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 에세이집 2번째.  1권인 슈팅 메시지가 분데스리가 시절의 선수생활 시절의 에피소드 위주였다면, 이번 2권인 그라운드 산책은 귀국 후와 귀국 후 프로팀 감독과 대표팀 감독 시절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글은 투박하지만, 오랜 축구 생활의 경험과 그 비하인드를 통해 좀 더 축구라는 세계를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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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9.

 스위스에는 생 모리츠와 함께 세계적인 고급 휴양지로 꼽히는 제어마트(Zermatt)라는 스키 휴양지가 있다.

 1년 내내 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이고 마테 호른을 볼 수 있어서 일본이나 미국으로부터 몰려오는 관광객도 꽤 많은 곳인데 겨울이면 스키 손님으로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이다.

 저녁이면 기차역 구내며 골목 등에 벗어서 팽개쳐 놓은 듯한 스키와 부츠 등으로 어지러운데 아무도 집어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아무래도 미심쩍어서 그곳 경찰관에게 괜찮으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부터는 우리 식구들도 어느 한 귀퉁이에다가 스키를 벗어놓고 그 다음날 찾아 신을 만큼 곧 익숙해졌는데, 의심하지 않고 서로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었고 바로 그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게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관계를 단순하게 만들어 준다. 그것은 물질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말, 생각, 그리고 행동에 이르기까지 내가 상대방을 믿을 수 있을 때 편안한 관계가 유지되고 스트레스도 훨씬 덜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려면 서로가 좀더 믿을 수 있어야 한다.

 

 

 p72. 콜 독일 수상에 관한 추억

 

 1990년 봄.

 동서독이 아직 완전한 통일은 되지 않고 화해의 분위기가 한창 뜨거울 때 드레스덴 시에서는 유적지 보수 기금 마련 자선 축구 대회가 있었다.

 나는 그 때 세계 선발로 그 대회에 참가했었는데 드레스덴의 운동장은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성하고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본부석의 자리 역시 널빤지였는데 초대 손님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놓으면 그것이 곧 지정석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 바로 앞에는 'Dr. Kohl'이라고 이름표가 붙어 있었는데 경기가 시작하기 조금 전에 남녀 수행원 한 명씩과 함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 널빤지에 안증ㄴ 사람은 바로 거인처럼 몸집이 큰 독일 수상 콜이었다.

 그 후 몇 차례 가까이에서 뵐 기회가 있었지만 그 때는 처음이라서 사실 흥분이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널빤지에 앉은 수상이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우리 식으로 생각한다면 본부석 전체도 고칠 판이지만 다만 널빤지 몇 줄을 걷어내고 안락한 의자 몇 개쯤 갖도 놓는 게 뭐 그리 어려웠을까. 하프타임이 되었을 때 동독의 축구 팬들은 콜 수상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서 몰려왔고 그것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짓말 같은 모습이었다.

 윗저고리에서 읷훅하게 사인펜을 꺼내서 옆에 앉은 드레스덴 시장과 함께 담소를 하면서 사인을 해주던 모습이 아줌마 수행원이 조심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응원을 하던 모습과 함께 지금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러운 일로 가끔씩 떠오르곤 한다

 언젠가 수상 관저에 초대받은 꼬마 중 하나가 '콜 아저씨'라고 부르는 바람에 그 다음날 신문과 독자들을 상당히 즐겁게 해주었는데 아마도 앞에서 얘기한 콜 수상의 그런 분위기가 그 꼬마에게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느껴지게 한 모양이었다.

 그 뿐 아니다. 지금은 치매로 독일 국민들을 가슴아프게 하는 전 수상 슈미트 씨의 경우에는 의전 상의 시효가 지나 부인이 1등석을 탈 수 없게 되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남편과 떨어져 비좁은 자리에 앉아 여행하는 당당함.

 바로 그런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는커녕 지금도 수십 명씩을 끌고 골프장에 행사하는 우리네 힘깨나 쓰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하고 근사해 보이는 것은 내가 외국 생활을 오래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p73. 축구 열기에 부는 이혼 바람

 

 독일 대사관의 야닉시 부부와 식사를 하는데 로타 마테우스가 두 번째 부인과 또다시 헤어졌다는 얘기를 했다.

 남의 얘기니까 서로 부담 없이 낄낄거리며 화제에 올리기는 하지만 사실 급작스럽게 불어닥친 독일 스타플레이어들의 이혼 바람은 우리들 세대에서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

 1990년 월드컵 우승 멤버 중 베켄바워 감독을 위시해서 로타 마테우스, 뮐러, 리트바르스키 같은 꽤 많은 인기 선수들이 이혼을 했다고 한다. '1990년 월드컵 챔피언 팀은 이혼도 챔피언이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가끔씩 독일을 방문하는 나에게도 발생한다. 운동장에서 마주치면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게 보통인데도 이제는 "부인과 얘들은 잘 있느냐?"는 인사를 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1980년대 내가 선수 생활을 하던 때와 비교하면 분데스리가 선수들의 평균 급여가 3배쯤 늘었다.

 거기다 90년 월드컵 우승을 전후해서 이탈리아로 팀을 옮겨간 국가 대표급 선수들은 천문학적인 숫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수입을 올렸다. 물론 내가 선수 생활을 할 때에도 휠첸바인이나 그라보브스키 같은 노장 선수들은 우리 젊은 선수들이 자신들의 시대에 비해 너무 많이 받는다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최근 5년 동안 불어닥친 연봉의 급등 현상은 가족 관계에까지 이상 현상을 나타낼 만큼 변화가 심했다.

 우리는 돈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생활의 여유가 가정을 파괴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우리 젊은 선수들, 앞으로 우리 축구 시장도 분명히 더 좋아지리라고 생각할 때 이런 선례를 알고 자신을 추스르는 것도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p84. 삼풍 참사와 코리아 컵 교훈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만약에 어느 건설업자가 다리공사를 1억 원에 입찰 받았다고 하자. 좀더 튼튼한 다리를 놓고 싶은 욕심(?)에 한푼 흘리지 않고 받은 돈을 고스란히 다리 건설에만 사용했다고 할 때 오늘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 과연 그 양심적인 업자에게 다시 또 다리를 건설할 기회가 돌아갈까 하는 것이었다.

 다리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원칙이, 양심이 무시되고 오히려 배척 당하다가 막상 다리가 무너지고 말자 왜 원칙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따진다. 삼풍백화점도 마찬가지다. 자재난에 허덕이던 시점에서 만약에 누군가가 온전한 골재를 사용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버티고 나섰다면 그 융통성 없는 잘난(?) 기술자는 분명히 무시당하거나 멀찌감치 떨려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백화점이 무너지고 나자 손가락처럼 가는 철근을 억지로 지탱하던 흙 콘크리트를 부서뜨리면서 사람들은 그들이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분노하고 나무라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꼭 지켜야만 하는 이 원칙은 사고가 난 후에 책임을 물을 때만 필요한 것인지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말하자면 우리의 현실은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기준이 원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융통성을 사랑하고 원칙을 배척하는 우리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 비도덕적이고 무원칙해도 고쳐져야 할 부분들이 잘한 일로 평가되는 우리 사회. 이제부터라도 우리들이 가장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도덕과 원칙이 이 사회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최고급 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한국'이라는 세계인의 비웃음 속에서 우리의 세계화는 정말 요원할 것이다.

==> 2019년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의 기조가 결과 지향에서 과정 지향으로 변해간다는 징조들이 사회 곳곳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 과정 지향만을 통해 원리와 원칙에 함몰되는 것도 효율이라는 측면에서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리스크가 있다고 생각한다. 70년대부터 2000년대 까지 30여년 간 초압축 성장의 과정 상에서 결과가 옳으면 모든 것이 옳다는 목적 지향의 사회기조는 눈부신 경제발전이라는 큰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큰 성과의 뒤안길에서는 소수의 승자를 위해 고통받는 다수의 대중의 알려지지 않은 희생이 있었다. 1998년 IMF와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를 통해 발생한 경제하락의 과정에서는 그간 희생해왔던 다수의 희생이 강요되며, 혜택받던 소수는 이 희생을 피해나가게 되었다. 대중은 경제위기가 표면화되면서, 이러한 비대칭의 경제혜택의 부조리를 목도하게 되었다. 이는 소수의 혜택받은 이들의 모럴 해저드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이는 그간 경시되었던 과정의 윤리와 도덕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결과보다는 과정의 투명성에 대중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난 촛불혁명과, 올해 조국 사태로 촉발된 우리 사회의 교육,경제에 대한 양극화에 국민 전체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과정의 투명성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대한 대중의 분노가 그 모티브였다. 또한 조국 개인과 그 가족에 대한 검찰의 과도한 월권은 과도한 국가 권력을 민주주의의 원칙에 맞게 제한해야 한다는 국민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p97. 비자금 파문, 공짜 밝히지 말자

 

 처음 서독에 갔을 때 나는 프로 선수들의 쩨쩨함에 놀란 적이 있다. 원정 경기를 멀리 가게 되면 보통 새벽 두세 시경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수고비를 거둬주는 돈이 1인당 3~5마르크(1500~2500원)였던 것이다.

 이 액수는 그곳에서 콜라 한잔 값에 해당되는데 이것도 이긴 날이나 거두지 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나는 몇 푼 안돼 보이는 그 돈 역시 결코 작은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누구를 막론하고 월급 외에는 단 한푼도 만져볼 수 없는 그곳 사회에서 비록 작은 돈이지만 스물 댓 명이 거두는 그 돈은 그나마 프로 선수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만져볼 수 있는 꽤 짭짤한 액수였다.

 여기에 비한다면 우리는 그 액수나 범위가 너무 크고 넓다. 어디를 가도 봉투는 가장 보편적인 인사 방법이다. 지금 노태우 전대통령의 4천억, 5천억 비자금 때문에 기를 박박쓰는 사람들도 촌지의 액수가 작으면 쩨쩨하다. 많으면 역시 통이 크고 멋있다고 상대방을 평가해 본적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월급이나 수입과 비례해서 봉투를 의심하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치자금, 정치자금, 비자금, 품위유지비... 이런 돈이 이 땅에서는 꼭 필요하다는 걸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처럼 철저하게 원칙과 도덕을 따지는 사람도 소위 품위 유지비라고 할 수 있는 비자금이 꼭 필요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 나 역시 따로 주머니를 차고 있다. 물론 자금의 출처가 정확한 것이기는 하지만 집안의 생활과 내가 써야하는 돈의 비율이 비등해지는 현실에서 매번 마누라에게 달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향에 찾아가 동네사람들이 모여 공을 차는데 한번 들러도 맨손(?)으로는 곤란하고 그 액수 역시 만만치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문화이고 관습이다. 나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비자금으로 야기된 사태를 지켜보면서 좀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인심과 환심을 사야 하는 정치인들로서는 비자금의 필요성과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받는 쪽이 먼저 변해야 이 잘못된 문화는 없어질 수 있고 그 위에 도덕정치가 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p111. 악습 교정과 선수 기 살리기

 

 지난 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전에서 한국 최고의 골게터인 최용수가 퇴장을 당하는 바람에 온 국민들이 바짝 긴장했던 적이 있다.

 일반 팬들의 입장에서는 워낙 중요한 선수가 빠지게 되니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고 축구를 잘 아는 전문가나 열성팬들의 경우는 중요한 고비에서 팀을 어렵게 만드니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날 밤도 방송을 하러 MBC에 갔더니 스포츠 보도국의 정국장님이 큼지막하게 써놓고 퇴근한 대본에는 도저히 방송으로 내보낼 수 없는 흥분한 문구로 꽉 차 있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최용수를 만나면 너무 순진하고 귀여워서 도무지 과격한 행동이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다. 본인의 변명으로는 투지가 넘치다보니 그게 잘 안된다고 하는데 나는 최용수를 볼 때면 또 생각나는 선수가 있다.

 현대 송주석 선수인데 그는 스피드와 기량으로 볼 때 한국 무대에서는 최고의 제목인데도 불구하고 기량만큼 크지 못하는 선수였다.

 내가 그만 두고 고재욱 감독이 팀을 맡으면서 주석이의 플레이가 좋아지기는 했는데 마침내 지난 시즌 끝날 무렵에 상대 팀의 라커룸으로 쳐들어가서까지 한바탕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주석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여러 명의 상대 선수가 다리가 부러지고 부상을 당해서 나는 아주 강경하게 나와 함께 일하는 동안 주석이는 어딘지 모르게 위축돼 있는 것 같았다.

=> 이런 애매한 문장을 보면 스포츠 신문에 연재할 때 편집자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이런 문맥일 것 같다. 

 주석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그의 거친 플레이로 여러 명의 상대 선수가 다리가 부러지는 등의 부상을 자주 당했다. 나는 이런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강경하게 그를 꾸짖었다. 그때문인지 나와 함께 일하는 동안 주석이는 심적으로 위축돼 있던 것 같다.

 내가 주석이의 이런 부분 때문에 고민을 하자 아내는 "만희 씨(현 전북코치) 보고 욕을 빼고 말을 하라고 하니까 당신 앞에서는 말이 잘 안되고 더듬거리잖아요. 똑같은 거지요 뭐!" 하면서 참견을 했는데 그 옆에 있던 최만희 코치의 부인이 "고것이 정답이네요" 하면서 즉각 거들고 나서는 것이었다.

 몸에 익힌 습관. 이것은 나이가 들어서 고치기는 힘든 모양이다. 바로 이렇게 힘든 남들의 습관을 꼭 모범 답안으로 고쳐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습관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고약하기는 똑깥을 것이다.

 

p113. 고교 감독은 로비스트(?)

 

 KBS-TV에서 우리 나라 운동선수들의 문제점들을 취재 보도한 적이 있다. 이날 얘기들은 진학에 얽힌 비리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비교적 완곡한 수준에서 취급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느 학생의 증언처럼 "부모님들이 나를 대학 보내는 데까지 그랜저 수십 대 값이 들었다"고 하는 식의 자극적인 증언도 있었지만 왜곡돼 있는 현실과 비교해 본다면 대체적으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 중 가장 힘든 건 고등학교 감독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도자라기 보다는 차라리 로비스트라고 해야 옳을 만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어떻게 해서든 대학 감독들과 끈을 맺어서 한 명이라도 더 대학에 보내는 게 중요한 임무가 돼버렸다.

 가장 많이 배워야 하는 연령의 아이들을 지도해야 할 감도들의 임무를 생각한다면 한국 축구로서는 이만저만 손실이 아니다. 그러나 대학 진학이 지상 목표가 돼버린 현실에서 부모들 역시도 당연히 이 작업에 적극 동참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보면 진학 과정이 비리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 졌다고 봐야할 것이다.

 지금 고등학교 지도자들의 봉급 수준은 몇몇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형편없는 평균이하의 수준이다. 1백만 원이 채 안되는 감독들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이들에게 자가용에 핸드폰은 기본일 뿐더러 거의 매일 이어지는 사람 만나기(접대) 비용 역시 이들의 수준을 이미 벗어난 지 오래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학부모들의 몫이고 어찌 보면 아이를 대학으로 보내기 위한 지원금인지도 모른다. 물론 더러는 이런 현실을 이용해 아주 악질의 지도자가 없지는 않지만 바로 이런 행위를 힘들고 괴로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안쓰러운 감독들도 적지 않다.

 내 밑에서 공을 차자 지도자로 나선 선수들도 꽤 있는데 바로 이런 짓(?)이 적성에 맞아 신바람내는 경우도 있는 하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지도자의 부인은 "우리 아기 아빠는 고스톱을 못하고 술을 못해서 걱정"이라며 걱정 아닌 걱정을 늘어놓기도 한다.

 언젠가 운동하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한다는 부담감으로 자살을 했던 아버지도 있었다. 외국에서 볼을 차다가 귀국한 선수들의 부모는 한 달에 수십만 원씩 들어가는 비용에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아마도 우리 나라처럼 많은 돈이 들어간다면 축구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는 축구를 시킬 수 있는 부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한푼의 돈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무엇부터 얘기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지금 우리 나라의 어느 부문에 손을 대도 썩은 고름이 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 검찰의 탄식. 그러나 그들에게 벌을 주기 이전에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도덕불감증'을 강요당하며 괴로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깨끗한 사회로의 변화가 더 급하고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p122.

 여름, 겨울 휴가를 마친 뒤 한 차례씩은 반드시 열흘 정도의 합숙을 아주 조용한 곳으로 떠났었다. 이 기간은 그야말로 먹고 훈련하고 곯아떨어지는, 더 이상의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내야하는 힘든 기간이지만 이 훈련을 마치고 나면 다시 경기를 할 수 있는 몸이 만들어지는 게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했었다. 일단 몸이 만들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가벼운 반복 훈련만으로도 기능이 유지되는데 그게 바로 매일 운동을 조금씩이라도 하는 사람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런 훈련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체력이 불충분하면 근육 사이 이외에 또 하나의 체내 에어지 공급처인 뇌와 간에 축적된 에너지를 우리 몸이 사용하게 되기 때문에 뇌는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지시할 수 없고 간은 구토를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서 기술이나 전술훈련은 아무 의미가 없고 잦은 패스미스 역시도 정신 집중 이외에 바로 이런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p134. 문화 따라 코치 역할도 다르다.

 

 이랜드의 이영무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의 코치직을 사퇴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비쇼베츠에게도 비교적 호감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이영무 감독과도 각별한 사이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가 돌아가는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별로 편하지 않았다.

 더구나 문제의 근원이 어느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동서양의 문화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서 더욱 그랬다. 우리 나라에서는 감독이 자신의 의견보다는 모든 사람과 의견을 나누고 주위의 의견을 잘 받아들일 때 겸손한 감독,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서양에서의 감독은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갈 때 훌륭한 지도력을 가진 감독으로 꼽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는 코치의 비중이 높고 그 역할 또한 유럽에 비해 중요한 편이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코치는 단순한 어시스턴트에 불과할 뿐 어떠한 권한이나 영향력도 갖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서 이영무 감독과 비쇼베츠의 문제가 시작되었다.

 감독은 바깥 정치(?)를 주로 하고 코치는 가르치는 일을 해왔던 지금까지의 역할에 익숙한 이영무 감독으로서는 감독이 휘슬을 직접 물고 지도하는 비쇼베츠 감독의 단순한 보조자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혼자서도 능히 올림픽 대표 팀을 끌고 갈 수 있는 이영무 감독의 능력 역시 유럽식 코치의 단순한 임무를 맡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비쇼베츠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역할 분담이다. 감독의 개성과 지도력, 그리고 자신만의 축구가 없이는 능력 있는 감독으로 평가받을 수 없는 유럽에서 모든 스태프는 감독을 돕기 위해서 존재할 뿐인데 그들의 의견을 꼭 들어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우리들의 감독 역할이 유럽 사람들 눈에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책임감 없는, 무능한 지도자로 보일 뿐이다.

  "잘모르겠는데요."

 "한번 의논해 보지요."

 바로 이런 말들이 겸손으로 받아들여지는 동양과 무능으로 취급되는 서양의 차이가 이영무 감독의 올림픽 코치직 사퇴를 낳게 한 것이다.

 

 p138. 스포츠 세계화 - 폭력 추방부터

 

 우리는 지금 세계화를 부르짖고 있다.

 그 의미가 세계적인 수준과 실력을 겨룰 수 있는 각 분야의 질적 향상도 되겠지만 그 보다는 세계인과 섞여 사는데 무리가 없는 한국이 되는 게 더 먼저인성 싶다.

 예의범절, 도덕성, 정직성 그리고 순화된 인성도 세계인이 되는데는 큰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얼마 전 TV로 보도되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호소를 접하면서 일반적인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국민이 저토록 잔인한가?'하는 괴로운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다.

 보고 듣기가 민망할 정도의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우리 나라 국민들이 비교적 성격이 급하고 폭력과 가깝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특히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남북한이 번갈아 가며 보여 온 폭력과 비신사적인 행위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사건들을 별 무게 없이 취급하는 언론 역시도 이 부분에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편인 것 같다.

 83년 본선 진출권을 얻은 북한이 FIFA로부터 징계를 받음으로써 한국의 세계 4강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기회를 제공해준 당시 북한 팀의 경기장 난동 장면을 나는 독일에서 신문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대형 사진을 통해 보았었다. 그러나 귀국 후 보니 우리들 주변에서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그라운드의 폭력이 별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

 지난 겨울 일화의 이종화 선수가 월드컵 대표 팀의 전지 훈련에 합류했다가 연습 경기 중 비신사적인 행위를 했다고 해서 FIFA로부터 징계를 받고 국내 리그에도 참여하지 못한 적이 있다. 이것 역시도 우리들의 자체 징계가 아니고 FIFA의 징계였던 것이다.

 스포츠가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갖는 것은 그 바탕이 '페어 플레이'로 정치에서 기대할 수 없는 친선과 교육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세계 무대에 태극기를 달고 나간 우리 선수들 중 어떤 이유에서라도 비신사적인 행위나 폭력을 사용했을 때는 귀국 후 아주 엄한 징계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제 무대에서의 그런 모습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깍아 내리고 세계화와는 정반대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p146. 윤정환, 고정수와의 전쟁이 시작되다.

 

 윤정환, 고정수.

 지금도 이들 둘만 생각하면 어려운 숙제를 끌어안은 듯 답답함을 느낀다. 앞으로 반 년여 동안 이들 두 녀석을 길들이고 '차범근화'하기 위해 해야 할 기력 소모를 생각하면 올 겨울에는 보약 한 재 정도는 넉넉히 먹어 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이들 둘은 게으르고 꾀가 많은, 사이좋은 선후배 관계다. 그러나 고종수는 좀 나은 편이다. 야단도 맘껏 칠 수 있고 여차하면 볼기짝도 패줄 수 있는, 소위 성격상 다루기가 쉬운 유형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정환은 많이 다르다.

 말 수도 별로 없는 데다가 붙임성이 좋은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 서로 간의 마음을 열 수 있는 통로가 썩 원활하지 못한 케이스다.

 선수들 중에는 여러 가지 부류가 있다. 우선 늘 열심이면서 자기 일을 틀림없이 해내는 완전한 프로는 성격의 색깔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런 선수들인데 대표팀 선수들이 대부분 여기에 속하고 나 역시 이런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만들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러나 수 십 명의 선수 중 모두가 다 그럴 수는 없다. 고종수나 김병치처럼 꼭 튀는 선수가 있다. 그나마 이들은 맘껏 야단치고 요리할 수 있어서 목이 아프고 힘은 들지언정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힘들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선수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이 늘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는 부류다. 직장이고 어디고 반드시 있을 것이다. 힘든 훈련과 치열한 경쟁으로 주전, 비주전을 가리는 대표팀의 예민한 분위기 속에서 바로 이런 선수들은 감독을 엄청나게 피곤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팀 분위기를 망쳐 놓는다. 더구나 고참 급에 속하는 노장 선수가 그렇다면 그것은 대책 없이 피곤해지는 것이다. 이제 윤정환, 고종수와의 전쟁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다. 지금 이들의 상태로는 내가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한국보다 더 높은 기량을 가진 팀들과의 경기 뿐인데 11로 전원이 자기 몫을 해줘도 기량 면에서 부족한 게 우리들의 현실인데, 자신의 몫을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준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둘은 변신에 성공하면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면 수비가 우선적으로 안정되야 공격력이 살아난다는 축구관을 가진 나로서는 과감하게 도태시킬 수밖에 없다. 이들은 우선 세계적인 팀들의 미드필더들이 얼마나 많이 뛰는지를 TV나 경기 비디오 테이프로 계속 보아야 한다.

 그들의 기량이 자신들보다 훨씬 높음에도 불구, 더 나은 자신이 역할을 위해 얼마나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악착을 부리는 지를 진심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충분히 인식되고 공감할 수 있으면 그 다음은 훈련장에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인내와 노력으로 이것이 성공한다면 이건 틀림없이 한국 축구와 팬들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인내하고 참는 것이라면 항상 자신이 있다. 그래서 이미 그들에게 도전장을 던져 놓았다. 성공 여부는 그들의 몫이다.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p151. 오버래핑을 차단하다.

 

 내가 선수 생활을 하던 때였다.

 81독일 선수권 대회의 결승전이 있던 날이었다. 전통적으로 맨투맨 수비를 쓰는 독일에서 최전방 공격수와 전담 마크맨의 1대1 싸움은 경기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만큼 중요한 전술 부분이다. 이때 상대방의 간판 수비수인 브리겔은 올림픽 10종 경기 국가 대표 출신답게 모든 면에서 뛰어난 선수였는데 거기다 그는 남아도는 힘과 스피드로 공격에 가담해 스스로 득점을 하는 아주 위협적인 존재였다.

 경기 전 부흐만 감독은 나에게 특별 지시를 내렸다. 90분 내내 절대 한 자리에만 머무르지 말아라. 공을 차지 않아도 좋으니 국가 대표 수비수인 브리겔을 몰고 전후좌우로 다니면서 브리겔의 공격력을 무력화시키라는 것이었다. 나는 쉬지 않고 움직였고 브리겔은 씩씩거리며 따라다녔다.

 결국 이 틈바구니에서 공격수 출신 풀 백인 노이어베르거가 선취 득점을 했고 우리는 2대 0으로 리드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반 종반 쯤 원래 움직이는 사람보다 따라다니는 게 더 힘든 법이이서 지쳐 있는 브리겔을 따돌리고 내가 점프 헤딩 슛으로 3대 0을 만드는 것까지 성공했다.

 이날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치고 달리며 공을 다루는 시간이 적은 내 경기에서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대만족이었다. 물론 브리겔의 체력 저하로 내가 득점까지 얻어내자 작전의 성공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서 더욱 통쾌했겠지만 바로 이런 경우 운동장 밖에서 별볼일 없는 선수가 감독에게는 아주 중요한 무기가 되어 주는 것이다.

 내가 대표팀을 맡고 노르웨이와 첫 경기를 치르던 날, 독일의 친구들은 노르웨이 풀 백의 오버래핑과 득점은 가공할만하다면서 거푸거푸 주의를 주었다. 덴마크 프로팀 소속으로 독일에 와서 유럽 선수권 대회를 치르는데 슈팅 그 자체가 대표 같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석주에게 단단히 일렀다. 물론 당시 상황으로는 먹지 않는 게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공격에 가담하지 않아도 좋으니 상대방이 오버래핑하지 못하도록 미리 차단하고 절대로 슈팅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 석주는 완벽하게 해냈다. 다만 TV에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뿐이었다. 바로 이런 경우 감독에게는 성공하고 선수에게는 실패처럼 보이는 경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도쿄에서 한일전이 끝나고 나는 고정운에게 많은 칭찬을 해줬다. "너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한 경기였지만 전술적으로는 대단히 만족스럽다. 결과적으로 너는 온르 나에게는 성공한 선수다." 이날 정운이에게는 줄기차게 많이 뛰어서 공격 가담을 늘리는 상대방을 철저히 무디게 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더구나 그곳은 적지였기 때문에 상대방의 기를 살려 놓는다는 것은 기름을 부어 주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보았듯이 같은 팀이지만 정운이가 대퇴부 근육 이상으로 도쿄서만큼 움직여 주지 못하고 서정원이가 반대쪽 공격을 저지해주지 못하자 실점을 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을 통해 공격수들의 수비 능력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팬들은 치고 들어가서 슈팅을 하고 문전에서 움직이는 그런 모습을 기억해 낸다.

 그러나 감독은 바로 저 순간 도와주지 않고 그냥 있는 선수들의 수비 나태가 더욱 불만스러운 것이다. 상대가 강팀일 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전의 우리 선생님 한분은 그런 선수를 가리켜 "팬들을 기만하는 선수"라고 혹독하게 야단친 것을 본적이 있다.

 팬들을 기만하는 선수는 팀 전력에 실질적인 보탬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팬들은 그를 기억하는 게 감독을 고민케 하는 또 하나의 짐이다.

 

p169.

 선수의 부상은 정신력이 흐트러지거나 최고의 컨디션이 아닐 때 자주 나타난다. 나 자신이 아픈 선수나 컨디션이 안 좋은 선수보다는 기량이 좀 떨어지더라도 완전한 몸을 가진 선수를 내보내려고 하는 이유 중 하나도 부상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우즈베키스탄 전을 마치고 본선 진출이 확정되자 "가능한 이번 경기는 그 동안 뛰지 못했던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던 것인데 그것은 "한 번쯤 뛰고 싶다"는 정신력이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것보다 우위일 것이라는 판단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쉽지가 않았다. 지난 한 주 내내 훈련 결과가 좋지 않았던 최용수였다. 그러나 홈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그동안 가장 공을 많이 세운 용수에게 주중 훈련이 부실했다고 스타팅에서 제외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목숨을 걸고 이겨야 하는 경우였으면 나 역시 좀 더 냉정했을 것이다.

 지금도 경기에 졌기 때문에 용수의 출장이 아쉬운 게 아니라 바로 그런 훈련 상태서 부상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내보 낸 나의 냉정치 못한 결정이 용수의 코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으로 이어지자 바로 그것이 아쉬운 것이다. 고정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허리가 아프고 시합 전날도 근육이 한번 뜨끔했다는 얘기를 팀 닥터로부터 전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일텐데 본인이 괜찮다며 기어이 출전하고 싶어하는 것을 보자 "우즈베키스탄 전에서 모처럼 골을 넣었으니 그 뒤풀이도 하고 싶을텐데 한 번 들어가서 소원 풀어봐라"하는 냉정치 못한 판단으로 출장을 허락했다. 근육 이상은 날씨가 추우면 더욱 위험률이 높아진다. 결국 한번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고 근육 부상만 악화되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

 

p180. 너무나 길고 힘들었던 3년 간

 89년 독일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지도자 교육 과정을 공부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네덜란드의 리누스 미셸 선생님에게 "지도자도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직업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지도자 과정을 공부하면서도 한국적 지도자 모습에는 스스로 자신이 없던 터라 귀국 후 꼭 팀을 맡아야겠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 선생님은 수 십년 간의 경험에서 오는 확신으로 단호히 얘기해 주셨다. "열심히 일하는 감독만이 성공할 수 있다. 감독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는 선수들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덧붙여 "선수 기용은 절대로 소신대로 정당하게 해야 하며 이것이 무너지면 결국 자살골을 넣게 되고 만다"면서 "특히 너처럼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은 책임도 그만큼 크기 때문에 팀을 맡을 때는 주변 정리를 완벽하게 하고 반드시 소신껏 일할 분위기가 되었을 때만 팀을 맡으라"는 충고도 거급거듭 해주셨다.

 그리고 1년 후.

 내가 현대팀을 맡아 바닥에 있는 팀을 준우승시키면서 감독 취임 첫 해부터 스포츠 서울과 일간 스포츠에서 주는 '올해의 감독' 상을 받을 때만 해도 정말 나는 지금처럼 재미있게 일했다. 큰돈을 들여서 선수들을 사들이는 데는 별 흥미가 없는 나는 어린 선수들이 쑥쑥 크는 재미로 힘든 줄 몰랐고, 당시 단장이셨던 윤국진 현 울산시 축구협회장님은 나의 명예를 걸고 하는 그 일에 신뢰와 지지를 아낌없이 보내주었던 정말 신명나는 한 해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 '왕회장'님께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시면서 윤국진 단장님이 선거관리 본부책임자로 불려나가시자 나는 한쪽 날개가 완전히 떨어져나가 버린 꼴이 되었고, 그 후 3년은 그야말로 매순간 그만두고 싶었던 너무나도 힘든 그런 시간의 연속이었다.

 내가 처음 현대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당시 고려대학교 동문회 회장이신 정세영 회장님은 "우리 동문중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인 차범근과 이명박을 현대가 갖게 돼서 너무 영광이다"면서 단장님에게 "잘 도와서 감독으로서도 훌륭히 키워줘야 한다"며 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보통의 감독 대우 이상으로 예우를 해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장님이 선거 때문에 떠나자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올라 갈 때마다 공항으로 내보내주던 회사 차도 "택시 타라고 그래"하면서 끊어버렸고 합숙 중 술담배를 하지 않는 우리 코칭스태프들이 디저트로 먹는 호텔의 2천원짜리 아이스크림마저 "왜 300원짜리를 사다주지 비싼 걸 먹게 하느냐"며 구단 직원들을 윽박지르는 간접 인신 공격과 자존심을 뭉개는 비하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며 당시의 3년은 너무나 길고 힘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것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나의 결정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표팀 감독을 맡을 때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이상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너무나 열심히 신명나게 일만했다.

 그래서 더욱 행복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서 UAE 감독관이 거푸 배정되자 사실 별 것이 아닌데도 "말도 안된다"면서 바꿔달라고 신경질을 부렸다. 협회는 부랴부랴 FIFA에 편지를 보내서 해결해주었다. 왠지 마음이 편했다.

 경기가 끝나자 오완건 부회장님, 김원동 부장, 가삼현 부장에게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바로 이런 축구협회의 분위기가 우리 선수들과 나에게는 안심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돼주었다.

p212.

 '샤덴 프로이데'라는 심리학 용어가 말해주듯이 인간은 남의 불행을 보면 본능적으로 쾌감을 느끼게 되어 있다.

 

p241.

 얼마 전 아들 녀석이 학교에서 선배들과 모여 앉아 잡담을 하면서 "다시 태어나면 무엇을 할까"를 서로 얘기했던 모양인데 녀석은 "다시 태어나도 축구 선수를 하겠다"고 했더니 모두들 "돌았다"고 하더란다.

 말하자면 이미 이 연령(고등학생)이 되면 축구를 정말 하고 싶다는 즐거움이 없어져 버린다는 얘긴데 얼마 전 조사된 초등학교 축구 선수들의 경우도 비슷하다는 결론이 나온 모양이다. 초등학교 축구 선수들이 축구를 하기 싫은 첫 번째 이유는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처럼 구타가 무서워서였다고 한다.

 두 번째가 훈련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세 번째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였다고 한다. 

 

p254. 운동장도 없는 축구 교실

 

 언젠가도 소외된 자들의 대변인으로서 바른 사회 만들기에 앞장서는 일을 대표적으로 나서서 하던 사람이 불법으로 집을 짓고 마당을 넓히는 등 정작은 옳지 않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게 문제가 돼 시장이 된지 며칠만에 그만 둔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참담한 기분이었는데 어린이 심장재단에 관여했던 L씨(부연 설명 : 뽀빠이 이상용 씨를 말함. 이 사건은 누명으로 밝혀져서 이상용씨는 법적으로 무죄를 입증했다. 자세한 것은 검색해보면 많이 나온다.)의 경우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을 뿐 아니라 15~16년 전만 해도 그나 나나 꼬마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때라 "나중에 너랑 나랑 대통령 선거에 나가서 누가 더 인기가 있는지 알아보자"는 농담을 자주 했을 만큼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믿어왔기 때문에 허탈감이 더했다.

 그러는 중에도 "단체를 운영하려면 비자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 분의 인터뷰 내용은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올 만큼 공감이 가는 부분이기도 했다.

 축구교실 운영을 좀더 체계 있게 하기 위해서 7년쯤 저 사단법인 허가를 신청했을 때의 일이다. 법인 신청을 하기 위해 우리 사무실에서 열심히 준비해서 갖다 준 서류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퇴짜를 맞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독일에서 귀국한 직후였고 운영 자체가 내 개인의 광고 모델료나 방송 출연료 같은 것으로 되고 있었기에 내가 그들에게 상을 받았으면 받았지 사정(?)을 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거의 1년여를 '차범근이 직접 오라'면서 끌던 것을 우연히 파티에서 만난 당시 박철언 체육부장관이 '팬'이라면서 반가워하는 바람에 체육부에서 퇴짜를 맞고 있는 서류 이야기를 하고 난 후 일이 일사천리로 끝났던 적이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아이들이 연습할 운동장을 빌려쓰는 데서부터 어느 한 곳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는 것이 우리 나라의 현실이다.

 얼청난 정부 예산으로 유명 선수 축구교실을 지원하는 경우에도 지도자들의 보수를 지불해서 더 어려운 곳을 개설해 달라는 요청은 무시하고 지난 해에는 현실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 물품으로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면서 운동자도 없는 축구교실에다 기가 막히게도 골대를 지원하겠다고 품목을 적어보냈다.

 우리 축구교실에서는 연구 끝에 그 골대를 운동장에 있는 곳에 보내주고 우리는 그 운동장을 빌려 써야겠다고 아이디어를 짜보았지만 1년이 넘는 지금까지 수 차례 독촉에도 골대는 나타나지 않고 올해는 그나마도 1천여 명이 넘는 우리 축구교실에는 그 엄청난 예산 중 공 100개만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차범근 감독이 글을 좀 더 조리있게 쓰셨다면 해결될 일이 많았을 지도 모르겠다. 좀 억울한 사연에는 할말은 많은데 마음이 앞서는지 글을 이렇듯 맥락 파악하기가 어렵게 쓰시는 경우가 있다.)

 또 몇 달 전 집사람에게 사정사정해서 얻어낸 돈 몇 천만 원으로 여의도에 만들어 놓은 미니 축구장도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몇 달째 사용허가가 나지 않고 있다.

 바로 이럴 때 원칙만 따지는 사람은 열만 받거나 포기해 버리는 것이고 능력 있는 사람은 비자금을 동원, 매끄럽고 쉽게 처리하는 것이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를 못 믿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는 산소 같은 누군가가 존재하기를 바라고 그런 이들을 사랑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도 더욱 밝고 투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바로 이런 대상이 주는 실망. 이것은 세상을 냉소주의에 빠뜨리게 하는 가장 큰 독성을 지닌 혐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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