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트럼프의 당선, 영국의 브렉시트를 천박한 포퓰리즘의 승리로 매도하는 중도 좌/우파의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내용.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로 능력있는 자들이 독재, 혹은 엘리트들의 독재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번역된 공정하다는 착각은 좀 생각해보면 현재의 능력주의적 신자유주의가 기회의 평등을 신봉하지만 그 자체가 능력에 따른 계급을 고착화시키고 이러한 고학력 지식인들이 교육이라는 매개를 통해 지위를 세습하는 아이러니를 비판한다.

 미국의 양극화-특히 고등교육을 이수한 자와 아닌 자의 차이로 인한-를 자세하고 다루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생각할 부분이 많다.

 

---------------------------

 

p31

  물론 실제로 보면 그렇게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돈은 뒷문뿐만 아니라 정문 앞에도 떠돈다. 실력대로라고? 사실 실력은 경제적 우위와 구별해서 보기가 어렵다. SAT처럼 표준화된 시험은 그 자체로 능력주의를 의미한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배경을 가진 학생이라 할지라도 지적인 장래성을 보일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 SAT 점수와 수험생 집안의 소득이 비례관계를 나타낸다. 더 부유한 집 학생일수록 더 높은 점수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

 

p46

 시장친화적이고 기술관료적인 세계화의 개념은 좌우 주요 정당들에게 고스란히 수용되었다. 특히 중도 좌파 정당이 시장 중심적 사고와 시장적 가치를 수용한 일은 무엇보다 의미심장했다. 이는 세계화 프로젝트의 진행에, 그리고 뒤따른 포퓰리즘의 반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트럼프가 당선될 즈음 민주당은 기술관료적 자유주의 정당으로서 한때 그 지지기반이었던 노동자와 중산층 유권자 대신 전문직업인들에게 한껏 기울어져 있었다. 브렉시트 당시의 영국 노동당, 유럽의 사회 민주당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변화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는 "정부는 문제이고 시장이 해답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정치 무대에서 물러나자, 미국 빌 클린턴, 영국 토니 블레어,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의 중도 좌파 정치친들이 뒤를 이었다. 그들이 시장에 대해 갖는 믿음은 이전의 리더들보다 엷었지만 각자의 사회에서 그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한몫했다. 그들은 통제받지 않는 시장의 날선 이빨을 어느 정도 무디게 만들었으나, 레이건-대처 시대의 핵심 전제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시장 메커니즘이야말로 공공선을 달성하는 기본 수단이라는 전제였다. 이러한 믿음에 발맞춰 그들은 시장 중심적 세계화를 수용했고 경제가 갈수록 금융화되는 경향을 환영했다.

 

p56

 사실 능력 있는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공자는 덕이 뛰어나고 유능한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고 했다. 플라톤은 공공의 정신으로 무장한 수호자 계급의 지지를 받는 철인왕이 다스리는 사회를 상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철인왕에는 반대했으나 그 역시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공공 문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정치와 관련된 능력은 부유함이나 좋은 가문이 아니라 시민적 미덕civic virtue과 실천지phronesis(공공선의 문제에 있어서 추론을 잘하는 실천적 지혜)의 탁월함이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스스로를 "능력을 갖춘 사람Men of Merit"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처럼 유덕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공직을 맡기를 바랐다. 그들은 세습귀족제에 반대했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도 내켜하지 않았다. 선동정치가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연방에 상원을 두고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는 등의 제도로 능력주의적 통치를 도모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덕과 재능에 근거한 '자연 귀족정'을 '부와 출신에 근거한 인위적 귀족정'보다 선호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런 정부 형태는, 자연적으로 고귀한 사람들을 정부 공직에 앉힐 수 있는 순수한 선택을 하는 데 최고의 것이다."

 이런 저런 차이가 있어도, 공자에서 미국 공화주의자들까지 이르는 이러한 전통적 능력주의는 통치에 적합한 능력에 도덕적, 시민적 미덕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같다. 그들 모두 공동선이란 적어도 부분적이나마 시민의 도덕교육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겪고 있는 '기술관료 버전'의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 판단의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는 경제 영역에서 '공동선이란 GDP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해 버렸으며, 어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에 달려 있다고 못박아버렸다. 또한 정부 영역에서는 능력이란 곧 기술관료적 전문성이라고 보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현상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대통령 정책고문으로서 경제학자들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다. 공동선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그것을 달성하는 일에 시장 메커니즘이 점점 더 많이 적용되고 있다. 정치 논쟁에서 중요한 도덕적, 시민적 문제들 즉 '불평등 증가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국경 문제에서 살펴야 할 도덕적 부분은 무엇인가?', '일의 존엄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우리는 시민으로서 서로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나?' 등이 소외되고 있다.

 

p70

 능력주의 논쟁은 구원을 논의할 때 다시 기독교에서 등장한다. 신앙이 독실한 사람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신이 각자의 생활 태도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첫 번째가 더 정당해 보인다. 권선징악의 틀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신의 전능함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며 따라서 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신은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하게 된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

 두 번째는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의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p96

 

 소련의 몰락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많은 서구인들은 역사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자본주의로의 행로를 명백히 드러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 가정에 힘입어 그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비전을 실천에 옮겼다. 자유무역협정, 금융 규제 철폐를 비롯한 재화, 자본, 사람의 국가 간 흐름을 쉽게 하는 여러 조치들이 취해졌다. 그들은 글로벌 시장 확대가 글로벌 상호의존성을 높일 것이며, 국가 간 전쟁 가능성은 줄어들고 민족주의 정체성이 완화되며 인권에 대한 존중은 높아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글로벌 경제와 새로운 IT가 가져올 긍정적 효과는 심지어 권위주의적 정권의 힘을 빼고 그들을 자유민주주의로 인도하기까지 하리라 여겨졌다.

 

 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세계화 프로젝트는 2008년 금융위기를 몰고 왔으며, 8년 뒤에는 격렬한 정치적 반동을 일으켰다. 민족주의와 권위주의는 사라지기는 커녕 전 세계적으로 새롭게 힘을 얻었고, 민주 사회들에서도 자유주의적 제도와 규범을 위협했다.

 

p106. 고된 노력과 정당한 자격

 

 나는 능력주의 정서가 점점 짙어지고 있음을 나의 학생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1980년부터 하버드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쳐온 나는 때때로 학생들에게 해가 지남에 따라 자신의 의견이 바뀐 건 없는지 묻곤 한다. 보통은 그런 질문에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교실에서 내가 가르치는 주제(정의론, 시장과 도덕, 신기술의 윤리학) 아래 논쟁을 벌여 보면 학생들의 도덕 및 정치관은 매우 다양했다. 그런 가운데 크게 의견이 바뀌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데, 예외가 하나 있었다. 199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현상으로, 갈수록 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성공은 자신의 덕이며, 자신이 기울인 노력에 따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능력주의적 신념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먼저 나는 이 현상이 학생들의 성장 연령대가 로널드 레이건 시대이고 따라서 당시 유행한 개인주의 철학에 물 들었기 때문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학생들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적이지 않았다. 능력주의적 직관은 정치적 성향을 불문하고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직관이란 대학 입학에서의 소수집단 우대정책과 관련된 토론에서 특히 강하게 불거졌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에 찬성하는 학생이든 반대하는 학생이든 '나는 죽어라 노력해서 하버드에 왔으며 따라서 나의 지위는 능력으로 정당화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이 운이나 기타의 통제 불가능 요인으로 입학한 게 아니냐는 말에는 거센 반발이 있었다.

 쉽게 들어가기 힘든 대학의 학생들 사이에서 능력주의 정서가 팽배해지는 현상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스탠포드대는 지원자 가운데 거의 삼분의 일을 입학시키고 있었다. 1980년대 초에는 하버드와 스탠포드가 오분의 일을 입학시켰다. 그러나 2019년 이 두 명문대는 이십분의 일도 입학시키지 않았다. 입시 경쟁이 처열해지면서 명문대(그들의 부모가 입학을 열망하는 대학들)를 지망하는 청소년들은 가혹한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고급 교과과정에서 요구하는 빡빡한 스케쥴과 막대한 과제물, 심리적 부담, 사설 입시 컨설턴트와 SAT 과외교사, 체육특기를 비롯한 특별활동 강사들의 훈육, 그리고 인턴 이수와 해외 봉사점수 따기 등등 목표 대학의 입학담당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온갖 노력들). 이 모든 것이 자기 아이들에게 '최선'을 선물하려는 극성 부모들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이런 과도한 스트레스와 힘겨운 노력을 겪은 뒤에 얻은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며 성공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고 여겨지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그렇다 해서 학생들이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많은 학생들이 많은 시간을 공공 봉사나 그 밖의 선행에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그들을 철저한 능력주의자로 만들었다. 과거 청교도 선배들처럼 그들의 성공이 노력의 산물이라 믿는다.

 내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능력주의 정서를 느낀 것은 미국에서만이 아니다. 2012년 나는 중국의 남동쪽 해안 지역에 있는 샤먼대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 주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도덕적 제한'이었다. 최근의 신문에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사느라 자기 신장을 판 중국 10대 학생기사를 읽었던 나는 학생들에게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뒤이은 토론에서 많은 학생들은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를 나타냈다. 그 10대 학생이 강압이나 협박에 의하지 않고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 신장을 팔기로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입장에 반대한 일부 학생들은 가난한 사람의 신장을 사서 부자가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강연이 끝난 뒤 한 학생은 내게 비공식적으로 답을 주었다. 부를 이룩한 사람은 그만한 능력을 입증한 것이며, 따라서 생명을 연장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후안무치한 능력주의 사고의 응용에 깜짝 놀랐다. 돌이켜 보면 이런 주장이나 개인의 건강과 부가 신의 은총의 증표라고 하는 번영 복음 신앙이나 도덕적으로 동색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내게 그런 답을 들려준 중국 학생은 아마도 청교도 사상이나 섭리론 전통과는 무관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그의 학우들은 중국이 시장경제로 전환할 때 자라났다.

 

 부유한 사람은 많은 돈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내가 중국 방문 때 만났던 학생들의 도덕적 직관, 또한 지난 십여 년간 다수의 중국 대학에서 배양된 도덕적 직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중국 대학생들은 우리 하버드대 학생들처럼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은 사람들이며, 그 경쟁의 배경에는 치열한 시장사회의 경쟁이 있다. 우리가 성공하는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에는 저항하는 한편, 우리는 스스로 성공했고 따라서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재능에 대해 사회체제가 부여하는 보상이 아무리 크든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에 환호하는 일은 놀랍지 않다.

 

p128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굳건한 미국은 사회민주주의 유럽보다 덜 간대한 복지국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p149

 "진짜 문제는 노동자의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과 상관없으며,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데 있다.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생산한 것에서 자기 몫을 요구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이 생산한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사람들은 더, 더 많이 챙겨가고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민주당 사람들은 경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 현실이란 독점산업에서 경제의 금융화, 그리고 노동 관리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은 대신 그런 현실 모두를 방치하게 만드는 도덕적 환상에 젖어 있을 뿐이다."

 

p159.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지지받기 힘들 때(힘들지만 완전히 외면되는 것은 또 아닐 때다), 학력주의는 최후의 면책적 편견이 된다. 미국과 유럽에서, 학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에 대한 멸시는 다른 부분에서 시원치 않은 집단에 대한 멸시보다 훨씬 두드러진다. 아니면 적어도 훨씬 잘 통용된다.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실시된 일련의 설문조사에서 사회심리학자 연구팀은 대학을 졸업한 응답자들이 다른 약점보다 대학 졸업을 못한 약점이 있는 집단에게 더 반감을 가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전형적인 차별 대상 집단들 즉 무슬림, 터키 출신 유럽 거주민, 빈곤층, 비만인, 시각장애인, 저학력자 등에 대해 고학력 유럽인들이 보이는 반응을 조사했는데, 그 가운데 저학력자가 가장 기피됨을 알 수 있었다.

 미국에서 실시된 비슷한 조사에서, 연구자들은 유럽과 다른 차별 대상 집단들을 예시했다. 흑인들, 노동계급, 빈곤층, 저학력자였다. 미국인들은 이 가운데 저학력자에 대해 가장 낮은 평가를 했다.

 

 대졸 엘리트가 그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을 어떻게 낮춰 보는지를 넘어, 이 연구보고서들의 저자들은 몇 가지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냈다. 첫째, 그들은 교육 받은 엘리트가 교육 수준이 낮은 대중보다 깨어 있어서 더 관용적이라는 익숙한 생각이 어긋남을 포착했다. 그들에 따르면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는 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에 비해 편견이 결코 적지 않다. 다만 편견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더욱이 엘리트는 그런 편견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들 대부분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는 반대할지 모르나, 저학력자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는 '그러면 어때?'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둘째, 대졸 엘리트들이 편견에 거리낌 없는 까닭은 개인 책임을 중시하는 능력주의와 관련이 있다. 엘리트는 가난이나 출신 계층을 따지기보다 학력을 따져 노동계급을 멸시한다. 학력 이외의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들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낮은 학력은 개인의 노력 부족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래서 대학에 못 간 것은 그 개인의 책임이라 여긴다. "노동계급과 비교해, 저학력자는 보다 자기 책임이 크고 더 비난받을 만하다 여겨진다. 그들에 대해서는 분노 감정이 많고, 호감이 적다."

 

 셋째, 저학력자에 대한 이런 안 좋은 감정은 엘리트만의 것이 아니다. 저학력자들 스스로도 그렇다. 이는 능력주의적 성공관이 얼마나 사회에 깊이 파고들어 있으며,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이 그 때문에 얼마나 사기 저하를 겪고 있는지 보여준다. "저학력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손가락질에 저항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반대로 그들은 그런 손가락질을 내면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학력자들은 자신들의 상황이 자업자득이며 욕먹어도 싸다고 여기는 듯하다.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연구자들은 능력주의적 사회에 대학 진학이 계속 강조됨으로써 비대졸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화된다고 본다. "교육이야말로 사회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의 권고는,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의 집단이 더욱 부정적으로 평가되면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강화될 위험성을 키운다." 이는 사람들이 불평등을 더 선뜻 받아들이게 하며, 성공은 능력 나름이라고 믿기 쉽도록 한다. "교육을 개인 책임이라 여기게 되면 교육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교육 성과는 대체로 개인 하기 나름이라 여겨지게 되고, 그에 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 또한 그렇게 된다.

 

p164

 

 어떤 이들은 고학력 대졸자들이 정부를 이끌어간다면 환영할 일이지 문제될 게 무엇이냐고 할지 모른다. 물론 다리를 지을 때는 가장 유능한 엔지니어를, 맹장수술을 할 때는 가장 숙련된 의사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최고의 대학을 나온 국회의원을 원하면 안 될 까닭이 뭘까? 빵빵한 학력을 갖춘 고학력 리더들이 더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더 합리적인 정치 담론을 이루지 않겠는가?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미국 연방의회와 유럽 국회들에서 오가고 있는 정치 담론을 슬쩍만 들어 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러시모어 산의 큰 바위 얼굴로 기념되고 있는 네 사람의 미국 대통령들 중 둘(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은 비대졸자다. 또한 마지막 비대졸자 미국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은 미국 최고의 대통령 중 하나로 꼽힌다.

 

 하버드 졸업생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여러 배경을 가진 자문단과 뉴딜 정책을 고안하고 실행했다. 그 자문위원들은 최근 민주당 대통령들의 자문위원들보다 더 유능했으나, 학력은 훨씬 떨어졌다. 1930년대에는 경제 관련 전문성이 최근 수십 년처럼 워싱턴의 정책에서 중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머스 프랭크는 뉴딜 정책을 만든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배경을 가졌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루스벨트가 가장 신임하던 해리 홉킨스는 아이오와 주의 사회복지사였다. 법무장관을 거쳐 대법원 판사에 임명된 로버트 잭슨은 법학 학위가 없는 변호사였다. 루스벨트의 구제금융 정책을 추진한 제시 존스는 텍사스 주의 사업가였는데 유수 금융기관들의 관리자가 되는 데 아무 주저가 없었다. 루스벨트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사장에 선임한 매리너 애클스는 유타주 작은 마을의 은행원이었고 비대졸자였다. 아마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농무장관일 헨리 윌리스는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학업을 마쳤다.

 

p167

 의회를 고학력자 계층의 전유물로 만들면 정부가 더 효과적인 방향으로 가기 힘들다. 대표성만 더 낮아질 뿐이다. 이로써 노동계급은 주류 정당에서 배제되며 특히 중도좌파 정당에서 그렇게 된다. 그에 따라 정치판은 학력에 따라 양극화된다. 오늘날 정치판을 가르는 가장 깊은 균열 중 하나가 바로 대졸자와 비대졸자 사이의 균열이다.

 

p172

 이런 학력주의 병폐와 가깝게 이어진 것이 기술관료적인 공적 담론의 왜곡이다. 정책 결정이 '스마트하냐 우둔하냐'의 문제로 여겨질수록 '스마트한 사람(전문가나 엘리트)'이 결정하고, 일반 시민들이 토론과 결의를 하는 일은 배제하는 게 옳다고 여겨지기 마련이다. 능력주의 엘리트들에게 '스마트하다'와 '우둔하다'의 담론은 도덕 및 이념적 반대에 대해 비당파적인 대안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런 반대는 민주정치의 핵심에 속한 것이다. 정당정치와 갑론을박을 뿌리치고 정책을 관철하려는 의지가 너무 강하면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질문을 저버린 채 정치를 유명무실화하는 기술관료적 공적 담론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다.

 

p179

 그러나 정치적 이견을 단지 액면의 사실로 부정하거나 과학을 부정하는 일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사실과 의견이 정치적 설득 과정에서 어떤 상호작용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치 이전에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우리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술관료적 기만이다. 정치 토론은 종종 의제와 연관된 사실을 어떻게 잡아내고 정의할지에 대해 벌어진다. 어느 쪽이든 사실을 프레임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면, 그는 장기적으로 그 논쟁에서 이긴 셈이다. 모이니 한의 말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의견은 우리의 인식을 사로잡는다. 의견이란 것은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정립된 뒤에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니다.

 

p182

 기술관료적 입장의 매력이면서 동시에 약점은, 그것이 겉보기로는 잡음의 여지가 없는 가치중립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스마트 기술'과 '스마트한 규제 틀' 같은 이야기는 기후변화를 두렵고 어려운 문제로 만드는 도적적, 정치적 질문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화석연료 산업의 외부효과를 억제하기 위해 민주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자연을 도구화하도록 부추긴 소비주의적 생활 태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쓰고 버리는 문화"라고 부른 그런 태도를 재고해야 할 것인가?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정부의 행동에 반대하며, '과학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정부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 않은지, 특히 경제를 대규모로 뜯억치며 특정인들(그런 재편성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기술관료적 엘리트들)의 잇속을 채우려 하는 게 아닌지 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는 전문가들이 대답해야 할 과학적 질문들이 아니다. 권력, 도덕, 권위, 신뢰에 대한 질문들이다. 바로 민주시민을 위한, 민주시민이 할 수 있는 질문들인 것이다.

 지난 40년을 군림해온, 좋은 학력을 자랑하는 능력주의 엘리트의 실수 중 하나는 그러한 질문들을 정치 논쟁의 핵심에 제대로 집어넣지 못한 것이다. 민주주의 규범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는 이 시점에, 능력주의 엘리트의 오만과 기술관료적 비전의 협소함에 대한 불만은 별 것 아닌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불만이 지금 이 지경까지 정치를 끌고 온 것이다. 그런 불만을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자들이 잘도 써먹은 것이다. 능력주의와 기술관료 정치의 실패를 바라보는 일, 그것은 그런 불만을 제대로 접수하고 공동선의 정치를 다시 이미지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단계다.

 

p192

 마이클 영은 누군가의 사회적 지위가 우연한 이유로 정해짐을 성찰하는 것이 꽤 득이 된다고 보았다. 덕분에 승자와 패자 모두 자기 인생은 자업자득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현행 계급질서를 마냥 옹호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는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역설적인 효과를 준다. 직업과 기회의 능력에 따라 배분되더라도 불평등은 줄어들지 않는다. 불평등 구조를 능력에 따라 재국축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재구축은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자리를 가졌다는 생각을 굳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를 더 벌려놓는다.

 

 "이제 능력에 따라 계급이 분류된 사람들에게 계급 간 격차는 필연적으로 더 넓어진다. 상류계급은 더 이상 자기 의심이나 자기 비판에 시달리지 않는다. 오늘날 잘나가는 사람들은 그 성공이 단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보상이요, 노력에 따른 대가라고만 여긴다. 그리고 누구도 그 성공에 대해 가타부타할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은 상류계급에 속할 만하니까 속해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시작할 때부터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뿐 아니라, 타고난 재능을 일류 교육으로 갈고 닦을 수 있었음도 알고 있다."

 

p208

 하이에크는 경제적 보상이 능력의 문제임을 부정함으로써 재분배에 따른 옹호론을 차단했다. 헤지펀드 매니저가 왜 교사보다 많은 돈을 버느냐며 분개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킴으로써 말이다. 하이에크는 우리가 비록 교사의 직분이 돈 관리하는 일보다 더 찬양할 만하다 여길지라도, 봉급과 임금은 좋은 인격이나 칭찬할 만한 업적의 보상이 아니며, 시장 참여자들이 내놓은 재화와 용역의 경제적 가치에 따른 보수일 뿐이라고 답변한다.

 

 하이에크와 달리 복지국가 자유주의의 옹호자들은 부자에게 세금을 거둬 빈자를 돕는 일을 선호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소득과 부의 배분이 각자의 능력이나 자격과는 무관해야 한다는 하이에크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p210

 롤스는 "차등의 원칙은 '자연적 재능의 분배 상태가 공동 자산이며, 그 분배에서 비롯되는 편익은 무엇이든 공동체적으로 향유되어야 한다'는 합의를 나타낸다. 태어날 때부터 남보다 유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가 누구든 가장 불우한 상황에 처한 이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한에서 그 행운의 몫을 향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는 반드시 "우연한 배분이 가장 불운한 사람들에게 이롭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p250

 코넌트는 이런 세습적 엘리트 체제를 뒤집어엎고 능력주의적 체제로 대체하려고 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르만이 했던 말로 정리된다.

 

 '기존의 비민주적인 미국 엘리트들을 쫓아내고 좋은 머리, 정교한 훈련, 공적인 정신으로 찬 새로운 엘리트가 배경을 불하고 충원되어 그들을 대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사실 보자면, 남성들)은 이 나라를 이끌어 갈 것이다. 그들은 20세기 말 미국이 창출해낸 대규모의 기술적 조직을 관리할 것이며, 그런 조직을 통해 처음으로 모든 미국인들에게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르만의 표현을 빌면 "이 나라의 리더십 집단과 사회구조에 대담한 변혁을 가져오려는 공학적 시도였다. 다른 말로 하면, 조용한 쿠데타 계획" 이었다.'

 

p253

 코넌트는 모든 장래의 시민을 민주사회 구성원으로서 교육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보기는 했지만, 공립학교의 그러한 공적인 목표는 '인재 선별기'로서의 기능에 비하면 뒷전이었다. 젊은이들을 시민으로 육성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그들에게 가장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기회의 사다리, 그 첫 단에 발을 디딜 수 잇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코넌트는 이러한 인재 선별 역할이 "교육 시스템에 과도한 부담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했다. 그러나 그는 공립학교가 "이 특정 목적에 종사하도록 재구성될" 필요를 제기했다. 공립학교는 새로운 능력주의적 엘리트를 널리 모집할 통로가 될 것이었다.

 

p255

 사회적 이동성과 기회의 평등이라고 하면서 모호하게 가리는, 능력주의 시스템의 부정적 측면 두 가지를 조명해준다. 첫째, 능력에 기준한 유동적 사회는 비록 세습적 위계질서와는 상반되지만 불평등과 상반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출생 대신 능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둘째, '최고의 천재'를 예찬하고 보상하는 시스템은 그 나머지를 격하시키며,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비천한 자들'이라고 멸시하기 쉽다. 비록 후한 장학금 제도를 제안하면서도 제퍼슨은 '스마트한 사람'을 높이고 '우둔한 사람'을 깍아내리는 능력주의 성향을 아주 일찌감치 나타낸 셈이다.

 

p256

 재능을 선별하는 일과 평등을 찾는 일은 두 개의 서로 다른 프로젝트다.

 

p269

 명문대들이 특기생 제도를 두는 종목들 대부분은 부유한 집 자녀들이 선호하는 종목이기 때문이다. 스쿼시, 라크로스, 조정, 요트, 골프, 수상폴로, 펜싱, 심지어 승마 등등.

 

p270

 그러나 오직 현행 시스템의 공정성에만 집중한다면 코넌트의 능력주의 혁명의 핵심에 놓인 더 큰 질문을 놓치게 된다. '대학은 누가 인생의 승자가 될지에 대해 재능을 근거로 사람들을 선별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

 그래야 한다는 주장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 번째 의문은 그런 선별 결과 걸러진 사람들에 대해 암울한 낙인을 찍게 되고, 그것은 곧 공동체적 시민 생활에 유해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이다. 두 번째는 능력주의적 경쟁이 인재 선별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피해, 그리고 인재 선별 임무가 너무 과부하됨으로써 대학의 교육 임무마저 경시될 위험성이다. 간단히 말해 고등교육을 초고도 경쟁을 거친 선별 도구로 삼는 것은 민주주의와 교육 모두에 건전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p272

 1961년 출간된 <탁월함 Excellence>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재단 이사장이며 훗날 린드 존슨 행정부 보건교육복지부 장관을 맡게 되는 존 가드너는 새로운 능력주의 시대의 정신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높은 역량과 앞선 훈련을 갖춘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태도의 혁명을 목격하고 있다. 사상 처음으로 그런 사람들은 아주 열렬하게, 아주 광범위하게 환영받고 있다." 소수가 다스리고 따라서 재능의 낭비가 가능했던 이전 시대와 달리, 현대 기술문명 사회는 복잡한 조직에 의해 다스려지므로 재능 소유자가 끝없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런 사람을 어디에서든 찾아내려고 한다. 이러한 "위대한 재능 사냥"의 긴급성은 이제 교육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엄격한 선별 처리"를 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코넌트와 달리 가드너는 능력주의적 선별의 가혹한 면을 잘 알고 있었다. "갈수록 교육이 가장 명민한 젊은이를 꼭대기까지 올려 보내는 효과적 수단이 됨에 따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엄격한 인재 선별기 역할을 할 것이다. 학교는 유능한 젊은이들에게 기회의 오아시스가 된다. 그러나 같은 의미에서, 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곳이 되기도 한다." 이는 기회의 평등이 가져오는 악영향이다. "이는 모든 젊은이가 돈이나 사회적 지위, 종교나 인종 등의 장애물을 초월해 자신의 능력과 야심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필요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준다.

 가드너는 그런 고통은 불가피하며, 재능을 발견하고 개발해야 할 시급성에 비추어 보면 수지가 맞는 비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에서 일부 학생은 학생은 떨어질 때 고통이 가장 심하리라 보았다. "사회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사람들을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선별하면, 루저들은 자신의 낮은 지위가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남보다 못하기 때문임을 절감할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입에 쓴 약이다.

 마이클 영에게 이런 통찰은 능력주의를 반대하는 핵심적 사유였다. 그러나 가드너에게는 불운한 부수적 효과일 뿐이었다. "대학이 특별한 명예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성공을 좌우하게 되었다고 그는 인정한다. "오늘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세상의 시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한 필수 코스처럼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만든 잘못된 가치 틀에 따라, 대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없게 되었다." 가드너는 다음과 같이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성취와 그 사람의 가치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개인은 그 성취와 무관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추구하던 능력주의 사회가 교육적 성취와 명망 사이에 구별의 여지를 별로 안 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대학 교육이 대중에 개인적 성취, 사회적 상승, 시장 가치와 자부심의 향상으로 확고히 인식되고 있음은 단순한 사실이다. '존경과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대다수의 미국 국민이 동의하게 되면, 그러한 국민 의견의 일치가 사실의 일반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p276

 경쟁률이 높은 대학과 그렇지 않은 대학의 차이는 점점 벌어진다. SAT 고득점 학생들은 몇 안 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대학 입시는 '승자독식 게임'이 된다. 비록 '지금의 대학 입학이 과거보다 더 어렵다'고 많이들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진술이라 할 수 없다. 지금 미국의 대다수 대학들은 지원하는 학생 대부분을 받아준다.

 오직 극소수의 엘리트 대학들만 최근 수십 년간 합격률이 떨어졌다. 그런 대학들의 사례는 신문 머릿기사를 장식하며 10대 내내 오직 입시 준비에 매진하는 부잣집 자녀들 사이에서 입시 광품이 몰아치도록 만든다. 1972년 '재선별'이 이미 한참 진행되었을 때 스탠포드는 지원자의 삼분의 일을 합격시켰다. 오늘날 그 수치는 5퍼센트로 떨어졌다. 1988년에 지원자의 절반 이상(54퍼센트)을 받아주던 존스홉킨스는 이제 9퍼센트만 받아준다. 대표적으로 합격률이 수직 낙하한 시카고대의 경우 1993년 77퍼센트였던 것이 2019년에는 6퍼센트가 되었다.

 통틀어 46개 대학이 지금 입학 지원자의 20퍼센트 이하를 합격시키고 있다. 이 중 일부 학교는 학생들에게 염원의 대상이며, 그들의 부모가 2019년 입시 부정 스캔들과 같은 일을 저지르게끔 하는 꿈의 목표다. 그러나 미국 대학 학부생 중 겨우 4퍼센트만 그런 경쟁률이 심한 대학에 소속되어 있다. 80퍼센트 이상은 입학 지원자의 50퍼센트 이상을 받아 주는 대학들에 다닌다.

 

p277. 상처 입은 승리자들

 

 고등교육의 승자독식형 재선별은 두 가지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첫째,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는 대학들은 일반적으로 부유한 집안 출신 자녀를 압도적으로 많이 뽑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은 승자들에게도 피해를 남긴다. 별 문제나 말썽 없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과거의 세습적 엘리트와 달리, 새로운 능력주의 엘리트는 힘겨운 투쟁을 거듭해야 높이 올라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비록 새로운 엘리트가 세습적 위치까지 차지하긴 했지만, 능력주의적 특권의 되물림은 확정될 수 없다. 그것은 '들어가기'에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는 능력주의적 성공에 모순적인 도덕 심리학을 부여한다. 명문대에 물밀 듯 몰린 부잣집 자제들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러나 입시 초고도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성공을 개인의 노력과 성취 이외의 것으로 생각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런 경쟁의 승자들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이를 쟁취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믿음은 능력주의적 오만의 일환으로 비판 받을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분투 이상의 것을 요구하며, 대가로 주어져야 할 성공 이상을 강요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강점도 있다. 그것이 고통 속에 담금질되었고 혼을 파괴할 정도의 압박 속에서 젊은이들에게 부과된 능력주의적 고난을 뚫고 왔다는 데서 비롯되는 강점이다. 부유한 부모들은 자제들에게 명문대 입학을 위한 강력한 뒷받침을 해준다. 그들 대부분은 고등학교 생활 내내 엄청난 스트레스, 고민, 불면과 싸우며 모의고사는 물론 공부, 체육, 예체능 실기 과외, 그 밖의 온갖 잡다한 특별활동을 견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겪는다. 종종 과외 선생들에게 지불하는 비용이 예일대 4년 과정보다 더 많이 들기도 한다. 선생들 가운데는 지체장애자 특별 선발을 노려보라고 권하는 경우도 있다. 그 결과 표준화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어느 소득수준이 높은 코네티컷 근교에서는 18퍼센트의 학생이 지체장애 진단을 받아냈다. 그것은 미국 전체 기준보다 6배나 높은 수치였다). 어떤 컨설턴트는 여름방학을 이용한 특별 해외 참가 프로그램에 등록해 대학 지원 자소서를 쓸 때 적당히 써먹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자고 권하기도 한다.

 이런 능력주의적 군비 경쟁은 부유한 집안 쪽으로 전세를 기울인다. 그리고 부자 부모들이 스스로의 특권을 대물림하기 쉽게 해준다. 이런 식의 특권 대물림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런 판에서 유리한 고지를 찾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공평하며, 이 판에 자식들이 뛰어들어 있는 상황에서는 지나친 압박이 된다. 능력주의적 경쟁은 침략적이고 성취만 쫓으며 과도한 부모의 압박을 불러온다. 10대 청소년에게 과중한 부담을 준다는 말이다. 극성 학부모의 등장은 능력주의적 경쟁이 과열된 시기와 일치한다. 사실 '부모 노릇하다parent'라는 단어는 1970년대에 와서야 동사로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자녀가 공부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부모의 책임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지게 되던 때다.

 

 1976년에서 2012년까지 숙제를 해주는 등 자녀의 학업을 돕는 데 전념하는 부모의 숫자는 다섯 배로 늘었다. 대학 입시가 갖는 의미가 커짐에 따라 조바심 내고 나서기 좋아하는 부모들의 태도도 늘상 있는 일이 되었다. 2009년 11월 <타임> 표지 기사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과잉 부모 노릇의 폐해 : 엄마 아빠는 왜 이제 잡고 있던 줄을 끊어야 하나." 기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성공에 너무 집착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부모 노릇이라는 게 마치 어떤 생산물이 생산 과정처럼 되고 말았다." 이제 아동기에 개입해 일정하게 관리를 하려는 움직임은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6~8세의 경우 1981년에 비해 1997년에는 노는 시간이 25퍼센트 감소했다. 그리고 숙제는 두 배로 늘었다."

 

 어느 흥미로운 연구에서 경제학자인 마티아스 되브케와 파브리치오 질리보티는 과보호 학부모의 등장을 경제학적으로 설명했다. 그들이 정의한 표현으로는 "과도하게 개입하고, 막대한 시간을 투입하며, 통제적인 육아 방식을 통해 지난 30년 동안 널리 퍼진 방식"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런 부모 노릇은 불평등이 증가하고 교육으로 인한 보상이 커진 데 따른 합리적 대응이었따. 비록 여러 사회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결 같이 부모의 개입이 심해지긴 했으나, 가장 심했던 곳은 불평등이 가장 크게 두드러진 곳이었다. 가령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였다. 그리고 스웨덴이나 일본처럼 불평등이 비교적 덜 불거진 나라에서는 그러한 극성 부모들도 덜 나타났다.

 이해할 만하기는 하지만, 자녀의 인생을 능력주의적 성공으로 몰고 가려는 부모들의 집착은 심리학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다. 특히 대입을 앞두고 있는 10대들에게 그렇게 가혹한 강요를 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2000년대 초 캘리포니아 주의 마린 카운티(샌프란시스코 인근의 풍요로운 교외 지역)에서 젊은이들의 심리 상담을 해온 심리학자 매들린 레빈은 겉으로는 성공적인 여러 유복한 가정의 10대들이 극심한 불행감, 고립감,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소한 문제에 흥분하며, 그들 다수는 우울하고, 불안하고, 분노에 차 있었다. 그들은 부모, 교사, 코치, 동료의 말에 지나치게 복종적이었으며 어려운 일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문제까지도 남들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의 문제가 삶의 어려움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인 것은 아니었다. 매들린은 이들이 '풍요로움과 지나칠 정도의 부모 간섭 때문에 불행하고 깨져 버리기 쉬운 인간이 되었음'을 차차 알게 되었다.

 <특권의 대가 The Price of Privilge>라는 책에서 레빈은 그녀가 "특권층 젊은이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질환 증후군"이라 부르는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심리학자들은 '일촉즉발'의 젊은이는 도시빈민굴의 불우한 청소년들이라고 생각했다. 어렵고 용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나야만 했던 아이들 말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괴롭다.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레빈은 "미국에서 나타난 새로운 일촉즉발의 젊은이 집단은 부유하고 잘 교육받은 집안의 아이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겪은 경험은 이 나라 동 연령대에서 최고 수준의 절망, 약물 의존, 불안 장애, 신체적 호소, 불행감 등이었다. 연구자들이 사회경제적 스펙트럼을 통틀어 동 연령대 아동들을 살펴본 결과, 가장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가진 아동들이 부유한 가정 출신임을 알 수 있었다.'

 

 레빈은 '상류 및 중류 청년들에 대한 뜻밖의 사실, 가장 유명한 대학을 나오고 미국 최고의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의 어두운 면'이라는 이름의 연구를 한 수니아 루타의 글을 이용한다. 그들은 동년배 10대보다 높은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으며, 그것은 그들이 대학에 합격한 뒤에도 계속된다.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때 풀타임 등록 대학생들은 2.5배나 높은 약물 의존증을 나타낸다(23퍼센트, 보통 사람은 9퍼센트)." 그리고 풀타임 대학생의 절반은 과도한 음주를 하며 불법적이거나 처방 약물을 사용하고 있다.

 부유한 출신 젊은이들이 과도하게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해답은 능력주의적 사명에서 찾을 수 있다. '뭘 해내라', '뭘 이뤄라', '뭘 성공해라' 하며 끊임없이 떨어지는 사명. 투라는 이렇게 썼다. "부모와 자식 모두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 메시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생애 초기부터 들려오던 것이며 행복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목소리다. 돈을 많이 벌어라. 그러기 위해 명문대에 들어가라."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다. 나는 그 사실을 내 학생들을 보고 알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불타는 고리를 뛰어 통과하는 일을 거듭해왔고, 그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많은 아이들이 아직도 분투하고 있다. 생각하고, 탐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가치 있게 살아갈 것인가 숙고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싸우고 또 싸운다. 놀랄 만큼 많은 아이들이 정신 건강에 이상을 겪고 있다. 능력주의의 호된 시험을 통과하는 데 따르는 심리적 피해는 아이비리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100개 이상 미국 대학의 학부생 6만 7,000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대학생들이 전례 없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울증과 불안증이 치솟고 있다. 대학생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설문 이전 1년 이내에 자살을 고려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넷은 정신질환자로 진단을 받거나 치료를 받고 있다. 젊은이(20~24세)의 자살률은 2000~2017년 사이 36퍼센트 늘었다. 지금 그들은 살인보다 자살로 더 많이 죽어간다.

 이런 병리학적 상황을 넘어 심리학자들은 이 세대 대학생들의 보다 미묘한 정신적 문제점을 찾아냈다. '완벽주의라는 숨은 전염병'이다. 몇 년 동안이나 불안 속에 분투해온 결과 젊은이의 마음은 약하디 약한 자부심, 그리고 부모, 교사, 입학사정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냉혹한 한 마디에도 산산조각 날 자의식으로 채워져 버렸다. "실적과 지위와 이미지만이 한 사람의 쓸모와 가치를 정할 수 있는 세계에서, '완벽한 자신'이라는 비이성적 생각이 의미 있는 게 되고 말았다." 4만 명 이상의 미국, 캐나다, 영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물의 공저자 토머스 쿠란과 앤드류 힐의 말이다. 이들은 1989년부터 2016년까지 완벽주의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사회적인, 그리고 부모의 기대에 매인 완벽주의의 증가세는 32퍼센트에 달했다.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직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실적을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한다." 성취 요구에 따라,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개인의 능력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치를 결정한다.

 능력주의 기계의 레버와 활차 역할을 해온 사람들은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간적 희생이 있었는지 모른다. 번아웃 증후군에 대한 솔직하고 통찰력 있는 글에서 하버드 입학사정관실은 "고등학교와 대학 재학 시절을 불타는 고리를 뛰어넘는 일로만 채워온 사라들이 결국에는 평생 신병훈련소와 같은 틀 안에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2000년에 나온 그 글은 아직도 하버드 입학 홈페이지에 일종의 경고용으로 게시돼 있다.

 

p285

 캄핑(comping) 문화의 등장은 대학이 경쟁적 능력주의의 기초훈련장과 같아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목표와 수단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는 다시 대학 역할이 더 넓은 범위에서 바뀌고 있음을 시사한다. 학력을 부여하는 역할은 이제 너무 커져서 교육을 수행하는 역할을 덮어버렸다. 선별하고 분투하는 일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넘어버렸다.

 

 p286

 오늘날 기회의 관리자로서 대학의 역할은 아주 확고하기 때문에 도무지 대안을 찾기 어려운 상태다. 고등교육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볼 때가 왔다. 특권을 얻은 사람들의 고장 난 정신 상태를 고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이 낳은 시민생활의 양극화를 고리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인재 선별기를 뜯어 고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면, 능력주의 체제가 그 폭력적 지배를 동시에 두 방향으로 뻗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정상에 올라서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안증, 강박적 완벽주의, 취약한 자부심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으로서 능력주의적 오만 등을 심는다. 한편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극심한 사기 저하와 함께, '나는 실패자야' 라는 굴욕감마저 심는다.

 이 쌍방향 폭력은 하나의 도덕적 원인을 공유한다. 능력주의의 금과옥조인 '우리는 개인으로서 우리 운명의 책임자다'라는 도덕률이다. 우리가 성공하면 우리가 잘한 덕이며, 실패하면 우리가 잘못한 탓이다. 사기를 올려주는 말 같지만, 개인 책임에 대한 집요한 강조는 우리 시대의 불평등 상승 추세에 대응할 연대 의식이나 연대 책임을 떠올리기 어렵게 한다.

 

 p297

 고등교육은 그 영예의 대부분을 그것이 공언한 고등 목표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학생들이 직업 세계에서 필요한 역량을 갖추게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도덕적인 인간이자 민주적인 시민으로서 공동선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사람이게끔 준비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가르쳐온 나는 도덕교육 및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왜 4년제 대학들이 그런 임무를 도맡아야 하는가? 시민의 민주주의 교육에 대한 보다 포용력 있는 생각은 대학의 시민교육에만 한정하는 입장에 반대할 것이다.

 

p299

 문화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래시가 본 대로, 19세기에 미국을 찾은 외국인 방문자들은 살므이 구석구석에 배어 있던 평등에 놀랐다. 그 평등이란 부의 평등한 분배도, 심지어 출세의 기회가 평등하다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시민이 거의 똑같은 기반에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민권이 있다면, 사회의 가장 보잘 것 없는 구성원일지라도 다른 곳에서는 특권층에게만 한정되는 지식과 교양을 저할 기회가 자유롭다. 모두의 복지를 위해 기여하는 노동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인 형태로 띤다. 이런 말이 있다. "미국의 기술자들은 무식한 일꾼이 아니다. 개명되고, 사려 깊은 사람들로, 자기 손을 어떻게 쓸지 알 뿐 아니라 원리원칙을 어떻게 쓸지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술자들을 위한 잡지는 이런 성찰적 주제를 계속해서 다룬다.'

 

 래시는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때, 19세기 미국 사회의 평등주의적 성격은 사회적 이동성이 아니라 지성과 교육이 모든 계층과 직업에 널리 퍼져 있던 데서 나온다고 보았다. 이는 능력주의적 선별이 망쳐버린 평등의 유형이다. 능력주의는 지성과 교육을 고등교육의 상아탑에 온통 몰아넣어 두고서, 누구에게나 그 상아탑에 들어올 공평한 경쟁이 보장되리라고만 약속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접근권 배분은 노동의 존엄을 떨어뜨리며 공동선을 오염시킨다. 시민교육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될 수 있다. 향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

 

p301

 풍요로우면서도 경쟁이 치열한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능력주의의 폭정을 보면, 내 십대 시절의 두 가지 경험이 떠오른다.

 선별과 등급 구분이 과열되면서 내가 1960년대 말 캘리포니아 주의 퍼시픽 팰리세이드에서 다녔던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내려왔다. 당시 우열반 편성 열기가 얼마나 심했던지, 우리 고등학교에는 2,300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우등분의 30~40명의 친구들하고만 지내야 했다. 8학년 때 수학 선생님은 그런 우열반 편성을 극단적으로 밀고 갔다. 아마 대수학인지 기하학인지 하는 과목 시간이었는데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성적에 따라 앉는 줄이 달라야 했던 사실은 기억난다. 6개 줄 가운데 3번째 줄까지가 이른바 우등 분반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학생 개인별 성적대로 정확히 차례차례 앉아야만 했다. 그것은 시험이나 쪽지시험을 볼 때마다 앉는 자리가 매번 바뀐다는 뜻이었다. 이 희비극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자 선생님은 개인 시험점수를 나눠주기 전에 자리 재배치부터 시켰다. 나는 수학을 잘했지만 최고는 아니었다. 보통은 두 번째 자리와 네 번째 또는 다섯 번째 자리 사이에 앉고는 했다. 케이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는 거의 언제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열네 살 먹은 소년으로서 '나는 학교란 게 원래 이런 건가'보다 여길 수밖에 없었다. 잘하면 잘할수록 좋은 자리에 앉게 되는 것. 모두가 누가 가장 수학을 잘하는지 알고 있었고, 이번 또는 저번 시험에서 누가 최고였고 누가 폭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것은 내가 생애 처음으로 능력주의와 마주한 순간이었다.

 우리가 10학년이 되었을 때는 등급 정하고 나누기가 최악에 이르렀다. 첫째 줄에 앉는 학생들은 대부분 성적에 목을 맸으며, 그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무섭게 경쟁했다. 너무 석차에 열을 올린 나머지 지적 호기심 자체가 증발하는 상황이었다.

 우리 10학년 때 생물 선생님의 이름은 판햄이었다. 늘 인상을 쓰고 나비넥타이를 매고 다녔는데, 수업 시간마다 교실을 뱀, 도마뱀, 물고기, 생쥐 등등의 신기한 야생동물로 채워서 놈들의 말썽으로 정신없게 만들곤 했다. 하루는 그가 우리에게 돌발 퀴즈를 냈다. 종이를 한 장씩 꺼내서 1번부터 15번까지 적고, 답이 맞는지 틀리는지 적으라고 했다. 당황한 학생들이 문제도 없이 어떻게 답을 적으라는 거냐고 묻자, 그는 각자 문제를 생각해서 맞나 틀리나 답을 쓰면 된다 했다. 학생들은 "이 말 같지 않은 시험도 성적에 들어가느냐"고 걱정스레 질문했고, 선생님은 "물론, 당연하지"라고 대답했다.

 그 때 나는 이것이 엽기적인 농담이 아니면 놀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판햄 선생님은 그 나름대로 능력주의의 폭정에 저항했던 것 같다. 그는 우리가 선별과 분투의 도가니에서 한 발 물러나 그냥 지긋이 도마뱀을 바라보기를, 그 동물이 얼마나 신비한 존재인지를 충분히 보고 즐기기를 원했을 것이다.

 

p324

 경제 정책이 궁극적으로 소비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오늘날 하도 익숙해져서 그런 생각을 넘어서기가 어려울 정도다. "소비는 모든 생산의 유일한 목표이자 의미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한 말이다. "그리고 생산자의 이익 추구는 오로지 소비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 존 케인스도 "소비란 모든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대상이다"라고 함으로써 스미스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리고 이는 지금의 경제학자들 대부분도 동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더 오래된 전통적 도덕사상과 정치사상은 생각이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번영이 '우리의 본질을 우리 역량의 배양과 실행을 통해 실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미국 공화주의 전통은 일정한 직업(먼저 농업, 그 다음은 수공업, 그리고 널리 자유노동이라고 이해되는 것)은 시민들의 자기 통치가 가능하도록 미덕을 계발해 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20세기에 공화주의 전통의 생산자 윤리는 소비자 중심적 자유 윤리와 경제성장 위주의 정치경제학에 밀려났다. 그러나 복잡한 사회에서도 '일은 시민들을 기여와 상호 인정의 틀 안에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때때로 이는 고무적인 표현으로 재인식된다.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암살 직전 행한 연설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청소 노동자들의 존엄을 그들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점에 결부시켜 이야기했다.

 '언제가 우리 사회는 청소 노동자들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죠. 따져 보면 우리가 버린 쓰레기를 줍는 사람은 의사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질병이 창궐할 테니까요. 모든 노동은 존엄합니다.

 

 1981년 회칙 "인간의 일에 대하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일을 통해 사람은 인간으로서 충족되고, 그리하여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일을 공동체와 결부된 것으로 보았다. "일은 인간의 가장 심층적인 정체성이 국가 전체와 이어지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의 일은 그의 동포와 함께 공동선을 개발하도록 해준다."

 몇 년 뒤 가톨릭 추기경 전국협의회는 경제 관련 사회교육에 대해 가톨릭 교회의 자세한 입장을 담은 <목회 서한>을 내놓았다. 그것은 '기여'에 대한 명백한 정의를 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사회생활에서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참여자가 될 책임이 있다. 그리고 정부는 경제 및 사회 제도를 정비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존중받고 노동의 존엄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할 의무가 있다."

 일부 세속 철학자들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독일 사회이론가 악셀 호네트는 오늘날 소득과 부의 분배에 대한 논쟁은 인정과 명망에 대한 갈등으로 이해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생각이 헤겔에게서 연유했다고 밝히긴 했지만, 고액 연봉을 받는 운동선수를 놓고 벌어지는 연봉 논쟁에 참여해 본 스포츠 팬이라면 아마 직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팬들이 한 선수에게 "이미 수백만 달러를 받고 있으면서 더 달라고 하느냐"고 불평하면 그 선수는 거의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존중받느냐가 문제죠."

 이것이 '인정 투쟁'이라는 용어를 통해 헤겔이 말하려던 것이었다.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시스템을 넘어, 노동 시장은 인정을 부여하는 시스템이라는 게 헤겔의 생각이다. 그것은 단지 소득만으로 노동에 보상하는 게 아니며, 각 개인의 일을 공동선에 대한 기여로 공적 인정을 해준다. 시장 자체는 노동자들에게 기술이나 인정을 부여하지 않으며, 그래서 헤겔은 노동조합이나 길드 같은 기구를 제안한다. 그런 기구는 각 노동자의 기술이 공적 명망을 얻을 만한 기여를 하기에 충분함을 보장해준다. 간단히 말해 헤겔은 그의 시대에 등장한 자본주의적 노동 기구는 오직 두 가지 조건에서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보았다. "첫째, 최저 임금을 보장해야 한다. 둘째, 모든 근로 활동에 있어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80년 뒤 프랑스 사회이론가 에밀 뒤르켐은 헤겔의 노동론을 토대로 "노동분업은 사회적 연대의 원천이 되어야 하며, 모든 이들은 공동체에 기여한 실제 가치에 근거해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미스, 케인스, 그리고 어려 현대 경제학자들과 다르게 헤겔과 뒤르켐은 일이 소비만을 위한 수단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일은 그 최선에 있어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p330

 시장 사회에서는 우리가 버는 돈과 우리가 공동선에 기여한 내용의 가치를 혼동하기 쉽다. 

 그런 혼동은 단지 생각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가 아니다. 그 논리적 결함을 지적하는 철학 논증만 하고 만족스러워 할 일도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는 받을 몫을 받는다'는 식으로 짜여 있다는 능력주의적 희망에서 비롯된 혼동이다. 그런 희망은 구약성서 시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역사의 옳은 쪽에 서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섭리론적 사고를 부추긴 희망이기도 하다.

 시장 주도적 사회에서 물질적 성공을 도덕적 자격의 증표로 해석하는 일은 지속성 있는 유혹이다. 그 유혹은 계속해서 우리의 저항을 깨트리려 한다.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논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법을 세우는 것이다. 공동선에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 있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시장의 낙인이 잘못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숙고하고, 민주적으로 공동의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런 논쟁이 어떤 합의를 반드시 낳으리라 본다면 비현실적이리라. 공동선은 불가피하게 논란의 여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일의 존업에 대한 새로운 논쟁은 우리의 당파적 경향을 무너뜨릴 것이고, 우리의 정치 담론을 도적적으로 활성화할 것이며, 우리가 40년 동안 시장의 신앙과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져든 탓에 양극화된 정치 현실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p335

 금융업계는 2008년 금융위기 때 극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이때 불거진 논쟁은 주로 '세금으로 구제금융을 제공해야 되느냐'와 '어떻게 월스트리트를 개혁해서 앞으로의 위기 가능성을 줄이느냐'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그보다 훨씬 덜 주목받은 문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금융이 경제를 재구성했으며 교묘하게 능력과 성공의 의미 또한 뜯어고쳤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변화는 일의 존엄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역과 이민은 금융에 비해 포퓰리즘의 반 세계화 공격에서 덜 주목 받았다. 그런 것들이 노동계급의 일자리와 지위에 미친 영향은 보다 분명하고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경제의 금융화야말로 아마도 일의 존엄 감소에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노동자들의 사기 저하에도 역시 더 큰 역할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대 경제에서 시장의 보상과 실제 공동선에의 기여도 사이에 아마도 가장 큰 격차 사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융업계는 선긴경제체제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으며, 지난 수십 년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미국의 경우 GDP에서 금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대 이래 세 배로 늘었다. 그리고 2008년 기준 기업 이익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그 고용인들은 다른 업계 비슷한 수준의 노동자들에 비해 70퍼센트 이상 실적을 낸다.

 모든 금융 활동이 생산적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가치 있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할 경제 능력을 증진시켜 준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최선을 다 한다고 해도 금융은 그 자체가 생산적일 수가 없다. 그 역할은 자본을 사회적으로 유용한 목적별로(신생 기업 공장, 도로, 공항, 학교, 병원, 가정 등등) 배당함으로써 경제 활동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이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최근 몇 십 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함으로써 그 투자는 점점 실물경제와 유리되었다. 점점 더 관계자들에게 큰 수익을 창출하는 복합 금융공학과 연계되고 있는데, 이 금융공학이란 경제를 보다 생산적이게 하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영국 금융서비스 국장 어데어 터너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 20~30년 동안 부유한 선진국들에서 금융 시스템의 규모와 복잡성이 증대했는데. 그것이 성장이나 경제 안정에 보탬이 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금융 활동이 경제적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실물경제에서 지대(부당한 불로소득)를 끌어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절제된 판단은 1990년대에 클린턴 행정부와 영국 정부가 믿고 있던 지혜, 그에 따라 금융업 규제를 철폐하도록 했던 지혜에 사형선고를 내린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간단히 볼 때 월스트리트에서 최근 수십 년 동안 고안해 낸 파생상품들과 기타 금융상품들은 실제로는 경제를 돕기보다 헤치기만 했다는 뜻이다.

 

 p338

 현대 금융이 경제이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금융을 개혁하려 한다. 그러나 나의 관심사는 그 도덕적, 정치적 영향이다. 일의 존엄을 살리려는 정치 어젠다는 세금 제도를 써서 명망의 경제를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즉 투기자본을 억누르고 생산적인 노동을 상찬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는 세금 부담을 일에서 소비로, 그리고 투기로 옮긴다는 뜻이다. 이를 급진적으로 추진하려면 급여세를 대폭 인하하거나 아예 없애버리고 대신 소비세, 부유세, 금융거래세를 통해 세입 부족분을 메워야 할 것이다. 보다 온건하게 가려면 급여세(고용주나 고용자 모두에게 일 관련 비용을 늘리고 있는)를 줄이고 그만큼 줄어드는 세입은 단타 거래(실물경제에 아무 보탬이 안 되는)에 한해 금융거래세를 매겨 충당한다.

 노동에서 소비와 투기로 조세 부담을 넘기려는 이런 저런 수단들은 오늘날의 세금 제도를 좀 더 효율적이면서 좀 덜 누감累減적이게끔 만드는 방법으로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고려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충분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세금의 표현적인 중요성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공공생활에 어떻게 돈을 대느냐를 통해 성공과 실패, 명예와 인정에 대한 태도를 표출한다. 세금 징수는 세입을 올리는 방법만이 아니다. 한 사회가 과연 무엇을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로 여기는가에 대한 판단을 제시하는 것이다.

 

p350

 같은 해에 대서양 건너편에서 제임스 애덤스라는 사람이 <미국의 서사시 The Epic of America>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조국에 바치는 송가를 썼다. 이 책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가 그 책의 결론부에서 처음으로 쓴 문구는 모두가 알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 우리 시대에서 돌아보면 그가 말한 아메리칸 드림이란 우리가 쓰는 사회적 상승 담론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버리기 쉽다. 그러나 애덤스가 미국은 "인류에게 내려진 독특하고 유일한 선물"이라고 쓴 까닭은 그 꿈이 "그 땅에서는 모둔 사람에게 더 낫고, 더 부유하고, 더 온전한 삶을 살아갈 기회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역량이나 성취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지 자동차나 높은 급여에 대한 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최상까지 이뤄낼 수 있는, 그리고 태생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자기 자신으로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질서의 꿈이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 보면 애덤스가 말하는 꿈은 단지 사회적 상승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더 폭넓고 민주주의적인 조건적 평등을 말하고 있다. 확실한 예로, 그는 미국 의회도서관을 가리켜 "민주주의가 그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상징"이라고 말했다. 모든 삶의 영역의 미국인들이 자유롭게 와서 공공 학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 열람실을 보면, 물어볼 필요조차 없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1만권이나 비치되어 있다. 자리마다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노인도 젊은이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흑인도 백인도, 경영자도 노동자도, 장군도 사병도, 저명한 학자도 학생도 한 데 섞여 있다. 모두가 그들이 가진 민주주의가 마련한 그들 소유의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는다.'

 

 애덤스는 "이 장면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 완벽하게 작용한다는 확실한 사례다. 사람들 스스로가 쌓은 자원으로 마련된 수단, 그리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대중 지성. 이 예가 우리 국민 생활의 모든 부분에 그대로 실현된다면 아메리칸 드림은 살아 있는 현실이 되리라"라고 썼다.

 

 p352

 당파주의가 하도 팽배하여 이제 사람들은 신앙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을 껄끄럽게 보게 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