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이며 언론인. 최근에는 SNS에 시사에 대한 비판글을 많이 올리시는데 이 책은 그러한 글들을 모은 것 같다.

페북을 통해서도 자주 이 분의 글을 접하곤 하는데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모아놓으니 편한점이 있다.

인터넷을 통해서 간간히 글을 읽긴 했지만, 이렇게 책으로 읽다보니 왜 이 분의 글이 언론에 거의 노출이 되지 않는지 이해가 된다. 기레기들에게는 거의 이 분의 글 하나하나가 다 비수와 같이 느껴질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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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7.  부동상 문화재 투기 1

 

 SBS기자가 전화로 이것저것 물어서 대답은 해줬는데, SBS의 이번 보도 태도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제 이야기를 토대로 '이런 의견도 있다'는 기사를 작성하는 건 무방하지만, 제 이름이나 변조된 목소리가 나가는 건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왜곡돼서 나갈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질문과 답변의 요점만 간추려서 적겠습니다.

 

 1) SBS 기자들의 취재가 불성실했다고 보는 이유가 뭔가?

 손혜원 의원의 친척, 지인들이 산 집과 집값에만 집착했을 뿐, 그들이 어떤 배경과 맥락에서 해당 건물을 구입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각 지자체의 도시재생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도시재생사업 지구 내 낡은 건물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를 함께 조사했다면, '투기 의혹'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지자체가 낡은 건물을 매입해서 리모델링한 후 주민 커뮤니티 센터나 카페로 활용하는 것은 도시재생사업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런 사업을 하면 당연히 해당 지역의 집값도 오르지만, 재개발 '호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손의원이 목포 구시가지에서 폐가를 매입하고 리모델링해서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로 바꾼 것은 바로 '지자체의 도시재생 방법'을 개인이 시행한 것이다. 지자체가 하면 '공익사업'이고 개인이 하면 '투기'인가? 각 도시의 도시재생사업에서 지자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이런 보도를 한 것 아닌가? 당신네 보도는 도시재새사업 자체의 정당성마저 공격하는 거다.

2) 자기 이름으로 하지 않고 차명으로 구입한 건 뭔가 숨기려고 했기 때문 아닌가?

 정치인에게는 SNS가 공정인 의사소통 수단이다. 자기 조카에게 목포에 집 사서 살라고 했다는 얘기를 페이스북에 올린 게 언제인데, 그것조차 보지 않고 기사를 썼다는 건가? 조카가 자금을 지원받고 증여세까지 낸 뒤 구입한 건물이고, 그 사실을 이미 주변에 다 밝혔는데, 세상에 그런 차명 매입 방법도 있는가? 손의원에게 조카들만 있을 뿐 자녀가 없다는 사실은 취재 안 했는가? 또 누구처럼 자기가 살지도 않을 집을 자기와 가족 이름으로 사서 소유만 하고 있다면 투기 의혹을 품을 만하지만, 구입자들은 목포에 살면서 해당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사용하고 있다. 본인이 이미 사실을 공개했고 구입자가 해당 건물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걸 차명 투기라고 보는 건 납득되지 않는다.

 

 3) 그 동네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데 압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나?

 다른 뉴스는 체크 안 하나? 박지원 의원이 그건 자기 '공'이라고 이미 얘기했다. 애초에 도시재생사업 지구였던 곳을 문화재 지구로 바꾸자고 국토부 장과과 문체부 장관을 설득한 게 자기라고. 그리고 문화재로 지정되는 건 그린벨트로 지정되는 것보다 재산권 행사에 더 제약 조건이 많다. 자기 건물이 있는 동네를 그린벨트로 지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부동산 투기꾼이 세상에 어디 있나? 이미 지정된 곳에 건물을 산 뒤 해제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본 적이 있나? 나도 문화재 위원 등으로 문화재 행정에 오래 관여한 사람이지만, '부동산 문화재 투기'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그런 투기가 생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도시의 역사가 무참하게 사라지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거다.

 

p210. 비하

 [단독] 이승만, 박정희 비하, DJ, 盧 칭송 -- 공공기관의 고3 퀴즈(중앙일보 단독)

 중앙일보 기자가 박정희 비하라고 주장한 문제는 "1961년 쿠데타를 주도하여 권력을 장악한 뒤, 1979년 사망할 때까지 18년 동안 장기집권을 이어갔던 인물은?" 입니다.

 중앙일보 기자가 이승만 비하라고 주장한 문제는 "첫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의 임기는 4년, 두 번까지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50년대 내내 한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 헌법을 바꾸어가면서 12년 동안 권력을 독점했던 이는?"입니다.

 여보세요, 저건 '사실'이지 '비하'가 아닙니다.

 "한 달 후 대한민국"처럼 문재인이 대통령 되면 나라 망한다고 근거 없이 저주하거나, "한국인이어서 미안합니다"처럼 한국인 전체를 모욕하는 글 정도는 돼야 '비하'죠. 모두 중앙일보에 실린 글이군요.

 

p240. 성희롱

 1993년, '서울대 우조교 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이라면 '서울대 교수 성희롱 사건'이라고 이름 붙였겠지만, 당시에는 '성희롱'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강간, 강간미수, 준강간, 강제추행만 범죄로 인정되던 때였죠. 당시 가해자의 동료 교수 일부는 "피고소인이 평소 남녀 가리지 않고 옆에 앉은 사람 허벅지를 주무르는 습관이 있었다"며 '성범죄'가 아니라고 두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피해자의 변호를 맡은 박원순 변호사는 '성희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6년 만에 승소했습니다. 변론서는 당시 박원순 변호사와 함께 일했던 이종걸 변호사가 쓴 걸로 아는데, 그는 박 변호사가 "역사에 남을 변론서가 될 테니 정말 잘 써야 한다"고 해서 정말 고심하면서 썼다고 얘기해 줬습니다. 이 사건 이후 '성희롱'이 법적 개념으로 정착했고, 공공과 민간을 막론하고 모든 기관에서 '성희롱 예방 교육'이 시행되었습니다.

 작년 서울북부지방법원 자리에서 서울생활사박물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개관 준비 과정에서 유물 수집과 전시 기획을 도와줬는데, 막상 개관한 뒤에 보니 중요한 전시 주제라고 생각했던 항목이 빠져 있었습니다. 서울 변두리였던 지역 특성상 '종점 동네' 사람들 얘기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버스 차장(안내양) 관련 전시물이 안 보이는 겁니다.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젠더자문관이 "버스 안내양 관련 전시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해서 뺐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재했던 역사를 지우는 게 '왜곡되지 않은 인식'을 심어주는 방법인가? 젠더자문관이 아무것도 지적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로 비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가볍게 한 말을 담당자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 건 아닌가? 공무원으로서 일단 지적 사항이 있으면 조치할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종의 '검열' 같아서 기분이 씁쓸했습니다. 하지만 박 시장도 이런 방식이 '검열'로 비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젠더자문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서울시의 모든 간행물과 전시물을 젠더 감수성 측면에서 재점검하는 걸 보고는 그가 얼마나 세심하게 여성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변론을 맡은 이래 박원순보다 더 여성 인권의 신장에 기여한 변호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박원순보다 더 여성의 안전과 권익을 위해 노력한 지자체장도 없었습니다. 그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모르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해온 모든 일을 '위선'으로 단정하고 비난부터 퍼붓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가 평생 가면을 쓰고 여성을 대해 온 '위선자'일까요? 그가 이 땅의 여성들에게 남긴 모든 것을 다 내다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p259. 쓸개

 "이른 새벽 통근차 고동 소리에 고무공장 큰 아기 벤또밥 싼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신발 붙일 제, 얼굴 예쁜 색시라야 감 잘 준다나. 감독 앞에 해죽해죽 아양이 밑천. 고무공장 큰아기 세루치마는 감독나리 사다 준 선물이라네." 일제강점기 세간에서 유행했던 '근대 민요' <고무공장 큰아기>의 가사입니다.

 일제강점기 고무신 공장에서는 기술자들이 고무신 '감'과 접착제에 농간을 부려 여자 직공들을 괴롭히곤 했습니다. 직공이 불량품을 만들면 벌금을 물리는 게 당시 관행이었는데, 하루에 불량품이 한두 켤레만 나와도 일당보다 많은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악질 기술자들은 이 관행을 이용해 여자 직공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곤 했습니다.

 악질 기술자들은 먼저 '얼굴 예쁜 색시'에게 나쁜 감을 주어 자주 불량품을 내게 만들었다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뒤에는 '좋은감'을 주는 수작을 부리곤 했습니다. '얼굴 예쁜 색시라야 감 잘 준다나'라는 가사는 앞의 한 단계가 생략된 셈입니다.

 아베가 수출규제로 한국을 압박하는 게 저 시절의 고무신 공장 악질 기술자가 하던 짓과 똑같습니다. 한국인들을 '부품과 소재'로 협박하고 겁탈하려는 거죠. 지금의 한국인 중에도 악질 기술자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고 '세루치마'라도 한 벌 얻어 입는 게 최고라고 믿는 쓸개 빠진 것들이 많습니다. 저 '쓸개 빠진 것들'을 척결하지 못하면, 일본 우파는 언제까지고 한국인 전체를 노리개 취급 할 겁니다. 토착왜구 척결은, 한국인 전체의 자존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p290. 엽기(獵奇)1

 10여 년 전 고등학생이 교외 체험활동에 참가했냐 아니냐를 '법정'에서 따지는 건, 전 세계 재판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겁니다.

 세계사상 유례가 드문 일에 어울리는 수식어는, '엽기적' 또는 '극도의 몰상식'입니다.

 한국 검찰과 언론의 행태에 어울리는 '수식어'이기도 합니다.

 

엽기2

 매사에 자유한국당을 편드는 뉴스타운이라는 인터넷 언론이 '고유정과 문재인의 닮은 점'이라는 칼럼을 실었습니다. 내용은 너무 극악무도해서 생략합니다.

 그런데도 나경원 씨는 지금이 "문 대통령이 곧 국가인 시대"라며 "문 대통령을 건드리면 반역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인격을 극악무도한 언사로 분쇄하려는 자들이 공공연히 설치는 현실은, '문 대통령이 곧 국가인 시대'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나경원 씨의 한결같은 인격'을 보증할 뿐입니다.

 사실 저런 글은 '국가에 대한 반역'을 넘어 '인륜에 대한 반역'입니다. 만약 어떤 언론에 '고유정과 나경원의 닮은 점'이라는 칼럼이 실린다면, 나경원 씨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너무 뻔해서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언론이 자국 대통령을 '희대의 엽기 살인마'와 똑같다고 매도하는 글을 유포할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몇 되지 않습니다. 언론 자유도를 최상위로 올려놓은 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비난하는 자들도, 지구상에 자유한국당 사람들뿐일 겁니다. 한국과 같은 민주국가에서 이런 정당이 제1야당이라는 현실이야말로, '엽기적'입니다. 이런 '엽기성'을 청산하는 일은 이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편 인간'의 자격을 얻기 위한 전제입니다.

 

p301. 원순 씨

 49재를 지냈지만, 아직 원순 씨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룬 일들과 '성범죄'는 다른 문제라는 사람도 많지만, 둘은 무관할 수도 없고 무관해서도 안 됩니다. 그가 정말 '성범죄자'이면서 겉으로만 여성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행세한 위선자였다면, 그가 이끈 시민운동의 역사도 당당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49일간 SNS를 쉬면서 진상을 알아보려 애썼고, 사람들의 얘기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원순 씨의 삶과 인품을 모르는 자들이 죽은 원순 씨를 향해 쓰레기 같은 악담들을 쏟아부을 때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정의당 국회의원들이 조문 안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대통령에게 누구 편인지 밝히라고 요구했을 대도, 그저 한숨만 나왔습니다.

 강용석이 그를 조롱하고 진중권이 그를 모욕했을 때도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권인숙, 정춘숙 등이 그를 '성범죄라'로 단정했을 때는, 절망했습니다.

 30년 넘게 알고 살아온 사람의 인격에 대한 신뢰를 한순간에 패대기치는 그 경박한 단호함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박원순이 그랬다니 믿기지 않는다. 아직 단정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정도의 반응을 기대한 게 무리였을까요? 원순 씨는 알았을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해명해도, 이런 '경박한 단호함'에 맞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 버틴다 해도 만신창이가 되어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원순 씨의 '여성운동 동지' 정춘숙 씨가 <시사인>과 인터뷰하면서 '박원순은 한국 현대 여성운동의 모든 장면에 다 있었다. 박원순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리 없는 사람은 없다. 이 사건은 박원순을 빼고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첫째, '박원순을 빼고 봐야' 보인다면 그건 당연히 박원순을 본 게 아닙니다. "박원순을 빼고" 박원순을 보는 황당한 생각은 하면서 "다른 사람을 넣고" 박원순을 보는 생각은 왜 못 한 걸까요? 둘째, "그럴 리 없는 사람은 없다."는 명제는 왜 원순 씨에게만 일방적으로 향하는 건가요? 한쪽은 언제나 그럴 리 없고, 다른 쪽은 언제나 그럴 리 있다고 보는 태도에 굳이 이념의 태도를 붙이자면, '맹목주의'일 뿐입니다. 맹목주의는, 광기의 일종입니다.

 

p307. 유서

 평생 죽음의 역사를 연구한 프랑스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는 자살이 인간의 지성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에 있다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말을 들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떤 사람이 죽음을 선택한 동기를 알 방법은 '유서'를 분석하는 것뿐인데,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사람이 적은 데다가 그 유서조차 온전한 '진실'을 담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수많은 유서를 분석했던 그의 견해입니다. 유서를 쓰는 순간의 그가 '본래의 그'였는지, 아니면 '일시적 충동에 사로잡힌 그'였는지를 제대로 판단할 방도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유서에 쓴 내용을 다 믿지는 못하더라도, 유서의 '수신인'이 그의 죽음과 직접 관련된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유서는 자기의 죽음으로 인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사람들-가족과 가까운 친지-에게 남기는 것이 보통입니다. 간혹 자기 죽음이 '집단 각성'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불특정 다수에게 쓰는 유서도 있습니다. 을사늑약 직후 민영환의 유서나 독재정권 시절 민주 열사들의 유서가 이에 해당합니다. 그 외에 '남'에게 쓰는 유서는 그 남이 적어도 자기 죽음과 '직접 관련'된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몇 해 전 고 성완종 씨가 남긴 메모가 이 경우에 해당할 겁니다.

 자살한 검찰 수사관이 윤석열 총장에게 따로 유서를 남겼답니다.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윤석열 총장께 면목이 없지만, 우리 가족에 대한 배려를 바랍니다."와 "화장해서 보무님 산소에 뿌려 주십시오."뿐인데, 자기 사후처리 문제까지 부탁한 것으로 봐서는 그가 목숨을 끊음으로써 대신하고자 했던 '말'은 윤석열 총장에게 한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겁니다.

 을사늑약 나던 해 연말에는 많은 채무자가 채권자 집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해를 넘긴 빚을 '묵은 빚'이라고 하는데, 묵은 빚은 탕감해 주는 게 당시 관행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목은 빚을 만들어서는 안 됐습니다. 묵은 빚을 남기면 새 빚을 얻을 수 없는 것도 관행이었기 때문입니다. 직업을 세습하던 시대에 장사꾼이 새 빚을 얻지 못하면, 본인이 망할 뿐 아니라 자식들 앞길까지 망쳤습니다. 그래서 채무자들은 자기 목숨을 끊음으로써 '채권자의 양심'에 호소하여 남은 가족의 앞날을 부탁했습니다.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 '가족'을 부탁하는 상대는, 자기가 죽은 뒤에도 자기 가족을 괴롭히거나 그 운명을 좌우할 사람이라고 보는 게 이치에 맞습니다. 자살한 검찰 수사관이 왜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정확히 알 도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에 윤석열 총장이 '직접' 관련된다는 점은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죽음으로써 호소한 대상은 '윤석열의 양심'이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당사자가 '윤석열 총장에게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겼다고 사실을 왜곡해서 언론에 알렸고, 언론들은 이 주장을 그대로 보도하면서 이 '선택'의 '배후사정'이 다른 데에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호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건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윤석열의 양심'일 겁니다.

 

p309. 의義

 의열단은 '의로운 일을 맹렬히 수행한다'는 취지로 붙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의로운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아도 '정의'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사실 영어 justice가 한자 '의義'에 정확히 대응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의義는 갑골문자에서부터 나오는 글자로, 한자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글자에 속합니다. 본래 톱날이 달린 창 모양의 제기祭器를 형상화한 글자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악귀를 물리치는 무기였을 겁니다.

 방위로는 서西, 계절로는 가을, 오행으로는 금金에 해당하며 그 기운은 '서늘함'과 '굳건함'입니다. 인仁은 따뜻하고 너그러우나 의義는 싸늘하고 단호합니다. 용서하는 것이 인仁이라면 용서하지 않는 것이 의義입니다. 그러니 인의仁義를 겸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유교는 왜 이 둘을 겸하라고 주문했을까요? 아마도 청와대 여민관에 걸려 있다는 '춘풍추상春風秋霜'의 의미와 같을 겁니다. 남을 대할 때는 인仁, 자기를 대할 때는 의義.

 의에는 의치義齒, 의수義手, 의족義足처럼 '가짜'라는 뜻도 있습니다. 가짜라기보다는 '본래 자기 것이 아님'이라는 뜻이겠죠. 친형제가 아니라서 의형제이고, 관군이 아니라서 의병입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서 하는 일에는 '의'자를 붙이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하는 일에도 '의'자를 붙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굳이 나서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스스로 나서서 하는 게 '의'입니다. 억울한 남을 돕는 일,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남을 구하는 일이 '의'입니다. 자기와 관계도 없는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의 횡포에 맞서는 게 '의'입니다.

 어떤 분이 의열단에 대비되는 '친일파'에 대해 물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친일파는 불의한 세력에 빌붙어 사욕을 채운 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자들이 많습니다. 누구다 의열단원들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죽진 못하더라도 더럽게 살진 말아야 할겁니다.

 '의'와 뜻이 반대인 글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의'라고 합니다. 하지만 '불의'는, '정의롭지 않다'가 아니라 '더럽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겁니다.

 

p311. 의료보험법

 우리나라 의료보험법은 1963년에 처음 제정되어 1964년부터 시행됐습니다. 당시 군사정권은 '무상의료'를 자랑하는 북한에 맞서기 위해 '선전용'으로 이 제도를 만들었지만, 임의가입 방식이었기 때문에 가입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이 보험료를 분담하는 강제 가입 방식의 의료보험 제도가 시행된 건 1977년이었습니다. 이때는 공무원, 군인, 교사, 상시 500인 이상을 고용하는 대 기업 노동자만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1977년은 유신체제가 종말을 향해 치닫던 때였습니다. 특히 당시 주력 수출산업으로 육성하던 중화학 공업 분야 대기업 노동자들은 극단적인 저임금에 불만이 매우 높았습니다. 대기업에서 파업이 일어나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리라고 판단한 박정권은 대기업 노동자들을 회유하는 한편, 공무원 군인 교사 등 정권의 중추를 이루는 사회 세력의 환심을 사기 위해 '특권적 의료보험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의료보험증은 특권층의 신분증 구실을 했습니다. 으료보험증만 맡기면 어느 술집에서나 외상술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박정희가 만든 건 빈부를 따지지 않는 한국의 현행 건강보험보다는 일부 사람만 혜택을 받는 '미국식 의료보험'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만든 의료보험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면, 중소기업 직장인이나 자영업자 절대다수는 코로나에 감염되어도 병원 문턱을 넘을 수 없을 겁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정당 노태우는 '전 국민 의료보험 혜택'을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료 보험증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 양상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증거물'이었기 때문이죠. 이 '가시적인 불평등의 증거물'을 없애지 않고서는, 6월항쟁으로 뜨겁게 분출한 민주화 열기를 가라앉힐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989년부터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시행된 건 이 때문입니다.

 현재의 국민 건강보험 제도는 박정희가 준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 스스로 살인적 폭력과 최루탄에 맞서 싸워 만든 제도입니다. 자기 자신이, 또는 자기 부모가 싸워서 얻은 권리를 남이 '선물'한 것으로 생각하면, 허무하게 빼앗기기 쉽습니다.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을 누구라도 함부로 훼손하게 놔둬선 안 됩니다. '민영 의료보험증'을 가진 사람이 공공연히 특권층 행세하는 시대로 되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p312. 의료수요

 1940년 - 527,964명

 1950년 - 633,976명

 1960년 - 1,080,535명

 1970년 - 1,006,645명

 1980년 - 862,835명

 1990년 - 649,739명

 1940년 이후 10년 단위로 본 출생아 수입니다.

 의료 서비스의 주 소비자는 70~80대의 고령층입니다. 지금은 1940~50년대 출생자들이지만 10년 후에는 1950~60년대 출생자, 20년 후에는 1960~70년대 출생자들입니다.

 다른 변수를 제외해도, 당분간 의료수요는 급증하다가 1990년생이 70대가 되는 2060년에야 지금 수준으로 돌아올 겁니다.

 물론 미용성형 소비자는 줄어들겠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선 위급환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상태로 유지될 겁니다.

 36시간 연속 근무에 시달린다고 호소하는 젊은 의사 여러분, 당신들 밥그릇은 향후 수십 년간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장 의사를 늘리지 않으면 10년 후 당신 후배들은 48시간 연속 근무하면서도 응급실에서 죽어가는 환자 멀뚱히 쳐다보는 잔인한 의사가 될 겁니다.

 그런 잔인한 마음으로 의사가 된 건 아니겠죠.

 의사 늘리는 것 말고, 환자 폭증에 대처할 방법이 있다면 스스로들 제안해 보시기 바랍니다.

 

p324. 

 '정의'는 이성으로 판별하고 감정으로 실천하는 인간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정의감'입니다. 근대 이후 일본 역사에서 일본인들이 '정의감'에 기초해 이루어 낸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성적 계산'만으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상대를 '정의감'으로 물리친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기회주의자, 사익 지상주의자, 토왜들이 '감정적 대응은 안 된다'고 하는 건, 그들이 이성을 '계산'의 용도로만 쓰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불의를 판별하는 것이 인간 이성의 가장 중요한 용도입니다. 그 정의를 실천할 수 있게 해주는 '정의감'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감정입니다.

 '정의감 없는 타산적 이성'이야말로, 인간을 짐승 이하 수준으로 타락시키는 악덕입니다. 토왜들에게 '친일'은 부차적 문제입니다. 그들의 진짜 문제는 '정의감' 없이 '타산적 이성'만 가진 존재라는 점입니다. 저들이 한국 시민들의 일제 불매운동을 편협한 '반일 감정'의 소산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정의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p326. 이완용1

 '그'는 어려서부터 우봉 이씨 가문에서 가장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소문났습니다.

 그 덕에 우봉 이씨 가문에서 제일 잘나가던 이호준의 양자가 됐습니다

 나라에서 똑똑한 젊은이들을 모아 육영공원에 입학시켰을 때, 그 학생이 됐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초대 주미공사관 참전관이 됐습니다.

 '그'는 공부를 참 잘해서 나라 덕을 많이 보았지만,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가 됐습니다.

 그는 처음 '친미'였으나, 자기 이익을 위해 '친일'로 태도를 바꿨습니다.

 이완용 얘기입니다.

 제 이익만 밝히면서 공부 잘하는 인간보다 세상에 더 해로운 물건은 없습니다.

 

p329. 이해력

 코링크 최고 의사 결정권자는 이봉직, 이창권, 조범동이며 정경심 씨의 돈은 투자금이 아니라 '대여금'이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일부 언론매체는 '조국 일가 사모펀드'라는 말을 계속 씁니다.

 판결문도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의 사람들이 여론을 주무른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이해충돌

 

 한국에서 최고의 투기 대상이 '부동산'이라는 데에는 거의 이견이 없습니다. 부동산 투기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당연히 '개발 정보'입니다. 박정희 정권이 강남을 개발할 때 '복부인'이 사회악으로 지목되어 온갖 비난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복부인은 '정보'를 받아서 투기를 실행했을 뿐, 진짜 사회악은 '복부인'들에게 정보를 준 그들의 남편이나 친척들이었습니다. 복부인에게 정보를 준 자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강남 개발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던 박종규가 서울시 건축과장 윤진우에게 강남땅을 사 모으라고 했다느 얘기는 이미 상식이 됐습니다. 윤진우는 후일 자기 이름으로는 땅 한 평도 사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 정보를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누설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땅 사는 심부름하는 동안 술을 엄청나게 먹었다는 말을 직접 들었는데, 누구와 술을 먹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는 술 먹는 데 돈 쓸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 시절 그와 함게 술을 먹었던 사람들, 술자리에 함께 있었던 종업원들은 그가 가진 '정보'를 알았을 겁니다. 그에게 술 사 줄 기회를 잡으려고 애쓴 사람은 무척 많았을 겁니다. 물론 그의 친척들은 술 사 주지 않고도 알았을 거고요.

 이제껏 부동산 투기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들은 개발계획을 세운 사람들과 그 정보를 남보다 먼저 입수한 사람들입니다. 개발 정보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라미드형 경로에서 '기자님'들은 꼭대기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중언부언 길게 쓸 필요는 없을 겁니다. '잘 아는' 기자님 덕에 개발 정보를 미리 입수해서 부동산 투기에 성공했다는 사람, 저도 더러 봤습니다. 유력 언론사의 역대 간부들 부동산 거래 내역과 소유 현황을 취재하면, 흥미로운 '단독 특종' 기사가 나올 겁니다.

 유력 언론사 기자님들이 열심히 보도한 덕에 이제 '이해충돌' 문제에 관해서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이참에 정부가 추진 중인 '이해충돌 방지법'을 속히 제정하면 어떨까요? 개발계획을 수립하는 부처의 공무원과 계획을 심의하는 각종 위원회 의원, 국회의원과 지자체 의원, 개발 정보를 먼저 입수하는 기자 및 그들의 가족, 친척, 친지들은 당사자 재직 중 부동산을 매수할 수 없게 하거나, '개발 정보'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소명한 후에야 매수할 수 있도록 하면, '부동산 투기'도 확실히 줄어들 겁니다. 물론 국회에서 이런 법을 만들 리 없고 기자님들이 이런 법을 지지할 리도 없으니, 그저 몽상일 뿐이지만. 20190126.

 

p374. 정정보도문

 "이 기사로 상처를 받은 분과 독자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본지 보도로 조 전 장관과 정 전 교수의 명예에 누를 끼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조주빈 사진을 넣을 자리에 조국 전 장관 부부 사진을 실었던 세계일보의 '정정보도문'입니다. 한국 언론의 처참한 수준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비다.

 '유감'은 '마음에 꺼림칙한 점이 있다'는 뜻이고 '사과'는 '내가 지나쳤다'는 뜻이며, '사죄'는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다오'라는 뜻입니다. 조 전 장관 부부에게 '사죄'해도 모자랄 일을 저질러 놓고 '유감'이라니요. 제3자인 독자에게 사과하고 피해 당사자에겐 '유감'? 말을 바로 쓸 책임이 있기에, 언론입니다.

 책임 있는 언론사라면, 이렇게 써야 합니다.

 "본지가 큰 잘못을 저질러 조 전 장관과 정 전 교수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데 대해 깊이 사죄드리며, 합당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저런 신문도 언론사라는 사실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p407. 진영숙

 1960년 4월19일, 한성여중 2학년 열다섯 살 진영숙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남기고 시위에 참가했다가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유관순이 삼일운동의 상징이 된 것처럼 진영숙도 4.19의 상징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아래는 진영숙의 편지 내용입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닌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례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p414. 창립기념일

 경향신문은 1906년 천주교에서 창간해 1910년까지 발행했습니다.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과 동시에 폐간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6년 천주고 서울교구가 같은 제호로 다시 발간했는데, 이때 '속간續刊이 아니라 창간創刊'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름은 계승하나 해방 이전의 역사와는 단절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과 봐야 할 겁니다. 이후 경향신문 경영권은 여러 차례 이동했지만, 지금도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 6일을 창간일로 삼습니다.

 3.1운동 이후 서간도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수많은 독립투사를 양성했지만, 재정난으로 1년 반 만에 폐교되었습니다. 해방 후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가 조직되어 1947년 2월 신흥전문학원을 세웠고, 1949년에는 신흥초급대학으로 승격했습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피난 중이던 부산에서 교무과장이 학교 경영권을 인수해 1960년 경희대학교로 개명했습니다. 지난 2019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이었지만, 경희대학교는 이를 창립일로 기념하지 않았습니다. 경희대학교가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계승하지 않는 데에는 나름의 생각이 있겠죠.

 조선일보는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3월 5일, 친일 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대정大正은 당시 일본의 연호입니다-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민족 분열 통치'에 협조하기 위해 창간한 신문입니다. 창간 1년 뒤에는 다시 초특급 매국노 송병준이 조선일보를 인수해 3년 넘게 운영했습니다.

 조선일보 사옥에 "창간 100년'을 자랑하는 글귀가 걸린 지 꽤 됐습니다. 며칠 후엔 '창간 100주년 기념호'가 나오겠죠. 일제의 민족 분열 책동에 적극 협조한 초특급 매국노의 정신을 '창간 정신'으로 기념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인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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