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 감독(현재는 감독, 해설가 등의 활동이 없으나 요즘 부르기 제일 무난한 호칭이라고 생각함)이 주로 독일에서 선수로 뛰던 시절에 대한 에피소드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스포츠 서울에 연재되던 칼럼을 모은 것이다. 칼럼의 연재연도는 1980년대 중후반으로 예상되는데, 실제 책은 1997년도에 출간했다.  거진 30년이 넘은 내용으로 당시의 축구계와 한국의 상황들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개인적으론 이런 책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손흥민의 에세이를 보고 나서 당연히 차범근 감독도 이런 책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찾아봤다.

차범근 감독의 축구에 대한 생각, 그리고 세상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아마 당시는 전문편집자가 없었나하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글의 내용은 괜찮은데 가끔가다 문맥이 이해가 안되게 튀는 부분이 있다.

차범근 감독이 뛰는 모습을 기억하는 세대(나도 사실 차범근 감독의 선수시절 모습은 86년 월드컵에서 뛰던 모습 정도나 기억한다.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활약을 하는 것은 신문으론 봤지만 TV에서 경기모습을 볼 수는 없었던 시절이다.)

이 책은 지금 절판에다가 중고서점에서도 구하기 힘들다.(그래서 어렵게 도서관에서 찾아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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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 나의 자랑스러운 둘째 형님

 처제들은 시골에 계시는 둘째 형님을 '일용씨'라고 부른다. 그 연속극을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처제들의 얘기인즉 [전원일기]에 나오는 '일용씨'의 모습이 둘째 형님의 모습하고 똑같다는 것이다. 형님은 지금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에서 버섯 농사를 짓고 있다. 가끔 고향집에 전화를 하면 밤 열한시가 넘었는데도 어머님과 함께 버섯을 다듬고 있다고 할 만큼 일이 많은 작업이다.

 그러나, 어머님, 형수님, 그리고 형님이 하루종일 매달려야 하는 엄청난 일의 양에 비해 일년에 떨어지는 돈이 칠백만원 정도라고 해서 나는 참 심란한 기분이 들었는데 정작 형님은 그만한 수입을 올린다는 것에 보통 자부심을 갖고 계시는 게 아니었다. 그런 천성 때문인지 형님은 한번도 도시 생활을 꿈꾸거나 계획한 적이 없는 분이다. 작은 운동구점 하나라도 동생 이름 걸고 하겠다고 할 법한데 여지껏 그런 생각은 꿈에서조다도 갖고 계시지 않은 것이다. 농사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도, 아는 것도 아무 것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형님이 지난번 만났을 때 "나는 말이여, 버섯을 하면서도 뭣을 조금씩 치면 일이 훨씬 수월한데 유명한 아우 생각을 하면 절대로 그렇게 못하겠어. 내 버섯은 정말로 아우 덕에 아무 것도 치지 않고 키우는거여"하며 느릿느릿 말씀하시는 것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고마움과 형의 인격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 얼마나 자랑스럽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형님은 자신의 인감도장조차도 마을일을 돌봐주는 '이장'에게 맡겨놓고 그 이장이 형님 몰래 오백만 원을 대출받아 썼는데도 몇 년씩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낼 만큼 순진하신 분이다. 그런 형님이 얼마 전 축구교실을 할 만한 아주 좋은 땅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도 머뭇거리는 나를 보자 내가 돈이 모자라서 그러는 줄 알고 몹시 딱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며칠 전 전화를 했더니 "범근아! 학교 뒷산에 있는 우리 밭을 팔면 한 사천만 원 된다는 데 내가 그걸 팔아서 보태주면 그 땅을 살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우리 둘째 형님 말고 또 있을 수 있을까. 더구나 요즘 같은 세상에....

 고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신 형님.

 하루종일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의 농군 형님. 그러나 형님은 동생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이 기쁠 뿐이고 나는 그런 형님이 박사보다도 장관보다도 더 자랑스러울 뿐이다.

 

p21. 

 그 해 6월에는 사기꾼이 처가에 사기를 치려고 했던 적이 있다. 어떤 남자가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내가 축구감독 김호인데 이번에 독일에 갔다 오면서 차범근이가 장모님 갖다 드리라고 주는 선물을 갖고 왔다. 그런데 세관에서 통관세 21만원을 물으라고 하니까 내 온라인 구좌로 돈을 좀 보내달라"면서 구좌번호까지 불러주더란 것이다. 평소 나나 아내는 "괜히 세관 검사대에서 떳떳하지 못하고 피곤해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어 귀국할 때 변변한 선물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흔한 양주 한 병도 안 가지고 간다. 그래서 내 손아래 동서는 "형님! 비행기 안에서 파는 양주 한 병은 예의예요."하고 항상 불평을 하는 판이다.

 그런데 10년 동안 선물이라고는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장모님 생각에 "천지개벽이 아니고선 세금까지 물어야 할 변난 것을 사서 보내겠느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장모님은 궁금하지도 않으셨는지 전화 한 통화 안한 걸 보면 평소 교육(?)의 효과가 대단했던 것 같다.

 

 p23.

 남을 위해서 참는 것, 일을 위해서 인내하는 것, 그것은 일의 종류가 어떤 것이라고 해도 매우 귀중한 것만은 틀림이 없으리라.

 

 p29.

 유럽컵과 같은 공식 유럽축구연맹 주최 경기에는 팀에서 입는 일반 유니폼을 입지 못하게 되어 있다. 같은 모양에 광고를 없앤 유니폼을 사용해야 하는데 유럽에서 열리는 3대 유럽컵 결승전은 전 유럽에 중계가 된다.

 10년 전 내가 속해 있던 프랑크푸르트 팀은 UEFA(유럽축구연맹)컵 결승전에 올랐었다.

 물론 경기장에서는 흰색 상의에 까만 팬티를 입었는데 프랑크푸르트의 마크가 왼쪽 가슴에 조그많게 달린, 규정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복장이었다.

 6만이 꽉찬 운동장에서 결승전을 벌인 끝에 '샤웁'이란 선수가 한 골을 넣어 1대 0으로 승리, 우승컵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시상 준비를 하는 짧은 시간에 우리는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옷이 적어 감기에 걸릴까봐서"라며 우리가 평소에 입던 미놀타라는 글자가 새겨진 유니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적은 옷과 갈아 입으라는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의 환호소리에 끌려 다시 나왔을 때 수백명의 카메라맨들이 우승팀을 찍으려고 우리를 향해 몰려들었다.

 중계되는 가운데 시상식도 근사하게 끝마쳤다.

 컵을 앞에 놓고 찍은 '우승 팀 사진은 각국으로 보내져 스포츠 신문과 잡지를 장식했다.

 유럽축구협회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광고주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느긋하게 유럽축구협회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요청한 벌금만 대납해주면 되는 것이다. 

 200만원.

 생각보다 적은 액수다.

 해볼 만한 일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프랑크푸르트가 이 일을 해주고 얼마나 받았을까?

 나도 모른다.

 신문에도 없다.

 다만 효과가 있기에 그런 법석을 떨었을 것이란 점만은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p37. 별난 아들 이름 '세찌'

 "야! 차붐! 넌 드디어 진짜 축구 선수가 된거야! 위대한 축구 선수는 다 얘들이 셋이거든. 펠레가 그렇고 베켄바워, 루메니게, 브라이트너, 슈스너, 그리고 나 니켈...."

 셋째를 낳았다는 신문보도가 나자 프랑크푸르트의 옛 동료 니켈이 부리나케 집으로 전화를 걸어 한 말이다.

 세찌. 이곳 독일 친구들은 저마다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을 지어 이제 겨우 두리란 이름이 익숙해질 만하니까 "또 세찌를 외워야 하게 됐다고 투덜거리는데 이름 가지고 말이 많기는 서울도 마찬가지다.

 전화를 통해 "축하합니다"하고 점잖게 운을 떼고 난 [스포츠서울]의 방석순 기자는 두리 다음에 난 아기의 이름이 세찌라고 하자 "세상에 '찌'가 들어가는 이름이 어디 있어요. 그래 그 이름 호적에 올릴 참이요?"라면서 어이없어했다.

 그렇다고 이미 지어 놓은 이름, 게다가 신문에 나고 이곳 TV해설자까지 축구해설 도중 자세히 소개해 놓은 우리집 아이의 이름을 이제 와서 바꿀 수 없는 것 아닌가?

 거기다 우리 세찌 녀석은 이름만 요란한 게 아니다.

 언젠가 신문지상을 통해 1986년 10월쯤 세찌가 태어날 것이라고 밝혔더니 어느 팬이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차 선수와 통화할 기회가 있거든 요즈음은 하나만 낳기 운동이 한창임을 꼭 일러주라"고 했더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제는 '모두가 하나'도 아니고 '한집 걸러 하나'의 추세라고 하니 우리 같은 경우는 아파트 한층의 애들을 몽땅 갖고 있는 셈이다.

 우리 한국 축구 선수들도 나이가 젊을수록 '하나만 낳고 끝'이라고 하는데 소위 선진국이라는 곳에서 수년을 산 가장 모법적이어야 할 영증(조영증)과 나만 애가 셋이니 사실 할 말이 없다.

 거기다 어찌된 영문인지 이곳 [익스프레지]지는 내가 한국 가족계획협회의 '둘만 낳기 운동'에 모델로 앞장섰다는 사실까지 알아내서 내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유감없이 폭로하기까지 했다.

 

p64.

 그러기 때문에 더 배운 사람, 더 높은 사람,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항상 남들이 흉내내고자 하는 대상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국에 있을 때, 많은 어른들을 뵙고 가까이에서 그분들의 생활을 보면서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흉내낸 적이 있고, 또 옳지 않은 것도 높은 분이 하는 것은 근사해보였던 기억이 난다.

 남편의 권력을 등에 업고 열심히 땅장사하시던 어느 사모님, 바로 그분이 내가 독일로 온 뒤 장관 사모님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의 기분은 요즘 신문을 잃고 난 뒤의 씁쓰레한 뒷맛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한번은 우연히 만난 어느 재벌 총수님께 좋은 말씀 있으시면 한마디 해주십사 하고 부탁드린 적이 있다.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 대재벌 총수님은 거짓말 같게도 갑자기 내 귀에 입을 슬며시 대시더니 "돈 있으면 금 사!" 하시는 것이었다.

 하기야 내가 낮에 묻었던 축구화 바닥의 흙이 생각나서 자다가도 뛰쳐나와 손질을 해놔야 속이 시원한 것만큼이나 그분도 자나깨나 돈버는 궁리를 해서 대기업을 이룰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나이 어린 나에게 하는 충고치고는 분명히 야(?)했었다.

 

p68. 레버쿠젠시가 온통 차붐 축제

 8년만에 UEFA컵이 서독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도 내 품으로.

(참고 : 1987-88 UEFA 우승은 레버쿠젠이 차지. 당시 상대팀인 RCD에스파뇰은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1차전 홈경기에서 3:0으로 승리. 레버쿠젠의 홈경기에서 4점차 이상으로 승리해야만 하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바로 이 절대절명의 2차전에서 차붐이 후반 81분 극적인 3번째 골을 넣으면서 3:0으로 레버쿠젠이 승리. 이후 1,2차전 동점/동률이 된 상황에서 연장전을 진행하지만 결국 양팀 모두 골을 넣지 못하고 승부차기로 간다. 승부차기에서 레버쿠젠이 3:2로 짜릿한 우승을 차지하며 일약 차붐은 레버쿠젠의 영웅이 된다.)

 뜨거워서 터질 것 같은 팬들의 열광과 환호는 8년 전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하늘에서는 [원더풀,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라는 왕츠가 높은 테너 가수의 음성으로 쏟아지고 관중들은 함성과 흥분으로 운동장을 덮고 있었는데 간간이 보이는 노란 바탕에 까만 붓글씨의 응원 플래카드는 나에게 또 다른 흥분을 더해 주었었다.

 '범근아, 너 알지 끝내줘라."

 나의 세 번째 골이 터졌을 때부터 UEFA컵은 내게 돌아오고 있었다.

 그 당시 내 나이 34세, 바로 그 감격스러웠던 순간에 나의 축구 인생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충동은 너무 감상적인 것이기만 했을까.

 더 이상 바랄 것도, 바라고 싶은 것도 없었다.

 왁자지껄 집으로 몰려들었던 한국 손님들이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떠난 것은 새벽 2시였다.

 도무지 잠자리에 들 수 없는 흥분 때문에 슬리퍼를 신은 채로 파티장에 다시 돌아갔을 때는 레버쿠젠 시도, 파티장도 온통 취해 있었다.

 깊은 밤에 빵빵거리면서 돌아 다니는 자동차, 어깨에 어깨를 걸고 훈훈한 초여름 밤을 맥주로 식히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무리들이 레버쿠젠을 온통 메우고 있었다.

 취한 경찰이 팬들과 어울려 [오! 미스터 나이스]를 신나게 부를 때 푸른 제복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입는 것인지를 그들은 잊은 지 이미 오래된 듯해 보였다.

 "부미!"(감독이 부르는 나의 애칭)하고 집에서 입는 옷차림으로 파티장에 들어선 나를 끌어안은 감독과 부인의 벌겋게 젖은 눈은 지난 세월 동안 그와 우리가 나눈 고통의 밀담을 소리없이 생각나게 하고 있었다.

 눈물과 웃음이 결국은 같듯이 고통과 영광은 같은 무게로 우리의 인생에 매달려 있는 모양이다.

 손수건을 링 위로 던졌다는 신문들의 빈정거림 속에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던 바로 그 감독이 떠나기 1주일 전에는 레버쿠젠의 영웅이었다. "이 컵은 나의 이별의 왕관이다"라고 반쯤 취해서, 아니 하나도 안 취해 있던 감독은 소리쳤다.

 나는 그때 뭐라고 소리쳤을까.

 그 밤의 모든 일들이 꿈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오픈카를 타고 시민들 사이를 누비며 8년만에 안아본 UEFA컵은 어느새 살찐 아들 녀석처럼 훨씬 무거워져 있었다.

 

p87. 마라도나는 진짜 작은 거인

 1987년 크리스마스 전에 서독 축구 국가대표 팀이 남미원정 중 브라질 및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팀과 친선경기를 가졌었다. 독일에서는 한밤중에 중계가 되었는데 경기 내용이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그 경기의 해설자는 연방 디에고 마라도나의 화려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지 않고 TV를 시청한 대가는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날 저녁 마라도나가 보여준 플레이는 기술이나 묘기라기보다 차라지 천진한 어린아이의 재롱 같아 보였다.

 수만 관중이 디에고를 외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미칠 듯이 환호하는 것을 작은 키의 마라도나는 마치 우리 집 세찌가 도리도리 짝짜궁을 하면서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치 긴장이 무엇인지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아이 같았다.

 그런데 1988년 초에 마라도나가 속해 있는 이탈리아의 나폴리팀과 언젠가 내가 가려고 했던 AC밀란과의 경기에서 나는 또하나의 작고 귀여운 '마스코트'를 보고는 나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그래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단계를 벗어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987년 유럽의 최우수 선수였던 네덜란드 출신의 머리를 갈래갈래 땋은 그 흑인 소년은 돌아가는 템포가 질러가는 상대 선수보다 빠를 만큼 스피드가 대단했다.

 그러나 그보다 개구쟁이 흑인 꼬마를 뻥튀기 기계에 올려놓고 튀겨놓은 것 같은 어른 개구장이의 천성이 내 눈엔 더욱 돋보이는 무기로 보였다.

 더욱이 요즘은 10년, 20년 전처럼 펠레는 영원히 브라질에, 베켄바워는 언제까지나 독일에 머무를 수 없는 세계 축구의 현실로 볼 때 이들의 낙천성이야말로 어느 곳에서든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인 듯했다.

 레버쿠젠 클럽에서 발간한 책에 실린 나에 관한 소개란에서 리벡 감독은 "그는 뛰어난 운동(육상)선수다. 그리고 그는 팀의 어느 곳에나 세울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유일한 선수"라고 얘기했다. 이와 비슷한 얘기는 나를 가르쳤던 감독 중 특히 부흐만과 크라마가 자주 했던 것 같다. 기초가 가장 완벽하다느니 가장 뛰어난 기술을 습득한 선수라느니 하는 식으로.

 그러나 나는 분데스리가 10년 넘은 경험을 통해 볼 때 내가 서 있는 이 위치에서 마지막 단게로 올라서기엔 성격적으로 담대하지 못하다는 크나큰 약점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하는 경기에 대단한 손임이 오게 되면 마라도나처럼 즐겁고 신나는 게 아니라 부담스럽고 불편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가 응원 많이 할 테니 잘하라"라든지 "한 골 넣어라"는 얘기는 일부러 안 들은 걸로 한다. 솔직히 말해 전혀 고맙거나 도움이 안되는 심리적인 부담만 쌓이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깰 수 없는 담, 늘 경기에 신중하게 임하는 나의 성격은 감독들 눈엔 만점일지 모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펠레나 마라도나처럼 한 단계 높은 더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p106.

 고등학교 시절 허리가 아파 쩔쩔매고 있을 때 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나 계신 장운수 선생님은 거액의 자비를 들여 나로 하여금 한의원에서 금침을 맞게 했다.

 머리카락보다도 더 가는 금침을 척추 부위에 집어넣었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 이후 통증 없이 경기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담당 한의사의 말에 따르면 75년이 지나면 침 자체가 없어지고 효과도 사라진다는데 요즘은 이 금침이 온몸을 돌아 당시를 회상하게 만든다.

 금침은 종아리, 허벅지, 무릎, 어깨 등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는데 처음에는 무릎이나 종아리 같은 데서 전기가 오는 것처럼 당기고 아팠다. 그러나 이제는 통증이 있을 때마다 '아! 지금은 이 녀석이 이리로 왔구나!'하고 침이 있는 곳을 알게 된다.

 독일에 온 지 얼마 안돼서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을때 의사인 룬츠하이머가 하루는 기겁을 하고 엑스레이 사진을 들고 달려왔다.

 척추 속에 쇠가 들어 있고 신장도 '쌍둥이 신장'인 때문이었다.

동양 침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그로서는 척추에 왜 쇠가 들어가 있으며 또 어떻게 집어넣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기네 방식으로는 등을 째고 집어넣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은데 내 등에는 수술한 흔적도 없으니 금침의 효과는 접어두고서라도 침을 어떻게 넣었을까 하는 점부터가 궁금했던 것이다.

 나는 신장이 양쪽에 두 개가 있다. 고무풍선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으면 얇아지듯이 두 개인 경우는 그 벽이 무척 얇기 때문에 작은 충격에도 쉬 상하게 된다고 한다. 당시 나의 부상은 상당히 심해서 소변에 피가 계속 섞여 나오고 있었다.

 정상적인 신장을 가진 사람도 그 위험도가 상당히 높은데 나처럼 유난히 얇고 큰 신장을 가진 경우는 한층 더 위험하다는 의사들의 충고가 있었다.

 

p119. 배고픔.

 1985년 독일에 들른 고등학교 코치 두 분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모처럼 뵙는 한국 분들이라 반갑기도 했고 청소년 축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시골 아저씨 이름이 생각나는 것처럼 나를 깨우는 얘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축구 선수들에게 일기를 쓰게 해서 거두어 읽어봤더니 실컷 한 번 먹어봤으면 하는 얘기가 가장 많더라는 것이다.

 '배고픔'

 지금은 나 역시도 잊고 산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있어서도 가장 절실한 문제는 먹는 것이었다.

 언젠가 라도 한번 실컷 먹고 싶었던 라면. 운동을 마친 뒤 혜화동(참고 : 차범근이 나온 경신고등학교가 혜화동에 있음)에서 목욕하고 학교까지 올라가려면 골목골목에서 나는 찐빵, 만두 찌는 냄새, 단순한 군것질의 욕구가 아니라 성장기 청소년의 육체 바닥에서부터 나는 허기가 그것을 찾는 것이었다.

 기름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반찬에 밥. 그것도 상급생이 아닌 다음에는 먹고 싶어도 숟가락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으니 나에게도 그 당시 머리에 꽉 차 있는 욕구는 "먹고싶다. 실컷 한번 먹어봤으면"하는 것이었다.

 남자의 신체는 고등학교 과정을 지나는 동안 완성된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은 성장기의 자녀들에게 옷 사대기 신발 사대기가 힘들다고 투정하시겠지만 우리의 신체가 그만한 발달을 하려면 물만 먹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특별히 단백질이 가장 많이 요구되는 시기가 나는 이때라고 생각하다. 하루가 다르게 만들어지고 성장해 가는 신체의 세포들, 이 세포들의 양적 팽창과 지적(질적의 오타인듯) 향상을 도우려면 단백질, 쉽게 말해서 고기가 꼭 필요하다.

 작은 동양 사람과 큰 서양 사람, 작은 옛날 사람들과 큰 요즘 아이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나처럼 영양실조다 뭐다 하면서도 179cm까지 자란 사람도 있지만 어쩌면 나도 그 당시 잘만 먹었으면 김재한 형만큼이나 컸을지도 모른다.(참고: 김재한은 1947년생으로 72년부터 79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며 키는 190cm이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내가 26세에 독일에 왔는데 독일에서 생활하는 동안 거의 2cm가 자랐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말이다. 나는 180cm에 가깝다. 독일에 와서 처음에는 하루 저녁에 1kg의 쇠고기도 먹어치울 수 있었다. 남들은 놀랐지만 나는 먹을 수가 있어다.

 내 몸의 세포들은 피고 싶은 의지가 더 강했던지 청소년기에 다 피지 못한 것들이 늦게라도 화분에 물준 것마냥 핀 모양이다. 

 2cm. 키의 2cm는 작은 숫자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후배들 고등학교 선수들은 잘 먹고 잘 크고 그리고 축구에 기술 향상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두뇌 발달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숲의 나무를 잘 기르는 것과 같은 식이다. 낙엽을 긁지 않고 놔둬서 거름이 되게 하고 적당한 비가 수분이 되었으면 한다

 대전상고 선수들은 그 학교 출신 선배들이 한 명씩 선수를 맡아서 먹이고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배불리 먹게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축구인의 한사람으로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지면을 통해서도 그 도와주는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다른 ㅎㄱ교에서도 더 많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도시락을 두 개씩 사와서 맛있는 반찬을 먹게 해줬던 고등학교 때의 내 짝 경일이한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p131. 훈련량과 위장병

 한국의 9월은 더위가 한풀 꺾이기 시작하는 때다.

 7,8월 뒤통수가 띵할 정도로 더운 날 하루 세 번 훈련을 하고 나면 밥 먹기가 귀찮아 물에 말아 훌훌 마시는 것으로 한끼를 때우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우리 나라 축구 선수 중에는 위장병 환자가 유난히 많다.

 한때 독일에서 배구 선수로 활약했던 이희완 씨는 독일로 건너온 뒤 위장병이 없어지고 밥맛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나는 그 원인이 독일에서 훈련을 무리없이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믿는다.

 사실 나는 한국의 선배들을 뵐 때마다 우리나라 축구는 훈련량이 너무 많다고 말하지만 그럴 때마다 도리어 "한국의 사정을 너무 모르는 이상론"이라는 면박과 함께 다른 데 가서는 그런 소리 하지도 말라는 충고를 듣게 된다.

 자동차의 경우 적재적량이 있어 너무 많이 실으면 고장이 나고 수명도 단축된다.

 나는 인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단순노동도 적정 노동시간을 초과하면 능률이 줄고 사고의 위험이 높아지는데 하물며 고도의 기술과 정신집중을 요하는 운동에서 이미 지쳐 있는 몸과 마음으로 훈련을 계속할 때 부상이 속출하리라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웬만한 운동 선수치고 해마다 몇백만원씩 들여 보약을 복용하지 않는 선수가 거의 없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보약 값을 들이고 또 많은 양의 훈련을 하면서도 우리나라 선수들이 국제 대회만 나가면 왜 뒤떨어지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곧잘 "선천적으로 타고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체력이야 말로 적당한 운동과 휴식, 그리고 좋은 식사로 얼마든지 향상시킬 수 있다. 이제는 옛날같지 않아서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연구 결과들이 우리로 하여금 효과적으로 체력을 보강하고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우리 선수들에게 도움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할 지금 적당한 훈련량, 효과적인 훈련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병난 위장에 몇백만원어치 보약을 쏟아넣는 것보다 건강한 위장에 사과 한 알이 우리 몸에는 더 유익하지 않겠는가.

 

 p153.

 내가 잘 아는 이탈리아의 한 친구는 "정신나간 듯해 보이는 포르노 배우를 국회의원으로 뽑는 너희도 참 한심한 나라다"라는 나의 공박에 천만의 말씀이라며 펄쩍 뛴다.

 이유는 '마피아가 판을 치는' 이탈리아에서 그것은 전체 정치인에 대한 일종의 침묵 시위라는 것이다. 마피아와 손잡는 정치인, 부정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우리는 도둑이나 강도보다는 차라리 미친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뜻을 전하려는 의도라는 얘기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p155. 독일에서 지켜본 대통령 선거.

 

 1987년 독일에서 고국의 대통령 선거를 TV로 지켜보았다.

 과정이나 결과에 무심할 수 없는 나로서는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최루탄이 터지는 등의 광경을 TV로 보고 더욱 착잡해지는 심정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정치에 무식하고 무관한 나 같은 사람도, 아니 어쩌면 초등학생 정도의 사고력만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두 사람에 한 사람 꼴로만 나가 싸웠으면 멋진 승부가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세가 나에게로 기울어졌다"며 저마다 자기 도취에 빠진 얘기를 들은 뒤 이들이 한결같이 참패를 당하고 난 후 생각해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 뿐이다. 선거를 한다는 그 자체가 자못 신기하면서도 기특하고 또 한편으로는 선거가 있기까지 최루탄 속에서 잘 참아준 시민들이나 일부 열성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멋진 플레이를 발휘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축구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줄 알지만. 그래서 독일에서 1주일에 두 번씩 몰아서 오는 신문을 보기 위해서 10만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구독을 했던 것이다.

 이제도 다 지나간 얘기다. '부정선거다' '관권 개입이다'하는 소리도 이제는 듣기 싫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라도 듣고 싶고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두 분이 다 많은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잘못되었던 당시의 판단을 시인하는 것이다.

 어떤 친구는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귀신이 씌었나 보다고 한탄을 한다. 누가 돈을 먹었다는 식의 얘기보다는 훨씬 마음이 가는 한마디다. 많은 사람들의 말뜻조차도 애매하게 "그럴 줄 알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두 후보의 득표는 큰 것이었다. 

 '집안싸움'에 진력이 나서 떨어져 나간 숫자까지 합친다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민들을 외면한 것은 그분들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일단락 된 지금 나는 두 분에게 부탁드리고 싶다. 순수하고 젊은 우리 학생들이 더 이상 데모로 희생되도록 부추기거나 방치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부정선거를 따지기 전에 자신들의 판단 착오였음을 설명하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정치가답게 새로운 정부에 강력히 반영시킬 것을 약속해야 한다. 이제는 하나와 두리도 TV를 볼 때마다 자꾸 묻는다.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이냐"고. 아이들이 커갈수록 대답이 자꾸 궁해지는 아빠들의 체면도 좀 생각해줬으면 한다.

 

p157. 참으성 심어주는 부모의 용기

 

 해발 3천400m에 있는 스키장까지 스위스의 전동식 톱니 기차로 올라가려면 30분은 족히 걸린다.

 그러니 플랫폼에 꽉 찬 스키꾼들 사이에서 애들이 자리라도 잡고 앉아서 가려면 여간 동작이 빨라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리부터 "하나야 두리야, 아빠가 너희들 스키 들고 갈테니까 너희들은 먼저 가서 앉아라"하고는 남들이 못 알아듣는 우리나라 말로 무진장 열심히 교육을 시켰다.

 그러고도 모자라 기차가 도착하자 괜히 마음이 조급해서 또 한 번 "하나야 두리번거리지 말고 앞으로 가"하고는 남들이 못알아듣는 소리지만 그래도 느낄까 봐 되도록 부드러운 멜로디로 다그쳤는데 내 뒤에 있던 꼬마 녀석도 마음이 급했던지 나를 헤집고 앞으로 갔다.

 그때 그 애의 아버지가 남부 사투리가 잔뜩 섞인 독일 말로 "천천히 타도되는데 뭘 그래"하면서 애를 끄집어 도로 내 뒤에 세우고는 "미안해요"하면서 자기 아들의 한쪽 팔을 꽉 붙드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세상 살다가 그때만큼 스스로 무안해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더구나 내 나름대로는 애들 교육을 제법 진지하게 시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 집에서 지내던 많은 한국분들도 애들 교육이 잘돼 있다고 칭찬을 해왔던 터라 그 충격은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가장 큰 고질병이라고 하는 조그함과 이기심을 나 자신은 얼마만큼 고쳤다고 믿어왔는데 자식에게까지 대물림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도 했다.

 언젠가 우리 두리가 학교 학예회에서 시 낭송을 하게 돼 있었는데 그만 며칠 전에 감기를 앓는 바람에 선생님이 다른 아이를 대신 시키기로 한 적이 있었다.

 며칠만에 학교에 간 아들 녀석이 너무 실망하는 것 같아서 제 엄마가 선생님께 반반 나눠서 시키자고 부탁을 했었는데 그 얘기를 들은 친한 이웃집 아줌마가 하나 엄마의 생각에 자기는 반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두리가 예기치 않는 사건에 부딪쳐서 참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배우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는 얘기였다.

 "자기애가 그랬다면 가만있겠어?"하고는 꿍얼꿍얼거리던 하나 엄마가 두 손을 들고 만 일이 나중에 또 있었다.

 그 집 애하고 두리가 같이 축구를 하러 다니는데 시합이 있다고 해서 그 집 식구가 온통 몰려갔던 모양이다.

 갔다 와서는 코치가 토마스를 경기장에 내보내지 않아서 줄곧 벤치에서 울고 있었다는 엄마의 얘기를 듣고 왜 애들 축군데 좀 얘기해서 잠깐이라도 뛰도록 해주지 그랬느냐고 했더니 물론 뛰는 것도 즐겁겠지만 참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좋은 경험이니까 배우도록 가만 놔뒀다는 것이다.

 정말 부모로서 대단하다고 할 만한 용기다.

 예기치 않은 불이익, 손해를 비켜나가도록 도와주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는 교육이란 게 부모가 돼 보니 참 쉽지가 않았다.

 정작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인 것 같다.

 

p162

 

 "어느 한 나라의 축구가 흥하고 안하고는 골목 축구에 달려있다"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베켄바워가 그랬었고 마라도나, 펠레가 모두 골목 축구로 시작했다. 가난한 집에서 변변한 장난감도 없이, 또 자기가 몸담고 꿈을 키울만한 방 하나도 없이 살다보니 길거리가 곧 자기 방이 되었고 아무 것도 필요없이 맨발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축구다 보니 닥치는 대로 발로 걷어찼을 것이다.

 

p193. 골프 대중화에 입맛 씁쓸

 

 '대중화'라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대중'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았더니 '수가 많은 여러 사람, 민중, 많은 사람들' 그리고는 부연해서 '특히 노동자, 농민들의 일반 근로 계급'이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물론 꼭 사전을 찾지 않더라도 대중이라는 말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별 무리 없이 포함시킬 수 있는 비슷한 삶의 수준을 누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뜻한다는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신문을 통해 '골프의 대중화를 저해하는....' 이라는 기사를 대할 때면 솔직히 말해서 입 맛이 쓰다.

 엄청난게 비싼 장비에 물리는 세금과 골프장 입장료, 회원권, 캐디 팁 같은 것이 대중화를 저해 한다고 목청을 높이니까 대중화와 가장 거리가 먼 이 부분은 얘기하지 않기로 하더라도 한번 필드에 나가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18홀을 도는 데 필요한 네 시간에다 왔다갔다 하면서 소요되는 시간까지 합친다면 일반 대중에게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어느 날을 잡아도 쉽게 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거기다 멀찌감치 떨어져 위치한 골프장까지 한 짐이나 되는 골프채를 챙겨서 가려면 자가용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그들이 얘기하는 대중의 수준에 낄 수가 없게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 나라처럼 좁은 땅에 시립 공원 하나도 제대로 없는 판에 아무리 작은 골프장이라도 십만 평은 넘어야 하는 그 면적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 넓은 그림 같은 잔디밭에서 몇 사람이나 동시에 즐길 수 있겠는가?

 염치 없는 비교가 되겠지만 가장 작은 십만 평짜리 골프장도 국제 규격의 축구장 33개에 해당되는 면적이다.

 33개의 잔디 축구장에서 700여 명이 동시에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뛰는 모습을 생각한다면 땅의 효용성에서도 골프는 대중화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다 골프를 치는 나의 입장에서 얘기해 본다면, 들이는 시간과 돈과 그 밖의 것들을 비교해 볼 때 실제적인 운동량에 있어서는 테니스나 탁구 또는 축구 같은 것들에 비해 형편 없이 못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골프는 분명히 재미있는 운동이다. 넓은 필드를 가로지르는 장타가 제대로 맞았을 때에 '딱'하는 소리는 통쾌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나도 가끔씩 필드에 나가곤 한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이것 자체가 특권이며 고마워해야 할 일인 줄 모르고 더 많은 기득권을 얻기 위해 대중화를 앞세우는 몰염치는 삼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골프장의 사람들을 대중이라고 부르면 오늘도 점심시간에 한강 다리 및 고수 부지에서 하루종일 구부렸던 다리를 모처럼 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즐겁게 볼을 차는 택시 운전기사 아저씨들에게는 붙여 줄 이름이 없지 않겠는가.

 

p198. '아침의 나라'의 인정을 아시나요

 

 1988년 어느 날 독일 여성지에 실린 슈미트 전 서독 수상 부부의 사진은 무척 보기가 좋았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얼굴 색도 좋아진 것 같고 표정도 밝고 아름다웠다.

 슈미트 씨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생전 처음 몇 백만 마르크를 모았노라는 자랑도 서슴지 않았다. 관직에만 있던 그로서는 돈을 벌 기회도 없었는데 이제는 책도 쓰고 강연회도 참석하면서 상당히 많은 인세와 사례비를 받는다고 했다.

 1회 강연 사례비가 2만 마르크. 한국 돈으로 8백만원이라고 하니 월급쟁이 생활에 길들여진 그분으로서는 엄청난 돈임에 틀림없다.

 그분이 수상직을 그만두고 첫 해외 여행할 때의 신문 기사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모처럼 공식 여행이 아닌 해외 나들이를 하면서 이 부부는 비행기의 서로 다른 칸에 떨어져 앉게 되었다.

 전직 수상에 대한 예우로 비행기의 1등석을 탈 수 있는 특전이 부인에게까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등석은 엄청나게 비싸다. 나도 가끔 공짜로 태워 줘서 타 보면 돈 있는 사람들의 돈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슈미트 씨의 부인도 수상 시절에는 1등석이나 전용기를 탔을 것이다. 또 그 자신이 원하기만 했다면 아무리 월급쟁이 관료 노릇만 했다고 해도 설마 남편과 나란히 1등석에 앉을 만한 방법쯤이야 없어겠는가.

 나는 참 용기 있는 분이라고 느꼈다. 가식이나 허영보다는 정직과 진실을 더욱 자랑스럽게 여길 줄 아는 용감한 여성이었다. 

 싹둑 잘랐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의 헤어스타일은 용기나 정직과 상당히 어울려 보였다. 결코 아름답게 치장하지도 다듬지도 않은 그분의 모습이 어느 날 유난히 눈 앞에 어른거렸다. 그것은 그 전날 뉴스에서 백담에서 은둔 중인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숨과 함께 눈가에 뜨뜻함을 느낀 것은 나뿐이었을까.

 5공화국이라면 눈을 길게 뜨고 째려보던 나였지만 그날 만큼은 그럴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개털 모자 같은 것을 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산사 같은 데서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많은 역사가들이 우리 민족이 우유부단하기만 한 바보 같은 정 때문에 역사가 걸러지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하더라도 바보 같은 정을 담은 그 우유부단한 피가 바로 내 속에서도 흐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p217. 나눠진 땅 갈라진 이념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이북 방문을 허용하는 대통령의 발표가 있었을 때, 그 발표를 듣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호기심이 발동했었다. (참고 : 1988년 7월7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7.7선언을 의미한다. 이 선언의 6개항중 해외동포의 방북허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북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막상 법으로 이북 방문을 허용한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은근히 이북 사람들 축구하는 것도 한번 보고 싶고 절경 중에 절경이라는 금강산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대사관, 한국 관광 공사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기대에 부풀기도 했었는데 불과 몇 달이 지난 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두려울 만큼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 것 같았다.

 동과 서로 갈린 나라의 서쪽 한편에서 한 10년 살아본 나는 "이 사람들은 남의 탓에 갈라져 살뿐이지 자기들끼리는 통일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나름대로 믿어왔었다.

 우선 자유롭게 서로 왕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이나 유럽의 각종 대회 때면 동독의 메달도 마치 통일된 독일의 것마냥 좋아하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랬다.

 얼음판의 여왕인 동독의 카타리나 비트가 두 번째 동계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을 제패했을 때 '우리의 카타리나'라는 표현으로 신문 1면 전체를 장식했었다.

 실제로 그녀는 서독 매스컴의 비중으로 친다면 테니스의 보리스 베커나 슈테피그라프에 못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1988년 겨울 뮌헨에서 시상하는 밤비상의 스포츠 부문 수상자로 결정되어 뮌헨에 도착했을 때 어떤 호텔에 묵으며 무엇을 하고 시상식에서는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하는 것까지 온통 사랑 어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TV앞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는 그녀는 '우리의 카타리나'라는 사랑이 듬뿍 담긴 얘기가 무색하도록 "당신네 나라 사람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었다.

 나는 상당히 놀랐다. 그리고 곧 "내가 이쪽에서만 보았기 때문이었지 동독은 아직도 냉랭한 모양이구나"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나의 질문을 받은 꽤 많은 서독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동독을 이웃나라 중 하나 이상으로 생각지 않는 것 처럼 카타리나도 그렇게 믿기 때문에 '당신네 사람'이라는 말은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렇다면 나야말로 한 부분만 보고서는 내가 산 10년이란 숫자로 독일을 다 아는 것처럼 지레 믿은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북에 가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한번 가보고 싶은 이웃 나라였을까 아니면 누구처럼 내가 가서 통일의 물꼬를 터야만 한다는 어마어마한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저것도 아닌 나 같은 사람까지 뭐가 문지 모르고 구경하겠다고 날뛰니...

 

p221. 빛바랜 축구 명문 도시

 

 프랑크푸르트와 뒤셀도르프의 전력이 최근 몇 년 사이 크게 약화되면서 관중이 줄어 팀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프로 축구는 단순한 관람객이 아닌 고정 팬을 많이 확보해야 원만한 팀 운영을 기대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두 도시는 수년 전부터 국제 도시로 탈바꿈, 깔끔하고 단정한 국제기업인들이 자리를 차지해 버리면서 축구팬을 잃게 됐다. 외국인들이 자꾸 늘어나는 현상 때문에 특유의 옷 색깔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향토팬은 줄어들고 대신 뜨내기 구경꾼들이 운동장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두 도시는 돈이 많아서인지 엄청난 돈을 들여 유치하는 이반 렌들이나 보리스 베커의 프로 테니스 시범 경기가 벌어질 때면 그 비싼 입장권이 몇달 전부터 매진되곤 한다.

 축구는 서민운동이다. 테니스와 달리 단순히 보는 것으로 즐기기보다는 '네편 내편'이 훨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어쩌면 이 편가름이 프로축구의 바탕인지도 모른다. 

 향토색이 짙은 지역일수록 좋은 팬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데 바이에른 뮌헨 같은 경우가 좋은 예다. 독일의 가장 남부에 있는 이 바이에른은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알프스 지역이다.

 날씨가 좋고 지역이 방대한 데 비해 뮌헨 팀만이 이 지역을 독점하고 있어 늘 많은 팬을 확보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특유의 사투리를 쓰는 그들의 커다란 생맥주 조끼가 말해 주듯 그곳 사람들의 낙천적인 농심이 많이 작용하고 있따.

 이와 달리 중부의 루르 지방에는 반경 150km가 채 안되는 좁은 지역 안에 분데스리가 팀(18개)이 반 수 이상 속해 있다.

 물론 뮌헨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규모가 작지만 이런 지역은 또 나름대로 팬을 모을 수 있는 요인을 갖고 있다.

 광산, 철광산업 등 늘 어두운 데서 노동하는 이 곳 주민들에게 토요일 늦게 벌어지는 축구 경기는 모처럼 소리도 지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노무자들이 대부분인 이 지역 특성대로 옆동네를, 혹은 이웃 광산을 이기고 싶은 심리가 발동, 거의 군 단위마다 팀을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도르트문트, 살케, 보쿰... 이런 팀들이 바로 이곳에 속해 있다. 아무튼 스포츠, 특히 축구는 양쪽 골대 뒤에서 편 갈라 싸우는 팬들이 있어야 신이 나고 구단으로서도 존재 가치가 있다.

동독에 갇혀 있는 서베를린이 수많은 세제 혜택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인들이 그 곳에서 살기를 피하자 이제는 외국인들의 도시처럼 되어 버렸다.

 그리고 뒤따라 나타난 자연적 현상은 그 막강하던 베를린의 팀들이 모두 2부 리그, 혹은 아마추어로의 전락이었다.

 이런 것과 비교하여 우리 나라를 보면 서울은 프로 축구가 뿌리를 내리기에 가장 부적합한 곳이며 영호남 지역이야말로 팬들과 호흡하는 축구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는 호남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 없어 다른 지역의 다섯 개 팀만으로 올 시즌 프로 축구 대회를 치르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보다 근본적인 지역 연고제의 정착, 나아가 진정한 팬 확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호남지역의 프로 팀 창잔이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p236. 한국 축구 활로 새 모델 창안뿐

 

 1990년 로마 월드컵이 끝난 후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거기에 참가했던 상당히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부러워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카메룬'이라는 검은 대륙의 가난한 나라를 상당히 부러워하고 있다. 나 역시도 카메론의 검은 돌풍이 지나간 후 나름대로 호기심을 가지고 이책 저책 혹은 보도 자료를 뒤적이면서 그 이유나 비결(?)이 어디에 있는 관심을 가졌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카메룬을 흉내낸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오늘이 엄청난 투자, 과학적인 훈련, 정부 지원, 해외 연수 같은 데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묘책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흉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파악한 카메룬 혹은 아프리카 축구의 비결은 그들이 못살고 덜 깬 덕분에 그 곳 아이들이 널려 있는 빈터에서 짚이나 잔디를 묶어서 맨발로 공을 찰 수 있는 여유(?)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월드컵의 스타 한지 뮐러는 "우리는 브라질보다 훨씬 더 많은 인재들을 갖고 있다. 그 아이들은 공도 유니폼도 운동화도 없이 맨발로 공터에서 짚더미를 차고 있지만 고금만 도와준다면 우리는 세계적인 축구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다. 이렇게 해서 키워진 선수들이 해외로 나가 더욱 다듬어지는 것은 그 다음 과정이다.

 나 역시도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니가 굉장히 늦게서야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 본 셈이다. 그러나 어렸을 적에 동네 앞마당에서 애들과 어울려 고무신 신고 짚이나 돼지오줌통으로 만든 공을 공부 걱정 안하고 맘껏 차던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때의 경험이 같은 시기에 엄격한 훈련을 받은 다름 동료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효과를 가져다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아이들은 축구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하더라도 뛰어 놀 만한 '시간'과 '공간'이 없으니 그 시절에 키울 수 있는 무한한 상상력과 응용력을 키워 낼 수가 없고 그저 정해 주는 생각과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팬들은 우리 축구가 답답하다고 한다. 또 지도자들은 "독일 선수들은 위치 선정이 뛰어나다"면서 훈련 방법이나 지도비결이 있는가를 묻기도 한다.

 'ㅋ'으로 시작하는 카메룬과 콜롬비아가 1990년 월드컵 대회 첫 경기에 성공했다고 '코리아'도 벨기에를 이길 것이라는 엉뚱한 발상이 여지없이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일을 천편일률적인 '감'이나 '방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맞는 이상적인 제도와 훈련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카메론의 방법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p298. 비오는 날의 축구화

 

 비가 내리는 저녁 경기였다.

 레버쿠젠 팀에서 축구화 손질이며 유니폼 정리 같은 잡일을 하는 하랄드가 축구화의 양 사이드에 붙은 아디다스 3선에 열심히 흰색을 칠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같아 보여서 내 신발은 그냥 달라고 했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이었다. 흰줄이 잘 안보이면 아디다스에서 자기에게 화를 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들의 지독스러운 상혼에 고개가 숙여지는 면도 없잖았다.

 진땅에서 45분을 뛰고나면 흰 선은 커녕 축구화인지 발목인지조차 구분이 안되는데 TV앞에 앉아 자기네 상표가 화면에 몇 분이나 나오는지 스톱워치로 재고 있는 그들이고 보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게 분명하다.

 아디다스에서는 스타들에게 입힐 옷을 '프로모션'이라고 해서 따로 만드는데 공짜로 얻어 입는 그 옷에는 정말 염치 없으리만큼 그들의 상표를 붙일 만한 데는 다 붙인다. 심지어는 어깨 위에까지 붙어 있는데 TV카메라가 얼굴을 클로즈업 하더라도 가슴에 있는 것처럼 잘리지 않고 나올 수 있도록 한 아이디어다.

 그러나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TV쇼나 가족사진을 찍을 때는 공짜로 얻은 그 옷을 잘 입지 않는다.  그래서 아디다스는 선수 개인과 계약을 해서 TV나 신문에 꼭 아디다스를 입고 출연하는 조건으로 상당한 대가를 지불한다.

 내가 독일에 처음 왔을때에도 아디다스는 이같은 계약을 제시했다.

 광고를 위한 사진 테스트도 한 적이 있는, 당시 한국에서 아디다스의 판매가 저조했기 때문에 광고가 아닌 평상시 옷을 입고 다닌다는 계약만 하자고 해서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달 후 테스트용으로 찍은 사진이 내 허락 없이 한국에서 광고,판촉용 포스터로 사용되었다. 물론 아디다스 같은 대기업이 장난을 치진 않았을 것이다. 중간에 누군가의 농간이라 생각하지만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여지껏 아디다스에서 보내주는 애들 옷이랑 신발 등을 입히지만 탐탁치는 않다.

 얼마전 나는 눈이와서 길이 안좋은 때 400km 떨어진 뉘른베르크의 아디다스 공장을 다녀왔다. 그 동안은 클럽으로 공급되는 표준형 축구화를 문제없이 신었다. 그런데 신형 축구화가 나오고서는 내 발에 맞지 않아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구형을 요구하자, 어렵게 두 켤레를 갖다주었다. 하지만 구형 재고도 떨어졌는지 공장으로 와서 발 본을 떠서 전용 축구화를 공급해주겠다는 오퍼가 왔다. 내 발에 맞는 축구화를 신고 싶은 욕심에 못 이기는 체하고 멀리 떨어진 공장까지 가서 발모양을 떴다. 그런 다음 신발 속에 붙이는 보조 스펀지를 내가 원하는 대로 설명하고 요청했다. 신발 전문장인인 슈버거 씨가 "볼 잘 차는 선수들은 다 까다롭더라"면서 웃었다.

 축구화를 전용으로 만들게 되면 한 켤레에 340마르크, 한화 14만원 정도가 든다. 그러니 앞으로는 시합 전에 하랄드가 3선에 흰칠을 하고 있어도 아무말도 안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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