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물리학의 초창기 역사에서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벌인 논쟁은 현대 물리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장면이었다.

 코펜하겐 해석이란 미시세계에서의 양자의 거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주로 이 해석에 담긴 양자적 거동에 대해, 물리학과에서는 양자역학 첫시간에 영의 이중 슬릿 실험을 통해서 이 내용을 배우게 된다(영의 이중슬릿 실험은 일반물리 시간에도 파동의 회절, 입자의 파동성 등의 성질에 대한 부분에서도 배우게 된다).

 코펜하겐 해석에서 우리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가장 이상하고 어려운 내용 중의 하나는, 하나의 전자가 두개의 슬릿 구멍 중 어디를 통과할지는 전자의 마음이라는 것이다(양자역학 이전의 뉴톤의 고전역학적 입장은 전자의 초기상태가 주어지면 우리는 그 전자가 두개의 슬릿 구멍 중 어디로 통과할지를 안다는 것이다).

 전자의 마음대로라는 용어는 물론 약간은 과장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전자가 생명이 가진 마음이 있다고 의인화한 면에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진짜 전자란 살아있는 우리 생명과도 같은 것인지?),  슬릿 구멍 중 어디를 통과할지는 "전자의 마음대로"라는 것은 양자역학적 현상을 우리의 일상의 언어로 치환했을 때 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며 보어와 그의 제자 하이젠베르크가 새로이 구축한 양자역학의 체계를 인정하지 않았다(아이러니 한 것은 광전효과에 대한 설명으로 노벨상을 수상했고, 이를 통해 양자역학이라는 분야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장본인이 바로 아인슈타인이라는 사실이다. 내로남불까지는 아닐지언정 어떤 면에서는 자기부정이라고나 할까).

그로부터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 물리학 뿐 아니라 생물, 화학, 지리, 천문, 인지학, 심리학, 진화학 등 다양한 과학 분야의 발전과 기여를 통해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깊어져 갔다. 이에 따라 근대의 위대한 지성- 로크, 데카르트, 뉴턴과 같은 합리적 기계론에 따른 - 에 의해 구축된 결정론적 셰계관은 여기저기에서 균열을 보이며 한계를 보이고 있다.

 과학이 종교의 도그마에 억압된 암흑의 베일을 벗겨낸 것은 신의 위세를 등에 업고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고 오만을 떨던 신의 대리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에게, 무지의 지(너 자신을 알라)라는 고대 현인의 무기를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과학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가에서 출발하여, 그 무엇을 구체화하고, 구체화된 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밝혀냄으로써 세상을 작동시키는 신의 의도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과학이 밝힌 신의 의도는 바로 미래는 신을 포함하여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신은 그 자신도 한치 앞의 미래도 예측하지 못하도록 세상을 혼돈의 상태 그 자체로 설계했다는 것을, 두 개의 구멍 중 전자 한개가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는 사실로서 우리에게 밝힌 것이다.

오직 확률적으로만 무수한 전자의 다발들이 모였을 때, 그 주변 조건들(이를 전문적인 용어로는 경계조건-boundary condition-이라 한다.)에 의해 대충의 경향(tendency)정도는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시의 세계에서는 한치 앞도 알수 없게 설계되어 있는 기저(base)의 집합체인 거시세계는 어느 정도의 경향성이라는 예측 가능한 성질을 통해 미천한 우리 인간들이 그럭저럭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뒷문 정도를 마련해 두신 것이리라.

이 세상은 한치앞도 알 수 없는 혼돈의 앙상블로 이루어졌으며, 신은 주사위 놀이를 자연의 본성으로 정해놓았지만, 우리가 수 많은 주사위를 던지면 6개의 눈 중 어느 하나가 나올 경향성은 1/6로 수렴되는 것을 아는 것처럼 대충의 방향성이라는 것을 지혜의 눈으로 어림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놓으셨다.

그러기에 인간은 항상 겸손하며, 우리의 무지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오늘도 우리가 원하는 숫자가 나오기를 기원하며 열심히 주사위를 굴리는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