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가 2010년 예루살렘 문학상을 수상할 당시, 당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난민 수용소인 가자 지구에 행한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1천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양민이 죽은 사건으로, 이 상을 수상해야 하느냐라는 문제로 일본 국내에서 꽤 논란이 있었다. 

 결국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상을 수상하기로 수락하고, 예루살렘에서 상을 수상후 알과 벽이라는 주제로 수상 소감을 발표하였다.

 수상 소감은 개인적으로 감명이 깊었으며, 그 주제는 힘없는 인간 개개인은 알과 같이 연약한 존재이며, 인간이 만들어낸 벽(사회, 국가와 같은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것들을 의미)에 의해 연약한 인간이 벽에 부딪혀 다치고 죽어가는 아이러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인간 개개인은 알과 알로서 서로의 소통을 통해 우리가 만든 벽에 부여한 비인간적 요소들을 타파함으로써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갈파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이야기하는 성경의 제1의 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글귀의 의미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고도화된 문명을 통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거대한 벽들로 이루어진 유형과 무형의 공간속에서 있으며, 그러한 벽이 없이는 사실상 생존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이미 우리는 돌아갈 자연을 잃어버린 실낙원의 세계를 영원히 살아가야 할 숙명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라카미는 "아무리 벽이 옳고, 알이 틀려도, 나는 알 편에 설 것입니다."라면서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이 아닌, 약자의 편, 인간의 편에 서겠다는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했다. 이미 알에 대해 벽은 절대적인 강자이며, 그 벽에 부여된 권위와 힘에 의해 알을 언제라도 깨뜨려버릴 수 있는 절대성에 의해 아무리 선한 의지라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인간의 위협이 될 수 있기때문에 자신은 무조건 알 편에 서겠다는 인간으로서의 주체적 의지를 갈파했다.

 현실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이 '알'이며, 무엇이 '벽'인지에 대해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을까? 또한 그것이 구분된다고 해서 자신있게 '알'의 편에 설 수 있을까?

 100 여년전 이 땅에, 팽창하는 제국주의의 기치 아래, 서구 열강을 위시한 일제의 강점이 시작되었으며,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을사오적과 같은 일제의 힘이란는 '벽'에 무릎을 꿇은 일단의 조선의 힘을 갖고 있던 기득권 세력의 '알'들에 의해 500여년을 이어온 조선이 이땅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조선이라는 거대한 '벽'에 의해 보호되던 무수한 선량한 '알'들이 희생되었다.


 영화 밀정을 보면 위대한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모델로 한 독립운동가 리더인 정채산(이병헌 분)의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실패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실패가 쌓여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앞으로 전진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야 한다.’

 이 말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할지라도, 그 희생을 우리는 계속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희생을 통해 다른 잠자는 '알'들을 깨워서 우리가 만들어올린 이 부조리하고 잘못된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내가 만약 저 시대에 태어나, 도저히 깨기가 불가능한 '벽'에 도전하는 '알'이 되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과연 내가 자신있게 전 '알'의 편에 서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는 회의적이다. 나와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그 불가능한 일을 했기에 우리가 독립운동가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의를 오늘날까지도 기리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무수한 희생과 희생을 통해 임시정부의 대의가 점점 한민족의 대중에게 스며들고, 기회가 무르익는 시기에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의 가세로 급속하게 세를 잃은 독일과 일본의 연합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은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주체적인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이후 2차 대전의 승전팀인 연합군의 힘의 논리에 의해 남과 북은 양분되고, 남한의 정부는 미국의 간택을 받은 친일세력으로 수립되면서, 수많은 한민족의 구심점이 되었던 '알'의 편에 서있던 주체적인 독립 세력은 일제라는 '벽'의 편에 서던 기회주의적 '친일'세력에 의해 도리어 숙청되는 잔인하지만 슬픈 역사가 70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것이 작금의 대한민국 역사의 주된 줄거리이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인간으로서 '벽'이 가진 힘이 '알'에게 횡포와 잔인함이 될때 그것에 맞서려고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 인지상정이 행동으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내가 인간이라는 자각과 그 인간성을 지키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내가 비록 '벽'에 항거하다가 깨질 수 있는 '알'이지만, 그것이 내가 '알'로서 가져야 할 인간의 숙명이며 그것이 내가 인간이라는 자각을 가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는 것을 깨달을 때만이 발휘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른 동물들과 대비되는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인간사회에서도 흔치 않은 '형이상학적' 행동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용기 있는 행동을 바람직하고 옳은 것이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매트릭스에서는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간약은 진실된 현실, 파란약은 매트릭스에서의 삶이라고 하면서 선택하라고 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자유며, 자신이 주는 것은 단지 진실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네오는 영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빨간약을 먹었지만 우리 모두가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실제로 사이퍼는 그 진실을 견디지 못하고 스미스요원에게 자신을 다시 매트릭스로 넣어달라며 딜을 하기도 한다.

 내가 네오인지, 아니면 사이퍼인지를 알기 위해선 계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전에 무엇이 '벽'인지 그리고 무엇이 '알'인지를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지혜 뒤에 비로서 행동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만이 인간은 '알'로서의 자각에 이를 수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