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의 인생관, 철학, 법무부장관 1년간의 검찰개혁의 기록, 정치관 등을 두루두루 알 수 있는 대담집 형태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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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6

 정치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출세하려고 정치하는 게 아니잖아요. 공공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일이잖아요. 저는 어떤 선택 앞에서 제 앞날을 고민하며 일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방탄조끼를 입고 일한 적이 없어요. 문제가 있다면 바로 뛰어들었습니다. 판사를 할 때도, 국회의원 준비를 할 때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할 때도 제 자신을 모두 던지면서 살아왔습니다.

p51

 사실 제가 서울 목동에 살면서 인천지법으로 출퇴근하다가 아이를 낳기 위해 남편의 고향인 정읍으로 갔어요. 남편의 의견을 따른 거에요.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해에 대선이 있었는데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선거에서 졌어요. 남편이 너무 속상해하더라고요. 선거에 패배한 이유는 지역주의를 깨지 못한 탓이라며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이 아이는 호남에서 낳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촌스러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땐 그만큼 호남분들의 절박함이 컸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남편의 뜻에 따라 전북대 병원에서 낳고 전북 주민등록번호를 받았어요.

 아이가 크면서 운동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스포츠매니지먼트과를 나와서 전북 FC구단에 들어갔어요. 정말 기뻐하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날 왜 자기만 전북산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빠가 널 담보잡은 거란다. 오죽 절절하면 그랬겠냐"라고 그때 이야기를 해줬더니 "처음 들었다"면서 놀라더라고요. 이 아이가 선거 때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2016년 선거에서 제가 식도염을 앓았는데 목소리가 잠겨 있으니 아들이 엄마를 대신해 선거 유세차에 올라 유세를 했어요. 청문회 때는 아들도 많이 힘들었는지 술에 취해 들어와서 저한테 한마디 하더라고요. "엄마, 존경해요"라고요.

 오히려 더 미안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존경한다는 말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어요. 존경한다는 말은 제가 죽었을 때나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거리감이 느껴졌어요.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엄마 나 힘들었어요. 열심히 살고 싶었어요. 엄마한테 부담 안 주려고 다리 아픈 것도 관리했고, 운동 많이 하면 다리 아프니까 하고 싶은 운동도 제대로 못 했고, 그런 상태로 군대도 갔고.."라고요.

 아들은 군대 가서 아픈 게 아니라 가기 전부터 아팠어요. 제가 아들에게 말했어요. "엄마가 공인이니까 엄마 때문에 네가 억지로 결정하지 마라. 아프면 순리대로 하자. 그에 맞는 법과 제도가 있으니 솔직하게 아프다고 말하고 그렇게 하자"라고요. 그런데 오히려 아들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군대를 안 가면 엄마한테 시빗거리가 만들어질 것 같다"며 입대했거든요. 정치를 하다 보니 가족의 건강에 신경 쓸 수가 없었어요. 그런 와중에도 스스로 잘 자라주고 엄마 생각해서 아픈 다리를 이끌고 군대까지 갔는데 그런 일이 생겼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요. 제가 병원을 데리고 가줍니까. 먹는 거라도 제대로 챙겨줍니까. 저는 아들에게 항상 미안해요.

 

p77. 겂없는 초등학생

 

추미애 : 제가 1958년 개띠잖아요. 1965년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그 시절 대구도 모두가 가난했어요. 학교 담벼락에 천막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여름엔 검은색 팬티 같은 내의만 입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가난이 일상이었지요. 그러나 그때는 가난이 창피한 것도 두려운 것도 아니었어요. 모두가 가난했으니까요. 5학년에서 6학년 올라갈 무렵인 1970년 초반까지 가난의 풍경은 거의 변하지 않았어요.

 1970년도에 6학년에 올라갔어요. 배정된 반을 찾아갔더니 먼저 온 아이들이 모여서 담임선생님 흉을 보는 거에요. "아, 우리가 선생님을 잘못 만났다. 선생님은 부자 아이들만 좋아한다. 학부모에게 촌지를 받고 성적을 높여준다. 이 선생님한테 과외를 받지 않으면 성적을 잘 받을 수가 없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제자리로 갔어요. 누군가 "선생님 온다"라고 하니까 아이들도 후다닥 자리로 가 앉았어요. 그런데 선생님 얼굴이 무척 화가 난 표정이었어요.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자마자 "누가 나를 흉봤어? 당장 나와!"라고 소리치니 아이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이 제일 앞에 앉아 있던 아이를 일으켜 세우더니 토끼귀 잡듯이 왼손으로 귀를 잡은 채 오른손으로 아이가 기절할 정도로 막 때리는 거에요. 다른 아이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요.

 선생님이 분을 삭이지 못한 목소리로 "앞으로 너희 같은 놈들은 안 가르쳐. 싫으면 다 나가" 그러는 거에요. 그때 저는 그 선생님한테 더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가!"라고 하는데 아무도 안 나가면 선생님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것 아니에요? 전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에요. 새로 받은 교과서를 가방에 탁탁 집어넣고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어요.

 

p100

 전두환 시절이었어요. 1985년 제 첫 부임지는 춘천지방법원이었고요. 그 이듬해인 1986년 10월 28일 대학생 1,500여 명이 참가한 건국대학교 점거농성 사건이 있었습니다. 구속된 학생만 1,000여 명이었고 그 중 400여 명이 국가보안법과 집시법으로 기소되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이른바 불온서적 압수수색이 전국적으로 일제히 시작되었어요. 판사들이 차례로 당직 근무하면서 영장업무를 맡았어요. 사건 관련 검사가 춘천의 제일 큰 서점인 '청구서점'에 대한 압수 수색 영장을 청구했는데, 저는 그 영장청구서를 읽으면서 가슴이 꽉 조여왔습니다.

 압수수색 목록이 기가 막혔어요.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김대중의 <옥중서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이었는데 왜 이 책을 압수수색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 국민을 바보로 아는 건가 싶었어요. 영장청구 사유가 경범죄 처벌법상 '유언비어 유포'라가 되어 있었어요. 근거도 없고 법적 정당성도 없었지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어요.

(영장청구, 기각할 생각이셨나요?)

 네, 그렇지요. 어떤 논거로 기각할지 궁리했습니다. 그냥 기각하면 공안정국 분위기로 저를 몰아세울 게 뻔하니 반박하기 어려운 논리를 세워야 했어요. "국민의 알 권리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이다. 경범죄 처벌법에도 이 법을 남용하여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남용 금지 조항이 있다. 영장청구서에는 혐의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책을 유언비어라고 볼 근거 자료도 없다." 이것이 제 논리였어요.

 사실 그 다음 일이 경악스러웠어요. 알고 보니 전국 법원에 같은 영장이 접수되었는데 모두 영장이 발부되었더라고요. 저 혼자서만 기각한 거지요.

(무섭지 않으셨어요?)

 두려움보다는 부끄러운 판사로 남지는 않게 되었구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그렇게 써놓은 건 그다음 당직 판사가 그걸 참고해서 영장청구 근거로 삼으라는 뜻도 담겨 있었지요.

 (아, 또 다른 영장이 접수되면 기각의 근거로 쓸 수 있는 논리를 남긴 것이기도 하군요.)

 네, 그런데 다음 날 당직 판사에게 전화가 걸려왔어요. 기각된 영장이 다시 접수되었다고요. 기각된 영장을 재청구하려면 지적된 사항을 보완해서 제출해야 해요. 그런데 검사가 마치 처음 청구하는 것처럼 만들어 영장을 접수시켰어요.

(속인 거네요)

 그렇지요. 형사소송법 절차를 무시하고 법원을 속인 겁니다. 이걸 이상하다고 여겨 당직 판사가 확인차 전화를 건 거였는데 결국 그분은 공안정국의 힘에 밀려 영장을 발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결국 제 뜻대로는 안 되었지만 당시 법원장님은 그 이후로 저를 진지하게 대해주셨어요.

 

p180. 문재인과 추미애의 인연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준비 기획단장'이었는데 경선 규칙을 정하려고 후보들 의견을 듣기 위해 한 분씩 만나게 돼요. 손학규, 문재인, 정세균 세 후보 중에 문재인 후보를 가장 마지막에 만났어요. 문재인 후보는 선하고 지성이 넘치는 온화한 풍모셨지요. 수고 많다고 덕담을 먼저 거네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본인은 어떤 규칙이라도 상관없다. 당이 하나로 모였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경선 과정에서 서로 상처되는 말을 주고받게 되면 응어리지지 않을까 염려를 많이 하셨어요.

 "반민주 세력에게 또다시 정권을 내준다면 불행한 일 아닙니까"라고 결의에 차서 말씀하셨어요. 내부 논란과 분열을 걱정하시면서 "당내 경선이 자칫 네거티브로 흐르면 본선보다 힘들어집니다. 오히려 본선에서는 국민들도 이명박 정권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단합이 될 수 있어요. 잡음 없이 당내 경선을 치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 경선 규칙에 대해서는 당에 모두 일임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통 크고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2012년 대선 당시 역할은 국민통합위원장이었습니다. 당시에 캠프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국민 통합이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었고 문재인 후보가 직접 국민통합위원장에 윤여준 전 장관 등 보수 쪽에서 건너오신 분들도 공동으로 참여지시자고 했습니다. 저는 유세 일정을 짜서 전국 유세를 다녔습니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까지 밤늦게 유세를 마치고 기진맥진햇 서울로 올라왔는데, 결국 패배결과를 보고 실망이 컸지요. 그때 우리 쪽 패착이 뭐냐 하면 선거를 지휘해야 할 당의 중심이 흔들린 거예요. 마지막에 당 안팎에서 문재인, 안철수 후보단일화를 위해 지도부 총사퇴를 해달라고 했어요. 그 당시 이해찬 대표와 제가 최고위원이었는데, 지도부 전원 사퇴를 하게 되니까 당이 선거지원을 제대로 못 하는 거예요. 제가 국민통합위원장이 되어 전국을 다녀보니 공조직은 대부분 팔짱만 끼고 있더라고요.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선거에서는 당 중심으로 당원과 지지자가 후보를 알리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거지요. 2018년에 문재인 대통령께서 이해찬 대표가 중간에 사퇴해서 2012년 선거에 패배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어요. 그만큼 당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것입니다.

(2017년도 대선에서 당 중심 선거를 치러낸 이유가 그런 뼈아픈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군요)

 2012년의 경험이 큰 교훈이 되었지요.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조기대선을 치루게 되어 선거 준비기간이 짧았던 상황에 차질 없이 정권교체를 완수해야 하는 막중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당 중심 선거를 실현해냈어요.

(2012년과 2017년 대선 사이인 2015년에는 전당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문재인 후보와 박지원 후보의 대결이 첨예했지요. 그 선거가 끝나고 지명직 최고위원이 누가 되는지 모두 궁금해 했는데, 당대표로 선출된 문재인 대표가 뜻밖에 추미애 의원을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하셨어요)

 사실 처음에는 더 좋은 분을 모셨으면 좋겠다고 사양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누군가 문재인 대표에게 저를 강력히 추천했다고 해요. "정치를 몇 선을 하는 동안 처음과 같은 자세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추미애다. 지명직 최고위원을 시키면 상징적인 의미가 클 것 같다. 여성으로서 통합과 개혁의 이미지가 있고, 여러 세력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이유였다고 들었어요. 과분한 추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선거에서 진 후 생겨난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 반드시 문 대표를 도와서 다음 대선에서 이기겠다는 각오를 세우고 최고위원 지명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p193. '의혹'이라는 이름의 인권유린

 (청문회 과정에서 아들 병역 문제가 불거졌어요. 예상하셨나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병역문제의 경우 대체로 병역 이행 여부를 따졌으니까요. 병역기피 사실이 없으니 생각하지도 않았지요. 예상 질문에도 없었고요.

 청문회 당일에 관련 질문이 나왔을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준비한 자료 중에 진단서 등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 충분해서 덤덤하게 사실 그대로를 말했지요.

 (그런데 문제가 커졌잖아요. 언론이 대서특필하면서 판이 달라졌어요)

 언론의 테러였엉. 교수님과 대담하는 이 순간에도 <문화일보>는 '오후여담'이라는 칼럼(2021.5.6)에서 '공인 의식 파탄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문재인 정부의 인사정책을 공격하며 "추장관 아들 탈영의혹"이라고 썼어요. 만기제대한 아들에게 탈영이라 하니 어처구니가 없죠. '의혹'만 붙이면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이건 언론이 아니지요. 테러 그 자체에요.

 (언론이 그야말로 공개처형장이 되버렸어요. 무허가 재판을 벌이고 낙인찍어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인권유린도 이런 인권유린이 없습니다. 조국 전 장관의 경우에는 입시 문제, 추미애 장관의 경우에는 군대 문제를 꺼내, 대한민국에서 보통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덫을 놓은 셈이었어요. 병역기피 사실은 없으니까 군대에서 특권을 누렸다는 식으로 부각했지요)

 처음에는 대응할 가치를 못 느꼈어요. 진실이 너무 확실하니까 저러다 말겠지 생각했어요. 문젯거리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언론은 사실에 관심이 없는 거에요. '의혹'이라고 빠져나갈 단어를 붙인 다음 일방적으로 매도하더군요. 공인은 그런 근거 없는 의심도 문제제기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이었어요.

 (언론이 아니라 정치공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방향과 목적을 정해놓고 그걸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겁니다. 이런 식의 언론은 저널리즘의 본령과 완전히 배치됩니다. 언론이 이렇게 타락하고 부패해버린 현실에 대해 깨어 있는 시민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 거지요.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 무너져요. 방어권을 박탈해버리는 건데. 우리 언론의 현실은 그런 점에서 너무나 처참한 지경입니다.

 (그런 적대적 환경을 뚫고 나아가야 했던 거지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확실히 보게 된 것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지요. 언론이 하도 크게 부풀려서 아들 병역 문제를 청문회에서 중요하게 다뤘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겠지만, 정작 아들 문제는 청문회 현장에서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제가 낙선한 후 남은 정치자금을 어떻게 처리했느냐, 횡령한 것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되었어요.

 하도 오래된 일이라 횡령이 아니라고 입증하는 증거를 확보하는 데 애먹었어요. 15~16년 전 일인 데다가 액수가 1억 원이나 되었어요. 하지만 결국 입증해냈습니다.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과 한국심장병재단에 각각 5,000만 원씩 기부했는데 그 증명 자료를 찾았습니다. 해당 단체에 가서 기부금 영수증을 받아오니까 저를 어떻게 해보려 한 이들이 뻘쭘해졌지요.

 (그런 일은 언론이 보도를 안 해요. 일단 목소리를 크게 해서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거지요. 그렇다면 아들 병역 논란은 어떻게 점점 커졌나요?)

 청문회 때 그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으면 진단서 등으로 다 해명했을 거예요. 그런데 해명할 기회를 안 주는 거지요.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나 보다 했어요. 그런데 청문회가 끝나고 나니까 법사위 간사인 김도읍 의원이 주도하여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이름으로 고발했어요.

 다 해명된 사안을 고발하니까요. 청문회 때 아들 병역 문제는 가벼운 질문 정도로 나와서 제가 충분히 답변했거든요. 아들이 원래 다리가 아팠었고, 군 복무 중에 수술이 필요해서 절차를 밟아 병가를 얻어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추가치료가 필요한 상황에서 병가 연장이 안 된다고 하니, 방법을 찾아보다가 개인 휴가를 쓰면 된다고 해서 절차대로 추가 치료를 받고 복귀한 뒤 만기 전역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끝났어요. 그날 본회의에서 공수처법이 통과됩니다. 그러니까 청문회가 진행되는 저녁 무렵에 공수처법이 통과되고, 별다른 심각한 질문 없이 서로 웃으면서 잘 끝났어요. 그런데 그다음 날 바로 고발 조치를 취한 겁니다.

(해명이 다 되었는데, 저쪽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고성이 오가지도 않고 큰 한 방 자체도 없었어요. 그때 김도읍 의원이 야당 간사로서 제 검찰개혁 의지를 여러 차례 확인했고, 어차피 자기들이 반대한다고 임명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나온 게 아닌가 싶었어요. 이후의 이야기지만, 법무부장관 재임 때인 2020년 4월에 채널A 사건이 터지면서 검찰이 엄청나게 흔들렸고, 제가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발동하자 엄청난 반발이 있었죠. 바로 그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아들 병역 문제가 재점화된 거예요. 병역 문제의 불씨가 꺼질까봐 계속 들쑤신 거지요.

 

p197. 인사혁신과 윤석열의 저항

 (채널A 사건이 터지기 전의 상황도 사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편했던 거 아닌가요?)

 그랬을 거예요. 1월에 대검 검사급, 검사장 32명의 인사를 단행했고요. 그때 이른바 '윤석열 사단'이 해체됩니다. 제 개혁 조치 가운에 첫 번째가 '검찰 인사 비정상의 정상화'였어요. 김영삼 대통령이 신군부 세력의 중심인 하나회를 척결한 일에 비교할 수 있겠네요. 2019년 여름, 윤석열은 검찰총장이 되자마자 박상기 법무부장관을 제치고 법무부 윤대진 검찰국장과 청와대 비서관을 시켜 기수를 무시하고 자기 쪽 사람들을 초고속 승진시켰습니다. 이른바 특수통 중심으로 검찰을 장악한 인사 전횡을 저지른 것인데, 그 여파로 70여 명이 검찰을 떠났어요. 그래서 '윤석열 사단'이라는 말이 떠돌았던 것입니다. 인사 정상화를 통해 이런 검찰 내 세도정치를 일차적으로 혁파한 거예요. 연달아 2월에는 중간 간부 인사까지 마무리지었어요.

 (윤석열 총장이 가만 있었을 리 없잖아요.)

 윤 총장은 추 장관이 법무부 인사 내용을 제대로 알 리 없다며 청와대가 배후 조정자라고 판단한 것이 한동훈 검사장의 녹취록에도 드러나지요. 인사발표 며칠 후인 1월 10일 검찰은 청와대를 압수수색해요.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수사를 한다며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청와대 여민관의 자치발권 비서관실에 영장집행을 시도했다가 8시간 만에 철수하는 수사활극을 벌였지요.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요. 저는 인사 정상화를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조사하고 연구해서 인사 조처했어요. 윤 총장은 청와대 압수수색 이후 곧바로 제 아들 병역 문제를 수사하기 시작했다고 언론에 흘립니다. 그런데 수사할 게 없거든요. 수사에 착수했으면 진단서를 보자고 하는 등의 조사과정이 있게 마련인데, 검찰이 실제로 진단서를 본 때가 8월이에요. 인사에 불만을 품은 윤석열 총장이 저를 겁박하고 여론을 조작하느라 언론 플레이를 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지요.

 (인사는 어떻게 한 겁니까?)

 검사장급 인사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 고검 검사급 인사를 하지요. 평검사 인사는 법적으로 일정이 정해져 있어요. 2월 첫째 주 월요일에 부임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 10일 전에 인사안을 발표해야 합니다.

 (검찰개혁을 바라는 이들은 검찰의 지휘체계가 정상화될 것이라고 기대했지요. 하지만 청와대 압수수색, 추 장관 아들 병역 문제가 재점화되는 등 개혁에 저항하는 반격이 이어졌습니다.)

 2월에 청와대가 관련되어 있다면서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사건을 만들고, 이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연루되어 있다면서 2020년 4.15 총선을 앞두고 신라젠 사건을 터뜨립니다. 한마디로 검찰이 정치공작을 했던 겁니다. 그에 더해 라임 사건을 수사하면서도 청와대 고위직과 여권 정치인들을 엮으려고 했던 것이 한참 후에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의 진술로 다 드러나지요. 검찰이 수용자를 압박하고 회유해 사건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말입니다. 검사 술접대 사건이 폭로되었지만 연루된 검사들을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처리한 것과는 상반되지요. <뉴스타파>의 심인보, 김경래 기자가 쓴 <죄수와 검사>를 읽어보면 검사들이 사건을 어떻게 조작하는지 자세히 나와요. 당하는 쪽에서는 지옥이지요.

 라임 사건에서는 강기정 수석을 겨냥했고, 옵티머스 사건에서는 임종석 실장을 겨냥했지요.

 (정리하면 법무부장관으로 취임해 인사를 통해 검찰의 지휘체계를 정상화하자 반격이 계속되었던 상황이네요. 지휘체계의 정상화는 결국 인사에서 나오니까요. 조국 전 장관 때도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휘체계를 교란해 장관을 흔들고 정치검찰의 결속을 다졌지요. 이른바 '검찰의 난' '검란' '검찰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군대의 쿠데타와는 달리 법과 제도의 영역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일상에서 잘 감지되지 않아 '조용한 쿠데타(Silent Coup)'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국가권력의 핵심을 자신들이 장악하겠다는거지요. 심지어 대통령까지 제압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지휘체계를 확립해나가는 것이 검찰개혁의 핵심과제라고 봅니다. 윤석열 총장의 대선 등판은 검찰의 쿠데타를 정치적으로 완결하겠다는 수순으로 판단됩니다. 이를 한국 사회의 지배 카르텔이 합심해 밀고 있고요. 법무부장관 임명 직후부터 이런 엄중한 현실을 인식하셨다고 알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의 판단은 어떠했나요? 간극이 있지는 않았나요?)

 

p239

 수사와 기소를 분리시키면 수사정보를 쥐고 이상한 짓을 못 하게 할 수 있어요. 있는 사건 덮고, 없는 사건 만드는 구조가 깨집니다. "부패검사는 어제는 없는 사건을 만들어서 이름을 얻고, 오늘은 있는 사건을 덮어서 돈을 번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이걸 깨야 사법정의, 민생정의가 확보되지요.

 

p292

김민웅 : 그렇지요. 민생과 개혁을 분리하면서, 민생을 소홀히 하고 개혁에 집중했기 때문에 민생이 어려워졌다는 논리를 펴는 것인데, 그건 개혁과 민생이 하나라는 걸 부인하는 것입니다. 개혁의 목표는 민생입니다. 과학기술의 해법에만 집중하다 보면 생태환경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처럼, 개혁 없는 민생을 말하면 기득권이 장치해놓은 덫에 걸린 민생의 현실이 보이지 않게 되지요.

추미애 : 저는 개혁과 민생을 별개로 나누는 이분법은 신자유주의적 계략이라고 봅니다. 시장을 지배하는 세력의 계략이지요. 그들은 "개혁은 정치 주제이고 민생은 경제 줒다. 정치가 개혁을 명분으로 경제를 간섭하고 위축시킨다. 따라서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고 정치가 경제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작은 정부여야 한다. 정치인은 경제에 무식하고 무능하다"는 논리를 자꾸 퍼뜨리고 주입시킵니다. 정치의 힘을 빼고 자본에 대한 간섭을 못 하게 만들려는 의도입니다.

 

p302

추미애 : 김 교수님의 진단이 바로 현실이에요. 비교적 돈에 덜 쪼들리는 중산층도 자신들의 노후나 자녀 결혼 등을 위해 돈을 불려보려고 주식투자하다가 금융자본 기득권 세력의 먹잇감이 됩니다. 거기에는 또 검피아가 역할을 하지요. 라임이나 옵티머스 사건 같은 경우도 관피아,모피아,검피아가 합세해서 일반 투자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금융사기 사건이거든요. 이런 금융시장 교란 행위를 바로잡으라고 검찰조직에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만들었던 것인데 거기가 오히려 범죄의 온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김민웅 : 그래요? 그런데 언론을 보면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이 폐지되어 금융범죄를 신속하게 수사할 수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 https://www.asiatime.co.kr/article/20210901500321?1=1 , 추미애 장관이 폐지한 증권범죄수사단은 현재 다시 설치됐다)

추미애 : 지난해 초 검찰 조직을 개편할 때, 증권범죄전담수사 기구 자체를 없앤 건 아니었어요. 서울 남부지검의 증권범죄합동수사단 대신 금융조사 1,2부가 금융 증권범죄를 전문적으로 수사하도록 하면서 기존 합동수사단의 카르텔을 허물려고 한 것이지요. 다만 그들이 마치 법무부가 정권수사를 못 하게 하기 위해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을 폐지한 것처럼 왜곡 주장하는 이유는 그들만의 부패 특권 카르텔을 다시 부활시키고 싶다는 의도예요. 부활시키기 이전에 특권 카르텔을 깨는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김민웅 :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은 금융시장 질서 교란을 막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직이라고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추미애 :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비리의 온상이 되었어요. 여러 차례 주가 조작으로 재벌이 된 전관변호사 박OO과 거물사기꾼인 증권자 대표 유OO이 있었어요(http://www.newsfreezo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1577, 이 링크를 보면 누군지 알 수 있다).

박 변호사와 유 회장은 저축은행 '상상인'의 대주주이기도 한데, 상상인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기업사냥'을 해요. 그리고 그 기업에 관한 허위 정보를 흘려 주가 조작을 하고 주가가 올라가 최고점을 찍을 때 주식을 팔아치우는 거지요. 그런 먹튀 수법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어요. 전관변호사 박OO은 곧 재벌변호사라고 알려졌지요. 그들이 단숨에 수십, 수백억 원을 가로채는 동안 허위정보를 믿고 투자에 뛰어든 수많은 서민들은 주식이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이 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 식의 범죄 행각은 2015년부터 2018년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무려 10개의 회사를 기업사냥했어요. 상상인의 돈이 어느 기업에 멀쩡하게 투자된 것처럼 속이면 주식 가격이 치솟아 고점에 이르렀을 때 팔아치우지요. 그들은 사냥한 기업의 경영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해당 회사자금도 횡령해 부도를 내고 멀쩡한 기업을 고사시켰습니다. 공장 가동이 멈추면서 대량해고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자본시장을 어지럽히고 기업을 고사시킨 이 사건들을 관할했던 서울 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은 초창기부터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피해규모와 금액, 피해자의 수가 막대하게 커졌습니다. 2015~2016년 증권범죄합동수사단장은 김OO 부장검사였어요(https://www.mk.co.kr/news/special-edition/view/2015/05/518373/).

 

[토요 FOCUS] 서울남부지검 라인업…문찬석 차장 끌고 김형준 부장 밀고

서울남부지검이 금융·증권범죄 중점 수사청으로 거듭나면서 검찰 내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검찰은 몸집이 커진 남부지검 조직에 2차장검사를 신설했다. 1차장검사가 기존 형사1~4부를 담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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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거 법무부장관을 지냈고 골프장 성추행사건으로 유명해진 전 국회의장의 사위이기도 하지요(https://www.mk.co.kr/news/special-edition/view/2015/05/518373/).

나중에 알고 보니 어이없게도 김 부장검사가 전관변호사 박OO의 범죄를 제대로 수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어요. 그는 감옥에 있는 자신의 동창생이자 친구의 뒤를 봐주면서 뇌물도 받았는데, 나중에 뇌물 받은 것이 들통나자 이를 무마시키는 데 필요한 비용을 박OO 변호사가 대주었습니다. 이미 박 변호사의 비리에 대해 수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엮여버린 것이지요. 현직검사와 전관변호사의 부패로 초기에 금융비리를 막지 못하는 바람에 유사한 피해가 반복 확대된 것입니다.

 나중에 증권범죄합동수사단에서 금융을 잘 아는 수용자를 활용해 불법수사를 했다는 것도 함께 드러났어요. 검사실에 출정시켜 수용자에게 감방을 벗어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면서, 범죄정보를 얻고 수사표적이 된 수용자의 자백을 유도하는 심부름도 시키고 별건수사를 한 것도 드러났어요. 최근에도 라임 사건에서 김봉현 씨가 66회나 검사실로 불려 다니면서 라임 사건 수사와는 관계 없는 정치권 인사를 대라는 회유를 당했다고 폭로했지요. 검찰은 그런 버릇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민웅 : 듣고 보니 더 기가 막히네요.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민생이 어려워지면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찾는 심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심리적 불안과 공황상태를 이용해 파시스트가 등장한 역사가 있었고 이들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했지요. 우리도 경제 전문가에 대한 환상으로 이명박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지금은 정치검사 윤석열 총장에 대한 환상을 여론으로 부추기고 있지요. 윤석열 총장은 대권수립용으로 속성 과외도 받고 심지어 금융전문성이 있다고 주변에 알리고 있기도 합니다.

추미애 : 경제범죄 전문가라고 하면 모를까 금융사건 수사 경험을 가지고 경제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지요. 금융범죄 전문가라고 하기도 그런 것이 윤석열 전 총장이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재직할 때 옵티머스 펀드에 투자했던 정부기관인 전파진흥원이 수사의뢰를 요청했어요. 그런데 당시 중앙지검은 김재현 옵티머스 대표 등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어요. 무혐의 처리했던 부장검사가 윤 총장 청문회에 관여했고 이후 핵심보직으로 이동했지요. 옵티머스 변호인도 검찰총장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유명 변호사였어요. 그런데 서울남부지검에서 옵티머스가 투자자금을 횡령했다고 기소했거든요. 만일 중앙지검에서도 무협의로 하지 않고 제대로 기소했었더라면 초기에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검찰이 무혐의로 처리해준 이후 마사회나 한국전력 등 공기업도 믿고 투자를 하고 민간투자도 뒤따라 급증하면서 투자금액이 1조 5,000억 원에 이르렀지요.

 옵티머스 자산운용의 금융범죄 진화과정을 살펴보면 기업 편법탈취와 기업사냥이 진행되는 동안, 금융검찰이라 할 금융감독원이 제대로 감독하지 않은 것, 그 위에 모피아라는 금융관료들의 막강한 로비가 있었던 것이지요. 검찰, 법원 등의 수사,기소,재판 단계에서는 전관변호사들의 로비가 이루어진 것인데, 대형 로펌을 중심으로 단계적,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지능적 특권층인 최상위 포식자들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3,000억 원 정도는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 거대한 규모의 범죄를 누가 설계한 것인지, 전파진흥원이 수사 의뢰할 때도 680억 원 상당을 수사의뢰했는데 중요 사건으로 보고되지 않았던 경위 등도 조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김민웅 : 금융시장이 그런 식으로 비리와 범죄의 복마전이 되기도 합니다. 금감원과 검찰이 제 구실을 하기는커녕 범죄를 키운 것 아닙니까.

추미애 : 금융산업을 보호하는 목적은 민생을 윤택하게 하려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 특권 카르텔이 금융산업을 이용해 민생을 고사시키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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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아파트 1층과 2층 사이의 콘크리트를 21센티미터는 유지해야 층간소음을 줄일 수 있다고 가정하면, 거기서 콘크리트 1센티미터만 줄여도 남는 돈이 어마어마해요. 그 돈이 부패자금으로 조성되는 거고요,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인 입주민들의 몫이고, 그로 인해 이웃 사이에 살인사건까지 일어나기도 하는데, 지금 그걸 누가 감시하고 따지고 처벌하나요? 검찰권력도 이를 봐주면서 부패와 비리의 고리가 서로 짝짜꿍이 되어 손잡고 돌아갑니다. 이명박 정부가 그랬고, 그 휘하에서 큰 검찰이 그 맛에 푹 빠져 성장했고, 그게 오늘날 정치검찰의 물적,정치적 토대가 되었어요. 바로 그게 '스폰서 검사' 문화지요. 스폰서를 둔 검사. 그러니까 부패검사를 말하는데 김학의 전 법무차관 성접대 사건도 건설업자 윤중천이 김학의 스폰서였고, 부산 LCT 비리 사건의 이영복 회장도 검사들의 스폰서였지요. 그래서 김학의 전 법무차관 사건도, LCT 특혜분양 사건도 수사나 기소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윤석열 총장이 "이명박 시절이 제일 쿨했다"고 한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고 봐요.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특권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개혁하려 하시다가 이명박 집권 시기에 대검의 정치공작에 몰려 죽음에까지 이르신 거 아닙니까. 이런 뿌리를 잘라내야 해요. 타워크레인에서 사고가 일어나도 그저 기계조작 잘못, 개인의 잘못, 과실치사, 그것도 업무상 과실치사라고 덮어버립니다. 그러니 검찰의 수사방해, 감찰방해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절박했던 거지요. 죄가 다 드러나게 생겼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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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 정치지도자는 때로는 국민에게 "이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잘난 척하고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관성에 빠진 의식에 도전하능 의미로 말이지요. 극작가 출신으로 체코 대통령이 된 하벨은 과거 스탈린주의 정치의 잘못은 체코 시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표를 얻어야 하는 정치인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말인데, 하벨은 "정치란 진실과 양심을 본질로 삼아야 한다"라고 했어요. 그래야 힘을 합쳐 어두운 베일을 거둘 수 있다고 믿은 거지요. 앞서 언급한 아렌트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칼 야스퍼스, 발터 베냐민 등 고통을 견디고 어둠을 뚫고 나간 이들의 의식세계를 조명합니다. 기존의 교육과 언론이 왜곡시킨 현실인식의 지층이 너무 두터울 때 용기를 내서 긍정할 것은 긍정하고 부정할 것은 부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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