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종다리의 노래

이 책은 2008년도에 내가 읽고 서평을 적었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블로그글에 댓글이 오르는 바람에 다시 생각이 난 책이다.

당시 감상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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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하, 백지연의 방송에세이를 생각하고 이 책을 읽고자 한다면 그 생각을 바꿔야 한다.

 

저자의 어린 시절의 기억의 편린으로부터 당시(1990년대 초반)까지의 그의 삶을 관통하는

시대의 아픔을 그의 말투와 비슷한 때로는 신랄한, 그러나 따뜻한 마음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책의 후반으로 갈 수록 그의 사상관이랄까 하는 것이 짙게 베어져 나오는데 그건 아마 그의 성장과정과 70년대와 80년대를 살아가던 이 시대 소시민들의 고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의 사상과 생각은 이 시대의 주류라고는 할 수 없을 듯 하다. 그러나 그가 긍정을 하든 부정을 하든 이미 대한민국의 주류 언론인으로서 그의 마음가짐이 이 책을 쓰던때와 그리 바뀌지 않은 것 같다는데서

그래도 이 시대의 희망을 본다고 하면 너무 과장스러운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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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내가 이 책을 읽은 동기는 김주하와 백지연의 에세이를 본데서 출발한다. 

두 책에서 공통적으로 손석희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아주 무서운 선배이자 본받을 수 밖에 없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 무언가 모순되는 듯 하면서도 흥미가 생겨서 보게 되었다.

특히 여자아나운서에게 쌍욕을 시전하면서도 별로 미움을 받지 않는 듯한 두 여자아나운서의 글에서 꽤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부분이 있구나라는 예상을 했었다는 기억이 있다.

이 책에서 봤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본 내용인지는 기억이 나진 않는데, 이 분의 아내분도 MBC아나운서 출신으로 지금은 없어진 프로인 아침 어린이방송 뽀뽀뽀의 메인 호스트인 일명 뽀미언니 출신이다.(역대 뽀미언니중 유명한 사람이 방송인 왕영은씨) 지금으로 말하면 어린이 프로 보니하니의 여자 호스트인 하니쯤으로 생각하면 쉽다.

하여간 손석희씨가 아나운서 초년 시절 지금의 아내분과 선인가 아니면 소개팅을 하게 됐는데, 남자가 피곤했던지 소개팅 자리에서 1시간가량 여자를 앞에 놓고 잠을 잤다고 한다. 여자는 그냥 지켜보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 잠이 깨어난 손아나운서는 일때문에 다시 회사로 갔던가 했다는데, 그 이후 이 사람이랑 결혼을 했다는 믿기지 않는 에피소드가 있다.

최근의 JTBC 뉴스에 대한 인기와 함께 손석희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아마 예전에 내놨던 책에까지 그 관심이 미치는 것 같다. 현재 이 책은 절판상태라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그냥 일반 신변잡기식의 내용이라(나도 읽은지 8년이나 지나서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한 번 읽고나면 그저 잊게 될 내용이다.

이 책을 구하기 힘들면 백지연이나 김주하의 초기 에세이를 구해보면 손아나운서에 관한 관련 에피소드가 있으니 그것이나마 손석희라는 인간에 대한 일면을 볼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에세이.


책 제목의 라오스와 함께 보스톤, 핀란드, 그리스, 구마모토등에 대한 여행기가 재미를 더한다.


아주 쉽게 술술 읽히는 부담이 전혀 없는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자서전이 아니라서 아마 자전적 에세이라고 쓴 것 같은데, 

제목처럼 소설가로서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작가가 소설가가 된 계기와 직업인으로서 프로작가가 된 이후로 어떻게 소설을 쓰고 있고, 글을 짓는 입장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면 조금 더 그의 세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중에서도 써있는데, 그 자신은 자신의 소설이 형식면에서나 내용적으로 나이가 들 수록 더욱 충실해(혹은 더욱 충실해지려는 의도를 가지고)지는 중이라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도 꼭 연대기적으로 그런 건 아닌 듯 하다. 

개인적 느낌으로는 태엽감는 새나 1Q84는 글의 느낌이 아주 농밀해서 읽다보면 무언가 끈끈한 작가의 땀과 기름이 배어나오는 것 같은 감상이 있는데 반해 여자 없는 남자들이나 댄스댄스댄스 이런 작품들은 그러한 밀도적인 느낌이 덜하다. 

확실히 무라카미 라디오같은 소설 중간중간 쓰는 에세이집은 밀도라기보다는 기분전환으로 쓴다는 하루키의 이야기처럼 아주 가벼운 깃털이나 봄날의 아침햇살처럼 가볍고도 유쾌한 느낌이 강하다.

밀도적인 면보다는 부피 혹은 작품의 세계의 넓이라고 할까 같은 부분에 있어서는 있어서는 태엽감는 새 이후로는 그렇게 확장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마도 내실을 기하는 그런 시기일까?

이 아저씨의 이 책도 아마 몇 년에 걸쳐서 꾸준히 1,2편씩 써오던것 같은데, 이 책을 보면서 가장 큰 수확은 뭐니뭐니해도 소설을 쓰는 그의 모습이 아주 구체적으로 나온다는데 있다.

하루하루 직장을 다니면서 꾸준히 밥벌이를 하는 샐러리맨처럼 딱 틀에 박힌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하루도 만만치 않게 빡빡해보이긴 한다. 다른 점은 샐러리맨은 대부분 마지 못해 회사를 다니지만 그는 하루하루를 아주 행복하게 농밀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의 다음 소설은 한 2년 이상은 기다려야 될 듯 하다.

이 책을 보고나니 태엽감는 새가 다시 보고 싶어져서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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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6

 

 하루나 일주일쯤 나침반을 따라가 보라. 그리고 인생이라고 하는 거대한 사막 안에 있을지라도 자신이 걷고 있는 사막의 이름을 불러 보고, 존재 방법, 살아가는 방법의 방향을 선택하라. 그리고 한동안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내가 점점 나의 사막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라. 궁극적으로 사막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사막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없는 것이다. 



p65

 

 사하라 사막에서 꼭 오아시스에 멀추어 쉬어야 할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쉬면서 기력을 회복해야 한다. 둘째, 여정을 되돌아보고 정정해야 할 것은 정정한다. 마지막으로 오아시스에서는 같은 여행길에 오른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인생을 산이 아니라 사막으로 보게 되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뿐 아니라 중요한 관계까지도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상하게도 멈추어 쉬고 활력을 되찾으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쉬지 않고 계속 가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버리고 나면, 중간에 쉬어가며 여행할 때보다 회복하는 데 네 배 정도의 시간이 든다.

 

 

 더 많이 쉴 수록 더 많이 갈 수 있다. 유목민들은 우리들이 잊어버린 것을 기억하고 있다. 더 자주 멈출수록 생의 사막에 더 깊숙이 들어가 볼 수 있다는 것을.



 

 쉬지 않고 정상으로 치닫게 만드는 열병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일을 해치운다. 하지만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쉬지 않으면 인생의 사막, 변화의 사막은 우리에게 그 대가를 치루게 한다.






p80

 

 사막 전체를 한꺼번에 기름진 정원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슬픔과 외로움이 사막의 일부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마사지건 절친한 친구와의 짧은 대화건 잠깐의 휴식을 취하면 그것이 작은 물줄기가 되어 먼지 날리는 사막을 적셔 준다.





p86


 변화의 사막을 건너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 나머지 우리는 점차 배우자나 사랑하는 연인 또는 동료나 아이들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직장을 잃거나, 이혼을 하거나, 중년의 위기를 맞거나, 금전적인 걱정거리가 있을 때 또는 퇴직 후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려 할 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자기의 사막을 건너는 일에만 몰두하게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상을 향한 열병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데 필요한 오아시스를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일을 마치고 나면,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면,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시간이 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막은 한없이 계속된다. 사막을 다 건너 저편에 다다를 때쯤이면 무시하고 지나온 관계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사막에 있다면 그 무엇보다도 오아시스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오아시스에서 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p88

 

 사막에 숨어 있는 비밀의 오아시스처럼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오아시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고,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발견된다. 우연히 오아시스를 마주쳤을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오아시스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p96


 길이 끝나는 순간부터 사하라 사막과 인생의 사막이 정말 험난해진다. 우리는 자기가 건너고 있는 사막의 존재를 망각한 채 일차선 고속도로 위를 질주한다. 그러다가 인생이 갑자기 멈추어 서면 그때부터 여행에, 특히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변화의 사막에서 막히게 되는 이유는 는 탄탄한 땅에서 운전할 때 필요한 기술이 부드러운 변화의 모래 위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p98


 갇히는 것은 변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인생의 깊은 부분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한 번도 갇혀 본 경험이 없다면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다. 갇히게 되면 여러가지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막히게 되었을 때 그 사실을 잘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p104

 

 예전에 이런 만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머리를 벽에 세게 부딪힐 때는 항상 무릎을 구부려라." 꼼짝달싹 못하게 된 상황에서 밀어붙이는 것은 벽에 대고 머리를 찧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며 상황만 더욱 나빠질 뿐이다. 벽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무릎을 구부리는 것과 같은 행동 하나로 허리를 다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밀어붙이기를 멈추지 않는 한 새로운 변화는 오지 않는다.



p108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압축 공기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감정적인 고양 또한 필요한 것이다. 심지어 목표, 프로젝트 그리고 도전 상황과 같은 인생의 은유적인 산들의 정상을 정복하는 데에도 감정적인 고양, 심리적인 자극, 정열의 불길 등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하라 사막에서 부딪치는 문제는 공기 부족이 아니라 공기 과잉 현상이다. 네 바퀴가 달린 자동차조차 매가리없이 구덩이에 쳐박혀 버린다. 이 상태에서 페달을 밟으면 더 깊이 박힐 뿐이다.


 사하라에도 죽음의 구역이 있다. 이 죽음의 구역은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기온이 52도 이상 되는 곳에서 모래를 치우고 랜드로버 차량을 미는 일은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다. 차량을 구덩이에서 빼내려고 하다가 12시간 만에 탈수 현상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있다.


 변화의 사막에서 우리 안의 일부가 죽어 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거나 너무 심하게 밀어붙이면 열정, 진지함, 약속, 이 모든 것이 시들거나 죽어 버릴 수 있다. 쥐었던 것을 놓고 변화하지 못하면 생동감도 죽는다. 인생의 사막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오래 머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체된 상황은 바로 우리의 자신만만한 자아에서 공기를 조금 빼내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여기에 또 다른 역설이 존재한다. 타이어에서 공기를 빼고 차의 높이를 낮춰라. 그러면 차가 모래 위로 올라설 수 있다. 우리도 우리의 자아에서 언제 그리고 어떻게 공기를 빼야 할지 알게 되면 굉장한 상승을 맛볼 수 있다. 우리의 자아에서 공기를 조금 빼면 현실 세상과 좀더 가까워지고 좀더 인간적이 될 수 있다. 장뤽이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는 자기의 미슐랭 바퀴에서 공기를 빼기 전에 먼저 한 일은 자아에서 공기를 빼는 일이었다. 자기의 계획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의 고집 때문에 일행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p130

  

 인생의 사막에서 다른 차에 깃발을 흔들어 구조 신호를 보내야 할 이유는 많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그것이 감정적인 자양분과 육체적인 힘이 되어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데 쓰일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사막을 건너 줄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서로 교류하고 좋은 시간을 갖는 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생의 사막을 건너는 데 길잡이가 되어 줄 내부의 나침반을 선택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다른 사람의 배신을 용서하고, 나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철이 들고, 상실감에 슬퍼하고, 퇴직 이후의 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 자신의 사막의 중심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종류의 도움이 필요한가? 단순한 도음이 구조를 받아야 할 상황으로 커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되도록 빨리 도움을 구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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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수많은 성가신 벽들이 허물어져, 사는 것이 더 쉬워지고 편리해졌다. 우리는 이제 팩스와 인터넷을 사용해 집에서도 일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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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오아시스를 정의하고 보호해 주었던 천연의 보호장벽을 많이 상실했다. 집에서 하는 작업 때문에 식탁이 서류로 뒤덮이고 새벽 3시에도 업무와 관련된 전화가 걸려온다. 휴가를 즐기거나 골프를 치는 중에도 휴대전화가 울린다. 디지털 혁명 덕분에 우리는 고객이나, 동료, 아이들과 항상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텔레마케터들과 스팸 메일 살포자들은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사고, 언제 집에 있고, 어떻게 해야 연락이 되는지 훤희 꿰고 있다. '벽이 무너졌다'는 포스트모던 세계의 슬로건이다. 그것은 또한 세상이 천천히 돌아가는 일과 휴식간에 경계가 좀더 뚜렸했던 시절에 대한 애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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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영을 위해 내달리는 와중에 우리는 영어에서 두 글자로 된 가장 강력한 단어, 'No'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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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건너고 있는 사막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어떤 종류의 오아시스가 필요한 걸까? 잠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매주 마사지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침반 바늘을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나 배우자와 또는 오래된 친구와 의미있는 시간을 갖고 싶은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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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나서는 오아시스를 침해하는 야만인들의 목록을 작성한다. 친구나 친척, 동료, 아이들, 직장상사, 고객, 의무, 프로젝트, 해야 할 일, 완벽주의적인 성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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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만의 오아시스를 보호할 벽을 세운다. 사막과 오아시스를 구분 짓는 분명한 경계선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각오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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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의 필요성을 믿지 않는 비신도들이 여러분을 시험메 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아시스를 믿지 않는 이교도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일부는 이교도이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해치는 최악의 야만인이 될 수도 있다. '아니오'라고 하지 못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오아시스에 걸어 놓은 빗장을 풀어 주는 것과 같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습성에 젖어 있는 내 안에서는, 다음 사막을 건널 때까지 오아시스에서 쉬지 않고 계속 가다 보면 나중에 훨씬

더 멋진 휴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속삭임이 들린다. 그렇다. 유목민 복장을 한 산악인이 가장 위험한 야만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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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혼자가 되어야 할 순간에조차 그 생각만으로도 두려워 몸을 떤다. 또는 서로 신의를 지키는 친밀한 관계를 두려워할 수도 있다. 공기를 빼야 할 상황을 피하기도 한다.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29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 한 기업가를 만난 적이 있다. 오아시스에서 멈출 수 없었던 이 사람은 항상 과로 상태였고 회사는 잘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휴가를 가면 회사가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상의 국경선에서 빠지는 함정은 제3장에서 기술했던 정체 상태와는 다르다,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되면 종종 두렵기도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데 대한 좌절감, 지루함, 분노 같은 감정이 따라온다. 하지만 허상의 국경선은 항상 두려움을 낳는다. 이 두려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믿음과 연관되어 있고, 이 잘못된 믿음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그에 저항할 용기나 통찰력이 없다면, 그 둘이 합세하여 우리를 사막 한가운데에 가두어 버릴 수도 있다.

 

 허상의 국경선은 허상처럼 보이지 않고, 진짜 우리의 앞길을 가로 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 국경선을 건너면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을 그 반대이다. 그 국경선을 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생기는 것이다. 때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언젠가는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될 거라고 경고를 해주기도 한다. 우리는 이 진실의 순간을 회피하고 두려워해왔지만 그것은 어느새 다가와 우리의 뒷덜미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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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내 안의 일부에서는 여기 영원히 머물고 싶다고 하고, 또 다른 일부는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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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신기하게도 슬픔과 행복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나는 슬픔은 저쪽으로 몰아내고 행복에만 매달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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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와 발톱이 있다면

당신은 새 - 여자

 

꼬리와 지느러미가 있다면

당신은 물고기 - 여자

 

몸이 조금씩 변해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물에 비친 모습을 보았지

당신은 머리를 빗어내리며 노래를 불렀지

 

물거품처럼 떠가는 노래

오래전 당신이 부르던 노래

아기를 업어 재우며 부르던 노래

슬픔의 베틀 앞에 앉아 부르던 노래

 

피에서 솟구친 노래는 어떻게 떨어져내리나

모래언덕을 잃어버린 파도는 어떻게 출렁거리나

 

사랑을 잃고

그 때문에 목소리마저 잃은 당신

침묵이 가장 무거운 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도 있었지

 

더 이상 노래를 보르지 않아도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

 

낡은 거푸집을 헤치고 날아오르느라

날개가 부러진 흔적이 있다면

당신은 새 - 여자

 

찢긴 지느러미를 지니고 있다면

당신은 물고기 -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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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흔적과 상처들이 남아 이리도 이 시가 내 가슴을 때리는가.


주저흔  

                       김경주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굴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몰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굴 밖에선 횃불이 마구 날아들었고 눈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가진 돌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법인데 그것은 돌 속으로
들어간 몇 세기 전 바람과 빛덩이들이 곤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썩지 못하고 땅이 뒤집어 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 시간에 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전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화석의 내부에서 빗방울과 햇빛과 바람을 다 빼내면 이 화석은 죽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졌다기보단
어쩐지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김경주 시집 기담中 발췌-



   슬픈 족속
                        윤 동 주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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