약을 주겠다. 시내에 나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겨자씨를 받아 오너라. 단 죽은 사람이 없는 집에만 찾아가야 한다."

 "알겠습니다. 곧 다녀오겠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어디를 가건 이런 소리만 들었다.

 "죽은 아이에게 줄 약이 어디 있단 말이냐. 어서 저리 가."

 냉담하게 쫓겨나기만 했던 키사고타미는 세존의 다정한 말씀과 태도에 용기를 얻어 자리를 박차고 달려갔다.

 이튿날 키사고타미는 다시 설법이 행해지는 정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 죽은 아이를 등에 업지도 않았고, 세수를 하고 머리도 깨끗이 빗은 모습이었다. 모습은 초라하지만 어제처럼 더럽지는 않았다.

 "오오, 키사고타미, 그래, 겨자씨를 얻어 왔느냐?"

 세존께서 다정한 말로 부르시자 그녀는 흐트러짐이 없는 걸음걸이로 세존 앞에 나아와 공손히 인사하고 입을 열었다.

 "어느 집이든 겨자씨를 주기는 했지만,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해 걷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제 자식의 경우는 주어진 목숨이 짧았을 따름입니다."

O Captain! My Captain!

O Captain! my Captain! our fearful trip is done,
The ship has weather’d every rack, the prize we sought is won,
The port is near, the bells I hear, the people all exulting,
While follow eyes the steady keel, the vessel grim and daring;
                         But O heart! heart! heart!
                            O the bleeding drops of red,
                               Where on the deck my Captain lies,
                                  Fallen cold and dead.

O Captain! my Captain! rise up and hear the bells;
Rise up—for you the flag is flung—for you the bugle trills,
For you bouquets and ribbon’d wreaths—for you the shores a-crowding,
For you they call, the swaying mass, their eager faces turning;
                         Here Captain! dear father!
                            This arm beneath your head!
                               It is some dream that on the deck,
                                 You’ve fallen cold and dead.

My Captain does not answer, his lips are pale and still,
My father does not feel my arm, he has no pulse nor will,
The ship is anchor’d safe and sound, its voyage closed and done,
From fearful trip the victor ship comes in with object won;
                         Exult O shores, and ring O bells!
                            But I with mournful tread,
                               Walk the deck my Captain lies,
                                  Fallen cold and dead.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 우리는 끔찍한 항해를 마쳤습니다, 

이 배로 우리는 모든 역경을 거쳐, 우리가 찾던 상을 얻었습니다. 

종소리가 저에게 들리고, 곧 항구가 가까워집니다. 

흔들림없이 나아가는 엄숙하고 용맹한 배의 옆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하지만, 오! 심장이여, 가슴이여, 마음이여!

오, 빨갛게 뚝뚝 떨어지는 핏빛이여.

  차갑게 식은 채, 갑판 위에 누워있는 나의 선장님이여!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 일어나 저 종소리를 들어보세요.

일어나 보세요. 당신을 위한 국기가 펄럭이고, 당신을 위한 나팔이 울립니다.

당신을 위한 꽃다발과 리본 달린 화환, 당신을 연도하는 해안가의 군중들. 

물결치듯이 움직이며, 그들은 열망에 가득찬 얼굴로, 당신을 연호합니다.

   이제 선장님! 나의 아버지여!

    이 팔에 당신이 안겨있다니!(1) 

   당신이 싸늘한 채로 식어 갑판위에 있다니,

   이것은 무슨 꿈인가요!

 

나의 선장님의 입술은 창백한 채로, 대답이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아무런 맥박도 의지도 없이, 나의 팔에 안겨있습니다.(2)


이제 항해는 마무리 되고 임무는 끝나, 배는 안전하고 조용히 항구에 닻을 내립니다. 

끔찍한 항해 끝에 승리의 함선은 바라던 승리를 얻어 돌아왔습니다. 

해안에 늘어선 이들은 환호하고, 종들은 울려퍼집니다. 

하지만 차갑게 식은채로 당신이 누워있는 갑판위로

나는 울음을 삼킨 채 당신께로 다가갑니다.


(1),(2)

이 구절은 의역임. 나의 팔을 느끼지 않는다는 표현은 영어에선 어떤 슬픔의 클리셰가 있을지 모르지만, 

한글로 번역하는 데 있어서는 안겨있다가 낫다고 생각함

어느 블로그에서 본 글. 아마도 어디선가 돌아다니는 글이겠지만, 나이가 든 지금 보니 모두 절절하게 맞는 말이다.

젊은이들에게 해 줄 단 한마디가 있다면, 너 자신의 인생을 살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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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국어 공부에 투자할 시간과 돈으로 해외를 다녀라. 시간과 돈으로 해외를 다녀라. 언어가 아닌 문화를 습득해라. 주요단어 10,000개가 아니라 현지인 친구 100명을 사귀어라. 나중에 30대 이후에 한풀이 하듯 해외여행 다니는 일은 없을 것이다.


2. 책을 많이, 그리고 깊게 읽어라. 제대로 읽으면, 제대로 들을 줄 알게 되고, 제대로 구분할 줄 알게 되고, 제대로 된 단어로 제대로 쓸 줄 알게 되고, 나아가 제대로 말할 줄 알게된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면, 제대로 읽고, 제대로 생각하고, 쓰고 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3. 무리의 흐름에 생각 없이 따라가지 마라. 누가 왜 그 것을 주도하는지 모를 스펙쌓기를 위해 두번 다시 오지 않을 "네가 너에게 가장 많이 집중할 수 있는 그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4. 롤모델과 멘토에 집착하지 마라. 20대는 인생의 모양을 결정 짓는 때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너의 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5. 좋아하는 운동이나 취미에 중독되어 할 수 있는데까지 해봐라. 그 과정과 성취 속에서 남보다 빨리 많을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 경험은 훗날 너의 남 다른 스펙이 될 것이다.

6. 아르바이트를 시간당 금액의 크기로 결정하지 마라. 돈이 부족해 할 수 없이 하는 일이라해도 네가 그 것을 할 때 목표로 햐야 할 것은 하나다. "가장 잘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일찍부터 노력해 보면 훗날 남이 따라올 수 없는 훌륭한 체질을 갖게 될 것이다.

7. 혼자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라. 인간은 그 때 가장 깊은 사색을 한다.

8. 만약 대학을 다니고 있다면, 네가 다니는 그 곳을 취업 준비 학교로 만들지 말아라. 어린 애같고, 정신 빠진 친구들로 보여도, 꼰대 같은 교수님으로 보여도, 돈만 밝히는 학교로 보여도 그 곳은 가장 고등한 공식적인 학습의 장이다. 그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적극적으로 경험해라, 너의 전공과목을 존중하고 배우도록 해라. 훗날 뒤돌아 보면 알게 된다. 인생에 다시 오기 힘든, 지적성장에만 집중 할 수 있는 시간이 거기에 있었음을.

9. 만약 대학을 안다니고 일찍부터 사회에 나왔다면, 버는 만큼 써라. 문화생활과 배움과 여행으로 그 번돈의 상당수를 쓰려고 노력해라. 멋과 맛에 쓰는 것은 가장 마지막의 마지막이어야 한다.

10. 늘 외모와 분위기를 관리해라.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지성이고, 가장 강렬하게 남는 것은 외모다. 성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1. 남에게 들려주기 쑥쓰러운 꿈을 가져라. 아마도 그 것이 꿈다운 꿈일 것이다.

12. 인사를 잘해라.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해라. 그냥 무조건 그렇게 해라. 이유가 뭐냐고 물을거면, 그냥 이 글을 읽지마라.

13. 부모탓을 하지마라. 너에게 남보다 부족하게 제공해준 그 분들 덕분에 너는 남보다 더 크게 될 확률이 높아진 것이다. 성공은 순조로움이 아니라 다사다난의 극복에서 탄생한다.

14. 남이 너를 비난해도, 너는 너를 격려해라. 살아보니 세상에서 가장 못난 것이 자책과 자격지심이다. 

15.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참 씹기 좋은 말이긴 하지만. 아플 때 마음껏 아파도 되는 것이 20대이다. 더 나이 먹으면, 아플 때 아프다고 하는 것도 문제가 되고 잘못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마음껏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괴로워해라, 그 시간들이 나중에 너의 감기가 폐렴이 되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피타고라스가 남긴 것으로 알려진 인생의 황금율.


***


불멸의 신들에게 가장 먼저 경배하라. 정해진 형식에 따라 그들에게 맹세를 바쳐라.

다음으로 위대한 영웅들과 망자들의 혼령에게 경배하라. 전통의 의례에 맞춰 제사를 올려라.

부모와 친척들을 공경하라. 그리고 덕이 출중한 사람이라면 누구와도 친구가 되어라.

친절한 말과 남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라. 사소한 잘못 때문에 친구를 미워하지 말라.

그럴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이것들도 알아야 한다. 다음과 같은 것들을 억제할 수 있도록 연습하라.

식욕, 그리고 잠은 물론 정욕과 분노를.

혼자 있건, 다른 사람과 함께 있건 부끄러운 짓을 하지 말지어다.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라.

말과 행동에서 정의로워져라. 또한 무엇에서건 생각 없이 행동하는 습관은 얻지 말라.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옴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부(富)는 어떤 때에는 얻게 되나 

어떤 때에는 잃게 된다는 점도 깨달아야 한다. 

신들이 우리에게 어떤 슬픔을 겪게 하건, 그대가 어떤 운명을 지녔든, 이를 감내하고 불평하지 말라.

그러나 최대한 상황을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하라.

좋은 사람에게 신들은 너무 많은 슬픔을 겪어야 할 숙명은 내려주지 않는다.

인간은 많은 말을 듣게 된다. 저속한 말도 있고 고귀한 말도 있다.

여기에 동요되지 말라. 또한 마음에 없는 말을 억지로 내뱉지도 말라.

만약 거짓말을 들었다면 온화한 마음으로 참아라.

허나,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무엇이건 완벽하게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대애게 좋지 않은 행동이나 말을 하게 만드는 그 누구의 말이나 행동에도 설득당하지 말라.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행하기 전에 생각하라. 

생각하지 않고 말과 행동을 한다면 가치 없는 사람이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일만을 행하라.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떠한 것을 하려고 애쓰지 말되, 필요한 것은 배워라.

이러한 방법을 따른다면 인생은 가장 행복해지리라.

육체의 건강을 돌보는 데 태만해서는 절대 안 된다. 적절한 만큼 먹고, 마시고, 운동을 해라.

그 기준이 어떠하건 스스로에게 적절하기만 하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

삶을 순수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방탕해서는 아니 되며, 

어떤 일에서건 시기와 질투가 생겨나지 않도록 주의해라.


마음에 든다고 경솔하게 달려드는 사람처럼 씀씀이가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구두쇠가 되어서도 안된다. 중용(中庸)은 모든 경우에서 최선이다.

항상 스스로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을 하라. 그리고 행동하기 전에 숙고하라.


오늘 하루의 일을 세 번 되짚어보기 전까지는 피곤한 눈을 감고 잠을 청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잘못한 일은 무엇인가? 내가 성취한 일은 무엇인가? 내가 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일은 무엇인가?"

하루의 처음부터 시작해 마지막까지 훑어가며, 잘못한 일에 자신을 꾸짖고, 좋은 일을 행한 것에 즐거워하라.


이러한 일들을 행하며, 부단히 노력해야 할 터인데, 이는 우리가 반드시 염원해 마지않아야 할 것들이다.

이것들이 너를 신적인 덕(德)의 길에 놓아줄지니, 그렇다, 우리의 영혼을 테트라크티스에 맡긴 분께서 인도해 주시리라.

영원히 흐르는 대자연의 원리인 테트라크티스여, 잘할 수 있도록 신께 기도를 드리고, 행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단단히 붙잡아라. 너는 신들과 피조물들의 세계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만물에 충만하며 만물을 관장하노니. 그렇다.

너는 모든 측면에서 비슷한 자연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불합리한 희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며, 그 무엇에도 소홀함이 없을 터이다.

비참한 인간들은 스스로가 그들 자신 고통의 원인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가까이 있는 선(善)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문제들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해(害)하는 숙명이다. 

그들은 마치 조약돌과 같이 하나의 걱정에서 다른 걱정으로 계속해서 구른다.

두려운 동반자인 '불화'라는 놈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을 해한다.

따라서 반드시 그의 뒤를 쫓아서는 아니 되며,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달아나야 한다.


아버지 제우스여. 만일 당신께서 사람들에게 그들이 지닌 운면을 보여주신다면,

참으로 많은 중생들이 악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나니, 왜냐하면 인간은 신들의 자손이기에,

그리고 자연은 너그럽게도 사람들에게 성스러운 모든 것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이왕에 이러한 것들에 마음을 쓰고자 한다면,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을 마음에 잘 새김으로 해서

변화할 것이며,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너의 영혼을 구원할 것이다.

우리가 <정화>와 <영혼의 구원>에서 언급한 음식들이 무엇인지 알아 이를 삼가고,

너의 스승이 인도하는 대로 모든 것들을 이성으로 판단하라.

네가 육체를 떠나 자유로운 공기를 갖게 될 적에, 그대는 불멸이 될 터이며,

죽지 않는 신으로, 즉 더 이상 피조물이 아니게 된다.


***



1. 일시 : 2018년 9월1일 (토), 15시~16시30분

2. 장소 : 강북문화예술회관

3. 강사 : 조승연, 문화예술 전문가. 주요저서로는 플루언트, 공부기술, 그물망 공부법

          다수의 인문 교양 방송 출연 中

 

4. 감상 : 부제는 행복에 대한 비주류권의 문화적 차이에 대하여가 더 어울릴 것 같다.

          구민들 대상으로 하는 무료 프로그램이고 조승연 작가의 프로필상 영어교육 전문가인 부분도 

          있다 보니, 어린 아이들이랑 온 학부모도 꽤 됐고, 이 동네 분위기상 나이가 지슷하신 어르신들도

          꽤 됐다. 강연 초반 핸드폰 소리와 늦게 온 사람 등 약간 어수선함 감도 있었지만 강연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준비해온 강연을 수준 있게 잘 풀어나갔다.

          초반 도입부가 조금은 내 생각이랑 좀 다른 부분이 있어서 약간 졸릴 때도 있었지만 30분 정도

          지나서는 확실히 몰입이 될 수 있었고, 내용도 물론 훌륭했다. 다만 강의의 강약 조절이 거의 없었다.

          말이 상당히 빠른 편이었는데, 그 속도를 계속 유지하다 보니, 들어오는 입력의 양이 좀 많은 편이라 

          지치는 감도 있었다.(실제로 어린 아이들은 거의 다 집중을 못하고, 나이 드신 분들도 좀 힘들어 하신 듯)

          강연시 관객과의 인터랙티브에 좀 더 신경을 써서 강약만 조절하면 아주 훌륭한 강연가가 되실 듯.

 

 

5. 내용

 1) 서론

   조승연 강사(이하 강사)가 프랑스 유학 시절, 프랑스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보면 같은 동양인이라고 해도 한,중,일본의 3개국의 행동을 보면 어느 나라인지가 구별된다는 에피소드로 서두를 시작. 일본인은 파리에 오면 우울해 보이고(사색적이라는 의미같다.), 중국인은 파리에서도 중국처럼 행동한다.(시끄럽고 행동에 예의가 없다) 한국인은 에펠탑 앞에 도착해도 그저 인상을 찌푸리고 이게 에펠탑인가 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음 장소는? 이라고 가이드에게 묻는다고.

 

  대한민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정도가 크다고 한다. 이는 행복을 어떤 정형화된 기준에 의해 스테레오 타입으로 보기 때문인데 - 예를 들어,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잡고 결혼해서 2명 정도의 아이를 가지고, 강남에서 30~40평형 정도의 아파트에서 사는 - 이런 정형화된 기준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즉 행복이란 감정은 상대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을 인식하는 삶에 익숙한 대한민국 사람들은 나의 행복이 아닌 보여주기 위한 행복속에서 살면서 도리어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2) 본론

  지혜와 지식은 어떻게 다른가? 지식은 배우는 것이고 지혜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으로부터 얻는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사의 비유는 예를 들어 자신이 원하는 좋은 차를 갖는 것은 지식이요, 그 차를 가지고 어딜 가고 싶은지는 지혜라고 이야기했는데 내 생각으로 지식과 지혜의 비유로선 그리 잘 어울리는 것 같진 않다. 지혜라기보단 삶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전체의 이야기 맥락상으론 강사가 이야기한 지혜의 비유가 완전히 틀리지는 않다.)

 두 번째 비유가 지혜라는 비유에 더 잘 어울렸다. 프랑스 유학시절 자동차 면허를 딸때 당시 젊은 조승연씨가 자꾸만 실수를 하고 사고를 낼 뻔하자 운전강사가 차를 주차장에 대라고 하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가자고 했다고 한다. 쉬면서 그 운전강사가 조승연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넌, 운전을 뭘로 한다고 생각하니? 운전은 손과 발로 하는게 아니라 눈으로 하는거야. 너가 눈으로 보는 데로 차는 향하는 법이다."

 운전강사의 오랜 경험으로부터 초보 운전자가 범하는 실수가, 공포에 이끌려 시선과 생각이 내가 가려는 곳이 아닌 주변의 방해물에 집중되는 탓에 똑바로 가지 못하고 사고의 확률만 높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오랜 경험으로 문제의 핵심과 본질을 꾀뚫고 있는 것이 바로 지혜다.

 어느 나라마다 지혜의 전승은 중요하며, 이 전승은 크게 2가지의 방법으로 이어진다. 하나는 어머니의 잔소리이며, 두 번째는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이다.

 (부모 자식으로 이어지는 가정교육과 역사와 민간설화등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유산을 의미한다.)  

 

  우리는 최근 인문학과 문화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는 하지만, 그 대상이 주로 한자문화권인 한,중,일로 대표되는 동양문화와 산업혁명 이후 세계의 패권을 쥔 영국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200년 남짓의 서양문화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 세계 문명의 기원은 독자적인 4대문명-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으로 5천년 전 무렵부터 각기 지역적으로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의 문화,문명에 대해 우리보다 선진국만이 배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이유로 세계사적으로는 중요하고 서양의 지식인이라면 권장하는 문화권에 대해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문화가 있다. 오늘은 그런 문화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로 인도는 한국사람에게는 매우 낯설고 너무나 다른 사고방식으로 인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화이다.(이 부분에서 갑자기 집중력이 떨어져서   많은 부분을 놓쳤다.) 수 많은 신이 등장하는 힌두교. 그 수 많은 신들의 수 많은 에피소드에 인도인들의 기저에 깔린 의식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둘째로 페르시아 문명이다.(현재의 이란과 우즈베키스탄등의 나라가 이 문명권의 후예이다). 페르시아는 2,500년전에 대제국을 세웠던 문명으로, 왕을 위한 전승의 모임인 샤나메가 전해진다. (이 샤나메중 하나의 이야기를 소개함.)

  이 이야기의 주제는 여러가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아랍권으로 불려지는 이 지역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말(그리고 그에 따른 대표적 의식구조)은 인샬라(만일 신이 허락한다면)이다. 이런 면이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굉장히 답답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인샬라가 아닌 "하면 된다"라는 정반대의 의식구조에서 살기 때문이다. 

 

   셋째는 태국이다. 태국은 앙코르와트 제국을 무너뜨린 대제국의 수도 아유타야(방콕에서 북쪽으로 70킬로 지점)가 있다.고 태국에도 여러 전승이 전해진다. 그 전승중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남자가 아무리 노력을 해서 돈을 벌어도 재산이 모이지 않자, 점장이를 찾아갔다. 점장이는 젊은이에게 너는 10가지 이상의 물건을 가질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러자 젊은이는 그럼 어떻게 하면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물어보았다. 점장이는 그건 내가 알 수 없으니 정 알고 싶으면 부처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젊은이는 부처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첫째날 날이 저물어 어느 부잣집에 가서 하룻밤 신세를 질 것을 청하자 부자집 주인은 흔쾌히 하룻밤 묵어 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젊은이가 주인의 안색을 보니 고민이 있어보여, 무슨 고민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주인은 성년이 된 어여쁜 딸이 하나 있는데 말을 못해서 고민이라면서, 젊은이에게 부처를 만나거든 내 딸이 왜 말을 못하는지를 물어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룻밤을 지내고, 산을 넘는데 연못에 있던 거북이가 젊은이를 보고는 나는 도마뱀, 뱀들과 함께 용이 되기 위해 정진 중인데, 같이 수련해 온 도마뱀과 뱀이 모두 용이 되어 날아갔는데 나만 아직도 용이 되질 못하고 거북이 신세로 있다오. 부처님을 뵙게든 나 대신에 내가 왜 용이 못되고 있는지를 좀 물어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제 높은 산을 하나만 넘으면 부처님 계신 곳인데, 너무 지쳐 넘어갈 엄두를 못내고 있던 차에 지팡이를 든 마법사가 나타나서 이 산을 넘게 해줉테니 내가 신선이 되기 위해 오랜 동안 도를 닦는 중인데 아직도 신선이 못되고 있는 까닭을 부처에게 물어봐달라고 했다. 

 젊은이는 이 부탁들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드디어 부처님 앞에 도착을 했다. 부처님은 젊은이를 보자 빙그레 웃으시며, "너의 질문 3가지를 들어주마."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젊은이는 자신의 질문은 포기하고 오는 중에 만난 3명의 질문을 하고 그 대답을 얻어서 돌아갔다.

 

 마법사에게는 그 지팡이를 버리면 신선이 될 수 있다하였고, 거북이에게는 거북껍질에서 나오면 용이 될 수 있다 알려주었으며, 부자 주인에게는 따님은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서방이 될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말을 안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신선이 버린 지팡이를 가진 젊은이는 하늘을 나는 능력을 얻었고, 거북껍질 속에서는 진귀한 금은보화를 얻었으며, 부자집 딸은 돌아온 젊은이에게 "나그네님"이라고 반겨 맞으며 그 신부가 되었다. 

 태국의 문화에서는 주는 것고 받는 것은 동일한 것이라는 의식이 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주고, 모자란 사람은 받으며, 언제든 상황이 바뀌어서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3)결론

 행복이란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이라고는 정의하기 어렵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인도,페르시아,태국 문화권의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우리보다 나쁜 환경과 열악한 경제여건 속에서도 우리보다 더 많이 웃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더 많이 웃고 산다는 것이 꼭 행복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 있으나 어쨋든 더 많이 웃고 사는 여유를 가진 삶이 행복이 아닐까 한다.

(강의 듣고 나서 바로 정리해봤다. 날이 갈 수록 더 까먹을테니. 내가 정리한 것보단 100배 정도 더 좋은 강의였다.) 

 

 

 

 

 

피코 아이어는 명상가이며 여행작가이다. 

 

그의 동명의 책, '여행하지 않을 자유(The Art of Stillness)'와 관련된 Ted강연이다.

 

이 동영상에도 그 책의 내용이 일부 나오긴 하나, 동영상보다는 책의 내용이 훨씬 내용도 많고 깊다.

 

이 동영상의 내용이 맘에 드는 사람은 그 책을 한 번 꼭 보기를 권장한다.

 

 

최근에 이 강연자가 쓴 책 '모든 것이 되는 법(how to be everything)'을 보고, 찾아보게 된 TED영상.

 

주요한 주제는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지 못하고 길게는 4,5년, 짧게는 2,3년에 하나의 직업이나 주제에 천착하고는

지루해져서 다른 주제로 자꾸 옮겨가는 자신에 대해 고민하다가 깨달은 것에 대한 내용이다.

 

핵심적인 내용은 2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1. Multipotentialite(다재다능)의 장점

  1) Idea Synthesis => Innovation happens at the intersections.

  2) Rapid Learning

  3) Adaptability

 

2. Multipotentialite + Specialist => Team, Create Synergy.

 

 

젊은 시절엔 넓게 공부하고, 차차 공부의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 모든 공부의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매우 좋은 글이라 인용함. 현재의 대한민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아주 시의적절하며 현명한 방향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함.


출처 : 동아시아 포럼


http://www.eastasiaforum.org/2017/12/18/south-koreas-astonishing-political-year/


South Korea’s astonishing political year

Author: Stephen Costello, Asia East

It is hard to overstate the drama that has gripped the South Korean political world during the past 12 months. But the return of pragmatic democratic leadership today offers a crucial opportunity for President Moon Jae-in to reshape the perilous security situation in Northeast Asia as well as to reinvigorate South Korea’s democracy and economy.

지난 1년간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태만큼 극적인 것은 유래가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실용주의와 민주적 리더십의 회복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은 북동 아시아의 위협적인 안보상황을 재편하는 한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경제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The political year really began in October 2016, when then president Park Geun-hye’s combination of corruption and incompetence propelled hundreds of thousands of citizens onto the streets in lively but peaceful protests. On 10 March 2017, the National Assembly voted unanimously to impeach Park. Sixty days later Moon Jae-in was elected.

이런 일련의 정치적 사태의 시작은 전임 대통령 박근혜의 부패와 무능에 분노한 수 십만의 시민들에 의한 적극적이고도 평화로운 시위가 시작된 2016년 10월부터 시작되었다. 2017년 3월10일 국회는 만장일치로 박근혜의 탄핵을 가결시켰고, 60일후에 문재인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South Korean President Moon Jae-in speaks during a press conference marking his first 100 days in office at the presidential house in Seoul on 17 August 2017 (Photo: Reuters/Jung Yeon-je).

There may not be any other democracy today that could do this.

현재 어떠한 민주주의 국가도 이와같은 성과를 거둔 예가 없다.

South Koreans can be rightfully proud of this. Yet it is not clear that government leaders or the policy community at large have fully digested the country’s growth or fully recognised its middle power potential. In this sense, they lag behind much of the public.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와 같은 성과에 자랑스러워할 자격이 충분하다. 그렇지만 아직도 정부의 지도급 인사들 또는 많은 정책 커뮤니티들이 대한민국의 (민주적인) 성장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중간국으로서의 잠재력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직도 많은 대중들이 대한민국의 현 상황에 대해 (지난 1년간의 눈부신 발전에 비해) 과거의 인식에 멈춘채로 있다.

For South Korea and Northeast Asia, the most important aspect of Moon’s election is that he is a pragmatist, not an ideologue. That makes him unique right now in Northeast Asia. His task is to advertise South Korea’s assets and insist on the country’s rightful seat at the decision making table. If the Moon government can become a channel for clear and pragmatic policies, it can then lead on critical issues such as North Korean denuclearisation and development, disaster relief, clean energy and arms reduction.

대한민국과 북동아시아에 있어서, 문재인의 당선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공론적 이상주의자가 아닌 실용주의자라는 점이다. 그 점이 북동아시아에서 현재의 그를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그의 과제는 결정을 하는 주요 협상테이블에서 대한민국이 가진 자산들을 관련국들에게 제대로 이해시키고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제대로 된 위상을 확보하는 것이다. 문재인의 정부가 선명하고 실용적인 채널로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되면, 대한민국은 북한의 비핵화와 (평화적) 개발, 재난완화, 친환경에너지와 군비감축과 같은 중요한 이슈들을 이끌어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Yet to do that, impediments within South Korea’s policy space must be acknowledged and managed — some will even have to be addressed head-on. One is that conservatives fear modernism and miss the imagined certainty of the pre-democratic era. Another is that there is a persistent political and personality war among democrats that may determine how successfully Moon can shape policy debates and maintain support in the National Assembly. Moon must also cooperate with the progressive People’s Party and the Justice Party in order to push through his initiatives.

하지만 그 이전에 대한민국의 정책공간내에 존재하는 장애물이 우선적으로 인식되고 관리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이슈들은 대한민국내에서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장애물의) 하나는 보수파들의 현대화(진보)에 대한 두려움과 과거 비민주적 시대의 가공되어진 확실성(독재시대에 정권에 의해 호도된 가치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다른 하나는 민주진영내에서의 그간의 끈질기게 요구되온 정치적이며 개별적인 사안들이 문재인이 정책적 논란과정들을 해결해내가고 국회의 지속적 유지를 얻는데 어떻게 성공적으로 결정될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There are two other challenges that could constrain South Korean power and flexibility. One is the radically different views that persist of South Korea’s role, power and responsibilities: on one hand, a weak and dependent South Korea, and on the other, a South Korea that stands as middle power. Even the President seems torn between them; Moon recently said that the regional situation ‘is not favourable to us’ and that South Korea ‘has no power to resolve the current crisis or help relevant sides seek an agreement’. But he has also insisted for months that Seoul should be ‘in the driver’s seat’ on North Korea issues, and he has begun to cultivate his relationship with Xi Jinping.

대한민국이 가진 국력-힘과 유연성-을 제한할 수 있는 두가지 장애물이 있다. 하나는 대한민국의 역할, 능력과 책임에 대해 극단적으로 다른 2가지의 견해 - 하나는 약소국으로서 의존적인 대한민국과, 다른 하나는 중진국으로서의 대한민국에 대한- 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대통령마저도 이 두가지 의견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듯이 보일때가 있다. 문 대통령은 최근 주변의 상황이 매우 여의치 않으며 대한민국은 현재의 위기를 해결할 어떤 힘도 갖고 있지 않으며, 관련국들간의 협의에 의한 도움도 없는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지난 몇 달동안 서울은 북한 이슈에 대해 이끌어가는 입장에 있다고 주장해왔으며, 시진핑 중국 수석과의 관계 개선이 시작되고 있다고도 이야기했다.

The second challenge is the South Korea–US alliance. The relationship is long overdue for readjustment and modernisation but is encountering numerous road blocks under the Trump administration. The Trump administration is an unreliable negotiating partner, and it has become hyper-sensitive to any hint of independent ambition by Seoul. While the alliance is not at risk, it sorely needs South Korea to assume greater responsibility. But US unpredictability and Trump’s bellicosity mean statements to that effect evoke nervousness among South Korean elites, and have prevented the government from advancing solutions.

두번째 장애물은 대한민국과 미국의 동맹이다. 양국 관계는 이미 필요한 재협상과 현실화라는 부분에 있어서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상태인데다가 트럼프 정부하에서 수 많은 새로운 장애물들이 등장하고 있는 상태이다. 트럼프 정부는 기본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협상 파트너이며, 서울의 (북한문제등에 대한)독립적인 야망에 대한 어떠한 낌새에도 과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동맹관계에 있어 (미국은) 어떤 위험도 지지 않는 반면에, 오직 대한민국에게는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북한문제에 대한)예측불가한 상태와 트럼프의 호전성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의 엘리트들(고위 지도급 인사들) 사이에서 (북핵문제에 대해) 과도한 비이성적 반응들을 야기시키고 있으며, 이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가 사태를 해결하는 것을 막아오고 있다.

(*외국인들이 우리보다 문제를 더 정확히 보는 것이 놀라울뿐)


Where does that leave South Korea’s foreign policy direction? President Moon needs to focus on three key external relations opportunities.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대외정책은 어디로 갈 것인가? 문대통령은 3가지 주요한 외적 관계의 기회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First is South Korea’s regional relations. Moon has already begun to manage the areas in which South Korean, Chinese and Japanese interests overlap. But it would be a grave mistake for Moon to continue to urge Russia and China to punish North Korea harder. Instead, his advantage lies in his ability to offer a roadmap for infrastructure and development that integrates the North. China, Russia and Japan would directly and amply benefit from this. Moon should also encourage diplomacy and increased global interaction with North Korea, which could form the basis for the next successful regional advancement.


첫번째는 대한민국의 지역적 관계이다. 문대통령은 이미 한국,중국과 일본의 이해가 만나는 지점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대통령이 러시아와 중국에 대해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강하게 요구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그 대신 대한민국이 이용해야 할 지점은 북한,중국,러시아와 일본-이 4개의 국가 모두에게 직접적이고 상세한 이익이 되는-을 잇는 인프라스트럭쳐의 개발에 대한 로드맵에 대한 구상에 있다. 또한 문대통령은 북한과 세계간의 더욱 빈번한 교류와 외교에 대한 중재를 통해, 더욱 성공적인 차세대 이 지역의 분쟁상황 개선의 기초를 닦을 수도 있을 것이다.

Second is South Korea’s bilateral relations with North Korea. South Korea’s clear interest lies in reclaiming the strategic possibilities that emerged in 2000, when the North’s proposed denuclearisation benefitted each actor and Pyongyang’s security and development were tightly linked to it. But if the government continues to pursue the false notion that maximum isolation and pressure can lead to negotiations with Kim Jong-un, then it can make no progress.

두번째는 대한민국의 북한과의 쌍무적 관계에 대한 것이다. 남한의 확실한 이해관계는 2000년도에 있었던, 북한이 제안했던 비핵화가 모든 이해당사국에 이익이 되고, 평양의 안보와 개발이 완전히 그것(비핵화)에 연관되었던, 전략적 가능성을 재확인하는데 달려있다.(말이 좀 어려워서 보충하자면, 2000년 남북의 6.15 공동선언에서 합의된 남북 화해협력의 대원칙을 이야기하며, 이때의 합의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현재의 북핵 위기가 종료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만약 정부가 최대의 고립과 압력이 김정은을 협상으로 이끌 것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고집한다면, 그 어떤 진전도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현재 국내의 보수가 이야기하는 지점이 최대의 고립과 압력이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미친놈마저 있는 실정임)


Third is South Korea’s alliance with the United States. Due to mistakes of past US and South Korean presidents, the North Korea issue now largely defines bilateral relations. This was clear before Moon was elected. If he is to be a true friend to the United States rather than a Trump enabler, he will quickly take up leadership on Peninsular issues (which Trump has abandoned).


세번째는 대한민국과 미국의 동맹이다. 과거 미국과 대한민국 대통령들(트럼프,오바마,부쉬,이명박,박근혜라고 써줘야 이해할 듯)의 실수들로 인해, 북한 이슈는 이제 쌍무적인 관계가 되어버렸다. 문재인 대통령 이전에 이것은 명확한 것이었다. 문대통령이 트럼프에 대한 아첨꾼이 아니라, 미국의 진정한 친구라면 반도의 문제에 대해 리더십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이것은 트럼프에 대한 폐기를 의미한다.)

*(--너무나 정확한 현실파악이라..이 글 쓴 분 존경스럽다.)


While the United States will eventually return to positive engagement on Peninsular issues, this may take five years or more, and Moon doesn’t have time to wait. Too much of South Korea’s agenda and its immediate security depend on him moving now. Trump has shown himself to be malleable — particularly if others arrange for the US’s advantageous participation. That possibility — rather than fuelling Trump’s non-strategic, ‘tough guy’ impulses — is where Seoul and Washington’s roles can be mutually reinforcing.

미국은 결국 반도의 이슈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아설테지만, 이것은 최소한 5년 이상(트럼프가 물러나야 된다는 의미)은 걸릴 것이고, 문대통령은 기다릴 시간이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어젠다의 대부분과 국가의 즉각적인 안보가 그의 현재의 행보에 달려있다. 트럼프는 그 자신이 상황에 따라 왔다갔다-미국의 이익이 되는 상황에서는 특별히 그렇다-하는 것을 보여줘왔다. 이 가능성-트럼프의 비전략적인 '터프가이'적 충동을 부채질하는 것보다는-에 서울과 워싱턴의 역할을 상호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With its US ally temporarily drained of diplomatic and institutional capacity, and with broad public support, South Korea’s leadership has never possessed this level of capability, stability and flexibility. How and whether it is used will greatly impact regional dynamics in coming months and years. Will the government use its unprecedented power to play a decisive and positive role in 2018?

미국이 잠시 외교적, 제도적 능력이 소진된 상황에서(트럼프에 의해 미국의 외교적 신뢰도가 현재 완전히 바닥이라는 의미), 대한민국 국민들의 높은 지지속에서, 대한민국의 리더십은 여태까지 이 정도의 능력,안정성과 유연성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역대 가장 높은 수준) 이러한 잠재력을 가지고 다가오는 미래의 이 지역의 정치적 역동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문재인 정부는 이 미증유의 능력을 가지고 다가오는 2018년에 결정적이며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Stephen Costello is an independent analyst and consultant and the producer of AsiaEast. He was formerly director of the Korea Program at the Atlantic Council and director of the Kim Dae Jung Peace Foundation. His column appears at The Korea Times. You can follow him on Twitter at @CostelloScost.

스테판 코스텔로는 동아시아 포럼의 독립된 분석가이며 컨설턴드이다. 그는 대서양위원회에서 한국 프로그램에 대한 디렉터를 역임했고, 김대중 평화재단에서 디렉터를 역임했다. 그의 칼럼은 코리아 타임즈에 게재되고 있다.

This article is part of an EAF special feature series on 2017 in review and the year ahead.





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데 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 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하니 손을 뻗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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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연작)


포근한 솜이불 속에서 엄마의 가슴팍에 안겨 자고 있는 아기의 볼을

살살 건드려보고 싶기도 하고,


꽃샘추위에  아직은 냉기가 가시지 않은 처녀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이른 봄향기에 취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이 밤이 쉬이 감에,  나는 안타까와.. 

더 새빨갛게 타버리지 못함이 못내 아쉬워 시뻐얼건 내 땀구녕을 한껏

열고 마지막 누런 한숨을 목놓아 쉬고 있다.


새벽 닭소리와 벌겋게 떠오르는 동녁하늘에 내 몸이 산산히 부서져가

재만 남아 고갯짓 겨우 하니 바싹 마른 몸에 내리우는 이슬 한방울에

밤새 먼지낀 얼굴을 닦이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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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은 35킬로를 넘어가면 소화기관에 축적된 에너지는 모두 연소되고, 

이후는 내장과 근육에 축적된 에너지를 사용하는 사점에 이른다고 한다. 


이에 이르면 보통의 사람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피로로 인해 달리는 행위 자체에 회의가 들게 되어 결국은 더 이상의 달리기를 포기하는 이들이 속출하는 구간이라고 한다.


이 지점을 넘어서 말 그대로 극한의 고통속의 달리는 마라토너들의 얼굴을 자세하게 볼 기회는 별로 없다. 우연히도 황영조 선수가 우승한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대회 영상을 보면서 골인점을 통과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고통을 참으며 무엇을 위해 한순간 한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짜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일그러진 얼굴이 이렇게 아름다운질 새삼 깨달았다.

감정과 실패, 그리고 행복 찾기에 관하여

-2008년 6월15일 스탠퍼드 대학



 Thank you, President Hennessy, and to the trustees and the faculty, to all of the parents and grandparents, to you, the Stanford graduates. Thank you for letting me share this amazing day with you.

 I need to begin be letting everyone in on a little secret. The secret is that Kirby Bumpus, Stanford Class of '08, is my god-daughter. So I was thrilled when President Hennessy asked me to be your Commencement speaker, because this is the first time I've been allowed on campus since Kirby's been here.

 감사합니다, 헤네시 총장님, 대학 이사진과 교직원, 부모님과 조부모님들, 그리고 졸업생 여러분. 이렇게 멋진날에 제가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모든 분께 작은 비밀 한 가지로 시작하려 합니다. 그 비밀은 이번 졸업생 중의 한명인 커비 범퍼스가 바로 제 대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네시 총장님이 제게 졸업 축사를 부탁하셨을 때 전 몹시 감격했습니다. 커비가 대학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이 교정에 올 수 있었으니까요.

 You see, Kirby's a very smart girl. She wants people to get to know her on her own terms, she says- not is terms of who she knows. So, she never wants anyone who's first meeting her to know that I know her and she knows me. So, when she first came to Stanford for new student orientation with her mom. I hear that they arrived and everybody was so welcoming, and somebody came up to Kirby and they said, "Oh my god, that's Gayle King!" Because a lot of people know Gayle King as my BFF.

 아시는 것처럼 커비는 매우 똑똑한 여학생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인맥으로서가 아니라 본인의 참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저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법이 없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기 위해 커비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스탠포드에 왔을 때, 전 모든 이들이 모든 사람들이 반가워했고 그 중에 누군가 커비에게 다가와 "세상에, 저 사람 게일 킹이잖아!"라고 했답니다. 제 절친인 게일을 아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죠.

 And so somebody comes up to Kirby, and they say, "Oh my god, is that Gayle King?" And Kirby's like, "Uh-huh, She's my mom." And so the person says, "Oh my god, does it mean, like, you know Oprah Winfrey?" And Kirby says, "Sort of."

 I said, "Sort of? You sort of know me?" Well, I have photographic proof. I have pictures which I can e-mail to you all of Kirby riding horsey with me on all fours. So, I more than sort of know Kirby Bumpus. And I'm so happy to be here, just happy that I finally, after four years, get to see her room. There's really nowhere else I'd rather be, because I'm so proud of Kirby, who grauates today with two degrees, one in human bio and the other in psychology. Love you, Kirby Cakes! That's how well I know her. I can call her Cakes.

 누군가 커비에게 "오, 저 사람 게일 킹 아냐?"라고 하면 커비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응 우리 어머니야." 그러면 그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하죠. "세상에, 그럼 너 오프라 윈프리도 알겠네?" 그러면 커비는 "그렇다고 할 수 있지."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고? 우리가 고작 그 정도니?"라고 커비에 이야기했죠. 저와 커비가 가깝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습니다. 전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께 제가 팔을 짚고 엎드려서 커비를 등에 태운 사진을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저와 커비 범퍼스는 아는 정도는 넘는 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여기에 온 것이 행복합니다. 4년 만에 커비의 방을 구경하게 되어 행복할 따름입니다. 커비를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제가 정말로 가보고 싶었던 곳이거든요. 커비는 오늘 인간생물학과 심리학에서 2개의 학위를 받습니다. "사랑한다 커비 케이크(멋진 여자를 지칭하는 애칭). 저는 커비를 케이크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친합니다. 

 And so proud of her mother and father, who helped her get through this time, and her brother, Will. I really had nothing to do with her graduating from Stanford, but every time anybody's asked me in the past couple of weeks what I was doing. I would say, "I'm getting ready to go to Stanford."

 I just love saying "Stanford." Because the truth is, I know I would have never gotten my degree at all, cause I didn't go to Stanford.

 그리고 지금껏 커비를 도와준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 윌이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사실 그녀가 스탠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지난 몇 주 동안 누군가 제게 뭐하며 지내내고 물을 때마다 "스탠퍼드에 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저는 그냥 '스탠퍼드'를 입에 올린다는게 좋습니다. 스탠퍼드에 다니지 않았으니 평생 스탠퍼드 학위를 따지는 못하겠지만요.

 I went to Tennessee State University. But I never would have gotten my diploma at all, because I was supposed to graduate back in 1975, but I was short one credit. And I figured, I'm just going to forget it, cause, you know, I'm not going to march with my class. Because by that point, I was already on television. I'd been in television since I was 19 and a sophomore. Granted, I was the only television anchor person that had an 11 o'clock curfew doing the 10 o'clock news. Seriously, my dad was like, "Well, that news is over at 10:30. Be home by 11."

 저는 테네시 주립대학교에 다녔습니다. 1975년에 졸업할 예정이었지만 한 학점이 모자라 학위를 받지 못햇습니다. 그때 저는 학위 따위는 그냥 잊자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교수가 될 생각도 없었고 사실 그 무렵에 이미 텔레비젼에 출연하고 있었으니까요. 대학 2학년이던 19살때부터 텔레비젼에 출연했습니다. 저는 10시 뉴스를 진행하고 11까지 집에 돌아가야 하는 유일한 텔레비젼 앵커였습니다. 아버지는 정말로 이렇게 말씀하셨죠. "뉴스가 10시30분에 끝나니까 11까지는 집에 오도록 해라."

 But that didn't matter to me, because I was earning a living. I was on my way. So, I thought, I'm going to let this college thing go and I only had one credit short. But, my father, from that time on and four years after, was always on my case, because I did not graduate.

 He'd say, "Oprah Gail" - that's my middle name - "I don't know what you're gonna do without the degree." And I'd say, "But, Dad, I have my own television show." And he'd say, "Well, I still don't know what you're going to do without that degree." And I'd say, "But, Dad, now I'm a talk show host." He'd say, "I don't know how you're going to get another job without that degree."

 학점은 제가 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전 이미 돈벌이를 하고 있었고, 내 진로를 찾은거였지요. 그래서 대학문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고작 한 학점이 모라잔 것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버지는 제가 졸업을 하지 않았기에 이후 몇 년 동안 항상 대학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아버기는 이렇게 말하곤 하셨죠. "오프라 게일"-제 중간이름입니다.-"대학 학위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구나." 그러면 전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전 지금 제 텔레비젼 쇼를 진행하고 있어요." 그러면 아버지는 또 이렇게 말씀을 하시죠. "음 그래도 대학 학위도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럼 전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전 지금 토크쇼의 진행자에요."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학위도 없이 다른 일자리를 어떻게 구할지 난 정말 모르겠구나."라고요.

 So, in 1987, Tennessee State University invited me back to speak at their commencement. By then, I had my own show, was nationally syndicated. I'd made a movie, had been nominated for an Oscar and founded my company, Harpo. But I told them, I cannot come and give a speech unless I can earn one more credit, because my dad's still saying I'm not going to get anywhere without that degree.

 So, I finished my course work, I turned in my final paper and I got the degree. And my dad was very proud. And I know that, if anything happens, that one credit will be my salvation.

 그런 와중에, 1987년, 테네시 주립대학교에서 졸업식 축사에 저를 초청해주었습니다. 당시 제 토크쇼(오프라 윈프리 쇼)는 전국적으로 방송되고 있었고, 제가 만든 영화는 오스카상 후보에 올라있었으며, 전 저의 회사인 하포(오프라의 철자를 반대로 함)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학점을 더 따기 전까지는 갈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여전히 제가 학위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 제 학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제출했으며,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매우 자랑스러워하셨죠. 저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한 학점이 제게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것을 믿습니다.

 But I also know why my dad was insisting on that diploma, because, as B.B.King put it, "The beautiful thing about learning is that nobody can take that away from you." And learning is really in the broadest sense what I want to talk about today, because your education, of course, isn't ending here. In many ways, it's only just begun.

 아버지가 학위를 그렇게나 고집하셨던 것은, 비비킹이 말했듯이, "배움의 가장 아름다운 점은, 아무도 그것을 당신에게 빼앗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움이야말로 넓은 의미에서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배움이란 것은, 당연하게도,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여러분의 배움은 이제 막 시작인 것입니다.

 The world has so many lessons to teach you. I consider the world, this Earth, to be like a school and our life the classrooms. And sometimes here in this Planet Earth school the lessons often come dressed up as detours or roadblocks. And sometimes as fullblown crises. And the secret I've learned to getting ahead is being open to the lessons, lessons from the grandest university of all, that is, the universe itself.

 세상엔 여러분을 가츠칠 수많은 교훈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즉 지구는 학교와 같은 곳으로 우리의 인생은 교실과 같습니다. 때로는 여기 이 지구라는 교실에서 가르침은 종종 우회로나 장애물로서 나타나곤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파괴적인 위기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 교훈을 헤쳐나가면서 얻은 비밀은 이 위대한 대학, 즉 이 세상의 가르침에 언제나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It's being able to walk through life eager and open to self-improvement and that which is going to best help you evolve, cause that's really why we're here, to evolve as human beings. To grow into more of ourselves, always moving to the next level of understanding, the next level of compassion and growth.

 I think about one of the greatest compliment I've ever received. I interviewed with a reporter when I was first starting out in Chicago. And then many years later, I saw the same reporter. And she said to me, "You know what? You really haven't changed. You've just become more of yourself."

 자기개발의 기회를 가지고, 여러분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도움이 되는 일을 하도록 간절히 소망하고 그것을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서 성장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 왔습니다.(정확히 해석하지 않으면 이 문장은 의미를 파악하기 매우 힘들다. (현재의)우리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다음 단계의 이해와 다음 단계의 정열 그리고 성장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전 이제껏 제가 받아본 최선의 찬사에 대해 생각합니다. 시카고에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 한 리포터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후에 전 그 리포터를 다시 만났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저에게, "알아요? 당신은 진짜 변하지 않았어요. 더 훌륭해졌을 뿐이에요."

 And that is really what we're all trying to do, become more of ourselves. And I believe that there's a lesson in almost everything that you do and every experience. and getting the lesson is how you move forward. It's how you enrich your spirit. And trust me. I know that inner wisdom is more precious than wealth. The more you spend it, the more you gain.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목표입니다. 더 훌륭해지는 일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과 경험에 교훈이 있으며 그 교훈을 얻으면서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갈거라는 걸 믿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풍요롭게 할겁니다. 그리고 절 믿으세요. 전 내면의 지혜가 돈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압니다. 지혜는 쓰면 쓸수록 더 많은 지혜를 여러분에게 얻게 해줄 겁니다.

 So, today, I just want to share a few lessons?meaning three?that I've learned in my journey so far. And aren't you glad? Don't you hate it when somebody says, "I'm going to share a few," and it's 10 lessons later? And, you're like, "Listen, this is my graduation. This is not about you." So, it's only going to be three. 

자,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몇 가지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인생의 여정에서 배웠던 세 가지 교훈입니다. 기쁘죠? 누군가 몇 가지 말한다고 해놓고 10가지를 말하면 싫죠? 여러분들은 이럴 겁니다. “이거보세요, 제가 졸업하는 거라고요. 당신이 아니고요.” 그래서 세 가지만 말하려고 합니다.  

The three lessons that have had the greatest impact on my life have to do with feelings, with failure and with finding happiness.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세 가지 교훈은 직감과 실패 그리고 행복을 찾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A year after I left college, I was given the opportunity to co-anchor the 6 o'clock news in Baltimore, because the whole goal in the media at the time I was coming up was you try to move to larger markets. And Baltimore was a much larger market than Nashville. So, getting the 6 o'clock news co-anchor job at 22 was such a big deal. It felt like the biggest deal in the world at the time. 

전 대학을 떠난 지 일 년 뒤 발티모어에서 6시 뉴스 공동 앵커를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출연할 당시 방송계의 궁극적인 목표는 더 큰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발티모어는 나쉬빌보다 훨씬 규모가 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2살에 그곳에서 6시 공동앵커를 맡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죠.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And I was so proud, because I was finally going to have my chance to be like Barbara Walters, which is who I had been trying to emulate since the start of my TV career. So, I was 22 years old, making $22,000 a year. And it's where I met my best friend, Gayle, who was an intern at the same TV station. And once we became friends, we'd say, "Ohmigod, I can't believe it! You're making $22,000 and you're only 22. Imagine when you're 40 and you're making $40,000!" 

전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마침내 바바라 월터스 앵커처럼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TV에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그녀를 따라하려고 애썼습니다. 전 22살에 연봉 2만 2천 달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서 인턴사원이었던 지금 저의 가장 친한 친구 게일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맙소사, 믿을 수가 없어! 22살 밖에 안됐는데 2만 2천달러를 벌다니! 마흔 살이 되면 4만 달러를 번다고 상상해봐!”라고 하곤 했습니다. 

 When I turned 40, I was so glad that didn't happen. 

제가 40살이 됐을 때 그렇게 되지 않아서 매우 기뻤습니다. 

So, here I am, 22, making $22,000 a year and, yet, it didn't feel right. It didn't feel right. The first sign, as President Hennessy was saying, was when they tried to change my name. The news director said to me at the time, "Nobody's going to remember Oprah. So, we want to change your name. We've come up with a name we think that people will remember and people will like. It's a friendly name: Suzie." 

22살이었던 제가 그곳에서 한 해에 2만 2천 달러를 벌면서도 무언가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맞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헤네시 총장님이 말씀하셨듯이 첫 번째 이유는 방송국에서 제 이름을 바꾸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뉴스 감독님이 제게 “아무도 오프라를 기억하지 못할거야. 그러니까 이름을 바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사람들이 기억하고 좋아할 만한 이름을 생각했는데 친근하게 수지 어때요?”라고 하셨습니다. 

Hi, Suzie. Very friendly. You can't be angry with Suzie. Remember Suzie. But my name wasn't Suzie. And, you know, I'd grown up not really loving my name, because when you're looking for your little name on the lunch boxes and the license plate tags, you're never going to find Oprah. 

안녕 수지. 매우 친근하죠. 수지에겐 아무도 화를 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수지를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제 이름은 수지가 아니었습니다. 전 자라면서 제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도시락 통이나 열쇠고리를 찾을 수는 있어도 오프라라고 쓰여 있는 것은 찾을 수가 없었거든요. 

So, I grew up not loving the name, but once I was asked to change it, I thought, well, it is my name and do I look like a Suzie to you? So, I thought, no, it doesn't feel right. I'm not going to change my name. And if people remember it or not, that's OK. 

그래서 전 제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라고 하니 글쎄, 이건 내 이름인데 그리고 수지가 나한테 어울릴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건 내게 맞지 않다고 말이죠. 전 이름을 바꾸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았습니다. 

And then they said they didn't like the way I looked. This was in 1976, when your boss could call you in and say, "I don't like the way you look." Now that would be called a lawsuit, but back then they could just say, "I don't like the way you look." Which, in case some of you in the back, if you can't tell, is nothing like Barbara Walters. So, they sent me to a salon where they gave me a perm, and after a few days all my hair fell out and I had to shave my head. And then they really didn't like the way I looked. 

그리고 방송국에서는 제 외모에 대해서도 맘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1976년에 여러분의 상사가 여러분을 불러서는 “외모가 맘에 안 드는군.”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지금이라면 소송감이지만 그 당시에는 외모가 맘에 안 든다고 그냥 내뱉을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여러분들 중 몇몇이 당시로 돌아간다면 바바라 월터스와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방송국에서는 저에게 미용실로 가서 파마를 하라고 했습니다. 몇일이 지나고 저는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고 머리를 아예 밀어야 했습니다. 그러자 방송국에서는 제 외모가 정말 맘에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Because now I am black and bald and sitting on TV. Not a pretty picture. 

제가 흑인인데다가 삭발을 하고서는 TV에 앉아있으니 썩 보기 좋진 않았겠죠. 

But even worse than being bald, I really hated, hated, hated being sent to report on other people's tragedies as a part of my daily duty, knowing that I was just expected to observe, when everything in my instinct told me that I should be doing something, I should be lending a hand. 

제가 삭발을 한 것보다 더욱 싫었던 것은 제가 매일 다른 사람들의 비극적인 소식을 전달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만 봐야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의 모든 본능은 제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도움의 손을 내밀어야한다고요. 

So, as President Hennessy said, I'd cover a fire and then I'd go back and I'd try to give the victims blankets. And I wouldn't be able to sleep at night because of all the things I was covering during the day. 

헤네시 총장님께서 말하셨듯이 저는 화재 사건을 보도하고 나서 희생자들에게 돌아가 담요를 제공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날마다 보도하는 모든 사건들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룰 수도 없었습니다. 

And, meanwhile, I was trying to sit gracefully like Barbara and make myself talk like Barbara. And I thought, well, I could make a pretty goofy Barbara. And if I could figure out how to be myself, I could be a pretty good Oprah. I was trying to sound elegant like Barbara. And sometimes I didn't read my copy, because something inside me said, this should be spontaneous. So, I wanted to get the news as I was giving it to the people. So, sometimes, I wouldn't read my copy and it would be, like, six people on a pileup on I-40. Oh, my goodness. 

반면 저는 바바라 월터스 앵커처럼 우아하게 앉아서 말하려고 스스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바라를 따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내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한다면 훌륭한 오프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바바라처럼 우아하게 발음하려고 노력했고 가끔 대본을 따라서 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내면에서 즉흥적으로 해야 한다고 소리쳤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뉴스를 사람들에게 보도하면서 저도 그 뉴스를 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가끔은 마치 머릿속 고속도로에서 6중 추돌사고가 난 듯해서 대본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맙소사. 

And sometimes I wouldn't read the copy?because I wanted to be spontaneous?and I'd come across a list of words I didn't know and I'd mispronounce. And one day I was reading copy and I called Canada "ca nada." And I decided, this Barbara thing's not going too well. I should try being myself. 

간혹 저는 즉흥적으로 하려고 대본대로 읽지 않고 목록에 있는 단어들을 조합해서 잘못 발음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대본을 읽는 데 캐나다를 ‘카 나다’로 발음한 적도 있었습니다. 전 바바라를 무작정 따라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다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But at the same time, my dad was saying, "Oprah Gail, this is an opportunity of a lifetime. You better keep that job." And my boss was saying, "This is the nightly news. You're an anchor, not a social worker. Just do your job." 

당시 아버지는 제게 “오프라 게일, 이건 일생의 기회야. 이 일을 계속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상사는 “이건 메인 뉴스야. 당신은 사회 복지사가 아니라 앵커라고. 당신이 일을 전념하세요.”라고 했습니다. 

So, I was juggling these messages of expectation and obligation and feeling really miserable with myself. I'd go home at night and fill up my journals, 'cause I've kept a journal since I was 15?so I now have volumes of journals. So, I'd go home at night and fill up my journals about how miserable I was and frustrated. Then I'd eat my anxiety. That's where I learned that habit.

저는 이런 기대와 의무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정말 제 스스로 처참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전 집에 가서 일기를 쓰곤 했습니다. 전 15살 때부터 일기를 써왔기 때문에 지금은 일기장이 몇 권 됩니다. 전 집에서 제가 얼마나 비참하고 좌절하고 있는지를 일기장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선 제 갈망을 집어삼켰습니다. 그런 습관을 이 때 배우게 된 것이죠. 

And after eight months, I lost that job. They said I was too emotional. I was too much. But since they didn't want to pay out the contract, they put me on a talk show in Baltimore. And the moment I sat down on that show, the moment I did, I felt like I'd come home. I realized that TV could be more than just a playground, but a platform for service, for helping other people lift their lives. And the moment I sat down, doing that talk show, it felt like breathing. It felt right. And that's where everything that followed for me began. 

8개월 뒤 저는 앵커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방송국 측에서는 제가 과도하게 감정적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쪽에서는 위약금을 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저를 토크쇼로 배정했습니다. 그 때 그 쇼에 앉아서 저는 마치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TV가 단순한 놀이터일 뿐만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람들을 돕고 삶의 질을 높여주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앉아서 토크쇼를 진행할 때 비로소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옳다고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저에게 왔던 모든 것이 시작된 계기입니다. 

And I got that lesson. When you're doing the work you're meant to do, it feels right and every day is a bonus, regardless of what you're getting paid. 

그리고 저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때 이것이 옳다고 느껴질 것이고 얼마를 버는지에 상관없이 하루하루가 보너스라는 것이죠. 

It's true. And how do you know when you're doing something right? How do you know that? It feels so. What I know now is that feelings are really your GPS system for life. When you're supposed to do something or not supposed to do something, your emotional guidance system lets you know. The trick is to learn to check your ego at the door and start checking your gut instead. Every right decision I've made?every right decision I've ever made?has come from my gut. And every wrong decision I've ever made was a result of me not listening to the greater voice of myself. 

이건 사실이었습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이걸 어떻게 아냐고요? 이건 느껴지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직감이 여러분들의 삶에 위치 추적 장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할 때 여러분의 감정적 안내 시스템이 판단을 하게 해줍니다. 이 방법은 시작하기 전에 자아를 확인하는 것을 배우고, 시작하고 나서는 대신에 여러분의 배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제가 내렸던 옳은 결정들은 저의 배짱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제가 했던 옳지 않은 결정들은 모두 제가 스스로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 때 내린 것이었습니다. 

If it doesn't feel right, don't do it. That's the lesson. And that lesson alone will save you, my friends, a lot of grief. Even doubt means don't. This is what I've learned. There are many times when you don't know what to do. When you don't know what to do, get still, get very still, until you do know what to do. 

옳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교훈입니다. 그리고 이 교훈 하나가 여러분, 저의 친구들을 많은 슬픔으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의심이 간다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배운 교훈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면 그냥 가만히, 아주 가만히 계십시오. 여러분이 뭘 할지 알기 전까지는 말이죠.

And when you do get still and let your internal motivation be the driver, not only will your personal life improve, but you will gain a competitive edge in the working world as well. Because, as Daniel Pink writes in his best-seller, A Whole New Mind, we're entering a whole new age. And he calls it the Conceptual Age, where traits that set people apart today are going to come from our hearts?right brain?as well as our heads. It's no longer just the logical, linear, rules-based thinking that matters, he says. It's also empathy and joyfulness and purpose, inner traits that have transcendent worth. 

여러분이 가만히 기다리면서 내면의 동기가 이끌어주기를 기다린다면 여러분 개인의 삶이 발전될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경쟁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 핑크의 베스트셀러 ‘새로운 세계가 온다’에 쓰여 있는 것처럼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것을 ‘관념적 시대’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서로 분류하는 특징은 우리의 마음, 우뇌와 머리로부터 오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에 말에 따르면 그것은 더 이상 논리적이지 않고 1차적이지 않으며 규칙에 지배되지 않은 시대입니다. 감정적이고 즐거우며 훌륭한 가치를 지닌 내면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These qualities bloom when we're doing what we love, when we're involving the wholeness of ourselves in our work, both our expertise and our emotion. 

이러한 성향은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자신의 일에 완전히 몰두할 때 우리의 전문성과 감정을 자라나게 합니다. 

So, I say to you, forget about the fast lane. If you really want to fly, just harness your power to your passion. Honor your calling. Everybody has one. Trust your heart and success will come to you. 

지름길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말 날고 싶다면 여러분의 열정의 힘을 기르세요. 스스로의 외침에 귀 기울이세요. 모든 사람들은 하나를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믿는다면 성공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So, how do I define success? Let me tell you, money's pretty nice. I'm not going to stand up here and tell you that it's not about money, 'cause money is very nice. I like money. It's good for buying things. 

그럼, 전 성공을 무엇이라 정의할까요? 분명히, 돈은 멋진것입니다. 난 여기에 서서 돈은 별거 아냐라도 고상한 척은 하지 않을겁니다. 왜냐하면 돈은 정말 좋은거거든요. 전 돈을 좋아합니다. 물건을 살때 그것은 꼭 필요한 겁니다. 

But having a lot of money does not automatically make you a successful person. What you want is money and meaning. You want your work to be meaningful. Because meaning is what brings the real richness to your life. What you really want is to be surrounded by people you trust and treasure and by people who cherish you. That's when you're really rich. 

하지만 돈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여러분이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돈과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는 일이 의미 있는 것이길 원합니다. 의미라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진정으로 풍요를 가져다주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신뢰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여러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주변해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자입니다. 

So, lesson one, follow your feelings. If it feels right, move forward. If it doesn't feel right, don't do it. 

첫 번째 교훈은, 항상 마음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맞다’라는 느낌이 들면 밀어붙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마세요.  

Now I want to talk a little bit about failings, because nobody's journey is seamless or smooth. We all stumble. We all have setbacks. If things go wrong, you hit a dead end?as you will?it's just life's way of saying time to change course. So, ask every failure?this is what I do with every failure, every crisis, every difficult time?I say, what is this here to teach me? And as soon as you get the lesson, you get to move on. If you really get the lesson, you pass and you don't have to repeat the class. If you don't get the lesson, it shows up wearing another pair of pants?or skirt?to give you some remedial work. 

자, 이제 실패에 대해 조금 말씀을 드릴게요. 그 누구의 삶도 흠집 없이 순탄할 수만은 없으니까요. 우리는 모두 비틀거리며 고난을 맞기도 하죠. 일이 잘못되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겁니다. 그,. 그건 바로 삶의 방향을 바꿀 때가 되었다고 인생이 말해주는 겁니다. 그러니 실패할 때마다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저는 그렇게 합니다. 모든 어려움, 고난, 힘든 시기에 저는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려고 왔을까?' 라고 물어요. 그리고 교훈을 얻자마자 여러분은 발전하게 됩니다. 만약 진정한 교훈을 얻는다면 여러분은 그 고난을 이수했으며 재수강할 필요가 없어요. 만약 교훈을 얻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나타날 거예요. 여러분에게 보충할 수 있는 숙제를 주기위해서 말이죠.  

And what I've found is that difficulties come when you don't pay attention to life's whisper, because life always whispers to you first. And if you ignore the whisper, sooner or later you'll get a scream. Whatever you resist persists. But, if you ask the right question?not why is this happening, but what is this here to teach me??it puts you in the place and space to get the lesson you need. 

또 제가 알게 된 것은, 어려움은 여러분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오며 그때 인생이 속삭입니다. 네, 인생은 당신에게 먼저 속삭입니다. 그때 여러분이 그 속삭임을 무시하면 언젠가는 그것이 외침으로 변하죠. 여러분이 저항하는 것은 지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옳은 질문을 하세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가 아닌 '이것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를요. 이것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그래야 당신에게 필요한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My friend Eckhart Tolle, who's written this wonderful book called A New Earth that's all about letting the awareness of who you are stimulate everything that you do, he puts it like this: He says, don't react against a bad situation; merge with that situation instead. And the solution will arise from the challenge. Because surrendering yourself doesn't mean giving up; it means acting with responsibility. 

여러분이 하는 모든 것의 도익에 대한 자각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지구’라는 아주 훌륭한 책을 쓴 저의 지인인 에크호트 톨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좋지 않은 상황에 반응하지 말고 그 상황과 함께하라고 말이죠. 그리고 그 해결책은 도전에서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순히 따르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Many of you know that, as President Hennessy said, I started this school in Africa. And I founded the school, where I'm trying to give South African girls a shot at a future like yours?Stanford. And I spent five years making sure that school would be as beautiful as the students. I wanted every girl to feel her worth reflected in her surroundings. So, I checked every blueprint, I picked every pillow. I was looking at the grout in between the bricks. I knew every thread count of the sheets. I chose every girl from the villages, from nine provinces. And yet, last fall, I was faced with a crisis I had never anticipated. I was told that one of the dorm matrons was suspected of sexual abuse. 

헤네시 총장님이 말씀하시고 또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것처럼 저는 아프리카에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저는 남아공 소녀들에게도 스탠포드와 같은 멋진 미래를 주고 싶었습니다. 학교가 학생들만큼 아름다울 수 있도록 5년이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좋은 환경을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죠. 그래서 제가 직접 모든 청사진을 점검하고 베개도 직접 골랐습니다. 벽돌사이에 들어가는 메지도 살펴보았죠. 심지어 침대보가 몇 수 인지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9개의 지방에서 소녀들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 저는 예상치 못한 위기와 직면했습니다. 기숙사 사감 중 한 명이 성추행 용의자라는 것이었죠. 

That was, as you can imagine, devastating news. First, I cried?actually, I sobbed?for about half an hour. And then I said, let's get to it; that's all you get, a half an hour. You need to focus on the now, what you need to do now. So, I contacted a child trauma specialist. I put together a team of investigators. I made sure the girls had counseling and support. And Gayle and I got on a plane and flew to South Africa. 

그것은 정말 악몽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전 그 소식을 듣자마자 30분간 흐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울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30분 동안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당시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동 전문 심리 치유 상담사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조사팀을 꾸려 여학생들이 확실하게 상담과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모든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게일과 함께 남아프리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And the whole time I kept asking that question: What is this here to teach me? And, as difficult as that experience has been, I got a lot of lessons. I understand now the mistakes I made, because I had been paying attention to all of the wrong things. I'd built that school from the outside in, when what really mattered was the inside out. 

비행기 안에서 저는 계속 제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이 상황이 나에게 가르치려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런 경험은 정말 가슴 아팠지만 저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중요하지 않은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러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학교의 외부적인 것에만 신경을 썼었죠.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내실을 다지는 것이었습니다. 

So, it's a lesson that applies to all of our lives as a whole. What matters most is what's inside. What matters most is the sense of integrity, of quality and beauty. I got that lesson. And what I know is that the girls came away with something, too. They have emerged from this more resilient and knowing that their voices have power.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이라는 이 교훈은 우리들 모든 삶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됨됨이, 삶의 질, 아름다움과 같은 가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학생들도 여기로부터 무언가를 배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에 대처하는 힘이 생겼고 자신의 목소리가 힘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And their resilience and spirit have given me more than I could ever give to them, which leads me to my final lesson?the one about finding happiness?which we could talk about all day, but I know you have other wacky things to do. 

그 아이들이 보여준 회복력과 정신력은 제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었고 이것이 제가 말하려고 하는 마지막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복 찾기’입니다. 이것에 관해 하루 종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여러분들에게도 다른 할 일이 많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Not a small topic this is, finding happiness. But in some ways I think it's the simplest of all. Gwendolyn Brooks wrote a poem for her children. It's called "Speech to the Young : Speech to the Progress-Toward." And she says at the end, "Live not for battles won. / Live not for the-end-of-the-song. / Live in the along." She's saying, like Eckhart Tolle, that you have to live for the present. You have to be in the moment. Whatever has happened to you in your past has no power over this present moment, because life is now.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작은 주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간단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웬도린 브룩스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쓴 시 ‘젊은이에게 고함 - 전진할 이에게 고함’의 마지막에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살지 말아라, 결과를 위해 살지 말라, 과정을 위해 살아라.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녀는 앞서 말한 에크호트 톨처럼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순간에 있어야합니다. 인생은 현재형이기 때문에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현재에서 그것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But I think she's also saying, be a part of something. Don't live for yourself alone. This is what I know for sure: In order to be truly happy, you must live along with and you have to stand for something larger than yourself. Because life is a reciprocal exchange. To move forward you have to give back. And to me, that is the greatest lesson of life. To be happy, you have to give something back. 

그녀는 무언가의 일부가 되라는 말도 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말라는 것이죠. 이것은 어려분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보다 더 큰 것을 지키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상호 교환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베풀어야 합니다. 저에게 이것은 인생에서 가장 큰 교훈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언가 베풀어야합니다. 

I know you know that, because that's a lesson that's woven into the very fabric of this university. It's a lesson that Jane and Leland Stanford got and one they've bequeathed to you. Because all of you know the story of how this great school came to be, how the Stanfords lost their only child to typhoid at the age of 15. They had every right and they had every reason to turn their backs against the world at that time, but instead, they channeled their grief and their pain into an act of grace. Within a year of their son's death, they had made the founding grant for this great school, pledging to do for other people's children what they were not able to do for their own boy. 

이런 정신은 이미 이 대학에 뿌리 깊게 내려있기 때문에 이미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교훈은 이 대학을 설립한 스탠포드 부부가 깨달았던 것이고 또한 여러분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학교가 어떻게 설립 되었는지, 스탠포드 부부가 어떻게 해서 15살 난 외동아들을 장티푸스로 잃게 되었는지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당시 이들 부부는 세상에 등을 돌릴 충분한 권리와 이유가 있었지만 대신 그 슬픔과 고통을 선행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낸 그 해에 이들 부부가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들의 자녀에게 베풀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The lesson here is clear, and that is, if you're hurting, you need to help somebody ease their hurt. If you're in pain, help somebody else's pain. And when you're in a mess, you get yourself out of the mess helping somebody out of theirs. And in the process, you get to become a member of what I call the greatest fellowship of all, the sorority of compassion and the fraternity of service. 

여기서 교훈은 명확해집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주세요. 고통 받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세요.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있다면 다른 사람도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주면서 여러분 스스로도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분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여러분은 제가 말하는 ‘위대한 동반자’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과 봉사정신을 가진 모임이죠. 

The Stanfords had suffered the worst thing any mom and dad can ever endure, yet they understood that helping others is the way we help ourselves. And this wisdom is increasingly supported by scientific and sociological research. It's no longer just woo-woo soft-skills talk. There's actually a helper's high, a spiritual surge you gain from serving others. So, if you want to feel good, you have to go out and do some good. 

스탠포드 부부는 다른 부모들이 견뎌왔던 것 중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써 자신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는 점점 과학적, 사회적 연구가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것은 더 이상 단순히 듣기 좋은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희열이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느낌을 얻고 싶다면 밖으로 나가 좋은 일을 하세요. 

But when you do good, I hope you strive for more than just the good feeling that service provides, because I know this for sure, that doing good actually makes you better. So, whatever field you choose, if you operate from the paradigm of service, I know your life will have more value and you will be happy. 

그런데 여러분이 좋은 일을 한다면 봉사를 함으로써 그것이 주는 좋은 느낌 그 이상의 것을 위해 노력하길 바랍니다. 선행은 확실히 여러분을 변화시켜주니까요. 어떤 분야를 선택하든 봉사 정신으로 임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분명 더 가치 있어질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행복해질 겁니다.  

I was always happy doing my talk show, but that happiness reached a depth of fulfillment, of joy, that I really can't describe to you or measure when I stopped just being on TV and looking at TV as a job and decided to use television, to use it and not have it use me, to use it as a platform to serve my viewers. That alone changed the trajectory of my success. 

전 토크쇼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제가 단순히 TV에 출연하고 TV를 일로써 이용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시청자들에게 봉사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자 그 행복은 성취와 기쁨의 깊이에 다다르고 이것은 여러분에게 설명하거나 측정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제 성공의 궤도가 바뀐 것이지요. 

So, I know this?that whether you're an actor, you offer your talent in the way that most inspires art. If you're an anatomist, you look at your gift as knowledge and service to healing. Whether you've been called, as so many of you here today getting doctorates and other degrees, to the professions of business, law, engineering, humanities, science, medicine, if you choose to offer your skills and talent in service, when you choose the paradigm of service, looking at life through that paradigm, it turns everything you do from a job into a gift. And I know you haven't spent all this time at Stanford just to go out and get a job.

여러분이 만약 배우라면 예술에 가장 큰 영감을 줄 수 있는 배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해부학자라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다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지식과 봉사의 수단이라 여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박사 학위를 받는데 경영학, 법학, 공학, 인문학, 과학, 약학 등 그 어느 분야에 있다고 해도 봉사 정신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여러분의 기술과 재능으로 이를 행한다면, 여러분의 직업은 선물로 바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스탠포드에서 이런 시간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You've been enriched in countless ways. There's no better way to make your mark on the world and to share that abundance with others. My constant prayer for myself is to be used in service for the greater good. 

여러분이야말로 정말 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그 풍요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더 좋은 일에 봉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So, let me end with one of my favorite quotes from Martin Luther King. Dr. King said, "Not everybody can be famous." And I don't know, but everybody today seems to want to be famous. 

이제 마지막으로 마틴 루터킹 목사의 명언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야기의 끝을 맺고자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유명해질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잘은 몰라도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유명해지기를 원합니다. 

But fame is a trip. People follow you to the bathroom, listen to you pee. It's just?try to pee quietly. It doesn't matter, they come out and say, "Ohmigod, it's you. You peed." 

That's the fame trip, so I don't know if you want that. 

하지만 유명세는 짧은 여행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유명해지면 사람들은 화장실까지 쫓아와 여러분이 아무리 조용히 소변을 보려 해도 그 소리를 듣고 ‘어머나 소변 본 사람이 당신이었군요.’라는 말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이라는 짧은 여행입니다. 이래도 여러분이 유명해지길 바랄지는 모르겠습니다.  

So, Dr. King said, "Not everybody can be famous. But everybody can be great, because greatness is determined by service." Those of you who are history scholars may know the rest of that passage. He said, "You don't have to have a college degree to serve. You don't have to make your subject and verb agree to serve. You don't have to know about Plato or Aristotle to serve. You don't have to know Einstein's theory of relativity to serve. You don't have to know the second theory of thermodynamics in physics to serve. You only need a heart full of grace and a soul generated by love." 

마틴 루터킹 목사는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유명해질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위대해 질 수는 있다. 왜냐하면 위대함은 봉사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것의 나머지 구절도 알 것입니다. 그는 ’봉사하기 위해 대학 학위를 가질 필요는 없다. 봉사하기 위해 표준어를 구사할 필요도 없고 봉사하기 위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알 필요가 없다. 또한 봉사하기 위해 아인슈테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열역학 제 2법칙을 알 필요가 없다. 은혜에 충반한 가슴과 사랑으로 가득찬 영혼만이 필요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In a few moments, you'll all be officially Stanford's '08. 

잠시 후 여러분은 공식적으로 2008년도 스탠포드 졸업생이 됩니다.  

You have the heart and the smarts to go with it. And it's up to you to decide, really, where will you now use those gifts? You've got the diploma, so go out and get the lessons, 'cause I know great things are sure to come. 

여러분은 그에 걸 맞는 마음과 명석함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결정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재능을 어디다 사용하시겠습니까? 학위를 받았으니 바깥세상으로 나가 교훈을 얻으십시오. 왜냐하면 반드시 좋은 일들이 올 테니까요. 

You know, I've always believed that everything is better when you share it, so before I go, I wanted to share a graduation gift with you. Underneath your seats you'll find two of my favorite books. Eckhart Tolle's A New Earth is my current book club selection. Our New Earth webcast has been downloaded 30 million times with that book. And Daniel Pink's A Whole New Mind: Why Right-Brainers Will Rule the Future has reassured me I'm in the right direction.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함께 나눌 때 좋은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제가 가기 전 여러분과 작은 졸업 선물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의자 밑에 제가 좋아하는 책 2권이 놓여 있습니다. 에크홀트 톨의 새로운 지구라는 책은 현재 저의 북클럽에서 선정된 책입니다. 이 책의 웹캐스트는 3000만 건이나 다운로드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책 다니엘 핑크의 ‘새로운 미래가 온다. - 왜 우뇌를 가진 자가 미래를 지배하는가’는 제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지 확인시켜준 책이었습니다. 

I really wanted to give you cars but I just couldn't pull that off! Congratulations, '08! 

Thank you. Thank you. 

여러분에게 차를 주면 좋았겠지만 그건 제 능력 밖입니다. 축하합니다. 08년도 졸업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학의 졸업식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 대학을 졸업한 적이 없으며, 솔직히 말해 이것이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참가한 것입니다. 오늘 전 제 인생의 3가지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단지 그것뿐. 별일도 아닙니다. 단지 3가지의 이야기일뿐이죠.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전 리드칼리지를 6개월 다니고 중퇴를 했지만, 이후 완전히 그만둘때까지 18개월동안 더 청강을 하며 대학에 머물렀습니다. 근데 제가 왜 중퇴를 했을까요? 첫번째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그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합니다. 젊은 시절 미혼의 대학졸업생이었던 제 생물학적 어머니는 저를 입양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저를 대학졸업자에게 입양시켜야겠다고 아주 강하게 느꼈고, 그래서 제가 태어날때 변호사와 그의 아내에 의해 입양되도록 모든것이 준비되어있었습니다. 단지 제가 세상에 나왔을때 그들이 마지막 순간에 딸을 원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죠. 그래서 대기자명단에 있던 우리 부모님은 한밤중에 "우린 기대했던것과 달리 아들을 낳았어요, 그래도 괜찮으세요?"라는 전화를 받았었죠. 그들은 "물론이죠"라고 답했습니다. 저의 생물학적 어머니는 나중에야 저의 어머니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입양 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거절했죠. 그녀는 몇 달 후에, 저의 부모님들이 제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듣고서야 누그러졌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17년 후 전 대학에 갔습니다. 하지만 전 순진하게 스탠포드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선택했고, 노동자계급이었던 부모님의 모든 저축은 제 대학등록금으로 들어갔습니다. 6개월 후, 전 대학에서 가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싶은지 몰랐고, 대학이 어떻게 그것을 구체화하는데 도움을 줄건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대학에 저의 부모님이 평생을 모은 돈을 사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전 중퇴를 결심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당시엔 꽤 무서웠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제가 한 최고의 결정중 하나였습니다. 중퇴하자마자 저는 흥미가 전혀없는 필수과목 수강을 관둘 수 있었고, 제가 보기에 흥미로운 수업들만 청강을 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그것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전 기숙사방도 없어서, 친구집 마루바닦에서 자고, 콜라병을 반환하고 받은 5센트 동전을 모아 음식을 사먹었으며, 매주 일요일 저녁마다 하레 크리쉬나 사원에서 주는 근사한 식사를 먹기 위해 마을을 가로질러 7마일을 걷곤 했습니다. 전 그 식사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 우연히 만났던 많은 것들이 나중에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의 예를 들려드리겠습니다.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s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리드대학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예 수업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캠퍼스 곳곳에 있는 포스터들과 서랍에 붙어있는 라벨들은 아름다운 손글씨로 쓰여져있었습니다. 저는 중퇴했고, 정규과정을 들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는지 배우기 위해 서예수업을 들었습니다. 전 세리프와 산스 세리프활자체를 배웠고, 빈공간과 활자들의 배치에 따라 공간미가 어떻게 변하는지, 그리고 위대한 조판들이 어떻게 위대해지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 예술적으로 미묘한 방식이었으며, 전 그것에 매혹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10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 10 years later.

이것이 제 인생에서 어떤 실제적인 쓰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10년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도시 컴퓨터를 디지안했을 때, 그것이 저에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맥에 서예를 접목했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첫번째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대학에서 그 한개의 과목을 청강하지 않았다면 맥은 절대로 다양한 서체들과 공간에 비례하는 활자체들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윈도우(마이크로소프트)는 맥을 카피한 겄이기 때문에, 개인용 컴퓨터도 그런 아름다운 활자체를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중퇴하지 않았다면, 서예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떠한 개인용 컴퓨터들도 환상적인 활자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확실히 제가 대학때 앞을 바라보며 그 사건들(dots)을 연결하진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10년후 되돌아보면 그것은 아주아주 명백한 것이었죠.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다시 말하자면, 앞을 내다보고 점들을 연결할 순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며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미래에 그 점들이 어떻게든 연결될거라 믿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 당신의 근성, 운명, 인생, 업 - 무엇이 됐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이것이 제 인생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제 2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잃어버림에 관한 것입니다.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전 행운아였죠. 제 삶의 이른 시기에 전 사랑하는 일을 발견했습니다. 워즈(니악)와 전 20살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애플을 설립했습니다. 우린 열심히 했고, 10년만에 차고에서 우리 둘이 시작한 애플은 4천명 이상의 종업원을 가진 20억불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막 우리의 최고의 작품 매킨토시를 1년전에 발표했었고, 전 30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회사에서 짤렸습니다. 어떻게 당신이 만든 회사에서 짤릴수가 있죠? 그게, 애플이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제가 생각하기에 나와 함께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한 사람을 고용했고, 첫 일년동안은 일이 잘 되어갔습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우리의 비젼들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우리는 사이가 틀어졌고, 이사회는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30살때 전 쫓겨났습니다. 그것은 매우 공개적인 축출이었습니다. 내가 집중해왔던 성인으로서의 모든 삶이 사라져버렸고,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몇 달간 전 도대체 무엇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전 지난 세대의 사업가정신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꼈고, 그건 저를 지나쳐갔던 바톤을 놓친 것만 같았습니다. 전 데이비드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서, 그렇게 형편없이 일을 망친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했습니다. 전 아주 공개적으로 망했고, 심지어는 밸리(실리콘밸리)에서 도망쳐야겠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 내가 했던 일을 여여전히 사랑했다는 사실 -  천천히 저를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애플에서의 사태가 그 사실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죠. 전 쫓겨났지만, 여전히 사랑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당시 전 알지못햇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저에게 일어난 일 중 최고의 사건 중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성공의 무거움이 다시 초심자가 되는 가벼움으로 바뀌었고, 모든 일에 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전 제 인생의 가장 창의적인 시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 다음 5년간, 전 NeXT라는 회사와, 또 다른 Pixar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내가 되는 굉장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토이 스토리는 현재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만화영화입니다. 이 놀라운 사태의 전환에서, 애플은 넥스트를 매입했고, 전 애플로 복귀했으며, 넥스트에서 개발된 기술은 애플의 부흥을 이끈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전 함께 훌륭한 가족을 가지게 됐죠.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전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들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약을 먹는 것은 무섭지만, 환자에게는 필요한 것이기도 하죠. 때로는 인생에서 벽돌이 당신의 머리를 때리기도 합니다. 신념을 잃지 마세요. 전 제가 사랑하는 것만이 저를 계속 전진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라 확신합니다. 당신이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의 연인뿐만 아니라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은 당신의 인생의 큰 부분을 채워주게 될 것이고,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을 당신이 진정 위대한 일이라 믿는 것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위대한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아직 그것을 찾지 못했다면, 꾸준히 살펴보십시요. 정착하지 마십시요.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이듯이, 당신이 그것을 찾았을때 당신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위대한 관계가 그렇듯, 그것은 해가 가면 갈수록 더욱 나아지게 될 것입니다. 고로 당신은 그것을 찾을때까지 꾸준히 살펴보고, 정착하지 마십시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제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제가 17살때, 전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읽었습니다. "만일 당신의 매일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당신이 걷던 그 길이 옳았음이 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저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 이후로 전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내가 하려는 일을 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 대답이 "아니오"라고 몇날 몇일을 계속되면, 전 무엇인가 바뀌어야 할때라는 걸 깨닫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난 곧 죽게 될거야라는 사실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순간에 나를 도와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요. 거의 모든것 - 모든 외적인 기대, 모든 긍지, 모든 실패나 당혹감에 대한 공포-이 죽음앞에서는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단지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가만 남습니다. 당신이 죽는다는 사실만이 당신이 무엇인가를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의 덫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기억하십시요. 당신은 이미 발가벗겨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1년 전, 전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30분에 스캔을 했고(CT를 찍었고), 저의 췌장에 종양이 확실하게 보였습니다. 전 췌장이 무언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는 그것은 거의 확실하게 치료불가능한 암의 형태라고 했으며,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를 더 살 수 있을거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죽어가는 환자에게 의례 하는 규정에 따라 집으로 돌아가 주변을 정리하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10년간 당신이 할 것을 당신의 아이들에게 몇 달동안 전달해주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신변의 모든 것을 잘 정리해두어, 당신의 가족을 가능한 편하게 해주라는 것을 의미했죠. 그것은 작별인사를 하라는 이야기였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전 하루종일 진단을 받았습니다. 늦은 밤 전 생검을 받았고, 내시경을 목으로 집어넣고 위를 통해 장으로 들어간 후, 바늘로 췌장의 암덩어리로터 세포들을 체취했습니다. 전 차분했지만, 같이 있던 아내는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검사를 했던 의사들이 울기 시작했다고 말해줬습니다. 왜냐하면 제 췌장암이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매우 희귀한 종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전 수술을 받았고 아직까지 멀쩡합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것이 제가 죽음과 가장 가까이 대면한 순간이었으며, 앞으로도 몇 십년간 동안 가장 가까운 것이길 바랍니다. 그것을 경험했기에, 전 죽음이 유용하다는 것을 단순한 지적개념으로만 알았을때보다 좀 더 확실히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아무도 죽음을 바라지 않습니다. 심지어 천국을 가기 원하는 이들조차 그곳에 가기 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하는 운명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생의 유일한 최고의 발명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변화의 대리인입니다. 젊은이를 위하여 노인은 사라집니다. 지금 당장의 젊은이는 여러분이지만, 언젠가 멀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점차로 늙어가고 사라져갑니다. 너무 극적이라 미안하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당신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다른 이들의 삶을 사느라 허비하지 마십시요. 타인의 생각에 빠져 사는 교조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요. 다른 이들의 의견이 당신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묵살하도록 하지 마십시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세요. 그것들은 어떻게든 당신이 진정 되고자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고 있습니다. 그외의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렸을때, 또래들에겐 성경과도 같은 지구 전체의 카탈로그라는 끝내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여기서 멀지 않은 멘로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그의 시적 감성으로 책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1960년대 말, 개인컴퓨터와 전자출판 이전이라, 이 책은 타자기와 가위 그리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건 마치 종이로 만든 구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구글이 나오기 35년전이죠. 그것은 이상적이었고, 깔끔한 도구와 위대한 개념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지구 전체의 카타로그를 몇 판인가 만들었고, 책의 운명이 다할 때쯤 마지막 판을 발행했습니다. 그것이 1970년대 중반이었고, 전 여러분 정도의 나이였죠. 최종판의 뒷 표지는 이른아침의 시골길의 사진이었고,  모험심이 가득한 날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만날 곳 같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언제나 갈망하고, 우직하라."라고 씌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전한 마지막 인사말이었습니다. 언제나 갈망하고, 우직하라. 전 제 자신이 항상 그러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졸업생 여러분께, 제가 여러분을 위해 바랍니다.

언제나 갈망하고, 우직하라.

Thank you all very much.






이 연설을 듣고 있노라면 눈시울이 붉어지며, 목이 매인다. 이런 위대한 인물이 줄줄이 나오던 미국도 50여년이 지나서 트럼프라는 희대의 쓰레기가 대통령이 되니 나라꼴이 골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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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happy / to join with you today / in what will go down / in history / as the greatest demonstration / for freedom in the history / of our nation.

우리나라 역사에 자유를 향한 가장 위대한 시위로 기록될 오늘, 여러분과 함께 되어 행복합니다.

Five / score / years ago, / a great American, in whose symbolic shadow we stand today, / signed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

100년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이 우리가 오늘 서있는 그의 상징적 기념관(링컨 기념관)에서 노예해방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This momentous decree[법령,판결] came / as a great beacon[횃불,신호] light of hope / to millions of Negro slaves / who had been seared[태우다,무감각하게 하다] in the flames / of withering[생기를 잃어가는, 말라죽어가는] injustice.

이 중대한 법령은 불의의 불길 속에서 타들어가던 수백만 흑인 노예들에게 희망의 횃불이 되었습니다.

It came as a joyous daybreak / to end the long night / of their captivity. 

이로서 구속의 긴긴 밤은 끝나고 기쁨의 새날을 맞았습니다.

But one hundred years later, / the Negro still / is not free.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흑인은 여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One hundred years later, /the life of the Negro is still / sadly crippled by the manacles[수갑,구속,속박] of segregation / and the chains of discrimination.

100년이 지났지만 지금 흑인의 삶은 인종차별의 속박과 차별에 의해 여전히 슬프게도 절름거리고 있습니다.

One hundred years later, / the Negro lives on a lonely island / of poverty / in the midst of a vast ocean / of material prosperity.

100년이 지났지만 흑인의 삶은 물질적 풍요의 광대한 바다 한가운데에 가난이라는 외로운 섬속에만 있습니다.

One hundred years later, / the Negro is still languished / in[~에서 고달픈 생활을 하다] the corners of American society / and finds himself an exile / in his own land.

100년이 지났지만 흑인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귀퉁이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의 나라에서 마치 망명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And so we've come here today / to dramatizea shameful conditon.

그리고 우리는 이 부끄러운 현실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In a sense /  we've come to / our nation's capital / to cash a check.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 나라의 수도에 수표를 바꾸기 위해 왔습니다. 

When the architects / of our Republic / wrote the magnificent words / of the Constitution and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 they were signing· / a promissory note / to which every American was to fall heir.

우리 공화국의 설립자들이 장엄한 글고 헌법과 독립선언문을 썼을때, 그들은 모든 미국인이 상속인이 되는 약속어음에 서명을 한 것입니다.

This note was a promise / that all men-yes, black men / as well as white men-would be guaranteed / the unalienable rights of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이 어음은 모든 사람 - 맞습니다. 흑인과 백인 모두 삶,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보장받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It is obvious today / that America has defaulted on / this promissory note / insofar as her citizens of color are concerned.

오늘날 미국은 시민들의 피부색과 관련되는 한 이 약속어음의 지급을 이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Instead of honoring this sacred obligation, / America has given the Negro people / a bad check, / a check which has come back marked "insufficient funds."

이 신성한 의무의 지급을 승락하는 대신에, 미국은 흑인들에게 자금부족이라고 표시된 부도 수표를 지급해 왔습니다.

But we refuse to believe / that the bank of justice  is bankrupt. / We refuse to believe that / there are insufficient funds / in the great vaults/  of opportunitiy of this nation.

그러나 우리는 정의의 은행이 파산했다는 사실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이 국가의 위대한 기회의 금고에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So we've come to cash this check, / a check that will give us upon / demand the riches of freedom and the security of justice.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풍성한 자유와 정의의 증권을 달라는 우리의 요구에 응하여 이 수표를 바꿔달라고 왔습니다.

We have also come to this hallowed spot / to remind America of the fierce urgeny / of Now.

또한 미국인들에게 지금 이 순간의 엄중함을 상기시키 위해 이 신성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This is no time / to engage in the luxury of cooling off / or to take the tranquilizing drug of gradualism.

지금은 땀을 식힐 사치를 부리거나, 점진주의라는 진정제를 복용할 때가 아닙니다.

Now is the time / to make real the promises of democracy.

지금은 민주주의의 약속들을 실현할 때입니다.

Now is the time / to rise from the dark and desolate valley / of segregation / to the sunlit pathe of racial justice.

지금은 인종차별이라는 어둡고 버려진 계곡에서 일어나 인종간의 정의가 실현되는 밝은 길로 나서야 할때입니다.

Now is the time / to lift our nation from the quicksands / of racial injustice / to the solid rock of brotherhood.

지금은 인종차별이라는 유사(流沙, 흐르는 모래)로부터 형제애라는 반석위에 우리의 국가를 올려 놓을 때입니다.

Now is the time / to make justice a reality / for all of God's children. 

지금이야말로 모든 신의 자식들을 위하여 정의를 실현할 때입니다.

It would be fatal for the nation / to overlook the urgency of the moment.

지금 이 순간의 긴박함을 간과하는 것이야말로 이 나라의 앞날을 풍전등화와 같이 위협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The sweltering summer of the Negro's legitimate discontent / will not pass / until there is an invigorating autumn of freedom and equality.

흑인들의 정당한 불만을 알리는 이 무더운 여름은 자유와 평등의 상쾌한 가을이 올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Nineteen sixty-three is not an end, / but a beginning.

1963년은 끝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And those who hope / that the Negro needed to blow off steam / and will now be content / will have a rude awakening / if the nation returns to business / as usual.

흑인들이 한창 열을 냈으니, 이제 곧 만족하겠지 하며 이 나라가 다시 평상시처럼 돌아가기를 바라는 이들은 정신이 번쩍 나게 될 것입니다.

And there will be neither rest nor tranquility in America / until the Negro is granted his citizenship rights.

흑인들이 그들의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기 전까지는 휴식도 평화도 없을 것입니다.

The whirlwinds of revolt will continue to shake the foundations / of our nation / until the bright day / of justice emerges.

정의가 실현되어 밝은 날이 올때까지, 저항의 바람은 계속되어 이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 것입니다.

But there is something that I must say to my people / who stand on the warm threshold / which leads into the palace of justice:

그러나 여기에 서서 정의의 궁전으로 향하는 따뜻한 입구에 서계신 저의 국민들께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In the process of gaining our rightful place, / we must not be / guilty of wrongful deeds.

정당한 위치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잘못된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Let us not seek to satisfy / our thirst for freedom / by drinking from the cup of bitterness and hatred.

고통과 증오의 잔을 들이키는 것으로 자유의 목마름을 풀려 하지 맙시다.

We must forever conduct our struggle on the high plane / of dignity and discipline.

우리는 높은 수준의 존엄과 규율위에서 우리의 투쟁을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We must not allow our creative protest / to degenerate into physical violence.

우리는 이 뜻깊은 투쟁을 폭력사태로 변질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Again and again, / we must rise to the majestic heights / of meeting physical force / with soul force.

우리는 언제라도 몸과 마음의 힘 모두를 숭고한 수준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The marvelous / new militancy[투쟁,투지] / which has engulfed the Negro community / must not lead us to a distrust of all white people, / for many of our white brothers, / as evidenced by their presence here today, / have come to realize / that their destiny is tied up with our destiny.

흑인사회를 사로잡은 이 놀랍고도 새로운 투쟁이 모든 백인을 불신하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 백인들의 운명이 우리 흑인들의 운명과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수 많은 백인들이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여기 와있기 때문입니다.

And they have come to realize / that their freedom is inextricably[불가분하게, 떼려야 뗄 수 없는] bound / to our freedom.

그리고 그들은 백인들의 자유가 흑인들의 자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We cannot / walk aone. / And as we walk, / we must make the pledge / that we shall always / march ahead. / We cannot / turn back.

우리는 홀로 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아가며, 맹세해야 합니다. 항상 앞으로만 가겠다고. 우리는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There are those who are asking / the devotees of civil rights, / "When will you be satisfied!" / We can never be satisfied / as long as / the Negro is the victim of the unspeakable horrors of police brutality.

시민의 권리를 추종하는 이들중 이렇게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너희는 언제 만족할거냐고."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들이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경찰들의 잔혹함에 의한 공포의 희생자가 되는 한 말입니다.

We can never be satisfied / as long as / our bodies, heavy with the fatigue of travel, / cannot gain lodging in the motels  of the highways / and the hotels of the cities.

우리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오랜 여행에 지쳐 무거워진 우리의 몸을 뉘일 고속도로의 모텔들과 도시의 호텔들을 구할 수 없는 한 말입니다.

We cannot be satisfied / as long as / the Negro's basic mobility is from a smaller ghetto to a larger one.

우리는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흑인들의 기본적인 거주 이전의 자유가 조그만 빈민가에서 좀 더 큰 빈민가로 제한되어 있는 한 말입니다.

We can never be satisfied / as long as / our children are stripped of their adulthood / and robbed of their dignity / by signs stating "For Whites Only."

우리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성인이 될 권리를 뺏기고 "백인들만"이라고 쓰여진 표식에 의해 그들의 존엄을 강탈당하는 한 말입니다.

We cannot be satisfied / as long as / the Negro in Mississipi cannot vote / and the Negro in New York believes he has nothing for which to vote.

우리는 절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미시시피의 흑인들이 투표를 할 수 없고, 뉴욕의 흑인들이 투표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믿는 한 말입니다.

No, no, we are not satisfied, / and we will not be satisfied / until justice rolls down like waters / and righteousness like a mighty stream.

아니, 아니 우리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만족하지 않을겁니다. 정의가 물과 같이 흐르고 올바름이 강력한 물줄기가 될때까지 말입니다.

I am not unmindful / that some of you have come here / out of great trials and tribulation[고난,시련]

나는 여기에 온 누구라도 위대한 시련과 고난을 겪은 분들에게 무심하지 않습니다..

Some of you have come / fresh from narrow jail cells.

여기에 있는 누군가는 막 좁은 감옥방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Some of you have come from areas / where your quest for freedom / left you battered by the storms of persecution / and staggered by the winds of police brutality. 

여기 있는 누군가는 자유를 구했다는 이유로 심한 박해를 당하고, 경찰의 잔혹함에 비틀거렸던 이들입니다.

You have been the veterans of creative suffering.

당신들은 이 뜻깊은 고난의 베테랑들이었습니다.

Continue to work with the faith that unearned suffering in redemptive

부당한 고통은 구원될 것이라는 믿음속에서 같이 나아갑시다.

Go back to Mississippi, / go back to Alabama, / go back to South Carolina, / go back to Georigia, / go back to Louisiana, / go back to the slums of ghettos of our Nothern cities, / knowing that somehow this situation can and will be changed.

미시시피로 돌아갑시다, 알라바마로 돌아갑시다,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돌아갑시다, 조지아로 돌아갑시다, 루이지애나로 돌아갑시다, 우리의 북부 도시들의 빈민가로 돌아갑시다, 어떻게든 이 상황이 바뀔 수 있고, 바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돌아갑시다.

Let us not wallow in the valley of despair.

절망에 계속에서 우리를 뒹글게 하지 맙시다.

And so even though / we face the difficulties / of today and tomorrow, / I still have a dream. 

그리고 우리가 현재와 미래의 어려움에 직면해있지만, 저에겐 여전히 꿈이 있습니다.

It is a dream deeply rooted / in the American dream. 

그 꿈은 미국의 꿈에 깊이 뿌리내린 꿈입니다.

I have a dream / that one day / this nation will rise up / and live out the true meaning of its creed : /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

그것은 언젠가 이 나라가 일어나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음을 당연한 진실로 받아들인다."라는 신념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I have a dream / that one day on the red hills / of Georgia, / the sons of former slaves and the sons of former slave owners / will be able to sit down together at the table of brotherhood.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아이들과 그 노예 소유주의 아이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앉게될 수 있는 것입니다.

I have a dream / that one day / even the state of Mississippi, / a state / sweltering with the heat  of / injustice, / sweltering with the heat of oppression, / will be transformed into an oasis / of freedom and justice.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불의와 억압의 열기로 이글거리는 이 미시시피주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모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I have a dream /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나의 어린 4명의 자식들이 언젠가는 그들의 피부색이 아닌 그들의 인격으로 평가받게 되는 그런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I have a dream today! / I have a dream / that one day, / down in Alabama, / with its vicious racists, / with its governor / having his lips dripping with the words of "interposition"[미국의 개별주의 주권주의] and "nullification"[주의 연방법령 실시거부] - / one day right there in Alabama little black boys and black girls / will be able to join hands with litte white boys and white girls / as sisters and brothers.

저에겐 오늘 꿈이 있습니다. 저에겐 사악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득실대고, 주지사가 개별주의 주권주의와 연방법 실시거부등을 들먹이는 바로 이 앨라바마에서 언젠가 흑인 소년과 소년들이 백인 소년과 소녀들과 형제자매로서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today! /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ry valley / shall be exalted,[드높이다], / and every hill and mountain shall be made low, / the rough places will be made plain, / and the crooked places will be made straight; / "and 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 shall see it together."

저에겐 오늘 꿈이 있습니다. 저에겐 언젠가는 모든 계곡은 솟고, 모든 언덕과 산은 낮아지며, 울퉁불퉁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게 펴져,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모든 피조물이 그것을 함께 지켜보리라"라는 말씀처럼 되는 꿈이 있습니다.

(* 마틴 루터 킹이 목사 출신이기 때문에 성경의 구절이 인용된 것은 지금 이 시점에 와선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굳이 이런 초자연적인 비유가 아니더라도 이 연설의 맥락이 좋았는데 뒤로 갈수록 소위 기독교의 방언처럼 되어가는 점이 있다. 감정이 고조되었을때는 이런 부분이 그럭저럭 먹히지만 연설도 역시나 상식적인 기반위에 적절한 비유가 있는 것이 두고두고 볼때는 훨씬 감동이 더하고, 되씹을 맛이 난다.)

This is our hope, / and this is the faith that I go back to the South with.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며, 이것이 제가 남부로 가지고 돌아갈 신념입니다.

With this faith, / we will be able to hew out[잘라내다,도려내다] of the mountain of despair / a stone of hope.

이 신념으로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을 캐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With this faith, / we will be able to transform the jangling discords of our nation / into a beautiful symphony of brotherhood.

이 신념으로 우리는 이 나라의 시끄러운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형제애의 합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With this faith, / we will be able to work together, / to pray together, / to struggle together, / to go to jail together, / to stand up for freedom together, / knowing that / we will be free one day.

이 신념으로 우리는 같이 일하고, 기도하고, 투쟁하며, 감옥에 가고, 우리가 언젠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함께 자유를 위해 일어설 것입니다.

And this will be the day - / this will be the day / when all of God's children / will be able to sing with new meaning: / My country' tis of thee, / sweet land of liberty, / of thee I sing. / Land where my fathers died, / land of the Pilgrim's pride, / From every mountainside, / let freedom ring!

그리고 그날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자식들이 이 노래를 새로운 의미로 부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조국은 주님의 것, 자유로 달콤한 땅, 내가 찬양하는 주님의 땅. 나의 조상이 살다 죽은 땅, 개척자의 긍지가 살아 있는 땅. 모든 산기슭마다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하라!"

And if America if to be a great nation, / this must become true.

미국이 진정 위대한 국가가 되려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일입니다.

And so let freedom ring / from the prodigious[거대한,수많은] hilltops of New Hampshire.

그래서 뉴햄프셔의 거대한 언덕 꼭대기에서 자유가 울려퍼지게 합시다.

Let the freedom ring / from the mighty mountains of New York.

뉴욕의 거대한 산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Let freedom ring / from the heightening Allegehenies of Pennsylvania.

높디 높은 펜실베니아의 알레게니 산맥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Let freedom ring / from the snow-capped Rockies of Colorado.

콜로라도의 로키산맥의 눈 덮인 정상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Let freedom ring / from the curvaceous slopes of California.

캘리포니아의 굽이진 경사에서도 자유가 울려퍼지게 합시다.

But not only that : / Let freedom ring / from Stone Mountain of Georgia. / Let freedom ring / from Lookout Mountain of Tennessee. / Let freedom ring / from every hill / and molehill[흙을 쌓아놓은 두둑] of Mississippi. / From every mountainside, let freedom ring.

그뿐만 아니라, 조지아의 스톤산에서도, 테네시의 룻아웃산에서도, 미시시피의 모든 언덕들에서도 자유가 울려퍼지게 합시다. 이 모든 산기슭에서도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합시다.

And when this happens, / when we allow freedom ring, / when we let it ring / from every village and every hamlet, / from every state / and every city, / we will be able to speed up that day / when all of God's children, / black men and white men, Jews and Gentiles[이방인,비유대인], / Protestants and Catholics, / will be able to join hands / and sing in the words of the old Negro spiritual : / Free at last! /Free at last! / Thank God Almighty, / we are fee at last!

이렇게 되면, 우리가 자유를 울려퍼지게 하고, 모든 주와 모든 도시의 모든 크고 작은 마을에서 자유가 울러퍼지게 하면 우리가 원하는 그 자유의 날을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의 자식들인 우리 흑인과 백인, 유대인과 이방인, 개신교와 카톨릭이 모두 손을 잡고 오랜 흑인영가를 소리높여 부를 것입니다. "마침내 자유! 마침내 자유!, 신이여 감사합니다. 우리가 마침내 자유로워졌습니다."라고.

잠은 잠이 아니고, 죽음도 죽음이 아니다. 

죽은 것 같은 사람도 살아 있으니,.

네가 태어난 집과 소꿉친구들, 노인들, 아가씨들, 하루의 수고와 그 보상마저도,

언젠가 사라지는 허망한 이야기일 뿐.

그 어느 것도 머물지 않으리.


-랄프 왈도 에머슨-


일본의 철학자 - 고교 졸업후 독자적인 철학을 정립한 일본의 철학자라고 함.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일상의 어렵지 않은 주제를 다룬 수필 형식이라고 할까?


아직 국내에 번역되진 않았다.(그리 주류는 아닌 듯)


맘에 드는 내용을 발췌 번역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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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 보면 오늘날의 사회는 여러 가지 '시간을 단축하는 기계'를 만들어왔다. 세탁기나 전자레인지 등도그중 하나일 것이고 공장에서는 새로운 기계가 생산 시간을 계속 단축한다. (중략) 비행기는 한 시간 정도면 국내 어디든 갈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내고 슈퍼마켓도 쇼핑 시간을 단축하는 역할을 완수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에는 예전의 몇 분의 일의 시간에 같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시간을 단축하는 기계'가 늘어남에 따라 꺼꾸로 현대인들은 바빠져 시간 여유를 잃게 되었다. 예전에는연말에 선물을 들고 신세 진 분의 댁을 방문하는 여유가 있었는데 요즘은 택배로 보낼 준비를 하는 것조차번거로울 정도다.

 그런 점에서 현대는 불쾌한 사회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제 사회에서는 사람들에게 여유가 없는 것이나쁜 일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요인마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 환경이 열악해지는것은 경제적으로 모두 비즈니스 기회가 될 수 있다. 가령, 자유롭게 새로운 비즈니를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이 펼쳐지는 것을 경제면의 자유라고 한다면 사람들에게 여유가 없는 것도 경제의 자유를 발전시켜 나가는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대인이 바쁘게 사는 배경에는 우리 사회가 점차 과정을 묻지 않는 사회가 된 것이 관련 있을 것이다. 마치 결과가 정답이면 그걸로 그만인 시험처럼 그것이 어떤 인간관계 속에서 만들어져 어떤 과정을 거쳐 손에 넣은 것인가 하는 사실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었다. 가능한 한 빨리 결과를 손에 넣는 것이 가치가 된 것이다. 이렇게 과정에 시간이 걸리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간주하게 되어 누구나 시간을  합리적으로 관리하려는 발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합리적으로 시간을 관리했음에도 시간 여유는 생기지 않았다. 반대로 한가해야 할 시간조차 시간에 지배되어 계속해서 시간에 쫓기는 오늘날의 상황이 생겨났다. 아마도 시간을 더 합리적으로 관리하면 여유 라는 자유도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발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나 그것을 손에 넣는 과정등에 시간을 뛰어넘는 가치를 발견하는 사회야말로 인간적인 여유를 만들어내는 법이다.

http://ppss.kr/archives/36576

오카다 다카시,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중.


 회피하는 습관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신의 인생에 주체성을 찾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자기 맘대로 될 만큼 인생은 단순하지 않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무수한 인과의 사슬과 우연의 결과에 불과하다. 아무리 당신이 자신의 인생을 완벽하게 관리하려 해도 온갖 우발적인 요소와 타인의 행동에 의해 영향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소망하는 것,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우리는 인생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우리의 의지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위기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찾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자신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기회의 대부분은 그렇게 우연히 나타난다. 중요한 점은 기회가 왔을 때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라듐 발건으로 유명해졌으며 노벨 물리학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마리 퀴리는 알려진 바와 같이 힘들게 물리학을 배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가 평생을 바친 학문에 이르는 과정은 한없이 아득한 것이었다. 마리는 당시 러시아의 점령지였던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는데, 그때만 해도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파리로 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담이어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니와 동생들의 교육비도 고려해야만 했으므로 아버지의 경제력만으로는 그녀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마리는 더부살이 가정교사를 하며 언니와 동생들의 학비를 송금하는 길을 선택했다. 언젠가는 자신도 공부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송금을 하고 나면 자신을 위해 남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마리는 총명한 여성이었지만 소극적인 성격에다 자신을 드러내는 유형이 아니었다. 오히려 언니 쪽이 더 사교적이고 적극적이었다. 마리는 뒤에 숨어서 가족을 지원하는 쪽을 선택했다.


 더부살이 가정교사로 일하는 동안 청초한 아름다움과 총명함을 겸비한 마리를 그 집 장남이자 바르샤바 대학의 학생이었던 카미지에시 조라프스키가 보고 첫눈에 반했고, 마침내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어머니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히고 만다. 가난한 하급 귀족 출신인 마리가 며느리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열렬히 사랑을 속삭였던 카지미에시도 처음 열정은 어딘가 사라지고 마리를 지켜주지도 못한 채 결혼 이야기는 흐지부지되었다. 가정교사는 예전처럼 계속 하라고는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일한다는 것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그 상황이 계속되었더라면 천하의 마리 퀴리라 해도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독학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다고 해도 그것을 활용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가정교사인 채 결혼도 하지 못하고 늙어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때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파리에서 의사와 결혼한 언니로부터 편지가 온 것이다. 거기에는 '이번에는 마리 네 차례야. 파리로 오거라.'라는 말이 씌어 있었다. 그런데 배려심이 깊던 마리는 처음에 그것을 거절하고 만다. 사실 마리는 아직도 카지미에시를 단념하지 못하고 몰래 편지를 주고받았고 여행지에서 몰래 만났다. 하지만 이 만남이 마리의 운명을 결정했다. 카지미에시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마리는 진절머리를 냈고, 마침내 두 사람은 완전히 헤어진 것이다. 마리는 파리로 가고 싶다는 답장을 보냈다.


 마리가 이때 신혼인 언니와 형부에게 부담을 주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계속 파리행을 거부했다면, 이루어질 가망이 없는 사랑을 계속 간직했더라면, 그녀가 공부할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버리자 마리는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됐고, 그것은 인생을 뒤바꿀 계기가 되었다.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한 멋진 나날들, 남편과의 만남, 방사선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대성공 등등이 그 계기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또 언니가 의사와 결혼한 이후 생활이 안정되었다는 점도 마리가 사랑을 끝내고 파리로 간 이유 중 하나였다. 이렇듯 운명이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결정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원래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조차 잊어버리곤 한다. 그것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것도 외부의 목소리였다. 마리의 경우 자신이 파리로 나가 공부하고 싶어 한다는 걸 새삼 떠올리게 만들어준 것은 언니의 편지였고, 슬픈 사랑의 결말이었다.


 그러나 바라던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것에 응하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다. 마리 퀴리조차도 아슬아슬하게 기회를 놓칠 뻔했다. 운명이 자신에게 무엇을 시키려고 하는가. 그런 관점에서 상황을 돌아보는 일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느꼈다면 순순히 그것을 따라야 한다.


 실패하지 않을까, 잘 안 되지 않을까,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싶어 겨우 찾아온 운명의 목소리에 귀를 막지 않아야 한다. 하늘의 뜻이라는 순간이 평생 몇 번인가는 있다. 그때는 일단 해보는 것이다. 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회피형 인간은 지금의 상황을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다는 교착 상태에 빠지기 쉽지만 외부에서 손을 잡아당겨 주면 의외로 움직인다. 만약 누군가가 손을 내민다면 그것에 순순히 매달려보자. 꼼짝도 않고, 아무것도 바꿔보려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엘리트'라는 단어가 갖는 독특한 위상 못지않게, 한국의 교육기관과 기업 역시 다른 나라와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소수의 인재가 나머지를 먹여 살린다"는 구호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사실 이 주장은 서구 사회에서는 감히 입 밖에 내놓을 수 없는 '무엄한 말'이다.

 이 말은 사실과도 거리가 멀다.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는 '인재'들이 먹여 살려야 하는 '밥벌레 집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을 가능케 해주는 터전이다. 평범한 시민들은 그 '인재'들이 속한 교육기관에 물적,인적 토대를 제공하고, 그들이 일하는 기업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사주고 투자하며, 끊임없이 아이디어와 노동력을 공급해주고
있다.

 오히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리는 셈이다. '누가 누구를 먹여 살리는가'의 문제는 단순한 수사학의 차원이 아니다. 이는 한 사회에서 기업과 학교가 져야 할 책임을 규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기업과 대학이 사회 없이 존속할 수 없다면 그들의 얻은 이익의 '사회 환원'은 '자선 행위'가 아니라 마땅히 되돌려주어야 할 빚을 갚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시민들이 한 달만 물건을 사주지 않아도 도산할 기업들이 도리어 '국민들을 먹여 살린다'고주장하거나 지역사회의 도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교육기관들이 지역 주민들을 이방인 취급해오지 않았던가.

 감사의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로부터 사회적 책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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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된 시민의 역량을 집중시켜 기득권에 대한 반발을 해 본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 서구와 차별화 되는 이러한 점이 합리성보다는 情에 치우치는, 진보와 개혁보다는 보수의논리에 치우치는 담론이 상기와 같은 논의를 막고 호도해왔으며, 서민 자신들의 자각이 부족하다는 점에서'엘리트'주의가 대한민국에서 먹히고 있다는 것은 바로 대다수 국민인 '서민' 자신들의 탓이라고 할 수 밖에는 없다.



"미래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지난버린 것 같았다."

- 편혜영 통조림 공장 中-

곱씹을수록 씁쓸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글귀.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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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동생은 고등학교 3학년인 학생입니다.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 나이엔 수능을 위해서 늦게 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합니다.
그 날도 동생은 어김없이 자율학습에 지친 몸을 이끌고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어둑한 골목길을 따라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며 아파트에 다 다를 때쯤, 등 뒤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아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습니다. 동생은 피곤해서 예민한 탓이라고 자신을 달래며 아파트 앞까지
도착했습니다.

일은 겹친다고 마침 그 날은 엘리베이터 점검 날.
오후에 끝이 나기로 했었지만 어째서인지 내일까지도 점검이 이어져 어쩔 수
없이 계단으로 자신의 집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답니다.

몇 층을 오른 뒤 다음 층을 오르기 위해 걸음을 내 딛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걸 느꼈습니다.

분명 계단을 오르는 건 자신 밖에 없는 것 같은데,
발걸음 소리가 엇박으로 나고 있던 것입니다.

동생은 이상한 느낌에 걸음을 멈추고 계단 옆의 틈새로 아래를 봤습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두 층 밑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분명 사람이 없다면 껴져있을 텐데…….

아까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답니다.
하지만 자신과 점점 좁혀오는 걸음 소리에 겁에 질려 급하게 계단을 빠져나와
살려달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동생 집은 복도 끝에 있어서 한참 뛰어가는데, 그 순간 '철컥'하고 잠기는
현관문 소리와 체인이 걸리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 것도 한 두 집이 아니라
그 층에 있는 여러 집에서 철컥, 하는…… 현관문을 재점검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동생은 집에 무사히 들어갔지만, 자길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보다
이웃들의 현관문을 다시 잠그는 소리가 더 무서웠다고 합니다.

http://thering.co.kr/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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