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 고령화를 바라보는 여러가지 시점을 통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원인들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내용.

 

 

-------------------------

p56

 열정 혹은 감정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 passion과 '수동적이다'를 뜻하는 단어 passive는 어원이 같습니다. 고대 서양 철학자나 현인들은 감정을 인간의 탁월한 능력, 즉 생각의 힘을 무력화하는 일종의 방해꾼으로 보았습니다. 감정에 휩싸이면 냉철한 판단이나 자기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매우 수동적인 존재로 인간이 전락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고대 사상가들로부터 내려오는 감정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 혹은 부정적 편견의 흔적은 많은 심리학 이론에도 녹아 있습니다. 합리적 사고와 비합리적 감정이 맞붙은 대결에서 합리성에 판정승을 내려주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죠. 하지만 이 시각이 최근에는 바뀌고 있습니다. 좀 더 큰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 사고력보다 감정 시스템의 역할이 오히려 생존과 더 밀접하게 관련있을 수 있다고 여러 학자가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사회심리학에서도 감정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인간도 정말 중요한 결정은 무의식적이고 감성적인 수준에서 처리하고, 이성적 생각은 큰 방향이 정해진 뒤 거기에 그럴듯한 설명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미 사랑에 빠진 뒤 상대의 장점을 손꼽아보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때 상대방이 좋은 이유를 차분히 생각해서 조목조목 나열해보도록 하면, 이 커플은 오히려 헤어질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유명한 심리학 연구를 하나 소개해드리겠습ㄴ다. 사회심리학 실험에 참여한 피험자들에게 수고의 보상으로 몇 개의 추상화를 보여준 뒤, 하나를 집에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한 조건(이유 조건)에서는 선택한 추상화가 왜 좋은지를 설명한 뒤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다른 조건(느낌 조건)에서는 아무 이유를 달지 않고 그냥 가지 느낌에 좋은 그림을 가져가도록 했지요. 몇 주 뒤, 연구자들이 피험자들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지난번에 가져간 추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와서 바꾸어 가셔도 돼요." 흥미롭게도, 그냥 느낌이 좋아서 그림을 가져갔던 사람들보다 왜 그 그림이 좋은지를 설명해야 했던 사람들이 더 많이 그림을 바꾸어 갔습니다. 즉, 인간의 결정과 선택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 감정입니다. 그림 선택만이 아니라 출산과 같은 중대한 결정에도 해당됩니다.

 이유와 논리는 감정이 내린 선택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위력을 우리는 잘 의식하지 못해요. 그래서 논리와 합리적 생각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정작 선택의 밥상을 차려 놓은 것은 감정적 느낌이고, 여기에 슬며시 수저를 올려놓는 것이 이성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을 하든 못하든 감정적 경험은 우리 일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감정은 긴 진화의 여정에서 습득한 생존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p71

 매년 OECD 가입국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행복 조사에 이런 문항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려움에 처할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Yes"라고 대답하는 비율이 가장 낮은 국가가 한국입니다. 왜 이런 안타까운 현상이 발생할까요? 한 가지 중요한 이유로, 개개인의 관심과 따뜻한 심성이 가족을 비롯해 가까운 몇 사람에게 과하게 편중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 울타리 밖의 사람들인데, 그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하거나, 위협이나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상호 신뢰가 바탕이 되는 사회적 자본이 축적되기 어려운 분위기죠. 또 다른 이유로는 과도하게 타인 중심적인 삶을 산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항상 남을 평가하고,  또 남의 평가에 쉽게 위축되기 때문에 관계에서 즐거움보다는 스트레스를 느끼는 경우가 더 많지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서로 친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행복감이 높은 국가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가령,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는 사회적 금기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것, 그저 서로 다른 삶을 각자 사는 것뿐인데, 주제넘는 참견을 하지 말자는 것이죠. 다양한 삶을 인정하는 열린 태도로 관계의 기본을 지키고 존중하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높은 출산율을 이끌어냅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시내의 특이한 장면 중 하나가 인도에 가지런히 세워진 유모차 행렬입니다. 유모차 속에서 아기가 잠이 든 사이, 부모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십니다. 행복한 사회의 단면입니다.

 예전에 읽은 에릭 에릭슨이라는 유명한 발달심리학자의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좋은 엄마가 되려면 단지 좋은 사람이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정은 보람과 의미가 있지만, 고되고 힘든 순간들도 분명 찾아옵니다. 행복은 이 긴 여정을 시작할 용기뿐 아니라, 어려움을 이기며 순항하는 지혜와 힘도 준다고 생각합니다.

 

p106

 그 누구도 완벽한 엄마일 필요는 없고, 실제로 완벽한 엄마가 될 수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아이에게 완벽한 환경을 제공해줄 자신이 없어 출산을 주저합니다. 즉, 정말 아이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직 집을 마련하지 못해서' '아직 내 인생도 잘 살지 못해서' ' 아직 부모로서 소양을 덜 갖췄기 때문에'와 같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며 출산 결심을 지연하거나 비출산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는 심리학적으로 아주 틀린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그저 최적의 좌절을 제공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면 됩니다. 예상되는 장애물들을 미리 제거해두고 아이의 욕구가 언제나 즉각 충족될 수 있는 무균실과 같은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은 아이가 결국 스트레스에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아이가 깊은 수준의 자기 통찰을 할 수 있으며 회복탄력성과 유연성을 갖춘 꽤 괜찮은 성인으로 자라는 과정에서, 부모의 불완전함은 아이에게 좋은 시험대를 제공해줄 것입니다. 즉 좋은 주 양육자는 '그럭저럭 괜찮은 엄마'면 됩니다. 정작 필요할 때에는 없어서 화가 나기도 하지만 문득 돌아보면 계속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 말이죠. 그래서 소아정신건강 분야의 권위자인 아주대 병원 조선미 교수는 '살아만 있으면 좋은 엄마'라고 종종 말합니다. 그러니 너무 많은 책임감과 완벽주의적 기대를 가지고 출산과 비출산을 결정하지는 말아주세요.

 다만 우리는 좋은 개인이 되어야 하고, 좋은 커플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학생, 그리고 내담자가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엄마가 정말 불행해하면서 모든 자원을 투입해 만든 게 저에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까지 행복하지는 않아요. 저는 엄마처럼 할 자신도 없는데, 그럼 제 아이는 얼마나 더 불행하겠어요?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까지 애쓰면서 살았을까 생각하면 또 너무 안됐고요." 다시 말하자면 애초에 부모 세대가 가족 내 생활에서 편안한 행복감을 느껴왔다면 청년들의 비혼이나 비출산 문제는 지금과 다른 양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어요. 시집살이와 친척들의 과도한 간섭, 경제적 문제, 가부장제 문화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문제와 억압, 불합리한 허식들이 성인과 성인의 진솔한 정서적 교류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기혼자들이 모인 곳에서는 결혼생활의 고통을 과장되게 토로하고 불행을 경쟁했으며 미디어에서는 이를 희화하하기 일쑤였지요.

 그러나 부모가 그럭저럭 유쾌하고 행복하다면 자녀는 비혼을 결심할 때 부정적 감각의 부당한 영향 없이 이성적으로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제일 좋은 아빠는 '엄마한테 잘하는 아빠'라고 합니다. 부부가 재미있게 잘 지내는 것마으로 자녀들의 행복감은 높아집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개인의 심리적 요인들을 고려할 때, 복지 시스템의 보완만으로 비혼, 비출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럭저럭 좋은 개인 혹은 그럭저럭 좋은 부부와 같은 모습을 젊은 세대에게 보여주고 기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태도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저렇게 살아도 괜찮겠구나' '내 삶에 아이가 한 명쯤 있어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도록 말이죠.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