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 한산을 보고 생각이 나서 다시 한번 읽어봤다. 읽은지 10년이 넘어가고 이순신 장군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진 탓인지 소설의 내용이 더욱 절절히 마음에 와닿는다.

 

문장의 농밀함과 문맥에 흐르는 힘은 김훈 작가의 글솜씨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이순신 장군님의 인생에 흐르는 비장함에 기인한 바도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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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7

 임진년에 여러 포구에서 이겼을 때, 매번 적병의 숫자를 장계에 써보낸 것이 오 년이 지난 정유년에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능멸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죽어야 할 죄목의 하나였다. 견내량에서 이겼을 때부터 나는 장계의 적병의 숫자를 적지 않았다. 그날 견내량 싸움을 끝내고 한산 통제영으로 돌아와 장계를 쓸 때, 나는 그 숫자가 어느 날 나를 죽이게 되리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그날 밤 나는 종사관을 물리치고 밤새도록 혼자 장계를 썼다. 한산 통제영에서 장계를 쓰던 임진년의 여름밤은 달이 밝았다. 나는 내 무인된 운명을 깊이 시름하였다. 한 자루의 칼과 더불어 나는 포위되고 있었고 세상의 덫에 걸려 있었지만, 이 세상의 칼로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덫을 칠 수는 없었다. 한산 통제영에서 그리고 그후의 여러 포구와 수영에서 나는 자주 식은땀을 흘렸고, 때때로 가엾고 안쓰러워서 칼을 버리고 싶었다.

 

p108

 명량의 장계를 보낸 지 두 달 만에 논공행상이 내려왔다. 선전관은 오지 않고, 조정의 명을 받을어 도원수부가 시행됐다. 거제 현령 안위가 정삼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전투에 참가했던 여러 읍진 수령과 군관들이 승진했다. 나에게는 상금으로 은전 스무 냥을 보내왔다. 스무 냥의 무게와 질감은 섬뜩했다. 그 스무 냥 속에서 남쪽 바다를 들여다보는 임금의 눈은 가늘게 번뜩이고 있었다.

 스무 냥이 내려온 지 이틀 뒤에, 임금이 보낸 선전관 이원길이 목포 앞바다 고하도 수영에 도착했다. 이원길은 수하를 거느리고 병영 막사 공사장까지 나를 찾아왔다. 서울 출신 문관인데, 바다를 평생 처음 본다고 했다. 몸매가 가냘폈고 흰 손가락이 길었다. 먼 길을 온 사람 같지 않게 그는 의관이 번듯했고 여독의 기색이 없었다. 수군 병영의 온갖 너저분한 풍경에 그는 자주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공사장 천막에서 그를 맞았다. 나는 인사했다.

- 객고가 크시겠소, 전하께서 수군을 이처럼 염려하여주시니 감읍할 뿐이오.

- 전하의 근심이 실로 깊소이다. 달아난 배설 말이오.

 명량 전투 직전에 탈영 도주한 경상 우수사 배설을 체포해서 끌고 가는 것이 임무라고 그는 밝혔다. 그가 데리고 온 부하들 중에는 무관들이 섞여 있었다. 배설은 이미 수군에서 도망쳤는데, 배설을 체포하는 일로 선전관이 남해의 수군 수영에까지 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배설은 이미 달아났지 않소? 배설을 잡으려면 이리로 오실게 아니라 그의 본가 마을로 가셔야 하지 않겠소? 경상도 성주 말이오.

- 통제공, 그게 그리 간단치가 않소이다. 성주에도 군사들을 보냈으나 잡지 못했소. 배설이 성주에 들어온 흔적도 찾지 못했소. 배설이 비록 달아났다 하나 본래 담력 있는 무장이었소. 따르던 장졸들도 많았던 것으로 아오. 이자가 달아나서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전하의 근심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오.

 나는 겨우 알았다. 임금은 수군통제사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명량 싸움의 결과가 임금은 두려운 것이다. 수영 안에 혹시라도 배설을 감추어놓고 역모의 군사라도 기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것이 임금의 조바심이었다.

 이원길은 열흘 동안 수영에 머물렀다. 이원길은 데리고 온 수하들을 풀어 병영 안을 모두 뒤졌고 수영 인근 백성들의 마을 헛간까지 뒤졌다. 이원길은 명량 전투 이전과 이후의 장졸들의 숫자를 점검했고 각 읍진의 탈영자 숫자를 확인했다. 이원길의 수하들이 수영의 모든 군관들을 불러서 배설의 탈영 경위와 탈영 직전 상황을 수사했다. 이원길의 수사의 초점은 배설이 수영에서 탈영했느냐 아니냐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원길은 귀로에 우수영, 벽파진, 삼지원까지 뒤지고 돌아갔다.

 

 

 이원길이 돌아간 지 보름 뒤에 임금이 보낸 면사첩(免死帖)을 받았다. 도원수부의 행정관이 면사첩을 들고 왔다. '면사' 두 글자뿐이었다. 다른 아무 문구도 없었다.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임금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에 대하여 죽음을 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면사첩을 받던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나는 '면사' 두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해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 고 임금은 멀리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면사' 두 글자 속에서, 뒤척이며 돌아눕는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글자 밑의 옥새는 인주가 묻어날 듯이 새빨갰다. 칼을 올려놓은 시렁 아래 면사첩을 걸었다. 저 칼이 나의 칼인가 임금의 칼인가. 면사첩 위 시렁에서 내 환도 두 자루는 나를 베는 임금의 칼처럼 보였다.

 그러하더라도 내가 임금의 칼에 죽으면 적은 임금에게 갈 것이었고 내가 적의 칼에 죽어도 적은 임금에게도 갈 것이었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 둘 곳이 없었다.

 

 

 종사관 김수철이 저녁때 막사 신축 공정과 수군 징모 실적을 보고하는 일로 내 숙사에 들었다. 서안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김수철은 실눈을 뜨고 담벽에 걸린 면사첩을 들여다보았다. 김수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을 때 김수철은 내 함거의 뒤를 따라 서울까지 걸어서 올라왔었다. 내가 하옥되었을 때, 김수철은 임금을 대면했다. 일개 지방 수영의 종사관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임금을 대변할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 영의정 류성룡이 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김수철은 임금 앞에서 이마로 대전 마루를 찧으며 울었다. 나를 심문하던 위관들이 김수철의 일들을 말해주었다. 그때 김수철은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 전하. 통제공의 죄를 물으시더라도 그 몸을 부수지 마소서. 전하께서 통제공을 죽이시면 사직을 잃으실까 염려되옵니다.

 임금이 대답했다.

- 너희들이 남쪽 바다에서 사직을 염려했느냐?

 김수철은 수영을 이탈한 죄로 곤장 쉰 대를 맞고 풀려났다.

 김수철의 시선은 오랫동안 면사첩에 박혀 있었다. 그가 눈물을 떨구었는데, 그의 얼굴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환갑연의 덕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나으리. 오래오래 사십시오.

- 알았다. 내 그럴 작정이다.

- 보고는 내일로 미루리다. 편히 주무십시오.

- 그래라. 피곤하니 물러가라.

 김수철은 들고 왔던 문서 두루마리를 펼치지 않은 채 그대로 들고 나갔다.

 

p253

 정탐이 돌아가던 날 저녁에 남해도 현감의 급보가 수영에 도착했다. 명의 도사부都司府 담종인이 나에게 보낸 문서가 남해도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남해 현감은 배를 탄 전령을 띄워 담종인의 문서를 나에게 전했다. 전령을 태운 협선은 열 명이 노를 저어 급히 수영에 도착했다.

 명군의 통신 축선이 적이 일부를 장악한 남해도에까지 닿아 있고 명군의 문서 연락병들이 남해도에까지 드나들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붉은 비다으로 싼 그 두루마리는 개전 이후 명군 최고사령부가 나에게 보낸 최초의 문서였다. 종사관 김수철을 방안으로 불러들여 문서를 함께 읽었다.

 

  이제 일본군 수뇌부들이 속속 귀순하고 있으니 그 마음이 실로 어여쁘다. 왜는 본래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종자들이거니와, 우리 천자의 크고 깊은 교화의 덕이 저 금수와도 같은 왜에게까지 미쳐 일본군은 이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려 하고 있으니 실로 천자의 덕이 아니고서야 바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제 함대를 해산하도 군사를 풀어헤쳐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인간은 인간이므로 마땅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럿이 창생의 슬픔과 고통을 지극히 헤아리는 천자의 뜻이다. 이제 너희는 일본군 진영에 가까이 가서 공연한 싸움을 일으키지 말고 천자의 변방 남쪽 바다를 소란케 하지 말라. 내, 너희들의 수영을 한번 들여다보고 스다듬어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멀어서 가지 못하고 이제 글을 전하니 내가 친히 너희에게 간 것과 무엇이 다르랴. 대저 천자의 무장은 정한을 가벼이 드러내는 일을 삼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 알라.

 

 읽기를 마치고 김수철은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썰물은 갯벌 위에 새들이 내려앉고 있었다. 바람과 물결이 함께 먼 바다로 몰려나가서 바다는 비어 있었다. 섬 너머 수평선 쪽에서 바람 속을 날뛰는 물결이 하얗게 일어섰다. 빈 바다에는 시간의 흔적이 없었고, 지나간 싸움의 흔적이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마음의 오지에서 징징징 칼이 울었다.

 - 수철아, 고향으로 돌아가겠느냐?

 김수철의 시선은 바다 쪽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물기가 번졌다.

 - 나으리, 이미 돌아갈 고향이 없습니다..

 - 일본군과 명군은 돌아갈 고향이 있을 것이다.

 김수철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나으리, 이 문서는 장졸들에게 발설치 마십시오.

 - 너도 발설치 마라. 조정이 가엾구나. 우리는 가엾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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