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 직업은 뭐라고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원래 대학교수였는데 지금은 그저 김정운 이라는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지식인이라고 해야 할까? 

 

 제목처럼 창조란 편집이다라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람 시각은 독특한 면이 있다.  난 이 분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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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창조적 사고는 이 같은 일상의 당연한 경험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를 가리켜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시클롭스키Shklovsky는 '낯설게 하기ostranenie' 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가장 창조적 작업인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반복과 익숙함을 낯설게 해 새로운 느낌을 느끼게 만드는 데 있다는 거다.

 우리 삶이 힘든 이유는 똑같은 일이 매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아, 남의 돈 따먹기 정말 힘들다!' 며 출근하고 끝없이 참고 인내해야 하는 삶에는 그 어떤 탈출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적이고 싶다면 무엇보다 이 따분하고 지긋지긋한 삶을 낯설게 해야 한다. 우리 삶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다.

 

p22

 19세기 말 인상파로부터 20세기 초반의 피카소, 칸딘스키 등의 추상회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천 년간의 회화 표현 방식이었던 재현의 해체가 시작된다. 더 이상은 외부 대상을 모방하지 않겠다는 구상회화의 포기는 '창조적 작업으로서의 예술'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p24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정보가 공유되고 지식이 구성되는 세상의 변화에 대해 애플의 스티븐 잡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민주주의에는 자유롭고 건강한 언론이 중요하다. ... 뉴스를 모으고 편집하는 조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나는 미국이 블로거들의 세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편집자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2010년 《월스트리트저널》 주최로 열린 제8회 'All Things Digital' 컨퍼런스에서 한 이야기다. 에디터, 즉 편집자에게로 권력이 이동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거다. 스티브 잡스가 옳다. 더 이상 정보 자체가 권력이 아닌 세상이다. 정보 독점은 이제 불가능하다. 세상의 권력은 정보를 엮어내는 편집자들의 몫이다.

▶ 요즘은 미디어의 발달로 수퍼 콘텐츠 크리에이터(인플루언서를 뛰어넘는 이들, 유발 하라리, 먹방 스타인 쯔양 등)가 직접 SNS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독자들과 소통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도 수퍼 편집자라 볼 수 있다

신문사의 젊은 기자들은 한결같이 데스크에 앉아 자신들이 작성한 기사에 연필로 밑줄 그어가며 맞춤법까지 문제 삼는 선배들을 욕한다. 편집의 권력을 일방적으로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이 신문 데스크의 그 막강한 권력도 이제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젊고 어설픈 편집자에게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포털 사이트의 헤드라인에 올라가는 기사를 선택하는 권력은 전국 종이 신문 데스크 권력을 다 합친 것보다 강하다.

 

p28

 한국 사회의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다들 그의 논문이 참인지 거짓인지에만 관심을 가졌다. 국가적 자존심의 훼손만 걱정했다. 그러나 황우석 사건의 본질은 따로 있었다. 지식권력이 이제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식권력인 대학의 붕괴는 이미 여러 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그 징조들이 황우석 사건을 통해 폭발한 것이다. 여태까지의 지식은 대학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지식은 대학이 정한 절차에 따라 논문이라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교수는 지식을 심사하고, 그 결과에 권위를 부여하는 지식권력 시스템의 최정점이었다.

 이 같은 국가 공인의 지식권력이 보장하고, 세계적 지식권력에 의해 검증된 국가적 자부심인 황우석의 논문이 정체불명의 하찮은(?) 네티즌들에 의해 처절하게 붕괴된 것이다. 지식 편집의 독점권을 가진 대학의 붕괴가 황우석 사건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도 논하지 않는다.

▶ 황우석 사건이 대중에게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은 물론 PD수첩에서 방송되고 난 이후다. 하지만 PD수첩에서 방송이 되어 전에 이미 BRIC(Biological Research Information Center), 즉 생물학연구 정보센터라는 생물학 전문가들이 이용하는 인터넷 포럼에서 황우석의 줄기세포 논문이 위조여부가 이슈가 되어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우석의 논문이 정체불명의 하찮은 네티즌들이라고 하기에는 과장이 크다. 이 포럼에는 한국의 생명공학, 생물학, 생화학 등의 최고 전문가들이 여전히 활동중이다.

 

p41

 자기 텍스트를 써야 제대로 학문을 하는 거다. 오늘날 인문학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한국의 콘텍스트에 맞는 텍스트 구성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텍스트로 서양의 학문을 하니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거다.

 텍스트는 반드시 해당 콘텍스트에서 생성된다. 하버마스의 비판이론도 프랑크푸르트학파, 실증주의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라는 20세기 유럽 지성사의 콘텍스트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하버마스가 한국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다. 하버마스를 전공한 국내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러나 정작 하버마스는 뜬금없는 이야기만 하다 갔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된다. "한국에도 위대한 정신 · 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 콘텍스트에 근거한 이론이 구성되어야 한다."

 

p57. 검증 가능성 - 반증 가능성 - 편집 가능성

 과학과 비과학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검증 가능성verifiablility' 을 주장한다.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이론만이 과학적 지식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포퍼Karl R. Popper는 인간의 경험은 시공간적으로 한계가 있기에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는 없다며 논리실증주의의 검증 가능성을 비판한다.

 

 포퍼는 과학적 지식과 비과학적 지식의 기준으로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 을 내세운다. '백조는 희다' 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백조를 검증할 수는 없지만, 검은 백조 한 마리만 발견되어도 그 가설은 틀린 것이 된다. 모든 지식은 이렇게 반증의 사례가 발견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옳은 것이고, 과학적 지식은 이렇듯 반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포퍼에 따르면 마르크스 이론이나 프로이트 이론은 비과학적이다. 반증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부의 논리 구조는 그럴듯하지만, 이론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가능성 자체가 아예 닫혀 있다. 그러나 포퍼의 과학과 비과학을 나누는 반증 가능성에는 시간이라는 요인이 빠져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되고, 변화하는 '구성주의적 세계관' 과는 거리가 먼, 날근 실증주의적 세계관의 변종이다. 주체적 행위의 개입이 불가능한, 인식의 주체와 개체가 철저하게 격리된 세계관일 따름이다.

 21세기에는 지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증명해야 하고, 확인해야 할 '객관적 세계'에 대한 신념 자체가 폐기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옳고 그름보다는 '좋은 지식'과 '좋지 않은 지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좋은 지식의 기준은 '편집 가능성'에 있다. 현재 진행형의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가능케 하는 주체적 행위가 가능한 지식이 좋은 지식이다. 편집 가능성이 있는 지식이 좋은 지식인 것이다.

 

 

p65

 몽타주 기법의 창시자로 불리는 소비에트의 쿨레쇼프Kuleshov는 소위 '쿨레쇼프 효과'라고 불리는 흥미로운 실험으로 몽타주 기법의 심리적 효과를 확인했다. 그는 소비에트의 유명한 배우인 모주힌Mozzhukhin의 무표정한 얼굴이 찍힌 화면에 각기 다른 세 가지 화면을 이어붙였다. 하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 또 하나는 관에 누워 있는 여인, 마지막으로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였다.

 흥미롭게도 관객들은 모주힌의 무표정한 얼굴을, 그 뒤에 이어진 화면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수프가 이어진 장면에서 모주힌이 배고파하며 수프를 먹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느꼈다. 관에 누워 있는 여인이 이어진 장면에서는 모주힌이 여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으로,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가 이어진 장면에서는 아이를 예뻐하는 모습으로 보았다. 동일한 배우의 표정이 어떻게 편집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몽타주 기법의 핵심은 'A장면'과 'B장면'의 합은 'A,B'가 아니라 'C'가 된다는 데 있다. 이는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명제와 동일하다. 각각의 부분이 합쳐지면 부분의 특징은 사라지고, 전체로서의 전혀 다른 형태Gestalt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 같은 몽타주 기법이 작동할 수 있는 이유는 '완결성의 법칙law of closure'이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

 '폐쇄성의 법칙'으로도 불리는 이 완결성의 법칙은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시켜 완전한 형태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본능적 경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중간중간이 떨어져 있는 원 모양의 띠를 완벽하게 이어져 있는 원으로 인식하는 경우다.

 

p85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의 발견으로 비롯된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통찰이 의사소통의 문제로 연결되는 이유는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joint-attention' 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에서는 객관성이란 단어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으로 대체한다.

 상호주관성의 시대에는 각 주체들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혹은 상호주관적 시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퍼스펙티브를, 각 주체들 간 상호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객관적 관점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자주 있다. 이때는 반드시 어떤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의심해야 한다.

 

p116

 독일의 국경은 수시로 변경되었다. 잦은 전쟁으로 승전과 패전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은 뼈아팠다. 전쟁이 끝난 후 이뤄진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납하는 등 영토의 13퍼센트를 잃었다. 물론 이 땅들 대부분은 이전의 전쟁에서 빼앗아 온 것이었다. 하지만 패전에 이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영토를 잃은 독일인들의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히틀러가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권' 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타났다. 1924년 뮌헨 반란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집필한 『나의 투쟁』에서, 독일 민족은 유럽 전체를 독일의 레벤스라움, 즉 독일의 생활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히틀러는 주장한다. 그가 사용한 레벤스라움이라는 개념은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이 'Lebens생활' 과 'Raum공간' 을 합쳐 만든 조어다. 다윈의 진화론을 국가에도 적용해, 국가도 다른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먹고, 자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레벤스라움이 히틀러의 용어가 되는 데는 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 라는 인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뮌헨 대학의 교수였던 하우스호퍼는 어릴 때부터 부친과 친구였던 라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라첼과 마찬가지로 하우스호퍼도 국경은 생명체의 피부처럼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히틀러에게 전달한 사람은 후에 나치 독일의 2인자가 된 루돌프 헤스Rudolf Hess 였다. 헤스는 뮌헨 대학 재학 당시, 하우스호퍼의 조교였다.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은 나치 독일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하우스호퍼는 독일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며, 두 나라의 제국주의가 닮은 꼴이 되도록 가교 역할을 했다. 하우스호퍼는 실제 일본이 한반도를 집어삼키기 바로 이전 해인 1909년에 일본에서 1년간 살았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어가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략을 지켜보며 자신의 레벤스라움 개념을 가다듬었다.

 독일로 돌아온 하우스호퍼는 일본을 극동아시아 레벤스라움의 지배자로 찬양한다. 가는 곳마다 일본을 레벤스라움 이데올로기의 모범적 사례로 소개했다. 그의 활동에 감동한 일본은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을 일본 제국주의의 이론적 토대로 받아들였다. 그를 흉내 낸 개념도 만들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이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히틀러가 부르짖은 레벤스라움의 변종이라는 이야기다. 이렇듯 히틀러의 레벤스라움은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한반도와도 이토록 깊은 관련이 있다. 그 당시에도 세상은 참으로 좁았다.

 

 하우스호퍼를 통해 레벤스라움을 알게 된 히틀러는 이 개념은 자신의 나치 이데올로기에 바로 적용한다. 베르사유조약으로 영토를 빼앗긴 독일은 인구에 비해 영토가 형편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국민을 먹여 살릴 충분한 영토를 얻기 위해서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에 있는 슬라브인들의 땅을 빼앗아야 한다고 선전한다. 그들은 독일의 아리아 민족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는 것이다. 이때 독일 영토가 지난 수백 년간 어떻게 줄어들었는가를 보여주는 하우스호퍼의 지도는 독일의 레벤스라움이라는 생명체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었다.

 히틀러의 레벤스라움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도 '공간Raum'을 이야기했다. 소설가 한스 그림Hans Grimme이다. 아프리카를 오가며 장사하는 상인이었던 그림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독일에 눌러앉아 작가가 된다. 이때 그가 발표한 소설이 『공간 없는 민족Volk ohne Raum』이다.

 

 1926년에 출판된 그의 소설은 당시 독일의 모든 사회문제는 '공간 부족'때문이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독일이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간 확장밖에는 해결책이 없다고 주장한다. 당시 독일인들에게 이처럼 인과관계가 명확한 설명은 없었다. 한스 그림의 소설을 히틀러가 사랑하고, 수시로 언급한 것은 당연했다.

 공간 상실에 대한 강박으로 시작한 나치 독일은 또 다시 엄청난 공간 상실로 끝이 났다. 전쟁 후, 동쪽 국격이 오데르-나이세Oder-Neisse 라인으로 그어졌다. 동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 고유 영토로 여겨졌던 상당한 크기의 공간을 빼앗긴 것이다. 뿐만 아니다. 남은 독일 영토도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승전국들의 관리를 받게 된다. 독일이 자기 국토를 다시 회복한 것은 채 30년도 되지 않는다.

 

p140

 아동이나 가족, 부부의 개념이 문화적 산물이라면, 보다 보편적인 '개인'과 같은 개념은 어떨까? 이 또한 문화적 구성물일까? 물론이다. 개인 혹은 사회, 문화라는 개념들은 모두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졌다.

 서구의 근대를 가능케 한 'culture' 'society' 'individual'에 조응하는 개념이 과거 동양에는 없었다. 이들 개념의 번역인 '문화' '사회' '개인'과 같은 단어는 일본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이 만들어냈다. 이 개념들을 오늘날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 것은 고작 100여 년에 불과하다.

 

 

 

 한번 생각해보라.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개인과 사회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것이 도대체 상상이 되는가? 개념이 없다는 것은 개인과 사회에 관한 의식 자체가 없었다는 말이다.

 

p141

 문명화civilization의 어원인 'civil'은 원래 '예절 바른'을 뜻한다. '사회적social'이라는 단어와는 거의 동의어로 쓰였다. 문명화란 말 그대로 품위 있고, 예의 바른 행동으로 발전을 뜻한다는 이야기다. 문명화 과정의 핵심 내용인 '합리화rationalization' 란 본능적 감정이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세련된 표현으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노베르트 엘리아스Nobert Elias의 주장이다.

 합리적인 문명사회는 각 개인이 예절 바른 교양인이 되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서구 근대에서 아동 개념의 탄생은 이러한 교양 교육의 맥락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아리에스의 주장이다. 그저 '작은 어른'일 따름이었던 아이들이 별도의 교육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원시적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합리적 성인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합리적인 성인으로 발달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를 '아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p143

 아동과 마찬가지로 청소년 또한 교육을 받아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아주 다르다. 아동 개념에는 그래도 '사랑스러움'이나 '귀여움'과 같은 긍정적 정서가 동반된다. '사랑과 관심의 공동체'로서의 가족이라는 사회적 표상social representation에는 항상 아동이 부부 사이에 있다. 그러나 청소년은 달랐다.

 청소년은 처음부터 불량한 개념이었다. 청소년의 또 다른 이름 'juvenile'은 거의 청소년 범죄juvenile delinquency'의 축약어로 쓰인다. 스탠리 홀은 이 청소년기를 '질풍노도Strum und Drang'의 시기로 명명하며 그 불안정한 특징을 더 노골화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청소년 개념을 편집할 사회구조적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급격한 산업화 때문이다. 일단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를 위해 훈련된 노동력이 급하게 필요했다. 그러나 기존의 소규모 도제제도와 같은 교육 방식으로는 당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대규모 노동력을 키워낼 수 없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가족 또한 더 이상 교육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가족에서 교육의 기능이 떨어져나갔다. 교육은 모두 학교에 맡겨졌다.

 학교는 자신들이 담당해야 할 교육의 필요성을 정당화해야 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불안하고, 위험하고,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소년의  표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즉, '청소년은 매우 불안하고 위험한 존재이기에 반드시 학교에서 교육받아야 한다' 는 이데올로기다.

 한국에서 청소년 개념도 비슷한 경로로 자리 잡았다. 1991년 청소년기본법이 제정된 후 청소년지도사, 청소년상담사와 같은 자격증이 만들어졌다. 아울러 이를 위한 전문 교육기관이 대학에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청소년 지도' '청소년 상담' 과 같은 개념은 '청소년은 반드시 지도와 상담이 필요한 불안한 존재'라는 근대적 표상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어의 청소년 개념 또한 항상 '비행-청소년' 아니면 '청소년-문제'로만 연결되는 것이다. (청소년 개념이 달리 연결되는 것을 보았는가?)

 

 아동과 청소년의 개념은 근대 이후 탄생한 '개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편집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근대적 주체가 그 산업 사회적 존재 양식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객체화'라는 '소외Entfremdung 현상' 을 동반하듯, 근대적 개인은 각 연령에 따라 아동, 청소년과 같은 각 발달단계로 귀속되어 또 다른 형태의 소외된 아이덴티티를 얻게 된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또 다른 연령대의 개인이 새롭게 편집되기 시작했다. '노인'이다. 이제까지의 발달은 성인이 되면 완성되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 생산활동을 하다가 은퇴하면 바로 죽었기 때문이다. 평균수명이 그만큼 짧았다. 더 이상의 발달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은퇴한 이후에도 수십 년을 더 살아야 한다. 평균수명이 100세에 가까워지고 있다. 개인의 발달이 성인 단계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편집의 내적 필연성이 생긴 것이다. 계속 발달하지 않으면 죄다 '성질 고약한 노인네' 가 되기 때문이다.

 성질 고약한 노인데는 비행 청소년만큼이나 위험하다. 그래서 요즘 발달심리학에서는 '전생애발달life-span-development' 를 이야기한다.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발달해야 한다는 거다. 근대 이후 생겨난 개인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편집의 과정을 겪고 있다.

 

 

p145

 역사적 사건은 물론 인식을 가능케 하는 정신의 도구, 즉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편집되었다는 관점을 갖게 되면 주체적 행위의 가능성과 한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 같은 구성주의 혹은 구조주의적 서술은 실증주의적 역사 서술의 근본 전제를 상대화하는 메타적 방법론이다. 개념들의 '생성'에 관한 엘리아스와 아리에스의 메타적 편집 테크닉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의 지식계보학 혹은 지식고고학에서 절정을 이룬다.

 실제로 푸코는 아리에스가 없었다면 자신의 책을 출판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읽히고 있는 푸코의 대표작 『광기의 역사』 는 당시 대부분의 유명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당했던 원고다. 마침 플롱 출판사에서 출판 기획을 맡고 있던 아리에스가 우연히 그의 원고를 읽고, 반대를 무릎쓰며 출판을 고집한다. 그 결과 푸코의 첫 저작인 『광기와 비이성 :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 가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이다.  

 

p148

 현대 심리학의 '일관된 자아' 에 대한 요구는 자아 구성 과정에 관한 무지에서 나온다. 내 안의 나는 항상 많다. 당연히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괴로워하거나 노여워하는 것은 '오버'다. 일관된 자아에 대한 오버는 '억압'을 낳는다. 자아에 대한억압된 기억은 타인의 내러티브를 왜곡하고 부정한다.

 

p151

 빌 게이츠의 이야기는 백 번 옳다. 훌륭하다. 그리고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도 안 재미있다는 거다. 별로 흥미롭지 않다. 안 들어도 다 아는 이야기 같다. 반면 기부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관해 어떠한 이야기도 한 적 없는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는 뭔가 감동이 있다. 울림이 크다. 듣고 싶어진다.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계몽'이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이 스스로 의미를 편집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일방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재미없는 거다.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내러티브는 진리를 강요할 뿐, 일리一理 의 해석학이 빠져있다. 반면 스티브 잡스의 내러티브는 상호작용적이다. 편집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잡스의 정서적 · 모순적 · 자극적 내러티브는 듣는 이들의 적극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주체적으로 편집해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낼 때만 의미 있다. 남이 만들어주는 의미는 전혀 의미 없다. 진리를 계몽하던 시대는 지났다. 듣는 이로 하여금 '주체적 편집의 기회'를 제공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한국 기업 CEO의 이야기에서 이런 감동을 얻고, '의미 편집'의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거다. 한국 정치인의 연설에서 눈물 흘리며 삶의 가치와 사회변혁의 용기를 스스로 편집해낼 수 있어야 내 나라가 자랑스러워지는 거다.

 

p164

 민족은 근대 이후에야 기능하기 시작한 가공의 이념이다. 그 이전에는 왕의 국가, 신의 국가였을 따름이다. 절대왕권이 사라진 이후, 국가를 지속하게 할 이념으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나타난 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던 1900년대 이후에나 민족 개념이 나타났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저항의 이념으로 우리의 '민족' 개념은 편집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오늘날 세계화의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상상 공동체는 해체되고 있다. 민족 개념 자체가 부정적 개념으로 변하고 있다. 그 화용론적 생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다. 당시 독일인들은 "우리는 한 민족이다! Wir sind ein Volk!" 라고 장벽 앞에서 외쳤다. 그러나 통일되지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동독 사람들은 동독 공산당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우리가 바로 그 인민이다! Wir sind das Volk!" 라고 외쳤었다. 공산당의 주체인 바로 그 '인민Volk' 이라는 주장이다.

 정관사 das에서 부정관사 ein으로 바뀌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인민'이 '독일 민족'으로 바뀐 것이다. 당시 독일 지식인들은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의 한 민족 즉 'ein Volk'는 세계화라는 대세에 부응해 몇 년 후 유럽연합의 유러피언european으로 변신한다.

 유독 우리나라만 여전히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한민족'이다. 남북 분단 때문이다. 그래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는 거다. 한 민족이 헤어져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산가족의 당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헤어진 가족을 만났다고 울며불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제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산가족 찾기'라며 전쟁 때 헤어졌던 가족들이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 온 나라가 감격했던 적이 있다. 우리 집안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전쟁 때 사라졌던 아버지의 가까운 친척이 나타난 거다. 감격한 아버지는 내게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을 소개하며 삼촌, 형, 동생이라 부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후 한동안 우리 가족은 너무 괴로웠다. 그 삼촌이라는 이가 도박 중독, 알코올 중독이었다. 매번 아버지를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부리고 협박했다. 그가 객사한 후에야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물론 드문 예일 수 있다. 그러나 헤어졌던 가족이 다시 만난다고 바로 '그리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와 같은 옛날 이야기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또 다른 방식의 '지지고 볶는 삶이 시작될 뿐이다. 독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통일 후, 다시 만난 가족이 지속적으로 왕래하며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민족 통일의 기쁨은 아주 추상적이고, 체감하는 현실은 지극히 구체적이다. 독일의 민족 개념이 변증법적 해체의 과정을 걷는 것처럼 민족이라는 낡은 이념도 발전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더 이상 새로운 시대가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는 거다. 이 낡은 '민족' 개념의 해체를 위해서다.

 저출산 문제는 '아기를 많이 낳자'고 홍보하고, 출산 지원금을 손에 쥐어 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적극적인 이민 정책으로만 해결 가능한 문제다. 그러나 한민족의 민족주의가 해체되지 않는 한, 적극적 이민정책이 자리 잡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래저래 통일이 안 되면 대한민국은 참 어려워지게 되어 있다.

 

p166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내면을 연구하는 대신 '자극input'과 '반응output'이라는 눈에 보이고 통제할 수 있는 요인만을 심리학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왓슨J.Watson이나 스키너B.F.Skinner의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통제할 수도 없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요인을 건드리면 어떤 행동이 나오는가만 알면 된다.

 행동주의는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의 그 유명한 '침 흘리는 개'를 획기적으로 변형시킨 이론이다. 먹이를 줄 때마다 종소리를 듣게 하면, 나중에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린다는 그 파블로프의 개는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다. 그저 묶여서 먹이를 받아먹고, 종소리를 들을 따름이다. 침도 가끔 흘리고.

 반면 '스키너 상자'에 갇힌 쥐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벽의 지렛대를 눌러야만 먹이를 얻어먹을 수 있다. 먹이를 먹으려면 반드시 주인이 원하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 이렇게 보상과 처벌이라는 '강화reinforcement'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유기체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미국식 이데올로기가 확립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스키너의 이 같은 행동주의를 '조작적 조건화Operant Conditioning' 라고 하여,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화Classical Conditioning'와는 확실하게 구별한다.

 스키너의 행동주의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암묵적 토대가 된다. 즉, 성과에 따른 보상과 처벌을 다양한 방식으로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듣보잡' 미국식 경영학이 오늘날 대학의 최고 인기 분야가 된 것도 바로 이 스키너식 행동주의를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경영학의 중요 영역인 인사관리 시스템이란 그 근본을 들여다보면 스키너의 행동주의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행동주의 심리학이 미국에서 꽃피운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증명할 수 없는 가설들로 인간 심리를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원하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확실한 방법론을 찾아내려 했을 따름이다. 인간 행동을 수치화하고, 실험실 조작을 통해 행동을 관찰하고 예측할 수 있는 계량화된 방법론이다.

 

p169

 모든 성과를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하는 미국식 심리학의 전성시대는 오늘날 '피로사회Mudigkeitgesellschaft'라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모순으로 이어진다.

 

p190

 실제로 언어철학에는 객관적 현상이 먼저 존재하고 언어(혹은 개념)는 이 객관적 현상을 '표상representation'할 뿐이라는 실재론적 입장과, 각 언어나 개념에 대응하는 독립적인 실제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던 이론이 양극단에서 대립한다.

 

 특히 소쉬르에서 롤랑 바르트로 이어지는 후기구조주의 언어철학은 '언어 없는 실재는 없다'라는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언어와 대상의 관계는 그 어떠한 내재적 필연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 철저하게 사회 · 문좌적인 약속일 뿐이라는 전제로부터 소쉬르의 '기호학semiology'은 출발한다.

 

p192

 대신 한국인들은 '구강기 고착'의 성격인 듯하다. 입이 거칠다는 말이다. 목소리도 크고, 담배도 많이 피운다. 욕도 정말 다양하게 잘한다.

 실제로 한국 욕의 종류를 정리해보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본이나 독일의 욕은 몇 개 안 된다. 미국 사람들도 가만 보면 나름 한다는 욕이 매번 'shit', 'fuck you'가 전부다. 한국처럼 다양하고 화려한 욕설은 세계사의 유례가 없다.

 한국인들에게는 왜 이런 구강기 고착의 퇴행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지난 세월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세월이 거의 없었다. 한 번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 오죽하면 풀뿌리,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살았을까? 당연히 아기들은 엄마의 젖을 충분히 먹을 수 없었다. 입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경험이 박탈된 것이다. 빈곤에 의한 구강기 고착 현상은 지형이 거칠고 풍료롭지 못한 지역의 욕이 훨씬 더 다양하고 화려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요즘 북한 사람들의 욕을 생각해보라.

 

p195

 내 이야기가 가능하려면 사용 가능한 데이터가 풍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자유롭게 연결할 때 얻어지는 메타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부다. 내가 축적한 데이터를 꼭 써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는 없다. 데이터를 축적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 데이터들에 관한 메타언어를 익히게 되면 데이터베이스의 일차적 목적은 달성된 거다. 이를 나는 '커닝 페이퍼 효과'라고 부른다.

 커닝 페이퍼를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그 내용을 다 숙지하게 된다. 정작 커닝 페이퍼를 사용할 필요는 없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다.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며 나름의 개념 체계를 만들다 보면, 어느새 전혀 다른 차원의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p196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엄숙한 독서법'을 신앙처럼 교육받아온 이들이 느꼈을, 모독당한 듯한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내 질문이 없고 내 생각이 없으니,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말 재미있는 책은 다 읽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읽게 된다. 그러나 억지로 책을 다 읽다 보면 내 생각은 중간에 다 날아가 버린다. 읽어야 할 자료도 산처럼 쌓여 있다. 어찌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수 있겠는가.

 

 

 

 목차와 찾아보기는 주체적 독서를 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주체적 책 읽기'란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목적이 분명함을 뜻한다. 주체적 책 읽기는 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책을 들춰 목차를 볼 때, 내 눈길을 끄는 내념들이 있다면 그 책을 선택하게 된다. 책 내용을 대충 훑어볼 때, 흥미로운 개념이 나타나면 그 부분을 잠시 읽게 된다. 그리고 저자이력이나 찾아보기, 참고문헌 목록을 보며 책의 구입 여부를 결정한다.

 내게 흥미로운 내용은 내게 이미 익숙한 개념과 책에 나타난 개념의 교차 비교 과정에서 확인된다. 독서는 내가 가진 개념과 저자의 개념이 편집되는 에디톨로지 과정이다. 그래야만 저자의 생각이 내 생각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절대 아니다.

 

 

 아주 조심스러운 조언으로 책을 끝내려 한다. 정말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다. 자신의 생각을 풍요롭게 편집하려면 무엇보다도 언어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오십 넘어 새롭게 일본어를 배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작 영어 자료 하나 소화하는 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하기 때문이다.

 내가 성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이만큼이라도 성취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영어와 함께 독일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읽는 자료의 내용이 남들과 달랐다. 축적된 데이터가 다른 까닭에 생산되는 지식의 내용도 달랐다.

 일본어 자료를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지식 편집의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이 커졌다. 같은 개념이라도 한국어, 일본어, 독일어, 영어의 설명이 다르다. 전문 개념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그렇다. 편집에 사용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려면 영어 이외에 꼭 한 가지 언어를 더 배워야 한다. 두 개 이상의 외국어와 데이터베이스 관리 습관을 갖추면, 뭘 하든 그리 두려울 게 없다. 아, 물론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p202

 뭔가 새로운 것을 손에 쥐려면, 지금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 꽉 쥔 채 새로운 것까지 손에 쥐려니, 맘이 항상 그렇게 불안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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