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물어, 선禪으로 나아간 기록 정도의 의미가 될 듯. 김미루라는 이름 자체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아버지인 도올 김용옥 선생의 따님이기도 하다. 나도 도올 선생께서 강연 등에서 몇 번 언급을 해서 알게 되었다.

 책의 장르는 여행 에세이라고 볼 수 있지만, 관광이라기보다는 해당 지역의 문화를 깊이 체험해보는 내용이 많아서 인문학적인 관점이 많이 녹아있다(그래서 인문으로 분류했다).

 사막과 낙타, 그리고 유목민이라는 테마에 관심이 많은 저자가 몇년 간 중동, 인도, 몽골지역의 사막,낙타와 유목민을 포함한 원주민과의 생활의 경험을 해당 지역의 풍광을 담은 자신과 함께 전하고 있다.

 글의 스타일은 아버지인 도올 선생과 굉장히 많이 닮아있는데, 도올 선생이 감수를 해주셨거나 아니면 저자 본인이 아버지의 책을 많이 읽었거나 대화를 자주 나누다 보니 그런 글의 스타일을 닮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내용 자체가 쉽게 접해볼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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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4

 레바논에서 레이시즘은 클라시즘 classism, 즉 계급주의와 매우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 현상은 그 나라에 편재하는 외국인 가정부무역에서 유래되는 것인데, 이것은 내 관점에서 본다면 현대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노예무역 이외의 딴 것이 아니었다. 가정부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공인된 제도는 가정이라는 밀폐된 환경 속에서 자행되는 통제되지 않는 학대를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레바논이라는 나라의 인구가 겨우 500만밖에는 되지 않는데 외국에서 이주한 가정부가 20만 이상이나 된다(전체 인구의 4% 정도). 레바논의 상류, 중상류, 그리고 중류가정조차도 대부분이 에티오피아, 케냐,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지에서 가정부를 고용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적 관행 때문에 가장 저열한 사회적 신분을 특정한 외관이나 국적에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스리랑칸 Sri Lankan"이라는 말은 곧 레바논 자곤jargon으로 "하녀"를 의미한다. 

 독자들은 내가 베이루트 거리에서 일상적으로 어떤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항상 누군가의 필리피노 하녀로서 심부름 나온 사람으로 즉각적으로 취급되었다. 매우 크고 모던한 한 식료품 가게에서 올리브를 사기 위해 나는 줄을 서고 있었다. 나는 두 늙은 백인 앞에 서있었는데, 나를 제키고 그들은 먼저 서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사람이 서부된 후에야 비로소 서브되었던 것이다. 계산대에 있는 노인은 나에게 마치 개에게 명령하듯이 그의 손으로 "기다려"하고 손짓할 뿐이었다. 내가 불만을 토로하자, 입에 손가락을 대면서 "쉿"할 뿐이었다. 명백한 줄의 순서를 어기는 행위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체험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의 단순한 외관 때문에 내가 나에게 던져지는 그토록 낯뜨거운 레이시즘을 체험한다는 것은 진실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내가 동아시아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다. 나의 얼굴이 보통 아시아 사람보다 다크 스킨톤인데다가 눈이 크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레바논 사람들은 전형적인 일본인이나 중국인, 한국인 관광객을 더 못사는 나라로부터 온 까무잡잡한 가사노동자들로부터 구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나를 보면 좀 이색적이라고 칭찬 비슷한 말을 던지곤 하는데, 바로 이놈의 "이색적 외관"이 이 레바논 지역에서는 전적으로 핸디캪이 되고 마는 것이다.

(위에서 보면 제키다, 핸디캪 과 같이 표준어와 약간 다른 표기법이 있는데 저자인 김미루 씨가 미국에서 출생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중학시절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간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표준어에 약해서 그럴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책이 통나무 출판사를 통해서 나왔고, 아마도 아버지인 도올 선생이 이 책을 어느 정도는 감수를 했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면 이러한 표기법은 표준어를 잘못 썼거나 오기라기보다는 도올 선생의 평소 표기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도올 선생의 표기법은 간혹 독특한 바가 있다.)

 

 내가 피부가 좀 더 하얗고 눈이 옆으로 찢어지고 광대뼈가 불거졌다면 나는 돈 많은 일본관광객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레바논 사람들은 나를 공경스럽게 대했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나의 체험을 말하자, 한 레바논 친구가 이렇게 디펜드하는 것이다 : "여기 사람들이 특별히 레이시스트라고 말할 것은 없지. 그들이 판단하는 것은 사회적 계급이야. 네가 부자처럼 보이면 사람들이 널 잘 대접할 거야." 나는 이 새로운 설을 입증하기 위하여, 머리꼭대기부터 발끝까지 백만불 여인처럼 치장을 화려하게 하고 밤에 나가보았다. 그러나 이 작전은 결코 먹히질 않았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빠를 갔는데, 아이디카드를 보자고 한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나 혼자만이 유색인종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 줄곧, 내가 아무리 잘 못을 입더라도 나 혼자만 체크당하는 수모를 계속 당해야만 했다. 여러 번 나는 문간 경비 어깨들이 내 미국여권을 보자마자 그들의 태도를 180도 바꾸는 사태를 체험했다. 약자에게 비열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중동문화의 한 측면을 나는 강렬하게 체험했다. 종교문화는 결코 인간에게 보편주의를 선사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종교가 인간의 구원을 외치면서 인간을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동방의 인문주의가 오히려 더 보편주의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매우 화가 났다. 그래서 이 가정부문제를 보다 깊이 탐구했다. 그리고 많은 이민자 가정부들이 그들을 고용한 가정에서 못 견디고 가출을 하게 되면 결국 길거리에서 매춘이나 천직에 불법고용되어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 현실을 목도하게 되었다.

 

 베이루트에는 가정부조달 에이전시가 많이 있다. 누구든지 가정부를 고용하고 싶으면 조달소에 나타나 국적을 선택할 수 있다. 에티오피아 가정부를 2년계약으로 고용하는 데는 서류작성과 비행기표를 포함하여 대략 2,000불이 든다. 그리고 방글라데시 식모를 구하는 데는 대략 1,500불이 든다. 그러나 이 돈은 양국의 에이전트들이 다 먹는 것이며 가정부 본인과는 무관하다. 본인은 그 나라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신청할 뿐이다. 그리고 계약대로 가정부가 도착하면 매울 샐러리가 지급되는데, 에티오피아 여자에게는 200불, 방글라데시 여자에게는 150불, 필리핀 여자에게는 250불 등등의 가격이 매겨져 있다.

 그런데 이 소녀들이 공식기구를 통하여 돈거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녀를 고용한 패밀리가 전적으로 모든 관리를 담당하기 때문에 가정부들의 여권과 서류를 고용주가 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월급조차도 고용주의 변덕에 따라 보류되기도 하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외국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일체의 노동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제도는 무제한의 혹사와 학대를 허용한다. 가정부들의 자살이 흔치않게 보도된다. 소녀들이 가정으로부터 도망치면, 그들은 여권을 포함한 모든 서류를 상실하기 때문에, 매춘과 같은 불법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레바논 가정의 고용주들이 월급을 꼬박 주었는데도 가정부가 도망쳤다고 투정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 아니다. 그들은 그러한 사태의 원인을 규명하여 불만과 불행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단지 그 자리를 새로운 가정부로 대치할 뿐이다. 그들은 소비성 상품에 불과한 것이다. 가정부조달 에이전트들은 그들의 가정부에 대해 이런 광고를 써붙이곤 한다: "신중히 선택된 메이드, 우울증에 걸리지 않음."

 일인당 GDP가 1만 9천 불 정도 되는 나라, 그런데 불합리한 종교의 교리가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나라, 그리고 오랜 내전으로 국가조직의 통제력이 와해된 나라, 이러한 모든 정황을 고려해보면 이러한 인간불평등의 부조리에 대하여 아무런 기준도 만들지 않고 있다는 무책임한 사실도 쉽게 이해가 간다. 우리 한국문명의 대체적인 개화의 방향이 세계문명의 기준에서 볼 때, 탁월한 정도正道를 지향해왔다는 사실도 비교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기독교 가정에도 이미 2년 동안 일하고 있었던, 방글라데시에서 온 19살의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리나Rina였다. 리나는 방글라데시의 어느 시골 작은 마을에서 살았는데, 아주 어린 나이에 임신을 했고 임신시킨 남자는 도망가버렸다. 그런데다가 설상가상 엄마가 세상을 떴다. 그래서 리나는 자기의 애기를 언니집에 맡겼고 자신은 양육비를 벌기 위해 에이전시에 취직을 부탁한 모양이다. 에이전시는 리나가 단 한마디의 아랍어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임의적으로 레바논에 배정했던 것이다. 리나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아주 작고 어여쁜 얼굴을 한 매우 조용한 소녀였다. 그녀는 항상 수심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녀와 감정을 소통하려고 접근하면 때때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매일 새벽 일찍부터 저녁식사 후 설거지 때까지 하루종일 일했다.

 그런데 나에게 그토록 잘해주는 패밀리의 엄마, 다시 말해서 리나의 보스조차도 끊임없이 그녀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그 집안의 아이들, 이미 성년이 된 아이들이었지만, 그들도 허파가 터질 듯이 리나의 이름을 불러댔다. 벗어놓은 양말이 없어졌다든가, 자기들이 제일 좋아하는 셔츠가 사라졌다든가 하면서, 물론 리나의 처지는 레바논의 대부분의 가정부의 처지보다는 더 좋은 상태인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나는 그녀가 로보트나 집안의 부속품처럼 취급되는 모습을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이 도무지 소화해내기 어려웠다.

 

 그녀는 결사적으로 휴식이 필요할 때는 꼭 장롱 하나차럼 생긴 작은 그녀의 방으로 숨어버리곤 했다. 레바논의 가옥에는 식모방이 그렇게 코딱지만 하게 설계되어 있다. 나에게 그토록 친절하고 관대한 엄마, 나를 한가족처럼 생각해준 고마운 그 엄마도 나에게 여러 번 리나에 관해 불평을 토로했다: "우리는 리나가 여기 오기까지 모든 비용을 댔고, 매달 월급도 꼬박꼬박 주었지. 리나는 매달 언니집으로 송금을 해. 그 돈은 방글라데시에서는 큰 돈이라고, 나는 리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지. 지금은 아럽어까지 알아들을 수 있어. 그런데도 리나는 너무 멍청해! 아직도 항상 실수를 저지르고,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모른단 말이야!" 언젠가 리나가 부엌 한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벽을 쳐다보고 밥을 먹고 있었다. 남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방글다데시 집에서 먹는 것처럼 밥을 손으로 꾹꾹 눌러 입에 넣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패밀리의 엄마는 그녀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 "저것 좀 보라구! 쟤는 개처럼 먹고 있잖아!" 문화적 관습에 대한 근원적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이다. 상대주의의 관용이야말로 보편주의의 기본원칙이라는 것을 전혀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나는 그 집에 존경받는 게스트였고, 주제넘게 주인의 인식체계를 교정할 수 있는 포지션에 있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주인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패밀리의 한 친구인 젊은 레바논 청년이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리나는 참 운이 좋아! 이 패밀리는 나이스해. 리나를 때리지는 않으니까." 그 무의식적인 말인즉슨, 레바논에서 가정부에 대한 체벌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너무도 충격을 받아 공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나에게 그 청년은 계속 말을 이었다: "레바논의 가정부 상황은 일반적으로 정말 좋지 않아! 많은 소녀들이 학대받고 있지. 예를 들면 우리집 옆의 패밀리가 얼마 전에 바캉스를 떠났어. 그런데 그들의 메이드를 음식과 물도 공급해주지 않고 방에 감금해버렸단 말야. 그래서 내가 매일 가서 창문으로 먹을 것을 공급해주었지."

 

 그 청년의 언어는 나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내가 그 잔학무도한 장면을 직접 목도하지 않았다는 것만이 나의 위안이었다. 아무튼, 리나의 정황을 쳐다보면서 나는 내가 오랫동안 되씹지 않았던 오래 전의 감정, 내 존재의 내면에 깊숙이 숨겨져 있었던 그런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내가 영어단어를 매일매일 외우면서, 계속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나날들의 추억이 나를 휘감았다. 언젠가 나를 놀리고 멍청하게 만드는 아메리칸 키드들보다 내가 더 훌륭한 인물이 되고야 말리라는 굳은 맹세가 생각난 것이다. 그때 나는 불과 13살이었다. 영어 한 단어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캘리포니아의 오렌지카운티에 홀몸으로 왔던 것이다.

 

 미국의 공립중학교의 아이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좀 사악한 종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내 얼굴에 대고 웃거나 심술궃은 행동을 마구 해댔다. 내가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아시아의 소녀라는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나는 이모집에 머물렀는데, 나의 이종사촌의 한국계 친구들조차도 나를 매우 귀찮은 존재로 여겼다. 물론 나 자신이 세련되지 못했고, 분위기를 쉽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나와 함께 어울리는 것을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 나는 "FOB"라고 놀림을 당했는데, 그것은 "fresh off the boat"라는 뜻이다. 배에서 갓 내린 세상 물정을 모르는 촌놈이라는 뜻이다. 아시아계 미국아이들도 나를 "포브"라고 놀려만 댔던 것이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아주 이방의 먼 땅에서 완벽하게 고독한 단독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 느낌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인자하기 그지없는 이모의 배려가 있었고 또 사촌들과 같이 잘 지냈지만, 베드에 들어가기 전에 거의 매일 밤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나의 리나에 대한 동정심, 아니 공감의 폭이 각별했다. 불과 17살의 어린 나이에 모든 사람이 경멸하는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이국의 땅에, 홀몸으로 내팽겨쳐진다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정말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어느날, 나는 리나가 부엌에 혼자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재빨리 나는 나의 랩탑컴퓨터를 가져다가 유튜브를 눌렀다. 나는 "방글라뮤직"을 찾아, 물항아리를 나르는 전통적 시골여인들도 분장한 가수들이 노래부르는 비디오 하나를 클릭했다. 노래가 터져나오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의 리나처럼 환희에 찬 모습을 어느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질 못했다. 리나는 홍조를 띠며 흥분 속에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리나는 그 노래를 완벽하게 암송하고 있었다. 그 순간이야말로 리나가 2년만에 자기 모국에서 온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느껴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던 것이다.

 리나에게는 인터넷이나 텔레비젼을 보는 것이 일체 허용되질 않았다. 물론 스마트폰도 가지고 있질 못했을 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셀폰도 허락되질 않았다. 주인의 입회 아래 일주일에 한번 정도 지상통신선으로 집에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그것도 제한된 시간범위 내에서. 뮤직비디오를 쳐다본 후에 리나는 그녀가 잘 알고 있는 또 하나의 방글라 비디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일종의 코미디쇼였다. 우리가 같이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한참중에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리나는 재빨리 컴퓨터로부터 멀어져갔고, 빨리 그것 좀 꺼달라고 손짓을 했다.

 그때로부터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면 리나에게 방글라 텔레비젼을 틀어주었다. 물론 누가 나타나기 전에 재빨리 끌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리나는 나에게 깊은 애정을 표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2년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한 인간으로부터 아무런 격 없는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 있는 인간의 관계가 왜 그렇게 왜곡되어야만 하는지, 칼릴 지브란의 심오하고 아름다운 레토릭도 이 예전자의 고향에서 공허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내가 리나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을 때, 그녀의 도톰한 눈망울에는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숫자가 적힌 종이 한 쪽지를 건네주었다. 아마도 그것은 방글라데시 고향에 있는 자기 연락처였을 것 같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 번호로 그녀와 연락하는데 실패했다. 국가번호도 그렇고 자릿수가 도무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2년 후에 나는 그녀가 결국 가출하고 말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리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중동의 빠리"라는 베이루트의 추억이나 모든 기획이 나의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멀어져만 갔다. 중동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흥분되고, 가장 열광적이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음식이 맛있는 곳처럼 느껴졌던 나의 환상은 이 가정부무역의 문제로 인하여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알고보면 중동의 어디에서나 벌어지고 있다. 예수시절부터 "돌로 쳐죽이기" 린치가 공공연한 율법으로 자행되고, 지금도 "명예살인"이 사회규범으로 인지되는 그런 분위기, 결국 구약적 세계관에서 아직도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인들은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손가?

 인류문명의 진보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나의 다음 목적지 요르단에서는 나는 필리피노 하녀로 취급되는 일은 없었다. 요르단이라는 나라는 최소한 그토록 뻔뻔스러운 레이시즘이 설치는 분위기에 예속된 그런 문명의 나라는 아니었다.

 

p207

 나는 비록 죽이는 첫장면을 놓쳤지만, 나머지 과정,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끌어내고, 자르고, 요리하는 과정에는 참여할 수 있었다. 아침용으로 작은 고기조각과 간조각이 양파와 더불어 볶아졌고, 빵과 함께 식탁에 올려졌다. 점심과 저녁용으로는 뼈있는 고깃덩어리가 큰 통에 넣어지고 장작불에 몇시간 동안 계속 삶아졌다. 이때 들어가는 전통적 요르단 조미료는 "자미드jameed"라는 것인데 염소젖에서 얻은 치즈를 태양에 말린 것이다. 나는 이 전과정엣 참다운 베두인 삶을 느낄 수 있었고, 상품화된 치즈와 깡통채소에 실망한 후인지라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이날 찍은 비디오는 염소머리가 분해되고 창자가 꺼내어져 요리되는 장면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뉴욕갤러리에서 사진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많은 관객들, 특히 고상함을 자랑하는 한국부인들이 이런 살육장면은 전시장에서 안틀면 좋겠다고 나에게 항의하는 것이다. 교육상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나의 비디오를 보면 아흐마드의 3살난 아들은 염소의 몸통 옆에서 아주 재미있게, 자연스럽게 놀고 있다. 베두인들은 걷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동물이 도추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난다. 이거은 우리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고기를 먹는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고기를 만드는 과정, 귀한 생명이 도축되는 과정, 귻이 축제의 일환으로 인식된다. 닭을 잡을 줄 모르면 닭을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에게 자식교육 운운하면서 항의한 부인들은 결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식들에게 고기를 많이 멕이는 여인들이다.

 고기를 먹는다고 하는 우리의 행위의 전체과정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교육적일까? 그것을 속이고 감추고, 오직 공장에서 생산된 최종적 고기상품만을 식탁에서 먹게만들고, 위생, 잔인, 살생, 백정놈들 운운하면서 고상한 삶의 가치를 구가하는 것이 교육적일까? 우리의 자녀들을 대량고기생산의 맹목적 소비자로 만드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 생각없이 불필요하게 과도하게 고기를 많이 먹는 병적인 인간들로 만드는 것이 이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더 바람직한 것일까? 수천년 지속되어온 "고기먹음"의 축제적 성격, 자연스럽고 지속가능한, 생태순환적인 전과정을 인지하도록ㄱ 만드는 것이 더 정당하지 않을까? 과거에는 소곡기를 먹어도 일년에 한번이면 족했던 것이다. 인류 식생활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요청되는 시점인 것이다.

 

p234

 최상의 이미지는 최악의 환경에서 창조된다.

 

p239

 처음에는 소통의 부재를 언어장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아랍어를 좀 할 수 있었고 또 바디 랭귀지를 습득하여 이야기할 수 있었다. 기실 내가 모르는 것은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의 사유방식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추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주일이 지난 후로는, 나는 순결한 침묵에 매우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들이 사유 그 자체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체류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는 나도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예술의 경지에 거의 도달핵가고 있었다.

 

p276

  맨해튼에서 보낸 2012년 가을은 정말 빨리 지나갔다. 나는 이때 이집트와 요르단으로 다시 갈 것만을 구상하며 새로운 벤쳐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육신이 있는 곳에 나의 정신이 있질 않았다. 도시의 삶은 무의미하게만 보였다. 밖으로 외출할 때마다 왜 나는 꼭 엘리베이터라는 좁은 공간에 나를 실어야만 하는가? 트래픽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게 길 한복판에 갇혀 있을 땐, 왜 나는 택시미터에 올라가고만 있는 숫자를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파티룸에서 왜 나는 그들과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희희덕거리고만 있어야 하는가? 왜 철근콘크리트의 고층건물이 서있고, 아스팔트 깔린 대로들이 존재해야만 하는가? 왜 아는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야만 하는가?

 나를 둘러싼 환경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지간에 모두 불필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너무 과도한 것뿐이었다. 내가 여행할 동안 향유할 수 없었던 사치들, 맛있는 해산물 요리라든가 끝없이 쏟아지는 더운물 샤워라든가 하는 것들이 나를 유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화이트 데저트로 갈 꿈만 꾸고 있었다. 나의 작업이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나는 일단 벌려놓은 일은 마무리해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p435

 내가 이 아이들에게 관해서 깊은 인상을 받게 된 것은, 이들이 항상 웃고 야외에서 즐겁게 논다는 매우 단순한 사실, 그리고 극히 단순한 오브젝트를 가지고 재미를 창조하면서 논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을 즐겁게 만드는 사태를 고안해낸다. 그리고 울거나 싸우거나 하는 법이 거의 없다. 도시문명의 아이들이 하루종일 울거나 찡얼거리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일례를 들자면, 어디서 볼펜 하나를 얻든지, 전등 하나를 얻든지 하면 그걸 가지고 수없는 종류의 오락을 끊임없이 지어내고 또 그것에 열중한다. 하룻밤은 나이가 좀 있는 소년이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의 손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놀이를 고안해냈다. 그 손바닥그림은 매우 정교했다. 나는 그가 손바닥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그 손바닥을 전등으로 비쳐주었는데 어두운 방에 모두가 옹기종기 웅크리고 있는 판에 집중된 스포트라이트가 생기고 또 그림이 그려지는 그 장면 자체가 매우 신비롭고 인간적인 훈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은 그 그림을 그리는 소년이 여러 가지 패턴과 글자와 숫자를 쓰면서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비상하게 집중하고 웃곤 했다. 그 행위 자체가 위대한 연극이었다.

 낮에 밖에서 놀 때도 그러했다. 동네에는 단지 하나의 시소가 있을 뿐이었다. 새총처럼 쌍갈래 가지가 달려있는 나무 하나가 땅에 굳건히 박혀있다. 그리고 그 위로 기다란 통나무 하나가 횡으로 걸쳐져 있다. 이 시소는 결국 두 개의 큰 나무로 구성된 초라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었지만 아이들은 그 나뭇가지에 매달려 끊임없이 다양한 놀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베키가 시소의 한 편에 남자아이들과 함께 타려고 하다가는 곧 땅에 떨어지곤 했다. 도시아이들 같으면 울면서 짜증을 낼 텐데, 베키는 웃고 또 웃으면서 천진난만하게 그곳에 기어이 올라타려는 노력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 순결한 시도와 웃음, 그리고 끊임없이 재미를 만들어낼 줄 아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문명사회에서 말하는 바 "교육"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지, 더구나 "덕성교육, 인성교육"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깊은 반성을 자아낸다. 자연이 그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도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p493

 과거의 베두인들은 친구이든 낯선 이방인이든, 사막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든 누구든지 텐트에 접근하기만 하면, 그들에게 마시고 먹을 것을 친절하게 제공했다. 사흘 동안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조건 접대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손님들이 오면 염소 한 마리를 잡는 것이 관례였고, 전통적인 맛있는 커피를 달여 정성스럽게 대접했다. 모든 게스트는 커피를 세 컵까지는 달라고 할 수가 있었다. 세 컵 이상 달라는 게스트는 탐욕의 인간으로 낙인 찍혔다. 커피는 집안간의 원한문제 해결이라든가 결혼에 관해 합의할 때도 반드시 필수품이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논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가장 특이한 측면은 완벽하게 낯선 이방인일지라도, 본인이 얘기하지 않는 한, 도대체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런 질문을 제4일 까지는 던질 수 없었다. 오면 무조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한국인의 친절이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들의 친절이라는 것은 좀 제식적 · 율볍적 측면이 강하다. 그만큼 절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예지가 묻어나는 것이다.

 

 한 베두인 가정의 사례로 전해 내려오는 재미난 얘기가 있다. 한 가정에 남자가 왔는데 대접을 하다 보니 그가 자기 가족의 한 사람을 죽인 집안의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사람에게 염소 한 마리를 잡아 후대했고, 그들의 천막에서 3일 동안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제4일이 되는 날 그는 자기 갈길을 평온히 떠났다. 텐트의 주인은 자기 장남에게 곧 명한다. "따라가서 그를 죽이고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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