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 복음을 베이스로, 예수 1인칭 관점을 가정하여 쓴 예수의 공생애 일대기.

당연히 저자인 김용옥 선생이 바라보는 예수에 대한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 

도올 선생의 과거 기독교 저작들과 영상 강의를 들어본 이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들이 있다.

예수에게서 신화적 부분을 싸악 걷어내고 인간적인 관점과 심리에서 접근했다고 보면 이해가 된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신의 자식으로 죽은 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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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

 20세기의 서구의 가장 위대한 성서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는 루돌프 불트만은 이와같이 말했습니다: "바울의 담론을 통해서도, 어떠한 복음서의 기술을 통해서도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에 관한 진실은 알려질 길이 없다. 그 모든 담론이 이미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적 담론이며, 초대교회는 종말론적인 회중이다. 이미 신화 속에 갇힌 사람들이다." 세상사람들이 불트만을 진보적 신학자로서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철저히 성서의 신화적 기술을 비신화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2천 년 전의 신화적 세계관을 오늘 과학적 세계관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합리주의정신을 표방했기 때문입니다.

 

p44

 내가 세례 요한을 만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 몇 가지를 얘기해둘 것이 있습니다. 나는 갈릴리 나자렛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의 어머니 마리아는 매우 평범한 여인이며, 결코 성모聖母라고 컬트화 될 수 있는 그런 여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중동 지역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까만 보자기를 쓴 보통의 여인,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의 그리스도됨을 원한다면 그 신령성을 나의 삶 속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가족을 장식물로 삼아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짓입니다. 마리아는 아람어로 마리암Mariam인데 그것을 희랍어로 적으면 마리아Mαρια가 됩니다.

 나의 엄마 마리아는 나의 아버지 요셉과 결혼하여 아들을 다섯 명, 딸을 셋 낳았습니다. 나는 8남매 중 둘째입니다. 그러니까 맏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녀잉태 같은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문명의 로컬 컬트와 결합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하나의 문화전통이니까 부정 · 긍정의 논란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나 예수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진지하게 이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런 유치한 논의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p66

 마가는 세례 요한의 사상과 나의 사상의 다른 점을 단적으로 "물의 세례"와 "성령(프뉴마 πνεμα)의 세례"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1:8). 마태는 "성령의 세례"라는 말 대신에 "성령과 불(퓌르 πνρ)의 세례"라는 말을 썼습니다(마 3:11). 누가도 "성령과 불의 세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눅 3:16).

 "프뉴마"라는 것은 본시 "숨"을 의미합니다. 동양언어에도 "기氣"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는 신령한 그 무엇이면서도 우주 전체에 깔려있는 물질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는 결국 숨breath입니다. 숨은 콧구멍을 들락거리는 공기, 바람이기도 하죠. 숨은 곧 생명의 근원, 증거이기도 합니다. 내가 쓰는 헬라문명권 언어의 이 프뉴마는 동양의 기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것은 숨이며, 바람이며, 호흡이며, 생명이며, 신적 영감 divine inspiration이며, 신의 영이며 사람의 영입니다. 물의 세례는 매우 구체적인 물질적 접촉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세례를 의미하지만, 영의 세례, 즉 기의 세례는 생명의 토탈한 뒤바뀜, 전 인격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불"은 물질을 대변한 말이 아니라, 프뉴마의 신생新生의 뜨거움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물의 세례보다는 불의 세례 한 차원 높은 어떤 영적 트랜스포메이션spiritual transformation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나의 사상과 세례 요한의 사상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균열이 생기면 결국 이별하게 됩니다. 이별하게 된다는 것은 나 예수가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아주 쉽게 말하자면 나는 세례 요한 밑에서 공부하면서 세례 요한보다 더 상위권의 비젼을 획득하고 그와는 다른 길을 개척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 시점이 아주 오묘했습니다. 내가 세례 요한과 결별하게 되는 시점 그 즈음에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마캐루스성채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운동은 통치자 안티파스를 위협할 정도의 사회적 셰력을 형성하였고, 그것은 그의 전성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례 요한의 터무니없는 몰락을 목격하면서, 나의 영적 세례운동은 정치적 세력을 형성해서는 아니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p125

 그런데 마가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예수는 천국의 비밀을 사람들이 함부로 쉽게 알아차릴 수 없도록 비유로 말하였다."(4:11). 마가는 훌륭한 작가이지만, 이 말만은 매우 그릇된 생각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 호반에 앉아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누구든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9장. 비유는 상식적 민중의 담론이다.

 

 우선 비유가 무엇일까요? 비유는 헬라말로 "파라볼레παραβολη"라고 하는 것인데, "파라"는 "나란히", "함께"라는 뜻이고, "볼레"는 "던지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가지 말을 하고 있는데 또 하나의 말이 동시에 나란히 던져지고 있다는 뜻이지요. 여태까지 나는 파라볼레의 어법을 계속 활용해왔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어찌 사탄이 사탄을 궤멸시킬 수 있겠는가," "잔치집에 온 신랑친구들이 어찌 신랑과 함께 있는 단식을 할 수 있으랴!"는 등등, 한 가지 말의 이면에 또 하나의 말이 있었다는 얘기지요.

 "씨 뿌리는 자의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면에 "천국의 비밀"이 같이 얘기되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비유담론은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복합적으로 많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죠.

 비유는 민중의 언어입니다. 조선말에 "속담"이라는 말이 있지요. "속담"이란 "세속의 이야기"라는 뜻이죠. 즉 "민중의 이야기 방식"이라는 뜻이죠. 속담은 짧은 경구警句라 할지라도 파라볼레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속담의 특징은 적재적소에  쓰이면 누구든지 쉽게 알아듣는다는 것이죠. 그것은 "카이로스(타이밍)의 예술"이지요.

 

p230

 먼저 성전에 오는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것은 정결한 코셔기준the kosher requirements에 맞는 동물을 희생으로 써야 합니다. 그런데 희생 동물은 순례자가 아무리 깨끗이 길러서 가지고 와도 코셔검사를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성전회랑에서 파는 동물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패구조 때문이죠.

 사실 성실한 본인이 잘 키운 것이 제일 깨끗할 텐데 그러면 성전에는 우수리가 안 떨어집니다. 성전회랑에는 파는 동물은 자기가 기른 것이나 시중에서 파는 것의 보통 몇 배를 호가합니다. 터무니없이 비싸지만 그 가격을 안 낼 수가 없습니다. 제사를 지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못 지내면 야훼의 축복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일년 동안 집안운수가 꽝이 된다고 생각하니 안 낼 수도 없죠. 10원에 해결될 것을 100원에 내야만 하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성전입니다. 90원을 착복한 상인의 이문의 대부분은 다시 제사장들, 사두개인, 서기관, 그리고 궁극적으로 산헤드린의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환전상이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서 쓰는 돈은 세속적인 로마화폐를 쓸 수가 없습니다. 모든 튀리안화폐the Tyrian currency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 튀리안화폐가 있어야 성전세를 낼 수 있고 또 성전에서 행하는 여러가지 활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환전하는 데도 상식적인 환율의 몇 배가 되는 환율이 적용되는 것이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헤롯성전이 AD 66년에 완성되었을 때, 그해 유월절에만 자그마치 25만 5천 6백 마리의 양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예수살렘성전의 제식규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환전과 희생동물매매의 수익은 천문학적 숫자에 달합니다. 나는 이 부패의 연결고리를 방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갈릴리 민중의 고초의 근본원인이 이러한 종교조직과 율법과 그릇된 신관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종교혁명, 정치혁명, 사회혁명의 한 고리라도 내 힘으로 달성해야겠다는 신념, 그 신념을 고취시키는 하나님의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는 누구도 이 나의 갈망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맥없이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민중의 마음에 확고한 씨를 뿌리지 않으면 내가 말하는 천국은 도래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첩격이 갈릴리 촌구석에서 행하는 이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성전을 뒤엎는 사회적 행위, 상식적 행위, 사람들의 마음을 경이롭게 만드는 의로운 거사에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고 있었습니다. 힐링이 기적이 아니라 힐링을 가능케 하는 민중의 마음이 기적이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 믿음의 궁극적 행태는 율법의 전승 그 자체를 단절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종교적 하이어라키를 전복시켜야 평등한 세상이 오고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나는 갈리리 촌놈에 불과합니다. 나는 서른댓 살의 청년에 불과합니다. 나를 마술사로 그리고, 나를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노인처럼 그리는데 정말 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만을 세상은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피 끓는 청년이고, 근원적인 사회변화를 꾀하는 운동가입니다.

 나는 그 거대한 헤롯성전에 들어서자마자 닥치는 대로 사고 팔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며 환전상들의 탁자를 다 엎어버리고, 비둘기장수들, 희생양을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었습니다(11:15). 그리고 제사기구들을 나르느라고 성전뜰을 왔다갔다 하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이것은 성전제사 자체를 금지시키는 반유대교적 행동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갈릴리 촌놈입니다. 아무리 메시아 운운한다 할지라도 로마병정의 칼자루에 간단히 목이 날아갈  그런 연약한 존재입니다. 어떻게 갈릴리 촌놈인, 서른댓 살의, 아무 조직배경도 없는 청년이 이 무시무시한 대성전에서 이러한 난동을 부릴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런 행위가 용인될 수 있었고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채찍까지 휘둘렀습니다. 폭력적인 힘까지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크게 소리쳤습니다.

 

 "성서에 하나님께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조용한 집이 되어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a den of robbers로 만들었구나!"

 

 나는 이 거대한 예루살렘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 규정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나의 언행이 용납될 수 있었을까요?

 만약 이 예루살렘성전이 로마군대가 직접 관장하는 곳이었다고 한다면 나는 초반에 바로 살해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는 다신론적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지역의 총교생활에 관해 매우 관용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헤롯왕가를 통한 간접통치방식을 취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반자치구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제기한 반종교적 행위는 로마권력자들의 입장에서는 강 건너 불이었습니다.자기들이 직접 다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유대교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행위는 반역이었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언행을 듣고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모의하였다."

 

 그런데 왜 목 죽였을까요? 여기에 복음서가 기록하지 않은 중요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군중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종교적 당국은 내가 민중의 마음을 얻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민중이 예수의 가르침에 감탄하였다"(11:18)

 

 다시 말해서 나의 성전전복행위는 나 홀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민중이 마음으로 성원했고 나와 같이 행동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환전상들의 탁자를 뒤엎어 동전이 여기저기 흩어질 때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통쾌했겠습니까? 마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석양이 뉘엿뉘엿할 때야 예수와 제자들은 성밖으로 나갔다."

 

다시 말해서 나의 전복행위는 하루종일 계속된 것입니다. 그 35에이커 면적을 커버하는 회랑을 뒤엎는 작업은 하루종일 진행된 민중항쟁의 대사건이었습니다. 나느 성공했습니다. 나는 이제 진정한 패션Passion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새로운 약속의 임재를 위하여 구약을 말소시키는 깨끗한 청소를 단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예루살렘 이틀째의 하룻일이었습니다. 나는 이날 밤도 베다니에서 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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