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책의 카테고리를 파악하는데 온라인 교보문고를 주로 이용하는데, 어떤 기준으로 그 카테고리를 나누는지 좀 의문이긴 하다. 이 책은 정치/사회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인문으로 분류해야 할 것 같다. 인문적 지식과 통찰이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 가득 들어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통찰들은 비단 대한민국에만 적용되는 것들은 아니다. 케이스들은 다 로칼에 관련되어 있지만 그것들을 아우르는 카테고리적인 내용들은 인류가 지속적으로 리마인드하면서 새겨야 할 주요한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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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숫자가 말을 하게 해야 한다

 한국 정부는 고위 공직자의 재산 내역을 PDF로 공개한다. 이것을 컴퓨터로 처리하려면 별도의 처리를 거쳐야 한다. 

 PDF는 사람이 보라고 만든 포맷이다. 컴퓨터가 자동으로 처리하려면 별도의 개발이 필요하다. 

 정부가 처음부터 그냥 구조화된 데이터로 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미국은 데어터법에 아예 포맷을 못박고 있다. 데이터법 정보모델 스키마라고 불리는 이것은 쉽게 말해 정부 예산 보고서를 기계가 읽을 수 있도록 하는 표준 포맷이다. 미 연방정부는 이 포맷을 공개해 다른 정부기관들도 쉽게 쓸 수 있도록 제공한다. 정부가 공개하는 데이터는 '기계가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법으로 구현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어떨까?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수많은 복지 비용을 지출하고 있지만, 각 지자체의 지역사회보장계획은 정책 목표 설정이나 성과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소득불평등과 빈곤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세청의 행정데이터가 공유되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정부기관 간에도 그렇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과 선별 재난지원금은 지금도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다. 다 줄 것인가. 선별해서 줄 것인가? 찬반의 소리가 높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미 전 국민 재난지원금도, 선별지원금도 지급한 경험이 있다. 그렇다면 효과를 측정해보면 되는 것 아닌가? 십수조 원의 돈이 들어간 일인데, 쓴 다음에 그 효과를 측정해보지도 않는다는 건 아주 이상한 일이다. 하다못해 작은 기업에서 1천만 원의 광고비만 써도 당연히 결과 리포트를 제출한다. 놀랍게도 기획재정부는 아직까지 어떤 보고서도 공식적으로 내놓지 않고 있다. 효과를 측정하지도 않고서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 건 근거가 없고, 근거가 없이 십수조 원의 예산을 쓰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정부가 숫자로 된 자료들을 이런 '구조화된' 형태로, 즉 분석가능한 데이터로 공개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민간의 수많은 전문간들이 데이터를 다각도록 분석하고, 통찰이 빛나는 논문들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누구든 수십 년치 숫자를 넣고 시계열 분석을 해 볼 수도 있고, 다양한 개선방안들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데이터가 4차산업혁명시대의 원유라고 한다. 디지털 혁신의 캐치프레이즈도 D.N.A. 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이다. 한 해에만 558조가 넘는 돈을 쓰는, 한국경제에서 가장 큰 단일 주체인 정부가 먼저 '데이터에 기반한' 정책을 펴는 게 D.N.A. 성공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p31

 수감율, 비만, 정신병, 중독 이런 사회적 지표들이 GDP와 관계를 보면 의외로 별 상관관계가 없는 걸로 나온다. 부자 나라인데도 비만율이 높고, 수감률도 높고, 덜 부자인데도 지표가 좋기도 하고.

 그런데 기대수명/문맹률/영아사망률/살인/수감률/미성년자 출산율/사회적 신뢰/비만/정신병/중독/사회적 유동성, 이런 지표들을 빈부 격차순으로 비교하면 거의 Y=X에 맞먹는 아주 강한 상관관계가 나타난다. '코로나에 왜 미국, 영구, 프랑스가 그렇게 맥없이 무너졌지?'라는 부분도 이렇게 보면 상당히 설명이 된다. 'GDP가 핵심이 아니었구나'하는 것이다.

 불평등을 완화해야 성장이 빨라진다는 OECD 공식보고서도 있다. 2014년 OECD는 <불평등과 성장>이라는 이름의 리포트를 내고 낙수 효과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OECD 회원국의 1985년부터 2005년까지의 지니계수와 1990년부터 2010년까지의 누적성장률을 사용해 분석을 했더니, 지니계수가 0.03포인트 악화되면 경제성장률이 무려 0.35%씩 떨어진다는 게 확인이 된 것이다. OECD는 "낙수 효과가 아니라 불평등 해소가 성장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면서 "불평등을 빨리 해소하는 국가가 빨리 성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p35

 현대 한국인의 문해 능력은 세계 최하위 수준에 가깝다. 청취력도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상대의 얘기를 제대로 경청한 뒤 토론하고 합의안을 찾는 것, 타협하는 법이 우리의 (입시) 교육에는 빠져 있다.

 도덕적 개인은 가르치되, 합리적인 시민을 가르치지 않는 것, 신독愼獨(*노자에 나오는 말, 공자는 모름지기 신독하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홀로 있어도 예를 갖추고 법도에 어긋나서는 안된다는 뜻) 하되 협업하지 않는 것, 현대 한국 사회의 공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공교육을 대학까지 정상적으로 다 마쳐도 계약서 한 장을 제대로 못 쓰고, 취업을 위해 애는 쓰지만 노동법은 읽어 본 적도 없고, 딜은 영화에서나 본 적이 있는 교육은 명백히 고장이 나 있따. 사람과 사람이 뉴런처럼 촘촘히 연결된 초연결의 사회에서 이런 결점은 치명적인 걸림돌이다. 도끼를 치우고, 상소문을 던져버리고, 초연결사회를 사는 현대 시민의 옷을 입어야 한다. 상대의 말을 깊이 경청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안을 마련해 손을 맞잡는 경험을 어릴 적부터 가르쳐야 한다. 

 

p46. 1996년, 한국영화의 느닷없는 황금기

 한국 영화 얘기를 해보자, 1996년과 2006년 사이에 한국영화가 느닷없는 황금기를 맞는다. 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97년 <넘버3> <접속> <초록물고기>, 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99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 <박하사탕>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1년 <소름>, 2002년 <복수는 나의 것>, 2003년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지구를 지켜라>, 2004년 <송환>, 2006년 <괴물> 등등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아~ 할 영화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이들 극영화 15편 가운데 무려 8편이 감독 데뷔작이었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로 봉준호 감독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고, 같은 해 박찬욱 감독은 세 번째 연출작 <공동경비구역 JSA>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체 96년도에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해에 영화 사전심의가 폐지되었다. 사전 검열이 폐지됐고, 공연윤리위원회도 사라졌다.

 검열이니 사전심의니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거다. 조영남의 <불꺼진 창>은 왜 창에 불이 켜져 있어야지 꺼졌느냐고 금지, 이장희의 <그건 너>는 왜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냐고 금지, 양희은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뤄지지 않느냐고 금지했다. 배호가 노래한 <영시의 이별>은 당시 통행금지가 밤 12신데ㅔ 그 시간에 헤어지면 언제 집에 가느냐고 금지곡이 됐다. 그러다가 사전심의가 폐지되고, 뉴런이 사방으로 자유결합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휩쓸었고, 넷플릭스 상위권을 K드라마가 채우고 있다. 일본은 TV 시리즈 10위 중 절반이 한국 드라마다. <사랑의 불시착>은 일본에서 230일이 넘도록 톱 10이다. 대만은 톱 10 중 9개, 말레이시아는 8개, 베트남은 7개가 한국 드라마인 때도 있다.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최고 경영자가 재미있게 본 한국 드라마로 뽑은 <킹덤> < 사랑의 불시착> <사이코지만 괜찮아> <승리호>들이 끊임없이 리스트를 점령한다. 최근에는 애플도 한국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올해도 윤여정 씨가 지명되는 영화제마다 여우조연상을 타낸 끝에 봉 감독에 이어 2년 연속 아카데미상으로 화려한 매듭을 지었다.

 

p52

 뉴런의 자유결합이 지능을 만들듯이, 재능의 자유결합이 경제를 꽃피운다. 민주주의는 한국의 경제와 문화를 위로 밀어올리는 최고의 플랫폼이다. 당연한 듯 보이는 이런 K-민주주의는 기실 유리그릇처럼 위태롭다. 사회 곳곳의 인재들을 생각에 따라, 정권의 친소 관계에 맞춰 블랙리스트로 분류하고 갈라치기를 했던 게 불과 몇년 전이다. 번영은 공짜가 아니다.

p84. 왼쪽으로 가는 영국차

 오래전에 영국에서 마차는 왼쪽 통행을 했다. 오른쪽으로 다니면, 대부분 오른손잡이인 마부가 휘두르는 채찍이 자칫 지나가는 행인을 때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만들어진 자동차도 자연스럽게 왼편으로 다니게 됐다. 이 '자연스러움'의 결과로 영국과 영연방 일부, 그리고 따라서 채택한 일본 등은 두고 두고 비싼 비용을 치르게 된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오른손으로 수동식 기어를 조작하기 편하게 핸들을 왼쪽에다 뒀기 때문이다.

 우핸들을 좌핸들로 바꾸는 것은 단순히 운전대만 바꿔서 되는 일이 아니라 파워트레인까지 뜯어고쳐야 하는 큰 작업이다. 인테리어도 통째로 바뀐다. 따라서 차를 만들 땐 언제나 수출용 차와 내수용 차, 2개의 라인을 만들어야 한다. 차를 수입하는 건 더 큰 난관이다. 좌측통행용으로 새로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p85. 인장제도문화보존연맹

 일본 국회에는 도장 문화를 존중하는 '일본 인장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 연맹'이 있다. 얼마 전까지 다케모토 나오키라는 의원이 이 연맹의 회장이었다. 이 양반이 몇 달 전에 과학기술-IT 담당장관이 됐다. 그는 자기 입으로 컴맹이라고 자복한 사람이다. 취임하면서 역사적인 명언을 남겼다. "행정절차의 디지털화와 함께, 서류에 날인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도장 문화의 양립을 목표로 한다." 이 명언이 얼마나 비난을 많이 받았던지, 그는 결국 '일본 인장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 연맹' 회장직으로 사임해야 했다.

 일본은 세계 최고의 로봇 강국이다. 그 로봇 강국 일본에서 2년쯤 전에 덴소 웨이브와 히타치 캐피털, 히타치 시스템즈 등이 자동 날인 로봇을 개발했다. 

 히타치 캐피털 측은 "산업 현장에서 '날인 작업이 귀찮기 대문에 효율화해 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 개발했다"고 말했다. "사람 대신 로봇이 서류 뭉치를 분류해 도장을 찍으면 시간을 절약하는 효과가 있고, 이는 사실상 '서류를 전자화'하는 것과 같다."

 'AI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며 인공지능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원격근무 잘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원격근무는 잘 하고 있는데, 인감을 찍어야 하는 일이 있어 가끔씩 사무실에 나갈 수 밖에 없다'고 답했다. 천하의 손 회장조차도 인감을 찍어야 돌아가는 일본 사회의 구조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p100. 한국, 오래된 맛집의 비밀

 몇 해 전 국내 유수의 음식 배달 서비스 회사에서 한국의 오래된 맛집의 비밀을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가동한 적이 있다. 오래된 맛집의 비밀을 알 수 있다면 이것을 잘 정리해 자사의 서비스를 쓰는 자영업자들에게 알려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막상 연구 결과가 나온 뒤 이 업체는 발표를 하지 못하고 접었다. 비밀을 발견하긴 했는데, 전혀 자영업자들에게 알려줄 만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 연구결과는 오래된 맛집의 비밀로, 압도적인 단 하나의 변수를 가리켰다. '자가 점포'. 자기 점포에서 영업을 하지 못한 거의 대부분의 맛집들이 장사를 이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 뒤를 이어 잘 나가던 경리단길이 임대료의 급격한 상승으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난 사례가 나온다)

 임차인이 갖은 노력을 다해서 입소문을 내고, 그래서 손님이 늘어나고 매상이 올라가면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을 건물주들이 냉큼 임대료로 가져가 버린다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노력을 할수록 벌을 더 받게 되는 구조다. 이런 구조에서 100년 된 노포가 나온다면 그게 기적이지.

 우리의 임대차보호법에 해당하는 게 일본의 차지차가법이다. 

 (일본의 경우는) 임차인이 월세를 제때 내지 못하고 있건, 임차 기간 중 건물에 손상을 입혔다거나 하는 등의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건물주는 임대 연장을 거부하지 못한다고 법으로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주변 비슷한 건물의 임대료와 비교해서 상당히 낮은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임대료를 올리지 못하게 못을 박고 있다. 분쟁이 있으면 재판으로 해결해야 하며, 주변의 임대료가 많이 올랐다는 것도 건물주가 입증해야 한다.

 이런 구조라면 식당 주인이 죽을 힘을 다해서 열심히 할 만하다. 노력의 대가를 고스란히 자신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열심히 한 결과로 쫓겨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p148

 산업혁명은 역사상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인류의 생산성을 높여 놓았지만, 초기의 90년간 그러니까 거의 한 세기 동안 평균적인 서민의 생활수준은 나락으로 떨어진 채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p155

 얼마 전 애플의 신용카드 발급을 위한 신용등급평가시스템이 동일한 조건의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 더 낮은 신용한도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소식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금세 퍼져나갔고, 미 금융당국도 조사에 착수했다. 이 사건은 2가지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첫 번째, 애플이 사용한 금융 데이터에는 처음부터 고객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고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인공지능은 애초에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애플 스스로도 왜 자신들의 알고리듬이 이런 편향된 결과를 불렀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인공지능이 저지른 일이었던 것이다. 애플과, 카드발급을 맡은 골드만삭스는 과거의 데이터 자체가 편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짐작했다.

 

 지난해 아마존은 몇 년간 개발해서 채용에 적용해오던 인공지능 툴을 폐기했다. 최근 10년간의 채용 데이터를 근거로 수많은 채용 후보자 중에서 적합한 사람을 가려내는 툴이었는데, 그 결과가 남성 편향적이었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지난 10년간 남자직원이 훨씬 많았는데, 인공지능은 이것을 주요한 입력요소로 판단한 것이다. 아마존은 이 편향을 제거할 적절한 방법이 없다고 판단해 결국 툴을 개발해온 팀 자체를 해체했다.

 

p158

 케인즈는 '장기적인 균형'이라는 언술의 허무함을 이렇게 설명했다.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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