川上未映子

가와카미 미에코(사진은 아마도 30대 정도의 모습일 듯. 꽤나 미인이다. 1976년생, 일본의 가수, 배우, 작가, 가수로 활동을 시작, 노래로는 지명도가 거의 없었지만 2008년 발표한 단편소설 젖과 알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이 알려진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인터뷰한 대담집.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의 출간과 함께한 인터뷰와, 기사단장 죽이기의 출간과 함께한 인터뷰 로 이루어져 있다.

 

하루키의 작법이랄까? 그런 것에 대한 하루키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마지막에 인터뷰 후에 소감으로서 에필로그로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이 직접 써놓은 글을 봐서도 알 수 있지만, 하루키에게 상당한 깊이에 이르기까지 충실한 대답을 하도록 유도한 인터뷰어로서의 가와카미 에미코 작가의 능력도 대단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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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 캐비닛의 존재(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 나오는 이야기로 하루키는 자기의 머릿속에는 캐비닛과 같이 소설을 쓸 때 꺼내 쓰는 저장소 같은게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책에서도 언급한 캐비닛 이야기가 이미지로도 멋집니다. 무라카미 씨 안에는 많은 캐비닛이 있다고요.

 무라카미 : 그렇죠. 제 안에는 커다란 캐비닛이 있고 서랍이 잔뜩 달려 있어요.

-그와 관련해 인용한 조이스의 '상상력이란 기억이다'라는 말도 흥미롭습니다. 의식한 것과 의식하지 않은 것 모두 한 덩어리씩 차곡차곡 캐비닛에 들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글을 쓰는 사람이건 쓰지 않는 사람이건 알고 보면 모두 캐비닛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죠.

 무라카미 : 다들 가지고 있죠, 제법 많이.

-누구나가 각자의 캐비닛을 가지고 있고, 그 안을 채워간다. 중요한 건 그것들이 필요할 때 어디 들었는지 즉각 알아내고 입체적으로 조립하는 일이다... 그건 결국 캐비닛 주인의 역량에 달렸을까요?

 무라카미 : 그렇죠. 소설을 쓰면서 필요한 때 필요한 기억의 서랍이 알아서 탁 열려줘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서랍이 아무리 많아도... 소설을 쓰다 말고 일일이 열어보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아, 저기 있다, 하고 그때 그때 서랍들이 자동으로 속속 열려주지 않으면 실제로는 쓸모가 없어요.

-자동으로 열린다고 하셨는데, 그건 훈련이나 노력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 부분일까요?

 무라카미 : 그렇다기보다 쓰는 중에 점점 요령을 터득해가는 거죠. 전업작가로 살다보면 항상 그런 것을 자연히 의식하고, 어디에 뭐가 들었는지 감으로 알게 됩니다. 이게 중요해요, 경험을 쌓고, 여러 기억을 효과적으로, 거의 자동으로 즉각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하죠.

-뒤집어 말하면, 조립하고 입체화하는 요령이 패턴화될 위험성은 없을까요?

 무라카미 : 어디 있는지 대강 알게 되는 것과 함께, 생각지 못한 순간 생각지 못한 서랍이 탁 열리는 것도 중요해요. 그런 의외성이 없으면 좋은 소설이 되지 못하죠. 소설 쓰기란 이른바 '액시던트'의 연속이니까요. 소설 속에서는 많은 일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서는 이런 에피소드를 써두자 하는 식으로 가다보면 당연히 이야기가 패턴화되겠죠.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오는 것에 대응해서 재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이야기가 생명을 잃어버려요.

-자질이 잇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자기 내부에서 필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캐비닛 앞에 서서도 아무 느낌이 없는 사람이라면 소설 쓰기는 좀...

 무라카미 : 특별한 조각 하나를 던져넣는 것만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크고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할 때도 있죠. 때에 맞춰 그런 조각을 찾아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그것만은 특별한 기술이랄까, 타고나는 자질일지도 모르겠어요.

 

-무라카미 씨 작품의 특징 중 하나가 정교한 비유라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가요?

 무라카미 : 그렇죠. 예전에 한 평론가가 하루키는 아마 노트에다 온갖 비유를 써서 모아뒀을 거라고 했는데, 그렇진 않아요(웃음).

-저절로 튀어나오나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이.

 무라카미 : 나와요, 필요할 때, 제 발로 찾아오듯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 때는 비유를 쓰지 않아요. 억지로 만들려면 말에서 힘이 빠져버리니까.

-비유 역시 말의 조립이고, 서로 다른 것들끼리의 거리니까요. 곡예와도 같죠. 놀라움을 불러오지 않으면 비유가 되지 않고, 딱 들어맞아야 하고.

 무라카미 : 네. 뭐니뭐니해도 거리감이 중요하죠. 너무 붙어도 안되고 너무 떨어져도 안 되고. 그렇게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려워져요. 비논리적인 게 제일이죠.

-하나하나의 표현을 끄집어내기도 어려운데, 저절로 나온다는 건... 그런 조합도 캐비닛에 들어 있다는 거죠?

 무라마키 : 들어 있을 겁니다. 전 비교적 간단하게 비논리적이 되거든요.

비유에 관한 건 대개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배웠어요. 챈들러는 그야말로 비유의 천재니까요. 가끔 아니다 싶을 때도 있지만, 좋은 건 말도 안 되게 좋죠.

-챈들러에게 배운 게 비유의 구조라는 말씀인가요?

 무라카미 : 비유란 의미성을 부각하기 위한 낙차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낙차의 폭을 혼자 어느 정도 감각적으로 설정하고 나면, 여기에 이게 있으니 여기서부터 낙차를 역산하면 대략 이쯤이다하는 걸 눈대중으로 알 수 있어요. 역산하는 게 요령입니다. 여기서 쿵하고 적절한 낙차를 두면 독자는 눈이 확 뜨이겠지, 하는 식으로요. 독자를 졸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슬슬 깨워야겠다 싶을 때 적당한 비유를 가져오는 거죠. 문장에는 그런 서프라이즈가 필요해요.

 

... 아까 나온 비유 얘기처람, 가장 적당한 것이 자연스레 나와주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죠. 그러니 여러 가지를 불러들여야 해요. 글쓰기는 뭐가 됐든 그것을 이쪽으로 불러들이는 일이니까요. 무녀 같은 사람처럼, 집중하다보면 여러 가지가 제 몸에 와서 찰싹 달라붙습니다. 자석이 철가루를 모으듯이, 그 자력=집중력을 얼마나 지속하느냐가 관건이죠.

(이 얘기에서 떠오르는 장면은 1Q84에서 아오마메가 교주를 암살하러 신주쿠(아사쿠사?인가)의 호텔로 가서 교주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던 내용이 떠오른다. 이 부분에서 약간 주술적인 요소도 보인다고 할까? 그리고 이와 연관해서 하루키가 이런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유지하는 것이 달리기와 같은 운동을 통해서 이겠군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p33.

 무라카미 : 리얼리티는 특징적인 게 아니라 종합적인 겁니다. 그리고 속속 변해가죠. '이건 이러하다'라고 단순하게 고정해서 단언할 수 없어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서문-이라고 기억되는데-에 보면 하루키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빵가게의 리얼리티는 밀가루 반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빵에 있다." 이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p41.

 무라카미 : 네, 자아 레벨, 지상 의식 레벨에서는 대개 보이스의 호응이 얕아요. 하지만 일단 지하로 내려갔다가 다시 나오면 언뜻 똑같아 보여도 배음의 깊이가 다르죠. 한번 무의식층에 내려갔다 올라온 재료는 전과는 다른 것이 됩니다. 담갔다 건지지 않고 처음 상태 그대로 문장을 만들면 울림이 얕아요. 그러니 제가 이야기, 이야기, 하는 건 요컨대 재료를 담갔다가 건지는 작업입니다. 깊이 담글수록 나중에 밖으로 나오는 것이 달라지죠.

 

p47.문장의 리듬, 고쳐 쓰기

-무라카미 씨의 단편에는 기술적인 부분, 길이나 줄거리 같은 것 말고도 읽고 난 후 짙게 남는 것이 있고, 많은 작가가 그것을 재현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낍니다. 개인적으로 <코끼리의 소멸>이라는 단편을 읽었을 때 '나도 이런 걸 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막연하게 말하는 '이런 것'(웃음)은 역시 무라카미 씨 문장의 리듬에서 오는 것 같아요. 뭐라고 이름 붙이거나 설명할 수 없고, '이런 것'이라고 감각적으로만 느끼는 무엇.

 무라카미 : 말하자면 소설의 보이스와 독자의 보이스가 호응하는거죠. 그러면 물론 리듬이 생기고, 울림이 생기고, 호응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보이스를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그건 결국 '고쳐 쓰기'에요. 처음에 일단 완성해놓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치고, 갈고닦고, 이대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손대는 과정에서 점점 나 자신의 리듬, 잘 울리는 보이스를 찾아가죠. 눈보다는 주로 귀를 사용하여 고칩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고쳐 쓰기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씀하셨는데요.

 무라카미 : 저의 고쳐 쓰기는, 제 입으로 말하기 뭣하지만, 꽤 대단하다고 봐요. 전 별로 자랑하는 편은 아닌데 이것만은 자랑해도 좋을 것 같군요.

-일단은 어찌됐건 끝까지 쓰는 편이죠? 돌아보지 않고, 어제 쓴 부분 정도는 다시 보지만 일단은 계속 써나간다. 거기가 어땠더라 하면서 거슬러 돌아가는 일도 별로 없고요.

 무라카미 : 나중에 고치면 되니까, 초고를 쓸 때는 다소 거칠더라도 어쨌건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것만 생각합니다. 시간의 흐름에 순조롭게 올라타서 계속 전진하는 거죠. 눈앞에 나타난 것을 가장자리부터 붙들고 써나가요. 물론 그러기만 해서는 이야기 여기저기 모순이 생기지만 신경쓰지 않습니다. 나중에 조정하면 되니까. 중요한 건 자발성. 자발성만은 기술로 보충할 수 없어요.

-완성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엄청난 작업인데요.

 무라카미 : 네, 엄청난 작업이죠. 그래서 저는 장편소설을 전작으로만 씁니다. 잡지 연재는 절대 불가능해요. 혹시 한다면 이미 다 쓴 완성 원고를 나눠서 싣는 거죠. 그러다보니 다 쓸 때까지 몇 년씩 걸리기도 하고, 고독한 작업이니 말 그대로 기진맥진해요. 일단 잡지에 실어놓고 나중에 고치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그게 안 돼요. 한번 활자화되어 다른 이의 눈에 닿았던 글은 더이상 순수하게 자신만의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작업하기가 불가능해져요. 그러니 어쨌거나 마음에 들 때까지 시간을 들여 고쳐 쓰고, 그다음에 비로소 활자화합니다. <양을 쫓는 모험> 이후로 오랫동안 그렇게 해와서 다른 식으로는 쓸 수 없어요.

 

... 아무튼 어릴 때부터 음악을 열심히 들었고 재즈카페를 칠 년쯤 운영했으니, 악기 연주는 못해도 리듬이나 보이스, 즉흥연주 감각은 제법 몸속 깊숙이 배어 있습니다. 그러니 음악을 연주하는 감각으로 문장을 쓰는 면이 확실히 있는 것 같아요. 귀로 확인해가며 문장을 쓴다고 할까요. 그리고 '벽 뚫고 나가기'와는 좀 다르지만, 정말 훌륭한 연주는 어느 대목에선가 홀연히 저편으로 '뚫고 나가'곤 하죠. 재즈의 긴 애드리브든 클래식이든 어느 시점에서 일종의 천국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번쩍하는 순간이 있어요.

 그렇게 훌쩍 '저편으로 가버리는' 감각 없이는 진정으로 감동적인 음악이 되지 못해요. 소설도 완전히 똑같습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감각'이고 '체감'이지 논리적으로 계측할 수는 없죠. 음악의 경우도, 소설의 경우도.

 

p57. 

 무라카미 : 데뷔 당시 문단에서 제일 싫었던 게 일종의 테마주의 였어요. 이런 주제를 다뤘으니 이건 순문학이다, 깊이가 있다, 그런 말이 제일 싫었죠. 그래서 소재나 주제를 전부 걷어내고, 그럼에도 깊이 있고 무게 있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저뿐 아니라 다들 점점 그쪽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옮겨가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그래서 그 대신 뭐가 나왔느냐하면 아직 명확하지 않죠.

 

p60.

 무라카미 : 열차가 멈추고, 한숨 돌리고, 머리를 식히고, 그뒤에 다시 원고를 읽어보면 '아, 여기가 틀렸군' '이쪽이 모자라군' 하는 부분이 차츰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열차가 완전히 멈추기 전에 편집자에게 원고를 내주면 안되요.

-재워둬야 하는군요. 멈추기 전에 넘기면 안 되고요?

 무라카미 : 안 되죠(웃음). 머리가 뜨거운 상태에서는 나쁜 부분이 안 보여요. 좋은 부분만 보이지.

-뭐든지 제정신이 돌아온 뒤에.

 무라카미 : 그런데 현실적인 마감일이 있다면 어렵겠죠.

-제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으니까요. 작가 입장에서는 말씀하신 방식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리고 그런 환경은 어느 정도 스스로 만드는 것일 테고요.

 무라카미 : 그렇죠. 레이먼드 카버를 만났을 때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특히 그의 집필방식에 역시 그렇구나 하고 공감했습니다. 그 사람도 무척 면밀하게 고쳐 쓰는 편이니까요.

 

p64.

 무라카미 :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고베 지진이 일어나고,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원전 문제가 생겼죠. 전 그런 시련을 통해 일본이 좀더 세련된 국가로 나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명백하게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그게 제가 위기감을 느낀 이유이고,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 후반에 우리가 싸웠던 건 결국 그 바탕에 이상주의가 있었기 때문이죠. 세상은 기본적으로 더 좋은 곳이 되어갈 것이고 그러기 위해 싸워야 한다. 대부분 그렇게 믿었어요. 뭐, 어찌 보면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지만 아무튼 그런 이상주의가 있었고 그것이 기능했죠. 그러다 그것이 통째로 무너져버리자 강한 환멸을 느꼈고. 하지만 이제는 거기서 한 바퀴 돌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최근에 들더군요. 언제까지고 똑같은 일만 할 수는 없고, 어떤 새로운 움직임에 들어서야 한다고.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니지만, 원칙적으로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에서 담담하게, 성실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p92.

 사람은 싸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죠. 안 그러면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뿐이니까요.

 

p102.

-가와이 하야오 씨는 <그림자의 현상학>에서 그 예를 들며 집합적 무의식이라고 표현하셨죠. 나치 독일의 소행은 집단에 발생한 그런 그림자를 외부에 떠넘긴 결과라고 하셨던 게 생각납니다.

 무라카미 : 2차대전 이후 일본도 그랬는데, 많은 독일인은 전쟁이 끝난 뒤 자신들을 피해자 입장에 놓으려고 했어요. 우리도 히틀러에게 속았고, 마음의 그림자를 빼앗겼고, 그 탓에 혹독하게 고생했다는 막연한 피해자 의식만 남죠. 일본에서도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일본인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의식이 강해서 자신들이 가해자라는 인식은 자꾸 뒷전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세부적인 사실이 이렇다저렇다 하는 문제로 도피하죠. 그런 것도 '나쁜 이야기'가 낳은 일조의 , 뭐랄까. 후유증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들도 속은 거라는 말로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면이 있죠. 천황도 나쁘지 않다. 국민도 나쁘지 않다. 나쁜 건 군부다. 하는 식으로. 그게 집합적 무의식의 무서운 면입니다.

 

p106.

 무라카미 : 링컨이 말했듯이, 아주 많은 사람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도 있고 얼마 안 되는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속이기는 불가능해요. 그것이 이야기의 기본 원칙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히틀러도 결국은 십 년 남짓밖에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죠. 아사히라는 십 년도 가지 못했고. 대부분의 경우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를 준별하는 것은 시간의 역할입니다. 긴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준별 가능한 것도 있고요.

-하긴 개별적으로, 별로 오래가지 않을 듯한 '악'은 언제나 있으니까요. 사라지지는 않고 언제나 존재하는.

 무라카미 : 네, 인간은 기본적으로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런 것을 원하니까요. 좋은 일은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데 시간이 걸리거니와 귀찮고 따분한 경우가 많아요. 반면 '나쁜 이야기'는 대체로 단순하고 인간 심리의 표층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죠. 논리가 생략되었으니 이야기가 쉽게 받아들여져요. 거친 말을 쓴 헤이트스피치가 논리적이고 훌륭한 연설보다 귀에 잘 들어오는 법이고.

 

 얼마 전 집에 잇는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을 여러 연주자 버전으로 비교하며 들어봤어요. 총 열다섯 장 정도를요. 그랬더니 글렌 굴드의 연주가 다른 연주자들과 압도적으로 다르더군요. 그야말로 독보적인 경지랄까요. 어딘가 다른지 한참 생각하다가 겨우 깨달은 게, 보통 피아니스트는 오른손과 왼손의 콤비네이션을 생각하며 연주하잖아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다들 그럴 거에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글렌 굴드는 달라요. 오른손과 왼손이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겁니다. 오른손 왼손이 각자 자기 뜻에 따라 움직여요. 그런데 그 둘이 하나가 되면 누가 봐도 훌륭한 음악세계가 확립되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왼손은 왼손이 할 일만, 오른손은 오른속이 할 일만 생각한단 말이죠. 다른 피아니스트는 반드시, 직그히 자연스럽게 오른손과 왼손을 조화시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런 의식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굴드의 연주들을 비교해봐도 1955년 버전이 그 오른손과 왼손의 분리감이 훨씬 강하고요.

-그렇군요. 1981년 버전에서는 별로 느껴지지 않나요?

 무라카미 : 물론 죽기 전에 한 연주도 분리감이 엄청나지만, 예전 것은 각기 완전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도 합해보면 정확히 프로그래밍되어 있어요. 굴드가 프로그램하는 게 아니라 자연히 프로그래밍된 느낌이죠. 자연체라고 할까, 천연이라고 할까. 그 사람의 그런 분리감은 저도 감각적으로 잘 압니다.

 

p117.

 무라카미 : 음 있죠, 다시 한번 확인해두자면 제 문장은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비리얼리즘이죠. 그런 분리가 처음부터 떡하니 전제되어 있어요. 리얼리즘 문제를 철저하게 구사하며 비리얼리즘 이야기를 펼치는 게 제 목적이니까요. 전부터 자주 한 얘기인데, <노르웨이의 숲>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리얼리즘 문체로 리얼리즘 이야기를 쓰는 실험을 개인적으로 했어요. 그리고 '음, 됐다, 이제 쓸 수 있어'라는 확신이 들면서 그뒤의 작업들이 무척 수월해졌죠. 리얼리즘 문체로 리얼리즘 장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면, 게다가 베스트셀러가 됐다면 무서울 게 없어요(웃음). 그뒤에는 원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제 뭐든 마음대로 쓸 수 있겠다 생각하고 얼마 후 <태엽 감는 새>를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정도의 정밀함을 지닌 리얼리즘 문체 위에 이른바 '상식을 깨는' 이야기를 얹으면 무척 재미있는 효과가 생긴다는 것을 그때 새삼 깨달았죠.

 

p126.

 아까 가와카미 씨가 말한, 플랜 없이 쓰다가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사람은 분명 '바로 지금'인 그때를 잡지 못한 거겠죠. 하나 더 들자면, 아마 문체가 완성되지 않은 것 아닐까요. 문체는 매우 중요하니까. 자신의 문체 없이 지하 깊숙이 내려가기는 불가능합니다. 굉장히 위험해요. 문체는 생명줄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개인적으로는 플랜 없이 쓰기 시작해서 작가 본인도 마지막까지 무얼 썼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작품은 보통 좀 혼잣말처럼 보이거든요.

 무라카미 : 당연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직접 내뱉지 않는 것이 소설의 기본이니까요.

-그러니 설사, 말이 좀 이상하지만(웃음), 지하 2층까지 내려갔다 해도 그곳에서 본 걸 독자와 공유하려면 문체가 필효하다는 거죠?

 무라카미 : 물론입니다. 저는 이래저래 벌써 사십 년 가까이 프로로 소설을 써왔는데, 그래서 그동안 무얼 했는가 하면 문체를 만드는 것, 그게 거의 다예요. 어쨋거나 조금이라도 좋은 문장을 쓰는 것, 나의 문체를 보다 탄탄하게 만드는 것, 보통은 그것만 생각합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스토리에 맞춰 글을 써가지만, 그때는 다른 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리시브할 뿐이에요. 그러나 문체는 다른 쪽에서 와주지 않아요. 자기 손으로 준비해야죠. 그리고 날마다 진화해야 합니다.

-진화. 그러면 문체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요?

 무라카미 : 완성되는 것이 아니죠.

-변화해가는 것이다?

 무라카미 : 네. 문체는 점점 변화합니다. 작가가 살아 있으면 문체도 그에 맞춰 살아 숨쉬죠. 그러니 매일 변화를 수행할 테고요. 세포가 교체되는 것처럼. 그 변화를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게 중요해요. 그러지 않으면 자기 손에서 떠나갑니다.

-어떤 부분을 써야 할 때가 오면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요.

 무라카미 : 바로 그거죠. 문장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도구로 쓸모가 있으면 그만이죠. 그러니 완성형 같은 건 있을 수 없어요. 저도 예전에는 쓰지 못했던 것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는 거의 쓰고 싶은대로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쓰지 못하는 건 없나요?

 무라카미 : 쓰고 싶은데 못 쓰는 건 없을걸요. 우회할 필요도 별로 없고. 다만 지금 당장 역사소설을 쓰라고 한다면 그건 좀 곤란하겠죠(웃음). 준비도 많이 필요하고.

-역사 고증이라든가(웃음).

 무라카미 : 네, 전문용어도 필요하고요. 하지만 현대 배경, 말하자면 제가 써온 이야기의 세계 안에서 기술적으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 있는가라면, 아마 웬만한 건 어찌어찌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뭐, 꽤 오랫동안 글을 써왔으니까요.

 

 p128.

-이번 주인공은 그림 관련 일을 하는데요. 그 직업은 먼저 정해두셨나요? 화가 주인공은 처음이죠?

 무라카미 : 잇마년 전 미국 터프츠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수전 네이피언이라는 일본어과 교수님을 만나 그분 남편과 파티에서 대화할 기회가 있어어요. 초상화가로 일하는 미국인이었죠.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초상화가가 제법 흥미로운 직업이구나 생각했던 것이 어려풋이 머릿속에 남았어요. 그리고 이번에 주인공 직업을 뭘로 할까 하다가 초상화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쓰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야 '아 참, 그러고 보니 수전 씨 남편이 초상화가였지' 하고 생각났습니다. 제 기억이란 게 대개 그런 식이에요.

 

 p133.

 무라카미 : 캐비닛이 작은 사람, 혹은 일에 쫓겨 서랍을 채울 시간이 없는 사람은 점점 고갈되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 시기에는 열심히 서랍을 채우려고 해요.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총력전이니 쓸 만한 건 뭐든 갖다 써야 하거든요. 서랍이 하나라도 많은 편이 좋아요.

 

p144.

 무라카미 : 그 신용거래가 성립하려면 이쪽에서도 최대한 시간과 수고를 들여 정성껏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독자들은 집합적으로는 정확히 간파해요. 이건 착실하게 공들여 썼거나. 이건 꼭 그렇지도 않구나. 대충 게으름 부리면서 쓴 건 긴 시간 속에서 반드시 지워집니다. 우리는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시간을 존중하고 소중히 다뤄야 해요.

 

p156.

 무라카미 : 그렇죠, 멘시키 씨는 '원하는 것은 거의 전부 손에 넣었지만, 알고 보면 원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밖에 원하지 못한' 사람이니까.

 

p167.

 무라카미 : 전혀 의식하지 않앗어요. 그래도, 의식이란 것에 대해서는 꽤 자주 생각하는 편입니다. 인간의 의식이 등장한 건 인류 역사에서 훨씬 뒤의 일이에요. 그전에는 거의 무의식밖에 없었고, 그 무의식 중심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아니라 집합적으로 판단을 내리며 살았죠. 그리고 도시가 생기고 보다 고도의 조직과 시스템이 완성됨에 따라 '무의식'으로 행하던 일들이 점차 '의식'의 영역으로 격상됩니다. 보다 논리적이 되고요. 그렇지 않으면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유지할 수 없으니까요. 

 그것과 같은 얘기라고 봅니다. 옛날에는 대개 무의식 속에서 처리하던 일들을 의식을 기반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와 더불어 언어체계가 정비된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무엇에 기대어 살아왔느냐 하면, 바로 예언이죠. 고대사회에는 무녀, 혹은 주술사 역할을 하는 왕이 있었어요. 그들은 무의식의 사회에서 더더욱 무의식을 갈고닦아, 벼락을 맞는 피뢰침처럼 여러 메시지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의 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가진다 한들 쓸데도 없었으니 그저 예언에 따라 무의식의 세계에서 살아가면 그만이었죠. 그것이 편하기도 했고요. 더이상 메시지를 받을 수 없게 된 왕은 죽임을 당하고, 새로운 왕이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의식'화하면서 그런 무녀적인 존재는 점차 힘을 잃어가죠. 공기가 바뀌고 벼락을 잘 맞을 수 없게 됐어요. 이데아도 그와 비슷한지 모르겠군요. 정말로 순수한 것은 오로지 무의식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것을 보지 못하고, 대신 의식에 투영된 것을 보는 수밖에 없다. 방금 플라톤 이야기를 듣다보니 떠오른 생각입니다.

 

p194. 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무서울 것이 없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목적 없이 써둔 문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 1인칭 '나(와타시)'를 사용한 데는 당시 번역하던 챈들러 작품의 영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씀을 듣고 그도 그렇겠다. 무슨 분위기인지 알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위대한 개츠비>입니다.

 오늘은 우선 <위대한 개츠비>와의 관계부터 얘기할까 합니다. 지형과 집의 묘사, 멘시키라는 인물의 조형, 그리고 '나'와의 거리, 관계성... 등은 닉 캐러웨이와 제이 개츠비의 관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건 당연히 의식하셨죠?

 무라카미 : 물론, 처음부터 의식했습니다. 골짜기 너머 건너편을 바라보는 구도는 두말할 것 없이 <위대한 개츠비>에서 거의 그대로 차용한 것이고, 멘시키 씨 조형에도 제이 개츠비의 캐릭터가 얼마간 들어갔습니다. 유복하고 비밀스러운 이웃 개츠비는 매일 밤 후미 건너편의 초록 불빛을 바라봅니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장면이죠. 멘시키 씨 역시 밤마다 골짜기 건너편 집의 불빛을 바라봅니다. 홀로 고독하게. 이 부분은 말하자면 혼카도리(本歌取り : 와카和歌 작법, 현대 대중가요의 샘플링 기법과 유사)처럼, 피츠제럴드에 대한 개인적인 트리뷰트 같은 거에요. 그러니 '나'라는 1인칭 화자가 어느 정도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와 비슷한 포지션이 되리라는 점은 당연히 의식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이미지가 있었나요?

 무라카미 : 집필을 시작하고 골짜기 건너편에 사는 인물을 설정했을 때 '아, 이건 개츠비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건 아니지만요.

-나중에 깨달은 거군요.

 무라카미 : 네, 집의 위치를 만들고 골짜기를 만들고 그 건너편에 커다란 저택이 있다는 설정까지 나온 뒤 '아, 그런가. 이건 개츠비구나'라고 문득 깨달았어요.

-무라카미 씨의 문화적 캐비닛 속에는 워낙 다양한 요소가 들어 있으니 지금까지 작품을 쓰면서도 생각지 못한 것이 나오곤 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중에서도 <위대한 개츠비>였군요. 무라카미 씨에게 무척 특별한 소설인데요.

 무라카미 : 제가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한 건 예순이 되기 조금전이고,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도 비슷한 시기였는데, 더 나중이었던가?

-챈들러가 나중이었어요.

 무라카미 : 그랬죠? <위대한 개츠비>를 제 손으로 직접 한 줄 한 줄 공들여 일본어로 옮기는 작업은 그냥 읽는 일과 전혀 달랐어요. 몸속에 쌓이는 과정이 달라요. 소설의 세부가 앙금처럼 단단히 제 안에 쌓여가고, 그 침전이 구체적인 영감을 주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자극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죠. <위대한 개츠비>와 <기나긴 이별>을 번역한 건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신에게 특별한 작품을 그런 형태로 다시 한번 만나는 건 작가로서 기쁜 일이죠.

 무라카미 : 네,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은 그야말로 제 골격의 일부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을 나름대로 환골탈태할 수 있나느 건 무척 익사이팅한 일이죠. 꺼꾸로 말해, '재사용'이라는 표현은 좀 그렇지만, 작품의 구조와 장치의 이행, 전용이 가능하다는 것도 문학 명작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 같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클래식이라 부를 수 있는 거죠.

-지난 주말에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어봤는데, '데이지를 오후에 집으로 초청하고 자기도 불러줄 수 있겠느냐'는 대목이 상당히 겹치더군요.

 무라카미 : 그렇죠, 그 부분은 물론 저도 의식했습니다. 속으로 슬쩍 웃으면서 썼죠(웃음).

-좋은데요. 이전 작품에서도 본인에게 특별한 작품을,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게 등장시키곤 했죠.

 무라카미 : 몇몇 작품에서도 그런 적이 있어요. 유희이기도하고. 말하자면 트리뷰트처럼, 제 생각에, 한 사람이 인생에서 정말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혹은 감명받을 수 있는 소설은 몇 편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걸 몇 번이고 읽으며 찬찬히 곱씹죠. 소설을 쓰는 사람이건 쓰지 않는 사람이건,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소설은 평생 대여섯 권 정도 만나지 않을까요. 많아야 열 권 남짓일까. 그리고 결국 그 몇 안 되는 ㅊ책이 우리 정신의 대들보가 되어줍니다. 소설가의 경우는 그 스트럭처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바꿔 말하고 풀어 말하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소설에 편입해갑니다. 우리 소설가들이 하는 일이란 결국 그런 게 아닐까요.

 호르헤 보르헤스라고 있죠. 그가 어느 날 시를 써서 친구 앞에서 읽어줬더니 "자네, 오 년 전에도 완전히 똑같은 시를 썼어"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보르헤스는 전에 그런 시를 썼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거죠. 이에 대해 보르헤스는 말합니다. "시인이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평생 대여섯 가지밖에 없어. 우린 그걸 다른 형태로 반복할 뿐이지." 듣고 보면 정말 그렇다 싶어요. 결국 우리는 대여섯 가지 패턴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뿐일지 모른다고. 다만 몇 년 단위로 반복하는 사이 형태나 질은 점점 변해가죠. 넓이와 깊이도 달라지고요.

-그때 작가가 두려워하는 건 아마 자기모방의 가능성이겠죠. 후퇴하지는 않았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걱정. 같은 대여섯 가지의 패턴을 되풀이하면서도 발전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건 어떤 부분일까요?

 무라카미 : 문장입니다.

-문장?

 무라카미 : 네. 문장. 제게는 문장이 전부입니다. 물론 소설에는 이야기적 장치, 등장인물, 구조 등 여러 요소가 있지만 결국에는 모두 문장으로 귀결합니다. 문장이 바뀌면, 새로워지면, 혹은 진화하면 설령 똑같은 내용을 몇 번씩 되풀이해도 새로운 이야기가 됩니다. 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작가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문장만 계속 변화하면 무서울 것이 없다.

 무라카미 : 네. 전혀 무서울 게 없어요. 문장이 정체하면 그저 똑같은 돌림노래겠지만, 문장이 업데이트된다면, 피와 살을 지니고 계속 움직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무라카미 씨는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리듬이라고 하셨느네, 문장을 변화시키는 것이란 즉 리듬을 연마하는 일이기도 하겠군요.

 무라카미 : 그렇죠. 울림, 리듬, 그런 것들이 전과 달라졌다는 확신이 없다면 역시 스스로 무서워지지 않을까요. 문장이 달라지면 같은 이야기여도 나아가는 방향성이 달라집니다. 작가는 그렇게 전진하는 수밖에 없어요.

-<스푸트니크의 연인>이 나왔을 당시 <광고비평>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의식적으로 비유를 많이 사용했다고 하셨죠. 그때까지 선호하던 문체를 총결산하고 '이런 문체의 소설은 이제 그만 쓰자'는 생각으로 임했다고요.

 무라카미 : 네. 그때는 문장 스타일을 한번 완전히 바꿔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전까지의, 이른바 무라카미 씨다운 문체를 모조리 써버리는 극단까지 갔다는 말이군요. <스푸트니크의 연인> 전까지는 문장이 전진하는 과도기였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무라카미 : 네, 그렇죠. 아무튼 나다운 문장, 혹은 그전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다운 문장'이라 여겨졌던 것. 즉 비유를 많이 사용한 경쾌한 문장을 쓸 수 있는 만큼 써버리고, '이건 이제 됐다'하고 그뒤로 다른 문체가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해변의 카프카>로 갔죠. 이 <해변의 카프카>라는 소설은 그전까지의 문장으로는 쓸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른 문체를 끌어와야 했어요. 그래서 조금 색다른 문체를 쓰다보니 호시노군이나 나카타 노인 같은, 지금까지 그려본 적 없던 캐릭터가 자연히 등장한 겁니다. 그래도 그 단계까지 가려면 일단 일종의 총결산 같은 것을 해둬야 하죠.

 

p200. <노르웨이 숲>의 사라진 시나리오

-데뷔작과 그 다음 작품 때는 아직 소설을 잘 몰라서 자신의 스타일을 익히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그뒤로 <스푸트니크의 연인>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을 들여, 좀전에 무라카미 씨가 말씀하신 '나다운 문제'를 만들어갔고요. 그것을 일단 총결산하고 다음 문체로 넘어갈 때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에는 구체적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무라카미 : 물론 문체를 총결산하고 새로 만들어낸다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써보지 않은 근육을 갑자기 쓸수는 없으니까요. 그저 새로운 방향으로 문체를 전환하자는 마음가짐인 거죠. 새로운 문체가 새로운 이야기를 낳고, 새로운 이야기가 또 새로운 문체를 보강해갑니다. 그런 순환이 이뤄지면 제일 좋아요.

-작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신의 문체가 무엇인지 아는것, 자신만의 시그니처가 들어간 문체를 획득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이 좋은 문체인지 치밀하게 관찰할 필요도 있고요. 누가 봐도 무라카미 씨의 것임을 알 수 있는 문장을 쓰면서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 나아가 그것을 독자와 공유하기란 녹록지 않을 텐데요.

 무라카미 : 어쨌거나, 저는 문장을 쓰는 게 좋습니다. 늘 문장을 생각하고, 늘 어떤 문장을 쓰고 있고, 늘 여러 가지를 조금씩 시험해봐요. 문장이라는 도구가 제 손에 있는 것만으로 무척 행복하고, 그 도구의 여러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어요. 애써 손에 넣은 것이니까.

-무라카미 씨는 절대 발을 멈추지 않죠. 정체하기 않고 계속 움직이니까 가까이서도 그 변화를 알 수 있지만, 조금 물러서서 보면, 몇 년쯤 지나서 보면 유기적으로 뚜렷한 그러데이션이 드러나 있어요.

 무라카미 :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노르웨이의 숲>에서 끝까지 리얼리즘으로 소설을 쓰는 실험을 했습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그전까지의 문체를 총결산할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고요. 그뒤에 <애프터 다크>는 거의 영상 시나리오와 비슷한 방식으로 써봤죠. 그렇듯이 '조금 짧은 장편'에서는 늘 저 나름의 실험을 합니다. 이번에는 이런 걸 해보자 하고 도전하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도 제게는 다소 실험적인, 그룹을 묘사한 소설입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써본 적이 없었어요. 쓰는 입장에서는 그 정도 길이의 소설이 제일 실험하기 좋죠.

 단편이라면 어느 정도 통합성이 필요하고, 긴 장편에서도 섣불리 시도할 수 없어요. 어설프게 실험적인 요소를 넣으면 수습이 힘들어지니까. 그래도 <스푸트니크의 연인>과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또 <애프터 다크>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정도의 경장편에서는 비교적 깊이 있는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껏 감각을 해방하고 새로운 설정을 시도해볼 수 있어요. 제게는 아주 중요한 그릇이라 할 수 있죠. 그런데 그 정도 사이즈의 소설은 대개 독자 평판이 좋지 않단 말이죠.

-뭐 짚이는 게 있으세요?(웃음)

 무라카미 : 모르겠군요. 무엇 때문일까(웃음). 단편은 단편대로 어느 정도 인정받고 긴 장편도 장편으로 인정받지만, 그 사이주의 소설을 적어도 출간 당시에는 왠지 혹평이 많은 느낌이에요. 대충 썼다. 지금까지와 똑같다. 아니면 반대로 새로운 시도에 실패했다 등등.

-아무래도 단편과 장편의 중간에 속하다보니, 좀더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기대하던 독자들이 어중간하다는 느낌을 받는 걸까요.

 무라카미 : 모르겠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작품 하나하나에 애착이 있고, 외국에서는 신기할 정도로 평판이 좋은데 말이죠.

-단편소설을 읽은 뒤의 날카롭고 상쾌한 느낌과 긴 장편소설의 다이너미즘에 흠뻑 취하는 독서체험. 무라카미 씨의 독자는 그 양쪽을 다 알지만 다소 짧은 장편의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좀 망설여지는지도 모르겠네요.

 무라카미 : 독자 카드에 너무 비판적인 의견만 나와서 담당 편집자가 무척 침울해했어요. 보기 딱할 정도로(웃음). 그래도 저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아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희안하게 재평가의 목소리가 나오거든요. "사실은 좋았습니다" 커밍아웃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중이 될수록 점점 평가가 좋아져요.

-"사실은 좋았습니다"라니, 왜 눈치를 보는 걸까요(웃음). 처음부터 말하면 될 걸.

 무라카미 : 아니면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자극하는 부분이 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반발을 사는 걸까요? 그래도 그런 분량의 장편소설에서만 가능한 것이 분명히 있고, 제게도 나름의 성과가 확실히 남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아도 딱히 걱정하진 않습니다. 머릿속에는 '자, 다음으로 가자'는 생각뿐이죠.

-그래도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는 어떤 부분을 포착할 때는 미들클래스, 400자 원고지 사오백 매 내외의 작품 속에 커다란 실마리,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죠.

 무라카미 : 네, 그럴 거에요. 그 정도 분량이 소설이 고비가 되어, 다음 장편으로 그 성과가 이어지는 면이 확실히 있습니다. 저는 곧잘 함대에 비유하는데, 거대한 전함이 있고, 그다음에 순양함이 있고, 구축함이 있고, 뒤이어 더 작은 배나 잠수함이 함대를 이루죠. 제일 큰 전함이 제게는 긴 장편에 해당하는데, 대신 그만큼 움직임은 부자유스러워요. 작은 배가 단편이고, 좁은 데서도 꽤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화력이 아무래도 모자라죠. 그런 때 마침 중간 사이즈의 배가 있으면 굉장히 고마워져요.

-그런데 단편도 점점 분량이 늘어나는 추세에요. 2014년의 <여자 없는 남자들>의 수록작도 각각 팔십 매 전후잖아요. 물론 단편의 범주에 들긴 하지만 조금 긴 편이랄까요. 아주 짧은 작품은 요즘 들어 잘 없어요. 예전에는 많았는데.

 무라카미 : 그렇네요. 점점 길어지는지도 모르겠어요. 언젠가 또 짧은 것도 쓰겠죠.

-<여자 없는 남자들> 때는 어땠나요?

 무라카미 : 음, 그때는 좀 긴 걸 쓰고 싶은 시기였어요. 쓰다보니 점점 이미지가 부풀어서, 쓰고 싶은 게 많았고, 그동안 길고 촘촘하게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도 했죠. 그런 게 재미있었어요.

-<세 가지의 독일 환상>처럼 짧고 시적인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것도 있었죠. 무라카미 씨 작품 중에서도 실험적인 단편이었어요.

 무라카미 : 옛날 작품이죠. 그렇게 감각적인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잡지에서 짧은 글을 원한 이유도 있지만. 지금은 잡지 청탁을 받아서 쓰는 일이 없으니까 보통 쓰고 싶은 만큼 쓰죠. 그래서 자꾸 길어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때가 되면 또 짧은 이야기를 쓰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기사단장 죽이기>는 분량도 많지만 디테일 면에서도, 특히 1부는 매우 치밀하게 쓰였습니다. 패러프레이즈가 자유자재이고 마치 '문장으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의지까지 느껴지는 밀도에요. 하나의 대상을 아주 끈질기게 묘사하고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그 시점이 또 조금 변한 인상이었습니다.

 무라카미 : 저는 원래 풍경 묘소 같은 데 서툰 편이었어요.

-초기에요?

 무라카미 : 아주 초기에. 대화나 행동 묘사는 그럭저럭 매끄럽게 나오는데, 움직임을 억제하고 구석구석 세세하게 묘사하기로 마음먹으면 아무래도 잘 안 되더군요. 그러다가 차츰 써지니까 좋아서 자꾸 써넣은 편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웃음).

-하긴 초기에는 그런 묘사보다 미니멀한 날카로움, 아포리즘의 이미지가 강했죠. 서툴렀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세번째 작품인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근사한 풍경 묘사가 나오잖아요.

 무라카미 : 그런가요.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산속 오두막으로 가면서 드넓은 초원을 걷는 장면이라든지. 꼭 자작나무 같은 걸 눈앞에 보는 기분이었는데요. 풍경이나 정경 묘사는 언제부터 만족스럽게 쓸 수 있게 됐다고 느끼세요?

 무라카미 : 언제일까요. 아주 최근처럼 느껴지는데, 풍경 묘사는 정말 옛날부터 잘 못했어요. 심리묘사는 더 못해지만(웃음).

-그런 때는 '여기 풍경 묘사를 좀 더 넣는 편이 좋겠는데 쓰기 싫다'는 느낌인가요?

 무라카미 : 그렇죠. 소설에는 본래 밸런스라는 것이 있으니까 '쓰기 싫지만, 귀찮지만, 여기서는 써야 한다' 싶죠.

<애프터 다크>를 쓸 때 가장 뚜렷하게 느꼈는데, 처음에는 대화만 슥슥 쓰고, 사이사이 간단한 지문을 메모해뒀어요. 그리고 마지막까지 다 쓴 뒤 지문 부분을 '영차, 영차'하면서 정교한 문장을 만들어 써넣었죠. 그런 식으로 써보는 것도 제게는 좋은 공부가 됐어요.

 

p213.

 무라카미 : 그에 앞서, 리얼하게 쓰지 않으면 미스터리해지지 않습니다. 미스터리하게 쓰려 한다고 미스터리해지는게 아니니까. 최대한 리얼하게 써야지 하는데도 미스터리해진다면 결과적으로 미스터리한 인물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p227.

 무라카미 : 말이죠. 문장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규범은 제 생각에 기본적으로 두 가지뿐이에요. 하나는 고리키의 <밑바닥에서>에서 거지와 순례자의 대화. "내 말 듣고 있는거야?"하고 한 사람이 말하니까, 다른 사람이 "나 귀머거리 아니야"라고 답해요. 지금은 거지니 귀머거리니 하는 차별용어를 쓰면 안 되지만 그 시절에는 아니었어요. 전 이 책을 학창시절에 읽었는데, 보통 같으면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로 끝날 대화죠. 그런데 그러면 드라마가 안 되는 겁니다. "귀머거리 아니야"라고 대답하니까 주고받는 말 속에 역동감이 생겨요. 단순하지만 아주 중요한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하는 작가가 세상에는 많거든요. 저는 항상 그 사실을 의식합니다.

 

 또하나는 비유. 챈들러가 쓴 비유 중에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만큼 드물다"라는 게 있어요. 에전에도 몇 번 예롤 든 문장인데, 만약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은 드물다"라고만 하면 독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죠. 예사롭게 획 읽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내가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만큼 드물다"하면 '호오!' 싶잖아요. 그러고 보니 뚱뚱한 우편배달부는 본 적 없는데, 하고. 그게 살아 있는 문장입니다. 이렇게 반응이 생겨나고, 움직임이 생겨나죠. "귀머거리 아니야"와 "뚱뚱한 우편배달부". 이 두 가지가 제 글쓰기 모델입니다. 그 요령만 알면 제법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을 거예요. 아마도.

 아무튼 독자가 간단히 읽고 넘어갈 문장을 쓰면 안 된다는 거죠.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문장으로만 채울 필요는 없지만, 몇 페이지에 하나쯤은 넣어줘야 해요. 아니면 독자가 좀처럼 따라와주지 않아요.

 

...

 

 오손 웰즈의 영화 <시민 케인>에서 이탈리아에서 온 음악 선생이 가수 지망생인 케인의 부인을 가르치다 말고 이런 말을 해요. "세상에는 노래를 할 줄 아는 인간과 못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유명한 대사인데, 어쩌면 글쓰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거의 글다운 글을 쓰지 못했어요. 그때부터 노력하며 조금씩 이런저런 것들을 쓸 수 있게 돘죠. 단계적으로 발전해온 거죠.

 

p231.

-무라카미 씨는 곧잘 '처음에는 잘 쓰지 못했다'고 하시는데요. 아까 했던 노래 이야기처럼 내가 쓰고 싶은 건 이런 거다. 하는 확고한 이미지는 있었는데 본인이 보기에 멀다고 느꼈다는 뜻인가요?

 무라카미 : 한참 멀었죠. 당시 편집자에게 "제가 아직 문장력이 부족해서요" 했더니 "괜찮아요, 무라카미 씨. 다들 원고료 받아가면서 차차 좋아집니다" 하더군요. 하긴 맞는 말이었어요(웃음).

-자꾸 처음에는 나도 잘 못 썼다, 못 썼다 하시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습니다. 잘만 썼잖아 싶은데요(웃음).

 무라카미 : 잘 쓸 수 있는 것만 썼고, 그것이 그것대로 잘 기능했다고 봐요. 그래도 제가 정말로 쓰고 싶었던 것과는 조금 달랐죠. 쓰고 싶은 이야기를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쓸 수 있게 된 건 훨씬 나중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해야 하나... 저는 데뷔 무렵부터 꽤 주목받았던 모양이에요.

 

p234.

-2015년 후쿠시마에서 열린 문학 워크숍에서 무라카미 씨가 제 창작 클래스에 잠깐 참석해주셨죠. 그때 수강자들에게 딱 한 가지 지적하셨는데. 귀로 들어서 알 수 없는 말은 쓸 때도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신인상 응모작 원고를 읽다 보면 다들 비교적 어려운 말을 자각 없이 쓰는 경향이 아직 엿보이거든요. 문자로나 소리로나 아무것도 남지 않는 말을요.

 무라카미 : 네, 말의 울림은 중요합니다. 구체적이고 피짘컬한 울림. 설령 소리내지 않고 눈으로만 보더라도 울림이 잇어야 해요.

-주제나 내용은 어찌됐건 일단 문장 단위에서 리듬이 좋고 술술 읽히는 글도 생각해보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것도 일종의 궁합일 테지만요.

 무라카미 : 작가는 눈으로 울림을 들어야 합니다. 글을 쓰고, 다시 읽어보고, 소리내는 대신 눈으로 울림을 느낀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저는 항상 '음악에서 글쓰는 법을 배운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눈으로 보고, 울림을 느끼고, 그 울림이 더 아름답게 울리게끔 바로잡아가는 작업을 중요시해요. 마침표, 쉽표도 리듬이잖아요. 그런 게 무척 중요해요.

 

p236.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글쓰는 법을 가르치기도 어려워요.

 

p238.

 무라카미 : 전에도 말했듯이 소설 쓰는 일은 일종의 신용거래고, 한번 잃어버린 신용을 되찾기는 매우 어려워요. 시간을 들여 '이 사람이 쓴 거니 돈 내고 사서 읽어보자'라는 신용을 쌓아나가고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문장을 정성껏 갈고닦는 일이 중요해요. 구두를 닦거나, 셔츠 다림질을 하거나, 칼날을 가는 것처럼.

 저는 문체가 거의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일본의 이른바 '순문학'계에서는 문체는 3순위나 4순위쯤 되는 듯합니다. 대개는 테마 제일주의로, 일단 테마 운운을 주목한 뒤야에 다른 여러 가지, 이를테면 심리묘사나 인물 설정 같은 관념적인 부분을 평가하고, 문체는 한참 뒷전이죠. 그러나 그게 아니다. 문체가 마음껏 활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p245.

 무라카미 : 스트록처는,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거의 의식하지 않아요. 그럴 필요도 없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자기 안에 이미 갖춰져 있어야 하니까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유의 골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스트럭처 역시 일부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무라카미 : 그 형태가 어디서 생겨나느냐 하면, 주로 지금껏 자신이 읽어온 소설, 그리고 써온 소설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이미 자기 안에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새삼 생각할 일이 없어요. 대신 문체를 생각해야죠. 그리고 문체가 이끌어내는 이야기를.

 

..

 

 화가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똑같아요. 캔버스에는 끝이 있죠 다들 그 안에 그림을 그립니다. 테두리 바깥에는 그릴 수 없어요. 그래도 화가는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죠. 끝없이 이어지는 광대한 캔버스 없이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어떤 사이즈의 캔버스를 머릿속에 설정하면 그 안에서 세계가 완성되어갑니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쯤이 끝이겠다 싶은 부분이 대략적으로 보여요. 아니면 오천육백 매씩 쓰고도 아직 모자란다고 하겠죠. 즉 어느 정도 쓰는 사이 구조가 보이기 마련이에요. 위쪽 끝은 이쯤이고, 아래쪽 끝은 이쯤, 좌웅 양쪽은 여기까지. 그러니 구조나 골격을 두고 그렇게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어요. 자연히 결정되니까요.

-지금까지 독서를 통해 쌓아온 것들에 구조의 재료가 모여있고, 그게 자연히 나오면서 작품에 따라 확실한 형태를 잡아간다는 말이군요. 무라카미 씨가 꾸준히 번역작업을 하는 것과도 적잖이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번역이란 전체 구조뿐 아니라 문장구조 그 자체에 줄기차게 부딪히는 작업이니까요.

 

 

p323

 무라카미 : 필요 없죠. 저는 소설 쓰는 게 좋고 밖에 나가 노는 일이 잘 없어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나이트라이프라고는 전혀 없어요. 어떻게 그런 생활이 가능한가 하면, 소설을 쓰는 능력이 있어서죠. 저는 소설을 어느 정도 잘 쓸 수 있고, 저보다 잘 쓰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봐서 뭐, 그렇게 많지는 않은 셈이잖아요. 이 세상에.

-좋은 말씀이 나왔습니다. "나보다 잘 쓰는 녀석은 적다!"

 무라카미 : 자랑이 아니라,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지 않나요. 어쨌거나 글쓰기에는 프로니까요. 사십 년 가까이 일선에서 프로로 글을 써왔고, 책도 어느 정도 팔리고, 실력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글쓰기가 즐겁고요. 이 일을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하면 일하기가 즐거워요. 예를 들어 섹스도 나쁘지 않지만, 나보다 섹스를 잘하는 사람이야 아마 세상에 굉장히 많겠죠(웃음). 직접 본 일은 없지만.

-그, 그렇군요...(웃음) 그러나 소설은 다르다.

 무라카미 : 소섥은 다르다. 이런 건 아마 나밖에 하지 못할 거라고 실감합니다. '어때, 손해는 안 본댔지' 하는 거. 이 실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요(웃음).

-철학자 등이 현저히 그렇죠. 의문을 제기하는 단계도 그렇고, 어떤 명제에 대해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기존의 학설을 넘어서서 새로운 생각을 내놓았다는. 일종의 '성취감'과 '과시욕'이 없으면 지적인 작업을 할 수 없죠. 그런 것이 중요한 엔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 그렇기에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요. 아무튼 지금 좋아서 소설가를 하고 있으니 계속 해보자. 그러다가 판매량이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소설을 못 쓰게 되면 못 쓰는 대로, 곧바로 가게문 닫고 아오야마 근처에 재즈클럽을 내면되지. 그것 역시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요.

 

p343.

 무라카미 : 저는 아직 순수한 의미의 '악'을 쓴 적 없고 쓰려고 한 적도 아마 없을 테니 악이란 어떤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지금 제가 가장 큰 '악'이라고 보는 건 역시 시스템입니다.

-무라카미 씨가 생각하는 '악'의 이미지는 시스템이다.

 무라카미 : 좀더 분명히 말하면 국가나 사회나 제도 그 솔리드한 시스템이 불가피하게 양성하고 추출해가는 '악'이죠. 물론 모든 시스템이 '악'이라거나 시스템이 추출하는 것이 모조리 '악'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선한 부분도 당연히 많아요. 하지만 만물에 그림자가 있듯이 어떤 국가나 사회든 '악'이 따라다니기 마련입니다. 교육 시스템도 그렇고, 종교 시스템에도 도사리고 있죠. 그런 '악'은 실제로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합니다. 저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인간이라 그런 시스템의 '악' 같은 것에 매우 민감한 편입니다. 그 실상을 좀더 그려나가고 싶지만 그러면 아무래도 정치적 메시지가 되기 쉽죠. 그것만은 되도록 피하고 싶어요. 제가 바라는 형태의 발신이 아니니까요.

 

p351

 무라카미 : 사악한 이야기의 한 전형이, 아사하라 쇼코(참고 : 옴진리교의 교주)가 펼쳐 보인 이야기죠.

 완전히 폐쇄된 장소로 사람을 끌어들여 철저하게 세뇌하고, 나아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죽이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기능한 건 최악의 형태를 취한 사악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회로가 폐쇄된 악의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다 넓고 개방적인 이야기를 작가는 만들어나가야 한다. 무언가를 둘러싸고 쥐어짜는게 아니라 서로를 받아들이고 주고받을 수 있는 상황을 세상에 제시하고 제안해나가야 한다. 저는 <언더그라운드> 취재를 통해 그렇게 절감했습니다. 피부로 느꼈어요. 이건 해도 너무한 일이라고.

 

p356. 인터뷰를 마치고(무라카미 하루키 에필로그)

 "따분하고 재미없는 대답만 해서 미안합니다. 따분하고 재미없는 질문에는 그런 대답밖에 나오지 않는 법이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 역시 지금까지 작가생활을 해오면서 적지 않은 인터뷰를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상황을 몇 번인가 경험했다.(물론 예의바른 나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번에 가와카미 에미코 씨와 총 네 번에 걸쳐 인터뷰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든 적은, 정말이지 솔직하게,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신선하고 날카로운(때로는 묘하게 절실한) 질문이 속속 날아오는 통에 무심결에 식은땀을 흘릴 때가 잦았다. 아마 독자 여러분도 이 책을 읽으며 그런 '끊임없는 공세'를 피부로 느끼셨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원래 작가끼리의 대담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데뷔 초기에는 몇 번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그러나 인터뷰 형태로 다른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제법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질문하는 쪽이든 대답하는 쪽이든, 상대를 잘 만나면 상당히 흥미로워지기 마련이다. 인터뷰라는 포맷에서는 인터뷰어의 책임과 인터뷰이의 책임이 뚜렷이 나뉘기 때문이다. 그런 깔끔함이 마음에 든다.

 2015년 7월 잡지 <MONKEY>의 청탁으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중심으로 가와카미 씨와 롱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 이 사람과는 좀더 오래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강한 여운이 남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만난 어떤 인터뷰어와도 다른 종류의 질문을 정면에서 던져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망설임 없이 여러 각도에서 그 질문을 반복했다. 그런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는 사이 지금까지 나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와 풍경을 내 안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랬던 터라 그 연장선상에서 다시 그녀와 인터뷰를 하면 어떨까, 나아가 가능하면 한 권의 책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거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창 <기사단장 죽이기>를 쓰고 있던 시기라 일단 대답을 미뤄두고 집필을 끝냈을 때 "혹시 아직 괜찮다면 하고 싶다"는 답을 보냈다. 이 작품을 놓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면 과연 어떤 인터뷰가 될지, 나로서도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따분할 틈이 없었다, 라고 한숨을 섞어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니, 정말이지 따분해할 여유라고는 없었답니다. 헤밍웨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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