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로 분류되어 있지만 내용상 인문으로 봐도 무방할 듯 싶다.

한국인으로서 일본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로 있는 서정민이라는 분이 쓴 에세이집이다.

신변잡기적인 내용도 있지만 한일관계라든가 종교 그리고 철학적인 부분도 혼재되어 있다.

일본에서 교수를 하시는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경계인의 시각에서 한일관계의 문제점을 다루는 관점은 참고할 만하다.

제목에 이끌려서 본 책인데 내용이 상당히 좋다. 

---------------------------------

p206

 민족주의는, 고난 받는 민족의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을 회복하는 데에만 긍정적으로 유효하다.. 역사에서 자주 보았듯이 우월적, 배타적, 공격적인 민족주의는 피아를 막론하고 배격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 민족주의는 '수비적', '고난 받는 민족주의'의 긍정적 테제를 지난 바 있다. 그러나 현황은, 한국 민족주의의 실체는 사라지고 남북한 모두에 유사 민족주의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민족의 과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현저히 상실되었다. 한국내의 민족주의 갈등은 구민족주의를 거짓 민족주의이자 '보수 꼴통'으로, 신민족주의를 사회주의이자 '종북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상호 불신과 논쟁만 거세다.

 

p211

 지난 번 한국문학기행 중 미당시문학관에서 마주한 서정주의 고백문은 실제로 내게 많은 생각을 더해주었다.

 

 "나에게 친일문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43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최재서가 경영하던 '인문사'에서 일본어 잡지 '국민문학' 편집 일을 하는 동안 당시 총독부 산하에 소속된 조선국민총력연맹지부 요구대로 작품을 쓴 일이 있다. 쓰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젊은 그 시절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그것이 새삼 아픔으로 다가온다. 친일문제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며 깨끗하게 청산되어야 마땅하다. 당시 나의 정신적 실상을 세상을 뜨기 전에 꼭 글로 남기겠다.

 

 이렇게 전제한 서정주는 자신의 친일작품 일부도 인용해 놓았다.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리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서정주의 고백 수준이 결코 높거나 만족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누가 보아도 '변명'에 가깝다. "쓰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그것" 등의 표현은 영락없이 구차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중요하다. '분명히 잘못된 일'이라고 전제하고, 자신이 남긴 행적을 그대로 증거하는 일 자체가 필요하다. 이보다 훨씬 뒤인 최근의 일이지만, 결코 '역사적 정죄'가 아니라 '역사적 정리'라고 강조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친일인사 후손들의 어불성설 이의제기가 새삼 우리 가슴을 꽉 막히게 한다. 역사의 현장이 실존적인 고뇌 그 자체라는 것은 역사가들 스스로가 더욱 잘 안다. 사실과 고백, 그것처럼 역사인식을 맑게 해주는 기제도 드물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