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릴레오에서 이 도서를 다룬 방송을 본 후에 읽기 시작했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진행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상황에서도 참고할 점이 많다.

---------------------------------------

p49

 간단하게 말해서 미국 사회는 끊임없이 전제주의 위협을 겪었다. 코글린과 롱, 매카시, 그리고 윌리스 같은 인물이 30퍼센트에서 심지어 40퍼센트에 달하는 지지율은 얻은 것은 미국 정치사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미국인들은 종종 그들의 정치 문화가 전제주의 위협에서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장밋빛 안경을 쓰고 역사를 바라볼 때에만 납득할 수 있는 말이다. 잠재적 독재자의 위협으로부터 미국 사회를 지켜준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확고한 의지가 아니라 민주주의 문지기, 다시 말해 미국의 정당 체제였다.

 

p52

 이러한 문지기 역할은 미국의 건국 시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87년 미국 헌법은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를 만들어냈다. 대통령제는 문지기 역할을 중요한 과제로 남겼다. 의원내각제에서 총리는 의회의 일원이며, 다수당이 선출한다. 그렇게 때문에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 내부자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내각 수립 과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필터 기능을 한다. 반면 대통령은 의회의 일원이 아니며, 다수당이 선출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이론적으로 대통령은 국민이 뽑느다. 그리고 누구나 대선에 출마할 수 있으며, 최고 득표자가 대통령이 된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문지기 역할에 주목했다. 그들은 헌법과 선거제도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미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다양한 딜레마와 씨름했다. 그들은 군주가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가 공화국 이념을 존중하고 국민의 뜻을 따르는 대통령제를 추구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건국자들은 국민이 후보자의 자질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대통령 선거제도가 대중의 공포와 무지를 이용해서 선거에 당선되고 난 뒤 본색을 드러내는 독재자에게 쉽게 농락당할 수 있다고 걱정했다. 해밀턴은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는 처음에 국민에게 아첨했다가, 대중선동가로 변신하고, 결국에는 폭군으로 군림해서 공화국의 자유를 허물어뜨린 인물들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해밀턴과 그의 동료들은 대통령을 투표로 선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위험을 걸러내는 특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건국자들이 고안한 장치는 바로 선거인단Electoral College이었다. 해밀턴이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68편에서 다음과 제시했던 근거에 따라 미 헌법 제2조는 간접선거 방식을 규정하고 있다.

 직접선거는 지위에 어울리는 자질을 분석할 줄 알고, 신중한 판단력 및 합당한 근거와 동기를 조화롭게 갖춘 사람들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간접선거제에서 각 주의 유명 인사로 구성된 선거인단이 최종적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책임을 진다. 해밀턴은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며", 또한 "음모를 꾸미고 인기에 영합하는 천박한 재능"을 지닌 인물은 걸러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선거인단은 미국 정치의 고유한 문지기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건국자들의 고유한 설계에 두 가지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헌법은 대통령 후보 선출 방식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선거인단은 국민투표가 모두 끝난 '이후에' 활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후보 선정 과정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둘째, 헌법은 정당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메디슨은 양당 시스템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정당의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1800년대 초 정당이 성장하면서 미국 선거제도의 작동 방식이 바뀌었다. 건국자들이 구상했던 것처럼 지역 유명 인사를 대의원 선거인단으로 선출하는 대신, 각 주는 정당 지지자를 선출하기 시작했다. 대의원은 이제 정당의 대리인이 되었고, 이 말은 곧 선거인단이 문지기 역할을 정당에 넘겨주었다는 뜻이다. 이후 정당들은 이러한 시스템을 계속 유지했다. 

 이제 정당은 미국 민주주의의 관리인이 되었다. 정당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함으로써 위험한 선동가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게 막는 권한(그리고 책임)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점에서 정당은 두 가지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우선 민주주의 관리자로서 유권자의 뜻을 가장 잘 대변하는 후보자를 선출해야 한다. 다음으로 정치학자 제임스 시저가 언급한 '걸러내기' 기능을 해야 한다. 즉,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거나 대통령직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을 사전에 걸러내야 한다.

 인기 있는 후보를 선택하고, 동시에 선동가를 걸러내야 하는 정당의 두 역할은 때로 상충하기도 한다. 만일 선동가를 선택한다면? 이는 건국시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의 핵심 문제이다. 하지만 정당이 문지기 역할에만 집중할 때 후보 선출 과정이 비민주적으로 이루어질 위험이 있다. 즉, 국민은 물론 일반 당원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보스 정치로 전락할 수 있다. 반대로 '국민의 뜻'에만 집중해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자칫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선동가를 후보로 선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이 이러한 상충 관계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문제는 언제나 균형을 잡는 일이다.

 

p86

 '집단적 포기',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인물에게 권력을 넘기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잠재적 독재자를 통제하거나 길들일 수 있다는 착각이다. 둘째, 사회학자 이반 에르마코프가 '이념적 공모'라고 부른 개념으로, 이는 집단적 포기를 택한 주류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잠재적 독재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는 경우에 해당된다. 하지만 잠재적 독재자가 등장했을 때 기성 정치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제어함으로써 민주주의 제도를 지켜야 한다. 비록 이를 위해 달갑지 않은 경쟁자와 잠시나마 손을 잡아야 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는 2016년 대선을 앞둔 공화당 인사들에게 더 중요한 말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 기본 규범을 위협하는 트럼프를 어떻게든 저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역할을 저버림으로써 미국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다. 민주주의를 잃는 것은 선거에서 패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일이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 공화당은 평소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결단, 즉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과감한 선택을 내렸어야 했다. 미국은 양당체제다. 2016년 대선에서 양당의 두 후보가 맞붙었고, 그중 한 명은 대중선동가였다. 2016년 대선은 공화당의 정치 결단력을 시험하는 중요한 무대였다. 과연 국가의 번영을 위해 단기적인 정치 희생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것인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비슷한 선례를 알고 있다. 2016년 오스트리아 보수 진영은 극우파 급진주의자인 노르베르트 호퍼의 당선을 막기 위해 녹색당 후보 알렉산터 판데어벨렌을 지지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2017년 프랑스 보수 진영 후보 프랑스와 피용은 극우파 후보 마린 르펜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중도좌파 후보인 에마뉘엘 마크롱을 지지하도록 당원들을 설득했다. 두 사례에서 우파 정치인들은 이념적 경쟁자를 지지했다. 이러한 결정으로 많은 당원들의 불만을 사긴 했지만, 상당수 유권자의 마음을 돌려 극단주의자가 권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았다.

 

p140

 자제 규범은 특히 대통령제 민주주의에서 그 가치가 높다. 후안 린츠가 설명한 것처럼 의회 분열은 교착 상태와 기능 장애, 그리고 헌법 질서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견제받지 않는 대통령은 사법부를 친정부 인사로 채우고, 행정명령을 남발하여 의회를 우회한다. 반대로 의회가 막강한 힘을 가졌을 경우, 대통령의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예산 권한을 빌미로 행정부를 혼란에 빠트리겠다고 위협할 수 있다. 혹은 석연치 않은 근거를 내세워 대통령 탄핵을 추진할 위험도 있다.

 

p181. 차별로 유지된 민주주의의 종착점

 미국 민주주의 제도는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여러 차례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매번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민주주의 가드레일은 온전히 유지되었고 양당정치인, 때로는 사회 전반이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시도에 저항했다. 그 결과 치열한 정쟁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는 1930년대 유럽, 그리고 1960년대와 70년대에 남미의 민주주의가 빠져들고 말았던 '죽음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경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미국 정치 시스템을 떠받치는 규범은 사실 인종차별에 의존해왔다. 재건 시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의 평화는 그 원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해 1877년 타협과 이후로 이어진 남부 지역의 반민주화 흐름, 그리고 흑인 차별법인 짐 크로 법을 근간으로 남았다. 인종차별은 20세기 미국 정치의 특성을 규정했던 정당의 협력과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인 남부'는 민주당 내에서 강력한 보수주의 세력으로 떠올랐고, 시민권에 반대함으로써 공화당과 협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남부 민주당 인사와 보수주의 공화당 인사 사이의 이념적 친밀도는 정치 양극화를 완화해주었고, 양당 협력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정치적 논의 테이블에서 흑인 시민권을 치워버리고, 미국 사회를 전면적인 비민주화로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중대한 사회적 희생을 요구했다.

 미국 민주주의 규범은 차별에 근간을 두었다. 정치 공동체가 대부분 백인의 영역으로 제한되었던 동안 민주당과 공화당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존재했다. 정당은 서로의 존재를 위협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작된, 그리고 1964년 시민권법과 1965년 선거권법을 통해 가속화된 미국 사회의 인종 포섭의 과정은 마침내 미국을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화 흐름은 미국 사회를 양극화시켰고, 재건 시대 이후로 이어져 내려온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에 최고의 도전 과제를 안겨다주었다.

 

p217

 그러나 공화당을 극단주의로 내몬 것은 단지 언론과 외부 이익단체만은 아니다. 사회적, 문화적 변화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다양성이 꾸준히 높아졌던 민주당과는 달리 공화당은 문화적 차원에서 오랫동안 동질적인 상태로 남아 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인 백인 개신교 집단은 그냥 일반적인 유권자가 아니다. 그들은 200년 가까이 미국 유권자의 대다수를 차지했고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우월한 위치를 누렸다. 그러나 이제 백인 개신교 집단은 다수의 지위를 잃었고 그 규모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공화당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1964년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지위 불안'이라고 하는 개념을 통해서 집단의 사회 지위, 정체성, 소속감이 위협받고 있다고 인식될 때 "미국 정치의 편집증적 성향"이 나타나고, 이는 결국 "과열되고, 상대를 지나치게 의심하고, 과도하게 공격적이고, 극단적이고, 종말론적인" 정치 접근방식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흘러 호프스태터의 주장은 지금의 미국 사회에 더욱 적절한 말로 들린다. 과반의 지위를 잃어버린 오늘날 미국 우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극단적인 적개심은 더욱더 활활 타올랐다. 설문 조사 결과는 많은 티파티 공화당 지지자들이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그들이 자라난 '진정한' 미국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회학자 알리 혹실드가 최근 발표한 책의 제목을 인용하자면, 그들은 스스로를 "자기 땅의 이방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진정한 미국인'을 진보 진영의 민주당 지지자들과 구분하는 담론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설명해준다. '진정한 미국인'을 미국땅ㅇ 태어나서 영어를 쓰는 백신 개신교 신자로 정의할 때 '진정한 미국인'의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앤 콜터가 냉소적으로 꼬집었던 것처럼 "미국 유권자는 왼쪽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사라지고 있다는 많은 티파티 공화당 지지자들의 인식을 고려할 때 "미국을 되찾자" 혹은 "위대한 미국을 다시 한번"과 같은 슬로건이 어떻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현상의 위험성은 민주당 지지자를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라고 규정함으로써 상호 관용의 규범을 직접적으로 공격한다는 사실에 있다.

 뉴트 깅리치에서 도널드 트럼프에 이르는 공화당 정치인들은 양극화된 사회에서 경쟁자를 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쓸모가 있으며, 정치를 전쟁으로 인식하는 입장이 많은 걸 잃어버릴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는 유권자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호 관용과 자제의 규범을 향해 더욱 거세지는 공격은(완전히는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 공화당 인사들에 의한)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민주주의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정쟁으로부터 미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켜주었던 연성 가드레일을 흔들고 있다. 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만 해도 그 가드레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세기에 비해 더욱 심하게 흔들리고 있으며, 그 강도는 점점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p249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에게는 정확한 정보에 접근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 선출된 지도자의 행동에 관한 신뢰할 만한 정보가 나와 있지 않다면 미국 시민은 선거권을 올바로 행사할 수 없다. 미국 대통령이 국민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때 신뢰할 만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위협받게 되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추락한다(당연한 사실 아니겠는가?). 국민이 선출된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을 때 대의 민주주의 근간이 허물어진다. 그들이 선택한 지도자를 믿지 못할 때 선거제도의 가치는 사라진다.

 

p263

 힘을 잃거나는 다수민족이 기존의 지배적인 지위를 평화롭게 넘겨준 역사적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레바논의 경우 지배적인 기독교 집단의 인구가 줄어들면서 15년간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의 경우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사실상 병합함으로써 생긴 인구통계 변화로 그 나라는 두 명의 전직 총리가 인종차별 정책에 비유했던 정치 시스템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흑인에 대한 선거권 부여로 촉발된 위협에 대해 남부 민주당은 재건 시대 이후로 한 세기 가까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서 선거권을 박탈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p272

 그러나 우리 두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당이 '공화당처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첫째, 외국 사례들은 이러한 대응 전략이 오히려 전제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전면적인 전략은 중도 진영을 위협함으로써 야당의 지지도를 떨어뜨린다. 반면 여당 내 반대파조차 야당의 강경한 태도에 맞서 단결하게 함으로써 친정부 세력을 집결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야당이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 때 정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 정당성을 확보한다.

 

p273

 설령 민주당이 강경 전술을 통해 트럼프를 무력화하거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그러한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다. 그 이유는 다음 정권이 가드레일이 사라진 민주주의를 물려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야당 공세에 무릎을 꿇는다면 혹은 양당의 합의 없이 탄핵을 당한다면 애초에 트럼프에게 기회를 가져다주었던 당파적 적대감과 규범 파괴는 더욱 고착화될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미국 국민의 3분의 1은 트럼프 탄핵을 좌파 세력의 거대한 음모라고 혹은 쿠데타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면 미국 정치는 위태로운 상태로 계속해서 부유할 것이다.

 이러한 국면은 웬만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민주당이 상호관용과 자제 규범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때 다음번 대통령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끌어내리려는 야당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당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이 지속적으로 허물어질 때 미국은 트럼프보다 훨씬 더 위험한 대통령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의 전제주의 행보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어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의회와 법원, 그리고 선거를 통해 저항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제도를 기반으로 트럼프가 실패하게 만들 수 있다면 미국 민주주의 토양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우리는 저항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다.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저항은 기본적인 권리이자 중요한 책임이다. 하지만 저항의 목표를 관리와 제도를 뒤엎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p279

 우리는 미국의 양극화를 고착화하는 두 가지 요인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요인이란 인종적, 종교적 재편, 그리고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경제 불평등을 말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정당이 대변하는 대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p286

 물론 경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은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정치 양극화를 완화할 수도, 오히려 심화시킬 수도 있다. 많은 다른 선진 민주주의 국가와는 달리 미국의 사회정책은 소득이나 생활수준이 특정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자산 조사 방식에 크게 의존해왔다. 그러나 자산 조사를 바탕으로 한 복지 정책은 중산층들 사이에서 가난한 사람만 복지 혜택을 받는다는 인식을 키웠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미국에서는 민족과 빈곤이 상당 부분 중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복지 정책은 특정 인종을 하위 계층으로 낙인찍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복지 정책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일반적으로 인종차별과 관련되 표현들을 사용한다. 가령 로널드 레이건이 언급한 '복지 여왕'이나 식료품 할인 구매권을 가지고 스테이크를 사 먹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영벅스'가 대표적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복지'는 경멸적인 표현이 되었다. 그것은 복지 수혜자들이 그러한 혜택을 받을 만한 정당한 자격이 없다는 사회 인식 때문이다.

 반면 북유럽 국가들은 엄격한 자산 조사를 기반으로 한 제한적인 복지 정책이 아니라 보편적인 모델을 추구한다. 이러한 방식의 복지 정책은 정치 양극화 해소에 도움이 된다. 사회보장제도나 메디케어처럼 사회 구성원 대다수에게 혜택을 주는 복지 정책은 사회적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고, 미국의 다양한 유권자 집단을 연결하는 다리의 기능을 한다. 이러한 정책을 장기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인종 갈등에 따른 역풍은 일으키지 않으면서 소득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 대표 사례로 포괄적 의료보험제도를 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사례로 최저임금 상승이나 보편적 기본소득이 있다. 실제로 기본소득 정책은 예전에 진지한 논의가 이뤄졌으며, 닉슨 행정부 시절 하원의 안건이 된 적도 있다. 또 다른 사례로는 '가족 정책'이 있다. 가족 정책이란 부모에게 유급 휴가를 주고, 맞벌이 부부에게는 탁아소 이용을 지원하고, 혹은 대다수 유아를 대상으로 어린이집 교육을 제공하는 정부 프로그램을 말한다. 최근 가족 정책과 관련된 미국 정부의 지출 규모는 선진국 평균의 3분의 1 정도로 멕시코나 터키와 비슷하다. 마지막 방안으로 민주당은 포괄적인 노동시장 정책도 고려할 수 있다. 여기에는 광범위한 직업훈련, 근로자를 교육하고 채용하는 기업에 대한 임금 보조금, 고등학교나 커뮤니티 칼리지 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무 경험 프로그램, 해고 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통비 지원 등이 있다. 이러한 정책은 사회 적대감과 양극화를 자극하는 경제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미국 정치를 재편하게 될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연합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이러한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대단히 힘든 일이다. 부분적인 이유는 이러한 정책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바로 양극화(그리고 그에 따른 제도적 정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수민족 집단, 그리고 백인 노동 계층을 아우르는 다민족 연대 형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쉽게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또한 보편적인 복지 정책이 이러한 연합의 근간을 마련해줄 것이라고 확신하지도 않는다. 다만 현재의 자산 조사 방식의 복지 정책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할 뿐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민주당이 사회 불평등 해소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은 시대의 과제다. 결국 그 과제는 단지 사회정의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 미국 민주주의의 생존이 달려 있다.

 

p288

 미국의 운명이 위기를 맞았던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한 시점에, 작가 E.B. 화이트는 미 연방정부의 '작가 전쟁위원회'로부터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짤막한 답변을 들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화이트는 겸손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물론 위원회는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침이다. 민주주의는 'don't shove(밀지 마세요)'에서 'don't'에 해당하는 말이다. 민주주의는 톱밥을 가득 채운 셔츠에 난 구멍이며, 높은 모자 위에 움푹 들어간 곳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절반 이상의 경우에서 옳다는 생각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다. 투표장에서 느끼는 프라이버시, 도서관에서 느끼는 교감, 곳곳에서 느끼는 활력이다. 민주주의는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이며, 9회 초의 점수다. 민주주의는 아직 반증되지 않은 이념이며, 타락하지 않은 노래 가사다. 민주주의는 핫도그에 바른 머스터드,, 그리고 배급받은 커피에 넣은 크림이다. 민주주의는 전쟁이 한창인 어느 아침에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대답해달라는 전쟁위원회의 요청이다.

 

 

 화이트가 언급한 평등과 예의, 그리고 자유와 공동의 목표에 대한 인식은 20세기 중반 미국 민주주의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오늘날 위기에 처했다. 미국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이제 미국 국민은 지금껏 그들의 민주주의를 지켜주었던 기본 규범을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규범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해야 한다. 규범이 포함하는 범주를 넓혀가야 한다. 미국 민주주의 규범의 핵심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그러나 역사의 많은 시간 동안 인종차별과 함께했고, 또한 그것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이제 그 규범이 인종 평등과 관계 없는 민족 다양성 시대에서도 제대로 기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다민족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는 없었다. 그것은 이제 미국 사회의 도전 과제로 남았다. 그리고 동시에 기회로 남았다. 미국 국민이 그 과제를 완수한다면 미국은 역사상 진정으로 특별한 나라가 될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